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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글 창제 작업은 누가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1443년 12월 30일자의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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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사용하는 까닭은?
한글을 수입한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은 자신들의 부족어를 표기하는데 한글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표현하는 문자로 한글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세계에 무수히 많은 소리문자들이 있지만 유일하게 발음기관을 본 따 만든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그런데 그 모양만 발음기관을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음기관에서 나는 소리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같은 성질의 소리는 비슷한 생김새를 갖도록 만들었다. 한글은 소리의 성질까지 담고 있는 자질문자로써 선진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렇다면 한글이 어떤 소리표현도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실제 엑스레이 검사를 통해 발음기관과 훈민정음의 연관성에 대해 실험하고, 소리에 대한 훈민정음의 표현력에 대해 알아보았다.
“쓰기에 갖추지 않은 소리가 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두루 통하고,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와 닭 홰치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적을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中
▶ 옛글자를 따른‘자방고전’, 그 안에 담긴 세종의 숨은 뜻
훈민정음의 창제기록에 자방고전, 즉 글자의 모양을 옛글자를 따라서 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어떤 옛글자를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일까? 훈민정음 기원설로 몽골의 파스파문자와 신라시대에 들어온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가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모양새만으로는 큰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자방고전이라는 말을 했을까. 실제 중국의 오랜 글자체 중에 전서체가 있다. 글자체만 놓고 봤을 때 전서체 획의 굵기만 한글과 동일할 뿐 비슷함 점을 찾기 힘들다. 중국의 한자가 국제공통어처럼 쓰이던 중화질서 속에서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문자를 창제한 세종. 자방고전이라는 말 속에 혹시 세종의 또 다른 속내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 세종, 백성의 소리를 담아내려 애쓰다
당시 조선의 법전이었던 [대명률]은 한자와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 있었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새김)을 빌려 한국어를 적던 표기법으로 일반 백성은 [대명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문자 모르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 당하는 경우 많았다. 문자 모르는 백성에 대한 세종의 안타까운 마음이 [삼강행실도]에 잘 나타나있다. 삼강행실도를 그림으로 그렸으나 그 조차도 백성들 알지 못할까 세종은 안타까워했다. 백성들과의 소통을 원했던 세종. 그는 결국 백성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는 소리문자 창제를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말과 사투리까지 표기하고자 했던 세종은 실제 백성들의 소리를 철저히 담아내려 노력했다.

“글의 뜻을 일반 백성은 깨우치기 어려움을 걱정으로 여기고 옥사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中
▶ 과학적인 소리문자 -‘훈민정음’어떻게 만들었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세종은 “너희들이 운서를 아느냐”고 호통을 친다. 세종은 음의 높낮이와 발음기관을 통해 말소리가 나는 이치에 대해 섭렵했던 당대 최고의 음운학자였다. 거기에 절대적인 음감을 가진 세종은 우리말을 수없이 들으며 철저히 분석하여 특히 차자표기법을 통해 우리말 구조를 분석했다. 훈민정음의 특징인 초성, 중성, 종성의 삼분법과 초성과 종성을 같은 자음을 쓰는 것, 이어쓰기에서 종성이 초성으로 넘어가는 현상을 분석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같은 성질의 소리는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게 만든 훈민정음. 그 창제 과정 곳곳에는 세종의 백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배어있다.
신역사스페셜 46회- [한글날 특집] 소리문자 훈민정음, 어떻게 만들어졌나 (2010.10.9 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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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반포 과정은 영화보다도 더 극적 – 오마이뉴스

훈민정음 연구가 김슬옹 박사(56, 한글학회 연구위원, 연세대 외래교수)는 “한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면서 “훈민정음 창제과정은 영화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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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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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세종 혼자 만들었다 – 뉴스톱

[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기록으로 본 한글창제 과정. 글쓴이와 비슷한 세대는 학창시절에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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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tof.com

Date Published: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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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1446 – 우리역사넷

그러나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 사용한다는 사안의 중대함에 비해 그 창제 과정과 관련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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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3/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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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이해 | 문화체육관광부 어린이 누리집

한글날은 세종이 1446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리는 날 … 북한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기념일’이라 하여 한글 창제를 기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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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cst.go.kr

Date Published: 9/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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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언제부터 훈민정음 창제를 고민했을까? – 우리문화신문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진실 퍼즐 맞추기.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흔히 세종은 10여년의 비밀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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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ya-culture.com

Date Published: 12/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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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은 조선전기 제4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는 조선한자음(朝鮮漢字音)의 정리 사업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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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6/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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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훈민정음 창제 과정

  • Author: KBS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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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19. 7.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i-k65eXOmo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 Sciencetimes

이야기과학실록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예전에는 달력에 빨간 글자로 인쇄된 법정공휴일이었지만,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기념일로만 명맥을 유지해오던 한글날은 2006년 국경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지만 여전히 공휴일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것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 덕분이다. 이 책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새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에 대해 상세히 풀이한 문헌이다.

책의 뒷부분을 보면 정인지가 쓴 서문 끝머리에 ‘1446년 음력 9월 상순’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확정된 것이다.

이처럼 한글날이 정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창제과정과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럼 한글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너무 뻔한 것을 묻는다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올지 모르겠다. 한글은 당연히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만든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까지 집현전 학사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한글 창제 이후 가장 심하게 반발하며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상소한 것도 바로 집현전 학사들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2개월 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ㆍ직제학 신석조를 비롯해 김문ㆍ정창손ㆍ하위지 등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그와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난다.

“만일 언문을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은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여 의혹됨이 없는 연후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상소문의 내용을 뒤집어 생각하면 한글 창제 작업 전에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일절 상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또한 집현전 학사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성삼문과 신숙주의 경우를 살펴봐도 한글 창제와 별 연관이 없다. 성상문은 한글이 거의 창제되었을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창제 2개월 전에 들어온 신숙주는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한글 창제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던 셈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유학자들의 모화사상(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고 따르는 정신)이 깊을 때라 미리 알렸더라면 더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을 게 뻔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세종으로서는 한글 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 작업은 누가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1443년 12월 30일자의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상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즉, 세종 혼자서 창제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이 그처럼 엄청난 작업을 혼자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한글 창제 전의 몇 년 간은 세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던 때라 정사를 돌보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경연(經筵)조차 제대로 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 집현전 학사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밀리에 누가 세종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꼽히는 인물들이 바로 세종의 자녀들인 문종과 수양대군ㆍ안평대군ㆍ정의공주 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거론되는데, 그가 바로 신미대사이다. 특히 신미대사의 경우 단순히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세종 및 한글과의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를 추적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글이 범자(梵字 ;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설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불교 경전은 범어로 기록된 것이 많았다. 승려인 신미대사는 불경을 번역한 한자에 오역이 많음을 알고는 독학하여 범어 및 티베트어를 비롯한 5개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범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세종보다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443년 12월 30일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도 ‘모양은 본뜨되 옛 전자를 모방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전자(篆字)란 가장 오래된 한자 글씨체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그런데 조선의 학자들이 지은 저서를 보면 한글의 기원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유학자인 성현은 훈민정음 반포 30년 후에 지은 ‘용재총화’에서 ‘그 글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조선 중기의 명신인 이수광도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과 이능화 역시 한글은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실록이나 정인지가 언급한 ‘전자’는 곧 ‘범자’의 한자식 표현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글과 범자의 음운 체계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오랫동안 한글과 범자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한국세종한림원의 강상원 박사는 자음의 기본을 이루는 아음ㆍ설음ㆍ순음ㆍ치음ㆍ후음의 5가지 음운체계가 범자에도 그대로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순우리말 중 상당수가 범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리랑은 범어에서 ‘사랑하는 임’을 뜻하는 ‘ari’와 ‘서둘러 떠나다’는 뜻의 ‘langh’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 이에 의하면 아리랑은 ‘사랑하는 임이 서둘러 떠나다’라는 뜻이 된다.

밥 역시 ‘어머니의 젖’을 의미하는 범어 ‘vam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사에 의존해온 우리 민족의 경우 쌀로 지은 밥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볼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한글의 범어 모방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과 관련이 있다. 각필이란 상아나 대나무로 뾰족하게 깎아 만든 필기구로서, 옛 문헌의 글자 옆에 점과 선ㆍ부호 등을 눌러서 표시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던 양식을 뜻한다.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 경전을 조사한 결과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일치하는 각필이 무려 17개나 발견되었다는 것. 더구나 자음과 모음의 체계도 각필과 유사한 점이 많음을 볼 때 한글의 범자 모방설 및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참여설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책이 모두 불교서적이라는 점이다. 석보상절과 능엄경언해는 불교경전이고 월인천강지곡 역시 찬불가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게 생각하여 만든 문자라면 유교를 숭상하던 국가에서 논어와 맹자 같은 유교 경전을 먼저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해야지 왜 불경 같은 불교서적들을 먼저 번역했던 것일까.

이는 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의 체계와 표기법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가 불경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그 당시 세종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신미대사가 그 주인공으로 지목된다.

실제로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 이상이 불교 관련 서적이며, 유교 관련 서적은 5%가 채 되지 않는다.

한글 창제와 불교의 연관설은 몇 가지 숫자에도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편찬한 ‘월인석보’의 첫 머리에 실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한글 어지는 정확히 108자이며, 그것을 한문으로 적은 한문 어지는 108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연구 결과 이는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글자를 탈락시키거나 다른 글자로 대체하는 등의 의도적인 조절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월인석보의 제1권은 정확히 108쪽이다. 이처럼 108을 고집한 것은 불교에서 신성한 숫자로 여기는 108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의 28자로 만들어진 문자이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28은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는 횟수와 똑같다.

때문에 한글 창제의 숨겨진 또 하나 목적은 새 문자를 통해 불교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평민들도 불교의 교리를 알게 되어 불교 포교의 새 전기가 마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셈이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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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반포 과정은 영화보다도 더 극적”

“세종대왕이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2년 6개월만에 해례본이 나오고, 이것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는 과정이 극적입니다. 비밀리에 연구하게 한 것도 극적이고, 15세기에 하층민인 노비 집단이 이 글자를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기적이고, 해설한 책을 펴낸 것도 기적입니다. 1천만 관객이 아니라 남북한 한겨레 7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영화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큰사진보기 ▲ 훈민정음 언해본 목걸이를 착용한 김슬옹 박사. ⓒ 신향식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별’ 글자가 있는 정음해례 26ㄴ(간송본) ‘별’ 글자가 있는 정음해례 26ㄴ(간송본). ⓒ 신향식 관련사진보기

– ‘<훈민정음> 해례본’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요?

– 왜 해례본 교육에 몰입하고 계신지요?

–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배워할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지요?

큰사진보기 ▲ 훈민정음 해례본 둘째 장 『훈민정음』 해례본 둘째 장 복원본. ⓒ 신향식 관련사진보기

– < 훈민정음> 해례본은 왜 중요한가요?

– 그 다음에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 ‘<훈민정음> 해례본’의 인류 보편주의를 설명해 주세요.

– 해외 학자들도 한글을 높게 평가하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의 융합적 가치는 무엇인지요?

– 해례본에 가치를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요?

큰사진보기 ▲ 『훈민정음』 해례본 셋째 장 훈민정음 해례본 셋째 장 사진본. ⓒ 신향식 관련사진보기

– 보험사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 한글은 왜 ‘과학적인 문자’라고 불리나요?

–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큰사진보기 ▲ 『훈민정음』 언해본 첫째 장 교정본 『훈민정음』 언해본 첫째 장 교정본. ⓒ 신향식 관련사진보기

– 곧 있으면 10월 9일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은 왜 ’10월 9일’인가요?

– 기적의 문자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 571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얽힌 몇 가지 궁금증을 질문 드리겠습니다. 우선 <훈민정음> 해례본은 왜 ‘해례본’이라 부르나요?

– 해례본은 왜 ‘간송본’이라 부르고 또 ‘상주본’은 무엇인가요?

– 간송본의 앞 두 장 네 쪽이 가짜라고 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지금 있는 것은 어떻게 보사한 것인지요?

– 간송본은 세상에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요?

큰사진보기 ▲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대왕 서문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대왕 서문의 끝부분 ⓒ 신향식 관련사진보기

– <훈민정음> 언해본은 무엇인가요?

– 언해본을 국어사학회에서 복원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덧붙이는 글 | 서양 고전만 읽지 말고 우리 고전인 ‘훈민정음 해례본’도 읽어보고, 이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타나면 좋겠습니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왼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다. 어떤 책일까. 바로 해례본이다. 국보 70호이고 199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마침 올해는 세계기록유산 등재 20돌이기도 하다.훈민정음 연구가 김슬옹 박사(56, 한글학회 연구위원, 연세대 외래교수)는 “한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면서 “훈민정음 창제과정은 영화처럼 극적이기 때문에 영화로 각색해도 훌륭할 것”이라고 밝혔다.김슬옹 박사는 “훈민정음 28자만 배우면 누구나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지혜를 발휘할 수 있고, 특히 해례본에는 엄청나게 많이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면서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과정을 영화로 만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례본은 새 문자 훈민정음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세종대왕은 비밀리에 연구하여 1443년에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어 신하들에게만 알렸다. 이후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해례본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새 문자 훈민정음과 그것을 만든 원리, 운용 방법을 알렸다. 이 책에는 창제의 취지와 원리, 역사적 의미 등을 비롯하여 문자의 다양한 예시 등이 실려 있다.김슬옹 박사는 “한글을 배우면 성리학이든 어떤 학문이든 풀어낼 수 있으니 한문으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던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무서워했을 것”이라며 “기득권이 사라지므로 한글을 2류 문자로 취급한 걸로 추론할 수 있다”고 밝혔다.지난 9월 26일 저녁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인근 전통찻집에서 훈민정음 연구가 김슬옹 박사를 만나 구술 대담을 했다. 김 박사는 2016년 3월부터 2017년 10월 현재까지 훈민정음 해례본 특강을 한글문화연대에서 8주 과정으로 진행 중이다. 다음은 일문일답.”인류 최고의 문자 해설서답게 당대 최고의 철학, 수준 높은 언어학, 문자학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더욱이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지식과 정보를 나누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해례본은 모두 66쪽으로, 이 가운데 8쪽까지는 세종대왕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입니다. 이 정음편의 서문에 ‘유통(流通)’이란 말이 나오는데, 15세기 말(우리말)과 글(한문)이 유통이 안 되니 한문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유통(소통)하지 못하고 그래서 모두 유통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이런 해례본이 우리 학계와 교육계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 해례본만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전문가가 많이 나올 리 없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학문이 녹아 있는 융복합서이고 한문본이다 보니 학제적 연구와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지만요.””이 강의를 위해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연구하고 배울 수 있게 여러 방식의 교육용 자료를 구성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며칠 뒤면 이 자료가 책으로 나옵니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의 합리성, 지식과 생각의 자유로운 소통의 평등성 등이 담긴 훈민정음 정신을 함께 새겼으면 합니다.”해례본이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로 짚어보겠습니다. 첫째로는 한글 창제 원리가 정확히 기술된 것은 이 책밖에 없습니다. 18세기, 19세기 훈민정음을 연구했거나 언급한 학자들이 꽤 있지만 이들 모두 이 책을 보았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책 수집광이었던 이덕무(1741~1793)조차 이렇게 써 놓았을 정도입니다(관련 자료를 갖고 나와 보여 주며).’훈민정음에 초성(初聲)·종성(終聲)이 통용되는 8자는 다 고전(古篆)의 형상이다. ㄱ 옛글자의 급(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ㆍㄴ 익(匿)자에서 나온 것인데, 은(隱)과 같이 읽는다. (가운데 줄임) 세속에 전하기를 ‘장헌대왕이 일찍이 변소에서 문살을 배열(排列)하다가 문득 깨닫고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창제하였다’한다. 54권 양엽기 1, 현대어번역(고전번역원)> 임금은 변소에 가지 않고 변기틀인 ‘매화틀’을 침소에서 이용했음에도 이런 잘못된 제자 원리가 어지럽게 유포된 것은 해례본을 보지 않고 썼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가 완전히 풀리게 된 사건이 1940년에 원본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해례 부분, 특히 ‘제자해’에 창제 원리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둘째는 누구나 평등하게 배울 수 있는 문자 보편주의, 문자 민주주의를 담고 있기에 중요합니다. 쉬운 문자, 누구에게나 과학적이고 간결한 문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꿈과 이상을 담을 수 없지요.””해례본은 하층민을 배려해 새 문자를 만든 세종의 인류 보편의 문자 꿈이 담겨 있어 위대합니다.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표, 취지 등이 담긴 세종 서문과 정인지 서를 함께 보면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한자 때문에 기본적인 소통조차 못하는 하층민을 배려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하층민과 더불어 양반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이 편안하게 쓸 수 있는, 하루아침에 배우는 쉬운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영국의 역사가 존맨은 한글을 ‘인류 문자의 꿈’이라고 했고, 이런 문자를 만든 세종을 기려 일본의 천문학자 와타나베는 자신이 발견한 별 이름을 ‘7365 Sejong’이라 하여 이른바 ‘세종별’이라 지었지요. 놀랍게도 해례본에서 예를 든 훈민정음 마지막 글자는 ‘별’입니다. 누구나 쉬운 문자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나눠 별이 되라는 의미는 아닐까요.””해례본에는 인류 최고 수준의 학문과 사상이 두루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금 수준으로 보아도 최고의 문자로, 과학에다 천지인 삼재 사상, 자음에는 오행 철학과 음악까지, 모음에는 수리철학까지 적용하여 만고불변의 소리 문자를 굳게 세운 것입니다.””해례본은 흔히 ‘무가지보’라고고 부릅니다. 가격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싸고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 공정한 값을 따져 대략의 가격을 추정해볼 수는 있는데,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동대문디자인센터에서 전시할 때 그 가격이 매겨진 적이 있습니다.””전시를 위해서는 보험에 들어야 하는데 보험사에서 추정한 돈은 최소 1조 원이었습니다. 국제 고가품 사례에 비추어 그렇게 추산한 것인데 세계기록유산인데다가 종이 책으로서의 가치, 인류 최고 문자로서의 가치 등이 고려되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40년에 매입한 가격은 정확한 기록도 없고 증언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 당시 일본돈 만 원, 중개료까지 합치면 만천 원으로 서울 최고 비싼 기와집 열 채 값이었다고 합니다.””한글을 과학적인 문자라고 하는 것은 핵심 제자 원리가 과학적이고 문자를 확장하는 방식이 체계적이기 때문입니다. 15세기에는 기본자가 지금보다 네 자가 더 쓰여 기본자가 28자였는데 이는 상형기본자 8자, 자음자 5자와 모음자 3자를 통해 확장된 것입니다. 그냥 더한 것이 아니라 자음은 획을 더하는 방식으로, 모음은 기본 세 자를 합치는 방식으로 규칙적으로 확장자나 응용자를 만들었습니다.””자음은 발음 기관 어딘가에 닿아 나는 소리이므로 발음기관을 본뜨고, 모음은 입술, 혀, 목구멍 등 여러 복합적인 작용으로 나므로 발음기관을 본뜨지 않고 하늘(·), 땅(ㅡ), 사람(ㅣ) 등의 삼재를 상형한 뒤, 이를 합성하여 우리말에 담겨 있는 음양의 기운을 살려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등의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자음과 모음, 초성자, 중성자, 종성자를 합쳐 만드는 방식도 ‘호하후허’에서 보듯 간결하고 체계적입니다.””세종은 임금이 된 지 25년째인 47살 때, 1443년 12월(음력)에 훈민정음 창제를 알리고 50살 때인 1446년 9월 상한(음력)에 반포했습니다. 이로부터 4년간 보급에 주력한 뒤 1450년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럼 1446년에 실제 훈민정음 반포식을 했을까요? 1446년에 반포했다는 것은 반포식을 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훈민정음’이란 새 문자를 해설한 책 을 간행, 출판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상한은 1일부터 10일 사이이므로 정확한 날짜는 모릅니다. 상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 오늘날 한글날인 10월 9일입니다.” 해례본은 세종대왕을 비롯해 집현전 학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여덟 명이 함께 지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쓴 부분을 ‘정음편’ 또는 ‘본문’이라 부르고, 신하들이 풀어 쓴 부분을 ‘정음해례편’ 또는 ‘해례편’이라고 부릅니다. ‘정음편’은 세종의 서문과 ‘예의’로, ‘정음해례편’은 ‘정인지 서’와 ‘해례’로 구성됩니다. 세종 서문을 자세히 풀어쓴 것이 ‘정인지 서’이고 ‘예의’ 부분을 자세히 풀어쓴 것이 ‘해례’입니다. ‘해례’는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의 다섯 ‘-해’와 용자례의 ‘-례’를 합쳐 이르는 말입니다. 책 제목과 문자 이름이 ‘훈민정음’으로 같다 보니, 책 제목에는 ‘훈민정음’에 흔히 ‘해례본’을 더 보태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릅니다.” 해례본은 글자를 나무판에 붓으로 쓴 것을 새겨 찍어낸 목판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정교한 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찍어낸 것은 빠른 시간에 많은 책을 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펴낸 초간본은 오랜 세월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용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 책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들여 지금은 간송미술관(서울 성북구 소재)에서 소장하고 있어 ‘간송본’이라 부릅니다. 다만 간송미술관이 1938년에 건립된 것이라 낡고 협소해 현재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최첨단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한편, 2008년에 경상북도 상주에서 또 다른 원본이 배익기 선생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원본을 ‘상주본’이라고 합니다. 상주본은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면서 소장자가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간송본은 발견 당시 세종이 직접 쓴 네 장 가운데 두 장, 총 네 쪽이 없었습니다. 발견자 이용준 선생이 해례본의 조맹부체에 능해 직접 보사한 것으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분은 세종실록에 실려 있고 또 정음편만 언해한 이른바 ‘언해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이용준 선생이 앞표지와 두 장을 보사한 보사 원본을 전형필 선생에게 판 뒤 해방 직전 월북하여, 그 어디에도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아 발견 경위와 정확한 보사 과정 등은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다행히 간송 전형필 선생은 당시 최고의 서지학자였던 송석하 선생을 통해 모사하게 하였고 그것이 훈민정음 최고 전문가였던 홍기문 선생에게 전달되어 그 가치를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우리말글 학자였던 외솔 최현배 선생은 1942년에 출판된 에서 이 책이 세종시대 원본임을 입증했고, 해방 후 조선어학회와 통문관에서 영인본을 펴내 연구와 교육으로 널리 알려지게 했습니다. 2015년에는 간송미술재단이 직접 교보문고와 함께 소장본과 똑같은 복간본을 펴내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언해본은 해례본 가운데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과 예의 부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로는 세조가 펴낸 것으로 정확한 제목은 입니다.”언해본은 1459년 세조 5년에 월인석보라는 불경 책 앞머리에 실려 있는 것인데 이 언해본은 세종 때부터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 중론입니다. 그래서 세종 때 것으로 복원해 본 것이죠.”

훈민정음은 세종 혼자 만들었다

[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기록으로 본 한글창제 과정

글쓴이와 비슷한 세대는 학창시절에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했다.’고 배웠다. 왕이 문자를 창제했다고 생각하기보다 학자들이 창제했다고 여기는 것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이므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기보다는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 가르침이었다. 그러면 요즘 세대는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이해하고 있을까? 초등이나 중학교 교과서가 없으니,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찾은 훈민정음에 대한 설명을 한번 읽어보자.

한글은 1443년(세종 25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만들었어. 한글의 처음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지.

매우 놀랍게도 글쓴이가 40여 년 전에 학교에서 배운 것과 한 치의 오차가 없는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사 개념사전』에 나오는 설명인데 더더욱 놀랍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는 출발부터 어려움이 많았어. 최만리 등의 학자들이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라며 격렬히 반대했거든. 그래도 세종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눈이 짓물러 한쪽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연구했지. 그 결과 1443년에 드디어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어.

훈민정음 해례본

내 생각에 위 책은 어린이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설명은 전혀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가장 심각한 오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이야기는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자에 나오고,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듬해인 1444년 2월 20일자 기록인데,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조차 잘못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 그럼 이번에는 글을 쓸 때, 작가들이나 연구자들도 자주 인용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을 보자.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사실이 기록에 난 것은 ≪세종실록≫ 25년(음력 1443년)이다. 그 해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내니……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부른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의 훈민정음 창제 관련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이 글에 따르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세종이다(親制: 친제). 그럼에도 옛날 교과서는 물론이고 요즘 나오는 여러 책들에까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을 공동 창제자인양 서술하는 것은 ‘설마, 왕이 문자를 만들었겠어?’라는 의구심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어학계를 비롯한 관련 학계의 결론은 ‘훈민정음은 세종이 혼자 창제했다’는 것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상.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 28개의 문자를 고안한 것까지인가? 아니면 문자 운용 체계를 완결지은 것까지인가?”

이처럼 문자와 문자의 운용 체계를 분리해 인식하는 것은 세종의 단독 창제설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면이 있다. 문자는 세종이 고안했지만 문자의 운용 체계를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와 『동국정운』과 같은 운서는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했다고 한다면 세종이 한글의 창제자라는 사실을 건드리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지음,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책과함께. 2008.

이 글에서는 문자 창제와 운용을 분리해 판단함으로써 세종 친제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게끔 논의의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문자를 만드는 일과 운용하는 체계를 세우는 일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세종의 단독 창제라는 주장에는 다소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세종의 단독 창제설, 곧 친제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세종이 우리말의 음운 체계, 문자의 운용법 등을 염두에 두고 28개의 문자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저자들의 신중함과 사려 깊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만, 발명자가 자신의 발명품이 어떻게 쓰일지 혹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또는 아무런 지식 없이 무언가를 발명한다는 것은, 아니 ‘발명만 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의 저자 박영규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공표할 때까지 문자 창제에 대한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는 점, 세종의 훈민정음을 반대한 최만리를 향해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되느냐?”면서 운학에 무지함을 지적하고,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고 한 기록 등을 근거로 세종을 당대 제일의 언어학자로 보았고, ‘훈민정음은 세종이 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했다.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공표할 때까지 훈민정음 창제를 시작했다거나, 새 문자 창제가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다는 내용 등이 실록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가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은 세종 혼자서 문자를 창제했다는 것을 뜻한다.

출처: zum 학습백과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국가를 경영하던 때였기에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유교 경전에 대한 공부가 1순위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과거를 준비하던 사대부 자제들이 24시간 씨름하던 것은 바로 그런 책들이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어학 공부에 시간을 투자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왕자로 태어났기에 궐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를 볼 필요가 없었다. 호학의 군주 세종은 어릴 때부터 유명한 책벌레였는데, 그의 관심사는 유학에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고, 자유롭게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라는 세종의 호언에서 우리는 자신감 넘치는 언어학자 세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훈민정음을 세종이 홀로 창제했다는 또 하나의 근거로서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에 대한 기록을 참고할 수 있는데, 훈민정음과 관련해 학사들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인 1444년 2월에 시작된 ‘운회’ 번역 사업에 관한 기록이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양 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성품이 예단(睿斷)하므로 상(賞)을 거듭 내려 주고 공억(供億)하는 것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16일 1번째 기사

열정적인 훈민정음 연구자 김슬옹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이에요. 오랜 연구 끝에 신하들 몰래 새 글자를 만들고, 1443년 12월에 가까운 신하들에게만 발표했어요. 그 당시에는 중국을 받들고 중국의 글자를 빌려 쓰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에요. 조선의 글자를 만드는 일에 신하들은 반대할 게 뻔했어요. 새 글자를 만든 뒤에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널리 새 문자를 알리기 위해서는 자세히 설명해 놓은 해설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강희안, 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들이 새 문자 창제에 찬성하여 해설서 만드는 일을 도왔어요.

– 김슬옹 글, 이량덕 그림, 『한글을 지킨 사람들』, 미래엔 아이세움, 2013.

[email protected] 최근글보기 정재환 1979년 데뷔 이래 장르를 넘나들며 개그맨, 방송진행자, 연기자 등 다양한 방송활동을 했다. 2000년 한글문화연대를 결성했고 2013년 성균관대에서 한글운동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초빙교수이며 현재 YTN ‘재미있는 낱말풀이’와 팟캐스트 ‘한마디로영어’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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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훈민정음, 우리가 모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이유

‘훈민정음(訓民正音)’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조선의 4대 왕인 세종(世宗)이 1443년(세종 25) 창제한 글자의 공식 명칭으로 오늘날 흔히 한글이라 부르는 우리말 표기체제이다. 다른 하나는 이 새로운 글자를 설명하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1446년(세종 28) 정인지(鄭麟趾) 등 집현전 학사들이 집필한 한문 해설서의 제목이다. 이 책은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라고도 한다.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글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뜻은 『월인석보(月印釋譜)』의 책머리에 실려 있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훈민정음’의 뜻을 주석하기를 “訓은 칠 씨오 民 百姓이오 音은 소리니 訓民正音은 百姓 치시논 正 소리라”라고 하였으니,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이다.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에서 쓰는 말인 구어(口語)와 그 말을 문자화 할 때의 글인 문어(文語)가 전혀 다른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해 왔다. 여기서 비롯된 불편함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이두, 구결, 향찰 등과 같은 독특한 차용표기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차용표기 체계가 아무리 발달해 있어도 말과 글이 다른 문자생활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말과 글이 달라 겪는 불편은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세종은 『훈민정음』해례본 어제서문(御製序文)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를 스스로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문 글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완성된 글자에 대해서는 『훈민정음』 뒤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 그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인지는 세종이 만든 28자는 그 전환이 끝이 없지만 배우기는 매우 쉬워 지혜로운 자는 하루 만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자도 열흘이면 모두 익힐 수 있는 글자라고 하였다. 또한 바람소리나 동물소리까지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글자라고 하였다. 말과 글이 일치하고 자연의 소리나 외래어까지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우리말 표기수단이 생긴 것은 우리 문자생활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 사용한다는 사안의 중대함에 비해 그 창제 과정과 관련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당대의 『세종실록(世宗實錄)』에도 언문을 만들고 훈민정음이라 이름 하였다는 1443년(세종 25) 기사 와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는 1446년(세종 28)의 기사 두 건 정도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기사들을 살펴보았을 때, 세종은 1443년에 28개의 문자를 만들고 간략한 예의(例義)를 들어 훈민정음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이후 3년 동안 집현전 학사 정인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의 8인과 함께 보완하고 글자의 이론적 근거를 해설하여 1446년 9월 『훈민정음』(일명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국보 제70호인 동시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편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언문’은 1443년 세종이 만든 28자의 음소문자를 지칭하는 말이며, ‘우리말(언, 諺)을 적기 위한 문자’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은 새로 만든 문자가 한자음 등 외래어까지 표기할 수 있는 표음문자라는 뜻이 함의된 공식 호칭이었는데, 이후에 종종 언문이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이 ‘언문’의 의미에 대해 ‘훈민정음을 비하한 말’이라거나 ‘훈민정음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였다’는 이해가 있기도 하나 이는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관련 학계에서 비판받는 주장이다.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에서 ‘언문 28자를 만들고 ……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다 ’는 기사가 나오고, 세종 스스로도 ‘언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언문, 즉 한글은 중국의 한문을 숭상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반적인 표기수단으로 수용되지 못했고 이러한 풍조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한문을 향유하는 계층이었던 조선의 지식인층은 한자를 매개로 한 문자언어의 사용에 큰 문제의식이 없었으므로, 우리말 표기수단을 만들기 위한 세종의 시도는 순탄치 못했다. 1443년 28개의 글자를 만들고 이어 새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작업 등을 진행하지만 지식인층은 새 문자 창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정황은 1444년(세종 26)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위시한 집현전 학사들이 공동으로 올린 상소에서 극렬하게 드러난다. 이 상소에서 우리 글자를 만들면 안 되는 이유를 여섯 가지 조목에 걸쳐 나열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조선이 새 문자를 만든 것은 중국을 섬기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 둘째,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과 같이 모두 오랑캐라는 것, 셋째, 신라 설총의 이두는 한자를 빌어 토씨에 사용하므로 이두를 쓰려면 한자를 익혀야 하니 바람직한데다 지금껏 폐단 없이 잘 사용하여 왔는데, 한자를 몰라도 배우기 쉬운 언문을 시행하면 관리(官吏)가 되려는 사람들조차도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니 성리학을 연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원래 이런 글자가 있었더라도 없애자고 해야 할 판에 학문과 정치에 유익함이 없는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려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 넷째, 관에서 형벌을 줄 때의 일을 이두와 한자로 쓰면 글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원통함을 당할 수 있다고 하나 말과 글이 같은 중국에서도 그런 원통함은 있으며 이는 관리가 공평한 인물인가의 문제이지 말과 글이 달라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다섯째, 많은 신료에게 의견을 물어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것을 관리 10여 명에게만 맡기고 국가의 정사를 의정부에 미루면서까지 글자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여섯째, 설사 언문이 유익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만드느라 왕의 학문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상소의 대표로 이름을 올렸던 최만리는 이 상소를 계기로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낙향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세종의 문자 창제 의지가 확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위와 같은 반대 논리들은 뒤집어 보면 세종이 왜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했는지 그 의도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세종은 우리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고, 이 문자를 만들게 된 원리와 이론적 근거, 실제 운용 예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책 『훈민정음』을 만들도록 하였다. 세계 문자사에서 문자를 만들고 그 원리 등을 기록한 설명서가 함께 있는 경우는 훈민정음의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이 『훈민정음』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종이 만든 문자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로 집현전 학사 정인지·신숙주·성삼문·최항·박팽년·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이 참여하여 1446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한문으로 쓰인 목판본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인 「해례(解例)」가 들어있어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이라 불리며 『훈민정음 원본(原本)』 이라고도 불린다. 장수 33장에 광곽크기 세로 22.9cm, 가로 16.9cm에 전체 1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주하리의 이한걸씨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여 그 서재로 들어갔다가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훈민정음』이라고 부르고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책이 바로 이 『해례본』이다. 이 『훈민정음』, 일명 『해례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세종이 친히 지은 서문(序文)(어제서문, 御製序文)과 새 문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 두 번째 부분은 정인지 등 신하들이 기술한 해례(解例), 세 번째 부분은 정인지의 서(序)이다. 첫 부분은 흔히 「훈민정음 예의(例義)」 혹은 「예의」라고 불리는데, 정인지의 서문에서 “계해년(1443)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고 간략하게 예의(例와 義, 보기와 뜻)를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고 한 데서 가져온 용어이다. 세종이 직접 지은 이 「예의」 부분에는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을 밝힌 어제서문, 28자의 글꼴과 그 음가 및 병서, 연서, 부서, 종성, 성음, 사성에 대한 규정이 담겨있다. 두 번째 부분은 「해례」라고 불리는데, 이 부분이 들어있는 『훈민정음』 한문간본만을 『훈민정음해례본』이라 부른다. 집현전 학자들이 집필한 이 「해례」에서는 「예의」에서 소개한 대강의 내용을 다시 세분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설명된 제자해(制字解), 훈민정음의 23초성체계에 있는 자모의 음가를 설명하는 초성해(初聲解), 중성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중성해(中聲解), 종성이 무엇인가 등을 설명한 종성해(終聲解), 초중종성글자가 합해져 음절단위로 표기되는 것 등을 설명하는 합자해, 단어 표기의 실제 운용 예를 보이는 용자례(用字例)가 그것이다. 마지막 정인지의 서문에서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으며 배우기도 쉬운 훈민정음의 우수성과 이런 문자를 창제한 세종의 영명함을 칭송하고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편찬 연월일을 적고 있다. 책 뒤에 달린 서문이라 하여 「훈민정음 후서(後序)」라고도 부른다. 『훈민정음』은 이 『해례본』 외에도 『언해본(諺解本)』, 『실록본(實錄本)』이 있다. 언해(諺解)란 한문으로 쓰인 내용을 우리말로 해석한 것을 이르는데, 『훈민정음 언해본』은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세종어제훈민정음」 부분을 가리킨다. 「세종어제훈민정음」은 『해례본』의 첫 부분인 「예의」를 우리말로 해석하여 싣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월인석보』에 붙어 있는 부분이나, 이 부분만 따로 제책되어 유통되기도 했는데 대개 『언해본』들은 이런 경우이다. 현재 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종실록』 병인년(1446) 9월 기사에 『훈민정음』(해례본)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실으면서 그 첫 부분인 「예의」를 요약한 내용과 마지막 부분인 정인지의 서문을 함께 싣고 있다. 따라서 이 『세종실록』의 병인년 기사를 『훈민정음』의 『실록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훈민정음예의(訓民正音例義)」라고 하면 『세종실록』의 이 병인년 기사의 해당 내용을 지칭하기도 한다. 『해례본』과 『언해본』,『실록본』의 가장 큰 차이는 해례부분의 유무이다. 해례는 『해례본』 에만 수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창제로 우리말의 전면적인 표기가 가능해졌지만 문자 보급 수단 및 교육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훈민정음의 보급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된 방법은 주로 한문 문헌에 대한 우리말 번역, 즉 언해나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글을 짓는 이른바 정음 문헌의 간행이었다. 이 문헌들은 주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연산군대에 이르는 약 50년간 집중간행 되었는데 대체로 두 가지의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언해나 정음문헌 대부분이 왕실이나 간경도감(刊經都監)같은 국가기관 주도로 만든 관판본이었다는 것이다. 즉 간행사업은 국가와 왕실 주도로 이루어진 국가의 문화적 역량이 결집된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15~16세기에 간행된 언해나 정음문헌은 전체 간행분 중 불경(佛經)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1447), 『석보상절(釋譜詳節)』(1447),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1447), 『월인석보(月印釋譜)』(1459),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1459), 활자본 『아미타경언해(阿彌陀經諺解)』(1461), 활자본『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 목판본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2),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1463),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1464) 등이 대표적이며 현재 40여종에 이르는 간본이 밝혀진 상태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2건의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1443년(세종 25) 계해년 12월 기사와 1446년(세종 28) 병인년 9월 29일 기사가 그것이다. 여기에 한 건을 더하자면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 적힌 ‘1446년(세종28) (음력)9월 상한(上澣)’이라는 날짜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을 정확히 언제 완성하고 반포하였는가와 관련하여는 『실록』을 비롯한 그 어디에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세종실록』의 기사에 의거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문자가 창제된 것은 1443년 계해년이고, 그 해설서인 『해례본』이 완성된 것을 1446년 병인년으로 보는 것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글날인 10월 9일은, 『해례본』 정인지 서문의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의 상한이니 대략 10월 9일쯤으로 잡자고 하여 정해진 날짜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어린이 누리집

한글날은 왜 10월 9일 인가요?

한글날은 세종이 1446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리는 날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언제부터인가 원본이 보이지 않다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라 훈민정음 반포일을 음력 9월 29일로 정해 1926년부터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 주도로 한글날 기념식을 치렀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하면 세종은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이 책을 펴냈습니다. ‘상순’은 1일부터 10일까지를 뜻하는데, 조선어학회에서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정했고, 1945년부터 이를 양력으로 바꿔 10월 9일에 기념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기념일’이라 하여 한글 창제를 기념합니다. 대한민국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북한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을 기념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자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달’이라고만 되어 있어 정확하게 12월 어느 날에 새 문자가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음력 12월 중간인 12월 15일을 훈민정음 창제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바꾼 1월 15일을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나요?

세종대왕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에는 우리말을 옮겨 쓸 글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 썼습니다. 그런데 말과 글이 다른 데다 한자가 어려워 소통하기 힘들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새 문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한 세종대왕은 백성들도 책을 읽어 훌륭한 분들의 가르침과 생활 정보, 올바른 생활 태도 등을 배우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한자로 된 책은 한자를 익힌 사람들만 읽을 수 있으니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누구나 쉽게 익혀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새로운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한자음뿐 아니라 외국말도 옮겨 적을 수 있게 했습니다. 훈민정음은 이처럼 여러 가지 목적과 기능을 가진 글자입니다.

창제(1443) 전 훈민정음 관련 주요 사건

창제(1443) 전 훈민정음 관련 주요 사건 17년 전 1426년 법은 나누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법률문이 어렵고 복잡한 한문과 이두로 되어 있음을 세종이 지적하였다. 15년 전 1428년 김화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세종은 <효행록> 같은 책을 만들어 백성을 교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11년 전 1432년 세종이 한문으로 된 법조문을 백성들에게 좀 더 쉽게 알릴 수 있는 방안을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9년 전 1434년 세종이 한자를 모르는 어린아이와 민가의 여성들까지도 책 내용을 알게 하기 위해 그림풀이가 덧붙은 <삼강행실>을 인쇄하여 종친과 신하들 및 여러 도에 내려 주었다. 1년 전 1442년 <용비어천가>를 짓고자 세종이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자료 수집을 명하였다. 1443년 12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이미지 확대보기

《훈민정음》 해례본은 무엇인가요?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입니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고 그에 대한 자세한 해설(풀이)과 용례(보기)를 붙여 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특별히 ‘해설’과 ‘용례’가 갖추어져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을 만든 목적과 근본 뜻, 창제원리, 역사적 의미를 비롯해 새 문자의 다양한 예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은 세종대왕이 지었고, 뒷부분은 집현전 학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여덟 명이 함께 지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쓴 부분을 ‘정음편’ 또는 ‘예의편’이라 부르고, 신하들이 풀어 쓴 부분을 ‘정음해례편’ 또는 ‘해례편’이라고 부릅니다. 정음편(본문)은 ‘세종대왕의 서문’과 ‘예의’로, 정음해례편은 ‘해례’와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 세종은 ‘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냈는데(세종실록과 훈민정음해례의 끝에 실린 정인지의 꼬리글에 따름), 이러한 독창적인 글자를 만든 일은 세계 역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답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펴낸 초간본(목판본)은 오랜 세월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책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들여 지금은 간송미술관(서울 성북구)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62년에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무엇인가요?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서문과 예의 부분만을 새로 만든 글자로 번역하여 펴낸 책입니다. 이런 책을 ‘언해본’이라고 부릅니다.

이 언해본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종 때 번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언해본은 1459년(세조 5년)에 나온 <월인석보> 권1.2 앞에 실린 것입니다. <월인석보>는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한데 엮은 책입니다.

이 언해본은 목판으로 인쇄했으며 반듯한 글꼴로 된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부드러운 글꼴로 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을 널리 퍼뜨린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으로 우리말을 쓸 수 있는 방법을 깨쳤으며, 그 문자의 힘은 역사를 바꾸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세종학당은 어떤 곳인가요?

82개국 234개소 아시아(26개국 129개소), 유럽(22개국 55개소), 아프리카(12개국 12개소), 오세아니아(2개국 4개소), 아메리카(15개국 34개소) (2021.06. 기준)

정부는 세계인이 한국과 한국어를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주려고 2007년부터 해외에서 세종학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종학당은 2021년 현재 전 세계 82개국 234개 지역에서 운영되며, 한국어와 한글, 한국 문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종학당은 국가에서 개발한 표준화된 한국어 교육을 제공합니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 교육과정과 표준 교재인 《세종한국어》, 지침서와 세종학당재단에서 만든 익힘책 등을 보급합니다. 또한 한국 전통 놀이 도구, 문방사우, 전통 악기 등의 교구를 제작・보급하고 국립국악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과 협력하여 문화 전문가를 파견하는 등 세종학당의 한국 문화 수업을 지원합니다.

세종학당이 없는 지역의 세계인은 누리집 누리-세종학당(www.sejonghakdang.org)에서 한글과 한국어, 한국 문화를 혼자서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또한

누리- 세종학당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사진과 동영상, 애니메이션 등 교육 자료들도 무료로 제공합니다.

● 온라인 가나다 http://www.korean.go.kr

세종은 언제부터 훈민정음 창제를 고민했을까?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흔히 세종은 10여년의 비밀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한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사내 연구원이 지적(홍사내, 2013.11.9., 세종은 언문 창제 작업을 언제부터 했을까? 얼레빗 )했듯이 그런 추정은 대체로 옳다고 본다. 본격적인 연구 기간을 말한다면 그런 추정이 맞지만 실제 새 문자에 대한 고민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감을 글쓴이는 “김슬옹(2011).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개정판)》. 지식산업사, 1장, 2장”에서 밝힌 바 있다.

▲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김슬옹, 지식산업사

훈민정음 창제 17년 전인 1426년 10월 27일(세종 8년) 세종이 “법은 함께 하는 것(人法竝用)”임을 강조하며, 법률문이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을 우리식으로 일부 고친 표기체)로 되어 있어 문신조차 알기 어렵고 더욱이 배우는 학생들은 더욱 어려움을 지적했다. 법률문과 같은 꼭 필요한 정보의 소통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훈민정음 창제 11년 전인 1432년 11월 7일(세종 14년)에도 보인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식 한문체인 이두문으로 번역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문제를 의논한 것이다. 허조가 백성들이 문자(이두문)를 알면 부작용이 커진다며 반대하였으나 임금은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옛기록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례를 조사하도록 했다.

두 사건에서는 읽기 문제만 언급했지만 세종은 더 나아가 한자 모르는 백성들의 표현 문제로까지 발전시켰음을 1444년의 최만리 외 6인의 언문 상소에서 드러난다. 이 상소에서 이 기록과 직접 관련된 세종 임금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세종실록》1444년 2월 20일,

이러한 글자에 대한 고민과 새 글자 창제 동기와 목표는 1446년 9월 상한에 출판된 《훈민정음》해례본 어제(세종) 서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 《훈민정음》해례본 어제(세종) 서문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은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 창제 15년 전인 1428년 10월 3일(세종 10년)에는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집현전에 교화를 위해 ≪효행록≫이란 책(한문)을 펴내라고 하였다. 도덕 윤리는 일벌백계로 안 되므로 책을 통해 근본적인 교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9년 전인 1434년(세종 16년) 4월 27일에 1432년에 그림풀이를 덧붙여 편찬을 끝낸 ≪삼강행실≫을 인쇄하여 널리 펴서 한문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민가의 여성들까지도 책 내용을 알게 세종이 지시하였고 이 해 11월 24일에는 이 책을 종친과 신하들 및 여러 도에 내려 주었다.

▲ 세종이 그림 풀이를 덧붙여 펴낸 ≪삼강행실≫ 한문본

이러한 고민 역시 창제 후 최만리 외 언문 상소로 인한 논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사관은 세종이 언문 상소의 핵심 인물인 정창손에게 직접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予若以諺文譯 『三綱行實』 ,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세종실록》1444년 2월 20일

이에 대해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반박하여 책과 문자의 효용성을 아주 낮게 평가하였다. 한문책으로 성인의 도를 깨우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사대부 학자로서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용렬한 선비이다.”라고 조금 과격해 보이는 말로 꾸짖었다. 웬만하면 벌을 잘 안 주는 세종의 정치 스타일로 볼 때 크게 화를 냈음이 분명하다.

결국 쉬운 책을 통한 세종의 교화 의지와 정책 의도는 세종이 죽은 뒤에 펴낸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까지 다음과 같이 수록된다. 세종의 유지를 받든 세조와 성종, 최항 등이 《경국대전》 편찬에 직접 매달렸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사족(士族))의 가장(家長)․부로(父老) 혹은 교수(敎授)․훈도(訓導)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만약 대의(大義)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서울은 한성부(漢城府)가, 지방은 관찰사(觀察使)가 왕에게 보고하여 상(賞)을 준다.”(三綱行實飜以諺文令京外士族家長父老或其敎授訓導等敎誨婦女小子使之曉解若能通大義有操行卓異者京漢城府外觀察使啓聞行實) 《경국대전》 권 3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42년 3일 1일(세종 24년)에 용비어천가를 짓고자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자료 수집을 세종이 명하였지만 이 또한 결국 노래를 문자로 적어 홍보하는 의도에 맞닿아 있으므로 책을 통한 교화 문제와 이어진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표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세종의 가상 독백체로 풀어보면 이렇다.

“입으로 하는 말과 쓰는 글말(한문)이 달라도 아주 다르다. 한문과 이두문은 똑똑한 양반(문신)들조차 어렵다. 더욱이 양반들만이 조선의 백성은 아니다. 백성은 하늘이다. 백성이 중심이 되는 민본의 나라를 만들자. 그런 나라를 해서는 중요한 정보와 지식을 가르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책이 중요하다.

그런데 양반 아닌 백성들은 한문책을 모른다. 그 한자 모르는 백성들이 책을 보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한문과 이두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쉬운 글자를 만들자. 서당에 다닐 수 없는 백성조차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자. 그런 글자는 말소리의 이치를 반영한 소리글자밖에 없다. 소리글자로는 인도의 산스크리트글자와 몽골의 파스파 글자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글자들은 반쪽 소리글자다. 이미 일상생활에서는 죽은 글자가 되지 않았는가.

섬세하게 발달되어 있는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가 없다. 이왕 만드는 소리글자, 자연의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바른 소리글자를 만들자. 바로 ‘정음’이다. 정음의 이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말소리가 나오는 실체를 관찰해서 그 원리를 반영하면 최고의 글자가 될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한테 연구해서 만들게 하면 어떨까. 그건 불가능하다. 나의 이런 의도를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이해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한문 기득권 때문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완벽하게 글자를 만들고 나서 나의 뜻에 동의하는 학사들과 조용히 후속 연구를 진행하자. 실제 새 글자를 보면 반대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한자 배우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렇게 하여 세종은 비밀 연구 끝에 28자를 창제한 뒤 1443년 12월 어느 날 조용히 창제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엄청난 창제 사실을 거창하게 알릴 수 없었을 것이고 집현전 일부 학사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알렸을 것이고 그래서 창제한 특정 날짜를 알 수 없었던 사관들은 훗날 12월 마지막 날짜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로되, 쪼개면 초성ㆍ중성ㆍ종성이 되지만, 이 셋을 합쳐야 글자(음절)가 이루어진다. 무릇 중국 한자나 우리나라 말이나 모두 능히 쓸 수 있으니, 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요리조리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컫는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사관들은 훈민정음의 실체와 가치를 가장 간결한 기록으로 차분하게 역사에 남겼다.

훈민정음 창제 전 문자 관련 주요 사건 흐름

◆ 17년 전→ 1426년 10월 27일(세종 8년) 세종이 법은 함께 하는 것(人法竝用)임을 강조하며, 법률문이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을 우리식으로 일부 고친 표기체)로 되어 있어 문신조차 알기 어렵고 더욱이 배우는 학생들은 더욱 큰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다.

◆ 15년 전→ 1428년 10월 3일(세종 10년)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을 보고 세종이 집현전에 교화를 위해 ≪효행록≫이란 책(한문)을 펴내도록 하다.

◆ 11년 전→ 1432년 11월 7일(세종 14년)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식 한문체인 이두문으로 번역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허조가 백성들이 문자(이두문)를 알면 부작용이 커 반대하였으나 임금은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옛기록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다.

◆ 9년 전→ 1434년(세종 16년) 4월 27일 1432년에 그림풀이를 덧붙여 편찬을 끝낸 ≪삼강행실≫을 인쇄하여 널리 펴서 한문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민가의 여성들까지도 책 내용을 알게 세종이 지시하다. * 11월 24일에 ≪삼강행실≫을 종친과 신하들 및 여러 도에 내려 주다.

◆ 1년 전→ 1442년 3일 1일(세종 24년) 용비어천가를 짓고자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자료 수집을 세종이 명하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문 문학의 본격적 개화의 길을 열었다. 정음의 반포에 앞서 1445년 한글로 된 최초의 문학 작품인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역성 혁명을 합리화하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총 125장의 악장체 영웅서사시이다. 단편적 사실을 각 장별로 서술하고 있어 본격 영웅서사시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국문 서사시의 선편을 잡은 작품이다.

1447년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석보상절』은 『석가보 釋迦譜』의 내용을 국문으로 옮긴 것인데, 후대의 불경언해류와는 달리 아름다운 우리 문체로 된 산문 서사문학의 최초의 작품이다. 『석보상절』을 본 세종은 같은 해인 1447년 석가의 공덕을 예찬하여 친히 악장체의 장편시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후에 세조는 1459년 위의 두 작품을 합편하여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한 줄거리의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그 내용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대목을 그 다음에 실었다. 그러나 두 작품을 합편하면서 권의 편차와 문장에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이상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 국가 혹은 왕가가 주도하여 제작한 국문 문학 작품으로, 국문의 문학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험, 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문의 문학적 기능이 관의 주도 아래 조심스럽게 실험,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에 심취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이를 외면하고 여전히 한문을 문학 수단으로 삼았다.

일반 국민의 계몽과 교화를 위한 훈계서류의 언해와 세조와 같은 신심 깊은 군왕의 각별한 배려로 추진된 일련의 불경 언해 사업은 국문의 서사 기능을 더욱 개발하여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이루어진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언해(1464), 『선종영가집언해 禪宗永嘉集諺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심경언해 心經諺解』·『아미타경언해 阿彌陀經諺解』·『원각경언해 圓覺經諺解』·『목우자수심결언해 牧牛子修心訣諺解』, 성종 때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발원으로 인출한 『법화경언해』·『능엄경언해』·『원각경언해』 등, 그리고 『내훈』의 간행은 그 자체가 반드시 문학적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국문의 문학적 기능을 여러모로 확인시켜 주었다.

1481년 『두시언해 杜詩諺解』가 간행되고, 1484년 『연주시격 聯珠詩格』과 『황산곡집 黃山谷集』이 언해됨으로써 한시의 국역을 통하여 국문의 문학어로서의 기능이 거듭 확인되었다. 1493년 성현 등이 찬진한 『악학궤범 樂學軌範』은 「동동 動動」·「처용가 處容歌」·「삼진작 三眞勺」 등 고려의 가요를 국문으로 정착시켜 우리 가요 국문화의 본보기를 보였다.

성종 때 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 賞春曲」이 나왔고, 이어 1498년 조위(曺偉)의 「만분가 萬憤歌」가 나왔다. 16세기 초두 연산군의 언문 박해가 시작되면서 모처럼의 국문 문학 활동은 한동안 침체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 각종 언해 사업이 재개되면서 국문에 의한 문학 창작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김구(金絿)의 「화전별곡」, 주세붕(周世鵬)의 「도덕가」·「오륜가」, 양사언(楊士彦)의 「남정기」 등 가사 작품이 창작되는 한편, 이현보(李賢輔)는 「어부가」·「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 등의 단가를 지었다.

여말 이래의 시조 문학의 전통은 국문의 구사를 통해 조선에서 더욱 그 지반을 다져 나갔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을 비롯하여 송순(宋純)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 유희춘(柳希春)의 「헌근가 獻芹歌」·「감군은가 感君恩歌」, 정철(鄭澈)의 「훈민가 訓民歌」·「장진주사 將進酒辭」,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 早紅枾歌」,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 江湖戀君歌」 등이 나왔다.

광해군 때 윤선도(尹善道)는 「견회요 遣懷謠」·「우후요 雨後謠」·「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몽천요 夢天謠」 등 국문 문학의 정수로 일컬을 만한 수작을 내놓아 순수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문학어로서의 국어의 면목을 드러내었다. 이 밖에도 시조를 남긴 이는 이이(李珥)·권호문(權好文)·이정환(李廷煥)·김상용(金尙容)·황진이(黃眞伊)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다.

가사 문학도 시조에 못지 않게 사대부들이 즐겨 지었던 국문 문학의 장르였다. 조선 초기에 국문이 소외되었던 것과는 달리, 중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나 문학 담당 계층인 사대부들의 국문에 대한 인식이 다소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국문 문학에 대한 문학으로서의 인식은 그다지 철저했던 것 같지는 않고, 득의(得意)의 자리나 실의(失意)의 자리에서 손쉽게 소회의 일단을 토로하고 울적한 심사를 해소할 수 있는 표출 수단, 아니면 ‘몽매한 백성’을 깨우쳐 타이르는 교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들이 부른 국문 가요는 대부분 연향(宴享)의 자리에서 가창했거나 배소(配所)에서 읊조렸던 것이다.

가사 문학에서는 16세기 후기 정철의 「성산별곡 星山別曲」·「관동별곡 關東別曲」·「사미인곡 思美人曲」·「속미인곡 續美人曲」 등의 작품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관동별곡」을 비롯한 그의 가사 3편은 일찍부터 ‘좌해진문장(左海眞文章)’이라는 극찬을 들을 만큼 가사 문학의 수준을 한 층 높이 끌어올린 작품이다. 정철에 이르러 가사 문학은 국문학의 진수를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명종 때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 關西別曲」, 양사언의 「미인별곡 美人別曲」, 이황의 「환산별곡 還山別曲」·「금보가 琴譜歌」, 선조 때 이이의 「자경별곡 自警別曲」, 송순의 「면앙정가 俛仰亭歌」,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 雇工答主人歌」, 휴정(休靜)의 「회심곡 回心曲」, 허강(許橿)의 「서호별곡 西湖別曲」, 이현(李俔)의 「백상루별곡 百祥樓別曲」, 박인로의 「태평사 太平詞」·「선상탄 船上嘆」·「사제곡 莎堤曲」·「누항사 陋巷詞」 등이 지어졌고, 그 뒤에도 광해군 때 조우인(曺友仁)의 「산새곡 山塞曲」·「매호별곡 梅湖別曲」·「자도가 自悼歌」·「관동별곡 關東別曲」, 인조 때 박인로의 「영남가 嶺南歌」 등 사대부의 가사 작품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불교 경전과 유교 경전의 언역 사업에 이어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 등의 번역(15세기 후기 및 1518년), 『열녀전 列女傳』의 언해(1543), 불교 영험담류(佛敎靈驗譚類)의 언해 등은 국문에 의한 설화류의 서술 가능성을 더욱 성숙시켜 갔다.

중종 6년(1511) 채수(蔡壽)가 지은 「설공찬전 薛公瓚傳」(한문)은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금서 처분되었는데, 1996년 그 국역본 「설공찬전」이 발굴(이복규)됨으로써 역어체 국문 소설의 소설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 연간에 보우(普雨)가 찬술한 것으로 보이는 『권념요록 勸念要錄』은 11편의 불교 영험담을 한문과 국역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짧은 10편은 중국에 원전을 두고 있는 설화이나, 맨 앞에 실린 「왕랑반혼전 王郎返魂傳」은 고려간본 『아미타경 阿彌陀經』(1304)에 수록된 「왕랑전 王郞傳」(한문)이 원전으로 간주되는 바, 이는 『궁원집 窮原集』 인문(引文)이다. 보우는 한문본 「왕랑전」을 윤색, 증연하고 다시 이를 국문으로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발생의 국문 소설은 한문을 발판으로 하여, 이를 번역함으로써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의 역어체 국문 문체는 문학어로서 아직 미흡한 단계의 생경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인 국문 소설의 문체는 광해군 때 허균(許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 洪吉童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난정 때의 인목대비(仁穆大妃) 서궁유폐사건의 전말을 그린 「계축일기 癸丑日記」는 궁인이 쓴 실기인 듯한데, 생생한 묘사와 정감 어린 문체는 국문 서사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역시 궁인의 작으로 보이는 「산성일기 山城日記」는 국문으로 쓴 실기로, 같은 제재를 다룬 허구적 수법의 전쟁 소설과 그 서술의 사실성에 있어 대조된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문 서사문학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에 이어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 九雲夢」·「사씨남정기 謝氏南征記」 등 비교적 문학성 높은 본격소설이 국문으로 창작되었다. 「구운몽」은 국문·한문 양본이 전하는데, 한문 원본설이 지배적이다.

18세기 이후 국문 문학은 괄목할 만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시가 분야에서는 『청구영언』·『해동가요 海東歌謠』·『고금가곡 古今歌曲』 등 가곡집의 편찬에서 보이듯 국문 가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시조에서는 서사성과 풍자성이 강한 사설시조가 출현하게 되었고, 가사에서는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가사 작품이 나왔다. 한편, 안조환(安肇煥)의 가사 「만언사 萬言詞」, 이세보(李世輔)의 「신도일록 薪島日錄」 등 유배 생활의 신고를 다룬 국문 작품도 있다.

소설은 군담류(軍談類)·염정류(艶情類)·전기류(傳奇類) 등 각종 작품들이 출현하였다. 궁정문학으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 閑中錄」은 사실적인 필치와 세련된 조사(措辭) 등 실로 국문문학의 백미편이라 이를 만하다.

19세기 중엽 한산거사(漢山居士)의 장편 가사 「한양가 漢陽歌」는 수도 한양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봉건 사회의 생태를 은연중에 풍자하고 있다. 이 무렵 경판(京板)·완판(完板)의 방각소설이 간행되면서 국문소설은 독자의 폭을 점차로 넓혀갔다.

1906년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소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언문 일치의 국문 문체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국문 소설도 신소설과 함께 공존하면서 새 인쇄술에 의한 ‘딱지본’으로 꽤 널리 보급되었다.

가곡집으로는 『남훈태평가 南薰太平歌』·『여창가요록 女唱歌謠錄』·『가곡원류』 등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국문 가요를 여러모로 총정리한 것이었고, 개인 시조집으로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이세보(李世輔)의 『풍아 風雅』가 나왔다.

시조에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담으려 하였다. 가사 문학도 전통적인 국문 문학이 새로운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변신을 경험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새로운 국문 문학 양식이 태어나고 있었다. 신소설·신시·창가 등이 국문 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늠하며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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