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 아니 그림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 모딜리아니의 작품 110점 감상하기 [짧고 굵은 지식] 상위 15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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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표현주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소개하고 그의 년도별 작품 110점을 음악과 함께 감상해 봅니다. 우리에게는 계란형의 미인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독특한 화풍을 지닌 화가이기도 합니다.
#모딜리아니, #온라인갤러리, #그림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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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 네이버 블로그

이 그림은 모딜리아니의 걸작품에 속한다. 이 작품 속 초상화의 주인공은 당시 파리 학파의 매우 중요한 예술가 모이즈 키슬링이다. 유대인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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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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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나무위키:대문

1906년 22세 되던 해에 파리로 떠났고 콜라로시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때, 폴란드 출신 유태인이자 미국 국적을 가진 조각가 야곱 엡스타인(1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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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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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가난했지만 열정적인 그의 …

심지어 그는 ‘누드화’ 전문이다. 오늘 만인의 그림에서는 가난했지만 예술과 연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를 살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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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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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그림닷컴

몽파르나스 전설의 화가 · Nude On A Divan, 1918 · 21,000원 ~ · Alice (앨리스) · 18,600원 ~ · Portrait Of Madme Zborowska · 21,200원 ~ · Beautiful Woman · 51,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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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urim.com

Date Published: 6/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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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예술가, 그림

2019. 8. 15 – Pinterest에서 세라님의 보드 “모딜리아니”을(를) 팔로우하세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예술가, 그림에 관한 아이디어를 더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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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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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인물에 집착한 화가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미술]

모딜리아니는 작품 표현에 있어 인물의 세세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눈, 코, 입의 특징만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시선과 이목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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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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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 모딜리아니의 작품 110점 감상하기 [짧고 굵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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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짧고 굵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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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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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는 수많은 여인을 만났지만

,

최후에 약혼녀가 된 잔느 에뷔테른느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다

.

잔느는 모딜리아니에게 그 어떤 계산도 없는 순진무구한 사랑을 바친 유일한 여인이었다

.

두 사람은 파리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잔느의 우아한 자태와 잔잔한 미소를 보고 모딜리아니는 즉각 사랑에 빠졌다

.

모딜리아니가 사랑을 고백하자수줍음 많은 소녀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

모딜리아니는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가진 미남이었을 뿐 아니라 정열적인 화가로서 뭇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

두 사람은 점차 열렬한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그리고 그 사랑이 저주였음을 확인했을 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15화 모딜리아니의 그림들

독특하고 눈에 띄는, 어딘가 낯설고 어색한 청년 화가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모딜리아니는 22세에 예술의 중심 도시 파리에 와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하고 강렬하고 가난하고 방탕하고 험난하고 안타까운 삶을 살다 35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애칭 ‘모디’는 프랑스어 ‘Maudit’(저주받은)과 발음이 같았는데 그의 삶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요소가 있어 친구들은 이중적인 의미로 그를 이와 같이 불렀다.

어릴 때부터 폐가 좋지 않아 병치레가 잦았던 모딜리아니는 평생에 걸쳐 병과 가난, 그리고 이를 가리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던 술과 약에 찌들어 살았다. 이와는 별개로 그의 내면에 자리한 예술에 대한 열정은 때로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고 때로는 자신의 육체를 혹사하면서까지 불타올랐다.

아내(에뷔테른)의 초상(1918), 노톤 시몬 뮤지엄

당시는 피카소와 마티스라는 양대 산맥에 의해 파리의 예술이 아방가르드적 색채를 물씬 풍겼다. 특히 자신의 집 주변 카페나 극장을 어슬렁거리며 무리를 지어 다니던 피카소 무리와는 몇 번 마주치고 서로 알고 지냈지만 그들과 깊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어디에 속하거나 무리를 지어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딱히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술가들이 보기에도 다소 낯설게 보일 정도로 독특한 면이 있었다. 샤이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색깔이 확실했고, 잘생겼지만 지저분하게 하고 다녔으며, 몸이 약한데도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있었다.

그의 그림도 어느 이즘이나 그룹에 속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초상화가 유독 많은데 그가 그린 초상화는 모딜리아니즘이라 불릴 정도로 확실히 독특했다. 기다란 목과 팔, 짧은 몸통, 몸에 비해 작은 머리, 도드라지는 긴 코, 아몬드 형태의 눈, 앉아 있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의 그림에서 여러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선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모딜리아니는 당시 전시되던 아프리카 가면이나 원시 조각품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군더더기 없고 특정 부분의 특징만을 과장되게 표현한 이러한 조각들은 직선 또는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들과 어느 정도 그 결을 같이 하고 있다.

조각에 대한 사랑, 캔버스로 이어지다

조각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사랑은 엄청나서 그가 조각에 빠져 있던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그림은 전혀 그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돌을 깎아 만드는 조각품은 제작 과정에서 돌가루가 날리는 환경에 노출되는 탓에 그의 폐 건강에 좋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조각을 멈추고 그림을 그리게 된 모딜리아니에게 캔버스는 조각품을 화면에 옮기는 실험 도구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그는 캔버스를 통해 평면적이면서도 동시에 양각과 같은 볼륨감이 느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얼굴에 있어 이 역할을 담당할 부분은 당연히 코였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그림 속 얼굴은 코로 대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코를 따라 길게 늘어진 얼굴, 코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뉜 얼굴, 코 위에 나뭇가지처럼 늘어진 눈썹과 그 아래 열매처럼 대롱 매달린 것 같은 가느다란 눈, 코 밑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간신히 자리를 차지한 앙 다문 입술은 모든 초상화 속의 얼굴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놀랍도록 하나하나 다르다!

가느다랗고 긴, 비슴듬히 기울인 내면의 슬픔

이에 더해 얼굴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목은 과도하게 길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신기한 것은 그림 속 그들의 목은 절대로 똑바르지도 않고 곧지도 않다. 머리 무게를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옆으로 약간 휘어 있거나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머리부터 배꼽까지 몸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들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셈이다. 손도 중심을 향해 다소곳이 모으는 경우가 많고 한쪽 손을 종종 의자 위로 올리거나 얼굴을 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초상화의 화룡정점이라 여겨질 만한 눈은 눈동자가 없이 가느다란 아몬드 형태로 비워둔 경우가 태반이다.

모딜리아니에게 초상화는 개인적 묘사 보다는 인간의 얼굴이 갖는 형태적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에 가까운 듯하다. 물론 특정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눈동자를 그려 넣었지만 설사 그런 경우에도 어느 한곳을 뚫어지게 보기 보다는 몽상에 잠긴 듯 초점을 잃은 경우가 많다.

이렇듯 형태적 특징이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얼굴 모습 그 자체 보다는 그들이 풍기는 인상과 분위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의 그림은 처음 보았을 때에는 코와 목이 눈에 들어오지만 어느 순간 시간이 갈수록 눈동자도 그려넣지 않은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공허한 듯한 눈동자를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하나같이 다소 우울하면서도 쓸쓸한 그들의 내면이다.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화끈하게 야한 누드들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린 모딜리아니는 단돈 몇십 프랑에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고 누드를 집중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특히, 1917년 열린 모딜리아니의 최초이자 마지막 개인전은 약 30개의 누드로 이루어졌다. 폴란드 시인이자 아트 딜러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우스키의 지원과 기획으로 마련된 이 전시는 비록 첫날부터 폐장되는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했다.

전시회를 알리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로 창가에 걸어놓은 그의 누드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은 분명했지만 전시장으로 사용된 갤러리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경찰서의 경찰들에게도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더구나 모딜리아니의 전시를 보고 외설적이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몰려와 항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도 없었을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음모가 드러나고 살빛이 야한 살구빛을 띠며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탓에 상당히 야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팔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델과 스튜디오, 그림 도구까지 모두 제공받으며 작정하고 그린 그림이기에 이전에 그린 그림들과도 약간 차이가 있기도 하다. 이전의 초상화들이 주로 정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였던 것과는 달리 누드의 여인들은 과감하고 선정적이다.

‘앉아있는 누드'(1916), 코톨드 미술관

단순하고 확실한 선 처리가 돋보이는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한편으로는 사실적이면서 한편으로는 클래식하다. 그의 누드가 사실적인 이유는 각각의 여인이 제각각의 신체적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과 엉덩이로 표현되는 여성의 신체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각각의 누드는 각기 다른 사실성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견고한 선과 선명한 색으로 섬세한 듯 과감하게 표현된 여인의 몸은 놀랍도록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당황스럽도록 야하다. 선으로 표현된 형태는 탄력까지 느껴질 정도이고 연분홍부터 어두운 주황으로 색칠된 몸은 질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다. 오히려 경찰이 음란함의 핵심으로 지목한 음모 그 자체보다는 이렇듯 사실적으로 야한 민망함으로 인해 그의 누드 그림은 묘하게 선정적이다.

과감하지만 여전히 클래식하고 어딘가 사색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그림은 상당히 클래식하다. 그림 속 여인의 포즈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여신의 누드를 보든 듯 비스듬히 누워있거나 앉아있다. 르네상스 시대 여신의 누드가 수줍은 듯 수동적이어서, 드러내기 보다는 은밀하게 남성의 욕망을 깨우는 것이라면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드러냄으로 욕망을 대놓고 자극한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 말한 것처럼 외설적이거나 음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억울할 듯하다. 사실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관람객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 단지 벌거벗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몸은 개인의 특징을 드러내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모딜리아니는 이를 최대한 도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초상화와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상업적인 용도로 제작되긴 했지만 모딜리아니의 단순하고 확실한 선과 놀라운 조형미로 이끌어낸 독특한 아름다움은 그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것은 물론 그의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그의 누드 그림은 애석하게도 모딜리아니의 살아 생전 유명세와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사후 즈보로우스키는 그의 누드 그림을 포함해 마크 샤갈, 앙드레 드렝 등 작가들의 그림으로 약간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지만 1930년대 공황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193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가 가지고 있던 그림들은 곳곳으로 흩어져버렸다. 그의 지원 아래 그려진 누드 그림들은 이곳저곳을 거치다가 2010년 이후 크리스티, 소더비 등 옥션에 등장해 1억5천만~1억7천만불에 달하는 최고가를 기록하며 팔리기도 했다.

죽음 전 해의 모딜리아니, 1919

모딜리아니만큼 자신의 그림이 곳곳에 흩어져있는 화가는 드물다 할 정도로 그의 그림은 세계 각 곳에 자리하고 있다. 비록 어느 한 곳에서 많은 수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지만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뜻이므로 모딜리아니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모딜리아니는 언제까지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00억 그림 남기고…가난과 추위에 떨며 떠난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1918~1919).

세잔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모딜리아니의 초기작 `리보르노의 거지`(1909).

조각가 브랑쿠시와 함께하던 시기에 모딜리아니가 제작한 조각 작품.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1919).

[죽은 예술가의 사회-64]1907년 파리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화가의 회고전이 열렸다. 이 화가는 젊었을 적 온갖 조롱을 받았다. 실패한 화가라는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파리를 떠났다. 시골에서 은둔하며 수십 년간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화가는 사과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다. 좌우, 위아래에서 관찰한 다양한 시점의 사과를 한 캔버스 안에 그렸다. 피사체를 집요하게 분석하며 대상의 본질만을 뽑아내 그리려는 시도였다. 미술계에선 이 예술가의 실험을 혁명으로 받아들였다. 화가의 이름은 세잔이다. 같은 해 인상파 화가 대부였던 모네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꿋꿋하게 수련 연작을 그리며 명성을 떨쳤고, 마티스가 창시한 야수파도 파리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화가 폴 고갱 그림도 신드롬을 일으켰다.예술사에서 1907년 파리는 황금시대였다. 세잔과 모네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룬 해방 덕분에 화가들은 자유를 얻었다.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기계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자 신세에서 벗어났다.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로 거듭났다. 파리는 새 물결로 가득했다. 바로 이 시기에 파리에 입성한 젊은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였던 그는 세잔, 모네, 고갱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파리에 왔다. 큰 꿈을 품고 기회의 땅으로 온 이 남자의 이름은 모딜리아니다.모딜리아니는 초상화로 유명하다. 모델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과 목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 않다. 눈동자가 없기 때문이다. 눈은 영혼의 통로로 일컬어진다. 우리는 상대방 눈만 보고 감정을 읽어내기도 한다.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성들은 눈동자가 없다. 그런데도 어떤 느낌을 풍긴다. 눈동자가 없는 이 여성들은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처럼 묘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아득한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사람 특유의 공허함도 느껴진다. 모딜리아니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에 속하는 화가다. 에콜 드 파리는 인상주의, 입체파처럼 특정한 미술사조는 아니다.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로 몰려든 이방인 예술가 집단을 뭉뚱그려 에콜 드 파리라고 한다. 태어난 곳을 훌훌 떠나 파리로 흘러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오랫동안 핍박받으며 유랑했던 상처를 공유한 민족답게 그들은 서로 교류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선 특정한 화풍을 공유하지 않고, 제각각의 노선을 걸었다.모딜리아니도 유대인이었다. 1884년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항구마을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모딜리아니는 유년 시절을 풍족히 보냈다.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딜리아니가 열 살이 될 무렵 집안에 먹구름이 끼었다. 아버지 사업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쇠약해졌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딜리아니는 가난에 내던져졌다. 세금 고지서처럼 또 다른 불운이 차곡차곡 소년에게 찾아왔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그는 좋은 병원에서 값비싼 진료를 받으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난 후부터 그러지 못했다. 장티푸스, 늑막염, 폐렴에 시달렸다. 겨우 10대였는데도 몇 번이나 죽음 문턱 앞까지 다녀올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모딜리아니를 예술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명문가 출신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예술 소양도 깊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카프리, 로마, 피렌체를 여행했다. 폐가 안 좋은 모딜리아니를 위해 기후가 온화한 지역으로 떠난 요양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모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경이로운 기운이 가득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품을 접한 모딜리아니는 자연스레 자신도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다. 여행 이후 모딜리아니는 그림 그리기에 매달렸다. 미술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회화를 배웠다. 다음 단계는 정해져 있었다. 기회의 땅으로 가야 했다. 스물두 살 모딜리아니는 당시 모든 유럽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큰 꿈을 품고 파리로 향한다.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 자리 잡았다. 그곳엔 가난한 이방인 예술가들이 우글거렸고, 그들은 자주 어울렸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피카소다. 젊은 예술가들은 피카소 작업실에 모여 예술에 관해 토론했다. 그들은 모두 세잔을 존경했고, 세잔처럼 새로운 회화를 개척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영리했던 피카소는 세잔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빨리 입체주의 화풍을 개척했다. 피카소는 젊은 나이에 위대한 화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세잔을 흉내 낼 줄만 알고, 자신의 화풍을 개척하지 못한 모딜리아니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만큼은 몽마르트르 예술가들 사이에 퍼졌다. 모딜리아니는 예술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표적인 미남이다. 모딜리아니 주변엔 여자가 많았다. 낮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엔 술집에 가서 흥청망청 취하며 자유로운 연애를 했다. 방탕한 미남 화가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의 대표적인 보헤미안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방탕은 쾌락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행위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설움을 술로 잊고자 했다.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았던 그는 더 망가졌다.모딜리아니의 예술 세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도록 도운 인물은 조각가 브랑쿠시다. 그는 한때 로댕의 조수였다. 로댕은 브랑쿠시에게 “계속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브랑쿠시는 “거목 밑에서는 새싹이 자랄 수 없습니다”라며 스승을 떠났다. 로댕의 품을 벗어난 브랑쿠시는 스승과 다른 영토를 개척해 현대 조각의 신화가 됐다. 루마니아 출신인 브랑쿠시는 모딜리아니가 어울렸던 에콜 드 파리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브랑쿠시는 방황하는 모딜리아니에게 조각을 권했다.브랑쿠시와 함께하며 모딜리아니는 동료에게서 많은 것을 흡수했다. 브랑쿠시는 추상 조각 길을 연 예술가다. 그는 피사체 형상을 단순화했다. 핵심이 아닌 것들은 과감히 버렸다. 브랑쿠시 작품은 간결하고 비유적이다. 아프리카 토속 미술처럼 원초적 기운이 깃들어 있다. 실제로 브랑쿠시와 모딜리아니는 아프리카 미술에 매료됐다. 그들은 길쭉한 타원형 얼굴을 한 원시 부족 가면을 유심히 관찰했다. 인간 얼굴을 단순화하며 왜곡한 이 가면에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둘은 아프리카 가면과 닮은 얼굴 조각상을 제작했다. 모딜리아니는 회화를 떠나 조각에 매달렸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의 변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폐가 안 좋았던 모딜리아니에게 조각 과정에서 나오는 돌가루는 치명적이었다. 조각을 할수록 건강은 나빠졌다. 모딜리아니는 회화 세계로 강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조각을 접하기 전과 달라졌다. 브랑쿠시와 함께하며 쌓은 경험을 그림에 적용했다. 가늘고 긴 얼굴, 사슴처럼 기다란 목, 눈동자가 없는 눈. 모딜리아니 특유의 초상화는 이때부터 탄생했다.모딜리아니는 지인 소개로 잔 에뷔테른이라는 여성을 만났다. 술집을 전전하며 불쏘시개 같은 연애만 하던 모딜리아니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모딜리아니는 고백했다. 잔 에뷔테른 역시 모딜리아니에게 마음을 뺏겼다. 둘은 연인이 됐다. 모딜리아니는 잔에뷔테른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 상당수는 잔 에뷔테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잔 에뷔테른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잔 에뷔테른의 부모에게 모딜리아니는 재앙이었다. 가난하고, 병약하며, 밤만 되면 술독에 빠지는 무명 예술가와 사랑에 빠진 딸을 뜯어말렸다. 하지만 불붙은 연인을 갈라놓지 못했다. 연인은 동거하며 부부처럼 지냈다. 사랑을 얻은 모딜리아니는 그림으로만 인정받으면 됐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와 같은 스타 화가들의 후광에 가려져 조명받지 못했다. 전위 예술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기에 초상화는 한물간 장르로 여겨졌다. 자괴감은 나날이 커졌다. 모딜리아니는 마음의 병을 술로 치유하려 했고, 그럴수록 수렁에 빠졌다. 지인 도움을 받아 개인전을 연 적은 있다. 경찰은 전시회에 걸린 누드화 를 문제 삼았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작품을 압수했다. 모딜리아니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는 허무하게 끝났다.어느 날 잔 에뷔테른이 모딜리아니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엔 왜 눈동자가 없나요?”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소.” 둘은 가난했지만, 온기를 나누며 버텼다. 사랑은 계속 깊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모딜리아니 그림 속 잔 에뷔테른에게는 눈동자가 생겼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딸이 먹을 밥값도 벌지 못했다. 둘째까지 임신한 잔 에뷔테른은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잔 에뷔테른의 부모는 딸과 손녀만을 받아줬다. 모딜리아니는 문전박대당했다. 잔 에뷔테른이 친정집에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냉기 가득한 골방에서 떨었다.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온갖 병을 달고 살았던 그의 몸은 무참히 무너졌다.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겨우 36세였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인을 잃은 잔 에뷔테른은 모든 걸 포기했다. 그는 모딜리아니가 사망한 후 이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딜리아니는 불운했던 예술가답게 사후에 재조명받았다. 오늘날엔 그림값이 비싼 화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2015년 뉴요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 작품 한 점이 약 2000억원 낙찰됐다.모딜리아니는 고집스레 초상화를 그렸지만, 좀처럼 자신을 그리지는 않았다. 1919년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음을 알았을까. 죽음의 문턱 앞에 있었던 그 시기에 모딜리아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 속 모딜리아니는 팔레트를 들고 있다. 목도리를 동여맸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다. 눈은 거의 감겨 있다. 가난 때문에 아내와 자녀와 떨어져 있었던 이 남자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짚는 듯하다. 생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버티던 모딜리아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잔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어 고향을 떠나온 이 남자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해가는 자신을 기록했다. 그리고 곧 완전히 사라졌다.모딜리아니가 존경한 세잔은 모딜리아니 못지않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꿋꿋하게 버텼고, 세상이 자신의 그림을 인정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세잔의 사과 그림에선 인내하고 인내하며 끝내 만개한 인간의 노력이 느껴져 숙연해진다. 모딜리아니도 묵묵히 나아갔다. 자신의 화풍을 만들기 위해 멈추지 않고 연구했다. 하지만 선천적인 질병이라는 불가항력적 불운을 이기지는 못했다. 영광을 거머쥐기 직전, 자신에게 화려한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도 못한 채 떠났다. 그래서 모딜리아니가 그린 인물들은 쓸쓸해 보인다. 이 화가의 삶을 알고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중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력하는 모두가 낙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향해 성실히 걷더라도 대부분은 꿈을 이루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십 년을 개미처럼 일한 사람이 은퇴하자마자 말기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기도 한다. 신문을 펼쳐 사회면을 보면 거기엔 온갖 비극이 전시돼 있다. 아무도 비극을 원하진 않지만, 눈물과 슬픔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어디에나 널려 있다. 모딜리아니 그림 속 인물들은 이 냉담한 진실을 받아들인 자들의 얼굴을 닮았다.[조성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가난했지만 열정적인 그의 ‘누드화’

▼저작권 : 창작물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법적 권리.

▼범위 : 예술, 건축설계면, 컴퓨터프로그램, 영상, 폰트, 논문 등 광범위.

모든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허락 없는 모방, 남용으로부터 보호하는 권리, 즉 저작권이 있다. 반면 저작권에도 만료기간이 있는데, 이는 작가의 사후 70년까지다. 이때부터 작가가 남긴 작품 공유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Copyleft”. 시리즈 기사 <만인의 그림>에서는 생전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이제는 만인의 그림으로 돌아온 저작권만료 예술가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사진제공 : Wikiprdia]

이름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출생 : 1884년 7월 12일 사망 : 1920년 1월 24일 국적 : 이탈리아 사조 : 현대미술 주요작품 : ‘잔 에뷔테른의 초상’, ‘자화상’, ‘누워 있는 누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것은 설레고 생동감 넘치는 일이다. 항상 그 자리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나무를 그리는 것과 달리, 살아 숨 쉬고 계속해서 눈과 눈이 마주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신의 연인을 그린 화가들 중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만큼 많은 작품과 여인을 그린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누드화’ 전문이다. 오늘 만인의 그림에서는 가난했지만 예술과 연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메데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당시 신흥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리보르노에서 유태인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아메데오가 태어날 무렵 은행가였던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는 파산에 직면해 있었다. 게다가 아베데오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잔병을 자주 앓았는데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과 같은 잔병치레로 평생 고통받았다. 10대에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맞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훗날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티노 디 카마이노의 조각작품 [사진제공 : Wikipedia]

허약체질이었던 모딜리아니였지만, 그를 옆에서 미술의 길로 안내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 에우제니아였다. 14세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 미술학교에서 데셍과 회화를 배웠지만 몸이 너무 안 좋아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아들의 재능이 아까웠던 엄마 에우제니아는 폐가 안 좋은 아들을 데리고 카프리,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지역으로 요양 겸 미술교육을 다녔다. 모딜리아니는 따뜻한 기후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경이로운 작품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점차 예술적 안목을 갖추게 된다. 특히 조각가 티노 디 카마이노(Tino di Camaino)의 조각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건강이 좀 좋아지자 잠시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정착해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그는 1906년 22세가 되던 해에 파리로 떠났다. 당시 파리는 피카소, 마티스와 같은 작가들로 인해 미술 부흥기였다. 상황이었다. 프랑스인 작가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이사를 왔는데 몽마르트를 기점으로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 ‘파리파’라고 불리는 외국인 예술가 집단이 생긴다.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던 모딜리아니 역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 모임에 가입한다.

에콜 드 파리에서 모딜리아니가 가장 가까운 예술가는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였다. 그를 만나 잠시 자신의 천직은 화가가 아닌 조각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폐가 안 좋았던 그는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다시 화가로 돌아온다. 물론 브랑쿠시를 만난 이때 그모딜리아니의 초상화 작품의 기틀이 만들어 졌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 [사진제공 : Wikipedia]

그는 몽마르트의 대표적인 보헤미안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방탕한 생활’ 그 자체였다. 예술가로서는 주목받지 못 한 조연이었지만, 외모만큼은 항상 주연이었다. 낮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엔 술집으로, 흥청망청 취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병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술 마시고 여자를 만나며 방탕하게 보냈는데, 이때 술집에서 만난 여인들의 누드화, 초상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보통 강조되는 관능미와 표정에 추가로 조각미술의 영향이 깃들어있다. 모델의 윤곽에 선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마치 조각품처럼 느껴지게 한 것이다. 때문에 그의 누드는 관능미 만을 부각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비장함과 차가움 또한 내포하고 있다.

보통 ‘누드’라고하면 낮 뜨겁고 보기 꺼려지지만, 사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누드를 그렸다.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누드화는 1483년경 보티첼 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을 예로 들 수 있다. 인체라는 것은 예술작품의 피사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드화’의 가치가 높게 책정되는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사진제공 : Wikipedia]모딜리아니의 누드화 ‘누워있는 나부(Nu Couche)’ [사진제공 : Wikipedia]

모딜리아니의 누드화인 ‘누워있는 나부(Nu Couche)’라는 작품은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7040만 달러(약 1972억원)에 낙찰되어 모딜리아니의 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기록했다.

현재까지 미술품 경매가 최고가로 팔린 작품은 2017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5030만 달러(약 4978억 9000만원)에 낙찰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 그 다음은 2015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7940만 달러(약 1982억원)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그리고 모딜리아니의 ‘나부’시리즈 중 2개가 3위와 4위다.

그중 3위인 모딜리아니 그림은 1917년 12월 파리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열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개인전에 걸렸던 작품이다. 당시 전시회에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아름다운 누드화 두 점이 쇼윈도에 걸렸는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한 경찰관이 그림을 철거할 것을 명령하며 전시회에 큰타격을 줬다.

모딜리아니의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사진제공 : Wikipedia]

그렇게 화가로서의 동력을 잃고 술집을 전전하던 1917년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한 화가들의 모임에서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보다 14살이나 어리지만 조숙한 성격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잔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고, 처음으로 누군가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곧바로 고백했고 둘은 연인이 된다.

병약하고 가난하며 술독에 빠진 딴따라 예술가를 잔의 부모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은 1917년 3월부터 지중해 연안의 한 마을에서 동거를 시작했고, 결국 떼어놓지 못 했다. 결국 1919년 증인을 앞에 두고 결혼서약을 한다. 그때부터 모딜리아니의 그림 주제는 주로 연인 잔이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 생활 중 수많은 사람들을 그렸지만 초상화를 그릴 때 유독 그만의 특징이 있다. 미묘하면서 단순한 색체와 타원형의 몸태, 전체적으로 세로로 길게 늘어진 느낌의 목, 코, 얼굴이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전체적으로 대상을 단순화하는 느낌을 준다. 어떻게 보면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기법은 전체적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며, 그림을 그리던 당시 그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다.

모딜리아니의 ‘자화상’ [사진제공 : Wikipedia]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초상화 속 주인공의 눈이다. 그의 연인 잔의 초상화를 보면 대부분 눈동자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느 날 잔은 모딜리아니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엔 왜 눈동자가 없나요?” 모딜리아니는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소.” 라고 답했다.

참 멋진 말이다. 사실 결혼을 하면 더 이상 상대를 알아가려는 부부가 드물다. 바쁜 일상때문인지, 돈벌이 때문인지 혹은 자녀 교육문제 때문인지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은 제쳐두고,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인생의 동반자’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실천한 예술가였다. 혹시 그가 건강했다면, 우리는 눈까지 완성된 잔의 초상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420개의 모딜리아니 아이디어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예술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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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인물에 집착한 화가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미술]

한껏 늘어진 여인, 적나라한 누드, 텅 빈 눈동자, 갸우뚱한 얼굴.

단순화시킨 형태와 부드러운 색채로 하여금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모딜리아니 작품을 처음 접하고 썼던 짧은 감상평이다. 그의 작품은 초상, 누드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는 간결한 형태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적 세계를 표현해 내고자 했다. 최근 미디어에도 자주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그 가치를 증명해 내고 있다.

모딜리아니는 작품 표현에 있어 인물의 세세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눈, 코, 입의 특징만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시선과 이목구비 모양새가 각기 다르다. 호수 빛의 푸른, 비대칭적인 눈을 계속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정적인 느낌을 준다. 눈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 하는데, 모딜리아니가 인물의 이목구비를 중요하게 작업한 이유일 것이다.

작품들만 보건대 그가 작업했던 시대와 회화 특징이 문득 궁금해진다. 작품 속 단순화시킨 공간은 원시미술을 재해석한 듯 보이는데, 영향을 받은 작가가 누구였는지 짐작된다.

모딜리아니가 18세부터 살았던 파리는 마티스, 피카소, 브랑쿠시 등 현재 유명한 예술가들이 교류했던 곳이었다. 파리는 새로운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변화와 모색을 통한 탈 전통의 이념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강렬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그의 작품에서 단순하고 왜곡된 표현양식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 니그로 조각과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평면 회화에, 기존의 인체와 인간의 형태를 무시한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형태 변형을 추구하였다.

초상화는 한 개인을 기억하기 위한 기능을 가진다. 개인의 모습을 재현하는 부분은 초상화에 있어 ‘닮음’이란 키워드가 중요하다. 다만 20세기에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초상화에 재현과 닮음이라는 요소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고 예술가의 해석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히려 초상화에는 모방과 재현에 대한 자유가 허락되어, 어떻게 모딜리아니가 인물화를 그려낼 때 자신의 내적 세계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이해가 가능하다.

<커다란 모자를 쓴 쟌느 에뷔테르느> 1907

<커다란 모자를 쓴 쟌느 에뷔테르느>를 통해 모딜리아니의 작품 형태를 보겠다.

구도를 살펴보면, 갸름한 타원형 얼굴은 커다란 모자의 포름과 아름답게 균형이 잡혀있다. 콧대의 선에서 가볍게 볼을 받치는 손가락과 팔의 선으로 뻗는 부드러운 곡선의 우아함과 청순함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붓질의 형태는 그녀의 생명의 고동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처럼 따사롭고 차분하고 또한 확실하게 화면에 정착해 있다. 조심스럽고 한없이 깊은 여성을 넘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랑을 그려낸 것이라 하겠다.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의 혼, 생명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그녀의 슬픈 파란 눈이다.

사실 모딜리아니의 짧은 생은 미술사적으로도, 한 인물의 삶으로서도 매우 안타깝다. 1919년부터 극도로 건강이 나빠진 모딜리아니는 결국 결핵 수막염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그를 따라 작품의 주인공이자 모딜리아니의 연인이자 아내인 쟌느도 어린 딸을 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작품을 다시 본다면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목이 긴 그녀의 모습은 눈동자조차 없이 무표정한, 마치 차가운 조각상 같은 모습이었다. 모딜리아니와 쟌느의 가슴이 아린 이야기로 작품 속 그녀의 파란 눈이 더 시리고 슬프게만 느껴진다.

<황색 스웨터를 입은 쟌느 에뷔테르느> 1918

<황색 스웨터를 입은 쟌느 에뷔테르느>를 색채 중심으로 감상해 보자.

이 작품에서는 유연함이 화면에 나타난다. 마치 기다림과 평온함에 명상하고 있는 듯한 소박한 삶이 묻어난다.

특히 유연한 S자 자세로 포즈를 취한 쟌느는 여성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모딜리아니의 연인 쟌느는 당시 임신을 한 상태로, 조용한 충족감에 평온함이 깃든 것을 보면 한때나마 모딜리아니와 함께 안정을 찾았던 순간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연인 쟌느를 성실하게 그렸으며 무엇보다 쟌느와 관련된 작품에서 색채가 가지는 여러 가지 특징 중 세밀한 배려를 한 것이 보여, 그의 사랑이 물씬 느껴질 정도이다. 즉 붉은색의 머리카락과 노란색의 스웨터, 푸른색의 스커트, 암청색의 배경은 단순한 색채의 대비이면서 간결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일관된 소재는 인물로써, 그가 응시하는 생명은 관능의 밑바닥에 물결치는 고독한 영혼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표현 양식을 보면, 장대하고 섬세한 곡선으로 변형된 형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색조를 표현하여 명암 대비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애수의 분위기가 독보적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빈곤과 병마로 인한 방황, 고독 그리고 인간 본연의 진실을 투영하는 몸짓으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큰 눈을 가진 갸우뚱한 얼굴의 무표정, 연민과 고독의 분위기 연출, 계란형의 얼굴, 백조와 같은 가느다란 목, 극단적으로 삐뚤어진 형상 등 무질서적인 구도지만 자세히 보면, 마음을 사로잡는 정서와 슬픔을 자아낸다. 다시 말해 형상과 색을 초월한 조형 예술이며 이는 추상의 가능성마저도 담고 있는 것이다.

매체로 다양하게 볼 수 있었던 그의 작품들은 무수한 꿈과 슬픔이 스며있었다. 풍부한 감수성으로 우아한 우수의 세계를 개척해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지금도 당시 집단적 미술 운동에 휩쓸리지 않았던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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