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쉘 바스키아 그림 | 바스키아 작품 속엔 왜 왕관이 많을까?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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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 찬열 세훈 이 오디오 도슨트 한 그 예술가! 장 미쉘 바스키아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 왕관이 많은 이유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 해골, 장기, 왕관 등 상징과 기호가 많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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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바스키아 – 나무위키:대문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시각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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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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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 네이버 블로그

최근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의 그림 경매 성과들. ​. ​. ​.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18 MAY 2017 | SALE PRICE 110,487,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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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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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 그림 – 검색결과 | 쇼핑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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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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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개의 장미쉘 바스키아 아이디어 | 그림, 예술, 현대 미술

2021. 3. 9 – Pinterest에서 drawing & Kang님의 보드 “장미쉘 바스키아”을(를) 팔로우하세요. 그림, 예술, 현대 미술에 관한 아이디어를 더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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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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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 작품 속엔 왜 왕관이 많을까?
바스키아 작품 속엔 왜 왕관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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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예술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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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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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 해독하기 – 오픈에디션

Q. 작품보다 작가의 삶을 향한 관심과 영향력이 꾸준히 지속되는 아티스트는?

수년간 예술계와 패션계, 미술 애호가들의 한결같던 ‘앤디워홀’ 이란 대답은 어느새 과거의 것이 되고 바통을 이어 받은 아티스트가 있다. 그 중 몇 가지 사실 만으로도 더 흥미가 유발되는 팩트들.

세상을 떠난지 30년. 20대 후반에 작고했으며 활동한 8년여 기간 중 총 2500여개 작품을 남긴, 최고로 인기 있고 비싼 작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다.

패션아이템과의 협업은 물론 올해 초 천억원대에 원작이 팔리며 사망 후 몸값을 최고로 경신한 그이기에, 그의 작품이 왜 좋은 것인지 구구히 설명하는 일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수십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그에 관한 글과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웹페이지, 현학적 미술용어들로 나열된 글들도 영 읽히질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바스키아를 향한 분석도 뒤로 하고 내 취향에 잘 맞는지 아닌지도 걷어내고 사심 없이 그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 상징으로 채워진듯 보이는 그것들. 난해한 암호처럼 보이는 바로 그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나의 이 단순한 호기심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작품 속 몇 가지 기호와 텍스트에 접근해 보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1. 왕관

그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왕관 Crown 모양이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 모형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 대신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 과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 주관적으로 바라본 시선에선 야망 ambition 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존중보다 조금 더 나간 느낌의 야심과 자신감.

2. 사람 이름

바스키아는 특정 아티스트를 향한 존경과 친애를 직접적으로 담았다. 아티스트의 이름을 명시하거나 그 아티스트의 창작물 제목을 적기도 하며, 왕관을 씌워주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위 이미지 상 왼쪽부터 차례로, 색소폰 연주자 찰리파커 Charlie Parker, 권투선수 무하마디 알리 Muhammad Ali, 복싱선수 슈거 레이 로빈슨 sugar ray robinson 가 바로 그 대상이다. (첫번째 이미지 상 ‘Now’s the time’ 은 찰리파커의 곡 제목, PRKR은 찰리파커의 약어이며, 무하마디 알리의 본명이 Cassius Clay다.) 이들과 바스키아의 공통점이자 연결고리가 또 하나 있다. 바로 ‘흑인’ 이라는 것.

– 바스키아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냥 아티스트다.’ 라고 말한게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감이나 동시대 혹은 과거를 살았던 흑인 아티스트에 대한 연대의식과 존경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알파벳 A, 그리고 해골 형태

그의 그림 속 ‘AAAAA’ 형태로 등장하는 반복적인 이니셜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장 흔히 들리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와 바스키아의 첫 번째 흑인 영웅인 야구선수 행크 아론 Hank Aaron의 성 첫 글자의 의미도 포함된다. 해골 형태의 인물과 신체 부위들은 그가 여덟 살 때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당시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교과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의 영향을 받은 것.

– 어린시절에 머물러 있는듯한 순수함, 강박적이면서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강렬히 호소하는 듯한 감정이 느껴진다.

4. 바스키아의 언어들

그의 작품을 ‘낙서’ 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빼곡히 혹은 헐겁게 적어내려간 단어들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을 적어봤다.

alchemy, an evil cat, black soap, corpus, cotton, crime, crimée, crown, famous, hotel, king, left paw, liberty, loin, milk, pure, negro, cigar, nothing to be gained here, Olympics, Parker, police, PRKR, sangre, soap, sugar, teeth.

신비한 힘, 사악한 고양이, 검은 비누, 코퍼스, 면, 범죄, 왕관, 유명한, 호텔, 왕, 왼쪽 발, 자유, 둔부, 우유, 순수함, 흑인, 담배, 여기선 얻지 못할 것, 올림픽, 파커, 경찰, 피, 비누, 설탕, 치아.

– 단어들의 나열에서 오는 공통적인 감수성은 그의 유년기와 활동시기의 미국 상황 등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거나 그의 영혼 어딘가를 빙빙 돌며 그를 ‘놓아주지 않는’ 어떤 것들이다. 그는 어떠한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을 그대로 캔버스에 담았다.

작품 속 은유와 상징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일차원적으로 해독한 위 내용은 생전 작가의 인터뷰, 각종 문헌과 글을 종합한 후 주관적 감상을 덧붙인 것이다. 이런 특성들을 알아가는동안 나 역시 전보다는 바스키아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라는 시인의 어구가 때론 그림에도 통한다. 작가가 분방한 태도로 작업한 그림을 해독하고자 노력하는 사이 자연스레 그의 영혼이 감상자의 마음에 스미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위 말하는 예술의 힘 power라는게 있다면 이런 것일까.

이런식으로 작가의 그림 속 기호들을 ‘해독’을 하는 방법과 과정은 작가에게 다가가는 일종의 노하우다.

물론 바스키아의 그림 속 몇 가지 기호와 문자들의 의미를 안 후에도 여전히 장님 코끼리 말하듯 막연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니, 이런 해독 없이도 바스키아의 세계관에 흠뻑 매료된 사람들은 이미 많다. 혹자는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특유의 거친 터치감과 저항정신이 느껴지는 무드가 취향저격이라고도 한다. 거기에 바스키아는 살아 생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의 표현방식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역사로 빛나는 인물이다. 당시 바스키아의 센세이셔널함이 여기에 있다면 오늘날 바스키아가 받는 사랑은 거듭 반복되는 그의 그림에 대한 해독과 접근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것, 한번 더 되돌아보게 만드는 마력. 바스키아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가 펼쳐놓은 영혼의 모습, 즉 빨갛고 노랗고 네모지고 세모난 것들은 이런식으로도 사랑받고 재해석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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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의 작품은 1980 년대 도시 문화 환경을 배경으로 태어납니다.

농담, 허튼소리, 불량배, 애송이들과 동성연애자의 펑크 punk, 빈민가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의 ‘거리낙서’와 힙합문화의 상징 그라피티 graffiti, 느릿느릿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와 똥 싼 바지 Saggy Pants, 그 힙합 hip-hop이 발생한 곳이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 지구였고, 그곳에는 스트리트 컬처(거리문화)와 비보이와 브레이크 댄스, 랩뮤직과 비트박스, DJ, MC 등과 그라피티 등 힙합이 얽히고설킨 문화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 중심, 그 장소 중심에 바스키아가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을까? 그런 반 문화적 실천들의 중심에 바스키아의 스타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리에 일생을 담다, 장 미쉘 바스키아

그래피티(Graffiti)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벽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이다.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Graffito 가 어원이다. 그래피티는 고대 동굴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거리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인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는 휘갈겨 쓴 낙서처럼 보이는 캘리그래픽적 양식을 선보였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도 낙서의 표현법에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장 뒤뷔페(Jean Dubuffet) 또한 아웃사이더 아트로서 낙서 에 주목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관심과 더불어 현대의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탄생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콘브레드(Cornb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을 남긴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활동했고,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서도 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속도감 있게 그려진 문자와 그림들은 유쾌하고 상상력 넘쳤지만, 도시 미관의 입장에서 보면 골칫거리였다.

그래피티가 도시 문제에서 현대미술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의 공이었다. 바스키아의 그래피티는 기존의 것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시로 쓰거나 다양한 기호를 덧붙여 그래피티를 그린 뒤 SAMOⓒ(세이모) 라는 문구를 남겼다. 당시 뉴욕 예술계에서는 세이모 가 누구인지에 관한 관심이 뜨거워졌고, 바스키아는 등장과 동시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27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201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그의 <무제(Untitled)>(1982) 작품이 1억 1천50만 달러(약 1천 2백억 원)에 팔리는 등 미국 작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바스키아의 생애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어와 스페인을 구사한 어머니는 바스키아에게 두 언어를 가르치고, 바스키아와 함께 뉴욕의 여러 미술관을 다녔다. 1968년 바스키아는 차 사고로 비장을 심하게 다쳤는데, 입원 당시 어머니는 그에게 해부학의 고전인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을 선물했고, 바스키아는 책을 통해 인체의 구조에 매료되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뼈와 해골, 인체 그림은 이때 해부학책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장 미쉘 바스키아

[Photo : 작가 홈페이지]

바스키아가 7살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아버지와 충돌이 잦아졌고, 그는 가출을 반복한다. 당시 친구인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뉴욕 소호 거리를 누비며 곳곳에 스프레이로 흔해 빠진 낡은 것 이라는 뜻의 세이모(SAMO, Same Old Shit)에 저작권 기호를 붙인 SAMOⓒ라는 문구를 남긴다. 세이모라는 문구와 그래피티로 표현된 그들의 철학적 시가 주목을 받으면서 1980년 그룹 전시인 <타임 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를 통해 호평을 받고, 바스키아는 1981년 라는 이름으로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이후 PS1,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다양한 공간에서 전시를 개최했으며, 이외에도 카셀 도큐멘타 7, 휘트니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거리, 영웅, 예술

바스키아의 대표작으로는 <기도하는 사람>(1984), <흑인>(1986), <피렌체>(1983), <천국>(1985), <재즈>(1986) 등을 꼽는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미국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2021. 2. 7.) 전시에서도 그의 원화 150점을 살펴볼 수 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8.3×226.1cm, 1981

[Photo : 롯데뮤지엄]

전시작 중 1981년에 그려진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은 바스키아 초기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텍스트와 드로잉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문자를 쓰고 지운 흔적이 보이는데, 그 자체가 작품을 구성한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은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을 묘사하고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

“나는 더 잘 볼 수 있게 하려고 단어들에 선을 그어 지워버린다.”

– 장 미쉘 바스키아

장 미쉘 바스키아, <잡 애널리시스(Job Analysis)>,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141.5×187.5cm, 1983

[Photo : 크리스티]

바스키아의 <잡 애널리시스(Job Analysis)>는 만화적 요소가 들어있는 작품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를 끌고 텔레비전이 각 가정에 보급되었으며, 영화와 만화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된 시기였다.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만화를 숭배하며 자신의 작품에 만화적 요소를 다양하게 등장시켰다. <잡 애널리시스>에서는 워너 브라더스의 <루니툰>에 나오는 포키(Porky) 캐릭터를 그렸으며, 이처럼 바스키아는 만화와 대중매체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문화적 기호로써 표현했다. 그는 또한 이 작품에서 만화 제작사인 UPA 프로덕션 로고를 작품 하단에 배치하고, 작품 곳곳에 만화와 관련된 텍스트를 넣기도 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1982

[Photo : 롯데뮤지엄]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는 바스키아가 LA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법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기법적 측면으로, 바스키아는 이 작품에서 제록스, 콜라주, 아상블라주 등의 기법을 사용한다. 다른 작품에 붙여 재사용하는 제록스 기법은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를 무한 반복할 수 있는 방식이자 반복된 도상들을 각인시키는 바스키아만의 독특한 전략이다. 또 이미지들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 냉장고, 문짝, 창문틀 등 일상용품이나 폐품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아상블라주 기법은 2차원 평면의 캔버스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한다.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는 내용으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바스키아 재단의 이사로 재직 중인 큐레이터 리처드 마샬(Richard Marshall)은 바스키아의 작품 주제를 여덟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자전적 이야기, 흑인 영웅, 만화책, 해부학, 낙서, 금전적 가치, 인종주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흑인 영웅과 인종주의의 주제가 드러난다. 여러 패널을 이어붙인 이 작품은 크게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누어진다. 먼저 작품의 상단부에서는 검은색 왕관을 쓴 젊은 유색 인종 영웅이 등장하고, 정의의 저울을 들고 있는 사람과 천사의 모습도 눈에 띈다. 작품의 하단부에는 붉은색의 강렬한 터치가 눈에 띄는데, 새의 공격을 당한 잔인한 모습을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바스키아는 작품을 통해 인종차별을 당하는 유색인종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진정한 영웅이 된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 acrylic, enamel spray paint, oilstick, metallic paint and ink on canvas, 220.9×401.3 cm, 1981

바스키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는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인간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그렸다. 앙상한 인간과 끌려가는 소가 대비적으로 표현돼 있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바스키아는 인간이 동물을 점유하고 독점하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구가 인류세로 접어들며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현재 시점에서 다시금 곱씹어 볼 만한 작품이다.

앤디 워홀과의 만남과 죽음

바스키아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바스키아는 1982년 처음으로 워홀을 만났고, 그와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다양한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업을 하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드로잉과 텍스트를 덧입혀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바스키아가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워홀과의 공동 작업에 나선 것도 있었겠지만, 미국 회화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유산을 중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회화의 유산에 그의 정통성을 덧입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낸 것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앤디 워홀, <무제, 두 마리의 개(Untitled, Two dogs)>, acrylic and silkscreen ink on canvas, 203.2×269.2 cm, 1984

[Photo : 롯데뮤지엄]

하지만 바스키아에게 예술적 동지이자 아버지와 같은 버팀목이었던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1987~1988년 사이 그의 작품을 보면 붕대를 두르고 눈을 지워 버린 두상이나, 뼈대와 내장기관이 보이지 않는 인물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환멸과 패배의 메시지가 드러나며, 자기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는 마약 남용으로 27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바스키아의 삶과 예술

1980년대 서구 미술에서는 기존의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경향과 해체주의, 절충주의, 다원주의 등이 나타났다. 당시 신표현주의나 트랜스 아방가르드로 분류되는 예술가들은 개인적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뉴 페인팅(New Painting)으로 나아갔다. 뉴 페인팅은 거대한 캔버스에 거친 붓질과 원색의 색채를 사용하고, 폭력, 죽음, 성(性), 꿈, 신화 등의 도상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비주류의 흑인 화가 바스키아는 뉴 페인팅의 방식으로 인종주의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했다.

“나는 작업 중에 예술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 관해 생각할 뿐이다.”

– 장 미쉘 바스키아

바스키아의 작품은 자신의 일생을 그대로 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드러난다. 사회적 편견과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에너지를 담아 거리 예술을 현대미술로 확장한 바스키아. 비록 그의 생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한 여운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바스키아의 삶은 작품 그 자체가 되었다.

77개의 장미쉘 바스키아 아이디어 | 그림, 현대 미술, 예술

Jean-Michel Basquiat. In Italian, 1983. Acrylic and oil paintstick on canvas with wooden supports and five smaller canvases painted with ink marker. Two panels: 88 1/2 x 80 inches overall (224.8 x 203.2 cm).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Courtesy Gagosian Gallery. Photography by Robert McKeever.

예술을 27세로 압축해 살다간 바스키아 1조원대 작품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

롯데뮤지엄 바스키아 회고전

회화·조각·드로잉 등 150점

‘거리’‘영웅’‘예술’로 조명

“30년 흘러도 신선하고 세련”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찰리 파커, 지미 핸드릭스 같은 우상들을 떠올리며 이들이 스타가 된 과정을 꿈꿨다.”

미국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1960~ 1988)가 남긴 말들이다. 바스키아는 1980년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8년이라는 짧은 기간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고작 27세에. 미술계에 등장할 때부터 사망한 순간까지 “유명한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스타성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 더 굳건해졌다.

지난 2017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 작 회화 ‘무제(Untitled)’가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48억원)에 낙찰됐다. 미술품 경매 최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의 기록 1억794만 달러(2025억원)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1980년대 이후 작품 중 1억 달러를 넘은 첫 작품이자, 미국 작가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장 미셸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 전이 8일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개막했다.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바스키아의 회화와 드로잉 등 150여 점을 소개한다. 국내에서 바스키아 전시는 2006년, 2013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렸지만, 이번 전시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성기와 유작을 모두 아우르는 국내 최대 규모다.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이티공화국 출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다. 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다닌 덕에 바스키아는 다빈치부터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그림을 가까이서 접하며 자랐다.

예술가 바스키아에게 그의 어머니가 끼친 영향은 미술관 관람에 그치지 않는다. 1968년 만 7세 때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을 때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를 선물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이때의 경험과 연관됐다고 본다. 이후에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봤고 인체에 대한 탐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세이모(SAMO©)’. 바스키아를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키워드다. ‘흔해 빠진 낡은 것’이란 뜻으로, 1977년부터 바스키아가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만든 가상 인물이다. 두 사람은 ‘SAMO©’라는 이름으로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낙서하며 권위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뉴욕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익명’으로 남고자 했던 알 디아즈와 ‘스타’가 꿈이었던 바스키아는 세이모 활동에 대한 이견으로 결별했다. 이후 우편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1982년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미술가에서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했다. 1985년 앤디 워홀과도 협업 전시를 열었고, 이후 1988년 코트디부아르 이주를 준비하던 중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아이가 거칠게 낙서한 듯이 자유분방한 화법이 도드라지는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제작된 지 30여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조합하며 스프레이, 오일, 파스텔, 크레용, 유화와 아크릴 물감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화면에 즉흥성과 리듬감을 더했다.

1981년 작 ‘뉴욕 뉴욕’도 그중 하나다. 뉴욕의 번잡한 거리를 묘사한 이 작품엔 왕관 형태와 얼굴, 암호 같은 글자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당시 비평가들은 “유치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했지만, 지금 평단에선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추앙받는다.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도 눈여겨볼 만하다. 1981년 첫 유럽(이탈리아)개인전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거대한 화면에는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형상의 인간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으로, 동물의 죽음을 통해 자본주의 소비 사회를 비판해온 바스키아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현재 이 작품 가격은 약 2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이번 전시 작품은 대부분 뉴욕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호세 무그라비의 소장품이다. 작품가만 1조원에 달한다. 전시를 기획한 구혜진 롯데뮤지엄 큐레이터는 “바스키아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를 즉흥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조합했다”며 “함축적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이미지와 탁월한 색채 감각은 지금 보아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세련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7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장 미쉘 바스키아, 제임스 딘이거나 피카소이거나

New York, New York, 1981,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8.3×226.1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장 미쉘 바스키아, 제임스 딘이거나 피카소이거나

천재, 낙서 그림, 요절로 상징되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이 한국에 온다. 국내 최초의 대규모 기획 전시다. 이보다 더 많은 바스키아의 작품을 볼 기회는 당분간 없을 것이다.

“작업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왕족(특권), 영웅주의 그리고 거리입니다.”

바스키아와 미술비평가 헨리 겔트잘러의 인터뷰 중에서

2017년 소더비 경매에 바스키아의 1982년 작품 ‘무제(Untitled)’가 출품됐다. 경매 참가자들은 미친 듯이 번호표를 들어 올리며 가격을 불러댔다. 최종 낙찰가는 1억1,050만 달러. 우리 돈 1,3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첫 문장부터 경매가를 들먹이니 속물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미술 분야에서 작품 가격은 작가를 규정하는 숙명이자 포장지니까.

그런 점에서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란 이름은 그 자체로 최고의 상징이자 브랜드다. 그는 가장 비싼 그림을 파는 작가이고, 그의 전시는 여전히 많은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 Dmitri Kasterine. All Rights Reserved

누구라고? 바스키아?

바스키아에 대해 흔히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그가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을 거라는 것이다. 아마 그가 흑인인 데다 ‘거리의 미술’이라 부르는 그라피티를 주로 작업했기 때문일 텐데, 사실 그는 회계사 아버지와 미술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중산층 가정의 소년이었다.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를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며 예술에 대한 경험을 탄탄하게 쌓도록 교육했다. 바스키아에게 어머니와 그림은 강한 연결 고리였다. 어머니와 함께 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처음 보고 화가를 결심했을 때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Old Cars, 1981, Acrylic, oil stick,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1.9×120.3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Untitled (Bracco di Ferro), 1983,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 supports, 182.9×182.9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외부에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시티 애즈 스쿨’에서 알 디아즈를 만나면서다. 그는 디아즈와 함께 그 유명한 낙서 크루 ‘세이모 ©( SAMO ©) ’를 결성했다. 이는 ‘Same Old Shit’의 약자로, ‘흔해 빠진 개똥 같다’는 의미다.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 그리고 몇몇 친구는 뉴욕 소호 거리를 캔버스 삼아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그린 낙서들은 단숨에 유명해졌다.

어려서부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던 바스키아는 이를 이용해 더 저명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에겐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같은 유명인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알 디아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명세 때문에 작업에 제약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었다. 결국 세이모는 해체했다.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라는 유명한 낙서가 당시 뉴욕 곳곳에 새겨진 이유도 그래서다.

이후 바스키아는 자퇴를 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가 굳이 거리로 나앉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노숙을 한다.

뉴욕 브루클린 거리에 그려진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벽화 © shutterstock

바스키아가 워홀을 만났을 때

잘 알려진 것처럼, 바스키아 연대기를 쓸 때 앤디 워홀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마케팅의 천재인 워홀은 어린 바스키아의 천재성과 대중성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이상으로 바스키아에게 투자했다. 덕분에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은 껑충 뛰어올랐다. 원하던 대로 스타가 된 것이다.

동시에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소문도 함께 입방아에 오르며 바스키아를 괴롭힌다. 1985년에 바스키아와 워홀이 함께 기획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과 함께 처참히 실패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는 커다란 금이 간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 없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형 전시도 개최한다. 그러던 중 워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이로 인해 약물중독에 빠진 바스키아는 워홀의 사망 1년 후인 1988년 8월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만다.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 아비장으로 이주하기 엿새 전이었다.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나이인 만 27세였다.

“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마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당신의 악기는 어떻게 소리가 나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장 미쉘 바스키아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Victor 25448, 1987, Acrylic, oil stick, wax, and crayon on paper laid on canvas, 182.9×332.7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해골과 왕관이 가득한 그림

1980년 초 뉴욕 화단에 데뷔했으니 바스키아가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은 8년 남짓,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는 3,000여 점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다.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 해골이나 인체의 구조, 왕관, 그리고 단어의 조합으로 된 메시지 같은 것들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8세가 되던 해, 바스키아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이란 책을 선물한다. 인체의 장기와 뼈 그림이 가득하던 해부학 교과서다. 이 책에 매료된 바스키아는 자신의 작품에 해골과 인체 구조, 다양한 기호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또 인종과 계급 간 불평등이 만연하던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성공한 유색인종을 캐릭터로 만들고 머리 위에는 존경과 권위의 의미를 담아 왕관도 함께 그려넣었다. 그런 해골과 왕관이 가득한 바스키아의 작품들을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바스키아 전시장 전경 ©롯데뮤지엄

바스키아 전시장 전경 ©롯데뮤지엄

서울에서 만나는 150여 점의 그림

10월 8일부터 롯데뮤지엄에서 <장 미쉘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전이 열리고 있다. 2021년 2월 7일까지 진행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있었던 바스키아의 전시 규모를 뛰어넘는 최대 규모인 15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는 바스키아 개인과 작품을 대변할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 ‘거리’, ‘영웅’, ‘예술’로 구성했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한 SAMO 시기부터 작가의 예술 세계에 드러나는 대중문화와 산업화의 방식, 영웅을 모티브로 작가가 창조한 다양한 아이콘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식과 시선으로 작업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작품 등이 전시된다. 인생 파트너인 앤디 워홀과 함께 작업한 대형 작품도 볼 수 있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흐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그의 작품은 미술과 음악, 패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 재생산되며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비록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바스키아는 여전히 신화이자 거리의 영웅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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