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 의 난 | (100) 정조의 최측근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 홍국영 상위 240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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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 나무위키:대문

조선 영조, 정조 시대의 정치가. 최초의 세도정치로 유명하다. 자는 덕로(德老). 본관은 풍산 홍씨.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는 10촌 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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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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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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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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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복심에서 역적으로, 홍국영…권력은 방심을 … – 매일경제

홍국영의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홍인한, 홍봉한, 정후겸 등이 숙청되고 난 뒤 주인 없는 당이 된 노론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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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1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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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정조의 비서실장’ 홍국영은 어떻게 몰락했나

여기에 정순왕후의 오빠로 당대 세력가였던 김귀주는 8촌 사이였으니, 영조ㆍ정조, 혜경궁 홍씨, 경주김씨 가문 등이 모두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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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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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의 난? – 네이버 블로그

왜 자꾸 멀쩡한 홍국영을 난을 일으킨 사람으로 모는지.. 김귀주(정순왕후의 오빠), 정후겸, 홍인한을 축출시켜 정조의 왕권강화에 큰 도움을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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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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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사약받고 죽는 ‘홍국영의 난’ 으로 궤도 진입

MBC 인기 월화 드라마 ‘이산’에서 홍국영이 끝없는 야심으로 정조(이산)와 분열하는 모습이 시작됐다.훗날 ‘홍국영의 난’이라 불리는 정조의 홍국영 숙청이 시작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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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onsumernews.co.kr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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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최측근이자 최고의 실권자 <홍국영> – 무님의 역사 이야기

사실상 홍국영이 물러난 직접적인 계기는, 1779년(정조3년) 5월에 그의 누이 원빈이 사망한 후 그가 정조의 왕비인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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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ykk.tistory.com

Date Published: 11/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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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정조의 최측근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 홍국영
(100) 정조의 최측근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 홍국영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홍국영 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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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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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1])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시절 때부터 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생애 초반 [ 편집 ]

아버지는 홍낙춘이고, 어머니는 우봉이씨로 이유(李維)의 딸이다. 아버지 홍낙춘은 당시에는 관직이 없었고 후일 딸이 원빈으로 간택되면서 가감역,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게 된다. 그는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영안위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장남 홍만용은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 형제와 홍상한의 증조부였고, 홍주원의 차남 홍만형은 홍국영의 5대조가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기준 멀지 않은 친척이었던 홍인한과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대개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고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낙춘은 원빈이 후궁이 되기 전에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김씨[2]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혜경궁 홍씨는 그가 예쁘장한 외모였다며 동궁(세손 산)이 그를 얼굴도 어여쁘고 슬기롭고 민첩하다 여겼다 한다. 심낙수의 《은파산고 (恩坡散稿)》에는 얼굴 생김새가 준수했다 한다. 심낙수는 은파산고에 그가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세손이 그를 총애하면서 다른 동궁 관료들을 멀리했다며, 사나이가 첩에게 혹한 모양이라고 품평했다.

그는 친척인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혜경궁에 의하면 홍국영의 백부 홍낙순과 자신의 숙부 홍인한이 서로 원수처럼 여긴 것, 홍인한이 홍국영을 어떤 이유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홍인한이 홍국영을 꾸짖은 일, 홍국영이 아버지 홍낙춘의 관직을 홍봉한에게 여러번 청탁하자, 홍봉한은 상중이라서 거절하다가 홍인한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홍인한이 편지에 홍국영을 미쳤다고 적은 것을 홍국영이 보게 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홍인한은 홍국영에게 영안위 후손에 이런 물건이 나왔느냐며 혹평했고, 이를 듣고 홍국영은 앙심을 품었다 한다. 홍인한이 세손을 반대하면서, 세손을 보호하던 홍국영은 홍인한 역시 공격했다.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홍국영, 화완옹주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었다.

동궁 궁료 시절 [ 편집 ]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3]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4]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5]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집권기 [ 편집 ]

정조의 오른 날개 [ 편집 ]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정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일당을 공격, 숙청했다. 이어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이 조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흔히 홍인한-정후겸이 정조의 즉위를 막았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와전된 내용이고, 이 책에서 밝힌 공식적인 죄명은 첫째,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은 것과 둘째, 세손의 오른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책에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과정을 도운 1등공신(소위 동덕회원同德會員)이자 최측신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조1년(1777년) 홍상간, 홍계능 등이 모의하여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처분하면서 다시 공초 내용을 《속명의록》에 수록하여 편찬하였다. 속명의록의 죄인들 역시 홍국영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집안의 여인들까지도 홍국영의 저주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집권기 활동 [ 편집 ]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6],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 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7] 그외 각종 관청에서 평정, 관리를 담당하는 제거(提擧)를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다한 제거 겸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정조 초기의 가장 주요한 사업이라면 규장각 설치가 꼽히는데, 정조의 최측신이었던 홍국영 역시 규장각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된 관료였으며, 유명한 규장각 서얼 사검서관의 서용 역시 홍국영의 천거와 설득으로 이뤄졌다. 다만 홍국영 축출 후 규장각 내각일기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삭제하여 새로 작성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홍국영이 규장각에서 실제 이행했던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외척 [ 편집 ]

1778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다. 이때 원빈 홍씨의 지위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후일 이 모든 이례적인 처사는 모두 홍국영의 세도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식으로 설명되게 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자교(이 경우 후궁 간택령)를 내리게 했다”라고 쓰고 있다. 《한중록》에서는 이어 원빈의 입궁에 대해,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식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정조)어제인숙원빈행장》(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원빈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에 대해 각별한 정의(情誼)를 나타냈다고 한다.[8] 《순조실록 혜경궁 행장(김조순 저)》에서 혜경궁은 원빈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지녔던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 강조한 대목이 있다.[9] 홍국영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는 원빈의 입궐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혜경궁은 효의왕후 쪽인 인상을 준다.[10]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元嬪 洪氏)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11].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몰락과 죽음 [ 편집 ]

은퇴와 유배 [ 편집 ]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12][13] 이때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14]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15]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고 숙위소를 혁파시켰으나 동시에 그의 백부 홍낙순(洪樂純)을 정승에 임명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계속 건재했으며 그 자신도 계속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에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1780년 1월에는 홍낙순이 파직과 문외출송되고, 다음달 26일 김종수의 탄핵상소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방출 처분을 받았다. 김종수의 탄핵 상소를 시작으로 하여 홍국영에 관한 탄핵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1780년 2월 강원도 횡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강릉으로 유배되었던 홍국영은 결국 이듬해인 1781년 4월 5일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몰락 이유 [ 편집 ]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인) 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정조의 이복 아우)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사후 [ 편집 ]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는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1977년 발간된 《전국문화재총람》에는 〈강릉 전 홍국영묘〉라는 제목으로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설명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묘소의 넓이는 약 50평, 크기는 약 1미터 정도로 추정했으며, 1972년 후손들이 발견하였으나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강릉종합경기장 뒷편 교동 수리골이라고 하는 마을이라고 한다. 수리골은 강릉종합경기장에서 북쪽방향 경포호 방향으로 가는 길 주변의 부락명이다. 이 지역은 뒤에 1985년 10월 강릉 종합 운동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은 홍국영 묘소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묘소 인근에는 홍국영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이 전하는데, 명확하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

강릉시 노암동 300번지에는 홍국영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김윤기 가옥이 있는데, 강희 53년 갑오(1714년)에 건립했다 한다. 이 가옥에서 홍국영이 실제 거주했는지, 얼마나 거주했는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노암동의 김윤기 가옥에는 홍국영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백일홍과 소나무가 전한다. 김윤기 가옥은 1985년 1월 17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8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 [ 편집 ]

관련 작품 [ 편집 ]

드라마 [ 편집 ]

영화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정조의 복심에서 역적으로, 홍국영…권력은 방심을, 방심은 오만을, 오만은 파국을 부른다

정조 시대 세도가 홍국영은 영웅도, 위대한 학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부상과 몰락이 극적이기 때문이다. 홍국영은 정조 초기 4년 동안 최고의 권세를 누리다가 갑자기 버림받았다. 한때 정조의 ‘모든 것’이었던 홍국영의 추락에서 우리는 ‘실패한 처세학’을 배운다. 그것은 1인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수많은 역사 속 2인자의 처세가 결코 만만한 교훈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만, 방심 그리고 ‘이 정도까지는 괜찮겠지’라는 자기 판단이 2인자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새삼 알 수 있다.조선 왕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군주로 정조를 꼽을 수 있다. 아버지 사도 세자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었고, 할아버지 영조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은 끊임없이 세손을 흔들었고 급기야 암살을 꾀하기도 했다. 이 모진 고초와 위협을 딛고 정조는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선언했다. “나는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이처럼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겪을 때 유일하게 그의 힘이 되어준 인물이 있다. 바로 홍국영이다.홍국영은 정조의 최측근 가신이었다. 그는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하고, 보위했다. 정조는 왕위에 올라 “그대가 있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라고 홍국영을 칭찬했고 “그대가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것으로도 그대의 죄를 묻지 않겠다”라며 홍국영을 신임했다. 그뿐인가. “홍국영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은 바로 나를 반대하는 역심으로 여기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정조는 홍국영을 지극히 총애했다.모든 권력은 홍국영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직책은 정3품 도승지였지만 의정부 삼정승을 비롯해 육조판서도 홍국영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국정은 정조에게 보고되기 전, 무조건 홍국영이 먼저 살폈고 조정은 홍국영의 측근 세력으로 가득 찼다. 또한 홍국영은 도승지로서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고, 금위대장, 숙위대장, 훈련대장을 겸직하며 왕의 호위는 물론 군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그는 약원부제조의 직함으로 왕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모든 탕약을 관리했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수도방위사령관, 경찰청장, 대통령 주치의를 겸직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조의 공식적인 업무 보좌는 물론 ‘심기 경호’까지 담당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조는 홍국영만을 찾고, 신임했다. 즉 정조 초창기 조선의 실제적 권력은 홍국영이 장악하고 있었다.하지만 홍국영은 과도한 욕심을 부렸다. 왕의 후계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정조의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779년 9월26일, 이 날은 홍국영이 정조를 처음 만난 지 딱 7년이 되는 날이다. 홍국영은 사직 상소를 올리고 정계를 떠났다. 물론 형식은 홍국영의 자진 사퇴였지만 실상은 정조의 명령이었다. 홍국영은 곧 자신의 지위가 복권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정조는 홍국영을 찾지 않았다. 정조에게는 매일 ‘대역죄인 홍국영을 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정조는 차마 그를 벌하지 못하고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홍국영은 오지인 강원도 횡성, 강릉으로 떠돌았다. 그리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을 가까이하다 1780년에 죽는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불꽃처럼 화려했지만 너무나 짧았던 권력이었다.역사는 질문을 던진다. 홍국영은 정조에게 사냥이 끝나면 버려지는 사냥개처럼 이른바 ‘팽’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정조의 변함없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홍국영의 과도한 권력욕이 그의 몰락과 죽음을 자초한 것일까. 사실 정답은 없다.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할 뿐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정조 즉위 후 약 4년간 홍국영이 보여준 행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권력욕, 탐욕, 방심, 오만 등이다.최고 권력자인 왕은 뜨거운 태양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불타 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 홍국영은 한마디로 불타 죽은 것이다. 우리는 배을 수 있다. 과도한 권력, 신임 그리고 팔에 두른 완장의 달콤함과 함께 권력과 신임에 취해 경계를 넘어서는 방심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를.▶정조가 ‘의리의 주인’이라 칭찬했던 홍국영의 충심홍국영은 1748년에 태어났다. 1752년생인 정조보다 4살 위이다. 풍산 홍 씨인 그의 집안은 명문거족이었다. 그는 선조가 아끼던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6대 손으로 어머니는 경주 김 씨 가문으로 정순왕후와 인척이고 정조와도 12촌간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홍국영은 준수한 외모에 시나 노래도 잘하고 언변도 좋았다고 한다. 또한 눈치도 빠르고, 정세 판단 능력도 탁월했으며 수완도 좋은, 한마디로 ‘팔방미인’ 스타일이었다.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 안에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던 나름 야망도 있는 청년이었다.홍국영은 1772년 25세에 문과 병과 11위에 급제한다. 그리 뛰어난 성적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영조는 홍국영을 직접 접한 후에 “내 손자”라 부를 정도로 총애했다. 그리고 1774년 9월26일, 홍국영은 운명적인 직책인 ‘동궁시강원 설서’로 임명된다. 살아있는 권력인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차기 권력인 세자의 측근이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이 같은 직책에 홍국영이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의 집안이 왕실과 인척관계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세손은 불안한 권력이었다. 즉 차기 임금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현재 지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홍인한, 정후겸 등의 노론 벽파는 집요하게 세손을 공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래서 ‘세손이 야망을 품고 에서 ‘제왕학’을 특히 공부하더라‘, ‘가끔 시정에 나가 잡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더라’ 등등 이른바 당시 생산되는 ‘찌라시’의 모든 내용이 세손을 비방하는 것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심지어 노론은 세손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행동에 옮기는’ 과감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세손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였다. 이때 홍국영만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세손은 점점 홍국영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를 통해 민심의 동향을 파악했고, 조정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손이 홍국영을 신임하게 된 계기는 홍국영이 특정 당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세손만을 지극정성의 마음으로 받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손은 홍국영을 통해 민심과 궐내의 정보를 얻어 이를 통해 정세를 분석하고 영조의 변덕과 노론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노론 벽파는 이를 거세게 반대했고 세손 역시 흔들렸다. 이때 세손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이를 대처해야 합니다’라고 충언을 다한 측근이 바로 홍국영이다. 공교롭게도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지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세손은 조선의 절대 권력자인 왕이 된 것이다.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한다. 그리고 그해 7월 홍국영은 도승지로 승진한다.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정조는 첫 숙청을 시작한다. 뿌리 깊은 노론 권력에 칼을 댄 것이다. 목표는 홍인한, 정후겸이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죄목이 붙었다. 첫째는 정조의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반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홍국영을 제거하려 음모를 꾸미고 공격했다는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홍국영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정조는 만천하에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과시했다. “홍인한, 정후겸 등의 공격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호한 사람이 바로 홍국영으로 그는 ‘의리의 주인’이다. 그에게 1등 공신의 작위를 내린다.” 홍국영은 그야말로 호랑이를 등에 날개를 타고 오른 셈이었다. 당시 홍국영의 지위는 겸직이 허다했다. 도승지이면서 군권도 장악했다.1776년 11월, 홍국영은 수어사,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번갈아 맡았다. 사람들은 홍국영에게 ‘세도’란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고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를 홍국영의 호칭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1777년, 경희궁 정조의 침전에 자객이 침입했다. 홍상간, 홍계능 등이 호위청 무사를 포섭해 정조를 죽이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자신의 호위부대를 개편했다. 반역에 가담한 병사 1000명, 3청 규모의 호위청을 병사 350명, 1청으로 축소하고 대신 정조의 최측근 경호부대인 숙위소를 창설, 호위군대인 장용영을 신설했다. 숙위대장은 홍국영이 임명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다. 이제 홍국영은 24시간을 정조와 함께하는 분신 같은 측근이 된 것이다.홍국영, 권력에 취해 왕의 후계구도인 ‘역린’을 건드리다권력을 손에 쥔 홍국영은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1778년 정비인 효의왕후에게서 후사가 얻지 못하던 정조에게 홍국영은 간택령을 내려 후궁을 들일 것을 청했다. 그리고 자신의 13세 된 어린 여동생을 ‘원빈 元嬪’이란 첩지를 받게 하고 구중궁궐로 들여보낸다. 원래 ‘빈’은 내명부에서 왕비 다음 품계로 왕자를 낳은 후궁이 받는 것이 관례였다. 홍국영의 여동생이 궁에 입궐하자마자 후궁의 품계 중 가장 높은 정1품 ‘빈 嬪’을 받은 것까지는 홍국영의 세도로 봐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후궁들은 감히 사용할 수 없었던 ‘근본 원 元’을 사용한 것은 ‘원빈을 장차 궁궐의 근본 즉 안주인으로 만든다’는 홍국영의 야심이 드러난 호칭인 것이다.과거, 정조 2년에 사간원 헌납 박재원이 중전의 불임증 치료하기 위해 양의를 고르자는 제안한 적이 있다. 이때 홍국영은 화를 내고 박재원을 꾸짖었다. 결국 정조도 “중전의 불임은 약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박재원의 건의를 물리쳤다. 이 같은 일화는 홍국영의 야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원빈은 궁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사망했다. 홍국영은 분노했다. 그는 이 죽음을 자연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중전 효의왕후를 의심해 왕비의 궁녀들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홍국영이 권력에 취해 2인자로서의 처신을 잃은 행동이 나온 것이다.정조는 불쾌했지만 홍국영을 문책하지 않았다. 홍국영도 한바탕 분을 풀고 멈추었어야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기어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 정조에게는 사도 세자 소생인 은언군, 은산군 두 이복동생이 있다. 은언군의 아들 이담은 상계군이었다. 정조의 조카가 되는 것이다. 홍국영은 이 상계군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군호도 상계군에서 ‘완풍군 完豊君’으로 바꾸었다.이것은 홍국영의 야망에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완’은 ‘전주, 완산군’에서 그리고 ‘풍’은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따온 것이다. 즉 임금의 가문과 자신의 가문을 동격으로 보고 그 결합의 상징인 완풍군으로 정조의 후계를 잇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홍국영은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불렀다. 홍국영은 점차 자신의 직분과 위치를 착각하기 시작했다.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이라 불렀다. 이는 영조 시대 권세를 누리고 세손을 위협하던 정후겸을 본떠 홍국영의 위세와 권력 남용이 정후겸을 능가한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홍국영의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홍인한, 홍봉한, 정후겸 등이 숙청되고 난 뒤 주인 없는 당이 된 노론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종묘의 효종 묘정에 위패를 모시고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송시열 계열의 사림파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뿐이 아니었다. 그는 정조의 대전 바로 옆에 집무실을 마련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에 의하면 ‘홍국영이 의녀나 궁녀를 자신의 집무실에 불러 어지럽고 온갖 더러운 짓을 자행했다’, 또 ‘홍국영이 방자하게도 집무실 평상 위에 누워서 버선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재상들을 맞았고 큰 소리를 쳐 사람들을 불렀다’고 기록했다. 물론 역사는 패자의 편이 아니다. 정조에게 버림받은 홍국영의 공과 덕을 배제하고 홍국영의 허물을 쉽게 기록했겠지만 홍국영이 도를 넘어선 것은 사실이다.▶#처세학 1. | 원칙으로 1인자를 지배하지 말라홍국영은 정책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서기도 했다. 규장각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에서 정조와 홍국영은 의견을 달리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야심작이자 국정 개혁을 위한 원동력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젊은 인재들을 양성했다. 세종대왕의 집현전과 같이 정조에게 규장각은 ‘싱크 탱크’였다. 정조는 규장각에 이가환, 정약용, 이제가, 박석무 등의 측근 인재들을 배치했다. 이들은 재주 있고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정조는 이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고 공부에만 전념케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했다. 규장각 제학 서명응이 묘안을 냈다. 평안도의 재원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즉 곡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몇 만석을 환곡으로 운영하면 2만냥 가까운 재원이 마련되므로 이를 규장각 운영비로 쓰자는 것이었다. 정조는 찬성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이를 반대했다.“전하, 환곡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평안도의 재원은 유사시를 위해 대비한 것이고 또한 기관의 운영을 위해 나라에서 일종의 이자 사업인 환곡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 되옵니다. 병조와 호조의 예산 안에서 규장각을 운영해야 합니다.”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홍국영이 자신의 뜻과 목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훗날 홍국영이 물러난 뒤 정조는 자신의 뜻대로 지방 관서의 환곡을 통해 규장각의 재원을 마련했다는 기록을 보면 홍국영에 대한 생각을 정조의 짐작할 수 있다.▶홍국영, 버려진 것인가, 자멸한 것인가홍국영의 행동과 처신은 보통의 신하였다면 벌써 정조에게 내쳐지기에 충분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인내심의 한계를 넘었다.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이 죽고,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은 이후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를 모함해 쫓아내려는 계획을 꾸몄다. 즉 효의왕후가 원빈을 독살했다고 증거를 조작한 것이다. 정조는 결심을 굳혔다. 1779년 9월26일, 정조와 홍국영이 첫 대면을 한 지 딱 7년째 되는 날, 정조는 홍국영을 불러 사직 상소를 올리라 명령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명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신이 지난 7년 간 국가 일을 맡아 조정의 명령 대부분을 제 손에서 처리했습니다. 이제 궐문을 나가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신에게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을 당일 수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이전과 이후 천 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언제 있었고, 또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동안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생겼으니 바로 홍국영이다.”‘봉조하 奉朝賀’는 군주가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주는 명예직이었다. 나이 32세의 젊은 홍국영에게는 과분한 칭호였다. 이는 정조가 홍국영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조정은 들끓었다. 홍국영에 의해 발탁된 사림파는 ‘홍국영을 다시 불러야 한다’고 일제히 상소를 올렸다. 그해 12월3일, 정조는 최측근 가신 모임인 동덕회 회원들을 모아 주연을 열었다. 서명선, 정민시 그리고 홍국영이 자리했다. 이 날은 정조가 세손 시절 홍인한 등의 노론이 주장한 ‘세손의 삼불필지설’을 비판하는 상소를 홍국영이 기획하고 서명선이 올려 홍인한을 실각시킨 날이었다. 이 날을 기념해 정조와 그의 일등공신들이 해마다 술자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모임 이후 정조는 다시 홍국영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조는 서명선을 숙위대장에 임명하고 홍국영의 힘이 남아 있는 숙위소 해체를 지시했다.조정의 관리들은 권력의 이동을 감지했다. 그들은 서서히 홍국영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권력에 가려졌던 홍국영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탄핵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그러다 이조판서 김종수가 홍국영 탄핵의 방점을 찍었다. 김종수는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음해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죄명을 직시하며 ‘홍국영을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80년 정조는 ‘홍국영은 다시는 도성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명령을 내리면서 홍국영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홍국영은 강원도 횡성, 강릉으로 떠돌았다. 그의 마음에는 울분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찼다. 그는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통곡을 하며 지내다 1780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홍국영은 정조의 통치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다정조가 자신의 분신처럼 총애했던 홍국영의 몰락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홍국영이 정조를 알지 못한 탓’이다. 홍국영은 그 누구보다 정조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정조의 깊은 생각과 원대한 목표는 짐작조차 못한 것이다. 즉 조선의 군주로서 정조의 원대한 꿈, 그가 그리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조의 정도전, 태종의 하륜, 세조의 신숙주.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혁명과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태조, 태종, 세조가 성군이 되어 완성하고자 했던 ‘새로운 조선 건설’의 통치 철학을 정확히 이해한 2인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왕권 강화라는 단기간의 목표에만 매달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정조는 노론 벽파로 대표되는 거대한 붕당 정치, 홍인한·홍봉한 등의 외척의 발효 등으로 아버지가 죽고 자신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노론 강경파를 숙청하면서도 노론의 뿌리를 흔들지 않았다. 이는 정조가 꿈꾸는 탕평의 세계를 위해서였다. 또한 정조는 더 이상 조선의 국정이 외척에 의해 농락당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외가인 어머니 혜경궁 홍 씨 가문을 고심 끝에 숙청했다. 그리고 젊은 인재들을 등용해 실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규장각을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통치 철학인 것이다. 홍국영은 노론 강경파를 숙청하고 주인이 비어버린 노론의 영수가 되어 강력한 붕당을 형성했다. 또한 그는 정조가 그토록 경계하던 외척이 되어 정조의 후계구도에도 야심을 드러냈다. 또한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었지만 규장각의 운영에 있어 정조의 의견을 끝까지 반대한 것도 원인이었다. 정조는 더 이상 홍국영의 월권과 권력욕을 방치할 수 없었다. 서로 바라보는 방향과 지점이 다르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결국 홍국영은 정조에게 ‘팽’을 당한 것일까. 역사는 ‘그렇지 않다’에 무게를 둔다. 그것은 동덕회로 대표되는 정조의 가신그룹이 홍국영을 제외하고는 정조 재위 기간에 내쳐지거나 버림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즉, 정조는 자연인 이산으로서 홍국영을 개인적으로 아끼고, 그의 재주를 높이 샀지만, 조선의 군주로서는 홍국영의 효용가치는 상실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훗날 홍국영이 죽자 정조는 그를 회상했다. 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다.“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 思慮(깊게 생각함)’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 休戚(편안함과 근심)’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 權柄(권력의 손잡이)’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 威福(벌과 복을 주는 임금의 권력)’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 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역사는 그 자체가 교훈이다. 홍국영이 정조와 정치적 지향점이 같았다면 그는 아마도 정조 시대 최고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홍국영은 한순간 타오르고 꺼져버린 불꽃으로 정조 초기를 장식했다. 그의 탐욕, 방심 그리고 오만함이 불러온 비극인 셈이다.▶#처세학 2. | 2인자의 권력은 잠시 부여받은 것이다홍국영을 보면서 한 인물이 떠올랐다. 바로 삼국시대 위나라의 사마의이다. 그는 조조의 책사로 능력에서 제갈공명이나 주유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조조 역시 이를 알고 그에게 장남 조비의 교육과 보필을 부탁했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이 되었다. 하지만 조비의 권력은 견고하지 못했다. 조조의 둘째 아들 조창은 20만 대군을 거느리며 전장에서 공을 세웠고 셋째 아들 조식은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당대 문인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때 조비의 위엄을 드높인 사람이 바로 사마의이다. 그는 세치 혀로 조창의 10만 대군을 조비 휘하로 가져왔고 조식 역시 조비에게 무릎 꿇게 했다. 조비는 사마의의 공을 보답하고 싶었다.“선생의 공이 큽니다. 보상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벼슬을 원하십니까? 태위, 상국, 말씀하시지요.”“위왕, 저는 왕실의 주부 직이면 족합니다.”“아니, 주부는 왕의 문서나, 기록물을 정리하는 하찮은 자리인데.”“위왕, 제가 나이는 많으나 직이 높아지면 가신들이 싫어합니다. 저는 남에게 보여 지는 것보다 실속을 차리겠습니다.”사마의가 원한 것은 벼슬이 아닌 위왕의 옆자리였다. 당시 어느 누가 주부 벼슬의 사마의를 무시했겠는가. 홍국영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칼을 칼집에서 꺼내 휘두르는 우를 범한 것이다.직장도 마찬가지다. 권한이 집중된 2인자는 조직원의 견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 그 권한에 버금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2인자의 처세는 위험한 줄타기인 것이다. 그것은 권한과 책임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1인자에게 잠시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1인자나 오너를 제외한 모든 조직원은 권력을 잉태할 수 없는 ‘태생적 불임’이다. 이를 착각하면 안 된다. 누구나 손에 쥐어진 권력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써 본다. 그러면서 점점 그 권력이 본래 자신의 것인 줄 착각하고 방심하고 오만해지는 것이다.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 몸을 담구고 있는 개구리의 모습과 같다.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인사는 대부분 회전문이다. 오너와 1인자의 관점에서는 일정한 테스트를 통과한 임원급이라면 A나 B, 그 누구도 상관없다는 뜻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2인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점은 1인자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목표로 하는 회사의 미래 모습, 그가 원하는 조직문화, 그의 경영 철학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1인자는 늘 조직과 자신에 대한 충성심, 성실함과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돌파력 그리고 2인자의 리더십을 시험한다. 이 모든 기준에서 2인자는 ‘절대 평가’를 받는다. 즉 상대적으로 몇 점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1인자의 기준점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열려 있어야 한다. 귀도, 눈도, 감각도, 사고도. 2인자는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체크하고, 메모하고, 기억하며 매일, 주간, 월간 그리고 1년 단위의 자신의 무대를 연출해야 하는 것이다. 무대에 등장할 때와 퇴장할 때, 대사를 크게 외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무대의 마지막 커튼콜의 주인공은 당연히 1인자에게 양보하는 ‘아름다운 마무리’다. 2인자의 자리, 어렵다. 그래서 역사에서도, 현실의 수많은 회사에서도 ‘영원한 2인자’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자리를 거쳐 가는 것뿐이다. 조직에서 2인자가 되겠다는 야망 있는 자, 그가 준비할 것은 2인자의 자리가 의외로 짧다는 사실을 먼저 아는 것이다.[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com _ 위키미디어커먼스][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28호 (16.05.17일자) 기사입니다][ⓒ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성운의 역사정치]’정조의 비서실장’ 홍국영은 어떻게 몰락했나

[유성운의 역사정치]㉚

“만약 경(홍국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가” (정조)

“7년간 국가 일을 돌보며 조정의 명령이 대부분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홍국영)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좌의정 김종수)

정조 초반의 정국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었던 홍국영을 제외하면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조정의 모든 정치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고 그의 입과 손을 거쳐 집행됐습니다. 그랬던 그가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정계에서 은퇴했을 때 나이는 불과 32세였습니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라는 미관말직으로 조정에 출사했을 때 32세였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홍국영이 얼마나 초고속 출세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과 30대 초반의 나이로 조선의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왜 한창나이에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와야 했을까요.

“외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민첩했다”

“외모가 준수했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기도 하니 동궁(정조)께서 한 번 보고 크게 좋아하셔서 가까이 두고 아끼셨다.” (『한중록』)

잘 생긴 외모에 영리했던 그는 시나 노래도 잘하고 언변도 좋은 ‘팔방미인’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유년 시절부터 학문보다는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장기를 두는 것을 즐겼습니다. 특히 시조를 잘했는데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는 도성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극에서는 종종 밑바닥 ‘잡초’처럼 그려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인맥 ‘금수저’였습니다.

그는 선조의 사위였던 홍주원의 6대손으로 풍산홍씨 일족인 혜경궁 홍씨의 집안과도 긴밀한 사이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조부로서 정계 를 장악한 홍봉한은 10촌 할아버지였고, 정조와도 12촌 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정순왕후의 오빠로 당대 세력가였던 김귀주는 8촌 사이였으니, 영조ㆍ정조, 혜경궁 홍씨, 경주김씨 가문 등이 모두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죠.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아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입니다.

최장수 비서실장으로 권력을 장악

1772년(영조 48년) 25세에 문과 11위로 합격한 그는 2년 뒤인 1774년 9월 26일(※날짜를 기억해주세요) 세자의 교육을 책임지는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임명되면서 이후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가 될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정조는 즉위한 뒤 홍국영을 승정원(承政院) 최고위직인 도승지에 임명했습니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자리입니다.

승정원은 정3품 기관으로서 국왕이 내리는 모든 명령과 지시를 전달하고 국왕에게 보고되는 정사의 처리나 국왕의 자문을 맡는 ‘문고리 권력’입니다. 행정의 처리뿐 아니라 인사, 국방, 교육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정조 재임 기간 도승지에 임명된 사람은 총 85명으로, 8520일간 일했습니다. 1인당 평균 근무일을 따져보면 99일인데, 최장기 도승지 근무자가 바로 홍국영(1204일)입니다. 정조가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정조의 ‘선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5군영 중 하나인 금위대(禁衛大)의 대장에 임명했으며, 국왕의 호위기관인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홍국영에게 맡겼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3군사령관과 대통령 경호처장에 비서실장까지 맡은 셈이라고 할까요. 그의 권세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정조는 왜 홍국영을 총애했을까

정조가 홍국영을 총애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잡을 줄 알았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요 작은 놈(홍국영)이 간사한 꾀를 내어 동궁(정조)께 곧게 충고하는 체하나 실은 다 듣기 좋은 말이라. 한 번 국영이 들어오자 외부 사정에 대해 여쭙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으니…”라고 기록했는데, 그가 얼마나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동궁 시절부터 정조에게 민심의 동향을 전했던 그는 정세 판단도 탁월했고, 언변과 수완도 좋아 여타 ‘책상물림’들과 다르다는 인상을 확실히 심었습니다.

둘째, 권력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잡은 그는 사정 정국을 조성해 정조의 ‘복수’에 나섰습니다. 칼은 영조 시대에 권력을 누리며 사도세자와 정조를 괴롭혔던 정후겸·김귀주에게 가장 먼저 향했습니다. 사도세자에게 불경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목을 붙여 흑산도로 유배하는 등 정치 일선에서 축출했습니다.

정조의 외가인 혜경궁 홍씨 집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행보를 한 데다 세손을 손안에 쥐려고 했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를 앞장서 공격해 정계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하고 싶지만 스스로 나서기 어려운 정조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죠.

셋째 왕위 계승과정에서 세운 공로입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왕위 계승을 방해하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홍국영은 정민시·김종수(노론), 서명선(소론) 등과 세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훗날 정조는 이들과 ‘동덕회(同德會)’라는 사모임을 따로 만들어 매년 모임을 가질 정도로 이들을 예우했습니다.

특히 홍국영에 대해선 “전후좌우가 모두 역적의 무리를 편드는 사람들뿐이었지만 오직 홍국영만큼은 몸과 마음을 바쳐 국본(國本)의 안위를 받들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특별히 대했습니다.

“산림 세력을 우대하고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

청년 시절부터 “천하의 모든 일이 내 손안에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야심을 드러냈던 홍국영은 정무 감각이 탁월했습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말처럼 그는 권력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산림 세력을 우대하고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인조 이래 서인(노론)계가 장기간 권력을 향유한 비결이자 원칙이었습니다. 노론계 집안 출신인 홍국영도 이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도승지에 오른 그는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을 대우하며 산림 세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재야 세력인 산림은 노론에 인재풀을 공급하는 한편 여론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산림의 지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정치력에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됐습니다.

여기에 더해 홍국영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여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습니다.

홍봉한 세력 축출로 힘의 공백이 생긴 노론계를 장악하기 위한 작업에도 착수했습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정조를 설득해 신임의리(辛壬義理)를 재차 천명하게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신임의리는 노론 측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것은 당파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조종의 안정을 위한 충성 때문이었다는 일종의 정치 프레임입니다. 노론은 영조가 신임의리를 지켜줬기 때문에 집권세력으로 권력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전전긍긍했던 노론 입장에서 신임의리를 재확인시켜준 것은 선물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홍국영은 기세등등했고, 노론의 실력자였던 좌의정 김종수가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흑발의 봉조하도 있게 됐다”

1779년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를 명했습니다. 이날은 두 사람이 세자와 시강원 설서로 처음 인연을 맺은 날이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면담을 마친 홍국영은 곧 “신이 한 번 대궐 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의 반드시 벌을 줄 것입니다” 라며 사직 상소를 올렸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정 인사들이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정계 은퇴였습니다.

여기서 정조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정조는 “이전과 이후 천 년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홍국영을 한껏 치켜세우는 한편 “옛날부터 흑발(黑髮) 재상은 있었지만,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奉朝賀)도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홍국영 입장에선 정치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봉조하는 은퇴한 정계 원로에게 주는 직함입니다. 국왕이 ‘흑발의 봉조하’라고 말한 것은 32세에 불과한 홍국영의 정계 은퇴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공언한 셈입니다. 실제로 정조는 홍국영을 내친 뒤 숙위소를 철거하며 홍국영 ‘지우기’에 착수했습니다.

권력의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는 것이 정치인들이죠.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확인한 노론계 인사들이 홍국영에게 재빨리 등을 돌렸습니다. 홍국영이 정계에서 물러나자 이듬해 2월 홍국영을 만나 위로한 김종수는 궁에 돌아와서는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어 서명선· 정민시 등 정조 즉위를 함께 도왔던 ‘동덕회’ 동지들도 홍국영에게 더 엄한 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평소 그가 궁궐 나인들과 음란한 행위를 했고, 고관대작들에게도 오만하게 대했다는 등 비난도 쏟아졌습니다. 권력의 끈을 놓치고 나니 홍국영의 주위엔 사방팔방 온통 적으로 가득했습니다.

반면 이때까지도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했던 이른바 ‘친홍 세력’으로 불리던 홍낙순·송덕상 등은 홍국영을 복귀시켜야 한다고 주청했다가 관작을 삭탈 당하거나 처형당하는 등 불운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듬해 정조는 홍국영에게 ‘다시는 도성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명령을 내리며 이 문제를 종결지었습니다. 사직 상소를 올리고도 서울에 머무르며 정치적 재기의 꿈을 놓지 않았던 홍국영은 이후 강원도를 떠돌며 폭음과 통곡으로 날을 보내다가 33세에 생을 마쳤습니다.

정조는 왜 홍국영을 몰락시켰나

그렇다면 정조는 그토록 총애했던 홍국영을 왜 내쳤을까요.

홍국영이 노론 벽파의 세력가들을 제거한 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정조의 의중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부친의 비극적 최후를 생생하게 목격했던 정조는 특정 당파의 독주를 종식하려 했습니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정치환경은 왕이라는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 아래서 각 당파가 경쟁·협력하는 단계였습니다.

반면 홍국영은 최대 세력인 노론을 접수해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고 노론도 ‘여당’으로 남기 위해 이에 협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김귀주나 홍봉한 대신 홍국영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노론 권력의 탄생인 셈이죠. 게다가 홍국영은 나이도 젊었고, 재야 세력인 산림의 지지도 얻고 있었습니다.

정조로서는 홍국영이 사정 정국을 조성한 목적이 국왕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의심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어쩌면 미래 권력을 꿈꾸는 홍국영과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던 정조의 예정된 충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인 것도 결국 부메랑이 됐습니다. 정비인 효의왕후가 있는데도 누이에게 으뜸 원(元)자를 붙인 ‘원빈(元嬪)’으로 쓰게 해 왕실을 불편하게 한 그는 원빈이 사망(1779년)하자 독살의 가능성을 제가하며 효의왕후를 배후로 지목했습니다.

또한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맏아들 상계군(이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고, 완풍군(完豊君)이라고 작호를 만든 것도 문제가 됐습니다. 완(完)은 왕실인 전주이씨의 본관(전주·완산주)을, 풍(豊)은 풍산홍씨의 본관을 의미합니다. 왕실에서 외가 쪽 본관을 작호에 붙인 것은 유례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친홍 세력이 완풍군 왕세자 만들기에 나선 것도 정조를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홍국영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사려가 올바르지 못한 탓이다. 처음엔 나라의 안정과 근심을 함께 하는 데 있어 그의 지위가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권력의 손잡이)’을 임시로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벌과 복을 주는 임금의 권력)’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5년 4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이 유럽 순방 중인 17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통일부장관 등을 대동하고 DMZ 일대 유해발굴 현장을 찾자 정치권에서는 “비서실장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한술 더 떠서 26일 공식 유튜브 계정에 임 실장의 방문 소감을 담은 촬영 영상까지 공개했습니다.

야권이 임 실장의 처신을 문제 삼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9월 1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5당 대표를 공식 초청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을 때나 4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의 성의 있는 개헌 논의를 촉구한다. 국민투표법을 신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드린다”고 압박했을 때도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기춘대원군’으로 불린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그간 비서실장이 자신의 존재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비교해보면 임 실장의 행보가 ‘튄다’는 평가에는 여당에서도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엔 여권의 일부 대선주자급 정치인들이 겪는 어려움과 관련해 배후라는 음모론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 실장을 둘러싼 비판과 소문은 ‘미래 권력’이라는 가능성 때문에 더욱 증폭된다는 점입니다. ‘미래 권력’의 가능성을 쥔 2인자의 처신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는 게 동서고금의 교훈인 것 같습니다.

유성운 기자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심재권 『조선 정조시대 국왕비서조직인 승정원의 인사운영, 업무 및 근무실태 분석』, 최성환 『혜경궁의 처지와 「한중록」의 다면적 사실성』, 이경구 『정조와 세도정치 이해를 위한 세 가지 고려』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홍국영의 난?

홍국영

1748년 출생, 71년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로인해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얻게 되고 홍국영은 권력을 잡게 된다. 그후 정후겸, 홍인한을 몰아내며 권력을 잡게 되어 이때부터 세도 정치가 이루어져 갖은 횡포를 일삼아서 정후겸 못지 않다하여 대후겸이라고 불렸다. 또한 욕심이 지나쳐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올렸으나 (원빈 홍씨) 자식없이 요절하자 효의왕후가 원빈홍씨를 죽였다고 생각해 의심하는 사건으로 왕대비, 혜경궁 등 모든 궁궐속의 세력이 홍국영을 적으로 여겼다. 이것이 홍국영이 은퇴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이다.

홍국영은 집중적인 탄핵을 받아 강릉으로 축출된후 1년만에 나이 34세에 사망하게 된다

(재탕..-_-;)

왜 자꾸 멀쩡한 홍국영을 난을 일으킨 사람으로 모는지..

김귀주(정순왕후의 오빠), 정후겸, 홍인한을 축출시켜 정조의 왕권강화에 큰 도움을 주었고.

누이와 효의왕후의 일만 없었더라면 멀쩡하게 살아서 정조와 함께했을 인물이건만

무슨 난?

난이라고 할만큼 사건은 없었고, 귀양을 가게 된 사건은 있다.(원빈홍씨)

cF)홍경래의 난(1811)-정조 승하후 막장을 달리던 세도정치 조선

순조 11년,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착취로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매우 궁핍해지고 가난에 시달리고 빚에몰린 많은 농님들은 고향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 되었다. 국경을 넘어 간도나 연해주로도 이주하며 매우 힘든 삶을 보내였다. 탐관오리의 부정이 날이갈수록 심해지자 더이상 참지 못한 농민들은 세금납부를 거부하거나 집단적으로 항의 시위를 하고 관아를 습격, 탐관오리를 폭행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이에 나라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농민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 등이 평안도에서 일으킨 농민봉기이다. (국사책 참고)

이산, 사약받고 죽는 ‘홍국영의 난’ 으로 궤도 진입

MBC 인기 월화 드라마 ‘이산’에서 홍국영이 끝없는 야심으로 정조(이산)와 분열하는 모습이 시작됐다.

훗날 ‘홍국영의 난’이라 불리는 정조의 홍국영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시청자들은 홍국영이 어떤 죄목으로 정조에게 내쳐져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고 귀향 그리고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는지 앞으로의 스토리 전개에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조와 함께 송연에게도 새로운 상황이 닥쳤다.

송연이 위기에 처해 구해준 사내가 어릴 적 죽은 줄 알았던 동생 욱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

이산은 앞으로 권력을 탐하다 모든 것을 잃는 홍국영과 정조가 시행하는 실학 사상을 가진 새로운 인물들,기존 노론 세력간의 알력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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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최측근이자 최고의 실권자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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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은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48년 홍낙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권력이 홍국영에게 집중되었고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렸다.

정조 즉위 초기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홍국영을 내세워 안정적 권력 기반을 구축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총애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권좌에서 내치기 전까지 도승지의 직책을 겸임시켰다. 도승지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국왕의 뜻을 신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홍국영의 말은 곧 정조의 말이었던 것이다. 홍국영은 당쟁의 세력관계를 교묘히 활용해서 힘있는 세도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처음에 홍국영은 노론의 청명당 계열인 김종수·정이환(鄭履煥) 등과 합세하여 노론 탕평당 계열의 홍인한·정후겸·윤양후·홍계능 세력을 제거했고, 이후 정순왕후의 친동생인 경주 김씨의 외척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공격했으며, 다시 김귀주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어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시켰다.

홍영국

*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원조 홍영국

구 정치세력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홍국영은 자신이 노론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홍국영은 노론의 주장을 앞장서서 펴 나갔다. 그는 정조가 즉위하던 해가 병신처분을 내린 지 60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내세워,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릴 것을 주장했다. 결국 홍국영은 다음 해에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노론의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은 정조에게 노론의 신임의리를 주장하다 죽음을 당한 이의연(李義淵)의 벼슬을 높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노론계 학자 김창흡(金昌翕)·이재 등의 벼슬도 다시 높였다. 또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송환억 등을 조정에 불러 올려서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론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반면에 홍국영은 노론 내에서 자기에게 적대적인 홍계능·홍양해·김한록·송능상(宋能相) 등에 대해서는 비록 송시열 계라 할지라도 제거 또는 그 힘을 약화시켰다.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 위상을 강화하는 동시에 소론을 심하게 압박했다. 그는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선거·윤증 부자의 관직을 박탈했으며, 정조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소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게 하였다. 이로써 소론의 정체성을 약화시켰으며, 소론계 인사들이 노론계 학자에게 학문을 배우게 유도하는 동시에 소론으로부터 노론으로 아예 당을 바꾸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관직에 대한 실질적 임면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영조 때 폐지된 통청권(이조전랑이 스스로 후임자를 추천하는 제도)을 부활시켰다. 이는 영조가 특정 붕당이 관직을 독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탕평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폐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홍국영은 자기 중심의 일사불란한 관직 독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 제도를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로써 주자의 성리학을 토대로 송나라의 국가운영체제를 따라야 한다는 노론의 오랜 숙원이 실현될 수 있었고,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다.

홍국영은 궁중에까지도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1778년(정조2년) 당시까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측실로 들여보내 정조와 외척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작호는 원빈(元嬪)이었다. 이는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서인의 기본적인 정략관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고, 이로써 홍국영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차기를 노리는 권력투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계책을 하나씩 실행할 수 있었고,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궁궐에 들어가 국왕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홍국영을 찾아보아야 했고, 홍국영의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노론의 지도자였던 김종수조차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홍국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사실상 김종수의 이 말은 정조의 의중을 반영한 말이다. 정조는 그만큼 홍국영을 믿고 총애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의 세도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1779년(정조3년) 9월 26일,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바로 그 날에, 정조는 홍국영을 불러들였다. 정조를 만나고 나서 홍국영은 곧바로 “신이 한 번 대궐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 하늘의 신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라는 정계은퇴의 상소를 올리고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이전과 이후 천 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奉朝賀) 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가 생겼도다.” 라는 말로써 홍국영의 낙향을 허락했다. 홍국영이 권좌에서 물러나 정계 원로가 된 것은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좋은 말로 정계 원로요 봉조하지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었고, 권력을 상실한 홍국영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채 여기 저기 떠돌았다. 그는 경기도 해변가를 비롯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강릉 근처의 동해안에 거처를 정했다. 그곳에서 홍국영은 매일 술을 마시고 산에 뛰어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 해(1780년) 33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례이다. 차기 정권까지를 겨냥했던 홍국영은 자신이 철저히 믿고 있었던 정조에 의해 3년만에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했다. 정조가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서 홍국영을 정계은퇴시켜 버린 것은 그가 왕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홍국영이 물러난 직접적인 계기는, 1779년(정조3년) 5월에 그의 누이 원빈이 사망한 후 그가 정조의 왕비인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해서 핍박한 사건 때문이다.

홍국영은 누이 원빈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비 효의왕후를 근거 없이 의심했다. 또한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했다. 이에 따라 궁궐 내 거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미워하며 적대시하게 되었다. 정조의 신임을 믿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인 것도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예컨대 홍국영은 숙위대장으로 궁궐에 머물며 일할 때, 아무리 나이 많은 상급 관리가 나타나도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정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入朝)를 명했다. 홍국영도 정조의 갑작스런 명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법하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홍국영은 곧바로 은퇴의 뜻을 밝히는 소를 올렸다. “저는 7년 간 국가의 일을 맡았는데, 그간 조정의 명령 대부분이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한 번 궐문을 나가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신에게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자진 은퇴 형식이었지만, 실은 정조의 명에 따른 추방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즉시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천 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언제 있었던가, 그리고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奉朝賀)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있게 되었다.”

봉조하는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이었다. 죄를 물어 벌주지 않고 자진 은퇴 형식을 취하게 한 것.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을까.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홍국영은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노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지난 날 외척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섰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왕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탕평 노선을 추구하는 정조의 정치 방향과도 맞지 않았다. 그는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 홍영국의 말로

홍국영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사들은 크게 득세한 반면, 홍국영의 은퇴에 대해 동정하거나 불분명한 태도를 취한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홍국영 자신도 결국 도성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재산도 몰수당했다.이후 홍국영은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해 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며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면서 울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고 지낸 지 몇 달이 지난 1781년 4월, 홍국영은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을 얻어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울화병이었으리란 추측이 많다. 29살 때부터 32살 때까지 약 3년 간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누린 홍국영의 최후는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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