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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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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 나무위키:대문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는 집단 창작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특히나 자신이 감독한 작품에 대한 영향력이 굉장히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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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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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 다음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Miyazaki Hayao, 宮崎駿 원문 더보기. 공유하기. 직업: 애니메이션 감독. 출생일: 1941.01.05. 출생지: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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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vie.daum.net

Date Published: 7/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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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 YES24 작가파일

1941년 도쿄 태생인 그는 고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을 보고, 애니메이션의 표현력과 인간의 움직임의 묘사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만화가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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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9/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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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를 읽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모든 것을 담았습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지브리 만화. 이런분께 추천드려요! 미야자키 하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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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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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당신이 몰랐던 14가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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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미야자키 하야오

  • Author: 괴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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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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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본어: 宮﨑 駿 ( みやざき はやお ) Miyazaki Hayao[*] , 1941년 1월 5일~)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애니메이터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1월 5일 도쿄시 분쿄구에서 태어나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청소년 신문에 만화를 기고하였으며, 1963년 졸업 후 도에이 애니메이션(東映動画)에 입사하여 후일 동업자가 되는 타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에 들어갔다.

《미래소년 코난》(1978년)·《빨강머리 앤》(1979년)에 이어 세계 멸망과 부흥이라는 극적인 소재와 환경이란 주제를 다뤘던《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로 크게 성공하였다. 또한, 《마녀 배달부 키키》와 《붉은 돼지》는 상영된 그해 일본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하였고,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하여 만든 《모노노케 히메》(1997년)는 제작비 20억 엔을 투자하여 1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1984년에 타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Studio Ghibli)를 창단하고 이후 《천공의 성 라퓨타》(1986년)·《마녀 배달부 키키》(1986년)·《이웃집 토토로》(1988년)·《추억은 방울방울》(1991년)·《붉은 돼지》(1992년)·《귀를 기울이면》(1995년)·《모노노케 히메》(1997년) 등을 성공적으로 발표한다.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의 금곰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은 일본에서도 2천4백만 관객을 동원하는 일본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1] 이후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을 만들었고, 2006년에는 그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게드 전기》를 감독, 제작하였는데 이전의 지브리 작품들보다 미흡한 점이 있었으나 그림과 음악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벼랑 위의 포뇨》(2008년)를 제작하였다. 《벼랑 위의 포뇨》는 제65회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었다.[2]

애니메이션 제작활동 이전의 삶과 가족 [ 편집 ]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도쿄 분쿄구 아케보노정에서 사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야자키 가쓰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야자키 항공사의 관리자로 일했다. 미야자키 항공사는 A6M 제로 전투기에 장착하는 방향타를 만들었다. 이 때부터 미야자키는 자주 비행기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 후 일생동안 비행의 매력에 빠져 지냈다. 이러한 경향은 후에 그의 영화에서 되풀이되며 분명하게 나타난다.[3]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게 되자, 미야자키 항공사는 몰락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4]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사회적 규범에 대해 자주 질문을 던졌으며, 열성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1947년부터 1955(56)년까지 결핵 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미야자키는 가족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다.[3] 특히 1948년부터 1956년까지 9년 동안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지냈으며, 미야자키는 어머니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이웃집 토토로》는 그의 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어머니도 비슷하게 고통받는다.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당시에는 치료하기 어려웠던 척추카리에스(결핵균이 척추에 침투하여 발생하는 질환)에 오래 시달리다가, 1984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미야자키는 도요타마 고등학교에 다녔다. 3학년 때 일본 최초의 장편 컬러 만화 영화로 불리는 ‘백사전'(하얀 뱀 이야기)을 보았다.[6] 애니메이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화영화 제작자가 되기 전에 사람 모습을 그리는 것부터 배워야만 했는데, 그 때까진 주로 비행기나 전투함만을 그렸기 때문이었다.[6]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쿠슈인 대학에 입학하였고, 1963년에 정치학과 경제학 학위를 얻고 졸업하였다. ‘아동문학 연구 모임’의 구성원이었고, 만화 연구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은 ‘당시 만화 모임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6]

1963년 4월에 도에이 동화에서 직장을 얻었고, 애니메이션 《멍멍충신장》을 만드는 데 동참했다. 1965년 10월 동료 만화영화 제작자(애니메이터)인 아케미 오타와 결혼했다. 아케미는 미야자키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미야자키 고로와 미야자키 게이스케를 낳고, 양육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고로는 현재 만화영화와 영화 제작자가 되었고,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게드전기》를 감독하였다. 게이스케는 나무 예술가가 되어 지브리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창작했고, 〈마음의 속삭임〉이라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에서 나오는 나무 조각을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본인의 직업에만 집중했고, 그런 태도가 아들 고로와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7]

작품 활동 [ 편집 ]

미야자키는 도에이 애니메이션에서 일하면서 《걸리버의 우주여행》(1965)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했다. 그는 처음의 결말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아이디어에 따라 결말을 조정했으며, 그 아이디어는 실제 상영된 영화에 반영되었다.

이후에 수석 애니메이터와 컨셉트 아티스트(concept artist)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1968년에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에서 화면 디자이너(scene designer)로 참여했다. 이후 30년 동안 다카하타와 함께 일했다. 기미오 야부키의 애니메이션 《장화 신은 고양이》(1969)(원작: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미야자키는 작품의 디자인을 짜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극의 절정부에 해당하는 추격전 장면이다.

그 후 ‘하늘을 나는 유령선’에 참여하여 몇몇 장면을 제안했다. 탱크가 떼를 지어 도쿄 도심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자 대중이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직접 그 장면을 그렸다. 1971년에 미야자키는 ‘동물보물섬’과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이야기의 구조와 인물의 성격,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스토리보드 작업도 했고 중요한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린드그렌

미야자키는 1971년에 도에이 애니메이션을 떠나 A 프로로 자리를 옮겼다. A 프로는 그가 타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첫 번째 루팡 3세 시리즈를 여섯 편 이후부터 공동으로 연출한 곳이다. 그와 다카하타는 ‘말괄량이 삐삐’ 시리즈를 사전제작하기 시작했고, 스토리보드 작업을 광범위하게 했다. 그러나 원작자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만나고 작품에 관한 자료 수집도 하려고 스웨덴으로 여행을 간 후에, 그들은 프로젝트의 완성에 관한 허가를 받지 못했고 그 작품은 취소되었다.[3]

삐삐 대신에 미야자키는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한 ‘팬더와 아기 팬더'(1972년)에서 원안·각본·화면설정·원화를 담당했다. 1978년에 《미래소년 코난》으로 연출 데뷔를 하였다. 1979년 ‘빨강 머리 앤’의 제작 도중에 미야자키는 니폰애니메이션을 떠났다. 그것은 그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루팡 3세 – 카리오스트로의 성’을 감독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미야자키의 다음 작품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이었다. 《나우시카》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주제가 많이 등장하는 모험 영화이다. 예로, 환경보전(ecology)에 관한 메시지나, 항공기의 매력, 그리고 특히 악한 역할인 경우에 인물의 성격을 정신적으로 모호하게 묘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나우시카는 미야자키가 원작과 애니메이션 감독을 동시에 맡은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는 같은 제목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는데, 그 후 2년이 흘러 애니메이션이 개봉된 후에도 만화는 완결되지 못했다.

지브리 박물관의 모습

1984년에 발표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성공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하였다.[8] 최근까지 그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계속해서 영화 세 편을 만들면서 명성을 얻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아인 두 사람이 하늘을 떠다니는 신비의 섬을 찾아 모험에 뛰어드는 내용이며, 《이웃집 토토로》(1988)는 두 소녀가 숲의 정령인 토토로와 교감하며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이며, 《마녀 배달부 키키》(1989)는 가도노 에이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가 집을 떠나 마녀로서 대도시에 사는 내용이다. 위의 영화 세 편 모두에 하늘을 나는 장면이 항상 등장하는데, 미야자키가 비행에 대한 이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라퓨타》에서는 날개를 위 아래로 흔들면서 나는 초기의 비행기(ornithopter)가 나오고, 《토토로》에서는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키키》에서는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

《붉은 돼지》(1992)는 미야자키 작품 중에서도 특히 예외적인 작품이다. 일례로 주인공이 어린 여자가 아니라 성인 남성이라는 점이 있으며,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반대하는 비행기 조종사인데, 그는 의인화된 돼지로 변한다. 영화는 192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두 사람으로, 공적 즉 비행기를 타고 도적질을 하는 무리와 싸워서 보상금을 타내는 주인공과 부유한 미국 군인이다. 영화는 의무와 이기심 사이의 긴장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풍부한 암시를 담고 있으며,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 영화를 참고하여 많은 유머와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붉은 돼지’는 영화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영화에서 보여준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모노노케 히메》(1997)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보여주었던 생태·정치적 주제를 다시 다룬 작품이다. 내용은 주로 숲의 동물신과 숲을 개발하려는 인간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의 다른 작품보다 폭력적인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모노노케 히메》는 일본에서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타이타닉》(1997) 전까지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둔 영화였다. 결국 이 작품은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상을 수상했다. 미야자키는 《모노노케 히메》를 감독한 후에 잠시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쉬는 동안 미야자키는 친구의 딸들과 시간을 보냈고, 그 중 한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이야기로, 그녀는 기괴한 신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며, 여자 마법사가 그녀의 부모를 돼지로 변하게 한 후에 그 마법사가 소유한, 신들을 위한 목욕탕에서 일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2001년 7월에 개봉해 국내에서 24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그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있다. 2001년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물론이고 2002년에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에서도 최우수 장편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2004년 7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완성했다. 이 영화는 다이애나 윈 존스의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미야자키가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에, 이 장편 애니메이션의 원래 감독이었던 호소다 마모루가 갑작스럽게 이 작품을 포기했었다. 영화는 200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기술 공헌상(Golden Osella award)을 수상하였다. 2004년 11월 20일에 일본에서 개봉하였다.

2005년 미야자키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 후 미야자키가 만드는 마지막 영화가 아마도 “나는 내 어린 소년을 잃었다”가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2007년에 이 작품의 제목이 《벼랑 위의 포뇨》로 바뀌었다.[9] 영화는 ‘소스케’라는 다섯 살 소년과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금붕어 공주 ‘포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사장 스즈키 토시오는 “영화의 70-80%가 바다에서 진행된다. 그것은 자유로운 드로잉으로 어떻게 바다와 그 물결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감독이 도전한다는 것을 말해준다”라고 적었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의 최근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활용한 장면이 거의 없다. 또, 본인은 이 작품제작 중, 체력적으로 이번작이 마지막 장편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지만,[10] 영화 개봉후 차기작에 대한 의욕을 나타냈었다.[11]

노동조합 운동 [ 편집 ]

한국 삐아제에서 출판한 미야자키 하야오 전기에 따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도에이사에서 일할 적에 만화영화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 운동을 했다. 레디앙에 따르면, 미야자키는 노동조합에서 서기를 맡아서 활동했으며, 다카하타 이사오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했다.[12]

주제와 사상 [ 편집 ]

선과 악 [ 편집 ]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역동적이고, 현실을 바꿀 능력이 있으며, 전통적인 선-악 이분법의 틀로는 쉽게 묘사하기 어렵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위협적 인물들은 나중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사악한 적대자(antagonist)로 낙인찍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에보시’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철을 만들 원료를 얻기 위해 동물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숲을 불태워버리려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다스리는 마을에서 나병환자와 전직 성매매 여성들에게 쉼터와 일터를 제공하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미야자키의 영화는 용서할 수 없는 악마를 물리치는 결말보다, 등장 인물이나 생태계의 구성원들이 여러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서로 화해하게 되는 결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마지막에 오무와 같은 거대한 곤충과 인간의 화해를 그리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인 치히로에 대해 “여주인공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악을 파괴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체득했기 때문이다”[13] 고 말한다.

미야자키는 그의 작품에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은 21세기를 ‘오래된 규범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규범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는 복잡다단한 시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고정관념은 이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에서조차 사용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또한 그의 영화가 때때로 세계에 대한 비관주의를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는 어린이에게 비관주의 대신에 긍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14]

물론 《카리오스트로의 성》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같은 미야자키의 초기 작품에는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악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마녀 배달부 키키》나 《이웃집 토토로》 같은 나머지 다른 작품에는 뚜렷하게 등장하는 악인이 전혀 없다.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전통적인 일본문화와 고대 애니미즘이 지닌 정령 신앙의 요소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토토로가 사는 곳인, 마을의 수호신사에 있는 숲(나무)이 등장한다.[15]

환경주의 [ 편집 ]

미야자키의 영화는 자주 환경주의와 지구 생태계의 연약한 모습을 강조한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신기한 생명체인 토토로는 언덕에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 살고, 그 나무에 가족들이 절을 한다. 이러한 생태학적인 의식이,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 잡고 있으며 꽃이 가득 피고 들개가 힘차게 질주하는, 거대한 원시림과 함께 울려퍼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의 환경주의는 악취가 나는 “오물신”으로 구체화되었다. “오물신”은 원래 강의 신이었으나, 오염되어 오물신으로 변하였다가 온천에 와서 여주인공의 도움으로 목욕을 한 후에 깨끗해져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군대는 영화에 등장하는 생태학적인 낙원을 위협한다. 각각의 영화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과 ‘문명의 군사적 파괴’는 갈등을 일으키며 대립하는 요소이고, 땅과 자연 자원은 주인공이 온갖 어려움을 겪어가며 지켜내야 하는 중요한 것으로 등장한다. 전투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군국주의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함께 생태계의 파괴가 일어나고 그것은 곧 마을 거주자들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으로 직결된다.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미야자키는 현대 문화의 상당 부분이 “천박하고 피상적이며 속임수”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농담으로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야생 초원”이 지구를 덮는 종말론적인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른이 어린이에게 “그들의 세계에 대한 비전(vision)을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17]

전쟁 반대 [ 편집 ]

미야자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는 둘 다 강력한 반전(反戰)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나우시카의 희생 때문에, 거대 곤충인 오무 떼와 인간 사이의 전쟁이 그친다. 더욱이 나우시카가 사는 세계는, 전쟁과 환경 파괴로 인해 멸망한 오랜 문명의 폐허로 가득찬 곳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생명의 신 시시가미의 강력한 힘에 의해, 인간 사이의 추악한 전쟁과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종식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은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그는 어떠한 공직에서도 싸움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

비행 [ 편집 ]

비행은 미야자키의 영화에서 반복되며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는 비행을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하늘을 날면서 지상의 풍경을 둘러보는 일이 어떻게 사람을 한 장소에 반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려 했다.[18] 스튜디오 지브리가 2002년에 만든 단편 영화인 《상상 비행 기계》(Imaginary Flying Machines)에서는 비행의 놀라움에 대한 미야자키 자신의 언급이 가득 담겨 있다.

게다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라퓨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도시이며, 영화에는 각종 항공 장치와 항공기의 그림이 등장한다. 이런 주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나우시카는 그녀 자신이 메베를 타고 하늘을 나는 조종사이고, 영화 속에서는 거대한 무기를 운반하는 공중 수송 부대의 모습이 등장한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키키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배달 일을 하고, 《이웃집 토토로》에서 거대한 토토로는 사츠키와 메이를 태우고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치히로가 하쿠가 변해서 된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아 마녀 유바바의 온천으로 돌아오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하울과 소피가 그들의 마을 위 하늘로 날아 오른다. 《붉은 돼지》에서는 아예 주인공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모두 비행사로서, 작품의 초점이 비행에 맞추어져 있고 비행기와 전투기가 등장한다.

미야자키가 즐겨 그리는 비행기는 주로 과거 제1·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전투기나 폭격기의 모습이다. 그는 다소 둔탁해 보이지만 인간이 조종해야만 동작을 하는 그런 기계의 투박한 느낌이 살아있는 비행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붉은 돼지》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대를 배경으로 매우 개성이 강하고 다양한 모습의 비행기들이 나타난다.[19]

숲과 나무 [ 편집 ]

종교학자 박규태는 《이웃집 토토로》와 《모노노케 히메》의 숲을 비교하며,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일본 신도의 영향이 드러나 있다고 본다. 그는 토토로가 사는 숲은 마을의 수호신사인 진주의 숲으로, 자체적인 질서가 잡힌 코스모스의 숲이다. 반면에 원령공주에 나오는 시시가미(사슴신)의 숲은 태초의 원시림이며, 원시적 생명력의 숲이다.[20]

다른 장편 애니메이션에도 숲과 나무는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선 사람이 살지 않는 라퓨타성을 거대한 나무가 지탱하고 있으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곰팡이 나무와 기괴한 식물들이 등장한다. 나우시카에 나오는 식물의 이미지는 핵전쟁 이후라는 설정 아래 과거와 현재의 식물 모습을 혼합하고 바꾸어 만든 것이다.[21]

신화 [ 편집 ]

만화가 김윤아는 《모노노케 히메》에 세 갈래의 신화가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흰 들개신과 같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아이누 신화, 둘째, 일본 특유의 재앙신이 나오는 원령 사상, 셋째, 시베리아 샤머니즘으로 그 기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북방계 신화이다.[22]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아이누 입니다.

아이누 민족은 오늘날의 일본 홋카이도, 혼슈의 도호쿠 지방에 정착해 살던 소수 민족이다. ‘아이누’는 신성한 존재인 ‘가무이’와 대비되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홋카이도 지방의 아이누어 방언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어로는 ‘에미시’, ‘에조(蝦夷)’로 불리는데, 이는 사할린 아이누의 ‘인간’을 뜻하는 ‘엔츄’ 또는 ‘엔주’의 원형으로 보인다. 수렵과 어업을 주로 했던 그들의 풍습에는 많은 부분 북방계 샤머니즘의 영향이 드러난다.[23]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시타카는 일본 동북방에 은둔하던 에미시족의 수장인 젊은이로 나온다.[22]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짐승신들은 아이누 신화에서 직접 빌려온 내용이다. 최근까지도 아이누 사람들은 산(山)이 짐승으로 변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신들의 나라 라고 믿고 있다.[23]

원령사상은 다음과 같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모노노케’는 산 사람을 괴롭히는 생령을 말하며, 일본에서는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귀족이나 왕족이 사후에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고 신으로 모시는 관습이 있었다.[24]

북방계 신화의 내용은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과 연관이 깊다. 북방계 신화에는 사슴에 대한 이야기 많은데, 영화 속에서는 사슴신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최고신으로 등장한다. 또한 어린아이의 영혼 같이 하얗고 작은 “고다마”들은, 인간 영혼이 벌거벗은 아이 모습으로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샤먼의 부름을 받고 세상으로 나온다는 신화적 관념을 연상시킨다.[25]

페미니즘 [ 편집 ]

스튜디오 지브리의 사장인 스즈키 도시오는, 미야자키가 여성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 미야자키는 사실 페미니스트이다. 그는 회사가 성공하려면 그 회사에 다니는 여성 직원도 성공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다. 이런 그의 태도를 《모노노케 히메》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영화에 등장하는 제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모두 여성이다. 《붉은 돼지》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의 비행기 전체를 다시 조립한다.[26] ”

미야자키가 만든 여러 영화를 살펴보면 위 견해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소설에서 여성 인물이 맡는 역할과는 반대로, 그의 영화에서는 기억에 남을만큼 강한 여성 주인공(protagonist)이 등장하기 때문이다.[27] 예를 들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바람 계곡을 지켜내는 나우시카가 등장하고,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들개신의 양녀로서 들개신과 함께 숲을 지켜내기 위해 인간과 싸우는 ‘산’이 등장한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녀이자 마녀인 키키의 성장과정을 담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해내는 여주인공 치히로가 나오고,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아기 물고기이자 여성인 포뇨가 등장하고 있다. 《마루 밑 아리에티》에도 주인공은 매우 작은 소녀인 아리에티이다.

어린이와 어린 시절 [ 편집 ]

“ 어린이의 영혼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인 기억의 상속인이다. ” —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감독이 만든 영화는 대부분 어린 시절을 다룬다. 예를 들어《이웃집 토토로》는 어른과 달리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두 어린 소녀의 이야기이고,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소년이 바다에서 온 신비한 생명체와 친구가 되는 이야기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역시 소녀의 성장과정을 담고 있다.

미야자키는 어린 시절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그는 그 시절이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시기라면서, 그때 사람은 “부모의 보호를 받으면서 주변에 널려 있는 여러 문제를 알아 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는 자연과 접촉할 기회가 너무 없고 가상 세계에 너무 의존한다는 점에서 조금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의 영화에서 자연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하늘과 라퓨타성을 감싸고 있는 나무 내지는 숲이 나오며,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산에 사는 동물신들이 등장하고 있고,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바다가 주요 배경으로 나온다. 또한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주위 어린이에게서 영감을 얻고, “어린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28]

참가 작품 목록 [ 편집 ]

장편 애니메이션 [ 편집 ]

단편 애니메이션 [ 편집 ]

《하늘색 씨앗》 (1992년)- TV 스팟

《온 유어 마크》 (1995년) – 차게 앤 아스카의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뭐야》 (1992)-TV 스팟

《상상 비행 기계》(2002)

《메이와 아기고양이버스》(2002)- 이웃집 토토로 외전

TV 애니메이션 [ 편집 ]

《미래소년 코난》 ( 未来少年コナン , 1978년)

, 1978년) 《명탐정 홈즈》 ( 名探偵ホームズ , 1982년) – 에피소드 #3~5, #9~11편(감독, 각본, 콘티, 연출의 일부)

[29] 기타 참가 작품 [ 편집 ]

디자인 워크

니혼TV의 심볼캐릭터 〈난다로〉(TVCM의 연출에도 담당)

요미우리 신문의 심볼캐릭터 〈도레도레〉

주니치 드래건스 공식 팬클럽의 마스코트 캐릭터 〈가부리〉 1991년, 영화선전용으로서 자주적으로 만들었던 캐릭터였지만, 구단 창설년도 70주년 맞이하였던 2006년 된 후로, 팬클럽 설립에 기용하였다. 열렬한 주니치 팬으로 알려지는 스튜디오 지브리 프로듀서·스즈키 도시오에 의해 채용되었다고 한다.

고가네이시의 이미지캐릭터 〈고킨짱〉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황의웅《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예솔, 1998년)

박규태《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책세상, 2001년)

김윤아《미야자키 하야오》(살림출판사, 2005년)

日우익 공격도 끄떡없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신경 쓴 단 한명 [뉴스원샷]

고양이 버스를 타고 이웃의 토토로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 가끔 하시죠. 21세기형 인어공주 벼랑 위의 포뇨와 소스케, 허세 마법사 하울과 속깊은 할머니 소녀 소피의 사랑을 응원한 적도 당연히 있으실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팬이라면 말입니다.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공동 창업한 미야자키 감독은 1941년생, 만 80세입니다. 1997년에도 2013년에도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미야자키 감독이 이번엔 진짜 끝이라며 지난달, 마지막 작품에 대한 힌트를 내놓았습니다. 뉴욕타임스(NYT)와 진행한 인터뷰에서죠. NYT는 별도로 발간하는 T매거진에 최근 이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인터뷰한 기자도 미야자키 감독의 팬이 틀림 없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에 대해 “20세기 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단언하고, 팬데믹으로 인해 화상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스튜디오 지브리 측의 제의에 대해 “컴퓨터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때를 기다렸다고도 설명하죠.

미야자키 감독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되도록 기자회견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NYT와 함께, 도쿄(東京) 교외 미야자키 감독의 작업실 문을 노크해보실까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감독은 흰 색 작업용 에이프런을 두르고, 60년 이상 애용해온 연필을 쥐고 세븐스타 담배를 언제든 피울 수 있게 준비해놓은 채 기자를 맞았다고 합니다. NYT는 “미야자키 감독은 항상 연필을 이용해 직접 그림을 그려왔고, 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해왔다”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전했습니다. ‘이번’이라는 건 미야자키 감독의 은퇴작입니다. 스튜디오 지브리도 지난 9일, “곧 공개할 것”이라고 발표한 이 작품은 1937년 소설이 원작입니다. 소설의 제목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郞)의 작품으로, 10대 소년이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갖는 의문을 정면으로 마주한 무게감 있는 소설입니다.

미국 신문인만큼, NYT는 자국의 디즈니와 스튜디오 지브리를 비교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미야자키는 디즈니 작품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1988년의 한 강의에선 “디즈니 작품을 보면 그들이 관객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다”고 울분을 터뜨린 일도 있죠. 그는 NYT의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요. 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는 신이 아닙니다.” 선악을 명확히 가르고 권선징악이 뚜렷한 주제로 등장하곤 하는 디즈니를 우회 비판한 셈이죠.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중 하나는 반전(反戰)입니다. 41년생인 그의 아버지는 군수 공장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어찌 보면 전쟁 덕에 먹고 살았던 가족의 둘째아들이 미야자키 감독이었습니다. 그 덕에 자신도 부유하게 자랐고, 일본 왕족과 부유층이 다니는 대학교 가쿠슈인(学習院)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를 미워하게 됩니다. NYT는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가 전쟁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점과, 그에 대해 부끄러움도 죄스러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점 두 가지를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부터가 그렇죠. 지브리는 지블리(Ghibli)의 일본식 발음인데, NYT에 따르면 리비아 사막의 열풍을 일컫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정찰폭격기 모델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전쟁엔 반대했지만 전쟁의 도구인 비행기엔 매료되었던 소년 미야자키의 면모가 그 이름에 녹아있는 셈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일본의 일명 ‘보통국가화’, 즉 지금의 자위대가 아니라 정식 군대로 무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로 인해 일본 우익의 악플이나 악성 e메일 등 공격도 많이 받지만, 미야자키 감독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네요. 미야자키 감독은 컴퓨터를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NYT는 “미야자키 감독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고,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사람이 한 명 있다”고 전합니다. 그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했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입니다. ‘반딧불이의 묘’와 ‘가구야 공주’ 등의 작품으로도 유명하죠. 다카하타 감독은 2018년 별세했는데, 당시 미야자키 감독은 울먹이며 추도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야자키 감독은 다카하타 감독에 대해 “우리들은 힘껏 그때를 살았던 것”이라며 “이제 나에게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추모했습니다. 생전 다카하타 감독은 미야자키 감독에 대해 “싸우기는 것도, 우는 것도 잘하고, 놀기도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재능을 인정받길 기대하는 데 그 기대가 깨지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라고 애정을 담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이 마지막으로 내놓는 작품 제목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NYT 기자의 마지막 질문은 이랬습니다.

“미야자키 감독님, 영화 제목에 대한 본인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고 그는 먼저 세븐스타에 불을 붙였고, 곧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

작가소개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1941년 도쿄 출생. 1963년 가쿠슈인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후, 도에이동화(현 도에이 애니메이션) 입사. 1985년에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에 참가. 대표작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벼랑 위의 포뇨〉(2008) 등. 2013년 7월에 〈바람이 분다〉가 공개되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 제75회 아카데미상 장편애니메이션영화상을 받았고,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는 영예금사자상을 수상. 2012년 문화공로자에 선출되었다. 2014년 11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에서 아카데미공로상을 수상했다. 또 2001년에 개관한 미카타의 숲 지브리 미술관에서는 기획원안과 프로듀스를 맡으며 관주로도 일하고 있다.

日애니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80세에도 신작낸다…NYT 인터뷰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80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좀처럼 언론에 나서지 않는 그가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1시간 동안 화상인터뷰를 했다. 서방언론과 인터뷰는 2014년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통역을 두고 이뤄진 1시간짜리 인터뷰에서 많은 것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NYT는 인터뷰를 계기로 23일(현지시간) 미야자키감독의 작품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은 기사요약.미야자키 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에도 캄퓨터를 사용한 제작을 한사코 거부했다. 1988년작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두 어린이의 우정과 숲속의 괴물을 그린 장면은 물론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일명 모노노케 공주)”의 주인공이 자기를 길러준 어머니 늑대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는 장면, 2001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겁쟁이 소녀가 용기를 내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는 장면까지 미야자키 감독은 극단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휙휙 눈이 돌아가는 장면들을 거의 전적으로 손으로 그려냈다. 특히 미야자키와 유일하게 견줄만한 애니메이션 작가인 월트 디즈니와 달리 미야자키는 80살이 된 지금도 기업 운영자로 물러앉지 않았다. 그가 영화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제작자 스즈키 도시오와 함께 1985년에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생산에만 몰두하는 수백명과 함게 팀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다. 때로는 동작을 직접 그리고 배경작업도 하며 청소도 하는 예술가중 한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 책상과 크기가 비슷한 그의 책상은 수십년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해온 현장이다. 그는 여전히 영화 한 편당 수만쪽에 달하는 장면을 직접 그리고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그는 “애니메이터의 도구는 연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제 연필이 특히 좋다면서 연필심이 섬세해 표현을 잘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스나다 마미 감독 2013년작 “꿈과 광기의 왕국”에서 그는 자신이 늙어서 5B 연필이나 6B 연필을 쓴다고 자조하면서 연필을 만드는 일본 삼나무에 대해 “질좋은 나무들이 다 없어졌다”고도 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인터뷰에서도 “그건 사실”이라면서 웃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모노노케 히메”에서 마을 지도자 에보시가 수천년된 이끼덮인 삼나무들을 잘라서 대장간에 불을 지피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미야자키 감독이 남부 야쿠시마섬 시라타니 운시쿄 협곡으로 현지촬영을 나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25m 높이에 둘레가 16m가 넘는 2600년 이상된 나무들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그러나 운시쿄 협곡의 숲이 영화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면서 “옛날부터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숲을 묘사했다”고 설명했다.그가 인터뷰에 응한 장소는 도쿄 교외 코가네이에 있는 작은 건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는 그곳을 그는 “돼지 우리”라고 불렀다. 돼지를 좋아하는 그는 스스로를 돼지로 그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건물 앞에 세워둔 어두운 회색의 시트로엥 2CV는 2마력짜리 엔진이 달린 컨버터블로 1990년에 단종된 모델이다. 1979년작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벼랑끝에서 추격전을 벌리는 와인색 모델로 등장한다. 매년 12월이 되면 부엌 창가에 1970년대 TV 시리즈로 방영된 “하이디: 알프스의 소녀”에 나오는 끌어안고 싶게 만드는 염소 인형을 놓아 둔다.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위해서다. 아카데미 박물관이 이 염소를 전시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한다며 거절했었다.미야자키 감독은 ‘돼지우리’를 은퇴 후에도 계속 사용할 계획이다. 1998년 더이상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지은 이 건물은 이듬해 지난해 가을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 열차” 이전 일본 역사에서 가장 많이 돈을 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스튜디오 지브리에 반환됐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서방 이외 지역 영화로는 처음으로 2002년 아카데미상 최고 애니메이션영화상을 받았다. 2013년 34년 동안 11편의 영화를 만든 그가 두번째로 은퇴선언을 하면서 스튜디오 지르비는 생산부서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도 이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하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말하며 그는 마치 마지막 도둑질을 하려고 준비중인 머리가 하얗게 센 도둑처럼 웃었다.미야자키 감독은 서스펜스의 대가다. 물흐르는듯 하면서도 대충 그린 듯한 선과 세부 묘사는 시간을 많이 들여 제작하는 주류 애니메이션과 다르지만 그의 영상 스타일은 보는 사람이 단숨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밝지만 천박하지 않은 채도높은 색을 차가운 회색, 회갈색과 대비시킨다. 빛과 그림자를 가르는 은빛, 깊은 밤을 묘사하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 그만의 특징이다.미야자키는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2004년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끝부분에 등장하는 비행선의 폭격장면은 검은 연기와 타오르는 불꽃, 붉게 물든 하늘이 등장한다. 이는 미야자키가 전쟁에 대해 가진 기억을 그려낸 것이다. 그는 일본이 진주만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1941년생이다. 그가 네살이던 해 그의 가족들이 도쿄에서 피신해 지내던 우츠노미야를 미국 폭격기들이 폭격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꿈과 광기의 왕국”의 한 장면으로 그려냈다. 소이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아버지가 그를 업고 강둑을 기어올라 작은 트럭을 타고 도망쳤다. 미야자키는 영화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트럭에 타도 되느냐고 묻는데 트럭이 그냥 떠나버리는 것으로 묘사했다. 미야자키는 실제로 그들을 두고 떠났었다고 했다. 한달 뒤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일본이 항복했다. 어렸던 미야자키가 당시 상황의 위중함을 제대로 알진 못했을 지라도 당시의 기억이 그의 작폼에 짙게 배어 있다. 타계한 화가 이케다 타츠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등 동시대의 일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실제로 괴물과 수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부상은 원자폭탄의 낙진으로 유전 변이가 발생하는 상황을 많이 그리고 있다. 954년 등장한 고질라는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때문에 심해에서 성장한 괴물이며 1963년 TV 시리즈로 방영되기 시작한 우주소년 아톰은 영웅주의를 표상한다. 원자력에서 동력을 얻는 소년 로봇이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설정이다.미야자키의 영화들은 또 쇄국하던 일본이 강제로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 들여야 했던 근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인터뷰를 중개한 로스앤젤레스 아카데미 박물관의 니벨은 미야자키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옅은 애절함을 간직한 열망이 제국주의시대의 자부심과 서구 물질주의를 모두 경원하는 나이든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고 말한다.미야자키의 아버지는 가미가제 공격으로 악명높은 제로 전투기의 날개를 생산한 무기공장을 운영했다. 결코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1995년 아사히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가 결함있는 제품을 눈감아달라고 관리들을 뇌물로 구워삼는 사기꾼으로 묘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남은 두랄루민으로 조잡한 숟가락을 만들어 가재도구가 없어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뒤에 공장을 댄스홀로 만든 적도 있었다. 미야자키는 네 아들 가운데 둘째였다.미야자키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던 군수공장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비행기에 심취했다. 리비아 사막에 부는 뜨거운 모래바람을 뜻하는 지르비(영어로 Ghilbi)는 2차대전에 사용된 이탈리아 정찰 겸 폭격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항공기에 매료된 흔적이 미야자키가 만든 모든 영화에 나타난다. 하늘을 날거나 하늘을 걸어다니는 괴물로 변하는 사람이나 1986년작 “천공의 라퓨타”에 등장하는 반투명 날개로 비행하는 비행물체처럼 말이다.미야자키는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전쟁을 통해 돈을 벌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됐다. 그는 1995년 “나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영화제작자로서 그 자신도 영상을 만들어내지만 영상이 마구 만들어지는 것을 비난하고, 자식을 사랑하지만 보살피지 못하며, 담배를 끊지 못하는 환경론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모순을 끌어안는 이같은 태도가 서방에서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비결인 동시에 그에 대한 거부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선악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 태도는 일신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나는 옳고 그른 것을 판정하는 신이 아니다”라면서 “우리 인간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의 세상에선 분명한 악당이 없으며 다만 나쁜 일을 하는 역할만 있을 뿐이다.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마을 지도자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지만 동시에 몸파는 사람들과 문둥병 환자들을 위한 구호소를 만들기도 한다.디즈니 영화에 대해 미야자키는 1988년 한 강연에서 디즈니의 가벼운 정서를 싫어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디즈니의 영화가 관객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미야자키의 작품에는 남자 주인공보다 여자 주인공이 더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 어린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의 소녀들이지만 아는 게 많고 독립적인 인물이다. 스스로 직업을 택하고 집안을 이끌며 전투를 벌이고 소년들을 구해낸다. 동화속 낭만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미야자키 감독은 겸손한 세속의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일을 통해 이웃에 사는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려하고, 쉬는 날은 강가의 쓰레기를 줍고, 20년 넘게 자기 집 근처 요양원에 있던 나환자를 남몰래 보살피고, 친구가 된 나환자가 숨질 때 손을 잡아 줬다.그런 그에 대해 미야자키의 멘토이자 경쟁자였던 다카하타는 “싸우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고 놀기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재능을 인정해주길 기대하며 기대가 깨지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라고 묘사했다.미야자키는 또 한사코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해 온 탓에 일본 우익들로부터 지독하게 공격을 당하고 있지만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전쟁중 무기를 만들어 부자가 된 아버지 덕분에 미야자키 감독은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일본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가쿠슈인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의 성장기는 일본의 격변기였다. 전통 농업에서 중공업으로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 속도가 눈부셨다. 일본의 산업화 이론을 공부하면서 미야자키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1960년대 미일안보조약 반대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토에이에 취직해 곧바로 애니메이터 노동조합의 사무총장이 됐다. 1994년 “출생 계급과 무관하게 바보는 여전히 바보고 좋은 사람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공산주의와 결별했음을 밝혔다. 그는 “모든 세상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철학자는 없다”고 말했다.미야자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념성이나 도덕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작업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일상 사이의 빈 자리를 채워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 사명이다. 다만 그의 작품들은 인간이 환경에 미친 파괴적 영향을 개탄한다.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 신도(神道)의 영향이 엿보인다.또 운명론과 낙관론이 묘하게 교차하는 것도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모노노케 공주가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죽지만 숲은 계속 살아 남는다. “나로선 울창한 숲이 나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과 연결돼 있다”고 미야자키는 1988년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숲이 사라지면 내 영혼 속의 어두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내 존재도 희박해지는 셈”이라는 것이다.미야자키는 그러나 자연을 순수한 것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곰의 신이 총을 맞자 화가나서 아시타카 왕자의 마을을 공격한다. 이 때도 아시타카는 그를 죽이려 하기 보다 떠나달라고 애원한다. 미야자키는 인터뷰에서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 본 적 없는 낮선 것과 마주치면 겁부터 내지 말고 소통해봐야 한다”고.미야자키는 지금 오랜 동료 스즈키(73)와 함께 다음 작품을 만들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를 꺼렸지만 요시노 겐자부로의 1937년작 소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개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얼마 안된 열다섯살 장난꾸러기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소설과는 딴 판인 “대형 판타지물‘이라고 스즈키는 밝혔다.약속한 시간이 끝나자 미야자키 감독은 머리를 문지르며 예의 기다란 세븐 스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이 ’사는 방법?‘인가요?“라고 묻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서울=뉴시스]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세계속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1941년 도쿄 태생인 그는 고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을 보고, 애니메이션의 표현력과 인간의 움직임의 묘사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도에이 동화에 입사. 〈걸리버의 우주여행〉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71년, 극장용 장편 〈아리바바와 40마리의 도적〉의 원화, 아이디어 구성 담당했다. 이후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하여 다양한 기획과 작품으로 활약하였다. 1973년, 즈이요 영상으로 이적하여 명작시리즈 첫 번째 작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엄마 찾아 삼만리〉〈빨강머리 앤〉 등 여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메인 스텝으로 참여했다.

1978년, 〈미래 소년 코난〉을 연출해 애니메이션 팬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79년,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작 〈루팡 3세 카리오스트로 성〉로 주목을 받았다. 월간 아니메쥬에 만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연재를 시작한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상업적으로 대흥행을 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소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가 개봉되어 일본에서 80만 관객을 동원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유럽 현지 로케이션을 통해 모든 콘티를 구성 각색했다. 이 영화는 실사에서는 표현 할 수 없는 카메라 기법과 리얼한 배경 등으로 미야자키를 일본 애니메이션의 최고 승자로 만들었다.

87년 4월 〈유천 이야기〉를 제작했고, 88 〈이웃의 토토로〉를 개봉하는 등 일본의 모든 극영화를 제치고 국내 영화제의 상을 휩쓸어 센세이션을 일으키다. 이어 〈반딧불의 묘〉를 개봉시켜 역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두 편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마녀 키키의 특급배달〉이 흥행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 그해 일본의 키네마 준보가 집계한 연간 흥행 순위에서 무려 300만 명이라는 폭발적인 관객 확보에 성공하며 79년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이후 20년만에 만화영화가 연간 흥행 순위 1위에 랭크되는 쾌거를 올렸다. 이어 발표한 〈추억은 방울방울〉이 그 기록을 갱신했다.

92년 7월 개봉된 〈붉은 돼지〉가 헐리우드의 〈원초적 본능〉을 제압하며 흥행 기록 갱신. 93년 앙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발 대상 수상했다. 이듬해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이 국내 흥행에서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을 꺾다. 애니메이션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일본 대표로 출품되었다. 1997년 7월 〈모노노케 히메〉가 개봉되어 일본 관객 1천 4백만 명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2년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며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여 세계 영화계의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제 75회 아카데미에서는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필모그래피]

천공의 성 라퓨타 (우리말 녹음)(1986)|각본

천공의 성 라퓨타 (우리말 녹음)(1986)|감독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각본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감독

이웃집 토토로(1988)|감독

마녀 배달부 키키(1989)|각본

마녀 배달부 키키(1989)|감독

붉은 돼지(1992)|각본

붉은 돼지(1992)|편집

붉은 돼지(1992)|감독

귀를 기울이면(1995)|각본

모노노케 히메(1997)|각본

모노노케 히메(1997)|감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더빙)(2001)|감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더빙)(2001)|각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감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각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우리말녹음)(2004)|각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우리말녹음)(2004)|감독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각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감독

벼랑위의 포뇨 (한글 자막)(2008)|감독

`80세` 日 애니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신작 공개…지브리 “멀지 않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사진| 일본 문부과학성 공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80) 감독의 신작이 곧 베일을 벗는다.스튜디오 지브리 사장 호시노 코지는 9일 일본 오사카시에서 열린 전시회 ‘아니메쥬와 지브리전, 한권의 잡지에서 지브리는 시작됐다’ 개막식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호시노 코지 사장은 현재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에 대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은 1937년 발표된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원작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이 작품은 15살 장난꾸러기 소년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함께 신작 작업을 하고 있는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원작과 다른) 대형 판타지물”이라고 밝혀 기대를 모았다.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고양이의 보은’,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벼랑 위의 포뇨’ 등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작품들을 기획, 감독, 제작했다. 1997년 개봉한 ‘모노노케 히메’ 개봉 후 은퇴를 선언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몇 차례 은퇴 선언과 번복을 반복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김소연 스타투데이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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