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 여자 | 문수보살오자진언 – 홍산스님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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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 오자진언
(팔만사천을 능가하는 큰 지혜를 구할 수 있다)
아라파자나(阿羅破者挪)
○오자 다라니의 공덕
5자 다라니의 공덕을 설한다.
즉 이 다라니로 삼매를 수행하는 자는
능히 범부의 몸으로도 부처의 몸을 얻을 수 있다.
○오자다라니 해설
5자 다라니를 설명한 다른 경전과 같이
여기서도 다섯 글자의 뜻과 염송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아라파자나(阿羅破者挪)를 들고 있다.
여기서 아(阿) 자는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무생(無生)의 뜻이며,
라(羅) 자는 번뇌에 오염됨이 없다는 뜻이다.
파(破) 자는 모든 것의 본성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者) 자는 변화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나(挪) 자는 본래 절대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阿) 자는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것이 없는 허망한 것이며,
라(羅) 자는 일체의 오염이 없이 번뇌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며,
파(跛) 자는 모든 차별을 떠난 최상의 진리를 의미한다.
또한 자(者) 자는 미묘하게 변화하는 세상의 현상을,
나(挪) 자는 절대적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5자 다라니를 외우는 방법
첫째는 명상을 하면서 글자를 새겨보는 방법이며,
둘째는 요령을 흔들 듯이 큰소리로 읽는 것,
셋째는 이과 입술을 다문 채 혀만 약간씩 떨면서 외우는 방법이다.
넷째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성낸 표정으로 큰소리를 내어 외우는 것이다.
이 5자 다라니는 아침과 점심, 저녁, 그리고 한밤 중에 외워야 한다.
그 결과로 속히 지혜를 얻고 번뇌는 사라진다.
○5자 다라니의 염송법
먼저 다라니를 염송하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제단을
건립하고 향과 진흙을 섞어서 바른 다음 문수 보살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제단의 주변을 네 번 돈다.

○5자 다라니의 효험
이러한 다라니를 한 번 외우기만 해도 모든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으며,
두 번 외우면 모든 죄가 소멸한다.
세 번 외우면 수행에 들어서서 즉시 효과가 나타나고,
네 번 외우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는 기억력을 얻는다.
다섯 번 외우면 가장 높은 불도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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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여자출정(女子出定) < 철학자 강신주의 무문관과 ... - 법보신문

옛날 문수(文殊) 보살이 여러 부처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여러 부처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한 명의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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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eopbo.com

Date Published: 10/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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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 – 나무위키

과거 한반도에서 문수신앙이 인기 있던 시절에는 오대산도 문수신앙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굉장히 위상이 큰 보살인데도 불구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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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5/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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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 당당한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사찰에 가면 사자 등을 타고 있는 동자의 형상이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문수보살이다. 오래 전 문수보살을 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렸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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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yunbulnews.com

Date Published: 5/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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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문수보살(文殊菩薩, 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Mañjuśrī, 만주슈리)은 ‘훌륭한 복덕(福德)을 가진’ 혹은 ‘완전한 지혜를 가진’ 불교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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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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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문관: 여자출정(女子出定) – 불교닷컴

… 양성평등과 관계된 ‘여자출정(女子出定)'( 제42칙) 공안을 제창하고자 합니다. 본칙(本則): 석가세존께서 전법하시던 어느 때 문수(文殊) 보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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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ulkyo21.com

Date Published: 6/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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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제42칙/여자출정(女子出定) – 네이버 블로그

문수(文殊, Man͠juśrī)가 불교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유명하다면, 보현(普賢, Samantabhadra)은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문수와 보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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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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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과 보현보살 – 밴쿠버 조선일보

‘문수'(文殊, Manju?ri)는 ‘감미롭고 훌륭한 복덕을 지닌 이’라는 뜻이다. 만물의 ‘빔'(空)과 ‘둘이 아님'(不二) 등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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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vanchosun.com

Date Published: 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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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 보살님은 여성인가요? | 신흥사

나투기 때문입니다. 다만 처음 보살도를 닦겠다고 서원을 세웠을 때 성별을. 말한다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남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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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inheungsa.com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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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오자진언 - 홍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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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문수보살 여자

  • Author: 홍산스님ho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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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g6ohPnrXR4

35. 여자출정(女子出定)

깨달음 읊조리는 것과

실제 깨닫는 것 사이

엄청난 간극이 존재

석가모니 부처님 옆서

당당히 선정에 든 여인

임제의 수처작주 체득

옛날 문수(文殊) 보살이 여러 부처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여러 부처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한 명의 여인만이 석가모니 자리 가까이에서 삼매(三昧)에 들어 있었다. 그러자 문수는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세존은 문수에게 말했다. “이 여자를 깨워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 네가 직접 물어보도록 하라!” 문수는 여인의 주변을 세 번 돌고서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기고는 여인을 범천(梵天)에게 맡겨 그의 신통력을 다하여 깨우려고 했으니 깨우지 못했다. 그러자 세존은 말했다. “설령 수백 수천의 문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여자를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래로 내려가 12억이라고 하는 갠지스강 모래알의 수처럼 많은 국토들 지나면, 이 여자를 삼매에서 꺼낼 수 있는 망명(罔明) 보살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망명 대사가 땅에서 솟아 나와 세존에게 예배를 하였다. 세존은 망명에게 여인을 삼매로부터 꺼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망명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기자, 여인은 바로 삼매의 경지에서 빠져 나왔다.

무문관(無門關) 42칙 / 여자출정(女子出定)

▲그림=김승연 화백

1. 문수는 지혜, 보현은 실천을 상징

서울을 북쪽으로 에워싸고 있는 북한산은 700~800미터 급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거느린 장대한 산입니다. 도처에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아찔한 암릉들이 도처에 숨어 있어서 해발고도보다는 훨씬 더 고산의 풍모를 자랑하는 산이지요. 아마 서울과 같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곁에 이만한 수준의 산이 있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산이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그리고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오악(五嶽)에 당당히 속하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과거에 북한산은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렸습니다. 북한산 동쪽 방향에 주봉인 백운대(白雲臺, 836.5m)가 있습니다. 이 백운대를 포함해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봉우리, 그러니까 인수봉(仁壽峰, 810.5m)과 만경대(萬鏡臺, 787.0m)가 이루는 형세가 세 뿔처럼 보였기에 삼각산이라고 불렸던 거지요.

북한산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은 대부분 백운대를 중심으로 산행을 진행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걸로 북한산을 경험했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와 쌍벽을 이루는 봉우리 군이 북한산에는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북한산 서쪽에는 문수봉(文殊峰, 716m)과 보현봉(普賢峰, 700m)을 정점으로 하는 웅장한 봉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망경대로 이루어지는 동쪽 봉우리 군과 문수봉과 보현봉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봉우리 군으로 양분된다고 봅니다. 북한산의 서쪽 봉우리 군의 정점인 문수봉과 보현봉을 제대로 보려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나 인왕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동쪽 북한산에 있는 봉우리의 이름들이 유교(儒敎)나 도교(道敎)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들과 관련이 있다면, 서쪽 북한산 봉우리의 이름은 불교(佛敎)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란 말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문수(文殊, Man͠juśrī)가 불교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유명하다면, 보현(普賢, Samantabhadra)는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문수와 보현은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중요한 보살들입니다. 소승불교가 아라한(阿羅漢, arhat)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을 강조합니다. 아라한이나 보살은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아라한과 달리 보살은 중생을 미혹에서 인도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2. 보살은 대승의 인격적 이상이다

아라한이 스스로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리(自利)에만 치중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에도 힘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불교 학자들은 아라한이 소승불교의 이상적 인격이었다면, 보살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이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이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나요. 문수보살의 이타행이 지적인 가르침에 중심이 있었다면, 보현보살의 이타행은 묵묵한 실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석가모니에게서 직접 배웠던 아난(阿難, Ānanda)과 비슷하다면, 보현보살은 가섭(迦葉, Kāśyapa)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난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적인 제자였다면, 가섭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릴 정도로 실천적인 제자였으니까 말입니다.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지적으로만 모색했던 교종(敎宗)을 비판하는 전통입니다. 말로 깨달음을 읊조리는 것과 실제로 깨닫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무문관(無門關)’에 등장하는 48가지 화두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난이나 문수보살이 폄하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의 마흔두 번째 관문에서 그렇게도 현명하다는 문수가 제대로 선정(禪定)에 든 여인네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하는 촌극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실 마흔두 번째 관문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는 이미 ‘대지도론(大智度論, Mahāprajnāp͠āramiātśāstra)’에도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종 이전의 경전에 등장한 것을 선사(禪師)들이 하나의 화두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이 문수보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이해의 상징이었던 문수보살이 제대로 선정에 드는 여자만도 못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선사들이 놓칠 리 있었겠습니까. 선종의 정신은 지적인 이해와 논리적인 담론보다는 치열한 자기 수행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마흔두 번째 관문을 가로막고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를 통과해보도록 하지요. 수많은 부처들이 석가모니의 처소에 모여들었나 봅니다. 이미 스스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임하던 문수보살도 회동에 참여합니다. 회동이 끝난 뒤 여러 부처들은 모두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만이 참선을 하다 삼매의 경지에 들어 석가모니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삼매(三昧, samādhi)는 참선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잡념과 상념이 없기에, 삼매는 당연히 무아의 경지를 스스로 체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순간 여인은 부처가 된 것이나 진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부처들이 다 떠나갔는데도 삼매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또 석가모니 옆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선정에 들었다는 것도 이 여인이 이미 자신의 삶에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분별적 지성 극복이 불립문자 정신

그렇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도 의식하지 않는 진정한 주인의 경지,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경지, 그러니까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처소에 들린 문수의 눈은 그저 여인은 보잘 것 없는 여인네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문수는 투덜거립니다. 지혜롭다고 자임하는 자신은 한 번도 그렇게 가까이 석가모니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볼멘소리로 문수는 불평을 토로했던 겁니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문수의 어리석은 투정에 웃음이 나지 않으시나요. 사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석가모니 근처에 앉고 싶었던 것은 문수 자신이니까요. 반면 여인은 석가모니 근처에 있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삼매에 들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수가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터인데, 문수에게 석가모니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문수의 투덜거림은 자신이 그 여인보다 경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누설하고 있었던 겁니다. 문수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미 그녀는 문수가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석가모니는 문수에게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이게 됩니다. 문수보다 지위가 한 참이나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망명(罔明) 보살을 불러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불요집경’에는 망명이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망명은 선사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보살인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흔두 번째 관문의 묘미가 있는 겁니다.

문수라는 한자를 보세요. ‘무늬[文]가 뛰어나다[殊]’는 뜻, 그러니까 세계를 분별하는 지성이 발달했다는 뜻으로 교종의 이론적 경향을 상징합니다. 반면 망명이란 글자는 ‘밝음[明]이 없다[罔]’는 뜻으로, 분별적 지성을 극복했다는 선종의 불립문자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마흔두 번째 관문의 화두를 만든 선사는 매우 영민했던 것 같습니다. 문수와 망명이란 글자를 통해 선종이 추구하는 정신을 멋지게 형상화했으니까 말입니다. 문수와 망명으로 상징되는 대립은 사실 전체 화두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문수가 의지했던 범천(梵天, Brahmadeva),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믿어졌던 범천은 ‘맑은 하늘’, 그러니까 모든 것에 통용되는 투명한 지성을 상징했던 겁니다.

▲강신주

반면 망명이 살고 있던 ‘거친 땅’은 삶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 삶의 세계에는 번뇌와 망상에 빠진 중생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망명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삼매에 들어 ‘자리(自利)’의 경지에 오른 여인보다 한 단계 수준이 더 높았던 셈이지요. 망명은 이타(利他)를 실천하는 진정한 보살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강신주 [email protected]

솔직 당당한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사찰에 가면 사자 등을 타고 있는 동자의 형상이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문수보살이다. 오래 전 문수보살을 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렸으며,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다 철학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을 읽고서 나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낙타와 사자, 어린 아이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먼저 낙타는 기존의 관념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인간이 낙타 등에 짐을 실으면 순순히 길을 가는 상황에 빗댄 것이다. 반면 사자는 낙타처럼 ‘너는 해야 한다(You should).’는 정신이 아니라 ‘나는 하고자 한다(I will).’는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사자보다 위대한 정신은 놀랍게도 어린 아이다. 니체는 어린 아이가 약해보이지만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I am)에서 ‘신’으로 상징되는 낡은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힘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니체가 가장 높이 평가한 어린 아이가 사자 등에 타고서 해맑게 웃고 있다. 어른이라면 사자가 무서워서 도망갈 텐데, 문수동자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솔직함과 당당함이다. 어린 아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른처럼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하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을 동자로 표현한 이유와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고 싶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문수시리(文殊尸利)를 줄인 말이다. 범어로는 만주슈리(Manjushri)인데, 만주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문수는 지혜가 훌륭하고 복덕을 지닌 보살이라는 의미다. 사찰 대웅전에서는 석가모니불 좌측에, 대적광전에서는 비로자나불 좌측에 모셔져 있다. 문수신앙이 강한 도량에는 문수전이 따로 있기도 하다.

지혜의 상징답게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경전은 <화엄경>이다.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는 문수보살이 동북방의 청량산(淸凉山)에서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청량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알려진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오대산(五臺山)이다. 신라 때 화엄종 승려들이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면 제일 먼저 참배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대산은 보현보살의 상주처인 아미산(峨眉山),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낙가산과 함께 중국의 3대 영산으로 꼽히고 있다.

문수신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다. 그는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를 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한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강원도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하여 이곳을 문수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곳 오대산에 오만의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신앙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곧 이 땅이 지혜의 터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문수신앙은 관음이나 미타신앙에 비해 그리 유행하지 않았다. 지혜를 중시하는 불교와 잘 어울리는 신앙인데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관음이나 미타신앙에 비해 기복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 불교가 그만큼 기복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문수신앙이 성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붓다나 훌륭한 승려들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 그분들이 앉는 좌석을 사자좌(獅子座)라고 한다. 사자루, 사자암과 같은 전각이나 암자도 많다. 모두 지혜를 상징하고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색은 푸른색이다. 문수보살이 청색 옷을 입고 푸른빛을 띠는 사자 위에 타고서 한 편의 멋진 시를 전해준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지혜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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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

9세기 팔라 왕조의 문수보살상 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만주슈리 중국어 중국어: 文殊 , 병음: Wénshū 한국어 문수보살 몽골어 ᠵᠦᠭᠡᠯ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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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文殊菩薩, 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Mañjuśrī, 만주슈리)은 ‘훌륭한 복덕(福德)을 가진’ 혹은 ‘완전한 지혜를 가진’ 불교 보살이다. 과거 일곱 부처님의 스승이다. 석가모니불보다 훨씬 빨리 성불한 고불(古佛)이다.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라 불릴 것이다.

어원 [ 편집 ]

특징 [ 편집 ]

오래전에 이미 깨달음을 얻어 성불을 했지만 이 대중이 모두 성불을 할 때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다며 부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미래에 가능할 지 모르지만 부처가 되어 보견여래가 될 것이다. 지혜를 완전히 갖춘 보살로서 석가모니불의 지덕과 체덕을 맡아서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나타난 보살이다. 여러 형태 중 사자, 공작을 타는 것은 그의 지혜가 용맹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일체중생의 번뇌를 끊는다는 뜻이고, 왼손에 청련화를 쥐고 있는 형상은 일체 여래의 지혜와 무상(無相)의 지덕(智德)을 맡아서 제법에 물들지 아니하여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머리에 상투를 맺고 있는 것은 지혜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상투는 대일여래의 오지(五智)를 표현한 것이다. 다섯 동자로 문수의 분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화현 보살, 석가의 교화를 돕고자 일시 보살의 자리를 보인 보처보살로 현학적이고 이지적인 보살이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살이라고도 믿어진다.

한국 [ 편집 ]

경상도 청량산, 강원도 오대산, 울진의 문수산, 금강산 문수봉 등에 문수신앙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상은 수미산 남쪽의 남섬부주며 오정산은 다섯 봉우리의 산으로 오대산과 같은 뜻으로 여겨 오대산 신앙을 낳았고, 고려 말 공민왕 때 신돈이 문수회를 만들어 문수법회를 여는 등 왕실의 후원을 입어 후대에까지 전승되었다.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부처의 협시불로서 삼존불을 모신 법당에 흔한 보살이나 관음, 미륵, 지장신앙 만큼 독자적으로 민간에서 신앙되지는 못했다. 한국에는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중국을 통해 자장율사가 소개했다.

울산 문수사는 원성왕때 연회국사가 창건했는데, 길을 걷던 연희대사가 문수대성이 현신한 농부를 처음 만난 자리에 문수암을 짓고, 변재천녀가 현신한 처녀를 만난 곳에 보현암을 지었다고 한다. 또다른 설은 선덕여왕때 자장이 창건했는데, 중국을 다녀온 자장율사가 울산을 지나던 중 문수산의 모습이 너무 깨끗하고 성스럽고 중국에 있던 청량산과 닮아서 청량산이라 이름하고 문수암을 세웠다고 한다. 울산 태화동에 자장율사가 태화사지를 만들고, 강 이름을 태화강이라 불렀으며, 또한 울산에는 문수보살이 현신한 승려를 묘사한 <헐수정과 무거동> 전설도 전해진다. 전라북도 고창 청량산 문수사도 자장율사가 선덕왕 13년에 창건했는데, 대웅전 뒤 문수전에 높이 2.25미터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다.[1]

만주 [ 편집 ]

본래 “여진”(여진어[만주어]: 주션)이란 이름을 갖고 있던 여진족은 청태조 아이신기로오 누르하치에 의해 “만주”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만주가 바로 문수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각주 [ 편집 ]

↑ 염중섭 (2011년 3월 30일). “三國遺事 五臺山 관련기록의 내용분석과 의미. 慈藏의 文殊信仰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제101호판. 한국사학회: 91.

신무문관: 여자출정(女子出定)

[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35.

* 성찰배경: 최근 전국적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을 중심으로 양성평등(兩性平等)을 위한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경기도는 양성평등 문화를 두루 확산시키기 위해 올해부터 성인지(性認知) 교육인 ‘젠더 스쿨(gender school)’을 운영한다고 지난 7월 11일 밝혔습니다. 한편 불교계가 지금까지 비록 이웃종교에 비해 비교적 양성평등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에 발맞추어 종교계를 선도하며 더욱 양성평등 문화 진작에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양성평등과 관계된 ‘여자출정(女子出定)’(<무문관> 제42칙) 공안을 제창하고자 합니다.

본칙(本則): 석가세존께서 전법하시던 어느 때 문수(文殊) 보살이 제불(諸佛)이 모인 곳에 이르자, 제불 모두 각각 ‘계시던 곳’[본처(本處)]으로 돌아감을 보았다. 그런데 다만 한 여인(女人)이 있어, 세존 가까운 곳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있다.

문수 곧 세존께 아뢰어 가로되, “어째서 저 여인은 세존 가까이 할 수 있고, 저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세존께서 문수에게 고하기를, “그대가 다만 이 여인을 선정에서 깨워 그대 스스로 그 까닭을 물어보아라.”

문수가 여인의 주위를 3번 돌며 ‘손가락을 한번 튕기고’[명지(鳴指)], 그녀를 범천(梵天)에까지 들어 올려서 온갖 신통력(神通力)을 다 부려보았으나, 그녀를 선정에서 나오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가로되, “비록 백천(百千)의 문수가 와도 이 여인을 선정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땅속으로 일십이억(一十二億)개나 되는 갠지스강변의 모래처럼 무수하게 많은 국토를 지난 곳에 망명(罔明) 보살이 살고 있는데 그가 능히 선정에 들어있는 이 여인을 깨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자 잠깐새[수유須臾] 망명이 땅에서 솟아 나와서 세존께 예배(禮拜)했다. 이때 세존께서 곧 그녀를 선정에서 깨우도록 그에게 명하니, 망명이 그녀의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그녀가 즉시 선정에서 깨어났다.

평창(評唱): 무문 선사 가로되, ‘석가 늙은이’[선종 특유의 석가세존의 극존칭]가 한바탕 연극을 연출했는데 시시한 것들과는 그 격이 달랐네. 자! 말해 보아라. 문수 보살은 칠불(七佛)의 스승인데 어째서 이 여인을 선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했는가?

반면 망명 보살은 지위가 제일 낮은 초짜 보살인데 어떻게 그녀를 선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는가? 만약 이에 대해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끝없는 ‘업식의 삶’[중생의 삶] 그대로, 부처[나가(那伽), 대룡(大龍)이라는 뜻]가 삼매에 든 경지이리라!

송(頌): 게송으로 가로되, 깨울 수 있는 것도 깨울 수 없는 것도, 망명과 문수 각자의 자유이네! 신선(神仙)의 탈과 도깨비의 탈을 쓰고 한바탕 벌린 연극에서, 성공한 망명도 실패[패궐(敗闕)]한 문수도 또한 당연히 멋진 풍류인 것을! [출득출부득出得出不得 거농득자유渠儂得自由. 신두병귀면神頭并鬼面 패궐당풍류敗闕當風流.]

군더더기: 이 공안은 본래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이라는 인도 경전(經典)속에 나오는 비유적인 우화(寓話)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전혀 다른 의도, 즉 수행자들의 안목을 넓히게 하기 위한 공안으로 활용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원전(原典)에 관계없이 수행자로 하여금 분별 작용을 멈추고 의심에 사무치게 하는 공안(公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참고로 촌음(寸陰)을 헛되이 하지 않는 치열한 수행자들의 시간관을 잘 엿볼 수 있는, 경전이나 선어록에 등장하는 시간 간격에 대한 용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찰나(刹那)’는 순간(瞬間)의 음역으로 약 0.013초를 뜻하며, ‘탄지(彈指)’[명지(鳴指)]는 찰나의 열배로 약 0.13초를 뜻하며, ‘순식(瞬息)’은 탄지의 열배로 약 1.3초를 뜻하며, ‘수유(須臾)’는 ‘순식’의 열배로 약 13초를 뜻한다고 합니다.

한편 기존의 상식과는 달리 역전된 상황 설정을 통한 이 공안은 또한 수행자로 하여금 신구불이(新舊不二), 즉 갓 입문한 신참[망명보살]과 오래 수행한 구참[문수보살] 및 여남불이(女男不二), 즉 여자[선정에 든 여인]와 남자[문수보살]에 대한 이원적 분별심까지도 철저히 타파하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양성’이니 ‘평등’이니 하는 분별심조차 일어나지 않는 경지로 나아갈 것을 다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노래’[증도가(證道歌)]

영가현각(永嘉玄覺, 665년-713년) 선사의 저작으로 알려진 <증도가(證道歌)>에서는 더욱 철저히 상황을 역전시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용녀돈성불(龍女頓成佛)’ 설화를 인용하며, ‘만일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용녀(龍女)처럼 비록 여성일지라도 단박에 성불(成佛)할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선성생함추(善星生陷墜)’ 설화를 인용하며, ‘잘못 수행한다면 비록 오랜 출가수행자일지라도 선성(善星) 비구처럼 땅이 갈라지며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노래에는 일불(一佛) 사상을 제창했던 소승불교 시대를 지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다불(多佛) 사상으로 바뀐 대승불교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아직 여성으로 태어난 경우 다음 생(生)에서 남성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는 ‘변성성불론(變性成佛論)’이 만연하던 당시의 (아니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묵시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넓은 안목을 갖춘 현각 선사께서 이를 혁파(革罷)하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도 즉시 성불할 수 있다는 ‘즉신성불론(卽身成佛論)’을 노래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비과학적인 남녀차별 관행

이번에는 과학 전공자로서 남녀차별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주제는 매학기 전공을 불문하고 제 강의 시간에 한 번은 꼭 언급하는 주제인 동시에 시대적 흐름에 따라 틈날 때마다 기고를 통해 다루어 오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불제자들은 대개 불교가 매우 과학적인 종교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해오고 있으나 냉철히 살펴보면 비과학적(비합리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내재해 있습니다.

따라서 첨단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불제자들은 이제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 비과학적으로 맹신하고 있는 점들을 하나하나 개선해 가야 할 때라 생각됩니다.

특히 시급히 고쳐야 할 관습 가운데 이번 글과 관계된 여성차별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성이 구별되어 있는 생물체는 원래의 체세포가 가진 염색체 수의 절반을 갖는 생식세포를 만듭니다.

이들이 세포융합 과정을 거쳐 반감되었던 염색체 수는 새로 만들어진 세포 속에서 원래대로 돌아가고 이 수정된 세포가 분열하여 새로운 생명이 탄생됩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남성과 여성은 부모가 되어 출산을 할 경우, 자녀에게 똑같이 유전 형질을 평등하게 반반씩 물려주며, 자녀는 다만 XY 염색체의 조합에 따라 딸과 아들로 나누어지는 것일 뿐 결코 여기에 우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뛰어난 과학자 중에는 여성이 그토록 희귀한가?’ 서구 문화권에서 행해진 일련의 조사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의 불균형은 생물학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요인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해 왔습니다.

특히 보부아르 부인은 ‘여성은 여성으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역설했습니다. 1970년대 미국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여러 여성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과학과 젠더(gender: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사회적·시대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을 의미하는 개념)’에 관한 연구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과학 정책의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그 결실로 지난 1999년 7월 브뤼셀에서 유럽연합국가의 대표들은 ‘과학에서의 남녀평등 문제를 긴급하고 중요한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선언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의 경우, 정책적으로 여성 과학자에 대한 동등한 기회 보장을 위해 종일반 학교, 전일제 탁아소 등 가정과 직업을 양립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가장 잘 마련해 놓고 있어, 여성 교수 비율도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성차별 근거인 ‘비구니 8경법’

한편 불교적인 측면에서 여성차별 문제를 살펴보면, 그 발단은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비구니가 비구를 공경해야 할 8가지 계율을 설정한데 있었다고 봅니다.

<사분율(四分律)>에 나오는 비구니팔경법(比丘尼八敬法)은 교단 내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근거로 지금까지 존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첫 번째 조항은 ‘비록 백세 비구니일지라도 처음으로 수계한 어린 비구를 보거든 마땅히 일어나서 친절히 맞이할 것이니 이를 형수(形壽)가 다하도록 어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로는 세존께서 비구니 승단의 인정 과정에서 이미 20여년 동안에 걸쳐 틀을 갖춘 비구 승단으로부터 수행에 관한 노하우를 철저히 전수 받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여성차별을 전제로 하신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이제 이런 비과학적인 조항들을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지혜로운 법사(法師)들께서 앞장서서 완전히 폐지하거나 또는 다음과 같이 바꾸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남녀를 불문하고 백세 수행자가 배울 것이 있다면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어릴지라도 법사께 마땅히 스승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해야할 것이며 이를 형수(形壽)가 다하도록 어기지 말라.’

또한 계율이나 규범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출가의 경우 비구계는 250계이나 비구니계는 348계인 것도 피상적으로만 보면 여성을 차별한 것처럼 보이나, 원래 계율은 승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수범제계(隨犯制戒: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직은 의지가 굳세지 못한 다수의 수행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비구니 승단의 형성 과정에서 여성 수행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더 추가된 것이라 판단됩니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시대도 바뀌고 문화적 배경도 인도와 다른 한국적 현실에서 비과학적이고 불필요한 계율이나 규범들[불문율(不文律) 포함]은 적극적으로 폐기되거나 개정되어야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과학계에서 강구하고 있는 재능 있는 여성과학자 지원육성 정책처럼, 불교계도 가부장적인 남성 법사와 종속적인 여성 법사 관계를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 아니라, 무한 경쟁 속에 내몰리며 첨단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이끌어 줄,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성차별이나 노소의 분별없이 스승으로서의 역량을 갖춘 법사들을 다수 배출하고 이 분들을 적극 활용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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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제42칙/여자출정(女子出定)

무문관 제42칙/여자출정(女子出定)

옛날 문수(文殊) 보살이 여러 부처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여러 부처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한 명의 여인만이 석가모니 자리 가까이에서 삼매(三昧)에 들어 있었다.

그러자 문수는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세존은 문수에게 말했다.

“이 여자를 깨워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 네가 직접 물어보도록 하라!”

문수는 여인의 주변을 세 번 돌고서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기고는 여인을 범천(梵天)에게 맡겨 그의 신통력을 다하여 깨우려고 했으니 깨우지 못했다.

그러자 세존은 말했다.

“설령 수백 수천의 문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여자를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래로 내려가 12억이라고 하는 갠지스강 모래알의 수처럼 많은 국토들 지나면, 이 여자를 삼매에서 꺼낼 수 있는 망명(罔明) 보살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망명 대사가 땅에서 솟아 나와 세존에게 예배를 하였다. 세존은 망명에게 여인을 삼매로부터 꺼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망명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기자, 여인은 바로 삼매의 경지에서 빠져 나왔다.

문수(文殊, Man͠juśrī)가 불교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유명하다면, 보현(普賢, Samantabhadra)은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문수와 보현은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중요한 보살들입니다.

소승불교가 아라한(阿羅漢, arhat)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을 강조합니다.

아라한이나 보살은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아라한과 달리 보살은 중생을 미혹에서 인도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소승불교가 아라한(阿羅漢)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菩薩)을 강조합니다.

아라한이 스스로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리(自利)에만 치중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에도 힘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불교 학자들은 아라한이 소승불교의 이상적 인격이었다면, 보살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이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사실 ‘소승(小乘)이라는 말 자체가 자기만 탈 수 있는 ‘작은 수레’를 뜻한다면, ‘대승(大乘)’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너끈히 탈 수 있는 ‘큰 수레’를 의미합니다.

이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나요. 문수보살의 이타행이 지적인 가르침에 중심이 있었다면, 보현보살의 이타행은 묵묵한 실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석가모니에게서 직접 배웠던 아난(阿難, Ānanda)과 비슷하다면, 보현보살은 가섭(迦葉, Kāśyapa)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난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적인 제자였다면, 가섭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릴 정도로 실천적인 제자였으니까 말입니다.

아난은 제자들 중 석가모니의 말을 가장 많이 기악해서 ‘다문제일’로 불렸던 것이고, 가섭은 석가모니의 말을 가장 잘 실천했기에 ‘두타제일’이라고 불렸던 거지요.

마흔두 번째 관문을 가로막고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를 통과해보도록 하지요.

수많은 부처들이 석가모니의 처소에 모여들었나 봅니다. 이미 스스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임하던 문수보살도 회동에 참여합니다.

회동이 끝난 뒤 여러 부처들은 모두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만이 참선을 하다 삼매의 경지에 들어 석가모니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삼매(三昧, samādhi)는 참선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잡념과 상념이 없기에, 삼매는 당연히 무아의 경지를 스스로 체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순간 여인은 부처가 된 것이나 진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부처들이 다 떠나갔는데도 삼매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또 석가모니 옆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선정에 들었다는 것도 이 여인이 이미 자신의 삶에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도 의식하지 않는 진정한 주인의 경지,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경지, 그러니까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처소에 들린 문수의 눈은 그저 여인은 보잘 것 없는 여인네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문수는 투덜거립니다. 지혜롭다고 자임하는 자신은 한 번도 그렇게 가까이 석가모니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볼멘소리로 문수는 불평을 토로했던 겁니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문수의 어리석은 투정에 웃음이 나지 않으시나요. 사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석가모니 근처에 앉고 싶었던 것은 문수 자신이니까요.

반면 여인은 석가모니 근처에 있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삼매에 들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수가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터인데, 문수에게 석가모니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문수의 투덜거림은 자신이 그 여인보다 경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누설하고 있었던 겁니다.

문수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미 그녀는 문수가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석가모니는 문수에게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이게 됩니다.

문수보다 지위가 한 참이나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망명(罔明) 보살을 불러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불요집경’에는 망명이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망명은 선사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보살인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흔두 번째 관문의 묘미가 있는 겁니다.

문수라는 한자를 보세요. ‘무늬(文)가 뛰어나다(殊)’는 뜻, 그러니까 세계를 분별하는 지성이 발달했다는 뜻으로 교종의 이론적 경향을 상징합니다.

반면 망명이란 글자는 ‘밝음(明)이 없다(罔)’는 뜻으로, 분별적 지성을 극복했다는 선종의 불립문자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마흔두 번째 관문의 화두를 만든 선사는 매우 영민했던 것 같습니다. 문수와 망명이란 글자를 통해 선종이 추구하는 정신을 멋지게 형상화했으니까 말입니다.

문수와 망명으로 상징되는 대립은 사실 전체 화두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문수가 의지했던 범천(梵天, Brahmadeva),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믿어졌던 범천은 ‘맑은 하늘’, 그러니까 모든 것에 통용되는 투명한 지성을 상징했던 겁니다.

반면 망명이 살고 있던 ‘거친 땅’은 삶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 삶의 세계에는 번뇌와 망상에 빠진 중생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망명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삼매에 들어 ‘자리(自利)’의 경지에 오른 여인보다 한 단계 수준이 더 높았던 셈이지요. 망명은 이타(利他)를 실천하는 진정한 보살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자유 게시판 > 보살님은 여성인가요?

대웅전에 가면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계시고 양옆으로

지장보살님이나 관세음보살님 등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여자신도를 보살님이라고 부르던데

그러면 보살님은 여성인가요?

“성별 없이 남녀로 현신하며 중생구제”

보살님은 성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윤회를 하면서 갖가지 모습으로 몸을 현신하여

중생을 구제함으로 때로는 여자로 때로는 남자의 몸으로

나투기 때문입니다.

다만 처음 보살도를 닦겠다고 서원을 세웠을 때 성별을

말한다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은 여자였습니다.

보살도를 닦겠다고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일체의 깨달음을

얻고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보살상들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여성스런 모습을 하는 이유는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았고 보살의 대자비심을 인격화한

모습입니다.

더불어 어머니의 사랑(모성애)를 형상화 하였기에 더욱 여성스런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여성은 아닙니다…

불교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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