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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7 (화) [하루 한 장]“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1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말라기가 끝나고 400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네 제국이 지나는 세월 동안
하나님은 그저 지켜보셨습니다
인간의 번영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지 보시고는
그 무기력과 불가능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신약을 시작하는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로
첫 포문을 열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보’는 게네시오스로서
창세기를 뜻하는 제네시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기원을 살펴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왕이심을
알려주는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의 죄를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구원하실
우리의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부정한 여인들 모두를
새로운 가치로 변화시킬 왕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분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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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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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복음 1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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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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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주석
마태복음 제 1장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혀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
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
대적 필요성을 느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
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
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
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
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
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
와 더불어. 선지자 아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
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
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게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
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
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
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
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 은예수야말
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
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
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
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
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자손(* , 휘오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 , 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
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
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
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
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
)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
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
서 ‘메시야’란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
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
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
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
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
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
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
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
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
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 ,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
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
(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
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
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
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
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
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 , 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블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
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
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
실히 드러난다.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
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
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
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
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
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낳고(* , 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
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
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
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
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
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
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
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
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
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
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
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
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
(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
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
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베레 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
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
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
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1:4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
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
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
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
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
(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
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
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
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1:6
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
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
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
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
(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 11:3)라
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다시금) 덧
입은'(* , 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
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
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1:7
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을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도 불구하고 그들
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1:8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
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
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
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
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
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1:9
웃시야3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12;왕하 15:13, 17-20비교)
와 동일 인물이다.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
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벧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1:11
바벧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벧론 유수(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
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벧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
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벧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
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왕하 24:6-16), 바벧론
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벧론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
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편 요시야와 여고냐(여
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
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
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
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
고냐와 바벧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Gundry). 한편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
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1:12
바벧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
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
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
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이다.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
(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
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스알디엘은 스룹바벧을 낳고 – 스룹바벧을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
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체
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벧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
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 곧 형수
(兄嫂)에게서 스룹바벧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바벧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
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벧은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1:13-15
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
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
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름들
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
다.
=====1:16
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러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
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
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
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
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
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
는 동시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
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
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 )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
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 ),
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
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
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스도가 인간
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 )
의 헬라식 음역이라고도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 )에서 유래했
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뗬 것이 되었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
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1:17
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
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
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
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치(Monarchy), 제 3의박 14대는 성직 정치
(Hierachy) 등으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
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
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
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
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
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
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
(* )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價)가 도합14(다렐<* >이4, 와우<* >가
6, 다렐<* >이 4)가 되기 때문이다.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
明期)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
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
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렘 22:30), 포로 이후
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
(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음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 , 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 , 후토스엔)에서 그 뜻
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
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
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
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
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
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
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
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
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예식을 끝내
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
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
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
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
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
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
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
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
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
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
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11;골 1:15-19).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
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
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
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
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
두르지 애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
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
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
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
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
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
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
다. 그리고 ‘…하고자하여'(* ,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않기로 서서
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
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
용히 묻어버리려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
려 했던 것이다.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
)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
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 ‘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
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
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
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
도 생각지 못했율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
)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
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
(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
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
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
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
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
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
다(눅 1:26, 27).
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앞에 나온 족보(族
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
)는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 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
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
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고
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
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
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 , 텨세타이 데)
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
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
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니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
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
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
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 )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 내지는 짧은 형태
의 ‘예수아'(* ,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
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
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
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벧(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
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
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
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 ,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
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
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
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
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 ,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
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
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
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목적과 다윗
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
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
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
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
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
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
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
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
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
은'(* ,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
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
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1:22-23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
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
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13:35;21:4;26:56;27:9 등)는 사실과 성
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
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
틀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
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
(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
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
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
을 소유하게 될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
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
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
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 )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 )와
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
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
스'(* )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 ‘파르데노스'(*
)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
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
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
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 )
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
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
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
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
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
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
어이다(사 7:14). 한편’임마누엘'(* ; )은 ‘함께
‘(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 )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 )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
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
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God with us)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
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
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24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
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
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
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1:25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
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 ),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 )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
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
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
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흣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
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
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헬라어 마태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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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휘우 다윋 휘우 아브라암
개역개정,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새번역,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또는 ‘나심은’
우리말성경,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가톨릭성경,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어NIV,1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영어NASB,1 The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영어MSG,1 The family tree of Jesus Christ, David’s son, Abraham’s son:
영어NRSV,1 An account of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1 βιβλος γενεσ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υιου δαβιδ υιου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1 liber generationis Iesu Christi filii David filii Abraham
히브리어Modern,1 ספר תולדת ישוע המשיח בן דוד בן אברהם׃
성 경: [마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계보 개관(槪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 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 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자손(*, 휘오스).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 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란 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 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브라암 에겐네센 톤 아사앜 이사앜 데 에겐네센 톤 야콥 야콥 데 에겐네센 톤 유단 카이 투스 아델푸스 아우투
개역개정,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새번역,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우리말성경,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가톨릭성경,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영어NIV,2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영어NASB,2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and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영어MSG,2 Abraham had Isaac, Isaac had Jacob, Jacob had Judah and his brothers,
영어NRSV,2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and Isaac the father of Jacob, and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헬라어신약Stephanos,2 αβρααμ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σαακ ισαακ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ακωβ ιακωβ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ουδαν και τους αδελφ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Abraham genuit Isaac Isaac autem genuit Iacob Iacob autem genuit Iudam et fratres eius
히브리어Modern,2 אברהם הוליד את יצחק ויצחק הוליד את יעקב ויעקב הוליד את יהודה ואת אחיו׃
성 경: [마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낳고(*, 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유다스 데 에겐네센 톤 파레스 카이 톤 카라 에크 테스 다마르 파레스 데 에겐네센 톤 헤스롬 헤스롬 데 에겐네센 톤 아람
개역개정,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새번역,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우리말성경,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가톨릭성경,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영어NIV,3 Judah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whose mother was Tamar, Perez the father of Hezron, Hezron the father of Ram,
영어NASB,3 Judah was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by Tamar, Perez was the father of Hezron, and Hezron the father of Ram.
영어MSG,3 Judah had Perez and Zerah (the mother was Tamar), Perez had Hezron, Hezron had Aram,
영어NRSV,3 and Judah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by Tamar, and Perez the father of Hezron, and Hezron the father of Aram,
헬라어신약Stephanos,3 ιουδ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φαρες και τον ζαρα εκ της θαμαρ φαρε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σρωμ εσρω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ραμ
라틴어Vulgate,3 Iudas autem genuit Phares et Zara de Thamar Phares autem genuit Esrom Esrom autem genuit Aram
히브리어Modern,3 ויהודה הוליד את פרץ ואת זרח מתמר ופרץ הוליד את חצרון וחצרון הוליד את רם׃
성 경: [마1: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 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아람 데 에겐네센 톤 아미나담 아미나담 데 에겐네센 톤 나아쏜 나아쏜 데 에겐네센 톤 살몬
개역개정,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새번역,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우리말성경,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가톨릭성경,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영어NIV,4 Ram the father of Amminadab, Amminadab the father of Nahshon,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영어NASB,4 Ram was the father of Amminadab, Amminadab the father of Nahshon, and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영어MSG,4 Aram had Amminadab, Amminadab had Nahshon, Nahshon had Salmon,
영어NRSV,4 and Aram the father of Aminadab, and Aminadab the father of Nahshon, and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ρ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μιναδαβ αμιναδαβ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ναασσων ναασσ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αλμων
라틴어Vulgate,4 Aram autem genuit Aminadab Aminadab autem genuit Naasson Naasson autem genuit Salmon
히브리어Modern,4 ורם הוליד את עמינדב ועמינדב הוליד את נחשון ונחשון הוליד את שלמון׃
성 경: [마1: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살몬 데 에겐네센 톤 보에스 에크 테스 라카브 보에스 데 에겐네센 톤 요벧 에크 테스 룯 요벧 데 에겐네센 톤 예싸이
개역개정,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새번역,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우리말성경,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가톨릭성경,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영어NIV,5 Salmon the father of Boaz, whose mother was Rahab, Boaz the father of Obed, whose mother was Ruth, Obed the father of Jesse,
영어NASB,5 Salmon was the father of Boaz by Rahab, Boaz was the father of Obed by Ruth, and Obed the father of Jesse.
영어MSG,5 Salmon had Boaz (his mother was Rahab), Boaz had Obed (Ruth was the mother), Obed had Jesse,
영어NRSV,5 and Salmon the father of Boaz by Rahab, and Boaz the father of Obed by Ruth, and Obed the father of Jesse,
헬라어신약Stephanos,5 σαλμ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βοοζ εκ της ραχαβ βοοζ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ωβηδ εκ της ρουθ ωβηδ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εσσαι
라틴어Vulgate,5 Salmon autem genuit Booz de Rachab Booz autem genuit Obed ex Ruth Obed autem genuit Iesse Iesse autem genuit David regem
히브리어Modern,5 ושלמון הוליד את בעז מרחב ובעז הוליד את עובד מרות ועובד הוליד את ישי׃
성 경: [마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예싸이 데 에겐네센 톤 다윋 톤 바실레아 다윋 에 에겐네센 톤 솔로모나 에크 테스 투 우리우
개역개정,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새번역,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말성경,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습니다. 다윗은 원래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가톨릭성경,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영어NIV,6 and Jesse the father of King David.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whose mother had been Uriah’s wife,
영어NASB,6 Jesse was the father of David the king.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by Bathsheba who had been the wife of Uriah.
영어MSG,6 Jesse had David, and David became king. David had Solomon (Uriah’s wife was the mother),
영어NRSV,6 and Jesse the father of King David. And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by the wife of Uriah,
헬라어신약Stephanos,6 ιεσσαι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δαβιδ τον βασιλεα δαβιδ δε ο βασιλευς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ολομωντα εκ της του ουριου
라틴어Vulgate,6 David autem rex genuit Salomonem ex ea quae fuit Uriae
히브리어Modern,6 וישי הוליד את דוד המלך ודוד המלך הוליד את שלמה מאשת אוריה׃
성 경: [마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 11:3)라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다시금) 덧입은'(*, 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솔로몬 데 에겐네센 톤 로보암 로보암 데 에겐네센 톤 아비아 아비아 데 에겐네센 톤 아샆
개역개정,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새번역,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고,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사’
우리말성경,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가톨릭성경,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영어NIV,7 Solomon the father of Rehoboam,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bijah the father of Asa,
영어NASB,7 Solomon was the father of Rehoboam,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nd Abijah the father of Asa.
영어MSG,7 Solomon had Rehoboam, Rehoboam had Abijah, Abijah had Asa,
영어NRSV,7 and Solomon the father of Rehoboam, and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nd Abijah the father of Asaph,
헬라어신약Stephanos,7 σολομ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ροβοαμ ροβο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βια αβια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σα
라틴어Vulgate,7 Salomon autem genuit Roboam Roboam autem genuit Abiam Abia autem genuit Asa
히브리어Modern,7 ושלמה הוליד את רחבעם ורחבעם הוליד את אביה ואביה הוליד את אסא׃
성 경: [마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를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샆 데 에겐네센 톤 요사팥 요사팥 데 에겐네센 톤 요람 요람 데 에겐네센 톤 오지안
개역개정,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새번역,8 ㉣아삽은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사’
우리말성경,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가톨릭성경,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영어NIV,8 Asa the father of Jehoshaphat, Jehoshaphat the father of Jehoram, Jehoram the father of Uzziah,
영어NASB,8 Asa was the father of Jehoshaphat, Jehoshaphat the father of Joram, and Joram the father of Uzziah.
영어MSG,8 Asa had Jehoshaphat, Jehoshaphat had Joram, Joram had Uzziah,
영어NRSV,8 and Asaph the father of Jehoshaphat, and Jehoshaphat the father of Joram, and Joram the father of Uzziah,
헬라어신약Stephanos,8 ασα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σαφατ ιωσαφατ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ραμ ιωρ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οζιαν
라틴어Vulgate,8 Asa autem genuit Iosaphat Iosaphat autem genuit Ioram Ioram autem genuit Oziam
히브리어Modern,8 ואסא הוליד את יהושפט ויהושפט הוליד את יורם ויורם הוליד את עזיהו׃
성 경: [마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오지아스 데 에겐네센 톤 요아담 요아담 데 에겐네센 톤 아카즈 아카즈 데 에겐네센 톤 헤제키안
개역개정,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새번역,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우리말성경,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가톨릭성경,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영어NIV,9 Uzziah the father of Jotham, Jotham the father of Ahaz, Ahaz the father of Hezekiah,
영어NASB,9 Uzziah was the father of Jotham, Jotham the father of Ahaz, and Ahaz the father of Hezekiah.
영어MSG,9 Uzziah had Jotham, Jotham had Ahaz, Ahaz had Hezekiah,
영어NRSV,9 and Uzziah the father of Jotham, and Jotham the father of Ahaz, and Ahaz the father of Hezekiah,
헬라어신약Stephanos,9 οζι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αθαμ ιωαθ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χαζ αχαζ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ζεκιαν
라틴어Vulgate,9 Ozias autem genuit Ioatham Ioatham autem genuit Achaz Achaz autem genuit Ezechiam
히브리어Modern,9 ועזיהו הוליד את יותם ויותם הוליד את אחז ואחז הוליד את יחזקיהו׃
성 경: [마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전까지의 계보]
웃시야는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12;왕하 15:13, 17-20비교)와 동일 인물이다.
헤제키아스 데 에겐네센 톤 마나쎄 마나쎄스 데 에겐네센 톤 아모스 아모스 데 에겐네센 톤 요시안
개역개정,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새번역,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몬’
우리말성경,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가톨릭성경,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영어NIV,10 Hezekiah the father of Manasseh, Manasseh the father of Amon, Amon the father of Josiah,
영어NASB,10 Hezekiah was the father of Manasseh, Manasseh the father of Amon, and Amon the father of Josiah.
영어MSG,10 Hezekiah had Manasseh, Manasseh had Amon, Amon had Josiah,
영어NRSV,10 and Hezekiah the father of Manasseh, and Manasseh the father of Amos, and Amos the father of Josiah,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ζεκι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μανασση μανασση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μων αμ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σιαν
라틴어Vulgate,10 Ezechias autem genuit Manassen Manasses autem genuit Amon Amon autem genuit Iosiam
히브리어Modern,10 ויחזקיהו הוליד את מנשה ומנשה הוליד את אמון ואמון הוליד את יאשיהו׃
성 경: [마1:1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벨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요시아스 데 에겐네센 톤 예코니안 카이 툿 아델푸스 아우투 에피 테스 메토이케시아스 바뷜로노스
개역개정,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새번역,11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
우리말성경,11 요시야는 바벨론으로 잡혀 갈 무렵에 여고냐와 그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가톨릭성경,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영어NIV,11 and Josiah the father of Jec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exile to Babylon.
영어NASB,11 Josiah became the father of Jec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deportation to Babylon.
영어MSG,11 Josiah had Jehoiachin and his brothers, and then the people were taken into the Babylonian exile.
영어NRSV,11 and Josiah the father of Jech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deportation to Babylon.
헬라어신약Stephanos,11 ιωσι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εχονιαν και τους αδελφους αυτου επι της μετοικεσιας βαβυλωνος
라틴어Vulgate,11 Iosias autem genuit Iechoniam et fratres eius in transmigratione Babylonis
히브리어Modern,11 ויאשיהו הוליד את יכניהו ואת אחיו לעת גלות בבל׃
성 경: [마1: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고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벨론 유수(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왕하 24:6-16), 바벨론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벨론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편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고냐와 바벨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Gundry). 한편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메타 데 텐 메토이케시안 바뷜로노스 예코니앗 에겐네센 톤 살라디엘 살라디엘 데 에겐네센 톤 조로바벨
개역개정,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새번역,12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우리말성경,12 바벨론으로 잡혀 간 후로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가톨릭성경,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영어NIV,12 After the exile to Babylon: Jeconiah was the father of Shealtiel, Shealtiel the father of Zerubbabel,
영어NASB,12 After the deportation to Babylon: Jeconiah became the father of Shealtiel, and Shealtiel the father of Zerubbabel.
영어MSG,12 When the Babylonian exile ended, Jehoiachin had Shealtiel, Shealtiel had Zerubbabel,
영어NRSV,12 And after the deportation to Babylon: Jechoniah was the father of Salathiel, and Salathiel the father of Zerubbabel,
헬라어신약Stephanos,12 μετα δε την μετοικεσιαν βαβυλωνος ιεχονιας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αλαθιηλ σαλαθιηλ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ζοροβαβελ
라틴어Vulgate,12 et post transmigrationem Babylonis Iechonias genuit Salathihel Salathihel autem genuit Zorobabel
히브리어Modern,12 ואחרי גלותם בבלה הוליד יכניה את שאלתיאל ושאלתיאל הוליד את זרבבל׃
성 경: [마1: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이다.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체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벨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 곧 형수(兄嫂)에게서 스룹바벨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바벨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벨은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조로바벨 데 에겐네센 톤 아비욷 아비욷 데 에겐네센 톤 엘리아킴 엘리아킴 데 에겐네센 톤 아조르
개역개정,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새번역,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야김을 낳고, 엘리야김은 아소르를 낳고,
우리말성경,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가톨릭성경,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영어NIV,13 Zerubbabel the father of Abiud, Abiud the father of Eliakim, Eliakim the father of Azor,
영어NASB,13 Zerubbabel was the father of Abihud, Abihud the father of Eliakim, and Eliakim the father of Azor.
영어MSG,13 Zerubbabel had Abiud, Abiud had Eliakim, Eliakim had Azor,
영어NRSV,13 and Zerubbabel the father of Abiud, and Abiud the father of Eliakim, and Eliakim the father of Azor,
헬라어신약Stephanos,13 ζοροβαβελ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βιουδ αβιουδ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λιακειμ ελιακει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ζωρ
라틴어Vulgate,13 Zorobabel autem genuit Abiud Abiud autem genuit Eliachim Eliachim autem genuit Azor
히브리어Modern,13 וזרבבל הוליד את אביהוד ואביהוד הוליד את אליקים ואליקים הוליד את עזור׃
성 경: [마1:13-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름들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다.
아조르 데 에겐네센 톤 사돜 사돜 데 에겐네센 톤 아킴 아킴 데 에겐네센 톤 엘리욷
개역개정,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새번역,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우리말성경,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가톨릭성경,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영어NIV,14 Azor the father of Zadok, Zadok the father of Akim, Akim the father of Eliud,
영어NASB,14 Azor was the father of Zadok, Zadok the father of Achim, and Achim the father of Eliud.
영어MSG,14 Azor had Zadok, Zadok had Achim, Achim had Eliud,
영어NRSV,14 and Azor the father of Zadok, and Zadok the father of Achim, and Achim the father of Eliu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αζωρ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αδωκ σαδωκ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χειμ αχει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λιουδ
라틴어Vulgate,14 Azor autem genuit Saddoc Saddoc autem genuit Achim Achim autem genuit Eliud
히브리어Modern,14 ועזור הוליד את צדוק וצדוק הוליד את יכין ויכין הוליד את אליהוד׃
엘리욷 데 에겐네센 톤 엘레아자르 엘레아자르 데 에겐네센 톤 맡단 맡단 데 에겐네센 톤 야콥
개역개정,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새번역,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우리말성경,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가톨릭성경,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영어NIV,15 Eliud the father of Eleazar, Eleazar the father of Matthan, Matthan the father of Jacob,
영어NASB,15 Eliud was the father of Eleazar, Eleazar the father of Matthan, and Matthan the father of Jacob.
영어MSG,15 Eliud had Eleazar, Eleazar had Matthan, Matthan had Jacob,
영어NRSV,15 and Eliud the father of Eleazar, and Eleazar the father of Matthan, and Matthan the father of Jacob,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λιουδ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λεαζαρ ελεαζαρ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ματθαν ματθα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ακωβ
라틴어Vulgate,15 Eliud autem genuit Eleazar Eleazar autem genuit Matthan Matthan autem genuit Iacob
히브리어Modern,15 ואליהוד הוליד את אלעזר ואלעזר הוליד את מתן ומתן הוליד את יעקב׃
야콥 데 에겐네센 톤 요셒 톤 안드라 마리아스 엨스 헤스 에겐네데 예수스 호 레고메노스 크리스토스
개역개정,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새번역,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우리말성경,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영어NIV,16 and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
영어NASB,16 Jacob was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by whom Jesus was born, who is called the Messiah.
영어MSG,16 Jacob had Joseph, Mary’s husband, the Mary who gave birth to Jesus, the Jesus who was called Christ.
영어NRSV,16 and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Jesus was born, who is called the Messiah.
헬라어신약Stephanos,16 ιακωβ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σηφ τον ανδρα μαριας εξ ης εγεννηθη ιησους ο λεγομενος χριστος
라틴어Vulgate,16 Iacob autem genuit Ioseph virum Mariae de qua natus est Iesus qui vocatur Christus
히브리어Modern,16 ויעקב הוליד את יוסף בעל מרים אשר ממנה נולד ישוע הנקרא משיח׃
성 경: [마1: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러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 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스도가 인간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라식 음역이라고도 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떤 것이 되었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파사이 운 하이 게네아이 아포 아브라암 헤오스 다윋 게네아이 데카테싸레스 카이 아포 다윋 헤오스 테스 메토이케시아스 바뷜로노스 게네아이 에카테싸레스 카이 아포 테스 메토이케시아스 바뷜로노스 헤오스 투 크리스투 게네아이 데카테싸레스
개역개정,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새번역,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우리말성경,17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모두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가 모두 14대요, 바벨론으로 잡혀 간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때까지가 모두 14대입니다.
가톨릭성경,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영어NIV,17 Thus there were fourteen generations in all from Abraham to David, fourteen from David to the exile to Babylon, and fourteen from the exile to the Christ.
영어NASB,17 So all the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re fourteen generations; from David to the deportation to Babylon,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the deportation to Babylon to the Messiah, fourteen generations.
영어MSG,17 There were fourteen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nother fourteen from David to the Babylonian exile, and yet another fourteen from the Babylonian exile to Christ.
영어NRSV,17 So all the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re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David to the deportation to Babylon,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the deportation to Babylon to the Messiah, fourteen generations.
헬라어신약Stephanos,17 πασαι ουν αι γενεαι απο αβρααμ εως δαβιδ γενεαι δεκατεσσαρες και απο δαβιδ εως της μετοικεσιας βαβυλωνος γενεαι δεκατεσσαρες και απο της μετοικεσιας βαβυλωνος εως του χριστου γενεαι δεκατεσσαρες
라틴어Vulgate,17 omnes ergo generationes ab Abraham usque ad David generationes quattuordecim et a David usque ad transmigrationem Babylonis generationes quattuordecim et a transmigratione Babylonis usque ad Christum generationes quattuordecim
히브리어Modern,17 והנה כל הדרות מן אברהם עד דוד ארבעה עשר דרות ומן דוד עד גלות בבל ארבעה עשר דרות ומעת גלות בבל עד המשיח ארבעה עשר דרות׃
성 경: [마1: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치(Monarchy), 제3의 14대는 성직 정치(Hierachy) 등으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價)가 도합 14(다렐<*>이 4, 와우<*>가 6, 다렐<* >이 4)가 되기 때문이다. 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明期)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렘 22:30), 포로 이후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투 데 예수 크리스투 헤 게네시스 후토스 엔 므네스튜데이세스 테스 메트로스 아우투 마리아스 토 요셒 프린 에 쉬넬데인 아우투스 휴레데 엔 가스트리 에쿠사 에크 프뉴마토스 하기우
개역개정,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새번역,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말성경,18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심은 이렇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하게 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가톨릭성경,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어NIV,18 This is how the birth of Jesus Christ came about: His mother Mary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Joseph, but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영어NASB,18 Now the birth of Jesus Christ was as follows: when His mother Mary had been betrothed to Joseph,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by the Holy Spirit.
영어MSG,18 The birth of Jesus took place like this. His mother, Mary, was engaged to be married to Joseph. Before they came to the marriage bed, Joseph discovered she was pregnant. (It was by the Holy Spirit, but he didn’t know that.)
영어NRSV,18 Now the birth of Jesus the Messiah took place in this way. When his mother Mary had been engaged to Joseph, but before they lived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from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8 του δε ιησου χριστου η γεννησις ουτως ην μνηστευθεισης γαρ της μητρος αυτου μαριας τω ιωσηφ πριν η συνελθειν αυτους ευρεθη εν γαστρι εχουσα εκ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라틴어Vulgate,18 Christi autem generatio sic erat cum esset desponsata mater eius Maria Ioseph antequam convenirent inventa est in utero habens de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18 והלדת ישוע המשיח כה היתה מרים אמו ארשה ליוסף ובטרם יבא אליה נמצאת הרה לרוח הקדש׃
성 경: [마1: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 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 후토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 예식을 끝내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11;골 1:15-19).
요셒 데 호 아네르 아우테스 디카이오스 온 카이 메 델론 아우텐 데이그마티사이 에불레데 라드라 아폴뤼사이 아우텐
개역개정,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새번역,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우리말성경,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사람들 앞에 수치를 당하게 될까 봐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영어NIV,19 Because Joseph her husband was a righteous man and did not want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he had in mind to divorce her quietly.
영어NASB,19 And Joseph her husband, being a righteous man and not wanting to disgrace her, planned to send her away secretly.
영어MSG,19 Joseph, chagrined but noble, determined to take care of things quietly so Mary would not be disgraced.
영어NRSV,19 Her husband Joseph, being a righteous man and unwilling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planned to dismiss her quietly.
헬라어신약Stephanos,19 ιωσηφ δε ο ανηρ αυτης δικαιος ων και μη θελων αυτην παραδειγματισαι εβουληθη λαθρα απολυσαι αυτην
라틴어Vulgate,19 Ioseph autem vir eius cum esset iustus et nollet eam traducere voluit occulte dimittere eam
히브리어Modern,19 ויוסף בעלה היה איש צדיק ולא אבה לתתה לבוז ויאמר בלבו לשלחה בסתר׃
성 경: [마1: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하고자 하여'(*,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서서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 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타우타 데 아우투 엔뒤메덴토스 이두 앙겔로스 퀴리우 캍 오나르 에파네 아우토 레곤 요셒 휘오스 다윋 메 포베테스 파랄라베인 마리암 텐 귀나이카 수 토 가르 엔 아우테 겐네덴 에크 프뉴마토스 에스틴 하기우
개역개정,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새번역,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말성경,20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할 때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라. 마리아가 가진 아기는 성령으로 임신된 것이다.
가톨릭성경,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영어NIV,20 But after he had considered this,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home as your wife, because what is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영어NASB,20 But when he had considered this, behold,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saying, ”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as your wife; for the Child who has been conceived in her is of the Holy Spirit.
영어MSG,20 While he was trying to figure a way out, he had a dream. God’s angel spoke in the dream: “Joseph, son of David, don’t hesitate to get married. Mary’s pregnancy is Spirit-conceived. God’s Holy Spirit has made her pregnant.
영어NRSV,20 But just when he had resolved to do this,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as your wife, for the child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20 ταυτα δε αυτου ενθυμηθεντος ιδου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κατ οναρ εφανη αυτω λεγων ιωσηφ υιος δαβιδ μη φοβηθης παραλαβειν μαριαμ την γυναικα σου το γαρ εν αυτη γεννηθεν εκ πνευματος εστιν αγιου
라틴어Vulgate,20 haec autem eo cogitante ecce angelus Domini in somnis apparuit ei dicens Ioseph fili David noli timere accipere Mariam coniugem tuam quod enim in ea natum est de Spiritu Sancto est
히브리어Modern,20 הוא חשב כזאת והנה מלאך יהוה נראה אליו בחלום ויאמר יוסף בן דוד אל תירא מכנוס אליך את מרים אשתך כי אשר הרה בה מרוח הקדש הוא׃
성 경: [마1:2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 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텤세타이 데 위온 카이 칼레세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 예순 아우토스 가르 소세이 톤 라온 아우투 아포 톤 하마르티온 아우톤
개역개정,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새번역,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예수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
우리말성경,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영어NIV,21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영어NASB,21 “She will bear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Jesus, for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영어MSG,21 She will bring a son to birth, and when she does, you, Joseph, will name him Jesus–‘God saves’–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영어NRSV,21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for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εξεται δε υιον και καλεσεις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ησουν αυτος γαρ σωσει τον λαον αυτου απο των αμαρτιω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21 pariet autem filium et vocabis nomen eius Iesum ipse enim salvum faciet populum suum a peccatis eorum
히브리어Modern,21 והיא ילדת בן וקראת את שמו ישוע כי הוא יושיע את עמו מעונותיהם׃
성 경: [마1:2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 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닌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벨(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토 데 홀론 게고넨 히나 플레로데 토 레덴 휘포 퀴리우 디아 투 프로페투 레곤토스
개역개정,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새번역,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우리말성경,22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영어NIV,22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the Lord had said through the prophet:
영어NASB,22 Now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was spoken by the Lord through the prophet:
영어MSG,22 This would bring the prophet’s embryonic sermon to full term:
영어NRSV,22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had been spoken by the Lord through the prophet:
헬라어신약Stephanos,22 τουτο δε ολον γεγονεν ινα πληρωθη το ρηθεν υπο του κυριου δια του προφητου λεγοντος
라틴어Vulgate,22 hoc autem totum factum est ut adimpleretur id quod dictum est a Domino per prophetam dicentem
히브리어Modern,22 ותהי כל זאת למלאת את אשר דבר יהוה ביד הנביא לאמר׃
성 경: [마1:22-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 13:35;21:4; 26:56;27: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성 경: [마1:2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이두 헤 파르테노스 엔 가스트리 헼세이 카이 텤세타이 휘온 카이 칼레수신 토 오노마 아우투 엠마누엘 호 에스틴 메데르메뉴오메논 멛 헤몬 호 데오스
개역개정,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새번역,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사 7:14(칠십인역)
우리말성경,23 “처녀가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를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사7:14
가톨릭성경,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영어NIV,23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they will call him Immanuel”–which means, “God with us.”
영어NASB,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SHALL BEAR A SON, AND THEY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which translated means, ” GOD WITH US.”
영어MSG,23 Watch for this–a virgin will get pregnant and bear a son; They will name him Emmanuel (Hebrew for “God is with us”).
영어NRSV,23 “Look, the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ιδου η παρθενος εν γαστρι εξει και τεξεται υιον και καλεσουσιν το ονομα αυτου εμμανουηλ ο εστιν μεθερμηνευομενον μεθ ημων ο θεος
라틴어Vulgate,23 ecce virgo in utero habebit et pariet filium et vocabunt nomen eius Emmanuhel quod est interpretatum Nobiscum Deus
히브리어Modern,23 הנה העלמה הרה וילדת בן וקראו שמו עמנואל אשר פרושו האל עמנו׃
성 경: [마1: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에게르데이스 데 호 요셒 아포 투 휲누 에포이에센 호스 프로세탘센 아우토 호 앙겔로스 퀴리우 카이 파렐라벤 텐 귀나이카 아우투
개역개정,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새번역,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우리말성경,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가톨릭성경,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영어NIV,24 When Joseph woke up, he did what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Mary home as his wife.
영어NASB,24 And Joseph awoke from his sleep and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commanded him, and took Mary as his wife,
영어MSG,24 Then Joseph woke up. He did exactly what God’s angel commanded in the dream: He married Mary.
영어NRSV,24 When Joseph awoke from sleep,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commanded him; he took her as his wife,
헬라어신약Stephanos,24 διεγερθεις δε ο ιωσηφ απο του υπνου εποιησεν ως προσεταξεν αυτω ο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και παρελαβεν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24 exsurgens autem Ioseph a somno fecit sicut praecepit ei angelus Domini et accepit coniugem suam
히브리어Modern,24 וייקץ יוסף משנתו ויעש כאשר צוהו מלאך יהוה ויקח אליו את אשתו׃
성 경: [마1:2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카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헤오스 후 에테켄 휘온 카이 에칼레센 토 오노마 아우투 예순
개역개정,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새번역,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첫 아들을’
우리말성경,25 그러나 요셉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영어NIV,25 But he had no union with her until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gave him the name Jesus.
영어NASB,25 but kept her a virgin until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Jesus.
영어MSG,25 But he did not consummate the marriage until she had the baby. He named the baby Jesus.
영어NRSV,25 but had no marital relations with her until she had borne a son; and he named him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25 και ουκ εγινωσκεν αυτην εως ου ετεκεν τον υιον αυτης τον πρωτοτοκον και εκαλεσεν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25 et non cognoscebat eam donec peperit filium suum primogenitum et vocavit nomen eius Iesum
히브리어Modern,25 ולא ידעה עד כי ילדה בן את בכורה ויקרא את שמו ישוע׃
성 경: [마1:2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훗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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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태복음 (1 : 1~25) 주석
마태복음 1장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ㅇ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혀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아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게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ㅇ자손(휘오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ㅇ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란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ㅇ세계(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 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ㅇ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
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
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
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
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
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ㅇ낳고(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
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
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
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
고 있다.
ㅇ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
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
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
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
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
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
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
(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
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
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
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
할 것임을 나타낸다.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ㅇ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
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
;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
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
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
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
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
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신
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
(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
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
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ㅇ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
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
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 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
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ㅇ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
(민 7:12).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ㅇ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
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
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
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
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
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
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ㅇ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
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
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 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ㅇ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
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7:12-
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
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
(位)를 계승할 자(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ㅇ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
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11:3)라고 표현하여 그리
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
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ㅇ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
님의 사랑을(다시금) 덧입은'(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
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
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
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
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ㅇ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을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
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ㅇ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
: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
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
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
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
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
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
(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
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가
장 타당한 듯하다(17절).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ㅇ웃시야는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
:12;왕하 15:13, 17-20비교) 와 동일 인물이다.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ㅇ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
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
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벧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
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
(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
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
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ㅇ바벧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벧론 유수
(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
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
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ㅇ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하
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
(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벧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
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벧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의 아
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
왕하 24:6-16), 바벨론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
(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
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벧론은 여호야긴 대
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
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
편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
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
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
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
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
고냐와 바벧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Gundry). 한편 유다의 마
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ㅇ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
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
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시사해 주고 있
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
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
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
이다.
ㅇ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
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
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
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
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ㅇ스알디엘은 스룹바벧을 낳고 – 스룹바벧을 스알디엘
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
체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벧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
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
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
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곧
형수(兄嫂)에게서 스룹바벧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
바벧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
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
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벧은 영광
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ㅇ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
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
(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형된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
로 정확한 이름들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
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ㅇ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런
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
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
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
(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
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
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
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
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
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ㅇ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
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
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
(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
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
으로 잉태’한 여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
해지고 있는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
스도가 인간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
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
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
라식 음역이라고도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
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뗬 것이 되었
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ㅇ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
(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ㅇ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
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
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
치(Monarchy), 제 3의박 14대는 성직 정치(Hierachy) 등으
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
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
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
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
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
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
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
價)가 도합14(다렐이4, 와우가6, 다렐이 4)가 되기 때문이
다. 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明期)
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
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
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
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
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
(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다
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
렘 22:30), 포로 이후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
(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
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
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ㅇ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음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
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
계(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후토
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
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
인 것이다.
ㅇ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
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
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
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
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
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
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
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
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ㅇ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
(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
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예식을 끝내고 동
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
었던 것이다.
ㅇ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
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
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
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
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
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
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
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
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
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
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
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
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또
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
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
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
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
11;골 1:15-19).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ㅇ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디카
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
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
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
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애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
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ㅇ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
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
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
(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
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
(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
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
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
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메델론)가 적
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
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하고자하여'(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
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않기로 서서히 결심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
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ㅇ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
덴토스’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
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
(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 ‘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
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
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
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
각지 못했율을 것이다.
ㅇ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
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
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
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
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
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
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
(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
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
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
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
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
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ㅇ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
이란,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
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
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ㅇ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
자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
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
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비
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
어나게 했을 것이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ㅇ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
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
리니'(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
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 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
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니 “기묘자(奇妙者)요, 모사
(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ㅇ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
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
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
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
(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ㅇ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
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
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
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벧(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
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
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
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ㅇ자기 백성(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
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
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
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
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
의 백성’을 의미한다.
ㅇ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
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
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
께서 오신 근본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
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
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
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
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
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
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
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
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
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
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
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
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ㅇ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
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
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
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
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
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
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 하셨
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
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
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
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ㅇ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
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
15, 17, 23;4:14;8:17;12:17;13:35;21:4;26:56;27:9 등)는 사
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
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
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ㅇ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
(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
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틀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
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
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
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
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
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
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
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
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
(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
-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
(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
하게 될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
(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
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
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
을 보존하실 것이다(9:7).
ㅇ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
(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
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
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
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
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
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
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
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
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
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
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
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
한다.
ㅇ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
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
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
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
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
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분이심을 강조한 호칭
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
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
(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
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
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
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
게 되는 것이다.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ㅇ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
(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
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
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
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
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
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ㅇ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
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
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
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
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
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
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
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
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흣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
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
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 춘천 대우인력
메모 :
마태복음 1장
<마태복음 1장 흐름정리>
마태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서 그의 복음서를 열고 있다. 이 족보의 특성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혈통을 먼저 밝히고 난 다음, 약속의 조상들을 차례대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14대씩 3부로 짜여진 이 족보(제3부는 13대)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요셉에서 끝맺음으로써 메시야가 오시기까지의 구속 역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밝혀주고 있다. 또 혈연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나아가 이방 세계에까지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18절부터 시작되는 예수 탄생과 유아기에 관한 기록은 그 내용상 2장 말미까지 계속된다.
<마태복음 1장 줄거리>
1.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족보.
18.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요셉과 결혼했을 때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함.
19. 천사가 요셉의 오해를 풀어 주었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를 일러줌.
<마태복음 1장 도움말>
* 1절 : 아브라함.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노력에 걸맞게, 마태는 적절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소급하고 있으며, 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한 누가는 그리스도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을 전 인류의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추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그를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상속자로 여기는 것이 적합함을 보여 줌으로 마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 1절 : 다윗의 자손.
신약의 기자들은 반복해서 “다윗의 자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롬 1:3; 딤후 2:8 등).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는 다윗의 보좌와 다윗에게 주어진 메시야 약속의 후사가 되었다.
* 1절 : 예수.
헬라어로는 이에수스(Ie-sous)인데, 히브리어의 예호슈아(Yehos∨ua‘) 즉 “여호수아”에 해당한다(누가와 바울은 여호수아를 “예수”로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다”(참조 21절)라는 의미로 알려져 왔다. 요수아(Joshua)의 원래 이름이었던 호세아(Oshea)가 여호수아(Jeho- shua)로 바뀌었다. 요수아는 여호수아의 축약형 이름이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 아람어가 히브리어를 대신하여 공용어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은 예슈아(Yes∨ua‘)가 되었으며, 그것이 헬라어 이에수스(Ie-sous)로 음역되었다.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한 이름을 택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습과 어울리게, 예슈아(Yes∨ua‘)라는 이름은 신약 시대에 유대인 소년들에게 주어지는 흔한 이름이었다.
* 1절 : 그리스도.
헬라어로 크리스토스(Christos). 이 단어는 “메시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Mas∨iah)의 헬라어 번역으로 “기름부음받은” 혹은 “기름부음받은 자”를 뜻한다.
* 16절 : 마리아.
그녀는 여호와께 크게 은혜를 받은 자요 여자 중에 복된 자였다. 여자의 “후손”(창 3:15)으로 올 것이라는 구주에 대한 소식이 처음 선포될 때부터,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맏아들이 약속된 메시야이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다(시대의 소망, 31). 마리아에게 이 크고 유일무이한 영광이 주어졌다. 마리아가 선택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기약된 시기에 그녀의 성품이 다윗 가문의 다른 어떤 여인들보다도 거룩한 어머니의 이상을 나타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선택된 소수 중 하나였다. 바로 이 소망이 그녀의 생애를 성결하게 하고 그녀에게 주어진 신성한 역할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했다. 현대 이스라엘의 모든 어머니들도 마리아처럼 하늘과 협력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들 수 있다.
* 16절 : 남편 요셉.
마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 마태는 요셉이 예수와 관계가 있지만 그것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남편으로서의 관계라고 말한다.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주된 연결 고리로 사용한 “낳고”라는 말을 생략한다.
* 20절 : 현몽하여[꿈에].
천사는 이 문제를 어찌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요셉의 꿈에 나타났다.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꿈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그분이 정한 방법 중 하나이다.
* 20절 : 무서워 말라[두려워하지 마라].
요셉은 주저하거나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 “의로운 사람”(19절)으로서 요셉은 마리아를 취함으로 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행동을 요구했다.
* 23절 : 처녀.
직접, 간접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증거를 제공한다. (1) 두 기자 모두 예수가 성령에 의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마 1:18, 20; 눅 1:35). (2) 그들은 마리아가 요셉의 아들이 아닌(참조 마 1:21 주석) 하나님의(눅 1:35) “아들을 낳았”다고 선언한다. (3) 마리아는 예수를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했다(마 1:25). (4) 마리아는 천사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단언했다(눅 1:34). 그러므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처녀”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어도 충분하게 증명될 수 있으며, 마태가 그 단어를 이 문맥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모든 시대의 최고의 진실, 곧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이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 없다면 진정한 성육신이 있을 수 없으며,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 없다면 성경은 단순한 우화나 전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경건한 장난이며, 구원은 낙담시키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 23절 :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 가족과 동일하게 되기 위해 오셨다. 임마누엘은 그의 개인적인 이름이 아니라 사명을 묘사하는 칭호였다.
[마태복음 1장 강해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마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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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장 강해설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책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구속사의 시작이고 다윗은 왕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마 1:1-25)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세계’(世系)라는 원어(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족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복음서들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며, 마태복음의 첫 부분은 메시아의 족보에 대해 말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약속된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식으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시고 그 나라의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12-13, 16).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사 9:6, 7; 11:10; 렘 23:5; 겔 34:23, 24; 호 3:5).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은 세 가지 진리를 보여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때는 일반적으로 긴 세월을 필요로 한다. 아브라함은 주전 2천년경의 인물이고, 다윗은 주전 천년경의 인물이다. 수천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도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그는 반드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음으로 바라보자.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 성실하신 분이시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한 왕위를 얻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사람에게는 약속을 쉽게 어기는 불성실함이 많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있고 돈에 대해 불성실한 일도 있다. ‘배약’(背約) 즉 약속을 어기는 것은 죄악이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는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특히 시간과 돈과 말에 있어서 약속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약속에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인격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만세 전에 계획하며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주권적 능력자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킬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행할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때와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자.
[2-3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일이 언급되어 있다. 유다가 다말에게 들어간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록 그의 아내가 죽었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에게 들어간 것은 부끄러운 실수이었다. 그 여자가 바로 자기 며느리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다말편에서 볼 때에도 시아버지가 옛날 풍습대로 막내아들을 자기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할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심히 악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다말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그 부끄러운 실수와 다말의 그 악행까지도 그의 메시아 약속 이행을 위해 사용하셨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한 일까지도 그의 거룩하고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셨다.
이 일은 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함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아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치스러운 죄악들을 깨끗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과거의 부끄러운 실수들과 악행들 때문에 뒤로 물러나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만 믿고 의지하며 이제는 거룩하고 선하게만 살자.
[4-5절]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라합과 룻이라는 두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그 둘은 다 이방인이었다. 한 사람은 부도덕하고 천한 신분의 이방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젊어서 과부가 된 불행했던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라합은 천한 죄인이 존귀한 성도가 된 경우이고, 룻은 불행한 이방인이 복된 선민이 된 경우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어떻게 여리고 성의 창녀가 메시아의 족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가엾은 무명의 이방 여인이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언급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사도 마태가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히 신약시대에 있을 이방인 구원을 예시한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비천한 이방 죄인이었던 우리가 존귀한 성도의 회에 들어왔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가 약속하신 천국 영광을 바라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우리야의 아내라는 여인도 언급되었다. 우리야는 다윗의 충성스런 병사이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은닉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장(戰場)에 내세워 고의로 죽게 한 것은 큰 죄악이었고 다윗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큰 오점(汚點)이었다. 그것은 비록 실수로 시작되었다고 할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고의적 악행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겪어야 했다. 밧세바가 낳은 첫 아기는 죽었고 다윗은 자기의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는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실수 외에는 다윗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죄를 범한 경험이 있는 다윗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된 행위를 인정하신 것은 아니나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죄악되고 실수투성이이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누추하고 연약한 인간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다 이루셨다.
이 일은 마치 요셉을 판 형들의 악행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 된 것이나, 가룟 유다의 배신이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는 일이 된 것과도 같다. 악을 행한 자들의 악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지만, 그 악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좌절되지는 않았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그의 일들을 이루신다. 인류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찬송하며, 또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7-11절]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악한 남자들도 많이 들어 있다. 다윗의 자손들인 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한 자들이었다. 솔로몬은 노년에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한 자이었다. 아사는 경건했으나 말년에 발에 병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에게 구하였다. 여호사밧도 경건했으나 악한 왕 아합과 교제를 끊지 않음으로 그의 자녀들의 타락과 부패의 길을 닦았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취함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았고 말년에는 하나님이 치시므로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으나 그들도 다 악한 자들이었다.
그 다음, 웃시야는 교만해져 제사장의 일을 하려 하다가 나병이 들어 여생을 마쳤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었다. 그의 많은 우상숭배로 유다 왕국은 결국 멸망에 이른다. 아몬, 여고냐(여호야긴) 등도 악하였다. 마침내 유다 왕국은 멸망하였고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로 이어진다. 구약 역사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 유다 열왕들의 340여년의 역사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메시아의 계보는 그런 연약한 인간들을 통해 흘러내려왔다. 사람들의 많은 부족과 무력(無力)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은 주권자시요, 그의 주권적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할 구주를 보내셨고 또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현대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부패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자. 악인들은 악을 행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오직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부흥케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들을 위해 힘쓰자.
[12-17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님이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의 것과 좀 다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으로부터 올라가면서 헬리, 맛단, 레위로 이어지고, 또 레사에게서 스룹바벨로, 또 나단에게서 다윗으로 이어 올라간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두 족보들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다음 몇 가지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옛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 대신에 한 사람을 뽑기 위해 추천된 자들 중 한 사람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었다(행 1:23). 이와 같이 같은 사람이 다른 이름들을 가진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옛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입양(入養) 제도가 있고, 특히 옛 시대에는 수혼(嫂婚) 제도,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명기 25:5-10은 수혼제도를 율법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혼선 같아 보이는 어떤 족보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셋째로, 여러 유력한 주석가들은 누가복음 3장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 것이라는 추측을 제안하였다.
비록 우리가 두 족보들 간의 차이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두 개의 족보가 다 진실하고 정확함을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과 영감성과 권위성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태와 누가의 증언을 둘 다 참되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 나머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진실한 증거의 책임을 알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행하고 소망해야 한다.
18-25절,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18-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그 여자의 맏아들](전통본문)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18절부터 25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의 사실을 증거한다.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그 증거는 여섯 가지 면에서 더해진다. ①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18절), 즉 아직 육체 관계를 갖기 전에 아기를 임신하였다. ② 그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18절). ③ 요셉은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왜냐하면 약혼녀인 마리아의 임신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④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생각하는 요셉에게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증거해주었다(20절).
⑤ 메시아의 처녀 성탄의 사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이었다. 이사야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유주의자들이 ‘처녀’라는 말(알마)을 ‘젊은 여자’로 번역하려 했지만, 그 말은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로 볼 때 ‘결혼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 않고 ‘처녀로 간주되는 젊은 여자, 즉 소녀’를 가리킨다고 본다(창 24:43). 그러므로 헬라어 70인역은 이 단어를 ‘처녀’(파르데노스)라고 번역하였다.
⑥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인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24, 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되시는 것은 합당하였다. 신약성경도 이 점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한 훌륭한 유대인이거나 어떤 탁월한 종교적 천재가 아니셨다. 우리는 단순히 그의 사상이나 인격을 본받는 자들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를 본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모범 이상이시다. 그는 우리의 찬송과 경배의 대상이시다. 신약성경은 그에게 신적 명칭, 신적 속성들, 신적 사역, 신적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동등한 분이심을 믿는다. 그의 모든 기적들은 그를 증거한다. 우리는 그의 신성의 영광을 믿는다.
둘째로, 이 부분은 메시아의 사역의 목표를 분명히 언급한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헬라어는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와 같은데, ‘구원’이라는 뜻이다. 메시아의 사역은 구원 사역이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자 곧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구원은 단지 병이나 가난이나 자연재해 등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죄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요, 그 외의 것들은 죄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이다. 메시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눅 5:32; 마 9:13 전통본문). 그의 사명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외의 문제들은 장차 천국에서 다 해결될 것이다.
그는 엄격히 말해 ‘자기 백성’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경은 선택의 진리를 가르친다.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요 6:37, 3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1: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그 일은 지금 참 교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전도는 교회의 첫 번째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그들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거룩하게, 즐거이 드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으로 택하신 요셉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① 요셉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19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었다. 그는 천사의 지시를 즉시 순종하였다(24절).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따르는 자가 의로운 자이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② 요셉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그는 마리아를 의심하였을 것이며 또 자신이 받을 억울한 비난이나 벌을 피하기를 원하였을 것이지만, 아직 어떤 확실한 단서를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또 마리아를 위하는 생각에서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을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헛소문을 전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일이다. 출애굽기 23:1은,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남의 은밀한 단점을 퍼뜨리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다. 잠언 11:13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③ 요셉은 절제심이 있었다(25절). 그는 천사의 지시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그 여자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전통본문). 그는 자기의 육신적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였다.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높은 덕이다. 잠언 16:30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또 갈라디아 5:22-23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중에 절제를 포함하였다. 우리는 절제의 덕을 구하자.
넷째로, 왜 오늘날에는 천사가 꿈에 나타나는 일이 없는가? 물론 오늘날에도 천사가 나타날 수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었으나, 우리는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 단지, 오늘날에 천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옛 시대에 천사들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의 기적들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로 이루신 속죄사역과 그 진리를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완료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충족하게 다 기록되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3:8-10,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개혁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계시하신 이전의 방식들이 중단되었다고 믿는다.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임을 믿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 .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오직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충분함을 알자.
[사도행전 6장 설교말씀] 직분자 선택의 원리(행 6:1-7)반응형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1장
마지막으로, 17절에는 이 모든 족보의 전체적인 요약이 되어있는데 전 족보가 14대씩 세 번으로 특징 있게 묶여져 있다. 첫번째 14대에는 다윗의 가문이 새로 돋아나는, 마치 아침과 같은 느낌을 주며 두번째 14대에는 정오의 대낮같이 찬란하게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세번째 14대에서는 점점 쇠퇴하고 몰락하여 가난한 목수의 가문으로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에 그리스도는 그것에서부터 환하게 비쳐나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신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불리운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단 9:25), 때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시 2:2)라고 불리워진다. 이러한 특성에 비추어 그는 “네가 그리스도이냐?”, 즉 네가 기름 부음 받은 자냐?는 질문을 받으셨다. 다윗은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삼상 16:13), 아론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으며(레 8:12), 엘리사(왕상 19:16)와 이사야(사 61:1)는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되었고 자격이 부여되었으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 즉 “그의 동료들보다 뛰어나게 즐거움의 기름으로 바르신 자”로 불리우는 것이다. 기름을 붓는다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으로부터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이는 그들로 역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언급된 왕들의 계승에 있어서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에 유의한다. 예를 들면(7, 8절) 사악한 르호보암이 사악한 아비야를 낳았으나 사악한 아비야는 선한 아사를 낳았으며, 선한 아사는 선한 여호사밧을 낳았으나 선한 여호사밧은 사악한 요람을 낳았다. 은혜는 혈통을 따라 이어지지 않으며 또한 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대로 주시기도 하시고 보류하시기도 하신다.바벨론으로의 이거는 이 족보에서 두드러진 시기로 언급되어 있다(11, 12절).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중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달리 망해 없어져 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백성들의 시내가 죽음의 바다를 통해 순수하게 계속적으로 흘렀던 사실에 대한 이유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그들로부터 “오실”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사 65:8, 9) 복 중의 복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유대인들이 회복되고 황폐한 성소가 “주님을 위해” 은혜로 비췸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단 9:17).”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고”로 되어 있다(11절), 여기의 여고냐는 요시야의 장자였던 여호야김을 말한다. 그러나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고”(11절)에서의 여고냐는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여호야김의 아들을 말하며 거기에서 스알디엘을 낳았다(휘트비). 또한 “이 사람(여고냐)이 무자하리라”(렘 22:30)고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이 말은 “그 후손 중 아무도 번성치 못하리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스알디엘이 브다야를 낳았으며 브다야는 스룹바벨을 낳은 것이다(대상 3:19).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손자는 종종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으며 따라서 브다야는 그의 아버지의 생존시에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이 족보는 주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가 아닌, “마리아의 남편 요셉”(16절)에게 이어져 내려온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족보를 따질 때는 언제나 남자 편으로 따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도 요셉과는 같은 지파, 같은 족속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친 편으로나 그의 가상적 부친인 요셉 편으로나 함께 다윗 가문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가 육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요섭에게서 유래된 것은 메시야의 왕국이 다윗에게서 이어온 자연적인 후손에 기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이러한 모든 계통(족보)들이 만나는 중심은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16절)이다. 이 분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갈망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였으며, 족장들이 자손을 바랄 때 거룩한 족보에 속하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바라보던 분이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는 이러한 족장들처럼 어둡고 흐린 상태에서 그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유리(역주:이 주석을 쓸 당시의 유리는 오늘날의 것과 같이 완전 투명체는 아니었음)를 통하여 희미하게 보았던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육신적으로 그리스도와 가까운 자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관계를 그리스도와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12:50).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조상의 대수를 14대씩 세 번으로 줄이는 것이 마태의 의도였는데, 두 번째 14대(다윗에서부터 바벨론 이거까지)의 경우에는 불가불 세 사람을 뺄 수밖에 없었는데 아합의 우상 숭배를 다윗의 집에 끌어 들여 그 낙인이 그 가문에 찍히게 되고 그 죄악에 대한 형벌이 “3, 4대까지 미치게”된 아달리야의 직계 자손인 이 세 왕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세 왕 중, 둘은 배교자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그의 노하심을 나타내신다. 이 세 왕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형제를 가졌던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 대체로 그는 동생의 계통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나 야곱, 유다, 다윗 나단, 레사등이 모두 동생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지상의 왕들의 탁월성처럼 그 조상들의 장자 신분에서 유래되지 않고 그의 섭리의 방식을 따라 “낮은 자를 높이시고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야곱의 아들들 중에, 실로가 오셨던 유다 외에는 “그의 형제들,” 즉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언급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서자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장자인 에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야곱의 모든 아들들은 교회 안으로 받아 들여졌고 비록 그리스도의 조상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족장들이 되었으며(행 7:8), 따라서 이 족보에 언급되고 있다. “흩어진 열 두 지파들”에 대한 이러한 격려는 그들 역시 유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유다의 쌍둥이 아들인 베레스와 세라는, 베레스만이 그리스도의 조상이지만 유다의 형제들이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둘 다 함께 언급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베레스와 세라의 출생이 어떤 비유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세라는 먼저 난자로서 그의 손을 맨 처음에 내밀었으나 그것을 도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베레스가 장자권을 가지게 되었다. 유대교는 세라와 같이 맨 처음으로 장자 상속권에 이르렀으나 불신앙으로 손을 도로 집어넣음으로써, 이방 교회가 베레스와 같이 먼저 나와 장자권을 소유해 버렸다. 이리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으나 그 후에 세라가 난 것처럼-“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롬 11:25, 26).네 여자의 이름. 이 족보에는 단지 네 여자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두 여자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 여자”들이었다. 즉 라합은 가나안 태생의 기생이었고, 롯은 모압 여자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차별이 없으며 나그네나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안에서 “성도의 시민권”을 가지도록 환영되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밖의 두 여자, 즉 다말과 밧세바는 간음한 여자들이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사람들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이 되신 것이 특별히 족보에 언급되어 있고 조금도 가리워지지 않았다는, 우리 주 예수님에게 부가된 겸손의 표식이었다.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체의 모양”(롬 8:3)을 입으셨으며 아무리 큰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회개할 때에는 그와 더불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주의할 것은 조상들의 추문 때문에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이며, 가장 위대한 사람이나 우리 주님 자신도 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사실이 기록된 것은, 다윗의 범죄는 그가 회개하였으므로 그에게 주어진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여인을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휘트비).비록 여러 왕들의 이름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윗 왕” 이외에는 왕으로 불리워 표시되지는 않았다(6절). 왜냐하면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또한 그에게 메시야 왕국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메시야는 그의 조상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라고 말해지는 것이다(눅 1:32).유다왕들의 족보에서 요람과 웃시야의 사이에는(8절) 세 왕, 즉 아하시아,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요람이 이 웃시야를 낳고”란 말은 히브리어의 용어 법에 따라 웃시야가 요람의 직계 후손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실례는 히스기야에게 대한 예언, 즉 “왕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리라”는 예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그들은 몇 세대가 빠지게 되었다. 이 세 왕이 빠진 것은 실수나 건망증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이 복음서 기자가 참조했던 그 당시에 권위 있다고 인정받았던 족보책에 이 세 왕의 이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를 주장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록 그 성취가 오래 지연되더라도 꼭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큰 축복이 될 한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약속이 바로 그 당시의 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42대, 약 2천년이란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오래 전에 앞으로 되어질 일을 예고하시기도 하시며, 그렇게 오랜 후에 이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도 하신다. 약속된 은혜들의 지연이 우리의 인내를 연단 시키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비록 사람들이 그 약속을 단념하더라도 꼭 이루게 하신다. 아버지의 집의 영광이었던 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태어날 때는 멸시받는 백성이었고, 이 즈음에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었던 때였으며 다윗의 집이 몰락되어 버린 때였다. 그리스도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시기는 그 성취가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보일 때임을 유의하자.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그런데 이 사실은 족보 사무소(herald’s offices)의 믿을 만한 기록에 의해 입증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족보를 보존하는 일에 매우 정확하였으며, 여기에는 메시야가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섭리가 있었다. 또한 그가 오신 이후로 유대 나라는 흩어졌고 혼란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론의 자손이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왕의 직능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 포기되거나 우리 주 예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먼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칭호로 언급되었고 또한 그렇게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한 자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15:22; 20:31; 21:15). 따라서 이 복음서의 저자가 입증하려는 것은 그가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그 “어깨에 정사를 메신”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것과, 또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 당시 메시야에 연관된 약속을 받을 위인들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으며, 메시야의 통치에 대한 약속이 다윗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다.” 또한 “지상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려는 자들은 “지상의 모든 족속들을 다스릴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 충성된 백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이었다(창 12:3; 22:18; 삼하 7:12; 시 89:3; 132:11). 따라서 예수님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다.
Ⅱ. 주요한 목적. 이 족보는 끝없이 또는 불필요하게 나열한 족보는 아니다. 또한 위인들의 족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허영적인 것도 아니다. Stemmata, quid faciunt? – 옛 족보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 족보는 어떤 제목(또는 명칭)을 입증하거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증거로 제시된 족보와 같은 것이다. 그 목적은 우리 주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셔서 메시야가 나시게 될 그 나라와 족속의 자손이 되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Ⅰ. 그 제목. 족보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 즉 그의 육신적인 조상에 대한 책[또는 사건이나 이야기. 히브리어 세폐르 “책”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기사, 이야기”의 뜻이 있음], 또는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족보의 제목은 Bi,bloj Gene,sewj-발생 기원의 책이다. 구약은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구약은 그 영광이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신약은 이 점에서 그 영광이 더욱 뛰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신약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의 “발생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이며(미 5:2), 누구도 그 발생기원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이곳에 언급된 것도 바로 이 발생기원인 것이다.
1:18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마태복음 1:18-25)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는 경외되어야 하며, 따지며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평범한 사람을 만드시는 “성령의 방법”이나 “여자의 태 속에서 어떻게 뼈들이 형성되는가를 알지 못”(전 11:5)하거늘 하물며 동정녀 마리아의 태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형성되셨는가를 알 수 있겠는가! 다윗이 어떻게 그 자신이 “은밀하게 지음을 받았으며,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는가”에 대해 탄복하였을 때(시 139:13-16)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부수된 몇 가지 사실이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Ⅰ. 마리아와 요셉과 정혼함. 우리 주님의 모친인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는데, 완전히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약속한 관계에 있었다. 결혼 의사는 de futuro-미래를 중요시했던 것이라는 말로 엄숙히 선언되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 약속이 맺어졌다. 신명기 20장7절을 보면 여자와 약혼은 했지만 데려오지 못한 남자의 예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나셨으나 약혼한 처녀에게서 나셨다.
1.
2.
3.
이 사실은 먼저 결혼을 존중히 여겨야할 것을 보여 주며, “결혼을 금하고” 독신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마귀들의 교훈에 대항하여 결혼을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혼한 마리아보다 더 고귀한 은혜를 받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동정녀 마리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수치가 장차 드려날 것이었다. 그녀의 임신은 결혼에 의해 마땅히 가리워져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당한 것이 되어야만 했다. 어떤 고대인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창녀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질문보다는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질문 받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하였다.동정녀 마리아는 그녀가 젊었을 때 그녀를 인도해 주고 고독과 여행의 동반자가 되며 근심을 함께 나누고 그녀를 도와주는 어떤 사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은 그 당시 홀아비였으며, “예수의 형제들”(13:55)은 요셉의 전처에게서 난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의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추측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그녀는 “현숙한 여자”였다. 이와 같이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아야”하며, 또한 결혼에서 위로를 얻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면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또한 이 사실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결혼이란 성급히 할 것이 아니라 신중히 잘 생각해서 해야 하며, 결혼 전에 약혼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나중에 후회할 시간을 “찾는” 것보다는 미리 신중히 고려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좋다.
Ⅱ. 마리아가 약속된 씨를 잉태함. “그들이 동거하기 전에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것은 실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다. 결혼이 약혼한 후 오랫동안 지연되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약혼을 했었지만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잉태된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잉태한 것을 요셉이 알아차린 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그녀의 사촌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달 간”(눅 1:56) 머물러 있다가 돌아온 후였을 것이다. 또한 마리아도 구태여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마음속에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나타낼 것이며, 또한 그것이 그가 소유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잉태한 이 사실이 마리아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리아 자신은 그녀의 잉태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인가? 그녀는 “창녀 취급을 받게”될 지도 몰랐다.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매우 높아진 후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 않도록 겸손하게 할 어떤 것, 즉 “육체의 가시”나 “뼈 속의 칼”과 같은 비난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와의 딸들 중에서 동정녀 마리아처럼 높아진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높아짐은 가장 치욕적인 누명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안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이 사실로 인하여 괴로워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무죄함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은 계속적으로 평온하고 조용하였으며, 그녀의 모든 주장을 “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 유의할 것은 선한 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자기들의 이름을 깨끗하게 보존하려는 일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으며, 자기들의 고결성과 명예가 대낮의 눈부신 태양처럼 밝혀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Ⅲ. 요셉의 곤경과 문제 해결을 위한 근심. 우리는 요셉에게 당면한 문제, 곧 그의 약혼자가 이와 같이 엄청난 죄의 혐의를 받는 지경에 이르자 얼마나 괴로워했고 실망했었는가를 능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마리아가 정말 이런 여자일까?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기대를 걸었는데 속다니 정말 알 수 없단 말이야!”라고 실망하며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요셉은 착하게 믿었던 마리아가 그런 나쁜 죄를 지었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는 변명되기에는 너무나 악화되었고 사실을 부인 못할 정도로 명백하였다. 이 경우야말로 그의 가슴속에 죽음처럼 도사린 사나이의 무서운 질투심과 한편으로 그가 마리아에게 쏟았던 애정이 갈등으로 치닫던 결정적인 순간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그는 극단적인 해결을 피하려고 했다. 그는 마리아를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려고”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행음하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있다(신 22:23, 24). 그러나 요셉은 그녀를 벌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리아가 범죄 했다 할지라도 아직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그 자신도 역시 그 사실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여진 요셉의 마음은 이와 비슷한 경우로서 구약에서 “그녀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라고 성급하게 재촉한 유다의 마음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요셉이 이 경우에 한 것처럼 “이 일들을 차분히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우리의 비난이나 판단에서 좀 더 신중을 기한다면 그만큼의 자비와 절제가 더 있게 될 것이다. 그녀를 형벌하는 것을 여기에서는 “그녀를 드러내지 않고”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형벌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in terrorem – 모든 사람이 듣고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경멸하는 자를 벌하고 단순한 자를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엄격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요셉의 온유함을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것이 그에 대한 칭찬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그녀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착한”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으며, 그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은”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했다. 약혼한 처녀가 들판에서 욕을 당했을 때 율법은 그녀가 “소리를 질렀을”것으로 인정하여(신 22:26) 벌하지 않았다. 요셉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리아를 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 사태를 궁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그 이름을 더럽힐 만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칭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유의할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우리는 부드럽게 대하며 처음에는 나쁘게 보이더라도 후에는 더 좋은 것으로 증명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좋게 이해하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Summum jus summainjuria – 율법의 엄격함은 (때로) 최고의 불의가 된다. 우리는 율법의 엄격함을 조절하는 양심의 법정을 “평등의 법정”이라고 부른다. 잘못이 드러난 사람들일지라도 “잠깐 사이에 실수”한 경우가 있으며 따라서 “온유의 정신”을 가지고 대함으로써 본래의 상태로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협은 비록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절제되어야만 한다.
2.
요셉은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피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그는 “가만히 끊으려고”, 즉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그런 태도에 이혼장을 줌으로써 이 일을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묻어 버리려고 작정하였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엄격한 율법 준수자였으므로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끊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녀를 생각하여 이 일을 가능한 비밀히 행하려고 결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해야할 것은 범죄한 사람에 대한 필연적인 책망을 조용히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말은 조용한 가운데서 들리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다투시거나 소리내지” 않으셨다. 기독교적인 사람이나 사려분별은 “허다한 죄를 가리며”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다만 그들과 교제를 끊을 뿐이다.
Ⅳ. 요셉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말미암아 이 곤경을 면함(20,21절). “그가 이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은혜로 그에게 행할 것을 지시하시고 그를 안심케 하였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려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들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생각해야”하며 그들 스스로가 심사숙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당황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일을 자신이 궁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친히 조언하신 것이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하시는 시기는 그들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망설일 때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하는 허다한 처지에서 그 영혼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주의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천사는 아마도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가져다 준 바로 그 천사, 가브리엘인 것 같다. 이제 천사들에 의한 하늘과의 교통, 즉 족장들이 경험하였으나 오랫동안 두절되었던 하늘과의 교통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가 세상에 오시게 될” 때 천사들은 그의 활동에 수종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곤경 가운데서 구출해내기 위하여 얼마나 천사들의 사역을 사용하실 것인가는 우리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일에 대해 확실한 것은 천사들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역하는 영들”이라는 것이다.
이 천사는 요셉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종종 말씀하신 방식과 같이 “꿈 속에서” 요셉에게 나타났다. 우리가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깨달아 알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하나님의 영은 조용한 물 위에 운행하신다. 이 꿈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헛된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꿈에서,
1.
요셉은 그가 예정했던 결혼을 그대로 진행할 것을 “지시”받았다.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로 하여금 다윗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는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와 그와의 관계에 대한 이 놀라운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했다. 때때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때 그들은 그 명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가난한 목수에게 그의 고귀한 출신가문을 생각케 할 필요가 있었다. 즉 “요셉아, 네 자신을 생각해 보라. 너는 메시야가 오실 다윗 혈통의 자손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참된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너의 출생, 너의 중생(重生)의 고귀성을 잊지 말라”고.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는 말도 위와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요셉은 마리아가 음행하여 임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녀를 데려오면” 그 자신이 죄책이나 비난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무서워했던 것이다. 아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또한 사실이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요셉에게 자신이 잉태한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며, 또한 요셉도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내 주의 모친”이라고 한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눅 1:43).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셉은 자기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게 된 마리아와 감히 결혼하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이 무엇에서 일어났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는 이 한 마디의 말에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의심이 풀어져서 만족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은혜라는 사실이다.
2.
(1)
여기에서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아내가 현재 잉태하고 있다는 “거룩한 사실”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잉태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불결함에 동참하는 위험에서 벗어났으며 그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최고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셉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들었다.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자연의 능력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를 창조하신 성령께서는 이제 세계의 구주를 창조하셨으며 약속된 대로 “한 몸을 예비하신” 것이다(히 10:5). 그러므로 성경은 그가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신 둘째 아담”이라고 말한다(고전 15:4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모친의 본체를 나누어 가지심으로서 “태의 열매”(눅 1:42)라고 불리우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성품을 가지시기는 하셨지만 인성(人性)의 부패와 타락을 피할 뿐만 아니라 죄악 중에 잉태되고 조성되지 않으시기 위하여 일반적인 “출생방식”과는 다르게 잉태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는 알렉산더왕의 어머니처럼 신적인 능력에 의해 앵태되었다고 허황되게 주장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우리 주님의 모친 이외는 그렇게 잉태된 사람이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이름은 참으로 다른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묘”하다.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에게 행해진 영광을 널리 선전했다는 말을 읽어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는 이 사실을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셨던 것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영광은 겸손한 자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
(2)
그녀가 “세상의 구주”를 낳을 것이라는 사실이다(21절).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는 말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암시되어 있다.
① 낳을 아들에게 주어질 “이름을 예수, 즉 구원자라고 하라”는 이름에서 암시되어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으며 헬라어와 어미를 맞추기 위해 고쳐졌을 뿐이다. 여호수아는 70인역에서 “예수”(행 7:45; 히 4:8)로 불리워진다. 구약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는데 그들은 둘 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전형이었다. 그 중 하나는 최초의 가나안 정복시에 이스라엘의 대장이었던 여호수아이며, 또 다른 사람은 바벨론 포로 후 두 번째 귀환 때에 대제사장이었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이다(슥 6:11, 12).
그리스도는 우리의 여호수아로서, 우리 “구원의 대장”과 “우리 신앙 고백의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그는 우리의 구세주, 즉 그는 모세를 대신하여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친히 우리를 위해 주시는” 여호수아이시다. 여호수아는 “호세아”라고도 불리웠지만 모세는 그 이름에 여호와의 첫 음절을 덧붙여 “여호수아”라고 하였다(민 13:16). 이것은 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질 메시야가 “여호와’가 되실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있으며, 그에게서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②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이유에 암시되어 있다. 즉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구절에서 “자기 백성”이란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그는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 또한 “그들 자신”에 의해 그에게 드린 모든 자들을 말한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왕이시며 옛 이스라엘의 사사들처럼 그들을 위해 “구원을 베푸신다”.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되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며,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허물 된 죄에서 구원하시며 또한 “그의 은혜의 성령”으로 죄의 지배에서 구원하신다.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그들을 진노와 저주, 그리고 현재와 이후의 모든 비참에서 구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들의 죄 가운데서”(in)가 아니라 “죄로부터”(from)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그들을 구속하시되 “죄”를 짓는데 자유함(a libetty to sin)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함(a liberty from sins)을 위하여, 또한 “모든 불법에서 구속”(딛 2:14)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사람 가운데서”(계 14:4) 구속함을 받아 “죄인들과는 구별되신” 그 자신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떠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그의 백성으로” 맡기는 자들은 구주와 그가 “이루신” 큰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롬 11:26).
Ⅴ.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 말씀이 성취됨. 유대인 출신인 이 복음서 기자는 유대인들에게 이 복음을 기록하면서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더욱 빈번히 이 점을 관찰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약의 예언들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 예수가 바로 “오실 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며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는 이 예수가 바로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그 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이루어진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약속하셨던 표적,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리니”(사 7:14)였다. 이곳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산혜립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라고 권면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유대 백성 중 다윗의 집에서 나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도록 지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유대 민족이나 다윗의 집이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남겨둔 이러한 영광과 축복이 있는 한 그 누구도 버림을 받아 멸망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역 교회를 위하여 베푸신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큰 구원의 모형과 상징에 불과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이루신다고 한다면 더 적은 일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곳에 인용된 예언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 말은 주의와 찬탄을 요구하는 말이다. 이 말로 예언이 시작된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현현되신” 사실이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하신 경건의 비밀임을 이 예언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주어진 표적은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처녀가 잉태할 것이며” 그녀로 말미암아 메시야가 “육신으로” 현현되실 것이었다. 히브리어의 “알마”란 말은 엄밀한 의미로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오니”라고 고백한 것과 같은 “동정녀”를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표적으로 주어진 이 말씀이 의도되었던 것과 같이 기이한 표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메시야가 “여인의 후손”이 될 것이라는 말씀에서 메시야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암시되었다. 그는 비록 여인의 후손이 되시기는 했지만 남자의 후손이 되신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것은 그의 탄생이 “초자연적”이고 전혀 특수한 것이 되어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흠 없고” 순결하며 어떠한 죄의 오점도 없으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여왕이나 왕비”에게서 태어나시지 않으신 것은 그가 외적인 영광이나 화려함으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것은 우리들에게 영적인 순결과 모든 감각적인 향락에 대해 죽어야 할 것을 가르치며 또한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 “정숙한 처녀”로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과 육욕으로부터 “자신들을 깨끗하게 보존”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이 표적에 의해 입증된 진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임마누엘”이 되실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불리워지리라”는 말은 그가 “우리의 의(義)이신 주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신비스러운 이름이면서도 매우 귀중한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더불어 “화목케”하시고, 평화를 누리시며, 그 자신과 더불어 언약과 교제를 맺으신다. 유대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서” 모형과 그림자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는 – 그것은 아름다운 “쇄귀나”(말씀)였다 –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일치를 위하여 두 성품(神性과 人性)이 중보자의 한 인격 안에 결합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조처인가!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과 사람 양편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완전하신 중재자, 즉 중개자(仲介者)가 되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두 양성(兩性)에 함께 참여하실 수 있다. 보라, 여기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오묘한 신비와 가장 풍성한 자비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연”이란 빛(역주:직각)에 비추어 하나님이 “우리 위에 초월”해 계심을 알 수 있으며, “율법”이란 빛에 비추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빛에 비추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과 (더우기) 우리의 관심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구속자는 자기의 사랑을 위탁하였다. 우리는 “임마누엘”이라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복음적 교회에 주어진 “여호와 샴마”(겔 48:35)-즉 “주님은 거기에 계신다”라는 명칭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가 “예수”라고 불리워진 것은 그가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워질 것이라는 예언이 그 계획과 의도에 있어서 성취되었다고 말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만일 그가 “임마누엘”-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 아니셨더라면, “예수”-즉 “구세주”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합일”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계획하셨던 것인바,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한 것은 우리의 큰 행복이며,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신 것은 우리의 큰 의무이다.
Ⅵ.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24절). “잠에서 깨어난 후” 요셉은 꿈에서 받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천사가 그에게 명한 대로”, 비록 그것이 이전에 지녔던 감정과 의도에 위배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행하여 “아내를 데려왔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재빠르게, 지체함이 없이, 기쁘게, 사소한 논쟁도 없이 행하였으며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에 불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이와 같은 특별한 지시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의심스러운 경우에 여러 가지 방법, 즉 섭리의 암시나 양심의 갈등, 신실한 친구의 충고 등을 통하여 그의 의도를 전달하신다. 이러한 모든 방법들을 통해, 그러나 기록된 말씀(성경)의 일반적인 규칙을 적용하면서 우리 삶의 모든 단계, 특히 이 요셉의 경우와 같은 삶의 위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Ⅶ.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25절). “마리아는 맏아들을 낳았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상황이 누가복음 2장 1절 이하에 충분히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결코 유산(流産)되지 않고 때가 차면 반드시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잉태된 것은 종종 유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혼 속에 “형성”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루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은혜로 “잉태”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영광 중에 태어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더 살펴보아야 하겠다.
1.
2.
3.
요셉는 그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린 후에도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된 이 거룩한 아기를 배고 있는 동안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즉 “그가 아기를 낳기까지 그와 동침치 아니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모친이 영원한 동정녀이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제몰(Jerome)은 이 사실을 부인하는 헬비디우스(Helvidius)에게 심히 분노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휘트비(Whitby) 박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려고 한다. 즉 “그녀가 맏아들을 낳기까지 요셉이 그녀와 동침치 않았다”는 말씀은 동침치 말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후에는 율법에 따라(출 21:10)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말한다.그리스도는 “맏아들”이었다. 성경의 어법에 의한다면 그의 모친이 그 후 다른 아이들을 낳지 않았어도 그렇게 불리울 수가 있다. 그리스도가 그녀의 “맏아들”이라고 불리우신 사실에는 신비가 없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피조물 중 처음 난 자”, 즉 만물의 상속자이시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것”은 그가 만유 위에 뛰어나시기 위함이다.요셉은 그에게 주어진 지시에 따라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사실에서 암시된 것과 같이 그를 구세주로 “임명”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그가 구주로 임명받으신 사실과 부합하도록 우리는 그를 “우리의 구주 예수”라고 불러야 한다.
[마태복음강해1장] 예수님 족보의 특징 ‘낳고 낳고 또 낳고’
마태복음 1장, 예수님 족보의 특징 그리고 ‘낳고’의 비밀
오늘부터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록한 성경이 4권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직책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이를 다 합하여 메시야 구원자로서 이 땅에서 그 사명을 다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마태복음 첫 부분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 것은 먼저 예수님이 결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존인물인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이 중 예수님은 왕이시다라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잇는 왕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다윗의 혈통을 이은 당당한 왕이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당시 로마의 괴뢰정권으로 세워진 헤롯왕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명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렘23:5).
둘째, 이 왕의 족보에 다섯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과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인데, 이중 라합과 룻은 모두 이방여인입니다. 다말은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이지만, 유다의 아들을 낳아 유다의 대를 잇게 됩니다. 밧세바는 다윗이 자신의 충실한 부하를 죽이고 뺏은 여인입니다. 이들 여인들은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여인들로 인해 다윗왕가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이름을 족보에 기록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인데, 이 여인들이 한결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다윗왕가가 생겨나고 이어졌다는 것,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당시 나라를 잃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그저 육신의 혈통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런 혈통 내세울 수 있느냐? 자랑할만한 것이냐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시세말로 “돌직구”를 날린 것이죠. 이는 또한 이제 육신의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새로운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의 등장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세번째, 이 족보는 계속해서 낳고 낳고 낳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단기간에 성경통독을 하는 훈련을 받아보셨다면,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으로 이어지는 다이나믹한 반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성경통독 셋째날이 되면 이사야로 시작되는 선지서를 읽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참가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우리 하나님 정말 무섭다”입니다. 이사야에서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소선지서를 통해 말라기까지 성경을 읽는 동안 아주 컴컴한 동굴을 기약없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정말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흘리며 회개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심판이 곧 내 머리 위에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구약성경이 끝나고 이제 신약성경이 펼쳐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단어가 바로 “낳고”입니다. 이전까지 죽고 죽이고 또 죽을 것이다.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그러면서 계속 낳고의 행진이 이어집니다.
“낳고”라는 말을 읽는 순간 그 어두웠던 터널의 끝이 보이면서 환한 생명의 빛줄기가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살았다, 살았구나” 그 안도감.. 마태복음은 왜 낳고를 계속 반복할까요? 아브라함이 죽어 이삭이 대를 잇고, 이삭이 죽어 야곱이 그 뒤를 잇고..이런 식으로 기술할 수 있었는데, 마태복음은 낳고 낳고 낳고의 행진을 이어갑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심판과 죽음을 가져오신 것이 아니라 죽어야 마땅할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살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마태복음 1장 헬라어 성경말씀]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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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장 헬라어 성경 말씀 중에서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메시아로서 이 땅에 탄생하셨는데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마 1:1-5)
1절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에에수 크리스투 휘우 다비드 휘우 아브라암
성 경: [마1:1]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계보 개관(槪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근 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 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아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아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 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아로 더욱 확증 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 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린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자손(휘오스).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써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오신 메시아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 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아’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란 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아’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를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아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아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 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 ‘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 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 같은 표현은 70인 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용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 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2절 아브라암 에겐네센 톤 이사아크 이사아크 데 에겐네센 톤 아아코브 이아코브 데 에겐네센 톤 이우단 카이 투스 아델푸스 아우투
성 경: [마1:2]
마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아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아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출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새 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낳고(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 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 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아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아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3절 아우다스 데 에겐네센 톤 파레스 카이 톤 자라 에크 테스 다마르 파레스 데 에겐네센 톤 에스롬 에스롬 데 에겐네센 톤 아람
성 경: [마1:3]
마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 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 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상간에서 시작된 모압 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 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둥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4절 아람 데 에겐네센 톤 암이나답 암이나답 데 에겐네센 톤 나앗손 나앗손 데 에겐네센 톤 살몬
성 경: [마1:4]
마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 시 제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5절 살몬 데 에겐네센 톤 보오즈 에크 테스 라캅 보오즈
성 경: [마1:5]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된다.
생일을 저주하는 욥(욥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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