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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사모하는 남은 자를 위하여 올린 생명의 떡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서원하시면 고칠 수 없는 질병이 치유되고, 빈 곳간이 넘치게 되며, 환난과 고난이 그치지 아니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없는 그곳에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이 차고 넘치는 귀한 역사가 넘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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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0140430>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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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브린니의 서재
성 어거스틴은 이 예수의 멍에에 대해 새의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것처럼 가볍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인 사랑의 계명, 즉 이웃에 대한 …
Source: brynlee.tistory.com
Date Published: 3/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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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멍에는 유익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는 말씀의 참 의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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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정리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제목: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본문 :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
Source: www.seonjija.net
Date Published: 10/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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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 다음블로그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다. 이 말씀은 약간 조롱의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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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Yebom – 예봄교회
쉽다는 말은 몸에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마·소는 멍에가 제 몸에 잘 맞아야 무거운 것도 가벼운 듯이 잘 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멍에가 …
Source: www.yebom.org
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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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담론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쉬운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5/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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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짐은 가벼우니라 – 당당뉴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는 말씀은 …
Source: 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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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38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Trust The Answer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0140430> : 네이버 블로그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 …
Source: 1111.com.vn
Date Published: 1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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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Author: 순복음새강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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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9.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BQIhUW_GRw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0140430>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인생은 난해한 퍼즐과도 같습니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또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퍽이나 쉽고 단순한 듯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으로 인생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죄 짐을 맡아 주실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마치, 자기 손에 큰 금덩어리를 들고
엄마에게 100원짜리 과자를 사달라고 하루종일 칭얼거리는
어린 아기와도 같은 삶을 우리는 살아가진 않는지요?
말 할 수 없는 보화가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기나긴 고독한 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허덕이면서 달리고 있습니까?
가끔씩 목을 축일 오아시스를 만나고
또 가끔씩 얼굴에 미소를 던져줄 작디 작은 기쁨의 소식들이 찾아 오지만,
우리 마음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근본적 구원에 대한 믿음이 요동칠 때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흔들려 버리고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고아와 같은 황망한 심정으로 떨어지고 있진 않습니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얼마나 단순 명쾌한 말씀입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우리를 쉬게 할 분이 결코 없음을 우리는 매일매일 묵상해야 합니다.
돈, 사람간의 관계, 직장, 배우자, 부모와 자식들
물론 연약한 인생길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또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만,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 외 우리에겐 ‘쉼’을 보장 받을 길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다 오라고 하시고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가요?
멍에는 무엇입니까?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나귀 등의 목에 가로로 얹는 막대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멍에는 ‘속박’ 또는 ‘예속’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
그리고 왜? 예수님의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런데 왜?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 인
예수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을 많은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일까요?
빛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가 어떻게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능히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그 안에서 안식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마나 쉬운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요.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십시요.
우리에게 안식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평안이며, 안식이며,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멍에입니다.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룩에서 거룩으로 인도하는 ‘쉬운 멍에’요 ‘가벼운 짐’인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30절)
이 말씀은 이 땅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한편으로는 참으로 답답함을 주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줍니다.
누구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예수를 믿는데도 왜 이리 여전히 힘든가 답답하기도 하고,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가벼워지고 싶은 사모함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음속에 일종의 물음표와 함께 오래 간직됩니다. 우리 신앙은 이 물음표를 들고 걸어가는 순례길이며, 조금씩 그 해답을 희미하게나마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내 멍에는 쉽고”에서 ‘쉽고’라는 말의 원어는 크레스토스로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는 다양한 뜻으로 해석됩니다.
앞서 멍에는 짐승을 부리기 위해서 씌우는 것으로 보통 일꾼에게 사용될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멍에를 메게 된다고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같이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땅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일이며, 그 멍에를 함께 진다면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부드럽고, 좋은 일이며, 은혜스럽고, 안락하고, 친절한 일이기에 쉽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예수의 멍에에 대해 새의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것처럼 가볍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인 사랑의 계명,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피곤하고 무겁고 힘든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좋고 은혜롭고 안락하고 친절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며, 그 자체로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며,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메기 때문에 가벼울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안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려 고통받으며 늘 자살을 생각하던 한 소년이 생각납니다. 그 소년은 죽고 싶지만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려워하며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대에 재야 신학자이며 이십대 때부터 하반신 마비가 되어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오신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 좋은 것, 바른 것, 선한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땅에서 바르고 좋고 선한 것을 행하면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그 소년에게도 이 말씀은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알콜중독 센터의 도움으로 상담을 받고 있는 그 소년이 바르고 좋고 선한 길로 가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바르고 좋고 선한 길로 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부단히 애쓰며 주변인들의 도움도 기꺼이 받으면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 길은 영원히 아름다운 길이라는 증명을 받은 길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자살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길이 아니라 깃털처럼 가볍고 확실하며 마음에 안식을 주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라고 할 때,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걸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인데, 너무 싫고 밉고 내게 잘못한 게 많아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잘 모르는 남일 때 더 봉사하기가 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신실한 크리스천일수록 마음에 찔려 합니다. 잘 모르는 이웃을 도울 때는 마음이 편하고 즐겁고 가볍고 기쁜데, 정작 도와야할 미운 내 친지를 도우려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나고 억울해서 마음이 무겁고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독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존속 상해 및 살해 사건이 많은 이유는 가족과 가문에 관한 얽매임이 강하여 그 안에서 발생하는 서로간의 상처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미움을 낳아 감정의 골이 깊은데다가 가족의 의무에 대한 강요도 심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태가 심각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이치와는 달리 생명에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의 결혼으로 인해 자녀가 태어나는 이치는 인과관계에 속하지만, 자녀의 몸을 생산할 뿐 자녀의 정신과 영혼을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왜 자신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왜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부모를 건너뛰어 그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에게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나로 태어나 존재하는지는 창조주와의 관계를 통해 찾아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부모이며 누가 나의 형제이냐라고 물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나의 형제요 부모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우리도 부모에게서 났지만 그 존재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에 매우 자유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무력한 나를 사랑으로 키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며 교육시키고 모든 혜택을 준 부모에 대한 감사는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가벼운 상태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알콜중독 아버지를 둔 소년이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한 봉양의 의무를 지운다면 소년은 마음속에 분노와 거부감이 들 것입니다. 그 분노와 거부감에 ‘불효’라는 유교적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따른 멍에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멍에는 무겁고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만약 그 소년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아버지를 거둔다면 그것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길을 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둠’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이웃 사랑으로 일어난 일이어야 가벼운 멍에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혈연의 끈이 지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작은 예수인 개인적 주체로서, 타인의 강요가 아닌 철저히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일이어야 가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여러 가지 멍에들을 둘러봅니다. 세상적 도덕과 관습, 형식, 절차, 규례 등에 의해서 무겁게 짐 지워져 있는 것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멍에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없어서 자유를 얻지 못하기에 당연히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이 끌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려면 세상 멍에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 배우자에 대한 도리, 직장 상사에 대한 도리 등의 멍에를 한번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멍에의 끈은 사실 창조주와 연결된 내 존재의 근원을 생각해 볼 때, 모두 다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적 관계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조차 굳이 내 자녀여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태어났을 수도 있는 자녀에게 마치 내 영혼을 다 내어줄 것처럼 얽매여 다 내주고 나서 또 내준 만큼 바라는 등의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끈을 일단 다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다시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갈지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눈은 부드럽고, 좋으며, 은혜스럽고, 안락하고, 친절합니다. 딱 그만큼의 눈으로 바라보고 딱 그만큼의 도움을 주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말입니다.
그 어떤 기대감이나 과거의 주고받음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도 없이 깃털처럼 가볍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깔끔한 관계의 멍에가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제목: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선지자선교회
본문 :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서론)
1. 믿음의 주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신도 믿음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성공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믿음 하나로 성공하는 그 성공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은 순종
1) 하나님 말씀대로 인정
믿음은 순종인데 순종은 두 가지 순종이니,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이러하다 저러하다고 당신이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가감 없이 인정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신데 ‘내 생각에는 반은 그렇겠고 반은 안 그렇겠습니까 다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는 아닌 줄로 압니다.’ 하면 믿음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역사에 있는 모든 학자들과 모든 유력한 인물들이 다 그렇게 주장하지를 안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에 반대로 주장하니까 ‘아무래도 주님의 말씀을 내가 전폭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면 그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자기 밖에 있는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 사상들이 뭐라고 해도 그저 ‘주님이 신구약 성경 말씀에 말씀한 그대로 나는 믿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만물에 대해서도 그대로 믿고, 선에 대해서도 그대로 믿고, 악에 대해서도 그대로 믿고, 성패에 대해서도 그대로 믿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천하 인간이 다 부인하고 내게 와서 뭐라고 지껄거릴지라도 나는 거기에 요동치 아니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은 호리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인정하는 믿음.
2)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
또 하나는 자기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현실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때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 믿음이면 예수 믿는 사람은 성공을 합니다.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 두 가지 믿음 가지고 성공했고, 또 우리도 그 두 가지 가지고 성공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이렇게 불이 섞인 유리바다 이 세상을 건너가도록 내세워 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면 날아가듯이 형통하게 주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신 자기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원수
그런고로 이 믿음에는 주관이 원수요, 자기의 사욕이 원수요, 자율이 원수요, 자기의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자기의 좁은 견해 가지고 얻어 놓은 경험의 지식 체험의 지식, 그런 것들이 다 원수입니다. 경험도 버리고, 체험도 버리고, 주관도 버리고, 사욕도 버리고, 어떤 인간의 증거도 버리고 그저 신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 가감 없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옳다 참되다 여기는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다 요렇게 인정하는 요것이 마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참되다 인정하는 것 순종이요, 그 다음에는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시는 대로 몸으로 순종하는 그것이 이제 몸으로 순종하는 믿음.
그러면 그 두 가지 믿음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달성시킵니다. 그 두 가지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죄도 이기고, 마귀도 이기고, 사망도 이기고,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상속받아서 영원히 통치할 수 있고 또 영원히 그것들을 잘 살릴 수 있어서 영원히 감사의 대상이 되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4. 믿는 것이 뭐인가
믿는 것이 뭐이건데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이 마귀로 말미암아 인간이 부패해진 모든 부패, 삐뚤어진 모든 삐뚤어짐, 정죄 받은 모든 정죄, 사망된 모든 사망, 그것을 믿음 하나로만 홀딱 벗어버립니다. 믿음 하나 가지고 그것을 홀딱 다 벗어버립니다.
정죄도 벗고, 사망도 벗고, 마귀도 다 벗어버리고, 모든 죄도 다 벗어 완전히 자유 하는 사람이 되는데, 그 자유가 마치 달아 놓은 두레박이 끈이 떨어져 놓으면 떨어져서 덜렁덜렁 기어 돌아다니는 것 모양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홀딱 벗기를 뭘로 벗었느냐?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 둘 가지고서 홰딱 벗었기 때문에 그 벗으면 이제는 하나님과 진리에게 뽈끈 결박이 돼서 둘이 하나가 딱 됐기 때문에 아무도 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5. 미국 무디 부흥사
그러기에 미국의 청교도들의 그 축복이 부패해서 한번 큰 암흑을 당했을 때에 그때에 중보자로서 미국을 구원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무디라는 부흥사입니다. 무디라는 부흥사가 그때에 암흑을 당한 미국 전 민족을 구출했습니다. 했는데 그분은 말하기를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을 가져오는 것은 없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별로 유식하지 안한 무식으로서 미국을 구출했습니다.
제가 서적 쳐놓고는 서적을 구경해야 시간이 아까워서 성경 외에는 볼 책이 없습니다. 보다가는 시간이 아까와서 못 봅니다. 피곤하면 잤지 그 책을 볼 시간은 없습니다. 나는 높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높은 걸 못 봐 그런지 몰라도 또 과학을 말하는 그것은 도매금으로 한 마디로 보나 안 보나 다 그만 그게 그거지 별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가 사석에서 신앙 담화한 그 책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나한테 한번 우편으로 보내서 한 권 받았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전부 산 말을 기록해 놨습니다. 그래 그 책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산 말을 기록해 놨습니다. 믿음에 능력이 나옵니다.
(본론)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오늘도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 그러면 여기에 기록한 수고는 고생만 실컷하고 효력 없는 그런 헛된 수고를 말합니다. 또 무거운 짐이라 말은 그 짐이 좀 힘이 들어도 지고 갈 만한 짐이 아니고 그 짐에 치여서 죽는 걸 말합니다.
지고 갈 수 없는 짐, 또 효력 없는 수고, 그 수고를 하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워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시니라 그것은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2. 벗으라는 멍에와 메라는 멍에
그러면 오늘은 주님이 벗으라는 멍에와 메라는 멍에를 바꿔야 되겠습니다. 벗으라는 멍에와 메라는 멍에를 바꿔야 되겠고, 또 벗어버리라는 짐하고 또 주님이 짊어지라는 짐하고 그 짐과 짐을 바꾸고 멍에와 멍에를 바꾸는 이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짐하고 짐하고 바꾸고, 멍에하고 멍에하고 바꾸면 그 결과가 뭐인가? 수월하고 심신이 다 평안하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수월하고 심신이 다 평안하다 하셨습니다..
평안이 죽을 때도 평안하고, 심판대 앞에 가서도 평안하고, 또 무궁세계도 평안하고 그러면 그 이상 행복이 뭐 있습니까? 모든 철학자들이 결론짓기를 인간의 행복은 쾌락에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쁨이 있는 길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멍에와 멍에를 바꾸고 짐과 짐을 바꾸면 수월하고 편히 쉰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수고하는 멍에
그러면 수고하는 그 수고의 멍에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 지식, 자기 비판, 자기 평가, 자율과 주관과 사욕대로, 인간들의 모든 주관과 자율과 그 사욕대로 그대로 하는 그것이 다 헛된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벗어버려야 할 마귀가 주는 사망으로 끌고 가는 멍에요 수고입니다.
2) 내 멍에를 메라
그것 버리고 ‘내 멍에를 메라’ 주님의 멍에는 뭐인가? 주님의 멍에는 여러 개도 아닙니다. 쉽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그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딴것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어디서든지 다른 멍에는 메지 안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멍에를 주님이 메고 갔고,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그 멍에만 메고 가면 됩니다.
죽음이 와도 순종, 어려움이 와도 순종, 사자구덩이가 와도 순종, 불미속이 와도 순종, 사형이 와도 순종, 살림살이가 다 뺏길 일이 와도 순종, 고관대작을 줘도 순종, 어디서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급하든지 수월하든지, 어려움이든지 평안함이든지, 대적이 많든지 적든지 거기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순종해라 요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메워주신 멍에입니다. 그저 순종.
3. 순종 하면 뒤가 어찌 되느냐
이렇게 순종을 하면 뒤가 어찌 되느냐?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왜? 당신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고, 우리를 존영하게 하려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 같이 우리를 모든 마귀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광의 주님의 우편에 그 보좌에 앉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니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뭐 있습니까? 그보다 좋은 것이 어데 있습니까? 소유로 말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을 다 네게 주겠다 하셨으니까 그 이상 뭐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약속해 놨으니까 이렇게 순종하면 어찌 되나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눈이 근시자라서 순종하면 담박에 어찌 되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니까 형제들에게 미움 받아서 사형 받았지, 순종하니까 또 감옥소 들어갔지, 그러면 순종해서 감옥소 들어갔는데 그것이 들어가야 애굽 나라 총리대신의 그 위치를 잡을 수가 있다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당장 눈앞에 뭣이 우리 생각대로 좋게 되리라 그런 것을 생각하면 시험에 듭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이 메워 주신 이 멍에 하나만 메고 가야 되는데 이 멍에를 메고 가면 피조물로서 제일 존귀한 성공을 한 자는 도성인신하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시고, 둘째로 피조물 가운데에 존영하게 성공할 자는 예수님의 구속을 입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니까 그것은 약속돼 있기 때문에 이렇게 순종하면 뭐이 되겠느냐? 그 필요가 없습니다. 순종함으로 돈 줄라 해도 돈도 그것은 당신이 주시든지 말든지 하고, 나는 당신이 순종하면 아버지 아들로,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는 약속한 그것을 바랍니다. 그것을 이루어져 가기에 순서가 쓰워도 좋고 달아도 좋고, 헐벗어도 좋고 굶어도 좋고, 어쨌든지 ‘주님이 내게 약속하신 그 영광의 구원을 내가 바라봅니다.’ 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면서 잘 됩니다.
1) 순종하면 잘 된다
순종하면 잘 된다는 그 생각 외에는 딴 것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순종하면 제일 잘 된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게 잘 된다. 순종하면 잘 된다.’ 그것뿐입니다. ‘순종하면 잘 된다.’ 순종하다가 코가 깨졌습니다. 순종하다 코가 깨졌으면 ‘코깨진 것이 잘 되는 것이다. 잘 된 것이다.’ 순종하다가 사형을 받았습니다. 순종하다 사형 받았는데 ‘이것이 잘 되는 그것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마귀 그놈이 우리에게 미혹을 주지 못합니다.
2) 순종 하는 멍에
그러니까 ‘내 멍에를 메라’ 우리는 어떤 그 현실에든지 순종하는 요것 하나 할 것입니다. ‘내가 순종하면 이리 되나 저리 되나?’ 그것은 당신에게 다 맡겨 놓고 그 결말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그 결말은 당신이 승리하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심 같이 나도 순종만 계속하면 승리하고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겠다고 했으니까 그것이 내 목적이요 내 소망이니까, 내가 그 결과는 벌써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 도중이야 이렇든지 저렇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순종 하나의 멍에만 메면 됩니다.
그런데 순종, 이 순종이 어렵다 어려운 것은 우리 주관, 사욕, 자율, 그놈이 들어서 어렵게 하지 그까짓 놈만 부인해 버리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만 부인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게 하는 것이 자기가 들어서 어렵게 만드는데 자기만 부인하면 어렵지 아니하고, 또 어렵지 안하는 이유는 우리가 내게 있는 힘만 가지고 순종하면 그 나머지기는 성령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피가 보증자가 되셔서 연대보증이 돼서 모자라는 것은 다 담당합니다. 이러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4. 내 짐을 져라
또 ‘내 짐을 져라 내 짐은 가볍다’ 그 짐은 뭐입니까? 그 짐은 어데서든지 영원 자존자, 영원 자존자, 지존자, 전지 전능자, 주권자, 모든 예정 창조를 하신 자, 대주재, 제일 큰 분, 그분 한 분만 섬깁니다. 다른 짐 질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에서도 그분만 섬기고 삶에서도 그분만 섬기고 어디서든지 ‘주여, 여게서는 어떻게 하면 당신을 섬기는 일이 됩니까?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까?’ 그것뿐입니다. 당신을 섬겨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쉬운 말로 당신 섬기는 것, 당신 한 분을 섬기는 것 그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당신 한 분을 섬기는 그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안합니다.
그러면 당신 섬기는 그 일은 당신을 섬길 때에 껍데기는 모든 것이 다 해하는 것 같지마는 당신을 섬길 때에 엉뚱한 것이 ‘나를 섬기라 나를 섬기라’ 주인은 주인 저 섬기라고, 남편은 남편 저 섬기라고, 아내는 아내 저 섬기라고, 자녀는 자녀 저 섬기라고, 사장은 사장 저 섬기라고, 모두 저를 섬기라고, 마귀는 마귀 저 섬기라고 이렇게 말하나 이 섬김을 바꾸지 말고 주님은 이 짐 하나만 졌습니다.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 그 외에 다른 책임지지 안했습니다. 아버지를 섬기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그 짐만 졌는데 그 짐이 왜 가벼우냐 하는 것은 그 짐은 아주 가볍습니다. 왜 가벼우냐? 그 짐은 자기만 부인하면 질 것도 없고 힘들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그 짐이 무겁다 하는 것은 전부 자기 그놈이 들어서 짐덩이가 돼 그렇지, 자기만 부인하면 질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만 부인해 버리면 그보다 더 쉬운 짐은 없는 것입니다.
5.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런고로 그리 하라.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온유하고 겸손하다. 온유는 짐 진데서 나왔습니다. 온유는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니까 어디라도 든든합니다. 어떤 세력가가 와도 내가 섬기는 그분의 발새 때만도 못한 것들이오. 아무리 크다고 위협 협박을 해도 내가 섬기는 그분에게 속해서 그분이 딸각 하면은 코르르 팩 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딱 그러면 반신불수가 돼 뻐들뻐들거리고 그렇지, 그분이 딱 그러면 당장에 그 자리서 툭 튀어 날아가서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지, 주권 전지전능을 가지신 이분을 내가 섬겨서, 이분에게 속해서, 이분이 섬기고 이분을 나를 책임지고 있는데 염려가 뭐 있습니까? 이러니까 짐을 바꾸면 온유해집니다.
1) 온유
온유해진다 말은 사람들이 누굴누굴하고 부들부들하다 그 말이 아닙니다. 온유하다 말은 마음에 평안하고 천하가 뭐라고 한다 해도 염려가 안 되고 하나도 걱정이 안 되고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하고 소망이 넘치는 이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내 마음은 온유하다’ 온 천하가 다 나를 배반하고 대적하고 제자들까지 가도 내 마음은 온유하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 내 마음은 어디서라도 평안하다. 세상에 인간들은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는데 죽으면 끝 안 납니까? 죽음이 와서 죽여도 내 마음은 온유하고 평안하다. 왜? 죽고 사는 것을 주권하신 그분이 내가 섬기는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달렸으니 그 분이 허락지 안한 죽음이 있을 수 없고, 그분이 살리는 데에 해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것이 와도 내가 섬기는 그분에게 다 속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 한 분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그분 한 분을 섬기는 생활을 시작했고, 그분이 내가 당신 한 분만을 섬기는 자인 것을 인정하고 보니까 어디든지 평안입니다. 어디든지 봄 동산입니다. 어디든지 희망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평안이 넘치고, 생명이 넘치고, 영광이 넘치고, 성공이 넘치고, 승리가 넘칩니다.
2) 겸손
‘나는 겸손하다’ 겸손은 멍에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내가 작고 크고 간에 요것은 요랬으면 되겠다 조랬으면 되겠다, 요것 하면 좋겠다 조것 하면 좋겠다.’ 내가 내 할 일을 크고 작고 간에 한 종류도 내가 정해 본 것 없다. 내가 할 일을 내가 정해 본 것이 없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내가 판정해 본 것이 없다. 나는 당신 앞에 ‘근본 본체시나 동등 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어 종의 형상을 가져 죽기까지 복종했다’ 모든 것을 그분에게 다 맡겼다. 그분에게 다 맡기고 그저 그분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서라 하면 서고, 앉으라 하면 앉고, 이렇게 ‘나는 마음이 겸손하다’ 그분 앞에서 이런 의의(意義) 저런 의의(意義), 또 이건 계획이고 저런 방편이고, 이런 것을 내가 가져보지를 안했다. 그저 그분 앞에 겸손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뭣이든지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 그거 하나가 내 멍에이다. 또 어디서든지 그분 섬기는 것 그것 하나가 내가 맡은 책임이요 내 짐이다. 그거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6. 다니엘의 멍에
다니엘이 거기서 평안한 것이, 이래 볼까 저래 볼까 하는데 사람이 고통인데 다니엘은 메고 있는 멍에가 자기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명령 순종하는 그것이 자기 멍에인 줄 알았기 때문에 사자구덩이가 오든지 불미속이 오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는 순종하는 그것만이 자기의 멍에이기 때문에 자기가 평생 메고 갈 것이 순종 그것뿐이기 때문에, 그 멍에 메고, 또 거기서 ‘야, 내가 이것을 모르고 그랬다. 네가 어떻게 됐던 간에 이 기간 지나갈 동안만 기도하지 말아라’ 해도 왕이여 그것은 나 할 일 아닙니다. 나 할 일은 주님을 섬기는 것 그것만 나 할 일입니다. 내가 이 지위에 앉아서도 주님 섬기는 일 했지 왕 섬기는 일 안 했습니다.’ 주님 섬기는 일 했고 내가 모든 직원들 가운데서 정직한 것도 주님 섬기는 일 했습니다. 나는 주님 섬기는 일만 했습니다.
여기서 요렇게 해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겠느냐? 저렇게 해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겠느냐? 어디서든지 주 하나님 섬기는 그 일 하나밖에 안 했기 때문에 그것만 나 할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살려 줄 터이니까 하나님의 계명 지키지 말아라. 이제 기도하지 안하는 것이 하나님 섬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죽인다 해도, 기도하는 것이 멍에 메고 가는 것이요 하나님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요동이 없습니다. 그것이 평안입니다. 그것이 평안했습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이 찾습니다! 이 믿음은 피조물을 이깁니다! 능가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7. 자존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우리의 책임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려고 힘들여 만듭니다. 이런데 그렇게 평소에도 주님의 멍에 메고만 가는 것, 주님이 책임 지워 주신 자존하신 그분 섬기는 것만이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분 섬기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 섬기는 그 책임만 지면 피조물은 다 나를 섬기는데, 암만 제가 안 섬길라 해도 섬기는데, 주님 한 분만 내가 섬겨 놓으면 김일성이 제가 암만 해도 영원히 나를 섬겨야 되는데, 김정일 제가 나를 암만 해도 영원히 섬겨야 되는데, 제가 나를 죽여도 저는 영원히 나를 섬겨야 돼. 안 섬기고는 못 견딥니다. 이러니까 나는 이 멍에를 메고 이 짐을 지고 보니 항상 온유하다, 이러기에 헛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이것은 좀 이래 하면 어떻겠습니까?’ 내 의사나 주관이나 사상이나 방편이나 그런 것을 내세워 보지 안했다. ‘나는 겸손하다’ 이 겸손과 이 온유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이것이 천국이요 이것이 성공한 증거입니다.
8. 현실 형편 에서
1) 불경기에서
그런고로 우리는 ‘야, 이 불경기가 돼지니 이래야 밥을 먹겠나 저래야 밥을 먹겠나? 무슨 사업을 할꼬? 무슨 직업으로 사업으로 전환을 할까?’ 그런 것 하지 말아라. 너는 내 멍에만 메고만 갈 것뿐이다. 네가 어느 직장에 있다가 ‘이러면 직장이 떨어지겠는데 올라가겠는데’ 그것도 너 할 일 아니다. 내 멍에만 메고 가거라. 이 현실에는 요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조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만 찾아서 그대로만 순종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움직여질 일이고, 네 인격의 중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만 네가 책임질 것이고, 명령 순종하는 그 멍에만 메고 하나님 섬기는 그 책임만 져라 이 둘뿐입니다.
2) 회사 경영에서
이러니까 현실에서 내가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으로 있다가 그 현실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려고 하니까, 다를 때는 그 현실에서 계명 지키면 사업이 잘됐는데 하나님이 현실을 만들어서 그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라 하니까 사업이 당장에 박살이 돼 버립니다. ‘아이구, 이 계명 지킬려 하면 사업이 박살되는데.’ 그러면 네가 멍에를 다른 멍에를 찾는 것이다. 네가 사업이 박살되고 안 되고 네가 사업을 붙드는 것 너 할 일이냐? 내 계명 지키는 게 너 할 일이지. 이러니까 계명을 지킬라 할 때 ‘사장님 이 계명 지키면 이러면 이 회사가 박살이 납니다.’ ’내가 무슨 회사 지키는 것이 나 할 일인 줄 아느냐? 내가 메고 가는 멍에는 따로 있어.’ ‘뭐입니까?’ ‘주님이 명령하는 그 명령 순종뿐입니다.
내가 현재 형편에서는 환경을 이래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명이 뚜렷이 이렇기 때문에 계명대로 하는 것뿐이라.’ ‘계명대로 하면 이 사업이 다 절단 나는데 어짭니까?’ ’사업이 절단 나고 안 나고 그것은 나 할 일이 아니라 계명 지키는 것만 나 할 일이라.’ 이래서 나가는 그자를 찾습니다! 그 자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나를 안즉 내가 너를 높이리라 네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너를 건지리라’ 이렇게 하면 사업일랑 냅두고서 지금 ‘이렇게 지금 그만 기도 안 한다하고 속으로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한다고 하면 사자구덩이 들어가 안 죽습니까?’ ‘내가 죽는 것 사는 것은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죽는 것 사는 것 그것이 나 할 일인 줄 아느냐? 나 할 일 아니다. 나는 멍에 메고 가는 것뿐이다. 나는 이 시간에 기도한다는 이것뿐이다.’ ‘저렇게 미련하네.’ ‘미련한 십자가의 도라’ 미련합니다.
3) 사자 구덩이에서
그러니까 그러다가 사자구덩이 턱 집어넣으니까 다른 사람이 보고서 ‘저거 어리석게 으레 죽을 줄 알면서 그것 그래 하지 말라 하니까 ‘죽고 사는 것이 나 할 일인가? 어디 주님의 멍에 메고 가는 것이 나 할 일이지’ 이러면서 기도한다고 뻑뻑 세우더니마는 그만 사자구덩이 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헛일됐다. 다니엘이 살아나오지 안했으면 헛일됐습니까? 살아나오지 안했으면 살아나온 것보다 훨씬 잘됐습니다. 왜? 다니엘의 전부는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으로서 완전히 화해졌습니다. 그보다 더 성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하나 계시기관으로서 그렇게 ‘이런 경우에도 계명 지키면 이제는 헛일이라 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능력은 살려 낼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계시기관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요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천인 만인이 말해도 멍에를 바꾸지 말 것입니다. 멍에를 바꾸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이런데 저런데? 그런 결과는 내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멍에 메고 가다가 ‘네가 이기고 내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 하는 그것이 내 소망이니까 그 소망이며, 또 이기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네 것이 된다는 그보다 더 큰 성공과 부자가 어데 있습니까?
우리 현재 강대국 해봤자 그것 지구 땅덩어리 속에 한쪽 쪼갱이 밖에 안 되는 것인데 우주로 말하면 그까짓 것 몇 닢 푼치 됩니까? 우주와 영계 것을 다 상속받는데 그것이 더 큰 부자 아닙니까? 이러니까 약속한 그 결말 그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9. 멍에와 짐을 바꾸지 말 것
이러니까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을 주님이 찾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든지 멍에를 바꾸지 말 것, 어디서든지 짐을 바꾸지 말 것입니다. 짐을 바꾸면 일시는 수월하고 좋은 것 같지마는 풍랑 만난 배가 물이 들어오면 그 배가 많이 출렁거리지 안하니까 좋지마는 좀 있으면 속에 침몰돼서 죽습니다. 속에 물이 안 들어오니까 가벼우니까 훌렁훌렁하고 그렇지마는 속에 물만 안 들어오면 그 배는 침몰 안 됩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믿읍시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멍에 메고 갈 것, 그러면 어찌 되나? 그것은 내게 상관이 없습니다. ‘이 멍에를 메고 가면 어찌 되나?’ 그것은 당신 할 일이고 나 할 일은 아니라. 그러면 어찌 되든지 그것은 내게 허락하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중간 방편이지 그것이 결말은 아니라. 중간 방편인 것입니다. 중간 방편이야 이래 쓰든지 저래 쓰든지 나한테 그 결과만 이루어 주시면 나는 됐지 중간 방편이야 이런 방편 저런 방편 어떤 방편을 쓸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저 분명히 약속한 그 약속 아버지 우편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이 되어지는 이것,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지는 것 이것. 이 결말만 보고 살아야 합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 섬기는 이 짐 짊어지고 가면 당장 절단난다. 네가 다리오 왕을 섬겨서 다리오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 너는 절단이 안 나나 내가 다리오 왕에게 절단 안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단 안 내는 그것 바라고 살아, 두려워하기는 하나님이 절단 내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산다. 이러니까 되든지 안 되든지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멍에,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 주신 짐, 이 짐 지고 이 멍에 메고 가면 수월하고 좋고 평안하고, 장차는 모든 피조물의 중보자가 돼서 많은 봉사자가 되고, 많은 앙모의 대상이 되고, 주님의 우편에서 주님의 통치하는 것을 다 대리 받아서 모든 피조물을 다 통치하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해서 그들에게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10. 자기를 망치는 것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메워주신 멍에, 지워 주신 짐, 이것 둘만 가지기로 확정을 한다면 능력 나옵니다. 이것 안 하는 통에 전부 자기 망치는 자가 누가 자기 망치느냐? 자기 망치는 자는 자기가 자기를 망칩니다. 다른 이가 자기 망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전부 자기 망칩니다.
무엇이? 고통스럽기는 누가 고통합니까? 자율, 주관, 자기 경험 체험, 인간들의 그 모든 지저분한 통계, 이것은 양이 목자를 떠날 때에 당한 것들이요. 양이 목자에게로 돌아갈 때는 어깨에 안고 품에 품고 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때와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다릅니다.
(결론)
1. 주님이 주신 멍에와 주님이 지워 주신 짐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이 주신 멍에와 주님이 지워 주신 짐 이 두 가지만 메고 지고 가기로 확정을 합시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지 모릅니다. 요셉이가 흙구덩이 들어갔으니까 이제는 끝장났습니까? 아니오. 또 살아서 보디발 집에 갔습니다. 보디발 집에 감옥에 들어갔으니까 끝장났습니까? 아니오. 마지막 애굽 나라에 총리대신으로 갔습니다. 그 한 순서라도 안 밟으면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보기에는 멸망인데 멸망이 기적으로 유지되고 멸망으로 멸망으로 자꾸 걸어갔는데 최후에는 성공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껍데기는 멸망 멸망이지마는 그 속에는 전체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총이요 권능입니다.
2. 마귀의 미혹과 협박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에서 악령을 저하고 짝하자고, 악령은 저하고 짝하자고 저하고 부부되자고, 간신같이 요렇게 악령은 지금 간부같이 우리에게 유혹을 줍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면서 성령은 ‘야, 네가 그래도 정신 차려라. 악령의 간부를 따라가 되겠느냐? 네 하나님 본부(本夫)를 따라가야 되지.’ 이럴 때에 지금 하나님도 마음이 막 시기하기까지 기다리셔서 ‘보자 보자 보자’ 할 때 그럴 때에 이 성도가 악령이 와서 유혹을 하니까 세상을 가져 가지고 유혹하니까 넘어갈 듯 넘어갈 듯, 속으로 웃으면서넘어 갈 듯 넘어갈 듯 하니까 세상과 마귀 그놈은 달아서 인제 이러면 오겠다 싶어서 협박도 해보고 유혹도 해 보고 한번 치켜 올리기도 해 보고 오만 것 이러는데 속으로는 단단하다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물러가라’ 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니까 아버지가 만족하셨습니다. 그것이라야 됩니다.
우리는 그 현실에서 간부 마귀는 저하고 하나 되자 하고, 요럴 때에 그럴 때에 그 간부 마귀에게 끌려 갈 듯 끌려 갈 듯 속으로는 다르면서 그놈을 애를 태워서 이러다가 착 배반하고 주님에게로 딱 돌아섰습니다. ‘주를 향한 것은 주를 섬기는 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딱 할 때에 주님이 만족하십니다. 그래서 ‘연(輦)’ 가마 태워서 이제 기뻐서 찬송을 부릅니다.
우리가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를 다 싸워서 이기는 사람들이 그런 재미로 이기고, 6·25 때에 강단을 양보하지 안하고 지키고 한 사람들 다 그런 재미로 이깁니다. 그러니까 오늘 멍에 바꾸고 짐 바꾸는 이 일을 우리가 확정합시다.
이제는 우리는 ‘내가 이래 하면 사업이 어찌 되나? 가정이 어찌 되나? 뭐이 어찌 되나?’ 그것은 주님께 맡기고, ‘그것이 뿌서진다 뿌서진다’ 마귀가 협박을 해도 주님 명령 순종하는 것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지 주님 명령 순종하는 것 하나 요것만이 우리의 멍에이며, 어디서든지 주님을 높여 주님 섬기는 것, 요것만이 우리의 책임 요것 둘이면 다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평소 사소한 일에서 이 싸움을 싸워야 됩니다. 사소한 일에서. ‘아! 요거로구나’ 할 때는 얼른 주님에게로 딱 옮겨 서고 그것을 탁 배척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 그분만 섬기고 그분에게만 경배하라 하셨느니라.’ 딱 결론을 지우니까 그만 마귀는 도망을 쳐버리고 천사는 와서 수종들고 했습니다. 요것을 작정합시다.
그럴 때에 우리가 머뭇거리고 짐을 바꾸고 멍에를 바꾸면 하나님 잊어버리고 마귀 그놈에게 끌려가서 단단히 욕봅니다. 우리가 뭐이든지 요것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안 될 것 뭐 있습니까? 그것 아니면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아주 많은데 얼마든지 있는데 모든 것 당신이 주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울로 달아보자. 요것도 감당 못 할 자인지 이보다 더 큰 것을 줘도 될 자인가?’ 저울로 달아보면 압니다.
(기도)
긍휼의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책임지시고 말씀하신 주의 신실하심을 믿는 영감으로 우리에게 충만케 하사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지워 주신 짐 이 둘만 가지고 세상 끝 시간까지 달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가는 자마다 세상을 평안한 세상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유유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유일의 길이오니 다 영감으로 각자들에게 충만케 하사 이 두 가지를 작정하고 요동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 설교: 백영희 목사(1983. 8. 7. 주일 오전)
– 편집: 김반석 목사(2013. 12. 22)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본문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해석과 설명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25절)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다.
이 말씀은 약간 조롱의 의미가 있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 지혜 있는 자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학식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 날 모든 지적 교만한 자들을 지칭하는 말씀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25절)
어린아이의 특징은 수수함이다.
그 어떤 사상이나 지식에 물들여져 있지 않다.
이들은 스스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
마침 어린아이가 부모님께 의존적인 것처럼 말이다.
겸손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는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26절)
원문에는 ‘옳소이다’가 ‘옳소이다. 아버지여!’로 ‘호격’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2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전달 방법을 말한다.
즉, 스스로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숨겨져 있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 복음이 들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
여기서 ‘내 아버지’란 말씀 속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는 것처럼 역으로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시기 때문에 또한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나타내실 수 있으신다.
따라서 아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즉, 아버지와 그의 계시를 아는 것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누구일까?
당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힘겹고 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맥상 이것은 종교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엄격한 의무와 규칙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이 초청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25-27절 사이에 나타난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일체성 주장에 근거를 둔 절대적인 권위의 초청이다.
즉, 죄와 율법의 짐에 지쳐있는 사람들의 영혼에게 쉼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29절)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의 헬라철학적 개념은 심오하다.
이는 신체의 중심적인 기관이나 감정과 사고의 중심 부분을 가리킨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의 ‘마음’의 개념은 히브리적 관념에 영향을 받고 있다.
즉, ‘가슴’ 또는 신체 활력의 중심지, 감정의 중심지, 여러 이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고와 이해의 중심지,
의도하고 계획하는 의지의 중심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심성의 중심지를 가리킨다.
이런 개념으로 볼 때 본 구절의 ‘마음’은 전인격적인 성향의 핵심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온유’라는 단어는 단순히 성격 자체의 유순함이나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맥상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집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가혹하고 엄한 노역 감독원의 모습이 아닌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지닌 ‘온유’와 ‘겸손’을 가지신 분이셨다.(사40:2이하, 사53:6).
또한, 예수님은 친히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유’와 ‘겸손’의 모습을 실증해 보이셨다.(빌2:3-6)
▶교훈과 적용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9-30절하)
여기서 ‘멍에(헬, 쥐고스)’는 문자적으로는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밭을 갈거나
짐수레를 끌도록 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무거운 틀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져야 하는 어려운 고역이나
괴로움을 주는 부담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당시 로마 군인들은 포로로 잡힌 노예들을 멍에에 씌워 압송시켰는데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멍에’는 ‘노예와 같은 예속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유대 문학에서의 ‘멍에’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랍비)의 가르침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겁고도 많은 멍에를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 멍에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겁고도 힘든 멍에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의 멍에’를 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멍에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배우라’는 말은 ‘내 제자가 되어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아마 우리 가운데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복음을 깨닫고 참 평안을 우리고 있는 성도!
하나는 참 복음을 깨닫고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세상의 짐 때문에 힘들고 고된 삶을 사는 성도!
그리고 아직도 참된 복음을 알지도 못한 채 교회만 다니는 사람.
오늘 본문은 마지막에 해당하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의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29)“ 아멘!
20131201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28-30ㅣ김남수 목사]어떤 사람이 목사님께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참 들어보고 있자니 늘 근심 걱정에 싸여서 세상을 불만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해 주려고 해도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혼자서만 쉴 새 없이 이야기해 나갔습니다. 이야기는 전부가 근심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듣다 못해서 ‘그런 곳이 있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저 쪽 언덕 넘어 가면 그런 마을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언덕 너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소중한 초청의 말씀이자, 이 말씀에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보더라도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착취하고 박탈하므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근심 걱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타락하여 질서가 무너지고 생명력은 없는 교권과 형식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말씀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고 하신 말씀은 인간의 고통을 두 개념, 즉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나누어서 총괄한 것입니다.
먼저, 수고한다는 것 은 고생할 일이 아닌데,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생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짐이 곧 수고하는 것입니다. 같은 노동이라도 보람 있고, 즐겁고, 기쁘고, 힘들지 않는 노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노동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만족할 만한 대가를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은 우리에게 성취의욕을 북돋아 주고, 스트레스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일을 해도 만족이 없고, 피곤만 쌓이는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고 스트레스만 쌓이고, 이와 같은 일은 그야말로 수고스럽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향하여 무거운 짐 진 자들 이라고 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은총을 누리며 살도록 복된 상태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범함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지혜와 이상과 능력을 믿고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짐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문명은 발전시켰으나 무거운 짐에 눌려 절망감으로 고통당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짐 없이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이 예비 된 은총의 세계를 벗어나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쓰고 힘써 노력하라 몸부림치라고 하지 않고,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이 예수님께로 와야만 해결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속주가 되십니다. 아담이후 인간은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 놓으시고, ‘내게로 와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구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초청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인구원의 원천이 되신 초청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인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시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인간의 짐을 대신 책임져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쉼을 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인생이 문명과 과학을 찾아간다고 해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더 좋은 것을 찾아 헤매고 헤매었으나 쉼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옛날보다 더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류는 역사 이래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 받고 쉼을 얻으려면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이 길밖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 하신 말씀은 인간이 처해 있는 처지로부터, 내 안일로부터, 그릇된 사상과 습관과 잘못된 행위로부터 떠나 예수님께로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나오는 행동으로 순종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십니다.
‘멍에’라는 말은 마·소의 목에 걸쳐 얹어서 수레와 쟁기를 몰게 하는 가로나무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셨으므로 멍에를 만들어 보셨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멍에가 어떤 것입니까?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수욕당하시고, 비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신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함께 메라고 하시면서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쉽다는 말은 몸에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마·소는 멍에가 제 몸에 잘 맞아야 무거운 것도 가벼운 듯이 잘 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멍에가 쉽다’는 것은 잘 맞는다, 무겁지 않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멍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멍에 밑으로 들어가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로 들어가기 위해서 나의 멍에를 메고 겸손하게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온유란 길들임을 잘 받아 순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사나운 짐승은 온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길들임을 잘 받는 가축 유의 짐승을 보고 온유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온유한 짐승은 주인의 보살핌을 잘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중심으로 서서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온유하면, 그래서 순복하면 예수님의 멍에로 들어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고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교만과 반대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과대평가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지고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들어가 쉼을 얻으려면 겸손하게 낮아져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책임져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길들임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짐을 맡아 주십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에게는 억압과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고 하신 말씀이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왜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가던 때에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던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 조차 힘든 박해와 고문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놓고, 거기에 사람을 매달아 놓습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잠겨서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포루투칼 선교사는 너무나 답답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능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 선교사는 피땀과 눈물을 흘리며 더 안타깝게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귀에 또렷하게 들여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당한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나아갈 때 그 멍에는 어떤 고난이라도 쉽고 가볍고 기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메는 짐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심리학자들의 분석한 것을 보면, 큰 원인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욕심이요, 하나는 증오라고 합니다. 이 증오는 위장병, 두통, 관절염, 심지어 암 병이 될 수 있으나, 증오가 사랑으로 바꿔지면 가벼워집니다. 증오하고 교만하면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일은 힘이 들지 않습니다. 내 짐이 가볍고 무거운 것은 나의 사랑을 점검해서 가늠해야 할 일이지 저울로 달아 가늠할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사랑이 식었느냐 뜨거웠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며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삶은 결코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짐이 무겁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 짐은 그 성격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요,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바꿀 때 가벼운 것입니다.
셋째, 내 멍에를 벗어버리고 나서 메는 멍에, 곧 죄 짐을 벋고 그리고 메는 멍에이기 때문에 가벼운 것입니다.
죄에 짓눌려 있으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는 확신 가운데 지는 십자가 고통이라는 것은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죄의식으로 인한 형벌의식 때문에 짐이 무겁고 피곤한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 받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고난이라면 이 짐은 시련이요, 영광이요, 기쁨이요, 나를 연단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요, 선교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무겁게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쓰러지고 쓰러지시는데 옆에서 따라가다 로마 병정에 의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십자가의 뜻도 모르고, 무거운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십자가를 메었던 어깨를 만지며 평생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다니! 이러한 일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교할 때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겠다고 하니, 예수님처럼 바로 서서 십자가에 달린 것은 무엄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거꾸로 메달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몰랐을 때 골고다로 메고 가던 십자가가 그토록 무거웠는데, 지금은 손과 발에 못 박아 거꾸로 세워 놓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저 가볍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죄를 벗고 지는 짐이요,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는 짐이 무겁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죄책에서 벗어나 죄의식에서 자유하고, 허무와 목적 없는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적을 찾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살 때에 삶의 짐은 가볍습니다.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멜 때에는 짐은 영광스러우며, 나에게 보람을 안겨줍니다. 내 생의 의미가 멍에에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쉼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구원에 대한 담론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구원의 주님이시자,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앞서서 구원이 어렵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앞서서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쉽고 가벼운 것은 어떤 존재든지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서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먼저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모순이자 허구성을 짚어 보면, 세례 문답에 답하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 등 여러 가지로 구원과 무관함을 말할 수 있겠으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그것이다.(물론 그것은 증거로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할 때 마다 회개로 시작한다. 죄가 있다는 것을 늘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받지도 못한 구원을 아주 쉬운 것이라고 여긴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 목적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쓰이고 살아갈 때 가장 쉽게 사는 것이다. 자동차 브레이크는 자동차를 세우느라 엄청난 열이 날 뿐 아니라, 자신이 닳아 없어지지만 그것이 브레이크의 존재 이유고 살아가는 삶이기에 브레이크에게 그것보다 쉬운 것은 세상에 없다. 만약 브레이크가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게 하려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완전한 하나의 공학과 공장과 산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인생들에게 보이시려 하신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란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쉬운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단 말씀은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구원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목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자신이 생각할 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좇아 사는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가장 쉬운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온전히 알면 예수님께서 쉽다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녀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좋은 결과는 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쉽고 가벼운 일이다.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쉬운 일이고 가벼운 짐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구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거듭남도 말로 되는 것으로 안다. 성경에서 거듭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만 인정하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다른 생명으로 났다는 뜻이다. 생명이 달라졌다면 삶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본성이 달라져야 한다. 본성이 달라지면 가치관과 안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전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그런데 구원 받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랐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다음에도 동일한 것을 구하는데 그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기 전에는 자기 힘을 믿고, 또 세상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필요하면 불법적인 것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의 평안과 안녕과 같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주관자로 믿는다.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 이런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런 신앙과 믿음은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것이 아니다. 구원 받기 전,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구원 받은 다음이나 원하는 목표는 같으니 거듭난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고 먹는 늑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변화 다음에도 썩은 고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두고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거듭남은 이렇게 엉터리다.
공부하면 좋은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은 쉬운 것이나 공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진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다. 존재로서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이므로 쉽고 가볍다. 문제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 듯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힘들다.
육신의 정욕, 곧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늘 소망하는 사람이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형식이자 도구며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자신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사하신다는 것이 약속이다.
그러므로 돌이킴은 행위에 대한 반성과 돌이킴이 아니다. 행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고서 또 다시 행위로 범한 죄를 회개하는 반복이 사함 받고 구원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더욱이 행위는 본질도 아니다. 행위는 속에 있는 의와 생각과 가치와 철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인 삶의 목적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구원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겠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알려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다.
구원은 엄청 어렵지만 구원 받은 삶은 너무 쉽다. 현재의 삶을 늘 곤고하다, 인생은 힘들다, 괴로운 인생길이라 말하며 사는 인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존재가 존재 목적 아닌 것을 좇아 사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힘들다. 반대로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은 다른 존재가 보기에 힘들 것 같아도 편안하다. 브레이크가 항상 열나고 마찰을 받아도 차를 세우는 것에 사용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을 믿고 알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목표를 바꾸는 것이다. 높은 곳을 앙망하다 뒤로 돌아서는 것과 같다. 돌아서는 것은 하등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돌아 설 수 없다. 그럴 수 없다면 구원은 한 없이 어렵다. 그러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것을 주신다. 사람이 육신의 가치를 앙망하면 구원은 하염없이 어렵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낮은 곳을 앙망하면 쉬운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짐은 가벼우니라
마태복음 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는 말씀은 많은 설교자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전반부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흔히 전도용 설교로도 많이 인용되고는 합니다. 중반부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는 양육 내지는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교육용으로 많이 인용됩니다만 후반부인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는 그리 많이 인용하지 않은 듯합니다. 인용한다 하더라도 그리 시원한 강해를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필자의 마음에 학 빨려 드는 속 시원한 설교는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래놓고 좁은 길로 가라 십자가를 져라. 복음의 길이 순탄한 길이 아니라는 걸 수없이도 말씀하시고서는 자신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시니 헷갈리기만 합니다. 대개는 이구절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성경이라고 해서 전부 다 해석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난해한 구절이 많이 있지만 오히려 쉬운 구절이기 때문에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우리의 신앙이 자칫하면 쉽고 가볍게 여길까봐 이 구절은 떼어놓고 설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라는 테두리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는 셈이 되기 때문에 자꾸만 복음을 율법화 하여 어렵게 만들어 놓아야만 자신들의 복음마케팅의 영업 전략전술이 성립이 되는 것이지요.
마치 병을 고치기는 쉬운 것이지만 어려운 것으로 전제하여 약을 팔고 병원으로 오게 하는 마케팅의 메카니즘과 비슷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세상의 진리는 간단 한 것인데 마치 어려운 것처럼 철학으로 신학으로 교육으로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배운 사람만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만 깨달을 수 있는 것으로 세뇌되어 일반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너무 쉬운 것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데 우리는 익숙해 져 있습니다.
먹거리도 간단한게 우리들의 몸에 유익한데 자꾸만 어렵게 가공하여 우리 몸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몸과 영혼을 둘러싼 모든 진리들이 간단하고 쉬운데서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가는 것은 인간의 철저한 죄성이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볻음도 쉽고 가볍습니다. 쉽고 가벼운 것을 어렵고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 전통신학과 교회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율법과 같이 무겁게 하여야 권위가 있고 무슨 인간의 신앙적 욕망을 채워주는 것 같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차도 경차를 타는 것보다 중형차를 타야 사람이 무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교회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육체적인 자유이외에도 영적인 자유가 있겠습니다. 육체적인 자유함은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자유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헌법상에서도 보장된 우리들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체적 자유권,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등과 정신적 자유권으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 자유권으로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 정당가입과 정당 활동의 자유, 투표와 공직선거입후보 및 선거운동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 신앙인으로서의 자유는 권력으로부터, 돈으로부터, 세상의 명예로부터, 목회권력으로부터, 브랜드목사의 우산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해방이후 수많은 희생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들의 자유로운 삶의 터전을 구축해왔습니다. 허지만 틈새자유가 속박되는 경우가 있는데 흔히 간과하고 지나치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흔히 관례로, 관습으로 지나치기 때문이지요.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진정한 자유는 영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이 우리들의 진정한 자유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속박된 목회의 울타리속에서 성도들을 가두어 놓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자신의 목회 울차리 안에서 가두어 놓고 자신이 주는 메시지만을 먹으며 알콩 달콩 유치원 소꿉장난하듯 재미있게 살자고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목회이자 신앙생활의 모습이라고 분석됩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배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가벼운 은혜의 수준에 머무르며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사회와 격리되어 불신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지요.정작 복음의 멍에는 쉽고 복음의 짐은 가벼운데 약싹빠른 당나귀처럼 물에 빠져 짐을 무겁게만 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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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0140430>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인생은 난해한 퍼즐과도 같습니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또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퍽이나 쉽고 단순한 듯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으로 인생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죄 짐을 맡아 주실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마치, 자기 손에 큰 금덩어리를 들고 엄마에게 100원짜리 과자를 사달라고 하루종일 칭얼거리는 어린 아기와도 같은 삶을 우리는 살아가진 않는지요? 말 할 수 없는 보화가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기나긴 고독한 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허덕이면서 달리고 있습니까? 가끔씩 목을 축일 오아시스를 만나고 또 가끔씩 얼굴에 미소를 던져줄 작디 작은 기쁨의 소식들이 찾아 오지만, 우리 마음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근본적 구원에 대한 믿음이 요동칠 때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흔들려 버리고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고아와 같은 황망한 심정으로 떨어지고 있진 않습니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얼마나 단순 명쾌한 말씀입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우리를 쉬게 할 분이 결코 없음을 우리는 매일매일 묵상해야 합니다. 돈, 사람간의 관계, 직장, 배우자, 부모와 자식들 물론 연약한 인생길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또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만,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 외 우리에겐 ‘쉼’을 보장 받을 길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다 오라고 하시고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가요? 멍에는 무엇입니까?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나귀 등의 목에 가로로 얹는 막대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멍에는 ‘속박’ 또는 ‘예속’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 그리고 왜? 예수님의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런데 왜?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 인 예수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을 많은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일까요? 빛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가 어떻게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능히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그 안에서 안식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마나 쉬운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요.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십시요. 우리에게 안식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평안이며, 안식이며,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멍에입니다.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룩에서 거룩으로 인도하는 ‘쉬운 멍에’요 ‘가벼운 짐’인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30절) 이 말씀은 이 땅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한편으로는 참으로 답답함을 주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줍니다. 누구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예수를 믿는데도 왜 이리 여전히 힘든가 답답하기도 하고,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가벼워지고 싶은 사모함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음속에 일종의 물음표와 함께 오래 간직됩니다. 우리 신앙은 이 물음표를 들고 걸어가는 순례길이며, 조금씩 그 해답을 희미하게나마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내 멍에는 쉽고”에서 ‘쉽고’라는 말의 원어는 크레스토스로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는 다양한 뜻으로 해석됩니다. 앞서 멍에는 짐승을 부리기 위해서 씌우는 것으로 보통 일꾼에게 사용될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멍에를 메게 된다고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같이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땅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일이며, 그 멍에를 함께 진다면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부드럽고, 좋은 일이며, 은혜스럽고, 안락하고, 친절한 일이기에 쉽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예수의 멍에에 대해 새의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것처럼 가볍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인 사랑의 계명,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피곤하고 무겁고 힘든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좋고 은혜롭고 안락하고 친절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며, 그 자체로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며,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메기 때문에 가벼울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안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려 고통받으며 늘 자살을 생각하던 한 소년이 생각납니다. 그 소년은 죽고 싶지만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려워하며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대에 재야 신학자이며 이십대 때부터 하반신 마비가 되어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오신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 좋은 것, 바른 것, 선한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땅에서 바르고 좋고 선한 것을 행하면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그 소년에게도 이 말씀은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알콜중독 센터의 도움으로 상담을 받고 있는 그 소년이 바르고 좋고 선한 길로 가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바르고 좋고 선한 길로 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부단히 애쓰며 주변인들의 도움도 기꺼이 받으면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 길은 영원히 아름다운 길이라는 증명을 받은 길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자살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길이 아니라 깃털처럼 가볍고 확실하며 마음에 안식을 주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라고 할 때,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걸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인데, 너무 싫고 밉고 내게 잘못한 게 많아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잘 모르는 남일 때 더 봉사하기가 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신실한 크리스천일수록 마음에 찔려 합니다. 잘 모르는 이웃을 도울 때는 마음이 편하고 즐겁고 가볍고 기쁜데, 정작 도와야할 미운 내 친지를 도우려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나고 억울해서 마음이 무겁고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독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존속 상해 및 살해 사건이 많은 이유는 가족과 가문에 관한 얽매임이 강하여 그 안에서 발생하는 서로간의 상처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미움을 낳아 감정의 골이 깊은데다가 가족의 의무에 대한 강요도 심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태가 심각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이치와는 달리 생명에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의 결혼으로 인해 자녀가 태어나는 이치는 인과관계에 속하지만, 자녀의 몸을 생산할 뿐 자녀의 정신과 영혼을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왜 자신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왜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부모를 건너뛰어 그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에게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나로 태어나 존재하는지는 창조주와의 관계를 통해 찾아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부모이며 누가 나의 형제이냐라고 물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나의 형제요 부모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우리도 부모에게서 났지만 그 존재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에 매우 자유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무력한 나를 사랑으로 키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며 교육시키고 모든 혜택을 준 부모에 대한 감사는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가벼운 상태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알콜중독 아버지를 둔 소년이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한 봉양의 의무를 지운다면 소년은 마음속에 분노와 거부감이 들 것입니다. 그 분노와 거부감에 ‘불효’라는 유교적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따른 멍에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멍에는 무겁고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만약 그 소년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아버지를 거둔다면 그것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길을 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둠’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이웃 사랑으로 일어난 일이어야 가벼운 멍에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혈연의 끈이 지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작은 예수인 개인적 주체로서, 타인의 강요가 아닌 철저히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일이어야 가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여러 가지 멍에들을 둘러봅니다. 세상적 도덕과 관습, 형식, 절차, 규례 등에 의해서 무겁게 짐 지워져 있는 것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멍에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없어서 자유를 얻지 못하기에 당연히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이 끌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려면 세상 멍에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 배우자에 대한 도리, 직장 상사에 대한 도리 등의 멍에를 한번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멍에의 끈은 사실 창조주와 연결된 내 존재의 근원을 생각해 볼 때, 모두 다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적 관계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조차 굳이 내 자녀여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태어났을 수도 있는 자녀에게 마치 내 영혼을 다 내어줄 것처럼 얽매여 다 내주고 나서 또 내준 만큼 바라는 등의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끈을 일단 다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다시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갈지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눈은 부드럽고, 좋으며, 은혜스럽고, 안락하고, 친절합니다. 딱 그만큼의 눈으로 바라보고 딱 그만큼의 도움을 주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말입니다. 그 어떤 기대감이나 과거의 주고받음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도 없이 깃털처럼 가볍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깔끔한 관계의 멍에가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본문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해석과 설명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25절)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다. 이 말씀은 약간 조롱의 의미가 있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 지혜 있는 자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학식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 날 모든 지적 교만한 자들을 지칭하는 말씀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25절) 어린아이의 특징은 수수함이다. 그 어떤 사상이나 지식에 물들여져 있지 않다. 이들은 스스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 마침 어린아이가 부모님께 의존적인 것처럼 말이다. 겸손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는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26절) 원문에는 ‘옳소이다’가 ‘옳소이다. 아버지여!’로 ‘호격’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2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전달 방법을 말한다. 즉, 스스로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숨겨져 있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 복음이 들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 여기서 ‘내 아버지’란 말씀 속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는 것처럼 역으로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시기 때문에 또한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나타내실 수 있으신다. 따라서 아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즉, 아버지와 그의 계시를 아는 것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누구일까? 당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힘겹고 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맥상 이것은 종교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엄격한 의무와 규칙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이 초청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25-27절 사이에 나타난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일체성 주장에 근거를 둔 절대적인 권위의 초청이다. 즉, 죄와 율법의 짐에 지쳐있는 사람들의 영혼에게 쉼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29절)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의 헬라철학적 개념은 심오하다. 이는 신체의 중심적인 기관이나 감정과 사고의 중심 부분을 가리킨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의 ‘마음’의 개념은 히브리적 관념에 영향을 받고 있다. 즉, ‘가슴’ 또는 신체 활력의 중심지, 감정의 중심지, 여러 이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고와 이해의 중심지, 의도하고 계획하는 의지의 중심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심성의 중심지를 가리킨다. 이런 개념으로 볼 때 본 구절의 ‘마음’은 전인격적인 성향의 핵심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온유’라는 단어는 단순히 성격 자체의 유순함이나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맥상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집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가혹하고 엄한 노역 감독원의 모습이 아닌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지닌 ‘온유’와 ‘겸손’을 가지신 분이셨다.(사40:2이하, 사53:6). 또한, 예수님은 친히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유’와 ‘겸손’의 모습을 실증해 보이셨다.(빌2:3-6) ▶교훈과 적용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9-30절하) 여기서 ‘멍에(헬, 쥐고스)’는 문자적으로는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밭을 갈거나 짐수레를 끌도록 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무거운 틀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져야 하는 어려운 고역이나 괴로움을 주는 부담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당시 로마 군인들은 포로로 잡힌 노예들을 멍에에 씌워 압송시켰는데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멍에’는 ‘노예와 같은 예속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유대 문학에서의 ‘멍에’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랍비)의 가르침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겁고도 많은 멍에를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 멍에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겁고도 힘든 멍에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의 멍에’를 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멍에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배우라’는 말은 ‘내 제자가 되어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아마 우리 가운데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복음을 깨닫고 참 평안을 우리고 있는 성도! 하나는 참 복음을 깨닫고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세상의 짐 때문에 힘들고 고된 삶을 사는 성도! 그리고 아직도 참된 복음을 알지도 못한 채 교회만 다니는 사람. 오늘 본문은 마지막에 해당하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의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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