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한국인 | [선공개] 한국 완벽 지배를 위해, ′친한파′를 자청했던 이토 히로부미 차이나는 클라스 99회 상위 198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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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한국인의 의지′를 알았던 이토
한국인의 인심을 얻어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어야
지배도 공고해지고 오래간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순종을 내세워 민심을 다스리려고 한 이토
일종의 보여주기식 방식으로
한국인들의 민심을 실제로 얻기도 했다고..!
그래서 일부에서는 안의사가
평화주의자 이토를 처단해 병탄을 앞당겼다는 주장도…. (착잡)

′안중근은 왜 이토를 죽여야 했나′
3월 6일 밤 9시 30분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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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나무위키:대문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물어보면 “일본 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라는 답보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사람”이라는 답이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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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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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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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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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인이었다”…본명은 림춘모, 아버지는 림세장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이름은 림춘모, 아버지는 림세장, 이놈이 조선인이면서 매국매족 매혼노였다는 것이다. 시사플러스에서 상기 내용을 정리했다. 태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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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plusnews.com

Date Published: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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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그저 나쁜놈인가 – 브런치

일본이 ‘한국의 원수’를 존경하는 이유 | 정답부터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인 입장에서 나쁜놈이 맞습니다. 이토는 한국통감을 지내는 동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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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4/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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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지 않았다면 – 한겨레21

아마도 대한국 정책에서 온건파를 대표했던 자신이 한국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에서였을 것이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이 자충수? 19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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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21.hani.co.kr

Date Published: 1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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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해부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삶 | 중앙일보

반면 일본에선 1984년까지 1천엔 지폐에 그의 얼굴이 실릴 정도로 근대화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되고 – 히로부미,한국인,이토의 살해범,이토의 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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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0/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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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토 히로부미 사살 배경 – 우리역사넷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즉 이토는 1907년 6월 4일에 “한국을 멸망시키는 자는 일본인이 아니라 내외 사정을 모르면서 경거망동을 하는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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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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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어리석도다!” – 프레시안

커 오면서 일본인의 ‘침략성’ 얘기를 많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식민 지배의 경험 때문에, 그리고 대동아전쟁을 일본이 일으킨 사실 때문에 우리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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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ressian.com

Date Published: 3/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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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 한국 완벽 지배를 위해, ′친한파′를 자청했던 이토 히로부미 차이나는 클라스 99회
[선공개] 한국 완벽 지배를 위해, ′친한파′를 자청했던 이토 히로부미 차이나는 클라스 99회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토 히로부미 한국인

  • Author: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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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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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나 ‘소로카쿠슈진’(일본어: 滄浪閣主人)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으로 시작하여 후작,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생애 [ 편집 ]

생애 초기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한복을 입은 이토. 한국 통감 시대, 전열, 왼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인 이토 우메코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周防國村)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林十藏)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中間)계급인 이토 다케베(伊藤武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伊藤)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소년기 [ 편집 ]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청년기 [ 편집 ]

요시다의 문하생 [ 편집 ]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 운동 [ 편집 ]

청년 지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스승 요시다 쇼인의 동상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1]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準士雇)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영국 유학과 귀국 [ 편집 ]

영국 에 파견된 5명의 유학생 장주 5걸, 좌측 상단에 앉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2](井上勝)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Ernest Mason Satow)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討幕) 정책을 수행하였다.

막부 타도 운동 [ 편집 ]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정치 활동 [ 편집 ]

정계 입문 초기 [ 편집 ]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권력 장악 [ 편집 ]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 총리대신 [ 편집 ]

1차 총리 취임과 퇴임 [ 편집 ]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 [ 편집 ]

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夏島)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다카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2번째 총리직 [ 편집 ]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3번째 총리직 [ 편집 ]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4번째 총리직 [ 편집 ]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외교 활동 [ 편집 ]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In Korea With Marquis Ito)’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 편집 ]

하세가와 대장과 함께 통감부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쪽)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통감부 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을사조약 입니다.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3][4]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5]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생애 후반 [ 편집 ]

한국 고종 양위 주도 [ 편집 ]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6]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6]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7]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7]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7]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7]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7]”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7]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7]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7]”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8]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8]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한국 고종 양위 사건의 여파 [ 편집 ]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9]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9]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10]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10]

퇴직과 사망 [ 편집 ]

하얼빈 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한국인 저격조의 한 사람 안중근 의사.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11]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

사망에 이르는 과정 [ 편집 ]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2]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및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蔡家溝) 및 (다음 역인)하얼빈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13]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14]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12]

장례식 [ 편집 ]

시신 운구 작업 [ 편집 ]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秋津洲)로 운구되었다.[15]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門司)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赤坂區) 영남판(靈南坂)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국장 거행 [ 편집 ]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內匠頭) 가타야마(片山東熊)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렀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忠貞君)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도쿄 시내에 소재한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荏原郡) 대정정자 곡수분영(大井町字 谷垂墳塋,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品川区) 곡수묘지(谷垂墓地))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伊藤文吉)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大森)의 은사관(恩賜館)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光友俱樂部)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伊藤道路)’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伊藤博文公)>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조선의 반응 [ 편집 ]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사후 [ 편집 ]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그려진 유통된 일본 1000엔 지폐 (1963년부터 1984년까지 통용됨.)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6]

저서 [ 편집 ]

《일본 헌법 정의 해제》 (1882년)

가족 관계 [ 편집 ]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는 공작에 올랐다.

인간 관계 [ 편집 ]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朴重陽)을 제자로 삼았다.

학력 [ 편집 ]

명예 박사 학위 [ 편집 ]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사상과 신념 [ 편집 ]

개화론자로 전환 [ 편집 ]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 [ 편집 ]

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成瀬仁蔵)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참고 문헌 [ 편집 ]

정일성, 《이토 히로부미: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지식산업사, 2002)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동아일보사, 2010)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중심, 1999)

일화 [ 편집 ]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17] 또 이때 선물한 초콜릿이 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18]

이토를 사살한 대한제국의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고, 근거로 총 15개 조를 제시했다. 재판, 신문 조서에서 밝혔던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19]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관련 작품 [ 편집 ]

다큐멘터리 [ 편집 ]

한국

영화 [ 편집 ]

한국

일본

드라마 [ 편집 ]

한국

중국

주향공화 (2003년, CCTV) – 히라타 야스유키

일본

뮤지컬 [ 편집 ]

한국

영웅 (2009년) – 조승룡, 이희정

영웅 (2010년) – 조승룡

영웅 (2011년) – 조승룡, 이희정

영웅 (2012년) – 김도형, 이희정

영웅 (2014년) – 김도형, 이희정

영웅 (2015년) – 김도형, 조승룡

영웅 (2017년) – 김도형, 이정열, 윤승욱

같이 보기 [ 편집 ]

박중양

규장각 – 이토가 규장각에서 빼돌린 상당수의 고서들이 현재까지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일본왕실 도서관)에 있다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제1대 이토 (히로부미) 공작가 당주

1907년 ~ 1909년 후임

이토 히로쿠니

이토 (히로부미) 후작가 당주

1895년 ~ 1907년 후임

공작으로 승작

이토 (히로부미) 백작가 당주

1884년 ~ 1895년 후임

후작으로 승작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인이었다”…본명은 림춘모, 아버지는 림세장

▲ 매국매족 매혼노 이등박문

이상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에 대한 설명이다. 최근 인터넷에 우리 역사에 몰랐던 이토 히로부미의 본명을 알아냈다는 글이 새롭게 화제가 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이름은 림춘모, 아버지는 림세장, 이놈이 조선인이면서 매국매족 매혼노였다는 것이다. 시사플러스에서 상기 내용을 정리했다.

태극훈장을 두 개나 단 림춘모

1850년대 대륙에서 이땅으로 넘어와 왜족으로 변신했다. 1876년 초대 통감으로 이 땅 한반도를 통치하였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척살된다.

이자가 현재의 덕수궁을 지었고, 현판 현액을 대한문 덕수궁으로 썼다. 조선은 덕수궁이 없었고 남송때 현 중공 항주에 있었다는 것.

림춘모 이놈을 기리는 사당이 현 신라호텔 짓기 전 박문사로 세웠다.

또 림춘모은 정동 바위에 대한을 영원히 식민지배 통치 다스리겠다는 뜻을 새겨넣었다.

▲ 이등박문 가족사진

大勳位 候爵 伊藤博文 謹題

(대훈위 후작 이등박문 근제)

1905년 11월 彫之(새김)

천황폐하께 엎드려 바치오니 영원히 무궁하옵소서.

이등박문의 아버지 임씨가 일본의 개노릇으로 출세하기 위해 일본과 이땅으로 와서는 자기 자식들도 매국매족 매혼노로 만들어 이땅을 천황폐하께 엎드려 바치오니 영원히 다스려 달라는 뜻이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평민이나 다름 없던 일개 하급무사가 멀쩡한 무사들도 평민이 되던 시절에 되려 공작이 되는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극초반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비주류노선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사쓰마 파벌의 영향력이 워낙 강한 초기에는, 정치인-관료 진영의 (비교적) 온건파 조슈 파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듯하다.

한국과 중국 및 아시아 침략의 원흉으로 1909년 러시아 회담이 있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총탄 세 발을 적중하고 처단당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저 나쁜놈인가

정답부터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인 입장에서 나쁜놈이 맞습니다.

이토는 한국통감을 지내는 동안 대한제국을 내부에서부터 야금야금 무너트려 갔습니다. 외교권 박탈, 고종황제 퇴위처럼 한국침략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이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의 최후는 한민족의 역사를 망가트린 악당으로서 손색이 없을만큼 드라마틱한데요. 조선 식민지화를 마무리 해가던 시점, 이토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습니다. 이쯤되면 과연 그만큼 뼛속까지 철저한(?) 제국주의자가 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이토히로부미(왼쪽)와 친일파들(오른쪽)

그러나 만약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무슨 답변이 나올까요? 몇년 전, 도쿄대 법학부 친구들과 함께 일본 국회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이드를 해주신 교수님을 따라 한참을 끄덕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메인 로비에 도착하니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버젓이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 절대악’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당신이 왜 여기에?’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그때 일본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어떤 사람이야?’ 친구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이토상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조금 보수적인 성향의 친구에게서 나온 답변이긴 했지만 현재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 이토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인물, 죽는 순간까지 메이지 천황(일왕)에게 가장 신뢰받았던 인물,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기억되는 인물. 이 모든 타이틀을 얻기까지 이토 히로부미 개인의 인생사에는 누구못지 않게 굴곡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그 수많은 굴곡 중 ‘한국인의 원수’ 이토가 ‘일본 국회의 한복판에 서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국회의사당 메인로비 : 맨앞 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때는 1881년 11월 일본이 서구식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습니다.(이때 조선에서는 영남지방 유생들이 개화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던 영남만인소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내무경, 지금으로 치자면 경제부총리 정도의 높은 직책에 있었는데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이토는 일본 지도부에서 아주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토는 이때 이후로 우울증과 노이로제에 걸려 건강이 갈수록 악화됩니다. ‘술 한병을 비우지 않으면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이었지요.

그가 노이로제에 시달린 이유는 바로 ‘헌법’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서구식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유럽처럼 헌법을 통해 국회를 설립하고 근대적인 정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부는 아직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핵심 지도층이 반으로 갈려 ‘그냥 무시하자’는 의견과 ‘뭐 그깟 헌법 대충 만들면 되는거아니냐’는 의견으로 투닥투닥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 헌법을 공부했었던 이토는 ‘헌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만들어야 하지만 그것을 나라에 맞게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토가 괴로웠던 것은 바로 이런 ‘맞춤형 헌법’을 만들 사람이 일본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오랜 고민 끝에 내무경의 자리를 내려놓고 본인이 직접(!)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영국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를 제외했던 이유는 국왕의 권한을 철저히 제한하는 영국 헌법이 천황을 하늘같이 여기는 일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독일에 도착한 이토는 독일의 외교가와 정치인들을 만나는 대신 곧바로 베를린 대학의 그나이스트와, 빈 대학의 슈타인을 찾아가 배움을 간청합니다. 자신에게 일본을 발전시킬 선진 헌법에 대해 지도해달라는 이유였지요.

이토(오른쪽)에게 독일 헌법을 교육한 슈타인(왼쪽)

막상 헌법을 공부해 오겠다며 베를린 대학에 들어간 이토였지만, 사실 그는 독일어를 전혀 못했습니다.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 그것도 가장 어렵다는 법률을 이토는 어떻게 공부했던 걸까요? 비결은 경험에 있었습니다. 이토는 비록 독일어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일본 정부의 모든 요직을 두루거치며 근대 법률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과거 유학시절, 미국 헌법을 샅샅이 공부해둔 경험 덕분에 독일법을 이해하는데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요. 그는 슈타인 교수의 지도 아래 , 난해한 독일 헌법 이론을 영어로 한단어 한단어 번역해가며 꼼꼼히 소화합니다. 그때의 공부가 얼마나 즐거웠던지 이토는 자신의 동지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독일의 헌법과 행정에는 전문적인 언어가 너무도 많아 이를 영어로 간신히 해석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런 법들의 장단점에 대해 논할때면 진실로 잠자고 쉬는 것조차도 전부 잊을 만큼 재미있습니다. … 조금이라도 (일본의 헌법을 위한) 핵심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이제야 마음 편히 죽을 곳을 찾은 기분입니다.

2년 간의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는 정부의 젊은 인재들과 함께 ‘일본 최초의 헌법’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나쓰시마에 있는 별장에 틀어박힌 이토는 일본을 서구 열강처럼 만들겠다는 무시무시한 일념 하나로 고통스러운 창작조차 기쁜 마음으로 몰두합니다 . 당시 그는 어린 신진 관료들이 지위가 높은 자신 앞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토론을 시작할때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반드시 모두 털어 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4달간 이런 격론을 통해 만들어진 ‘제국헌법’ 초안은 이후 여러차례 수정을 거쳐 ‘근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뼈대로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토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가 대한제국에 저질렀던 비열한 일들을 생각하면 이런 ‘원한’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테지요. 하지만 이런 미움이 한발자국 더 나아가 ‘이토를 무시하자’는 의견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당장 네이버 인물사전에 ‘이토 히로부미’를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댓글이 베스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쁜놈이면 몰라도 되는걸까요

그러나 이토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는 ‘무서운 열정’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헌법과 내각, 그리고 국회를 만들어낸 ‘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거를 가진 그는 오늘날 기세도 당당하게 국회 로비의 한복판에 서서 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안중근 의사(장군)의 희생과 순국을 기리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단했던 악당 이토가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토를 ‘그저 나쁜놈’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기 보다 ‘상대로 두기엔 끔찍할만큼 무서운 인간’ 이라고 여기며 알아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이토 유키오, ‘이토 히로부미’ ,선인, 2014

이성환,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선인, 2009

일본 위키피디아, ‘이토 히로부미’ 항목

네이버 인물사전, ‘이토 히로부미’ 항목

한국인이 해부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삶

일본의 조선침략 선봉, 이토의 일생을 우리 시각에서 해부해 그의 죄상을 밝힌 책. 그는 조선통감을 지냈고 안중근 의사에 의해 만주 하얼빈역에서 사살됐다는 몇 가지 단편적 사실 외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일본에선 1984년까지 1천엔 지폐에 그의 얼굴이 실릴 정도로 근대화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언론인 출신의 저자는 한·일 양국의 자료를 동원해 이토가 한민족에 끼친 패악을 적시하는 한편 출생부터 출세까지 비화를 소개했다. 그 중 암살테러 경력을 가진 유일한 일본 총리며 메이지 일왕(日王)의 부친 살해에 관여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또 이토의 살해범이 따로 있다는 일본 내의 논란도 담았다. 참고문헌 목록과 연보(年譜)는 있지만 적절한 주석과 찾아보기가 빠진 점이 관련 분야 연구서로선 아쉬운 점.

(1) 이토 히로부미 사살 배경

1910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安重根에 의한 일본 樞密院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0451)안중근의 사상 및 독립운동에 관한 대표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현종,<살신보국으로 광복운동한 안중근>(≪나라사랑≫34, 외솔회, 1979).

愼鏞廈,<안중근의 사상과 국권회복운동>(≪韓國史學≫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윤병석,<안의사의 의병활동과 그의 사상>(≪안중근의사연구의 어제와 오늘≫, 안중근의사기념관, 1993).

김창수,≪항일의열투쟁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金鎬逸,<安重根義士의 東洋平和論>(≪安重根의 義烈과 東洋平和論≫, 안중근의사 의거 제89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1998).

白奇寅,<安重根의 國權守護運動과 思想>(≪淸溪史學≫13, 1997).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암살자’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일합병을 시기적으로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0452)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7(1968), 138∼139쪽. 이에 반하여 안중근 자신은 스스로를 의병으로 규정하여 개인적으로 행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의병 參謀中將으로서 전개한 독립전쟁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일제가 침략의 의도를 은폐하고 합병의 필연성을 강조한 정략적 견해이고, 후자의 경우 무력투쟁을 통한 구국운동의 한 표현이라는 점이 그 특징이다.

1909년 7월 6일 일본 閣議에서는<韓國 倂合에 관한 案件>이 결정되었으며 이를 기초로<對韓施設大綱>이 확정되어 구체적 작업에 들어갔다.0453)外務省 編,≪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東京:原書房, 1965), 315∼316쪽.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일관된 정책을 견지하였으며, 그 해 11월 17일에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 국내의 독점자본 형성의 촉진과 일반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방어능력을 상실한 한국’을 완전 병합하기 위한 전초 단계였다. 또한 일제는 이른바 아시아 연대주의론0454)아시아연대론은 征韓論·脫亞論과 함께 일본의 침략주의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상위개념이다. 즉 이 논점은 일본만이 근대민족국가를 이해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朴英宰,<近代日本의 韓國認識>;趙恒來 編著,≪日帝의 對韓侵略政策史硏究≫, 玄音社, 1996 참조). 이는 일본이 제국주의체제를 형성하고 그와 함께 독점자본제적 경제시스템을 완비하는 데 필수적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을 내세워 서구열강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조선이 대등한 형태로 합방하여 大東國을 건립하고 淸國과 연계하자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한국병합과정에서 대아시아주의자들이 침략성을 은폐하는 관념적 무기로서 그리고 친일자들이 자신들의 매국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0455)旗田巍,≪日本人의 韓國觀≫(一潮閣, 1983), 26∼31쪽.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의 실질적 정책 실행자, 특히 회유파의 거두 이토0456)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및 韓國觀에 대하여서는 市川正明,≪安重根と日韓關係史≫(原書房, 1979), 119∼128쪽 참조.는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대한 정책의 실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당시 초대 통감의 자격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쟁점 속에서 이토는 對歐美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구미열강에게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외교경험이 풍부하고 천황의 신임이 두터운 문관을 초대 통감에 임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다년간 외교경험이 풍부한 이토가 한국 통감으로 결정되고 그는 바로 군대통수권을 확보하였다. 이는 그가 재임중에 한국의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이를 저해하는 요인을 무력으로 제거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0457)柳在坤,<伊藤博文의 對韓侵略政策(1906∼1909)-<大臣會議筆記>를 중심으로->(趙恒來 편역, 앞의 책), 309∼310쪽.

이와 같이 이토는 통감으로 재직하면서 일본 자본주의체제의 이식에 적합한 구조로 한국사회를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은 극도로 피폐하였기 때문에 이를 개조하지 않고는 도저히 한국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0458)國史編纂委員會,≪統監府文書≫1(1998),<韓國施政改善に關する協議會 第14回 會議錄>, 278쪽. 이토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對韓 정책이 善政이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함이며, 이에 반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이토는 1907년 6월 4일에 “한국을 멸망시키는 자는 일본인이 아니라 내외 사정을 모르면서 경거망동을 하는 한국인이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된다면 한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보존에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 긴요한 방침은 한국이 일본과 성실하게 친목을 도모하고 존망을 같이하는 데 있다”0459)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6 中(東京 : 巖南堂書店, 1965), 508∼509쪽.고 하였다. 이토의 이러한 대한 정책은 안중근이 제시한 ‘이토의 죄목’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토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제반 여건, 즉 헌병경찰제도의 확립, 재정·화폐제도의 확립, 토지수탈과 식민지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다. 이는 이토가 동양평화의 유지를 주장한 日韓提携論이 고도의 기만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어리석도다!”

▲ 저격한 사람이 조선의 애국 청년이란 말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어리석도다” 한 마디가 전해진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대신 보호국으로 지키는 것이 이토가 마지막 몇 년을 바친 일이었다. 그가 조선의 황제와 대신들에게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만 한 경륜을 접한 일이 있었을까? ‘동양평화론’이 육혈포 탄환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 안중근에게도, 이토에게도, 그리고 모든 조선인과 일본인에게도 비극이었다. ⓒ프레시안

연초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5월 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6월로 들어오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꽤 남았네요. 그러나 주 2회 정기 연재는 이번 회로 일단 끝내겠습니다. 몇 주일 생각을 가다듬은 뒤에 남은 이야기는 다음 달에 더 잘 정리해서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커 오면서 일본인의 ‘침략성’ 얘기를 많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식민 지배의 경험 때문에, 그리고 대동아전쟁을 일본이 일으킨 사실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일본의 침략성이 크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특정 시점에서 문화적 조건 때문에 공격성이 크게 나타나는 상황이 이해되면서 민족성 자체의 편향성을 생각할 필요는 줄어든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제국주의 시대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모든 국가가 먹느냐 먹히느냐 양단 간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였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를 이룩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팽창 없는 근대화의 길은 새로 근대화를 시작하는 국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19세기 말의 전 세계 열강들에게 최대의 침략 대상은 중국이었다.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해 필연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한국이 있었다. 한국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들여 놓는 것이 대륙 침략에 유리한 위치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일본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한국을 무력으로 병탄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무력을 갖추기 전부터 일어나 합방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보다 온건한 주장이 합방 직전까지 이에 맞서 펼쳐졌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무단(武斷)파와 문치(文治)파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다.초기의 갈등은 무단파의 거두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1877)으로 몰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당시 문치파는 정한(征韓)의 필요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 침략에 앞서 내부 정비가 먼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일본이 치른 대외 전쟁은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두 차례뿐이었다. 당시의 열강치고는 전쟁을 덜 치른 편이다. 내실을 중시하는 문치파 노선이 대체로 관철된 셈이다.한국을 어떻게든 일본에 유리한 자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 기간 내내 문치파도 인정한 과제였다. 조선 정부를 메이지유신과 같은 길로 이끌어 일본과 협력하는 관계를 맺자는 온건 노선에서부터 조선을 정벌해 속국으로 만들자는 강경 노선까지 여러 노선이 엇갈렸다. 결국 합방은 강경 노선에 가까운 귀착이었지만, 문치파 주장도 가미된 타협적 노선이라 할 수 있다.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대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을 때 갑오경장을 유도한 것은 일단 온건 노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왕비 살해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무단파의 불만이 분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관파천이 촉발되어 영향력의 지속적 행사가 막힌 것을 계기로 강경 노선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은 당분간 문치파의 온건 노선을 기조로 하게 되었다. 이 온건 노선을 대표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였다.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아관파천 이래의 교착 상태를 벗어나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영향력을 다시 확보했다. 이때의 온건 노선은 보호국화 정책이었다.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육성하려던 계획은 ‘광무개혁’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진도가 너무 처진 조선을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온건 노선이라 하더라도 10년 전보다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광무개혁’이라고 따옴표를 쓰는 것은 전혀 ‘개혁’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개혁적 요소를 가리키며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질을 갖춘 개혁이 아니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피상적 변화 몇 가지를 체계성도 없이 진행시킨 것일 뿐, 시대적 요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대한제국의 반동성은 무엇보다 황제권의 전제화에 나타난다. 일본의 온건 노선이 조선 왕권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 측면에는 평가할 만한 의미가 있다. 권력 사유화는 대외 관계에 앞서 조선 국내의 체제 문제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이 문제의 극복에 일본이 노력한 것은 조선의 향후 진로를 조선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군주권의 축소가 침략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무조건 침략을 하려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 없이 더 쉬운 길이 많이 있었다. 아직 일본이 군국주의에 빠져들기 전의 일이었다.온건 노선이건 강경 노선이건 한국을 일본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이상 똑같은 침략 노선으로 보자는 주장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보는 태도다. 물리적 힘으로 강제하는 강경 노선과 한국 쪽의 자발성을 가능한 한 키워내려는 온건 노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에서 한국의 진로는 일본의 존재와 의지를 고려하지 않고 결정될 수 없었다. 개항기 이전까지 중국의 의지를,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의지를 고려하더라도 주동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대응이라면 이쪽 사회의 발전을 위한 선택의 기회를 스스로 찾을 여지가 있다.절제 없는 자유가 개인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민족자결’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국가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제한된 선택의 범위를 가진다. 한국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힘을 주어진 여건으로 받아들여 왔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힘이 무너진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국제 질서에서는 일본의 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갑오경장 당시의 ‘친일’ 내각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일본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이는 방법과 범위를 조정해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견제로 일본의 영향력이 봉쇄된 데 고종은 만족하고 권력의 사유화에만 일로매진해서 대한제국을 세웠다.러일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면서 일본은 10년 전 갑오경장 때의 ‘지도’ 방식에 비해 강압적인 ‘통제’ 방식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顧問) 정치의 방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종이 겉으로만 이에 응하는 시늉을 하면서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고 온갖 획책을 했기 때문에 외교권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는 을사조약과 더욱 강압적인 통감(統監)정치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겉으로만 보면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대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서라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대한제국을 운영하는 동안 고종은 방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규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돈과 관계되는 사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궁내부로 끌어들인 것을 보면 비자금 조성에 그야말로 전력을 기울인 것 같다. 이 비자금으로 밀사들을 움직여 열강들, 특히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고종에게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최선의 방책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이권으로 유혹하면 열강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환상을 그는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듬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가 1909년 6월 통감 직을 그만둘 때는 합방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을 때였다. 조선 통감 자리는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합방 후의 조선 총독은 대신 급과 총리 급 사이에서 임명되었다. 총리급을 넘어 국가 최고 원로인 이토가 총독보다 가벼운 통감 자리를 맡은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온건 노선을 대표하는 이토가 무력 합방을 피하거나 늦추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통감 자리를 떠난 몇 달 후 하얼빈에서 자신을 저격한 것이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도다.” 말했다는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변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최대한 만들어주기 위해 통감 자리에서 강경 노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그가 인생의 마지막 몇 해를 바친 일이었다.지난 회에 을사오적 중 이근택이 단순한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었는데, 그 후에 이근택의 행적을 다룬 관계 연구를 더 읽어보면서 아무래도 내가 지나친 상상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용익과 경쟁하며 권력을 추구하는 비열한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럴 리는 절대 없다, 하고 명쾌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너무나 많은 음모가 난무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가식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고종이 “술수와 책략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임금”이라고 적었었다. 그렇다. 들여다볼수록 고종이 편집증 같은 정신질환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도 꼭 안 해도 될 거짓말을 그저 거짓말 하는 보람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종은 무슨 일에건 드러난 거래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뭐든 이면계약을 맺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민비가 살해당한 닷새 후에 엄 상궁을 불러들인 일을 놓고 황현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란 극단적 표현을 썼다. 아무리 ‘야록’이라지만 선비의 몸으로 그런 표현을 임금에게 쓴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1907년 7월 퇴위 압력 아래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하는 장면에 대한 황현이 뭐라 했을지, 그에 관한 논평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박영효는 갑신정변 때 일본에 망명했고, 10년 후 갑오경장 때 일본 등에 업혀 돌아와 총리대신에까지 올랐으나 민비 암살 음모 혐의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추종자들을 통해 독립협회의 움직임을 조종했고, 1900년에는 고종 폐위 음모가 발각되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종이 그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 것은 온 나라가 아는 사실이었다.그런데 헤이그 밀사 사건이 터져 안팎의 양위 압박에 몰리자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했다. 자기 황제 자리를 지켜주려는 세력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자 일본에 연줄이 많은 박영효에게 매달린 것이다. 박영효는 그 한 달 전 일본 당국이 모르는 채로 입국했는데, 그것부터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 또한 황제와의 협력을 통해 지위를 확보할 뜻이 있었던 듯, 그가 궁내부대신을 맡은 며칠 후 그가 관련된 쿠데타 첩보에 따른 군사행동이 있었다. 양위식 전날이었다.고종 양위의 직접 원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을 황제 자리에 두고는 언제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만큼 불신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황제 자리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종의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받은 외국인 알렌도 고종에 대해 “나는 그가 어떤 짓이라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체념한지 오래되었다”고 일기에 적은 일이 있었다.일본이 1905년 11월 강압을 통해 을사조약을 맺은 것은 나쁜 짓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 즉 정미 7조약을 맺은 것도 나쁜 짓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일 모두 일본 측에서는 저지르지 않으려고 상당히 애를 쓴 사실이 있었다. 그런 짓까지 않고도 일본의 국익을 확보하려고 이토 히로부미는 노력했다.이토는 가급적이면 덜 강압적인 방법을 찾아내려고 여러 단계에서 노력했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에게 계속 이토 노선을 공격할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능한 한 온건한 방법을 취하는 쪽이 장기적 효과가 좋다고 믿었다.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택했을 것이다.하나의 왕조로서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다.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 사유화다. 하나의 국가 체제가 노쇠 현상을 일으킬 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은 쇄신을 촉구하기도 하고 파탄을 촉진하기도 한다. 개항기 이후 조선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대표한 것은 일본의 야욕이었다. 이 위협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이 주효했다면 일본에서도 온건 노선이 득세할 많은 계기가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그 와중에도 극단적 권력 사유화에만 매진하며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조선 말기의 방문자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영국의 비숍 여사는 조선 각지를 돌아다닌 끝에 연해주에 가서 그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탄복했다. 서로 도와가며 질서를 지키고 생업을 키워나가는 그 모습이 국내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어 같은 민족인 줄 알아보기가 힘들다고 했다.고종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 왕으로 있어서 훨씬 더 대응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19세기 말 조선에 닥친 시련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에도 숭고하고 비천한 품격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 국가의 멸망에서도 그 사회의 격조가 나타난다. 의로운 죽음에는 미래를 위한 밀알의 가치가 있다. 조선 왕조 멸망의 책임을 고종 한 사람에게 물을 일은 아니지만, 왕조 멸망에 임해 민족사회를 비참한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그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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