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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본문 – 히브리서 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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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주석 – 공동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있다(Bruce, Hewitt). … 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 Lane). … 목임을 시사한다. … 들과 교제를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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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히브리서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헬라어 히브리서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굿윌러 2020. 10. 28. 23:22.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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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히브리서 13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 …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3/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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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1145-히브리서 13장 – 네이버 블로그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상기하여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이 혼인을 순결하고 정숙하게 유지하고 더럽히지 않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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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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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히 13:1~25)
제목: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 (히 13장) ·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 2.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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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성도의 예배와 교제 – 구조 매일성경큐티 새벽 …
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으로, 성도들이 해야 할 필수적인 두 가지의 일을 … 히브리서 13장의 구조 매일성경큐티 새벽설교주제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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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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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8절~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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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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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 히브리서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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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본문 내용
히브리서 13장 본문 내용 ; 새 언약의 중보자와 더 좋은 성막과 제물 되신 JX (8:1-10:18) · 더 좋은 제물(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9:23-10:18) ;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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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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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성도가 해야 할 일[히 13장] [내용 … – 디럭스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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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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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8.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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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주석
13장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
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
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
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
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Bruce, Hewitt).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
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
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
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
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
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
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
목임을 시사한다.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
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
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음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
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
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
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
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하나님이 심판하시
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
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
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
테'(* )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
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
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
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
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
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
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
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
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
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
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
(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
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
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
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
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
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
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 )은 본장에서 본
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
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
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
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
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
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
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
크바신'(* )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
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
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
기까지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
고 따라야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
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
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
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
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
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
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
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
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
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
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
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잇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
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
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
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
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
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
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
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
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
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
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
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
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
(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
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
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
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
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
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
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
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
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
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
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
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
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
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
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
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
Hewitt, Morris). 그fl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
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
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
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
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
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
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
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
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
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
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
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
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
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
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
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
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
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
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
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
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
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
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
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
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
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
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
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
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
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
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
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
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히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
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
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
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
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
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되므로 하나
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
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
(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
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
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
하지 않다.
=====13:20,21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
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
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
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메간'(* )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
(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
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
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
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
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
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
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
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
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
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
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 )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
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
63:11-14) 죽은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이끝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
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
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
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
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
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
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
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
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
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
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
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
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
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
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
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
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
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
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
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
(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
)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Hewitt, Lane).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
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 )은 완료 시상으
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
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
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
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
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
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
한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
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
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
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
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 )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
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 혹자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
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
렵다(Morris, Bruce, Hewitt).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
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
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
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
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
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히브리서 주석 끝========================
헬라어 히브리서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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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필라델피아 메네토
개역개정,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새번역,1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우리말성경,1 형제 사랑하기를 지속하십시오.
가톨릭성경,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영어NIV,1 Keep on loving each other as brothers.
영어NASB,1 Let love of the brethren continue.
영어MSG,1 Stay on good terms with each other, held together by love.
영어NRSV,1 Let mutual love continue.
헬라어신약Stephanos,1 η φιλαδελφια μενετω
라틴어Vulgate,1 caritas fraternitatis maneat
히브리어Modern,1 אהבת האחים תעמד׃
성 경: [히13: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Bruce, Hewitt).
테스 필롴세니아스 메 에필란다네스데 디아 타우테스 가르 엘라돈 티네스 크세니산테스 앙겔루스
개역개정,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새번역,2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가톨릭성경,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어NIV,2 Do not forget to entertain strangers, for by so doing some peopl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영어NASB,2 Do not neglect to show hospitality to strangers, for by this som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영어MSG,2 Be ready with a meal or a bed when it’s needed. Why, some have extended hospitality to angels without ever knowing it!
영어NRSV,2 Do not neglect to show hospitality to strangers, for by doing that som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헬라어신약Stephanos,2 της φιλοξενιας μη επιλανθανεσθε δια ταυτης γαρ ελαθον τινες ξενισαντες αγγελους
라틴어Vulgate,2 hospitalitatem nolite oblivisci per hanc enim latuerunt quidam angelis hospitio receptis
히브리어Modern,2 הכנסת ארחים אל תשכחו כי יש אשר הכניסו בה מלאכים ולא ידעו׃
성 경: [히13: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임을 시사한다.
밈네스케스데 톤 데스미온 호스 쉰데데메노이 톤 카쿠쿠메논 호스 카이 아우토이 온테스 엔 소마티
개역개정,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새번역,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우리말성경,3 여러분은 자신이 함께 갇혀 있는 것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을 가진 사람들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가톨릭성경,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영어NIV,3 Remember those in prison as if you were their fellow prisoners, and those who are mistreated as if you yourselves were suffering.
영어NASB,3 Remember the prisoners, as though in prison with them, and those who are ill-treated, since you yourselves also are in the body.
영어MSG,3 Regard prisoners as if you were in prison with them. Look on victims of abuse as if what happened to them had happened to you.
영어NRSV,3 Remember those who are in prison, as though you were in prison with them; those who are being tortured, as though you yourselves were being tortured.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ιμνησκεσθε των δεσμιων ως συνδεδεμενοι των κακουχουμενων ως και αυτοι οντες εν σωματι
라틴어Vulgate,3 mementote vinctorum tamquam simul vincti et laborantium tamquam et ipsi in corpore morantes
히브리어Modern,3 זכרו את האסורים כאלו אתם אסורים עמהם ואת הנלחצים באשר גם אתם בבשר׃
성 경: [히13: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10:32-34; 11:36-38, Filson).
티미오스 호 가모스 엔 파신 카이 헤 코이테 아미안토스 포르누스 가르 카이 모이쿠스 크리네이 호 데오스
개역개정,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새번역,4 ㉠모두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 ㉠또는 ‘모두에게 혼인은 귀하니, 잠자리는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사람들과 간음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영어NIV,4 Marriage should be honored by all, and the marriage bed kept pure, for God will judge the adulterer and all the sexually immoral.
영어NASB,4 Let marriage be held in honor among all, and let the marriage bed be undefiled; for fornicators and adulterers God will judge.
영어MSG,4 Honor marriage, and guard the sacredness of sexual intimacy between wife and husband. God draws a firm line against casual and illicit sex.
영어NRSV,4 Let marriage be held in honor by all, and let the marriage bed be kept undefiled; for God will judge fornicators and adulterers.
헬라어신약Stephanos,4 τιμιος ο γαμος εν πασιν και η κοιτη αμιαντος πορνους δε και μοιχους κρινει ο θεος
라틴어Vulgate,4 honorabile conubium in omnibus et torus inmaculatus fornicatores enim et adulteros iudicabit Deus
히브리어Modern,4 האישות תיקר בכל וערש יצועכם אל יחלל את הזנים ואת המנאפים ידין אלהים׃
성 경: [히13: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아필라르귀로스 호 트로포스 아르쿠메노이 토이스 파루신 아우토스 가르 에이레켄 우 메 세 아노 욷 우 메 세 엥카탈리포
개역개정,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번역,5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 / ㉡신 31:6; 8; 창 28:15; 수 1:5
우리말성경,5 돈을 사랑하며 살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께서는 친히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고 또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31:6
가톨릭성경,5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어NIV,5 Keep your lives free from the love of money and be content with what you have, because God has said, “Never will I leave you; never will I forsake you.”
영어NASB,5 Let your character be free from the love of money, being content with what you have; for He Himself has said, “I WILL NEVER DESERT YOU, NOR WILL I EVER FORSAKE YOU,”
영어MSG,5 Don’t be obsessed with getting more material things. Be relaxed with what you have. Since God assured us, “I’ll never let you down, never walk off and leave you,”
영어NRSV,5 Keep your lives free from the love of money, and be content with what you have; for he has said, “I will never leave you or forsak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5 αφιλαργυρος ο τροπος αρκουμενοι τοις παρουσιν αυτος γαρ ειρηκεν ου μη σε ανω ουδ ου μη σε εγκαταλιπω
라틴어Vulgate,5 sint mores sine avaritia contenti praesentibus ipse enim dixit non te deseram neque derelinquam
히브리어Modern,5 רחקו מאהבת כסף ושמחו בחלקכם כי הוא אמר לא ארפך ולא אעזבך׃
성 경: [히13:5,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 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호스테 다르룬타스 헤마스 레게인 퀴리오스 에모이 보에도스 카이 우 포베데소마이 티 포이에세이 모이 안드로포스
개역개정,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새번역,6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 ㉢시 118:6; 7
우리말성경,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말합니다.“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시118:6-7
가톨릭성경,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영어NIV,6 So we say with confidence,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can man do to me?”
영어NASB,6 so that we confidently say,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SHALL MAN DO TO ME?”
영어MSG,6 we can boldly quote, God is there, ready to help; I’m fearless no matter what. Who or what can get to me?
영어NRSV,6 So we can say with confidence,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can anyone do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6 ωστε θαρρουντας ημας λεγειν κυριος εμοι βοηθος και ου φοβηθησομαι τι ποιησει μοι ανθρωπος
라틴어Vulgate,6 ita ut confidenter dicamus Dominus mihi adiutor non timebo quid faciat mihi homo
히브리어Modern,6 על כן נבטח ונאמר יהוה לי בעזרי לא אירא מה יעשה לי אדם׃
므네모뉴에테 톤 헤구메논 휘몬 호이티네스 엘랄레산 휘민 톤 로곤 투 데우 혼 아나데오룬테스 텐 엨바신 테스 아나스트로페스 미메이스데 텐 피스틴
개역개정,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새번역,7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우리말성경,7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산 삶의 결과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가톨릭성경,7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영어NIV,7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영어NASB,7 Remember those who led you,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and considering the result of their conduct, imitate their faith.
영어MSG,7 Appreciate your pastoral leaders who gave you the Word of God. Take a good look at the way they live, and let their faithfulness instruct you, as well as their truthfulness. There should be a consistency that runs through us all.
영어NRSV,7 Remember your leaders, those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νημονευετε των ηγουμενων υμων οιτινες ελαλησαν υμιν 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ων αναθεωρουντες την εκβασιν της αναστροφης μιμεισθε την πιστιν
라틴어Vulgate,7 mementote praepositorum vestrorum qui vobis locuti sunt verbum Dei quorum intuentes exitum conversationis imitamini fidem
히브리어Modern,7 זכרו את מנהיגיכם אשר הגידו לכם את דבר האלהים בינו לאחרית דרכם ולכו באמונתם׃
성 경: [히13: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은 본장에서 본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 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크바신'(*)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 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에크데스 카이 세메론 호 아우토스 카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개역개정,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새번역,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말성경,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가톨릭성경,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영어NIV,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영어NASB,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yes and forever.
영어MSG,8 For Jesus doesn’t change–yesterday, today, tomorrow, he’s always totally himself.
영어NRSV,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헬라어신약Stephanos,8 ιησους χριστος χθες και σημερον ο αυτος και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라틴어Vulgate,8 Iesus Christus heri et hodie ipse et in saecula
히브리어Modern,8 ישוע המשיח גם תמול גם היום הוא הוא וגם לעולמים׃
성 경: [히13: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디다카이스 포이킬라이스 카이 크세나이스 메 파라페레스데 칼론 가르 카리티 베바이우스다이 테 카르디안 우 브로마신 엔 호이스 우크 오펠레데산 호이 페리파툰테스
개역개정,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새번역,9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 ㉣그, ‘음식으로가 아니라’
우리말성경,9 여러분은 갖가지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마음은 음식이 아니라 은혜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에 집착한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갖가지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가지 마십시오. 음식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 은총으로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규정에 따라 살아간 이들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9 Do not be carried away by all kinds of strange teachings. It is good for our hearts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ceremonial foods, which are of no value to those who eat them.
영어NASB,9 Do not be carried away by varied and strange teachings; for it is good for the heart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foods, through which those who were thus occupied were not benefited.
영어MSG,9 Don’t be lured away from him by the latest speculations about him. The grace of Christ is the only good ground for life. Products named after Christ don’t seem to do much for those who buy them.
영어NRSV,9 Do not be carried away by all kinds of strange teachings; for it is well for the heart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regulations about food, which have not benefited those who observ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9 διδαχαις ποικιλαις και ξεναις μη περιφερεσθε καλον γαρ χαριτι βεβαιουσθαι την καρδιαν ου βρωμασιν εν οις ουκ ωφεληθησαν οι περιπατησαντες
라틴어Vulgate,9 doctrinis variis et peregrinis nolite abduci optimum enim est gratia stabiliri cor non escis quae non profuerunt ambulantibus in eis
히브리어Modern,9 אל תנועו בתורות שנות וזרות כי טוב לכונן לבנו בחסד ולא בעניני מאכל אשר לא הועילו למתהלכים בהם׃
성 경: [히13: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코멘 뒤시아스테리온 엨스 후 파게인 우크 에쿠신 엨수시안 호이 테 스케네 라트류온테스
개역개정,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새번역,10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에 놓은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0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막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0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는데, 성막에 봉직하는 이들은 이 제단의 음식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영어NIV,10 We have an altar from which those who minister at the tabernacle have no right to eat.
영어NASB,10 We have an altar, from which those who serve the tabernacle have no right to eat.
영어MSG,10 The altar from which God gives us the gift of himself is not for exploitation by insiders who grab and loot.
영어NRSV,10 We have an altar from which those who officiate in the tent have no right to eat.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χομεν θυσιαστηριον εξ ου φαγειν ουκ εχουσιν εξουσιαν οι τη σκηνη λατρευοντες
라틴어Vulgate,10 habemus altare de quo edere non habent potestatem qui tabernaculo deserviunt
히브리어Modern,10 יש לנו מזבח אשר אינם רשאים לאכל מעליו משרתי המשכן׃
성 경: [히13:10]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혼 가르 에이스페레타이 조온 토 하이마 페리 하마르티아스 에이스 타 하기아 디아 투 아르키에레오스 투톤 타 소마타 카타카이에타이 엨소 테스 파렘볼레스
개역개정,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새번역,11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니다.
우리말성경,11 이는 그 짐승의 피는 죄를 위해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갖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 밖에서 불태워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1 대사제는 짐승들의 피를 속죄 제물로 성소 안에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의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웁니다.
영어NIV,11 The high priest carries the blood of animals into the Most Holy Place as a sin offering, but the bodies are burned outside the camp.
영어NASB,11 For the bodies of those animals whose blood is brought into the holy place by the high priest as an offering for sin, are burned outside the camp.
영어MSG,11 In the old system, the animals are killed and the bodies disposed of outside the camp. The blood is then brought inside to the altar as a sacrifice for sin.
영어NRSV,11 For the bodies of those animals whose blood is brought into the sanctuary by the high priest as a sacrifice for sin are burned outside the camp.
헬라어신약Stephanos,11 ων γαρ εισφερεται ζωων το αιμα περι αμαρτιας εις τα αγια δια του αρχιερεως τουτων τα σωματα κατακαιεται εξω της παρεμβολης
라틴어Vulgate,11 quorum enim animalium infertur sanguis pro peccato in sancta per pontificem horum corpora cremantur extra castra
히브리어Modern,11 כי הבהמות אשר הובא דמן בקדש לכפרת החטא על ידי הכהן הגדול גויתיהן נשרפו מחוץ למחנה׃
성 경: [히13:1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디오 카이 예수스 히나 하기아세 디아 투 이디우 하이마토스 톤 라온 엨소 테스 퓔레스 에파덴
개역개정,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새번역,12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말성경,12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영어NIV,12 And so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영어NASB,12 Therefore Jesus also, that He might sanctify the people through His own blood, suffered outside the gate.
영어MSG,12 It’s the same with Jesus. He was crucified outside the city gates–that is where he poured out the sacrificial blood that was brought to God’s altar to cleanse his people.
영어NRSV,12 Therefore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in order to sanctify the people by his own bloo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διο και ιησους ινα αγιαση δια του ιδιου αιματος τον λαον εξω της πυλης επαθεν
라틴어Vulgate,12 propter quod et Iesus ut sanctificaret per suum sanguinem populum extra portam passus est
히브리어Modern,12 בעבור זאת גם ישוע למען קדש בדמו את העם ענה מחוץ לשער׃
성 경: [히13:1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토이뉜 엨세르코메다 프로스 아우톤 엨소 테스 파렘볼레스 톤 오네이디스몬 아우투 페론테스
개역개정,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새번역,13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우리말성경,13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갑시다.
가톨릭성경,13 그러니 진영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치욕을 함께 짊어집시다.
영어NIV,13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
영어NASB,13 Hence, let us go out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His reproach.
영어MSG,13 So let’s go outside, where Jesus is, where the action is–not trying to be privileged insiders, but taking our share in the abuse of Jesus.
영어NRSV,13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and bear the abuse he endured.
헬라어신약Stephanos,13 τοινυν εξερχωμεθα προς αυτον εξω της παρεμβολης τον ονειδισμον αυτου φεροντες
라틴어Vulgate,13 exeamus igitur ad eum extra castra inproperium eius portantes
히브리어Modern,13 לכן נצאה נא אליו אל מחוץ למחנה ונשא את חרפתו׃
성 경: [히13:1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우 가르 에코멘 호데 메누산 폴린 알라 텐 멜루산 에피제투멘
개역개정,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새번역,14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4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아니라 다만 장차 올 도시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4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
영어NIV,14 For here we do not have an enduring city, but we are looking for the city that is to come.
영어NASB,14 For here we do not have a lasting city, but we are seeking the city which is to come.
영어MSG,14 This “insider world” is not our home. We have our eyes peeled for the City about to come.
영어NRSV,14 For here we have no lasting city, but we are looking for the city that is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υ γαρ εχομεν ωδε μενουσαν πολιν αλλα την μελλουσαν επιζητουμεν
라틴어Vulgate,14 non enim habemus hic manentem civitatem sed futuram inquirimus
히브리어Modern,14 כי פה אין לנו עיר עמדת כי את העתידה אנחנו מבקשים׃
성 경: [히13:1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디 아우투 운 아나페로멘 뒤시안 아이네세오스 디아 판토스 토 데오 퉅 에스틴 카르폰 케일레온 호몰로군톤 토 오노마티 아우투
개역개정,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새번역,15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말성경,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가톨릭성경,15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영어NIV,15 Through Jesus, therefore, let us continually offer to God a sacrifice of praise–the fruit of lips that confess his name.
영어NASB,15 Through Him then, let us continually offer up a sacrifice of praise to God, that is, the fruit of lips that give thanks to His name.
영어MSG,15 Let’s take our place outside with Jesus, no longer pouring out the sacrificial blood of animals but pouring out sacrificial praises from our lips to God in Jesus’ name.
영어NRSV,15 Through him, then, let us continually offer a sacrifice of praise to God, that is, the fruit of lips that confess his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15 δι αυτου ουν αναφερωμεν θυσιαν αινεσεως διαπαντος τω θεω τουτεστιν καρπον χειλεων ομολογουντων τω ονοματ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5 per ipsum ergo offeramus hostiam laudis semper Deo id est fructum labiorum confitentium nomini eius
히브리어Modern,15 לכן נקריב על ידו בכל עת זבח תודה לאלהים היא פרי שפתים המודות לשמו׃
성 경: [히13:15,1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테스 데 유포이이아스 카이 코이노니아스 메 에필란다네스데 토티아우타이스 가르 뒤시아이스 유아레스테이타이 호 데오스
개역개정,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새번역,16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말성경,16 그리고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가톨릭성경,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영어NIV,16 And do not forget to do good and to share with others,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pleased.
영어NASB,16 And do not neglect doing good and sharing;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pleased.
영어MSG,16 Make sure you don’t take things for granted and go slack in working for the common good; share what you have with others. God takes particular pleasure in acts of worship–a different kind of “sacrifice”–that take place in kitchen and workplace and on the streets.
영어NRSV,16 Do not neglect to do good and to share what you have, for such sacrifices are pleasing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6 της δε ευποιιας και κοινωνιας μη επιλανθανεσθε τοιαυταις γαρ θυσιαις ευαρεστειται ο θεος
라틴어Vulgate,16 beneficientiae autem et communionis nolite oblivisci talibus enim hostiis promeretur Deus
히브리어Modern,16 ואל תשכחו לגמל חסד ולתת לאביונים כי זבחים כאלה יערבו לאלהים׃
페이데스데 토이스 헤구메노이스 휘몬 카이 휘페이케테 아우토이 가르 아그륖누신 휘페르 톤 프쉬콘 휘몬 호스 로곤 알뤼시텔레스 히나 메타 카라스 투토 포이오신 카이 메 스테나존테스 가르 휘민 투토
개역개정,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새번역,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말성경,17 여러분을 인도하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순종하십시오. 이는 그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께 아뢰야 할 사람들인 것처럼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기쁨으로 이 일을 행하게 하고 근심함으로 행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영어NIV,17 Obey your leaders and submit to their authority. They keep watch over you as men who must give an account. Obey them so that their work will be a joy, not a burden, for that would be of no advantage to you.
영어NASB,17 Obey your leaders, and submit to them; for they keep watch over your souls, as those who will give an account. Let them do this with joy and not with grief, for this would be unprofitable for you.
영어MSG,17 Be responsive to your pastoral leaders. Listen to their counsel. They are alert to the condition of your lives and work under the strict supervision of God. Contribute to the joy of their leadership, not its drudgery. Why would you want to make things harder for them?
영어NRSV,17 Obey your leaders and submit to them, for they are keeping watch over your souls and will give an account. Let them do this with joy and not with sighing–for that would be harmful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7 πειθεσθε τοις ηγουμενοις υμων και υπεικετε αυτοι γαρ αγρυπνουσιν υπερ των ψυχων υμων ως λογον αποδωσοντες ινα μετα χαρας τουτο ποιωσιν και μη στεναζοντες αλυσιτελες γαρ υμιν τουτο
라틴어Vulgate,17 oboedite praepositis vestris et subiacete eis ipsi enim pervigilant quasi rationem pro animabus vestris reddituri ut cum gaudio hoc faciant et non gementes hoc enim non expedit vobis
히브리어Modern,17 שמעו אל מנהיגיכם והכנעו מפניהם כי שקדים הם על נפשתיכם כעתידים לתת חשבון למען יעשו זאת בשמחה ולא באנחה כי זאת לא להועיל לכם׃
성 경: [히13:1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프로슈케스데 페리 헤몬 페리도메다 가르 호티 칼렌 쉬네이데신 에코멘 엔 파신 칼로스 델론테스 아나스트레페스다이
개역개정,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새번역,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한 점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우리말성경,18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모든 일을 올바르게 행하며 선한 양심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가톨릭성경,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늘 올바로 처신하려고 하기에 바른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영어NIV,18 Pray for us. We are sure that we have a clear conscience and desire to live honorably in every way.
영어NASB,18 Pray for us, for we are sure that we have a good conscience, desiring to conduct ourselves honorably in all things.
영어MSG,18 Pray for us. We have no doubts about what we’re doing or why, but it’s hard going and we need your prayers. All we care about is living well before God.
영어NRSV,18 Pray for us; we are sure that we have a clear conscience, desiring to act honorably in all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18 προσευχεσθε περι ημων πεποιθαμεν γαρ οτι καλην συνειδησιν εχομεν εν πασιν καλως θελοντες αναστρεφεσθαι
라틴어Vulgate,18 orate pro nobis confidimus enim quia bonam conscientiam habemus in omnibus bene volentes conversari
히브리어Modern,18 התפללו בעדנו כי ידענו אשר שלמה מחשבתנו ונחפץ ללכת דרך ישרה בכל׃
성 경: [히13:1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페리쏘테로스 데 파라칼로 투토 포이에사이 히나 타키온 아포카타스타도 휘민
개역개정,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새번역,19 내가 여러분에게 좀더 속히 돌아가게 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더욱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말성경,19 내가 여러분에게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
가톨릭성경,19 내가 여러분에게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를 더욱 간곡히 부탁합니다.
영어NIV,19 I particularly urge you to pray so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soon.
영어NASB,19 And I urge you all the more to do this,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the sooner.
영어MSG,19 Pray that we may be together soon.
영어NRSV,19 I urge you all the more to do this, so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very soon.
헬라어신약Stephanos,19 περισσοτερως δε παρακαλω τουτο ποιησαι ινα ταχιον αποκατασταθω υμιν
라틴어Vulgate,19 amplius autem deprecor vos hoc facere ut quo celerius restituar vobis
히브리어Modern,19 ובחזקה אבקש מכם לעשות זאת למען אושב אליכם במהרה׃
성 경: [히13:1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호 데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호 아나가곤 에크 네크론 톤 포이메나 톤 프로바톤 톤 메간 엔 하이마티 디아데케스 아이오니우 톤 퀴리온 헤몬 예순
개역개정,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새번역,20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우리말성경,20 평강의 하나님, 곧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이끌어 내신 분이
가톨릭성경,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영어NIV,20 May the God of peace, who through the blood of the eternal covenant brought back from the dead our Lord Jesus, that great Shepherd of the sheep,
영어NASB,20 Now the God of peace, who brought up from the dead the great Shepherd of the sheep through the blood of the eternal covenant, even Jesus our Lord,
영어MSG,20 May God, who puts all things together, makes all things whole, Who made a lasting mark through the sacrifice of Jesus, the sacrifice of blood that sealed the eternal covenant, Who led Jesus, our Great Shepherd, up and alive from the dead,
영어NRSV,20 Now may the God of peace, who brought back from the dead our Lord Jesus, the great shepherd of the sheep, by the blood of the eternal covenant,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 δε θεος της ειρηνης ο αναγαγων εκ νεκρων τον ποιμενα των προβατων τον μεγαν εν αιματι διαθηκης αιωνιου τον κυριον ημων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20 Deus autem pacis qui eduxit de mortuis pastorem magnum ovium in sanguine testamenti aeterni Dominum nostrum Iesum
히브리어Modern,20 ואלהי השלום אשר בדם ברית עולם העלה מן המתים את רעה הצאן הגדול את ישוע אדנינו׃
성 경: [히13:20,2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메간'(*)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 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63:11-14)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카타르티사이 휘마스 엔 판티 아가도 에이스 토 포이에사이 토 델레마 아우투 포이온 엔 헤민 토 유아레스톤 에노피온 아우투 디아 예수 크리스투 호 헤 돜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아멘
개역개정,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새번역,21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러분에게’
우리말성경,21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 것으로 여러분을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가톨릭성경,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영어NIV,21 equip you with everything good for doing his will, and may he work in us what is pleasing to him,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영어NASB,21 equip you in every good thing to do His will, working in us that which is pleasing in His sight,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 the glory forever and ever. Amen.
영어MSG,21 Now put you together, provide you with everything you need to please him, Make us into what gives him most pleasure, by means of the sacrifice of Jesus, the Messiah. All glory to Jesus forever and always! Oh, yes, yes, yes.
영어NRSV,21 make you complete in everything good so that you may do his will, working among us that which is pleasing in his sight,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 the glory forever and ever. Amen.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ταρτισαι υμας εν παντι εργω αγαθω εις το ποιησαι το θελημα αυτου ποιων εν υμιν το ευαρεστον ενωπιον αυτου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ω η δοξα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των αιωνων αμην
라틴어Vulgate,21 aptet vos in omni bono ut faciatis voluntatem eius faciens in vobis quod placeat coram se per Iesum Christum cui gloria in saecula saeculorum amen
히브리어Modern,21 הוא ישלימכם בכל מעשה טוב לעשות רצונו בפעלו בכם את הרצוי לפניו ביד ישוע המשיח אשר לו הכבוד לעולמי עולמים אמן׃
파라칼로 데 휘마스 아델포이 아네케스데 투 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카이 가르 디아 브라케온 에페스테일라 휘민
개역개정,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새번역,22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이 권면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권유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짤막하게 썼습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22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 권면의 말을 용납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간단히 썼습니다.
가톨릭성경,22 형제 여러분, 이렇게 간단히 적어 보내니 이 격려의 말을 잘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영어NIV,22 Brothers, I urge you to bear with my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you only a short letter.
영어NASB,22 But I urge you, brethren, bear with this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to you briefly.
영어MSG,22 Friends, please take what I’ve written most seriously. I’ve kept this as brief as possible; I haven’t piled on a lot of extras.
영어NRSV,22 I appeal to you, brothers and sisters, bear with my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to you briefly.
헬라어신약Stephanos,22 παρακαλω δε υμας αδελφοι ανεχεσθε του λογου της παρακλησεως και γαρ δια βραχεων επεστειλα υμιν
라틴어Vulgate,22 rogo autem vos fratres sufferatis verbum solacii etenim perpaucis scripsi vobis
히브리어Modern,22 ואבקש מכם אחי שאו נא דבר התוכחה כי כתבתי אליכם בקצרה׃
성 경: [히13:2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기노스케테 톤 아델폰 헤몬 티모데온 아포렐뤼메논 멛 후 에안 타키온 에르케타이 옾소마이 휘마스
개역개정,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새번역,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풀려나온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석방된 것을 알려 드립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3 우리의 형제 티모테오가 풀려났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가 빨리 오면 내가 그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23 I want you to know that our brother Timothy has been released. If he arrives soon, I will come with him to see you.
영어NASB,23 Take notice that our brother Timothy has been released, with whom, if he comes soon, I shall see you.
영어MSG,23 You’ll be glad to know that Timothy has been let out of prison. If he leaves soon, I’ll come with him and get to see you myself.
영어NRSV,23 I want you to know that our brother Timothy has been set free; and if he comes in time, he will be with me when I se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3 γινωσκετε τον αδελφον τιμοθεον απολελυμενον μεθ ου εαν ταχιον ερχηται οψομαι υμας
라틴어Vulgate,23 cognoscite fratrem nostrum Timotheum dimissum cum quo si celerius venerit videbo vos
히브리어Modern,23 ודעו כי טימותיוס אחינו יצא מבית האסורים והיה אם יבא במהרה אראה אתו את פניכם׃
성 경: [히13:2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아스파사스데 판타스 투스 헤구메누스 휘몬 카이 판타스 투스 하기우스 아스파존타이 휘마스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
개역개정,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새번역,24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성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우리말성경,24 여러분을 지도하는 모든 사람들과 온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가톨릭성경,24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영어NIV,24 Greet all your leaders and all God’s people. Those from Italy send you their greetings.
영어NASB,24 Greet all of your leaders and all the saints. Those from Italy greet you.
영어MSG,24 Say hello to your pastoral leaders and all the congregations. Everyone here in Italy wants to be remembered to you.
영어NRSV,24 Greet all your leaders and all the saints. Those from Italy send you greeting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σπασασθε παντας τους ηγουμενους υμων και παντας τους αγιους ασπαζονται υμας οι απο της ιταλιας
라틴어Vulgate,24 salutate omnes praepositos vestros et omnes sanctos salutant vos de Italia
히브리어Modern,24 שאלו לשלום כל מנהיגיכם ולשלום כל הקדשים בני ארץ איטליא שאלים לשלומכם׃
성 경: [히13:2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 혹자는 이탈리아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헤 카리스 메타 판톤 휘몬
개역개정,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새번역,25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 / ㉦다른 고대 사본들은 절 끝에 ‘아멘’이 있음
우리말성경,25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가톨릭성경,25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영어NIV,25 Grace be with you all.
영어NASB,25 Grace be with you all.
영어MSG,25 Grace be with you, every one.
영어NRSV,25 Grace be with all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5 η χαρις μετα παντων υμων αμην [προς εβραιους εγραφη απο της ιταλιας δια τιμοθεου]
라틴어Vulgate,25 (없음)
히브리어Modern,25 החסד עם כלכם אמן׃
성 경: [히13:25]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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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히브리서 13장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있다(Bruce, Hewitt).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임을 시사한다.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음을 받아야만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 )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 )은 본장에서 본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크바신'(* )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잇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fl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아그뤼프누신'(*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히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20,21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메간'(* )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 )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63:11-14) 죽은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끝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 )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 )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것을 밝히고 있다.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혹자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11장과 12장이 믿음과 소망에 대해 다루었다면 본장은 사랑의 실천 면을 다루고 있
다. 본장의 주제는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레 19:18;신
6:4,5)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자로서
행해야 할 바른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불신앙과 인간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진정한 형제애에 대해 배울 수 있다.이제 본장의 내용
을 이해하기 위해 본장에 나타난 신학적 논의와 구조적 특징 및 당시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신학적 논의. 본장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본
장이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요, 또 하나는 본장의 마지막 인사가 바울의 것
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까) 전장까지의 문맥상의 연결을 볼 때, 본장이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는 본문으
로 간주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장은 논리상 앞장과의 명백한 연결어가 없이 갑작스럽게 돌입한다. 이로 인
해 본장은 어조와 주제에 있어서 앞장들과 사뭇 다르다.
둘째, 본장은 일반적인 훈계를 말하고 있을 뿐 본서에서 누누이 부각된 저자의 특별
한 관심을 담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본장은 논리의 일관성과 형식 및 내용에 있어서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
는 본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본장은 전장의 28절 내용과 연결되고 있으며, 본서에
서 주로 사용되었던 모세 오경과 시편등의 구약적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6,11절). 그
러므로 본장은 완전한 본 서신의 일부이다. 더욱이 본장은 교차 대칭 구조를 사용함으
로써 문학적 양식으로 기록된 앞의 장들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 본서의 서두가 서신서의 형식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본 서신의 서두는
분실되었거나 삭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본서를 억
지로 바울 서신의 형식에 꿰맞추려는 태도이다. 마카비서, 바나바서, 클레멘트서, 요
한일서에는 서신체 형식의 서두가 없다. 특히 본장은 앞장에서 볼 수 없는 저자와 독
자의 개인적 관계를 수록하고 있다.만약 본서가 12장이나 본장 17절에서 마감되었다
면, 이것은 편지의 형식이 아닌 논설문이나 단순한 교훈을 실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장을 통해 저자는 주제 전개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의 적용에도 관심을 표명
하고 있다. 즉 독자들의 신앙의 유익과 실천을 위한 권면과 마지막 인사말로 보아 본
서는 나름대로 서신서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장에는 바울의 서신체, 특히 빌립보서에서 두드러진 표현이 부분적으로 나타
난다(16절; 빌 4:18/21절; 빌 4:20/23절; 빌 2:19,23,24). 이렇듯 본장이 전체적으로
바울의 문체 및 사상과 다르면서도 부분적으로 바울의 서신체와 유사한 사실이 결코
본서의 완전성을 의심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2) 구조적 특징. 본장에는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는 본문과 교차 대칭 구조를 갖는
본문이 나타나 있다.
(까)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는 본문. 본장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1-6절). 이 부분은 성도들에게 당시의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알게 해
주며 성도들이 사랑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는 사랑의 삶을 살도
록 부름받은 자이다.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1-6절 내용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본 문| 주 요 어 휘 | 내 용 |
+—–+———————————————–+————————+
|1,2절| 필라델피아, 필롸세니아스 | 형제 사랑과 손님대접 |
| | ( , ) | |
+—–+———————————————–+————————+
| | 톤 데스미온, 톤 카투투메논 ( | 갇힌 자와 학대받는 사람|
| 3절 | , ) | 을 생각할 것 |
+—–+———————————————–+————————+
| 4절 | 가모스, 코이테 | 혼인을 귀하게 여길 것 |
| | ( , ) | |
+—–+———————————————–+————————+
|5,6절| 아필라르귀로스, 아르쿠메노이 | 돈을 사랑치 말고 가진 |
| | ( , )| 것으로 만족할 것 |
+—–+———————————————–+————————+
(다) 교차 대칭 구조를 갖는 본문. 10-16절은 구조상 7-9절 및 17-19절과 구별된
다. 10-16절의 구조를 보면, 10-12절은 설명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13-16절은 설명에
근거한 권면이다. 그리고 설명부와 권면부는 전체적으로 교차 대칭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설 명 > < 권 면 >
+—————————+ +—————————–+
| 10 절 | | 13 절 |
+—————————+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위+—+ +—–+그런즉( ,토이뉜) |
|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 | | |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 |
|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 | | | |( ,여소)으로 나아가자 |
|을 권이 없나니 | | | | |
+—————————+ | | +—————————–+
+—————————+ | | +—————————–+
| 11 절 | | | | 14 절 |
+—————————+ | | +—————————–+
|이는( ,가르) 죄를 위 | | | |이는( ,가르) 우리가 여 |
|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 | |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니| | | | |
|라. | | | | |
+—————————+ | | +—————————–+
+—————————+ | | +—————————–+
| 12 절 | | | | 15, 16 절 |
+—————————+ | | +—————————–+
|그러므로( ,디오) 예수|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
|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 | | |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
| ,여소) 고난을 받으셨느 | |기를 잊지 말라. |
|니라. | | |
+—————————+ +—————————–+
위의 도표를 보면 설명하는 구절들이 교차 대칭을 이루는 권면의 구절들에게 ‘동기’
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먼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 후에는 성도로서 짊어지고 나가야 할 고난을 제시하고 있다.
(3) 당시 성도들의 삶의 정황. 본서에서 성도들의 삶은 유대교로 인한 배교와 로마
로 인한 박해의 위험을 안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색다른 삶의 면모
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분열과 분쟁과 반목으로 일관된 ‘사랑의 결핍’이다.
1세기말에는 박해로 인해 갇힌 자가 많았으며,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는 유랑자들이
(strangers)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혼인을 순결하게 여기지 않는 사상들과 안락과 쾌
락만을 일삼는 윤리가 난무했다. 그리고 박해로 인한 궁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참되게 알지 못함
으로 인해 지도자와 성도간의 불일치가 존재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
고 시종 일관 사랑의 회복과 실천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본장은 하나님 사랑의 회복
과 이웃 사랑의 실천 및 지도자와의 관계 회복 등이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즉 1-19절은 사랑의 회복을 다루고
있으며, 20-25절은 마지막 인사와 축도를 다루고 있다.
1. 사랑의 회복(13:1-19)
본문은 나누는 공동체의 상황 아래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본문은 12:28에서 예배에 대한 주제적 암시를 받았다. 진정
한 예배란 삶의 전영역이 거룩해져야 한다는 확장된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
게 해드리는 삶에 대한 기꺼운 받아들임을 전제한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및 지도자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이웃 사랑.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인간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
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인간
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을 다루기에 앞서 인간 사랑을 다루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저자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을 위한 열정과 사랑의 냉랭함
으로 시작되는 성도간의 믿음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다. 본문에 드러난 이웃 사랑의 대
상은 누구인가 ?
(까) 형제 사랑. 성도가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형제 사랑이다. 본문
1절에는 ‘계속하라’라는 강한 어조의 명령형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
속적인 사랑이다(요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들이 각기 고난 속에서 서
로 격려하고 위로한다면 겹겹이 쌓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손님 대접.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여행자들이 거처할 숙소가 비위생적이었으
며 숙박 시설의 비용은 엄청나게 비쌌으므로 쉽게 이용할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복
음 전파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따스한 손길을 요청하는 가난한 나그네
들도 있었다. 우리의 삶에는 개방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집과 교회를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맞아들여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
신의 집과 교회를 개방해 놓고 어떤 사람이든 사랑으로 맞이하는 자의 처소를 찾아가
실 것이다(마 25:35-40).
(따) 갇힌 자를 생각함. 초대 교회 당시 감옥에 갇힌 자들은 매우 혹독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들의 음식과 필수품은 아주 형편 없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박해
의 상황으로 볼 때 복음으로 갇힌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본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
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양심수들의 모
습을 기억하게 해준다. 아직도 이 땅에는 자신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수많은
양심수들이 갇혀 있다. 우리는 부당하게 투옥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
도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고난받는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마) 순결과 자족. 본문은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게 비추어 볼 때
위배되는 비윤리성을 고발한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가치성의
몰락과 돈을 사랑하는 물질주의이다.
(a) 결혼의 순결성. 결혼이란 도덕적 순결과 서로에 대한 영원한 책임성을 전제
로 한다. ‘혼인을 귀히 여기라'(4절)는 말은 ‘결혼을 값지게 하라'(RSV) 또는 ‘하나님
의 창조 질서에 걸맞게 결혼 생활을 하라’는 의미이다. 당시에 금욕주의자들은 결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천시하였으며, 반면에 쾌락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권장하였
다. 이에 저자는 혼인을 귀히 여길 것과 아울러 결혼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음행'(
,포르노스)과 ‘간음'( ,모이코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음행
은 무절제한 성생활을 뜻함이요, 간음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
다.
우리 사회에는 점차 프리 섹스(free sex)와 동성 연애, 미혼모, 에이즈(AIDS), 증가
하는 이혼률 등 다양한 성범죄들이 쌓여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회 질서뿐 아니라
가정의 파괴등으로 인간을 해롭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역행하는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창 19:4-28; 고전 6:9,10; 벧후 2:14).
(b) 자족(自足). 돈에 대한 탐욕과 성적 방종은 상호 연관이 있다(고전
5:10ff.).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한 점은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지나친 부(富)는 종종 육욕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한다. 여기
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을 뜻한다. 성도는 결코 자
기 자신으로 인해 만족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라고 말하
였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으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서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마저 감사하게 여겼다(고후 12:7).
주는 어떤 분이신가 ?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
게 어찌히리요'(6절). 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창 28:15)과 여호수아(수 1:5)에게 주
신 신변 보장의 약속의 말씀뿐 아니라, 고민에 빠져 있던 시편 기자가 마침내 찾게 된
평안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상기하도록 서술하고 있다(시 118:6). 성도는 자신에게 가
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6절).
(2) 하나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왜(Why), 어디에서(Where), 어떻게(How) 일어났
는가 ?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하고 있는가 ?
(까) 거룩케 함. 유대인의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는 지성
소로 가지고 들어가고 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태웠다(레 16:14,15,27). 이 같은 제사를
통해 대제사장의 죄와 백성의 죄는 속죄받았다. 이와 같이 예수도 백성을 거룩케 하시
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당시의 유대인 성도들은 유대교적인 예배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 이스라엘 백
성만이 누리는 선민으로서의 특권, 율법적 요소 등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진정한 성화를 얻는데 있다. 성도
의 거룩케 됨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또한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거룩의 참의미를 실현하시길 원하신다.
(다) 진정한 예배.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믿었으므로 성문 밖에서 죽
으셨다. ‘장차 올 영구한 도성'(14절)이 없는 고난은 절망 그 자체이다. 이 도성은 그
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소유된다. 부활의 경험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며(빌 3:10), 그와 더불어 고난을 나누는 것은 생활 가운데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벧전 4:13,14).
‘성문 밖'(12절)의 개념은 무엇인가 ? 이것은 ‘구원의 새로운 장소’를 뜻한다. 구약
시대에 성전은 예배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의 중심지로도 이해되었다. 대제사장
은 지성소에 들어가 수양과 수염소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염소를 취하여
그 위에 안수하고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게 해서 광야로 내보냈다(레 16:1 ff.).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장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이동되어졌다.
예수는 추방당하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광야와 같은 곳에서 죽으셨다. 추하고 불결
한 땅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룩한 땅이 되었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실천적 면을 내포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유대교의 선민 사상과 같은 사적 소유나 개인적 특권으로 해석해 왔
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배타적 공동체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으신 그곳으로 따라 나서는 것을 포함한다.
즉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가 있는 그곳에 나의 삶을 헌신하는 것
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란 첫째는,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감사의 찬
미를 드리는 일이요(15절), 둘째는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나눔과 섬김의 삶
을 사는 것이다(13,16절).
(3)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의 깨어짐은 지도자와 성도간의 분
리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하며, 이것은 공동체의 깨어짐을 초래한다. 이
에 대해 통분히 여긴 저자는 본문에서(7,17-19절)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 강조
하고 있다.
(까) 모범적인 지도자상. 본문은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해 네 가지로 말하고 있
다.
첫째,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그 행실은 모범적이어야 한다(7
절).
둘째,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경성하여 지키는'( ,아그뤼프네
오) 사람들이다(17절). 이 ‘아그뤼프네오’라는 단어는 ‘잠’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의미
는 타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해 늘 깨어 있음을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도시에서 파수병으로 근무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일어난 분열과 분쟁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경성하고 있
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내 양떼를 치라'(요 21:17)는 명령에 잠시도 졸지 않았던
성실한 지도자들이었다.
셋째, 지도자는 즐거움으로 일해야 한다(17절). 이는 위로부터의 권위를 힘입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즐거움은 현세의 만족에 근거하지 않는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召命)아래서 삶을 영위하므로 사람에게서 전적으로 자유하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제한이 있다. 그 제한은 섬김이다. 비록 지도자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종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섬김 가운데서 다른 사람을 위
한 자유를 생각해야 한다.
넷째, 지도자는 성도들의 기도에 의지한다(18,19절). 지도자는 만능인으로서 행세하
려고 완전을 보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성도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자이다.
(다) 성도의 자세. 위에서 제시된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기억
하고(7절), 순종하며(17절), 문안하는 것이다(24절). 지도자는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지도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존재하며, 성도들은 그 지도자를 순종해야 한다.
또한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과 더불어 다양한 각도에서의 진지
한 연구를 거듭하여 성도들을 일깨워야 한다. 성도들에 대한 제자 훈련과 양육이 온전
하게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더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실
현하실 것이다. 성도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위로부터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 ‘성문 밖’에 대하여. 예수가 성문 밖에서 죽었다(12절)는 사실은 선교에 관한 보
다 완전한 이해를 제공한다. 교회의 선교는 안으로 불러모으는 차원뿐만 아니라 더 넓
은 세계로 흩어져야 한는 적극적 선교의 차원을 갖는다.
교회는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도직’은 하나님 나라
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본 개념이다. 따라서 선교는 그의 구속된 백성과 관계하며 그들
을 세상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는 데 관계한다(눅 10:1). 본 주제강해에서는 ‘성문 밖’
의 성경적 관점가 선교의 목표 및 선교의 방향과 대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문 밖’의 성경적 관점. 이에 대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어서 살펴보
자.
(까) 구약성경.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며(겔 5:5), 어느
민족이든 구원을 위해서는 시온의 거룩한 산으로 와야 했다(시 6:2; 미 4:1 ff.). 북
왕국과, 뭇 민족들의 포로가 된 후에도 유다는 이러한 자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
은 거룩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바벧론에서도 그들의 종말론적 비전을 생생하게 간직
하였다. 때가 되자 몇몇 지도자들은 귀향하여 성전을 재건하였다. 포로가 되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생활하면서도 해마다 예루살렘에로의 순례를 시도하였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선교는 기본적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이동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죽음은 선교의 본질을 명백히 보여준다. 선
교는 더 이상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다. 저자는 본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
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凌辱)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13절). 선
교의 초점은 영원한 국외자(Outsider)로 자신을 동일화시킨 예수 위에 놓여져야 한다.
선교는 우리의 안락하고 화려한 성안의 장벽과 문을 뚫고 세상을 위해 ‘그가 당하신
능욕’을 어깨에 메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의 건축과 성장은 ‘약속의 땅에서도 외방에 있는 것처럼'(11:9) 천막에 잠시 머
물러 살았던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잠시 머물러 있는 공동체의 의미를 갖는다. 교회
는 고립된 요새나 성곽이 아니라 잠정적 거주지요, 광야의 천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문 밖에’현존하시는 예수께 나아가 임시 체류자로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께 참된 찬양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 삶이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
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신'(2:17)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과 신실함을
구현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는
‘능욕윽 지는'(13절)삶의 자세가 요청된다. 이러한 삶이 바로 거룩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2) 선교의 목표. 선교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라보게 된 ‘장차 올 영구한 도성'(14절)을 목표로 한다. 죄와 악의 세계,
고난과 불의의 세계는 영원한 도성이 될 수 없다. 그 속에서 행하는 우리의 나눔과 섬
김의 실천은 도성을 향해가는 통로에 불과하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꿈이 없는 선교는 좌절에 이르고 만다. 그것은 순환성과 일회성
에 끝나버리고 미래 앞에서 무능력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으
로 하여금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자유로
운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일해야 한다.
(3) 선교의 방향과 대안. 성도는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 밖에
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사도적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을 개인적 소유로서만 간직하지 말고
주변의 이웃들에게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에 참된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
2. 마지막 인사와 축도(13:20-25)
이제 저자는 본서의 독자들에게 간략한 몇 가지 사항을 권명함으로써 본서를 마무리
짓는다. 이 마지막 권면에는 앞에서 밝힌 모든 내용을 총괄한 뛰어난 목회적 교훈이
나온다.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지막으로 나타내면서 성도들을 축복 기도하고
있으며(20,21절), 다음은 성도들이 소중히 여겨야 할 성도간의 교제와 은혜를 언급함
으로써 본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22-25절).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형제
들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속성. 마지막 권면 속에서 저자가 언급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
(까) 평강의 하나님. 하나님만이 참된 평강의 원천이 되신다. 본서의 독자들은 하
나님을 떠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평강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 자신
에게만 참된 평강이 있으며,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쾌락과 안일은 괴로움일뿐임을 교
훈한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관계를 예수의 피흘리심을 통해 화해시키는
사랑의 행위자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항상 기억해
야 할 것은 그러한 평강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능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저자가 축도한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
기를 소원하는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서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빌 1:6; 2:13).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혼자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전케 된 자와 함께 일하신다. 그래서 저
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기를 기도하였다(21절). ‘온전케 하다'(
, 카타르티조)라는 말은 ‘충분하게 공급하다’, ‘부서지고 찢어진 것을
수선하다’, ‘조절하다’, ‘구비하게 하다’등의 의미이다. 이는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으
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게 되기를 기도한 내용이다. 결국 성도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어야 한다.
(2) 형제들과의 교제. 저자는 이제까지 독자들에게 책망과 격렬한 어투로 충고한 것
이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권면이므로 시비없이 받아들여 주
기를 바란다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이어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놓였다
는 것과 이달리야에서 온 자의 문안 소식을 새롭게 전해주고 있다(23,24절). 디모데가 놓였다 함은 그가 옥살이에서 풀려났다고 해석함이 옳다. 이것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갇힌 자가 많았을 것을 추측케 해준다(3절).
그밖에 본문에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는 권면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가 디모데와 자기 자신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또 그들에게 문안하고 싶어하는 이달리야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나타내주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랐다(25절). 이러한 축도는 신약성경 서신서의 말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상례적인 문구이다(딛 3:15).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목회자로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었던 뜨겁고도 간절한 축복의 기도였다.
매튜헨리주석1145-히브리서 13장
히브리서 13장
Ⅰ. 몇가지 권고 13:1-17
사도는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여러 가지 선한 의무들을 행할 것을 권고 한다.
1. 형제 사랑을 행할 것을 권고함(1)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다. 또한 믿음도 사랑에 의하여 역사한다. 진정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이웃사랑의 고리이다. 이런 형제의 사랑이 그 사랑을 가장 필요로하는 핍박의 때에 오히려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때나 항상 서로를 형제처럼 사랑해야 한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자랄수록 형제간의 사랑도 더욱 성장해야 할 것이다.
2. 나그네 대접하기를 권고함(2)
마지못해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 의무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다’ 나그네들이 거처할 곳이 없음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기꺼이 우리의 마음과 집을 비워서 그들이 거기에 기거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의무를 행하는 동기는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히 대접하는 종들에게는 그들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부지중의 일에까지도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신다.
3. 동정심을 발휘할 것을 권함(3)
1) 이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갇혀 있거나 학대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마치 자신들도 그들과 같은 족쇠에 묶여 있는 것처럼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2)이런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이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이는 그들과 또 같은 육신의 몸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신비한 몸, 즉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짐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몸에서 떠나는 것이 된다.
4. 순결하고 정숙할 것을 권함(4)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상기하여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이 혼인을 순결하고 정숙하게 유지하고 더럽히지 않을 때 그 혼인은 귀하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더럽힌 부정한 행위에 대한 심판은 두려운 것이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애정이나 연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음행과 간음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상응하는 책벌을 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시고 처벌하실 것이다.
5. 자족할 것을 권고함(5,6)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죄가 바로 탐욕이다. 우리는 이 죄를 자제하려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이 죄를 근본부터 척결하도록 해야 한다. 탐욕과 상반되는 것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기뻐하며 만족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날 그날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을 호전시켜 주셔도 그 환경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그 환경보다 더욱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비록 가진 것도 없고 천한 위치에 처해 있었지만 ‘어떠한 상태에 처하더라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말하였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심을 확인하게 된다(6절). 인간들은 하나님을 해하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해하려 하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해하려 하는 행위를 자기 백성의 유익으로 변경시킬 수 있으시다.
6.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사역자들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를 권고함(7-17)
죽은 사역자들과 아직 살아있는 사역자들 모두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죽은 사역자 대한 의무(7절)
1)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전에 그들을 치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들이었다.
2) 이들에 대해서 행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저들을 기억하라’ 그리고 ‘믿음을 본받으라’ 즉 그들이 살아서나 죽을 때나 지키고 의지하던 믿음의 은혜를 본받도록 노력하라. 또한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 이제 사도는 전에 그들이 가르침받았던 그 진실한 믿음을 따라야 할 것을 그들에게 말하며 더 나아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언급하는 데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항상 살아 계시며 항상 변함이 없으시다. 따라서 그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믿는 일에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야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는 그들에게 빠져서는 않될 잘못된 교훈들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①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다(9절). 이것들은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교훈과는 전혀 다르며 그들 자체로서도 서로 모순되는 교훈이다.
② 이러한 교훈들은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것이다.
③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것이다.
④ 이 잘못된 교훈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등 외적이고 사소하며 없어질 것들이다.
⑤ 이 잘못된 교훈들은 어떠한 식으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신령하게도, 겸손하게도, 감사하게도 못할 뿐만 아니라 물론 하늘에 이르게도 못한다.
⑥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제단의 특권을 박탈당한다(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리스도 교회에는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물질적인 제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제단이며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인 동시에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다. 이 제단은 진정으로 믿는 자들에게 만찬을 제공해 준다. 주의 성만찬은 복음 시대의 유월절 만찬이시다. 구약의 장막이나 레위기 속의 율법을 고집하거나, 그리고 돌아가는 자는 이 그리스도의 제단의 특권에서 제외된다. 사도는 이 논지에 대한 주장을 먼저 증명한 후 더욱 발전시킨다.
㉠ 유대의 의식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것은 복음 시대의 제단의 특권을 받는데 장애가 된다. 복음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이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 그는 이 논지를 더욱 발전시킨다(13-15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31절).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능욕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같이 하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잠시 후 죽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이 세상이 우리에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착을 구하여야 한다(14절). 그러므로 이 일에 필요한 복음의 제단을 바르게 사용하자. 즉 우리의 희생 제물들을 이 제단에 가져오자(15,16절). 첫째,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바쳐야만 하는 찬미의 제물을 가져오자. 이 속에는 감사와 찬미와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우리 입술의 열매’들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자선과 사랑의 제물을 가져오자(16절). 우리는 단순히 입술로 즉 말로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선행의 제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2〕살아있는 사역자에 대한 의무(17절) : 이것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들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하며 자기들이 아주 현명하고 선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망상을 버리고 겸손히 사역자들에게서 배우며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런 의무를 져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들은 교인을 다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의 직분에는 그렇 수 있는 참된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2) 사역자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인들을 해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한다. 또 교인들의 영혼을 하늘나라에 가게 하는 모든 기회를 선용하고자 애쓴다. (3) 사역자들은 교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지를 지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한 지도를 베풀기를 기뻐한다. 만일 사역자들이 교인들의 충성과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 슬픔에 빠진다면 그것은 사역자들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손실이 될 것이다.
#1-6 The design of Christ in giving himself for us, is, that he may purchase to himself a peculiar people, zealous of good works; and true religion is the strongest bond of friendship.
Here are earnest exhortations to several Christian duties, especially contentment.
The sin opposed to this grace and duty is covetousness, an over-eager desire for the wealth of this world, with envy of those who have more than ourselves.
Having treasures in heaven, we may be content with mean things here.
Those who cannot be so, would not be content though God raised their condition.
Adam was in paradise, yet not contented; some angels in heaven were not contented; but the apostle Paul, though abased and empty, had learned in every state, in any state, to be content.
Christians have reason to be contented with their present lot.
This promise contains the sum and substance of all the promises; “I will never, no, never leave thee, no, never forsake thee.
In the original there are no less than five negatives put together, to confirm the promise: the true believer shall have the gracious presence of God with him, in life, at death, and for ever.
Men can do nothing against God, and God can make all that men do against his people, to turn to their good.
#7-15 The instructions and examples of ministers, who honourably and comfortably closed their testimony, should be particularly remembered by survivors.
And though their ministers were some dead, others dying, yet the great Head and High Priest of the church, the Bishop of their souls, ever lives, and is ever the same.
Christ is the same in the Old Testament day.
as in the gospel day, and will be so to his people for ever, equally merciful, powerful, and all-sufficient.
Still he fills the hungry, encourages the trembling, and welcomes repenting sinners: still he rejects the proud and self-righteous, abhors mere profession, and teaches all whom he saves, to love righteousness, and to hate iniquity.
Believers should seek to have their hearts established in simple dependence on free grace, by the Holy Spirit, which would comfort their hearts, and render them proof against delusion.
Christ is both our Altar and our Sacrifice; he sanctifies the gift.
The Lord’s supper is the feast of the gospel passover.
Having showed that keeping to the Levitical law would, according to its own rules, keep men from the Christian altar, the apostle adds, Let us go forth therefore unto him without the camp; go forth from the ceremonial law, from sin, from the world, and from ourselves.
Living by faith in Christ, set apart to God through his blood, let us willingly separate from this evil world.
Sin, sinners, nor death, will not suffer us to continue long here; therefore let us go forth now by faith and seek in Christ the rest and peace which this world cannot afford us.
Let us bring our sacrifices to this altar, and to this our High Priest, and offer them up by him.
The sacrifice of praise to God, we should offer always.
In this are worship and prayer, as well as thanksgiving.
Ⅱ. 결 론 13:18-25
〔1〕사도는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신과 더불어 고난을 당하는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여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18절).
1) 자기들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 중 하나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교인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교인들이 자기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할수록 교인들은 그들의 사역으로부터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2) 교인들이 자기들의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대한 정당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다.
①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 하노라(18절).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악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당함을 표명하고 있다. ‘우리가 확신 하노니’라는 말 대신 바울은 ‘우리가 아노니’라고 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나와 및 여러 그리스도의 일군들) 모든 일에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가 모든 일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하려 하노라.”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신자의 모든 의무를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② 바울이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19절). 그것은 현재 그가 그들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었으며 그들의 기도를 그것을 이루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평강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20절).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화해와 평강의 길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사역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낸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강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 붙여진 칭호는 양의 큰 목자시오 우리의 구세주며 통치자인 주 예수라는 명칭이다. 믿는 자들은 그의 목장의 양떼들이며 그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해하실 수 있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게 했던 수단과 방법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하여’서 였다. 이 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언약을 성별하고 봉인하는 표시인 것이다.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다(21절). ‘모든 선한 일에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성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간구되고 있는 위대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즐거운 것을 항상 그들속에 이루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온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하여 ‘아멘’하고 화답해야 한다.
〔3〕사도는 디모데와 더불어 히브리 교인들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23절).
〔4〕사도는 인사말과 비록 짧지만 엄숙한 축도로 본 서신을 맺고 있다(22절).
1) 작별 인사를 모든 믿는 히브리인들과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자들에게 전하고 있으며 또한 이달리아에서 온 성도들에게도 문안하고 있다.
2) 짧지만 엄숙한 축도를 하고 있다(25절).
#16-21 We must, according to our power, give to the necessities of the souls and bodies of men: God will accept these offerings with pleasure, and will accept and bless the offerers through Christ.
The apostle then states what is their duty to living ministers; to obey and submit to them, so far as is agreeable to the mind and will of God, made known in his word.
Christians must not think themselves too wise, too good, or too great, to learn.
The people must search the Scriptures, and so far as the ministers teach according to that rule, they ought to receive their instructions as the word of God, which works in those that believe.
It is the interest of hearers, that the account their ministers give of them may be with joy, and not with grief.
Faithful ministers deliver their own souls, but the ruin of a fruitless and faithless people will be upon their own heads.
The more earnestly the people pray for their ministers, the more benefit they may expect from their ministry.
A good conscience has respect to all God’s commands, and all our duty.
Those who have this good conscience, yet need the prayers of others.
When ministers come to a people who pray for them, they come with greater satisfaction to themselves, and success to the people.
We should seek all our mercies by prayer.
God is the God of peace, fully reconciled to believers; who has made a way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between himself and sinners, and who loves peace on earth, especially in his churches.
He is the Author of spiritual peace in the hearts and consciences of his people.
How firm a covenant is that which has its foundation in the blood of the Son of God!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in every good work, is the great thing desired by them, and for them; and that they may at length be fitted for the employment and happiness of heaven.
There is no good thing wrought in us, but it is the work of God.
And no good thing is wrought in us by God, but through Christ, for his sake and by his Spirit.
#22-25 So bad are men, and even believers, through the remainders of their corruption, that when the most important, comfortable doctrine is delivered to them for their own good, and that with the most convincing evidence, there is need of earnest entreaty and exhortation that they would bear it, and not fall out with it, neglect it, or reject it.
It is good to have the law of holy love and kindness written in the hearts of Christians, one towards another.
Religion teaches men true civility and good breeding.
It is not ill-tempered or uncourteous.
Let the favour of God be toward you, and his grace continually working in you, and with you, bringing forth the fruits of holiness, as the first-fruits of glory.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히 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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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살아났습니다.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담의 혈통으로 나온 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 (히 13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13:1~25
요절: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주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사랑의 왕이시다.
이번 주일은 한국전쟁(Korean War,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간) 발발(6.25)을 회상하며 나라와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되어 있어 지금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인 전쟁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준전시 상황으로 67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 서명함으로 일제 강점기 36년이 끝나고 해방되자 남한은 미군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북한은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3년 동안 치밀한 전쟁준비를 하여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암호명 ‘폭풍 224’이었는데, 남조선 해방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여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하였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입니다. 마침 주말 휴가로 많은 대한민국 군인들이 전선을 비운 사이에 남한으로 공격하여 3일 만에 서울 미아리고개 전선이 뚫리고 서울이 함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간청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9:1로 유엔군 참전을 결의하여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천 상륙을 9월 15일 지휘함으로 16개 나라가 군대를 지원하여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싸워주었습니다. 고마운 나라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 16개 나라에 가서 교육선교를 하였습니다. 9월 28일에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어 시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1951년 1월 중공은 조선족을 중심한 인민군을 파병함으로 1.4 후퇴가 되어 동부전선은 고성까지, 서부전선은 강화까지 국경이 형성되어 155마일 오늘날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한국 전쟁은 근대 국제 체제가 형성된 1500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전쟁 가운데 군인 사망자가 일곱 번째로 많았던 전쟁입니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여 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여 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여 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미군 사망자는 3만 3천686명, 영국군 1천78명, 터키군 966명, 캐나다군 516명 순으로 사망자가 많고,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는 각각 3,950명, 5,817명이며 부상자는 10만 3,460명입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여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여 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여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입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던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노래가 1951년부터 불려 왔습니다.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 다시는 이런 전쟁이 우리나라에 없도록 남과 북이 평화롭게 통일이 되어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한국이 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일제 강점기 때 평양신학교 채플에서 즐겨 불렀던 찬송이 70장(통 79장)이 오늘도 부르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좋아한 시편 46편을 기초로 쓴 가사.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이 방이 떠들고 나라를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4.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마지막 장인 13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완성”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전체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20여 년간 해 왔으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표현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무궁한 대제사장, 멜기세덱, 새 언약의 중보자, 천국의 기업, 믿음의 완성, 소망의 완성, 사랑의 완성이심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히 13:1~6)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에서 형제 사랑(필라델피아 philadelphia, brotherly love)는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벧전 1:22).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이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선행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합니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구체적으로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천사인줄을 알지 못하고 손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세 손님들에게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절), ‘급히 장막에 들어가’ (6절), ‘속히…떡을 만들라’(6절), ‘짐승 떼에 달려가서’(7절), ‘급히 요리한지라’(7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는 손님을 영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이나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의 증거입니다. 딤전 3:2에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딤전 6:17-18). 잠 11:24-25는 말하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합니다.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감옥에 갇혔을 때 방문한 자의 행위가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부부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관계입니다. 결혼이나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관계, 즉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가졌던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위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잠 5:18-19는,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에 비유하였고 남편은 그 아내의 품을 항상 만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가르칩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에 간음이나 음행은 부부 사랑에 반대입니다. 그러려면 결혼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여 처신해야 하며, 술이나 춤 혹은 인터넷 채팅 등 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부부는 마귀의 시험이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5-6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번하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헤어집니다. 우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할 때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만을 따르자(히 13:7-13)
7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7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파악하여 해석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벧전 5:2-4).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의 인도와 지도에 잘 따라야 합니다. 교인들은 인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생각하다’는 원어(므네모뉴오 mnemoneuvo)는 ‘기억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인 인도자들은 바른 설교와 바른 행위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 마지막도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설교와 나쁜 행위로 나쁜 모범을 보이다가 불쌍한 마지막을 가진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제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데마 같은 제자가 그러하며 또한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에 빠진 자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와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the same yesterday, and to day, and for ever.” 이 요절은 전도자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로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당(The Moody Church) 발코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참 인도자이십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천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십니다.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라는 원어(포이킬로스 poikilos)는 ‘다양한’이라는 뜻이고, ‘다른’이라는 원어(크세노스 xenos)는 ‘이상한’이라는 뜻입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교훈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 뉴에이지 사상, 종교 통합주의가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말합니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고정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하고 불변적인 진리를 버려두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 보수신앙을 붙 들어야 합니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였습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그분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분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었다.
‘능욕’이라는 원어(오네이디스모스 oineidismos)는 ‘비난, 불명예, 모욕’을 뜻합니다. ‘그분의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영문’은 ‘진영’(陣營)이라는 말인데 진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사회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성도들이 일반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욕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3. 찬송과 선행의 예배(히 13:14-25)
14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17 이는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들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19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21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24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14-16절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 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욕 즉 그분의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즉 현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고난의 생활이지만,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죄 사함의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약 성도는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물’이며(롬 12:1) 찬송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또 찬송은 그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증거 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 homologeo)는 ‘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가장 좋은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남의 인격을 허물고 남을 거짓 되게 비난하는 일에 사용되었으며 종종 더러운 욕설이나 음란한 말의 도구가 되지는 않았던가. 이제 이런 더러운 입술이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합니다.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영문 밖에서 희생하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이 사랑을 이웃과 나눔이 주님께서 열납 하시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worship service)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mutual service).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열매입니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 koinonia)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으로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힘써야 할 섬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먼저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다음은 이웃을 향한 선행도 구제가 실천되는 예배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생활화입니다.
17절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souls)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決算 give account)할 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근심으로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또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합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3:1, “형제들아, 여러분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18-19절에서 바울이 수신자들인 유대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가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 곳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0-21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기원의 내용은 우선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요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작은 목자들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무궁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증거 하신 신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 하십니다. 행 17:31, “이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평강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습니다. 사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죄 사함 받은 혼들(souls) 속에 평강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이루시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됩니다. 우리는 다른 특별한 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증거 합니다. 계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히브리서 강해를 마무리 하면서 22-25절로 대신합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처럼 말씀을 받읍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다른 바울 서신처럼 히브리서도 마지막 안부와 축도로 마칩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을 받는 교인들에게 그의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 부르는 살전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회자와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행 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 되었음을 보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히브리서를 거듭 읽으시면서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증거 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의 기도]하나님, 오늘 히브리서를 마지막 장까지 읽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모세보다, 아브라함보다, 믿음의 모든 선진들보다 우월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시고 소망을 완성하시고 사랑을 완성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며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Yes, Jesus loves me, the Bible tells me so.)” 찬송 563장(통 411장) 부르며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나라를 어떤 핵무기, 미사일, 테러, 코로나 바이러스, 자연재해,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전쟁의 방법이 아닌 평화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로 통일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단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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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성도의 예배와 교제 – 구조 매일성경큐티 새벽설교주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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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으로, 성도들이 해야 할 필수적인 두 가지의 일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서로 교제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13장의 구조와 새벽 설교 주제 그리고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장, 성도의 예배와 교제
히브리서 13장의 구조 매일성경큐티 새벽 설교 주제 해설
히브리서 13장의 개요
1절-6절, 삶으로 드리는 예배
참된 그리스도인이자 참된 예배자는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그분께서 살아가신 대로 거룩함과 정결함을 따라 살아갑니다.
7절-17절, 공동체 가운데 드리는 예배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는 지도자의 길을 바르게 분별하여 따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18절-25절, 지도자를 위한 기도와 인사
성도들의 참된 교제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의 참된 교제를 서로를 향한 축복과 친밀하고 개인적인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교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13장의 매일성경큐티 새벽 설교
1절-17절, 성도들이 드리는 올바른 예배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서로 사랑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특별히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갇힌 형제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도와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로 함께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함께 모여 찬송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갑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개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18절-25절, 성도들의 참된 교제
히브리서 저자는 마지막에 와서는 개인적인 기도 요청과 축복의 인사, 그리고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 점점 사라져 가는 공동체의 나눔과 참된 교제의 모습들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 속에서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축복함으로써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축복을 통하여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3장의 해설
1절-19절,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13장에서는 일곱 가지 영적 실천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째 덕목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입니다(1절에서 헬라어 단어 ‘필라델피아'(philadeiphia)의 의미는 ‘상호 간의 사랑입니다). 둘째 덕목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호의입니다(2절). 셋째 덕목은 옥에 갇힌 자들과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3절). 넷째 덕목은 정결하고 순결한 결혼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간음자이든 음행자이든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심판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4절). 다섯째 덕목은 신자들은 재물을 사랑하여 세상 것을 좇기보다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5-6절). 여섯째 덕목은 신자들은 영적 지도자들을 존중히 여기고 그들을 닮아 가려고 해야 합니다(7, 17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고(9절) 복음의 은혜 안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13절,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광야의 성막은 영적인 삶의 적절한 비유(metaphor)입니다. 첫 언약에서 짐승들은 ‘진(陣) 밖에서’ 희생되었습니다(11절). 동일하게 예수님도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12절). 따라서 우리도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할 치욕을 견디며 ‘진(陣) 밖’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서야 합니다.
영적인 삶의 목표는 잠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거주자들처럼 우리 스스로 진(陣) 밖에서 사는 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인 삶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운데 세상이 주는 약속과 보호의 영역 ‘밖에서’ 형성되고 또한 영위됩니다.
16절, 희생
선을 행하고 당신의 소유물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행위가 부담입니까 헌신입니까 아니면 사랑의 행위입니까? 당신의 동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당신은 마지못해 사랑 없이 선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의 목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 신자들의 영적 안녕을 돌보는 것입니다.
20절-21절, 평강의 하나님이… 원하노라
마지막 축복 기도는 히브리서의 완전한 요약이며 영성 개발을 위한 완벽한 기도입니다.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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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50408 히브리서 13장.hwp
오늘 우리들 히브리서 공부 마지막입니다. 벌써 13주가 다 지났군요. 히브리서를 여러분들이 각자 집에서 읽거나 다른 큐티 등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겠습니다만 그래도 꼼꼼하게 같이 읽을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히브리서는 신약성서 중에서도 앞에서 많이 우리가 접하는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기도 해서 약간 뒤로 쳐지는 성경이었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에 같이 읽으니까 여러 가지로 좋았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고요. 1절부터 25절까지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을 교독해서 전체 읽고 천천히 전체 13장까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듣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절,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절,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절,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여기 여러 가지 모양이 가지각색이에요. 주제가 앞에 하고는 좀 다르게 여러 가지 분산되어 있습니다.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고요. 특별히 여기에 13장, 마무리를 하면서 일부러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좀 생각해라는 게 있네요. 지금의 목사를 가리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하여튼 교회 공동체를 끌어가는, 말씀을 전하거나 목회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말도 있고 생각 좀 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두고 ‘거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교회 목사에게 순종해라’ 이렇게 말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상황이 있기 때문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이거를 일반화 시키면 성경을 좀 오해하게 되는 거죠. 이 말씀을 따다가 무조건 순종하라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아마 히브리서 공동체의 정확한 배경이 뭔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만 여기 지도자들을 생각해봐라 반복해서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거기에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러한 풍토나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 질서가 허물어지고 덕스럽게 운영이 되지 않은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건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네, 그런 것들이 있어요. 여기 본문에 해당하면 조금 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13장에서는 실제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어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잘 해야 되냐. 그러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 이런 것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의 일치,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갖잖아요. 기본적인 신앙이잖아요. 그걸 전문적인 신앙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날 제가 서울에 예배 인도 하러갈 때 예배 마치고 신학공부를 해요. 지난 공부 주제가 칭의와 성화였어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려놨으니까 보십시오. 거기서 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른 건 빼고 하나만 얘기할게요. 칭의, 이걸 굉장히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거든요. 예수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된다, 그렇게만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이론, 신학 개념들은 이론이기 전에 실체에요. 리얼리티에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도 그렇고요. 신학자들도 그렇고 이론을 잘 계산해갖고 어떤 상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다, 신앙이 뭐다를 말한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신앙의 실체를 경험한 거예요. 그걸 합리적으로 설명한 게 신학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정말 그 신앙의 능력 안에 들어간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론적인 설명인 거예요.
그런데 이게 기독교인들이 이론에만 떨어져서 그게 어떤 건지를 조금 눈치를 못 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칭의의 능력, 역동성, 그거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똑똑해야 인정받죠. 돈이 있어야 이 사람 괜찮다 인정받죠. 스펙이 있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가 돌아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다는 사실을 자기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능력 있게 사는 거죠. 보세요. 시시한 사람들이 인정하냐, 아니냐에 우리는 너무 예민하게 작용을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한다, 너 의롭다, 칭의가 그런 말이니까요. 그 인정한다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날 인정하냐, 아니냐는 정말 작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어떤 학교에 한 반이 있습니다. 거기 한 학생이 있어요. 그 학생을 자기 친구들이 조금 소홀하게 대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얘를 인정해 주는 거예요. 약간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인정해 주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칭의라고 하는 거는 그냥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완성하실 그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 자기의 인식, 자기의 영혼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 거죠.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실질적인 깨달음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험이기도 합니다.
조금 말이 옆으로 지나갔네요. 오늘 본문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닌데 여기 신앙생활하고 실제 삶이 어떻게 연결 되나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칭의가 뭐냐를 말씀드린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칭의와 예수님과의 관계. 그러나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거기에 걸 맞는 실제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걸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칭의와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실제적으로 삶이 변화되는 거잖아요. 이 두 관계가 어떤 거냐를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논의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3절 사이에 세 가지 삶의 중요한 태도를 가르쳐요. 세 가지예요. 형제 사랑, 손님 접대, 갇힌 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될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거죠. 형제 사랑, 손님 대접, 갇힌 자라고 하는 것, 이것도 일일이 다 어떤 거냐를 꼼꼼히 살피려면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되겠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시각으로 이웃들을 대하게 되거든요. 나그네, 손님들, 형제, 그리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려움을 당한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또 그런 삶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힘을 나눠야겠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주의는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살되 그건 단순히 윤리학은 아니 겁니다. 그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잖아요. 말하자면 휴머니즘이죠. 그건 아름다운 거예요. 기독교인이 휴머니즘적으로 사는 건 당연하되 기독교 신앙이 휴머니즘은 아닌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잘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4절. 여기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가르침이죠. 음행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한, 두 마디 갖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성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가정 윤리라든지. 그런 것들이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해요.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 시작할 때 나온 문제들은 로마 윤리하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조금 구분해서 봐야하는데 너무 전문적인 거라서 사실은 일반 신자들이 그걸 다 구분해서 보기는 힘듭니다. 이런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들을 보면 성령의 열매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도 사실은 로마의 윤리적인 가치, 용어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관용에서 사랑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절을 갖다가 기독교인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음적이라고 설교를 하면 조금 부족한 거예요. 관용적으로 살아야죠. 그러나 그건 일반 윤리이고 다 좋은 거예요.
성경 내용이 어떤 사실을 얘기하잖아요. 어떤 때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사실을 지칭, 가리킬 때가 있는 거예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떠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사실이 말하려고 하는 다른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를 기독교적인 신앙의 본질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가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뭔가 혼란스러워서 ‘예수 믿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교회 안에서 싸우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지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위기를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런 걸로만 충분하지 않으면 율법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하나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일일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책 하루에 얼마나 읽어야 돼’ 이런 것처럼 실질적으로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냐 그러한 요구가 교회 안에서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걸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쭉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이런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기독교인 공동체가 복음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거기에만 집중하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도덕한 일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소극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러한 열매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뭐냐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좀 까다롭죠. 일반 신자들이 성전 읽고서 그런 것을 다 분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제가 4절을 설명하다가 옆으로 얘기가 나왔는데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은 성윤리, 로마 시대가 굉장히 혼탁했죠.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빴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는데, 성도라는 뜻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성윤리, 그런데 좀 끼지 마라 그런 얘기인 거죠. 그 당시에는 매음굴, 창녀촌이라고 하나요. 굉장히 일반화 됐습니다. 그래서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어요. 아기들을 로마 광장에다 버리면 소위 말해서 포주들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끼워서 다시 윤락가에 보내고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은 모르지만 남자가 윤락가의 여자 대상이 자기의 딸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동성애 이런 것도 굉장히 파괴적인 일이 있었어요. 원래는 헬라 시대 때는 좋은 거였어요. 이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플라토닉러브, 이게 동성애였어요. 그 당시는 결혼해서 남, 여 간의 관계가 애기 낳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정말 순수한 사랑은 애기 낳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거다. 플라톤 시대에 플라토닉러브라고 해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동성애였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문헌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성애가 굉장히 타락한 방식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점점 문란하게 돼서 바울이 경고 한 거죠. 그게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성경 말씀은 다 배경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촘촘히 따지지 않고 그것만 가져다가 ‘봐라! 이렇게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서 6절.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왔네요.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죠. 기독교인들도 이런 점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사랑한다.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둘 다 진정한 사랑은 못 되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운명을 맡기는 건데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하고 돈에게 맡기는 것,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두 가지는 하지 못합니다. 이게 지금의 자본주의, 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속에서,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근거라는 걸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서 개인이 그런 것을 다 못하니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도록 달라져야 돼요. 정치적인 것들도 필요합니다. 복지 문제도 우리의 현황이 되고 있는데 약간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국가차원에서 보장 해준다면 그렇게 돈에 많이 치우치지는 않을 수 있거든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목회 활동이 점점 열악해져서요. 목사의 품위,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에게 품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태도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목회하기가 쉽지 않아요. 젊은 목회자에게 더 그렇습니다. 부목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일 년 뒤에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학생회, 청년회, 어느 교구를 맡았던지 그 동안 얼마나 성정을 시켰는지를 평가 받고요.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추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온순한 목사들은 일반교회 부목사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면 자기 뜻대로 양심껏 하려면 담임목사를 가야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상태인데다가 신학생들은 계속 많이 나오고요.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데 공급은 계속 되고 있으니까 불균형, 이게 목사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고 교회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다 보니까 자기를 비하하게 되거나 과욕을 많이 부리게 되고 총체적으로 악순환 속에 빠져있습니다. 하여튼 품위인데 복지가 최소한 보장이 되면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겨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두 가지 방법이에요. 기독교인들이 똑바로 자기의 신앙적인 인식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생명이 확보된다는 것을 정말 깊이 깨닫는 것하고 그 다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하도록 서로 노력해 나가는 것. 같이 좀 병행해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절, 8절. 드디어 여기 나오네요. 교회 지도자들을 좀 생각해라. 7절에 나오죠. 너희를 인도하던 자를 생각해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늘날하고 상황이 다르게 순교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 다음 9절. 이것도 여러 가지 교훈 중에 하나에요. 영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9절에 재미있는 게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으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죠. 이거는 음식 규정, ‘이걸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그러한 율법적인 규정을 잘 지켜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그러한 것들. 그건 별 거 아니다. 그런 것들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 한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16절. 이건 조금 복잡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학자들도 이게 정확한 뜻이 뭔가를 다 풀지 못했어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난해 구절이라고 할 수 있어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게 무슨 비유, 상징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냥 제가 하나의 틀로만, 전체적인 그림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소유한다거나 거기 가까이 갈 수 있다거나 그렇게 되지 못 한다. 그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그 뒤에서 조금씩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하고 있어요. 12절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여기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골고다인데 예루살렘성 밖이라는 뜻입니다. 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이죠. 안에서 십자가 달리신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셔서 고난 받으셨어요.
13절,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우리도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도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요. 그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 골고다죠, 성문 밖에 있는 그거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는 그런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두루두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14절에서 좀 더 정확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영구한 도성, 영원한 성읍, 하나님 나라, 그런 건 없다.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예루살렘 도시도 아니다. 물론 로마 제국, 황제도 아니다. 그건 장차온다. 새 예루살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겁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에도 제가 지금 인용한대로 새 예루살렘 그 얘기가 나오거든요. 새 하늘과 새 땅 얘기 하거든요. 온다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나나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표현들 말입니다. 그건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뜻인데 우주 공간 어디에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힘든 게 우리는 세계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 나무 책상입니다. 우리는 그냥 나무 책상으로만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하늘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질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이 우리에게 오는 거죠. 그런데 제가 그걸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묘사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정도까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변화될 때를 기다려야 되는데, 부활도 그런 거예요. 저도 전적으로 변화 됐으면 좋겠어요. 현대와 같은 상태, 이런 거로는 영원한 생명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그러나 현재 이 몸도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그 때를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오늘 입관 예배 갔다가 제가 성경을 한 군데 읽었어요. 간단하게 설교를 했는데 그 부분이 기억이 또 나네요. 지금 전적인 변화를 얘기하다 보니까요.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4절,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탄식이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이상하게 모든 좋은 일들은 짐하고 같이 옵니다. 모든 게 그래요. 그래서 이 삶은 숙제를 푸는, 짐을 진 것과 같은데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게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죽을 거잖아요. 생명에 삼킨바 된다. 우리가 없이 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완전히 초월하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삼킨바 되는, 그 때를 우리가 바란다는 거죠. 바로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질적인 변화, 그게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고요. 그걸 우리가 기다리고 사는 거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10절에서 16절이라고 쓴 대목의 밑에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15절이 가리키는 찬송의 제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16절이 말하는 선한 행위이다. 재밌게 16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것을 제사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일상의 제사죠. 앞에 있는 거는 실제 우리가 예배드리는 제사고요. 제사라기보다도 찬양이죠. 두 번째 선함과 함께 나눔, 이런 것들은 일상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와 연관되는 거예요. 신앙의 중심과 하나님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그거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성화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17절에서 19절. 여기에 두 번째로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충고가 나오네요. 재밌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순종하라, 복종하라’ 그런 얘기도 하고요. 그 다음 좀 내려오면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런 일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고 얘기했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밑줄 쳐 놓고 잘 읽어두세요. 그리고 저를 잘 봐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늘 즐겁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18절에 보면,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도 교회 지도자들이죠. 우리가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그 다음, 20절에서 21절까지. 여기는 축복입니다. 축복기도에요. 내용이 재밌습니다.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 쭉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5절입니다. 마지막 인사 몇 마디에요. 22절에 보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여태까지 권면한 거예요.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그런데 간단한 건 아니네요. 13장까지 굉장히 길게 썼는데 간단하게 썼다고 했을까 모르겠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가 봅니다. 줄이고 줄여서 썼나보네요.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은 것을 너희가 알라, 감옥에 같이 있다가 풀려났나 봐요. 이런 걸 보면 바울이 이 편지를 썼다는 암시이기도 하고 아니면 바울과 아주 가깝게 아는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요. 디모데하고 같이 일 한, 감옥에까지 같이 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 여기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또 나오네요. 문안하라, 그렇게 얘기했고요.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지금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방문을 받았나 봐요. 이달리야, 이탈리아죠. 로마 교인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한 마디만 우리가 잘 생각해도 우리 신앙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 삶에 역동성이 생겨요. 이거는 사회에서 심리 치료 받고, 힐링 치료 받는 거하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걸 자꾸 놓치기 때문에 다른 데 한눈을 파는 거죠. 은혜라고 하는 것, 받았다고 하는 것, 선물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은혜 한 마디만 가지고도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가능한 거예요. 그냥 받았다고 하는 것, 너무 크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 사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세상은 다 주고 받고 하는 차원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 이거를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13주에 걸쳐서 히브리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천년 전, 전혀 우리와 상관없던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던 이들의 문서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특별히 우리 대구샘터교회, 수요일 성경 공부하는 이 시간까지,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이 시간까지 내려왔는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13주 동안 같이 공부한 히브리서의 그 영적인 깊이, 그러한 리얼리티, 우리의 신앙의 긴 발걸음에 좋은 디딤돌이 되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우리 다시 또 새롭게 다음 주부터 시작하게 될 욥기서 공부할 때도 진리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키워드에 대한 정보 히브리서 13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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