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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누가복음 66강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신우인 목사)
본문 말씀 : 누가복음 18:1-8
1.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2. 기도의 NWSG 법칙
3. 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수단,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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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세부광명교회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진짜 믿음은 시련과 고난이 왔을 때에도 변함이 없이 주님을 잘 섬긴다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주님의 말씀에 …
Source: lightcebu.org
Date Published: 7/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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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네이버 블로그
바로앞 누가복음 17장 20절 이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뭐든지 떼를 쓰면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시는 때. 종말에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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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Daum 블로그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1-8 오늘 본문말씀인 누가복음 18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모든 …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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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마13:24-30, 36-42)
설교 MP3 다운로드 (right click and save)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마13:24-30, 36-42)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다(살전1:9).
Source: www.churchofjesus.co
Date Published: 4/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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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
고산 등정 때 보통 그러하듯이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여 몇 차례의 캠프를 거친 후에 정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게 되면, 거기까지 함께 갔던 대원들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9/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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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검색 – 다국어 성경 Holy-Bible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0/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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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충성 …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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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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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벨 대통령은 체코의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용감한 지식인으로서 … 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때에 매우 시의적절한 지적입니다.
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3/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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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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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4. 9.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qCq3EwdcxM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요한계시록 13:1~10>
영원한 우방이며,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동맹국들을 향한 트럼프 행정부의 과도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가 지나치다는 여론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일들이 생기니깐 얼마 전까지 사드 문제 때문에 우리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중국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국도 없다는 것이 역사적 현실인 것입니다.
엊그제 페이스 북에 어떤 분이 올린 포스트 중에 우연히 보게 된 문구가 하나 있는데 “풍요 속에서는 친구들이 나를 알게 되고, 역경 속에서는 내가 친구를 알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잠언 19장 4절에서도 지지해 주고 있는데,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이 두 문구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되고, 성공하고, 많은 재물을 갖고 있고, 힘이 있을 때는 나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거나 망하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거나 할 때… 사람들은 나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내 주변에 많던 사람들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곁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친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친구는 역경 속에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예수 믿은 지 10년 됐고 20년 됐다고,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짜 믿음일까요? 그것만 갖고는 잘 구분할 수 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잘되고 풍요로울 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과 고난이 왔을 때에도 변함이 없이 주님을 잘 섬긴다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잘 섬기지만 일이 형통치 않고 어려울 지라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또한 믿음으로 인해 여러 가지 시련과 시험과 고난과 환난 속에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부터 15절 말씀에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금과 은과 보석은 나무와 풀과 짚과는 재료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불과 같은 시험이 왔을 때 나무와 풀과 짚은 완전히 타서 없어지지만, 금과 은과 보석은 그 불을 견뎌내고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금과 은과 보석 같다면 그는 시련 속에서도 그 순수함과 믿음의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풀무불 속에서도 그 믿음의 아름다움을 지켜낸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보면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판타지 소설 이전에 성경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예언서(다니엘, 에스겔, 요한계시록)가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판타지 소설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상징으로 보느냐? 아니면 실제 생물로 보느냐? 하는 것도 학자들 간의 주장이 다르기도 합니다. 또한 예언서의 내용을 억지로 풀고, 억지로 짜 맞추다가 이단과 멸망에 이른 이들도 교회 역사 속에 많이 있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참조. 벧후3:16).
이 구절 역시 신비로운 내용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세계 단일정부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외의 이방나라에서 발생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뿔이 열 개이고 거기에 왕관이 씌어 있는 것은 열 개의 나라를 의미하는데, 그들 머리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단일정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교회를 모독하고, 핍박과 박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짧게는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또는 사탄의 정부 즉 반기독교적이고, 반복음적인 세계단일정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중동지역의 나라들이 하나의 정부를 통해 통제되어 움직이면서 대대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할 것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과 같은 거대 공산국가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으로 보기도 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7절, 8절을 보시면,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세상의 놀라운 권세를 잡은 짐승 곧 세계단일정부는 7년 대환난기에 엄청난 세력을 떨치게 되고, 그 아래에서 교회와 기독교는 박해를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하게도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모독되어 질 것이며, 거대한 불신자 무리들은 그 짐승에게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시면,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그러나 그 대환난기에 믿음으로 인내하며 시련과 핍박과 박해를 견뎌내는 이들은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 해 두시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8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작은 시련에 믿음이 흔들리고, 지금 당장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고 절망하지는 않습니까? 불과 같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서게 된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6.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1절~8절)
이 말씀을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떼쓰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 주신다라고 적용을 한다
그래서 본인의 필요와 요구를
주구장창 악쓰며 기도를 한다
들어 주실 것을 믿으며….
그러나 이 말씀 초반의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될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바로앞 누가복음 17장 20절 이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뭐든지 떼를 쓰면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시는 때
종말에 겪게 될 필연적 고통에 대하여
자신의 백성들이 고통중에 드리는
애절한 기도를 끝내 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에 겪게 될 필연적 고통….
당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았는가?
얼마전 도시가스가 끊어져 며칠동안 불편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하필 그동안 비가 와서
춥기도 하고 습하고 눅눅하고
빨래는 마르지 않아 냄새나고
아이들을 씻기는 것도 어렵고….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그려보았다
전기도 없고
물도 없고
가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생활물자를 생산할 어떤 기반도 없이
그렇게 40년을 광야에서
아이를 낳으며
기르며
200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 까???
만나라는 단한가지 재료로서
음식을 삼아야 했던 그들은
그럼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짓고
절기를 따라 제사를 지내며
광야의 여정을 밟아 나아갔다
어쩌면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택하셨는 지도 모른다
우리라면 그렇게 살 수 있었을 까?
누가 감히
그들에게 목이 곧고 어리석은 백성이라 돌을 던지겠는 가?
그 열악하고 참담한 생활가운데서도
끝내 가나안 땅에 도달한 그들 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기어이 가야한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그렇게 녹녹치 않음을 알아야 한다
”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21장9절~28절)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란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 마태복음 24장 19절 ~22절)
성경 곳곳에 마지막 때의 환난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 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최신식 사운드와 음향시설
최고급 재료로 지어진 교회건물
빵빵하게 틀어지는 에어컨과 히타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
맛있는 식사
잘 짜여진 프로그램
그리고 그것들을 매끄럽게 진행하는 스텝들……
우리가 익숙하여져 있는 교회환경이며
또한 우리의 생활 환경이다
과연 우리가 그 모든 조건들이 없어진 상황에서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믿음 때문에 잡혀가는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워 갈 수 있을 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마태복음24장 7절~10절)
과학으로도 의학으로도
하나님의 계획과 마지막 때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핑크빛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을 까?
우리가 그렇게 힘들여 모으는 재산이
우리의 영혼을 구할 수 있겠으며
우리의 지식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마지막 때의 환난을 감할 수 있겠는 가?
정신차리자
정신 바짝 차리고
성경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피를 토하며 말씀하심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 하셨을 까?
그것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장 29절~36절)
참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기도하여야 할 때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하며
주님의 오심을
두 눈을 부릅뜨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1-8
오늘 본문말씀인 누가복음 18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모든 생활을 다 포기하고 기도에만 몰두하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화내는 등의 삶을 버리고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골방에서 조용한 시간을 따로 내어
기도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분주한 삶 가운데서 늘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매 순간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과 결정과 언행을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훈련이 잘 되면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 제목을 놓고 간구하는 우리가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권면입니다.
유한한 우리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깊고 넓은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계십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모든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당연히 죄와 탐욕을 채우기 위한
그런 잘못된 기도는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기도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적합한 때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따라서 바로 응답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이
싫어서 청원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이렇듯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8절의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믿음은 보시지 않을 것이며,
믿음없는 자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이 구절은 이단들이 잘못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문맥으로 볼 때
당연히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믿음’은
낙심치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너희가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겠느냐?
믿음을 잃지 않으며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너희의 그 모습이 보고 싶구나”
라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성경이나 다른 한국어 번역에서도
“믿음을 보겠느냐”의 의미는
“내가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입니다.
표준새번역
눅 18:8 하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바른성경
눅 18:8 하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이렇듯 우리는 마지막 그 날까지
세상에서 낙심치 말고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 잘 알고는 있습니다만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답없어 보이는
그런 답답한 상황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보자면 답은 기도입니다.
다른 방법 없습니다.
상황에 따른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해서
생각하고 , 말하고 , 결론 내리는 것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먼저 말씀드려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 친히 인도 하시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십니다.
상황에 맞는 지혜로운 대처와 행동과 할말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기도가 말라버리면 우리의 영혼도 말라갑니다.
답은 기도, 즉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과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매번 강조해도 모자란 것입니다.
의외로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시간을 가지지 않는다고 알려주셨습니다 .
가진다고 해도 아주 잠깐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
바쁘고 피곤한 날은 안하기 일쑤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찬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하고 잠은 잡니다 .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사람들에게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육신의 식사이고 잠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인 기도입니다.
찬송과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본질이고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우리의 본질인 영혼이 메말라가고
죽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잠깐 입고 있는
육체가 먹는 밥 한그릇보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이
비교도 안될만큼 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육체가 쇠약해지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기에 육체의 건강함을
지키는 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육체의 건강이 영혼의 건강보다
더욱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육체가 건강해도 영혼이 죽으면
하나님과 끊어지고 영원히 지옥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육체는 죽을지라도
하나님과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안락한 삶도 아닙니다.
바로 회개와 하나님과 나와의 친밀한 교제인
기도와 찬송과 말씀과 거룩한 삶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의 영혼에
영혼의 양식과 새 힘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아무리 곤하고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어도
하나님과의 교제시간을 가집시다.
그것이 없이 하루 이틀만 지나도
영혼이 메마르고 마음이 퍼석퍼석해지고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이 늘어나고
세상적인 방법과 가치관과 생각들이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기가 점점 쉬워집니다.
아주 위험해집니다.
매일 낙심없는 기도와 말씀과 찬송으로
성령충만하여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어야합니다.
이제 나눠드린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합심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십시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아내와 남편을 귀히 여기며 더 나아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기도가 막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의 영혼은 위험해집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눅 22: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도 사랑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와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구원을 받을 자들입니다.
눅 20: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자신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따로 마련하여
골방에서 하나님과 1:1로 만나십시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여
하나님께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여… 주여… 주씨옵소서… 주씨옵소서…”
이렇게 100회를 반복하면
꼭 응답해 주실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기도를 불교의 108배처럼 불손히 여겨선 안됩니다.
또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잘 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하는 것과
목소리의 크기보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참된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외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훗날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살전 5:17-18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생활 가운데서도 늘 기도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순간 순간, 시시때때로, 매 순간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십시다.
신 4:7 상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 같이…
우리의 친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친히 우리를 가까이 해주십니다.
민 11:1-2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랑으로 용서해주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정신을 못 차리면
결국 영원히 멸망합니다.
삼하 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시 66:2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들어주시고 재앙을 그쳐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마음이 괴롭고, 외롭고, 힘들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울고,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솔직히 쏟아내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의 모든 감정을 감당하실 수 있으신
마음이 넓으신 분이며 친히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며 응답해주십니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부와 명예와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목적입니다.
막 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기도밖에 없습니다.
막 11:22-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며,
철저히 회개하고, 죄와 싸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대로 거룩하게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시며,
낙심하지 않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밤이 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에 힘쓰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셨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행 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기도하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죽은 사람도 살려주십니다.
행 28:8-10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의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병도 낫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절대로 기도자 개인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병이 낫는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지 않고 아주 조금 더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단순히 병이 낫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병이 낫는 기적을 통하여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것입니다.
행 10:2-4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고넬료를 비롯한 그의 온 집안이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외모와 신분을 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며, 의를 행하며,
항상 기도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행 12:5-12을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헤롯의 손에서 구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도 구해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잘 아시는 것처럼
염려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죄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십시다.
유 1: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는데 힘쓰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다.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마지막 때의 재앙들에 관해 설명하시면서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미리 말씀해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있어야 할 시대에 사는 성도들입니다.
계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으로 올라갑니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스스로 계신 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기도를 받으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랑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이 썩어가는 죄악이 날로 만연해지는 마지막 때에
아무리 바쁘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늘 깨어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간구하며,
매일 하나님을 찬송하고, 매일 하나님 말씀 읽으며,
마지막 그 날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아래서
세상을 이기시며, 우리 구주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기쁨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수님을 맞이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12.8.12. 주일설교 중
http://cafe.daum.net/holysp1
출처 : 진리의성령교회 원문보기 ▶ 글쓴이 : 윤목사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설교자료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장 1-14절석기현 목사언젠가 ‘월간 조선’에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산악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그 사람이 히말라야의 어떤 매우 어려운 고봉에 도전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산 등정 때 보통 그러하듯이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여 몇 차례의 캠프를 거친 후에 정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게 되면, 거기까지 함께 갔던 대원들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도전하게 되는 그날 아침이었습니다.그 산악인은 자기 후배인 어떤 대원 한 명과 짝을 이루어 등반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그 준비란 것이 아주 간단했습니다.”어이, 나는 카메라 메고 갈 테니까, 넌 뭐 좋아해? 아무거나 너 잘 먹는 것 챙겨.” – 이것이 전부였습니다.8,000미터 급의 고봉을 등정하려는 그 중요한 날 아침에 그 두 등반가 사이의 대화는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정말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고 그저 눈만 마주쳐도 이미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그렇게 출발한 그 두 사람은 등반 도중에 폭설을 만나 눈구덩이 속에서 이틀 밤이나 비박을 하는 등의 초인적인 투쟁 끝에 결국 그 고봉을 정복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은 말보다 먼저 ‘마음이 통하는’ 것이며 ‘사람이 통하는’ 것이라는 원리는 바로 신자의 기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신자가 기도드릴 때 ‘하나님과 먼저 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우리 주님의 오묘한 비유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1. 기도는 소원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본문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선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이것은 ‘자주 기도하라’는 뜻도 되고, 혹은 ‘계속 기도하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너무 귀찮게 굴지 않기 위하여’ 기도 횟수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옛날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드렸으니 그것이 최대한도라고 정해놓고서 매일의 기도 횟수가 그것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물론 이것은 따져볼 가치조차 없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즉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는 “항상” 드려야 하는 것이지 무슨 횟수의 제한 따위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하지만 그처럼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꼭 한 가지 극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왜냐하면 ‘낙망’이야말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대표적으로 겪게 되는 시험이며, ‘항상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기도하는 사람이 도중에 낙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대체로 그것은 기도 응답이 기대했던 것처럼 속히 내리지 않을 때입니다.바로 그런 경우에 낙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인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시고자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즉 오직 자기 생각과 욕심만 철저히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그러니 불쌍한 사람에 대한 어떤 자비심의 발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공정한 재판 그 자체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재판관 치고는 정말 대단한(?) 성품의 소유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그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자주” 찾아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사정했습니다.이것은 어떤 부당한 복수를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그 과부는 그 철저히 이기적인 재판장을 움직일만한 아무 재력도, 연줄도 없는 존재였습니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자주 찾아가서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밖에 없었던 것입니다.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통하게 되었습니다.처음에는 들은 척도 아니하던 그 재판장은 나중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번거로움을 당하는 것이 귀찮고 괴로워서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이어지는 6절 이하 8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6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단지 그 과부의 끈질긴 소청 때문에 그처럼 바늘 끝 하나 들어갈 여지없이 보였던 재판관의 마음도 움직였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앞의 경우는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십니다.또한 앞의 경우는 그 재판관이 눈이라도 깜빡할 이유도 없는 무력한 ‘과부’였지만, 여기서는 ‘그 택하신 자’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당신의 양자들인 것입니다.그런 관계에서 “밤낮 부르짖는” 끊임없는 기도가 올려지고 있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못들은 척하고 얼마나 ‘오래 참으실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셨습니다.물론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예수님께서 장담하시는 대로 반드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덧붙이신 말씀이 정말 의외입니다.”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이것은 바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을 말합니다.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물론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하지만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그러니 사람의 시간대에서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항상 ‘당장’이나 ‘며칠 이내’가 아니라, 몇 주일, 몇 달, 혹은 몇 십 년까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아니 어쩌면 그 ‘속히’라는 것은 “인자가 올 때,” 즉 예수님 재림 때까지 걸릴 수도 있습니다.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하실 때에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이처럼 기도 응답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의 시계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조금 기도해보다가 도중에 쉬 ‘낙망’하는 교인들이 많은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기도하는 믿음 가진 사람을 얼마나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는 자기가 지금 기도드리고 있는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부단하고도 절대적인 신뢰입니다.’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간청을 못 이겨 들어줄 수밖에 없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야 얼마나 더 확실히 응답해주시랴.’라는 철저한 신뢰야말로 신자로 하여금 끝까지 낙망치 아니하고 기도드리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입니다.오직 이 믿음 있는 자만이 ‘항상 기도’할 수 있으며 ‘인자가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그런 식으로 정의해도 충분할 것입니다.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막연히 어떤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나 돌과 나무 앞에서 절하는 모습은 이 세상의 여러 종교들이나 미신에서 가장 흔하고도 공통적인 현상입니다.하지만 기독교의 기도란 것은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왜냐하면 신자의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기도하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짐으로써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하나님과의 이처럼 인격적으로 통하는 것 없이 그저 자기 소원만 가지고 기도하려는 사람은, 그 기도가 자기 뜻대로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아무리 빌어 보았자 별무신통하다고 싶으면 그 다음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앞에도 가보고 부처 앞에도 가보고 무당 앞에도 가보고 끝내는 말 못하는 돌 앞에까지 물을 떠다놓고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자기가 기도드리는 대상과의 내면적 관계라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 일단 자기 기도를 먼저 응답해주면 그 응답해주는 신을 믿겠다는 식인 것입니다.신자의 기도가 그런 유치한 것, 주객전도 격의 미신이 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조건을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그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면서 끝까지 낙심치 않고 항상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2.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하는 것입니다.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서두에 분명히 밝히시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의 기도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그런 기도의 대표자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그의 기도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통 자기 자랑이었습니다.첫 서두에서 딱 한번 “하나님이여”라고 부른 것 외에는, 전부가 다 자기가 얼마나 완벽하게 신앙생활했는가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는 식이었습니다.그는 자기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함을 자랑했습니다.원래 율법에 정해진 의무적인 금식은 일 년에 꼭 한번 대속죄일에 하는 것뿐이었지만,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도 월요일과 목요일을 정해놓고 금식일로 지켜왔다고 자랑했습니다.또 “소득의 십일조” 드림을 자랑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한 십일조 외에도 자기 개인정원에서 나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어김없이 계산해서 바친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훨씬 더 많이 초과달성하는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보고한 것이 그의 기도 내용이었던 것입니다.아니 보고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바로 지금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기도드리고 있는 곁의 한 사람을 지목하여 자기와 비교하면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입니다.이런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것이 전무했습니다.아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만이 그의 청산유수 같은 미사여구의 구구절절에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 반면에 13절과 14절에 기록하기를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이 세리의 기도에는 조금 전의 바리새인의 경우와 같은 유창한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하지만 그는 말 대신 몸으로 이미 기도하고 있었습니다.그는 “멀리 서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전 앞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자신의 부끄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가슴을 치며”라고 했습니다.그 이유란 설명하면 오히려 사족이 될 정도로 명백한 것입니다.실로 이 세리의 자세는 그냥 보아도 정말 백 마디 말보다도 더 정확하게 자기 속에 있는 바를 솔직히 전달해주고 있지 않습니까?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밖에 다른 기도드릴 것이 없었습니다.하지만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는 가장 유창한, 최고로 아름답고도 완벽한 기도였습니다.’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정말이지 이 한 문장보다 더 멋지고 진실한 기도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그 결정적인 이유는 오직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지는,” 즉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인정해주시는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확증해주셨습니다.이처럼 참된 기도는 유창한 말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에서 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나는 말을 잘 못해서 기도 못 하겠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기도는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 세상에서 말 좀 잘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 세상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오히려 그런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정말 듣기 지겹고 가장 역겨워 하실 기도들이 아니겠습니까?하지만 반면에 아예 기도드릴 줄 모르는 교인들, 이런 사람들은 목사가 볼 때에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지만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하겠습니까?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그런데 그 하나님 믿는다는 교인들 중에도 ‘묵묵부답의 자녀’들이 있습니다.조금 전 설교시간에는 분명히 ‘아멘’이라고 했는데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한 마디 소리도 나오지 않는 ‘급성 벙어리 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그런가 하면, 그 통성기도 시간에는 그래도 기도를 하는데, 나머지 엿새 동안에는 하나님께 한 마디도 기도드릴 줄 모르는 ‘주기적 벙어리 교인’들도 많습니다.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소위 ‘자녀’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주셔야 하겠습니까?그저 과묵한 성격 탓이라고 넘겨주셔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점잖은 성격 때문이라고 칭찬해주셔야 하겠습니까?아니면 당신 앞에서 너무 겸손해서 말 못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주셔야 하겠습니까?그 어느 것도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무슨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 자녀라는 자들이 그렇게 아무 반응 없이 앉아 있다면 아버지로서는 어디까지나 기분 나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시겠다고 말씀해주시는데도 그저 유구무언으로 앉아 있는 탕자라면 그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 어떤 감사도, 사랑도, 존경도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그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겸손한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는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 진짜 기도입니다.’감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자세야말로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더욱 완벽한 기도의 서론입니다.’가슴을 치는’ 자세야말로 천만 마디의 말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정확하게 상달되는 진짜 기도의 언어입니다.”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 자신의 입술을 통하여 이 한 마디를 진심으로 고백할 줄만 알면 이미 최고 수준의 기도를 숙달한 신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유창한 말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이처럼 하나님의 눈에 가장 사랑스럽게 보이는 자녀가 되시고 그 앞에서 참된 의인으로 인정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기도 잘한다’라고 할 때, 대개 ‘말 잘하는 기도’를 연상하게 됩니다.하지만 진짜 잘 드리는 기도는 결코 말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기도는 ‘믿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기도 잘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부터가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그러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이렇게 기도드리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걱정하셨습니다.실제로 그런 주님의 염려 그대로 현대교회들은 이런 ‘기도의 믿음’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기도하자’는 것이 의례적인 교회의 표어로 전락되면 끝장입니다.제가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어떤 기도제목을 말씀드리고 매일 기도하자고 부탁드리면, 모든 장로님들은 그 약속한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기도를 각자가 드려야만 합니다.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리라는 믿음은 오직 우리가 함께 기도드리는 가운데서만 통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기도가 안 통하는데, 어떻게 뜻이 통하며, 어떻게 힘이 모아지겠습니까?서로가 하나님과 먼저 통하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목사와 장로가, 목사와 집사가, 목사와 교인이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어떤 어려운 사정이 있는 교인에게 ‘저도 기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목사의 입에서 무슨 공수표처럼 계속 남발되는 인사말로만 끝나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목사가 삯군이요 외식자가 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기도회에 모일 줄은 모르고 주일예배에만 겨우 참석하는, 일주일에 딱 한 시간만 신자 노릇하는 교인들이 늘어갈 때, 그 교회는 반드시 사양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구미의 교회사를 볼 때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며 실로 두려운 경종이 아닙니까?그처럼 목사부터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고 교인들에게 기도의 확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기도의 응답을 해주시겠으며 무슨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교회가 쇠퇴하게 될 때, ‘말씀에 대한 믿음’과 ‘기도에 대한 믿음’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약해지기 쉽겠습니까?그 대답은 분명히 후자입니다.오늘날 서구의 대형교회들의 예배시간에 설교에는 ‘아멘’이라고 화답하면서도 공기도 드릴 때에는 기도하던 목사 혼자만 ‘아멘’하고 끝내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바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걱정하시던 그대로, 교회가 ‘말씀에 대한 믿음’은 남아 있는 것 같아도 ‘기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이미 교회의 쇠퇴는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아무리 주일예배 출석교인 수자가 늘어간다 하더라도 기도회에 모이는 수자가 함께 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코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퇴보하고 있는 교회가 되고 만다는 이 주님의 엄한 경종에 대하여 모든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기도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기도는 하나님에게 자기 ‘소원’을 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뜻’이 서로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기도는 하나님과 ‘언어’가 통하는 것 이상으로 그 ‘인격’이 먼저 통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기도할 줄 모르는 교인이나 기도가 약한 교회는 결국 하나님과 제대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니 퇴보할 수밖에 없고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는 믿음,’ 이 ‘기도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회복하고 지키며 더욱 강력하게 발휘하는 것은 곧 우리 각자의 개인구원 완성과 우리 교회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기도의 능력은 얼마나 조리 있게 자기 소원을 하나님께 잘 아뢸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 마음속에 얼마나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기도의 은혜는 얼마나 막히지 않고 남들 듣기에도 좋은 말들을 이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것과 더러운 것을 얼마나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과 진실하게 통하는 바른 관계를 맺고 기도드림으로써,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깊게 하나님과 영교하며 우리의 기도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고 좋은 것으로 내려주시는 응답의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인자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의 신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일치할 때에만 우리는 구하는 축복을 받을 힘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예언자 요셉과 그의 형 하이람이 가장 좋아했던 “슬픔에 잠긴 나그네”라는 장엄한 노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공연이었습니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너무도 아름답게 공연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대회 동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주님의 영이 저와 함께 하셔서 교회 회원이나 비회원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제가 이 말씀을 겸손히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약 2천 년 전에 구세주께서 하셨던 질문을 하겠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
복음의 첫번째 원리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충성 …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2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란 …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것들을 바라는 것이며 … 예수 그리스도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라는 것을 믿습니다.3
미망인의 신앙
우리가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기만 하면 신앙에 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남편을 잃은 어느 여인입니다. 혼자 남아 아들을 키워야 했던 그녀는 자활의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당시 그 곳에는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식량은 귀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식량이 줄어들면서 그 여인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구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 여인은 마침내 마지막 한 끼를 위한 음식밖에 없는 날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부탁했습니다.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여인은 돌이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이제 그녀는 자신과 아들을 위해 그것으로 마지막 한 끼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앞에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 엘리야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이 예언자가 한 말은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자못 놀라운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미처 말할 틈도 없이 그 사람은 말을 계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녀는 이 예언적인 약속을 들은 후에 신앙을 가지고 엘리야가 시킨 대로 했습니다.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4
오늘날 사람들의 지혜에 따르면 그 예언자의 요구는 부당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과부의 행동은 어리석고 지각 없는 행동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대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하여 결정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즉각적이고도 가장 큰 이익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5 신앙은 어둠을 꿰뚫어 멀리 있는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6
신앙을 행사하지 못함
오늘날 우리는 종종 신앙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가 병이 들면, 현대 의학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 거리도 짧은 시간에 여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500년 전 같으면 거지도 왕자로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된 신앙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7 거듭 묻습니다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절대적인 확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행동과 하나가 될 때 존재합니다. 첫째 신앙, 둘째 행동, 셋째 절대적인 순종, 이 세 가지가 없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모방의 신앙, 즉 약하고 힘 없는 신앙일 뿐입니다. 이 신앙의 조건들을 하나씩 살펴 봅시다.
첫째,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구세주의 못 자국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본 후에야 결국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8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초기 제자들을 칭찬할 때 그 말을 반복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
둘째, 신앙이 변화를 가져오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수동적인 믿음을 능동적인 신앙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힘 닿는 데까지 행동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10기 때문입니다.
1998년에 고든 비 힝클리 대관장님은 이 교회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난 밤 신권 모임에서도 동일한 경고를 표명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집에 질서를 세워야 할 때가 왔다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수입을 다 써가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분들은 빚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 저는 우리 성도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큰 액수의 할부금을 떠안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습니다.”11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예언적인 말씀이 전해졌을 때, 일부 충실한 교회 회원들은 신앙을 북돋우어 예언자의 권고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말씀이 옳다고 믿었지만 겨자씨만한 신앙도 갖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개인과 가족이 재정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셋째, 사람의 신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자연 법칙을 위시하여 그분의 뜻과 일치해야 합니다. 폭풍 속을 나는 참새는 그것을 잘 헤치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지 모르지만, 단순한 자연 법칙은 결국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현명합니까? 종종 세상에서 신앙이라고 일컫는 것은 고작 쉽게 속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인기 있는 것들과 세상적 이론은 열심히 받아들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원한 원리는 거절하거나 믿지도 않고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어리석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행동이 빚어낸 피치 못할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늘의 축복까지 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는 때와 그분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경전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태초부터 인간과 관계를 맺어 오신 것을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 마음의 소망이 경전에 위배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다음, 말일의 예언자들이 영감 받은 가르침으로 주시는 권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깊이 숙고하고 기도하며 영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와서 네 마음 가운데 거할 성령[성신]으로 네 정신과 마음에 말하리라.”12
우리의 신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일치할 때에만 우리는 구하는 축복을 받을 힘을 갖게 됩니다.
권세의 원리
온전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행사한다면, 신앙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권세의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강력한 힘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13졌습니다. 믿음으로 물이 갈라지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악한 자가 잠잠해지고 구원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모든 생활이 근거를 두는 기초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믿는 것 이상이며, 우리는 그에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구세주의 다음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14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15
원리를 가르침
신앙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하늘의 빛과 축복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이해할 것입니다. 영의 일은 오직 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에 신앙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의 일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합니다.16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나타내심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로나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신앙이 없을진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기적을 행하여 보이시지 못하실 것이라. 저들이 신앙을 갖기까지 친히 나타내어 보이지도 아니하시느니라.”17
그러나 역사를 통해, 심지어는 암흑의 시기에도 신앙의 눈을 통해 어둠을 뚫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로나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독한 신앙을 가졌던 자가 많았던지라, 장막으로 가려지지 아니하여 저들의 눈 곧 신앙의 눈은 실체를 보고 기뻐하였으니,”18
우리의 가정은 신앙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조부모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가족과 함께 모이게 되면 적절한 때를 봐서 손주 가운데 몇 명과 일 대 일로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들과 함께 앉아 “어떻게 지내느냐?” “학교 생활은 어떠니?” 등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런 다음, 복음과 제게 너무나 큰 의미를 주는 참된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저는 그들의 신앙과 간증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려 합니다. 불확실한 부분을 알게 되면 이렇게 질문합니다. “할아버지가 주는 목표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런 다음 저는 매일 경전을 읽을 것을 제안하고, 아침 저녁으로 매일 무릎을 꿇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기도드릴 것과 개인 기도 시간을 갖도록 권고합니다. 성찬식에 참석하기를 권고합니다. 항상 자신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지키고, 항상 모임에 참석하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늘 주님의 속삭임에 민감하도록 노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와 같이 손주인 요셉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여덟 살 된 손주가 제 눈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할아버지, 이제 가도 돼요?” 손주가 제 팔에서 달아나고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긴 했나?” 그래 보이는 것은 다음 날 아침 손주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잠깐 이나마 얘기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그들에게 꾸중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갈 경우, 우리는 손자와 손녀들의 신앙이 구세주와 그분의 거룩한 교회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영향력과 간증의 결과로 커 가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련
때로 세상은 어두운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 우리의 신앙은 시련을 겪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늘이 우리를 향해 닫혔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소망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몇 년 전에 제 주위에 있는 것들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전에 있는 글자들을 읽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전구의 품질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며 왜 요즘 회사들은 전처럼 물건을 만들지 못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구를 더 밝은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침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애꿎은 램프와 전등의 디자인만 탓했습니다. 심지어 태양빛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 문제는 방안에 있는 빛이 아니라 제 시력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안과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는 세상이 결코 어두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백내장이 빛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제 나이를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숙련된 전문가의 솜씨를 믿었으며 백내장은 제거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시 밝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시력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이 일은 제게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종종 세상이 어두운 것처럼 보이고, 하늘이 멀어 보일 때, 우리는 어둡게 보이는 진짜 요인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신앙의 결핍인 것은 모르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비난하려 합니다.
즐거워 하십시오. 신앙과 확신을 가지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열심히 구하며 항상 기도하며 믿으라. 만일 올바르게 행하며 너희가 서로 맺은 성약을 기억하면 모든 것이 연합하여 만사 형통하리라.”19고 주님께서는 이 말일에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고대에 살았던 앨마가 말한 바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건져 주실 것이요 마지막 날에 높이 들어 올리시리라.”20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만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때로 우리가 슬픔과 고통과 비통함의 짐을 지고 있을 때, 인내라고 하는 신앙의 시련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그리고 인생이 어둡고 적막할 때, 신앙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21
언젠가 우리는 어둠을 뚫고 온전하게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자비 그리고 사랑을 이해할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교회 회원들이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소망과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 애쓸 때, 2,000년 전에 구세주께서 하신 질문에 대한 답은 힘차게 울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신앙을 보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받드는 사람들 가운데서 신앙을 보실 것입니다. 그분은 신성한 원리대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을 보실 것입니다.”
간증
저는 예언자요, 선견자요, 계시자인 고든 비 힝클리 대관장님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간증합니다. 충만한 복음이 요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영원한 권세인 신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 인류에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영원한 진리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을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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