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종교 개혁 | 존 칼빈의 생애 | 가장 강력한 기독교 지도자 | 종교개혁 이야기 191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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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목회자요 신학자요 개혁가 입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를 세계적인 개혁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성직자로서 다음엔 법률가로서, 그리고 인문주의 학자로서 최상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와 이러한 교육은 개신교를 체계화하고 그것을 성도들의 삶의 적용시키는게 기여했습니다. 루터가 용기있게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던 개척자라면, 칼빈은 개신교의 교리들을 한데 묶어 체계를 이룩한 심오한 사상가였습니다.
칼빈의 하나님을 위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적극적이고 열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조그마한 비리나 어두움도 허락하지 않는 과감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단적 사상, 불경건하고 불순한 것들을 털끝만치도 허용하지 않은 그의 용단이 때로는 독재자라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본질적인 측면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과 충성심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더불어 고난받고 희생하는 데에 철저하게 자신을 ‘드림’의 정신은 그의 내면 속에서는 철저한 비움과 순결함으로 응집되어 나타납니다.
칼빈의 생애는 역경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개혁가로서 선봉에 나섰을 때 숱한 쫓김과 핍박 속에 숨어지내야 했고, 말년에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 할 정도로 극심한 병으로 신음해야 했습니다. 편두통과 사일열, 폐렴, 좌골신경통, 통풍, 치질, 위장병, 담결석 등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여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뒤늦게 결혼하여 5년만에 얻은 아들을 곧바로 잃게 되었고, 난산 끝에 아내는 4년 정도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던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자기를 비워내는 영성생활이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칼빈과 같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도들 중 한 분인 존 칼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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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인물탐방 칼빈 편 | 진짜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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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칼빈 종교 개혁

  • Author: 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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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rQV8baZI6o

종교개혁 인물탐방 칼빈 편

칼빈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더불어 가장 명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고 국내에 출판된 책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블로그에서 지도를 함께 보면서 그의 삶을 가볍게 따라가보는 것도 나름의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출생 및 공부

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장 칼뱅, 장 깔뱅과 같은 이름들 중에서 어떤 것을 쓰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존 칼빈이라고 하겠습니다. 칼빈은 프랑스 파리의 북쪽에 있는 지역인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프랑스식 이름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죠.

칼빈의 아버지는 나름 중산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주교의 비서이자 참사회 감독관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칼빈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와는 달리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제로 만들고 싶었했기 때문에 12살 때 칼빈은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5년 정도 후에 칼빈의 아버지는 생각을 바꾸고 칼빈을 오를레앙에서 법을 공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칼빈은 인문주의를 접하고 빠져들게 됩니다.

오를레앙과 이후 부르주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칼빈은 그리스어와 분석적 사고와 논증을 통해 설득하는 방법들을 습득했습니다. 칼빈은 논증에 있어서 자신의 논점을 확신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래서 심지어 별명이 “목적격(the accusative case)” 별명도 참 이었다고 합니다.

칼빈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의 아버지가 1531년 죽음을 맞게 되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칩니다. 그리고 1532년에 다시 부르주로 가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책을 출판합니다.

종교개혁에 합류

칼빈의 회심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회심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공부를 하던 시기에 인문주의의 영향도 받고 또한 칼빈 본인이 성경과 교부들을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분위기가 악화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1528년 과격한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파리에 있는 마리아와 아기의 형상에 있는 아기의 머리를 자르고 마리아상 덮개를 짓밟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에 관대한 편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이때부터 루터파에 대한 강경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과격한 파괴 방식은 루터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1534년에는 가톨릭의 미사에 대해 비판하는 벽보가 프랑스 전역에 붙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필이면 왕의 침실문에도 그 벽보를 붙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보이는 사람 36명을 화형시켜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종교개혁에 적대적인 분위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칼빈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과격파들을 싫어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이러한 이유로 칼빈이 쓴 첫 신학작품이 로마 가톨릭이 아닌 재세례파에 대한 반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무튼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칼빈의 신변도 위태로워졌습니다. 1533년에 파리 대학의 새 총장이 된 니콜라 콥은 루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고 그 때문에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칼빈도 관원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게 되죠.

1535년에 칼빈은 바젤로 피신을 하는데 이곳에서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초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프랑수아 1세에게 이 책을 헌정합니다. 사실 프랑수아 1세도 위에 언급한 안 좋은 일들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아지긴 했지만 교회의 개혁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무엇보다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과격하고 위험한 이단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책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초판은 9개월만에 매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여러차례 중보되어 1560년에 최종판이 나오게 됩니다.

제네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지적인 논증 능력도 탁월했고 학문적 저술 능력도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적성에도 맞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이 학문과 저술에 소명이 있다고 여겼죠. 그랬기에 칼빈은 조용한 곳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라는 지역으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칼빈은 잠시 몰래 파리로 돌아갔었고 그곳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면 전쟁의 위험으로 인해서 제네바를 우회해서 가야했습니다. 그때가 1536년이었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이미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죠.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던 사람은 기욤 파렐이었는데 그는 종교개혁을 함께 이끌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그래서 곧바로 칼빈을 찾아간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말합니다. 당연히 칼빈은 자신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놔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을 하게 되고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의도치 않게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됩니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된 것이죠. 지금은 제네바는 국제적인 도시이고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여담이지만 전 제네바에 가면 Le Relais de l’Entrecote라는 레스토랑을 가보고 싶더군요. 프랑스에도 지점이 좀 있는 이 사실이 맛을 보장해준다는 스테이크집입니다. 메인메뉴는 스테이크 단 하나라는 사실도 뭔가 맛집의 냄새가 나긴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녀와서 블로그에 후기를 남겨놨더군요.

아무튼 마치 억지로 제네바에 남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해서 칼빈이 사역을 대충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제네바에서 남아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여겼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는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이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게을리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결코 수월할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제네바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은 원했기는 했지만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이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칼빈과 파렐이 철저하게 개혁을 진행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반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칼빈이 범죄자들이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결국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칼빈과 파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당시 취리히에 있던 불링거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쫓겨나는 것이 확정되고 칼빈은 원래 목적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됩니다.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에 가게 된 칼빈은 원래 생각했던 대로 조용히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는 마틴 부처에게 붙들려 프랑스 난민교회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사역은 제네바와 비교할 때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스트라스부르는 지금도 매우 아름다운 도시로서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으면서 마틴 부처에게 신학과 목회사역의 방향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며 종교개혁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칼빈의 친구들이 그를 결혼시키기를 원했고 결국 두 아이가 있는 과부였던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하게 됩니다. 칼빈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또한 어려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칼빈 부부의 아들은 태어난지 두 주만에 세상을 떠났고 칼빈의 부인 이들레트도 1549년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죠. 이런 일들이 칼빈을 힘들게 했습니다.

제네바 복귀 및 개혁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을 한지 몇년이 되지 않아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됩니다. 칼빈이 추방된 뒤 제네바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 기회를 틈타서 가톨릭 주교인 사톨레토 같은 사람이 제네바를 다시 가톨릭 진영으로 되돌리려고 편지를 보내는 등 애를 썼습니다. 결국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에게 사톨레트의 글에 대한 반박을 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칼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물론 칼빈은 선뜻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파렐과 부처의 설득으로 인해 제네바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네바로 복귀한 칼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 복귀했을 때 그가 설교를 통해 이전에 자기를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쫓겨날 때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부분을 이어서 강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칼빈이 어떤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죠.

칼빈은 냉정한 독재자라는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여건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제네바의 시민조차 아니었기에 그는 투표권도 없었고 당연히 세속적인 공직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아무튼 칼빈은 이렇게 제네바로 돌아와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하게 됩니다.

칼빈은 아무 생각 없이 제네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교회법을 만들어서 제시했고 겸손해진 상황이었던 제네바 시의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교회법에서 칼빈은 교회의 사역 직분을 목사, 교사(doctors), 장로, 집사들의 4가지 직분으로 나눕니다. 칼빈의 관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랬기에 칼빈은 올바른 목양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몇몇 목사들과 12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컨시스토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교회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 컨시스토리는 매주 목요일 만나서 일을 수행했습니다.

쉽지 않은 개혁

물론 그뒤로도 제네바에서의 사역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철저한 개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네바 사람들은 프랑스 등 각종 지역에서 제네바로 몰려온 수많은 난민들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는데 이 악감정은 피난민 출신인 칼빈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빈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가 설교할 때 일부러 기침을 하거나 의자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식의 치사한 방법으로 설교를 방해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칼빈마저도 자신의 사역이 거의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에 주눅들어서 물러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반전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1555년 제네바에서의 선거에서 칼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의원에 뽑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에 반발한 반칼빈파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피신해서 칼빈을 적대하던 사람들이 뿌리가 뽑히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덕분에 이때부터 칼빈은 원했던 일들을 더 힘있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칼빈이 한창 힘든 상황이었을 때 벌어진 사건이 바로 세르베투스 사건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자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 가톨릭과 종교개혁 진영 모두에게 이단이었습니다. 그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위기에 몰려있을 때 몸을 피해서 제네바로 왔는데, 체포된 이후 오히려 담대하게 칼빈을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칼빈이 처형을 당하게 되면 재산을 몰수하라는 제안마저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칼빈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검사로 세우고 세르베투스를 사형시키게 되죠.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칼빈은 두고두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칼빈은 의회에 관대한 사형 방법을 요구하기도 했고 세르베투스를 설득하려고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칼빈은 사형선고에 영향을 미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윤리 기준으로는 칼빈이 확고하게 사형을 반대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칼빈의 상황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칼빈이 감당한 일들

아무튼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칼빈은 종교개혁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 있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고 당시 뿐만이 아니라 이후 시대에도 서구 시민사회의 원리를 세우는 것이나 공교육과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철학에도 영향을 주는 등 많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평소에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했고 격주로 매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매주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3시간씩 투자했고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목사로서 나그네들을 돌보고 사람들을 견책하는 일들도 했습니다. 목요일에는 성도들의 훈육을 위한 컨시스토리에 참여해서 그 회의를 이끌었으며 금요일에는 목사회(the congregation)라는 이름의 성경 연구 컨퍼런스를 이끌었습니다. 설교를 하지 않는 주의 주중이라고 여유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통해 제네바로 온 피난민들을 가르치고 권고했으며 각지에서 박해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탄원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경 주석도 저술해서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주석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을 다루었고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쉽고 간결명료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정말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죠.

그뿐만이 아니라 칼빈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프랑스의 지하 교회들과 접촉하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나 다른 지역의 개신교를 따르는 통치자들에게 조언도 하고, 난민들을 훈련시켰으며, 선교사들도 파송해서 남아메리카에도 선교사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59년에는 목회자들을 기르기 위해서 대학과 아카데미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목회자 칼빈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했지만 무엇보다 칼빈은 목회자였습니다. 칼빈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교회의 목사로 여겼고 자신의 최고의 의무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칼빈은 성경을 해설하고 적용하는 것을 최고의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로손(Lawson)은 칼빈을 설교단을 자신의 사역의 심장이라고 여기는 성경의 해설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칼빈은 성경 외에는 다른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칼빈은 매일 성경을 설교했으며, 설교의 능력 아래에서 제네바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제내바의 시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것에 대해 변화됨으로써, 존 녹스가 훗날 말한 것처럼 이 도시는 복음이 유럽의 남은 지역과 영국과 신세계로 뻗어나가는 시발점인 새로운 예루살렘이 되었다.”

또한 로손에 의하면 칼빈이 설교할 때 우선적으로 전하는 대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상은 위대한 이 신학자의 명성과 능력에 가장 덜 감흥을 받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칼빈은 그 대상에게 가장 강력하게 설교했고 그가 쉽게 마음을 닫게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굴까요? 바로 칼빈 자신이었습니다. 즉 목회자로서 칼빈은 설교할 때 항상 자신을 염두에 두고 설교한 것이죠. 이것은 모든 목회자들이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날들

많은 일들을 감당했지만 사실 그것들을 다 해내기에 칼빈은 몸이 너무 약했습니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했고 하루에 한 끼를 아주 조금만 먹었다고 합니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더 소식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칼빈이 활동하기가 조금 편해졌던 시점인 1555년부터 그의 건강은 오히려 급격히 안 좋아지게 되어서 관절염, 담석으로 인한 통증, 치질, 신장염, 신장 결석, 통풍, 담 등 정말 안 아픈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64년에 삶을 마치게 됩니다. 원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의 사람이었던 칼빈은 죽을 때에도 자신을 평범한 묘지에 묻어서 무덤에 표시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자신이 원했던 길이 아니었고 자신의 기질상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음에도 칼빈은 이렇게 전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주변의 방해와 공격, 그리고 몸의 약함을 안고서도 말이죠.

칼빈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제 영국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추구한 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S. J. Lawson, The Expository Genius of John Calvin

F. L. Cross & E. A. Livingstone (Eds.), I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이정숙, “제네바 컨시스토리”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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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지성 중심의 자율적 인식론을 강하게 배격했으며 지성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임을 강조했다. 바른성경적 인식론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서 지성을 도구로 삼는 것이지 결코지성에서 출발해서 그 지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칼빈은 경고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아퀴나스와는 달리 죄의 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 of sin)을 강조한다. 죄의 영향을 받은 지성은 스스로 자율성, 중립성, 독립성 등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성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힘입어 된 것이므로(행 17:28), 칼빈은 그 인식론적 행위의 순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이성의 도구성(instrumentality)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가능하게 하는 근본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율적 이성을 비판한 것이다. 칼빈의 인식론은 한마디로 성경을 그 중심에 놓고 그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상적 혹은 신학적 방법론들을 동원하는 구조라고 하겠다. 이러한 칼빈의인식론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사상에 도전할수 있는 동기와 이유를 제공했다.

Calvin strongly opposes to the autonomous epistemology centering around human reason. And he emphasizes that to know God as the ground of intellect is the true knowledge of man. For Calvin, the Biblical epistemology starts with God and uses human knowledge as an instrument, not starts with reason and judges Him with it. Unlike Aquinas, Calvin emphasize the noetic effect of sin in an affirmative way. The intellect affected by sin can’t be autonomous, neutral, or independent by itself, rather must be dependent upon the order of God. Since all human activities, including intellect, become possible in God(Acts 17:28), Calvin claims that at the moment of epistemological activity of man, he must acknowledge the epistemological possibility by God. Calvin never denied the instrumentality of reason, but declined the autonomous reason denying its ground. In sum, the epistemology of Calvin centers around the Scriptures and asks for all kinds of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methods as complementary. This kind of epistemology of Calvin was clear enough to oppose to the theology and thoughts of Roman Catholic church and solid enough to provide the motive and reason for the opposition.

스위스 종교개혁(존 칼빈)

스위스의 종교개혁

(존 칼빈)

칼빈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다른 외래어에서 보듯이 다양하다. 존 칼빈, 요한 칼빈, 쟝 깔뱅, 요하네스 칼비누스(라틴어표기의 우리말 음역)등이 있다. 칼빈은 종교개혁 제 2세대 사람으로서 프랑스 파리 북동쪽 노용에서 태어났으나 종교개혁운동은 스위스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제 2세대는 1세대보다 조직신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조직신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가톨릭의 비판에 대해 자신들을 보호할 복음적 신학의 기본개념들을 제시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사상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청교도를 중심으로 구체화되어진 후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 체계화의 기틀을 놓았다.

1.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1536년 초반 노용에서 기독교 강요라는 소논문을 출판한 그는 슈트라부르크에 정착하여 개인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지만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찰스5세에 의해 일어난 전쟁으로 노용에서 슈트라부르크에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통과하는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제네바 시는 파렐과 캘빈의 종교개혁이 쟁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칼빈이 그 도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요청하였고 칼빈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그는 제네바에서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어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재세례파의 공개 도전과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였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제네바 시에서 신앙훈련의 견고한 기초를 마련하려는 그의 시도는 저항에 부딪쳐 축출되어 1538년에 슈트라부르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기독교 강요를 새롭게 손질하여 출판하였으며 1539년 최초의 주석 ‘로마서‘를 내어놓았다. 여기서 독일의 멜랑톤과 슈트라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와의 우정을 통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슈트라부르크의 3년은 목회적이나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완전한 성숙기를 가져다주었다. 이곳에서 프랑스 난민들은 칼빈의 목회 전반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람된 열정을 쏟으며 목회 일에 전념하였다.

칼빈이 없는 동안 종교적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었으나 1540년 파렐에 동조하는 인물들이 다시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1540년 10월22일 시의회는 칼빈에게 다시 복귀를 원하는 초청장을 보내었다. 칼빈이 정중히 거절하자 1541년 2월 다시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541년 9월13일 33세의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제네바의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시켜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이겨나갔다. 종교개혁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이 기간은 개신교의 칼빈(1509-1564)과 가톨릭의 로욜라(1491-1556)에 의해서 주도된 때였다.

칼빈은 제네바 시 목회 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자, 교육가로, 저자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칼빈의 종교개혁 목적과 동기

칼빈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개혁이었다. 바른 목회가 이루어지는 교회로서 그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행사되며 성령의 역사가 구체화되어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인식되어지는 교회를 추구하였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존귀와 성령의 역사, 복음의순수성과 바른 교회를 위해서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적 목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였다. 이 땅위의 교회가 상처받지 않는 온전한 교회이길 노력하였다. 칼빈의 전 생애의 목적은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고 더욱 밝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에 목적이 있었다.

제네바는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오히려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하여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며 범법자들을 회개시켜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었다. 엄중한 죄를 지은 자는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 출교를 명하고 회개했을 때 다시 회복시켜주었다. 특히 목회자들을 성경지식과 품행에 대한 심사 교인들의 교화능력여부를 시혐을 통해서 분석한 후 목회자로 내세웠다.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다.

3. 칼빈 신학의 사상

칼빈 신학의 요점은 하나님 중심사상이다. 특성은 하나님 주권과 영광,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은혜, 유일무이한 규범으로서의 오직성경,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내적조명, 목회 적 전인적 신학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칼빈의 이 5대추구가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둥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성령의 능력을 강조한 칼빈은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 불변한 전적 확신과 큰 순종 가운데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 중심사상은 하나님 절대주권에 입각할 때 삶 전체가 신앙이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기독교적 삶에 근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성취의 최고의 목표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며 그분의 왕권에 겸손히 순종한다. 칼빈의 체계 속에서 앞장 서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사고에 대한 그의 강조였다.

하나님의 주권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사람과 사건에 미치며 하나님의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초임을 나타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세계의 목적이며 유일한 근원이시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 속에서만 인간사회나 개인행동이 바르게 정돈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모든 삶에서 실존적 참여가 요구되는 신학이며 삶을 함께 이야기하는 신학이다.

4. 칼빈의 신학의 영향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중심이었다. 성경신학자였던 칼빈은 문자적 역사적 방법론을 자신의 성경해석학적 방법론으로 가져왔다. 성경 해석은 칼빈의 주석에서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키르리안, 오리겐,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바실리우스, 닛시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등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특히 어거스틴에게서 자유의지, 성찬이해, 예정교리 등에 영향을 받고 있다. 칼빈의 성경해석은 독창적 이라기보다는 어거스틴을 위시한 앞선 교부들의 해석에 빈번하게 도움을 받고 있어 전통적 해석에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주의를 배격하면서도 버나드를 빈번히 인용하고 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성경번역을 종종 그대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루터는 내적 경험에서 은혜와 믿음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반면 칼빈은 우선적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고 여기서부터 그의 모든 신학 행위는 출발하고 있다. 칼빈은 루터를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는 그를 향해 탁월한 그리스도의 사도, 복음의 전령, 하나님의 선지자 등으로 불렀는데 그렇다고 루터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칼빈에게서 발견되는 루터의 저작들로는 교회의 바벨론 적 포로(1520) 기독교인의 자유(1520) 대 교리 문답(1529) 소 교리 문답(1529) 등이 있다. 루터와 비교할 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학사상은 성찬론, 예정론, 교회 직분론 등이다.

칼빈은 루터보다 한 세대 후에 태어나 활동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루터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 결론이 날 때까지 신학적 문제들을 예리한 지성과 담대함으로 추적하였으며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자신의 사상을 따라 형성하려 하였다. 그 결과 칼빈은 개신교(Protestantismus)의 정체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5. 칼빈의 일대기

칼빈의 연대표(1509-1564)

유년시절과 교육(1509-1536) 1509.7.10 칼빈은 교육법률 자문관이었던 게라르 코벵의 아들로 노용에서 태어남 1523-1527 철학, 인문주의, 유명론 그리고 교부학과같은 기초교육을 파리에서 받음 그는신학을 했으나 성직 소명에 회의를 느끼고 신앙의 문제에도 회의를 느꼈다. 1527-1528 석사학위 취득과 그 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르레앙으로 감 1531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파리로 돌아왔다. 1531-1533 파리 대학에서 인문주의적인 연구를 하였다. 히브리어 헬라어에 박학한 인문주의자였다. 법학박사 학위 취득 1533.8-1534.5 교회의 본래적 순결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명을 느끼는 종교경험을 하게 되는 급격한 회심으로 로마가톨릭과 결별함 1533.11.1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그의 마5:3을 주제로 취임연설문을 작성해주었다, 소르본느에서 이 연설을 이단으로 제소하였고 파리로부터 그의 고향 노용으로 도주하였다. 그의 고향에서 12세 때 받은 가톨릭 성직소명 특혜를 포기하게 되었을 때 종교적 박해의 위험을 받게되어 바젤로 피신한다. 1534.10 슈트라부르크를 지나 바젤로 갔다. 이때에 연구에 몰두하여 개혁의 지식을 얻었다. 1534-1536 바젤에 가는 동안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고 1월에 바젤에 도착 1536.8(27세) 기독교 강요(그리스도교 경건의 신앙심 학습법으로 개신교를 대표하는 조직신학 작품이 됨)의 초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수정 보완되었는데 1539년 1543-1550 그리고 최종판이 1559년에 출판되었다. 이글의 초판 발행으로 프랑스 개신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첫 번째 제네바 시기(1536-1538) 1536 여행중 제네바에 유숙하는 동안 파렐의 초청을 받아 종교개혁에 동역. 8월에 성 피에르 교회에서 바울서신을 해설하는 강사로서 시작 1538 강력한 종교생활을 제네바 시민들에게 요구함으로 부활절에 제네바에서 추방당함. 제네바를 모범적 공동체로 만들려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스트라부르크에서의 체류(1538-1541) 1538 제네바 추방 후 몇 달 동안 바젤에 머물던 그는 부처의 초청으로 슈트라브르크에서 3년간 프랑스로부터 종교적인 이유로 도망 온 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섬겼다. 1538-1540 마르틴 부처와 친교, 로마서 주석(1539), 독일 종교개혁가 멜랑톤과 친분 두 번째 제네바 시기(1541-1564) 1541 1539년부터 제네바 교회는 분열이 일어났는데 피첼의 추종자들에 의해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고 9월13일에 교회법의 초안이 시의회에 제출하여 통과됨. 교회회의가 출교의 힘을 갖게 되었으며 제네바 전 시민의 개인생활위에 힘을 행사함. 춤과 도박 등이 금지되는 엄격한 종교생활을 시민들은 요구받으며 때로는 처형되기도 하였다. 자쿠에스 그루에트와 파울모네 등이 간음죄와 칼빈 모독죄 등으로 처형되었고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부인사건으로 이단이 되어 화형 당함. 1554-1560 1555년에 이르러 모든 저항은 끝나고 칼빈은 당당히 제네바시의 선생이 되고 외국인 취급을 끝내고 영구적 제네바 시민권을 얻는다. 성만찬 논쟁 안에서 루터교도들과 함께 논쟁 1559 개혁교회의 정신적 중심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 1564.5.27 죽어 다음날 그의 비문을 통하여 표식을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대로 프랭 파레 묘지에 장사되어 오늘까지도 그의 무덤이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잇다. 칼빈은 루터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다면 그의 작업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칼빈의 후계자는 데오도르 베자(1519-1605)였다. 베자는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예정론을 대변하는자가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 목회 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자, 교육가로, 저자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교개혁의 달 10월, 칼빈이 남긴 10가지 신학 원리

루터 신학이 십자가와 구원에 초점 맞췄다면

칼빈 신학은 하나님의 총체적 주권과 영광에

위기 맞은 한국교회, 칼빈 신학 효과적 적용을

칼빈 신학의 영구적인 유산(Permanent Legacy of the Theology of John Calvin)과 한국교회의 개혁

16세기 종교개혁을 이끈 대표적인 두명의 지도자가 루터(1483-1546)와 칼빈(1509-1564)이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루터와 거의 동시대에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이끈 츠빙글리(1484-1531) 역시 위대한 복음적 지도자였다. 하지만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루터에 비해 넓거나 깊지 않았다. 도리어 2세대 개혁자인 칼빈을 통해 츠빙글리가 남겼던 신학적 유산도 유의미하게 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 등 1세대 개혁자들의 복음적인 신학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종교개혁 신학을 한 차원 더 진전시키고 성숙시킨 신학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남긴 영구적인 신학적 유산을 살펴보고, 그것을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적용할 것인가를 논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칼빈의 신학은 칼빈이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후 소위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또는 칼빈주의 신학 (Calvinism)의 전통을 통해 계승됐다. 루터파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에 기초한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개혁신학은 구원에 대한 관심을 넘어 하나님의 총체적인 주권과 영광에 초점을 맞춘 신학이었다.

지난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개혁주의 전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칼빈신학의 10가지 유산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최고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과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적 권위를 가진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침묵한다는 것이 칼빈 신학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에, 성경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특별히 칼빈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성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는 것이 칼빈 신학의 핵심이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언약’ 개념의 중요성을 칼빈은 강조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에 대한 강조이다.

칼빈은 성경이 계시하는 참되고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강조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루터의 신학에 비해 훨씬 더 포괄적이고, 삼위일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주저 <기독교 강요> 자체가 삼위일체적 구조로 저술됐다. 총 4권으로 저술된 <기독교 강요>의 1권은 성부론, 2권은 성자론, 3권을 성령론, 4권은 교회론을 다루고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만사와 만물의 목적임을 강조했다. 만사와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극장이요 거울이라는 것이 칼빈 신학의 중핵이었다.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심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마귀의 존재와 역사조차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허용되고, 통제됨을 그는 성경을 통하여 명확하게 증거하였다.

3.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전적 무능력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함으로 범죄하였고, 그 결과 인간의 영육과 지정의 등 모든 영역이 죄로 물들게 되었다. 또한 영적으로 죽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영적 무능력의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외부로부터 오시는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루터의 인간 이해와 매우 유사하다. 칼빈의 이 사상은 후대 칼빈주의 5대 교리(Five Points of Calvinism)의 제1항을 구성하게 되었다.

▲제네바 빠스띠옹 공원에 세워진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pixabay.com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없는 제물로 준비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죄인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피를 흘리셨다. 또한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 예수는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교회와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한 구세주요 주님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라는 신학적 원리는 칼빈신학의 중심 기둥들 중 하나이다.

5.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이다.

우리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며, 그 구원의 혜택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그 본성상 하나님이시며, 인격적 존재이시다.

성령을 비인격적인 힘이나 세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철저한 오해이다. 칼빈이야말로 성령의 신학자였다(the theologian of the Holy Spirit).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신령한 복은 오직 성령을 통하여 전달된다.

6. 구원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자격없는 죄인에게 무조건적인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이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자를 선대하심을 성경은 은혜라고 부른다.

구원은 결코 인간이 이뤄내는 어떤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에서 나오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을 자들을 주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따라서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상 그의 은혜론의 귀결이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런 죄인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 은혜에 기초한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 칼빈 예정론의 중심 사상이었다.

▲칼빈이 사역했던 제네바의 종교개혁 500주년 모습. ⓒ크투 DB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과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그는 거듭남/중생, 죄사함, 연합, 칭의, 양자, 성령세례/내주 등과 같은 구원의 복을 누린다.

어떤 율법의 행위나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선행은 때묻은 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죄인에게 전가(imputation)되고, 하나님은 그를 의인으로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칭의는 오직 믿음만으로이다.

8. 성화의 주관자는 성령이시며,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책임이 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은 전 인생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실재적으로 변화되도록 이끄신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써 실재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가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고 견인하도록 이끄신다. 그러므로 참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한번 구원받은 자는 결코 구원에서 탈락할 수 없다.

칼빈은 그의 성화론에서 율법을 재해석한다. 루터에게서 율법의 주된 기능은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기능이다. 반면 칼빈에게 있어 율법의 주된 기능은 소위 ‘제3의 용도’이다. 그것은 성도의 성화 과정에서 윤리적인 규범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율법은 구약적 컨텍스트에서 이해되고 해석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율법에 대한 더 온전하고, 내면적인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9. 교회의 절대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 성령의 전으로서 예배와 영적 재생산, 양육, 훈련을 제공하고 복음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공동체이기에 성도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회는 결코 어떤 선택사안이 될 수 없다. 필수적 사안이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를 ‘모든 성도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생물학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없다면, 그의 성장과 성숙은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 성도에게 영적 어머니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추구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일 수 밖에 없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이며, 그 소망 안에서 우리는 밝고 행복한 종말 신앙을 견지한다. 칼빈 신학은 결코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을 가르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천년왕국론과 관련해서 칼빈은 무천년설을 지지했다. 그 점에서 필자의 입장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둡고 두렵게만 그려내는 건강하지 못한 종말론에 대해, 칼빈의 종말론은 적절한 치료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종합

한국교회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거룩한 새판 짜기가 시급한 시점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칼빈 신학의 10가지 영구적인 유산을 오늘의 한국교회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때 한국교회의 개혁은 더 앞당겨지고, 그 미래는 더 밝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성욱 교수.

정성욱 박사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저서 ,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 , , , , ,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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