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강해 |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291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8장 강해 –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ppa.pilgrimjournalist.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ppa.pilgrimjournalist.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홍융희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6,182회 및 좋아요 176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강해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 마태복음 18장 강해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2020. 2. 26 (수) [하루 한 장]“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18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마태복음 18장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천국의
통치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네가 뭔가 특별한
지위가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누가 천국에서 더 크냐고
함부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는 아예 들어갈 수 없다고,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 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 당시에
가장 자격 없고 존중받지 못하는
미천하고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도리어 높임받고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역설입니다
오늘날 강하고 힘있는 자들이
득세하는 이 세상을 살지만
우리 역시 예수님만 의지하고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온전히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강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마태복음 18장 주석 – Daum 카페

마태복음 제 18장 =====18:1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9/1/2021

View: 3567

마태복음 18장: 하늘 나라에서 사는 법 – Godmade

겉으로 하찮아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 그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죄에 빠지게 하는 도구가 되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godmade.tistory.com

Date Published: 3/13/2021

View: 3430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8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18:1 겸손에 관한 교훈 (마태복음 18:1-6) 그리스도는 전무후무한 겸손의 모형이셨으며, 또한 그것의 설교자이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언제라도 …

+ 여기에 보기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6/24/2022

View: 254

헬라어 마태복음 18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

+ 여기에 보기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6/21/2021

View: 8397

마태복음 18장 설교 – 밤중소리

(본문 : 마태복음 18 : 1 – 4) 서 론 :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주님께 물어 볼만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천국에 …

+ 더 읽기

Source: www.bamjoongsori.org

Date Published: 9/18/2022

View: 5746

마태복음 18장

<마태복음 18장 흐름정리>. 주님은 겸손과 용서에 대한 교훈을 통해서 천국 시민의 자질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크게 보아서 산상 수훈의 실천적 …

+ 여기를 클릭

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1/30/2022

View: 7200

제21과: 마태복음 18장

주님께서는 또한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며 자비롭지 못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교수 제언. 마태복음 18:1~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교회를 이끄는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4/2021

View: 2585

[마태복음 18장 예수님의 말씀]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마 18:1 …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 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 율법의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복음은 주님을 높이게 됩니다.

+ 여기에 보기

Source: bedesd153.tistory.com

Date Published: 3/18/2021

View: 7588

마태복음 18장 강해 3부 용서의 원리 – 천안UBF

마태복음 18장 강해 삼부 용서의 원리 255장. 말씀 마태복음 18장 21-마태복음 18장 35. 요절 마태복음 18장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cnubf.co.kr

Date Published: 5/24/2022

View: 9977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마태복음 18장 강해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복음 18장 강해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6,182회
  • Likes: 좋아요 176개
  • Date Published: 2020. 2.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UFI3qGKuzs

마태복음 18장 주석

마태복음 제 18장

=====18:1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

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

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

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

(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

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

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

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

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

(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

(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

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

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

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

었다.

=====18:2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

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

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

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

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

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

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

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

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

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

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

다.

=====18:3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우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

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

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

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

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

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

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

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

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

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

)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

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8 } 4 끼기쁠 낫추는 그이가. 사모 ) 3-4의 고난받는 종의 1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자기뤄 낫추다’의 혈라어 동사 ‘타페이1오’ (멱488퉈01)쳤 단순할 의미의 겸손이 아니

라 멸시, 촨대, 굴욕 둥올 당하면서까지 겸손할 것올 의미한다. 따라서 신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넘의 말씀올 전하고 실천함으로 진찌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몌시를 당하는 것올 기뻐하는 상태를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 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 } 5

=====18:8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우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

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

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

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

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

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

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

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

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

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

)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

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8 } 4 끼기쁠 낫추는 그이가. 사모 ) 3-4의 고난받는 종의 1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

이다. “자기뤄 낫추다’의 혈라어 동사 ‘타페이1오’ (멱488퉈01)쳤 단순할 의미의 겸손이

아니 라 멸시, 촨대, 굴욕 둥올 당하면서까지 겸손할 것올 의미한다. 따라서 신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넘의 말씀올 전하고 설친함으로 진찌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몌시를 당하는 것올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 5)

=====18:10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

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비사자로서 생

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

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

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

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

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

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

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

(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

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

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

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

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

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

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11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

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13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

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18:14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

망)은 이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

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

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

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

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극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

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

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

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

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

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

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

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

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

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 )이 아니라 ‘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

렝코'(* )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

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

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

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

19:17).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

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

음으로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

혜와 조심성과 사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

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18:17

듣지 않거든(* ,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

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

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

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

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

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

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세리처럼 되

게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

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18:19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

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

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

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

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

)가 ‘어떤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

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

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

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

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

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해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

오'(* )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

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18:20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

마'(* )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

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

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말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

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

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18:21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제의 죄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용서

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

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

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체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

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

사 ‘아페소'(* )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

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

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

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

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

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

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

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

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

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

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

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

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

(McNeile).

=====18:23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벌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늬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늬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

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 둘로이)이란 문자적으

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

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

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

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

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

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

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 )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

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18:24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

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

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

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

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

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빚진 자(* ,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

령 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

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

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

‘(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

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

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

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

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

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

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

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

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

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

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

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

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

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

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지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18:25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

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

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

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

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

자비할 종도리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

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

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

(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8:26

엎드리어 절하며(* ,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

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

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

)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 )와 ‘강한 감정 ,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 )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

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앳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

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

변에 지나지 않는다.

=====18:27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

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

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

11:30-32).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

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

서 ‘빚'(* ,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

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

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

(* )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

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

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

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 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

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

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

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

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18:28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

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

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

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

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

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

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

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

,)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

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

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

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

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빚을 갚으라(* ,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

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

(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

)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

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

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

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29

엎드리어 간구하여(* ,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

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

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느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과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저느이 자신의 처지를 기

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 브장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 )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

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

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

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 )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

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

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

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

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

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

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

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

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

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

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18:32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

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

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

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

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

(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

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도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

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

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네가 빌기에(* ,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 )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

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

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

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18:33

불짱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

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

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

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

(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으미한다.

마땅치 아니하냐(* … ,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

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 )는 다

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

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18:34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

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

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

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

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 빚을 다 같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 )는 ‘…까지’의 뜻으로, 제

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

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

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

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

개한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

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

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

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

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

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

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

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

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

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 )

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

퓔라크스’ )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대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

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

마태복음 18장: 하늘 나라에서 사는 법

마태복음 18장: 하늘 나라에서 사는 법

1. 1-14절: 하늘 나라와 지극히 작은 사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즈음에 제자들도 하늘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이유도 하늘 나라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혹시 예루살렘에 이루어질 위대한 다윗 왕국이 아닐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 나라가 임하면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까? 아마도 제자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1절).

그러자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부르셔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된다”는 말은 4절에 나와 있듯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어린이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존재감이 낮았습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다투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 서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이 사회에서 무시 당하고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을 절대적인 가치로 대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그것도 역시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에 대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6절)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그 중에는 사회적으로 무시 당하고 차별 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한다”(6절)는 말은 “믿음을 버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죄짓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겉으로 하찮아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 그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죄에 빠지게 하는 도구가 되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중대한 죄를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6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7절)는 현실을 인정하십니다.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8-9절)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제거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의 근원을 제거 하라는 뜻입니다. 죄 짓게 하는 것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 죄의 근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생명”(8절)과 “영원한 불”(8절) 혹은 “지옥”(9절)을 대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천국과 영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지옥이 있고 영원한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엄연한 사실로 전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 좋을 대로 상상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라면 이 땅에서 아까워할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가르침을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써 마무리하십니다(10-14절). 백 마리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는 그 중에서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찾아 나섭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누구나 같은 무게와 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 하나님의 눈으로 대하여 누구에게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2. 15-35절: 하늘 나라와 용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로 인해 세상은 꼬이고 꼬입니다. 그것을 푸는 것이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꼬인 매듭을 푸는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네 형제”(15절)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고 믿음의 형제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를 말합니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공동체를 시끄럽게 하지 말고 먼저 일대일로, 사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래도 되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될 경우에 한하여 공동체에 알리고 교회의 결정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돌아설 때까지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20절)는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를 말합니다. 모인 사람의 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모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승인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인정할만한 거룩하고 참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거듭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21절). 당시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세 번 용서해 주면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리새파 율법학자들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 하신다고 알고 있었기에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21절)라고 묻습니다. 일곱의 완전수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22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90번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이 대답에 다들 놀랐을 것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 ‘무한대의 용서’가 가능해지는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액수입니다. 오늘로 하자면 천억 정도에 해당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빚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 그 종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치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왕이 볼 때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

왕에게 그 많은 빚을 용서받고 궁궐을 나가던 중에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로 일만 달러 정도 되는 돈입니다. 왕에게 용서받은 그 종은 자신에게 빚진 친구에게 당장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 친구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 종은 결국 그 친구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왕은 그 종을 하옥시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말하고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빚은 죄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듭 거듭 짓는 죄는 490번이 아니라 490000000000번도 넘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상상할 수 없는 빚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상상할 수 없는 죄의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죄를 모두 사해 주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것이 믿는 자가 받은 은혜입니다. 만일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행하는 잘못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 형제가 나에게 하는 잘못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하나님께 지은 잘못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받은 용서를 잊었다는 뜻입니다(35절).

묵상:

하나님의 다스림에 마음을 열면 먼저 나의 내면이 변화하고, 내면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대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영원한 가치를 알아 보고 그것에 따라 사람을 대합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을 밟고서라도 높아지는 것이 목표인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의 발판이 되어 줍니다. 그렇기에 땅의 나라에서 무시 당하고 차별 당하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임 받고, 땅의 나라에서는 높임 받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아집니다. 사실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눈에 보이게 도드라져 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 즉 우리의 죄가 치워졌다는 뜻입니다. 죄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께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를 모두 합하면 일만 달란트에 달합니다. 그 모든 것을 용서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그를 미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뜻입니다.

복 되어라, 모든 이들을 절대값으로 대하는 이!

복 되어라, 용서의 능력을 아는 이!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8장

18:1 겸손에 관한 교훈 (마태복음 18:1-6) 그리스도는 전무후무한 겸손의 모형이셨으며, 또한 그것의 설교자이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언제라도 겸손할 것을 명령하셨고 또한 권장하셨다. Ⅰ. 겸손에 관한 이 교훈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제자들 간에 누가 더 크냐하는 합당치 못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 와서 말하기를” 그들 중에서 “누가 천국에서 제일 크니이까?”하고 물었다(그들은 이러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그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였다. 막 9:34). 그들이 말하고 있는 뜻은, “어떤 성품을 가진 자가 크니이까?” 한 것이 아니라(그런 뜻의 질문이라면 온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은사와 직분이 가장 빼어나는가를 그들은 알아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가장 큰 자의 이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늘 나라와 메시야의 나라와 이 세상에 있는 그의 교회에 대하여 많이 들어왔고 또 많이 가르쳐 왔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국의 분명한 개념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현세적인 왕국과 그것의 외형적인 허례와 권세만을 꿈꾸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근에야 그의 고통 당할 일과 그 후에 있을 영광, 즉 그의 부활을 예언하셨었다. 그들은 그 영광의 부활이 있게 되면 그때로부터 그의 나라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천국에서 자기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찍 말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던 다른 경우에서도 제자들 간에는 이러한 종류의 논쟁이 있었다(마 20:19, 20; 눅 22:22, 24).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지만,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말씀만을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한 마디의 말씀만을 귀담아 들었으며, 다른 말씀들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능력과 은혜를 받아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을까 라고 묻는 대신에 “그와 함께 그의 나라에서 다스릴 때 누가 제일 큽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은 특권과 영광에 대해서는 듣거나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수고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생각하는 것은 기꺼이 지나쳐 버린다.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많이 바라보기 때문에 멍에와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크니이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 1. 제자들은 그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을 크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제사장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으로 선한 자들이 참으로 큰 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처럼 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세상에서는 비천하고 가난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2. 제자들은 천국에도 계급과 상하 계층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다 존귀하게 되지만 그러나 동등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 별은 다른 별과 영광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윗의 모든 관리(용사)들은 모두 30인의 영걸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 영걸들은 모두 첫 3인의 시위대 장군들은 아니었다.

3. 제자들은 그들 중에 몇 명만이 최고의 주지사(또는 장관)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왕 되신 주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에 와서는 인내와 고난 가운데서 그의 동역자가 된 자들에게만 존귀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

4. 제자들은 각자가 자신의 잘난 점만을 내세우면서 누가 제일 큰가를 논쟁하였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석 발언자였으며 또한 천국열쇠가 주어져 있었다. 그는 주님의 집에서 국무대신이 되어 가장 큰 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말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장차 재무장관이 되어 가장 큰 자로 지명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시몬과 유다(가룟 유다는 아님)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혈육의 군주들로서 높은 자들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요, 왕의 총애를 받는 자였으므로 큰 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안드레는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이므로 그 역시 하늘 나라에서도 큰 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자기의 분수에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을 어리석게 탐하여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기가 쉽다. 제자들은 그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을 크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제사장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으로 선한 자들이 참으로 큰 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처럼 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세상에서는 비천하고 가난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제자들은 천국에도 계급과 상하 계층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다 존귀하게 되지만 그러나 동등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 별은 다른 별과 영광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윗의 모든 관리(용사)들은 모두 30인의 영걸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 영걸들은 모두 첫 3인의 시위대 장군들은 아니었다.제자들은 그들 중에 몇 명만이 최고의 주지사(또는 장관)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왕 되신 주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에 와서는 인내와 고난 가운데서 그의 동역자가 된 자들에게만 존귀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제자들은 각자가 자신의 잘난 점만을 내세우면서 누가 제일 큰가를 논쟁하였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석 발언자였으며 또한 천국열쇠가 주어져 있었다. 그는 주님의 집에서 국무대신이 되어 가장 큰 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말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장차 재무장관이 되어 가장 큰 자로 지명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시몬과 유다(가룟 유다는 아님)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혈육의 군주들로서 높은 자들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요, 왕의 총애를 받는 자였으므로 큰 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안드레는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이므로 그 역시 하늘 나라에서도 큰 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자기의 분수에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을 어리석게 탐하여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기가 쉽다. Ⅱ. “누가 가장 크니이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시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교회의 머리요 지상의 최고 대행자들로 삼으시려는 의향을 가지고 계셨다면, 그에게 주어진 기회가 마침 좋기 때문에 그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도록 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억측들과는 전혀 동떨어진다. 그의 대답은 그 문제 자체를 불허하시고 오히려 정죄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결코 그러한 권위나 우월한 지위를 그의 교회에 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 권세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모두가 강탈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지위를 제자들에게 주시기는커녕 그들이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을 엄하게 책망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겸손해지기를 가르치고 계신다. 1. 표적(sign)으로 가르치심(2절). “예수께서 한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옛날 선지자들처럼 흔히 표적에나 알기 쉬운 예화를 들어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겸손은 익히기가 매우 힘든 교훈이기 때문에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이 어린아이를 표적으로 사용하셨는가를 마음에 새기게 된다. 곧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물들(예화나 표적 등)은 영적인 목적에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저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린아이들과 더불어 장난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이나 위인이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들이 어른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을 해 주기도 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때에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어렸을 때에 선생들 중에 계셨었다(눅 2:46).

2. 이 표적에 근거하여 설교를 하심. 그의 설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겸손의 필요성(3절). 그의 말씀의 서두는 엄숙하였으며, 자신의 말씀에 경청하고 동의할 것을 명하고 계시다.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인 내가 말하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 주님께서 요구하시고 주장하신 것은 무엇인가? 표적(sign)으로 가르치심(2절). “예수께서 한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옛날 선지자들처럼 흔히 표적에나 알기 쉬운 예화를 들어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겸손은 익히기가 매우 힘든 교훈이기 때문에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이 어린아이를 표적으로 사용하셨는가를 마음에 새기게 된다. 곧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물들(예화나 표적 등)은 영적인 목적에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저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린아이들과 더불어 장난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이나 위인이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들이 어른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을 해 주기도 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때에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어렸을 때에 선생들 중에 계셨었다(눅 2:46).이 표적에 근거하여 설교를 하심. 그의 설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겸손의 필요성(3절). 그의 말씀의 서두는 엄숙하였으며, 자신의 말씀에 경청하고 동의할 것을 명하고 계시다.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인 내가 말하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주님께서 요구하시고 주장하신 것은 무엇인가? 첫째, “너희는 돌이켜야 한다. 즉 너희들이 천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적합한 자가 되기 전에 먼저 너희의 마음과 기질과 너희 자신, 그리고 천국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너희 안에 있는 교만과 야망, 명예욕과 권세욕들을 회개하고 극복하며 개조시켜야 하며 또한 참된 자신을 회복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는 본래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변화되는 영혼의 첫 번째 변화 이외에도 종종 있게 되는 타락의 길에서 다시금 회개해야 되는 두 번째 변화가 있다. 이는 구원에 이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죄로 말미암아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모든 발걸음은 회개를 통하여 다시금 바른 길로 돌이켜야만 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것을 회개하였을 때 회심을 하게 되었었다. 둘째, 너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회심의 은혜는 우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혜에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우둔하게 만든다든지(고전 14:20), 변덕스럽게 세상풍조에 휩쓸리게 한다든지(엡 4:14), 장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과 같이(마 11:16)되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같이 “신령하고 순전한 말씀의 것을 사모”(벧전 2:2)해야 하며 또한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실 줄을 믿어야 하며(마 6:31)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악의가 전혀 없고 남을 해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고전 14:20), 다스림에 순복하고 명령을 잘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갈 4:2)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별히 뜻하고 있는 바는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위엄을 부리지 않으며, 귀족의 자식일지라도 거지의 자식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며 논다(롬 12:16). 어린아이는 걸레 조각과 같은 누더기 옷을 입을지라도 따뜻하기만 하면 비단 옷을 입은 어린아이의 화려함을 시기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높은 자리를 탐내거나 세상에서 크게 출세할 계획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는다.”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여 심령으로 고요하고 자신을 평온케 해야 할”(시 131:1, 2)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몸이 작고 키가 적은 것과 같이 우리는 영적으로 또한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적고 또 작아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성품만이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 준다. 유년기는 한찬 배우는 시기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처럼 배우는 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2] 주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강조를 하셨다. 겸손함이 없이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항시 두려워함으로 “(그의 안식에)미치지 못할까”를 염려해야만 한다(히 4:1). 제자들이 그 질문을 했을 때(1절) 그들은 천국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질투심을 가지고 있음을 깨우쳐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보다 나은 성품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곳으로 결단코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에서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실은 제일 못난 사람들이며 “전혀 무능력한 자로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은 본문에서 교만과 욕망의 위험성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다. 어떠한 맹세를 사람들이 했을지라도 그들이 이 죄를 범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그의 거룩한 산에서 쫓겨나게 했으며, 또한 우리가 교만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교만으로 높아진 사람들은 마귀의 정죄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듭나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하며,” 또한 “거룩하신 아기인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승천 후에도 “소자”(행 4:27)로 불리우고 계시다.

(2) 그는 겸손에 뒤따르는 명예와 승진을 가르치시고 있다(4절).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이고도 경이스러운 대답을 해 주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사람은 비록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경멸을 받지 않을까 염려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매우 수줍어하는 마음씨를 가진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승진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러한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겸손한 기독자만이 가장 훌륭한 기독자이며,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은총 안에서 가장 존귀한 자이며, 신적인 은혜를 교통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저 세상에서도 그를 가장 즐거워하는 자이다. 그들은 큰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찾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가장 겸손하고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존경받기를 전혀 구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기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해 주시며, 그들을 보호해 주시며, 그들의 염려하는 것을 선처해 주시며, 그들이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곧 회복케 될 것을 아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강조를 하셨다. 겸손함이 없이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항시 두려워함으로 “(그의 안식에)미치지 못할까”를 염려해야만 한다(히 4:1). 제자들이 그 질문을 했을 때(1절) 그들은 천국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질투심을 가지고 있음을 깨우쳐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보다 나은 성품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곳으로 결단코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에서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실은 제일 못난 사람들이며 “전혀 무능력한 자로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은 본문에서 교만과 욕망의 위험성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다. 어떠한 맹세를 사람들이 했을지라도 그들이 이 죄를 범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그의 거룩한 산에서 쫓겨나게 했으며, 또한 우리가 교만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교만으로 높아진 사람들은 마귀의 정죄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듭나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하며,” 또한 “거룩하신 아기인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승천 후에도 “소자”(행 4:27)로 불리우고 계시다.그는 겸손에 뒤따르는 명예와 승진을 가르치시고 있다(4절).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이고도 경이스러운 대답을 해 주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사람은 비록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경멸을 받지 않을까 염려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매우 수줍어하는 마음씨를 가진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승진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러한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겸손한 기독자만이 가장 훌륭한 기독자이며,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은총 안에서 가장 존귀한 자이며, 신적인 은혜를 교통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저 세상에서도 그를 가장 즐거워하는 자이다. 그들은 큰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찾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가장 겸손하고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존경받기를 전혀 구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기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해 주시며, 그들을 보호해 주시며, 그들의 염려하는 것을 선처해 주시며, 그들이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곧 회복케 될 것을 아실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염려할 것이다.

[1]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지 않을 것으로 염려한다. 그러나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겸손한 자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은 모두 그리스도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그는 간주하신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영접하고 정중히 대우하는 자들은 그의 겸허함을 인하여 실족케 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를 사랑해 주고 우정을 나누며 서로 도와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힘쓰게 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영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합당하게 받으시고 갚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된 자가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되, 각 지체들 특히 가장 비천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교회의 전체 가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의 자녀까지도 돌보신다. 우리가 친절을 베푸는 어린아이가 더 보잘것없는 아이일수록 그 속에 담겨있는 선의(善意)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지극한 것이 된다. 그들 자신을 위하여 적으면 적을수록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더욱 더 큰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그와 같이 여기신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개인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충분히 영접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심령이 가난한 자와 함께 있다.” 그들은 그가 영접해 주시는 자들이다(마 25:35-40 을 참조).

[2] 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을 배신할까 염려한다. 가장 천박한 사람들은 겸손한 자들을 짓밝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Vexat censura columbas─즉 비둘기에게서 비난할 조건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미리 예방하신 것이다(6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일 그의 어린 소자 중 하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매우 위험스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이 말씀은 그들의 둘레에 불담(a wall of fire)을 만들고 있다. 그들을 해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눈동자를 해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지 않을 것으로 염려한다. 그러나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겸손한 자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은 모두 그리스도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그는 간주하신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영접하고 정중히 대우하는 자들은 그의 겸허함을 인하여 실족케 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를 사랑해 주고 우정을 나누며 서로 도와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힘쓰게 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영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합당하게 받으시고 갚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된 자가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되, 각 지체들 특히 가장 비천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교회의 전체 가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의 자녀까지도 돌보신다. 우리가 친절을 베푸는 어린아이가 더 보잘것없는 아이일수록 그 속에 담겨있는 선의(善意)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지극한 것이 된다. 그들 자신을 위하여 적으면 적을수록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더욱 더 큰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그와 같이 여기신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개인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충분히 영접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심령이 가난한 자와 함께 있다.” 그들은 그가 영접해 주시는 자들이다(마 25:35-40 을 참조).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을 배신할까 염려한다. 가장 천박한 사람들은 겸손한 자들을 짓밝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Vexat censura columbas─즉 비둘기에게서 비난할 조건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미리 예방하신 것이다(6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일 그의 어린 소자 중 하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매우 위험스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이 말씀은 그들의 둘레에 불담(a wall of fire)을 만들고 있다. 그들을 해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눈동자를 해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가상적인 범죄.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어린아이들은 비록 어리고 적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이 되며, 또한 자신의 주장을 그에게 아뢰게 된다. 그러므로 그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 할 때도 그도 역시 그들의 억울함(wrongs)에 동참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비록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사람들과 동일한 특권을 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어린아이들을 범죄케 하거나(고전 8:10, 11), 또는 그들의 의로운 영혼을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며, 그들을 낙담시키고 그들의 온순한 마음씨를 이용하여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실족케 할 때가 있다. 이와 같이 가장 좋은 사람들(여기서는 어린아이-역주)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대접을 받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둘째, 이 범죄에 대한 형벌. 이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6절)는 말씀에 암시되어 있다. 그 죄는 가증한 것이며, 그 파멸은 비례적으로 극심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자는 차라리 극악한 죄인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는 편이 낫다. 그 형벌은 육체만을 죽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 하라. 1. 지옥은 바다의 깊은 곳보다 더 나쁜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밑이 없는 못이요, 불이 이글거리는 호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깊은 바다 속에서도 오히려 편하게 쉬었던 요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욘 2:2, 4, 9). 그러나 지옥에서는 한 가닥의 위로도 찾아 볼 수 가 없다. 거기에는 영원히 위로가 없다.

2. 저항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는 재판장 되신 하나님의 심판이 “목에 달리운 연자 맷돌”보다 더 신속하고 분명하게 그들을 가라앉게 할 것이요, 더욱 굳게 조일 것이다. 거기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구렁(눅 16:26)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 을 실족케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실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가장 무서운 선고인 “화있을진저”(교만한 박해자들은 최후에 이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를 받게 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지옥은 바다의 깊은 곳보다 더 나쁜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밑이 없는 못이요, 불이 이글거리는 호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깊은 바다 속에서도 오히려 편하게 쉬었던 요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욘 2:2, 4, 9). 그러나 지옥에서는 한 가닥의 위로도 찾아 볼 수 가 없다. 거기에는 영원히 위로가 없다.저항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는 재판장 되신 하나님의 심판이 “목에 달리운 연자 맷돌”보다 더 신속하고 분명하게 그들을 가라앉게 할 것이요, 더욱 굳게 조일 것이다. 거기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구렁(눅 16:26)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 을 실족케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실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가장 무서운 선고인 “화있을진저”(교만한 박해자들은 최후에 이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를 받게 될 이유가 되는 것이다.

18:7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하여 (마태복음 18:7-14)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실족케 하는 것 또는 장해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Ⅰ. 일반적인 언급(7절).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나서 보다 일반적으로 실족케 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계시다. 실족케 하는 죄란, 1. 유혹이나 위협에 의해서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에로 사람들을 꾀어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경우와,

2. 재난을 당하게 하여 “의로운 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계시다.

(1) 실족케 하는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있게 마련이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위험이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에는 보다 더 튼튼하게 무장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이 실족케 하는 것을 부득이한 것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족케 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을 미리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사탄의 교활함과 사악함, 인간의 심령의 연약함과 부패함 그리고 인간의 우매함을 생각해 볼 때 실족케 하는 일들이 실제로 없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고 거룩한 결말들(ends)을 인간들에게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온전한 자들이나 온전치 못한 자들이 모두 다 드러나도록 하셨다.”(고전 11:19; 단 11:35 참조). 주님께서도 이미 유혹하는 자들과 핍박하는 자들과 시험에 들게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경계를 해야만 한다(마 24:24; 행 20:29, 30).

(2) 실족케 하는 것은 화를 불러오는 것들이며 또한 그것들의 결말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실족케 하는 것에는 두 가지 화가 뒤따른다.

[1] 실족케 함을 당하는 자들, 즉 부주의하고 경계가 허술한 자들에게 미치는 화.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믿음과 거룩함을 역행하는 장애물과 방해물들은 인류의 악이요 전염병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파멸이다. 이 세상은 사악한 세상이며, 허물과 죄와 유혹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이다. 유혹이나 위협에 의해서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에로 사람들을 꾀어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경우와,재난을 당하게 하여 “의로운 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계시다.실족케 하는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있게 마련이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위험이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에는 보다 더 튼튼하게 무장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이 실족케 하는 것을 부득이한 것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족케 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을 미리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사탄의 교활함과 사악함, 인간의 심령의 연약함과 부패함 그리고 인간의 우매함을 생각해 볼 때 실족케 하는 일들이 실제로 없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고 거룩한 결말들(ends)을 인간들에게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온전한 자들이나 온전치 못한 자들이 모두 다 드러나도록 하셨다.”(고전 11:19; 단 11:35 참조). 주님께서도 이미 유혹하는 자들과 핍박하는 자들과 시험에 들게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경계를 해야만 한다(마 24:24; 행 20:29, 30).실족케 하는 것은 화를 불러오는 것들이며 또한 그것들의 결말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실족케 하는 것에는 두 가지 화가 뒤따른다.실족케 함을 당하는 자들, 즉 부주의하고 경계가 허술한 자들에게 미치는 화.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믿음과 거룩함을 역행하는 장애물과 방해물들은 인류의 악이요 전염병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파멸이다. 이 세상은 사악한 세상이며, 허물과 죄와 유혹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거침돌들과 낭떠러지와 거짓 안내자들로 가득찬 위험한 길을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고 거기에서부터 건져냄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실족케 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함을 받으며, 또한 이 모든 거침돌들에 의해 넘어지는 데서 도우심을 받는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실족케 하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2] 고의적으로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화, “그러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것이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변명의 구실은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죄악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케 하시지만 그것이 죄인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족케 하는 자들이 범죄 할 때에는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 앞에는 죄가 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은 그들이 정죄 받은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치 “죄를 범한 여로보암이 다른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 경우와 같다. 고의적으로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화, “그러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것이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변명의 구실은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죄악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케 하시지만 그것이 죄인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족케 하는 자들이 범죄 할 때에는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 앞에는 죄가 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은 그들이 정죄 받은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치 “죄를 범한 여로보암이 다른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 경우와 같다. 이 재앙(화)은 재판법의 경우와 비슷하다(출 21:33, 34 -; 22:6), 그 법에 의하면 구덩이를 파거나 불을 놓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모든 손해를 배상해야만 했다. 크게 실족케한 반기독자들은 죄인들을 미혹케 하고(살후 2:11, 12) 성도들을 핍박한 것(계 17:1, 2, 6)으로 화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값진 영혼들이 가진 영원한 이익을 파괴하고 값진 성도들의 특권을 망쳐놓은 자에게서 반드시 손해배상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피와 “성도들의 피”는 “하나님 보시기에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의 열매, 즉 그들에 의해 행해진 손상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Ⅱ. 구체적인 언급. 1.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를 실족케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한 경우에 그 손과 발은 찍어 내버려야 한다(8,9절).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이 말씀을 하신 일이 있다(5:29, 30). 그 때는 특별히 제7계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혈과 육에 대하여는 매우 불쾌한,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매정스러운 말씀들은 반복하여 우리에게 돌려질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도 불충분할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여기에는 어떤 것이 명령되었는가 ?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지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불가피하게 우리를 죄짓게 하였을 때, 우리는 그 “눈”이나 “손, 발”을 제거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죄에 대한 많은 강렬한 유혹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 자신의 눈과 손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마귀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자체가 선하고 또 선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심령의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덫이 되고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한다.

[2]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합법적으로 우리를 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그 지체를 제거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를 실족케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한 경우에 그 손과 발은 찍어 내버려야 한다(8,9절).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이 말씀을 하신 일이 있다(5:29, 30). 그 때는 특별히 제7계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혈과 육에 대하여는 매우 불쾌한,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매정스러운 말씀들은 반복하여 우리에게 돌려질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도 불충분할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여기에는 어떤 것이 명령되었는가 ?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지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불가피하게 우리를 죄짓게 하였을 때, 우리는 그 “눈”이나 “손, 발”을 제거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죄에 대한 많은 강렬한 유혹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 자신의 눈과 손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마귀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자체가 선하고 또 선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심령의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덫이 되고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한다.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합법적으로 우리를 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그 지체를 제거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의 내적인 정욕은 그것이 우리에게 눈이나 손과 같이 귀중한 것일지라도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느니라”(갈 5:24). “죄의 몸은 멸망 받아야 한다.” 부패한 습성이나 성향은 반드시 제지되고 못박아져야만 한다. 달콤한 사탕처럼 혀 밑에서 굴려지는 애지중지하는 정욕은 마땅히 증오심을 가지고 제거되어야만 한다. 둘째, 죄를 범하게 하는 외적인 동기들을 피해야만 한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손을 잘라내고 눈을 뽑아 버리는 듯한 큰 상처를 우리 자신에게 입힌다해도 단호히 이를 피해야만 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 땅을 떠난 것은 우상 섬기는 데 미혹을 받을까 두려워해서였다. 또한 모세가 바로의 궁전을 떠난 것도 그곳의 죄악된 환락에 빠지게 될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들에게는 오른손을 잘라내는 듯한 아픔이 있었다. 선한 양심을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귀중한 것도 단호히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2) 이 명령은 어떤 권유의 말씀에 의거하여 요구되고 있는가?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의 상태(신분), 즉 천국과 지옥에서부터 그의 논증을 이끌고 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범죄 하는 것을 제지할 수 있는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계시다. 그 논증은 사도의 것과 동일하다(롬 8:13).

[1]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두 눈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죄악된 육체와 또한 아도니야처럼 나면서부터 부패한 성격에는 아무런 침범도 가해지지 않게 되기 때문에 언제나 즐겁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지옥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

[2]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불구의 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불구가 된 죄의 몸을 뜻한다. 그렇지만 기껏해야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불구인 것이다. 옛 사람의 오른손이 잘리워지고 그의 오른 눈이 잘리워지고 그의 오른 눈이 뽑혀져서 그 주요 기능들이 마비되고 그 힘이 쇠약해져 버린다 해도 그것은 괜찮다. 아직도 한쪽 눈과 손이 남아 있어서 그것만 가지고도 살아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생명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권세는 빼앗기고 만 것이다”(단 7:12). 그리고 그 육체에 가해진 치명적인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을 것이다.

2.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경우. 특히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에 대하여는 우리가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하고 계신 말씀은 6절에서 하신 말씀에 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경고의 말씀.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의 원수들이 비록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지체에 대해 악을 행할 때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교회의 지체 높은 자들이 교회의 어린아이들을 무시한다면 그러한 자들을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누가 큰 자인가를 논쟁하는 너희는 삼가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여기에서 문자적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2,4절에서 말씀하셨다. 즉 믿는 자들 중 매우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의 권속에 속하며, 따라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즉 참되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심려의 구조나 외형적인 조건에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고 그리스도의 무리들 중 어린양과 같은 자가 곧 소자이다.

[1]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순전한 자들이 조롱거리가 되듯이(욥 12:4)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약점들을 조소하거나, 그들을 경멸에 찬 눈초리로 멸시하거나,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내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삼가야만 한다. 즉 “그들이 실족케 되고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고 넘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우리는 결코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고 당황케 하는 일들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는 이러한 죄는 우리가 크게 주의해야 할 것으로 성경에 강조되어 있다(롬 14:3, 10, 15, 20, 2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속이거나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비위를 맞추도록 강요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향해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도록 하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존경을 받는 것은 진실하고 양심적인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양심에 근거하고 있다.

[2] 우리는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거나 부지중에 그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몹시 미워하고, 그들을 내어쫓으면서 말하기를 “주를 영화롭게 할지어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삼가 그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업신여길 때에 네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2) 주의할 것을 강요하는 이유. 우리는 이 어린아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되낟. 왜냐하면 참으로 그들은 무시 못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세상은 멸시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사랑 받는 존재들로 아끼는 “그러한 자들”을 우리는 멸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들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1] 천사들이 그들을 수종 들고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그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세계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진실하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 명령은 어떤 권유의 말씀에 의거하여 요구되고 있는가?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의 상태(신분), 즉 천국과 지옥에서부터 그의 논증을 이끌고 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범죄 하는 것을 제지할 수 있는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계시다. 그 논증은 사도의 것과 동일하다(롬 8:13).”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두 눈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죄악된 육체와 또한 아도니야처럼 나면서부터 부패한 성격에는 아무런 침범도 가해지지 않게 되기 때문에 언제나 즐겁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지옥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불구의 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불구가 된 죄의 몸을 뜻한다. 그렇지만 기껏해야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불구인 것이다. 옛 사람의 오른손이 잘리워지고 그의 오른 눈이 잘리워지고 그의 오른 눈이 뽑혀져서 그 주요 기능들이 마비되고 그 힘이 쇠약해져 버린다 해도 그것은 괜찮다. 아직도 한쪽 눈과 손이 남아 있어서 그것만 가지고도 살아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생명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권세는 빼앗기고 만 것이다”(단 7:12). 그리고 그 육체에 가해진 치명적인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을 것이다.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경우. 특히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에 대하여는 우리가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하고 계신 말씀은 6절에서 하신 말씀에 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경고의 말씀.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의 원수들이 비록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지체에 대해 악을 행할 때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교회의 지체 높은 자들이 교회의 어린아이들을 무시한다면 그러한 자들을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누가 큰 자인가를 논쟁하는 너희는 삼가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여기에서 문자적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2,4절에서 말씀하셨다. 즉 믿는 자들 중 매우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의 권속에 속하며, 따라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즉 참되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심려의 구조나 외형적인 조건에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고 그리스도의 무리들 중 어린양과 같은 자가 곧 소자이다.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순전한 자들이 조롱거리가 되듯이(욥 12:4)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약점들을 조소하거나, 그들을 경멸에 찬 눈초리로 멸시하거나,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내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삼가야만 한다. 즉 “그들이 실족케 되고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고 넘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우리는 결코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고 당황케 하는 일들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는 이러한 죄는 우리가 크게 주의해야 할 것으로 성경에 강조되어 있다(롬 14:3, 10, 15, 20, 2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속이거나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비위를 맞추도록 강요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향해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도록 하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존경을 받는 것은 진실하고 양심적인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양심에 근거하고 있다.우리는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거나 부지중에 그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몹시 미워하고, 그들을 내어쫓으면서 말하기를 “주를 영화롭게 할지어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삼가 그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업신여길 때에 네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주의할 것을 강요하는 이유. 우리는 이 어린아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되낟. 왜냐하면 참으로 그들은 무시 못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세상은 멸시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사랑 받는 존재들로 아끼는 “그러한 자들”을 우리는 멸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들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천사들이 그들을 수종 들고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그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세계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진실하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첫째, 그들은 어린아이들(소자)의 천사들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어린이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2). 천사들은 어린이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히 1:14). 또한 그들은 어린이 주위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팔로 안아 떠받들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성도는 개별적으로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개개인의 성도는 필요에 따라서 천사들의 수호를 받는 다는 것을 믿는다면, 개별적으로 수호 천사를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문은 오직 특별하게 어린아이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많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버림을 받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자기들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들은 믿음으로 하늘의 천군 천사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수행원과 호위병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반면에 교회의 어린아이들은 영광스러운 천사들의 수종을 받고 있다. 이는 그들의 위엄을 뜻하기도 하는 한편 그들을 업신여기고 경멸하며 욕하는 자들이 당할 위험을 나타내 보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처럼 수호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은 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은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모두 우리의 천사들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① 천사들의 영속적인 행복과 영광을 뜻함. 하늘 나라의 행복은 하나님을 본래의 모습대로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을 뵈옵는 데 천국의 행복이 있다. 천사들은 이 행복을 아무런 장애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땅에서 우리들을 수종들 때에 심사숙고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full of eyes within-즉 그들 안에 눈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말을 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계 4:8; 눅 1:19). 이러한 표현의 말들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어린아이들의 천사들의 특별한 위엄과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센 천사들이 약한 성도들을 돌보아 주는 것처럼, 나라의 방백들은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1:14). ② 그것은 천사들이 영속적으로 성도들을 섬길 것을 뜻하고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행할 바를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종의 눈들이 자기 주인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오거나 갈 준비가 되어 있듯이,” 천사의 눈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깨닫고는, 그 날개 가진 천사들은 재빨리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날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번개불같이 빨리 왕래한다”(겔 1:14). 우리도 이후에 천사들처럼(눅 20:36)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게 된다면 천사들이 행하는 대로 우리도 지금 우리가 행할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행 9:6).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한 은혜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한 은혜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 때문에, 첫째,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아이들을 수종들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는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계획에 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천사들의 수종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은 우리와 화목케 되었다. 천사들은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찬양할 때에 자신들의 것도 그곳에 첨가시킨다. 둘째, 바로 이 때문에 어린이들은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잃은 자들인 그들, 다시 말하자면 길을 잃고 당황하는 어린아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사 66:3) 오셨기 때문이다. 또는 어린아이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도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우리의 영혼은 본래적으로 길 잃은 영혼들이다. 마치 여행자가 길을 잃고 방황하며, 기결수가 판결을 받고 낙담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로부터 그가 마땅히 받으셔야할 섬김을 받지 못하셨으며 존귀도 받지 못하셨다. ②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우리의 본분을 다시 감당케 하며, 우리의 특권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영적으로 영원히 전락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③ 바로 이것은 믿음이 부족하고 약한 신자들이 업신여김을 받거나 실족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면 우리도 그들을 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처럼 자기 자신을 부정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들의 신앙성장과 위로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할 것이다. 이 논증은 로마서 14장 15절, 고린도전서 8장 11, 12절에서 강조되고 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또한 그의 마음이 그 구속사업에만 전념하셨다면 그는 분명히 그 구속사업을 방해하는 자들, 즉 하늘을 향하여 전진하는 자들을 방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커다란 구원의 계획을 꺾는 자들을 혹독하게 다루실 것이다.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어린아이들의 안녕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12-14절). 그리스도의 논증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유의하여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의 구주이시다. 또한 그들의 존귀함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어린아이들의 안녕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12-14절). 그리스도의 논증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유의하여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의 구주이시다. 또한 그들의 존귀함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다. “아무도 저희를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첫째, 12절, 13절에는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양 일백 마리를 자긴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 주인이 그 잃은 양을 찾았을 때, 그는 길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고 있다. 그 한 마리를 잃었을 때의 두려움과 그것을 찾았을 때의 놀라움이 그 기쁨을 더해 주고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다. ① 일반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관하여 관용될 수 있다. 인간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과 같이 하나님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천사들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과 같다. 그리스도는 몹시 피곤하신 중에서도 방황하는 인간을 찾아 산을 넘고 냇물을 건너며 헤메다가 그를 찾았다. 그를 찾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하늘에서는 남아있는 천사들보다 돌아온 죄인들을 인하여 더욱 크게 기뻐한다. ② 거침돌이나 간계에 의하여 실족케 되거나 길을 잃은 개별적인 신자들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백에 하나라도 곁길로 나가게 되면(양들은 곧잘 거침돌이나 간계에 의해서 곁길로 떨어져 나간다), 그 한 마리를 인하여 크게 걱정하면서 찾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돌아올 때는 크게 기뻐하면서 맞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마리에게 가해진 불법적인 행위는 매우 혹독하게 징계되는 것이다. 이 어린 소자들 중의 하나를 찾게 됨을 인하여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한다면 그들을 실족케함을 인하여 하늘에서는 진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무리 전체뿐만 아니라 그 무리에 속한 어린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은혜롭게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양 무리의 숫자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 중에 한 마리만 없어도 이를 쉽게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하신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쉽게 양이 글을 잃도록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전보다 더욱 세심하게 그의 양떼를 개별적으로 아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내기”때문이다(요 10:3). 이 비유의 완전한 해석에 관하여는 에스겔 34장 2,10,16,19절을 참조하라. 둘째, 이 비유의 적용이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여기에는 보다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느 누구라도 잃어져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① 이 소자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그의 뜻이다. 그는 그 구원을 계획하셨고 거기에 심혈을 기울여 오셨으며 또한 그것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의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그 계획을 촉진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행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② 그의 뜻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까지, 특히 가장 못난 것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양떼 중 한 두 마리가 실족하거나 미혹 당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이거나 염려할 것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것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③ 소자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멸망할 위험에 빠지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요, 하나님을 크게 격노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요, 하나님을 크게 격노케 하는 자들임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인 성도들이 짓밟히거나 멸망하는 것을 결코 묵과해버리지 않으시며 또한 자기의 존귀에 대하여 크게 질투하신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의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사 3:15, 참조; 시 76:8, 9)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19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으며, 14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시다. 이는 그가 자기의 못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심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와 같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어린 소자들의 안전에의 근거를 말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자기의 자녀들을 모두 돌보신다. 그러나 특별히 어린 자식들을 더 귀여워하신다(창 33:13).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이므로 그는 그 자녀들에게 부여된 존엄성을 알고 계신다. 또 하늘은 능력의 장소이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보복조치를 취하실 수가 있다. 그들의 증인이 하늘에 있고(욥 16:19), 그들의 재판장이 거기계시다(시 68:5)는 이 사실은 실족함을 당한 어린 자녀들을 위로해준다.

18:15 권고 받아야 할 죄 (마태복음 18:15-20)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실족케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나서 그들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실족케 함을 당하게 될 경우, 즉 그들에게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할 경우에 그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다. 이 죄는 개인적인 명에 훼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 때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경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이 공적인 중상 모략에 관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 때에는 교회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데 힘 쓸 것을 당부하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두 가지 면에서 이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으로 볼 경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형제가 너의 약한 심령을 상하여 슬프게 한다든지(고전 8:12), 너를 모욕한다든지, 너에게 야비한 욕설을 퍼부어 너에게 범죄 하는 경우, 또한 그가 너의 이름을 거짓된 소문이나 고자질하여 더럽히는 경우, 또한 너의 권리를 침해한다든지, 아니면 너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경우, 레위기 6장 2,3절에 열거된 범죄들 중에 하나라고 범하는 경우, 공의와 사라오가 친족의 양육 의무 등의 법을 어기는 경우, 이러한 여러 경우들은 모두 우리들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때는 미숙한 탓으로 매우 불행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준수되어야 할 규칙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이 말씀을 레위기 19장 17절과 비교해 보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권고하라.” 즉, “만일 네가 너의 형제에 의하여 명예 훼손을 당하여 기분이 나쁘게 되었을 때 너희 분한 생각이 속에서만 품는 악의가 되지 않도록 하라”(그 악의는 마치 속으로 피가 터져 흐르는 상처가 위험하듯이 가장 위험하다). 오히려 너의 분함을 관대하고도 무게 있는 권고로써 풀어버려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곧 없어지게 해야만 한다. 그의 등뒤에서 그를 헐뜯지 말고 “그를 반드시 권고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가 너에게 상당히 부당한 행동을 가했을 때는 그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너는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개인적으로 책망해야 한다. 만일 그가 너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그의 허물을 누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를 격노케 할뿐이며 그 책망을 보복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잠언 25장 8,9절과 일치한다.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치 말라. 변론은 조용하게 그리고 평화적으로 하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하고 좋은 일이다. 그리고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 되며 논쟁은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끝맺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게 되며 도리어 친구들과의 다툼이 변하여 우정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그가 만일 듣지 않거든 즉, 그가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때에는 낙담하지 말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잘 설명하여 그를 설득시키려고 할 때에 그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시험하여 보라” 그 증인들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보다 더 잘 들을 것이다. 만일 사려 깊은 말이 그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두 세 증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Plus vident couli quam oculus-즉 여러 개의 눈은 한 개의 눈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그들의 말에 더 잘 설득되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될 것이며 결국은 내가 회개하노라고 말할 것이다.”

3.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그 증인들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때에는 교회에 말하라. 즉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여러 직원들, 또는 너희들이 속해 있는 모임 가운데서 가장 지위 높은 사람들에게 말하라.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 사건을 화해시키는 심판관이 되게 하라. 그리고 아직 당장은 관원들에게 고소하거나 소송 영장을 청구하지는 말아라.” 여기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 전서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 앞에서가 아니고 불의한 세상 사람들 앞에 가서 송사 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있다(1절). 그리고 성도들이 세상일에 (3절) 속하는 지극히 작은 일들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절). 너희는 혹시 “우리가 말해야할 대상인 교회가 누구냐?”고 물을지 모른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 중에 그러한 사건들을 충분히 판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로 인정받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음을 반어적(反語的)으로 말하기를,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하찮은 자들을 세우느냐?”(4절)고 한다. 이 규칙은 세상의 정부가 이방인들이나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때 특별히 필수적인 것이었다.

4. “만일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고, 그들의 판정에 불복하며 계속적으로 자기의 부당한 행위를 고집한다든지 오히려 너를 해하려고 할 때에는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 즉 법에 호소를 하라.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최후의 방책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일단 그 사건을 타협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시험해 보고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그와의 우정이나 친교를 깨뜨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너는 결코 그를 보복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가 다시는 그러한 부당 행위를 할 기회를 엿보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너는 그를 싸매어 주고 그와의 교재를 지속시키려고 하겠지만 그가 원치 않을 때는 결국 그 교제가 파기되고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번 나를 속이거나 비방한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두 번째 또 그런 짓을 한다면 그 때는 내 자신의 잘못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이 말씀을 레위기 19장 17절과 비교해 보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권고하라.” 즉, “만일 네가 너의 형제에 의하여 명예 훼손을 당하여 기분이 나쁘게 되었을 때 너희 분한 생각이 속에서만 품는 악의가 되지 않도록 하라”(그 악의는 마치 속으로 피가 터져 흐르는 상처가 위험하듯이 가장 위험하다). 오히려 너의 분함을 관대하고도 무게 있는 권고로써 풀어버려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곧 없어지게 해야만 한다. 그의 등뒤에서 그를 헐뜯지 말고 “그를 반드시 권고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가 너에게 상당히 부당한 행동을 가했을 때는 그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너는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개인적으로 책망해야 한다. 만일 그가 너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그의 허물을 누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를 격노케 할뿐이며 그 책망을 보복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잠언 25장 8,9절과 일치한다.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치 말라. 변론은 조용하게 그리고 평화적으로 하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하고 좋은 일이다. 그리고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 되며 논쟁은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끝맺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게 되며 도리어 친구들과의 다툼이 변하여 우정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그가 만일 듣지 않거든 즉, 그가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때에는 낙담하지 말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잘 설명하여 그를 설득시키려고 할 때에 그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시험하여 보라” 그 증인들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보다 더 잘 들을 것이다. 만일 사려 깊은 말이 그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두 세 증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Plus vident couli quam oculus-즉 여러 개의 눈은 한 개의 눈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그들의 말에 더 잘 설득되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될 것이며 결국은 내가 회개하노라고 말할 것이다.””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그 증인들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때에는 교회에 말하라. 즉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여러 직원들, 또는 너희들이 속해 있는 모임 가운데서 가장 지위 높은 사람들에게 말하라.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 사건을 화해시키는 심판관이 되게 하라. 그리고 아직 당장은 관원들에게 고소하거나 소송 영장을 청구하지는 말아라.” 여기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 전서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 앞에서가 아니고 불의한 세상 사람들 앞에 가서 송사 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있다(1절). 그리고 성도들이 세상일에 (3절) 속하는 지극히 작은 일들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절). 너희는 혹시 “우리가 말해야할 대상인 교회가 누구냐?”고 물을지 모른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 중에 그러한 사건들을 충분히 판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로 인정받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음을 반어적(反語的)으로 말하기를,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하찮은 자들을 세우느냐?”(4절)고 한다. 이 규칙은 세상의 정부가 이방인들이나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때 특별히 필수적인 것이었다.”만일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고, 그들의 판정에 불복하며 계속적으로 자기의 부당한 행위를 고집한다든지 오히려 너를 해하려고 할 때에는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 즉 법에 호소를 하라.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최후의 방책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일단 그 사건을 타협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시험해 보고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그와의 우정이나 친교를 깨뜨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너는 결코 그를 보복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가 다시는 그러한 부당 행위를 할 기회를 엿보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너는 그를 싸매어 주고 그와의 교재를 지속시키려고 하겠지만 그가 원치 않을 때는 결국 그 교제가 파기되고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번 나를 속이거나 비방한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두 번째 또 그런 짓을 한다면 그 때는 내 자신의 잘못이다. Ⅱ. 중상 모략의 죄로 볼 경우, 이 죄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범죄이며, 연약하고 유순한 자들에게는 가장 사악한 실예요 또한 나약하고 겁 많은 사람에게는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형제들의 연약함을 잘 감당해 주라고 말씀하신 후, 여기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구실로 삼아 사악한 짓을 할 때에는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말 것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울 것을 계획하시고,, 1.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시키시려고 여기에서 각별히 주의를 주고 계시다. 교회는 죄악을 추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자체를 정결케 하고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마치 생수의 근원과 같다. 복음의 그물이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함께 양육하고 있는 한 교회에는 정화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2.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보존시키기 위하여 주의의 말씀을 주고 계신다. 즉 각 지체가 자기 자신의 위치와 의무를 깨달아 교회의 순수성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존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1) 본문에서 가정된 실례는 어떤 것인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1] “범법자는 형제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즉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와 함께 기도 드리고 또한 그와 함께 네가 정기적으로든지 아니면 수시로 든지 하나님께 함께 예배를 드린 자이다.” 여기에서의 유의할 것은 교회의 법규는 교회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고전 5:12, 13). 어떠한 범법행위가 우리에게 가해졌을 때 그 범법자는 우리의 한 형제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 형제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하도록 해 준다.

[2] “그 죄는 너에게 가해진 범법 행위이다 너희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는 경우, 즉 그가 기독자인 너에게 불법 행위를 범하여 허물이 있을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죄는 그의 백성들에게 범하는 범법 행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존귀함에 대하여 참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서로 밀접한 이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가해진 허물을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허물을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9).

(2) 이 경우에는 어떤 조처가 취해져야 하는가?

[1] 준수되어야할 규칙들(15-17절). 이 방법대로 실천해야만 한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시키시려고 여기에서 각별히 주의를 주고 계시다. 교회는 죄악을 추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자체를 정결케 하고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마치 생수의 근원과 같다. 복음의 그물이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함께 양육하고 있는 한 교회에는 정화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보존시키기 위하여 주의의 말씀을 주고 계신다. 즉 각 지체가 자기 자신의 위치와 의무를 깨달아 교회의 순수성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존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본문에서 가정된 실례는 어떤 것인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범법자는 형제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즉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와 함께 기도 드리고 또한 그와 함께 네가 정기적으로든지 아니면 수시로 든지 하나님께 함께 예배를 드린 자이다.” 여기에서의 유의할 것은 교회의 법규는 교회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고전 5:12, 13). 어떠한 범법행위가 우리에게 가해졌을 때 그 범법자는 우리의 한 형제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 형제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하도록 해 준다.”그 죄는 너에게 가해진 범법 행위이다 너희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는 경우, 즉 그가 기독자인 너에게 불법 행위를 범하여 허물이 있을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죄는 그의 백성들에게 범하는 범법 행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존귀함에 대하여 참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서로 밀접한 이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가해진 허물을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허물을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9).이 경우에는 어떤 조처가 취해져야 하는가?준수되어야할 규칙들(15-17절). 이 방법대로 실천해야만 한다. 첫째,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그의 허물을 지적하여 권고하라. 그가 너에게 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에게로 가라. 마치 의사가 혼자를 찾아가며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 듯이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한 사람의 죄인을 돌이켜 회개케 하는 데는 아무리 많은 수도가 든다고 하더라도 그 수고를 끝까지 감당해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허물을 지적하여 권고하라. 즉 그가 행한 바를 회상시켜 자기의 행위가 악하였음을 깨닫게 하고 그의 가증된 소행을 드러내 보여 주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허물들에 대해서 권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사실이 명확하고 또 그 과실이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그 두 가지는 함께 적용되어야만 한다. 큰 죄들은 때로 양심을 속인다. 그리하여 잠시동안이나마 흐려놓아 양심을 멍청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양심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칼로 베었을 때 그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 주었었다. 그러나(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기까지는 우리아 장군의 일로 인하여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의 허물을 지적하여 권고하라. e;legzon auvto.n ─즉 그에게 논증을 하라.” 즉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그의 허물을 권고하라.” 허물이 분명하고 큰 경우에는, 또한 우리가 허물이 있는 그 사람을 권고할 만한 입장에 있고 또 권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권고를 해도 해를 끼칠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우리는 온화하고도 신실하게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족함과 허물된 점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권고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권고는 규범(명령)으로 준행되어야만 한다. “권고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개인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그를 책망하기보다는 회개케 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지켜 져야할 유익한 규범은 우리의 형제들의 허물을 당사자 자신들에게 먼저 말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책망을 하는 것보다 권고를 하게 된다. 즉, 죄를 더 이상 범치 않게 하고 자기의 의무에 더욱 충실케 하는 것이 된다. 범죄한 사람이 그를 권고하는 자가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여 말할 때에 자기의 구원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권고해 줌으로써 자기의 명예까지 염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 범죄한 자는 크게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즉 “네 말에 유의한다면─, 만일 그가 책망을 받고서 깨달음이 있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너는 죄와 파멸에서 그를 구원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는 보람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약 5:19, 20).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영혼을 회개시키는 것은 영혼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이다(잠 11:30).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을 힘써 행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알고 노력해야만 한다. 한 영혼을 잃는 것이 천하를 잃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한 영혼을 얻는 것은 분명히 적지 않은 유익이 되는 것이다. 둘째, 개인적인 권고가 도무지 통하지 않을 때에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16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그것이 당장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에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고 절망적인 경우에서도 승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권고해 본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단념하여 말하지 말라. 계속하여 다른 방법들을 강구해 보아라. 목을 곧게 하는 자들일지라도 흔히 권고될 수 있으며, 강력하게 반대하는 자들일지라도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면 설복되는 수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할 때에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감당해야만 한다. 어린아이가 해산되는 것은 많은 진통과 아픔이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너와 함께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 1. 너를 도와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네가 데리고 간 그 사람들은 네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매우 적합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해줄 수도 있고 또한 너보다도 훨씬 더 사려 깊게 일을 잘 마무리지을 수가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선을 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권고를 할 때에도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2. 그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그는 두 세 사람에 의하여 반증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자신의 허물을 인하여 보다 더 쉽게 고개를 숙일 수가 있는 것이다”(신 19:1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의 불미스러운 행동이 일반적인 범죄와 명예 훼손이 된 것을 아는 자들은 회개하여 개심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선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지만 “모든 사람이 비방하는” 선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더욱 힘들다. 즉 악명 높은 사람이 자신의 죄악 된 것을 자백하고 새 사람되는 것을 찾아보기가 이 세상에서는 힘들다.

3. 후에 교회 앞에 그 사건이 제기될 때에 그의 행동에 대해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혐의가 충분히 입증될 때까지는 어떤 사람도 완고하거나 고집이 센 자라는 교회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너를 도와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네가 데리고 간 그 사람들은 네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매우 적합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해줄 수도 있고 또한 너보다도 훨씬 더 사려 깊게 일을 잘 마무리지을 수가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선을 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권고를 할 때에도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해야만 하는 것이다.그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그는 두 세 사람에 의하여 반증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자신의 허물을 인하여 보다 더 쉽게 고개를 숙일 수가 있는 것이다”(신 19:1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의 불미스러운 행동이 일반적인 범죄와 명예 훼손이 된 것을 아는 자들은 회개하여 개심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선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지만 “모든 사람이 비방하는” 선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더욱 힘들다. 즉 악명 높은 사람이 자신의 죄악 된 것을 자백하고 새 사람되는 것을 찾아보기가 이 세상에서는 힘들다.후에 교회 앞에 그 사건이 제기될 때에 그의 행동에 대해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혐의가 충분히 입증될 때까지는 어떤 사람도 완고하거나 고집이 센 자라는 교회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셋째,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전혀 겸허해지지 않으면, “그때에는 교회에 말하라”(17절). 어떤 사람들은 심령이 완고하여 설득력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도 전혀 불치의 사람으로 단념해 버려서는 안 된다. 다만 사건을 보다 더 널리 공개하여 더 많은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공적인 책망이 있기 이전에 반드시 개인적인 권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신사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 보다 더 거칠고 가혹한 방법들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딛 3:10). 또한 설득을 받아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은 그 죄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일은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잡음이 없이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으로임하며, 율법을 준행함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2. 개인적인 권고로서 설득되지 않을 때에는 공적인 책망이 있어야만 한다. 교회는 피해를 입은 자들의 이의를 신청 받아 죄를 범한 자의 죄를 책벌해야 하는데, 그 원인의 시비를 공정하게 조사한 후에 그들 사이를 판단해야 한다. 공적인 책망이 있기 이전에 반드시 개인적인 권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신사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 보다 더 거칠고 가혹한 방법들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딛 3:10). 또한 설득을 받아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은 그 죄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일은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잡음이 없이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으로임하며, 율법을 준행함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개인적인 권고로서 설득되지 않을 때에는 공적인 책망이 있어야만 한다. 교회는 피해를 입은 자들의 이의를 신청 받아 죄를 범한 자의 죄를 책벌해야 하는데, 그 원인의 시비를 공정하게 조사한 후에 그들 사이를 판단해야 한다. “교회에게 말하라.” 모든 불화를 종식시키고 모든 범죄들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그리스도의 명령 그 자체가 큰 논쟁의 대상이 되고 또한 심령의 부패로 인하여 그것이 도리어 불화와 불법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 천만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어떠한 교회를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점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정부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있었던 유대인의 산헤드린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8절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 교회를 말씀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그 당시 기독교 교회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었지만, 바야흐로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에게 말하라. 그 교회는 범법자가 사는 공동체의 특정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말하라는 말의 뜻은 사건의 공소 사실들을 접수하도록 쌍방간에 동의하여 인정한 대표들에게 그 사건을 알리는 것이다. 즉 교회의 치리자들은 목사나 장로, 집사 등이나 아니면 회중의 수뇌들이나 대표들 또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말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건을 조사한 연후에 이의 신청이 하찮은 것이거나 이유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이의 신청자를 책망할 것이요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면 그 범법자를 책망하여 그를 회개케 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쉽게 책망하는 일을 마무리지어 가부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1. “법적인 절차를 밟아 엄정하게 되어질 뿐만 아니라.”

2. “큰 권위를 가지고 판결 짓기 때문이다.” 교회나 또는 직책상 권징하는 자인 목사로부터 책벌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나 그의 전권대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매우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법적인 절차를 밟아 엄정하게 되어질 뿐만 아니라.””큰 권위를 가지고 판결 짓기 때문이다.” 교회나 또는 직책상 권징하는 자인 목사로부터 책벌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나 그의 전권대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매우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그가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그가 권고를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거나 그 허물들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를 교회의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특별한 직위에서 해고시키고, 교회의 회원권을 박탈하고, 모든 회원들로 하여금 그와 상종하지 않도록 경고하여 그가 자기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며, 교회원들은 그의 죄에 물들거나 그로 인하여 비난받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사회의 질서나 규범을 무시하거나 사회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 사회의 명예와 특권을 박탈당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승복하여 다시금 그 사회에 자신들을 화해시키기까지는 버림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명예를 옹호하고 그 순수성을 보존하며, 범죄 하는 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과 개심을 기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택하셨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마귀 자식이나 저주받은 자들로 여기거나 또는 매우 절망적인 존재로 여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언젠가는 다시 돌이킬 수 있고 용서받아 영접될 수 있는 존재로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며, 그를 원수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 형제로서 권고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사람에 관하여 고린도교회에 명한 사도 바울의 지시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규범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러한 사람은 “그들 중에서 추방”(고전 5:2) 되어야 하며, “사탄에게 내 주어야”(4절) 한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추방당하게 되면, 사탄의 왕국에 속한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인들은 그러한 자와 사귀지도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11, 12절).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가 겸손해지고 개심이 된다면 그는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져야 한다.

[2] 이들 규칙에 따라서 교회의 모든 재판 소송을 재가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서명하신 위임장이 바로 18절의 말씀이다.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여기에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는 교회의 모든 충성스러운 직위를 맡은 자들에게와 모든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선포하고 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교회를 치리 한다고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시며, 목회자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재가하여 그것이 자기 자신에 의하여 말해지고 행해진 것으로 간주하실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들 규칙에 따라서 교회의 모든 재판 소송을 재가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서명하신 위임장이 바로 18절의 말씀이다.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여기에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는 교회의 모든 충성스러운 직위를 맡은 자들에게와 모든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선포하고 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교회를 치리 한다고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시며, 목회자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재가하여 그것이 자기 자신에 의하여 말해지고 행해진 것으로 간주하실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는 교회의 책벌 판결을 인정하실 것이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교회의 견책이 정당하게 그리스도의 강령을 따른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판단은 교회의 견책에 동조할 것이다. 교회의 견책은 다른 모든 책벌보다 뼈아픈 것으로서 예를 들면 버림받은 유대인들이 당하는 것과 같은(롬 11:8) “혼미한 심령”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규례와 명령이 무시당하지는 않으시지만, 교회가 완악하여 범법한 자들에게 내린 의로운 재판 판결을 “아멘”으로 동의하여 주시는 까닭이다. 교만하여 교회의 판결을 경멸하는 자들은 그 판결을 매우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법정에서 그들의 형벌이 혹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법정에 상소를 제기한다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거기에서는 그들에 대해 확정 판결이 내려져 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회중에서” 추방된 자는 이제 심판 날에 “거기에 들지 못할 것이다”(시 1:5).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정당하게 사탄에게 넘겨 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거나 그들을 영접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실수나 시기로 인하여 교회의 견책이 부당할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여 추방된 자들을 은혜롭게 찾아 주실 것이다(요 9:34, 35). 둘째, 그는 교회의 면죄 판결을 인정하신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를 하라. 1. 어떠한 교회의 견책도 다시는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매지는 못한다. 그래서 죄인이 회개하고 개심 하면 교회의 책벌은 다시 해제될 수 있고 또한 풀어져야 한다. 처벌의 목적을 달성한 그 벌은 그로써 충분한 것이므로 그때에 범법자는 용서되어야 하고 또한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고후 2:6, 7). 지옥과 천국사이 이외에는 건널 수 없는 고정된 구렁텅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2. 범법자들이 회개하여, 교회에 의해서 다시금 교회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하늘에서 죄가 면해지는 위로를 얻을 수가 있다. 책벌이 완고한 자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처럼, 면죄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격려를 해 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고후 2:10)라고 하였다. 어떠한 교회의 견책도 다시는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매지는 못한다. 그래서 죄인이 회개하고 개심 하면 교회의 책벌은 다시 해제될 수 있고 또한 풀어져야 한다. 처벌의 목적을 달성한 그 벌은 그로써 충분한 것이므로 그때에 범법자는 용서되어야 하고 또한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고후 2:6, 7). 지옥과 천국사이 이외에는 건널 수 없는 고정된 구렁텅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범법자들이 회개하여, 교회에 의해서 다시금 교회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하늘에서 죄가 면해지는 위로를 얻을 수가 있다. 책벌이 완고한 자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처럼, 면죄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격려를 해 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고후 2:10)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호의 판결을 인지(認知)하실 뿐만 아니라 확정 지워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부여해 주신 바 큰 명예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주장된 구절의 말씀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교회의 기도를 응답하실 준비를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신다(19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1]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충성스럽게 기도하는 모든 야곱의 자손의 간구에 적용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헛되게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의 약속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의 이 말씀은 합심하여 드리는 연합기도를 특별히 권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보다도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훨씬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의 어떠한 법도 간구 하는 자의 숫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신자들의 연합 기도와 그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공통된 제목의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기시고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만일 신자들이 동일한 기도를 합심하여 드리고 어떤 특별한 사명에서 서로 약속하여 시은소에 모여 함께 기도한다면, 또는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한다면, 그들은 매우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일반적인 관심을 가지시는 것 외에도 특별히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가 되고 합심하는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대하 5:13; 행 4:31, 참조).

[2] 특별히 매는 일과 푸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에 적용된다. 이 약속의 말씀은 특별히 더욱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본문을 고찰해 보면, 교회의 기도를 응답하실 준비를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신다(19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충성스럽게 기도하는 모든 야곱의 자손의 간구에 적용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헛되게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의 약속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의 이 말씀은 합심하여 드리는 연합기도를 특별히 권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보다도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훨씬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의 어떠한 법도 간구 하는 자의 숫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신자들의 연합 기도와 그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공통된 제목의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기시고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만일 신자들이 동일한 기도를 합심하여 드리고 어떤 특별한 사명에서 서로 약속하여 시은소에 모여 함께 기도한다면, 또는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한다면, 그들은 매우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일반적인 관심을 가지시는 것 외에도 특별히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가 되고 합심하는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대하 5:13; 행 4:31, 참조).특별히 매는 일과 푸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에 적용된다. 이 약속의 말씀은 특별히 더욱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본문을 고찰해 보면, 첫째, 교회의 권장하는 권력은 한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거기에 관계하고 있는 두 사람의 손에 있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고린도 교인이 쫓겨남을 받도록 되었을 때 교회가 함께 모였으며(고전 5:4), 많은 사람들에게서 벌을 받았었다(고후 2:6). 그처럼 중요한 사건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낫고, 많은 모사가 있는 곳에 안전함이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권장하는 일을 합심하여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허물을 제거할 임무를 맡은 자들 사이에 원한과 분노가 있게 되면 그것은 커다란 허물이 된다. 셋째, 기도는 언제나 권징하는데 수반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확정지어 주시기를 구하지 않고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16장 19절에서 말씀된 바 있는 매는 일과 푸는 일은 말씀전파에 의하여 되어졌으나 지금의 말씀은 기도에 귀착되고 있다. 복음 사역자들은 이 말씀과 기도에 온전히 자신들을 쏟아 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판결하는데 의견이 일치하여 한가지 사건을 결정지으면 그대로 될지니라”(마치 목회자들이 재판관이나 땅 주인들인 것처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합심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그로부터 너희가 그것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인들을 돌이켜 회개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기도 없이 권징이나 권고를 해서는 안 된다(약 5:16, 참조). 넷째, 교회의 정당한 책벌에 대한 제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가 전원 일치의 청원을 하게 되면 이는 하늘에 상달되어 응답을 얻을 것이다.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즉 하늘에서 매이기도 하고 풀리우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에게 드리는 모든 호소와 간구를 재가하실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그는 여기서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말씀하고 계시)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비록 우리가 기대한 것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해도 좋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허물이 있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영접해 주신다. “주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신”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가 아니고, 그에게 죄를 범한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였다.

(2)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20절).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개개인에게 임재하고 계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세 사람들이 권징을 위해서든지, 종교적 예배를 위해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어떤 행사를 위해서든지 가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을 두고 이 약 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이에 의해서 정해지고 지도되고 그리고 장려된다.

[1] 모임들은 이에 의해서 정해진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적인 모임들로써 대개는 가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은 이러한 모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인간을 교화(敎化)하고 세상에 종교의 외관을 남겨두기 위해 시작되고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기도에 특별한 응답을 주시려고 할 때에는 성회를 모이게 하셨다(욜 2:15, 16). 대규모의 그리고 많은 수의 집회를 위한 자유나 기회가 없을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여 그들의 성의를 나타내는 데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종교 행사에 있어서 하려고 하는 바를 할 수가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으신다.

[2] 모임들은 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도록 지도가 된다. 교회의 권징을 실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야 한다.”(고전 5:4). 그 이름이 그들로 하여금 땅에서는 권세를 행하게 하며, 하늘에서는 합당한 것이 되게 해 준다. 예배를 위해 모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표시해 주는 그의 임명장을 가지고서, 즉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처소에서 그를 부르는 모든 신자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모여야 한다. 우기가 함께 모이되 성령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의지하고 그의 공로와 의를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아버지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요, 아버지께 우리의 대변자이심을 실제로 믿고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게 된다.

[3] 모임들은 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의 확신을 가지고 장려된다. “그들 중에 내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무소부재하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별한 임재에 대한 말씀이다. 그의 성도가 있는 곳에 그의 성소가 있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곳은 그가 영원히 쉴 곳이요(시 132:14), 그가 다니시는 곳이다(계 2:1). 그는 우주 가운데 있는 태양처럼 그들 가운데 계시어서, 그들에게 생명과 힘을 주시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며 또 위로해 주신다. 즉 그들의 심령 안에 계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로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으로 더불어 임재하시는 것을 뜻하며, 본문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한 것이다. “나도 있으니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있겠다”는 뜻만 아니라 “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그가 먼저 오셨고 그들보다 먼저 임재해 계시므로 그들이 거기서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승천하실 때에도(마 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반복해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임재를 믿음으로 간구하고 신뢰하여도 좋을 것이다. “내가 있느니라”는 이 말씀은 옛날 구약 시대의 회막과 하나님의 성전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인 “세키나”와 동의어이다(출 40:34; 대하 5:14).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20절).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개개인에게 임재하고 계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세 사람들이 권징을 위해서든지, 종교적 예배를 위해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어떤 행사를 위해서든지 가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을 두고 이 약 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이에 의해서 정해지고 지도되고 그리고 장려된다.모임들은 이에 의해서 정해진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적인 모임들로써 대개는 가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은 이러한 모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인간을 교화(敎化)하고 세상에 종교의 외관을 남겨두기 위해 시작되고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기도에 특별한 응답을 주시려고 할 때에는 성회를 모이게 하셨다(욜 2:15, 16). 대규모의 그리고 많은 수의 집회를 위한 자유나 기회가 없을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여 그들의 성의를 나타내는 데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종교 행사에 있어서 하려고 하는 바를 할 수가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으신다.모임들은 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도록 지도가 된다. 교회의 권징을 실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야 한다.”(고전 5:4). 그 이름이 그들로 하여금 땅에서는 권세를 행하게 하며, 하늘에서는 합당한 것이 되게 해 준다. 예배를 위해 모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표시해 주는 그의 임명장을 가지고서, 즉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처소에서 그를 부르는 모든 신자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모여야 한다. 우기가 함께 모이되 성령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의지하고 그의 공로와 의를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아버지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요, 아버지께 우리의 대변자이심을 실제로 믿고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게 된다.모임들은 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의 확신을 가지고 장려된다. “그들 중에 내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무소부재하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별한 임재에 대한 말씀이다. 그의 성도가 있는 곳에 그의 성소가 있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곳은 그가 영원히 쉴 곳이요(시 132:14), 그가 다니시는 곳이다(계 2:1). 그는 우주 가운데 있는 태양처럼 그들 가운데 계시어서, 그들에게 생명과 힘을 주시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며 또 위로해 주신다. 즉 그들의 심령 안에 계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로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으로 더불어 임재하시는 것을 뜻하며, 본문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한 것이다. “나도 있으니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있겠다”는 뜻만 아니라 “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그가 먼저 오셨고 그들보다 먼저 임재해 계시므로 그들이 거기서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승천하실 때에도(마 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반복해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임재를 믿음으로 간구하고 신뢰하여도 좋을 것이다. “내가 있느니라”는 이 말씀은 옛날 구약 시대의 회막과 하나님의 성전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인 “세키나”와 동의어이다(출 40:34; 대하 5:14). 단지 두 세 사람만이 함께 모이는 경우일지라도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계신다. 이 사실은 소소의 모임에 큰 격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수의 모임은, 첫째, 선택된 자들만이 모이는 경우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비밀 예배와 전체 회중의 드리는 공중 예배 외에도 때로는 두세 사람만이 모여서 상호 간에 협조하여 협의하고 공동으로 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모일 수도 있다. 이는 공중예배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합치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수의 모임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실 것이다. 둘째, 강압으로 인하여 두세 사람의 소수만이 모이는 경우이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모이지 못하는 경우, 그래서 두 세 사람만이 겨우 모이는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숫자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과 진실된 헌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숫자는 두 세 사람으로 가장 적을지라도 예배의 중심 인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자리를 함께 하시면 그들의 모임은 마치 그 숫자가 삼천 명이나 되는 것처럼 고귀하고 즐거운 일이다.

18:21 용서받아야 할 개인적인 허물 (마태복음 18:21-35) 본문에 있는 대화의 말씀은 분명히 허물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허물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에 속한다. Ⅰ. 이 문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21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될까요?” 1. 베드로는 그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이 교훈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바가 있다(6:14, 15). 베드로는 그 교훈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형제에 대하여 원한을 품거나 복수를 꾀해서는 안 되고 다만 언제나 변함없이 친구가 되어 주며, 그가 당한 손해를 금방 잊어 벼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은 큰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눅 17:4)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에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일곱 번이나 그를 비난하고 배신하였다고 가정할 때 그는 화해되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면서도 그는 그와의 교제를 포기하고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잠언 24장 16절, “의인이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씀을 깨달았던 것 같다. 아니면 아모스 2장 1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서너 가지 죄에 관한 말씀”을 깨달은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부패된 본성에는 선한 일에 인색하고 신앙적인 일을 너무 많이 할까 염려하며, 특히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습성이 있다. 베드로는 그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이 교훈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바가 있다(6:14, 15). 베드로는 그 교훈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형제에 대하여 원한을 품거나 복수를 꾀해서는 안 되고 다만 언제나 변함없이 친구가 되어 주며, 그가 당한 손해를 금방 잊어 벼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은 큰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눅 17:4)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에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일곱 번이나 그를 비난하고 배신하였다고 가정할 때 그는 화해되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면서도 그는 그와의 교제를 포기하고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잠언 24장 16절, “의인이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씀을 깨달았던 것 같다. 아니면 아모스 2장 1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서너 가지 죄에 관한 말씀”을 깨달은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부패된 본성에는 선한 일에 인색하고 신앙적인 일을 너무 많이 할까 염려하며, 특히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습성이 있다. Ⅱ.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즉각적인 대답.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횟수를 한정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 숫자는 분명히 무한대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허물들을 헤아려 그 횟수를 따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나쁜 습성 중에는 우리가 용서해 준 권리 침해들을 헤아려 놓았다가 일정한 한도가 차면 보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헤아리신다(신 32:34). 왜냐하면 그는 재판장이시요, 복수하는 일이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심판의 보좌에 침범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헤아려서는 안 된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평화를 보존하는 데는 횟수를 헤아리지 않고 권리 침해 행위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여러 번 용서를 베푸셨다(시 78:38, 40).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권리 침해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으로 삼아 그것이 우리 몸에 베일 때까지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Ⅲ. 우리의 권리를 침해한 죄를 용서해 줄 필요성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다. 비유는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데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의무를 강조하는 데 유용하다. 왜냐하면 비유는 곧 잊혀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겨 주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은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대한 해설이다. 자기의 형제를 용서해 주는 자만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용서받는 것을 기대할 수가 있다. 본문의 비유는 “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천국은 교회와 그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복음의 규범에 의한 통치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요, 그의 법정이다. 그는 그 안에 계시며, 거기에서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들로서 적어도 그에게 소유되어 있고 또 채무관계로 얽매어 있다. 대체로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권속들로부터 얼마나 많이 분통터지는 일들을 당하고 계시며 또한 그의 종들은 얼마나 패역하고 완악한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세 가지 내용이 있다. 1. 빚진 종에게 보여 준 주인의 엄청난 관용. 종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에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줌(23-27절).

(1) 우리가 범한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진 빚이다. 이 빚은 물건을 사고 팔 때 계약하는 당사자들처럼 대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진 빚이 아니고 상급자에게 진 빚이다. 이 빚은 종이 서약증서를 박탈당할 때 영주에게 진 빚이나, 또는 법률 위반이나 치안을 문란케 함으로 인하여 부과된 벌과금과 같으며 종이 주인 섬기기를 그만 두거나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거나 계약서를 위반하거나 위약금을 맡음으로 인하여 주인에게 종이 진 빚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배상금을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형법상의 처벌을 받게 된다.

(2) 이 빚들을 기록해 둔 회계장부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빚들을 곧장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임금은 “그 종들과 회개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자신의 양심에 의하여 우리와 계산하신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을 대리한 회계사인데, 그 회계사는 우리와 회계하려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자기 죄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제일 먼저 묻는 질문 중에 하나는, “너는 내 주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느냐?” 양심이 뇌물로 매수되지 않는 한 그것은 참된 말을 할 것이며, 모든 빚을 계산하게 되는 다른 정해진 날이 있다. 그때 이 모든 회계서들을 떼게 되는데, 어떤 것은 이월되고 어떤 것은 기각된다. 그리고 그때에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 계산서를 결산하여 줄 것이다.

(3) 죄의 빚은 매우 큰 빚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죄로 인하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가 회계하기 시작했을 때 첫 체납자들 중 한 명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문은 피할 길이 없다. 너의 죄는 반드시 너를 찾아낸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였는데, 그것은 막대한 금액이며 계산하면 1,875,000파운드(pounds)나 된다. 이는 왕의 몸값(역주:포로로 되거나 인질이 되었을 때 지불하는 금액)이나 한 왕국의 특별 세금에 해당되는 액수로서, 종의 빚으로는 너무도 많은 금액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떤 것인가?

[1] 죄의 본질은 극악하다. 죄는 달란트이다. 이는 돈이나 무게를 계산하는데 사용된 단위 중 가장 큰 것이다. 모든 죄는 한 달란트의 짐이요 “납 한 달란트는 악이다”(슥 5:7, 8).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인 우리에게 맡겨진 주인의 소유 재산은 한 달란트였다(25:15). 즉 금 한 달란트였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모두 땅에 묻어 버렸든지 아니면 대개의 경우 낭비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한 달란트씩 빚지고 있다. 이 한 달란트가 우리의 계산서를 고액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2] 죄의 숫자는 막대하다. 그 수는 일만으로서, “우리의 머리털보다 더 많다”(시 40:12). “누가 자기의 허물의 수를 헤아릴 수 있으며 그가 얼마나 많이 죄를 범하였는가를 말할 수 있으리요?”(시 19:12)

(4) 죄의 빚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우리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그는 값을 것이 없는지라.” 죄인들은 지불이 불가능한 채무자들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갈 3:22)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한 파산 선고를 알리는 법령이다. 금이나 은으로도 우리의 빚을 갚지 못한다(시 46:6, 7). 희생 제물로도 갚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 것이기에, 속전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무력하여 우리 자신을 도울 수가 없다.

(5)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공의로 우리를 취급하시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불 불능의 채무자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빚을 강제로라도 회수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완전히 파멸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공의는 속죄물을 요구하며, 법의 판결은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currat lex). 그 종은 자기의 낭비벽과 자행 자지함에 의하여 이 빚을 진 것이므로 마땅히 그것을 자기가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다. 그는 갤리배(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젓게 한 군함)의 노예로 팔려 감옥에서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모든 죄인들이 받게 되는 것, 즉 “죄의 삯”에 관한 것이다.

[1] 팔리게 됨. “자신을 팔아 사악한 짓을 행하는” 자들은 팔리워서 속상(贖賞)해야 한다. 죄에게 노예가 된 자들은 진노(wrath)에게 노예가 된 자들이다. 노예로 팔리운 사람은 모든 인생의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모진 목숨뿐, 그는 자신의 불행을 되씹으며 감수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저주받은 죄인들의 처지를 말해 주고 있다.

[2] 갚아야 됨. 그렇지만 보잘 것 없는 몸값은 엄청난 죄의 빚을 도저히 충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속상(만족)되어 가지만 결코 모두가 속상되지는 못한다.

(6) 자기 죄를 깨달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 할 수밖에 없다. 그 종은 이 명령을 받자, 그의 주인 되신 임금의 발아래 엎드리어 “‘그에게 절을 하였다”(어떤 사본에는 ‘그에게 탄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주인에게 애걸복걸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절). 그 종은 이전에 벌써 자기가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개를 하도록 부름을 받을 때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죄인들은 대개 어떤 감화력 있는 말이나 깜짝 놀랄 만한 섭리 또는 임박한 죽음에 사로잡혀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의 앞에 나아갈까?”(막 6:6)하고 탄식할 때까지는 자기들의 조를 용서받는 일에 무관심하다. 얼마나 간단하고도 잠깐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교만한 자들을 그의 발 앞에 끓게 하시는가! 아합왕으로 하여금 굵은 베옷을 입게 하고, 므낫세 왕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바로 왕으로 하여금 자기의 허물을 고백케 하고, 가룟 유다로 하여금 은 삼십을 되돌려 주게 하고, 시몬 마가로 하여금 애원케 하고, 벨사살과 벨릭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셨다. 아무리 무디고 목이 곧은 심령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앞에 죄목을 나열해 놓으면 낙담케 되는 것이다. 이 종은 그의 죄의 빚을 부인하거나 갚지 않으려거나 또는 도망쳐 버리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 그는 시간을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내게 참으소서.” 하나님께서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그 인내하심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집행 유예는 사면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회개함에 이르는 것”(롬 2:4)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하등의 자비를 베푼 것이 되지 못한다.

[2] 그는 갚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잠깐만 “참아 기다리소서. 제가 당신께 모든 것을 갚겠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정죄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하나님께 범한 허물에 대해서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치 부채를 일부만 지불한 파산자처럼 “자기의 허물을 위하여 자기의 맏아들”(막 6:7)을 드림으로써 빚을 청산하려는 자들과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며(롬 10:3) 갚을 길이 없으면서도 (25절) 모든 것을 갚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가 죄를 범한 것을 아는 죄인들일지라도 교만을 버리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서도 아직 겸손해지지 않는다.

(7)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순수한 동정심에서 겸손한 자들의 조를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27절). 그 종의 주인은 그를 정당하게 파멸시킬 수도 있지만 자비를 베풀어 그를 놓아 보냈다. 그 주인은 만족한 만큼 빚 갚음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빚을 탕감해 줌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이다. 그 종의 간구는 “내게 참으소서”였지만 그 주인의 응답은 완전 탕감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죄 사함은 하나님의 긍휼, 즉 그의 온유하신 긍휼에서 기인한다(눅 1:77, 78).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27절). 하나님의 긍휼의 동기는 자신의 속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다. 그가 긍휼을 베풀려고 마음 먹으셨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비참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편적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그들을 위한 보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하게 회개한 자들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만을 독생자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심령이 상하게 되며 또한 죄를 깊이 뉘우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중한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 그 빚은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주인은 “전부를 탕감하여 주셨다”(32절). 우리의 죄는 양적으로는 무수히 많고 질적으로는 매우 악하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탕감될 수 있다.

[3]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곧 그 빚진 자를 놓아 보내는 것이다. “그가 그를 놓아 보내며.” 채무관계가 무효로 되고 심판도 취소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까지는 자유롭게 활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주인은 그 종에게 빚진 자로서의 벌과금을 모두 탕감하여 청산해 주기는 했지만, 종으로서의 그의 의무는 면제하지 않았다. 죄 사함은 우리의 순종의 의무를 연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종들로 하여금 그를 계속하여 섬기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따라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어 그를 섬기게 하기를”(눅 1:74, 75) 기뻐하신 것을 은총으로 간주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는 당신이 나의 멍에를 푸신 연고라.”

2. 종의 주인은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관에 대하여 혹독하고 매정하게 대하였다(28-30절). 본문의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요구할 때에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자기 자신의 소유를 요구할 때는(즉 자기 빚을 받아낼 때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자기의 권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며, 그러한 행위는 때때로 사실상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된다. Summun jus summainjuria ─즉 자기의 권리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부당 행위가 된다. 배상 자체나 공적인 이익을 위하지 않고 법이 허락한다고 해서 in terrorem ─ 즉 공포를 주기 위한 단순히 보복하려는 목적과 완악한 인간의 심령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손해 배상 청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어긋난다. 빚진 자가 도저히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매 그를 감옥에서 망하도록 하려고 빚 돈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이웃 사랑은 전혀 가지지 않고 돈만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 준다(느 5:7).

(1) 주인이 탕감해 준 “일반 달란트”에 비하면 그 종이 받아낼 그 빚은 매우 하찮은 액수이다. “그는 저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금액은 3.5파운드(pound)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지은 허물이나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것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들과 같은 인간인 어떤 사람에 대하여 행해진 허물들은 단지 “데나리온이나 티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행해진 허물들은 “달란트나 들보나 낙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부당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행하는 부당 행위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거나 보복을 꾀하여서는 안 된다. 다윗은 자기에게 가해진 냉대나 모욕에 대해서는 무관하였다. “나는 귀머거리처럼 듣지 않았나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인하여는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죄들 때문에 “눈물이 강이 되어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2) 그의 빚 독촉은 지나치게 혹독하였다.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자만하고 성미가 고약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정당하기만 하면 그 방법이 혹독하고 잔인하다 할지라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 빚진 자의 목을 졸라매지 않고서도 요구할 수 있고, 영장을 발부하거나 집달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종의 태도는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오만한가! 그렇지만 그의 정신은 얼마나 비열하고 야만스러운가! 그가 만일 그 주인에게 진 자기 빚 때문에 감옥에라도 가게 되어서 그의 사정이 아주 긴박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가 동관들에게서 받아야할 빚을 독촉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고,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절박한 필요성보다도 교만하고 악한 까닭에 빚진 자들을 혹독하게 취급한다.

(3) 그 빚진 자는 엎드려 애걸하고 있다. “그의 동관”은 같은 동료였지만 그의 긍휼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이미 마치 그 채권자인 종이 이전에 자기 주인에게 진 엄청난 빚 때문에 간청하였던 것처럼, 이 빚진 동관도 자기의 하찮은 빚 때문에 그에게 간구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잠 22:7).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기의 빚을 갚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채권자에게 매우 공손해야 하며 또 최대한으로 그들에게 가장 높은 존칭들을 사용해 주어야 한다. 빚진 자들은 채주들에 화를 내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험담해서도 안되며, 채주들이 혹독하게 굴더라도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기들의 사정을 하나님께만 간구해야 한다. 그 불쌍한 동관이 간구한 것은 “나를 참아 주소서”이다. 그는 정직하게 그 빚을 인정하고 그의 채주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고만 애걸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채무의 보류는 그것이 면제는 아니지만 때로는 긴요하고 은유한 관용의 일종이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할 때에(빚이나 손해 배상을 받아내는 것 등) 완고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서둘러서도 안 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4) 그 채주는 매우 격하여 있었다(30절). “허락하지 아니하고” (즉 참아 주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옥에 가두었다. 그는 얼마나 오만하게 자기에게 그처럼 간구 하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동료를 유린해 버렸는가! 얼마나 그는 잔인하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그 동료를 취급하였는가! 사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무자비한 채주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집어삼키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데서 기쁨을 누리고(삼하 20:19), 그들의 가난한 채무자들의 뼈를 취하는 데서 의기양양해 한다.

(5) 다른 동료 종들은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그들은 심히 민망하게 여겼다”(31절). 그들은 채주의 잔인성과 채무자의 비참함을 인하여 심히 민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동료 종들의 죄와 괴로움은 우리에게도 슬픔과 고민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형제들 중에 누군가가 잔인성과 야만성에 의하여 맹수 노릇을 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또는 권력을 가진 자가 비인간적인 권력 행사를 하여 모든 사람을 노예화시키는 폭군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 채주인 동료 종이 으르렁거리는 곰처럼 날뛰고 벌레를 유린하듯 채무자인 동료를 짓밟는 것은 인간성과 종교의 존엄성에 대해서 열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솔로몬은 어떤 눈으로 “학대받는 자의 눈물”과 “학대하는 자의 권세”를 보았는가를 살펴 보라(전 4:1).

(6) 이 사실은 주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이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라.” 그들은 그 도료 종을 면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을 잃고 격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찾아가 그 학대받는 친구 종을 위하여 그 학대하는 채주 종을 제재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경우마다 우리를 기도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사각한 자들의 사악함이나 눌린 자들의 억울함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하소연과 이의는 하나님께 아뢰어 그의 처분에 맡겨져야 한다.

3. 자기 종이 범한 잔인성에 대한 그 주인의 정당한 분노. 종들도 그 잔인성에 대하여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하물며 동정심이 우리의 경우보다 한없이 많으신 그 주인은 더욱 하지 않겠는가?

(1) 그 주인은 자기 종의 잔인성을 어떻게 책망하였는가?(32, 33절) “악한 종아!”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무자비한 것은 사악함이요, 가장 큰 악이라는 사실이다.

[1] 그 주인은 자기가 그에게 베풀었던 그 긍휼을 인하여 그 종을 책망하였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하나님의 은총을 잘 감당하는 자들은 결코 책망을 받지 않지만, 그 은총을 역이용하는 자들은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만 한다(마 11:20). 주인이 탕감해 준 것은 빚 전부였으며, 그것도 거액의 빚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가 많은 곳에 사죄의 은총이 넘치는 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는가”(눅 7:47)를 언제나 생각해야만 한다.

[2] 그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자기의 동관에게 긍휼을 베풀 의무가 있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긍휼을 받은 자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Dat ille veniam facile, cui venia est opus ─ 즉 사죄를 필요로 하는 자는 쉽게 용서를 베푼다 Senec. Agamemn. 그 주인이 그 종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빚진 종에게 보여 준 주인의 엄청난 관용. 종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에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줌(23-27절).우리가 범한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진 빚이다. 이 빚은 물건을 사고 팔 때 계약하는 당사자들처럼 대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진 빚이 아니고 상급자에게 진 빚이다. 이 빚은 종이 서약증서를 박탈당할 때 영주에게 진 빚이나, 또는 법률 위반이나 치안을 문란케 함으로 인하여 부과된 벌과금과 같으며 종이 주인 섬기기를 그만 두거나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거나 계약서를 위반하거나 위약금을 맡음으로 인하여 주인에게 종이 진 빚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배상금을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형법상의 처벌을 받게 된다.이 빚들을 기록해 둔 회계장부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빚들을 곧장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임금은 “그 종들과 회개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자신의 양심에 의하여 우리와 계산하신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을 대리한 회계사인데, 그 회계사는 우리와 회계하려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자기 죄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제일 먼저 묻는 질문 중에 하나는, “너는 내 주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느냐?” 양심이 뇌물로 매수되지 않는 한 그것은 참된 말을 할 것이며, 모든 빚을 계산하게 되는 다른 정해진 날이 있다. 그때 이 모든 회계서들을 떼게 되는데, 어떤 것은 이월되고 어떤 것은 기각된다. 그리고 그때에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 계산서를 결산하여 줄 것이다.죄의 빚은 매우 큰 빚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죄로 인하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가 회계하기 시작했을 때 첫 체납자들 중 한 명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문은 피할 길이 없다. 너의 죄는 반드시 너를 찾아낸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였는데, 그것은 막대한 금액이며 계산하면 1,875,000파운드(pounds)나 된다. 이는 왕의 몸값(역주:포로로 되거나 인질이 되었을 때 지불하는 금액)이나 한 왕국의 특별 세금에 해당되는 액수로서, 종의 빚으로는 너무도 많은 금액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떤 것인가?죄의 본질은 극악하다. 죄는 달란트이다. 이는 돈이나 무게를 계산하는데 사용된 단위 중 가장 큰 것이다. 모든 죄는 한 달란트의 짐이요 “납 한 달란트는 악이다”(슥 5:7, 8).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인 우리에게 맡겨진 주인의 소유 재산은 한 달란트였다(25:15). 즉 금 한 달란트였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모두 땅에 묻어 버렸든지 아니면 대개의 경우 낭비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한 달란트씩 빚지고 있다. 이 한 달란트가 우리의 계산서를 고액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죄의 숫자는 막대하다. 그 수는 일만으로서, “우리의 머리털보다 더 많다”(시 40:12). “누가 자기의 허물의 수를 헤아릴 수 있으며 그가 얼마나 많이 죄를 범하였는가를 말할 수 있으리요?”(시 19:12)죄의 빚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우리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그는 값을 것이 없는지라.” 죄인들은 지불이 불가능한 채무자들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갈 3:22)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한 파산 선고를 알리는 법령이다. 금이나 은으로도 우리의 빚을 갚지 못한다(시 46:6, 7). 희생 제물로도 갚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 것이기에, 속전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무력하여 우리 자신을 도울 수가 없다.하나님께서 엄격하신 공의로 우리를 취급하시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불 불능의 채무자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빚을 강제로라도 회수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완전히 파멸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공의는 속죄물을 요구하며, 법의 판결은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currat lex). 그 종은 자기의 낭비벽과 자행 자지함에 의하여 이 빚을 진 것이므로 마땅히 그것을 자기가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다. 그는 갤리배(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젓게 한 군함)의 노예로 팔려 감옥에서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모든 죄인들이 받게 되는 것, 즉 “죄의 삯”에 관한 것이다.팔리게 됨. “자신을 팔아 사악한 짓을 행하는” 자들은 팔리워서 속상(贖賞)해야 한다. 죄에게 노예가 된 자들은 진노(wrath)에게 노예가 된 자들이다. 노예로 팔리운 사람은 모든 인생의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모진 목숨뿐, 그는 자신의 불행을 되씹으며 감수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저주받은 죄인들의 처지를 말해 주고 있다.갚아야 됨. 그렇지만 보잘 것 없는 몸값은 엄청난 죄의 빚을 도저히 충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속상(만족)되어 가지만 결코 모두가 속상되지는 못한다.자기 죄를 깨달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 할 수밖에 없다. 그 종은 이 명령을 받자, 그의 주인 되신 임금의 발아래 엎드리어 “‘그에게 절을 하였다”(어떤 사본에는 ‘그에게 탄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주인에게 애걸복걸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절). 그 종은 이전에 벌써 자기가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개를 하도록 부름을 받을 때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죄인들은 대개 어떤 감화력 있는 말이나 깜짝 놀랄 만한 섭리 또는 임박한 죽음에 사로잡혀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의 앞에 나아갈까?”(막 6:6)하고 탄식할 때까지는 자기들의 조를 용서받는 일에 무관심하다. 얼마나 간단하고도 잠깐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교만한 자들을 그의 발 앞에 끓게 하시는가! 아합왕으로 하여금 굵은 베옷을 입게 하고, 므낫세 왕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바로 왕으로 하여금 자기의 허물을 고백케 하고, 가룟 유다로 하여금 은 삼십을 되돌려 주게 하고, 시몬 마가로 하여금 애원케 하고, 벨사살과 벨릭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셨다. 아무리 무디고 목이 곧은 심령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앞에 죄목을 나열해 놓으면 낙담케 되는 것이다. 이 종은 그의 죄의 빚을 부인하거나 갚지 않으려거나 또는 도망쳐 버리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그는 시간을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내게 참으소서.” 하나님께서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그 인내하심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집행 유예는 사면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회개함에 이르는 것”(롬 2:4)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하등의 자비를 베푼 것이 되지 못한다.그는 갚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잠깐만 “참아 기다리소서. 제가 당신께 모든 것을 갚겠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정죄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하나님께 범한 허물에 대해서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치 부채를 일부만 지불한 파산자처럼 “자기의 허물을 위하여 자기의 맏아들”(막 6:7)을 드림으로써 빚을 청산하려는 자들과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며(롬 10:3) 갚을 길이 없으면서도 (25절) 모든 것을 갚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가 죄를 범한 것을 아는 죄인들일지라도 교만을 버리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서도 아직 겸손해지지 않는다.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순수한 동정심에서 겸손한 자들의 조를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27절). 그 종의 주인은 그를 정당하게 파멸시킬 수도 있지만 자비를 베풀어 그를 놓아 보냈다. 그 주인은 만족한 만큼 빚 갚음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빚을 탕감해 줌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이다. 그 종의 간구는 “내게 참으소서”였지만 그 주인의 응답은 완전 탕감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죄 사함은 하나님의 긍휼, 즉 그의 온유하신 긍휼에서 기인한다(눅 1:77, 78).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27절). 하나님의 긍휼의 동기는 자신의 속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다. 그가 긍휼을 베풀려고 마음 먹으셨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비참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편적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그들을 위한 보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하게 회개한 자들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만을 독생자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심령이 상하게 되며 또한 죄를 깊이 뉘우치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중한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 그 빚은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주인은 “전부를 탕감하여 주셨다”(32절). 우리의 죄는 양적으로는 무수히 많고 질적으로는 매우 악하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탕감될 수 있다.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곧 그 빚진 자를 놓아 보내는 것이다. “그가 그를 놓아 보내며.” 채무관계가 무효로 되고 심판도 취소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까지는 자유롭게 활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주인은 그 종에게 빚진 자로서의 벌과금을 모두 탕감하여 청산해 주기는 했지만, 종으로서의 그의 의무는 면제하지 않았다. 죄 사함은 우리의 순종의 의무를 연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종들로 하여금 그를 계속하여 섬기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따라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어 그를 섬기게 하기를”(눅 1:74, 75) 기뻐하신 것을 은총으로 간주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는 당신이 나의 멍에를 푸신 연고라.”종의 주인은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관에 대하여 혹독하고 매정하게 대하였다(28-30절). 본문의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요구할 때에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자기 자신의 소유를 요구할 때는(즉 자기 빚을 받아낼 때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자기의 권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며, 그러한 행위는 때때로 사실상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된다. Summun jus summainjuria ─즉 자기의 권리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부당 행위가 된다. 배상 자체나 공적인 이익을 위하지 않고 법이 허락한다고 해서 in terrorem ─ 즉 공포를 주기 위한 단순히 보복하려는 목적과 완악한 인간의 심령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손해 배상 청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어긋난다. 빚진 자가 도저히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매 그를 감옥에서 망하도록 하려고 빚 돈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이웃 사랑은 전혀 가지지 않고 돈만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 준다(느 5:7).주인이 탕감해 준 “일반 달란트”에 비하면 그 종이 받아낼 그 빚은 매우 하찮은 액수이다. “그는 저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금액은 3.5파운드(pound)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지은 허물이나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것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들과 같은 인간인 어떤 사람에 대하여 행해진 허물들은 단지 “데나리온이나 티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행해진 허물들은 “달란트나 들보나 낙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부당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행하는 부당 행위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거나 보복을 꾀하여서는 안 된다. 다윗은 자기에게 가해진 냉대나 모욕에 대해서는 무관하였다. “나는 귀머거리처럼 듣지 않았나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인하여는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죄들 때문에 “눈물이 강이 되어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그의 빚 독촉은 지나치게 혹독하였다.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자만하고 성미가 고약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정당하기만 하면 그 방법이 혹독하고 잔인하다 할지라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 빚진 자의 목을 졸라매지 않고서도 요구할 수 있고, 영장을 발부하거나 집달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종의 태도는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오만한가! 그렇지만 그의 정신은 얼마나 비열하고 야만스러운가! 그가 만일 그 주인에게 진 자기 빚 때문에 감옥에라도 가게 되어서 그의 사정이 아주 긴박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가 동관들에게서 받아야할 빚을 독촉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고,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절박한 필요성보다도 교만하고 악한 까닭에 빚진 자들을 혹독하게 취급한다.그 빚진 자는 엎드려 애걸하고 있다. “그의 동관”은 같은 동료였지만 그의 긍휼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이미 마치 그 채권자인 종이 이전에 자기 주인에게 진 엄청난 빚 때문에 간청하였던 것처럼, 이 빚진 동관도 자기의 하찮은 빚 때문에 그에게 간구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잠 22:7).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기의 빚을 갚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채권자에게 매우 공손해야 하며 또 최대한으로 그들에게 가장 높은 존칭들을 사용해 주어야 한다. 빚진 자들은 채주들에 화를 내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험담해서도 안되며, 채주들이 혹독하게 굴더라도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기들의 사정을 하나님께만 간구해야 한다. 그 불쌍한 동관이 간구한 것은 “나를 참아 주소서”이다. 그는 정직하게 그 빚을 인정하고 그의 채주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고만 애걸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채무의 보류는 그것이 면제는 아니지만 때로는 긴요하고 은유한 관용의 일종이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할 때에(빚이나 손해 배상을 받아내는 것 등) 완고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서둘러서도 안 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그 채주는 매우 격하여 있었다(30절). “허락하지 아니하고” (즉 참아 주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옥에 가두었다. 그는 얼마나 오만하게 자기에게 그처럼 간구 하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동료를 유린해 버렸는가! 얼마나 그는 잔인하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그 동료를 취급하였는가! 사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무자비한 채주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집어삼키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데서 기쁨을 누리고(삼하 20:19), 그들의 가난한 채무자들의 뼈를 취하는 데서 의기양양해 한다.다른 동료 종들은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그들은 심히 민망하게 여겼다”(31절). 그들은 채주의 잔인성과 채무자의 비참함을 인하여 심히 민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동료 종들의 죄와 괴로움은 우리에게도 슬픔과 고민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형제들 중에 누군가가 잔인성과 야만성에 의하여 맹수 노릇을 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또는 권력을 가진 자가 비인간적인 권력 행사를 하여 모든 사람을 노예화시키는 폭군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 채주인 동료 종이 으르렁거리는 곰처럼 날뛰고 벌레를 유린하듯 채무자인 동료를 짓밟는 것은 인간성과 종교의 존엄성에 대해서 열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솔로몬은 어떤 눈으로 “학대받는 자의 눈물”과 “학대하는 자의 권세”를 보았는가를 살펴 보라(전 4:1).이 사실은 주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이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라.” 그들은 그 도료 종을 면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을 잃고 격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찾아가 그 학대받는 친구 종을 위하여 그 학대하는 채주 종을 제재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경우마다 우리를 기도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사각한 자들의 사악함이나 눌린 자들의 억울함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하소연과 이의는 하나님께 아뢰어 그의 처분에 맡겨져야 한다.자기 종이 범한 잔인성에 대한 그 주인의 정당한 분노. 종들도 그 잔인성에 대하여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하물며 동정심이 우리의 경우보다 한없이 많으신 그 주인은 더욱 하지 않겠는가?그 주인은 자기 종의 잔인성을 어떻게 책망하였는가?(32, 33절) “악한 종아!”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무자비한 것은 사악함이요, 가장 큰 악이라는 사실이다.그 주인은 자기가 그에게 베풀었던 그 긍휼을 인하여 그 종을 책망하였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하나님의 은총을 잘 감당하는 자들은 결코 책망을 받지 않지만, 그 은총을 역이용하는 자들은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만 한다(마 11:20). 주인이 탕감해 준 것은 빚 전부였으며, 그것도 거액의 빚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가 많은 곳에 사죄의 은총이 넘치는 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는가”(눅 7:47)를 언제나 생각해야만 한다.그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자기의 동관에게 긍휼을 베풀 의무가 있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긍휼을 받은 자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Dat ille veniam facile, cui venia est opus ─ 즉 사죄를 필요로 하는 자는 쉽게 용서를 베푼다 Senec. Agamemn. 그 주인이 그 종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그는 자기의 동관의 고통에 보다 더 동정적이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동일한 고통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더 잘 알아준다는 말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의 심정을 잘 알아주었다. 이는 그들이 나그네로 지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종은 자기에게 붙들린 빚진 자의 심정을 그에게 완악하고 혹독하게 대하기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 종은 그 주인의 관대한 마음씨를 본받아 따랐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왜냐하면 그 종은 그 주인의 관대한 마음씨를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죄함 받은 은총을 깊이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당연히 형제를 용서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찬다. “모든 빚들을 면제하는” 희년의 나팔소리는 속죄일 마지막 날에 크게 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형제를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 주인은 자기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여 그 판결을 환원시켰다(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의 사악함은 지독하였지만 그 주인은 다른 벌을 대리지 않고 빚을 갚도록만 하셨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한 벌은 어떤 것인가? 죄를 용서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용서받지를 못하게 돈다. “그는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이 자기 동료 종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를 옥에 가두는 것이었지만 그 자신은 옥졸들에게 넘기워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멸시키는 진노의 위력은 어떠한 피조물의 힘이나 진노보다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이 느끼는 가책과 공포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옥졸들과 같다. 왜냐하면 양심은 결코 죽지 않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자들인 마귀들은 지금은 죄인들의 유혹자이지만, 영원히 죄인을 괴롭히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 종은 그가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감옥으로 보내어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빚은 결코 일부만 지불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탕감되든지 아니면 완전히 면제되든지 해야만 한다. 하늘에 있는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 속죄를 인하여 전부 탕감을 받았으나 지옥에 있는 영벌에 처한 죄인들은 모든 것을 갚도록 벌을 받았다.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범해진 죄과나 허물은 명예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코 감소액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지불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 자신에 의해서든지 아니면 그의 보증인에 의해서든지 그 죄과는 속량되어야 한다. 그 주인은 자기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여 그 판결을 환원시켰다(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의 사악함은 지독하였지만 그 주인은 다른 벌을 대리지 않고 빚을 갚도록만 하셨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한 벌은 어떤 것인가? 죄를 용서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용서받지를 못하게 돈다. “그는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이 자기 동료 종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를 옥에 가두는 것이었지만 그 자신은 옥졸들에게 넘기워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멸시키는 진노의 위력은 어떠한 피조물의 힘이나 진노보다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이 느끼는 가책과 공포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옥졸들과 같다. 왜냐하면 양심은 결코 죽지 않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자들인 마귀들은 지금은 죄인들의 유혹자이지만, 영원히 죄인을 괴롭히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 종은 그가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감옥으로 보내어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빚은 결코 일부만 지불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탕감되든지 아니면 완전히 면제되든지 해야만 한다. 하늘에 있는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 속죄를 인하여 전부 탕감을 받았으나 지옥에 있는 영벌에 처한 죄인들은 모든 것을 갚도록 벌을 받았다.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범해진 죄과나 허물은 명예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코 감소액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지불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 자신에 의해서든지 아니면 그의 보증인에 의해서든지 그 죄과는 속량되어야 한다. Ⅳ. 비유의 전체적 적용(35절).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스도께서 본문에서 하나님께 붙여드린 명칭은 19절에서도 사용되었다. 19절의 말씀은 위로를 주는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런데 본문의 경우는 19절과는 달리 가공할 만한 위협을 주는데 그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부성적(父性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로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준엄하거나 혹독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항상 그를 경외하면서 지내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1. 용서의 의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진실 되게 우리에게 허물이 있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올바르게 그리고 합당하게 용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의도 심중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서로 간에 또는 어떤 사람에게 악의를 품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떠한 보복에 대한 계획도 심중에 꾀하여서는 안 되며 그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화려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죄과가 있는 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간구 해야 한다.

2. 용서치 않을 때의 위험.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

(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죄 용서를 변개(變改)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진의에 따라서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는 거부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합왕처럼 겉으로는 겸손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탕감받은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믿고 죄 사함 받은 은혜와 위로를 함부로 남용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제넘게 건방진 자들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몰수하는 예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실하되 겁 있는 자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안전책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자는 소망을 가질 것이다. 자기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참되게 회개치 않은 사람들이다. 또한 참되게 복음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빼앗기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뿐이다(눅 8:18).

(2)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는 사실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는 것은 사죄와 화평에 반드시 필요하다. 긍휼은 하나님과 성부 앞에서 순수하고 흠이 없는 종교의 기본 요소요 위로부터 주신 바 관대하고 쉽게 청원을 들어주는 지혜의 기본 요소이다.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들의 형제를 무자비하고 혹독하게 취급하기를 고집하다가 심판날 어떻게 응답을 받게 되는가? 그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자기 자신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용서의 의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진실 되게 우리에게 허물이 있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올바르게 그리고 합당하게 용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의도 심중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서로 간에 또는 어떤 사람에게 악의를 품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떠한 보복에 대한 계획도 심중에 꾀하여서는 안 되며 그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화려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죄과가 있는 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간구 해야 한다.용서치 않을 때의 위험.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죄 용서를 변개(變改)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진의에 따라서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는 거부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합왕처럼 겉으로는 겸손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탕감받은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믿고 죄 사함 받은 은혜와 위로를 함부로 남용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제넘게 건방진 자들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몰수하는 예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실하되 겁 있는 자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안전책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자는 소망을 가질 것이다. 자기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참되게 회개치 않은 사람들이다. 또한 참되게 복음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빼앗기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뿐이다(눅 8:18).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는 사실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는 것은 사죄와 화평에 반드시 필요하다. 긍휼은 하나님과 성부 앞에서 순수하고 흠이 없는 종교의 기본 요소요 위로부터 주신 바 관대하고 쉽게 청원을 들어주는 지혜의 기본 요소이다.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들의 형제를 무자비하고 혹독하게 취급하기를 고집하다가 심판날 어떻게 응답을 받게 되는가? 그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자기 자신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헬라어 마태복음 18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반응형

엔 에케이네 테 호라 프로셀돈 호이 마데타이 토 예수 레곤테스 티스 아라 메이존 에스틴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새번역,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우리말성경,1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가톨릭성경,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1 At that time the disciples came to Jesus and asked, “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 At that time the disciples came to Jesus and said, ” Who then is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 At about the same time, the disciples came to Jesus asking, “Who gets the highest rank in God’s kingdom?”

영어NRSV,1 At that time the disciples came to Jesus and asked, “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ν εκεινη τη ωρα προσηλθον οι μαθηται τω ιησου λεγοντες τις αρα μειζων εστιν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 in illa hora accesserunt discipuli ad Iesum dicentes quis putas maior est in regno caelorum

히브리어Modern,1 בשעה ההיא נגשו התלמידים אל ישוע ויאמרו מי אפוא גדול מחבריו ב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18: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호 예수스 파이디온 에스테센 아우토 엔 메소 아우톤

개역개정,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새번역,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우리말성경,2 예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가톨릭성경,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영어NIV,2 He called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among them.

영어NASB,2 And He called a child to Himself and set him before them,

영어MSG,2 For an answer Jesus called over a child, whom he stood in the middle of the room,

영어NRSV,2 He called a child, whom he put among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προσκαλεσαμενος ο ιησους παιδιον εστησεν αυτο εν μεσω αυτων

라틴어Vulgate,2 et advocans Iesus parvulum statuit eum in medio eorum

히브리어Modern,2 ויקרא ישוע אליו ילד קטן ויעמידהו בתוכם׃

성 경: [마18: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다.

카이 에이펜 아멘 레고 휘민 에안 메 스트라페테 카이 게네스데 호스 타 파이디아 우 메 에이셀데테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

개역개정,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새번역,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가톨릭성경,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어NIV,3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3 and said, “Truly I say to you, unless you are converted and become like children,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3 and said, “I’m telling you, once and for all, that unless you return to square one and start over like children, you’re not even going to get a look at the kingdom, let alone get in.

영어NRSV,3 and said, “Truly I tell you,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ιπε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εαν μη στραφητε και γενησθε ως τα παιδια ου μη εισελθητε εις την βασιλειαν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3 et dixit amen dico vobis nisi conversi fueritis et efficiamini sicut parvuli non intrabitis in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3 ויאמר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אם לא תשובו להיות כילדים לא תבוא אל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18: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는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호스티스 운 타페이노세 헤아우톤 호스 토 파이디온 투토 후토스 에스틴 호 메이존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새번역,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우리말성경,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가톨릭성경,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영어NIV,4 Therefore, whoever humbles himself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4 “Whoever then humbles himself as this child, he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4 Whoever becomes simple and elemental again, like this child, will rank high in God’s kingdom.

영어NRSV,4 Whoever becomes humble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4 οστις ουν ταπεινωση εαυτον ως το παιδιον τουτο ουτος εστιν ο μειζων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4 quicumque ergo humiliaverit se sicut parvulus iste hic est maior in regno caelorum

히브리어Modern,4 לכן כל המשפיל את עצמו כילד הזה הוא הגדול במלכות השמים׃

카이 호스 에안 뎈세타이 파이디온 토이우톤 엔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에메 데케타이

개역개정,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새번역,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말성경,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가톨릭성경,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어NIV,5 “And whoever welcomes a little child like this in my name welcomes me.

영어NASB,5 “And whoever receives one such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영어MSG,5 What’s more, when you receive the childlike on my account, it’s the same as receiving me.

영어NRSV,5 Whoever welcomes one such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ος εαν δεξηται παιδιον τοιουτον εν επι τω ονοματι μου εμε δεχεται

라틴어Vulgate,5 et qui susceperit unum parvulum talem in nomine meo me suscipit

히브리어Modern,5 וכל אשר יקבל ילד אחד כזה בשמי אותי הוא מקבל׃

호스 드 안 스칸달리세 헤나 톤 미크론 투톤 톤 피스튜온톤 에이스 에메 쉼페레이 아우토 히나 크레마스데 뮐로스 오니코스 페리 톤 트라켈론 아우투 카이 카타폰티스데 엔 토 펠라게이 테스 달라쎄스

개역개정,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새번역,6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 ㉠또는 ‘죄 짓게’

우리말성경,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가운데 한 명이라도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큰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가톨릭성경,6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영어NIV,6 But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it would be better for him to have a large millstone hung around his neck and to be drowned in the depths of the sea.

영어NASB,6 but whoever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tumble, it would be better for him to have a heavy millstone hung around his neck, and to be drowned in the depth of the sea.

영어MSG,6 “But if you give them a hard time, bullying or taking advantage of their simple trust, you’ll soon wish you hadn’t. You’d be better off dropped in the middle of the lake with a millstone around your neck.

영어NRSV,6 “If any of you put a stumbling block before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it would be better for you if a great millstone were fastened around your neck and you were drowned in the depth of the sea.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ς δ αν σκανδαλιση ενα των μικρων τουτων των πιστευοντων εις εμε συμφερει αυτω ινα κρεμασθη μυλος ονικος επι τον τραχηλον αυτου και καταποντισθη εν τω πελαγει της θαλασσης

라틴어Vulgate,6 qui autem scandalizaverit unum de pusillis istis qui in me credunt expedit ei ut suspendatur mola asinaria in collo eius et demergatur in profundum maris

히브리어Modern,6 וכל המכשיל את אחד מן הקטנים האלה המאמינים בי נוח לו שיתלה פלח רכב על צוארו וטבע במצולות ים׃

우아이 토 코스모 아포 톤 스칸달론 아낭케 가르 에스틴 엘데인 타 스칸달라 플렌 우아이 토 안드로포 에케이노 디 후 토 스칸달론 에르케타이

개역개정,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새번역,7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는 화가 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 ㉡또는 ‘죄 짓게’ ㉢또는 ‘죄 짓게’ ㉣또는 ‘죄 짓게’

우리말성경,7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 때문에 이 세상에 화가 있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과 같은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7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영어NIV,7 “Woe to the world because of the things that cause people to sin! Such things must come, but woe to the man through whom they come!

영어NASB,7 “Woe to the world because of its stumbling blocks! For it is inevitable that stumbling blocks come; but woe to that man through whom the stumbling block comes!

영어MSG,7 Doom to the world for giving these God-believing children a hard time! Hard times are inevitable, but you don’t have to make it worse–and it’s doomsday to you if you do.

영어NRSV,7 Woe to the world because of stumbling blocks! Occasions for stumbling are bound to come, but woe to the one by whom the stumbling block comes!

헬라어신약Stephanos,7 ουαι τω κοσμω απο των σκανδαλων αναγκη γαρ εστιν ελθειν τα σκανδαλα πλην ουαι τω ανθρωπω εκεινω δι ου το σκανδαλον ερχεται

라틴어Vulgate,7 vae mundo ab scandalis necesse est enim ut veniant scandala verumtamen vae homini per quem scandalum venit

히브리어Modern,7 אוי לעולם מפני המכשלים כי המכשלים צריכים לבוא אבל אוי לאיש ההוא אשר על ידו יבוא המכשול׃

에이 데 헤 케이르 수 에 호 푸스 수 스칸달리제이 세 엨콮손 아우톤 카이 바레 아포 수 칼론 소이 에스틴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 퀼론 에 콜론 에 뒤오 케이라스 에 뒤오 포다스 에콘타 블레데나이 에이스 토 퓌르 토 아이오니온

개역개정,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새번역,8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또는 ‘죄 짓게’

우리말성경,8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 내버려라. 두 손, 두 발 다 가지고 영원히 타는 불 속에 던져지느니 불구자나 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가톨릭성경,8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영어NIV,8 If your hand or your foot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maimed or crippled than to have two hands or two feet and be thrown into eternal fire.

영어NASB,8 “If your hand or your foot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and throw it from you;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crippled or lame, than to have two hands or two feet and be cast into the eternal fire.

영어MSG,8 “If your hand or your foot gets in the way of God, chop it off and throw it away. You’re better off maimed or lame and alive than the proud owners of two hands and two feet, godless in a furnace of eternal fire.

영어NRSV,8 “If your hand or your foot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maimed or lame than to have two hands or two feet and to be thrown into the eternal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ι δε η χειρ σου η ο πους σου σκανδαλιζει σε εκκοψον αυτα και βαλε απο σου καλον σοι εστιν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ζωην χωλον η κυλλον η δυο χειρας η δυο ποδας εχοντα βληθηναι εις το πυρ το αιωνιον

라틴어Vulgate,8 si autem manus tua vel pes tuus scandalizat te abscide eum et proice abs te bonum tibi est ad vitam ingredi debilem vel clodum quam duas manus vel duos pedes habentem mitti in ignem aeternum

히브리어Modern,8 ואם תכשילך ידך או רגלך קצץ אותה והשלך ממך טוב לך לבוא לחיים פסח או קטע מהיות לך שתי ידים או שתי רגלים ותשלך אל אש עולם׃

성 경: [마18:8]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실족케 한 자의 화(禍)]

󰃨 네 손…찍어 내버리라 – 여기서 ‘손’ 이나 ‘발’은 문자 그대로의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5:29).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해당 부위를 즉각 찍어 내버리면 우리의 신체 중 지금까진 남아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손과 발은 유혹의 도구, 수단 및 그 죄악의 실천적 기능에 불과한 것일 뿐 죄의 원인과 동기와 그 근원은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 즉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찍어 버리라고 하는 이 경고의 말씀은 악한 생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마음의 썩은 생각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씀이며, 이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고 무자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씀이다.

󰃨 영원한 불 – 9절에 의하면, ‘지옥 불’ 이다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는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힌놈의 골짜기는 우상 몰렉에게 자기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쳤던 곳으로 (대하 28:3;33:6),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불결한 곳, 부정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왕하 23:10). 그러나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은 사 66:24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다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묵시 문학의 등장으로 ‘지옥’이라는 개념이 차차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신약의 가르침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헨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수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8:12, 바깥 어두운 데 ;13:50, 풀무 불 등).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 즉 임박한 세계 종말종과 심판 사상에 충만해 있던 예수는 이러한 사상을 사람들에게 고취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곧 실현하기 위해 진리와 공의로써 행동하게 하였다. 한편 지옥에 관한 여러 표상들, 예컨데 ‘영영한 불’, ‘바깥 어두운데’ 등은 지옥에 대한 상징과 비유로서, 죄를 지은 영혼이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카이 에이 호 옾달모스 수 스칸달리제이 세 엨셀레 아우톤 카이 발레 아포 수 말론 소이 에스틴 모노프달몬 에이스 텐 조엔 에이셀데인 에 뒤오 오프달무스 에콘타 블레데나이 에이스 텐 게엔난 투 퓌로스

개역개정,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새번역,9 또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 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또는 ‘죄 짓게’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9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느니 한 눈만 가지고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가톨릭성경,9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영어NIV,9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in, gouge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be thrown into the fire of hell.

영어NASB,9 “If your eye causes you to stumble, pluck it out and throw it from you.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be cast into the fiery hell.

영어MSG,9 And if your eye distracts you from God, pull it out and throw it away. You’re better off one-eyed and alive than exercising your twenty-twenty vision from inside the fire of hell.

영어NRSV,9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tumble,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to be thrown into the hell of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ει ο οφθαλμος σου σκανδαλιζει σε εξελε αυτον και βαλε απο σου καλον σοι εστιν μονοφθαλμον εις την ζωην εισελθειν η δυο οφθαλμους εχοντα βληθηναι εις την γεενναν του πυρος

라틴어Vulgate,9 et si oculus tuus scandalizat te erue eum et proice abs te bonum tibi est unoculum in vitam intrare quam duos oculos habentem mitti in gehennam ignis

히브리어Modern,9 ואם עינך תכשליך נקר אותה והשלך ממך טוב לך לבוא לחיים בעין אחת מהיות לך שתי עינים ותשלך אל אש גיהנם׃

호라테 메 카타프로네세테 헤노스 톤 미크론 투톤 레고 가르 휘민 호티 호이 앙겔로이 아우톤 엔 추라노이스 디아 판토스 블레푸시 토 프로소폰 투 파트로스 무 투 엔 우라노이스

개역개정,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새번역,10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말성경,10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

가톨릭성경,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영어NIV,10 “See that you do not look down on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tell you that their angels in heaven always see the face of my Father in heaven.

영어NASB,10 “See that you do not despise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say to you that their angels in heaven continually see the face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영어MSG,10 “Watch that you don’t treat a single one of these childlike believers arrogantly. You realize, don’t you, that their personal angels are constantly in touch with my Father in heaven?

영어NRSV,10 “Take care that you do not despise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tell you, in heaven their angels continually see the face of my Father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ρατε μη καταφρονησητε ενος των μικρων τουτων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οι αγγελοι αυτων εν ουρανοις δια παντος βλεπουσιν το προσωπον του πατρος μου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라틴어Vulgate,10 videte ne contemnatis unum ex his pusillis dico enim vobis quia angeli eorum in caelis semper vident faciem Patris mei qui in caelis est

히브리어Modern,10 ראו פן תבזו אחד wקטנים האלה כי אמר אני לכם כי מלאכיהם ראים תמיד את פני אבי שבשמים׃

성 경: [마18:1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 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생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엘덴 갚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소사이 토 아폴롤로스

개역개정,11 (없음)

새번역,11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1. 인자는 잃은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가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11 (없음)

가톨릭성경,11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왔기 때문이다.)

영어NIV,11 The Son of Man came to save what was lost.

영어NASB,11 {“For the Son of Man has come to save that which was lost.}

영어MSG,11 (OMITTED TEXT)

영어NRSV,11 For the Son of Man came to save the lost.(난외)

헬라어신약Stephanos,11 ηλθεν γαρ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σωσαι το απολωλος

라틴어Vulgate,11 venit enim Filius hominis salvare quod perierat

히브리어Modern,11 כי בא בן האדם להושיע את האבד׃

성 경: [마18:1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티 휘민 도케이 에안 게네타이 티니 안드로포 헤카톤 프로바타 카이 플라네데 헨 엨스 아우톤 우키 아페세이 타 에네네콘타 엔네아 에피 타 오레 카이 포류데이스 제테이 토 플라노메논

개역개정,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새번역,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우리말성경,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가 99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가톨릭성경,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영어NIV,12 “What do you think? If a man own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wanders aw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on the hills and go to look for the one that wandered off?

영어NASB,12 “What do you think? If any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has gone astray, does he not leave the ninety-nine on the mountains and go and search for the one that is straying?

영어MSG,12 “Look at it this way. If someone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wanders off, doesn’t he leave the ninety-nine and go after the one?

영어NRSV,12 What do you think? If a shepherd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has gone astray, does he not leave the ninety-nine on the mountains and go in search of the one that went astray?

헬라어신약Stephanos,12 τι υμιν δοκει εαν γενηται τινι ανθρωπω εκατον προβατα και πλανηθη εν εξ αυτων ουχι αφεις τα εννενηκονταεννεα επι τα ορη πορευθεις ζητει το πλανωμενον

라틴어Vulgate,12 quid vobis videtur si fuerint alicui centum oves et erraverit una ex eis nonne relinquet nonaginta novem in montibus et vadit quaerere eam quae erravit

히브리어Modern,12 מה דעתכם כי יהיו לאיש מאה כבשים ותעה אחד מהם הלא יעזב את התשעים ותשעה על ההרים והלך לבקש את התעה׃

카이 에안 게네타이 휴레인 아우토 아멘 레고 휘민 호티 카이레이 엪 아우토 말론 에 에피 토이스 에네네콘타엔네아 토이스 메 페플라네메노이스

개역개정,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새번역,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만약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 잃지 않은 99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욱 기뻐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영어NIV,13 And if he finds it, I tell you the truth, he is happier about that one sheep than about the ninety-nine that did not wander off.

영어NASB,13 “If it turns out that he finds it, truly I say to you, he rejoices over it more than over the ninety-nine which have not gone astray.

영어MSG,13 And if he finds it, doesn’t he make far more over it than over the ninety-nine who stay put?

영어NRSV,13 And if he finds it, truly I tell you, he rejoices over it more than over the ninety-nine that never went astray.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εαν γενηται ευρειν αυτο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χαιρει επ αυτω μαλλον η επι τοις εννενηκονταεννεα τοις μη πεπλανημενοις

라틴어Vulgate,13 et si contigerit ut inveniat eam amen dico vobis quia gaudebit super eam magis quam super nonaginta novem quae non erraverunt

히브리어Modern,13 והיה כאשר ימצאהו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י ישמח עליו יותר מעל התשעים ותשעה אשר לא תעו׃

성 경: [마18:1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후토스 우크 에스틴 델레마 엠프로스덴 투 파트로스 휘몬 투 엔 우라노이스 히나 아폴레타이 에이스 톤 미크론 투톤

개역개정,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새번역,14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

우리말성경,14 이와 같이 이 어린아이 중 한 명이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가톨릭성경,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영어NIV,14 In the same way your Father in heaven is not willing that any of these little ones should be lost.

영어NASB,14 “So it is not the will of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that one of these little ones perish.

영어MSG,14 Your Father in heaven feels the same way. He doesn’t want to lose even one of these simple believers.

영어NRSV,14 So it is not the will of your Father in heaven that one of these little ones should be lost.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υτως ουκ εστιν θελημα εμπροσθεν του πατρος υμων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ινα αποληται εις των μικρων τουτων

라틴어Vulgate,14 sic non est voluntas ante Patrem vestrum qui in caelis est ut pereat unus de pusillis istis

히브리어Modern,14 כן איננו רצון מלפני אביכם שבשמים כי יאבד אחד מן הקטנים האלה׃

성 경: [마18:1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망)은 이 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극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안 데 하마르테세 에이스 세 호 아델포스 수 휘파게 카이 엘렝크손 아우톤 메탘쉬 수 카이 아우투 모누 에안 수 아쿠세 에케르데사스 톤 아델폰 수

개역개정,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새번역,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또는 ‘신도’

우리말성경,15 “만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해 주어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영어NIV,15 “If your brother sins against you, go and show him his fault, just between the two of you. If he listens to you, you have won your brother over.

영어NASB,15 “If your brother sins , go and show him his fault in private; if he listens to you, you have won your brother.

영어MSG,15 “If a fellow believer hurts you, go and tell him–work it out between the two of you. If he listens, you’ve made a friend.

영어NRSV,15 “If another member of the church sins against you, go and point out the fault when the two of you are alone. If the member listens to you, you have regained that one.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αν δε αμαρτηση εις σε ο αδελφος σου υπαγε και ελεγξον αυτον μεταξυ σου και αυτου μονου εαν σου ακουση εκερδησας τον αδελφον σου

라틴어Vulgate,15 si autem peccaverit in te frater tuus vade et corripe eum inter te et ipsum solum si te audierit lucratus es fratrem tuum

히브리어Modern,15 וכי יחטא לך אחיך לך והוכחת אותו בינך ובינו לבדו ואם ישמע אליך קנית לך אחיך׃

성 경: [마18:15]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이 아니라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렝코'(*)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 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 19:17).

󰃨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음으로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와 조심성과 사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에안 데 메 아쿠세 파랄라베 메타 수 에티 헤나 에 뒤오 히나 에피 스토마토스 뒤오 마르튀론 에 트리온 스타데 판 레마

개역개정,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새번역,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 ㉫신 19:15

우리말성경,16 그러나 만일 네 말을 듣지 않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에 두세 사람의 증거를 얻기 위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거라. 신19:15

가톨릭성경,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NIV,16 But if he will not listen, take one or two others along, so that ‘every matter may be established by the testimony of two or three witnesses.’

영어NASB,16 “But if he does not listen to you, take one or two more with you, so that BY THE MOUTH OF TWO OR THREE WITNESSES EVERY FACT MAY BE CONFIRMED.

영어MSG,16 If he won’t listen, take one or two others along so that the presence of witnesses will keep things honest, and try again.

영어NRSV,16 But if you are not listened to, take one or two others along with you, so that every word may be confirmed by the evidence of two or three witnesse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αν δε μη ακουση παραλαβε μετα σου ετι ενα η δυο ινα επι στοματος δυο μαρτυρων η τριων σταθη παν ρημα

라틴어Vulgate,16 si autem non te audierit adhibe tecum adhuc unum vel duos ut in ore duorum testium vel trium stet omne verbum

히브리어Modern,16 ואם לא ישמע קח עמך עוד אחד או שנים למען על פי שנים או שלשה עדים יקום כל דבר׃

에안 데 파라쿠세 아우톤 에이페 테 엨클레시아 에안 데 카이 테스 엨클레시아스 파라쿠세 에스토 소이 호스페르 호 에드니코스 카이 호 텔로네스

개역개정,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새번역,17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 ㉬또는 ‘신도’

우리말성경,17 그러나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거부하면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너는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가톨릭성경,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영어NIV,17 If he refuses to listen to them, tell it to the church; and if he refuses to listen even to the church, treat him as you would a pagan or a tax collector.

영어NASB,17 “If he refuses to listen to them, tell it to the church; and if he refuses to listen even to the church, let him be to you as a Gentile and a tax-collector.

영어MSG,17 If he still won’t listen, tell the church. If he won’t listen to the church, you’ll have to start over from scratch, confront him with the need for repentance, and offer again God’s forgiving love.

영어NRSV,17 If the member refuses to listen to them, tell it to the church; and if the offender refuses to listen even to the church, let such a one be to you as a Gentile and a tax collector.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αν δε παρακουση αυτων ειπε τη εκκλησια εαν δε και της εκκλησιας παρακουση εστω σοι ωσπερ ο εθνικος και ο τελωνης

라틴어Vulgate,17 quod si non audierit eos dic ecclesiae si autem et ecclesiam non audierit sit tibi sicut ethnicus et publicanus

히브리어Modern,17 ואם לא ישמע אליהם הגד אל הקהל ואם לא ישמע גם אל הקהל והיה לך כגוי וכמוכס׃

성 경: [마18:17]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듣지 않거든(*,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 세리처럼 되게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아멘 레고 휘민 호사 에안 데세테 에피 테스 게스 에스타이 데데메나 엔 우라노 카이 호사 에안 뤼세테 에피 테스 게스 에스타이 렐뤼메나 엔 토 우라노

개역개정,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새번역,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말성경,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가톨릭성경,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영어NIV,18 “I tell you the truth,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영어NASB,18 “Truly I say to you, whatever you bind on earth shall have been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shall have been loosed in heaven.

영어MSG,18 “Take this most seriously: A yes on earth is yes in heaven; a no on earth is no in heaven. What you say to one another is eternal. I mean this.

영어NRSV,18 Truly I tell you,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σα εαν δησητε επι της γης εσται δεδεμενα εν τω ουρανω και οσα εαν λυσητε επι της γης εσται λελυμενα εν τω ουρανω

라틴어Vulgate,18 amen dico vobis quaecumque alligaveritis super terram erunt ligata et in caelo et quaecumque solveritis super terram erunt soluta et in caelo

히브리어Modern,18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ל אשר תאסרו על הארץ אסור יהיה בשמים וכל אשר תתירו על הארץ מתר יהיה בשמים׃

팔린 아멘 레고 휘민 호티 에안 뒤오 쉼포네소신 엨스 휘몬 에피 테스 게스 페리 판토스 프라그마토스 후 에안 아이테손타이 게네세타이 아우토이스 파라 투 파트로스 무 투 엔 우라노이스

개역개정,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새번역,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9 다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어떤 일이든지 마음을 모아 간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영어NIV,19 “Again, I tell you that if two of you on earth agree about anything you ask for, it will be done for you by my Father in heaven.

영어NASB,19 “Again I say to you, that if two of you agree on earth about anything that they may ask, it shall be done for them by My Father who is in heaven.

영어MSG,19 When two of you get together on anything at all on earth and make a prayer of it, my Father in heaven goes into action.

영어NRSV,19 Again, truly I tell you, if two of you agree on earth about anything you ask, it will be done for you by my Father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9 παλιν λεγω υμιν οτι εαν δυο υμων συμφωνησωσιν επι της γης περι παντος πραγματος ου εαν αιτησωνται γενησεται αυτοις παρα του πατρος μου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라틴어Vulgate,19 iterum dico vobis quia si duo ex vobis consenserint super terram de omni re quacumque petierint fiet illis a Patre meo qui in caelis est

히브리어Modern,19 ועוד אמר אני לכם שנים מכם כי יועצו יחדו בארץ על כל דבר אשר ישאלו היה יהיה להם מאת אבי שבשמים׃

성 경: [마18:19]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가 ‘어떤 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오'(*)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우 가르 에이신 뒤오 에 트레이스 쉬네그메노이 에이스 토 에몬 오노마 에케이 에이미 엔 메소 아우톤

개역개정,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새번역,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우리말성경,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가톨릭성경,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영어NIV,20 For where two or three come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with them.”

영어NASB,20 “For where two or three hav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I am there in their midst.”

영어MSG,20 And when two or three of you are together because of me, you can be sure that I’ll be there.”

영어NRSV,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in my name, I am there among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υ γαρ εισιν δυο η τρεις συνηγμενοι εις το εμον ονομα εκει ειμι εν μεσω αυτων

라틴어Vulgate,20 ubi enim sunt duo vel tres congregati in nomine meo ibi sum in medio eorum

히브리어Modern,20 כי בכל מקום אשר שנים או שלשה נאספו בשמי שם אני בתוכם׃

성 경: [마18:2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마'(*)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말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토테 프로셀돈 아우토 호 페트로스 에이펜 퀴리에 포사키스 하마르테세이 에이스 에메 호 아델포스 무 카이 아페소 아우토 헤오스 헾타키스

개역개정,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새번역,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 ㉭또는 ‘신도’

우리말성경,21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가톨릭성경,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21 Then Peter came to Jesus and asked, “Lord, how many times shall I forgive my brother when he sins against me? Up to seven times?”

영어NASB,21 Then Peter came and said to Him, “Lord,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Up to seven times?”

영어MSG,21 At that point Peter got up the nerve to ask, “Master, how many times do I forgive a brother or sister who hurts me? Seven?”

영어NRSV,21 Then Peter came and said to him, “Lord, if another member of the church sins against me, how often should I forgive? As many as seven times?”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οτε προσελθων αυτω ο πετρος ειπεν κυριε ποσακις αμαρτησει εις εμε ο αδελφος μου και αφησω αυτω εως επτακις

라틴어Vulgate,21 tunc accedens Petrus ad eum dixit Domine quotiens peccabit in me frater meus et dimittam ei usque septies

히브리어Modern,21 ויגש אליו פטרוס ויאמר לו אדני כמה פעמים יחטא לי אחי וסלחתי לו העד שבע פעמים׃

성 경: [마18:2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제의 죄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체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페소'(*)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우 레고 소이 헤오스 헾타키스 알 헤오스 헵도메콘타키스 헾타

개역개정,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새번역,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 ㉭또는 ‘신도’

우리말성경,21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가톨릭성경,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21 Then Peter came to Jesus and asked, “Lord, how many times shall I forgive my brother when he sins against me? Up to seven times?”

영어NASB,21 Then Peter came and said to Him, “Lord,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Up to seven times?”

영어MSG,21 At that point Peter got up the nerve to ask, “Master, how many times do I forgive a brother or sister who hurts me? Seven?”

영어NRSV,21 Then Peter came and said to him, “Lord, if another member of the church sins against me, how often should I forgive? As many as seven times?”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οτε προσελθων αυτω ο πετρος ειπεν κυριε ποσακις αμαρτησει εις εμε ο αδελφος μου και αφησω αυτω εως επτακις

라틴어Vulgate,21 tunc accedens Petrus ad eum dixit Domine quotiens peccabit in me frater meus et dimittam ei usque septies

히브리어Modern,21 ויגש אליו פטרוס ויאמר לו אדני כמה פעמים יחטא לי אחי וסלחתי לו העד שבע פעמים׃

성 경: [마18:2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McNeile).

디아 투토 호모이오데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안드로포 바실레이 호스 에델레센 쉬나라이 로곤 메타 톤 둘론 아우투

개역개정,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새번역,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 ㉡또는 ‘왕의 사정과’

우리말성경,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빚을 결산하려는 왕과 같다.

가톨릭성경,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영어NIV,23 “Therefor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king who wanted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ervants.

영어NASB,23 “For this reason the kingdom of heaven may be compared to a king who wished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laves.

영어MSG,23 “The kingdom of God is like a king who decided to square accounts with his servants.

영어NRSV,23 “For this reason the kingdom of heaven may be compared to a king who wished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lave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δια τουτο ωμοιωθη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ανθρωπω βασιλει ος ηθελησεν συναραι λογον μετα των δουλ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3 ideo adsimilatum est regnum caelorum homini regi qui voluit rationem ponere cum servis suis

히브리어Modern,23 על כן דומה מלכות השמים למלך בשר ודם אשר חפץ לעשות חשבון עם עבדיו׃

성 경: [마18:2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벌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의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늬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둘로이)이란 문자적으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아릌사메누 데 아우투 쉬나이레인 프로세네크데 아우토 헤이스 오페일레테스 뮈리온 탈란톤

개역개정,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새번역,24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

우리말성경,24 왕이 결산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나오게 됐다.

가톨릭성경,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영어NIV,24 As he began the settlement, a man who owed him ten thousand talents was brought to him.

영어NASB,24 “When he had begun to settle them, one who owed him ten thousand talents was brought to him.

영어MSG,24 As he got under way, one servant was brought before him who had run up a debt of a hundred thousand dollars.

영어NRSV,24 When he began the reckoning, one who owed him ten thousand talents was brought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ρξαμενου δε αυτου συναιρειν προσηνεχθη αυτω εις οφειλετης μυριων ταλαντων

라틴어Vulgate,24 et cum coepisset rationem ponere oblatus est ei unus qui debebat decem milia talenta

히브리어Modern,24 וכאשר החל לחשב הובא לפניו איש אשר חיב לו עשרת אלפים ככרי כסף׃

성 경: [마18:2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 빚진 자(*,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령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지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메 에콘토스 데 아우투 아포두나이 에켈류센 아우톤 호 퀴리오스 아우투 프라데나이 카이 텐 귀나이카 아우투 카이 타 테크나 카이 판타 호사 에이켄 카이 아포도데나이

개역개정,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새번역,25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우리말성경,25 그런데 그는 빚 갚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은 그 종에게 그 자신과 아내와 자녀와 전 재산을 팔아 갚도록 명령했다.

가톨릭성경,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영어NIV,25 Since he was not able to pay, the master ordered that he and his wife and his children and all that he had be sold to repay the debt.

영어NASB,25 “But since he did not have the means to repay, his lord commanded him to be sold, along with his wife and children and all that he had, and repayment to be made.

영어MSG,25 He couldn’t pay up, so the king ordered the man, along with his wife, children, and goods, to be auctioned off at the slave market.

영어NRSV,25 and, as he could not pay, his lord ordered him to be sold, together with his wife and children and all his possessions, and payment to be made.

헬라어신약Stephanos,25 μη εχοντος δε αυτου αποδουναι εκελευσεν αυτον ο κυριος αυτου πραθηναι και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και τα τεκνα και παντα οσα ειχεν και αποδοθηναι

라틴어Vulgate,25 cum autem non haberet unde redderet iussit eum dominus venundari et uxorem eius et filios et omnia quae habebat et reddi

히브리어Modern,25 ולא היה לו לשלם ויצו אדניו למכר אותו ואת אשתו ואת בניו ואת כל אשר לו וכן ישלם׃

성 경: [마18:25]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할 종도리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페손 운 호 둘로스 프로세퀴네이 아우토 레곤 퀴리에 맠포뒤메손 엪 에모이 카이 판타 소이 아포도소

개역개정,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새번역,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우리말성경,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조금만 참아 주시면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

가톨릭성경,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26 “The servant fell on his knees before him. ‘Be patient with me,’ he begged, ‘and I will pay back everything.’

영어NASB,26 “So the slave fell to the ground and prostrated himself before him, saying,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repay you everything.’

영어MSG,26 “The poor wretch threw himself at the king’s feet and begged, ‘Give me a chance and I’ll pay it all back.’

영어NRSV,26 So the slave fell on his knees before him, saying,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you every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26 πεσων ουν ο δουλος προσεκυνει αυτω λεγων κυριε μακροθυμησον επ εμοι και παντα σοι αποδωσω

라틴어Vulgate,26 procidens autem servus ille orabat eum dicens patientiam habe in me et omnia reddam tibi

히브리어Modern,26 ויפל העבד וישתחו לו לאמר אדני הארך לי אפך ואת כל אשלמה לך׃

성 경: [마18:26]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엎드리어 절하며(*,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와 ‘강한 감정,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랫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스플랑크니스데이스 데 호 퀴리오스 투 둘루 에케이누 아펠뤼센 아우톤 카이 토 다네이온 아페켄 아우토

개역개정,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새번역,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우리말성경,27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가톨릭성경,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영어NIV,27 The servant’s master took pity on him, canceled the debt and let him go.

영어NASB,27 “And the lord of that slave felt compassion and released him and forgave him the debt.

영어MSG,27 Touched by his plea, the king let him off, erasing the debt.

영어NRSV,27 And out of pity for him, the lord of that slave released him and forgave him the debt.

헬라어신약Stephanos,27 σπλαγχνισθεις δε ο κυριος του δουλου εκεινου απελυσεν αυτον και το δανειον αφηκ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27 misertus autem dominus servi illius dimisit eum et debitum dimisit ei

히브리어Modern,27 ויהמו רחמי אדוני העבד ההוא ויפטרהו וישמט לו את החוב׃

성 경: [마18:27]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 11:30-32).

󰃨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빚'(*,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 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엨셀돈 데 호 울로스 에케이노스 휴렌 헤나 톤 쉰둘론 아우투 호스 오페일렌 아우토 헤카톤 데나리아 카이 크라테사스 아우톤 엪니겐 레곤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일레이스

개역개정,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새번역,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우리말성경,28 그러나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을 찾아냈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으며 ‘빚진 돈을 갚아라!’고 말했다.

가톨릭성경,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28 “But when that servant went out, he found one of his fellow servants who owed him a hundred denarii. He grabbed him and began to choke him. ‘Pay back what you owe me!’ he demanded.

영어NASB,28 “But that slave went out and found one of his fellow slaves who owed him a hundred denarii; and he seized him and began to choke him, saying, ‘Pay back what you owe.’

영어MSG,28 “The servant was no sooner out of the room when he came upon one of his fellow servants who owed him ten dollars. He seized him by the throat and demanded, ‘Pay up. Now!’

영어NRSV,28 But that same slave, as he went out, came upon one of his fellow slaves who owed him a hundred denarii; and seizing him by the throat, he said, ‘Pay what you owe.’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ξελθων δε ο δουλος εκεινος ευρεν ενα των συνδουλων αυτου ος ωφειλεν αυτω εκατον δηναρια και κρατησας αυτον επνιγεν λεγων αποδος μοι ο τι οφειλεις

라틴어Vulgate,28 egressus autem servus ille invenit unum de conservis suis qui debebat ei centum denarios et tenens suffocabat eum dicens redde quod debes

히브리어Modern,28 ויצא העבד ההוא מלפניו וימצא אחד מחבריו העבדים והוא חיב לו מאה דינרים ויחזק בו ויחנקהו לאמר שלם את אשר אתה חיב לי׃

성 경: [마18:28]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 빚을 갚으라(*,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페손 운 호 쉰둘로스 아우투 에이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 파레칼레이 아우톤 레곤 마크로뒤메손 엪 에모이 카이 판타 아포도소 소이

개역개정,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새번역,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우리말성경,29 그의 동료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조금만 참아 주게. 내가 다 갚겠네.’

가톨릭성경,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영어NIV,29 “His fellow servant fell to his knees and begged him, ‘Be patient with me, and I will pay you back.’

영어NASB,29 “So his fellow slave fell to the ground and began to plead with him, saying,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repay you.’

영어MSG,29 “The poor wretch threw himself down and begged, ‘Give me a chance and I’ll pay it all back.’

영어NRSV,29 Then his fellow slave fell down and pleaded with him,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9 πεσων ουν ο συνδουλος αυτου εις τους ποδας αυτου παρεκαλει αυτον λεγων μακροθυμησον επ εμοι και παντα αποδωσω σοι

라틴어Vulgate,29 et procidens conservus eius rogabat eum dicens patientiam habe in me et omnia reddam tibi

히브리어Modern,29 ויפל חברו לפני רגליו ויבקש ממנו לאמר הארך לי אפך ואשלמה לך הכל׃

성 경: [마18:29]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엎드리어 간구하여(*,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느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관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전의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호 데 우크 에델렌 알라 아펠돈 에발렌 아우톤 에이스 퓔라켄 헤오스 우 아포도 토 오페일로메논

개역개정,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새번역,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우리말성경,30 그러나 그는 참지 못하고 가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가톨릭성경,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영어NIV,30 “But he refused. Instead, he went off and had the man thrown into prison until he could pay the debt.

영어NASB,30 “But he was unwilling and went and threw him in prison until he should pay back what was owed.

영어MSG,30 But he wouldn’t do it. He had him arrested and put in jail until the debt was paid.

영어NRSV,30 But he refused; then he went and threw him into prison until he would pay the deb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 δε ουκ ηθελεν αλλα απελθων εβαλεν αυτον εις φυλακην εως ου αποδω το οφειλομενον

라틴어Vulgate,30 ille autem noluit sed abiit et misit eum in carcerem donec redderet debitum

히브리어Modern,30 והוא מאן וילך וישליכהו במשמר עד כי ישלם לו את חובו׃

성 경: [마18:3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허락하지 아니하고 – 브장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이돈테스 데 호이 쉰둘로이 아우투 타 게노메나 엘뤼페데산 스포드라 카이 엘돈테스 디에사페산 토 퀴리오 아우톤 판타 타 게노메나

개역개정,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새번역,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우리말성경,31 이 일을 본 다른 동료 종들은 너무 기가 막혀서 주인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가톨릭성경,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영어NIV,31 When the other servants saw what had happened, they were greatly distressed and went and told their master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영어NASB,31 “So when his fellow slaves saw what had happened, they were deeply grieved and came and reported to their lord all that had happened.

영어MSG,31 When the other servants saw this going on, they were outraged and brought a detailed report to the king.

영어NRSV,31 When his fellow slaves saw what had happened, they were greatly distressed, and they went and reported to their lord all that had taken place.

헬라어신약Stephanos,31 ιδοντες δε οι συνδουλοι αυτου τα γενομενα ελυπηθησαν σφοδρα και ελθοντες διεσαφησαν τω κυριω αυτων παντα τα γενομενα

라틴어Vulgate,31 videntes autem conservi eius quae fiebant contristati sunt valde et venerunt et narraverunt domino suo omnia quae facta erant

히브리어Modern,31 וחבריו העבדים ראו את הנעשה ויעצבו מאד ויבאו ויגידו לאדניהם את כל אשר נעשה׃

토테 프로스칼레사메노스 아우톤 호 퀴리오스 아우투 레게이 아우토 둘레 포네레 파산 텐 오페일렌 에케이넨 아페카 소이 에페이 파레칼레사스 메

개역개정,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새번역,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우리말성경,32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서 말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애원하기에 내가 네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가톨릭성경,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영어NIV,32 “Then the master called the servant in. ‘You wicked servant,’ he said, ‘I canceled all that debt of yours because you begged me to.

영어NASB,32 “Then summoning him, his lord said to him, ‘You wicked slave, I forgave you all that debt because you pleaded with me.

영어MSG,32 “The king summoned the man and said, ‘You evil servant! I forgave your entire debt when you begged me for mercy.

영어NRSV,32 Then his lord summoned him and said to him, ‘You wicked slave! I forgave you all that debt because you pleaded with me.

헬라어신약Stephanos,32 τοτε προσκαλεσαμενος αυτον ο κυριος αυτου λεγει αυτω δουλε πονηρε πασαν την οφειλην εκεινην αφηκα σοι επει παρεκαλεσας με

라틴어Vulgate,32 tunc vocavit illum dominus suus et ait illi serve nequam omne debitum dimisi tibi quoniam rogasti me

히브리어Modern,32 ויקרא אליו אדניו ויאמר לו אתה העבד הרע את כל החוב ההוא השמטתי לך יען אשר בקשת ממני׃

성 경: [마18:3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도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 네가 빌기에(*,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우크 에데이 카이 세 엘레에사이 톤 쉰둘론 수 호스 카이 에고 데 엘레에사

개역개정,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새번역,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말성경,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았느냐?’

가톨릭성경,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영어NIV,33 Shouldn’t you have had mercy on your fellow servant just as I had on you?’

영어NASB,33 ‘Should you not also have had mercy on your fellow slave, in the same way that I had mercy on you?’

영어MSG,33 Shouldn’t you be compelled to be merciful to your fellow servant who asked for mercy?’

영어NRSV,33 Should you not have had mercy on your fellow slave, as I had mercy on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3 ουκ εδει και σε ελεησαι τον συνδουλον σου ως και εγω σε ηλεησα

라틴어Vulgate,33 non ergo oportuit et te misereri conservi tui sicut et ego tui misertus sum

히브리어Modern,33 הלא היה לך גם אתה לרחם על העבד חברך כאשר רחמתי אני עליך׃

성 경: [마18:3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불쌍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 (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 마땅치 아니하냐(*,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카이 오르기스데이스 호 퀴리오스 아우투 파레도켄 아우톤 토이스 바사니스타이스 헤오스 후 아포도 판 토 오페일로메논 아우토

개역개정,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새번역,34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우리말성경,34 그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 관리들에게 넘겨주며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뒀다.

가톨릭성경,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영어NIV,34 In anger his master turned him over to the jailers to be tortured, until he should pay back all he owed.

영어NASB,34 “And his lord, moved with anger, handed him over to the torturers until he should repay all that was owed him.

영어MSG,34 The king was furious and put the screws to the man until he paid back his entire debt.

영어NRSV,34 And in anger his lord handed him over to be tortured until he would pay his entire debt.

헬라어신약Stephanos,34 και οργισθεις ο κυριος αυτου παρεδωκεν αυτον τοις βασανισταις εως ου αποδω παν το οφειλομενον αυτω

라틴어Vulgate,34 et iratus dominus eius tradidit eum tortoribus quoadusque redderet universum debitum

히브리어Modern,34 ויקצף אדניו ויסגר אותו למיסרים עד כי ישלם את כל חובו׃

성 경: [마18:3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 그 빚을 다 갚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는 ‘…까지’의 뜻으로, 제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개한 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퓔라크스’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대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

후토스 카이 호 파테르 무 호 에푸라니오스 포이에세이 휘민 에안 메 아페테 헤카스토스 토 아델포 아우투 아포 톤 카르디온 쉬몬 타 파랖토마타 아우톤

개역개정,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새번역,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그, ‘형제’

우리말성경,35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가톨릭성경,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영어NIV,35 “This is how my heavenly Father will treat each of you unless you forgive your brother from your heart.”

영어NASB,35 “My heavenly Father will also do the same to you, if each of you does not forgive his brother from your heart.”

영어MSG,35 And that’s exactly what my Father in heaven is going to do to each one of you who doesn’t forgive unconditionally anyone who asks for mercy.”

영어NRSV,35 So my heavenly Father will also do to every one of you, if you do not forgive your brother or sister from your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35 ουτως και ο πατηρ μου ο επουρανιος ποιησει υμιν εαν μη αφητε εκαστος τω αδελφω αυτου απο των καρδιων υμων τα παραπτωματα αυτων

라틴어Vulgate,35 sic et Pater meus caelestis faciet vobis si non remiseritis unusquisque fratri suo de cordibus vestris

히브리어Modern,35 ככה יעשה לכם גם אבי שבשמים אם לא תסלחו איש איש לאחיו בכל לבבכם את חטאתם׃

728×90

반응형

마태복음 18장

<마태복음 18장 흐름정리>

주님은 겸손과 용서에 대한 교훈을 통해서 천국 시민의 자질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크게 보아서 산상 수훈의 실천적 규례(6~7장)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주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앞으로 남겨질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제자도를 재무장 시키기 위해서 이 같은 말씀을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베푸는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상호 결속을 다지고 나아가 주변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야 했다.

<마태복음 18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겸손하고 순전한 사람이 될 것을 훈계함.

7. 실족케 함을 피하고 어린 아이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명함.

15. 형제가 우리를 실족케 할 때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가르침.

21.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를 가르침.

23. 종들과 회계하려 했던 한 임금에 대한 비유를 말함.

32. 자신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자에 대한 주인의 처벌을 말함.

<마태복음 18장 도움말>

* 1절 : 그 때에.

마태가 기록한 이 가르침은 성전에 세금 바치는 일이 일어났던, 바로 같은 날에 주어진 것이다. 18장 전체 이야기의 제목을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견해와 논쟁들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붙이면 적절할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이야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큰 문제는 열두 제자들의 심각한 성격 차이였다. 이것은 제자들간의 연합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 5절 : 어린아이.

예수는 어린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좋은 성품의 특성과, 오직 그러한 성품만이 크게 여겨지는 하늘나라에서 진실로 “큰” 자들의 특징을 비교하고 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아이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여기서 일차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하늘 왕국에서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 7절 :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즉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낙담시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 14절 :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 3:9)신다. 또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딤전 2:4)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 15절 :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적을 다루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그들을 우리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심판의 날에 셈하는 일이 불가피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22절 :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진정한 용서란 숫자에 제한받지 않으며, 더욱이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시킨 정신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은 어떠한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실물교훈, 251).

* 24절 : 달란트.

무게를 재는 단위와 화폐의 단위. 신약 시대 1 달란트는 약 20.4Kg정도 하였다. 일만 달란트는 은(銀) 213,840킬로그램이며, 18년 동안 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돈이다.

* 28절 : 데나리온.

로마가 발행한 은전. 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력의 값어치다. 그리스의 은화인 드라크마와 거의 같은 액수이다. 백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 100명의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다.

* 35절 : 이와 같이 하시리라.

다른 이들을 책망하거나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그들에게 강요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서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으며 만약 상황이 반전된다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는지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이와 같이 자비를 나타내야만 한다.

제21과: 마태복음 18장

주님께서는 19~20절 에서 사도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학생들에게 20절 에 나오는 약속에 표시해 두라고 제언해도 좋다.)

사도들에게 어떤 권세가 주어졌는가? (구주께서 사도들에게 신권의 열쇠를 주셨으며, 그 열쇠를 통해 그들은 베드로의 지시에 따라 인봉 의식을 집행하고, 죄인을 회원으로 계속 남게 할지 여부를 포함하여 교회에 관하여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권세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마태복음 16:19 참조])

한 학생에게 마태복음 18장 18~20절 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며, 사도들이 어떤 권세를 받았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마태복음 18장 16~17절 에 대한 요약으로, 구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죄를 고백하지 않으며, 따라서 두세 증인을 통해 증언하게 하면, 그 사람이 교회에서 잘려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설명한다. 오늘날, 그러한 결정을 하는 교회 선도 평의회의 감리자들은 한 개인을 교회에서 절단, 즉 파문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하여 항상 주님의 뜻을 구한다고 설명해 줄 수 있다.

이 성구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 학생에게 마태복음 18장 15절 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하고,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생활 속에서 없애라고 권고하신 후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분은 또한 사도들에게 교회 선도의 원리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8장 1~14절 에 대한 요약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낮추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명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분은 또한 어린아이들을 “실족”하게 하거나, 타락으로 이끌거나, 그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6~7절 참조) 그런 후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는 것들, 즉 죄를 범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생활 속에서 없애라고 권고하셨다.( 9절 참조) (주: 마태복음 18장 1~14절 에 나오는 구주의 가르침들은 마가복음 9장 과 누가복음 15장 이 나오는 과에서 더 깊이 다루게 된다.)

학생들에게 마태복음 18장 을 공부하면서, 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진리들을 찾아보라고 한다.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힘든 때에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숙고해 보라고 한다.

칠판에 다음 죄목들을 열거한다. 거짓말을 함, 무언가를 훔침, 친구를 배신함. 학생들에게 1부터 10까지의 등급을 사용해서, 각 죄목에 등급을 매겨 보게 한다. 1등급은 가장 용서하기 쉬운 죄이고, 10등급은 가장 용서하기 힘든 죄를 나타낸다. 자원하는 몇몇 학생에게 각 죄목에 어떤 등급을 매겼는지 말해 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교회를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원리들을 가르치시다

마태복음 18:21~35 주님께서 자비롭지 못한 종의 비유를 전하시다

한 학생에게,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아기를 잃은 한 가족에 관하여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들려준 다음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이미지 “장식장 제조업자인 아버지는 자신의 소중한 아이의 시신을 위해 아름다운 관을 만들었습니다. 우울한 장례일의 날씨는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그 가족이 느꼈던 슬픔을 나타내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관을 옮겼으며, 가족이 뒤따라 예배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소수의 친구들이 그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바쁜 감독이 장례식을 잊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찌할 줄 몰라, 아버지는 관을 팔에 안고 가족들과 함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숨겨진 쐐기”,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20쪽)

여러분이 이 가족의 일원이었다면, 감독이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겠는가?

왜 그 감독을 용서하는 일이 어렵겠는가?

구주께서 사도들을 가르치신 후에, 베도로가 주님께 용서에 관해 여쭈었다고 설명한다. 한 학생에게 마태복음 18장 21절을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베드로의 질문을 찾아보라고 한다.

베드로는 구주께 무엇을 여쭈었는가?

베드로 시대에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세 번 이상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는 점을 설명한다. 베드로는 주님께 일곱 번을 용서해야 하는지를 여쭈면서, 자신이 무척 관대한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Bruce R. McConkie, The Mortal Messiah, 4 vols. [1979–81], 3:91 참조) 학생들에게 마태복음 18장 22절을 조용히 읽으면서, 구주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응답하셨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범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서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함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구주로부터 어떤 진리를 배울 수 있는가?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더라도 다음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죄를 범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명하셨다. )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죄를 범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경전 안내서, “용서”, scriptures.lds.org; 교리와 성약 64:9~11 참조] 용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계속 해를 끼치도록 허용하거나, 그 죄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법적 또는 다른 방법으로 책임을 지지 않아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신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가지 비유를 가르치셨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을 둘씩 짝지어 주고, 각 조에게 마태복음 18장 23~35절을 함께 읽고,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충분히 시간을 준 후, 학생들에게 찾은 것을 발표해 달라고 한다.

학생들이 이 비유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 단어를 칠판에 적는다.

왕 종 동료 종

종은 왕에게 얼마나 빚을 졌는가? (종 아래에 왕에게 10,000달란트를 빚짐이라고 적는다.)

다음 내용을 설명한다. 예수님 시대에 “10,000달란트는 100,000,000데나리온[로마 화폐]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 1데나리온은 평범한 노동자가 일반적으로 받는 하루치 품삯이었다.”(Jay A. Parry and Donald W. Parry, Understanding the Parables of Jesus Christ [2006], 95) 학생들에게 그 종이 이 빚을 갚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기 위해 100,000,000데나리온을 365일로 나누어 보라고 한다.(100,000,000/365 = 273,973) 칠판에 적은 왕에게 10,000달란트를 빚짐 아래에 273,973년이라고 적는다.

동료 종은 그 종에게 얼마를 빚졌는가? (동료 종 아래에 그 종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짐이라고 적는다.)

따라서, 동료 종은 그 종에게 대략 100일치의 품삯, 즉 연봉의 거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돈을 빚진 셈이었다. 칠판에 적은 그 종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짐 아래에 100일이라고 적는다.

그 종이 자신에게 이 빚을 진 동료 종을 용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왕이 그를 악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들에게 이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이 각각 누구를 나타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학생들이 대답하고 나면, 그 대상이 될 만한 이들을 다음과 같이 칠판에 적는다. 왕 = 하나님 아버지, 종 = 우리, 동료 종 =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

구주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제자들에게 어떤 원리를 가르치려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다음과 유사한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이 원리를 칠판에 적는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좀 더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음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학생에게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 회장이 전한, 다음 말씀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가능하면, 각 학생에게 유인물로 제공한다.

이미지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인식하고 알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이렇게 하는 데는 큰 겸손을 필요로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의 감정을 간구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미움이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기’[Orson F. Whitney, Gospel Themes (1914), 144]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용서할 것’[교리와 성약 64:10]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우리에게서 미움과 비통함을 없애 버릴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 비극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개인적인 복수를 구하는 것으로 반응해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정의가 그것을 해결하도록 한 후,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 그 일을 잊고 우리의 마음을 비워 점점 커지는 분노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속죄를 통하여 소중한 평화를 우리 모두에게 주셨지만 이것은 우리가 분노, 악의, 또는 복수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기꺼이 던져 버릴 때에만 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6:13] 심지어는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속죄로 인한 평화와 위안이 오게 됩니다.”(제임스 이 파우스트, “용서가 낳는 치유의 힘”,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69쪽)

파우스트 회장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무엇을 하라고 권고했는가?

파우스트 회장에 따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학생들에게 수업 앞부분에서 들려준 몬슨 회장의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한 학생에게 그 이야기의 결말을 읽어 달라고 한다.

이미지 “그 가족이 낮은 품성을 지녔더라면, 감독을 비난하며 나쁜 감정을 마음에 담아 두었을 것입니다. 나중에야 그 비참했던 상황을 알게 된 감독은 그 가족을 방문하여 사과를 했습니다. 표정에는 아직도 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그 아버지는 사과를 받아들였으며, 둘은 이해의 영으로 서로 포옹을 하였습니다.”(“숨겨진 쐐기”,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20쪽)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죄를 짓거나 잘못을 범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도록 어떻게 여러분을 도와주셨는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수업 공책이나 경전 학습 일지에 적으라고 할지 고려해 본다.)

질문을 하고 적용하도록 권유한다 복음을 가르치는 목적은 학생들이 경전에서 찾은 원리와 교리를 적용하고, 마음을 돌이키며, 충실하고 순종하는 이들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도록 돕는 데 있다. 질문을 하고 적용하도록 권유하면, 학생들이 이런 원리들과 교리들을 현재 상황과 미래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된다.

학생들에게 혹 자신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유한다. 또한 용서할 마음이 생기도록 기도하고 상처와 분노를 사라지게 할 능력을 간구하여서, 그들이 속죄를 통해 화평과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우실 수 있게 하라고 권유한다.

[마태복음 18장 예수님의 말씀]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마 18:1-35)

반응형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용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복음은 주님을 높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와 같은 원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용서할 일이 있다면 용서하면서 살아가라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마 18:1-35)

1-14절, 겸손을 가르치심

[1-3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 . .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쭈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크다’는 원어(메이존)는 ‘더 크다’ 혹은 ‘가장 크다’는 뜻이다(BDAG, KJV, NASB, NIV).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교만, 세상적, 육신적 명예심이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주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빌 2: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많이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교만한 자는 높은 자에게는 아첨하고 낮은 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마 25:31-46) 이 진리를 좀 더 자세하게 증거하셨다. 그는, 그의 형제들, 곧 그의 종들과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며,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며, 또 그의 이름을 가진 소자(小子) 하나의 영접 여부가 영원한 구원과 멸망을 나누며, 의인과 악인, 영생에 이를 자와 영벌에 던지울 자를 나눌 잣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표가 된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영접하며 서로를 섬겨야 한다.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범죄케 하는 것이 큰 죄가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는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경고가? 남을 범죄케 하는 것보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즉 남을 살리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지 남을 범죄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남을 범죄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있다. 우리는 남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바쳐질지언정, 남을 죄 짓게 하는 데 바쳐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단을 가르친다든지, 위선적 말과 행위로 남에게 참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한다든지 술취하고 음란한 풍조를 사회에 조장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우리의 손이나 발, 우리의 눈이 우리를 계속 범죄케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계속 범죄하여 지옥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지 않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불구가 때때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일 수 있다. 건강한 몸으로 죄만 짓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더 복되다.

만일 우리가 불구의 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지백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을 깨닫자.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찍어버려야 했을 지체, 뽑아버려야 했을 지체를 가진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이 아니니이까?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 . . .

주께서는 또, “삼가 이 소자(小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소자’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 아이의 생명이든, 혹 태아의 생명일지라도,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 질서와 직분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것이 어린아이의 인격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절]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전통본문).

전통본문에는 11절에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는 말씀이 있다.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주께서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제자된 우리도 같은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주를 따르는 자들이 어찌 남을 범죄케 하여 그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이가 심각한 신앙적, 도덕적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거절하거나 업신여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고 권면하여 그를 구원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5:3-7의 ‘잃은 양의 비유’와 비슷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는 것이 목자의 심정이요 그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은 매우 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린 한 영혼이라도 우리의 실수로 인해 범죄하게 하고 잃어버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 . . .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 어린아이나 청소년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교회에서 큰 자는 형제를 섬기는 자이다.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했다(롬 12:10).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들은 어린 신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한 영혼, 한 어린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힘쓰자.

15-20절,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전통본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다.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 죄가 말로 우리를 잘못되게 비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돈을 떼어먹는 일일 수도 있다. 교회 생활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사람의 인격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없지 않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께서는 그 대처 방안을 말씀해 주신다.

첫째로,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책망]하라.” 개인적 책망 혹은 충고가 첫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문제를 남에게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이것은 또 우리가 ‘저런 자와는 만날 것도 없어!’ 하고 그를 정죄하고 그와의 교제를 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내포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들고 수고가 든다. 또 잘못하면 마음 상하는 말을 한마디 더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참된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이 내포하는 바이다. 이것이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증참한다’고 번역한 말은 ‘확실케 한다,’ ‘확증케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도록 해야 한다. 신명기 19:15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 . . .

주께서는 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나 회중 앞에서 판단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적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겨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즉 그는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교회 밖에 속한 외인(外人)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는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될 것이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적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을 가리킨다. 이 권징은 비록 땅에서, 즉 지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효력을 가진다.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 . . .

또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21-35절, 용서에 관해 가르치심

[21-22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 . . .

예수께서 형제의 범죄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교훈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에게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23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24-27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 . .

그 임금이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었다.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이었는가? 한 달란트는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6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3억 6천만원이며, 일만 달란트라면 약 3조 6천억원이 된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었다.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였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말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 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주께서 하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것이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 곧 영원한 지옥 형벌이었다.

그 종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말했지만 실상 그 빚이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갚기 어려울 정도의 금액이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와 형벌을 갚는 데 부족할 뿐이었다. 신약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28-30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 . . .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일 품삯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달라. 갚으리다”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떠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31-34절]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 . . .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주인의 말은 정당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신약교인들은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 . . .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교훈을 주셨다. 용서는 우리가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후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엡 4:32).

[역대상 9장 주석 설교말씀] 예루살렘의 원 거주자들(대상 9:1-44)

반응형

천안UBF

마태복음 18장 강해 3부 용서의 원리

마태복음 18장 강해 삼부 용서의 원리 255장

말씀 마태복음 18장 21-마태복음 18장 35

요절 마태복음 18장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의 죄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로 인하여 고통합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들과 관계성이 깨어집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죄를 용서하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받았습니다. 용서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 용서하신 것을 취소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무한한 하나님의 용서)

21,22절을 보십시오.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는 죄를 회개하면 일곱 번 용서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피해를 준 사람에게 미움과 분노가 있습니다. 반면에 용서한 사람은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용서해야 합니다.

당시의 유대교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랍비들보다 마음이 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7번까지 용서하겠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몇 번까지 심방하는가 몇 년까지 기다려야하는가 하는가 하면 양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이런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회개하였을 때 아홉 번이나 반복하여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조금 회개하는 기미만 보이면 용서하십니다. 그가 반복하여 죄를 지을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여주셨습니다.

아합왕은 북한의 김정은 같이 악한 왕입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종을 죽인 자입니다.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사 아합에게 속한 자는 개들이 먹고 새들이 먹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아합은 책망을 듣고 옷을 찢고 금식하고 베로 허리를 동이고 회개하였습니다. 풀이 죽어다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왕상 21:29)

저는 예전에 이 말씀을 보며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마음이 약하신가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용서의 말씀을 보니 정말 하나님은 회개한 자에게 마음이 약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한없이 마음이 약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입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해야합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

예수님이 일흔번씩 일곱 번씩 용서하라고 하신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관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렘17:9) 하나님은 인간이 완전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내가 완전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자기의가 없습니다. 절망도 없어집니다. 은혜로 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운전을 잘못하여서 여기저기 찌그러진 차와 같습니다. 이런 차를 끌고 다니면 또 긁힐까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잘 글러가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찌그러진 차를 끌고 다니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운전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찌그러진 차를 새 차로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로워질 수 있다고 소망을 두십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아무 죄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성경에는 회개하고 개과천선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로 두 번이나 속인자요. 첩을 얻은 자입니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을 한 자입니다. 유다지파의 조상 유다는 며느리와 간음한 자입니다. 성경에 한 명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이라는 노아는 술먹고 발가벗고 아들을 저주한 자입니다. 욥은 병이 들자 하나님을 원망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다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회개를 받으시고 이들을 거룩한 자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용서하신 하나님)

23-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예수님은 한 비유를 통하여 마음으로 용서해 주어야함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달란트 빚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6조원으로 그는 빚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매장이 500개 정도 되는 홈플러스가 7조 이천 억에 매각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홈플러서 다 팔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는 16만 년을 일을 해서 갚아야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종이 되어 몸으로 떼워야 합니다. 주인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가르쳤습니다. 빚진 자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도 다 종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죄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야합니다.

종은 빚을 진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가서 잘못을 인정하고 참아주시면 다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는 죄값을 갚는 자세로 회개하며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주인은 죄인에 대해서 사랑이 불타오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불타오르시는 분이십니다. 주인은 회개하는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탕감했다는 것을 완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완불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다 완불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500개의 매장을 가진 홈플러스를 그냥 준 것과 같습니다. 종은 빚을 탕감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이처럼 죄를 용서받은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는 이제 빚을 갚아주신 주인에게 감사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빚을지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자신을 긍휼히 여겨준 것처럼 이제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주며 살아야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종은 죄사함을 받은 우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일만 달란트입니다. 16만년을 일해서 갚아야 하는 큰 죄입니다. 우리는 죄의 빚으로 지옥에 갈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머리털보다 더 많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선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합니다.

마태 자신이 세리로서 하나님께 많은 빚을 진자였습니다. 그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불에 타 죽을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긍휼을 베풀어서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를 열두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마태는 이런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힘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살았습니다.

(무자비한 인간)

28-30절을 보십시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종이 기뻐서 나갈 때 그는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 빚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60만대 일의 비율입니다. 그는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목을 잡았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그가 친구의 목을 잡고 조였다고 되어있습니다.

동료는 종이 주인에게 한 말과 같이 내게 참으소서 갚으리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동료는 마음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고자 하였습니다. 종은 빚진 자가 이렇게 사정하여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60만원을 주었는데 일원을 상대방에게 주지 않는 겪입니다. 60억 원을 용서받았는데 만원을 용서해주지 않는 격입니다. 그는 주인의 용서를 생각하고 동료에게 그 빚을 탕감해주어야 했습니다. 주인이 용서하신 뜻도 서로 빚을 탕감해주기를 원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사랑을 져버렸습니다. 자신이 임금의 위치에 섰습니다. 그를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인정사정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민감하였습니다. 그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는 용서받은 것에 대해서 잊었습니다. 그는 빚진 자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도 똑같은 죄인인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용서치 않는 자를 아신다)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동료들이 이를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겼습니다. 동료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인에게 아뢰었습니다. 주인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다 들었습니다. 일만달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이 백데리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님 귀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용서치 않는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용서를 취소하신 하나님)

32-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주인은 용서치 않은 자를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그가 뉘우치는 것을 보고 빚을 다 탕감하여 주신 은혜를 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는 불쌍히 여기는 주인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종은 주인이 불쌍히 여김과 같이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노하여 악한 종이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미 탕감하였던 빚을 취소하였습니다. 그가 동료를 옥에 가둔 것같이 주인은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여기서 동료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은 죄는 백데리온처럼 작은 죄입니다. 60만분의 일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용서를 취소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나의 미움이 나를 감옥에 가둡니다. 분노가 병을 만듭니다. 우리의 분노가 우리를 지옥에 가게 합니다.

(형들을 용서한 요셉)

우리가 용서를 하지만 회개를 선포하는 것에는 신중해야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악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기까지 오래참고 기다렸습니다. 회개하기까지는 형들을 간첩으로 몰고 도둑으로 몰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회개시키기 위해서 많은 마음 고생을 하였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울기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는 용서하였지만 곧바로 용서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변화되었을 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상대방이 회개할 때 용서를 선포하는 사랑이 거룩한 사랑이요. 값비싼 사랑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용서를 선포하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용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북한은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습니다. 북한은 연평도를 공격하고 서해해상에서 공격하고 아옹산에서 장관들을 죽이고 칼기를 폭파시켰습니다. 그런데 역대 정부들은 이런 북한의 잘못을 알고도 그냥 용서하여주었습니다. 돈을 많이 퍼주었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으레 그래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돈으로 원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정부는 이번에 지뢰 폭발사건을 통하여 그들의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준전시 상황을 선포하는 중에서도 무박 삼일간 회담을 통하여 그들이 유감이라고 표현하는 말을 받아냈습니다 그들이 이전과 같이 또 그런 잘못을 우리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회개하거든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용서해야하는 이유)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도 이와 같이 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이미 용서하신 것을 취소하십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산술적으로는 60만분의 일이지만 실제는 무한대에 비해 한 자릿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해야 하지만 우리의 죄도 용서해야합니다. 우리는 말로만 용서하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서는 다시는 기억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괴롭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들입니다. 내가 실패한 과거가 나를 답답하게 합니다. 이런 기억이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나를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불법을 하나님이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말씀이 나의 마음에 기쁨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나의 실패한 과거가 지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줄 때 그 사람은 변화되고 이 사회도 변화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죄를 다 기억하면 참으로 나는 구제불능입니다. 죄를 다 생각만 해도 구토증이 날 것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해도 부족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아멘!

(3F)

기독교의 용서에 3F 가 있습니다. “Forgiven, Forgotten Forever”- 용서받았다. 잊혀졌다. 영원히-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용서할 때 ”Forgive, Forget Forever”- 용서하라, 그리고 잊어라, 영원히- 하는 같은 원리로 용서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용서해야합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용서하다는 말은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상대방을 소망 가운데 영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마음에 한맺힌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아직 상대방을 중심으로 용서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공의는 어떻게 되나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용서하는 사랑이 충만키를 기도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내 영혼을 살찌게 하고 교회를 살찌게 하며 성도간의 교제에 깊은 사랑과 신뢰를 더해줍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교회에서 주신 사랑의 법입니다.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18장 강해 삼부 용서의 원리 255장

말씀 마태복음 18장 21-마태복음 18장 35

요절 마태복음 18장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강해 삼부 끝입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마태복음 18장 강해

다음은 Bing에서 마태복음 18장 강해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 홍융희
  • 홍융희목사
  • 성민교회
  • 부산성민교회
  • 하루한장
  • 분홍목사
  • 어린이와 같이
  • 자기를 낮추는 자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
  • 누가 큰 자입니까
  • 어린이주일
  • 어린 아이와 같이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YouTube에서 마태복음 18장 강해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한 장] 마태복음18장_천국에서 큰 자니라 | 마태복음 18장 강해,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나 성영락 교회 장학금 | Ync 나성영락교회 267 개의 베스트 답변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