남유다 의 멸망 | [5분 정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하는 이야기 [성경 공부 일독 프로젝트 #45] 154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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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역 소개 https://youtu.be/vscb9Ofeu60​
02. 0주차 읽기 https://youtu.be/gpun1v360C8​
03. 창세기 개관 https://youtu.be/bAq05MvoSPw​
04. 4가지 주의사항 https://youtu.be/ymfaW6G3e0A​
05. 1주차 읽기 https://youtu.be/T80-uLx6Mjk​
06. 성경의 구조 https://youtu.be/6_z7_Ey1lP8​
07. 성경의 유익 https://youtu.be/qc1sdcqPvcU​
08. 2주차 읽기 https://youtu.be/3ny3p-RUUaM​
09. 성경의 주제 https://youtu.be/GYnfD7Qa2JY​
10. 출애굽기 개관 https://youtu.be/Iko0Yp044g4​
11. 3주차 읽기 https://youtu.be/rUOkFvd2n6c​
12. 구약 성경목록 https://youtu.be/k5JYP8yDAXw​
13. 성막 https://youtu.be/xKcFjL9fGWg​
14. 4주차 읽기 https://youtu.be/8_UGL1PEu_w​
15. 레위기 개관 https://youtu.be/AyWlDYe7cQE​
16. 5대 제사 https://youtu.be/imBgKkmjzK4​
17. 5주차 읽기 https://youtu.be/y8rC0ZmofaE​
18. 7대 절기 https://youtu.be/TuGKpq9q_rs​
19. 민수기 개관 https://youtu.be/wQSvsJWAmQs​
20. 6주차 읽기 https://youtu.be/23G4AZ0Y1cs​
21. 율법 준수? https://youtu.be/1OsA7xLGTZ4​
22. 7주차 읽기 https://youtu.be/P48DOAHGmCc​
23. 신명기 개관 https://youtu.be/voLD7iXjv8U​
24. 우리나라 성경역사 https://youtu.be/0qD3P645hK8​
25. 8주차 읽기 https://youtu.be/Xn8qnX6OidM​
26. 가나안 지리 https://youtu.be/pjMWkWHzr6A​
27. 여호수아 개관 https://youtu.be/tyU7wQbw8kk​
28. 9주차 읽기 https://youtu.be/lHFcK36bH4s​
29. 가나안 영토분배 https://youtu.be/OHc83KLkPFs​
30. 사사기 개관 https://youtu.be/AZh8b-lzrKQ​
31. 10주차 읽기 https://youtu.be/_qPilNG0bXY​
32. 열두사사 https://youtu.be/WLCWM7SAY8E​
33. 룻기 개관 https://youtu.be/Vd_nyymty04​
34. 11주차 읽기 https://youtu.be/2Ue6ghWgiEo​
35. 사무엘상 개관 https://youtu.be/F_Z6W8lLqS0​
36. 12주차 읽기 https://youtu.be/ym1AZpj8ej4​
37. 사무엘하 개관 https://youtu.be/CWvqkCyTDik​
38. 정경화 과정 https://youtu.be/g5MeUYuhoRw​
39. 13주차 읽기 https://youtu.be/QZk1XUIDjOU​
40. 열왕기 개관 1 https://youtu.be/uXZc1uvd728​
41. 성막과 성전 https://youtu.be/zQPuRRHTlxg​
42. 14주차 읽기 https://youtu.be/s5BXXKxFr6s​
43. 열왕기 개관 2 https://youtu.be/llafpA8IYu4​
44. 15주차 읽기 https://youtu.be/s1HKMLILx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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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2)_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 바른미디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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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ami.kr

Date Published: 2/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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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 네이버 블로그

분열 왕국 중 먼저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했다. 호세아가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했을 때 북쪽에서는 당시 제국이었던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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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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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역사 – 구속사시리즈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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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brahampark.com

Date Published: 1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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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멸망과 유일신 신앙 형성 – 뉴스앤조이

기원전 587년~기원전 586년 8월, 예루살렘과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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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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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창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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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ongtanms.kr

Date Published: 3/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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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멸망 – 지식인이야기

남유다의 멸망. 변도톨 2020. 5. 7. 06:11. [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25장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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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namry.tistory.com

Date Published: 10/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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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멸망과 유배 | – HD Korean

남유다의 멸망과 유배. 남유다의 멸망과 유배. ▫ 열왕기/역대기: 유다 왕국의 바벨론 유수(3차례 포로) ▫ 남유다: 포로생활 70년 만에 약속의 땅으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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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dkorean.com

Date Published: 10/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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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 왕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아시리아 제국은 단호하게 통혼 정책을 펴 ‘동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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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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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정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하는 이야기 [성경 공부 일독 프로젝트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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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남유다 의 멸망

  • Author: 성경공부일독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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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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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 bareunmedia

편집자 주: 본 연재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부터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주요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폴 존슨는 이 분열에 대해 “르호보암은 무력으로 통일 왕국을 유지할 군사 수단과 방편이 없었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독자 왕조를 세우며 르호보암과 결별했다. 아시리아(앗수르)와 바벨로니아(바벨론) 제국이 연이어 부상하는 시대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두 왕국은 각자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1)라고 평가한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지만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강 넘기를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의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편집자 주: 성경에는 불로 기록)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그를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로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2)라고 평가한다. 폴 존슨은 디글랏빌레셀이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을 제국주의자들로 바꾸어놓았다”3)고 전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 지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교체되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4)고 기록했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당한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베가가 그의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베가를 살해한 이유가 있을 것”5)이라며 “(친앗수르 정책은) 오히려 백성들과 국가를 많이 손상시켰다”6)고 전한다. 존 브라이트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몇몇 블레셋인 군주들이 앗시리아에 대한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다가 므나헴이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의 계획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된 베가를 밀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7)고 밝힌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지만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동맹군의 칼은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고 만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왕은 수리아인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이스라엘 왕쯤이야 한 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끌고 나와 대결하였다. 한바탕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이스라엘 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 그 날 이스라엘군에 의해 전사당한 자는 모두 120,000명이나 되었다”8)고 기록했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 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한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앗수르 인들을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존 브라이트는 이것을 자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살 행위였다. 이때 이집트는 대단치 않은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9)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게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가 공격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 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폴 존슨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서도 당시의 재앙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충분히 나왔다. 사마리아 내의 왕실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므깃도는 완전히 무너졌고 아시리아식 새 건물이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세워졌다. 하솔의 성벽도 무너졌다. 세겜은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10)고 전했다.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만들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지만,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속국들의 복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목을 조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증오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11)고 알린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살핫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 때에 본격화된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지도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이 와중에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 사르 이스쿤과 반란자 아슈르 에틸 일라니 사이에 일어난 수 년 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바벨론의 창건자라 불리는 나보폴라살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 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의 왕 느고 2세는 갈그미스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존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공식적으로 바벨론인들의 동맹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앗시리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이집트의 야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12)라고 밝힌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데려갔고,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느고는 다시 한 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거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 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25:27∼30).

▲미켈란젤로가 그린 예레미야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둘러쌓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하여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한 번 하지 못한 채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인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시드기야가 죽자 바벨론은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13)고 전한다.

유다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의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을 피해있던 무리들이 다시 돌아오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표현한 이스마엘이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하게 된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은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요세푸스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기간을 130년 6개월 10일 이라고 계산했다.14) 게오르크 포어러는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은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 뒤에 계속 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의미, 즉 이방통치 아래 강한 종교적인 토대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 민족사를 의미 한다”15)라고 평가했다.

1)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19.

2)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68.

3)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6.

4) 요세푸스, 『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08.

5) 게오르크 포어러, 『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02.

6) 같은 책, 202.

7)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1.

8) 요세푸스, 『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11.

9)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6.

10)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7.

11)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29.

12) 같은 책, 445.

13) 요세푸스, 『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46.

14) 같은 책, 651.

15) 게오르크 포어러, 『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49.

조믿음 기자 [email protected]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집과 남유다의 므낫세의 집을 재시고 심판을 단행하셨다. 방법은 주변 국가, 곧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이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공격해서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분열 왕국 중 먼저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했다. 호세아가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했을 때 북쪽에서는 당시 제국이었던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세아 통치 4년, 즉 기원전 727년에 디글랏빌레셀이 죽었다. 그러자 호세아는 디글랏빌레셀의 죽음을 호기로 여기고 앗수르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남쪽의 또 다른 제국 애굽 왕 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애굽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을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 7:11)라고 비판했다. 디글랏빌레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살만에셀은 북이스라엘의 호세아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쳐들어와서 3년간 포위했다가 사마리아를 정복했다. 이로써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열왕기서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같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7:7-12, 15-18, 21-23). 북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암 때부터 가장 사악한 왕 아합은 물론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명령하신 율법을 지키지 않고 허망한 우상에게서 돌이키지 않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남유다는 어떠한가?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 열왕기서의 저자는 남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왕하 17:19). 남유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기로는 매한가지였으며,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해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행했다. 그 절정이 바로 남유다의 가장 사악한 왕 므낫세 때였다(왕하 21:1-18).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우상을 척결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절기를 회복하여 유월절을 사사 시대 이후로 가장 온전하게 드렸지만, 남유다를 멸망시키기로 한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리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왕하 23:25-27). 남유다의 가장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는 기원전 609년에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죽임을 당했다. 남유다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지만, 3개월이 지났을 때 애굽의 바로 느고는 그를 폐위시키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서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다. 북쪽의 바벨론과 남쪽의 애굽에게 치이는 와중에서도 여호야김은 조상들이 행했던 대로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심판 도구는 북쪽의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었다. 기원전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애굽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느부갓네살은 다음 해에 남유다를 향해 밀고 내려왔다.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고 항복했으며, 이때 다니엘 선지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인질로 잡혀갔다(단 1-7장). 애굽의 느고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사이에 외줄타기를 하던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섬기라는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렘 27:17) 친애굽 정책을 펼치며 바벨론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말았다(왕하 24:1-7).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르지만 석 달을 다스리다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때 에스겔 선지자도 포로로 끌려갔다(왕하 24:15).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시켜서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지만, 시드기야 또한 반역을 일으켰으며, 기원전 586년에 느부갓네살 왕에게 남유다는 멸망당하고 말았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당했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왕하 24:3-4). 성경은 요시야가 죽었을 때도, 여호야김 시대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했을 때도 거듭해서 그 심판이 므낫세가 우상을 섬기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유다의 가장 사악한 왕 므낫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고 심판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남유다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아니 므낫세의 죄악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에서 교훈은 고사하고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답습하고 더욱더 타락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남유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아무런 생명력도 힘도 없는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패망당하고 말았다.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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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마지막 왕들

요시야는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기원전 609년 므깃도 전투에서 바로 느고에 의해 죽습니다(왕하 23:29, 대하 35:20-24). 유다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하려던 그의 개혁은 끝나고 요시야가 죽자 ‘그 땅의 백성들'(암 하아레츠)은 요시야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위에 올립니다(왕하 23:30-31). 그는 겨우 3달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이집트 바로 느고에 의해 오론테스 강변 리블라 지역 감옥에 갇힙니다. 은 100달란트와 금 1달란트의 벌금이 유다에게 부과됐고 여호아하스는 이집트에서 죽었습니다(왕하 23:33-34). 선지자 예레미야는 동포들에게 전사한 요시야 왕이 아니라 살룸(여호아하스)을 위해 애곡하라고 충고합니다.

이때부터 유다 왕국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바로 느고는 요시야의 둘째인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고 여호야김이라 이름을 바꿉니다(왕하 23:34). 유다는 힘이 없어 다른 나라가 왕을 결정하는 부끄러운 처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야김은 11년 통치 기간 내내 친親이집트 정책을 폈는데, 이집트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그 땅의 백성들’에게 특별 조공을 내도록 했습니다(왕하 23:35). 암 하아레츠에게 무거운 경제적 짐을 지워 다시는 세력화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집트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야김은 4년 동안 충성스런 이집트의 봉신으로 섬기면서 이집트가 바벨론 제국에 맞서 유다를 지켜주리라 생각했으나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봤습니다. 예레미야는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특출한 시각으로 유다가 바벨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레미야 가족은 아마도 유다 고위 관리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아버지(힐기야)는 요시야 개혁 당시 대제사장 이름과 같고(렘 1:1, 왕하 22:4), 그의 숙부(살룸)는 여선지 훌다 남편과 이름이 같습니다(렘 32:7, 왕하 22:14). 살룸의 아들(예레미야의 첫 번째 사촌?) 마아세야는 방을 지키는 제사장 관리였으며(렘 35:4), 살룸의 또 다른 아들 스바냐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인물이었습니다(렘 21:1).

바벨론에서는 느부갓네살 2세(기원전 605년~기원전 562년)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신新바벨론 제국 2대 왕으로 기원전 605년 5월경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무찌르고(왕하 24:7) 기원전 604년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합니다. 위기를 느낀 예루살렘에서는 금식이 선포되고(렘 36:9) 여호야김은 친이집트 성향인데도 3년간 느부갓네살에게 굴복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습니다(왕하 24:1). 느부갓네살이 기원전 602년~기원전 601년 겨울에 이집트를 침공하러 갔다가 패하자, 기회를 엿보던 여호야김은 바벨론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지하고 느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벨론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에 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598년~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김이 조공을 거부한 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은 이 일이 있기 얼마 전인 기원전 598년에 죽었는데 아마도 살해된 듯합니다.

라기스에서 발견된 22개의 오스트라카는 남 유다의 마지막 날들(기원전 586년)에 라기스에서의 전쟁을 묘사합니다. 대부분은 라기스와 예루살렘 사이 주둔지에 있던 군대 장관 호샤이야가 라기스의 군대 장관 야오쉬에게 쓴 글들로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에게 바로 이날 좋은 일이 있게 하길 기원합니다. 이제 나의 주께서 쓰셨던 것처럼 당신의 종이 행했습니다. 나는 나의 주께서 지시한 대로 문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께서 벳 하라피드(장소가 밝혀지지 않은 요새)에 관해 쓰셨던 것처럼 거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략) 나의 주는 우리가 주께서 지시한 모든 신호대로 라기스에서 보내는 신호(봉화)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세가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그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렘 34:7).”

기원전 598년 여호야긴은 18세로 왕이 됩니다(역대하 36:9에서는 8세). 여호야긴은 겨우 3달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왕하 24:8) 바벨론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재위 7년인 기원전 597년 3월 16일, 예루살렘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하고 맙니다. ‘바벨론 연대기’에서는 유다를 진압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7년, 그슬레브 월: 아카드 왕(느부갓네살)은 군대를 이끌고 하티 땅으로 진격하여 유다 성(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아달월 제2일에 그 성을 함락시키고 왕(여호야긴)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왕(시드기야)을 임명하였고 거기에서 많은 전리품을 바벨론으로 가져왔다.”

기원전 597년에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비롯한 왕족, 왕실 인사들, 지도층 주민과 기술자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포로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열왕기하 24장 12절에는 첫 포로 10000명, 열왕기하 24장 16절에는 8000명, 예레미야서에는 3023명이라고적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요시야 셋째 아들인 여호야긴 삼촌 맛다니야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치고 왕위에 앉힙니다(왕하 24:17). 20세에 왕이 된 그는 11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렸고, 후에 바벨론에 대항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계속 군사행동에 주력했고, 기원전 601년~기원전 600년의 바벨론 패배를 기억하던 유다와 팔레스타인 국가들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것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집트를 침공하려다 몇 안 되는 패전을 경험했던 기원전 601년~기원전 600년에 이집트는 잠깐이나마 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느고의 후계자인 프사메티쿠스 2세(기원전 595년~기원전 589년)와 성서에 호브라(렘 44:30)로 나오는 아프리에스(기원전 589년~기원전 570년)의 통치 아래 야심과 위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서 기원전 595년~기원전594년 일어난 반란 소식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594년에 반란을 도모하기 위한 국제 공모자 회의를 예루살렘에서 열어 에돔·모압·두로·시돈 대표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주어 에돔의 왕과 모압의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의 왕과 시돈의 왕에게 보내며(렘 27:3).”

하박국, 에스겔

기원전 587년~기원전 586년 8월, 예루살렘과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왕하 25:8-10).”

하박국은 통제 불능의 세상에서 여호와의 통치를 갈망한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공동체의 사악함 또는 아시리아의 광폭함은 하나님의 도구인 바벨론에 의해 응징됩니다. 그러나 바벨론 역시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합 2:4). 진정한 해결책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착취하는 권력자들과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을 심판하고 회복하러 올 것입니다. 하박국은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진정한 기쁨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체에 있다고 선포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에스겔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 유다의 피할 수 없는 멸망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593년~기원전 571년에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살면서 활동했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아마도 여호야긴과 함께 기원전 597년에 포로로 잡혀 바벨론에서 생활했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일종의 ‘시온신학'(곧 유다, 예루살렘, 성전, 다윗 왕조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영원하리라는 믿음) 옹호자들의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에스겔은 극단적이고 대담한 행동으로 여호와의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 외쳤습니다(겔 4장).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편협한 종교 제도와 정치체제로 여호와 하나님을 속박하거나 제한할 수 없었습니다(겔 20:23-26). 유다는 물론이고 바벨론도 세계를 통치하고 주관하는 신神이 여호와인 줄 알아야 했습니다. 겉보기와 달리 바벨론 침략과 파괴도 여호와 심판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 왕조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여호와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마저 파괴될 수 있었습니다(겔 33:21). 에스겔은 이스라엘 땅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과 진노를 선포합니다. 예루살렘 멸망과 파괴는 여호와의 무능력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7:27).”

왕국시대 이스라엘의 종언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을 향해 이스라엘의 종말을 애통해합니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렘 22:29-30).”

예루살렘 함락은 유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었으며, 먼저 포로로 끌려간 포로들은 항의와 절망이 가득한 넋두리를 토해 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1-5).”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게 끝났을까요? 삶은 계속됐고 여호와의 통치는 이어집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여호와 신앙은 깊이가 더해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됐지만 남아 있는 자들이 폐허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지켜 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속해 있던 바벨론 포로들과 예레미야가 속해 있던 이집트 포로들은 고통과 더불어 나름대로 예배 생활과 희망의 싹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포로들에게도 찾아가는데, 여호와는 어떠한 제도나 상황에 제한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향한 무거운 책임감과 여호와를 향한 순수한 신뢰가 있는 곳이라면 시공간의 제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인간 왕정王政은 끝났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왕정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백성이 아닌(삼상 8:17), 여호와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렘 30:22).

눈여겨볼 것은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 유다 지역에서는 형상이 있는 인장印章에서 현상이 없는 인장으로 변화됩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유일신 운동의 영향이 컸기 때문입니다. 일월성신 형상이 아시리아인과 접촉하면서 급격하게 증가했다가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이르면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성소(산당)에서 신상 수천 개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뿐만 아니라 다른 신도 섬겼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놀라운 점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신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성전 파괴 뒤 비로소 유일신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유튜브 채널 ‘에르고니아’ 바로 가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w8sxRrpaJba1RXI97GwSA

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역사]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창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남유다의 멸망

[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25장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On the seventh day of the fifth month, in the nineteenth year of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Nebuzaradan commander of the imperial guard, an official of the king of Babylon, came to Jerusalem.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He set fire to the temple of the LORD, the royal palace and all the houses of Jerusalem. Every important building he burned down.

10.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The whole Babylonian army, under the commander of the imperial guard, broke down the walls around Jerusalem.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Nebuzaradan the commander of the guard carried into exile the people who remained in the city, along with the rest of the populace and those who had gone over to the king of Babylon.

12.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But the commander left behind some of the poorest people of the land to work the vineyards and fields.

[목요 새벽설교 박대용 목사]

전문 왕하 25:8~21

<유다의 멸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악을 행함으로 바벨론을 통해 남유다를 멸망시킵니다

바벨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룹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하는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 세워졌지만 반바벨론 정책, 친애굽 정책을 취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언함으로 그것을 달콤한 것으로 받아들여 어리석은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결국 두 눈이 뽑히고 놋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삶 가운데 당하는 시련과 어려움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일으켜 역사를 이루십니다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성을 지키려고 하지만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4차에 걸쳐 끌려갑니다

바벨론의 시위대장 느부라사단이 왕궁과 성전을 불살라 버립니다

처참하게 파괴됩니다 갈대아 군대가 성벽을 헐고 귀인의 집(공공 건물)까지 불사릅니다 성전과 왕궁이 철저히 파괴됩니다

유다의 멸망이 비참한 현실이 됩니다

이는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유다 마지막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의 수차례 경고를 듣지 않았기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성전까지 파괴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통해 죄용서를 받는 곳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는 매개체 역할을 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그들의 정체성입니다 성전 만큼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이방인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고 더럽혀집니다

전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에배를 드리지 못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대한 민국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않습니다 우리 예배가 겉모습만 화려하고 습관적으로 드리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울 왕이 버림받은 것은 예배를 드리면서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마음을 다해야 받으십니다

호세아 6장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For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and acknowledgment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번제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인애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제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드릴 예배는 봉사를 하고 십입조를 하는 것보다 우리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버리고 하나님 경외하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왕의 시종, 서기관 귀인들을 시위대장 느부라사단이 사로잡아 하맛 땅에서 쳐죽입니다

모든 성전 기구를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여기 나오는 60명은 반란의 소지가 있는 관리자들입니다 반바벨론 정책을 펼쳤던 주요 리더들이 최후를 맞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 예언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고 수차례 경고했습니다 결국 예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긍휼과 은혜가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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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북이스라엘 왕국( 히브리어 מַמְלֶכֶת יִשְׂרָאֵל, 현대 히브리어 Mamlekhet Yisra’el, 티베리안 히브리어 Mamléḵeṯ Yiśrāʼēl , 기원전 922년경~기원전 722년경) 또는 사마리아 왕국은 고대 중동에 있던 국가이다. 성경과 역사학계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될 때 형성되었는데,[2][3][4] 일부 학자들은 북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884년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 왕국의 형태를 갖추어싸고 주장한다.[5][6]

이스라엘 왕국이 북부와 남부로 분열될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르우벤, 스불론, 시므온, 므낫세, 단, 잇사갈, 아셀, 에브라임, 납달리, 갓 등 이렇게 열 부족을 규합하여 북부를 지배한 왕국이다. 209년간 존속해 19명의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다.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정정(政情)이 불안하였다. 벧엘 이북을 영토로 하고 오므리 왕조 시대에 남쪽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도 사마리아를 건설하였다. 유다에 비하여 땅이 비옥하였으므로 농경적 성격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도 토착종교 또는 이민족의 신앙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7]

구약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후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존의 야훼 대신 몰렉, 아스타르테, 바알 등의 신들을 숭배했다고 한다.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아시리아 제국은 단호하게 통혼 정책을 펴 ‘동화’시켰다.

역사 [ 편집 ]

초기 왕조와 오므리 왕조 [ 편집 ] [10] 예후 왕의 사절단. 검은 오벨리스크. 기원전 841~840년

북이스라엘 왕국은 처음에 세겜에 도읍을 정한다.[11] 디르사로 천도하고,[12] 오므리가 사마리아에 수도를 건설하여[13] 아시리아에 의해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는다.[14]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사마리아가 성경 시대에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다는 것에 동의한다.[15] 기원전 850년 경에 모압의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에게서 거둔 승리를 고대 히브리 문자로 기록한 메사 석비가 발견된 바 있다.[16]

유다 왕국과의 연관성 [ 편집 ]

성경에 의하면 처음 60년간은 유다 왕국이 북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뒤, 이후 80년간은 특별한 전쟁 없이 아람 다마스쿠스 등 공공의 적을 위해 연합했다고 한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쟁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의 결혼을 통해 동맹은 굳건해지나, 아합의 아들들이 기원전 840년에 예후의 쿠데타에 의해 모두 사망하고 만다.

멸망 [ 편집 ]

기원전 732년, 이스라엘의 베가는 아람의 왕 르신과 동맹을 맺어 예루살렘을 위협한다. 당시 유다 왕국의 왕이었던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공물을 받은 티글라트-필레세르는[17]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아람을 병합한다.[18] 이 때 길르앗에 거주하던 르우벤, 가드, 므나쎄 지파 사람들도 아시리아에 끌려가 하부르강 유역에 정착한다. 이외에도 납달리 지파의 전지역, 에브라임 지파의 야노아도 점령한다. 이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시리아로 끌려간다.[19]

북이스라엘는 얼마 남지 않은 영토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고 남은 사람들도 모두 끌려간다. 아시리아는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하는 동안 샬마네세르 5세가 죽고 사르곤 2세가 즉위하는데, 사르곤 2세는 자기 자신을 사마리아의 정복자로 기록했다. 이 때 27,280명이 아시리아로 호송되었다. 이렇게 호송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부르강 유역과 메디아 땅에 정착하여 엑바타나 등에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토비트는 이 때 니네베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시리아 에 의한 북이스라엘 유민의 강제이주

이렇게 아시리아로 강제이주된 지파들을 잃어버린 열 지파로 부른다. 남쪽에는 유다 왕국이 남아 유다 지파, 시므온 지파, 베냐민 지파, 그리고 일부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를 유지해나간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사마리아인의 관점 [ 편집 ]

사마리아인들은 아시리아에 의한 유수때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은 소수에 불과하며, 여전히 북이스라엘 지역에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단지 1/5만이 압송되었다고 추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다 왕국으로 건너가 예루살렘의 인구수가 5배나 증가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고, 히즈키야가 샘을 새로 팠다고 주장한다.[20] 또한 역대기하 30장에서도 이스라엘 지역에 에브라임, 므나쎄, 아셀, 이싸갈, 즈불론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남아있었음을 암시한다.

역대 임금 [ 편집 ]

각주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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