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이방원 | [Kbs 역사저널 그날] 이성계Vs이방원, 균열이 시작되다ㅣKbs 211211 방송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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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회 그날 클립영상] 이성계vs이방원, 균열이 시작되다
#역사저널그날 339회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 기획 ① 역적의 아들이 되다”
자세한 방송 내용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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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사극 #대하드라마 #태종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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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태종 이방원) – 나무위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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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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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태조 7년(1398) 8월 26일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모두에게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날 못지않은 비중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한 날, 바로 1차 왕자의 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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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6/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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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 간의 참극 ‘조사의의 난’

더 나아가 아버지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 사이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자 간 참극마저 발생하게 된다. 군신유의(君臣有義)와 부자유친(父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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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nnews.com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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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이성계의 나라였나 이방원의 나라였나 – 오마이뉴스

조선 건국시조는 분명히 이성계이지만, 정말로 이성계의 나라였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 건국 6년 만인 1398년에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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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4/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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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 네이버 블로그

태조 이성계 △ 태종 이방원 이성계의 조선 개창과 깊어가는 부자의 갈등 만 스물한 살 때인 공민왕 5년(1356)에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 이성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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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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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BS 대하드라마에 대해서는 태종 이방원 (드라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태종(太宗, 1367년 6월 13일 ~ 1422년 5월 30일)은 조선의 제3대 임금(재위 : 1400년 11월 28일 … 부친,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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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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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이성계VS이방원, 격정적 대립 시작 – 매일경제

태종 이방원` 이성계VS이방원, 격정적 대립 시작 – 스타투데이, 작성자-김소연, 섹션-hot-issues, 요약-`태종 이방원`이 한달 반 만에 방송을 재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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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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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1357 ~ 1419 – 우리역사넷

정종[定宗] · 1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의 형, 조선 제2대 왕. 정종은 1357년(공민왕 6)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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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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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저널 그날] 이성계vs이방원, 균열이 시작되다ㅣKBS 211211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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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성계 이방원

  • Author: KBS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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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2.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HdJeMH8QmjQ

[역사줌인]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 간의 참극 ‘조사의의 난’

유교 국가 조선에서 금기시됐던 정변

이성계 vs. 이방원…부자 간 참극 전말

[파이낸셜뉴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표방하며 야심 차게 출범한 신생 국가 조선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연이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왕권주의(王權主義)와 신권주의(臣權主義)가 극심하게 대립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져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이 초래됐다.더 나아가 아버지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 사이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자 간 참극마저 발생하게 된다. 군신유의(君臣有義)와 부자유친(父子有親) 등으로 대변되는 유교(儒敎) 국가 조선에서, 그 언급조차 금기시됐던 이 정변을 역사는 ‘조사의의 난’이라고 부른다.제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곧 세자(世子) 자리에 오른 데 이어 1400년 자신의 형인 2대 왕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으로 즉위(卽位)했다. 태종이 즉위하자 태조 이성계(당시 태상왕(太上王))의 분노와 상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방원이 자신이 그 누구보다 아꼈던 세자 이방석과 삼봉 정도전 등을 척살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 왕위까지 꿰찼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총애하던 신덕왕후 강씨도 잃었다.이성계는 더 이상 이방원이 지배하는 궁궐에 있을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이었지만, 사실상 원수지간(怨讎之間)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궁궐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동북면)의 함흥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조용히 보낼 계획이었다. 이성계는 추후에 전갈(傳喝)을 통해 이방원에게 “내가 즉위한 이래로 조종(祖宗)의 능에 한번도 참배하지 못한다고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행히 한가한 몸이 되었으니 동북면에 가서 선조의 능에 참배한 뒤에 금강산을 유랑코자 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방원은 당초 이성계의 함흥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성계가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궁궐로 환궁(還宮)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머지않아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함흥에 안착한 이성계에게 조사의라는 사람이 접근했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1393년(태조 2년)에 형조의랑이 됐고, 그 뒤 순군(巡軍)과 첨절제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조사의와 더불어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인 강현도 있었다. 이들은 이방원의 정적(政敵)이었던 신덕왕후 측의 사람들이었던 만큼 자연스레 이방원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는데 때마침 이성계라는 거대한 우군(友軍)이 알아서 자신들의 구역으로 왔던 것이다.조사의 등은 이방원에 대한 분노와 상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자극시켰다. 바로 1차 왕자의 난 때 무참히 살해된 이방석과 이방번 등의 원수를 갚고, 역적(逆賊) 이방원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척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사의는 정변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도 충분하다고 봤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지역에는 대대로 이성계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고, 지역민들도 이성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우호 세력인 여진족이 참전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결국 1402년(태종 2년), 이성계는 조사의의 의도대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동의했다. 역사는 이를 ‘조사의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상 조사의의 배후에 있었던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의 부자 간 전쟁이었다.한편, 이방원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도 이성계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방원은 이성계를 회유하기 위해 함흥으로 사람을 보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박석명, 성석린, 박순이었다. 박석명은 지금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였고, 성석린은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과 재상인 영의정부사를, 박순은 중추부의 종1품 관직인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특히 성석린은 이성계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성석린이 회유했을 때 이성계는 이를 수락하며 잠시 개경으로 환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성계는 다시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 때 이성계가 잠시 환궁한 것은 기실 조사의가 거병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고 개경의 동태를 살펴 조사의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성석린의 회유도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방원은 성석린만큼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운 박순을 함흥으로 보냈다. 그런데 박순은 실제로 이성계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대신 함경도 일대의 동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직감해 도순문사 박만과 함께 이 지역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조사의 등은 박순이 자신들의 거병 준비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조사의 등은 이성계에게 박순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옛 정을 생각해 박순을 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거병이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이성계는 조사의 등에게 박순이 안변 아래쪽에 흐르는 용흥강을 건너갔으면 죽이지 말고, 건너지 못했으면 죽이라고 명했다. 박순은 불운하게도 용흥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조사의가 급파한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방원이 함흥에 차사(差使)로 보냈던 사람들이 모두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함흥차사의 전설’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으며, 실제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박순 한 명 뿐이었다. 함흥차사의 전설은 후대의 일부 역사가들이 조사의의 난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포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야사(野史)로 보인다.이성계와 조사의가 거병했을 때, 예상대로 함경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계 측에 가담했다. 거병 소식을 전해 들은 이방원과 조정의 대신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대응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현 임금의 아버지이자 조선을 건국 한 태조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반란군이 평안도의 덕천·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 쪽으로 밀고 내려오려 하자 이방원은 마지못해 이천우 등을 보내서 이를 방어하도록 했다.하지만, 반란군의 위세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고맹주 지역에서 이천우의 군대가 격파 된 것이다. 반란군은 전장에서 ‘태상왕’ 이성계의 권위를 앞세우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이성계를 나타내는 깃발 등을 흩날리며 앞으로 진격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관군은 적지 않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관군의 선발대가 패배하고 반란군의 남하(南下)가 이어지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방원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자 간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현실화 됐다.이방원이 관군을 진두지휘하면서 전황(戰況)에 차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관군의 사기가 드높아졌고, 이를 기반으로 관군은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기본적인 양과 질에서 관군은 반란군보다 크게 앞섰다. 그리고 관군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반란군을 난관에 빠뜨렸다. 각 고을의 군사를 효율적으로 동원해 반란군의 진로를 저지하는 한편 회유책도 구사해 반란군을 분산시키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청천강 전투에서 이숙번이 이끄는 관군이 반란군을 대패시키면서 반란군의 전의(戰意)는 땅에 떨어졌고 탈영병이 속출하면서 안변 쪽으로 퇴각하게 된다. 관군은 조사의와 그의 아들 조홍 등을 신속하게 추격해 체포, 주살(誅殺)했다. 조사의와 반란을 함께 한 측근들은 죽거나 귀양을 갔고, 반란의 태동지였던 안변 대도호부는 감무 파견지역으로 강등(降等)됐다.조사의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후 이성계는 반란군의 주둔지였던 평양에서 아들 이방원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조선을 건국 한 ‘태조’치고는 상당히 처량한 모습이었다. 이방원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이성계는 한동안 거부하다 마지못해 개경 궁궐로 환궁했다. 야사에서는 이성계의 오랜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이성계가 마침내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방원은 직접 교외로 마중 나가 이성계를 맞이했다.일각에서는 이성계가 환궁할 때 노여움을 버리지 못해 현재의 성동구 한양대학교 뒤쪽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부근에서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쐈고, 그 화살이 급히 몸을 피한 이방원을 벗어나 정자의 나무기둥에 꽂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화살이 꽂힌’ 장소라는 데에서 유래해 해당 돌다리는 ‘살곶이 다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궁궐이 한양이 아닌 개경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야기의 신빙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또한 환궁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이성계가 소매 안에 철퇴를 감추고 이방원의 목숨을 노렸는데, 최측근이었던 하륜의 기지(機智)로 이것이 무위(無爲)에 그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자신에게 직접 술을 따를 때 철퇴로 내리치려고 했지만, 하륜이 이성계의 의도를 미리 눈치채고 예법을 거론하며 환관으로 하여금 대신 술을 따르게 했던 것이다. 이후 이성계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이방원에게 옥새를 넘기며 왕으로 인정했다고 한다.환궁한 이성계는 여생을 조용히 궁궐에서 보내다 1408년 5월(태종 8년)에 승하(昇遐)했다.일개 변방 장수에서 출발해 조선의 건국자로 올라섰던 풍운아 이성계는 결과적으로 말년(末年)이 좋지 못했다. 아버지를 향한 회한(悔恨) 때문이었을까. 이성계가 승하하자 아들 이방원은 “소자가 잘못했습니다”라며 ‘짐승처럼’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성계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며 단릉(單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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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이성계의 나라였나 이방원의 나라였나

큰사진보기 ▲ KBS 1TV ⓒ 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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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시조는 분명히 이성계이지만, 정말로 이성계의 나라였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 건국 6년 만인 1398년에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성계를 몰아냈다. 건국시조가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것이다.아들에 의해 끌어내려졌건 남에 의해 끌어내려졌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 의해서든 건국시조가 정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부동의 사실이다. 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아들이 예의를 갖춰 아버지를 끌어내렸을 따름이다.그 뒤 조선의 왕위는 이방원과 그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이방원의 후손이 곧 이성계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이성계와 이방원 사이에 정치적 연속성이 존재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혈통상의 연속성이 곧바로 정치적 연속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이방원이 아버지한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면, 정치적 연속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패주로 전락시켰다. 아버지를 광해군·연산군과 다를 바 없는 처지로 내몬 것이다.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성계는 상왕에 이어 태상왕이 됐다. 실각 후에도 형식상의 예우는 받았지만, 이는 이방원과의 부자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이방원의 정치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왕조국가에서는 군주의 혈통이 중시됐다. 천명을 받은 거룩한 존재로 인식돼야 건국시조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건국시조의 혈통으로 인정돼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이방원은 정권은 잡았지만 건국시조는 아니었다. 이방원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를 가로챌 능력이 있음은 입증했어도, 없는 나라를 새로 세울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지는 못했다.그랬기 때문에, 1398년 집권(즉위는 1400년) 이후의 이방원한테는 자신과 혈통적으로 연결되는 건국시조가 필요했다. 이방원이 왕이 되려면 건국시조 이성계를 자신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과 태상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같은 현실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쿠데타를 당한 이성계는 광해군이나 연산군과 다를 바 없었다. 광해군과 연산군에게는 임금이 되기 전에 받은 군호(君號)가 있었다. 그런 대군 칭호가 있었기에 실각 뒤에 광해군·연산군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성계는 왕자를 거치지 않고 왕이 됐기 때문에 실각 뒤에 군호로 불릴 여지가 없었다. ‘패주 광해군’이나 ‘패주 연산군’처럼 불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패주 이성계’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왕좌를 빼앗겼으니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성계가 공식적으로 패주가 되면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이방원이었다. 패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군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군주 자리를 지키게 되면 정치 불안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건국시조를 제외한 군주들은 시조의 혈통을 계승한 이전 군주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실제로는 임금 생활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을 죽은 뒤에 임금으로 격상시키는 추존왕 제도가 필요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세조(수양대군)의 아들인 의경세자는 만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를 계승한 사람은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다. 예종 역시 19세에 사망하자, 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예종의 조카인 성종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그 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된 것은, 성종을 군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종의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의경세자를 왕으로 격상시켰던 것이다.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그 아버지를 추존왕으로라도 만들어주는 것이 왕조시대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이런 관념이 존재하는 시대에, 이방원의 아버지가 패주가 되고 죄인이 되면 누구보다 이방원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과 태상왕으로 격상시킬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런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그런 이유에 따라 이성계가 패주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 측면을 놓고 보면 이성계는 패주와 다를 바 없었다. 건국시조가 실질적 패주가 됐으니 이성계의 나라는 이방원의 집권을 계기로 사실상 단절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뒤 조선은 실질적인 새 출발을 했다. 그러니 1398년 이후의 조선을 이성계의 나라로 볼 것인가 이방원의 나라로 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조선왕조가 이방원에 의해 새 출발을 했다는 인식은 이방원 본인과 그 자손들에게서도 표출됐다. 이방원과 세종대왕 부자가 훗날 정종으로 불리게 될 제2대 주상인 이방과에게 묘호(사당 명칭)를 부여되지 않은 사실이 그 점을 드러낸다.클 태(太)가 들어간 태종이란 묘호는 건국시조인 태조에 버금가는 칭호였다. 그래서 태종 묘호를 받은 군주는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 한국·중국·베트남 등에서 형성된 관행에 따르면, 이 묘호는 두 번째 임금에게 부여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두 번째 군주에게 무조건 태종 묘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 묘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이 두 번째 군주에 국한됐다는 의미다.제29대 임금인 신라 김춘추가 태종 묘호를 받을 때도 당나라와의 마찰이 있었다. 조선은 신라보다 훨씬 더 중국에 사대를 했기 때문에, 이 묘호를 쓰면 중국과의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3대 임금인 이방원이 이 묘호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태종 묘호를 받았다. 명나라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교묘한’ 혹은 ‘절묘한’ 방식을 구사한 결과였다.1398년에 즉위한 제2대 주상 이방과가 사망한 해는 이방원이 상왕일 때인 1419년이다. 이때의 형식상 임금은 세종이지만 실질적 임금은 상왕인 이방원이었다. 군사권 같은 핵심 권한은 여전히 상왕에게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이방과에게 어떤 묘호를 부여할 것인가는 세종이 아닌 이방원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은 형인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았다.이방과가 묘호를 받게 되면, 이방과가 공식적인 제2대 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방과가 태종 묘호를 받든 다른 묘호를 받든, 이방과 이후의 왕들은 태종 묘호를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방과 이후의 군주가 제2대 태종이 될 가능성을 남겨놓게 됐다.태종 묘호는 그로부터 3년 뒤에 사망한 이방원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 됐다.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가 건국시조 이성계를 몰아내고 실질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 사실이 ‘제2대 태종’이란 위상에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이방원이 이방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사실과 세종이 이방원에게 태종 묘호를 준 사실은 이방원이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군주라는 인식이 이방원 가족들 사이에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1398년 쿠데타로 이성계의 나라가 실질적으로 단절됐음을 이들도 인식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방과가 정종 묘호를 받은 것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인 1681년이다. 이로 인해 이방과는 공식적으로 제2대 군주의 지위를 갖게 됐다. 엄연한 군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잘못된 일이라는 판단 하에 묘호를 부여하게 됐다.이는 이방원을 ‘제2대 태종’이 아니라 ‘제3대 태종’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3대로 밀려남에 따라 이방원이 태종 묘호를 유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색해지고 말았다. ‘제2대 태종’ 위상을 통해 이방원에게 건국시조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던 사람들의 의도가 훗날 뒤틀리게 됐던 것이다.1681년 조치가 있기 전까지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었다.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누렸던 것이다. 건국시조를 몰아냈지만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던 이방원이 제2대 태종으로서 건국시조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상황이 1681년까지 유지됐던 것이다.

父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 태조 이성계 △ 태종 이방원

이성계의 조선 개창과 깊어가는 부자의 갈등

만 스물한 살 때인 공민왕 5년(1356)에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 이성계는 독로강만호 박의 일당의 반란 같은 내우와 북쪽의 홍건적, 남쪽의 왜구 침략 같은 외환을 극복하면서 혁혁한 무공을 쌓아 무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정도전과의 만남을 통해 새 왕조 개창의 꿈을 현실화할 동력을 얻게 된다. 정도전의 토지 개혁을 통한 개국 프로그램은 이성계의 군사력과 결합하면서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 이론이 되었고, 이성계의 군사력은 혁명 무력으로 전환되었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조를 존속시킬 것인가, 새 왕조를 열 것인가를 둘러싸고 고려를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정몽주, 이색 등의 온건개혁파와 조준,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파는 나라의 운명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정몽주의 거센 공격으로 귀양에 처해진 정도전이 사형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까지 치닫는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그는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가 거절하자 스스로 악역을 맡아 정몽주를 제거해 일거에 판세를 바꾸었다. 이 일격으로 반 역성혁명파는 무너졌고, 정도전은 사형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몽주 제거 직후 고려는 무너졌고, 조선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막내 방석을 후사로 선택했고, 개국에 가장 공이 큰 방원을 소외시켰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그런 선택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이 선택이 정도전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태조 7년(1398) 8월 26일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모두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바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날이다. 이 난으로 정도전, 남은 등의 요동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그리고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마저 비명횡사하지만, 사실상 방원이 칼을 겨눈 대상은 부친 이성계였다.

이방원은 일단 형인 방과를 세자로 내세워 이성계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시간을 번다. 태조는 쿠데타 발생 10여 일 후인 9월 5일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나마 이복형제들을 죽인 방원이 아니라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방과가 왕위에 오른 것을 위안 삼았다. 하지만 졸지에 어린 두 아들과 사위를 저승으로 보내고, 막내 공주는 사찰로 보내야 했던 이성계의 슬픔은 숨길 수 없었다. 게다가 왕자의 난은 1차로 끝나지 않았다. 정종 2년(1400) 1월 28일, 이번에는 동복형제들끼리 칼부림이 벌어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고, 여기서도 이방원이 승리를 거둔다.

이방원은 돌아선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방원을 도운 공신들을 처벌하라는 이성계의 요구에 그들을 지방으로 유배 보내기도 했고, 정도전과 남은의 당여黨與를 용서하여 그들의 가족들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방지해 잠시나마 이성계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방원이 왕자의 난 직후 형 방과에게 사양한 세자 자리와 임금 자리를 정종 2년(1400) 정종의 양위 형식으로 물려받게 되면서, 이성계는 다시 싸늘하게 돌아서고 만다. 그리고 방간을 불러올리라는 이성계의 요구를 방원이 거절하자 결국 이성계가 반 태종 봉기에 가담하면서 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천명을 받은 이성계, 천명을 만든 이방원

이성계를 추대한 역성혁명파는 이성계가 천명을 받았다는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래야 조선 개창이 하늘의 뜻으로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를 만든 것은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시험해보려는 뜻도 있었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도 강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에는 천명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용비어천가》 1장은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시니”라는 노래다. 해동 육룡은 이성계의 4대조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을 뜻한다. 《용비어천가》 83장은 금척에 대한 노래다. “군위君位를 보배라 할새 큰 명命을 알리려고 바다 위에 금탑이 솟게 하시니 / 자〔尺〕로서 제도가 생길새 인정仁政을 맡기시려고 하늘 위에서 금척을 내리시니.” 이성계가 하늘에서 내린 금척을 받고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정도전은 《삼봉집》 [몽금척]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하께서 잠저(즉위 전의 집)에 계실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을 받들고 하늘에서 내려와 “경 시중(경복흥)은 맑은 덕이 있지만 장차 늙어서 혼미해질 것이고, 최삼사(최영)는 곧다는 이름이 있지만 너무 융통성이 없다”라고 말하고, 전하에게 “문무를 겸한 자질이 있고 덕과 지식도 있으니 백성들의 신망이 속했다”라고 말하면서 금척을 주었다. – 《삼봉집》 [몽금척]

또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었던 권근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에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에 전하던 비기 《구변진단지도》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라는 말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라는 말은 한자로 ‘건목득자建木得子’라고 한다. 목자득국木子得國과 마찬가지 이야기인데, 목자木子는 ‘이李’ 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이 이야기 역시 이씨가 개국한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이성계가 천명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여럿 전해진다.

개국시조 아버지에 이어 조선의 군주가 되고 싶었던 이방원은 스스로 천명을 만들기로 했다. 방원이 천명을 만들기로 했다는 말은 결국 부친에게 칼을 겨눈다는 뜻이다. 실제로 세자 방석 형제와 정도전 등을 죽인 것은 부왕에게 칼을 겨눈 것이었다. 개국시조가 자신 대신 동생을 선택했고, 그래서 방원은 부왕과 대립하면서 스스로 새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천명에 따른 것임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방원이 즉위 후 행했던 수많은 일은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공신을 숙청해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게 하고, 종부법을 제정해 천인들의 아픔을 달래주며 자신에게 내린 천명의 당위성을 입증하려 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토지 개혁에 이방원의 공신 숙청, 종부법 등이 더해져 조선은 보다 완벽한 나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권력은 국왕 한 사람에게만 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방원은 집권 후 권력 분배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며, 개혁의 칼날을 내부로 겨누었다. 그렇게 시작된 공신 숙청은 처남은 물론이고, 측근 중의 측근 이숙번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조선은 태종의 피의 숙청으로 비로소 법이 지배하는 법의 나라가 되어갔다. 고관들은 더 이상 법 외의 횡포를 자행할 생각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 바로 대간에서 탄핵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그리고 태종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개혁되지 못한 노비제도 개혁에도 앞장섰다. 태종은 수많은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부법을 제정해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들을 구제하고, 양인 수 증가로 국가 재정도 튼튼하게 했다.

태종은 권력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주였다. 또한 군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던 군주였다. 하늘이 자신에게 천명을 내렸다면 그것은 악역을 하라고 내린 천명이라고 생각했던 군주였다. 태종은 누구나 걷기 싫어하는 악역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친에게 칼을 겨누었고, 부인과 원수가 되었으며, 맏아들도 버렸다. 태종은 “이 또한 하늘이 시켜서 한 일이지,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악역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성군이 되기를 바랐던 군주가 태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태종은 세종 못지않은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또한 태평성대를 만들려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군주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치세 동안 백성들은 태평성대였다.

태종처럼 파란만장하고 복잡다단했던 삶을 산 군주를 찾기도 쉽지 않다. 정몽주를 격살해 개국의 전기를 마련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부왕을 쫓아냈으며, 네 처남을 비롯한 공신들을 가혹하게 숙청해 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비난과 저주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태종의 이런 악역을 통해 신생 조선 왕실은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태종의 죽음과 함께 피로 얼룩졌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런 토대 위에서 세종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의 시대가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종 르네상스는 태종이 뿌린 피를 거름 삼아 피어난 꽃이다.

– 이덕일 著 역사특강 2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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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1367년 6월 13일 ~ 1422년 5월 30일)은 조선의 제3대 임금(재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개요 [ 편집 ]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왕자 시절 받은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다. 이후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생애 [ 편집 ]

생애 초반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고려 함흥부 귀주(歸州)에서 이성계와 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1] 운곡 원천석이 태종의 잠저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였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2]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매우 기뻐하였다.[3]

1388년(우왕 15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공양왕 2년),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임명되었고, 1391년 어머니 한씨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일파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자 경처 강씨(신덕왕후)는 여묘살이를 중단시키고 해주로 건너가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내었다.

역성 혁명 활동 [ 편집 ]

정몽주와 온건개혁파 제거 [ 편집 ]

포은 정몽주 (1337-1392) 역성혁명과 개혁방법의 차이로 인해 이방원에게 암살되었다. (1337-1392)역성혁명과 개혁방법의 차이로 인해 이방원에게 암살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아버지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청구영언』과 『가곡원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해동가요』, 『시가』(詩歌) 등에 실려 있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 此亦何如彼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 — 이방원, 〈하여가〉

《하여가》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시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시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하여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 정몽주, 〈단심가〉

시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시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단심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4] 이어 그는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훗날 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현창시켜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했다.[5] 이는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는 일부 평가도 있다.

조선 개국 [ 편집 ]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6]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7]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8]

왕자의 난 [ 편집 ]

제1차 왕자의 난 [ 편집 ]

완산부원군 이천우 (1354-1417) 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1354-1417) 태조 이성계 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6]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 [ 편집 ]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9] 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10]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1]

치세 [ 편집 ]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 [ 편집 ]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하고,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새로히 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의흥부(義興府)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척불숭유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사원전을 몰수하였다. 또한 호패법·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실시했으며, 국방에도 힘써 야인을 다스리는 등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다.[12] 사병 혁파로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사병 조직은 사라졌으며, 이들은 농부가 되거나 군역에 편입되었다.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 편집 ]

태종 대에는 모두 4차례에 걸쳐 관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태조 대 정도전이 설정한 제도 방향성을 권근과 하륜 등이 수정하여 국왕-의정부-육조-언관 체제가 이 시기 자리잡았다. 태종 14년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관료들을 잘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려 말기에 10년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냈던 적이 있었기에, 관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13]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또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공신 숙청 [ 편집 ]

태종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당대와 다음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7] 태종은 먼저 개국공신이자 자신의 옹립에 공을 세운 이거이 부자를 유배보내고, 공신이자 오른팔이었던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을 유배보낸 뒤 ‘사후 백여년간 도성출입을 금지’하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원경왕후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 민제는 개국 공신이었고, 그의 네명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과 민무회 등은 모두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었다. 장인 민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그들 주변에 인물들이 결집하자 장인과 처남들을 과감하게 제거한다. 장인 민제는 곧 병사했고, 장인의 죽음과 동시에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유배했다가 사사케 하고, 이후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 그의 처가는 몰락하게 되었다. 1405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14] 본인이 제거한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14]

서적 간행 [ 편집 ]

1403년 태종은 주자소의 설치를 명하여 계미자(癸未字) 활판을 제작하게 했으며 직접 이를 감독했다. 1404년 2월에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이 사실을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것을 명령한 사실까지 실록에 기록되었다.[15]

1413년에는 즉위 이후에 추진한 일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하였고,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 (續集詳節) 2권을 간행하였다. 1414년에는 정도전이 편찬하려다가 중단한 《고려사》의 편찬 작업을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명하여 계속 하게 하였으며, 권근과 하륜에게는 삼국사도 새로이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집권 후반 [ 편집 ]

효령대군 (1396-1486) 태종의 둘째 아들 (1396-1486)태종의 둘째 아들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한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양녕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16]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눈병이 나고, 질환에 시달려 병석에 누우면서도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태종은 명하여 충녕이 책을 못보게 엄명을 내렸으나 충녕은 몰래 책을 숨겨놓고 병석에서도 책을 읽었다. 또한 병석에 누운 동생 성녕대군을 간호하는 모습이 태종에 눈에 들기도 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다. 6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보냈다.

태종 우(雨) [ 편집 ]

《연려실기술》에는 태종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쳤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고 밭은 타들어 갔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로 먹을 것을 대신했다. 오랜 가뭄으로 민심은 날로 더욱 흉흉해져 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 종일토록 앉아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도 기우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다.[17]

퇴위와 죽음 [ 편집 ]

심온 제거 [ 편집 ]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9년에는 둘째형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다.

왕권을 물려준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등 외척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병조참판 강상인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 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심온을 영의정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고, 심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심정, 박습, 이관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심온은 사사되었다. 이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인 세종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최후 [ 편집 ]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으로 존숭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주 1]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묘호와 시호 [ 편집 ]

묘호는 태종이며,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숙종과 고종 때 존호가 더해졌다. 최종 존시는 태종(太宗)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가족 관계 [ 편집 ]

능묘 [ 편집 ]

태종은 1422년 9월 6일 광주(廣州) 서대모산(西大母山)에 원경왕후와 합장되었다가 후에 천장(遷葬)하였다. 능호는 헌릉(獻陵)이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仁陵)이 위치해 있다. 헌릉은 인릉과 함께 대한민국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10]

태종이 등장하는 작품 [ 편집 ]

서적 [ 편집 ]

평가 [ 편집 ]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영민하고 대범하고 냉철하였다.[34] 이는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惡業)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손자인 세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다. 군왕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여야 한다고 평생을 믿었던 인물이다. 훗날 세조와 비교해 볼 때, 쿠데타로 즉위한 인물로서의 공통점은 있지만, 사후 처리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즉, 세조는 왕위 등극 후에 공신을 우대해 줘서 이들에게 공을 치하했지만, 태종은 반대로 공신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마저 처형하는 등, 후계자의 후환을 미리 제거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 덕분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 된다.[35]

기타 [ 편집 ]

숭유억불 정책 [ 편집 ]

태종은 집권 직후 종교문제에도 개입하였다. 그 자신이 성리학을 수학한 인물이었지만, 새 왕조 체제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한층 강화한다. 1406년 사원혁파를 단행하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압수하였으며, 승려들 역시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이로써 얻어진 노비와 전토를 국고에 강제 환속시켰다.

도교에도 부정적이었던 그는 1417년부터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비기도참서와 예언서들, 무속 관련 서적들을 소각하도록 한다.

정종과 유사한 시호 [ 편집 ]

태종의 시호는 공정(恭定)으로 형인 정종의 시호 공정(恭靖)과 유사하여 혼선을 빚기도 했다. 또한 형 정종은 그에게 양위를 했음에도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도 못하다가 숙종 때인 1681년(숙종 7년)에 가서 정종의 묘호를 받는다.

정릉 수난 [ 편집 ]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 초 자신이나 동복 형제를 제치고 이복 동생인 의안대군 등을 세자로 세운 것에 불만을 품은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분풀이를 한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자신의 신후지지도 미리 옆에 마련하고 한성부의 중심에 안장하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에 안장하고,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은 도성 밖으로 이장을 명한다. 이장하면서 흥천사(興天寺)를 폐쇄했고, 신덕왕후의 능에 있던 석상과 석물을 철거하고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한다.[36]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을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에는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을 다리 교각으로 만들었다. 능침 앞에 세워진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36]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37]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37]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37] 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38] 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38] 사한리 골짜기에 있는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년)이었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주소서 ” — 《연려실기술》

당시 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의 묘가 함흥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정해 묘를 돌보게 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국묘봉사자(國墓奉祠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즉 조선 최초의 왕비 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을 면제해달라는 조심스러운 복위 제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38][39]

신덕왕후 강등 [ 편집 ]

태종은 계모인 신덕왕후를 왕후가 아닌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동시에 태종은 적서 차별법을 발표하여 서자들의 관직 기회를 차단한다. 신덕왕후는 사후 250여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에야 송시열의 주도로 지위가 왕비로 복위된다.

“ 태종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다고 사변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참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39] ”

형식은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39]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39] 88년간 이어져온 논쟁이었다.[39] 신덕왕후가 왕비로 복귀되는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는데, 백성들은 그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였다.

서얼 차별 규정 [ 편집 ]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초 창업에 막대한 공을 세운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배제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40]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40][41]

방원은 둘째 형 영안군 방과를 왕으로 앉히면서, 그 교지에 ‘간신 정도전 등이 서얼을 세워 후사를 삼아 어른과 아이의 차례를 뒤엎고 적서의 구분을 어지럽히려 하였다.’(태조실록 15년 9월 정해 조)라고 쓰게 하였다.[40] 이것이 적, 서를 구분지은 최초의 기록이다.[40] 그 뒤 태종은 서자들의 관직 임용 자체를 제한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서자 차별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적서, 구분의 문제는 여러 신하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륜의 주장이다.[40]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치 말라고 주장하였다.[40]

그 후 서선(徐選)은 1415년(태종 15년) 종친과 각 품관의 서얼은 현직에 두지 말라고 공의를 내세워 이의 채택을 보았다. 서얼 금고를 주장하던 태종은 서선 등의 공의를 빌미로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된다.

코끼리 일화 [ 편집 ]

재위 11년인 1411년 2월 22일, 일본왕 원의지(源義持,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코끼리를 바쳤다. 이는 기록 상으로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였다. 태종은 이를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다.[42] 이듬해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李瑀)가 코끼리를 보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이우를 밟아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43]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을 올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海島)에 두길 청하니,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44] 귀양 간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날로 수척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414년 5월 3일 태종은 코끼리를 다시 육지로 불러오게 했다.[45]

이 코끼리는 세종 때까지 살았는데, 상왕이었던 태종은 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코끼리를 기르는 것이 어렵다는 계를 올리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를 돌아가며 키우도록 했다.[46] 이듬해인 1421년에는 충청도 공주에 가 있던 코끼리가 기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또 발생했는데, 이후에는 이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47]

같이 보기 [ 편집 ]

주해 [ 편집 ]

↑ [18] 신궁( 창경궁 )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 후 성종 14년( 1483년 )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 양녕대군(1394년생)의 형들이므로 경안공주(1393년생) 보다 이전에 출생함

각주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 이성계VS이방원, 격정적 대립 시작

‘태종 이방원’이 한달 반 만에 방송을 재개한다.26일 오후 9시 40분 방송되는 KBS1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극본 이정우, 연출 김형일 심재현, 제작 몬스터유니온)에서는 왕위를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이방원(주상욱 분)의 모습이 그려진다.앞서 이방원은 이성계(김영철 분)의 어명을 받고 조선의 왕자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이방원이 명나라에 간 사이, 이성계는 공식적으로 조선의 천도를 논했으며 고려 왕족들의 씨를 모두 말살시켰다.정세가 혼란스러운 틈에 새로운 인물 이숙번(정태우 분)이 등장해 설전을 벌이던 유생들을 한 방에 제압하며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그가 이성계의 행보에 어떤 파동을 불러올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26일 방송에서는 이방원과 이성계가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방원으로부터 세자인 방석(김진성 분)을 지키기 위해 이성계가 택한 방법은 무엇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또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이방원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그는 의문의 인물을 찾아가 비밀을 털어놓는다고. 이성계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이방원이 찾아간 인물은 누구일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태종 이방원’ 제작진은 “13회에서는 이방원이 왕위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의 시작을 보여줄 예정이다. 그 과정에서 직면하는 부자(父子)의 갈등과 극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주상욱, 김영철 배우의 열연을 본방송에서 확인해 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이처럼 왕위를 둘러싼 이방원과 이성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앞으로의 조선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태종 이방원’ 13회는 26일 오후 9시 40분에 방송된다.[김소연 스타투데이 기자]사진제공| 몬스터유니온[ⓒ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종 [定宗] 사후 262년 만에 ‘정종(定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받다

정종은 1357년(공민왕 6)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광원(光遠)이고, 이름은 경(曔)이며, 방과(芳果)는 초명이니 태종 이방원의 형이다. 정종이 그의 나이 18세 때인 1374년(공민왕 23)에 혼인한 김천서(金天瑞)의 딸이 훗날 정안왕후가 된다. 정종은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고려왕조에 무공을 세워 벼슬을 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이후에는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얼마 후 다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정종이 조선 제2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서 맡았던 주요 역할들은 다음과 같다. 21세인 1377년(우왕 3) 아버지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한 것을 비롯하여 고려왕조에 많은 무공을 세웠다. 32세인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 권문세족을 몰아낼 때 이들을 국문하는 데 참여하였다. 34세인 1390년(공양왕 2)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여 왕위에 오르자 1392년(태조 1) 36세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에 임명되면서 왕자로서 병권에 참여하였다.

정종은 동생 정안군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한 후 세자에 책봉되었고 곧 즉위하였다. 1398년(태조 7) 42세의 나이였다. 1398년 9월부터 1400년 11월까지 2년 여 재위하였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한 셈이었으므로 국왕으로서는 다소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정종 대 국정과 관련하여 취해진 주요 조치들은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한 것과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삼군의 직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분리체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방원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하륜(河崙) 등이 내세운 ‘적장자가 후사가 없으면 나머지 아들로, 나머지 아들이 후사가 없으면 서자가 계승한다.’는 승계 원칙에 따라 나머지 아들 중의 하나인 정안군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제1, 2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 과정을 살펴볼 때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종은 왕위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한 공로는 정안군 이방원의 몫이 크다고 하면서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에 힘을 더했다. 세자에 책봉된 정안군은 다시 정종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취하여 1400년(정종 2) 11월 정종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굳이 이러한 형식을 취한 것은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로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종법정신을 표방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종은 동생 이방원을 아들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상왕이 된 정종은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반기를 든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나 상왕복위문제 등이 불거질 때마다 태조와 태종 사이에서 편안하지 못했는데, 태조 승하 후 태종의 왕권이 공고해지면서 왕-상왕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태종은 형식적으로는 아버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0년 위 형님인 정종을 상왕으로 모시며 극진히 받들었다고 한다. 정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 근 20년을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으로 소일하며 여생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 태종이 상왕이 되면서 태상왕이 된 정종은 1419년(세종 1) 태종과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정종의 유명에 따라 왕비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厚陵)에 합장하였다. 처음에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이듬해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공용순효대왕(恭靖溫仁恭勇順孝大王)’으로 고쳐 다시 받았다. 숙종 대에 묘호를 받으면서 다시 의문장무(懿文莊武)의 시호를 더 받았다.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숙종 대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받을 때까지 공정대왕(恭靖大王)이라 불렸다.

정종은 태조, 태종과 달리 승하 후 바로 묘호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정통 임금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또 국왕이 국왕 대우를 받지 못하면 그 일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까지 대대로 국왕의 그것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종의 자손들은 국왕의 자손이 아니라 대군의 자손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밖에도 여러 왕실 관련 예제나 정치적 관계, 역사적 정통성 등과 관련되어 복합적으로 영향이 따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정종의 묘호 논의는 단순히 왕의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묘호를 받기 전 정종 즉 공정대왕에 대한 묘호 논의는 예종 대에 처음 나왔다. 예종이 공정대왕에게 안종(安宗) 혹은 희종(熙宗)이란 묘호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실록에도 아무 이유 없이 묘호를 받지 못한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예종이 문득 승정원 승지들에게 의견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음날에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 똑같이 물었다. 승지들이나 대신들 모두 선대왕들이 묘호를 올리지 않은 데에는 뜻이 있었을 것이라며 은근히 반대의 입장을 나타냈다. 성종 대에는 후손들에 의한 묘호 요청이 여러 차례 있었다. 1475년(성종 6) 정종의 장남 무림군(茂林君)이 묘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1481년(성종 12)에는 후손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이 상소를 올려 묘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1482년(성종 13)에도 후손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이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기를 주장하였지만 예조판서 이파(李坡)가 적극 반대해서 시행하지 못했다. 후손들의 연이은 요청에 조정에서도 이 논의를 피할 수는 없었는데 대체로 선대왕이 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반대의견이 일방적이었다. 중종 대에도 왕실의 후손들이 연대하여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릴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공정대왕의 후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논의는 보다 보편성을 띠게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공정대왕이 묘호를 받지 못하고 온당한 대우 역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당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조에서 반대하고 중종도 그대로 따랐는데 당시 이와 같은 결정을 개탄하는 사관의 논평이 있어서 주목된다. 또 1519년(중종 14)에는 시강관(侍講官) 이연경(李延慶)이 공정대왕을 국왕으로서 온당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처럼 연대 상소와 사관의 논평, 시종신의 문제제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중종 대에는 성종 대와 달리 공정대왕의 묘호 문제를 다시 보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이 감지된다. 공정대왕 묘호 논의는 숙종 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구체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종의 종묘 배향 등 숙종대 취해진 일련의 왕실 정통성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 세종을 비롯하여 선대왕들은 왜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았는지, 예종 대에 묘호를 정해서 올리려고 했던 것은 맞는지 그 어떤 것도 정확한 고증이 없는 상황에서 1681년(숙종 7) 지춘추(知春秋) 조사석(趙師錫), 검열(檢閱) 이여(李畲) 등 사관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본 후 보고하였다. 이 보고가 있은 지 약 석 달 만인 1681년(숙종 7) 9월 18일 드디어 공정대왕에게 묘호가 내려졌다. 공정대왕의 묘호는 ‘정종(定宗)’으로 결정되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묘호를 받기까지 262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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