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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 나무위키:대문

분류 · 일본의 화가 · 일본의 조각가 · 1929년 출생 · 1952년 데뷔 · 마츠모토시 출신 인물 · 도쿄도 명예도민 · 일본 문화공로자 · 일본 문화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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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7/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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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쿠사마의 삶, 작품 세계를 담은 최초의 영화로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 관심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박’을 비롯해 인피니티 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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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dmk.com

Date Published: 4/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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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마 야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쿄토시립 미술 공예학교(현 교토예대) 졸업.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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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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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예술로 다스린 쿠사마 야요이, 그 치유의 호박

과연 쿠사마의 호박 조각, 특히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 설치된 것 같은 거대한 호박 조각은 그가 말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햇빛을 품어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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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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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연대별 대표작품 소개 – Colorful Life

쿠사마 야요이는 시대를 앞서가는 행위예술가였으며 당시 보수적인 성격의 본국인 일본의 예술계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주목받은 현대미술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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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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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92세 할머니가 매일 종이에 점을 찍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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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쿠사마 야요이

  • Author: 이슈텔러 issueT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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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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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쿠사마 아카이브 포스터 /콜론비아츠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이보다도 유니크한 예술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 ‘쿠사마 아카이브’ 전시가 국내 최초 ‘콜론비 아츠 갤러리’에서 열린다. ‘무엇이 쿠사마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들었을까,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기까지 그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콜론비아츠 갤러리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 전을 기획, 온라인 전시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에서는 대표작인 ‘호박’ 등의 조각 작품, 물방울 무늬와 그물 패턴 등의 회화 작업들이 주로 전시되어 왔고 최근 쿠사마의 그림이 23억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시는 이러한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인생의 발자취에 중점을 두고, 어떤 인생의 여정이 지금의 쿠사마를 만들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플루어 쇼’ 오리지널 포스터 /콜론비아츠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는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와 이후 도쿄 세이와 정신병원에 종신 환자로 입원 후 현재까지 병원 근처 신주쿠의 작업실에서 펼쳐 온 삶의 여정을 조망할 수 있는 전시 포스터, 책, 잡지, 사진 등의 오리지널 인쇄물과 컬래버레이션 아트상품, 조각 등의 오브제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콜론비 아츠 갤러리 안선영 대표는 “쿠사마는 세계적인 기업과의 콜라보, 비엔날레, 갤러리 전시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모든 작품들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며, “여러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 모든 수집품도 일관된 색깔과 흐름을 보여 아카이브 자체가 하나의 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술품을 왜 수집하는가’, ‘누가 미술품을 사는가’라는 질문부터 ‘동시대 미술 수집가의 역할’에 대한 다소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 /오드

조각과 설치미술이 주인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의 현대 화가로 회화, 공연, 영화, 패션, 시 소설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 이후에 대두한 현대미술의 경향 중 하나인 개념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페미니즘, 미니멀리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추상표현주의의 일부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이며, 때로는 성적이다. 일본에서 온 예술가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중요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유년기의 쿠사마는 식물 묘목장, 종자 농장을 소유한 상인 부모님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호박 그림을 즐겨 그렸고 가끔 환상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 당시 그리고 만든 작품은 이후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쿠사마는 그림이나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서둘러 그린 후 치워버리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가 순종적인 주부의 역할을 하길 바랬으며 쿠사마는 어머니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생각했다. 또 아버지에 대해서는 ‘밖에서 여자들과 많이 노는 타입’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어머니가 자신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바람을 염탐하도록 시켰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일종의 ‘성’이 평생의 경멸하는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그는 특히 남근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나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항상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 누구와도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섹스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내 안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암울한 어린 시절은 자연히 그의 예술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점은 영감이자 예술이다,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flickr

쿠사마는 10살 때 ‘섬광, 오오라, 혹은 점으로 울창한 들판’이라 묘사했던 환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환상 속에는 쿠사마에게 말을 건네던 꽃, 그가 예술가로써 살아가는 과정, 영원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자기망각’등이 포함되어 있다. 꽃밭에 서 있던 쿠사마는 끝없는 점들로 이루어진 들판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환상을 겪었으며 그의 예술은 그가 환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족과 자신의 마음 속으로부터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집 근처 강가를 덮고 있던 매끄럽고 하얀 돌에 매료되었으며 그가 봤던 돌들이 점(dot)에 대한 지속적인 집착을 낳았으며, 또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끼친 영향이라 말한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 공장으로 가 일본 군인들을 위한 낙하산을 바느질하고 조립하는 일을 하다 제2차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그는 공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가끔 이야기하며, 공급 경보가 매일 울리고 대낮에 미국 전투기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사춘기는 ‘닫힌 어둠 속’ 이었다 회고한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은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시기 즈음, 그는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자유에 대한 개념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1948년 교토 시립 예술 공예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서양 문화를 배격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쿠사마는 천 년 전의 전통 일본 기술과 재료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일본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스타일에 실망했던 쿠사마는 1950년대 마츠모토, 도쿄에서 연달아 자신만의 그림 전시회를 열며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경향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쿠사마는 주로 종이에 수채화 또는 기름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벽, 바닥, 캔버스에도 그리다가 나중에는 집안의 물건, 나신의 어시스턴트까지 대상을 확대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폴카 도트, 즉 물방울 무늬를 동원해 작품을 만들었다.

수많은 점의 향연, 인피니티 네트 /flickr

그의 거대한 물방울 점, ‘인피니티 네트 Infinity Nets’는 그의 환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인 ‘인피니트 네트’는 환상을 암시하는 일련의 네트와 점으로 뒤덮인 모습이다. 그는 그림에 온통 점을 더함으로써 자신과 작품 자체를 더 큰 우주로 끌어당기고, 우주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의 지구는 우주에 있는 백만개의 별 중 하나인 물방울일 뿐이다. 폴카 도트(물방울 무늬)는 무한대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다. 폴카 도트로 자연과 우리의 몸을 지우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라고 전했다.

쿠사마의 ‘플라워’ 설치 전시물 /flickr

1954년, ‘Flower’란 작품을 소개하며 쿠사마가 언급한 코멘트는 인상적이다. “하루는 식탁에 있는 식탁보의 붉은 꽃 패턴을 보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똑같은 무늬가 천장, 창문, 벽을 덮었고 급기야 방 안, 내 몸과 우주를 덮었다. 나는 마치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 속에서 회전하며 곧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겁이 났다. 나는 빨간 꽃의 마법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내 밑에 있는 계단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곧 나는 발목을 잡혀 계단에서 떨어졌다”

도쿄와 프랑스를 거쳐, 쿠사마는 27세가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숨막히는 가정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의 대표 여성 작가인 조지아 오키프에게 ‘화가의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란 편지를 보냈고 조지아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나라에서 예술가는 먹고 살기 어렵다’ 라며 쿠사마에게 일종의 경고를 했지만, 그와 더불어 조지아는 쿠사마에게 미국으로 와 누구에게든지 당신의 작품을 보여주라는 충고를 한다.

당시 쿠사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일본에서 미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쿠사마는 일본 사회가 너무 작고, 비굴하며, 봉건적이고, 여성을 경멸하는 사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며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화가 난 쿠사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의 많은 작품들을 파기했고, 기모노에 지폐 달러를 덜렁덜렁 꿰맨 채 태평양을 건넜다. 쿠사마는 곧 시애틀로 이사해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의 전시 /flickr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뉴욕 미술계는 많은 여성 딜러들조차 여성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꺼릴 정도로 남성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로 활약했으며 무정부주의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에게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사마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남성 작가들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기성 미술계에서는 외면을 받았지만 그는 전략적으로 그의 후원자들을 만나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61년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미술가 도널드 저드, 조각가 에바 헤세가 있는 건물로 옮겼고 에바 헤세와는 친한 친구가 된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독특한 단발 가발과 화려한 패션을 한 채 대중 앞에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Infinity Mirrored Room /flickr

I’m Here, but Nothing /flickr

그는 그의 ‘인피니티 룸 Infinity room’ 작업을 계속했다. 많은 거울이 정렬된 특별 제작된 방 안에는 다양한 높이에 매달린 수십개의 네온컬러 볼이 있다. 관람객들은 거울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을 반복적으로 보며 끝이 없는, 무한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쿠사마의 ‘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I’m Here, but Nothing’ 전시는 간단한 가구가 있는 방 벽에 수백 개의 네온 물방울 점이 빛나고 있다. 이것은 자신과 방 안의 모든 것이 지워지며, 무한한 공간이 생기는 착각이 드는 결과를 낳는다.

Accumulations /flickr

반복되는 형태에 대한 쿠사마의 관심은 어수선한 캔버스와 사물을 특징으로 하며, 그의 작품 ‘집적 Accumulations’으로 표현된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우편 스티커, 계란 상자 등을 이용해 마치 혹과 같은 형태로 행과 열을 만들어 배열했다. 나중에는 남근으로 장식된 기성품 조각을 만들며 이 시리즈는 절정에 달한다. 많은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이 남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그의 페미니즘적 경향이 보인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쿠사마의 작품을 연구해 온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는 ‘만약 대다수의 여성이 자신의 주관성을 부인하며 지배에 복종하는 구조가 있었다면 쿠사마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쿠사마의 남근을 이용한 작품들은 남성 지배적인 세계에 대한 억압의 진술처럼 보인다. ‘집적’은 그의 과거, 초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혼란, 남근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공황을 반영한다. 이 작품은 팔리진 않았지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그의 특별한 성격과 성향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6년까지 쿠사마는 거울, 조명, 여러 설비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재정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설상가상 이 당시 쿠사마는 과로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많은 남성 예술가들은 그의 이 창의적인 시도를 모방했다. 루카스 사마라스, 앤디 워홀 등의 백인 남성 예술가들은 쿠사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작품을 만들었고, 이 남성 예술가들은 유명해졌다.

Peep Show /flickr

1966년 쿠사마는 획기적인 전시인 핍쇼(Peep Show)를 개최했는데, 핍쇼는 관람객이 머리를 내밀 수 있는 내향 거울로 만들어진 8각형의 방으로 관객들이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설치물로써는 처음 하는 시도였다. 이것은 쿠사마가 계속 탐구해 온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예술 방향을 바꾼 루카스 사마사르는 훨씬 더 권위 있는 갤러리에서 자신의 거울에 비친 설치물을 전시했다. 물론 쿠사마의 핍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쿠사마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마땅히 벌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돈도 이 작가들만큼 벌 수 없었다. 한때 배신과 좌절감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쿠사마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쿠사마는 센트럴 파크, 브루클린 브릿지 같은 눈에 띄는 곳에서 종종 나신으로 나타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그 일례로, 그는 리처드 닉슨에게 베트남 전쟁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신과 섹스를 하게 될 것이라며 공개 편지를 쓰기도 했다.

현재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 전시 중인 Narcissus Garden /flickr

196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쿠사마는 1,500여개의 미러볼을 행사장 정원에 허락없이 설치하기도 했다.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이라 불리는 이 퍼포먼스 아트에서 그는 허영심의 상징인 미러볼을 저렴한 아이스크림 값마냥 단돈 2달러에 팔았다. 고가의 미술품만 상대했던 당시 비대중적인 예술계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쿠사마의 작품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많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을 시행하기도 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의미로 나체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뉴욕 신문에 실린 그의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그가 자신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며 관심을 끈다고 비판했다. 점점 더 낙담하던 그는 1973년, 다시 일본에 돌아와 강제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의 우울증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는 본능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소설, 시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으며, 그의 작업실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종종 ‘예술이 아니었다면 난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라 밝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여러 편의 소설, 시집, 자서전 등을 출간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가 뉴욕을 떠난 동안 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예술가로써 잊혀진 존재였지만 그에 관한 많은 회고전이 그를 다시 세상에 떠오르게끔 해 주었다.

쿠사마 야요이의 분신과도 다름 없는 호박 /flickr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관이 성공을 거둔 데 이어 검은색 점 무늬로 장식한 그의 대표 작품인 ‘노란 호박 Great Gigantic Pumpkin’을 만든다. 이 호박은 그에게 일종의 분신이며 자화상 그 자체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호박이 좋다. 그 유머러스한 모양과 따뜻한 느낌, 그리고 인간과 같은 특성 때문이다. 나는 호박의 그런 인상을 표현하고 싶어 호박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호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Infinity Mirror room /flickr

그는 예술가로써 끊임없이 일했다. 2012년 전시회에서는 여러 개의 아크릴 캔버스 작품들을 전시했고, ‘인피니티 미러 룸 Infinity Mirror room’의 무한한 공간을 탐험하는 것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거울로 정렬된 정육면체 모양의 방과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조명이 깜박인다. 이 형태는 삶과 죽음을 의미했다. 쿠사마는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이 환경, 이 방을 자신의 오랜 꿈의 표현으로 보았다. ‘유리를 통과한 앨리스처럼 나 쿠사마는 환상과 자유의 세계를 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후 하이네 온스타드 박물관, 노르웨이 현대미술관, 스웨덴의 현대미술관, 핀란드의 헬싱키 미술관을 돌며 100개 이상의 작품과 대규모 미러 룸 설치 관객들을 맞이했다. 1960년대 쿠사마의 실험적인 패션 디자인을 발표한 것을 포함해 만든 이후 대중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초기 작품 몇 개도 같이 선보였다. 2017년에는 도쿄에 야요이 박물관을 개관해 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Walking Piece /OTA FINE ARTS, TOKYOYAYOI KUSAMA STUDIO INC.

18개의 컬러 슬라이드로 연속된 이미지인 ‘워킹 피스 Walking Piece’에서 쿠사마는 기모노를 입고 우산을 든 채 뉴욕 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기모노는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서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한 관념이자 성역할 같은 것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검은색이고, 겉만 흰색으로 칠했을 뿐 가짜 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쿠사마는 미지의 탐험을 하며 사람들이 없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는 이유 없이 울다가, 걸으면서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퍼포먼스는 아시아계 미국 여성들이 끊임없이 직면하는 고정 관념들을 포함한다. 쿠사마는 세계 최대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분류해 보는 부조리를 보여줌으로써 백인 미국 관객들이 그를 분류하며 보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그는 뉴욕 회색의 텅 빈 거리를 걸으며 이민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했다.

예술로 증명하는 자신의 존재, 쿠사마 야요이가 존경받는 이유

Infinity Net White No28 /Christie’s.

최근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매출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발표한 ‘2021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상반기 결산’과 ‘낙찰총액 상위 5순위 작가별 KYS미술품가격지수 분석결과’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낙찰 총액은 약 121억원으로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이미 세계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 낙찰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쿠사마의 ‘무한 그물(White No28)’은 2014년 71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한 바 있다.

최근 그의 작품 세계를 그린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가 개봉 중이다. 쿠사마의 삶, 작품 세계를 담은 최초의 영화로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 관심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박’을 비롯해 인피니티 네트, 인피니티 미러 룸과 더불어 초기 회화 조각품, 설치미술까지 그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오드

특히 그의 목소리로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아티스트가 되기까지의 여러 일화를 직접 듣는 것도 별미일 것이다. 힘겨운 삶을 예술로 마음껏 표현하며 치유하려 노력했던 그는 30년간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단지 예술이 좋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한다. 그저 죽을 때까지 예술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열정으로 하여금 한없는 존경을 받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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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쿄토시립 미술 공예학교(현 교토예대) 졸업.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출생, 1957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일본으로 돌아온 야요이는 나이 48세부터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에 구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일본관에 초대일본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004년 도쿄모리 미술관에서 KUSAMA TRIX 전을 오픈하였다. 시드니 비엔날레(2000), 타이페이 비엔날레(1998) 등 다수의 대형 국제전시를 비롯, 총 100여 회의 단체전 및 100여 회의 개인전을 오픈하였다. 문학활동으로는 20여권의 시집 및 소설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생애 [ 편집 ]

어린시절 [ 편집 ]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나 자란 쿠사마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1926년 히로히토 국왕의 왕위 계승, 1931년 만주 침공 그리고 당시의 불길한 전운 모두가 구사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소녀 시절을 전쟁 상황 속에서 보냈으며, 실제로 군수 공장에서 낙하산 재봉 일을 하기도 했다.[1] 그녀의 상태를 병이라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등 야요이의 어린시절은 자신의 상태를 이해받지 못한 채 깊은 상처 속에 지나가게 되었다. 일본의 부유한 가정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열 살무렵부터 심한 착란증상을 보였다. 환영을 보기 시작하며 발작과 착란에 시달렸으나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이 부족한 탓’이라며 체벌을 가했다.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고 강박증에 시달리던 구사마는 어린시절 치유받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작가시절 [ 편집 ]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물방울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자신의 환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하던 그녀는 1952년 23세 때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호 박사는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후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개의 물방울 무늬 오브제를 깔아놓는다. ‘개당 2달러!’였던 쿠사마의 사인이 적힌 수많은 물방울은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장을 받게한다..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정신병을 예술로 다스린 쿠사마 야요이, 그 치유의 호박

쿠사마 야요이는 1972년까지 뉴욕에 머물렀다. 미술작품 창작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출간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패션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와 함께 학자와 예술가들이 서구 남성 중심주의에 본격적으로 반발하면서 비서구권 여성인 그는 더 쉽게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남성 중심주의는 여전히 견고했기 때문에 뉴욕 예술의 주류에 속하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에 친한 친구 예술가의 죽음, 심신의 과로 등이 겹치면서 쿠사마 야요이는 자칫하면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리겠다고 느꼈다. 그는 그래서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로지 작업과 정신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거주지를 정하고 병원 앞에 ‘쿠사마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두 곳을 오가며 지금까지 왕성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인정 받아 1993년에는 일본을 대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현재 가장 이름 있는 생존 작가 중 한 명이다. 런던-베를린 기반 현대미술 리서치 사이트인 아트팩츠넷(ArtFacts.Net)의 2017년 세계 미술가 랭킹에서 현재 34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트팩츠는 미술관·비엔날레 전시 이력과 아트페어·경매 결과를 종합해 미술가의 명성 순위를 측정하는데 2017년 현재 1위는 앤디 워홀, 2위는 파블로 피카소다.

이렇게 쿠사마 야요이는 결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의 야심찬 결의를 그대로 실현시켰다. 그리고 거기에는 쿠사마 특유의 천재성이 있었다. 그 천재성은 ‘미침’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미침을 스스로 다스리고 승화하며 자신의 내적 경험을 창조적으로 시각화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해내는 성실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쿠사마 야요이 연대별 대표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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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을 한번쯤 들어보셨나요? 현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현대미술 아티스트로서 그 작품들이 고가에 거래되면서 화제가 되며 가끔씩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이름입니다. 오늘은 쿠사마 야요이의 연대별 대표작품과 그의 예술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1. 유년기

쿠사마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의 유복한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납니다. 어릴때부터 정신적인 병으로 인하여 꽃에게 말을 걸거나 본인의 목소리가 개 소리로 들리는 등 환상과 환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두려움을 잠재우는 수단이 되었고 어릴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경쇠약 증이라던가 강박증이었다던지의 추측이 많습니다만 어린시절 아버지의 가정에 대한 태만과 그로 인하여어머니의 히스테릭으로 학대를 받았고 이에 의한 정신질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무제 1939년 작

오늘날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에서 상징성을 나타내는 물방울은 그 환각을 통해 보였던 물방울 모양을 표현한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어린시절 그녀가 그린 그림에는 반점같은 물방울이 화면을 뒤덮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2. 초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학창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해 그림실력이 높이 평가받아 교토시립의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다만 세밀한 묘사 등 정형화된 미술화법을 가르치는 교육에 질려 학교에 잘 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 무렵 49년 이후부터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화를 그만두고 감정이나 느낌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추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좌) 잔몽 1949년 작 (우) 태양 1953년 작

1952년 마츠모토시 제일공민관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이 개인전에서 신슈대학의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니시마루 요카타씨가 참석하게 되고 그 후 학회에 쿠사마야요이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등 그녀가 미술 평론가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첫 개인전을 개최한 후 미술평론가의 지지를 얻어 도쿄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여 주목을 끌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55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 18회 국제 수채화 비엔날레에 일본대표로 참석하게 되고 이 전시를 본 시애틀의 한 미술관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57년에는 첫 해외 개인전이 개최되었습니다.

3. 뉴욕에서의 전성기

이듬해인 58년부터는 유럽을 대신하여 예술의 중심지가 된 뉴욕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미국에서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지만 조각가인 도널드 저지나 영상작가인 조지프 코넬 등을 알게되어 서서히 조각작품이나 설치미술을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쿠사마 야요이와 조지프 코넬과는 72년 조지프가 사망할때까지 연인이자 파트너로서 함께 생활합니다.

뉴욕에서의 쿠사마 야요이 Infiniti Nets Yellow 1960년작 The Man 1963년작

검은 바탕을 두른 거대한 캔버스에 작은 호를 여러개 그려 2M, 4M 가량의 화면을 가득채워 완성한 작품이 대표작인 무한한 그물 Infinity net 입니다. 무한한 공간을 표현한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물방울이나 그물모양의 표현방식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현지의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은 후 미국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게 됩니다.

무한한 거울의 방 1965년작

나르시스의 정원 1966년 작 자기해소 1967년 작

이 시기에는 새로운 표현방식의 일환으로 평면적인 회화 뿐만 아니라 입체 작품에도 도전하게 됩니다. 의자나 테이블, 식기에 이르기까지 흰 패브릭을 설치해 덮은 작품으로 소프트 스컬프처라고도 불리는 오늘날 유명한 입체예술 섬유예술의 표현방법 중 하나입니다. 65년에는 방의 사방을 거울로 둘러싸고 바닥 일면을 소프트 스컬프처로 채운 설치미술을 발표하여 무한한 세계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쿠사마 해프닝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평화나 사랑을 호소하는 반전운동이 미국에서 큰 사회현상이 되고 있던 67년경부터 쿠사마는 독자적인 전위예술 퍼포먼스인 ‘해프닝’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벌거벗은 남녀가 춤을 추는 가운데 그 몸에 물방울을 그리는 퍼포먼스입니다. 이는 생명의 원자 중 하나를 뜻하는 물방울을 그리면서 인체도 자연도 원자의 하나로 돌아가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자기가 소멸되어 우주로 돌아간다는 새로운 표현이었습니다.

4. 다시 일본으로

1973년에는 오랜 연인과 아버지가 잇달아 사망하고 쿠사마 야요이 본인의 원래 앓고 있던 정신적 질병까지 겹쳐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며 안정되지 않는 시기가 계속되고 ‘해프닝’이라는 전위예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일본국내의 비판에 의하여 귀국 후에는 그다지 큰 활동을 하지 않고 조금씩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자살한 나 1977년 작

다만 이 시기에는 문학창작활동을 계속하여 78년에는 맨해튼 자살미수 상습범이라는 작품을 발표합니다. 이후 쿠사마 야요이는 99년까지 14권의 소설을 출간하였으며 그 중 크리스토퍼 남창굴은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창작 부문에서도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았습니다.

회화부문에서는 일본 귀국 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게 된 것이 판화작품인데 물방울에 줄선 그녀의 대표작인 호박 등의 모티브의 작품도 이때부터 많이 그려지게 됩니다.

5. 다시 예술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다.

잊혀지는 듯 하던 쿠사마 야요이가 다시 세계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1989년 뉴욕에 새롭게 설립된 국제 현대 미술센터의 오프닝전으로 쿠사마야요이 회고전이 그것입니다. 또한 무한한 그물이 전후 미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귀중한 작품임이 실증되어 다시한번 작가로서 평가받아 주목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93년 국제 미술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일본 대표작가로 선택되어 이 미술전에서 첫 일본인 여성작가로서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98년에는 로스엔젤레스, 뉴욕, 도쿄 등 개인전을 순회하면서 다시 미술의 최전선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Infinity Nets 1990년 작 호박 1999년 작

6. 우리의 영원한 영혼

2009년부터는 ‘우리의 영원한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대형회화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2017년까지 500점 가까이 제작된 회화 시리즈는 압도적인 예술로서의 패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영혼은 쿠사마 야요이 예술의 집대성이며 계속되는 창작활동은 향후 쿠사마야요이 표현활동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좌) 나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 2015년 작 (우) 사랑의 행방 2014년 작 (좌) 마음 2015년 작 (우) 나에게 사랑을 더해서 2015년 작

쿠사마 야요이는 시대를 앞서가는 행위예술가였으며 당시 보수적인 성격의 본국인 일본의 예술계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주목받은 현대미술가였습니다. 일찍이 1960년대 미국에서 반전,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쿠사마 해프닝”이라는 전위예술로 큰 예술적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쿠사마 해프닝은 남녀 나체의 몸에 그녀의 상징이기도 한 물방울 무늬를 그려넣거나 페인트를 뿌리는 행위예술로 게재제한이 있어 포스팅할 수 없지만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www.phaidon.com/agenda/art/articles/2016/march/21/did-yayoi-kusama-conduct-the-first-gay-wedding/

그녀는 90세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정력적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미국 TIME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어릴때부터 가지고 있던 정신질환의 일종인 환영과 강박을 예술로 풀어냈던 예술가로써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어 앞으로의 활동이 여전히 기대되는 쿠사마 야요이입니다.

https://prunnnn.com/20

https://prunnnn.com/22

https://prunnnn.com/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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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노란 호박에 수많은 검은색 점이 그려져 있는 이 작품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로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쿠사마 야요이’하면 떠오르는 이 작품은 <호박>이다. 그녀는 항상 호박의 모티프는 ‘자신’이며, ‘자아’라고 한다. 그녀에게 호박은 어린시절 교감하던 자연을 상징하고, 순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박은 그녀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고 말한다.

작품 <호박>을 포함한 쿠사마 야요이의 많은 작품에는 그녀만의 아픔과 괴로움이 담겨있는데, 이는 그녀가 앓고 있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어린시절 집안 사업을 책임지는 어머니의 지속적인 폭력, 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인한 불우한 가정사와 전쟁이 일어나는 불안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10살 때 심각한 정신 착란 증상을 처음 겪게 되었다. 다음은 그 당시 그녀가 남긴 글이다.

“어느 날 나는 테이블보에 새겨진 붉은 꽃무늬를 보고 있었는데, 그 무늬들이 훨훨 날아 온방을 채우고, 내 육체와 우주를 가득 채우는 환상과 둥근 물방울 무늬가 공중을 떠다니다가 저에게 붙는 환각을 경험했어요.” – 쿠사마 야요이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질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시절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질환을 가진 채 성장했다. 23살에 그녀는 나가노 대학의 교수인 니시 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니시 마루 시호 박사는 환영으로 나타나는 물방울 모양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업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 이후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물방울 모양을 미술적 소재로 삼아 작품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으로서 예술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시절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의 강박관념적인 정신질환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뉴욕활동 초기 시절 제작한 <작품 No.F>이다. 멀리서 보면 섬세한 단색조로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캔버스를 가득채우고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하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유기적 결합을 통해 존재하다는 의미로 끝없는 그물망을 만든다. 그녀의 강박관념을 표현한 이 미니멀리즘 작품은 이후 그녀의 작가적 모티프를 형성하게 된다.

<무한의 거울 방> 시리즈는 작품 안에서 감상을 하면 무한성을 느낄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울 속에서 반복과, 그 속에 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는 작품이다. 쿠사마 야요이는 작품을 하면서 내 삶의 표면, 내 강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이어갔지만, 오브제와 캔버스는 한계가 있었고, 이후 무한에 대한 표현으로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쿠사마 야요이가 느끼는 환영과 환각의 반복과 무한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어, 그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이름은 <소멸의 방>이다. 하얀색의 빈 방에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스티커를 부여해서 방 안에 아무곳에나 붙이게 하고, 이렇게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서 최초의 방이 점차 소멸해가는 참여예술이다. 예술 작품을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는 미술관의 절대적인 규칙을 허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시작해 점차 물방울 무늬의 스티커가 증식해가는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질환의 증상이다. 관람객이 이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그 시간만큼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적 환영에 같이 시달리면서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

쿠사마 야요이에게 ‘작품’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의 예술 활동이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시달려온 정신질환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강박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다. 그녀가 겪는 헛것이 보이는 기괴한 환각과 학대를 당했던 아픔, 개인적인 집착과 강박관념은 완전히 치료되지 못하는 그녀의 정신질환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경쟁력이다.

현재 그녀는 1977년 뉴욕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 내에 쿠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그녀의 삶에서 보여지는 예술에 대한 애정과 끈기는 지금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 2030세대 현대인에게 더욱 큰 위로와 극복 에너지로 돌아오게 되며서 작품의 매력을 더 부각시키는 기능으로 순화한다고 생각한다.

올해만 29억→36억→54억….쿠사마 야요이 작품 ‘이유있는 질주’

viewer 서울옥션이 시작가 54억원에 선보인 쿠사마 야요이의 1981년작 ‘호박’ /사진제공=서울옥션

viewer 사진 설명

viewer 추정가 13억~20억원에 출품된 쿠사마 야요이의 1989년작 ‘Dots Universe’. /사진제공=서울옥션

viewer 24일 열리는 케이옥션 경매에 추정가 1억2,000만~1억5,000만원에 나온 쿠사마 야요이의 ‘붉은 호박’ /사진제공=케이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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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는 23일 개최하는 윈터세일에 일본의 현대미술가 쿠사마 야요이(92)의 1981년작 ‘호박’을 출품한다. 시작가는 54억원. 올 들어 지금까지 국내 경매에서 거래된 최고가 작품이 42억 원에 팔린 마르크 샤갈의 ‘생 폴의 정원’이니, 낙찰된다면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쿠사마는 올해 한국 미술경매 시장을 이끄는 ‘대장주’ 중 하나다. 지난달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2015년작 ‘골드 스카이 네츠(Gold Sky Nets)’가 36억5,000만 원에 팔렸다. 앞서 7월 경매에서는 2016년작 ‘인피니티-네트(WFTO)’가 31억 원, 6월에는 ‘실버 네트(BTRUX)’가 29억 원에 낙찰되는 등 10월 말 현재까지 국내 경매에서만 약 266억원 어치가 거래됐다. 작가별 낙찰 총액은 이우환(약 350억 원)에 이어 2위다.‘호박’이라는 아이콘과 ‘물방울’ ‘그물’ 등 반복적 문양으로 유명한 쿠사마의 작품은 왜 이토록 높은 인기를 누리며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것일까.단일한 색조로 화면 전체를 뒤덮는 모노크롬(Monochrome)은 한때 서구 화단의 주류를 이룬 경향인데, 쿠사마는 이를 자신만의 반복적인 패턴을 이용해 일종의 추상표현주의로 펼쳐내 동서양 전체의 고른 공감을 얻었다. 프랑스 ‘아트 프라이스’지의 분석에 따르면 쿠사마 작품은 홍콩에서 50%, 그 외 아시아 지역에서 30%, 런던·뉴욕 등 서구 시장에서 20%가 판매되는 등 세계적으로 고른 수요를 보인다. 환금성과 투자 가치에 있어 안정적이라는 의미다. 최근 글로벌 아트마켓이 여성과 흑인, 제3세계 예술가로 눈 돌리는 것도 가격 상승 요인 중 하나다.1929년 일본 태생의 쿠사마는 폭압적인 부모 밑에서 행복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 10살 무렵부터 강박신경증과 환각·환청에 시달린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 미술이었다. 그에게 ‘무한 반복’은 자아의 제거와 소멸을 뜻하는 동시에 영원성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붉은 꽃무늬 식탁보에서 환각이 시작됐다는 쿠사마는 개인사의 고통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가이기도 하다. 특히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에서 선보인 거울 방 속 호박들이 무한히 자기복제를 하는 작품은 그의 국제적 명성에 날개를 달았다. 1994년 일본 나오시마에 설치된 대형 ‘노란 호박’과 2012년 루이뷔통과의 협업, 지난 4월 뉴욕 보태니컬가든에서 열린 야외 조각전 등으로 인지도는 날로 치솟았다.이번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 쿠사마의 ‘호박’은 작가가 본격적으로 호박 연작을 시작하던 초기작이라 희소성이 높다. 쿠사마 작품은 구작(舊作)일수록 가격이 높은 편이다. 그간 가장 비싸게 낙찰된 작품은 2019년 4월 소더비 홍콩경매에서 팔린 1959년작 ‘끝없는 그물(INTERMINABLE NET) #4’로 가격은 795만 달러, 당시 환율로 약 90억3,000만원이었다. 판화가격도 상승세다. 24일 열리는 케이옥션 경매에는 50개 에디션의 ‘호박’이 추정가 1억5,000만~2억원, 120개 에디션의 ‘붉은 호박’이 1억2,000만~1억5,000만원에 출품됐다.국내에서는 ‘슈퍼 컬렉터’의 견인에 따른 ‘낙수효과’도 작품값을 끌어올렸다.‘수학 1타강사’ 현우진 씨 등 큰 손 컬렉터의 관심이 쿠사마에게 쏠리면서 시장 전반의 ‘자극제’가 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미술시장 전문가는 “한두 명의 슈퍼 컬렉터가 쏟는 집중적인 관심이 작품값을 끌어올린 사례로 앤디 워홀, 장 미셀 바스키아 등이 있다”면서 “좋은 컬렉터 한 사람의 영향력이 다른 컬렉터는 물론 대중 저변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긍정적 연쇄반응을 일으킨다”고 분석했다.

91세 ‘땡땡이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코로나19 이기자”

10살 무렵에 물방울무늬와 그물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나이 만 91세. 여전히 무한 반복하는 ‘땡땡이’ 무늬로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 패션, 퍼포먼스 등을 넘나들며 작업해온 그는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박과 환영 등 자신의 정신질환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양식을 구축해온 쿠사마 야요이 얘기다.

“끔찍한 괴물과 싸워야 하는 때

오래 기다려온 우주의 빛 비치길

이미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감사”

전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야요이가 세계인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고 그의 속해 있는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와 빅토리아 미로(Victoria Miro)가 15일(현지시간) 전했다. 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글에서 야요이는 작금의 상황을 가리켜 “우리의 불행과 맞서 싸우고 극복해야 하며” “끔찍한 괴물과 싸워야 하는” 때라고 말했다.

야요이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반짝거려도, 나는 희망을 통해 빛나기를 우리의 길을 비추기를 기도한다/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거대한 우주의 빛/ 이제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면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됐으니/신들은 우리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희망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이어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또 각자의 이야기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위해/그리고 우리 영혼을 위해 사랑의 찬송가를 찾아야 할 때”라며 “이 역사적인 위협 속에서, 잠깐 번득인 빛이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 이 찬란한 미래의 노래를 즐겁게 부르자”고 썼다. 또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의 깊은 사랑과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때, 평화를 가져와야 할 때”라며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코로나19에게 나는 이 지구에서 사라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To COVID-19 that stands in our way/I say Disappear from this earth//We shall fight/We shall fight this terrible monster/Now is the time for people all over the world to stand up/My deep gratitude goes to all those who are already fighting./Revolutionist of the world by the Art/From Yayoi Kusama”(쿠사마 야요이의 메시지 중에서)

쿠사마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2014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그의 60년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이 열린 바 있다.

땡땡이와 그물, 그리고 불안신경증

끝없이 반복되는 땡땡이와 그물 등 작품에 등장하는 패턴은 그가 앓고 있는 불안신경증, 강박과 편집증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곤혹스러운 병이 원인”이라며 “똑같은 영상이 자꾸 밀려오는 공포”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작품 창작이 자신에게 강박과 환각을 치유하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난 야요이는 교토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에서 활동했다. 이후 정신질환이 심해져 73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 48세부터 현재까지 정신병원 앞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에 초대 일본 대표로 참여해 특유의 검정 땡땡이 무늬의 노란 호박을 설치미술로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2004년 개인전 52만명 관람

1994년부터 야외 조형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현재 그의 노란 호박 조각은 나오시마 섬에도 호박 조각이 설치돼 있다. 이어 그물망 회화와 호박 연작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LA카운티미술관을 비롯해 뉴욕 휘트니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고, 2004년 도쿄 머리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선 총 52만명의 관람객의 끌어모아 화제를 모았다. 2017년 도쿄 신주쿠에 5층 규모의 ‘쿠사마 야요이 미술관’을 열었다.

현재 미국 뉴욕의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와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등 쟁쟁한 화랑이 그를 전속작가로 두고 작품을 관리하고 있다. 한편 미술전문 매체인 아트&옥션 등은 쿠사마 야요이를 ‘최근 10년간 가장 작품값이 많이 오른 여성작가’로 선정한 바 있다.

이은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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