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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 조성훈 목회자의 설교와 글
주제 : 믿음의 선진들 설교자 : 조성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Source: www.pastorcho.kr
Date Published: 7/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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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믿음의 선진들1 (히브리서11:1-12) – 대구아름다운교회
21. 믿음의 선진들1 (히브리서11:1-12)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
Source: www.covlife.co.kr
Date Published: 9/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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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 bridgestudio
믿음의 선진들 … 여전히 옛사람의 폐허 속에 누운채, 그들의 삶속에 짐승의 형상을 담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사탄의 형상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몇가지 권면과 …
Source: sites.google.com
Date Published: 8/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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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11:4-32 – 네이버 블로그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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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의 선진들(19)-다윗 – Daum 블로그
믿음의 선진들(19)-다윗 김 영익 목사 히11:32 (시 27:1-6)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하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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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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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 –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성경에는 인내로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통해 이 시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인내의 정신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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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의 행적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도 받은 사람들이요 증거도 가진 사람들로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얼마나 복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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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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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M. E. 바버자매님 전기 중에서 M. E. 바버자매님은 마치 이 땅위에 조용히 왔다가 간 외로운 여행자 같았습니다. 그녀는 1866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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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고백 – Home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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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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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믿음의 선진들 – 크리스챤월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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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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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믿음 의 선진 들
- Author: 최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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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6.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k8qMseikU8
조성훈 목회자의 설교와 글
본문말씀 : 히브리서 11장 7절-22절
주제 : 믿음의 선진들
설교자 : 조성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지난 주일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교회 생활 중에 가장 많이 말하게 되는 것이 믿음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을 통해서 믿음을 따라 살아간 선진들을 삶을 통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믿음은 우리가 보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큰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은 어떤 것이며 신뢰하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뢰하는 하는 삶에는 그에 대한 마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예로 노아, 아브라함, 야곱, 이삭, 등의 많은 선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믿음의 삶을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믿음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선진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선진들의 삶 – 노아
먼저 노아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을 보면, 그는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고, 후시대에 의인으로 등록됨을 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그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 보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이 세상을 물로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다고 할 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은 후에 노아의 삶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인가 아닌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아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 까요? 성경에 보면 그 때까지 이 세상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온 지구를 덮을 홍수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한 지역의 홍수였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현대 과학자들도 믿지 못하는데 비가 내리는 것조차 보지 못했던 노아가 하나님께서 비로 온 세상을 덮겠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지금 여러분이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앞으로 내가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 말씀하신다면 산에 올라가서 배를 만들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세상은 물로 멸망 시켰으나 앞으로는 불로 불사르기 위해서 준비해 두었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불탈 세상에 투자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삶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삶이 좋고,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남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하늘나라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멸망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방주를 짓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기에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 이 세상을 불태우리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에 재물을 쌓기에 바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은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부동산 업자 전화 한 통에 더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비를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방주를 지었고 이로서 그는 의인으로서 믿음의 후사가 되었고, 그의 행동은 이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나 말씀에 있어서 순종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선진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그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곧 신뢰함입니다.
선진들의 삶 – 아브라함
이 시간이 끝나고 나서부터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생활 해 보십시오. 말도, 행동도, 생각하는 것에도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살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나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에만 의지하여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의 가족이 장막에 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갑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을 짓지도 않고 평생을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장막을 짓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신의 친구라 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에 장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인간이 보기에 가능한 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의 생각에 가능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약속 하셨을 때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나사로가 죽어 썩어 냄새 날 때, 나를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씀하시고 썩어 가는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했을 때 나사로가 살아서 나왔습니다. 가능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믿는 것,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나이도 이미 지났고 모든 면에서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리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믿는 것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곳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떠나라고 했기에 떠난 것, 하나님의 성을 바라보고 늘 장막에 거했던 것,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한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님께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네 아들 이삭을 통해서 네 씨를 주리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약속 하셨는데 다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래도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던 아브라함 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가장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해 줄 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해 주는 이들에게 참 약하십니다. 니느웨이성이 악했을 때 멸망시키려 하셨으나 그들이 회개하였을 때 그들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고,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였으나 하나님께서 낳는다고 하시니 낳을 것을 믿고, 많은 나이에 갈 곳을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믿고 나온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선 기뻐하신 것입니다. 노아 역시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대로 되리라고 믿고 방주를 지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믿음의 대열에 선 것입니다.
선진들의 삶 – 이삭
이삭의 삶을 보면’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 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27:29, 창27:40 ) 어떻게 이삭은 그 아들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삭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삭이 장래 일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이삭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곧 믿음으로 장차 야곱과 에서에 대해서 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야곱도 그의 아들들에게 믿음으로 그 후에 당할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들에게 야곱은 축복하면서 아우가 더 큰 자가 되겠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것을 말했습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때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겠고 다시 너를 대리고 나오리라고 약속하셨으며 그러한 약속에 근거해서 야곱은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변치 않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설계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진들의 삶 – 요셉
요셉의 삶에서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자기 해골을 매고 나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군대 가운데서 아무런 힘도 없는 소수 민족이 그곳을 뚫고 나오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출애굽 과정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절대로 애굽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장자가 다 죽는 엄청난 사건 이후 이스라엘 민족을 나가게 하고서도 다시 그들을 쫓아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자신의 민족이 애굽에서 나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온 세상에 흩으신 다음에 나라 없이 1500년 가까이 살다가 말세에는 그 민족을 모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독립해서 모이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해도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시청에 가서 도시계획을 볼 것이 아니라 성경을 찾고 그곳에서 더 확실한 계획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진들의 삶의 특징
13절에 보면 구약의 선진들의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들은 곧 앞에서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그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이 말은 예로 아브라함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 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실지로 자신의 시대에는 자손이 그렇게 많아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또 적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 것을 약속 받았으나 이들은 그 자손들과 함께 그 땅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도 메시아에 대한 언급을 받았으나 메시아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야곱이나 요셉도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에 대한 약속은 받았으나 보지 못했고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것이 이루어질 줄 알고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메시아의 대한 약속을 알고 있었고, 보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보고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볼 수 있었을까요? 타이머신을 타고 주님 시대로 가서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브라함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가서 즐거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가끔 저는 생명수 강가에 앉아 낚시질 할 생각을 하며 즐거워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비록 하늘나라에 아직 가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합니다. 믿음으로 과거로 갈 수 있고 미래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를 현재 우리 것으로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지금부터 하늘나라로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서11장 13절 ‘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그들은 왜 이 땅에서 살면서 나그네로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생각했기에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았고 장막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본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정을 들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들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원했다면 그들의 본향(우르)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의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 곧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살아갔습니다. 11장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제는 저희가 더 나은 성을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는 조성훈이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떨까요? 우리끼리도 알고 지내기에 부끄러운 사람이 있고, 또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2장32절 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았고 그 땅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하나님께선 그들을 위해 한 나라를 준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25:34에 보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만족하며 살아간 자들에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결론
믿음의 삶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여기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갔으며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다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어떻게 했더라’ 하고 그 증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뢰는 항상 행함이 따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되리라고 나는 믿노라 라는 말에 아멘 하십니까? 여러분의 삶도 아멘 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여러분의 삶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믿음의 선진들1 (히브리서11:1-12)
21. 믿음의 선진들1 (히브리서11:1-12)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은 바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현실에 존재하는 존재물처럼 확신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그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에 기초하여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현실은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는 쪽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현실이 바로 실상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믿음의 눈이 생성되어 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 그것이 실상의 세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 모두가 허상의 골리앗을 볼 때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골리앗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허상의 세계를 본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무엇이 찾아왔습니까? 실상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 현재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음으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미래의 실상을 창조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바로 미래의 실상을 창조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은 실상의 삶입니다. 실상의 삶은 바로 하나님이 이루신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살려면 제일 먼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그것을 알려줍니다. 가인과 아벨은 왜 서로 다른 제사를 드렸을까요?
3.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고,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 방주를 준비하였고, 아브라함은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고, 사라는 믿음으로 잉태할 힘을 얻어서 많은 후손이 생육하게 되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보지 않고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자들입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그 약속이 당대에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훨씬 지난 후세에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루어질 그 시간을 쳐다보지 않고 약속을 쳐다보았습니다. 이는 어떤 차이일까요? 시간을 쳐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음의 선진들 11:4-32
b. 믿음의 선진들 4-32
앞 단락에서 ‘믿음의 정의’를 규명한 저자는 이제 믿음의 위대한 선진들을 한 사람씩 들어서 정상을 향해서 믿음의 산을 오르고 있다. 매 절마다 전개되는 그들의 믿음의 삶은 초인적인 능력과 결과를 가져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믿음은 가히 수소폭탄보다도 더 폭발적이고 혁명적이다. 믿음은 개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자체를 바꿔 놓기도 한다. 한편 본문의 다양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었으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원동력이 바로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v.4 저자는 2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절에서 시작하여 31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본절은 창 4:3-5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이유가 제사 절차상의 결함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고 아벨은 제사 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LXX 창 4:7). 또한 필로에 의하면 아벨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아벨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 which he obtained witness that he was righteous’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이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창 4:4). 즉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본문은 창 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는 ‘핏소리’로 되어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는 “di j h|” 디 헤스, by which”로 되어 있다. ‘헤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제사’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대로 아벨이 드린 제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이든 제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벨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
v.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 본절은 창 5:21-1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에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니 God had translated him’로 되어 있다(창 5:24). “옮기셨으니 metevqhken 메테데켄, had translated”는 ‘변화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metativqhmi 메타티데미’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바뀌다’, ‘변화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믿음으로 by faith’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시락의 교회서 44:16). 저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6: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믿음은 회개와 동일시 될 수 있으므로 유대 전승에서 회개의 표본으로 나타났던 에녹은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 있다.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본문은 에녹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5:22-24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Enoch walked with God’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he pleased God’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 뿐만 아니라 에녹에 관한 유대 전승마다 나타나는 어구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시락의 교회서 44:16; 지혜서 4:10,14).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연결지어 다음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v.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it is possible to please Him’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 that He is’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1:1,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주시는 misqapodovth” 미스다포도테스, a rewarder”은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v.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경고하심 crhmatisqei;” 크레마티스데이스, being warned of God”은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5; 12: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1절). 한편 “경외함으로 율라베데이스”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이란 의미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 ‘eujlabhqei;” 율라베데이스, moved with fear’는 ‘거룩한’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고 ‘두려움’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으나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노아가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이로 말미암아 di j h|” 디 헤스 ,by the which”에서 ‘이 헤스’는 지시 대명사로 ‘믿음’이나 ‘방주’ 또는 ‘구원’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헤스’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by his faith, NIV).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정죄 받았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었다. 한편 “믿음을 좇는 kata; pivstin 카타 피스틴, by faith”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아가 믿음이라는 규범을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 받았음을 시사한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창 6:22).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음을 시시한다.
v.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 저자는 본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 성경에 없어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kalouvmeno” 칼루메노스, when he was called”는 ‘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창 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 12:5,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창 12:7).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v.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우거하여 parwv/khsen 파로케센, he sojourned”는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였으며(행 7:5),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밭을 사라의 매장지로 사기전까지는(창 23장)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와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장막에 거하였으니 dwelling in tabernacle’는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속해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창 12:2,3)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v.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타낸다. ‘터’는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터가 있는 성 the city which has foundations’은 9절의 “장막 ejn skhnai'” 엔 스케나이스, in tabernacles”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장막은 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반면에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이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12:28; 13:14)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 하나님에 의해 견고히 세워진 ‘시온 성’을 암시한다(시 48:8; 87:1-3,5; 121:3; 사 14:32; 33:20). 한편 “경영하시고 tecnivth” 테크니테스, builder”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뜻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성’과 결부시킬 때 본절에서는 ‘설계자’나 ‘건축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으실 dhmiourgo;” 데미우르고스, maker”은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데미오스’와 ‘일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자’의 뜻을 지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음을 시시한다.
v.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 “잉태하는 eij” katabolh;n spevrmato” 에이스 카타볼렌 스페르마토스, to conceive seed”은 남성의 정액을 생산하는 기능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헬라 관용구이기 때문에 이를 사라에게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라 자신’이란 말을 주격으로 보지 아니하고 대격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사라 자신과 함께…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라고 해석하면 된다.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라도(창 18:9ff.)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v.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 him as good as dead’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자손을 낳을 수 없었던 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는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창 15:5; 22:17; 출 32:13; 신 1:10; 10:22).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자손으로 둔다는 기적적인 약속의 성취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한 바울의 진술처럼(롬4:19) 아브라함의 변치 않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었다(롬 4:22).
v.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이 사람들 These all’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외국인과 나그네 strangers and pilgrims’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와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47:9)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v.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이같이 말하는 자들 those who say such things’은 앞 절의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한 옛 조상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本鄕)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본향 patrivda 파트리다, a country”은 ‘선조의 땅’,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목적지가 하늘나라였음을 시사한다.
v.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본절의 ‘본향’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도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하였다. 야곱 역시 메소포타미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창 30:25; 31:3).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다(창 23:19; 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 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v.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하니 ojrevgontai 오레곤타이, they desire”는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15,16)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 a city’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v.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그는 순종하였다. 혹자는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식마저 포기해야함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한 믿음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의 성취 여부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크다란 모순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였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v.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으며(창 12:2), 이러한 아브라함의 민족은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한다고 약속하셨다(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v.19 생각한지라 –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생각한지라 logisavmeno” 로기사메노스, Accounting”는 부정 과거로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단호한 내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11,12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으며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22:5).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믿지 못하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비유컨대 ejn parabolh’/ 엔 파라볼레, in a figure”에서 ‘파라볼레’는 ‘유형’,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엔 파라볼레’는 본절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 한편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창22:10)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v.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창 26:2-5)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 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창 27:27-29,39,40). 이 때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자는 맏형인 에서였으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챘으며 에서는 그 나머지 축복을 받아야 했다(창 27:39,40). 저자는 이러한 부당성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삭의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예(例)에 해당한다. 한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 비합법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25:23).
v.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 본문은 20절과 마찬가지로 족장 야곱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음을 나타낸다.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였다(창 48:13-20).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장자인 므낫세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왼손으로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장자의 축복을 차자에게 해주었다(창 48:14,19,20). 이러한 사실은 장자에게 축복과 혜택을 부여하는 인간의 관습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은 그의 주관대로 뜻을 이루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본문은 창 47:31(LXX)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에는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지팡이’와 ‘침상’이라는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mth)가 모음을 붙이기에 따라 ‘말테'(matteh, ‘지팡이’)로 읽을 수도 있고 ‘밑타'(mittah, ‘침상’)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본문은 70인역이므로 전자를 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9,13절) 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특징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순례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v.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본문은 창 50:24, 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출 13:19; 수 24:32). 이러한 사실은 요셉의 믿음을 잘 예증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시사한다.
v.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수가 급증함에 따라 위협을 느끼며 그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내아이가 출산되었을 때 그들을 전부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출 1:9-10,15,22).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출생하였다(출 2:1,2). 저자는 70인역을 인용하여 본절에서 믿음으로 그 부모가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겼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출 2:2에는 모세를 숨긴 일을 한 사람으로서 오직 어머니만 언급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숨기는 일이 남편과의 합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70인역에서 부모가 모세를 석달 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ajstei’on 아스테이온, proper”은 ‘도시’라는 뜻의 헬라어 ‘아스튀’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도시에 속한’, ‘잘 양육된’ 혹은 ‘우아한’이란 뜻이다. 아마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을 예견한 듯하다.
v.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 “장성하여 mevga” genovmeno” 메가스 게노메노스, to years when he was come”는 출 2:11(LXX)의 ‘장성한 후에’를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히브리인 어머니를 통해서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출 2:9) 모세가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identity)을 알았음과 동시에 그가 내린 결단은 장성한 사람이 내린 신중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본문은 저자가 출 2:11,12의 내용을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세는 자기 형제인 히브리 노예를 돕는다고 무력으로 개입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자처한 행위였으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거절하였다.
v.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향유하며 세상적인 온갖 쾌락을 다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민족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교적 개념이 내포된 표현이며, ‘죄악의 낙’은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그대로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 큰 죄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더 좋아하고 ma’llon eJlovmeno” 말론 헬로메노스, rather choosing”는 ‘…보다 …을 택하다’라는 의미로 모세가 그 일을 판단하여 선택하였음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
v.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 63:9에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전 10:4에서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25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13:8)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셨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凌辱)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상 misqapodosivan 미스다포도시안, recompense of the reward”은 10:35절에서의 ‘상’과 동일한 용어로서 ‘보상’을 뜻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상은 바로의 궁전에 있는 온갖 보화들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으로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이었다. 저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 당하는 사실을 알고(13:13)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도록 권면한다.
v.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 모세는 애굽을 두 번 떠났었다. 첫번째는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한 일이며(출2:11-15),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때였다. 본절의 ‘애굽을 떠나 he forsook Egypt’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 중 전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모세가 유월절을 정하여 피 뿌리는 의식을 하게 한 사건인 출애굽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건은 출애굽 전에 되어진 일로서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일을 가리킨다. 본절의 해석의 문제점으로 모세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not fearing the wrath of the king’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할 때에는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출2:14,15). 그러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동기는 애굽인을 죽여서 생겨난 바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출2:14). 왜냐하면 출애굽기나 다른 성경에서 모세의 도망과 두려움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비록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 “보이지 아니하는 자 ajovraton 아오라톤, him who is invisible”는 유대교나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롬 1:20; 골 1:15; 딤전 1:17). 필로(Philo)는 바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이와 대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Life of Moses 1.88). 모세는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출 33:11; 민 12:7,8)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v.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 “정하였으니 pepoivhken 페포이에켄, he kept”는 ‘만들다’의 뜻인 ‘포이에오’의 완료형으로 유월절의 항구성을 시사한다. 모세는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제정하였다(출 12:14). 모세가 이같이 정한 것은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출 12:12,13)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의 죽음을 가져다 백성들로 하여금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하였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애굽인의 장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다.
v.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저자는 본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다(출 13:17-14:4).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곳까지 추격해 왔을 때(출 14:10-12)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바다를 건넜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믿음을 함께 나누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과 변치 않는 그의 사랑의 언약을 나타내는 경이로운 일로서 찬양되고 있다(출 15:1-21; 시 106:9-12; 사 43:16,17; 44:27). 홍해를 믿음으로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불신앙과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이스라엘백성을 추격하여 홍해 바다에 난 길로 들어 온 애굽군대는 바닷물이 본래대로 돌아와 물 속에 침몰하여 전멸하였다(출 14:23-28).
v.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 여리고 성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수2:1).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를 따른 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 주위를 6일 동안은 하루에 한번씩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칠 때 그 성이 무너져 내렸다(수 6:1-21). 이러한 사건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저자는 본절에서 특별히 실제 믿음을 갖고 행동한 여호수아나, 그를 따른 군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따라 행동으로 실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v.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기생 povrnh 포르네, harlot”은 이방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가 아니라 일반 창녀를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였다(수 2:1). 라합은 이러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받는 인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라, 아비가일, 에스더와 더불어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여인 중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바빌론 탈무드 Megillah 15a). 신약성경에서도 라합의 믿음은 본절 이외에 약 2:25에서 찬양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한다. 이와 같이 그녀가 믿음의 인물로 추앙 받는 것은 이스라엘의 첩자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이 동족에게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됨을 알고서도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실천한 행위였다(수 2:1-21). 한편 “순종치 아니한 자 toi'” ajpeiqhvsasin 토이스 아페이데사신, them that believed not”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긴 라합과 대조를 이루는 여리고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당하였다. 저자는 여리고 사람들의 멸망을 언급하므로 수신자들에게 순종치 아니함으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시키고 있다(3:18).
v.32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Kai; tiv e[ti levgw 카이 티 에티 레고, what shall I more say?”는 수사적이며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시간이나 지면 관계상 제한을 받게 될 때 흔히 사용되던 관용구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관용구를 사용하므로 믿음에 대한 예를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취급할 수 없음을 나타내면서 여섯 명의 믿음의 사람을 예로 제시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이들 네 사람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되었고(행 3:24; 13:20) 다윗은 자주 언급되었다(마 1:1,6; 막 2:25; 행 1:16 등). 여기서 이들 여섯 사람의 이름은 연대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바락(삿 4,5장), 기드온(삿 6-8장), 입다(삿 11, 12장), 삼손(삿 13-16장), 사무엘(삼상 1-15장), 다윗(삼상 16-삼하 24장)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기드온 – 이는 이스라엘의 다섯번째 사사로서 미디안의 군대를 무찌른 사람이었다(삿 7장).
바락 – 이는 네번째 사사로 가나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이었다(삿 4장).
삼손 – 이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서 그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을 괴롭힌 사사였다(삿 13-16장).
입다 – 이는 길르앗의 서자(庶子)로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암몬 족속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큰 전과를 거두었던 사사였다(삿 11-12장).
다윗 – 이는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 된 인물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다(삼상 16:1-13).
사무엘 – 이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일찍이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으며 성장 후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서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신앙으로 인도한 선지자였다(삼상 1-15장). 저자는 이들 여섯 명의 믿음의 인물들을 열거하고서 이들에 관한 일을 말하려면 자신에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ejpileivyei me ga;r dihgouvmenon oJ crovno” peri; 에필레잎세이 메 가르 디에구메논 호 크로노스 페리, for the time would fail me to tell of”는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수사적 관용구로서 고대 저술가들이나 필로(Philo)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표현법이다. 저자는 이런 수사법을 사용하여 이들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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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19)-다윗
김 영익 목사
히11:32 (시 27:1-6)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다윗을 언급합니다. 하나님도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오늘은 사사에 이어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다윗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워낙 뛰어난 사람이고, 성경에 믿음의 많은 기록이 있기에 한 시간에 다윗의 믿음을 다 언급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그의 믿음의 근간만을 찾고자 합니다. 다윗의 신앙 근간은 무엇이었을까요?
1. 하나님 주도권 중심의 신앙
성경은 다윗 왕조의 번영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해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2절). 강력한 블레셋 군대의 2차에 걸친 침입 역시 하나님께서 직접 작전을 지시하시며 주도해 가셨습니다. 그 결과는 두말할 필요 없이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며, 내 삶을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두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2절). 따라서 그는 중요한 결정이 자신의 몫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듣는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것은 다윗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대하 20:15). 이렇게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소유할 때 우리는 자신을 억누르는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삼상 17:41-58 47절 –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의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한 말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다윗의 이 같은 말들은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골리앗보다 하나님이 더 강한 분이심을 믿었고 결국 그 믿음에 의해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겁없는 사람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주권을 믿고 그 아나밈을 믿고 사는 사람의 특징은 무슨 일을 만나도 걱정이 없고 누구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강하고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 요16:33에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고,
사 41:10에서도 “두려워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잡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쓴 시 3:6절 말씀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련과 연단 속에서도 그것을 헤치며 이길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었기에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으로 인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때에 믿음으로 골리앗 장군 앞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 모든 문제를 보기 때문에 거침없이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시오니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늘 높이 올라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혹시 흑암에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오니 내가 주의 낮을 피하여 어디로 숨으리이까”하고 고백합니다.
오늘도 다윗과 같은 이런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 영국의 크롬웰 시대에 화이트 룩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공사로 스웨덴에 파견되어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밤 그는 나라일 이 심히 마음에 걸려서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안 신앙심이 돈독한 부하가 그의 침실로 찾아와 그에게 물었습니다.
“공사님이 태어나기 이전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다.”
“그러면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이 지상을 지배하시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을 하나님 손에 맡기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부하의 말을 들은 후 아주 기뿐 듯이 “그렇군” 한마디하고 그대로 편안히 잠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주권을 믿음 신앙심이 그에게 좋은 잠을 자게 한 것입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몇 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습니다. 모두 그 그림을 보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림 속에서 특히 포도주 잔을 보고 참 대단한 그림이라고 모두 평가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는 얼굴색이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붓을 들고 포도주 잔을 지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명작을 왜 지워버리느냐고 모두 놀랐습니다. 그때 다빈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패작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눈이 이 술잔에 모아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이 그림을 그릴 때의 의도가 빗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그리겠습니다.”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모든 초점을 예수께 두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나의 모든 관심, 모든 목적을 둘 수 있는 대상을 가지고 그 대상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자랑하는 삶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 주권을 중심으로 삼고 살고 있는가? 나를 중심으로 삼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다윗처럼 하나님 주권을 중심으로 삼고 하나님 주권을 세우기 위해 살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 성전 중심의 신앙
시편 27편은 다윗이 지은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요,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신앙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살았습니다. 그 전의 아름다움을 앙망했고, 그 전을 날마다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참으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 다윗의 성전 중심 신앙은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1) 다윗은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것을 가장 삶의 우선 순위로 삼게 했습니다.
모든 절기 때마다 백성들을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이면 제사와 축제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윗 시대에 와서 비로소 성가대가 조직이 되었고, 다윗은 모든 악기와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곳인지를 알게 했던 것입니다.
2) 다윗은 왕으로 있는 기간 동안 가장 큰 업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성전건축을 가장 소중한 업적으로 계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그토록 원하던 성전건축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성전을 사랑했는지 시편 84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성전을 사모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사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를 무엇보다도 교회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앞서간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성전과 교회를 사랑했고, 그래서 당대와 후대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 초대교회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당시 교회에 가는 것은 핍박과 고난이 따라오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선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좀 더 교회로 가까이 가기 위해 집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모임이 아니더라도 날마다 교회의 주변을 돌면서 한 순간도 교회가 머리와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앞서간 선진들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은 성전에서의 예배를 즐기고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것이 또한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즐겨했던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제사, 예배를 즐겼던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즐겁지 않으면 어떻게 성전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며, 교회를 사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지 않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결코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즐겁게 드린 것이 예배를 잘 드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고파야 합니다. 배만 고픈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는 예배가 고파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가 즐거워야 합니다. 다윗처럼 즐겨야 합니다. 형식을 떠나야 합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예배가 짐이 아닌 즐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제사와 예배를 즐겁게 드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에 교인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여러 형태로 재밌게 설명했습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생각 파,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 파, 예배를 시작하면 졸기 시작하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간 절약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에 있는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파, 예배 시간에 뒤적뒤적 성경을 읽고 있는 독서파, 주위의 아기에게 눈을 맞추고 까꿍거리는 유모파, 설교를 평가하려는 시험 채점파, 처음부터 팔장을 낀 채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파 등 천태만상의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 한 부부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박 집사 자동차가 3,000cc로 바뀐 것 보았어요?” 라고 묻자, 남편은 “못 보았는데”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아내가 “어느 성도님 부인이 밍크코트 입은 것 보았어요?” 다시 남편이 “아니 몰랐어” 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아내가 “그러면 오늘 설교할 때 목사님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 진 것 보았어요?” 라고 질문하자, 남편은 “설교 듣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도 못 봤다고 하니까 아내가 열 받아 남편에게 “그러면 오늘 성가대 찬양하던 이 집사 입술 립스틱으로 진하게 칠한 것 보았어요?” 라고 물어보자, 남편은 역시 “그것도 못 보았는데.”라고 대답합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아내는 “아니, 당신은 예배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하나도 못 보았어요? 예배 시간에 잠만 잤어요?” 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을 가리워서 눈물만 났지.”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남편은 예배를 잘 드렸지만 아내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구경꾼만 된 것입니다.
▶ 그랜트 시걸 기자가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에게 그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을 물었을 때 록펠러는 “나는 부모님에게서 세 가지 신앙유산을 받은 것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고 하면서 “첫 번째의 유산은 십일조 생활이요, 두 번째로는 맨 앞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요, 세 번째 유산은 교회에 순종하고 목회자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한 마디로 록펠러의 신앙유산의 핵심은 교회 중심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하나님 교회 중심의 삶을 반드시 이어가야 합니다.
3.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앙
다윗의 믿음 중의 백미는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도 가까이 했고 즐겼으며 그 말씀대로 행하고 누리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시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25:4-5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시119:8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119: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119:14-16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시119:36-40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119:50-56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시119:97-103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119:126-128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119:162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 다윗의 하나님 주권 중심의 삶, 하나님교회 중심의 삶, 하나님 말씀 중심의 삶, 신앙을 여러분도 소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요안나 원글보기 : 요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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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
성경에는 인내로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통해 이 시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인내의 정신을 살펴보겠습니다.
1. 욥의 인내
욥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자녀도 많고 재산도 풍족하여 육신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욥을 시기했던 사단은 욥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험들을 걸어왔습니다. 욥의 재산을 전부 잃게 했고 자녀들까지도 모두 죽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들을 겪으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찬양을 돌렸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 1:21~22
사단은 계속해서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에 악창이 나게 하여 그를 시험했습니다. 욥의 부인은 그에게 아직도 하나님을 믿느냐며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돌아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2:10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사단의 시험에서 승리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큰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시험을 받기 전보다 갑절이나 되는 재산을 주셨고 많은 자녀들까지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욥이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인내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욥의 인내를 본받아 믿음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들을 인내로써 이기고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약 5:11
2. 사도 바울의 인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감옥에 여러 번 갇히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맞고 돌로 맞고 파선하여 하루 동안 바다를 떠다니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도 여행길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으며,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인내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인내로써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1
우리는 인내로써 환난과 시련을 이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도 바울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결코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됩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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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 (히브리서 11:33-40) 33절부터 40절까지는 아직까지 언급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적에 따른 고난과 승리의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했는가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이런 귀한 믿음을 위해 그들이 당한 고난의 생애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적 33절에서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나라들을 이기기도 했다는 말은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역대의 위대한 사사들이나 왕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땅이 넓혀졌으며 국위가 널리 선양된 것을 의미합니다. 의를 행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사사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왕들의 의롭고 정의로운 통치를 말합니다. 약속을 받기도 했다는 말은 39절에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과 상반되는 것 같으나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언약한 개인적이며 국가적인 문제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고 39절의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약속은 종말론적인 약속으로 최종적으로 생명을 얻어 영생하는 부활이나 천국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인류의 종말에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대 앞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은 일은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의 입을 봉한 사건을 의미해 줍니다. 불의 세력을 멸한 일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렬히 타는 불 풀무 속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들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은 또한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한 것입니다. 2.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생명을 버린 믿음의 사람들 그런데 우리는 35절 이하의 말씀에서 부활과 더 좋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은 실인즉 부활이라고 말하기엔 미흡한 사건입니다. 왜냐 하면 여기에 언급한 부활자들은 그 후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은 사건은 사르밧 과부의 경우 엘리야가 살려주었고, 수넴 여인의 경우 엘시 사가 살려 주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의 경우, 예수님이 관과 무덤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여자들에게 돌아갔으나 사실인즉 그들은 다시 죽어 무덤에 장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부활의 한 그림자일 뿐 부활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부활로 받았다는 말과 부활을 얻고자 했다는 말은 다른 말입니다. 하나는 현재 받은 상태를 말하고 하나는 앞으로 받을 것을 소망으로 바라본 것을 말합니다. 더 좋은 부활이라고 한 말은 방금 전에 여자들이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더 좋은 부활이란 부활의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한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형체는 여러 가지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늘에서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상급은 부활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모두 영광스럽지만 그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부활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이 부활로 최고의 영광을 누리셨는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으며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누릴 최고의 부활은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자에게 주시는 첫째 부활의 상급입니다. 더 좋은 부활이란 이 첫째 부활자가 받을 영광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며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받아 누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 같은 부활을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는 일에 조금도 주저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35절로 3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38절 말씀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을 이겨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39절과 40절 말씀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 주는 연결고리가 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약속으로 이 약속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도 받은 사람들이요 증거도 가진 사람들로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나 옛날의 믿음의 선진들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분명한 약속을 받았으니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M. E. 바버자매님은 마치 이 땅위에 조용히 왔다가 간 외로운 여행자 같았습니다. 그녀는 1866년에 영국의 피젠홀 , 써폴크 카운티에서 루이와 마르다 바버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M. E. 바버가 63세 되었을 때 데려 가셨습니다.
그녀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주님에 의해 두 번 중국에 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집을 포기하고 수천마일 떨어진 낙후된 나라로 외롭게 여행했습니다. 그녀는 1930년 3월 1일 그녀가 죽기까지 그녀가 신실하게 계속했던, 주님을 위해 바친 그녀의 최고의 해들을 후조우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보냈습니다.
한 형제님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막14: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워치만 니 형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의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녀에 대한 그의 감사함을 후에 썼습니다. 마지막 장 ‘복음의 목표’에서 니 형제님은 그녀의 “주여, 주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제 마음은 부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를 인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녀에게 물었는데,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중국인 젊은이들 중 일부는 그녀로 인해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왜 더 큰 도시로 가서 집회를 세우고 일하지 않습니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사는 것이 허비인 듯 했습니다.
한 형제는 그녀에게 “아무도 당신이 아는 것처럼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가장
산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방에 필요가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나가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 힘,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다시피 말했습니다.
허비였을까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중국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바 된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씨앗은 정녕 외로움, 수치 당함, 은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함은 그분은 그녀로 활짝 피어 열매 맺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녀로 풍성히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이 사실을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M. E. 바버자매님 전기 중에서-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진들
정동운(황등교회 담임목사)
오늘 우리는 순교자기념주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순교신앙이 숨 쉬는 교회, 순교자의 거룩한 피가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사도행전 7장 54절∼60절)은 초대교회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집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스데반집사님이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하는 집사의 직분을 안수 받고 감당하던 사람입니다. 일곱 집사들 가운데 대부분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스데반 집사에 대한 말씀과 기록들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순교의 신앙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 이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때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목숨을 내놓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 하는 설교를 하다가 사람들의 무서운 미움과 핍박으로 결국에는 돌에 맞아 순교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교자가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많은 복음의 사역을 감당했음에도 순교자의 영광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다고 하는 것, 이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누가 이런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까? 먼저 믿음이 준비된 사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살리라고 다짐할 때, 우리는 순교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또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자가 순교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를 살아가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 나의 기쁨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할 때 우리는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위에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순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1866년 9월 2일,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으로 올라왔다가 그 배와 함께 불에 타 순교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백성들에게 성경을 전달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헛된 것 같이 보였지만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서 몇몇 사람들에게 성경이 전달되고 그리고 예수가 구주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기초를 닦아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 땅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생명 바침으로 예수가 구주라고 하는 것이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진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황등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신 네 분이 계십니다. 이재규 목사님, 변영수 장로님, 안인호 사모님, 백계순 집사님 이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황등교회 안에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이 네 분은 믿음의 반석 위에서 참되고 거룩하게 살아갈 네 가지 자세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이재규 목사님은 교회를 섬기시고 사랑함에 최선을 다하신 분이셨습니다. 변영수 장로님은 청년시절부터 나라사랑을 실천하신 애국지사셨습니다. 안인호 사모님은 남편이 평양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상황에서 연로하신 시부모를 극진히 공경하고 6자녀를 양육하셨던 가족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백계순 집사님은 육신의 가족을 넘어서 믿음 안에서 부모와 같이 가족처럼 지낸 교회의 어른이신 계원식 장로님의 가족을 사랑하셔서 목숨을 건 수고를 하시다가 순교하신 교인사랑의 실천자이십니다. 이처럼 우리 황등교회 순교자 네 분은 교회와 나라와 가족과 교인 사랑을 실천하신 아름다운 믿음의 선진들이십니다. 오늘 특별한 순서로 우리교회와 우리 지역의 다음 세대를 대표해서 4명이 나와서 네 분의 순교신앙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가슴 깊이 되새기는 글을 발표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순교자의 피가 기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기념되고 이어가야하는 것임을 되새길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있는 순교자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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