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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영화 \”인천상륙작전\” 해설강의!!
여러분들은 인천상륙작전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맥아더 장군 또는 유엔군이라고 답을 하실텐데요.
하지만 그들이 승리를 역사에 기록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이름 모를 학생들, 그리고 지역주민,
그리고 우리 국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켜 준 그 당시의 우리 선배님들에게
이 영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추모의 마음을 가져 봅니다.
단 한 번의 작전을 위하여
단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친 분들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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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영어: Operation Chromite)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진행된 상륙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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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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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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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8/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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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 왓챠

한국전쟁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하자 더글라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그의 지시로 대북 첩보 작전에 투입된 장학수는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 인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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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atcha.com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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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기념관

사이트맵. 기념관 소개, 건립목적 | 관람안내 | 시설배치도 | 찾아오시는 길 | 영상정보처리기기운영 · 관리방침 안내. 전시안내, 전시관 소개 | 제1전시관 | 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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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anding915.com

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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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첩보전을 그린 영화 『인천상륙작전(2016)』

2016년 7월 27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된 군사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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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cms.nculture.org

Date Published: 12/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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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영화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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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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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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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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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영어: Operation Chromite)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진행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다. 2주 후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하게 된다.[1]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영어: Operation Chromite)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겨운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인천은 낙동강과 부산 교두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조선인민군이 거의 방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기습 상륙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유엔군은 손쉽게 인천을 점령하여 서울까지 탈환했다. 이로써 조선인민군은 보급로를 차단 당하게 되었다.

전투의 배경 [ 편집 ]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UN군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부산 교두보 전투 입니다.

부산 교두보 지도

부산에 도착한 미국 해병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했다.

조선인민군(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략은 포위, 섬멸 작전이었다. 조선인민군이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밀어붙인 후, 좌우 양 측면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위아래를 보자기로 감싸듯이 섬멸하는 전략이었다. 이 방법은 6.25 전쟁 시작부터 8월 초까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그만큼 조선인민군은 더욱 진격할 수 있었다.[4]

8월 초가 되자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더 이상 밀릴 땅도 없었다. 더 이상 물러나다가는 동해와 남해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일명 부산 교두보 전투의 시작이었다.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북쪽과 서쪽의 2면만 방어하게 되자 더 이상 조선인민군에서 양측면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조선인민군은 이제까지 재미를 봤던 포위, 섬멸 작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유엔군은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하여 병력과 무기, 전쟁물자를 빠르게 보급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군이 6.25 전쟁 초기에 누렸던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위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인민군의 8월 공세 [ 편집 ]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이전의 전술을 다시 사용하고자 했다. 상하좌우를 포위할 4개의 공격축을 설정하고 전투를 치렀다. 바로 부산 교두보 전투였다. 마산 , 전투산,[7] 낙동강 일대,[8] 대구, 칠곡 등에서 격전이 치러졌다.[12]

포항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을 포항 전투에서 격퇴시켰다.[13]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자 조선인민군의 8월 공세도 시간을 끌게 되었다. 이제 조선인민군의 전략은 6.25 전쟁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드러나게 되었다.[15]

조선인민군의 9월 공세 [ 편집 ]

8월 말이 되었다.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대다수의 부대가 커다란 병력 손실을 입어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16] 조선인민군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보급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식량, 무기,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병력을 대신하여 투입된 병력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17]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인민군은 9월 공세를 준비한다. 이를 가능케 할 만큼의 보급을 받고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다.[4]

9월 1일 조선인민군은 최후의 공세인 낙동강 대공세를 감행했다. 목적은 오직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였다. 조선인민군은 이번에 4개가 아닌 5개의 공격축을 설정했다.[18] 이 공세에서 유엔군은 허를 찔려버렸다. 조선인민군이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거의 압도할 수 있다고 예상되었다. 조선인민군은 경주를 공격했고,[21] 대구와 가산을 포위했으며,[23] 낙동강을 다시 도하하여 영산을 향해 진격했고[25], 남강과 함안을 통해 마산을 점령하고자 하였다.[26] 6.25전쟁의 전투 중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결과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였다.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효과적인 방어로 막아낸 것이다. 조선인민군은 두 번에 걸친 공세의 실패로 병력과 자원이 급감하게 되었고, 공세 위주의 전략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공세의 실패로 인해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도 버겁게 되었다.

상황을 타계할 상륙 작전 계획 [ 편집 ]

작전 노선도

상륙 지역 선정 [ 편집 ]

미국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로 정하고 주요 상륙지로는 총 3개 지역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인천(100-B), 군산(100-C), 주문진(100-D)이 그것이다. 일본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보부에서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하여 관련부대에 하달했다.[29]

미 합동참모부의 인천 반대 [ 편집 ]

미 합동참보부가 상륙 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인천의 조수, 수로, 해안 조건을 반대 이유로 들었다.

수로가 협소하여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적이 수로에 기뢰를 부설해놓아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10미터에 달해 썰물 시 해안에 2~5킬로미터의 갯벌이 생겨난다. 이로 인해 상륙함의 접근이 곤란하다.[30]

맥아더가 겪은 태평양 전쟁 [ 편집 ]

필리핀 레이터섬(Leyte)을 상륙작전으로 탈환하는 맥아더

1942년 3월 17일 맥아더는 작은 어뢰정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하여 호주로 갔다. 이후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미군과 필리핀군 14만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2개의 전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미 극동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에게 배정된 전쟁 물자는 유럽전선에 있던 패튼에게 배정된 물량의 5%에 불과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일명 ‘개구리 뛰기 전술’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을 압도했다. 전선을 연결하여 안전하게 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가 뛰듯이 주요 거점만 점령하는 모험적인 전술이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다시 필리핀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총 87차례의 상륙작전을 전개하였기에 누구보다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가 전개한 상륙작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섬을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배후 섬을 공격한다.

배후에 있는 섬에 대한 사전 공격은 2~3시간 정도 최대의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전투기가 와서 1시간 정도 공습을 한다.

일본군은 미군의 포격과 공습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후 미군은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일본군은 어차피 참호나 진지에 숨어있어도 미군의 포격과 공습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모두 무시한 채 적진을 향해 반자이 돌격(Banzai charge)을 감행한다.(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이라는 무모한 작전을 구사한 이유는 이왕 죽는 것 싸우다 죽자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섬을 점령한다.

일본군은 병력을 분산시켜 다른 섬으로 병력을 보낸다.

미군은 또다시 섬을 공격하고 점령하며 일본군의 보급로와 교통로를 단절시켜 나간다.[31]

이렇듯 맥아더는 상륙작전에는 도가 터있었고 이를 6.25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인천 상륙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장사 상륙 작전 등을 먼저 시행하여 조선인민군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상륙작전 전에 두 번이나 전투기로 공습하고 포격하였다.

미국 군함의 맹렬한 포격과 전투기의 공습이 있은 다음 미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를 설득하여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하고자 하였다.

미 합동참모본부의 최종 결정 [ 편집 ]

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됴쿄 미국 극동군사령부까지 와서 1950년 8월 23일 맥아더와 회의를 개최하였다. 맥아더가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주장하면서 한 브리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군의 전투부대는 모두 낙동강 방어선에서 미 8군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병참선이 길게 늘어져 있어 후방인 서울에서 이를 차단할 수 있다. 그래서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상륙 지역이 되어야 한다.

서울은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에서 신속히 탈환해야 한다.

인천은 미 8군이 망치가 되고, 미 10군이 모루가 되어 인민군을 분쇄하게 해줄 것이다.

결국 8월 28일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하고,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상륙작전일을 9월 15일로 정했다.[32]

사전 작전 [ 편집 ]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 폭격당하고 있는 월미도 미 해군 구축함 USS 라이만 스웬슨(USS Lyman K. Swenson)에서 본 모습.

삼척 :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상륙 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

군산시 :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

인천 : 9월 4일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

영덕군 : 9월 15일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 장사 상륙 작전에서 생존한 학도병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장사 상륙 작전이 9월 14일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으나, 해군 기록에는 9월 15일에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고 적혀있다.[33]

상륙 작전 [ 편집 ]

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USS Mount McKinley)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방어가 약했던 인천을 포격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다.

미해병대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중위가 인천 레드비치(Red Beach : 현재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일대)에 상륙한 후, 방조제를 기어오르는 모습. 얼마 지나지 않아 로페즈 중위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폭사당했다. 사후에 미국 명예 훈장(Medal of Honor) 을 수여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어 9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의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해군 소장이 유엔군 해군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다.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대선단이었다.[34] 13일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되어 이틀이 지났다. 15일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대한민국의 백인엽 대령이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수행하면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인천에 진입하였다.[35]

서울 탈환 [ 편집 ]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다급해졌다.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을 투입, 서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해 있었고 23일에는 대한민국 해병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안산(鞍山)을 점령했다. 다음 날 한강을 도하하여 마포를 통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대한민국 국군 제17연대와 미국 제7보병사단이 현재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방면을 통하여 한강을 도하했고 서울의 남쪽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해병대와 맹렬한 협공으로 가했다. 조선인민군은 시가전을 치루려고 했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28일 제2차 서울 전투로 서울 탈환이 이루어졌고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자리에 있었던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34]

관련 작품 [ 편집 ]

영화 [ 편집 ]

참조 [ 편집 ]

각주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이후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이 마련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 초안이 7월 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상륙작전을 계획하자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100-B, 작전 100-C, 작전 100-D의 세 가지 안을 제출하였다. 작전 100-B는 서해안 중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고, 작전 100-C는 군산에, 그리고 작전 100-D는 동해안 주문진 근처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세 가지 작전에서 최종적으로 작전 100-B가 채택되었고, 잠정적인 D-Day는 9월 15일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다.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요원들을 차출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KATUSA)의 시초였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의 계획은 9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되었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하였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로 하여금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상륙부대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9월 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9월 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9월 12일부터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하기 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02:00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다. 제1단계 작전에서는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가하는 동안 미 해병연대가 상륙하였다. 제2단계에서는 후속하는 부대들이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시가지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인천상륙작전

신파극 · 군인 · 1시간 50분 · 평균 3.012

한국전쟁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하자 더글라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그의 지시로 대북 첩보 작전에 투입된 장학수는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 인천 상륙 함대를 유도하는 임무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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