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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 국민일보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8절)고 합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는 그 자체에 만족하며 …
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11/16/2022
View: 3821
두란노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7~14) 1. 독사의 자식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했던 사역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일 …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8/13/2022
View: 7842
[이아침 칼럼] 회개의 합당한 열매 맺기 – 복음기도신문 –
회개는 마음에 채워진 것을 먼저 돌이키는 것입니다. 탐하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회개는 배를 땅에 대고 있는 것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Source: gnpnews.org
Date Published: 5/26/2022
View: 4841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 당당뉴스
세례요한은 이것을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표현했다.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중심이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중심이 변화되어야 한다.
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2/17/2021
View: 526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 (눅3:8-14) – Theology of Work
누가복음의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어난 순서대로 살펴보면, 누가복음에서의 첫 번째 가르침은 비록 예수님이 아닌 세례 요한에게서 …
Source: www.theologyofwork.or.kr
Date Published: 4/20/2022
View: 6627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될 수 …
Source: changmoolee.tistory.com
Date Published: 10/1/2022
View: 4652
회개의 열매 – 세선회
회개의 열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Source: www.sehsungm.org
Date Published: 7/20/2021
View: 3046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 …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를 한다. 그렇다면 회개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되어 자신의 죄가 하늘의 행위책에서 지워지는 …
Source: dongtanms.kr
Date Published: 7/16/2021
View: 1377
백석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아이굿뉴스
회개는 생명 회복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 …
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2/24/2021
View: 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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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회개 의 열매
- Author: Noah’s 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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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4. 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4zd1SfO5Jo
본문 및 주제 연구 52p
‘스크루지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에 등장하는 욕심쟁이 스크루지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고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를 미리 알면 지금까지의 삶, 그리고 현재의 삶을 교정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관점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도들은 ‘마지막날 주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라는 질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주님께서 내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열매를 맺었는가’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열매’에 관한 본문은 종말론적 심판의 문맥에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이 글에서는 ‘열매’에 관한 복음서의 본문 두 개, 그리고 이와 관련된 본문들을 묵상함으로써 성경적 스크루지 효과를 얻어보고자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7~14)
1. 독사의 자식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했던 사역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일이었다눅 3:3. 요한의 사역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막 1:5. 세례는 세례 받는 자의 회개와 하나님의 죄 용서를 보여주는 신앙 행위였다. 그것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다눅 3:4.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마땅히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1을 반겨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심한 욕을 퍼부었다. 도대체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을까?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독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작자가 그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고, 그 방책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냐는 뜻이다. 만약 내가 요한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절대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요한은 이런 독설을 퍼부었을까?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한다. 8절에 따르면 이들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속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이 말은 이들이 혈통적으로 유대인임을 뜻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자부심 때문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통렬히 지적한 것은 바로 그들이 망각한 한 가지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자신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8절는 그의 비장함을 보여준다.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이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노라고 선포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혈통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돌에게서 나왔다. 이사야 51:1~2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셔서 자손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마치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과도 같았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택함 받은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이것을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이지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 그렇다면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1)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요한은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8절를 맺어야 한다고 요한은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저 ‘회개’가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요한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듣고 있는 무리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한을 찾아왔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였다.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채 자신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싶어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례는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종교의식이 아니었다. 세례가 죄 사함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시는 죄악 된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만약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아무리 세례를 받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이며,2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아니,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이 엄중한 경고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눅 13:6~9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을, 포도원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사 5:1~7; 렘 8:13 참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구하셨지만 얻지 못하셨다. 무화과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맺어야 했지만 3년 동안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땅에 있는 자양분만 고갈시킬 뿐이었다. 포도원 주인이 3년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 기회를 주었다는 말이다. 포도원 주인은 당장에라도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때 포도원지기가 한 번 더 기회를 요청한다. 그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노라고,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때 가서 찍어버리라고 주인에게 간청한다. 여기서 포도원지기를 예수님으로 풀이한다면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살지만 그래도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님 덕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 비유 직전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3 그들을 죽인 사건과 관련하여 질문을 하고 여기에 대답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눅 13:1~5. 여기서 예수님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3라고 경고하셨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님을 지적하시면서 마찬가지로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엄중히 경고하셨다. 이 두 본문이 어서 회개하여 심판을 피하라고 일러준다면 그 직후에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세례 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눅 3:3~6, 그 후에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는 흐름과 일치한다.
마리아와 사가랴가 찬송한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기억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눅 1:54~55, 72~73.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것에 감사하여 그의 백성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로 응답해야 한다.
2) 더 이상 늦기 전에 어서 행하라! :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
나사로에게 단 한 번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부자는 때늦은 회개가 소용없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이 부자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이 부자를 ‘얘’테크논 tevknon로 부른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부자의 형제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은 보장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최고급 명품 옷을 입고 ‘날마다’카쓰 헤메란 kaq j hJmevran 럭셔리한 삶을 살면서도 -‘날마다’카쓰 헤메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의 삶과는 정반대다!-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던 거지 나사로에게 자비 한 번 베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일이었다.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 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내세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거지 나사로였다.
그렇지만 이 부자는 자기 형제들만큼은 “이 고통 받는 곳”16:28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죽어서 이미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하면 자기 형제들이 ‘회개하게 될 것’16:30이라고 말한다. 내 형제들은 자기처럼 때늦은 회개를 하지 않기 바란다는 것이다. 이 때 회개란 무엇일까? 비유의 내용을 보건대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그것은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다.
따라서 서둘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혈통에 관계없이 신분과 무관하게 그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실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바로 내가 아닐까? 작년과 다를 바 없이 올해도 나는 송구영신예배, 신년 예배를 통해 한 해를 회개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삶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 해마다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 마음에 위안이 될까 하여 나오는 것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일이다.
3. 삶 속에서 실천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1) 속 옷 두 벌 가진 자도 나눠야 한다
무리들은 세례 요한의 질책을 듣고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라고 요구한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옷’키톤 citwvn이란 속옷을 말한다. 누가복음 6:29을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옷이 나온다. ‘속옷’은 3:11에서도 언급된 ‘키톤’이며, ‘겉옷’은 ‘히마티온’iJmavtion으로서 겉에 입는 긴 옷이다. 속옷은 그 안에 입는 짧은 옷을 말한다. ‘속옷 없는 자’란 가장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가지지 못한 자들을 뜻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속옷 한 벌 없는 자가 있을까? 요한의 이야기는 극단적이다. 그러나 요한이 속옷 두 벌을 가진 자가 속옷이 한 벌도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는 것은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비록 자신도 속옷 두 벌밖에 없지만 함께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렇듯 나눔의 삶을 말한다. 나눔은 부자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옷 두 벌 정도는 거지가 아닌 한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눔은 모든 이가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2) 정해진 것만 받아라
두 번째로 세리가 등장한다. 세리들 역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다가 요한이 무리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리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12절라고 묻는다. 이에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13절고 요구한다.
주후 1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먼저 세금은 직접세와 간접세가 있는데, 간접세는 항구로 들여오는 상품이나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 통과할 때 소지한 상품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으로서, 항구나 성문 근처에 위치한 세관에서 거둬들였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난 여리고눅 19:1~10는 로마 속주 유대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인 베뢰아 사이에 위치했다. 반면에 인구세poll tax = tributum capitis나 토지세land tax = tributum soli와 같은 직접세는 로마 제국이 직접 고용한 자들에 의해 징발되었다. 로마 총독이 관할하지 않던 갈릴리의 경우도 헤롯 안티파스의 감독하에 그의 공무원들이 직접세를 거둬들였다. 간접세를 거둬들이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세리tax-collector였다.
간접세는 로마제국이 직접 관할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맡겼다. 즉 어떤 유대인이 특정 지역에 대한 간접세 징수 권한을 로마 당국으로부터 받는다. 입찰을 통해 이런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로마 당국에 징수를 허락 받은 지역의 간접세를 미리 지불한다. 그는 자기 밑에 부하 직원들세리들을 두거나 하청을 줘서 세금을 거둬들인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이 때 정해진 세금 그 이상을 거둬들여 부를 꾀했던 것이다.4
세리들이 당시 사람들, 특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세금 수탈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윤commission을 가능한 한 많이 남기기 위해 그들이 로마 당국에 선불로 지급한 액수를 훨씬 초과하는 세금을 거둬들였다.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온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이나, 삭개오가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19:8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 세리들의 횡포를 짐작케 해준다. 요한은 이러한 세리들의 착취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받는 월급에 만족해라
세 번째 등장인물은 군인들이었다. 로마 군병일 수도 있지만,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이 요단강 부근3:3이라고 할 때 이곳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였던 베뢰아일 수 있다. 당시에 헤롯 안티파스는 군인을 거느렸다. 혹은 세리들을 보호해주던 유대 군인들일 수도 있다.5 이들 군인들은 세리를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강탈했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 군인들에게 돈을 뺏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코판테오’sukofantevw는 원래 ‘무화과나무를 흔들어 그 열매를 드러내다’라는 뜻인데,6 여기서부터 금전적 이득을 얻기 위해 ‘거짓 고소하다’ 혹은 ‘사기 쳐서 강탈하다’라는 의미가 가능하다.7 이런 일들을 그만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는 것, 이것이 군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는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구된 삶이 매우 구체적임을 알 수 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 삶 속에서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내 지위를 이용하여 내 탐욕을 채우는 일,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리非理다. 나는 이것에서 떳떳한가?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일을 당장 중단하는 일,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막(눅 19:1~10)
1.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이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아는 삭개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깨끗한’, ‘순결한’과는 달리 탐욕스럽고, 부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다.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불리며 조롱받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리들은 동족을 착취하여 배를 불렸고, 로마에게 봉사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매국노라고 불렸다. 이러한 윤리, 도덕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세리들은 정결법상으로도 ‘더러운 죄인’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직업상 이방인들과 많이 접촉해야 했고, 로마황제의 상이 새겨진 돈을 날마다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히 율법에 엄격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경멸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삭개오는 특별히 키가 작았는데, 주후 1세기의 사람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이 소심하고, 탐욕스럽다고 생각했다. 신체적인 왜소함은 웃음거리였다. 어쩌면 삭개오는 작은 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그것은 삭개오의 열등의식을 부추겼고, 그의 열등의식은 사람들에 대한 적대심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절라고 수군거린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러주셨다9절.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불린 삭개오가 구원받은 백성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삭개오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여준 예수님께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노라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삭개오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을 그 재산의 절반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 자신의 재산의 20%만 내놓아도 관대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삭개오는 50%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또 그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입술로만 고백하지 않고 네 배나 갚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 5:16; 민 5:7 착취한 것에 20%만 더 주면 해결되었다. 삭개오는 네 배로 갚겠다고 했으니, 이러한 삭개오의 의지는 그가 철저히 과거의 삶으로부터 돌이켰음을 보여준다.
2. 삭개오와 부자 관리, 그 공통점과 차이점
삭개오 이야기는 18:18~23에 나오는 부자 관리의 이야기와 대조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리 역시 큰 부자였고18:23, 삭개오 역시 부자19:2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 관리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온 경건한 사람인 반면에 삭개오는 죄인이라고 조롱받았다. 그렇지만 관리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못했으나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고 말씀하셨다18:24~25. 그렇다면 삭개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즉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는 과연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8다.
3. 삭개오의 변화는 예수께서 먼저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이 보고 싶어졌다3절.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만약 그저 호기심에 불과했다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는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장애물에 굴하지 않았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4절. 그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정에 응답하여 예수님도 삭개오를 바라보셨다5절.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아무도 자기 집을 찾아오지 않았을 삭개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 사랑이 삭개오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아래서 볼 수 있듯이 삭개오 이야기는 교차대칭구조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신 구절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이 이야기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A 예수의 행동(1절)
B 삭개오 소개(2절)
C 삭개오가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볼 수 없음(3절)
D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감(4절)
E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심(5절)
D´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옴(6절)
C ´사람들이 수군거림(7절)
B´삭개오의 결단(8절)
A´예수님의 말씀(9~10절)
또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예수님의 소명 선언9~10절이 삭개오 이야기의 결론이라는 사실도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신 일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지지한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15~27)
1.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에서 열매에 관한 본문은 앞서 언급한 누가복음 3:7~14의 병행본문인 3:7~10이다. 그 다음은 산상수훈5~7장의 마지막 부분인 7:15~20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아마도 이곳저곳을 떠돌던 반反율법주의자들antinomians로서, 참된 믿음을 곡해하여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로 추측된다. 이들은 극단적인 바울주의자였을 것이다.9 13~14절에서 말하는 바,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는 자들은 바로 이들처럼 말씀의 행함을 통한 신앙의 성숙을 이루지 않고 값싼 은혜, 값싼 믿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이들이 양의 옷을 입었으나 실제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이들의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시한 식별 방법은 그들의 열매다. 여기서 열매란 그들의 행동을 말한다. 말이 아니라 실천이요 인격이요 삶이다. 좋은 나무라면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름다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kalo,j와 ‘나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ponhrov~는 열매의 품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윤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단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란 행동이요 삶이라는 말이다. 속이 노략질하는 이리라면 아무리 겉에 양의 옷을 입었어도그래서 미혹되기 쉽지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은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마 3:7. 누가복음에서는 무리들, 눅 3:9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열매 맺는 백성이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이 비유에서 주인이 보낸 종과 아들을 죽인 불의한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이방인들을 포함 가리킨다. 구원은 누구에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열매 맺는 백성이어야 한다. 그들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농부”21:41다.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2.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 vs.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앞서 15~20절이 비유였다면 21~27절은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어떤 것인지 보다 현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21절 말씀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대비되고 있다. 첫째 인물은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다. 둘째 인물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다. 예수님은 첫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그렇게 부른다. 따라서 이들은 신자다. 그런데 왜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22~23절을 읽어보면 ‘주여 주여 하는 자’는 그저 말로만 주님을 부르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2~23절은 마지막 심판날22절의 “그날에”와 23절의 “그 때에”에 있게 될 일을 예수님이 경고하고 계신 내용이다. 여기에는 예수님께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앞서 21절에 등장한 ‘주여 주여 하는 자’와 동일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일들예언, 귀신축출, 많은 권능=이적을 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말할 때마다 ‘주의 이름’ 행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행한 일의 명분 혹은 능력의 근거를 주님에게 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한마디로 능력과 열심을 갖춘 신자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날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23절 ‘밝히 말하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엄숙히 선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법적으로 철회될 수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지금의 분위기는 매우 비장하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행한 저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신다. 지금까지 나는 너희들을 안 적이 없다. 너희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이런 선언인 것이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상상해보라.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한 그들이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은 자들이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이제까지 나는 너희들을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 말씀은 더욱 놀랍다. 예수님은 이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고, 많은 이적을 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행한 모든 것이 불법이라고 규정하신다. 여기서 ‘불법’이란 법에 어긋난 행동이란 뜻이라기보다는 ‘악한 행동’이란 뜻이요, 문맥상 2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서 떠나가라!” 더더구나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그 날에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22절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왜 예언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많은 이적을 행하는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인가?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셨고,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던가? 예언도 하지 않으셨던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지 않으셨던가?마 10:1.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충실히 따른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절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21절에는 ‘주여 주여 말하는 자’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비되고 있고, 후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22~23절에 등장하는 자들은 전자에 속한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예언하며, 귀신을 내쫓고, 이적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15절에서 예수님이 경고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3. 하나님의 뜻: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너희의 의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의 맥락에서 그것은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아무리 예언을 하고, 귀신을 내쫓고, 이적을 행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가족과 동료 교인들을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여기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는데,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못할 때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마태복음에는 ‘의’라는 말이 7번 나온다3:15; 5:6, 10, 20; 6:1, 33; 21:32. 이 가운데서 산상수훈에서만 5회 사용되고 있어, 산상수훈의 주요 주제가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순종을 뜻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셨고, 이에 순종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례를 받아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세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하나이지만, 세례를 받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나머지 모든 의를 이루는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다.
마태복음에서 ‘의’는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정신을 가르쳐주신 진정한 교사이다. 특히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은 실천해야 한다. 즉 마태복음에서 ‘의’는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닮아가고자 하는Imitatio Dei 결단과 행위로서 교사 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5:20의 ‘너희 의’ 역시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다.
21~48절과 관련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너희 의’란 6가지 반제의 행함이다. 옛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면 6가지 반제의 행함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48절에서 말하고 있는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단순히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산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조롱하지 않고,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너희 의,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의인 것이다.
이웃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한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의다. 특히 원수 사랑이야말로 6가지 반제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뜻의 절정이요 ‘너희 의’와 ‘온전함’의 핵심이다. 이러한 ‘너희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요 회칠한 무덤으로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는 자들이었다23:23.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23:25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너희 의’는 철저히 계명의 본래적인 뜻을 내면화하여, 전인격적으로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다. 이 같은 ‘너희 의’를 이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반드시 성취해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언이나 귀신 축출이나 이적 행사처럼 남들의 이목을 한순간에 휘어잡을 수 있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다. 비록 남이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 인격을 다듬어가며, 말씀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가 될 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 25:31~46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 하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그 사람이 주릴 때에 지나치지 않고 먹을 것을 주면, 목마를 때에 냉수 한 잔 주면 주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신다. 그래서 바울도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4.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다음에 나오는 24~27절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24~27절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나의 이 말”24절을 듣고 행하는 자다. ‘나의 이 말’이란 예수님이 5장부터 7장까지 하신 말씀을 말한다. 즉 산상수훈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자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특히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7장은 단지 듣거나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좋은 말씀이라고 감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25, 27절에 나오는 비와 창수=홍수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다. 만약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홍수가 나면 완전히 무너져 버리듯이 최후의 심판 때에 이들은 철저히 무너질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기름’(마 25:1~13)
1. ‘열 처녀 비유’의 문맥
마태복음 24~25장은 예수님이 종말과 심판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전 멸망에 관하여, 또 종말에 있을 징조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24:3 예수님이 답하신 긴 답변24:4~25:46이다. 24~25장에 걸쳐 나오는 예수님의 답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난리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 박해, 천체의 격변 등과 같은 종말의 징조에 관한 내용과 인자가 재림할 때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24:4~31. 둘째는 종말을 대비하라는 교훈으로서, 다음과 같이 모두 8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24:32~25:46.
먼저 ‘무화과 나무의 비유’24:32~35는 시대의 징조를 잘 구분하여 종말이 가까운 것을 깨달으라는 교훈이다. ‘노아의 때의 비유’24:36~39는 종말의 때는 아무로 모르며, 노아의 홍수가 갑작스럽게 임한 것처럼 종말도 그러할 것을 말하고 있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는 종말에 사람의 운명이 판이하게 갈라지게 될 것을 확연한 이분법적 대조로 보여줌으로써, 데려감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하는 비유다24:40~41. ‘도둑의 비유’24:42~44는 ‘노아의 때의 비유’처럼 종말이 언제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지만44절,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깨어있을 것42, 43절과 예비하고 있을 것44절을 강조한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비유’24:45~51는 믿는 성도가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말고, 성도들이 마땅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 경우 주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맡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착각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단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고,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필자는 이 세 가지 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를 고찰하고자 한다.
2. 기름의 의미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그룹이다: 신랑, 슬기로운 처녀, 미련한 처녀. 여기서 신랑은 재림하실 인자 예수님을, 10명의 처녀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를 가리킨다.10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는 것은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많은 해석이 있어왔는데 대표적으로는 믿음, 은혜, 성령 등이 있다. 블룸버그는 이런 해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구매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1 그는 기름을 각 개인의 영적인 준비됨으로 해석한다.12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개인의 영적인 준비는 구매될 수 있는 것인가? 그의 견해대로 여기서 기름이 영적인 준비를 가리킨다고 필자 역시 생각하지만, 믿음이나 성령이 구매될 수 없는 것이기에 기름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는 그의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으로부터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해석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기름은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되, 선행을 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대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먼저 성경외적인 근거로서, 랍비 문헌 Numbers Rabba 13:15~16에 따르면 율법연구는 반드시 ‘기름’과 혼합되어야 한다. 이 때 기름은 선행을 의미한다. 또 Qoheleth Rabba 9:8§ 1은 전도서 9:8“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에 나오는 하얀 의복과 기름을 선행으로 해석하고 있다.13
2) 기름은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빛은 선행마 5:16의 메타포다. 여기서 선행이란 그저 착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명령마 5:17~48을 지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는 삶마 5:20을 말한다.
3)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마태복음 7:21~27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문이 닫힌 후에 신랑에게 “주여 주여”라고 부른 것은 마태복음 7: 21~22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즉 마지막 심판날에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둘째, 신랑이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도 “주여 주여” 말하는 자들과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7:23고 말하였다. 셋째, 10명의 처녀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구분된 것처럼, 7:24 이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구분하였다. 이상을 도표로 나타내자면 아래와 같다.
7:21~23 및 반석/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 열처녀의 비유
지혜로운 자 ↔ 어리석은 자 슬기로운 처녀 ↔ 미련한 처녀
주여 주여(7:21~22) 주여 주여(25:11)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행하는 사람과 행치 않는 사람 준비할 것을 준비한 처녀와 준비하지 않은 처녀
이와 같은 유사성은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서를 제공해준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7: 21~22은 그저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란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율법5~7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자7:24~27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우리는 또한 열 처녀의 비유와 결혼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의 비유마 22:11~14 사이에도 유사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후자는 왕이 베푼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응답해야 할 뿐만 아니라즉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 선포에 응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초대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예복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말한다.14 열 처녀의 비유는 결혼잔치 비유와 마찬가지로 결혼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결혼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었던, 그렇지 않던 잔치에 온 이들은 일단 왕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 즉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예복을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고, 입지 않은 사람은 종말론적 형벌을 받게 된다22:13. 열 처녀의 비유 역시 10명의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 즉 성도이다. 또 이 성도는 다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구분되고, 미련한 처녀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종말론적 형벌을 받게 된다. 이렇게 두 비유는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은 결혼잔치의 비유에 나오는 예복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제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가리킨다.
3. 메시지
열 처녀의 비유는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현실에서 재림을 의심하지 말고, 재림에 대비하여 깨어 있어야 함13절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13절의 ‘깨어있으라’grhgorevw는 문자적으로 “깨어있다”stay awake를 의미하지 않는다. 슬기로운 5명의 처녀들도 깨어 있지 못했지 않은가?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준비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15 그러나 깨어 있다는 것, 준비한다는 것은 그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다. 재림이 있다고 믿지만, 그러나 동시에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여 늘 빛을 발하는 삶을 사는 것, 즉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발하는 삶, 예수님이 주신 명령을 온전히 지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해지는 삶마 5:48을 사는 것이다. 24:42 이하에서도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를 것을 알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을 뜻한다.
재림이 있기 전까지의 삶은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시기다.16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을 알았을 때,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기름을 보충하러 갔어야 했다. 적어도 그 때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랑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 때서야 비로소 기름을 얻고자 했다. 시간이 있을 때 준비하라! 이것이 이 비유의 메시지다.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종말이 닥치면 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된다. 미련한 처녀 5명이 아무리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어도 돌아온 것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이 비유는 ‘믿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며, 성도들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구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자는 “예비하였던 자들”aiJ e{toimoi. 10절. 24:44 참조, 즉 선행을 행하는 삶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였던 자였다. 이들은 집안에 들어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반면에 미련한 처녀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여 “문 밖에 남은 처녀들”aiJ loipai; parqevnoi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처녀가 지혜로운 처녀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으며2, 3, 8절, 이들의 잘못과 그로 인한 운명이 부각되고 있음은 이 비유가 경고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란트 비유’도 착하고 충성된 종보다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실 예수님은 마태복음 곳곳에서 성도라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자가 당할 운명에 대해 경고해왔다7:15~23; 13:24~30, 36~43, 47~50; 18:21~35; 22:1~14. 이제 수난을 당하기 전 마지막 강화24~25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을 잘 대비하지 못할 경우 성도가 영원 형벌에 처해질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새겨볼 만하다: “지옥은 불신자들에게 겁주려고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만들어낸 교리이다.”17 이런 점에서 볼 때 보좌에 앉은 왕이요 심판주인 인자가 25장을 마감하면서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25:46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결론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하늘만 쳐다본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제자들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행 1:10~11 참조.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에 힘써야 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믿는 이가 중간기에 해야 할 일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 즉 선교였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태 역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지만마 28:19~20, 그는 성도들이 종말에 당할 운명을 극명하게 대조함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깨어 예비하는 삶을 촉구하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그 날이 올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세상에 빛을 비추는 제자의 삶을,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부터.
註
1. 누가와는 달리 마태는 이들을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3:7)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도 ‘독사의 자식들’로 비판받는다(12:34; 23:33).
2. 요한복음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우리의 아비’이며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혈통적인 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비판한다(요 8:33-47 참조). 바울 역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것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갈 3:29). 이것은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이어받을 것임을 뜻한다.
3. 아마도 유월절과 같은 절기가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와 드린 제사일 것이다. Darrell L. Bock, Luke, Vol. 2, 1204 참조.
4. John R. Donahue, “Tax Collector,” Anchor Bible Dictionary 6:337 참조.
5.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Anchor Bible Commentary 28 (New York: Doubleday, 1981), 471; Darrell L. Bock, Luke, Vol. 1, 312.
6.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470-71.
7. Darrell L. Bock, Luke, Vol. 1, 313.
8. 김영봉,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서울: IVP, 2003).
9. Ulrich Luz, Matthew 1~7 A Commentary (Augsbrug Fortress, Minneapolis, 1989), 441~2 참조.
1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영생을 위한 기름: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 연구” 「성경연구」 131권 (2005.10), 38~49를 참조하라. 여기서 논하는 ‘열 처녀의 비유’에 관한 내용은 이 글을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11. Blomberg, Matthew, The New American Commentary(Nashville, Tennessee: Broadman & Holman, 1992), 370.
12.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0), 196.
13. David E. Garland, Reading Matthew: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First Gospel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5), 241.
14. Donahue, The Gospel in Parable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8), 95~96을 참조하라.
15.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195.
16. Donahue, The Gospel in Parable, 104~5.
17. F. D. Bruner, The Christbook (Waco: Word, 1987), 306; Blomberg, Matthew, 142~43에서 재인용.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장 7절~14절)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3절~7절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가 전하는 의미는 욕심에 이끌려 살던 옛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겠노라는 결단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세례를 예표한다. 패괘한 세상은 물로 수장 되고 말씀을 준행한 노아의 방주는 물 위로 떠올라 새로운 세상이 여는 비전을 증거한다. 세례는 새로운 창조, 거듭남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세례의 대상자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신앙인들이였다. 다시말해, 모세의 율법의 따라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요한에게 또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 세례요한이 말하고 있는 ‘장차 올 진노’란 미래적인 종말과 동시에 현재적인 종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미래적인 종말이란, 개인적인 죽음과 더불어 역사적 종말을 말한다. 다시말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판가름 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이러한 미래적인 종말론의 메시지는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더 의미있게 살아가라는 종말론적인 경고를 담고 있다. 이와 달리 현재적인 종말이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을 말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만나는 위기, 곧 절대절명의 순간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지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몰려든 이유는 전자보다 후자의 이유가 더 강했다. 유대인들은 지금 ‘로마제국의 탄압’라는 문제를 당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모세의 율법과 규례의 준수만으로는 물질과 힘을 앞세운 로마제국의 압제 라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을 경험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로마의 압제와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2010년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들 가운데 하루에 약300명, 일년에 10만명이 파산하는 극심한 경기침체와 경제위기를 살고 있다.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살인적인 취업난을 겪는다. 하루에 42.6명, 일년에 15,56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율 1위라는 실로 전쟁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실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날’과 같은 현실의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무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이 요한세례를 받으러 온 까닭은 지금까지 해오던 자신들의 종교생활로는 더 이상 삶에서 만나는 극심한 위기와 엄청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의 물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회복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렇다면, 요한이 증거한 ‘세상을 이기는 새로운 믿음의 길’은 과연 무엇이 였을까?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와 신앙의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인가, 회심인가 누가복음은 요한이 선포한 새로운 믿음의 핵심을 한마디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증거한다. ‘죄사함’이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죄를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모세의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행위의 차원으로만 여겨왔다. 그래서, 살인과 도둑질을 안하고 율법과 규례를 준수하면 죄 없는 ‘의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세례요한의 통찰은 달랐다.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죄란 범죄행위를 넘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이기적인 탐욕’이였다. 그래서, 비록 겉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 죄를 지을 수 있는 탐욕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여겼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16장 2절)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내면에 숨겨진 죄를 감춘 채 겉으로 드러난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했다. 일명 ‘눈가리고 아웅하는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내면에 숨겨진 죄악의 본질을 폭로하는 일이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세례’의 목적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말하지만 한걸음도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회개하는 깊이 만큼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회개는 잘못한 행위를 고쳐서 돌이키는 차원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증거하는 회개란 ‘마음(중심)을 돌이키는 것’ 곧 회심(回心)의 차원이다. 이기적인 탐욕에 붙들려 있는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 보다 ‘회심’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하나님의 보신다고 하는 인간의 ‘중심’이란 과연 무엇인가? 중심은 내면에 숨겨진 ‘동기’와 ‘목적’을 말한다. ‘동기(motive)’란, ‘무엇이 나의 삶을 이끌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고, ‘목적(purpose)’이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회심’이란 지금까지 부와 명예,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며, 세상의 자랑과 세상의 영광을 쫓던 옛 자아가 사랑과 진리, 겸손과 섬김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동기와 목적의 ‘회심’ 없이는 결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매주일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늘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례는 받았지만 그 중심(동기와 목적)이 근본적으로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술로 회개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중심은 탐욕에 붙들려 세상적인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기심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삶인지, 아니면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는 삶인지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중심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거룩한 신앙행위나 말로 의롭다고 판단하거나 한번의 치명적인 실수로 정죄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룩한 행위를 통해서도 명예욕과 사리사욕을 채울 만큼 간사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사랑과 섬김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명예와 권세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숨겨진 중심, 곧 동기와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마지막 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숨겨진 중심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숨겨진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날’, 삶에서 만나는 위기의 순간에 비로소 자기도 모르던 중심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솔로몬에게 한 아이를 데리고 두 여인이 찾아 왔을 때, 그들의 눈물과 말로는 누가 진짜 어머니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 둘로 나누라는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비로소 감춰진 진실과 숨겨진 본심은 드러났다. 진짜 어미는 아이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지만, 가짜 어미는 아기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라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했다. 따라서, 참된 회심의 여부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표현했다.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중심이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중심이 변화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진정으로 마음을 고쳐먹을때 행동은 달라질 수 있다. 회개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중심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의 탈을 쓴 이리’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고 꾸짖는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과 규례를 지키며 절기와 제사를 드렸다. 이것으로 충분히 의롭기에 더 이상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이기적인 탐욕이 자신의 삶을 이끌고 있었다. 세례요한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정체를 ‘독사의 자식’이란 한마디로 말로 폭로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뱀은 전통적으로 사단을 의미한다.(the serpent in the Garden of Eden) 독사의 자식이란, 하나님의 자녀와 대비되는 말이다. 곧 사단의 자녀요, 세상의 자녀요, 탐욕의 자녀란 말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도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교인의 의무를 다하면 구원은 따논 당상으로 여긴다. 주일성수와 헌금생활, 교회의 직분과 봉사활동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동기와 목적이 변화되는 세례 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기적인 탐욕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목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사랑과 평화, 기쁨과 감사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가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의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그들은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위기의 순간에도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한다. 반면에 독사의 자식들은 이기적인 탐욕으로 오류와 다툼, 미움과 절망만이 가득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0절~14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지난 2007년,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원산의 하디선교사와 길선주장로가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교회는 대규모집회를 열어 너나 할 것 없이 회개를 쏟아냈다. 그 무렵 감리교회도 부산에서 영남선교대회를 열어 회개의 대열에 동참했다. 이날 감리교회 최고의 지도자 신경하감독회장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삼만여명 감리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인 회개를 선언했다. “저 역시 돈을 주고 표를 매수하는 감리교회의 선거풍토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실로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회개는 단순한 ‘립써비스’일 뿐이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심어린 회개였다면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새로운 선거풍토를 위한 제도를 마련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을 비롯한 모든 감리교회의 공동체는 입술의 회개는 있었지만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맺지 않았다. 겉으로는 회개를 말했지만 여전히 중심은 명예욕, 권력욕, 물욕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감리교회의 감독선거는 금권타락선거로 더욱 혼탁해져서 마침내 120년 선교역사에 먹칠을 하며 4년간 감독회장을 선출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남 얘기 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원한다면,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 물었다.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요한의 답변은 아주 심플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하나를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 군인들과 세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지 마라. 이것은 구약 레위기의 말씀으로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이였다. 무엇보다, 여러가지 복잡한 요구가 아니라 오직 단 한 가지 뿐이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다. 많은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이다. 네가 믿는대로, 네가 고백한 대로, 네가 배운대로 실천하라. 네가 말한대로 행동하라. 한마디로 ‘말씀을 적용하라’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례요한을 통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신다. 너희가 듣고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며 살아가라. 작은 일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하라. 끊임없이 계속하라. 온전하게 변화될 때 까지…
독사의 자식들과 하나님의 아들 21절~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은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풀었던 세례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한다. 세례가 행해지는 장소는 ‘요단강’이요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세례요한’이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세례를 베푼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사단의 자녀들아’, ‘세상의 자녀들아’라고 비판했지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복음은 ‘독사의 자식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요단강에서 펼쳐지는 세례를 통해서 아주 드라마틱 하게 대비 시키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시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기적인 탐욕을 쫓아 ‘독사의 자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삶의 위기의 순간에 확실하게 드러나서 만천하에 공개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누가복음은 바로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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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 (눅3:8-14)
누가복음의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어난 순서대로 살펴보면, 누가복음에서의 첫 번째 가르침은 비록 예수님이 아닌 세례 요한에게서 나온 것이긴 해도 바로 일에 대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고 청중들에게 권면한다(눅 3:8). 그들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눅 3:10, 12, 14), 요한은 종교적 해법이 아닌 경제적 해법을 준다. 먼저 세례 요한은 (두 벌 옷과 많은 식량을 가진) 소유가 넉넉한 사람들에게 가지지 못한 자들과 그것을 나누라고 말한다(눅 3:11). 그다음 그들의 직업과 연관해서 세리들과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즉, 세리에게는 세금 고지서에다 금액을 부풀려서 그 차액을 챙기지 말고 부과된 금액만큼만 거두라 하고, 군인에게는 돈을 착취하거나 사람들을 무고하게 고발하는 데 힘을 쓰지 말라고 한다. 또 자기의 봉급을 족한 줄로 여기라고 한다(눅3:13-14).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라고 말했을 때, 그는 조직적인 불의가 깊이 뿌리내린 직업인에게 대단히 극단적인 말을 한 셈이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세금은, 공무원들과 다른 고위 관리들이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외주를 주는 ‘세금 징수 청부’(tax farming)로 모아졌다. 그 외주 계약을 따기 위해 세리들은 로마가 거두는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둬 그중 일정액을 그 담당 관리에게 상납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관리들을 위한 상납금 위에 세리 스스로를 위한 이윤이 더해진 것이 최종 액수였다. 로마의 세금이 실제로 얼마인지 백성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리가 그들에게 부과한 금액이 얼마든지 납부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세리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돈을 착복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정부 관리들에게 두둑한 이익을 보장하지 않고 그 계약을 따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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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4 강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씀/ 누가복음 3:1-20
요절/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저는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용할 양식 표지에서 느꼈습니다. 이번 3,4월호 표지는 영블레싱 목자님의 작품입니다. 표지 속엔 화사한 꽃발에서 두 마리의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이 그림 같이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을 맞이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이자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 인생에 새 봄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려면 그 전에 준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사람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또한 이 나라와 캠퍼스에 새 봄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절과 2절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보여줍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초대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의 양자였던 디베료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땅은 로마에서 파견된 빌라도 총독 그리고 헤롯 대왕의 두 아들인 안디바와 빌립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종교 권력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안나스의 사위였던 가야바가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선대로부터 지위를 물려받아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삶은 아무런 변화의 기미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침묵 중이신 것 같았습니다. 이 긴 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얼어붙은 세상 가운데 다가올 새 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2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빈 들은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말 그대로 빈 들입니다. 이곳에서 요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세상은 아무도 이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역사를 바꿀 대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앞서 가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련 나무에 꽃이 피면 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제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알리는 예고편과 같았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회개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는 것과 회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즘에는 잘 안 하지만 예전 센터에서는 새봄맞이 대청소를 매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새봄학기 센터로 몰려올 새내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목자님들이 2월말 토요일에 다 모여서 센터 구석구석을 청소했습니다. 평소 잘 청소하지 않던 부분들까지도 다 찾아내서 물을 뿌리고 열심히 걸레질을 했습니다. 새내기를 영접하기 위해 센터 청소를 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음과 영혼을 대청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회개입니다.
집을 더럽히는 것이 먼지와 오물이라면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죄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죄가 우리 마음을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게 만듭니다. 자연 세계는 참 정직합니다. 3월이 되면 어김없이 얼었던 물이 녹고 개구리가 깨어납니다. 얼마 후면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 개나리 벚꽃 등등 봄꽃이 만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짓됩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 앞에서 ‘나는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만약 사람 마음에서 냄새가 난다면 세상에 악취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너도 나도 다 죄인인데 죄인들끼리 서로 참아주며 어울려 살면 그만 아닐까요? 굳이 힘들게 회개를 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서 각자 삶을 해명해야 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언론과 수십 명의 특별 검사가 아무리 다 뒤져봐도 밝혀내지 못하는 진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아무도 그 무엇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판결문이 읽히는 순간 그 즉시 효력이 발생하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때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했던 사람은 아무리 꼼수를 써 봐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당장 마음의 대청소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더러운 죄들을 다 씻겨 주시고 영생과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18절은 회개를 가리켜 생명 얻는 회개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 받은 사람도 회개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목욕한 사람도 날마다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회개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참된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성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회개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차라리 심판을 받고 말지 회개만큼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죄인의 심리입니다. 아니면 회개하는 시늉만 내고 참된 회개를 외면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참된 회개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참된 회개를 하려면 헛된 자부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하필이면 왜 세례라는 의식을 베풀었을까요? 당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치르는 입교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세례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향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말은 곧 유대인인 너희도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온 무리를 향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외친 사실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유대인의 혈통과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자부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은 큰 복입니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다운 믿음과 순종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어차피 구원 받을 것이니 아무렇게 내 맘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자부심이 헛된 자부심입니다. 참된 회개를 방해하는 해로운 자부심입니다. 회개하려면 이런 종류의 헛된 자부심이 깨어져야 합니다. 혈통이든 업적이든 인간조건이든 모두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합니다. 그때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자부심이 넘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친척들이 다 부러워하는 고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고전을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같은 경영대생들과는 인문학에 대한 수준차가 나서 대화가 잘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고 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안에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요한복음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즐겁게 공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문제 많은 사람들을 탐구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학년 때 또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니고데모, 38년 된 병자, 사마리아 여인 등등 모두가 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이 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제가 얼마나 마음이 깊이 병든 자인지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패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왔는데 자부심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나니 너무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일대일 목자님에게 이렇게 따졌습니다. “아니 목자님 맨 처음 저를 피싱하실 때 성경 공부를 하면 기쁘고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하면할수록 괴롭고 힘들어요. 목자님은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러자 목자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저에게 이렇게 단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올 것이 왔군요.” 저는 그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먼저 헛된 자부심이 깨져야 합니다. 그 과정이 괴롭고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부모님이 선교사이거나 목자이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배에 나왔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부모님 눈치 목자님 눈치 보느라 세상 친구들처럼 마음대로 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면 봤지 뭐 그렇게 회개할 일이 많겠어?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던 적이 많지 않았습니까? 또 어떤 분은 내가 UBF 목자 경력이 몇 년인데 하면서 타이틀과 경력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목자 생활을 오랫동안 신실하게 감당해 왔다면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한 회개를 외면하고 그 뒤로 숨어버리는 방패막이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열심히 일한 사도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많은 업적을 남긴 사도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말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죄인 중의 죄수입니다.’라는 식의 표현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서 보십시오. 우리는 부끄럽고 할 말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저절로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회개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헛된 자부심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참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무리들은 무엇을 해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지 세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세 가지 케이스를 들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옷 두 벌 가진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옷 두 벌 가졌다고 죄는 아닙니다. 정정당당하게 벌어서 옷 두 벌을 가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곁에서 옷 한 벌이 없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둘째로 세리들은 부과된 것 이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오늘날과 달리 공무원이 아니라 자영업자였습니다. 많이 거둘수록 자기 몫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한 세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재산을 늘리는 세리들이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더 이상 그런 부정한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셋째로 군인들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박봉이었습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아무나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불러 시비를 건 후 뒷돈을 받고 나서야 풀어주곤 했습니다. 요한은 더 이상은 이런 불의한 짓들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이것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의 예들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두 이웃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회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은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열매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한 영혼을 어떻게 무시하고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회개했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직 온전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사례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와 관련된 사례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례는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사례입니다. 웨슬리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갑이 회개해야 회개한 것이다.” 사람이 정말 회개했는지 알고 싶으면 말을 보지 말고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 쓰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거나, 오직 자기만을 위해 쓰는 이기적인 삶을 살 때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회개를 했어도 진정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얻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모두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회개는 교회에 와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은 세상 속입니다. 내가 캠퍼스에 있을 때, 내가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때, 내가 집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가사를 돌볼 때 회개로 인해 변화된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가 센터 밖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레포트를 남의 것을 베껴서 내는지 안 내는지 잘 모릅니다. 직장에서 업무 처리를 공의롭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센터 밖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찾으십니다.
셋째, 참된 회개는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여기서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 뿐이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 세례는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회개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반면 성령 세례는 우리를 거듭나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또 불 세례는 죄를 아예 태워 없애는 정화의 세례입니다. 이 성령 세례와 물 세례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죄를 깨닫는 것에만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의식에 질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 같은 놈이 살아서 뭐해?’ 한탄만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후회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회개는 죄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키려면 눈을 들어 길과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새롭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불로 나의 모든 죄를 태우시고 없애버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만 죄문제가 해결됩니다. 회개한다 해 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물속에 열두 번을 들어갔다 나와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는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참된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길 기도합니다. 또한 진실한 회개로 삶에서 좋은 열매 맺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며 목자의 사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처음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세례 요한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올 해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 종교 개혁의 역사는 마르틴 루터의 작은 연구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사였던 루터가 로마서를 묵상하고 연구하던 중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 한 말씀이 루터를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곧 이어 골방에서 나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골방에서 말씀 묵상 중에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한 말씀을 깊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캠퍼스 영혼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자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우리 삶은 너무 복잡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빈들과 같은 골방이 필요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조금 물러나서 골방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한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우리가 빈들로 골방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도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침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말씀에 사로잡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우리는 요단강으로 나가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요즘에 ‘팩트 폭행’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팩트 폭행이란 부정할 수 없고 반박할 수도 없는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서 상대방이 잘못을 깨닫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왕비에게 거울이 ‘당신보다 백설 공주가 더 예뻐요’라고 말해주는 것 등을 사례로 들기도 합니다. 이때 제시된 팩트 때문에 폭행을 당한 것 같은 큰 충격을 받는다는 점에서 팩트 폭행이라고 불리웁니다. 죄 문제는 팩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팩트가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충격과 공포를 느끼기조차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 문제를 말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축복의 메시지만 전하고 싶지 이런 메시지는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모르고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회개 없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죄 문제를 이야기하고 회개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으로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에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아픔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마치 솜씨 좋은 외과의사가 죽어가던 환자의 암 덩어리를 수술로 제거해 살려주었을 때 감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돌직구 같은 메시지를 듣고 다 도망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뜨거운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요단강은 캠퍼스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헤롯왕처럼 회개의 메시지를 팩트 폭행으로 여기고 듣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하며 나아올 이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봄학기 캠퍼스에 나아가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도들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세상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나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해 아래 새 것은 없지만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임합니다. 변화는 나로부터, 나의 변화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들부터 먼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삶으로 맺으면 우리나라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새봄학기 우리 가운데 회개의 열매들이 풍성히 맺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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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10)_2021-09-19(주일)
어느 날 문득 한 번 얻은 구원이라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성도는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회개 중에서도 열매 맺는 회개를 못했을 경우 결국에는 버림받아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진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냥 흘려 듣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회개는 대체 어떻게 행하는 것인가? 여기 그 방법이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은 저마다 누구나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과 그 회개는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회개를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회개가 진정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회개가 됨으로 자신의 죄가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과연 내가 드린 회개 기도가 온전히 상달되어 그 죄들이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부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놀라운 말씀 중의 하나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간에는 내가 드린 회개가 진정한 회개였는지를 알아보고 어떻게 하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는 대체 무엇이며, 그러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동안 내가 왜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했으며 회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를 한다. 그렇다면 회개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되어 자신의 죄가 하늘의 행위책에서 지워지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에 관한 기본 상식과 그리 멀지는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회개는 3가지 측면의 회개 즉 깨닫고, 뉘우치고, 고치는 회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는 어떤 회개인가? 첫째로, 죄를 깨달아야 한다(지적인 측면)는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죄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회개도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을 찾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계명 법을 주셨고 더 크게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죄를 안 채 기도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제공하는 ‘회개기도문’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죄에 대한 24가지 항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죄를 뉘우쳐야 한다(감정적인 측면)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을 애통해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잘못 되었다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 죄가 우리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은 죄를 정말 뼈아프게 생각했던 사람이 구약시대에 살았다. 그는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황소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상한 심령과 통회(깊이 뉘우치는)하는 마음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시51:17). 그러므로 죄를 회개할 때에 통곡의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정적인 측면에 좀 약한 분들이라고 하겠다. 셋째는 죄를 고쳐야 한다(의지적인 측면)는 것이다. 죄를 지었던 현장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시 반복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했지만 다시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것이다. 임시 회개인 것이지 완전한 회개가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말씀도 바로 의지적인 측면의 회개다. 고로 오늘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란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이 세 번째 방면의 회개를 잘 모르는 자는 자기가 지금 회개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회개가 아직 덜된 상태에 놓여 있는지 모를 수 있다. 만약 그러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는 쭉정이라는 말을 듣고 바깥 어둔 데 내지는 불 못에 던져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를 위한 마지막 단계로서, 회개의 의지적인 측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는 가끔씩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문구에서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말은 ‘합당한’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언뜻 ‘타당한’, 혹은 ‘적합한’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뜻이 아니다. ‘합당한’이라는 단어는 ‘악시우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는 동사 ‘악사’에서 온 단어다. 그 뜻은 ‘무게가 나가다. 무게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단어가 뒤에 소유격을 달고 오면 ‘악시우스’는 ‘~만큼의 동일한 무게를 가지다. ~에 상응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회개에 적합한 무게를 가지는 열매’라는 뜻이며, 그 말은 자신이 진정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어떤 행동들 곧 그것에 상응하는 무게 있는 열매들을 가리킨다. 고로 진정 누군가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하고 있다면, 그는 누가 보더라도 눈에 보여지는 어떤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자기 남편에게 말을 건넸지만 남편이 자기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 어떤 아내들은 남편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궁시렁궁시렁거릴 수 있다. 남편이 되어 가지고 부탁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다며, 핀잔을 하거나 험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말을 퍼붓던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설거지를 하면서 하나님께 회개를 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 모시듯 섬겼다는데, 저는 제 남편을 제 자식처럼 부려 먹으려고 하였고 그렇게 안 해 준다고 무시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기도를 끝내면 그 사람의 회개 기도는 끝난 것인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드시 남편에게 다가가 “여보, 아침에 내 성질을 참지 못하고 궁시렁거렸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요 입이 방정이에요. 당신의 사정도 있을텐데 오직 내 생각만 했어요. 미안해요.”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남편이 먼저 말하기를 “여보,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당신의 말을 그만 흘려 듣고 말았어요.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아무리 바빠도 당신의 말을 꼭 경청해서 듣겠소.” 그러면 아내는 “아니에요. 제가 먼저 당신을 두고 험담을 했으니 사과할 사람은 바로 나이지요. 미안해요, 여보.” 그리고 “사랑해”하고 달려들어 와락 안아 준다. 이것이 바로 진정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라는 것이다.
4. 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왜 회개할 때에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는 회개를 해야 하는가? 그냥 하나님께 말로 혹은 마음을 다해 회개 기도해도 아니 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회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가 덜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식으로 회개를 다 끝마쳐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열매가 없는 회개를 하게 되면 마귀가 우리의 죄의 약점을 알고 그 방면에 계속해서 죄를 짓게 만들어서 결국 마귀의 손아귀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심판대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선고를 할 것인가? 그것은 “너는 쭉정이였느니라”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열매 없는 회개를 한 자는 결국 마귀의 손아귀에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십일조와 헌물(예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말3:8~9). 그런데 웬만한 그리스도인 치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의 월급이나 보너스 정도는 십일조로 내고 살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들어오는 용돈들이 있다. 그럴 때에는 5천 원이나 만 원 정도를 십일조로 내야 하는데, 그것을 매번 십일조로 내자니 번거롭고 해서 모아서 내겠다고 했다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달에 나가야 할 돈이 너무 많아서 십일조를 내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며칠 후에 내야지 하고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제가 이번에 십일조를 떼어 먹었어요. 죄송해요”하고 회개 기도만 하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러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죄를 용서받는 것인가? 아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회개하고 있는 장면을 하나님도 보고 계시지만 귀신들도 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귀신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데 문제가 있다고 간파하고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을 만든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면 자신의 약점 때문에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되어 계속해서 반복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열매가 뒤따르지 않는 회개를 하면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 반복적으로 죄만 짓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는 쭉정이가 되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든지 아니면 쭉정이를 불태울 꺼지지 않는 맹렬한 불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마3:12).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할 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국 자라지 못할 것이다. 계속 죄가 깨끗이 제거되지도 못한 채 반복적으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죄들로 인해 우리의 신앙은 결국 껍데기만 갖춘 신앙인 곧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에 따라 죄를 짓도록 계속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 알곡의 모양은 갖추긴 했지만 결국 그 속이 차지 못해 쭉정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죽는 날, 주님의 심판대에서 쭉정이라는 판정을 받고는 쭉정이를 불태울 맹렬한 불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정말 그 무시무시한 지옥에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셋째, 열매 없는 회개를 하는 생활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주님 앞에 행한 일들마저도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에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럴지라도 그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들마저 제대로 상급으로 계산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의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린 헌신이 온전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린 모든 헌신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열심히는 살았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권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열매 맺는 회개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왕이면 천국에서 시녀 신부로 살기보다는 왕권 신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5.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회개할 때에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회개 곧 열매 맺는 회개를 할 수 있는가? 그 방법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2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첫째는, 열매 맺는 회개를 하려면 ‘즉시’ 하라는 것이다(마3:7,10). 왜냐하면 뒤로 연기했다가는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 위에 놓여 있는 싯점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회개를 뒤에 가서 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고로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려면 지금 가서 사과하기를 바란다. 용서해 줄 사람이 있으면 지금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즉시 감사를 표현하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즉시 지금 가서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남을 도울 때에 없는 돈을 빌려다가 할 일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 정도로 한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감당할 만한 수준에서 하면 된다. 남을 도와준다고 행한 것이 내 가정을 힘겹게 만들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인 회개는 사람에게만 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도하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지금 즉시 무릎을 꿇으라. 예배를 빼먹고 있었다면 즉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든지 오는 주일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라. 혹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와 예물을 빼먹었다면 즉시 그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상 생활이 되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바치라는 말이 아니다. 떼어 먹은 것을 다 드리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서 주님 앞에 드리면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철저히 계산해서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더 이상 십일조와 예물을 가지고 사탄이 나를 장난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것이 힘들더라도 죄의 무게에 상응하는 회개를 시행하라는 것이다. 지은 죄가 클수록 열매 맺는 회개를 하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유부남과 살고 있다고 치자. 상대가 원 가정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에게 집을 얻어 주고 매월 돈도 준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을 떠나 보낸다면 내가 살기가 막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유부남하고 살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것은 음행의 죄로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는 죄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런데 주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막9:43,45,47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다. 열매 맺는 회개를 실천하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 아무리 열매 맺는 회개를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져서 숨도 제대로 한 번 쉬지 못한 채 영원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귀신들이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수만 가지 고문을 주는 그 장소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지 아니한가? 고로 죄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죄를 청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가 무엇에 중독되어 있다거나, 물질에 묶여 있다거나, 사람에 묶여 있다면, 그곳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신이 장차 그 영원한 지옥에 던져질 것을 생각하고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를 바란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6. 나오며
우리가 열매를 맺는 회개를 실천한다는 것은 실로 힘겹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자기의 핸드폰도 정지시키고 기도원에 들어가 한 달이나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으실 분이 결코 아니시다. 회개를 한 후에 들이닥칠 물질의 문제를 두고서도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난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다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그분이 진정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를 하려고 몸부림 치는 것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으실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청산하려는 그 의지를 볼 때에 한걸음으로 달려오실 분이시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에게 힘도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실 분이시다. 그분을 믿으라. 그분은 전능자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동안 죄를 끊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죄를 끊어 내지 못했던 것일 뿐, 우리가 진정 죄를 끊어 내려고 결단하고 실행에 들어가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능히 감당하시도록 도와주실 분이시다. 그렇다. 회개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끝내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은 반드시 행위를 고쳐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죄를 계속 그냥 놔두게 되면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약점이 될 것이고 그것을 빌미로 사탄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반복적으로 죄만 짓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속이 차지 않은 곡식은 쭉정이가 되어 불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라도 결단하라. 계속해서 사탄 마귀의 노예로 살다가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지 말라. 지금 힘들더라도 그 죄를 끊어냄으로서 주님이 도와주시는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라. 주님은 죄짓다가 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채 있는 자를 거룩한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라. 죄를 회개하다가도 그것을 끝내지 못해 미완성된 채 그대로 죄를 남겨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열매 맺는 회개를 하라. 그것은 깨닫는 즉시 실천할 때 가장 잘 행할 수 있다. (건투를 빈다..지워주세요)
2021년 09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백석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장종현 목사에게 듣는 ‘백석’ 정체성 – 이기는 그에게는 흰 돌을 주리라 – 2. 백석인의 신앙(2)
회개는 생명 회복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죄의 벌을 받는 것 말고는 달리 용서 받을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 살던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삶과 생명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결단이요 엄숙한 결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는 스스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백석인들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을 강조합니다.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서로를 용납하여 하나 됨을 추구하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도 수많은 잘못들이 있었습니다. 악한 사탄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버가모 교회처럼 관용이라는 미명 아래 죄와 타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빌 1:10).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먼저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백석인이라면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단지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롬 12:2).
우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석학원과 백석총회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힘차게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백석인으로서 성경을 머리로만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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