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논나 장명숙 | [Eng]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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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논나. Milanonna. 밀라논나 유튜브프로필. 유튜브 채널명. 밀라논나 Milanonna. 본명. 장명숙 (張明淑). 출생. 1952년 10월 1일 (69세). 충청남도 공주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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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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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밀라논나 장명숙

  • Author: 밀라논나 Milan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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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7.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Cq9ukBNiNA

작가 & 작품 – 교보문고

작가소개

저자 밀라논나(장명숙)는 난 멋있어지겠다”라는 일념 하나로 패션계에 입문한 대한민국 최초 밀라노 패션 유학생이다. 지난 40년간 이탈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무대 의상을 제작하기도 하며, 페레가모와 막스마라 등 이태리의 가장 핫한 아이템을 한국에 들여온 명품바이어로 활동했다. 현재는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일념으로 한국의 진솔한 문화를 전하는 문화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일평생을 바쁜 커리어우먼으로 살아온 그녀는 다시 젊은 때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쿨하게 “ONE TIME IS ENOUGH!(한 번 젊어봤음 됐지!)”라고 외친다. 한 번 젊어봤으니 됐다는 그녀의 쿨함은 젊음을 바쳐 열심히 일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닐까. 죽을 때까지 변화하고 싶다는, 삶에 찌들지 않은 노인네로 보이고 싶다는 그녀는 60대의 나이에 “밀라논나(밀라노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도전한다.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와 이탈리아 밀라노 마란고니 복장예술학교를 졸업했다. 유학 후 1981년부터 덕성여대, 동덕여대, 한양대, 한국예술종합대학 등에서 강의했고, 에스콰이어와 삼풍백화점,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디자인 고문 및 구매 디렉터로 일했으며, ’86서울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디자인과 〈아이다〉, 〈춘향전〉, 〈돈 주안〉, 〈그날의 새벽〉, 〈환〉 등 수많은 연극과 오페라, 무용 공연의 무대의상디자인을 맡았다. 또 이탈리아 패션지에 한국 패션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한국에 이탈리아 디자이너와 문화계 인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과 이탈리아 간의 우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양국 간의 다양한 문화 및 산업 교류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 중이다.

‘밀라논나’ 장명숙 “어쩌다 보니 유튜버 됐죠”

장명숙 씨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책 이미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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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제 삶에서 허락받았다는 건 축복이에요. 그것도 건강하니까 할 수 있는 거잖아요.”유튜브와 방송 등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밀라논나’ 장명숙 씨는 18일 에세이 출간을 기념한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봉사 활동의 즐거움을 이렇게 소개했다.한국 최초의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파 디자이너, 유튜버 ‘밀라논나’라는 별칭을 지닌 그는 에세이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김영사)를 펴냈다.패션계에 입문한 젊은 시절부터 ‘밀라논나’라는 유튜버로 활동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노년의 현재까지, 그의 인생 경험을 녹인 책이다.저자는 자존, 충실, 품위, 책임이란 네 개의 열쇳말로 삶의 지혜를 풀어낸다. 지난해 여름부터 올여름까지 꼬박 1년간 집필했다. 받은 인세는 모두 기부하기로 했다.”일주일에 한두 번씩 청소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요. 오랫동안 행한 제 취미이자, 의무죠. 기부는 결심이라기보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사실 유튜브 활동이 수익이 나는지도 몰랐습니다. 유튜브도 원래 계획해서 한 게 아니고, 책을 쓰는 건 더더구나 계획한 게 아니었죠. 모두 덤으로 한 일입니다. 덤으로 받은 건 모두 다른 분들에게 돌려드려야죠.”장명숙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밀라노로 패션 유학을 다녀온 디자이너다. 밀라노 마랑고니 패션스쿨을 졸업한 후 한양대, 동덕여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 디자인을 담당한 경력도 있다.이후 ‘아이다’, ‘춘향전’, ‘돈 후안’ 등 수많은 오페라와 무용공연 등에서 무대 의상 디자인을 도맡았다. 이 같은 공로로 지난 2001년에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60대 후반이던 2019년 ‘밀라논나’라는 유튜브를 시작해 현재는 약 90만 구독자 수를 보유한 유명 유튜버가 됐다. ‘밀라논나’는 밀라노 할머니라는 뜻이다.”자식들을 대학 보내고 나니 50대 들어 자유로워졌어요. 주변에 있는 젊은 친구들이 권해서 ‘어쩌다 보니’ 유튜버가 됐어요. 영상이 많아지니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면 ‘어린이들에게 더 줄 수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유튜브를 계속하게 됐죠.”그는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라는 고유한 존재를 내가 인정하는 삶”을 살라고 조언했다. 또한 패션 철학에 대한 질문에는 “옷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입는 게 좋은 것”이라고 답했다.100세 시대라지만 “오래 살까 봐 겁이나 장수 식품도 안 먹는다”는 그는 현재를 사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에게 오늘이란 ‘논나'(할머니)의 삶이다.”젊었을 때는 치열하게 살았어요. 지금은 산책한 후에 온종일 빈둥거릴 때도 있습니다. 게을러질 수 있어서 지금이 좋습니다.”

당신은 미운 오리 새끼 아니라 ‘눈부신 가능성의 오리’예요

[한겨레S] 살롱 드 여울

패션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

작가로 거듭난 패션인, 유튜버 ‘밀라노 할머니’ 장명숙

구독자 88만명 육박하는 크리에이터이자 ‘딸들의 멘토’

개성 넘치는 존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꿈과 일상과 배움의 열정을 나누는 곳, 그곳이 바로 살롱이지요. 작가 정여울이 이 시대의 빛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속 깊은 정담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할머니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어준 블라우스를 여전히 즐겨 입는 밀라논나 장명숙씨. 사진 이승원 작가

“걸림돌을 디딤돌로!” “우리 엄마의 핍박이 저를 만들었어요.” “핍박과 싸울수록 나는 더 강해졌죠.” “나는 시간빈곤자가 아니라 시간관리자예요.”

한국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 구독자 87만 유튜버 밀라논나(밀라노라는 지명과 할머니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논나’의 합성어), 서울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디자이너, 이탈리아 정부 명예 기사작위 수훈자 장명숙의 ‘유쾌한 띵언(명언)’이다. ‘띵언 제조기’로 불리는 밀라논나의 입가에서는 시종일관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 미소가 아름다워서 나도 따라 자꾸만 웃게 된다. 나는 밀라논나의 따스한 말들을 이렇게 번역해본다. 괜찮아! 더 많은 것을 원해도 된단다! 마음껏 원하고,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사랑하거라! 꿈이 여러개여도 괜찮아! 우리는 수많은 꿈을 이룰 권리가 있어!

“명품은 브랜드가 아니라 ‘내 인생에 어울리는 옷’이죠”

내 속의 아이, 지금도 응원하죠

―반갑습니다. 밀라논나 장명숙(이하 밀라논나) 선생님.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젊고 아름다우세요. 그런데 이번 신간 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나이 자체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세련미의 아이콘인 선생님이, 어릴 때는 ‘못생겼다’는 핍박을 들으셨다고요.

“얼굴은 너무 작고 입은 너무 커서 ‘못생겼다’는 구박을 받았어요. ‘꼭 예뻐질 거야, 패션디자이너가 돼서 멋지게 변신할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꿈을 이루어서 패션디자이너가 되니까, 어머니가 이러세요. 명숙아, 네가 보는 이탈리아 잡지를 보니, 패션모델들 입술이 꼭 널 닮았네. 내 딸 못생겨서 시집 어찌 보내나 걱정이었는데, 이제 보니 내가 널 최첨단 유행에 맞게 낳아주었구나! 이러시는 거예요. 나처럼 입 큰 여자도 미인 소리를 들을 걸 미리 아시고, 절 이렇게 낳아주셨나 봐요.(웃음) 어머니의 구박이 저를 패션디자이너의 길로 이끈 거죠.”

―지금은 콤플렉스를 극복하셔서 그렇게 농담도 하시지만, 한국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이 되고, 패션디자이너가 되어 한국과 밀라노를 오가며 첨단 유행을 이끌어가고,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일흔살을 앞두고 유튜버가 되신 일까지,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이 없었을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아무리 바빠도 항상 책을 읽고 공부하는 습관이 밀라논나의 성공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이를 악물고 노력했지요. 지금도 베갯머리에서 이탈리아어 사전을 찾아가면서 공부를 해요. 아버지 영향으로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며 자랐고, 힘들 때마다 책 속의 명언을 떠올렸죠. 큰아들이 뇌수술을 하고 난 뒤 ‘뇌’에 대해서 궁금한 모든 책을 다 찾아서 봤지요. ‘뇌’를 공부하다 보니까 심리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온갖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들어주는 ‘큐앤에이’(Q&A) 인생상담도 하게 되고, 인생의 위기가 올 때마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어떻게든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려고 노력했지요.”

미소가 아름다운 밀라논나 장명숙씨. 사진 이승원 작가

―항상 쉼 없이 공부하고 남을 돕는 삶을 실천하는 것도 멋지지만, 밀라논나의 또 다른 매력은 ‘마음의 평온을 지키는 법’을 너무 잘 알고 계신다는 점이에요. 를 보면, 여자라서, 아시아인이라서, 일하는 엄마라서, 서럽고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다고 쓰셨어요. 저도 제 트라우마가 떠오르면서 울컥하더라고요. 그렇게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건강한 ‘멘탈’을 유지하게 된 비결이 있을까요. 우리 마음속에 마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진 상처의 말들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밀라논나 선생님의 비법을 듣고 싶습니다.

“심리학 책을 많이 읽으면서 ‘내면아이’라는 개념에 관심이 생겼어요. 아직도 어머니에게 들었던 부정적인 말들이 내 안에서 올라올 때가 있어요. ‘넌 참 유난스럽다, 너랑 똑같은 딸 둘만 낳아서 고생해봐라’라고 하신 적도 있죠. 그땐 참 아픈 말들이었지만, 이젠 제가 내면아이를 달래면서 말하죠. 명숙아, 언제까지 이렇게 징징거릴 거야! 그건 여섯살 때 일이야. 이제 어른이 됐잖아. 그분도 나름 사정이 있었겠지. 이렇게 제 안의 내면아이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나를 꺼내지요. 자기 안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자주 달래주고, 토닥여주고, 응원해주세요.”

―책에서 인생의 멘토 브라가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명숙은 디자이너로 살기엔 보수적이고,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살기엔 감성이 풍부해 평생 갈등할 것”이라고 하셨다고요. 상처받진 않으셨는지요? 제가 다 뜨끔하더라고요.(웃음) 창작과 교육, 또는 창작과 비평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전혀 상처 안 받았어요.(웃음) 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요. 브라가 선생님 말이 맞아요. 밀라노에서 디자인 공부할 때 제 옆에 ‘돌체앤가바나’의 창업자 도메니코 돌체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의 천재적인 디자인을 보면서 생각했지요. 이 사람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구나. 하지만 나는 한계가 있구나. 저는 디자인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50살에 서서히, 딱 그만뒀어요. 제 한계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미련 없이 접은 거예요. 디자인 말고도 하고픈 일이 많고요.(웃음)”

―단호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 참 어려운데 선생님은 그런 ‘내 안의 바운더리(boundary)’를 정하기를 정말 잘하세요. ‘바운더리 심리학’도 그런 것이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 정하기, 거절해야 하는 일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의 경계 정하기,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것의 경계를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평온을 찾아주는 길이죠. 그래서 책 속에서 한 기업의 ‘의전차량 제공’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모습이 참 멋졌어요. 욕망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잖아요.

“그때 저에게 일자리를 제안하신 분이 좋은 조건을 제시했죠. 계약 조건도 좋았지만, 의전차량 제공도 파격적이었어요. 차량이 준비된다면 당장은 편하지만, 나중에 일을 그만뒀을 때 너무 상실감이 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예의 바르게 거절했어요. 화려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제가 그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 미련이 생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차량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중에 그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때 깨끗하게 미련 없이 그만뒀어요.”

밀라논나 장명숙씨는 어떤 공간에서도 환하게 미소지으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사진 이승원 작가

―끝없이 변화하는 불안한 노동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글이었어요. ‘갑과 을’의 피할 수 없는 권력관계에서 ‘을이면서도 자존감 넘치는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을’의 위치에서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참 어려운 시대이니까요.

“돈보다는 자유가 훨씬 중요하니까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특권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해요. 훗날 그 자리를 떠날 때 미련이 남을 것 같은 특혜는 거절할 용기도 필요하지요.”

―인생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의 한 대목을 들려드리고 싶더라고요. 사르트르의 문장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지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걸 붙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걸 심사숙고해 선택하여 그 택한 일에 후회하지 말자.”

“맞아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문이 있어요.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위한 기도이지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 기도가 저에게 늘 힘이 됩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구분하는 지혜. 이 문장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내 한계가 과연 어디인가를 가늠해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반항심이 생겨요. 때로는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맞아요. 제가 이탈리아 유학을 떠났을 때 첫번째 충격이 바로 ‘국경을 넘는 일’이었어요.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는 것이 당시에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일단 아버지가 허락을 쉽게 안 해주셨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유학을 갔기 때문에 아이 걱정도 태산이었죠. 모든 것이 어마어마한 경계를 뛰어넘는 모험이었죠.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국경을 넘는데, 아무런 경계선이 없는 거예요. 비행기도 여권도 필요 없이 그냥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그렇게 경계를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지요.”

―그렇게 경계를 훌쩍, 아무 고통 없이 뛰어넘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본다면, 저의 꽉 막힌 상상력도 언젠가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 결혼식 때 흔히 쓰는 면사포를 거부하셨다는 에피소드가 바로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하하, 그때는 결혼할 때 다들 면사포를 썼거든요. 나는 그 치렁치렁한 베일이 싫었어요. 서로 이미 다 아는데 뭐 하러 얼굴을 가려.(웃음) 아우, 나는 그런 내숭이 싫더라. 난 내숭 떨기 싫다, 베일이 아니라 내가 디자인한 모자를 쓰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엄청나게 반대하셨지요. 아주 유난을 떤다고, 아주 별난 게 나왔다고.(웃음) 남들처럼 하라고, 남들 눈이 있지 않냐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어머니, 전 남이 아니에요. 평생 ‘남이 보더라도’라는 틀에 갇히기 싫었어요.”

저마다 사연이 있는 추억의 액세서리들과 편안한 신발이 멋스럽다. 사진 이승원 작가

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씨가 미소짓고 있다. 사진 이승원 작가

“돈보다 자유…남과 비교 멈추고 살고싶은대로 살았으면”

90년 된 옷도 여전히 ‘현역’이다

―틀에 박히지 않은 삶,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남과의 비교도 멈추고, 끝없이 후회를 남기는 습관도 버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껄껄 하지 말자’라는 명언도 남기셨잖아요. 그렇게 할걸, 진작 할걸, 이렇게 ‘걸 걸’ 하면서 후회하지 말자고요.

“껄껄 하지 말자, 그래요. 그렇게 후회없는 삶을 위해서 저는 남과 비교하는 일을 멈췄어요. 비교도 안 하고, 후회도 안 해요.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두 아들이 어렸을 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거죠. 지금도 두 아들에게 ‘엄마가 미안해’라고 표현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해요. 아들들이 날 닮아서 너무 쉬지 않고 일하는 것 같아서, 쉬어가며, 놀아가며, 즐기며 살라고 이야기해요.”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된 두 사건이 ‘큰아들의 대수술’과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라고 하셨지요. 큰아들이 어린 나이에 엄청난 뇌수술을 해야 했고, 구사일생으로 아들이 살아난 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많은 타인의 아픔을 돌보는 삶을 시작하셨다고요. 또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 백화점에서 중책을 맡고 계셨는데, 마침 근무일이 아닌 날 그 사건이 일어나서 함께 일하던 분들이 참사를 당하셨다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왈칵 났어요. 그 두가지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 아름다웠어요.

“큰아들의 대수술을 겪으면서 하루아침에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옥에서의 마지막 날 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것처럼, 내 머리카락도 하루 만에 수십년을 살아낸 것처럼 변해버렸죠. 고통스러웠지만, 아들이 기적처럼 살아난 것만으로도 제가 그 축복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둘째 아들한테는 공부하란 말도 안 했어요. 세계관이 바뀐 거죠.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또 한번 제 인생을 뒤흔들었죠. 하필 내가 출근하지 않은 날 그 사건이 일어났을까, 나를 살려주신 이유가 뭘까, 고민하면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돕는 삶을 살자고 결심했죠. 밀라논나 활동도, 이 책의 인세도, 대부분 보육원으로 들어가요. 아파하는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돕고 싶어요.”

―자신을 위한 돈을 거의 안 쓰시는 것 같아요.

“전 돈 쓸 일이 거의 없잖아요. 머리도 다 제가 잘라요. 옷도 옛날에 입던 옷을 입어요. 팔찌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들도 다 한참 일하던 때 마련한 것들, 내가 직접 디자인한 것들이거나 선물받은 것들이에요. 절 위한 돈은 필요 없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블라우스는 90년 된 옷이에요. 할머니가 한땀 한땀 손으로 바느질해서 지어내신 옷이에요.”

―90년 된 블라우스라니, 놀라운데요. (눈이 시리게 하얀 그 블라우스는 누가 봐도 정말 아름다운 옷이었다.) 밀라논나의 진짜 매력은 ‘옷 잘 입는 할머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옷장에 있는 옷만으로도 어떻게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 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명품을 산답시고 경쟁하듯이 백화점 앞에 줄을 서고, 코로나로 인해 ‘보복소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스러워요. 명품은 단지 브랜드가 아니라 ‘내 인생에 어울리는 옷’, ‘나를 있는 그대로 빛내주는 소품’이에요. 난 화장품도 비누도 최소한으로 써요. 물로만 세수하고 샤워해요. 몸에 가능한 한 화학적인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해요.”

―미니멀리즘과 제로웨이스트 운동도 이미 하고 계시네요. 또한 내 아픔을 겪으면서 타인의 아픔을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밀라논나 선생님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눈부신 영감이 아닐까 생각해봐요. “기성세대는 인생을 숙제 풀듯 살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축제처럼 살게 해줍시다.” 이 문장도 좋았어요. 엠제트(MZ)세대들이 밀라논나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꼰대스러움이 전혀 없으니까요. 너의 날개를 펼쳐 마음껏 날라고 용기를 주시니까요.

“저는 젊은이들에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죠. 누구에게나 그래요. 그게 후회를 가장 덜 하는 방법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인생상담을 요청하지만, 결국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사랑이란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중요해요.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줘야 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디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았으면 좋겠어요.”

―밀라논나 선생님으로 인해 저도 ‘나이 드는 것’이 두렵기보다는 ‘더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시간이 가는 것을 무작정 두려워하는 마음의 습관을 내려놓게 되어요. 저렇게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 나이 들수록 더 눈부시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구나, 위로받습니다. 밀라논나 덕분에 이제 나이 듦이 두렵지 않아요(웃음).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서, 제 이야기를 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본격적인 신문사 인터뷰는 오랜만이라 더욱 뜻깊은 자리였네요. 여러분, 차오 아미치(안녕, 친구들)!”

신발끈을 고쳐묶는 밀라논나의 모든 동작이 활기차고 우아했다. 사진 이승원 작가

말하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경청하는 밀라논나. 사진 이승원 작가

달리되, 멈춤을 두려워하지 않기

“인생의 가장 찬란한 때가 바로 노년이다. 원한다면, 가만히 앉아 하루 종일 햇살도 볼 수 있으니 눈이 부시지 않은가.” 책 속의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며, 밀라논나처럼 환하게 미소짓는 법을 배운다. 밀라논나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나중에 다시 보니, 밀라논나가 오히려 나보다 훨씬 밝게 웃고 있어 깜짝 놀란다. 나는 저토록 해맑게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다. 나는 아직 내 안의 어둠을 극복하지 못했구나. 그러나 밀라논나와 함께라면 왠지 다 괜찮아질 것만 같다.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유튜브를 보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내내 나는 ‘내 안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싱그러운 광합성을 즐기고 있는 듯한 행복한 착시를 느꼈다. 햇살처럼 따사로운 멋쟁이 언니 밀라논나와의 대화를 여기, ‘살롱 드 여울’에 소담스럽게 담을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달리되, 멈춤을 두려워하지 않기. 꿈꾸되, 집착하지 않기. 사랑하되, 때론 놓아주기. 밀라논나를 통해 나는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고, 절정의 순간, 미련 없이 멈출 수 있는 용기를 배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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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논나 장명숙 과거 유학 시절 및 유튜브

과거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이화여대를 졸업 후 남편과 결혼했고, 이태리 밀라노 유학 생활을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 패션 디자이너로 여러곳에서 활동을 해왔으며, 현재도 밀라노를 오가고 있으나 무엇보다 유튜브 ‘밀라논나’로 사랑받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장명숙(밀라논나).

최근 방송에 출연하면서 주목되고 있어 패션디자이너 장명숙(밀라논나)의 모든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목차-

장명숙(밀라논나) 프로필 과거 보수적인 집안 그리고 남편과 결혼 후 첫 번째 유학 결정 귀국 후 건빵을 먹어가며 쉴틈 없이 활동했던 시기와 두 번째 유학 삼풍백화점 해외 명품 담당 고문, 책 발간 외에 다양한 활동을 했던 시기와 근황 ‘밀라논나’ 뜻과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이유와 그 외에 가족 궁금증

1. 장명숙(밀라논나) 프로필

먼저 장명숙은 1952년에 맏딸로 태어나, 그동안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공식 의상 디자이너’, ‘삼풍백화점 해외 명품 담당 고문’ 외에 다방면으로 활동해왔고, 최근에는 밀라노와 서울을 오가며 양국의 문화교류 및 강의를 하는 교수로 활동과 유튜브 ‘밀라논나’로도 활동하고 있는 유튜버 및 패션디자이너로 프로필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명숙(밀라논나)

생년월일 – 1952년 10월 1일

나이 – 만 68세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장식미술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란고니스쿨(Marangoni Fashion Institute Milano)

가족 – 남편, 아들 2명

종교 – 가톨릭(세레명 : 안젤라 메리치)

그 외에 인스타그램 및 유튜브 사용함.

2. 과거 보수적인 집안 그리고 남편과 결혼 후 첫 번째 유학 결정

어릴 적 장명숙(밀라논나)은 종종 집에서 굿도 하고 점도 치고 하였던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에 의해 당시 정숙하기로 소문난 숙명여중, 숙명여자고등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하게 되는데요.

다만 중고등학생 때는 성당에서 연주되는 오르간 소리에 심금이 울렸을 정도로 오르간을 좋아했던 장명숙은 언젠가 종교를 선택하면 가톨릭을 가리라 생각하였기에 추후 종교는 부모님과 달리 가톨릭이 됩니다.

아무튼 보수적인 집안으로 인해 장명숙은 어린 시절부터 미적 감각이 뛰어나 손재주가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부모님이 못마땅하셨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던 부모님의 의해 결국은 이화여대 장식미술과를 졸업하자마자 서둘러 결혼을 추진하게 됩니다.

4학년 2학기 때 은사의 소개로 만나게 된 남편과 말이죠. 당시 남편 역시 혼인을 무척 원했던 터라 장명숙은 준비 중이었던 유학을 포기한 채 별생각 없이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였고, 아들을 놓으며 가정주부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사에 익숙해질 때쯤 장명숙은 자신이 ‘고여있는 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여 ‘인간’으로 사는 삶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결국 결혼으로 인해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죠.

그리하여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장명숙은 결혼 전 계획을 되살려 남편과 함께 이태리로 유학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부부과 함께 출국이 처음 허락되었던 1978년이었죠.

그렇지만 유학을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국가고시로 유학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이었죠. 거기다가 당시에 유학생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가지 못하였기에 시험을 본 뒤 아들은 친정에 맡긴 채 이태리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참고로 이때 유학생은 한 달에 1000달러밖에 갖고 나가지 못할 시기였습니다.)

3. 귀국 후 건빵을 먹어가며 쉴틈 없이 활동했던 시기와 두 번째 유학

이태리에 위치한 ‘미란고니스쿨(Marangoni Fashion Institute Milano)’에서 영화와 무대의상을 위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던 장명숙은 아무래도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할 것 같아 외무부에 타원을 했고, 외무부 측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려면 이태리인 재정보증인을 세워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아들을 데리고 와 아들과 함께 장명숙 가족은 유학 생활을 이어 가게 됩니다.

그 후 1980년 가을에 장명숙은 첫 번째 유학 생활을 마친 뒤 귀국하여 이 시기에 점심을 건빵으로 대체했을 정도로 바쁜 패션 디자이너 생활을 보내게 되는데요. ‘공간 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패션일 러스트 레이션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그 외에 바쁜 생활을 보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나게 되죠.

그리고 두 번째 유학을 준비하던 중 1986년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공식 의상 디자이너로 발탁을 하게 됩니다. 살인적인 업무였지만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고, 결국 성황리에 행사를 마친 뒤 두 번째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게 되죠.

두 번째 유학은 가족과 함께하지 않고 홀로 떠났고, 유학 생활 중 많은 것들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1988년 ‘토탈패션컴퍼니’에 고문으로 일하며 새로운 브랜드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마침 ‘88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차에 ‘스칼라좌’ 국내 공연을 성사시키더니 이런 일들로 인해 장명숙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게 됩니다.

4. 삼풍백화점 해외 명품 담당 고문, 책 발간 외에 다양한 활동을 했던 시기와 근황

그 후 1994년이던 42살에 장명숙은 ‘에스콰이어’ 고문을 하다가 막 끝낸 뒤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삼풍백화점으로부터 해외 명품 담당 고문 자리를 제안을 받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큰 아들이 고3이라 뒷바라지를 해야 해서 못한다고 했으나, 출퇴근도 마음대로, 뭐든지 마음대로 해도 된다며 부탁을 하여 결국 삼풍백화점 해외명품담당 고문으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1995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많은 지인들을 잃게 된 장명숙은 “나는 왜 살아남았지?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요.

거기에다가 1997년 IMF가 찾아오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하게 된 장명숙은 “그래 산이라면 넘고 강이라면 건너자 언제인가 끝이 보이겠지. 명숙아 이 시기를 잘 견디어 내면 나중에 큰 선물을 줄게”라며 자신을 다독이며 외환위기를 버텨내게 됩니다. 그 후로부터 장명숙은 봉사에 마음을 두고 봉사를 취미로 여기게 되죠.

그 후 2004년 장명숙의 두 아들이 모두 대학에 가자 장명숙은 삶을 다시 찾아보기로 결심하게 되는데요. 혼자 지내면서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고,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데요.

그리고 일 년의 절반은 밀라노에서 지내면서 밀라노와 서울을 오가며 양국의 문화교류에 한몫을 하고 있으며, 몇 년 전까지는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에서 해마다 4월에 하는 ‘디자인 박람회의 전문위원’을 3년간 했고, 현재는 밀라노에서 동양 문화, 한국 문화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특강도 하며, 이태리 여행은 물론 수녀님들을 도와 봉사 활동을 하며 근황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요.

5. ‘밀라논나’ 뜻과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이유와 그 외에 가족 궁금증

한편 지금은 유튜브 ‘밀라논나’로 활동하면서 현재 81.6만 명의 구독자수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리나라에 유럽 문화가 왜 곡 돼서 들어와 있는 것들이 많다고 느껴 책을 하나 더 쓸까 했다고 하는데요.

이때 어느 한 후배가 “선생님, 그러지 말고 유튜브를 한 번 해보세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유튜브를 더 많이 봅니다. 젊은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으시 면 책 보다 유튜브가 훨씬 나아요.”라는 말과 함께 유튜브를 권하여 68살이었던 2019년 10월에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장명숙이 할 동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이름의 ‘밀라논나’ 뜻은 밀라노와 이탈리아 어로 할머니를 뜻하는 논나를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하네요. 거기에다가 유튜브 수익금 모두 후원단체에 보낸다고 합니다.

한편 유튜브로 인해 많은 인기를 받고 있는 장명숙(밀라논나)는 인기에 힘 입어 2021년 ‘현대 쏘나타’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 장명숙 남편은 대학 교수라고 알려져 있으며, 아들은 글을 쓰는 작가로 영국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9년생 성형외과 의사인 오빠 장충현이 있으며, 여동생 2명이 있다고 합니다.(한편 유튜브를 통해 둘째 아들 민준홍 작가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작가라고 언급했다고 하네요.)

앞으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장명숙(밀라논나) 패션 디자이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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