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아야코 | ‘빙점’ ‘길은 여기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그녀의 남편 미쓰요씨 직접 인터뷰. 그녀가 작품을 썼던 다다미 방과 빛바랜 사진들을 보자 4892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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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았다. 홋카이도 아사이카와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남편 미우라 미쓰요씨를 만나 직접 인터뷰했다. 미우라 아야코가 작품을 쓴 다다미방에서 생전의 미우라 미쓰요씨를 만나 미우라 아야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랑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의지\”라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미우라 부부가 살았던 집 속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 인생과 사랑, 믿음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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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우라 아야코(일본어: 三浦 綾子 1922년 4월 25일 ~ 1999년 10월 12일)는 일본의 여성작가, 소설가, 에세이스트이다. 결혼 전 성은 홋타(堀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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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3/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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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꼬님의 전체작품 보기 | 작가 & 작품 – 교보문고

일본작가, 미우라 아야꼬 작가의 다양한 최신작과 베스트셀러 작품을 확인해보세요 … 원죄에 관한 인간의 내면 의식을 치밀하게 다룬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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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yobobook.co.kr

Date Published: 8/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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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코 – 알라딘

사랑과 용서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한 미우라 아야코는 1922년 4월 25일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가와 시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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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5/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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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길은 여기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그녀 …

Transcript · [특강] 빙점의 미우라 아야꼬 문학강좌 · 명작 일본 소설을 드라마화한 또다른 명품 드라마 ‘빙점'(1990) [세대공감토요일: 별들의고향] |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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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outube.com

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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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아름다운 간증의 삶

사​람들은 미우라 아야코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렀습니다. 그녀는 폐결핵과 척추골양이 겹쳐 인생의 황금기인 24살 때부터 13년동안 거의 침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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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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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작가 미우라 아야코 남편 미쓰요의 일기 – 여성동아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99년 타계한 그녀의 곁에는 40년간 그녀의 손이 되어 집필활동을 도운 세살 연하의 남편 미쓰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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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oman.donga.com

Date Published: 6/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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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코는… | 중앙일보

작년에는 일본 전역 1만 5천명의 독자들의 참여로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 주요 작품 1. 길은 여기에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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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4/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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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 Daum 블로그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출처 기록문화연구소 게시물 스크랩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lh5h3zNLLQ0&feature=youtu.be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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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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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 나무위키

일본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1922~1999)[1]의 소설. 1964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주최한 1천만 엔[2]현상 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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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3/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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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_미우라 아야코의 삶과 그 작품 세계 – 갓위드

미우라 아야코는 일본작가들 중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녀는 1922년 홋카이도 아사히가와 시에서 태어나 39년 17세의 나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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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with.tistory.com

Date Published: 5/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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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길은 여기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그녀의 남편  미쓰요씨 직접 인터뷰. 그녀가 작품을 썼던 다다미 방과 빛바랜 사진들을 보자
‘빙점’ ‘길은 여기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그녀의 남편 미쓰요씨 직접 인터뷰. 그녀가 작품을 썼던 다다미 방과 빛바랜 사진들을 보자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미우라 아야코

  • Author: 기록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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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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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우라 아야코(일본어: 三浦 綾子 1922년 4월 25일 ~ 1999년 10월 12일)는 일본의 여성작가, 소설가, 에세이스트이다. 결혼 전 성은 홋타(堀田)이다. 고향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에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이 있다.

생애 [ 편집 ]

교사생활 [ 편집 ]

1922년 4월 25일(타이쇼 11년)에 홋타 테츠지와 키사의 5번째 아이로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와 9남매가 함께 생활했다. 아사히카와 시립여고를 졸업하였다. 1935년에 여동생 요코가 요절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7년간 근무했으며, 일본의 세계대전 패전 후 그때까지의 국가의 방식이나, 스스로 속해 있던 군국주의 교육에 의문을 품고 1946년에 퇴직하였다. 퇴직 후 그는 폐결핵과 척추골양이 겹쳐 13년간 요양생활을 했다.

그리스도 신앙 그리고 결혼 [ 편집 ]

1948년, 홋카이도 대학 의학부를 결핵으로 인해 휴학중이던 죽마고우였던 마에카와 쇼와 재회해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하였다. 마에카와는 경건한 크리스천으로, 미우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52년에 결핵 투병 중에 오노하라 린조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 1954년, 마에카와가 사망하였다. 미우라 아야코는 요양 생활 동안 기독교인이 되었다. 1955년 6월에 기독교잡지인 《이치지쿠》, 《무화과》를 통해 아사히카와 영림국(산림원)에 근무하던 아사히카와 시 공무원인 미우라 미쓰요를 알게 되어 1959년 결혼하였다.

등단 [ 편집 ]

1961년, “주부의 친구” 모집 제1회 “주부가 쓴 실화”에 “하야시다 리츠코”라는 필명으로 “태양은 다시 지지 않고(太陽は再び没せず)를 투고해 입선했다. 다음 해 “주부의 친구” 신년호에 입선작이 “사랑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빙점 [ 편집 ]

미우라 부부는 잡화점을 운영했는데, 가게가 번창하여 이웃 가게들이 장사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남편의 권유로 가게 규모를 줄이고 남는 시간에 글을 썼는데, 이때 쓴 글이 《빙점》이다.[1][2] 1961년 잡지에 소설을 투고하여 등단했으나,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소설은 나중에 쓴 《빙점》이다. 1964년 아사히 신문의 일천만 엔 현상 공모 소설에 《빙점》을 출품하여 최우수작으로 당선되어 지방에서 평범하게 잡화점을 경영하는 주부에서 유명 작가로 떠올랐다. 취미이던 글 쓰기가 직업이 된 것이다. 《빙점》은 다음 해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어 큰 호평을 받았으며,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인기 [ 편집 ]

《빙점》은 범우사 등에서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어 한국방송에서 김영애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1960년대 ~ 1970년대의 베스트셀러로 매우 유명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끈 일본 소설로 꼽힌다. 빙점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대한민국에서 1965년부터 2004년 사이 146편이 306회나 번역, 출간되어,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치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번역된 작품 수가 가장 많은 일본 작가로 조사되었다.[3][4]

기독교 문학 [ 편집 ]

그 후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평화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한 많은 저작들을 발표했다. 1982년 직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로는 남편의 대필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만년에는 파킨슨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9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에피소드 [ 편집 ]

미무라 아야코가 장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2001년부터 출신지인 아사히카와에서는 미우라 아야코 기념 어린이 장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던 과자는 삿포로 제과의 삿포로 명물 오키나와 만주(냉동시켜 보존하는 등 구입), 모리나가제과의 비스켓 MARIE에 무염 버터를 바른 것 등이 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미우라 미쓰요는 패결핵으로 사망했던 죽마고우 마에카와와 용모가 아주 닮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미쓰요를 만났을 때, 죽었던 마에카와가 살아 돌아와 눈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할 정도로 놀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녀의 자서전 ” 道ありき”에 자세히 나와있다.

작품 목록 [ 편집 ]

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아름다운 간증의 삶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의 최고 여류작가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코’의 이야기를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기독교 작가입니다. 일본의 여류작가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죠. 작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사실 24살 때부터 13년 동안 폐결핵과 척추 질병 등으로 병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만나 불후의 명작 소설 <빙점>을 썼습니다. 인간의 원죄와 용서를 그린 <빙점>은 1963년 아사히신문사 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어 입상한 이후 71만부라는 기록적인 판매를 보이며, 국내에서도 1965년 부터 2004년 사이 146편이 306회가 번역 및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애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도 제작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이 소설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끈 일본 소설로 꼽힙니다.

작가 미우라 아야코 남편 미쓰요의 일기

■ 기획·정지연 기자([email protected]) ■ 정리·조희숙 ■ 사진·도서출판 투영미디어 제공 입력 2002.11.14 14:24:00

“병마와 싸우며 글 쓰면서도 내 아내는 언제나 숲처럼 조용했습니다”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99년 타계한 그녀의 곁에는 40년간 그녀의 손이 되어 집필활동을 도운 세살 연하의 남편 미쓰요가 있었다.

최근 출간된 에세이집 는 이들 부부가 오랜 세월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세월의 기록이다. 잔잔한 감동을 전하는 이들 부부의 삶을 정리해 싣는다.

미우라 미쓰요는 아내가 죽을 때까지 문학과 생활의 가장 헌신적인 동반자였다.

여성동아 2002년 11월 467호

1955년 6월18일. 아야코의 병실은 색상 장식이 없는 검소한 방이었다. 당시 아야코는 폐결핵이 발병한 지 9년, 척추만성염증에 시달린 지 3년이 지난 상태였고 몸을 뒤척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약간 부은 듯 보였지만 그녀의 투명하고 커다란 눈동자는 퍽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아야코와 나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환자와 위문자로 이루어졌다.아사히카와 영림출장소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결핵 환자들을 위한 잡지 발행인으로부터 훗다 아야코를 위문해줄 것을 부탁받았다. 단순히 위문을 부탁받은 것이었지만 아야코가 여자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교제나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나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결핵에 감염되어 임파선 결핵을 앓은 경험이 있었다. 47년부터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55년에는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어떤 고통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가정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운 좋게 체력이 주어진다 해도 제멋대로인 내 성격에 결혼생활은 번거로울 뿐이라는 생각도 깊었다.하지만 그녀를 세번째 방문했을 때, 나는 “신이시여, 나의 생명을 훗다씨에게 주어도 좋으니, 아무쪼록 훗다씨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이듬해 나는 아야코에게 우리 두 사람간의 교제에 관한 긴 편지를 썼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웠다. 상대는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였고 언제 나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그러나 57년 어느 여름날, 그녀는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불쾌한 미열이 여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각혈도 하지 않았고 식은땀도 가라앉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1년 후 그녀는 어머니의 식사 준비를 도울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가족들에게 나와 아야코와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3일 살고 죽더라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인정해주었지만 어머니는 몸이 약한 사람끼리의 결혼을 걱정했다. 장기간 결핵을 앓고 있던 사람끼리 결혼한다고 했으니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59년 1월25일. 나와 아야코는 아사히키와 로쿠조 교회에서 약혼식을 치렀다. 결혼을 앞두고 그녀는 초대할 사람의 수와 회비, 축사나 사회자, 초대장의 문안 등등 결혼준비로 분주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결혼식 보름을 앞두고 그녀가 갑자기 39도의 고열로 쓰러졌다. 하지만 결혼식 하루 전날 그녀의 열이 마치 거짓말처럼 내렸다. 결혼식날 순백의 웨딩드레스에 몸을 감싼 서른일곱의 신부, 아야코는 마치 빛을 발하는 듯 아름다웠다.지금까지 아야코는 네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유년시절에 대하여 쓴 , 소녀시절을 회상한 , 청춘시절을 전한 그리고 이렇게 네권이다. 특히 는 ‘우리 결혼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붙여, 결혼초부터 시작하여 소설 이 당선되기까지 9년에 걸친 생활이 쓰여 있다. 그녀는 결혼 첫날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기도를 마친 서로의 눈에는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드디어 미우라는, ‘피곤할 테니 오늘은 편히 쉬도록 해요’라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키스도 없이 자신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조용하고 너무도 경건한 밤이었다.”우리의 신방은 실내를 개조한 단칸방이었다. 겨우 9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고 집주인과 한집에 살아야 했지만 ‘좁으면서도 즐거운 우리집’이었다. 라디오 한대 없는 가난한 출발이었지만 우리는 늘 함께였다. 아야코가 작품활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항상 행동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무렵 나는 “만약 나의 수명이 그녀보다 길다면 그 반을 그녀에게 나누어주소서”라는 기도를 변함없이 드리곤 했다.신혼생활은 즐거웠다. 아야코가 매일 싸준 도시락에는 그녀의 메모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기도 했고, 빨갛게 절인 생강으로 하얀 밥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신혼시절 그녀는 자신은 별로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내게 자주 바나나를 사다 주었다. 혼자 게걸스럽게 먹던 나는 바나나가 비싸기 때문에 어느 가정에서도 쉽게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그녀는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고 매사 솔직한 성격이었다. 심지어 별것 아닌 일에도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해서 나는 그녀에게 ‘조아리 엄마’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불쾌한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사과하곤 했던 그녀는 종이에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써서 천장에 붙여두곤 했는데, 3일만 지나도 천장에 붙은 종이가 무슨 일 때문에 붙인건지 잊어버려 나에게 묻곤 했다. 용서해도 쉽게 잊지 못하는 나와는 전혀 반대였다.또 그녀는 단가를 지을 때도 거의 퇴고하지 않은 채 꾸밈 없이 읊기를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은 퇴고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쓰는 조잡한 문장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아야코는 결코 소설을 대강 쓴 적이 없었다.그녀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경리적인 사무에 흥미가 없다는 것. 경리사무는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61년 그녀가 잡화점을 시작했을 때도 장부정리는 내몫이었다. 아야코가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 기록하는 것은 나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인세나 수입을 기록하는 정도여서 잡화점을 할 때보다 단순했지만 아야코의 입장에서는 내가 꽤 능력 있어 보였던 것 같다.아야코가 13년에 걸친 투병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핵으로 인해 7년간 척추 카리에스를 앓은 몸이었고, 서른일곱살의 늦은 나이에 임신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63년 아야코는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그해 정월 초하루, 아야코의 친정으로 신년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우리는 아사히 신문에서 1천만엔이라는 상금이 걸린 소설 공모 소식을 보았다.아야코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일찍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62년 월간지 1월호에 ‘태양은 다시 지지 않는다’라는 수기가 당선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하야시다 리츠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아사히 신문 공고를 본 다음날, 아야코는 하루 만에 완성한 줄거리를 다음날 내게 들려주며 써도 좋겠냐고 물었다. 그때 아야코는 라스트신을 먼저 생각하고 주인공 요코의 유서를 쓰고 있었는데, 그 유서에 “나의 마음은 얼어버렸다”라고 쓰여 있어서 내가 제목을 ‘빙점’이라고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근사한 제목이라며 좋아했다.잡화점을 그만둘 수 없었던 아야코는 가게문을 닫은 후 저녁 10시부터 새벽 1~2 시까지 소설을 써 나갔다. 추운 겨울에는 꽁꽁 언 잉크에 만년필을 찔러가며 집필에 몰두했다. 마침내 63년 12월 31일 오전 2시, 드디어 소설 이 완성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이렇게 해서 12월31일 오전 2시, 결국 소설 은 완성되었다. 복사는 2백장 정도, 마침내 빠뜨리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어쨌든 의지가 약한 사람의 전형인 내가 1천장 가까이 되는 장편을 완성한 것이다. (중략) 골판지 상자에 50장씩 철한 원고를 신중하게 쌓았다. 원고는 도중에 눈을 맞거나 비를 맞아도 젖지 않도록 비닐봉지에 싸서 넣었다. 명찰도 비닐로 씌웠다. 그 원고가 든 소포를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하였고, 아침이 되어 남편 미우라가 아사히 신문사 본국까지 제출하러 가주었다. 12월 31일 소인이 있다면 유효할 것이다. 그 소인을 두번, 선명하게 받아 제출하고 왔다고 미우라는 내게 말했다.”7월10일, 소설 이 1위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와 아야코는 잡화점을 정리하기로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 아야코가 나와 상담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고작 나의 재능을 가지고 상담을? 말이 안 된다. 소설 의 주인공 다가노의 딸인 야에에게 정이 들어, 야에만은 살리자고 그렇게 부탁했지만, 아야코는 야에를 허무하게 바다에 빠뜨려버렸다. 그녀의 소설은 어떻게 전개될지 나로서는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아야코의 원고 청탁이 늘어나면서 나는 회사를 퇴직했다. 아내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아야코는 한권을 출판했을 뿐이었다. 의 출판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해 이라는 일본 기독교단체 출판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를 쓰기 시작했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내를 돕기 위해 남자가 오랜 세월 해오던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걱정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선 남편이 밥을 짓든, 차를 끓이든, 서로가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아야코는 소설을 쓰게 되고, 강연에 초청받게 되었어도 건방진 기색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결혼 36년 동안 나를 대하는 자세가 눈물겹도록 일관되게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TV를 간절히 원한 그녀에게 “필요없다”고 미루다가 10년이나 지나서야 사줄 만큼 나밖에 몰랐던 것은 내쪽이었다. 그 사이 등 그녀의 소설이 TV 드라마로 방영되었지만 아야코는 친정집에 가서 봐야 했다.소설 의 연재를 시작하고 10개월이 지났을 때, 아야코는 내게 말하는 대로 원고를 써주지 않겠냐고 했다. 66년부터 아야코와 나는 구술 필기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70여권의 작품이 대부분 구술 필기로 세상에 나왔다. 1권당 평균 3백 페이지로 본다면, 원고지 2만장은 나의 펜으로 썼다는 계산이 된다.언젠가 “문학작품은 문자를 한자 한자 돌에 새기듯 쓰는 것이므로 구술 필기는 진정한 문학작품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한 아야코에게 구술은 정말로 적당한 수단이었다. 가끔 괴로웠던 것은 그녀가 구술하고 있는 도중에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야코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냉수로 얼굴을 씻곤 했다.원고를 퇴고할 때도, 그녀의 지시에 따라 가필이나 삭제를 했다. 처음에 가필 수정은 그녀 스스로 연필을 움켜쥐고 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읽은 것을 들으면서 그녀가 “그 부분 이렇게 고쳐주세요” “다음 행은 전부 지우시고” 등등의 말로 원고를 다듬어갔다.아야코는 취미가 적은 사람에 속한다. 그런 경향은 그녀의 소설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야구에 대한 현대소설을 쓸 경우, 야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모르고 쓰게 되면 이야기가 이상해집니다.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편이 무난합니다”라는 게 그녀의 설명. 때문에 아야코의 소설에는 야구뿐 아니라 골프, 마작 등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단 3분을 연설해도 메모를 하는 아야코는 모든 일을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다도를 1년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을 쓸 때, 다도의 대가 후지오 에이지로 선생은 “다도에 관해 전혀 틀린 부분이 없다”고 말해주기도 했다.그녀의 흥미는 오로지 문학적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소학교 5학년 때 이미 노트 한권에 시대소설을 쓴 적이 있다고 했다. 특히 13년에 걸친 요양중에 많은 서적을 읽었던 그녀에게 취미의 전부는 독서처럼 보였다.결혼생활 동안 아야코는 많이 아팠다. 67년 그녀의 목에 악성질환이 발병했지만 다행히 을 완성할 무렵 뜸 치료법으로 회복되었다. 80년 아야코는 얼굴의 대상포진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그후로도 혈소판 감소증, 만성 편도선염, 심장발작 등 수많은 병마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82년 직장암 수술에 이어 91년에는 난치병으로 불리는 파킨슨병까지 그녀를 괴롭혔다.아야코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복조차 입을 수 없었다. 혼자 눕거나 화장실에 가는 일도 그녀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병에 걸렸음에도 그녀는 언제나 숲처럼 조용했다.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었다. 성질 급한 나에게는 그녀의 모습은 커다란 훈련이 되었다.우리의 결혼식 축사는 “결혼생활은 즐거운 것뿐만 아니라 괴로운 일도 있지만 둘이서 협력해 나갈 때 극복할 수 있다”였다. 내가 아야코에게 협력하는 것은 극히 적지만, 남은 인생을 더 많이 그녀에게 협력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녀로 인해 좋은 것들을 실로 많이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야코와 결혼한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미우라 아야코는…

77세의 나이로 별세한 ‘빙점’의 작가.

64년 아사히 신문은 ‘잡화점의 주부, 깊은 밤 계속 글쓰기 1년’이라는 제목으로 창간 85주년 기념 1천만엔 현상공모에 미우라 아야코가 당선됐음을 알렸다. 42세의 나이에 등단한 그녀의 첫 소설 ‘빙점’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빙점은 일본문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독교적 시각으로 인간의 원죄와 구원 문제를 다룬 작품. 미우라 아야코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억울하다고 믿지만 그와 같은 오인이 인간이 비참해지는 원인이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이런 빙점(氷點)

이 존재한다” 밝힌 바 있다. 이후에 나온 작품에서도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한 주제는 인간의 원죄문제.

60년대 후반 ‘설국’과 더불어 일본작가 열풍이 불게 한 그녀 작품의 미덕은 작가가 보여준 솔직함과 담담함. 이는 그녀 개인이 갖는 비극에서 나온 듯 하다.

스물 네살의 나이에 갑작스런 고열로 병상에 누운 그녀는 이후 13년간 매일 천장만을 쳐다보며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이후 신과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병상에서의 습작이 그녀 작품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핵, 직장암, 파킨슨병, 포진 등의 난치병과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절망에 빠질 법도 했던 70 평생이지만 죽기 전까지도 남편 미우라 미쓰요의 도움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면서 그녀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작년에는 일본 전역 1만 5천명의 독자들의 참여로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 주요 작품

1. 길은 여기에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7,000원1994년 9월 출간

2. 길은 있었네 /문학사상사 5,000원1993년 6월 출간

3. 나는 비록 약하나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5,000원1993년 12월 출간

4. 내게 강같은 평화 /홍성중떡갈나무 6,000원1998년 12월 출간

5. 빙점 /홍신문화사 8,000원1995년 12월 출간

6. 살며 생각하며 /범우사2,000원1996년 10월 출간

7.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끝이 보인다 /한국장로교출판사 5,000원1998년 1월 출간

8. 연인의 그림자 /이장구아라출판사 5,000원1994년 1월 출간

9. 이 질그릇에도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5,000원1994년 9월 출간

10. 처마밑의 작은 새 /원종익웅촌 3,000원1989년 9월 출간

11. 총구 /한국장로교출판사 7,000원1997년 7월 출간

* 미우라 아야코 수필 중에서

사랑의 조건

나의 남편 미우라가 택한 신부감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나다. 나는 왜 그가 나같은 여자를 택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기만 하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데는 저마다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 선택 조건이 있듯이 남자에게도 저마다 미래의 아내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둥그스름한 얼굴을 가진 명랑한 여성’이라든가 ‘음식솜씨가 뛰어나고 자상한 여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스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을 지니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는 조건은 상대가 여자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이어서 새삼스럽게 내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여자가 남자인 자신보다 나이가 적어야 한다는 사실도 당연한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당신의 형이나 동생 또는 아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폐결핵과 척추 카리에스로 8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각혈도 합니다. 나이가 33세이니 나보다는 두 살이 더 많고 그다지 예쁜 편도 아닙니다. 그녀의 애인은 죽었고 그녀의 머리맡에는 항상 그 애인의 사진과 유골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녀의 병세가 언제 호전될 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에 그녀가 낫지 않는다면 난 절대로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당신은 “세상에 그런 법은 있을 수 없다!”며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나 자신도 물론 그런 경우에는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나의 남편 미우라 미츠요이다. 그는 공무원이었고 꽤 핸섬했다. 그는 여러 여성으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듣기도 했고, 혼담도 무척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마다하고 오직 나만을 기다려 주었다.

더구나 내 주위에는 여러 명의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가 나를 찾아왔을 당시에도 몇몇 남자친구들이 나의 병실을 번갈아가며 찾아와 주곤 했었다. 게다가 나는 예쁜 얼굴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그다지 순수한 편도 아니었다.

대체 그가 기다릴 만한 가치가 나에게 무엇이 있었을까를 자꾸 곱씹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 주일에 한 번씩 문병을 왔고 계속 격려해 주었다. 그 결과 그를 만난 지 5년 만에 나는 겨우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내 건강이 7년 걸려서 회복되든지, 8년 걸려서 회복되든지 간에 틀림없이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가 35세, 내가 37세 되던 해에 마침내 우리는 교회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20명 가량의 사람들이 약간씩의 회비를 내어서 홍차와 케이크를 마련하여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다. 간소하기 그지없는 파티였지만 정성이 가득찬 감동적인 것이었다. 결혼 전날까지 신열이 있던 나는 신혼여행도 포기한 채 남의 집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단칸방에서 그와의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나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긴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한 가지도 갖지 못한 나를 기다려 주고 끝내 아내로 삼아 준 미츠요의 사랑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것이리라.

참다운 사랑이란 것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볼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인간적인 결점과 허약한 신체, 남의 입에 오르내리던 연애 사건을 모두 포용한 미츠요의 사랑이야말로 참다운 사랑이 아닐까?

결혼한다는 것은 상대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용서할 각오가 있어야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와 결혼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손창원 인턴기자

냉수 한 그릇

출처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을 찾아서

일본 홋카이도 북부의 중심도시 아사히카와!

내가 인구 36만여 명의 아사히카와 에 간 것은 순전히 한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三浦綾子,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일본이 자랑하는 이 여류소설가 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64년 7월 10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조간 1면에

42세의 주부로 잡화점을 운영하는 미우라 아야코가

1천만엔 현상 소설 공모에 1위로 뽑혔음을 알렸습니다.

소설의 이름은 <빙점>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아야코 붐’을 일으킨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습니다.

1922년 아사히카와에서 태어난 아야코는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6 편의 소설을 썼습니다.

<길은 여기에> <양치는 언덕> 등 그녀의 작품은

일본은 물론 한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이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일본인이 미우라 아야코 일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작가의 삶을 산 그녀 였습니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코는 폐결핵과 척추질병 등으로

꽃다운 24세부터 13년간 병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봐야 했던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고통에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절한 고통을 통해 인간의 구원과 희망을 찾았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와 그녀의 남편인 미우라 미쓰요 씨는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평생을 산 일본의 대표적인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앞서 떠난 부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삶을 살고 있는 남편 미후라 미쓰요 씨의

이야기 역시 현대의 부부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지금 미우라 아야코는 물론 남편인 미우라 미쓰요 역시 이 땅을 떠났습니다.

저는 일본 북부 아사히카와 市 도요오카에 있는 자택에서

생전의 미쓰요 씨를 만났습니다.

아사히카와 에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인구 36만 명의 아사히카와는 일본 홋카이도 북부의 중심 도시입니다.

조금만 더 달리면 오호츠크 해에 다다르는 이 도시에서 유명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아사히카와 동물원을 찾기 위해서 이 곳을 찾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입니다.

그녀가 고통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된 데에는

남편 미우라 미쓰요 씨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미우라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아사히카와 市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미쓰요 씨는

1955년 6월 우연히 투병을 하던 호타 아야코의 병문안을 가게 됩니다.

침상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던 아야코에게

미쓰요 씨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3절까지를 읽어주었습니다.

노래를 해 달라는 아야코의 부탁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이라는 찬송가를 불러줬습니다.

세 번째 방문한 날에 미스요 씨는

‘하나님 제 생명을 아야코 에게 줘도 좋습니다.

아야코를 낫게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아야코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만난 지 5년 후에 이들은 결혼을 합니다.

그때까지도 아야코는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건강은 꽤 회복되었습니다.

미쓰요 씨는 3일간 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결혼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둘은 1959년 5월 24일 아사히카와 의 리쿠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미우라 미쓰요 씨가 35세, 부인인 미우라 아야코가 37세 였습니다.

그후 미우라 아야코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일상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쓰요 씨는 아예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야코가 구술한 내용을 필기했습니다.

1967년 <시오카리 고개>를 쓸 때부터 30여년동안

미쓰요 씨는 아야코의 충실한 비서로 지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08년 11월에 저는 OMF 선교사로 삿포로 국제 그리스도 교회를 담임했던

이수구 선교사 등과 함께 아사히카와를 찾았습니다.

아사히카와 에는 수많은 아야코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빙점>의 무대인 아사히카와 미혼린 에는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이 있습니다.

아야코가 죽기 1년 전인 1998년에 세워졌습니다.

문학관 건립을 위해서 그녀를 사랑한 독자 15,000 여 명이

십시일반으로 기부한 금액이 무려 2억 엔에 달했습니다.

아사히카와 도요오카에는 미우라 부부가 30년 넘게 살았던 집이 있습니다.

생전에 미쓰요 씨가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저도 그 곳을 방문했는데요. 담백한 2층 집으로

문패에는 ‘미우라 미쓰요, 미우라 아야코’ 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내부는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2008년에 84세 였던 미쓰요 씨는 당시에도 소년같은 미소가 아름다웠습니다.

‘저렇게 늙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곱게 늙은 분이셨습니다.

미쓰요 씨는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습니다

큰 다다미방은 아야코가 이 땅을 떠나기 전까지 집필 활동을 펼쳤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부는 밤늦게까지 앉아 서로를 도우며 소설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아내의 말을 남편이 옮겨 썼겠지요.

당시 1시간에 걸쳐서 미쓰요 씨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미쓰요 씨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습니다.

‘사랑이라고요? 사랑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네요!’ 그의 대답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미우라 아야코가 미쓰요 씨에게 어떤 아내였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아야코는 순종의 여인이었어요. 고통 속에서도 남을 돕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나에게 요카타 요카타 (좋아요 좋아요) 라고 말해줬어요.

학교를 8년밖에 다니지 않은 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위해줬어요.‘

그는 아내를 만나게 해준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3일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4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아야코 덕분에 (저도) 15권의 책도 쓸 수 있었습니다.‘

미쓰요 씨는 생전에 아내의 체취가 묻어 있는

2층 다다미방에서 잤다고 합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고통을 어떻게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한 미쓰요 씨의 대답입니다.

’아내는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구원의 빛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참으로 그녀는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하는 성경 말씀을 삶으로 실천한 것 같았습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죽기 직전에 ’죽는 것은 내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쓰요 씨는 아내가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사명까지 완수한

사명의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응접실에는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편지와 엽서가 가득했습니다.

편지마다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을 통해서

새 소망을 찾은 사람들이 보내는 감사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비서인 다미에 여사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사의 답장을 쓰는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시오카리 교회 기념관의 게시판에서 있는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미우라 아야코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빙점」_미우라 아야코의 삶과 그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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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코는 일본작가들 중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녀는 1922년 홋카이도 아사히가와 시에서 태어나 39년 17세의 나이로 아사히가와 시립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원 생활을 시작하여 46년 태평양 전쟁 패전 이듬해까지 계속했습니다. 이 7년 동안의 교원 생활이야말로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열성을 기울인 생활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에게는 이성보다 아동들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 아이들을 현관까지 배웅하면 아이들은 “선생님, 안녕!”하고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란도셀을 짊어지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몇 번이나 눈물을 찔끔거렸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아무리 사랑해도 아이들에게는 역시 어머니가 더 좋은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이들의 어머니가 부러웠습니다. 그녀는 무척 엄한 선생이었으나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녀가 교원 생활을 한당시, 그러니까 1940년에서 45년에 걸친 일본의 전시 교육이 담당한 가장 큰 과제는 ‘인간이 되기 전에 국민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의 교육은 천황 폐하의 국민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미우라 아야코가 이런 교육에 열성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인간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겁니다.

1945년 패전과 동시에 미군이 진주했습니다. 일본은 점령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제까지도 귀축으로 부르던 미국인에 의해 종전의 국정 교과서를 여러 군데 삭제해야만 했습니다.

“자, 먹을 갈아요.”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먹을 갈았습니다. 그 아이들의 천진스러운 얼굴을 보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먼저 수신 책을 꺼내게 해 미군정의 지령에 따라 지시를 했습니다.

“첫 페이지의 둘째 줄에서 다섯째 줄까지 먹으로 지우세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의 말에 따라 교과서에 먹칠을 했습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뇌까렸습니다.

“나는 이제 교단에 설 자격이 없다. 하루 빨리 교직에서 떠나야지.”

그녀는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본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미국이 잘못된 것일까?”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대체 어느 쪽이 옳으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교사로서 먹칠을 한 교과서가 옳은지 아니면 본래의 교과서가 옳은지를 알아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물어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시대라는 거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대란 대체 무엇인가? 지금까지 옳다고 말해 온 것이 그릇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시대의 의미일까?

‘나는 7년 동안 대체 무엇에 전력을 기울여 왔는가? 그처럼 열심히 가르쳐 온 것이 그릇된 것이었다면, 나는 7년을 허비한 셈입니다. 아니, 잘못을 범한 것은 허비와는 전혀 다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한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패전 후 할복 자살한 군인들처럼 우리 교사들도 학생들 앞에서 죽음으로 사죄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1946년, 그러니까 패전 이듬해에 교원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는 교단에 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교생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그녀는 쓸쓸했습니다. 7년 동안 힘껏 일했지만 아무런 총족감도 보람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릇된 것을 모르고 가르쳐 왔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만이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교원 생활을 그만둔 지 한 달 남짓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40도 가까운 열이 오르고 다리의 마디마디가 쑤셔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류머티즘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일주일쯤 치료를 받고 나니 열도 많이 내리고 다리의 통증도 가셨으나 체중이 7킬로그램이나 줄고 미열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진찰을 받은 결과 폐결핵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패전 직후라 식량 부족으로 국민들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였으며, 결핵특효약도 아직 나오지 않아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의사는 폐결핵을 늑막이라고도 말하고, 폐침윤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편이 어느 정도 병의 증상을 가볍게 느끼게 하여 환자가 절망감에 빠져 치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찾아간 요양소의 전문의도,

“가벼운 폐침윤입니다. 석 달 동안 입원하면 나을 수 있어요. 다만 곧 입원하지 않으면 죽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요양소에 석 달만 입원하라는 말을 들은 환자들은 그 후 여러 해를 입원해야 했으며, 반년 동안 입원하라는 말을 들은 환자는 거의가 죽어갔습니다. 요양 생활이래야 주로 안정을 취하고 영양식을 섭취하며, 포도당 주사나 가끔 맞는 것이 고작이라 병이 제대로 나을 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미우라 아야코는 결핵성 척추 카리에스까지 병발하여 깁스를 하고 침대에서 절대 안정을 취하며 대소변도 받아 내는 투병 생활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소꿉동무인 마에가와 다다시였습니다. 그는 미우라 아야코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웃으로 이사 와 같은 학교에 다닌 2년 선배로, 아사히가와 중학교를 거쳐 훗카이도 대학 의학부에 다니는 수재였습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마에가와가 문병을 온 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마에가와와 재회한 후 2, 3일이 지나 그에게서 엽서가 왔습니다. 이것이 그 후 그가 보낸 천여 통에 이르는 편지의 제 1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그와 주고받은 글들을 모아 이후(73년) <생명에 아로새긴 사랑의 흔적>이라는 이름의 서한집으로 펴냈습니다.

“기독교인은 위선자들이에요. 그러면서도 정신적인 귀족으로 자부하며 우리를 가엾은 인간이라고 내려다보고 있어요.”

하고 미우라 아야코는 문병 온 마에가와에게 대들 듯이 말했습니다. 그녀에게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이들처럼 싸움을 거는 묘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의 말을 마에가와는 싱글벙글 웃어 넘기기 일쑤였습니다.

기독교를 극구 부인하던 미우라 아야코는 병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자 마에가와의 전도로 성경을 읽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 대해 품고 있던 모멸적인 감정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이 당시의 그녀에게는 안이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시중에 우리 일본인은 천황을 신으로 믿고 신이 다스리는 이 나라는 패할 리가 없다고 믿으며 싸워 오지 않았던가. 이제 믿는다는 것의 두려움을 뼈저리게 알았을 게 아닌가.’

전쟁이 끝나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녀는 전시중에는 교회에 모이는 신자가 별로 없었는데 패전이 되자 교회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사람들이 경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마에가와는 <전도서>를 읽을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무심히 읽기 시작한 <전도서>에서 그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여기까지 두세 줄 읽는 사이에 그녀의 마음은 이 <전도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녀가 읽은 성경은 주로 ‘서로 사랑하라’ 또는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들이대며’라는 식의 교훈으로 일관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전도서>의 이 허무적인 사고는 그녀에게 기독교 전체를 다시 보게 했습니다. 이후 그녀의 구도 생활은 차츰 진지해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52년, 30세의 나이로 드디어 그녀는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마에가와의 인도와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마에가와가 폐결핵으로 갈빗대를 여덟 개나 절제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술을 받는 날 미우라 아야코는 깁스를 한 채 침대 위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에가와는 수술한 보람도 없이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그때까지 하루 속히 마에가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도조차 그를 위해 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앞머리와 사진을 흰 종이에 싸서 사람을 시켜 마에가와의 관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 마에가와와 같은 훌륭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저와 같은 어리석은 자가 살기보다는 마에가와가 살아 있는 편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녀는 어째서 마에가와가 죽고 자기가 살아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같은 기독교인인 미우라 미쓰요라는 사람이 어느 날 문병을 왔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죽은 마에가와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면의 인사를 나누면서 들으니 그 조용한 목소리까지도 비슷했습니다. 이 무렵의 그녀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침대 위에 일어나 앉을 수 있었습니다. 미쓰요도 14년 전에 신장 결핵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나머지 한쪽 신장도 나빠졌으나 마이신 덕택에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미쓰요는 아사히가와 영림국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우라 아야코가,

“당신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읽어 주세요.”

하고 부탁했더니, 그는 서슴지 않고 <요한복음> 제 14장 1절을 읽어 주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녀는 자기가 너무나 마에가와를 그리워하니까 하나님이 가엾게 여겨 그를 닮은 사람을 보내 주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미쓰요는 자주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차츰 알고 보니 외모나 말씨뿐만 아니라 취미와 사상까지도 마에가와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야코는 폐결핵이 완치되고 결핵성 카리에스도 7년 동안에 걸친 깁스 베드 생활 끝에 완쾌되자 미쓰요와 1959년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37세, 미쓰요는 35세의 만혼이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조그만 잡화상을 경영하다 소설 <빙점>이 <아사히 신문> 1천만 엔 현상 소설 공모에 당선됨으로써 일본 문단에 데뷔해 그 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946년 소설 <빙점>의 당선은 일본 문단에 있어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아사히 신문사>는 창립 8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현대 문학에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려는 의도에서 1천만 엔이라는, 그 당시의 화폐 가치로는 막대한 금액의 상금을 걸고 기성 작가를 포함해 신진 작가의 소설을 모집했습니다.

그런데 7백 31편의 응모 작품 중에서 작품 활동이라고는 거의 해보지 못한 중년 부인의 작품이 당선되었습니다.

1964년 7월 10일, 미우라 아야코는 <빙점>의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쁨과 흥분을 느꼈으나 곧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에 잠들기 전에 반드시 남편과 함께 성경을 한 장씩 읽었습니다. 밤 열 시에 가게 문을 닫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으레 자정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가게 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줄곧 이 고된 생활을 했습니다.

그녀는 24세 때부터 37세까지 13년 동안 줄곧 여성의 한창 때를 병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독자의 생애에서 괴로울 때에 상기했으면 하여’ 이 소설을 썼던 것입니다.

<빙점>의 주제는 ‘원죄’입니다. 인간은 죄에서 벗어나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는 나면서부터 죄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뿌리가 곧 원죄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을 하면서 괴로움에 시달리며 치유될 수 없는 영혼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데, <빙점>은 그것을 우리에게 좀더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한 병원장의 어린 딸 루리코가 피살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루리코의 어머니 나쓰에는 남편이 원장으로 있는 쓰지구치 병원의 안과 의사인 무라이 야스오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리하여 그와 단둘이 있고 싶어 세 살짜리 딸 루리코를 밖으로 내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길을 지나가던 인부 사이시 쓰치오에게 피살됩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색다른 사건에서부터 소설 <빙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부조기한 상황 하에서 등장인물들은 그 일상성의 연극을 연출합니다.

어린이에 대한 애정의 눈길은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이 지닌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다. 이것은 20대를 전후하여 7년간 초등학교 교사로서 정열적으로 일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녀는 패전 후 점령군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여러 군데 먹칠을 하라고 시켜야만 했습니다. 어제까지의 진실이 오늘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전후 일본의 교육은 아이들의 목을 정신적으로 비트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교육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살 난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뿐만 아니라 루리코를 도외시한 나쓰에도, 나쓰에를 사모하는 무라이도, 그리고 쓰지구치 병원의 원장 게이조까지도 같은 죄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게이조는 자기를 배반한 아내 나쓰에에게 복수하기 위해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딸을 데려다 기르게 하지만, 그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나쓰에는 정신없이 요코의 목을 조릅니다. 그처럼 미워한 사이시와 똑같은 살해를 나쓰에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코는 사이시의 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쓰에가 죽이려고 한 것은 순진한 소녀 요코입니다.

일찍이 카뮈는 인간의 비극은 실존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지만, 나쓰에는 요코의 실존을 오해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남을 오해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나쓰에는 자기의 실존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일생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으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저마다 저기는 죄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와 같은 오해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원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 실존의 오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요코입니다. 요코는 자기가 살인범의 딸인 줄 알게 되자 살아갈 의욕을 잃게 됩니다. 가엾은 소녀는 실연이나 실의에서가 아니라 자기 실존을 참을 수 없어 음독 자살을 꾀합니다. 그리하여 요코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빙점>은 끝나고 <속빙점>이 이어집니다.

<속빙점>은 요코의 재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주제는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는 사랑(아가폐)과 표리의 관계이 있습니다. 자살을 꾀하기 전에 게이조와 나쓰에 앞으로 쓴 유서에서 요코는 간절한 심정으로 ‘용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요코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의 핏속을 흐르는 죄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합니다.’

저자는 “<속빙점>을 마치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코는 죄를 깊이 느끼고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려고 했다. <빙점>은 거기서 끝난다. 그렇다면 재생한 요코는 당연히 죄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코가 참된 죄의 용서를 체득할 때까지 써야겠다는 생각에서 펜을 들었다.

<빙점>에서의 요코는 얄궂은 운명 아래 태어나 쓰지구치 가에서 양녀로 자라며 갖은 구박에 시달립니다. 그러한 요코의 비참한 처지에 많은 독자들이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요코가 궁지에 몰려 자살을 꾀했을 때 많은 독자들이 ‘요코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전보를 치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무 죄도 없는 요코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독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속빙점>에서의 요코는 전과 같이 수동적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유서에 쓴 ‘죄의 용서’라는 과제를 어떻게 떠메고 살아가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요코는 인간에겐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자기의 출생을 긍정할 수 없었습니다. 미츠이 게이코라는 요코의 생모는 남편이 출장중에 친정에 가 있었는데, 그곳에 하숙하고 있던 나카가와 미쓰오라는 학생과의 불륜의 관계로 요코를 낳았던 겁니다. 요코는 그런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의와 같은 감정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이 어째서 죄인가를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고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정죄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다. 인간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정죄를 맡기지 않는 것이다. 이 교만은 일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요코에 대해 써 나갔다. 그리고 정죄하는 것은 요코만이 아니다. 등장 인물들이 서로 곳곳에서 정죄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두려움을 자기 속에서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테마를 전개하면서 <속빙점>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의 하나는 구성의 묘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코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요. 특히 명목상의 오빠인 도오루와 그의 친구 기다하라 중 어느 쪽의 구애를 받아들일까요? 그리고 착잡한 심리상태에서 요코의 생모의 정체를 밝히려는 도오루의 행동은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빨리 알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요코의 이부 동생 미츠이 다츠야는 요코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마치 범행을 쫓는 형사와 같은 태도로 어머니의 비밀을 추적합니다. 그리하여 독자는 다츠야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미츠이 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그 결말을 고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자가 이 작품에 이끌리게 되는 둘째 이유는 그 진상의 해명이 통석적인 추리 소설처럼 범인이 판명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하나하나가 ‘죄의 용서’라는 테마를 풀어 나가 독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게이코의 남편 미츠이 야기치의 고백은 독자의 가슴에 자욱하던 안개를 말끔히 제거해 줍니다. 어찌하여 아내의 불륜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야기치는 게이조 부부에게 보낸 편지에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츠이 야기치가 아내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겐 아내를 책망할 자격이 없다는 죄의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속빙점>에서 또 하나 인상 깊은 장면은 유빙이 불타오르는 광경입니다. 요코는 분명히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코가 본 것은 육안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비친 사실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때의 요코의 심정을 정성드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눈에 비친 사실은 육안에 비친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변혁을 촉구합니다. 그리하여 요코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생모에게 무심코 말합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요코는 이 말을 고개를 숙인 채 눈길을 걸어가던 게이코의 등을 향해 호소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저자 미우라 아야코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빙점>도 <속빙점>도 저자가 호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모티브를 쓴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작품 전체에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그 메시지를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데 그치느냐, 아니면 요코가 추구한 과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요코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원죄와 싸워 ‘자기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죄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존재’를 붙잡은 겁니다.

문학을 인간의 해명이라고 볼 때 인간의 절망을 해명한 작품, 인간의 부조리를 해명한 작품, 인간의 자기 상실을 해명한 작품 등은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속에서는 인간 구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병상에 대한 진단은 있어도 그러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처방은 없습니다. <빙점>, <속빙점>에 이어 발표된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은 인간의 깊숙한 현실을 해명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제시한 구원의 문학이요, 소망의 문학입니다.

예컨대 그녀의 또 하나의 수작 <양치는 언덕>에서도 이 <빙점>과 <속빙점>의 주제가 시점을 달리하여 사랑, 즉 에로스가 아가페로 승화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주인공 나오미라는 아름다운 소녀는 전학해 온 학교에서도 여전히 창 밖만 내다보고 있을 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기가 목사의 딸이라는 것도 언짢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렇다 할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소녀의 마음속을 뒤덮고 있는 막연한 비충족감 때문입니다.

이 비충족감은 미우라 아야코의 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영어 선생인 다케야마 데쓰야는 이러한 나오미의 태도를 시정하려고 정성을 기울이며 이윽고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나오미도 여기 호응하는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만 그 정체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다케야마 데쓰야로서는 그녀의 동요가 조용히 성숙하는 것을 지켜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고뇌’가 시작됩니다.

한편 나오미의 친구의 오빠이고 다케야마 데쓰야의 친구이기도 한 화가 스기야마 료이치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오미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초등학생보다도 순진하고 붙임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는 참고 기다리는 데쓰야와는 달리 그녀를 정공법으로 공략하려 듭니다. 그는 여성과의 관계가 복잡하여 자기 자식을 낙태시키다가 잘못해서 상대방 여성을 죽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특색을 료이치를 통해 잘 묘사하고 있스빈다.

나오미의 아버지 히라노 고스케는 목사로서 오랫동안 사람들과 접촉해 온 제 6감에 의해 그런 료이치를 간파하고 자기 감정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려는 딸에게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딸을 설득합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어디가 좋다는 거냐?”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도 료이치와 같은 죄인이라는 종교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작품을 친자의 단절, 사랑의 갈등, 삼각 관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랑을 한결 승화시킨 구원의 문학이요. 소망의 문학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나오미는 료이치의 인간됨을 알지 못하고 다케야마 데쓰야의 사랑을 오인하며, 아버지의 간곡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그녀는 자기의 실존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놓인 처녀들이 으레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이 뭐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자기가 사람을 죽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빙점>, <속빙점>의 나쓰애와 마찬가지로 <양치는 언덕>의 나오미도 그처럼 좋아했던 료이치를 미워하고 경멸하고 혐오스러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파탄이 의외로 빨리 왔습니다. 일반 소설이라면 여기서 작품이 끝날 테지만, <양치는 언덕>은 그렇지 않습니다. 료이치에게서 도망쳐 친정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아버지 고스케는 다시 ‘사랑’에 대해 조용히 타이릅니다.

“인간은 서로 미워하게 마련이야. 서로 배반하도록 되어 있어. 인간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해. 사랑한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야. 료이치를 탓하는 너도 자주 남에게 용서받아야 할 존재야.”

여기에 미우라 아야코의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가 나타나 있습니다. 저자는 료이치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재기할 가능성을 보인 가운데 죽어 가게 합니다. 나오미는 그의 유해에 매달려 울며 그는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자기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고스케의 고별사에서 이 작품의 의도가 분명히 독자 앞에 제시됩니다. 그것은 많은 남녀가 서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사랑’에 대한 저자의 희망에 찬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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