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업적 | 한번도 패전하지 않은 레전드 오브 레전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인생 [인물백과사전] 191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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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대표적인 업적은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전선을 수습하며 붕괴된 조선 수군의 재건을 꼽을 수 있는데요. 특히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한 명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전투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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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거북선 #난중일기 #한산도대첩 #명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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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순신 ; 삼도수군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사건 · 임진왜란 · 옥포 해전 · 합포 해전 · 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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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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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전문가도 믿기 어려운 업적…민족의 신화 이순신 윤명철의 …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해양환경과 전선, 그리고 전술의 미묘한 상관성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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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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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나무위키:대문

일찍이 일본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함 건조, 무기와 군비 확충, 군사훈련 등에 힘썼다. 1592년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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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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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 경상남도청

이순신이 통제사로서 이룩한 큰 업적의 하나는 지휘계통의 일원화였다. 이제까지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원균 등의 시기와 불복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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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yeongnam.go.kr

Date Published: 5/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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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탄신일! 이순신 장군 업적 살펴보기 – 네이버 블로그

이순신 장군은 우리 바다를 침략한 왜군을 연이어 격파,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승리를 거두는 업적을 이뤘는데요. 그가 참전해 승리한 임진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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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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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업적과 명언 모음 및 임진왜란 배경

2.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23 전 23승의 전적이다. 3. 개량형 신무기인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 기록문화의 공로가 크다. … 애국애족의 표본이자 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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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kss17.tistory.com

Date Published: 7/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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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업적 정리 – 니기

이순신 장군의 업적들 … 옥포해전에서 승전. 옥포에 침략하였던 왜군들을 물리쳐 26척 침몰 왜선 13척 침몰 등 조선의 임진강 방어실패로 조선의 불리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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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igi.tistory.com

Date Published: 12/24/2022

View: 7451

이순신 장군 업적 알아보기

이순신 장군 업적 알아보기 …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 명량해전과 거북선으로 유명한 분이죠. … 혹시 영화 명량을 보셨나요? … 재임명을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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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bcd1994.tistory.com

Date Published: 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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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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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3/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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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패전하지 않은 레전드 오브 레전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인생 [인물백과사전]
한번도 패전하지 않은 레전드 오브 레전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인생 [인물백과사전]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순신 장군 업적

  • Author: 세상의모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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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QUYjseeAE4

군사전문가도 믿기 어려운 업적…’민족의 신화’ 이순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59) 민족의 신화, ‘성웅’ 이순신과 대해전

20여 번의 해전에서 무패한 이순신 장군

동아시아 질서와 한민족의 역사에 큰 영향

많은 군사전문가도 믿기 어려워하는 업적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한국경제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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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전남 진도군 울돌목에서 열린 ‘2019명량대첩축제’에서 어민들이 명량해전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명량대첩축제는 임진왜란 당시 진도∼해남 해역에서 판옥선 13척으로 열 배가 넘는 규모의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을 기리는 해상전투 재현 행사다. 사진=연합뉴스

여수 엑스포 전시장앞 거북선 모형 사진=김용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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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과 당포만.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20여 번의 해전에서 무패했고, 아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만 낸 이순신 장군이 전사 직전에 한 말이다.육지전에서 끊임없이 패하던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초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인 거제도의 옥포 대첩이 있었다. 같은해 5월 말에는 거북선을 첫 사용한 사천 전투에서 79척을 침몰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7월과 8일에는 한산도 대첩이 있었고, 9월 1일에는 부산포 등 남해 동부 해안을 급습해서 대승했다. 이어 1593년과 1594년 계속 승리를 이어나갔다. 1597년에는 감옥에서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고, 9월 16일에는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싸워 대승했다. 이후 몇 번 더 승리했고, 1598년 11월 19일에는 7년 전쟁의 마지막인 노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사했다. (이민웅,임진왜란 해전사패전국면이라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더구나 대규모 해양전에서 어떻게 이러한 무패의 대승을 할 수 있었을까?이순신 장군의 승전들은 동아시아 질서와 한민족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쟁의 향방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 승리한 5월 7일에 한양은 이미 점령당했고, 탈출한 선조는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승전보로 백성들과 왕조는 절망에서 희망을, 패배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있었다. 한산도 대첩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은 수군은 물론 육군과의 협동작전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곡창인 호남은 보호됐고, 일본군은 군량미 보급 등의 차질로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아울러 의병활동이 본격화됐다. 부산포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첫 상륙지이자 교두보를 공격해 100여 척을 침몰시켰다. 본국에서 병력충원과 보급품 지원에 차질이 생긴 일본군은 전쟁 방식을 전환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로 변했다.명량 전투는 정유재란을 일으키고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전멸시킨 일본을 대패시켰다. 그 결과 일본 주도의 전쟁 국면은 전도됐고, 조선에는 승전의 분위기가 확산했다. 드디어 일본군의 총퇴각하는 과정에서 노량 전투가 벌어졌다. 북방에서 여진족의 발흥을 목도하고 전투를 벌였으며, 명나라와 일본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부사정도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나라의 미래 등을 고려해 명나라 수군과 달리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해전의 대승리들은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정부는 패망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무능하고 실추됐던 권위를 회복했다. 따라서 총력전을 실시했고, 의병을 활용했으며, 결과적으로 왕조를 연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생존이 보존되고,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93년의 한 기록에 따르면 백성들이 떠돌다가 굶어 죽어 송장들이 많았고,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국제적으로 일본군은 전력이 대손실을 입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좌절됐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고 점점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여진족은 조선 구원의 의사를 전달했다. 전쟁의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해양전이 벌어졌다.많은 군사전문가들도 믿기 힘들어하는 이순신 장군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그는 관리로서 능력이 출중할 뿐 아니라 아픈 상황에서도 휴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성실했다. 원칙에 충실하고, 청렴했으나, 모함을 받고 좌천과 투옥·장형·백의종군(2차)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군량미가 부족하고, 전염병이 돌아 탈영병들이 생기고, 백성들이 아사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였다. 그는 남해안의 몇 곳에 둔전을 설치하고, 어업을 장려했으며, 제염까지 했다. 자칫하면 국법에 어긋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군기를 엄정히 했지만, 부하들을 아꼈다. 공을 상세하게 보고해 상을 받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공도 돌렸다. 이러한 인품 때문에 전장에서는 부하들이 잘 따랐고, 백의종군할 때와 전사했을 때는 병사들과 많은 백성이 슬퍼했고, 유해를 고향으로 모실 때에는 길가에서 통곡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남다른 삶의 방식과 특별한 용기를 가졌다. 칠천량 전투로 조선 수군은 거의 사라졌고, 임금조차도 수군을 해체한 후 충청도로 와서 훗날을 도모하라고 특별히 전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이렇게 올렸다. “이제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12척 있습니다. 전선은 비록 부족하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감히 저를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기가 질린 부하들이 주저하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결국 명량 전투에서 13척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 133척을 격파했다.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수군으로 근무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짧은 기간의 수군 만호에서 파직된 이후에는 두만강 하구인 함경도의 조산보에서 만호로 근무했다. 1592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건조했는데, 다음 날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그리고 5월 7일에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승리를 이어갔다.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해양환경과 전선, 그리고 전술의 미묘한 상관성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1555년에 을묘왜란을 겪고, 왜선에 대응할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연안용이자 방어용이며, 소나무 등의 침염수를 이용했다. 길이가 보통 15m에서 20여m에 달해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함포를 장착해서 먼거리에서도 쏠 수 있다. 또한 승선 인원은 100여 명(증보문헌비고)정도이고, 다수의 노꾼을 가동해 속력을 낼 수 있어 신속한 전투에 편리했다. 반면에 일본의 ‘안택선’, ‘관선’ 등은 원양용인데다 선체가 삼나무라서 내구성이 약했다. 따라서 크고 단단한 판옥선이나 거북선으로 충돌 작전을 펼 수 있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수적으로 우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였다.아울러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에게 익숙한 해양환경을 유효하게 활용했다. 승전의 현장을 뗏목과 배를 타면서 조사해보니 암초·해안선·만·해류·조류·바람 등으로 인해 물길이 복잡한 곳이었다. ‘견내량’, ‘명량’, ‘노량’ 등은 바다의 여울이고, 당포·당항포 등은 만과 항로의 ‘목(項)’이었다(윤명철,한국 해양사). 다만 한산도 전투는 넓은 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으로 반격한 후에 대승을 거두는 전략을 구사했다. 노량 전투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80여 척과 명나라의 300여 척은 일본의 500여 척과 캄캄한 축시(새벽 2시 전후)에 전투를 벌여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으로 기선을 잡은 후에 200여 척을 침몰시켰다.노량전투가 벌어진 날. 이순신 장군을 애도하면서, 오늘의 우리를 위해 2가지 가정을 해본다. 첫째, 그가 전쟁에서 때때로 패배했다면?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이전에 크게 패배했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까?조선은 멸망했을 확률이 높다. 물론 국가의 흥망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 더구나 ‘조선’이라면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사상으로 새나라를 건국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한민족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군이 조선 전체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명나라가 우려했듯 서해안 여러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후 만주를 침공해서 여진족과 대결했을 수도 있다. 도요토미가 강화조건의 하나로 할양을 요구한 4개도, 즉 현재 대한민국 땅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고 북한 지역은 명나라, 뒤를 이어 청나라의 영토가 됐을 수도 있다.둘째, 그가 노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긍정적인 가정은 그가 최고의 공신으로 출세한 상황이다. 은퇴 후에는 재야인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며,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상황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낮은 가정이다. 전쟁 패배의 책임자인 선조는 그를 극도로 싫어했었고, 성리학적인 세계를 고수하려는 문반 사대부들과 군인들의 시기는 심해졌을 것이다. 결국 숙청돼 사약을 받거나 참수형 당했을 수도 있다. 전쟁의 상흔과 고마움을 망각한 백성들의 무관심과 방조에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그의 전사는 충성과 명예를 소중히 여긴 삶을 위해서나, 후손들과 역사를 위해서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혜로운 그는 국제질서의 방향, 조선의 정치 구조, 권력의 속성을 간파했다. 전후 자신의 입지 등을 고려해 혼신을 다해 조선의 미래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 덕에 우리는 민족의 존립에 공헌하고, 넘볼 수 없는 능력과 인격이 고매한 위인, 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신화를 가진 것이다.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충무공 이순신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전쟁 초기에 일본 수군을 거의 섬멸한 이순신은 계속 적을 소탕하여 오다가 여수로부터 진영을 한산도로 이동하였다.

한산도는 산령(山嶺)에 둘러싸여 있어 일본군의 남해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요지였다. 이곳에서 일본군의 길목을 막으면서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나무를 베어 전선을 만들며,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면서 쉬지 않고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어려운 처지에서 이순신은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적의 재침에 대비하였고 적의 대함대를 앞에 두고, 내일의 전투를 위하여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칼을 갈며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이순신의 임전태세야말로 유비무환의 자위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실례라 하겠다.

이순신은 남해해상 연해지역의 소탕작전을 꾸준히 계속하다가 1593년 7월, 좌수영을 여수에서 거제 한산도로 옮겨 왜적침략의 수로를 가로막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곤궁에 빠져 있는 피난민을 정성껏 돌봐왔었고 통제사가 된 이후로는 더욱 민생문제와 군량을 염려하여 돌산도와 도양장(道陽場)에 군민 합작의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십경도6-한산도생활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전선을 계속 건조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즉, 일본 조총을 세밀히 검토하여 정철총통을 제조하였고, 염초(焰硝)를 끓여 만들고 각종 총포를 만들어 전선에 비치하여 주무기로 활용하게 하였다.

아울러 수군의 지휘권을 확립하고 군비를 재정비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또한 한산도에 운주당을 설치하여 누구에게나 중요한 작전상의 의견이나 정보를 제공케 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로서 이룩한 큰 업적의 하나는 지휘계통의 일원화였다. 이제까지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원균 등의 시기와 불복종으로 인해서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못했었다.

1594년 2월부터는 지난날 이순신의 위력에 눌려 외해로 나오지 못했던 일본 수군들이 점차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므로 이순신은 함대를 출동시켜 일본 전선을 격파하면서 적의 집결지인 당항포를 습격, 21척의 왜선을 불태워 그들의 야욕을 한풀 꺾어 버렸다.

당항포해전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난 7, 8월부터는 일본군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長門浦)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과 각 포구마다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이순신은 수륙협동작전을 계획하고, 곽재우 등과 협동으로 장문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진중생활로 인해 피로가 겹치고 기후가 나빠서 무서운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견디어냈다. 그 의지의 바탕에는 자주·자조·자립정신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는 아무 지원도 없는 어려운 진중생활에서도 군량을 비축하고 쇠를 모아 총포를 만들며 군비를 강화하여 연전 연승의 빛나는 공적을 쌓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충무공 탄신일! 이순신 장군 업적 살펴보기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이 한 대사입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우리 바다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내며 장수로서 도리를 다했죠. 오는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탄신일이 갖는 의미와 이순신 업적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임진왜란(정유재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죠? 구국의 명장 이순신 장군은 정조대왕 때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는데요. 이후 이순신 장군의 충의를 기리는 행사들이 개최되었습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행사가 치러졌다고 해요.

충무공 탄신일 행사가 처음 개최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랍니다. 이때부터 충무공 탄신일은 본격적인 국가기념일로서 형태를 갖추게 되었죠. 현충사와 광화문 동상도 이때 건립되었답니다. 행사 규모는 1990년대 들어 작아졌다가 1998년 순국 4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기념사업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 임진왜란 주요 해전 살펴보기

이순신 장군은 우리 바다를 침략한 왜군을 연이어 격파,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승리를 거두는 업적을 이뤘는데요. 그가 참전해 승리한 임진왜란 주요 해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옥포해전] 1592년 5월 7일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치러진 최초의 해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출전해 왜군과 싸운 첫 전투죠!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왜선 26척을 격파하며 큰 승리를 거뒀답니다.

[사천포해전] 1592년 5월 29일 벌어진 사천포해전은 거북선이 처음으로 투입된 해전입니다. 적선을 넓은 지역으로 유인한 뒤 반격해 13척을 격파했답니다.

[한산도대첩] 1592년 7월 8일 벌어진 한산도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전투랍니다. 이순신 장군은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학익진’을 이용해 왜군을 둘러싼 뒤 일시에 모든 화력을 쏟아 부어 왜선 66척을 격파했는데요. 이는 세계 4대 해전에 손꼽히는 해전이기도 합니다.

[명량대첩] 1597년 왜군의 2차 침입(정유재란)으로 위기를 맞은 조선을 구해낸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입니다. 불과 13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133척의 왜군과 싸운 대단한 전투랍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치열한 공방 끝에 왜선 3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답니다.

[노량해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과 연합해 퇴각하는 왜군을 격퇴했습니다. 조선 수군은 왜선 200여 척을 침몰시키고 100여 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죠.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는데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 장군은 죽음을 앞두고도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2016년 충무공 탄신일 기념행사

2016년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맞아 특별한 기념행사가 펼쳐집니다. 현충사가 위치한 충남 아산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릴 예정인데요. 4월 27일(수)부터 이틀 동안 제55회 ‘성웅 이순신 축제’가 시내 곳곳에 열린답니다. 27일(수) 아산 시내에서는 퍼레이드를 비롯해 불꽃놀이도 펼쳐진다고 하네요.

탄신일 당일 오전 10시에는 현충사에서 문화재청 주관 다례행사도 열릴 예정입니다. 이외에도 국방부와 해군에서는 매년 충무공 유적지 참배, 부대 개방 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고 합니다. 이날만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업적과 충의를 떠올리며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琚)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이순신이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李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이순신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이순신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순신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주 01)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 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訊問)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寶花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鄭寅普)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여수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이순신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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