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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 Daum 블로그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창(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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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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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 – 큐틴(Q-Teen)

무지개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 2021년 01월 임준섭 목사 (사랑의교회, 분자생물학 이학 박사). 비가 내린 후, 맑게 개인 하늘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가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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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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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표다 – 아이굿뉴스

‘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후손과 모든 생물들 사이에 약속을 하시고, 노아의 후손 대대로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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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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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지개를 주셨는가? – 두란노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후에 노아와 계약(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계약을 맺으시면서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들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무지개를 두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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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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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약속밖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무지개 언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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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언약, 누가 기억하는가 – 뉴스앤조이

먼저 하나님이 무지개를 거론하시면서 ‘내 언약을 세운다’는 말씀이 … 그 다음에는 그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두 번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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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상징] 무지개의 약속 – 평강제일교회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평화롭게 자기의 활(무지개)을 구름 속에 걸어 두셨는데, 무지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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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무지개 하나님 의 약속

  • Author: KI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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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9.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0DUssIuE5w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창(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 이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비록 세상은 멸망했지만 너는 나와 함께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자’는 격려과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7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복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받았던 복은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 받은 복은 똑같은 복임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이요, 불완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생존보전의 복을 주셨습니다.

또 지금까지는 채소만 먹었는데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죄를 짓기 전과는 달리 죄를 지은 후, 세상에는 서로 죽이고 속고 속이는 심각한 상황이 생겨났습니다. 모두가 적(賊)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서로 살인하지 못하도록 ‘보호장치’를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계약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복을 주시며 계약을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약속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지 않고 일을 이루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구약’, ‘신약’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구약에서의 모든 약속은 신약에서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은 이제 곧 머지 않아, 역사의 마지막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없이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일방적인 계약

8~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계약’은 서로 쌍방간에 만족하여 서명을 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한일합방과 같이 폭력이나 무력으로 맺은 일방적인 계약은 그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에서 일방적이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면 그 계약은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계약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자와의 계약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사랑이요, 복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와 계약을 하고 키우지는 않습니다. 부모는 조건없이 일방적인 사랑을 베풉니다.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계약에는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방적인 계약은 복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고 사랑과 은혜와 복된 계약을 일방적으로 하십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사랑한다’고 합니다.

‘네가 나에게 혜택을 주기 때문에 나도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이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없어도,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어도,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없어도,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를 일방적으로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계약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찬양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2천년 전에 그분이 나를 위해 먼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니, 창세 전에 그분은 나를 택하시고,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내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복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은혜와 복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너희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이며, 이제 육식을 허락할 것이며, 동물들이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서로 죽이고 살인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겠다. 그리고 난 너와 새로운 특별한 계약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이 계약은 네가 요청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 때문에, 나의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는 복의 계약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격려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에 부합된 성경말씀이 로마서 5장 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몰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건없이 노아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보호해 주시고, 그를 지켜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노아를 안심시키는 하나님

그렇다면 노아와 하나님께서 맺은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왜 이 말이 이렇게 중요할까요? 이 말에 어떤 의미가 있기에 노아와 계약을 해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노아의 입장으로 돌아가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주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첫번째로 목격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겠습니까? 폐허입니다. 집, 논, 밭,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처참하고 상상할 수 없는 폐허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와 그 가족들이 그러한 현실을 보고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집을 짓겠다든지, 농사를 짓겠다든지 하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갖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좌절과 절망 뿐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폐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노아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복을 주시면서

‘너는 다시 할 수 있다.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동물들이 너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육식을 허락하겠다. 그리고 살인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노아의 두려움을 하나님께서 없애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는 일, 잠자는 일, 옷을 입는 일, 직업을 갖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암에 걸려 보십시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을 때,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자라지 않고 제멋대로 자랐을 때 부모가 갖는 두려움, 남편에 대한 공포감, 아내에 대한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두려움입니다. 미래는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와 좌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돈이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노아가 가졌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파괴된 현실을 보면서, 세상을 보면서 그가 가졌던 감정은 두려움과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노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상담학자요, 심리학자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심정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네가 나를 신뢰하고 나를 바라보면 이 모든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다 사라질거야. 그리고 새로 시작해. 나를 의지하고, 나를 바라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라.’ 그것이 11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안심입니다. 구원의 복은 죽음과 미래에 대해 안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안심하고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권은 ‘안심’입니다. 이것이 노아에게 필요했습니다. 두려움, 공포, 절망, 좌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함께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사후 세계에 대한 평안함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이것을 줍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안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고, 실패하고, 건강하고, 병드는 것 때문에 감정이 얼마나 요동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두려움을 치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노아는 이 말씀을 듣고 미래에 대한 꿈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성경 도처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늘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쫓기는 것같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계속해서 용기와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이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 1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 성경말씀들이 님에게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당신의 두려움이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두려움, 인간관계의 두려움, 부부관계의 두려움, 직장에 대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몰아 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 속한 단어가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18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불안, 근심, 좌절 같은 것들은 마귀가 몰래 우리의 영혼에 심어놓은 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 안에 가득했던 안개와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 가득한 평안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사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선택하는 것은 전부 실수투성이입니다. 공포와 쫓김, 당황함, 안절부절한 가운데서 무언가를 선택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런 두려움과 불안으로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뉴스들을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 잡혀서 그러한 결과로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단의 결과는 항상 비극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두려움은 예수님이 완전히 해결해 주셨음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노아에게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4~7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다시 시작하십시오.

오늘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어제까지의 좌절과 두려움에 미련을 갖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여러분에게 전개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언약의 증거’

세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물로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가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개’입니다. 무지개가 이때 생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증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무지개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3절에 ‘언약의 증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증거’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무지개가 내 언약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과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면서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그런데‘왜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계속하실까?’ 마치 노아가 어린아이, 혹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한번만 말해도 다 알 것 같은데 자꾸만 반복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언약의 증거’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보면서 구원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약속을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가 이미 마음에 와 있습니다. 이미 내 마음 안에 2천년대에 일어날 일들이 와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무지개를 볼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월절은 그들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위기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유월절떡을 먹었습니다. 절기를 지키면서 그날 밤 죽음이 지나가고, 홍해가 갈라지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던 이 놀라운 영적 감격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 여러분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기를 축원합니다. 노아시대에는 언약의 증거가 ‘무지개’였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구약의 무지개가 노아와 가족들에게 평안을 주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던 사건이 마귀를 쫓아내며, 음부의 세력을 몰아내며, 병을 물리치며,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내게서 다 떠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증거는, 바로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약속을 기억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요한일서 5장 5~8절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렇습니다. 구약에는 무지개가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이후에는 십자가가 증거입니다. 성령이 증거입니다. 말씀이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증인이 되시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모든 분들이 체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은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천국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이어서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라는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이 무지개가 무엇인지 알고 무지개와 관련된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성경에 나온 무지개와 관련한 이야기를 어떤 이들은 믿고, 어떤 이들은 전설로 간주하며,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믿지 않는다. 어쨌든 무지개와 관련해 전후로 발생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행했던 일이자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 일들은 있는 그대로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기록 속에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들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기 전후의 생각이 말씀의 행간에 드러나 있다. 말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통해 당시 하나님의 생각이 모두 생생하게 표현된 듯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류가 가장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사람의 생명 진입에 있어서 절대 없어선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들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는, 하나님이 보기에 매우 좋고,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한 인류였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후 홍수로 멸망했다. 이런 한 인류가 순식간에 소멸되었을 때 하나님은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 당연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어디서 나타났느냐? 성경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느냐? 성경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간단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그는 그때 세상을 멸한 것이 무척 마음 아팠던 것이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참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뒤 원래 생기로 충만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인류로 가득했던 땅이 어떻게 변해 버렸을까?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생물도 없이 도처에 물만 있는데, 물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런 광경이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본의였을까? 분명 아니다! 하나님의 본의는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그가 창조한 인류가 그를 경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노아 한 사람만이 그를 경배하고 그의 부름을 받아 그가 준 사명을 완수하는 것, 이건 적어도 하나님의 본의가 아니었다. 인류가 사라지자 하나님이 보게 된 것은 그가 애초에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 정반대의 광경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품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어떤 결정이었을까? 구름 속의 무지개[주: 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홍수로 세상을 멸했었던 적이 있다고 알려 주며,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했는지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그렇게 세상을 멸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했을까? 분명 하나님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을 멸한 뒤 땅의 참상을 조금은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장면이 어땠을지, 우리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이나 당시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즉 홍수로 멸망한 뒤의 세상을 봤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인류의 패역으로 인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했지만 그때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운 언약, 즉 맹세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한 적이 있음을 사람에게 기억하라고 알려 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이다. 그 ‘언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멸했을 때 마음이 아팠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고 인류가 사라진 상황을 봤을 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인류가 사람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들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언어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이런 언어로 하나님의 심정과 느낌을 묘사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리 잘못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것 같다. 최소한 당시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너희가 아주 생생하고 적절하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가 다시 무지개를 보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최소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함으로 인해 느꼈던 아픔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증오했지만 자신이 친히 창조한 인류를 멸할 때 하나님은 마음이 아팠음을, 차마 버릴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었음을, 견디기 힘들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노아의 여덟 식구였다. 노아의 협력으로 그가 만유를 창조할 때 기울인 심혈이 그나마 헛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상심한 와중에 유일하게 그의 상처를 메워 준 일이었다. 그런 뒤로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노아 가족에게 걸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그들이 다시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광경을 보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멸망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성품의 어떤 부분을 알아야 할까? 하나님이 인류를 증오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근심과 긍휼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를 멸했지만 그의 이 마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인류가 심히 패괴되어 하나님을 극도로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본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원칙대로 인류를 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로 인해 여전히 인류를 불쌍히 여긴다. 심지어 인류가 계속 생존해 가게 하려고 각종 방식으로 인류를 되돌리려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부르고 깨우쳐 주고 공급하고 도움을 주고 관용을 베풀어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히 여기지 않으며 등을 돌려 버린다. 하나님은 상심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람에게 최대한도의 관용을 베풀면서 사람이 돌이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그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겠다고 계획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멸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기한이 있고 과정이 있었다. 이 과정은 인류가 돌이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최후의 기회였다. 그러니 인류를 멸하기 전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했을까? 하나님은 대대적으로 깨우쳐 주고 권면하는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아무리 상심하고 괴로워도 인류를 끊임없이 염려하고 보살피고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우리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함을 분명히 보았다.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이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짓이나 가식, 기만, 불순물이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지금껏 그 어떤 거짓된 수단이나 허상으로 인류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인 적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껏 거짓 증거로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보여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거룩함을 과시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측면들의 성품은 사람이 사랑할 만하지 않느냐? 사람이 경배할 만하지 않느냐? 사람이 귀하게 여길 만하지 않느냐? 여기까지 말을 했는데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이런 말을 듣고 난 후에도 너희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속 빈 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이 빈말에 불과하느냐?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고지상함, 위대함, 거룩함, 관용, 사랑 등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본질의 면면은 매번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구체화되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구현되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서 구체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구현되었다. 네가 일찍이 그 느낌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세심히 보살피고 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지혜와 다양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영을 일깨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와 사랑스러움과 관련해 나름대로의 경험과 느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경험, 느낌, 혹은 인지 모두 결국 이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종합하고, 거기에 우리가 오늘 언급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을 결합하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더욱 진실하고 더욱 적절한 인식을 갖게 되지 않겠느냐?

……

우리가 오늘 교제한 성경 이야기를 포함해 모든 성경 구절에서 너희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느냐? 하나님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표명한 적이 있느냐? 인류를 얼마나 염려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솔직한 언어로 표현한 기록이 있느냐? 없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 중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나 다른 서적을 읽으면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느냐? 답은 분명하다. 없다! 하나님 말씀 혹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실제 기록을 포함한 성경 기록에 보면, 하나님은 그 어떤 시대나 시기에도 그의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표현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말씀이나 다른 어떤 방식의 행위로도 자신의 마음과 느낌을 서술한 적이 없다. 이는 사실이 아니냐?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일까? 이 속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하나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후, 인류가 패괴된 이후든 인류가 그를 따랐던 때든 상관없이 인류를 자신의 절친한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니까 인류가 말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겼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스스로는 창조주이고 인류는 피조물이라고 한 이 말씀은 계급이 나뉘어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인류를 위해 한 모든 행사는 이런 관계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다. 인류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염려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일까지, 그의 마음은 이런 것들을 가욋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공로가 큰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공급하며 베푼 모든 것이 인류에게 엄청난 공헌을 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으로 조용하고 묵묵히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공급과 도움을 받았든지 그는 사람에게 공을 요구할 생각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한 것이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나 다른 서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래서 사람의 감사와 찬미를 받아 내려고 인류를 향해 하나님 자신이 왜 이렇게 행했고, 왜 이렇게 인류를 보살피는지 설명하거나 표현한 부분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심하거나 극심한 아픔을 느낄 때에도 인류에 대한 책임과 염려를 잊지 않고 그런 ‘상심’과 ‘아픔’을 홀로 묵묵히 감내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이렇게 인류에게 공급한다. 비록 인류가 자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증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잘 대해 준 것을 가지고 사람의 은혜에 대한 감사나 보답을 받으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과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 쪽에서 이 축복은 조금의 아낌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은 흔히 사람의 상상을 넘어서고, 사람이 한 행위와 사람이 들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심정이 어떨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받은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느냐?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 노아를 포함해 인류가 당시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왜 그런 언약을 세웠는지 느낄 수 있느냐? 느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거나 지위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감정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독립적이어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헤아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픔도 희로애락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어떤 감정적인 표현도 필요치 않고, 그 어떤 감정적인 위로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연약하고 어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안과 공급과 격려가 필요하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 감정적인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은 ‘약자’이니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돌봄’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강자’이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의 수호자이자 축복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통력이 굉장해서’ 사람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낸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실을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고, 인도해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이 모든 것과 들인 모든 대가에 대해, 성경이나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요구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끊임없이 인도하고 공급하며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게 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와 어떠함, 은혜와 긍휼과 모든 상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받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인 적은 없다. 또한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고,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님 쪽에서 원망한 적도 없다. 그는 묵묵히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며, 사람이 깨달을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왜 이런 말들을 할까? 이 말들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는 사람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인이나 좋은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나,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하나님’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이다. 사심 없음이라 하면 너는 자신도 매우 사심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네 자녀에 대해 한 번도 대가를 바라거나 셈을 따진 적도 없었고, 부모를 대할 때도 사심 없는 마음으로 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최소한 ‘사심 없음’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개념은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음’은 긍정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무척 훌륭하다고 여긴다. 만일 너 자신이 사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물 속에서나 사람, 일, 사물 속에서나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본 사람은 없다. 무엇 때문일까?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사람은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하나님을 따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너에게 공급하고 사랑을 주고 염려하는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보는 것은 너와 혈연관계에 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를 몹시 아끼는 그 사람이다. 네가 본 것은 너에게 육적으로 유리한 것들이고, 네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물질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심 없음이다. 바로 이렇게 ‘사심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사람의 ‘사심 없음’은 오히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심 없음’은 실제적이지 않은 공허한 것이고 불순물이 들어 있다. 하나님과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 사람의 ‘사심 없음’은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사심 없음’은 하나님의 본질이 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끊임없는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오늘 내가 말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정하는 수준에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느낄 수 있는 사람과 일과 사물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심 없음만이 진정한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직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무조건적이고 흠결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의 소위 사심 없음도 진실이 아닌 거짓되고 표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목적과 속셈이 있고 거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검증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추하고 비열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느냐?

나는 이런 주제들이 너희에게 상당히 낯설다는 것을 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쌓여야 너희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낯선 문제라고 느끼거나 낯선 주제라고 느낄수록 그것이 바로 너희 마음속에 부족한 주제라는 것을 더욱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영원히 이런 주제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너희 중 이런 내용을 알 수 있을 사람이 있을까? 너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너희가 얼마나 깨닫고 얼마나 알 수 있든, 결국 내가 말하는 이 주제들은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고,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무척 중요하다. 지극히 소중한 보물이자 생명이며, 너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말씀들의 인도가 없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서도 모른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전혀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도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며, 하나님이 어떤 일로 상심하고 어떤 일로 기뻐하는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상심할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에게 아예 등을 돌린 인류이고, 그를 따르면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의 어떤 감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류이다. 이러니 그가 마음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에서 하나님은 진실하게 모든 사람을 향해 사역하고 말씀하며, 조금도 아낌없이, 숨김없이 사람과 대면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그에 대해 폐쇄적이다. 자발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없고, 자발적으로 그의 마음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지기(知己)’가 되고 싶다는 사람조차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으며, 그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해를 받을 때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의 마음이 슬프고 아플 때, 그의 토로를 들으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의 희로애락을 나눌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하나님은 고독하고 고독하다! 하나님의 고독은 패괴된 인류가 그와 대립하기 때문만이 아니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려는 사람, 나아가 그를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치겠다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생각을 모르고, 그의 성품과 희로애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아 이야기의 결말인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이례적인’ 방식으로 당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음을 보았다. 이 방식은 무척 특별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을 일단락 짓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 ‘언약을 세운’ 일은 아주 평범한 일이다. 그것은 단지 문자의 형식으로 양측을 구속하는 일로, 일을 행할 때 규정을 어기지 않도록 양측의 이익을 보호하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상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한 출발점과 의미에 입각해서 보면,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각이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다. 만일 네가 이 말을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는다면, 내가 일의 진상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인류는 정말로 영원히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너의 상상 속 언약을 세우던 하나님은 웃고 있었을 수도 있고, 엄숙한 표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이 가장 일반적인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아픔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고독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신뢰하거나 신뢰할 만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아픔을 토로할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간단한 일을 행하여 지난 인류와 작별했고, 과거의 일을 해결했으며,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의 슬픔과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다. 하나님은 그가 토로할 만한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워 사람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무지개가 나타날 때 과거에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음을 상기하게 했고,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은 이토록 마음이 아픈 상황에서도 사람을 잊지 않고 여전히 이렇게 사람을 염려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심 없음이 아닐까? 반면 사람은 고통스러울 때 무엇을 생각할까? 이때가 바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이럴 때 사람은 늘 하나님을 끌어당겨 와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 언제든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곤경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에게 공급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은 안정제나 위로제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마음 아프고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떤 피조물이나 사람이 그와 함께하고 그를 위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선 분명 지나친 바람이다. 사람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감정을 헤아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 줘야 한다고 요구한 적이 없고,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이 약간의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이 모든 일에 기울인 심혈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될 때, 너는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웠지만 왜 그렇게 했고 왜 언약을 맺었는지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즉, 그의 진정한 생각을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그가 직접 창조한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그가 인류를 멸할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느낌을 사람에게 알려 주더라도 사람은 그 ‘신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는 마음이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그의 다음 단계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늘 가장 좋은 부분과 가장 아름다운 것을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 그러면서 자신은 묵묵히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린다. 하나님이 인내하는 것은 그가 냉혹해서도 아니고, 무감각해서도 아니며,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약함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본질이 본래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본질과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자 진정한 창조주인 하나님의 신분이 진실로 체현된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의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렇게 상세하고 감동적으로 설명한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동정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런 뜻이 있느냐? (아뇨, 없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너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은 사람이 빈말이나 글귀, 상상으로 묘사해 낸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 속에서 확실하게 조금씩 나타나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본질은 분명 실제로 존재한다. 이는 그림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며, 사람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사람이 꾸며 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제 너희는 이 사실을 알겠느냐? 너희가 알았다면 내가 오늘 한 이 말들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무지개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표다

(63) 언약의 하나님

어린 시절에 친구와 약속을 할 때는,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서로서로에게 약속하였다. 또는 친구와 땅 따먹기 놀이를 할 때는, 어떤 특별한 모양의 돌이나, 막대기를 세워두면서 여기가 서로서로의 땅의 경계라고 말하였다. 또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 각자 집을 짓고, 집 앞에 자기 집이라는 표시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세워놓기도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인들 또한 학교나 회사나 공공단체나 어떤 모임이나 단체들은 자기 단체를 상징하는 특별한 이름과 로고 또는 앰블럼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방송공사는 KBS, 문화방송은 MBC, 백석대학교는 BU 또는 백석대학교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 그리고 백석대학교는 ‘기독교 대학의 글로벌리더’라고 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표지를 가진다. 이처럼 모든 단체나 학교는 그것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나 마크나 로고를 가진다. 이 로고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이 상징하는 기업, 학교 또는 단체를 생각나게 해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 또한 그 언약을 기억하게 만드는 언약의 표가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2세들에게 열심히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2세들이 그 표를 보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2세들에게 가르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지개와 안식일 그리고 할례이다.

유대인들은 언약의 표로서 가장 먼저 무지개를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에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산을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셨다. 그 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열매를 먹으므로 인하여 행복한 땅,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사람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마침내 온 땅이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심판하여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코로 숨 쉬는 것들 모두를 땅위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 너의 집 식구들은 그 심판에서 건져 줄 것이니, 내가 말하는 모양대로 방주를 만들라.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라. 그 후에 내가 홍수로 모든 땅을 심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모든 식구가 방주에 들어가므로 그 심판을 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1년 동안,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후 방주 안에 있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방주에서 나오라. 그리고 이제 이 땅 위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나는 너와 네 후손과 언약을 세울 것이다. 언약은 이것이니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을 것이며, 땅을 멸망시키는 홍수를 다시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노아에게 복의 말씀을 주신 다음, 하나님은 노아에게 덧 붙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표를 주시겠다는 은혜와 보증의 말씀이다. ‘나는 나의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 그것이 나와 그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후손과 모든 생물들 사이에 약속을 하시고, 노아의 후손 대대로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이는 노아와 일대일로 맺은 언약의 표시가 아니라, 노아의 후손과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표시라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너희가 무지개를 보면, 반드시 알아 할 것이 있다. 너희가 무지개를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분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 그러므로 네가 무지개를 보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다고 너에게 말씀하시는 은혜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신 그분의 책임을 기억하신다는 언약의 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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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셨으니, 굳이 여기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본문 중 몇 군데를 유의하여 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무지개를 거론하시면서 ‘내 언약을 세운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9~10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11절).”

그렇게 언약을 세운다는 말씀이 두 번, 그 다음에 그 언약의 증거를 말씀하신 것이 세 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12절).”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17절).”

그 다음에는 그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두 번 나타납니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14~15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16절).”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리라”고 거듭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측에서만 기억하시겠다고 했지, 그것을 상대방인 노아에게 기억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그런 언약, 약속은 두 당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당연이 언약하시는 하나님이 상대방인 노아에게도 기억하라고 한 번쯤 말씀하실 만도 한데, 기억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1. 무지개 언약, 하나님만 기억하시나

그 대목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행동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경우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볼까요?

예컨대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약속을 한다 합시다. “이번 여름에는 너에게 옷을 한 벌 사 주마.” 그런 경우 아버지는 약속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요? “내가 너에게 옷 한 벌 사 줄 테니, 꼭 알고 있어라! 혹시 내가 그것을 잊더라도 네가 나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 줘라.” 그러면 그 아이는 그것을 잘 기억해 둘 것입니다. 그런 약속은 아들에게 유익한 것이니, 그가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떤 약속의 당사자가 기억하라고, 잊지 말라고 할 때에는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지 말하는 사람 측에서 기억하겠다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기억하겠다’는 말 대신에 상대방에게 ‘이것 꼭 기억해라, 잊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행동 습관과는 다른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는 기억하라는 말의 ㄱ 자도 꺼내지 않습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무지개만 보여 주시며, 당신 자신이 기억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 하나님은 노아에게 언약을 따로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창세기를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는데, 8장과 9장에 등장하는 몇 대목도 그중 하나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0~22).”

그렇게 하나님은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라고 마음에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작정하셨으니, 이제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9장에는 같은 내용의 언약을 노아에게 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작정하셨으니 그런 일은 이 땅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도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오셔서, 친히 다짐하시는 언약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과연 노아에게 그런 언약을 해 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8장까지 읽어 본바, 8장에서 언급된 어떤 내용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그런 약속을 해 주실 필요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오셔서 언약을 해 주시되, 증표로 무지개를 제시하시면서 다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작정을 하셨으면 그것으로 될 것인데, 그것을 노아에게 구두로, 또한 증표까지 제시하시면서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그런 약속의 상대방이 되는 노아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3. 노아를 사람으로 바라보자

과연 노아라는 인물이 이 땅에 실재한 인물인가 아닌가 궁금합니다. 실재한 인물이었다면 실제 행동에서 사람의 모습이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믿음의 인물을 만나면 일단 최고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그것만으로 일상생활에서도 가장 좋은 성격과 품성을 가진 것으로, 행동 또한 전지전능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창6:9)”이었습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다(창 6:22, 7:5)고 기록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히브리서 11:7에서는 노아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으니 홍수가 끝난 뒤 노아가 번제를 드린 후에 다시 믿음의 굳건한 모습으로 살아갔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구태여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고 별도로 노아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다시 그런 일을 확인하시는 것을 보면, 8장과 9장 사이의 어느 시점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8장과 9장 사이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노아에게 발생한 어떤 상황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시 그런 말씀을 하시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어떤 점을 보시고 ‘내가 가서 확실히 해 주어야겠다’고 판단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8장과 9장 사이의 실제 상황에서 노아에게 어떤 사건 –주로 심리적인 변화–이 발생했다고 가정을 해 보는 것입니다. 노아의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셨건만, 그것을 모르는 노아는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다시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는 않을지, 또한 가끔씩 생각나는 홍수가 닥쳤을 때의 그 처참한 광경들, 아비규환의 장면들이 노아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런 추측은 9장 20~21절 노아의 음주 사건(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을 감안한다면,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니리라 봅니다.

그런 고민이 없었다면, 노아는 실재한 인물이 아닐 것이고, 또한 그런 상처를 감안하지 않고 이 본문을 읽는다면, 우리는 노아를 땅 위에 발을 딛지 않고 살아가는 상상 속의 인물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성경을 그저 하나의 판타지 소설로 취급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만 저의 추측일 뿐,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노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성경의 기록에는 노아의 행동이나 발언에서 미루어 짐작할 만한 자료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만 9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4. 본문(창 9:8~17)이 성경에서 빠졌다면

이런 가정을 해 볼까요? 본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빠져 있다면 어떨까요? 애초에 이런 일이 없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전체적인 성경의 흐름을 읽어 가는데 지장이 있을까요?

본문 창세기 9장 8절로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 땅을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심중에 그런 다짐(창 8:21)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이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 주시면서 언약을 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는 창세기 8장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경륜은 노아가 알든지 모르든지 관계없이 그대로 진행이 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 본문은 노아 개인에게 특별히 관련이 있는 구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노아의 어떤 정황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마련한 사건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 노아는 그때 제정신이었을까

지금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노아, 그가 실재한 사람인이라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것이니,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는 시점에서 그의 심리 상태를 알아보는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런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때의 홍수가 노아를 비롯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았으니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홍수에 다 떠내려가 죽었지만 나는, 우리 가족은 며느리까지 모두 살았으니 다행이다’고 생각했을까요? 노아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홍수로 인하여 죽은 사건은 그 노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쇼크, 멘붕! 이었지요. 따라서 노아가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 제정신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일어난 일본의 쓰나미 재해 현장을 사진 또는 영상을 통하여 보았다면, 이해가 빠를 것인데 홍수 후에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빠져 나와 발을 디딘 곳의 형편이 그 곳과 방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내린 곳 어느 한 군데 성한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산자락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발을 딛고 있는 땅조차 제대로 놓인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보이는 나무들도 모두들 넘어지고, 찢겨지고 또 그 나무 사이사이로 짐승들의 시체가 보였을 것입니다. 또 사람들의 시체도 보이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그런 현장이 노아가 실제적으로 겪었을 홍수의 현장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아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살아남았다고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완전한 혼돈 상태였을 것입니다. 자기는 살아남았지만 자기와 이웃한 사람들은 모두 다 홍수에 휩쓸려 내려가 버리고 그들의 집, 땅조차 사라진 마당에 노아의 마음이 결코 편할 리 없습니다. 어떤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난 다음에 사람들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인간에게는 기억이라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무서웠던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두려워서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엄청난 홍수 심판의 진노를 겪고 난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트라우마’가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심리를 살펴본다면 이 세상이 언제 다시 물로 심판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허물어진 땅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트라우마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아무리 노아가 믿음이 좋다 할지라도, 홍수 후 땅의 모습은 참혹했을 것입니다. 그런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노아의 심사가 결코 편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제대로 사람 취급하려면, 쓰나미 이후의 땅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하는 노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노아의 심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노아와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읽는다면 이 본문에서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다시는 이런 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언약이지만 대화를 통하여 노아의 심리를 면밀히 읽고 계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돋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앞으로 혹시라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 하는 염려와 근심걱정을 없이 해 주시는 일. 또 하나는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시는 일.

6.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노아에게는 과거에 겪은 대참사로 인한 트라우마가 한쪽에 있다면 또 한 쪽에는 미래에 또다시 하나님이 그 같은 홍수 멸망을 하지 않을지 하는 염려와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아의 심리를 아시는 하나님은 속으로 다짐하던 일들을 노아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노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 주시면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무지개를 증표 삼아 그 언약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시면서 일부러 노아에게 기억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노아의 트라우마를 염려한 까닭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병원의 환우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쳐서 고생하시는 환우들을 보면 맨 먼저 드는 생각은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질문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셨어요?” 그러면 이차 저차 하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큰 상처를 입으신 분들에게는 상황이 다릅니다.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그런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큰 상처를 입으신 분들에게는 사고를 당할 그 순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을 묻지 않습니다. 조금 시간이 흘러 상처가 웬만큼 아물고 또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또 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부드럽게 이루어진 다음에 그것을 묻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묻기도 전에 그 과정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7. 트라우마, 꿈에까지 쫓아온다

그런 기억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실제적으로 괴롭히는지, 사례 하나가 기억납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환우 중 한 명이 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해서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그렇지, 밤마다 악몽을 꾸면 무섭기도 하고, 또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얼마나 힘든 시간의 연속입니까? 그래서 그 병실에 가서 환자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환우분 말하길, 악몽을 꾸는데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꿈을 꾸다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악몽을 연속극처럼 시리즈로 꾼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면서 그런 악몽을 꾸는 것은 사고를 당한 끝이라, 사고 당할 때의 아찔한 장면들이 자꾸만 생각나고, 또 기가 허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씀을 드리고 잘 때에 마음을 굳게 먹고 주무십시오, 라고 나오려는데, 조금 허전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기도합시다, 하고는 둘이 앉아 하나님에게 그분의 마음을 담대하게 해 주시기를, 또 마음에 평안을 주시라고, 기도를 하고 나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정말 궁금했습니다, 기도의 결과가. 그래서 그 병실에 아침 일찌감치 들러 먼저 그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때보다는 잘 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놓여 내친 김에 부탁하기를 그럼 이제부터 본인이 기도하시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기도하시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역시 맨 먼저 그 방에 들렀습니다. 그분 얼굴이 아주 훤하게,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아주 잠을 잘 잤다는 것입니다. 그런 꿈꾸지 않고 잠을 잘 잤다, 그분 말씀으로는 신기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사고를 당하면, 그 사고가 사람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 사실입니다. 비단 신체적인 외상이 없더라도, 교통사고 같은 경우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되어 두고두고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정서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우울증’, ‘트라우마’, 같은 용어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문제는 그 상황이 자꾸 떠올려지거나, 당시 연관되었던 물건이나 사람들만 보아도 괴로운 기억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공포나 불안, 두려움이 그래서 꿈으로 반복되기도 하는데, 그런 악몽을 꾸는 것은 사고를 당한 끝이라, 그 트라우마는 어떤 경우는 평생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사고와 연관된 일이나 물건을 볼 때 나타나기 때문에 그리 단기간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살아가면서 어떤 큰 충격을 받으면 그것은 분명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그 비슷한 일만 보아도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한 사고들이 무의식으로 숨어들어가 있다가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토끼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8. 무지개 언약,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그런 트라우마가 지금 노아의 마음 한쪽에 들어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하나님은 노아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문의 무지개 언약을 통하여 두 가지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앞으로 혹시라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 하는 염려와 근심 걱정을 없이해 주시는 일. 하나는 노아의 심리 치료.

그래서 그것을 없애 주시는 방편으로 하나님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약속하시면서 무지개를 보여 주시는데, 노아의 성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니 본문에서와 같이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지어 무지개조차 기억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기억하라고 노아에게 명시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 기억에 홍수로 인한 비참한 모습들의 기억이 따라붙을 것이기 때문에 기억하라는 말을 애초에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대신 무지개를 보여 주시되, 그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겠다고 다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억은 내가 맡으마, 기억하마,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 믿습니다. 노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트라우마까지 살피셔서, 몸소 찾아오셔서 그것을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 또한 그의 근심 걱정을 아시고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니 그러한 걱정 근심 역시 하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수의 상징] 무지개의 약속

무지개의 약속

서울 도심지에서 무지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오염된 공기에 의해 자연의 스펙트럼이 혼탁해졌기 때문이다. 소나기가 내린 후 깨끗한 하늘에 걸려있는 무지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하게 만들며, 다양한 상상거리들을 제공한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 후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하며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 보좌의 영광으로 표현된다(창9:13, 계4:3).

하나님의 활인 무지개

신구약에서 무지개를 뜻하는 단어는 ‘케쉐트’와 ‘이리스’가 사용됐다. 케쉐트(활)는 ‘화살을 장전하여 쏘는'(왕상13:15-), 사냥꾼(창27:3), 전사의 활(삼상31:3)을 의미한다. 이리스는 무지개를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후광’, ‘홍채’, ‘색깔의 어름거림’ 등을 뜻한다. 그리스에서는 무지개를 종교적 개념들과 경험을 반영해 의인화하기도 했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언약의 표징이며 증거이기도 하지만(창9:9-),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며(겔1:28),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계4:3).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평화롭게 자기의 활(무지개)을 구름 속에 걸어 두셨는데, 무지개는 하나님의 선하고 은혜로운 뜻을 재확신시키는 표시이다.

약속과 무지개

무지개 색깔을 정확히 표현하면 무지개 색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무지개가 7개의 빛깔을 갖고 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개 색을 3개로 보았고, 중국은 5색이라고 보았다. 기독교 미술은 무지개를 삼위일체에 맞게 3색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과학자 뉴턴은 무지개를 11개 색으로 보았다가 그 뒤 5개 색으로, 1704년 ‘광학이론’을 저술하면서 7개라고 구분했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과 하나님과의 약속(계약)은 어떤 관계일까?

‘일곱’이란 숫자에 대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의 표식이며, 어원적으로 ‘맹세하다’와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래서 일곱은 ‘맹세’, ‘계약’과 상호 혼용되고 있다(창21:31). 무지개가 하나님의 약속을 표징하는 것은 일곱(맹세) 빛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한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맹세(약속)를 생각하게 한다.

참고 문헌:

o 엄원식의 <구약성서의 수신학> (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84)

o 토를라이프 보만의 <히브리적 사고와 그리스적 사고의 비교> 허혁 역(서울, 분도출판사, 1993)

o Hward Eves의 <수학사> (고대 및 중세편), 이문영 역(서울, 경문사, 1991)

o <성서백과대사전 Vol.6> 민영진 편(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1)

o 배재민의 <새로훈 형태의 구약연구> (서울, 총신대출판부, 1982)

o 존킹의 <수와 신비주의>, 김창국 역(서울, 열린책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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