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생애 | 요한 웨슬리의 생애ㅣ감리교의 창시자ㅣ신앙의 위인전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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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어두워질 때마다 빛을 비추어 교회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등불 역할을 하셨던 분들이 바로 ‘빛을 따라 산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성도들로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성도들 중의 한분인 요한 웨슬리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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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 웨슬리(John Wesley, 1705년 8월 31일 ~ 1791년 8월 31일)는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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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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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 – 기독정보넷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를 창시한 신학자이자, 근대 복음주의적 기독교 부흥을 이끈 목사입니다. … 뜨거운 은혜설교를 했고,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로 사회개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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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3/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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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 네이버 블로그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로 추앙된다. ‘감리교인’ 혹은 ‘메소디스트(Method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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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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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Life 존 웨슬리의 생애

John Wesley’ Life 존 웨슬리의 생애. 영국의 상황.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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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dkumc.org

Date Published: 4/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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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 한국신학마당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1703-1791) 웨슬리는 전도자, 신학자, 그리고 사회 개혁자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웨슬리의 이러한 세 면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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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ologia.kr

Date Published: 8/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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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 나무위키:대문

그는 세례는 개인적 성사이며 일생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일회적 성사로 보았고 성찬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은총의 수단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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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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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 Daum 블로그

존 웨슬리의 생애는 오늘날 감리교회의 원형이며, 미래를 향한 감리교회의 비전이다.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규범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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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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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 – 당당뉴스

이 책은 모든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이자 성결과 사랑의 성자인,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정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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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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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3월 2일,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존 웨슬리 (John …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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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edulife.com.au

Date Published: 3/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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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 – 웨슬리 이야기2 – 두란노몰

이 책의 특징을 말하면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다. … 평신도들이 존 웨슬리를 배울 수 있게 가능한 한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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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ll.duranno.com

Date Published: 8/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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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의 생애ㅣ감리교의 창시자ㅣ신앙의 위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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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존 웨슬리 생애

  • Author: 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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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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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 1705년 8월 31일[3] ~ 1791년 8월 31일)는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 영국국교회[4](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약 [ 편집 ]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 편집 ]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가, 1728년에는 사제/장로목사가 되었다. 잉글랜드국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였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 편집 ]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신학사상 [ 편집 ]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High church,Anglo-catholic)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감리교와 잉글랜드 성공회 [ 편집 ]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즉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끼친 웨슬리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생애 [ 편집 ]

어린 시절 [ 편집 ]

성공회 사제의 자녀 [ 편집 ]

존 웨슬리는 1705년 8월 31일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엡워스는 링컨에서 서북쪽으로 3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웨슬리는 새뮤얼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재너 웨슬리(Susanna Wesley)의 열아홉 자녀 중 15번째였다. 새뮤얼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영국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으며, 1696년부터 엡워스의 성공회 사제가 되어 목회하고 있었다. 새뮤얼 웨슬리는 1689년 개신교 목사인 새뮤얼 아네슬리(Samuel Annesley)의 25번째 딸인 수재너와 결혼하였다. 새뮤얼과 수재너는 총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이 중 여섯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새뮤얼과 수재너는 모두 개신교 목사의 자녀였지만 젊은 시절 잉글랜드 성공회로 전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께 학문을 익히다. [ 편집 ]

당시 대부분 가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웨슬리의 부모도 자녀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켰다. 딸들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은 걸음마와 말을 배우자마자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근대 서양 중간계급 가정에서는 가정교사나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쳤는데(나이팅게일도 부친이 따님들인 플로렌스와 나이팅게일에게 학문을 가르쳤음)지식인인 수재너 사모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에 능통하였고, 존 웨슬리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원어인 그리스어로 신약성서를 읽으며 생생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가르침을 새겼다. 존 웨슬리도 어머니처럼 지식인이어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부터 신학, 문학, 음악에 모두 밝았다. 즉,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실력을 쌓는 일부터 해나가야 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엄격하고 자상한 가정교육 [ 편집 ]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새뮤얼보다 수재너 웨슬리였다. 수재너는 점심 식사와 저녁 기도 시간 전에 아이들을 불러 배운 것을 잘 익혔는지 점검해 보았다. 수재너는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지 못하게 했고, 무분별하게 간식 먹는 것도 엄격히 금했다. 이를 어길시에는 어김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를 맞고 나서 큰 소리로 우는 것도 금했다. 수재너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의 의지를 정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 형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치면서, 수재너는 아이들 한 명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 시간을 그리워하였다.

화재 [ 편집 ]

1709년 2월 9일 사제관 화재에서 구출되는 어린 존 웨슬리. 새뮤얼 윌리엄 레이놀즈 작.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1709년 2월 9일 사제관에서 일어난 화재일 것이다. 당시 웨슬리는 다섯 살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화재를 보고 피신한 것과 달리 웨슬리는 늦게까지 화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불이 난 사실을 알고 간신히 창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새뮤얼 웨슬리는 아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화재가 심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새뮤얼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여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찰나에 같이 불을 끄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했고, 웨슬리가 구조되자마자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이 무너지던 찰나 구조된 웨슬리를 보고 수재너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재너는 스가랴 3장 2절을 인용하며 웨슬리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불렀고, 웨슬리 자신도 이 별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학교공부 [ 편집 ]

열한 살이 된 1714년,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 School)에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에서의 생활은 결코 풍족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웨슬리는 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내었다. 차터하우스에서 6년 간 수학한 후,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과 성공회 성직서품 [ 편집 ]

웨슬리가 수학하고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크라이스트처치 내부.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1724년, 문학사(B.A.) 학위를 땄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석사(M.A.) 학위 취득을 위해 계속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1725년 9월 19일 옥스퍼드의 주교 존 포터(J. Potter)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부제(deacon)로 서품받았다. 부제서품받을 즈음 웨슬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러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Rules and Exercises for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라는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웨슬리는 이 책을 통해 참된 신앙은 먼저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자라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연구교수(fellow)가 되었다. 연구교수가 된 웨슬리는 학교 안에 연구실을 얻을 수 있었고 1751년 결혼할 때까지 해마다 18파운드에서 최고 80파운드까지, 평균 약 30파운드의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웨슬리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교에서 고전 문학과 논리학, 그리스어와 신약성서, 고전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이외에도 학생들의 개인 지도를 하였다. 웨슬리는 1728년 9월 22일에 성공회 부제서품 때와 마찬가지로 존 포터에게 성공회 사제(elder; priest)로 서품받았고, 1735년 조지아로 떠날 때까지 연구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성실히 수행했다.

존 웨슬리가 아버지의 교구 목회를 도우러 고향에 내려 가 있는 동안, 1726년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찰스는 입학 초기에는 경건하게 생활하지 않았었으나, 형 존과 어머니 수재너의 조언과 격려로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하고 영적 생활을 새롭게 하려고 마음 먹었다. 결심 후에 찰스는 매주일 성찬을 받으며 매일 규칙적으로 개인 기도를 하면서 경건생활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두 명의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성경 공부와 경건 서적을 읽고 대화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729년 11월 말 경에 웨슬리가 옥스퍼드에 돌아왔고,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는 동시에 신앙 생활의 증진을 돕게 되었다. 웨슬리도 찰스가 시작한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연스럽게 그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신성회(Holy Club)의 시작이었다.

기도와 독서 [ 편집 ]

신성회는 매일 여섯시부터 아홉시까지 기도하고, 시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읽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보았던 책은 주로 초대 교회와 중세기 성자들의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시대와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성공회에서 1년에 3번 정도 성찬을 받아도 된다고 권고한 것과 달리, 신성회 회원들은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이 균형을 이룬 초대교회 예전에 따라 매주일 성찬을 받았다. 이들은 초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1730년 8월부터 신성회 회원들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고 전도하는 사회선교를 시작하였다. 윌리엄 모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일은 후에 신성회의 사역 중 중요한 일로 정착하였다. 당시 감옥은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여건이 극도로 나빴으며, 신성회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 겨울에는 석탄이나 나무를 갖다 주는 한편 심지어 빚을 못 갚아 들어온 죄수들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석방시키기까지 했다.1732년 웨슬리는 신성회 회원들이 사용할 《매일 기도집(A Collection of Forms of Prayer for everyday in the week)》을 썼는데, 이 기도집에는 주일부터 월요일까지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가 실려 있으며 “매일의 자기성찰 일람표(A Scheme of Self-examination)”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성회는 웨슬리가 정한 규칙과 기도집을 엄격히 지켰다.

이렇게 신성회는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경건 생활에 매달렸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많은 질시와 조소를 당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바로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이름이었다. 웨슬리 본인에 따르면 이 호칭은 네로 황제 시절 로마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의사 집단에서 유래하였다. 그 당시 의사들은 규칙적인 식이 요법을 통해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메소디스트란 바로 이 의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외에도 신성회는 “성경 벌레(Bible Moths)”, “공로주의자들(Supererogation Men)[5]”, “성례전주의자들(Sacramentarians)”, “초대 교회(Primitive Church)”, “열광주의자들(Enthusiast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와 같은 옥스퍼드에서의 신성회 활동은 웨슬리가 회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감리교회 운동의 시초였다.

조지아 선교와 실패 [ 편집 ]

1735년, 웨슬리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였던 아메리카 조지아 서배너(Savannah)에 선교하기로 하였다. 1734년 말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 사제가 별세하였고, 별세하기 직전 완성한 욥기 주석서를 캐롤라인 왕비에게 전해달라고 존에게 요청하였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주석서를 왕비에게 전해주었다. 책을 전해주고 오는 길에 웨슬리는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의 존 버턴(John Burton) 사제를 만났다. 버턴은 웨슬리에게 조지아로 가서 선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버턴은 웨슬리에게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한 제임스 오글소프(James Oglethorpe)를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다. 제임스 오글소프는 웨슬리에게 식민지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선교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웨슬리는 고민하다가 고향 엡워스로 가서 어머니 수재너 웨슬리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수재너 웨슬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내게 스무 명의 아들이 있다면, 다 그렇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구나.” 웨슬리는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735년 10월 10일, 버턴에게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모라비안 공동체와 만나다 [ 편집 ]

같은 해 10월 14일, 웨슬리는 갓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은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그레이브젠드(Gravesend)로 갔다. 이날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의 벤저민 잉햄(Bejamin Ingham)과 런던 상인의 아들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가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데이비드 니치먼(David Nitschmann) 주교의 인솔 하에 시몬즈(Simmonds) 호에 올랐다. 이때 같이 배에 탄 이들 중에는 독일 헤른후트 노동공동체에서 온 개신교 신도들인 모라비안 26명도 있었다.

장장 4개월 23일 간 계속된 항해에서 시몬즈 호는 몇 번이나 전복될 뻔 하였다. 바닷물이 객실 창을 부수고 돛대까지 부러뜨릴 정도였다. 위기의 순간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였고, 침착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은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었고, 이들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배는 우여곡절 끝에 1736년 2월 6일 조지아에 상륙하였다. 존 웨슬리는 서배너에, 찰스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주의 두 번째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온 것이지만 조지아에는 아직 전임인 새뮤얼 퀸시(Samuel Quincy)가 사제관에 그대로 남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웨슬리는 찰스 델라모트와 함께 모라비아 교도들이 쓰는 막사에 기거해야 했다. 2월 25일 두 사람은 이 독일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고, 덕분에 모라비아 교도들을 매일 보며 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인 스팡겐베르크(August Spangenberg)와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팡겐베르크와 웨슬리가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스팡겐베르크는 웨슬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당신 안에 증인을 갖고 있는가?”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는가?”였다. 웨슬리는 느닷없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있었고, 그때 다시 스팡겐베르크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리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분이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 스팡겐베르크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날의 대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일기에 그저 “의미 없이 내맽었다”라고 적었다. 웨슬리는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스팡겐베르크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보였던 믿음의 확신에 감탄하였다. 웨슬리는 자연스레 모라비아 교도와 스팡겐베르크에 끌리게 되었으며 믿음의 확신을 얻기까지 계속 교제를 나누었다.

미국사람들과의 갈등 [ 편집 ]

서배너에서 시작한 웨슬리의 목회는 시작은 꽤 순조로웠으나 곧 난항을 겪었다. 이유는 웨슬리의 보수적인 목회 스타일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비국교도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세례 시에는 물에 세 번 잠기게 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웨슬리는 비국교도를 엄격히 차별하여 비국교도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 집례를 거부하였다. 또 웨슬리는 조지아로 떠나면서 인디언이야말로 죄에 때묻지 않은 창조 본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인디언 선교에 큰 꿈을 품었었지만 인디언 선교도 쉽지 않았다. 찰스 웨슬리도 형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난항을 겪었는데, 찰스가 겪은 것은 주로 식민지 주민들의 악의적인 협박과 행동이었다. 찰스 웨슬리는 이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에 시달리다가 1736년 8월, 6개월 만에 식민지 활동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동생 찰스가 떠나자 웨슬리는 목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프레데리카에 정기적으로 들르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부재하는 동안 서배너에서는 앞서 조직한 소모임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의 신앙생활을 독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서배너보다 프레데리카의 상황은 더욱 나빴고, 1737년 1월 26일을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의 사역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서배너 식민지 사람들은 프레데리카와 달리 신앙에 열심이 있었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엄격한 웨슬리의 스타일로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선교는 다른 쪽으로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소피아와의 갈등 [ 편집 ]

아직 독신이었던 웨슬리에게 조지아 주지사 오글소프는 치안장관 토머스 코스턴(Thomas Causton)의 조카 소피아 홉키(Sophia Hopkey)를 1736년에 소개시켜 준 적이 있었다. 소피아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지만 아름답고 신앙적으로 신실한 여자였다. 웨슬리와 소피아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경건생활과 사랑 사이에 갈등하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스킨십을 악한 것이라 생각하여 하지 않기로 결단하면서도 막상 소피아와 만나게 되면 스킨십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해 하는 웨슬리를 소피아는 굳게 붙잡을 수 없었고, 1736년 3월 9일 웨슬리에게 마지막 통보를 하였다.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자신에게 청혼한 윌리엄슨과 결혼하겠다는 말이었다. 웨슬리가 고민하는 사이 소피아는 결국 3월 12일 윌리엄슨과 결혼식을 올렸다.

소피아가 결혼하자 웨슬리의 마음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웨슬리는 소피아의 신앙생활에 흠이 있음을 계속 지적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8월 7일 영성체를 위해 나온 소피아와 남편 윌리엄슨에게 영성체를 하지 않음으로써 공개적인 굴욕을 주었다. 이 일은 큰 파장을 주었는데, 소피아가 치안장관 코스턴의 조카였기 때문에 일은 더욱 일파만파로 커졌다. 코스턴은 웨슬리가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소피아에게 성찬 분급을 거부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즉시 2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구성되었으며, 웨슬리에게 10개의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이에 웨슬리는 서배너에서의 선교가 사실상 끝났음을 직감하고 12월 2일 도망치듯이 조지아를 떠났다. 결국 1년 9개월에 걸친 조지아 선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오다 [ 편집 ]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웨슬리는 또 다시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이때의 심경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나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는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올더스게이트 회심 [ 편집 ]

모라비안 페터 뵐러 목사와의 만남. [ 편집 ]

웨슬리는 1738년 2월 1일 우울한 모습으로 딜(Deal) 항구에 도착했다. 3일 후 웨슬리는 런던으로 가 오글소프와 조지아 이사들을 만나 사유서를 제출하고 선교사 임명장을 반환하였다. 갈 곳도 없던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친구인 제임스 허턴(James Hutton)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허턴은 웨스트민스터 학교 근처에서 책방과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웨슬리는 그곳에서 막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목사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났다. 피터 뵐러는 웨슬리보다 9년 늦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예나(Jena) 대학교를 졸업했고, 친첸도르프(Zinzendorf) 백작 밑에서 신앙 지도를 받은 후 헤른후트(Hernhut) 형제단에 가입했다. 영국과 아메리카에서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웨슬리는 뵐러와 급속도로 친해졌으며, 뵐러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뵐러가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믿음에 의지하다 [ 편집 ]

뵐러는 웨슬리에게 “내 형제여, 내 형제여, 당신은 당신의 철학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Mi frater, mi frater, excoquenda est ista tua philosophia).”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3월 5일 웨슬리는 병 중에 있던 동생 찰스를 보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고 거기서 뵐러를 다시 만났다. 뵐러와의 대화 중에 웨슬리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saving faith)’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뵐러는 대화를 거듭하며 웨슬리에게 성서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이신칭의)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뵐러는 회개하고 그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뵐러와의 대화 끝에 자신이 갖지도 못한 신앙에 대해 설교를 그만해야 하지 않나 번민하는 웨슬리에게 뵐러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인 3월 6일부터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에 따라 믿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신약성서를 연구하다 [ 편집 ]

3월 말에 피터 뵐러는 웨슬리에게 경건주의적 전통의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의 본성을 설명해 주었다. 믿음의 본성은 거룩함(죄로부터의 자유)과 행복(용서받았다는 자각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으로 열매 맺는 것이며 거룩함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뵐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을, 칭의-법적인 변화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중생-참여적 변화와도 연결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뵐러의 말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웨슬리는 4월 말에 뵐러를 다시 만났을 때는 뵐러가 설명한 믿음의 본성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으며, 여러 간증을 듣고 “즉각적인 회심”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제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울부짖었다.

성공회 교회와의 갈등 [ 편집 ]

5월 1일 웨슬리는 뵐러의 충고에 따라 다른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과 함께 “우리의 작은 신도회”를 설립하였고, 이것은 후에 “페터레인(Fetter Lane) 신도회로 발전했다. 5월 4일에는 뵐러가 아메리카로 떠났고,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대로 계속 자신의 부족한 믿음에 대해 설교하였고, 영국 성공회의 전례와 다른 자유로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영국 성공회 사제들이 웨슬리의 이러한 행보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웨슬리가 광신주의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찰스 웨슬리 [ 편집 ]

존 웨슬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동생 찰스 웨슬리도 병석에서나마 같은 확신을 얻기 갈망하고 있었다. 찰스도 뵐러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깊게 소망하였다. 찰스는 5월 말 루터의 “갈라이다서 주석”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우리의 교회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와 같이 이렇게 중요한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특별히 우리의 강령과 설교가 폐기되지 않고 중심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새로운 교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찰스는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인 존 브레이(John Bray)가 무식한 막노동자였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며, 그 가족도 신앙 안에서 감사와 평화,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5월 21일 오전 9시, 찰스는 존 웨슬리와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기도와 찬양을 하였다. 9시 30분쯤 되어서 홀로 남아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찰스는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조용하지만 아주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믿으라. 그리하면 네 모든 병이 나음을 얻으리라.” 찰스는 이 음성이 브레이의 누이 무스그레이브(Musgrave) 부인이 말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찰스를 간호하고 신앙적인 권고를 해온 터너(Turner) 부인의 목소리였다. 찰스는 무스그레이브를 불러달라고 터너 부인에게 이야기했고, 터너 부인이 내려간 사이 “이상한 마음의 떨림”을 경험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병도 나았다. 다음날 동생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소식을 듣고 웨슬리는 찰스를 방문하였고, 찰스는 형도 같은 은혜를 체험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 편집 ]

1738년 5월 24일,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 편집 ]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성공회의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성공회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영국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대표 성직자인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영국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존 웨슬리 자신도 스스로를 성공회 사제라고 생각하였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영향 [ 편집 ]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국가교회인 영국국교회로만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으며, 잉글랜드 성공회가 현재의 성공회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신학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6]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인물과 서적들 [ 편집 ]

웨슬리는 다양한 인물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의 종교적 열심을 증진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윌리엄 로우의 <경건한 삶을 위한 엄숙한 부르심>과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그의 성화론에도 영향을 미쳤다.[7]

존 웨슬리의 신학 [ 편집 ]

존 웨슬리의 신학은 당시 교리 중심의 사상적 신학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천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였다.[8] 교리를 선택하는 문제로서 신앙이 아니라 “성화” 즉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견주어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은총과 사랑은 웨슬리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신학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기준이 되며 최종적 칭의를 향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는 개신교의 교리를 형성했던 칼빈주의나 루터주의, 경건주의 등과 구별되는 신학적 방법론이었다.

실천신학적 접근 [ 편집 ]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은 교부신학자와 같이 성서에 기초하여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며 전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주목하는 실천적 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는 신학은 세상을 낙관론이나 비관론적 입장이 아니라 양쪽의 긴장을 지닌 중도적 대안 또는 제3의 과정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방법의 현실적 표상은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 받음의 은총과 힘 입음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과 은총의 제한적 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 칭의와 최종 칭의와 같은 긴장 속의 주제에 대한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며 나타났다.[9] 이 신학의 주제들은 은총의 개념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은총의 실천 [ 편집 ]

은총의 개념은 초기 교부들과 고전 공의회의 신학을 뛰어넘어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을 시작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발전의 과정을 수반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오며, ‘의’도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점차 자란다고 보았다.[10] 이를 위한 실천적 은총의 수단은 일반 수단과 특별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님의 여정 속에 있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보편적 순종이고,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과 상황적 은총의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제도적 은총 수단: 성경과 전통 [ 편집 ]

제도적 은총의 수단은 대부분의 신자가 생각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경건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능력을 경험하는 체험도 존중하였다. 공중예배와 성경읽기, 성찬 참여, 가족기도, 개인기도, 성경공부, 속회와 금식과 절식이 제도적 은총의 수단이며 이들을 습관적으로 실천하고 그 안에서 영혼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11] 이 중 특히 성례전인 성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라 내적인 은총에 대한 외적인 징표이고 이로서 우리가 내적인 은총을 받는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12] 그가 보았던 성찬은 기존의 성례전시각인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츠빙글리주의와 차이를 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엄숙한 기념으로 이 기념인 온전한 기억과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몸의 현전이 아니라 실재적인 영적 현존이 있다고 구분하였고, 성례전을 통해 칭의와 성화의 현재적 구원 은총인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금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13] 성례전으로 세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이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로 보았다. 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단계이나 완전한 단계는 아니며, 죄를 짓는 과정 속에서 세례로 받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될 수 없기에 체험적인 온전한 마음의 변화와 경건한 성화의 삶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세례와 거듭남을 구분하였으므로 성인의 세례와 유아 세례를 묶어서 생각하였다.

상황적 은총의 수단: 이성과 경험 [ 편집 ]

상황적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초월하는 성령의 인도로 은총 안에서 자라 가도록 하는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수단을 구분하였다. 선행 은총을 통해 생긴 도덕법은 신앙인의 양심과 상황에 맞춰 생각하도록 하였으나 상황적인 대응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론과 밀접한 도덕법으로서 윤리적 기준을 의미한다.[14]

관련저서 [ 편집 ]

번역된 저서 중 1차 문헌 [ 편집 ]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존 웨슬리의 생애 > 기독교자료모음

존 웨슬리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를 창시한 신학자이자, 근대 복음주의적 기독교 부흥을 이끈 목사입니다.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하고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영국과 미국을 순회하며뜨거운 은혜설교를 했고,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로 사회개혁을 이루게 하였습니다.웨슬리 신학은 성화를 중심한 성령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해 회개, 칭의, 중생를 거쳐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실천적인 신학입니다. 존 웨슬리의 생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 사 사무엘 웨슬리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며 교수과목과 교육방침도 결정했다.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놓고 개별 상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존 웨슬리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일년에 한번 엡워드교구 목사의 집에서는 [알파벳잔치]라는 것이 있 었다.이는 자녀가 다섯살이 돼 첫 공과를 배우기 시작하는 날로 첫날은 ABC를, 다음날부터는 창세기를 보며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가르치며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이 6세 되던해 엡워드 목사관에 불이나 [가정학교]는 잠시 중단된다. 1707년 2월 7일, 집을 삼킬듯한 불길이 목사관을 휩싸자 식구들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은 형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들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다. 그때 [사람살리라] 라는 소리가 목사관2층에서 들렸다. 웨슬리가 창문에 몸을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해 내려오자 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 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80여년의 생애동안 [화재]와 [구원]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화재 사건 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존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그는 6년만에 차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마친후 옥스퍼드로 갔다. 웨슬리는 1년에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의 그리스도 교회대학에 입학했다. 웨슬리는 재학중 우수한 성적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논리가 뛰어나 학우들과 논쟁하면 언제나 상대를 꺾고 말았다.1725년 22세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웨슬리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흡잡을게 없었으나 성직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적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작은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마음의 성결에 대한 관념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명백한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 죄에 만족하였다.”그가 먼훗날 그 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웨슬리가 사도직을 걷기로 작정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나는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언행뿐 아니라 우리의 사상에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는 이때부터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신앙생활하는데 보냈으며 내적 성결을 위하여 힘썼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 그리스도에게 몸바칠 각오로 살았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갖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성결에 대한 도리를 깨달았다. 웨슬리가 쓴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기본 사상은 아켐피스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 또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란 책은 그가 아켐피스에게서 얻은 신념을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나는 이 책을 읽는 중 한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로부터 13년뒤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다.요한 웨슬리가 집사 안수를 받은 것은 그가 22세때인 1725년 9월19일 이었다.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대학 교회당에 옥스퍼드감독 요한 피터에게서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는 그로부터 3년뒤에 받았지만 가끔씩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당시 설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 신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 진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이 없었다.”1726년 3월 11일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 사상을 그들에게 불어 놓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은 제외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받은 것은 1727년 이었으나 당시 그는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65세의 고령인데도 엡원 교구와 우릇 교구 둘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두 교구를 맡기엔 힘이 벅차 아들 존 웨슬리를 부목사로 초빙했다. 웨슬리는 2년 3개월동안 부친 교구에 봉직한후 1729년 옥스퍼드대학 조교수로 피선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한편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포드 그리스도교회 대학에 입학한 것은 1726년 그의 나이 20세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고 비범한 재사였고 형이 오기 전부터 교내에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종교모임을 가졌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그의 동지들과 함께 매일매일의 학과 일정표를 만들고 종교적 의무를 지키며 침식 시 간을 될 수 있는대로 줄이는 등 신앙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 생활로 동창학우로부터 “규칙장이들” (metho-dists)라는 별명 까지 듣게 되었다.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로 돌아온 후 즉시 동생이 조직한 단체 [신성 구락부] (holy club) 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29년. 타락한 조국을 바로 잡고자 뜻 있는 청년 몇 사람이 조직한 [신성 구락부]는 신임회장 존 웨슬리를 맞았다. 회원 네 명중 세 명은 대학 조교수였고 나머지는 대학 재학생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을 지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일반회원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과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신성구락부]의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방문하고 병자 위문을 하는등 여러가지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옥스포드 감독의 허가로 그들은 감옥 뿐 아니라 시내의 가난한 가정도 심방하였으며, 무산 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남루한 옷을 몸에 걸친 소녀 하나가 웨슬리에 구걸했다. [너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옷은 그것밖에 없니?] 웨슬리는 그 소녀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돈이 없어 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의 서재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나는 가련한 소녀의 배고픔을 면케 해 줄만한 돈으로 내집의 벽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아 – 내 마음엔 공의도 없고 자비도 없다. 이 그림들은 저 가련한 소녀의 피 값이 아닌가?” 이 때부터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그들의 수입 중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잔액 전부를 구제비에 썼다. 웨슬리는 연수입 30파운드를 제외한 2파운드를 내놓았고 이듬해는 60 파운드의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32파운드를 구제비로 썼고, 다음 해 역시 90파운드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리의 부친 엡윗 교구 목사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한편 웨슬리가 몇몇 신성구락부 회원들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나고 남은 신성 구락부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갖다 졸업 후 목사직을 받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단체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향기는 얼마간 옥스포드 학원에 머물렀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 아메리카 대륙과 전세계에 신앙의 불꽃을 일게 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신성구락부였다.웨슬리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일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 전도단은 1735년 10월 18일 시몬주호를 탔는데 이 배에는 모라비 아인들과 80명의 영국이민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진 8주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웨슬리에 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 중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제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 도중 여러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독일 모라비안 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했다.폭풍이 지난후 웨슬리는 한 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 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그의 일기장에 [나의 일생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영광은 웨슬리가 구원의 빛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736년 2월 6일. 웨슬리 일행이 탄 배는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했다.웨슬리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리비아 교단의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 겐베르크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 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 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 찼다. 그후 웨슬리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 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리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 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에는 스페인 출생의 유대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 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리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고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리를 실각케 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고 그 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리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영국 행 범선 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그는 조지아 선교 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 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 그들 중 페터 볼러와의 대화는 웨슬리의 신앙에 큰 교훈을 주었다. 그는 볼러로 말미암아 그의 불신앙을 깨닫게 되었다. 중생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묻자 볼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웨슬리는 볼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튿날 아침 옥스포드 감옥에 있는 한 사형수에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전도했다.다음주일 웨슬리는 퀘이커교 예배에 참석했다. 이것은 웨슬리의 부 흥운동 뿐 아니라 감리회 예배의식 발전상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폭스(퀘이커교 창설자)회에 참석하였는데 내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넘처 흘러 그동안 해왔던 기도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운 기도를 했다.] 영국교회의 의식과 기도문에 따라서만 기도했던 그는 자유기도가 더 은혜로움을 깨달았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한 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상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리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웨슬리가 중생한지 18일 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의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만큼 그의 중생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영국국교는 웨슬리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간주,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벌써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네 교회만 그에게 설교를 허락했다. 또 뉴케이트 감옥에 수용된 죄수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전에 해오던 방법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돼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1739년 4월 2일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했다.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예의범절만 찾던 영국교회의 목사들은 제복차림으로 노천에서 전도 하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른 목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그날 오후4시 나는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약 3천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웨슬리는 야외설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새로운 선교방법에 대해 성도들이 걱정을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나에게 내 능력에 따라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덕이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교구에서 일하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던 중 웨슬리 일행에게 일대 수난이 다가왔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감리교도들에게 박해가 심했다. 그들이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 다. 이러한 폭도들의 행패는 1757년까지 계속됐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가졌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팀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감리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웨슬리는 찬송에도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1776년 처음 발표된 총회통계를 보면 감리교엔 목사 97명, 성도 1만 9천7백61명, 순회지구 40개로 나타나 있다. 그 일년후에는 성도가 2만5천9 백11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이 커지고 양적으로 발전한 감리교는 1984년 웨슬리는 기독교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첫 사랑의 상처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려고 했으나 나이 48세때 미망인인 파질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의 변태 행각과 질투로 별거하게 됐으며 얼마후 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리가 받은 복은 컸다.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4천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 여행한 총거리가 40 만km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 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위에 누운 웨슬리 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영국사회를 믿음으로 구원한 믿음의 선구자 웨슬리는 다른 여타의 유럽국가들이 유혈혁명으로 타락된 산업혁명 이후 사회에서 벗어난 것과 달리 영국에 명예혁명이라는 영광스런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사상을 제공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구원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의 효시였다. 그의 후계자인 우리도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한 그의 선언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선교 대상으로 삼고 그들에게 구제, 교육 등 갖가지 방법으로 선교를 펴야 할 것이다.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1) 가족적 배경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로 추앙된다. ‘감리교인’ 혹은 ‘메소디스트(Methodist)’란 ‘고지식한 사람’ 혹은 ‘원리원칙에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복음주의와 사회운동을 중시하는 개신교의 중요한 한 갈래이다.

존 웨슬리는1703년 6월17일 영국의 링컨셔주 에프워스(Epworth)에서 성공회 사제인 새뮤얼 웨슬리(Rev.Samuel Wesley)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체 19명의 자식들 가운데 15번째 였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성공회 목사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의 아버지인 새뮤얼 웨슬리는 40년간 교구 일을 맡아 본 성실한 성직자로,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목회에서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를 보면서 존 웨슬리가 받은 영향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경의 원문에 충실한 해석, 2) 세계선교를 향한 사역적 확신, 그리고 3) 소규모 모임을 통한 신앙조직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존 웨슬리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물론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후에 그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감리교의 특징인 속회(class)를 활성화 한 것도 아버지 목회에서 배운 방법들이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역시 성공회 목사의 딸이다.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할 만큼 빈틈없는 학문 실력으로 19남매를 직접 가르쳤으며, 신앙생활에 몹시 엄격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를 하는 것은 물론 영적일기를 쓰도록 하고 가정을 통한 자녀들의 영적 구원에 신경을 썼다. 영국교회사에서 존 웨슬리라는 지성적이고 활동적인 설교자이며 신학자가 나온 것은 부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족 가운데 그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된 동역자였다. 후기에 동생과의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를 가장 크게 후원해주고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 바로 동생인 찰스였다.

2) 좌절의 초기목회

1720 년 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다양한 언어와 논리학, 윤리학, 철학, 웅변, 그리고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1725년 성공회 부제 (ordained deacon)에 서품되었고, 1726년 링컨대학의 연구원(fellow)에 임명되었다. 1927년 동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아버지의 교회에서 2년간 일을 하고 연구원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 옥스포드로 돌아왔다. 이 때 18세기에 다시 유행이 불기 시작한 중세의 영성가인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28년 영국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29년은 감리교(메소디즘)의 시작으로 기록된 해이다. 그의 동생인 찰스가 옥스포드에 친구들과 함께 ‘경건 클럽(The Holy Club)’을 만든 해이기 때문이다. 이 클럽에는 찰스와 조지 윈필드와 같은 성서적 신앙관을 갖은 젊은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조직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비웃는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메소디스트’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기 때문에 후에 ‘메소디스트’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1735년 10월 14일 존과 동생 찰스는 미국의 조지아 지방의 사바나를 향해 항해에 나섰다.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사바나 교구의 교구목사로 주지사인 제임스 오글레토피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배에서 그는 큰 경험을 하고 그의 초기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항해 중이던 배가 큰 폭풍을 만났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 하였지만 경건주의 기도교 종파인 ‘모리비안(Moravian)’들은 무서워 하기는 커녕 조용하게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라비언들과의 교류를 시작한다.

존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한 후, 큰 위기에 처한다. 존 웨슬리는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소피아 홉키라는 여인과 로멘스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와 절교를 하고 그녀에게 성찬식을 주는 것을 거부하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존 웨슬리와 헤어지고 난 후 만난) 월리엄 윌리엄슨이 그를 고발한 것이다. 열가지 항목에 걸쳐 고발된 그는 재판정에 서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국 땅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3) 회심

미국에서의 실패는 그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그러나 배에서 만났던 모라비언들의 모임에 참석한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되는 대단한 경험을 한다. 1738년 5월24일 런던의 알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모라비언의 모임에서 들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Preface to Romans)’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경험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to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이 경험은 존 웨슬리에게 성령과의 직접 교통을 하는 경험을 제공하여 주었고, 이 후 그의 사역에 경험적인 신앙을 강조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성공회 입장에서는 대단히 과격한 신앙적 입장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라비언들의 총본부인 독일의 헌헛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찬송을 짓는 등 열심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교회로부터 초대를 받지 못한 그는 설교를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존 웨슬리의 옥스포드 시절의 친구이고 ‘경건클럽’의 회원인 조지 화이트필드 역시 그와 비슷한 처지로 영국 성공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었다. 그러나 조지 윈필드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대신에 교회에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인 광부나 농부같은 사람들을 이하여 야외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을 돌아다니며 직접 사람들에게 전도와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도 여행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가 일생동안 한 전도여행은 그 거리가 40만km나 되었다고 한다.

4) 존 웨슬리 신학의 발전과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

1739년 그는 모라비언들이 이단인 ‘침묵주의(Quietism)’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여 모라비언들과 결별을 한다. 스스로 신앙체를 조직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브리스톨과 킹스우드에 ‘영국 메소디스트 소사이어티’를 결성한다.

그 해, 미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부제들에게 성공회가 사제 서품을 주지 않는 것에 반발해 자신이 스스로 사제 서품을 줌으로서 사실상 성공회에서 감리교회가 분열되었다. 영국 성공회는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미국에서 사제서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성공회를 화나게 했다. 성공회 목사들은 설교와 출판물을 통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목회를 계속했다.

비록 그가 감리교파를 만들고 목사들에게 사제서품을 해 주었지만, 존 웨슬리 사제 자신은 자신을 성공회 사제로 생각했다. 왜냐면 그의 존 웨슬리의 입장에서는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부패하고 사회적인 영향을 상실한 성공회를 갱신하려는 신학운동이었지,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영국 성공회는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를 부과했다.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의 왕이 수장인 영국 성공회가 보기에는 국가교회와 국가질서를 혼란하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국 성공회는 교회내에서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설교를 금하였고, 교회에서 복음주의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심지어 영국 성공회에서는 복음주의 운동을 영국에 성공회를 파괴하고 로마 캐톨릭을 재건하려는 운동의 일부로 간주하기도 했다.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성공회의 제제로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결국 자신이 만든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주도한 감리파는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기독교 윤리에서 무기력하던 성공회 내부에 복음주의적 변혁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 감리교는 미국에서 더욱 활발하게 피어났다. 또 그의 아이디어인 ‘감독’제도와 ‘순환근무’ 같은 제도들은 감리교의 특징적인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존 웨슬리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와 같은 형식을 존중하는 옥스포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 성공회의 전통이 되었다.

존 웨슬리는 1748년 감리교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킹스우드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사후인 1831년 미국에서는 웨스리안 대학이 그의 이름을 따라 설립되었다. 평생을 복음주의 신학과 가난한 자를 위한 설교에 힘을 쏫은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2일 친지들에게 “나는 찬양한다. “나는 찬양한다. 찬양한다 (I’ll praise… I’ll praise…)”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5) 존 웨슬리 신학의 특징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성공회에서 유행했던 조지 와이트필드의 칼빈주의(Calvinism)과는 다른 알미니안 주의(Arminian Doctrine)를 수용했다. 알미니즘 학파를 지지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적인 ‘선거’와 ‘교회로 부터의 출교제도’에 반대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초기 동역자이며 친구인 조지 와이트필드와 결별을 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의 전통에도 충실했다. 성공회의 기도서에 따른 철저한 신앙생활과 전통적 예식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성경이 모든 진리의 중심이라는 점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거룩한 기독교인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개인적 회심과 신앙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침례교인들에게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거듭남의 은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 죄를 멀리 하는 거룩한 마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가르쳐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에서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에 가장 구별되는 점은 기독교인으로써의 사회봉사와 사랑의 실천이다. 존 웨슬리에 따르면 크리스찬의 사랑이란 이웃들과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 사랑의 동기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늘 날 중요한 감리교의 정신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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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명의 자녀가운데 열 다섯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청교도 목사의 자녀들이었으며 교회를 영국교회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조부와 부친이 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영국교회로 들어가 영국교회의 목사로 안수받은 후 링컨 주의 습지에 위치한 엡워스 교구를 맡아 거의 40년간을 봉직하였습니다.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성례를 귀하게 여기던 목사였습니다. 비록 위대한 학자나 시인은 아니었지만 사무엘은 욥기에 관한 주석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엡워스 목사관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그가 지은 찬송 중의 하나가 연합감리교 찬송가인(The United Methodist Hymnal)에 수록되어있습니다,(#293,“Behold the savior of Mankind”) 요한 웨슬레의 체격은 작았으나 그의 다갈색 머리와 정렬적인 성경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특별히 웨슬레가 태어나고 자라난 엡워즈 마을은 난폭한 주민들이 있어 사무엘 목사의 농작물에 불을 놓기도 하고 젖소를 찔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6살이 된 해 겨울 즉 1709년 2월 9일 한 밤 중에 원인 모를 화재가 목사관에 발생하였을 때 이층 다락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재속에서 깨어나 조금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창문 곁에 다가서서 “사람 살리세요”라고 외쳤으며 이를 본 불을 끄던 교회 청년들이 무등을 서서 그를 구출해내는 순간에 그 집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구사일생으로 구원받은 자기 생명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조각”(스가랴 3:2)이라 비유하여 생각하고 자기 사진 밑에 이 성경구절을 쓰고 항상 “하나님이 왜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셨을까?”그 이유를 생각하며 평생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였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 화재로 인하여 집이 완전히 타 버렸는데도 가족중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타는 목사관에서 마지막으로 구출된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 나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 웨슬리는 비범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자녀 양육은 직접 가정에서 조기 교육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독서는 광범위하였고 특히 종교와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섭렵하였으며 남편 목사의 출타 중에는 목사관에서 기도회를 직접 인도하였습니다. 수산나와 사무엘은 종교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서로 의견대립이 있을때가 많았는데 때론 이 일로 인해서 목사관에 심각한 긴잠감이 감돌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궁핍과 연이은 출산과 아울러 계속된 어린 자녀들의 죽음이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열 아홉명의 자녀중에서 요한 웨슬레를 포함하여 열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습니다. 자녀중 가장 맏이인 사무엘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곱명의 딸, 곧 에밀리아, 수산나, 메리, 메헤타벨, 앤, 마타와 케지의 삶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프레데릭 E, 메이저는 그의 저서 ‘The Story of John Wesley’s Sisters or Seven Sisters in Search of Love‘에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여러번 자신의 누이들이 감리교 운동에 보다 적극적이지 못한다고 실망을 표현하곤 했는데 가난과 가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들은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이었던 챨스 웨슬레(Charles Wesley)는 그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역자였습니다. 챨스 또한 아버지와 두 형과 같은 길, 영국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적인 신앙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으며 상당한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감리교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6,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기록하였고 그의 찬송시는 다른 교단에서 발행하는 찬송가집에도 많이 수록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찬송으로 ‘천사 찬송하기를(새찬송, 통일 126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새찬송, 통일 23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새찬송 15장 통일55장)’이 수룩되어 있습니다. 엡워즈 목사관에서의 삶은 요한 웨슬레에게 귀한 신앙의 터를 닦아주고 오랜 추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과 영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서에 대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는 학문과 교회의 가르침, 기독교인으로서 필요한 훈련, 또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이 모두를 귀중히 여겼으며 목회 말년에 이르서는 엡워스에서 경험되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회상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교육과 목사안수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로서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1714년 상류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고 그 곳에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1720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1724년 졸업을 할 때에는 고전과 현대문학, 신학, 역사, 과학을 폭넓게 공부하였고 신약성경을 원어로 능숙하게 읽을 정도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우수한 성적을 올린 우등생이었습니다. 옥수포드를 졸업할 무렵에는 부모님의 권유로 종교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그가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졸업후에도 1726년 3월에는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뽑히는 영예로 인해 옥스퍼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연구원이 되면 특별 요청이 없는 한 캠퍼스에서 살아야 한다거나 대학에서만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기회로 인해 요한 웨슬레는 자유롭게 옥스퍼드를 떠나 상당한 기간 동안 아버지의 교회 일을 도와줄 수가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이 교회를 담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요한 웨슬레는 1728년 7월 옥스퍼드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는 하였지만 자신에게는 교구 목회가 적합하지 않음을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1729년 9월 웨슬레는 링컨 칼리지로부터 강의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옥스퍼드롤 돌아온 그는 옥스퍼드 학자로서의 동료간에 사이도 좋았고 운동을 잘하여 인기도 있었으나 그의 마음 저변에서는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동생인 챨스 웨슬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학생이 되어서 영적 성장을 목표로 옥스퍼드 대학의 다른 학생들과 소그룹으로 규칙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들의 초청으로 이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곧 그들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레 두 형제는 옥스퍼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기도와 성서연구와 봉사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대학가에 만연하고 있었던 도덕적, 종교적인 방종을 거부하고 대신 정규적인 신앙클럽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별히 요한 웨슬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꾸준히 기도생활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했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을 했습니다. 또는 그는 매주 성만찬에 참석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고 특히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매주 두 번씩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를 자신있게 질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하여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이 적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성례주의자’ ‘성경벌레’ ‘신성구락부’ 혹은 ‘규칙주의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결국에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단어에서 나온 ‘감리교인’이란 말이 이 후에 웨슬레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의 죽음과 조지아 선교여행 1735년 아버지의 별세후 요한과 챨스 웨슬레는 당시 영국교회의 선교기관이었던 복음전도협회(Society for the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로 자원을 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러한 선교사역이 초대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1735년 가을, 웨슬레 형제는 선교사 자격으로 영국의 새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에 있는 원주민들을 향해 떠나가게 됩니다. 새 식민지를 향해 항해하던 도중 선상에서 심한 폭풍을 만났는데 함께 탑승한 26명의 모리비안 교도들이 기쁘게 찬송하는 것을 보고 젊은 요한 웨슬레는 “어떻게 저들을 내가 갖지 못한 내적 평화와 위로를 지녔을까?”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두 달동안의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항해 끝에 그들은 1736년 2월 6일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요한 웨슬레는 적어도 3가지 목표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조지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둘째로 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셋째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 죠지아주에서의 요한 웨슬레의 경험은 환멸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웨슬레가 생각했던 것만큼 원주민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웨슬레는 성실하게 정열적으로 일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교사역에 냉담하거나 반항적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과의 접촉도 빈번하지 못했고 효과도 별로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 웨슬레가 섬긴 교구의 교인이었던 소피 합키라는 여인과의 불행한 사랑은 결국 대 배심원의 기소를 받게 되어 식민지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못된 1737년 12월 죠지아를 떠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동생 챨스는 그 때 이미 영국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 모라비안과의 만남 그러나 미국에서의 경험이 모두 부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지아로 가던 배안에서 식민지에서 머무는 동안, 또한 영국으로 돌아오던 때 배안에서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인 모라비안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루드윅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적인 지도하에 있었던 그룹으로 모라비언들은 영적으로 훈련된 내적인 긴밀한 교제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들이 보여주는 신앙과 위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그들의 확실한 신뢰와 체험을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레는 몇개월동안 영적으로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로 돌아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였으나 모라비언 친구였던 독일의 경건주의자인 피터 뵐레(Peter Boehler)는 웨슬레에게 설득하기를 자신이 찾고 있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이를 위하여서라도 계속 설교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의 신학은 내적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영혼을 뒤흔들만한 신앙의 체험으로 기독교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회심 1738년 5월 24일 저녁 요한 웨슬리는 내적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드디어 그가 바라던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의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위치한 어느 작은 기도 모임의 참석은 요한 웨슬레의 장래와 그의 사역 방향을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체험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모이는 한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할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고 그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같은 죄인의 죄마저도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일지, 1738년 5월 24일) 동생 챨스 또한 형 요한보다 삼일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올더스케이트에서의 회심 체험은 요한 웨슬레에게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큰 변화를 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모든 의문과 갈등을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던 요한 웨슬레에게는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하여 소망과 확신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었고 자신의 생애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심의 체험이 시험이라든가 의심, 절망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로부터 그를 완전히 해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정한 삶의 모습으로 믿고 있던 평안, 기쁨,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가끔 고백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올더스케이드의 체험을 통하여 그가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힘 주시는 은헤를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독일 헤른후트: 모라비아본부 방문 5월 24일의 회심 체험이후 요한 웨슬레는 독일 헤른후트에 소잭하고 있었던 모라비언 교도들의 본부를 방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곳에 몇일을 머물면서 그는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진젤도르프 백작과도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보여준 친밀함과 서로를 돌보는 마음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헤른후트를 방문한지 몇 달이 지난후에 모라비안교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역사를 기다리는데 너무나 소극적이라고 웨슬레는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회심경험을 앞당기기 위해서 기도, 성경공부, 성만찬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을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음을 잘못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738년 가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요한 웨슬레는 종교적인 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독서와 연구, 기도, 감옥 방문, 성만찬 집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설교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전력하였습니다. 그는 교구 목사로서 어느 한 교구를 맡아 안정된 목회를 하는 대신에 교회마다 다니면서 순회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회 전도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옥외설교시작: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 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희망을 잃었던 그들에게 말씀으로 희망을 되찾게 해주었고 의심에 가득찬 그들에게 확신을 갖게하고 종교가 한낮 차갑고 생명력 없던 일과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경건심과 뜨거움을 체험하도록 도와주었기에 일반 대중들은 웨슬레의 복음전파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반면에 웨슬리의 설교가 회중들을 사로잡고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되자 핍박과 비방도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기존 교회로부터 요한 웨슬레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일기장에 보면 그는 설교 도중에 계속 돌을 맞아 “세 번이나 쓰러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60차례에 걸쳐 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1739년 4월 요한 웨슬레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됩니다. 그의 친구인 죠지 휫필드의 권유로 교회 건물밖에서 곧 브리스톨 야외에서 처음으로 옥외설교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739년 복잡한 브리스톨(Bristol) 도시 외곽에 위치한 킹스우드(Kingswood)라는 곳에서 광부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늦은 오후였습니다. 혹독한 노동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친 광부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처음으로 이 광부들에게 옥외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용하셨던 똑같은 성경 본문(눅4:18-19)으로 광부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이렇게 일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후 4시에 나는 상식에서 조금 더 벗어난 일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도시에 접하고 있는 약간 높은 언덕에 서서 약 삼천명의 청중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내가 선포한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일지, 1739년 4월 2일)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습니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나왔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정도밖에 안되었는데 5번째 설교할때는 그곳에 1만명이 훨씬 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교회, 가정, 장터, 탄광 입구, 그 외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복음을 메시지를 들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250,000마일이나 순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도시, 마을, 농폰들을 순회했을뿐 아니라 북쪽의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규칙적으로 순회 전도를 다녔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도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 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50년동안 말을 타고서 250,000마일 이상 말을 타고 다니면서 지구 10바퀴 이상되는 거리를 다니며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틈에 2백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8주간동안에 무려 80번의 설교를 한 정력가였습니다. 그는 평생 4만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이 만든 사람: 요한 웨슬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늘 “하나님! 나에게 이 책을 주소서. 내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이 책의 메시지를 받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책이 참으로 나의 책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이 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웨슬레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 그의 목회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조직력: 속회의 시작 특별히 요한 웨슬레와 절친했던 조지 휫필드 목사 또한 웨슬레처럼 옥외 및 순회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개한 사람들을 계속 돌보는 영적 양육을 위한 별개의 조직이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요한 웨슬레는 회심한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양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 각계 각층에 속해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다양한 부류에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리교 설교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이 경험 이후에 술주정, 가정 폭력, 매춘, 범죄, 절망 가운데서 벗어나 사랑과 희망, 기쁨의 새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신앙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처럼 변화된 사람들이 은혜 안에서 성숙하고 성결에 이루도록 격려하는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이것이 후에 감리교인들의 조직이 되었습니다. 1739년 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습니다. 모이는 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Class Meeting)’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속회는 약 12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속회의 인도자인 속장과 만나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회원들은 자신이 경험한 시험이나 유혹을 이야기하고 잘못을 고백하며 관심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보다 신실한 삶을 위하여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감리교인들은 속회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속회에서 다른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발급하거나 갱신해 주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외에 영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신도들을 위하여 더 작은 모임은 ‘조(Band)’를 조직하였으나 이 조직은 속회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감리교 운동 초기에 웨슬레는 속회, 조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속회와 조 모임보다 큰 모임을 ‘공회’라고 일컫는다. 최초의 공회는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조직) 감리교 여성운동 감리교의 영적인 힘과 통찰력이 있는 속회와 조 모임의 인도자들의 지도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는데 그들이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라 크리스비, 도로시 다운즈, 그레이스 머레이는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새 생활을 시작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여성이 설교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787년에 그는 몇 명의 남성 설교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리교 설교자들이 따라야 했던 교리적 선포와 규율을 준수하는 한 남녀를 불문하고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1791년 그의 죽음 이후 여성 설교자를 반대하는 기운이 다시 감돌았습니다. 1803년 맨체스터 연회에서 여성 설교자에 대한 반대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되었습니다. 1) 감리교인들의 거의 대다수가 반대한다, 2) 모든 설교 장소에 보낼 만큼 충분한 남성 설교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여성은 반드시 여성들에게만 설교를 해야한다” 더군다나 설교하기를 원하는 여성은 미리 설교 전에 해당 지역의 감리사로부터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Minutes of Methodist Conference, 1803)(폴 칠코트는 그의 저서인 “She offered Them Christ:The Legacy of Women Preacher in Early Methodism”에서 감리교 운동의 초창기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감리교가 성장하면서 웨슬레는 평신도 전도자들을 자신의 조력자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공회를 하나의 구역으로 묶은 순회구역(Circuit)의 전임 순회 전도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여가를 이용해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연회의 기원- 첫 예배처소 브리스톨(Bristol New Room) 1744년부터 웨슬레는 설교자들과 매년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연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연회에서는 신학, 감리교 선교, 다음해 설교자 파송에 관한 회의를 하였습니다. 공회의 모임 장소로 고심하던 웨슬레는 1739년 초에 예배처소(Chaplel)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브리스톨에서 지어진 첫 번째 예배 초소는 ‘새 집’(New Room)이라고 부릅니다. 그 곳은 예배와 설교를 위한 장소일뿐 아니라 웨슬레가 브리스톨을 방문할 때 머물 수 있는 거처 공간도 있었습니다. 이 집은 현재 영국 감리교회가 관리하며 방문자들에게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39년 웨슬레는 화운더리라고 알려진 런던에 있는 옛 무기 제조공장을 구입하여 개조하고 그 곳에 채플, 살림집, 출판시설을 갖추게 됩니다. 이 곳은 감리교인들의 사회봉사를 위한 여러 형태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후에 감리교인들을 위한 채플들이 다른 도시와 마을에 설립되어 예배와 목회사역을 위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환자를 위한 진료소, 고아들을 위한 집,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뛰어난 조직력이 없었다면 그의 영향은 당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웨슬레는 교회를 분리할 의시가 전혀 없었고 오직 목표가 있었다면 그가 사랑하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데 그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평신도들은 신도회(Society)를 조직하여 성서연구, 기도, 신앙훈련,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웨슬레 운동은 급속히 성장하여 성직자가 모자랐고 회중들에게 설교를 해줄 수 있는 순회설교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순회설교자들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말씀을 전파함과 동시에 속회를 인도하고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744년 요한 웨슬레와 챨스 웨슬레, 그리고 같이 일하던 4명의 영국 교회 성직자들과 4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여서 연회(Conference)를 조직하게 됩니다. 1791년 웨슬레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영국에는 313명의 목사와 76,968명의 신도가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목회자와 56,621명의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도전과 위기, 신학적 논쟁 영국교회의 목사와 평신도중에는 감리교 지도자와 평신도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특히 감리교 운동 초기에는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영국교회에서 허락하지 않는 야외설교를 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웨슬리의 죄악에 관한 단순한 논리와 복음주의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 선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체험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레가 평신도 전도자를 등용한 것이라든지 교구의 경계에 제한되지 않고 여기 저기 순회하며 하는 설교를 불쾌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자들 중에는 자기 부인들이 감리교 채플에서 보내며 아픈 사람들을 심방하는 등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정밖에서 쓰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웨슬레가 가정의 가치를 침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영국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영국교회를 분열시키려고 노력하는 위장된 카톨릭 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감리교인들은 만화와 풍자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웨슬레와 그의 설교자들과 감리교인들에 대한 폭도들의 폭력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극렬한 핍박은 그쳤지만, 예정론과 자유의지, 신앙과 이성간의 관계, 이 세상에서의 온전으로의 가능성, 감리교인들이 강조하는 종교적인 체험, 감리교인들이 영국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 하는 문제들을 놓고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었습니다. 다른 문제들이 요한 웨슬레의 삶에 암운을 드리웠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정문제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결혼생활과 지도력 1748년 웨슬레는 자신보다 13살 연하의 감리교 신자이며 과부인 그레에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결혼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지만 챨스 웨슬레의 방해로 인하여 그레이스는 다른 감리교 설교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절망에 빠진 요한 웨슬레는 자기 동생의 결혼 방해에 극도로 화가 났었고 이 일로 인해서 형제간의 관계는 거의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1751년 2월 결혼을 했지만 이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메리 바제이, 혹은 몰리라고 부르는 뷰유한 상인의 미망인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못되어 그는 부인과 갈등을 겪게 되어 외부사역에 신경을 쏟고 가정과 부인에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몰리는 요한 웨슬레가 계속해서 집을 비우고 다른 많은 여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1757년부터 두 사람은 몇차례 별거를 하였습니다. 결국 아내가 1781년 사망할 때에도 웨슬레는 외출중에 있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레가 감리교 운동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독재를 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는 감리교가 자신의 꿈과 이상에 맞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끌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예외없이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질때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그에 의하면 감리교운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이런 운영 방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감리교인들은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당시 영국 감리교회를 향해 “나는 메도디스트(Methodist) 즉 감리교회라고 불리는 교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단지, 그 교회가 능력이 없이 종교의 형태만 지닌채 한낱 죽은 단체로 전락할까 봐 염려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영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영성 88세의 생신을 맞은 요한웨슬리에게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교인으로써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증거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한 유명한 목사가 영국을 여행하던 중 웨슬레의 고택과 집무실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던 기도실로 들어간 그는 마룻바닥에 쥐구멍 같은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은 무슨 구멍입니까?” “목사님 생각에는 무슨 구멍 같으세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혹시 쥐구멍이 아닌가요? 맞습니까?” “천만에요. 저것은 웨슬리 목사님의 기도의 흔적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던지 웨슬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그 마룻바닥에는 쥐 구멍같은 무릎 자국이 구멍처럼 뚫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새벽 4시에 두 시간씩 기도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규칙적으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기도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빛을 띤 청명한 얼굴로 기도실에서 나오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웨슬레는 하루에 두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바침으로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샐리커햄이란 여성 중보기도사역자가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자신이 이 중보자를 만들었다고 고백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고 준비하셔서 자신에게 보내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 클라크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때 역풍을 만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웨슬레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판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역풍이 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클라크 박사와 함께 “그러면 기도합시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웨슬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당신은 어느 곳에서나 주관하시며 만물은 당신의 뜻을 섬기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손으로 바람을 움켜쥐시고 홍수도 잔잔케 하시며 영원히 왕으로 군림하시나이다. 이 바람과 파도에 명하시어 당신께 복종케 하사 우리가 갈 항구로 빠르고 안전하게 우리를 데려가게 하소서 !” 모든 사람이 웨슬레의 기도에 힘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웨슬레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아무 말없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었습니다. 클라크 박사가 갑판으로 올라가보니 놀랍게도 배가 다시 제대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그 후 줄 곧 순항하여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바람이 갑자기 순조로워졌을때에도 웨슬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으리라는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위해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목사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첫째,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둘째, 너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셋째,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넷째, 너는 욕심내는 것이 없는가? 다섯째, 너는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가? 여섯째, 너는 네 중심에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일곱째,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요한 웨슬레의 마지막 순간 요한 웨슬리가 1791년 2월 14일 죽기 6일전에 영국 노예매매제도에 대항했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이런 편지를 썻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과 사단의 공격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과연 누가 그대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이 편지가 월버포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후인 1807년 영국의회는 마침내 노예매매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1807년 ‘노예 매매 폐지법’과 1833년 ‘노예 해방 법령’통과는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1791년 2월말 88회의 생일을 앞두고 요한 웨슬레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그의 침상 주변에 모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그는 아이삭 와트의 찬송가 ”내 생명 다할 때, 말할 수 있을때까지, 내 창조주 찬양하리“를 불렀습니다. 너무나 약해진 웨슬레는 ”내 찬양하리….내 찬양하리“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최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1791년 3월 2일 아침,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남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 동안 벌은 돈의 거의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남은 재산이라곤 겨우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 자신의 관을 런던에 있는 감리교 예배당 뒤뜰에 있는 묘지로 운반해 준 여섯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수고비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기도와 전도운동, 드림과 사회정화운동을 위해 헌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경건과 거룩의 삶, 성화의 삶을 사시다가 1791년 3월 2일에 53년의 전도사업을 마치고 88세를 일기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이란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속에서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통해 대규모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던 종교개혁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모든 때를 찾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선을 행하라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라고 말함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드림으로써 온전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2013년 5월 24일은 요한 웨슬레 회심 275주년 기념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프랑스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는 “18세기 요한 웨슬레에 의해 일어난 감리교회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개혁시켰으므로 불란서와 같은 유혈혁명이 영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사회와 국가의 희망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유산을 그로부터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서 끝없어 보이는 고민과 싸움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요한 웨슬레처럼 될 수는 없지만 요한 웨슬레가 남기고간 그 위대한 정신과 신앙만은 우리가 계승시켜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죽어가는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사람, 이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저 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된 한 사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요한 웨슬리 부흥 전도운동이 필요합니다. 제2의 요한 웨슬리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글 정리: 장재웅목사) Reference(참고자료) 챨스 유리긴, Jr ‘존 웨슬리:성결한 삶을 위하여’ John Hampson, ‘Memoirs of the Late Rev. John Wesley’, London 1791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 Nashville:Abingdon Press, 1995 Paul W. Chilcote, ‘She Offered Them Christ: The Legacy of Women Preachers in Early Methodism’ Nashville:Abington Press, 1993, 144page Albert C. Outler, ‘Theology in the Wesleyan Spirit’, Nashville: Discipleship Resources, 1975 Albert C.Outler and Richard P.Heitzenrater, editors, ‘John Wesley’s Sermons: Anthology’, Nashville:Abingdon Press, 1991 This entry was posted in 자료실 Source Bo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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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기별과 복음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며, 미래를 향한 문을 열어준다. 이것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인 E.H. 카의 역사관이 반영된 표현이다. 존 웨슬리의 생애는 오늘날 감리교회의 원형 이며, 미래를 향한 감리교회의 비전 이다.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규범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장재언) 하버트 웨슬리 (도싯셔의 귀족) 바톨로뮤 웨슬리(1595~1680) 옥스퍼드대 졸, 비국교도 목사 웨스리의 증조부 존 웨슬리(1636~1678) 옥스퍼드대 졸, 비국교도 목사 웨슬리의 조부 사무엘 아네슬리(1620~1696) 옥스퍼드대 졸, 비국교도 목사 수산나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1662~1735) 옥스퍼드대 졸, 성공회 목사 웨슬리의 아버지 수산나 앤슬리(1669~1742) 웨슬리의 어머니 1 사 무 엘 2 세 2 수 산 나 ⁀ 유 아 기 에 사 망 ‿ 3 에 밀 리 아 4 아네슬리 ⁀쌍둥이 / 유아기에사망‿ 5 제 디 댜 ⁀ 쌍 둥 이 / 유 아 기 에 사 망 ‿ 6 수 산 나 7 메리 8 메 히 터 블 9 무명⁀출생직후사망‿ 10 존 ⁀ 출 생 직 후 사 망 ‿ 11 벤 저 민 ⁀ 출 생 직 후 사 망 ‿ 12 무 명의 쌍둥이⁀출생직후사망‿ 13 무 명 의 쌍 둥 이 ⁀ 출 생 직 후 사 망 ‿ 14 안 15 존 16 무 명 ⁀ 출 생 22 일 만 에 사 망 ‿ 17 마 르 타 18 찰 스 19 케 지 아 웨슬리의 가문과 계보 1.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Джон Уэсли детства )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잉글랜드 북부의 링컨 주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인 엡웟(Epworth)에서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사제 사무엘 웨슬리와 경건한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사이의 19자녀 중에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19명의 형제자매가 태어났으나 그중에 9명의 형제자매는 어릴 때 사망하고 10명(형제3, 자매7)만 생존하였다. 여기서 잠깐 웨슬리의 어원을 알아보도록 하자. 1066년 영국 동남부에 있는 해스팅스에서 일명 센라크라고 하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들이 모두 생명을 잃게 되자, 과부가 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서머싯 백작의 영지 안에 있는 웰스베(Welswe) 또는 웰스레(Welslegh)라는 농장으로 피신하였다. 이 지역은 영국 서남 해안에 있는 도싯셔에 속해 있었다. 1420년 이후부터 웰스베 또는 웰스레가 웰레슬레(Wellesleigh)로 변했으며, 그 후 웰레슬리(Wellesley)와 웰스리(Welsly)라고 불렸다가 1539년부터는 웨슬리(Wesley)로 불리게 되었다. 발음이 잘못되어 한때 웨스트리(Westley)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존 웨슬리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세상적인 의미의 명문가가 아니라 신앙과 경건에서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가 명문가였다. 웨슬리가의 뿌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따르면 친가 선조들은 중세기부터 대대손손 성직자가 많았고, 학자와 의사와 시문학가가 많았을 뿐 아니라, 음악 그리고 충성심과 특별히 중세기를 지나면서 존 웨슬리 가문에서는 유명한 기사( 騎士 , chivalry)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렇게 기사도 정신을 탁월하게 갖추고 국가와 교회와 사회를 지켜온 하나님의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다. 존 웨슬리의 외가도 영국 교회사에 빛나는 명문가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 박사(1620~1696)는 옥스퍼드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민법학 박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어 런던에서 대표적인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선조의 신앙 전통을 따라 비국교도의 길을 택하였고 청교도의 대부라 불릴 정도로 청교도 운공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 이렇게 존 웨슬리의 선조들은 돈과 부에서 가난했으며, 세속적인 명예와 세속적인 권력에서도 가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과 고독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경건과 학문과 성직을 온전히 지켰으며, 후손에게 거룩한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실로 존 웨슬리는 우리 모두가 흠모할 만하며 교회사에서 빛나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과 어머니 수산나는 청교도 전통의 기독교 신앙을 지닌 가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무엘이 성공회로 전향한 후, 교리의 문제로 사무엘과 수산나는 종종 가정에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어머니 수산나는 매우 강직한 신앙과 자녀에 대한 엄격하고도 교양 있는 교육으로 존과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수산나는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 세 가지 원리의 철저한 규칙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규칙의 철저한 준수이고, 둘째는 철저한 통제성, 셋째는 빈틈없는 기민성이다. 수산나에게 받은 어린시절의 교육은 이후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09년 2월 9일 목요일 밤 11시 엡웟 목사관의 화재(Fire)는 존 웨슬리의 평생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소명의식을 지니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 화제에서 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화재의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불만을 품은 교구민들이 방화하였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엡웟에서의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엡웟 주민들은 존의 아버지 사무엘의 목회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자신들의 토지를 개간하여 1/3은 왕이 차지하고, 1/3은 개간한 회사가 차지하고, 나머지 1/3을 주민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엡웟 주민들은 왕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러므로 토리당(왕실)의 비호를 받는 사무엘 웨슬리가 엡웟에 들어오자 주민들은 사무엘과 수산나의 접근을 싫어하였고, 가능한 한 웨슬리 집안을 괴롭혔다. 주민들은 사무엘의 가정이 경작한 농작물을 불태우고, 젖소를 찔러 죽이거나 가축을 불구로 만드는 등 박해를 가하였다. 이 화재 사건을 통해, 웨슬리는 후에 자신의 생명은 “불 속에서 꺼낸 타다 남은 막대기”(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 бренд вынул из горящего )로 부르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이후로 마을주민들은 화재 속에서도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무엘가족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웨슬리의 어릴 때의 삶은 정말 가난하고 어려운 삶이었다. 그런 중에도 사무엘과 수산나는 자녀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사무엘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웨슬리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전문학을 가르쳤고 애정 어린 친구이자 선생으로서 편지를 통해 그를 양육하였다. 특히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어 웨슬리에게 독서를 장려하였다. 존 웨슬리가 8~9세 사이에 천연두를 앓았다. 당시에 천연두는 모든 어린아이가 앓는 병이었으며 또 많은 아이들이 이 질병으로 죽었다. 존 웨슬리도 천연두에 걸려 아주 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남자답게 또 그리스도인의 용기로 잘 참아내었다. 이렇게 어머니인 수산나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싸워야 했지만 언제나 온순하고 엄격하였으며 어머니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 수산나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존 웨슬리의 모든 것은 어머니의 교육 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어머니의 신앙 지도와 교육적 영향은 일생 동안 계속 되어 그의 삶의 목표와 방향, 그리고 모든 생활방식을 이끌어 갔다. 특별히 어머니 수산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존 웨슬리는 어머니 수산나의 ‘규칙에 따라서 생활하는 훈련’(disciplined life according to the rules/ дисциплинированную жизнь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правилами )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주일성수, 부모에게 순종하기, 잠자리에 드는 것, 일어나는 것, 식사, 기도, 독서, 공부, 노는 것, 일하는 것 등 하루의 모든 생활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하였으며, 모든 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어머니를 통하여 받은 규칙에 따르는 엄격한 생활 교육이 웨슬리의 인격 형성과 영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자신의 모친 수산나를 위대하게 보았다.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깨끗하며 정숙한 여인이었다. 웨슬리는 여성에 대해 깊은 존경심과 신뢰를 가졌는데, 이런 태도는 그의 모친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정신적 위기와 신학적 의문에 빠졌을 때 박식했던 수산나에게 직접 또는 서신을 통해 상담하는 것이 웨슬리에게는 기본적이 삶이었다. 이와 같이 존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 영국 고교회 경건주의 신앙을 이어받았으며, 아버지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교구 목사의 아내로서 교구민들의 어머니 역할을 잘 해내면서 동시에 많은 자녀의 교육에 헌신적인 생애를 살았던 메도디즘의 어머니다. 그녀는 교회사에 빛나는 세 아들을 키워낸 인류역사에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다. 2. 차터하우스 학교에서(1711~1720) 초등학교 교육의 어머니의 가정학습(home schooling/ домашнее обучение )으로 마친 존 웨슬리는 1714년 1월 28일에 런던에 있는 명문 사립 기숙학교(boarding school/ школа – интернат )인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e School)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 학교는 1611년에 카투시안 수도회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설립된 이래 현재까지 영국에서 가장 우수한 명문 사립학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카투시안 수도회는 1084년 프랑스의 신비주의 성자 브르노(St. Bruno, 925~965)가 세운 엄격한 관상 수도회로서 세속에 대한 완전한 죽음과 포기를 추구하는 수도 규칙을 갖고 있었다. 이 수도회의 영성생활은 베네딕토 수도 생활과 은둔적인 금욕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존 웨슬리가 이 학교의 학생이 된 것은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고생도 많이 하였다. 당시 영국의 기숙학교 생활은 여러 면에서 고생스러웠다. 엄격한 규율생활과 무거운 학과 공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교의 음식도 별로 좋은 수준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상급생들이 하급생들의 고기를 모두 빼앗아 먹었기 때문에 존 웨슬리는 10!14세까지 고기를 전혀 먹지 못했다. 오로지 빵만 먹었는데, 빵도 충분히 먹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 사무엘은 집을 더나 고생하는 아들에게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큰 유익이다.’( Он нес ярмо молодого человека на будущее является большим преимуществом .)라고 말하면서 격려하였다. 존 웨슬리는 신앙과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잘 이겨내면서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로 성장해 갔다. 존 웨슬리는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어떠한 경건 훈련을 받았을까? 존 웨슬리의 차터하우스 학교생활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수도원 학교에서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주일에는 수도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경건의 훈련을 하였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는 이 당시에 엡웟에서 지켰던 경건을 많이 상실하였으며, 경건생활에 게을러져서 죄의식에 빠졌다고 회상했다. 아마 존 웨슬리는 이 학교에서 경건생활에 게으르고 방탕한 다른 학생들을 보면서 일종의 영적인 혼란과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존 웨슬리는 혼자서 규칙적인 경건을 지키려고 단호한 결심을 하고 성경 읽기와 영국 국교회의 기도문을 가지고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하는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환경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규칙을 세워 실천하였다. 첫째, 다른 아이들처럼 나쁘게 되기 않는다. 둘째, 무엇보다도 경건생활을 즐거워한다. 셋째,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여하고,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 차터하우스에서 존 웨슬리는 분명히 다른 학생들보다는 경건 훈련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엄격하고 따뜻한 지도를 받던 가정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그에게 차터하우스는 역시 하나의 도전이요 위기였다. 엡웟에서의 생활은 따뜻한 온실과도 같으며, 세상의 유혹과 시련이 닿을 수 없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차터하우스는 아주 다른 곳이었다. 차터하우스에서부터 존 웨슬리는 광야와 같이 험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존 웨슬리는 갓 나온 어린 성자와 같았다. 그는 여기서부터 세상이 주는 죄악의 유혹을 받으며 그 세력과 싸워야 했고, 대로 영적 전투에서 오는 시련과 고난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훈련되고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웨슬리는 차터하우스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축복도 많이 받았다. 3. 옥스퍼드에서의 경건 운동( Религиозные учения в Оксфорде )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 분야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합리주의는 기독교를 도덕 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18세기 말 영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 될 산업 혁명의 시작이 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산업 혁명의 영향 역시 기독교에 미치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가속화 시켰다. 그러나 18세기 초는 경건한 복음주의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윌리엄 로오는 합리주의적인 기독교인 “이신론”에 반대하며, 존 웨슬리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웨슬리는 1720년에 옥스퍼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클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724년에 인문학 학사를 받고, 1725년 9월 19일에는 영국 성공회 감독 포터에 의해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존 웨슬리는 1726년 3월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대학의 펠로우(Fellow, 연구교수)로 임명되고, 1728년에는 엘더 목사 안수를 받아서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 임명된다. 이 시기에 장차 영국을 변화시킬 감리교 운동의 씨앗이 웨슬리의 삶에 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일기쓰기와 독서였다. 1725년 4월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존 웨슬리의 영적 일기는 그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초기 감리교 운동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메도디스트 운동은 존 웨슬리가 아니라 동생 찰스 웨슬리 가 시작 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매 주일 저녁에 두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성경과 경건 서적 을 읽고 대화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1729년 11월 말경에 존 웨슬리가 옥스퍼드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고 동시에 그의 영적 생활의 증진을 돕는 조력자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존은 동생이 시작한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옥스퍼드의 신성클럽(Holy Club/ Святой клуб )이다. 이 모임은 학문연구와 경건의 훈련 즉 기도와 성서 읽기와 성만찬 받기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옥스퍼드 메도디스트들의 모임인 신성클럽이 처음 생겨난 이야기이다. 신성클럽은 존 웨슬리의 영적 학문적 지도력에 의하여 가장 건전하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경건 훈련 모임으로 발전하고 후에 위대한 메도디스트 운동을 낳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성클럽 회원들이 처음에 한 것은 매주 3~4회 저녁에 모여서 고전을 읽고 주일에는 신학을 읽으며 학문과 경건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들의 독서 목적은 학문의 발전과 경전의 증진을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로 그들의 관심은 규칙적으로 함께 모여서 독서와 대화와 기도를 함으로써 서로의 경건을 증진하는 일에 모아졌다. 신성클럽은 처음에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여 경건의 훈련을 더하고 더불어 사랑의 실천을 필수적인 활동으로 삼는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옥스퍼드 신성클럽은 학문과 경건과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모였으며, 동시에 이러한 일은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그 다음 교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성화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기독교를 소유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추구하였다. 당시 메드디스트라는 이름은 신성클럽의 회원들을 조롱하여 일컫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이 별명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였고, 신성클럽 회원은 모두 다 열성적인 신자들로서 어떤 경우에도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경건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옥스퍼드 대학의 모든 규정을 열성적으로 지키는 사람들로서 이러한 이름에 꼭 어울린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옥스퍼드의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진 별명 “ 규칙쟁이”(Methodist/ Методист )는 처음에는 조소하고 모욕하기 위해서 얻은 이름이 후일에는 거룩하고 명예로운 이름인 감리교회의 명칭이 된다. 메도디스트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로마 네로 황제 시대부터이다. 이때 특별한 방법의 의술을 사용하여 병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그 의사들은 자신들의 식이요법 의술이 만병통치의 길 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메도디스트는 본래 의학이나 의료 기술에 관련된 용어였다. 옥스퍼드 신성클럽은 인간의 병든 마음과 삶의 불행, 그리고 사회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민족의 고통을 치료하는 특별한 규칙과 방법을 발견하고 실천하였던 새로운 메드디스트 들이었던 것이다. 옥스퍼드 메도디스트들은 인간의 죄악과 모든 불행을 치료하기 위하여 영적인 의술과 영적인 식이요법을 실천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존 웨슬리는 신성클럽 회원들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온전히 맞는 것이면 지켰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성경에 맞지 않으면 지키지 않았다 고 말하면서, 바로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한 가지, 곧 ‘ 성경 그리스도인 ’(bible Christian/ Библия Христианская )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성경 그리스도인’이란 성경을 초대교회가 해석한 대로 따르면서 성경을 모든 신앙과 삶의 전적이고 유일한 규칙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모임은 모든 신앙과 생활에서 성경을 최우선적 권위와 표준으로 삼으며, 성경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활에 완전히 일치하고,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규칙과 법을 순전하게 지켜 완전한 성결, 즉 마음과 생활의 성경(holiness of heart and life)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1735년에는 위대한 복음 설교가 조지 휘트필드가 “신성클럽”에 가입하였다. 조지 휘트필드는 이후 존 웨슬리와 결별하였지만,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 조지아 선교 시대( миссии Джордж в эпоху ) 존 웨슬리 형제는 1735년 10월 14일 영국 여객선 시몬즈 호에 119명이 타고 그레이브센드 항구를 떠나 미국 조지아 선교를 떠나게 된다. 존 웨슬리가 선교사로 가게 된 동기 가 무엇일까? 그가 미지의 땅 조지아를 향해 떠날 때 선상에서 쓰기 시작한 여행 일기와 편지에 조지아 선교의 동기가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Во – первых , для спасения своей души .) 조지아는 옥스퍼드보다 자신의 성결을 이루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것이었다.( Во – вторых , полное славы Божией было жить .) 그의 일기를 보면 [우리가 순수한 땅으로 자는 목적은 무슨 물질적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족한 복을 주셨다. / Бог благословил нас с избытком .) 배설물 같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요, 오로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기 위한 것뿐이다.] 셋째, 자신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자가 없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В – третьих , это не его место , чтобы привлечь красивая женщина , которая собирается .) 존 웨슬리는 조지아야말로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환경이며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즉 조지아는 영국과 같은 문명세계와 달라서 자신이 죄를 짓도록 유혹할 만한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거기에서는 자신이 유혹 당할 만한 아름다운 여자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만큼 존 웨슬리는 죄악을 완전히 벗어버리고자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넷째, 인디언 부족들을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В – четвертых , индейцы пытались сохранить .) 그곳은 타락 이전의 에덴과 같은 곳이라고 상상했다. 다섯째, 거기서 더 많은 선을 행하려는 것이었다.( В – пятых , было больше делать то , что это хорошо .) 이와 같이 존 웨슬리는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는 동기와 그 목적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즉 인생의 목표인 완전한 성결을 이루기 위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설려고, 자기를 유혹할 만한 매혹적인 여자가 없는 세계를 찾아서, 많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더 많은 선생을 실천하려는 거룩한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시몬즈 여객선은 영국을 떠나 57일 동안 대서양을 항해하여 조지아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대서양 항해는 대단히 무섭고 험난한 항해였다. 그러나 존 웨슬리 형제 일행은 57일 동안 배 안에서도 옥스퍼드 메도디스트 규칙대로 생활하였다. 그들은 옥스퍼드 메도디즘의 세 가지 거룩한 일, 기도와 연구와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규칙을 세우고 시간표를 만들어 항해 시작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지키며 매일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멀고먼 미지의 신대륙을 향한 길고 험난한 57일간의 대서양 항해가 시작되었다. 니치만 감독을 포함하여 독일의 보헤미아 지방과 모라비아 지방에서 온 26명의 모라비아교인들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메도디스트들의 눈길을 끌며 깊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 당시 대서양 항해는 항해 도중에 많은 여객선과 무역선이 폭풍과 태풍에 난파되고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생명을 내건 위험한 항해였다. (— 모리비아교의 기원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존 허스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보헤미야 종교개혁자 허스의 신앙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이 박해를 피하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땅에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그들은 1457년에 허스가 가르치는 영적 교훈과 사도적 규범을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협회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모라비아 형제단’이다. 이후 그들은 카톨릭의 박해를 피하여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지방으로 흩어져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1722년에는 진첸도르프를 만나게 되어 독일 헤른후트에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지도자가 된 진첸도르프는 이들의 신앙운동을 루터교회 개신교 신앙과 접목시켜서 하나의 개교회 경건주의 신앙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을 모범으로 삼아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철저한 경건생활을 실천하였다. 이들은 카톨릭교회의 경건주의인 수도원 영성생활과는 다르게 그것을 대신하는 독특한 개신교 경건주의를 형성하여 발전시켰다. 이후로 헤른후트는 개신교 경건주의의 본산지가 되었으며, 여기서부터 개신교 경건주의는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도는 1467년 독일에서 시작된 개신교 운동으로 성서의 권위, 개인구원, 십자가의 구속을 강조하는 신앙공동체이다.) 시몬즈 호는 크게 세 번의 폭풍우와 한 번의 태풍을 만났다. 항해 중 폭풍을 만났는데 이때 바닥에 넘어진 메도디스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찬송소리를 들었다. 바로 곁에서 독일 모라비아교인들이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비아교인들은 비에 젖고 바람에 넘어지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존 웨슬리는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았다. 같은 시간에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교인들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예배를 막 끝낸 그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Вы боитесь ?) 그 사람은 ‘네 두렵지 않습니다.( Да , я не боюсь .)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 Скорее , мы просто поблагодарить Бога .)’라고 대답하였다. 존 웨슬리가 다시 ‘당신들 중에 있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Женщины и дети составляют часть тебя Не бойтесь , что ли ?)’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네, 우리들 중에는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도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Да , наших женщин и детей , пока они не боятся умирать вообще .)’라고 대답하였다.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며 울고 있는 영국 교인들에게로 가서 ‘저기 모라비아교인들을 좀 보십시오 ( Посмотрите на все из них выглядят Моравии .).’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영국 교인들과 모라비아교인들의 분명한 차이점을 말해 주었다. 이때 모라비아교인들의 대답은 존 웨슬리에게 폭풍보다 더욱 강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차이점은….. 첫 번째는 자신을 포함하여 메도디스트들은 기독교의 외면적 신앙(outward religion/ внешней религии )은 소유했지만, 내면적 신앙(inward religion/ внутренней религии )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Методисты , в том числе внешней христианской веры , владелец , но не имеют внутренней веры . 자신들은 경건의 규칙과 습관이 있고 예배와 성찬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 религия сердца )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감동과 감화를 받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속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속죄의 은총을 마음속에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체험적인 신앙이 없었다( Это не религиозный опыт ). 두 번째는 모라비아교인들은 기쁨으로 마음껏 찬송을 부르는데, 자신들은 부를 찬송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Мораваки пела от радости , хвалить себя , не было его хвалить был вызов . 자신들은 기도문과 예배순서는 있지만 마음의 찬송이 없었다. 자발적으로 마음껏 소리 내어 외쳐 부르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노래가 없다는 것이 커다란 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경건의 규칙과 의식을 중시하는 외면적 신앙만 가지고는 참다운 신자가 되기에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마음의 신앙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경험하였다. 통해 목격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침착한 태도와 경건은 존 웨슬리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의 선교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 아이들, 그리고 인디언들의 교육과 구제에 힘을 썼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를 임명하고, 즉흥적 설교와 즉흥적 기도를 예배에 도입하여 예배의 갱신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존 웨슬리는 열정과 헌신과 사명감은 충만했지만 너무나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에 맞추어 일하는 경험과 지혜가 부족했다. 존 웨슬리가 선교사 생활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복은 모라비아교인들을 만난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존 웨슬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섭리요 은혜라고 생각된다. 조지아 선교는 실패라지만 모라비아교인들과의 만남은 위대한 존 웨슬리를 만들었고, 위대한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어떻든 유럽에서 이주한 현지인들과 인디언들과의 어려운 관계, 소피아 홉키 양과의 결혼 좌절 등으로 1737년 12월 2일 발에 먼지를 털고 조지아를 떠나게 된다. 존 웨슬리의 조지아 선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첫째, 존 웨슬리의 충성되고 창의적인 목회를 통해서 사반나의 영국인 교회가 부흥하였다. 둘째, 조지아 선교에서 존 웨슬리가 얻은 최대의 소득은 모라비아교인들을 만난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 религия сердца ), 순회 설교 방식(circuit/ цепь )과 속회(class meeting/ классное собрание )와 애찬회, 그리고 즉흥설교( Экспромт проповеди )와 즉흥기도( Экспромт молитвы )와 마음의 찬송 부르기( Пение похвалы ума ) 등 모라비아교인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배우고 새롭게 도입한 것들은 존 웨슬리에게 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하여 신선하고 든든한 기초를 놓았으며, 그 후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실을 거두었다. 셋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에서 바쁜 생활 중에도 독서에 열중하였다. 특별히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를 깊이 연구하고 어거스트 프랑케 등 경건주의자와 신비주의 영성가들의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영성은 더욱 깊고 풍부해졌다. 넷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 경험을 통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그가 이전에 가졌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그는 자연적 인간을 너무나 선하게 보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담의 타락 이전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죄악 된 인간성을 경험하고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라는 성경적인 인간 이해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수정은 그의 구원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섯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또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 많고 약한 존재인가를 깊이 경험하였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떤 선한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여섯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 경험이 메도디즘 탄생의 두 번째 단계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리를 조지아로 부르셔서 이 모든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모리비아교인들을 만나도록 인도하셨으며, 이로써 그가 올더스케이드로 나아가고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무서운 시련을 당하고 크나큰 실망을 안고 돌아온 존 웨슬리는 ‘인간의 방법이 다하고 이성이 실패하는 곳에서 그의 방법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믿으면서 쓰라린 상처를 달랬다. 조지아 선교가 처음의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음에 그가 갈 길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갖고 그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5. 회심 이후 감리교 운동 ( Методист движения после его преобразования ) 1738년 2월 1일 영국에 도착한 후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실패로 끝났다는 좌절감에 빠졌고, 또 소피아와의 연애 사건은 생각만 해도 배신감과 모욕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이 파멸에 이르렀다는 불안과 절망적인 생각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심정으로 힘없이 런던을 향했다. 런던에 도착한 그는 모라비아교인들의 지도자인 피터 뵐러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의 일기에서 ‘그와 친분을 쌓으며, 나는 나의 믿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즉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saving faith/ спасительной веры )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존 웨슬리는 자신이 무엇을 갖지 못했는지 발견하였다. 피터 뵐러는 대화 속에서 존 웨슬리에게 계속해서 성경으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 Вера в спасение )을 소유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얻는 구원( Спасение верой )’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뵐러에게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Как получить веру , чтобы иметь возможность спасения ?)고 물었다. 뵐러는 먼저 ‘회개하고 그 믿음을 얻기를 구하라/ Ищите покаяния и веры , чтобы получить’고 하였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소위 순간적 회심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신이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동반한다. 존 웨슬리는 이제 자신이 갖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채 그러한 신앙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뵐러에게 물었다. 이때 뵐러는 존 웨슬리에게 결코 설교를 중단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Preach faith till you have it./Проповедовать веру , пока вы получите его .) 그리고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 И как только они получают вера , что вера получила проповедь , пожалуйста .)’라고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계속해서 뵐러는 존 웨슬리에게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확신’(a sure trust and confidence/ уверен , доверие и уверенность )이라고 말하였을 때 존 웨슬리는 마음 깊이 감동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요약한 핵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뵐러와 다른 모라비아교인들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한순간에 주어지며 이로써 죄와 저주로부터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을 누리는 상태로 변화한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이러한 순간적 회심의 교리를 부인하고 수용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5월 24일 그날까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은사를 얻기를 사모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직까지도 조지아의 어둡고 슬픈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방황하고 있던 존 웨슬리에게 5월 21일, 동생 찰스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고 죄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경험하는 회심을 체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두 형제가 회심을 체험하는 모습은 많이 다르다. 존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기 위해서 성경과 경험에 비추어보는 지적인 노력에 집중하는 반면에 찰스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감성적인 요소가 짙다.) 그런데 동생과 달리 존은 아직도 자기 죄를 슬퍼하는 영혼이었으며, 그의 마음을 한없이 무거웠다. 그는 자신의 선행과 의와 기도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만한 공로가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여, 자신이 받을 만한 것은 오직 저주와 형벌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에서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Доверие , то будут сохранены .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 Тот , кто считает , будут переданы из смерти в жизнь .”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네틀톤 코드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신도회의 기도회에 갔다. 존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모라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날 저녁 8시 45분쯤에 아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케이트 신도회의 집회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듣는 중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는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뜨거운 영적 회심을(conversion/ преобразование ) 하였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케잍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8시 45분,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존 웨슬리 “회심의 날 일기” 중에서) 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 이전에도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신칭의 교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교리가 성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진실한 것인지를 자신이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였다. 존 웨슬리는 신앙에서 경험을 중시했다. 어떠한 신앙이라도 경험을 통해서 그 진실성과 정통성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에 경험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속에 깊이 느끼는 마음의 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가르쳤다. 마음의 신앙은 “마음이 뜨거워짐”(warm-heartedness/ сердечность )으로 시작해서 자라난다. 신앙은 신비함이다. 머리와 이성만으로 다 이해되지 않는다.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 증명하고 믿겠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음 뜨거움’(warm-heartedness/ сердечность )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특징이다. 그것은 메도디스트의 힘이요 매력이요 멋이다. 마음의 신앙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영원한 은사이고 전통이다. 마음의 뜨거움을 강조하는 마음의 신앙은 처음부터 메도디스트 신앙에 생동감과 역동성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주었다. 만약에 존 웨슬리가 마음의 신앙을 경험하지 못하고 마음의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18세기에 영국의 부흥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을 오로지 은혜를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 발견하였다. 즉 올더스케이트에서 마음이 뜨거워진 체험으로 그의 모든 신앙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올더스케이트에서 체험한 것으로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얻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оправдании верой )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지, 성화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올더스케이트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시는 대속의 은혜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assurance/ уверенность )하게 되는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지 그의 마음과 성품과 생활까지도 완전히 성화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생애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우심에 자신을 맡기면서 믿음과 순종의 행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즉 순간순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동시에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존 웨슬리의 올더스케이트의 회심 의 의미는? 첫째, 회심 전에는 종의 믿음을 가졌으나 회심 후에는 아들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Имея веру в виду до преобразования , а после своего обращения в веру в Сына получил . 둘째, ‘거의 된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почти христианские )에서 ‘전적인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 всего христианского )으로 변하였다. 셋째, 율법주의 신앙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온 것이다./ Легализмом в евангелической веры , веры не вернется . 넷째,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 구원관(인간의 도덕적인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에서 복음주의 구원관으로 전환하였다. 다섯째, 개신교 정통 구원 교리인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은혜'(sola gratia),의 교리를 확고히 붙들었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고히 신뢰하였다. 여섯째,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바꾸었다. 일곱째,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Завоевали доверие прощение и спасение . 열덟째,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 религия сердца )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속죄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마음 뜨거움’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은사요 능력이다. 동시에 이러한 ‘마음의 신앙’은 성서적 신비주의요 건전한 신비주의이다. 아홉째, 올더스케이트 체험은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의 불씨요 원동력이다. 열째, 복음주의 신앙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뿌리요 핵심이요 본질이다. 열한째, 여전히 신앙의 목표는 성화-완전 성화다. 열두째, 올더스케이트 체험은 사실상 메도디즘 탄생의 세 번째 단계다. 회심 후에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독일로 2주간 여행을 하며 진젠도르프 백작을 직접 만나보고, 1738년 10월 런던으로 돌아왔다. 모라비안교인들에게 존 웨슬리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웨슬리는 모라비안교인들의 경건이 너무도 주관적이며, 진젠도르프 자신이 지나치게 숭배된다고 생각하여 완전한 모라비안 교도가 되지는 않았다. 거룩한 체험을 한 웨슬리는 1739년 4월 1일 브리스톨에서 산상수훈강해로 야외 설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야외설교는 영국 전역에 놀라운 성령체험의 물결을 일으켰다. 초기 감리교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회(Society,소싸이어티)는 1739년 7월 11일 웨슬리와 휫필드에 의해 브리스톨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성공회 예배와 중복되지 않도록 모임 시간이 신중하게 결정되었고, 예배와 친고, 기도와 교육이 신도회에서 행해졌다. 1742년에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뿌리 내리고 성장하게 하는 “속회”(Class meeting/ Класс заседании )가 조직되었다. 약 12명 단위로 구성된 속회는 1명의 속장을 세워 매주 금요일에 모여서, 영적 생활을 점검하고 성경말씀을 공부하며 기도와 교제를 나누는 소그룹 운동이었다. 속회에서는 2~3개월마다 시험을 치러 회원자격을 부여했으며 “충고와 견책”이 이루어지는 철저한 신앙훈련이 실시되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그의 “신약성서 주해”와 “표준 설교”를 깊이 강독하게 함으로 감리교 운동의 교리적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속회는 새 회당의 빚을 갚기 위해 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감리교회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속회는 1777년 런던 씨티로드에 봉헌된 “웨슬리예배당”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 파운더리에서 웨슬리 형제와 다른 네 명의 성직자, 그리고 네 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초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에서는 믿음과 의인( 義認 , 의롭다고 인정하다), 확신과 성화에 관한 교리와 감리교 운동의 규율과 조직, 지도자의 역할 등이 주된 의제가 되었다. 1767년 런던연회, 1770년, 1777년, 1786년의 브리스톨 연회, 1787년의 맨체스터 연회로 이어져 나가면서, 감리교회는 크게 부흥하였고,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여 감리교 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감리교회가 영국성공회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767년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감리교회가 창립된 후, 1776년 미국이 독립했을 때 15,000여 명의 감리교회 신자가 있었으며, 존 웨슬리는 이들의 성만찬과 세례를 위해 1784년 토마스 콕 박사를 미국 감리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존 웨슬리는 선교사업과 구제 사업을 위해 모든 사재를 다 쓰고, “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일세 ”라는 고백 후에 시티 로드에서 88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온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존 웨슬리는 평생 5천마일(8046㎞)을 돌며 전도하고, 54,400여회의 설교를 하였으며, 135,000여명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결신시키며, 500여명의 순회전도자를 길러내었다. 1. 웨슬리 신학의 네 가지 원천 ( Источник 4 видов Уэсли духовной семинарии ) 첫째, 성경 은 웨슬리 신학에서 기독교 교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요 표준이 된다. 웨슬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옷입기 위해” 1725년부터 자신을 “한 책의 사람”으로 선포한 이후, 1730년에는 “성경 외에는 어떠한 책에도 관심을 두지 안겠다”고 선언 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앙 전통에 따르면,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게 된 사실을 증언한다. 웨슬리 신앙 전통 속에서 “성경은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원천이요, 믿음과 실행의 참된 법도와 안내이며, 모든 믿음에 대한 해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둘째, 웨슬리는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전통 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다음은 웨슬리가 미국으로 선교를 떠난 항해 중인 1735년 10월 21일(화) 일기의 한 부분이다. 새벽 4시에서 5시까지는 우리 각자의 개인기도 시간으로 했고, 5시에서 7시까지는 함께 성경을 읽었는데, 우리 자신의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으려고, 초대 교회의 문헌들과 세심하게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웨슬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유산으로 내려오는 전통, 특별히 초대 교부들과 영국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러한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셋째, 웨슬리는 성경적 진리의 증거를 일상적 삶의 체험과 연결된 상식적인 지식 에서도 찾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성의 빛 아래 진리를 추구하였으며, 이성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믿게 하는 힘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였다. 웨슬리가 말하는 이성이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영혼이 지닌 능력으로 사물을 이해하며, 사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이것을 언어(생각의 언어를 포함)로 표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넷째, 웨슬리는 체험적 신앙 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신뢰이며 성령의 내적 증거와 외적 열매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올더스케으트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곧 종교적 경험을 한 웨슬리는 경험이란 성경적 진리를 확증할 수 있는 시험장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계시되어 있는 권위의 원천이 된다. 전통은 성경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건전성을 조명하여 주다. 신앙경험은 성경의 진리를 확증하며 신앙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리고 이성은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며 판단하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웨슬리는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 신학적 원천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다. 2. 웨슬리의 구원론 첫째. 선재적 은총 (혹은 선행 은총)이란 구원의 과정 중 칭의( 稱義 )의 앞선 단계로서, 하나님의 행위가 항상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재적 은총의 사상은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웨슬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을 위한 거룩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지 않으신다면, 당신 자신을 위한 구원의 사역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언을 이룸”에 관한 웨슬리의 설교문) 웨슬리의 설교는 구원 사역에 하나님의 앞선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주고 있다. 둘째, “회개” 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 된 자신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참회의 심정을 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존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원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의인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겸허하고 참회해야 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는(즉 자기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 옳고 당연하다. 따라서 이 참회와 통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존 웨슬리의 “감리교인의 원리” 중에서) 웨슬리는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인간이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창세기 6:5의 말씀에서 기초한 것이다.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이해하였던 웨슬리는 그러한 인간 본성 안에 “선을 향한 거룩한 충동”이 있음도 확신하였다. 웨슬리는 “회개”의 원인이 되는 “선을 향한 인간의 거룩한 충동”을 선재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살아있으신 현존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장로교인들이 보지 못했던 웨슬리의 독특한 통찰이요 이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셋째, 칭의 ( 稱義 , 의롭다 일컬음)에 관하여 웨슬리의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칭의라 함은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귀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존 웨슬리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 설교 중에서) 그리고 이러한 칭의 과정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결국 “칭의”의 중심에서 빛나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인 것이다. 웨슬리는 “신앙으로 얻는 칭의”(1746년)라는 그의 설교에서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 사역을 로마서 4장 5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한다. “일을 아니 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결국 칭의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 십자가의 공로로, 그러한 사실을 믿는 우리 모두가 용서함 받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사건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신생”이란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생”, 곧 “거듭남”이란 성화의 첫 단계이며, 성화와 함께 발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끄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웨슬리가 1760년에 설교한 “신생, 곧 거듭남”의 설교문의 한 부분인데, 웨슬리는 요한복음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 “신생”의 근거 구절로 삼았다. 신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영혼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시생은 의와 참된 성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교만이 겸비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미움 시기 악의가 모든 인류에 대한 신실과 온유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존 웨슬리의 “신생” 설교 중에서) 칭의( 稱義 , 의롭다 일컬음)에서 사역의 중심에는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위치한다. 반면 “신생”의 과정에서 빛나는 불꽃은 단연 “성령의 역사”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이것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준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 3:4-5) 다섯째, “성화” 란 웨슬리에 따르면, “우리가 죄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화에 대한 이해는 1739년 9월 12일 일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성화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성화란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벧후 1:4)이며, 그리스도께서 안에 있는 마음(빌 2:5)이며,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마음에 갱신하는 것(골 3:10)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성화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이며 “하늘 아버지가 거룩하듯이 우리도 거룩해 지는 것”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변화와 은혜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섯째, “ 완전 ”은 웨슬리 신학 사상의 꽃이다. 웨슬리 신학 사상의 꽃인 “완전”을 한마디로 다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완전에 대한 웨슬리 자신의 답변이다. 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답: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성품과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다. 영혼 속에 잔재하지 아니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 에 대한 이해는 그가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1752년 출판한 찬송시의 내용을 요약한 다음의 글에서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1)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과 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는 것, (2)이것은 신앙으로만 받는다는 것, (3) 그것은 순간적으로, 한 순간에 주어진다는 것, (4)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는 시간은 임종 시가 아니라 매 순간이며, 지금이 허락된 시간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1. 웨슬리와 전도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단 없는 사명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9-20).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88세를 살며, 5천마일(지구전체 길이의 4분의 1)을 50년 넘도록 전도를 위해 다녔고, 135,000명을 전도하여 결신시켰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을 충성스럽게 실천한 주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웨슬리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전도하게 하고, 전도의 결실을 낳게 한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로, 웨슬리는 “성령의 확신”을 믿었다. 성령께서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 예수님의 사랑하심, 죄사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됨을 증거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함께 하심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평생 전도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는 전도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는 조직이 전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미국 선교지에서 안수 받은 목사의 요청에0 따라, 콕 목사를 미국 선교지로 파송하고, 애즈베리를 안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국 성공회에서는 반대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전도를 위해 조직 운영에 있어 개방적이며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 교육을 항상 병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 밖으로 나가는 선교”와 함께 “교회 안에서의 신앙교육”을 함께 강조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교육을 통해 교회의 질적이며 양적인 부흥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웨슬리가 강조한 감리회의 전도 운동은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여, 불신자를 성경의 사람으로 교육하여, 그들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사회개혁의 의지라 할 수 있다. 넷째로,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속회 운동”의 결정판이다. 감리회의 신앙 운동에서 속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속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신도의 역할이다. 웨슬리는 말씀의 교육과 실천을 위해 속회를 조직하였다. 책임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전도를 통해 속회를 부흥시켰고, 속회의 부흥은 새로운 속회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리회가 건강하게 부흥하기 위해, 속회의 부흥은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째, 웨슬리는 전도에 있어 매우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감옥에 있는 자 등, 모든 소외계층”을 포괄하였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당시 영국 사회에 매우 큰 파장이 되었다. 사회가 돌보지 않는 이들을 웨슬리는 주님의 품에서 양육하였던 것이다. 전도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이다. 전도는 교회의 부흥은 물론,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사회개혁운동이다. 웨슬리의 전도운동이 당시 영국을 변화시킨 역사적 유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부흥과 사회 혁신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2. 웨슬리의 재물관 존 웨슬리는 그의 평생 설교와 저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연간 수입이 1,400파운드를 넘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을 위한 사용에는 연간 28파운드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나의 모든 돈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신자들은 소득의 100퍼센트를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돈에 대한 웨슬리의 실제적인 지침은… 첫째, “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벌어라”이다. 둘째,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저축하라”이다. 셋째, “줄 수 있다면 , 최선을 다해 나누어줘라”이다. 웨슬리는 헌금 생활은 십일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의 마음을 황금에 두고 있다”고 말하였다. 크리스천의 헌금은 십일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 웨슬리는 재물 사용 에 대한 네 가지 성서적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당신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딤전 5:8)고 하였다.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은 가난한 교회의 목사였다. 어린 시절에 웨슬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둘째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딤전 6:8)고 했다.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족함은 감사의 생활로부터 비롯된다. 감사할 때, 돈이 주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셋째는 “정직하게 거래하고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넷째는 “잉여 자금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돈을 사용하는 방법 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첫째, 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 이 돈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돈을 맡은 청지기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둘째, 하나님께서는 의의 부활 때에 내가 쓰는 이 돈으로 인해 나에게 상을 주실 것인가? 1791년에 그가 임종할 때, 그의 유서에 언급되어 있는 돈은 그의 주머니와 옷장 서랍에 남겨져 있는 동전들 뿐 이었다. 웨슬리는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자신만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살았다. 웨슬리는 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지배하며 살 수 있는 신앙의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다. 돈의 소유는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돈을 관리하는 주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이 돈으로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3. 웨슬리와 성령체험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이트 작은 집회에서의 존 웨슬리의 성령 체험은 감리교 역사의 최고봉에 위치한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그가 속해 있던 성공회와 감리회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신학적 기준이 된다. 20세기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알버트 아우틀러 박사는 성공회에서 강조하는 “성서”, “전통”, “이성”의 삼중구조에 성령체험을 “경험” 차원에서 정립한 것이 바로 웨슬리의 공헌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가 감리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성령체험을 성서, 전통, 이성과의 지속적인 조명을 통해, 감리회의 예배 속에 정착하였다. 웨슬리는 성공회와 장로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외설교, 즉흥기도, 순회설교, 속회, 그리고 찬양의 열정을 예배의 순서 속에 도입하여 예배에 참된 활력을 불어 넣었다. 오늘날 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찬양사역과 열린 예배의 기원을 우리는 웨슬리의 “성령체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웨슬리에게서 “성령 체험”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결정적인 내적 증거가 된다. 웨슬리는 “성령체험“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증거라고 설교 하였다. ”성령체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증대시킨다. 웨슬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간과되어왔던 성령에 대한 이해를 교회의 살아 움직이는 제도 속에 정립한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웨슬리는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영적 생명을 나눠주며,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의와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교리에 갇혀 있는 “성령론”이 아니다. 목회를 통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 속에 살아 숨쉬는 “성령체험”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이 여기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리 잡게 될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교회마다 넘치게 될 것이다. 첫째, 회심 전에는 종의 믿음을 가졌으나 회심 후에는 아들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둘째, ‘거의 된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에서 ‘전적인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으로 변하였다. 셋째, 율법주의 신앙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온 것이다. 넷째, Armenian 영혼구원에서 복음주의 영혼구원으로 전환되었다. 다섯째, 개신교 정통 구원 교리인 ‘ 오직 믿음 ’(sola fide)과 ‘ 오직 은혜 ’(sola gratia)의 교리 를 확고히 붙들었다. (이신칭의 – 以信稱義 ; j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 여섯째,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바꾸었다. 일곱째,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여덟째,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을 발견하였다. 아홉째,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Methodist 부흥운동의 원동력이다. 열째, 복음주의 신앙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기초다. 열한째, 여전히 신앙의 목표는 성화(거룩)-완전 성화(거룩하다) 이다. 편집자로서 이 긴 글을 소개하는 것은 존 웨슬리의 신앙이 나에게 엄청난 도전을 다시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가 존 웨슬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절박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어머니 수산나의 ‘ 규칙에 따라서 생활하는 훈련 ’(disciplined life according to the rules)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주일성수, 부모에게 순종하기, 잠자리에 드는 것, 일어나는 것, 식사, 기도, 독서, 공부, 노는 것, 일하는 것 등 하루의 모든 생활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였다. 오 늘날 개인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절대 필요하고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규칙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문제를 만나면 원칙으로 돌아 가야 하는데 우리의 원칙은 성경이다. 현대교회는 원칙이 아니라 변칙을 일삼고 있는 것 같다.. 존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은 감리교회가 가르쳐야할 기본이다. 그러나 존 웨슬리의 삶이나 교훈이나 신학은 감리교회의 전용물이 될 수 없다. 우리 모두의 것이다.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하듯 존 웨슬리의 신앙과 가르침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한다.(장재언)

존 웨슬리의 생애

‣ 이 책은 메도디스트들의 필독서「존 웨슬리의 생애」가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새단장하였다. 이 책은 모든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이자 성결과 사랑의 성자인,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 신학도와 목회자가 존 웨슬리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였다. ‣ 지은이 김진두 저자 김진두 목사는 평생 존 웨슬리 연구에 매진하여 누구나 쉽고도 정확하게 존 웨슬리를 알도록 힘써왔다. 감리교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대학교 신학석사, 잉글랜드 브리스톨대학교 신학박사(PhD)를 취득하였다. 현재 영등포중앙교회 담임, 감리교신학대학교 이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강사, 감신대 총동문회장이다. 또한 감리교의 신앙과 전통을 알리는 데에 기여한 공로로 ‘감리교회 저작상’ 제1호를 수상하였다. ‣ 추천의 글 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렇게 좋은 「존 웨슬리의 생애」는 나온 적이 없다.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념할만한 대작이다. 김 박사는 중대한 내용을 읽기 쉽고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은혜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을 목회자와 신학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 모두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 조종남 박사(전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한국웨슬리학회 명예회장) 이 책은 한국인이 쓴 가장 훌륭한 존 웨슬리의 전기 작품이다. 김 박사는 가장 많은 자료를 읽고 가장 자세하고 가장 아름답게 존 웨슬리의 생애를 그렸다. 특히 그의 부흥운동, 성령체험, 신비체험, 그리고 신유와 귀신추방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학문과 영성운동 양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여성관계, 인상, 성격, 사랑의 실천, 생활습관 등 인간 존 웨슬리의 모습을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김 박사를 더욱 칭찬하고 싶다. 앞으로 수십 년간 이 책이 존 웨슬리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애독될 것이라 확신한다. – 김홍기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웨슬리학회 회장) ‣ 웨슬리 이야기 시리즈란? 감리교회 신앙과 신학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소개하는 ʿ웨슬리 이야기ʾ 시리즈는 총 3권으로 구성하였다. 제1권「웨슬리의 뿌리」에서 웨슬리가문 신앙선조들의 믿음과 삶을, 제2권「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존 웨슬리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메도디스트 역사와 신앙전통을, 제3권「더욱 더 사랑해」(근간)에서는 찰스 웨슬리의 생애, 그리고 시와 찬송을 소개한다. ‣ 차례 머리말 / 4 약어표 / 7 1부_ 엡웟에서 옥스퍼드까지(1703~1735) 1. 영원한 고향 엡웟 – 어린시절(1703~1711) / 14 2. 세상에 나온 어린 성자 – 차터하우스 학교에서(1711~1720) / 23 3. 유령에 대한 신비한 경험(1716~1725) / 28 4. 학문과 경건과 낭만의 옥스퍼드 학생 시절(1720~1725) / 33 5. 생애 전체를 바치는 회심(1725) / 43 6. 여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존 웨슬리(1725~1727) / 53 7. 내 아들은 링컨 대학 교수다(1726~1735) / 61 8. 규칙이 없이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 신성회 이야기(1729~1735) / 67 2부_ 옥스퍼드에서 올더스게이트까지(1735~1738) 1. 에덴동산의 뱀에 물린 존 웨슬리 – 조지아 선교(1735~1738) / 90 2. 예수 나를 위하여 – 올더스게이트 회심(1738) / 120 3. 원시 기독교를 찾아서 – 독일 여행(1738) / 152 3부_ 올더스게이트에서 온 나라로(1738~1791) 1. 불타는 가슴 – 부흥운동의 발발(1738~1791) / 172 2. 고난과 영광(1738~1791) / 214 3. 사자가 어린 양이 되다 –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1739~1791) / 246 4. 연결된 사람은 안전하고 복되다 – 존 웨슬리의 연결주의(1739~1791) / 265 4부_ 온 나라에서 온 세계로(1738~1791) 1. 만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 예정론 논쟁(1738~1778) / 276 2. 불쌍한 존 웨슬리 – 세 번째 실연과 불행한 결혼(1749~1771) / 306 3.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 사랑의 성자 존 웨슬리(1729~1791) / 326 4. 당대의 백과사전 존 웨슬리 – 학문과 저술과 출판(1720~1791) / 346 5. 살아 있는 사도 요한 – 존 웨슬리의 인상과 성격(1725~1791) / 359 6. 영국 국교도로 살고 죽으리라! – 미래를 위한 준비(1784~1788) / 369 7. 행복한 황혼 – 말년의 세월과 작별(1788~1791) / 385 존 웨슬리 생애의 주요 사건 / 403 참고도서 / 406 주 / 409

1791년 3월 2일,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 타계

1791년 3월 2일,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 서거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 ~ 1791년 3월 2일)는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 영국국교회 (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존 웨슬리 (John Wesley)

.출생: 1703년 6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주 엡워스

.사망: 1791년 3월 2일 (87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직업: 신학자, 저술가 영국 성공회 사제

.언어: 영어, 독일어

.국적: 영국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활동기간: 1725년 ~ 1791년

.장르: 기독교신학교육 저술

.부모: 부) 새뮤얼 웨슬리, 모) 수재너 웨슬리

.자녀: 없음

.친지: 찰스 웨슬리 (남동생)

○ 요약

–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 (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가, 1728년에는 사제 / 장로목사가 되었다. 잉글랜드국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였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 (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 신학사상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 (High church, Anglo-catholic)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 (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 감리교와 잉글랜드 성공회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즉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끼친 웨슬리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 생애

– 어린 시절

.성공회 사제의 자녀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엡워스 (Epworth) 에서 태어났다. 엡워스는 링컨에서 서북쪽으로 37km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웨슬리는 새뮤얼 웨슬리 (Samuel Wesley)와 수재너 웨슬리(Susanna Wesley)의 열아홉 자녀 중 15번째였다. 새뮤얼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영국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으며, 1696년부터 엡워스의 성공회 사제가 되어 목회하고 있었다. 새뮤얼 웨슬리는 1689년 개신교 목사인 새뮤얼 아네슬리 (Samuel Annesley)의 25번째 딸인 수재너와 결혼하였다. 새뮤얼과 수재너는 총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이 중 여섯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새뮤얼과 수재너는 모두 개신교 목사의 자녀였지만 젊은 시절 잉글랜드 성공회로 전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께 학문을 익히다

당시 대부분 가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웨슬리의 부모도 자녀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켰다. 딸들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은 걸음마와 말을 배우자마자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근대 서양 중산층 가정에서는 가정교사나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쳤는데 (나이팅게일도 부친이 학문을 가르쳤음) 지식인인 수재너 사모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에 능통하였고, 존 웨슬리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원어인 그리스어로 신약성서를 읽으며 생생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가르침을 새겼다. 존 웨슬리도 어머니처럼 지식인이어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부터 신학, 문학, 음악에 모두 밝았다. 즉,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실력을 쌓는 일부터 해나가야 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엄격하고 자상한 가정교육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은 끼친 것은 새뮤얼보다 수재너 웨슬리였다. 수재너는 점심 식사와 저녁 기도 시간 전에 아이들을 불러 배운 것을 잘 익혔는지 점검해 보았다. 수재너는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지 못하게 했고, 무분별하게 간식 먹는 것도 엄격히 금했다. 이를 어길시에는 어김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를 맞고 나서 큰 소리로 우는 것도 금했다. 수재너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의 의지를 정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 형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치면서, 수재너는 아이들 한 명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 시간을 그리워하였다.

.화재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1709년 2월 9일 사제관에서 일어난 화재일 것이다. 당시 웨슬리는 다섯 살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화재를 보고 피신한 것과 달리 웨슬리는 늦게까지 화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불이 난 사실을 알고 간신히 창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새뮤얼 웨슬리는 아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화재가 심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새뮤얼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여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찰나에 같이 불을 끄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했고, 웨슬리가 구조되자마자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이 무너지던 찰나 구조된 웨슬리를 보고 수재너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재너는 스가랴 3장 2절을 인용하며 웨슬리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불렀고, 웨슬리 자신도 이 별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학교공부

열한 살이 된 1714년,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 학교 (Charterhous School)에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에서의 생활은 결코 풍족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웨슬리는 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내었다. 차터하우스에서 6년 간 수학한 후,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 옥스퍼드 재학 시절과 성공회 성직서품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1724년, 문학사 (B.A.) 학위를 땄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석사 (M.A.) 학위 취득을 위해 계속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1725년 9월 19일 옥스퍼드의 주교 존 포터 (J. Potter)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부제 (deacon)로 서품받았다. 부제서품받을 즈음 웨슬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러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 (Rules and Exercises for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라는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웨슬리는 이 책을 통해 참된 신앙은 먼저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자라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연구교수 (fellow)가 되었다. 연구교수가 된 웨슬리는 학교 안에 연구실을 얻을 수 있었고 1751년 결혼할 때까지 해마다 18파운드에서 최고 80파운드까지, 평균 약 30파운드의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웨슬리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교에서 고전 문학과 논리학, 그리스어와 신약성서, 고전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이외에도 학생들의 개인 지도를 하였다. 웨슬리는 1728년 9월 22일에 성공회 부제서품 때와 마찬가지로 존 포터에게 성공회 사제 (elder; priest)로 서품받았고, 1735년 조지아로 떠날 때까지 연구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성실히 수행했다.

– 신성회 (Holy Club)

존 웨슬리가 아버지의 교구 목회를 도우러 고향에 내려 가 있는 동안, 1726년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찰스는 입학 초기에는 경건하게 생활하지 않았었으나, 형 존과 어머니 수재너의 조언과 격려로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하고 영적 생활을 새롭게 하려고 마음 먹었다. 결심 후에 찰스는 매주일 성찬을 받으며 매일 규칙적으로 개인 기도를 하면서 경건생활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두 명의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성경 공부와 경건 서적을 읽고 대화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729년 11월 말 경에 웨슬리가 옥스퍼드에 돌아왔고,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는 동시에 신앙 생활의 증진을 돕게 되었다. 웨슬리도 찰스가 시작한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연스럽게 그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신성회 (Holy Club)의 시작이었다.

.기도와 독서

신성회는 매일 여섯시부터 아홉시까지 기도하고, 시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읽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보았던 책은 주로 초대 교회와 중세기 성자들의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시대와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성공회에서 1년에 3번 정도 성찬을 받아도 된다고 권고한 것과 달리, 신성회 회원들은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이 균형을 이룬 초대교회 예전에 따라 매주일 성찬을 받았다. 이들은 초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1730년 8월부터 신성회 회원들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고 전도하는 사회선교를 시작하였다. 윌리엄 모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일은 후에 신성회의 사역 중 중요한 일로 정착하였다. 당시 감옥은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여건이 극도로 나빴으며, 신성회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 겨울에는 석탄이나 나무를 갖다 주는 한편 심지어 빚을 못 갚아 들어온 죄수들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석방시키기까지 했다. 1732년 웨슬리는 신성회 회원들이 사용할 ‘매일 기도집’ (A Collection of Forms of Prayer for everyday in the week)을 썼는데, 이 기도집에는 주일부터 월요일까지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가 실려 있으며 ‘매일의 자기성찰 일람표’ (A Scheme of Self-examination)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성회는 웨슬리가 정한 규칙과 기도집을 엄격히 지켰다.

이렇게 신성회는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경건 생활에 매달렸기 때문에 주변으로 부터 많은 질시와 조소를 당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바로 메소디스트 (methodist)라는 이름이었다. 웨슬리 본인에 따르면 이 호칭은 네로 황제 시절 로마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의사 집단에서 유래하였다. 그 당시 의사들은 규칙적인 식이 요법을 통해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메소디스트란 바로 이 의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외에도 신성회는 “성경 벌레 (Bible Moths)”, “공로주의자들 (Supererogation Men)”, “성례전주의자들 (Sacramentarians)”, “초대 교회 (Primitive Church)”, “열광주의자들 (Enthusiast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와 같은 옥스퍼드에서의 신성회 활동은 웨슬리가 회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감리교회 운동의 시초였다.

– 조지아 선교와 실패

1735년, 웨슬리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였던 아메리카 조지아 서배너 (Savannah)에 선교하기로 하였다. 1734년 말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 사제가 별세하였고, 별세하기 직전 완성한 욥 주석서를 캐롤라인 왕비에게 달라고 존에게 요청하였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주석서를 왕비에게 전해주었다. 책을 전해주고 오는 길에 웨슬리는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Corpus Christi College)의 존 버턴 (John Burton) 사제를 만났다. 버턴은 웨슬리에게 조지아로 가서 선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버턴은 웨슬리에게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한 제임스 오글소프 (James Oglethorpe)를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다. 제임스 오글소프는 웨슬리에게 식민지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선교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웨슬리는 고민하다가 고향 엡워스으로 가서 어머니 수재너 웨슬리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수재너 웨슬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내게 스무 명의 아들이 있다면, 다 그렇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구나.” 웨슬리는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735년 10월 10일, 버턴에게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모라비안 공동체와 만나다

같은 해 10월 14일, 웨슬리는 갓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은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그레이브젠드 (Gravesend)로 갔다. 이날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의 벤저민 잉햄 (Bejamin Ingham)과 런던 상인의 아들 찰스 델라모트 (Charles Delamotte)가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데이비드 니치먼 (David Nitschmann) 주교의 인솔 하에 시몬즈 (Simmonds) 호에 올랐다. 이때 같이 배에 탄 이들 중에는 독일 헤른후트 노동공동체에서 온 개신교 신도들인 모라비안 26명도 있었다.

장장 4개월 23일 간 계속된 항해에서 시몬즈 호는 몇 번이나 전복될 뻔 하였다. 바닷물이 객실 창을 부수고 돛대까지 부러뜨릴 정도였다. 위기의 순간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였고, 침착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은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었고, 이들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배는 우여곡절 끝에 1736년 2월 6일 조지아에 상륙하였다. 존 웨슬리는 서배너에, 찰스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주의 두 번째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온 것이지만 조지아에는 아직 전임인 새뮤얼 퀸시 (Samuel Quincy)가 사제관에 그대로 남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웨슬리는 찰스 델라모트와 함께 모라비아 교도들이 쓰는 막사에 기거해야 했다. 2월 25일 두 사람은 이 독일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고, 덕분에 모라비아 교도들을 매일 보며 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인 스팡겐베르크 (August Spangenberg)와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팡겐베르크와 웨슬리가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스팡겐베르크는 웨슬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당신 안에 증인을 갖고 있는가?”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는가?”였다. 웨슬리는 느닷없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있었고, 그때 다시 스팡겐베르크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리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분이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 스팡겐베르크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날의 대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일기에 그저 “의미 없이 내맽었다”라고 적었다. 웨슬리는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스팡겐베르크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보였던 믿음의 확신에 감탄하였다. 웨슬리는 자연스레 모라비아 교도와 스팡겐베르크에 끌리게 되었으며 믿음의 확신을 얻기까지 계속 교제를 나누었다.

.미국사람들과의 갈등

서배너에서 시작한 웨슬리의 목회는 시작은 꽤 순조로웠으나 곧 난항을 겪었다. 이유는 웨슬리의 보수적인 목회 스타일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비국교도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세례 시에는 물에 세 번 잠기게 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웨슬리는 비국교도를 엄격히 차별하여 비국교도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 집례를 거부하였다. 또 웨슬리는 조지아로 떠나면서 인디언이야말로 죄에 때묻지 않은 창조 본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인디언 선교에 큰 꿈을 품었었지만 인디언 선교도 쉽지 않았다. 찰스 웨슬리도 형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난항을 겪었는데, 찰스가 겪은 것은 주로 식민지 주민들의 악의적인 협박과 행동이었다. 찰스 웨슬리는 이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에 시달리다가 1736년 8월, 6개월 만에 식민지 활동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동생 찰스가 떠나자 웨슬리는 목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프레데리카에 정기적으로 들르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부재하는 동안 서배너에서는 앞서 조직한 소모임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의 신앙생활을 독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서배너보다 프레데리카의 상황은 더욱 나빴고, 1737년 1월 26일을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의 사역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서배너 식민지 사람들은 프레데리카와 달리 신앙에 열심이 있었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엄격한 웨슬리의 스타일로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선교는 다른 쪽으로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소피아와의 갈등

아직 독신이었던 웨슬리에게 조지아 주지사 오글소프는 치안장관 토머스 코스턴 (Thomas Causton)의 조카 소피아 홉키 (Sophia Hopkey)를 1736년에 소개시켜 준 적이 있었다. 소피아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지만 아름답고 신앙적으로 신실한 여자였다. 웨슬리와 소피아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경건생활과 사랑 사이에 갈등하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스킨십을 악한 것이라 생각하여 하지 않기로 결단하면서도 막상 소피아와 만나게 되면 스킨십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해 하는 웨슬리를 소피아는 굳게 붙잡을 수 없었고, 1736년 3월 9일 웨슬리에게 마지막 통보를 하였다.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자신에게 청혼한 윌리엄슨과 결혼하겠다는 말이었다. 웨슬리가 고민하는 사이 소피아는 결국 3월 12일 윌리엄슨과 결혼식을 올렸다.

소피아가 결혼하자 웨슬리의 마음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웨슬리는 소피아의 신앙생활에 흠이 있음을 계속 지적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8월 7일 영성체를 위해 나온 소피아와 남편 윌리엄슨에게 영성체를 하지 않음으로써 공개적인 굴욕을 주었다. 이 일은 큰 파장을 주었는데, 소피아가 치안장관 코스턴의 조카였기 때문에 일은 더욱 일파만파로 커졌다. 코스턴은 웨슬리가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소피아에게 성찬 분급을 거부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즉시 2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구성되었으며, 웨슬리에게 10개의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이에 웨슬리는 서배너에서의 선교가 사실상 끝났음을 직감하고 12월 2일 도망치듯이 조지아를 떠났다. 결국 1년 9개월에 걸친 조지아 선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오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웨슬리는 또 다시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이때의 심경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나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는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 올더스게이트 회심

.모라비안 페터 뵐러 목사와의 만남

웨슬리는 1738년 2월 1일 우울한 모습으로 딜 (Deal) 항구에 도착했다. 3일 후 웨슬리는 런던으로 가 오글소프와 조지아 이사들을 만나 사유서를 제출하고 선교사 임명장을 반환하였다. 갈 곳도 없던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친구인 제임스 허턴 (James Hutton)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허턴은 웨스트민스터 학교 근처에서 책방과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웨슬리는 그곳에서 막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목사 피터 뵐러 (Peter Boehler)를 만났다. 피터 뵐러는 웨슬리보다 9년 늦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예나 (Jena) 대학교를 졸업했고, 친첸도르프 (Zinzendorf) 백작 밑에서 신앙 지도를 받은 후 헤른후트 (Hernhut) 형제단에 가입했다. 영국과 아메리카에서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웨슬리는 뵐러와 급속도로 친해졌으며, 뵐러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뵐러가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믿음에 의지하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내 형제여, 내 형제여, 당신은 당신의 철학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Mi frater, mi frater, excoquenda est ista tua philosophia)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3월 5일 웨슬리는 병 중에 있던 동생 찰스를 보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고 거기서 뵐러를 다시 만났다. 뵐러와의 대화 중에 웨슬리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 (saving faith)’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뵐러는 대화를 거듭하며 웨슬리에게 성서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 (이신칭의)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뵐러는 회개하고 그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뵐러와의 대화 끝에 자신이 갖지도 못한 신앙에 대해 설교를 그만해야 하지 않나 번민하는 웨슬리에게 뵐러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인 3월 6일부터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에 따라 믿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신약성서를 연구하다

3월 말에 피터 뵐러는 웨슬리에게 경건주의적 전통의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의 본성을 설명해 주었다. 믿음의 본성은 거룩함 (죄로부터의 자유)과 행복 (용서받았다는 자각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으로 열매 맺는 것이며 거룩함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뵐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을, 칭의-법적인 변화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중생-참여적 변화와도 연결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뵐러의 말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웨슬리는 4월 말에 뵐러를 다시 만났을 때는 뵐러가 설명한 믿음의 본성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으며, 여러 간증을 듣고 “즉각적인 회심”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제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울부짖었다.

.성공회 교회와의 갈등

5월 1일 웨슬리는 뵐러의 충고에 따라 다른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과 함께 “우리의 작은 신도회”를 설립하였고, 이것은 후에 “페터레인 (Fetter Lane) 신도회로 발전했다. 5월 4일에는 뵐러가 아메리카로 떠났고,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대로 계속 자신의 부족한 믿음에 대해 설교하였고, 영국 성공회의 전례와 다른 자유로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영국 성공회 사제들이 웨슬리의 이러한 행보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웨슬리가 광신주의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찰스 웨슬리

존 웨슬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동생 찰스 웨슬리도 병석에서나마 같은 확신을 얻기 갈망하고 있었다. 찰스도 뵐러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깊게 소망하였다. 찰스는 5월 말 루터의 “갈라이다서 주석”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우리의 교회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와 같이 이렇게 중요한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특별히 우리의 강령과 설교가 폐기되지 않고 중심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새로운 교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찰스는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인 존 브레이 (John Bray)가 무식한 막노동자였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며, 그 가족도 신앙 안에서 감사와 평화,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5월 21일 오전 9시, 찰스는 존 웨슬리와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기도와 찬양을 하였다. 9시 30분쯤 되어서 홀로 남아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찰스는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조용하지만 아주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믿으라. 그리하면 네 모든 병이 나음을 얻으리라.” 찰스는 이 음성이 브레이의 누이 무스그레이브 (Musgrave) 부인이 말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찰스를 간호하고 신앙적인 권고를 해온 터너 (Turner) 부인의 목소리였다. 찰스는 무스그레이브를 불러달라고 터너 부인에게 이야기했고, 터너 부인이 내려간 사이 “이상한 마음의 떨림”을 경험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병도 나았다. 다음날 동생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소식을 듣고 웨슬리는 찰스를 방문하였고, 찰스는 형도 같은 은혜를 체험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1738년 5월 24일,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 (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 (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 (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깉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성공회의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성공회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영국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대표 성직자인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영국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존 웨슬리 자신도 스스로를 성공회 사제라고 생각하였다.

1784년 2월 28일, 존 웨슬리가 감리교를 열었다. 메소디즘은 당시 경직되었던 성공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일으킨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신학적으로는 성공회 특유의 ‘중도의 길’ Via Media)을 이어받되,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배격하고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한 자유의지와 만인속죄론을 주장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타락해버려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을 믿을 수 없고, 이 하나님을 믿게끔 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택하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감리회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물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자유의지가 선을 극구 기피할 정도로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사랑을 추구하는 본능이 깃들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고 가르친다.

교회 체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감독제를 택한다. ‘감리회’라는 낱말 자체가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를 뜻한다. 사실 감리회의 감독은 영어로 bishop이라고 하는데,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와 북유럽 루터교회의 주교도 영어로 bishop이라고 한다.

감리교회의 영어 명칭인 Methodist Church의 ‘methodist’란, 존 웨슬리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결성한 신성회 Holy Club)의 신앙 생활이 매우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에서 유래했다. 사실은 조롱조에 가까운 별명이었으나 이후 공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는 루터교회 (The Lutheran Church) 역시 ‘루터를 추종하는 자들’이란 조롱에서 교단명이 유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동양권에서 메소디스트 교회가 ‘감리교회’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 메소디스트 감독 교회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에는 2가지 명칭이 혼용되었다. 첫째는 미이미 (美以美) 교회로, 이는 Methodist의 me를 美로, Episcopal의 e를 以로, 美는 아메리카의 가차 (假借)였다. 이는 미국 북감리회에서 옮긴 말이었다. 둘째는 감리교 (監理敎)로, 미국 남감리회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Bishop을 監으로, Methodist를 理로, 뜻을 번역한 말이었다. 북감리회, 남감리회가 들어와 선교하던 한국에서는 두 명칭이 혼용되다가, 1930년 두 교회가 합쳐질 때, 명칭을 ‘감리회’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감리회’란 메소디스트 감독 교회의 뜻을 번역한 말이며 넓게는 감독이 치리하는 감리회의 교회 구조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한편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영향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국가교회인 영국국교회로만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으며, 잉글랜드 성공회가 현재의 성공회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 (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신학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 (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 (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

–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인물과 서적들

웨슬리는 다양한 인물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의 종교적 열심을 증진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윌리엄 로우의 ‘경건한 삶을 위한 엄숙한 부르심’과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그의 성화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 존 웨슬리의 신학

존 웨슬리의 신학은 당시 교리 중심의 사상적 신학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천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교리를 선택하는 문제로서 신앙이 아니라 “성화” 즉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견주어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은총과 사랑은 웨슬리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신학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기준이 되며 최종적 칭의를 향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는 개신교의 교리를 형성했던 칼빈주의나 루터주의, 경건주의 등과 구별되는 신학적 방법론이었다.

– 실천신학적 접근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은 교부신학자와 같이 성서에 기초하여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며 전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주목하는 실천적 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는 신학은 세상을 낙관론이나 비관론적 입장이 아니라 양쪽의 긴장을 지닌 중도적 대안 또는 제3의 과정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방법의 현실적 표상은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 받음의 은총과 힘 입음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과 은총의 제한적 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 칭의와 최종 칭의와 같은 긴장 속의 주제에 대한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며 나타났다.

이 신학의 주제들은 은총의 개념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 은총의 실천

은총의 개념은 초기 교부들과 고전 공의회의 신학을 뛰어넘어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을 시작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발전의 과정을 수반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오며, ‘의’도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점차 자란다고 보았다. 이를 위한 실천적 은총의 수단은 일반 수단과 특별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님의 여정 속에 있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보편적 순종이고,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과 상황적 은총의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 제도적 은총 수단: 성경과 전통

제도적 은총의 수단은 대부분의 신자가 생각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경건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능력을 경험하는 체험도 존중하였다. 공중예배와 성경읽기, 성찬 참여, 가족기도, 개인기도, 성경공부, 속회와 금식과 절식이 제도적 은총의 수단이며 이들을 습관적으로 실천하고 그 안에서 영혼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중 특히 성례전인 성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라 내적인 은총에 대한 외적인 징표이고 이로서 우리가 내적인 은총을 받는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 그가 보았던 성찬은 기존의 성례전시각인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츠빙글리주의와 차이를 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엄숙한 기념으로 이 기념인 온전한 기억과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몸의 현전이 아니라 실재적인 영적 현존이 있다고 구분하였고, 성례전을 통해 칭의와 성화의 현재적 구원 은총인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금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성례전으로 세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 (稱義)론을 기독교인이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로 보았다. 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단계이나 완전한 단계는 아니며, 죄를 짓는 과정 속에서 세례로 받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될 수 없기에 체험적인 온전한 마음의 변화와 경건한 성화의 삶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세례와 거듭남을 구분하였으므로 성인의 세례와 유아 세례를 묶어서 생각하였다.

– 상황적 은총의 수단: 이성과 경험

상황적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초월하는 성령의 인도로 은총 안에서 자라 가도록 하는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수단을 구분하였다. 선행 은총을 통해 생긴 도덕법은 신앙인의 양심과 상황에 맞춰 생각하도록 하였으나 상황적인 대응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론과 밀접한 도덕법으로서 윤리적 기준을 의미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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