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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28 (목) [하루 한 장]“믿음이 없이는” (히11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장입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장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하기 때문에 실은
왜곡된 내용도 많고 오해와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무조건
잘 믿으면 된다는 식의
믿음예찬론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1장부터 10장까지
줄기차게 논증해왔다시피
구약의 모든 믿음의 내용을
한낱 비유에 불과하게 만드는
믿음의 핵심이자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밝히고 보여주고 그분께만
온전히 영광돌리는 것이
믿음장의 주요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구약의 모든 이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시며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이십니다
예수님만 믿음덩어리이십니다
예수님만 붙잡고 나아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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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히브리서 11장 요약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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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EyVm9lv2ec
히브리서 11장
【본문은 이른바 ‘믿음 장’으로서, 먼저 믿음의 본질을 언급한 후에, 믿음의 실례로서
믿음을 좇아 살아간 성경의 여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
‘실상이요’의 헬라어‘휘포스타시스’는 ‘실체, 확증 객관적 실체’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체’의 사전적 의미는 ‘늘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지속하면서 사물의 근원을 이루는 것, 언제나 있으며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바라는 것의 실상’
믿음이 소원하고 있는 것의 실체로, 지금 당장 손에 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을 믿는 것이다.
‘실상’이란 실체를 눈으로 보듯이, 또는 손으로 실체를 붙잡은 것과 같은 확신에 찬 기대를 뜻한다.
저자는‘믿음’은 ‘바라는 것’과 동일시하였으며, 믿음은 미래 지향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아직 보이지 않는 장래 일을 가리킨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일에
대해 믿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11:2)
‘선진들’이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을 지칭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믿음으로’의 헬라어 ‘피스테이’는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믿음으로 … 아나니’
진리에 대한 인식이 믿음을 통해 가능함을 보여준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 그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믿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저자는 ‘무에서의 창조’를 강조하고 있다.
물질 세계는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無
에서 창조된 것이다.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창4:3-5의 인용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3-5)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셨지만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힘으로, 아벨의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행위였음을 부여준다. 따라서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
‘옮겨졌으니’의 헬라어 메테데켄‘은 ’변화되다‘는 뜻이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5:22, 24의 인용이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2,24)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믿음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계신 것’은, 존재가 보이지 않으나 그 존재를 믿는 것이며, 말씀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여호와의 존재와 그의 역사까지 받아들임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타난 하나님의 실존적 존재를 뜻한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 주시는’의 헬라어‘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뜻이며,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는 ‘신적인 의사 소통,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의 의미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경외함’이란 ‘거룩한 두려움’이란 뜻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아는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홍수 심판으로 정죄 받았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였다.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했음을 보여준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루메노스’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12:5-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창12:7)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11:9)
‘거류하여’의 헬라어‘파로케센’은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막에 거하였으니’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창12:2-3)를 성취하신 것을 굳게 믿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
10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터가 있는 성’은 ‘장막’과 반대되는 것으로, 한 곳에 견고하게 세워진 집을 의미한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 ‘시온 성’을 암시한다.
‘계획하시고 지으실’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11)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지만, 사라가 끝까지 의심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1:12)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며, 그가 자손을 낳을 수 없었던 늙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는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본 것이다. 약속의 성취는 1차적으로 가나안 정복이지만,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외국인과 나그네’는 창23:4,47:9의 인용이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네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저자는 옛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11:14-15)
‘본향’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은 자신들의 본향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사모하니’의 헬라어‘오레곤타이’는‘열렬히 갈망하다’는 이미로, 그들이 하늘나라를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원어상 현재분사로 시험을 받음과 이삭을 드림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시험적으로 이삭을 드리라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즉시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는 말이다.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생기게 되고,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문제였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11:18)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생각한지라’의 헬라어‘로기사메노스’는 단호한 내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삭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고,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22:5) 말할 수 있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비유컨대’의 헬라어‘엔 파라볼레’는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 그에게는 이삭이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11:20)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창27:27-29, 39-40)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은 비합법적이라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11:21)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다.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였다.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므낫세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얹고 왼손으로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장자의 축복을 차자에게 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의 주관대로 뜻을 이루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특징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지팡이는 순레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11:22)
창50:24-25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이다.
‘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11:23)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ㅂ개성의 인구 수가 급증함에 따라 위협을 느끼며 그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내 아이가 출산되었을 때, 그들을 전부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출1:9-10,15,22)
부모가 모세를 석 달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의 헬라어‘아스테이온’은‘잘 양육된, 우아한’이라는 뜻이다.
아마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을 예견한 듯하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11:24)
모세는 히브리인 어머니를 통해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알았음과 동시에 그가 내린 결단은 장성한 사람이 내린 신중한 것이었다.
모세는 자기 형제인 히브리 노예를 돕는다고 무력으로 개입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자처한 행위였으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거절하였다.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5)
모세는 왕궁에서 왕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향유하며 세상적인 온갖 쾌락을 다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주의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죄악의 낙’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큰 죄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더 가치있게 여겼다.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63:9은 그리스도가‘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전10:4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셨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을 수 있었다.
‘상’의 헬라어‘미스다포도시안’은 ‘보상’을 뜻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모세가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것은 바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출2:14)
비록 모세가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바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었다고 진술한다. 모세는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출33:11, 민12:7-8)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11:28)
‘정하였으니’의 헬라어‘페포이에켄’은 완료형으로 ‘만들다’는 뜻을 가진다.
유월절의 항구성을 시사한다. 모세는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제정하였다.
모세가 이같이 정한 것은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11:2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바다를 건넜다. 홍해를 믿음으로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애굽 군대는 바닷물이 본래대로 돌아와 물 속에 침몰하여 전멸하였다.(출14:23-28)
‘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11:30)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를 따른 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그 성이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기생’의 히브리어 ‘조나’는 이방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가 아니라, 일반 창녀를 가리킨다.
라합은 이러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받는 인물이다.이는 이스라엘의 첩자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이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함을 알면서도 그러한
일을 실행하여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아니한 자’는 여리고 백성들을 가리키며,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시킨다.
‘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믿음에 대한 예를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취급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6명의 믿음의 사람을 소개한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5번째 사사로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사람이었다.(삿7장)
‘바락’은 4번째 사사로 가나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이었다.(삿4장)
‘삼손’은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서 그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을 괴롭혔다(삿13-16장)
‘입다’는 길르앗의 서자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암몬 족속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큰 전과를 거둔 사사였다(삿11-12장)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인물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다.(삼상16:1-3)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일찍이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으며 성장후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자사장적 기능을 담당했다.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신앙으로 인도한 선지자였다.
(33-38절은 믿음으로 산 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승리의 삶을 설명한다)
‘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11:33)
다윗에 대한 설명이다.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 사업은 다윗에 이르러 최고의 절정에 달하였다.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애굽 국경부터 유브라데강까지 확장되었다(왕상4:20-21)
‘의를 행하기도 하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사들이나 영왕들의 의롭고 바른 통치를 가리킨다. 이상 언급된 사사들이나 열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신체적으로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단6:17-22)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으며(삼상17:34-37), 브나야도 사자를 죽였었다(대상11:22).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세명의 친구 사드란, 메삭, 아벳느고를 가리킨다(단1:7)
그들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한 자들로는 구약 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였으며(왕상19:2)
‘엘리사’는 이세벨의 아들 여호람에게서 구원받았고(왕하6:3)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하였다(삼상18:11)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심을 강조한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으로서(삿6:31)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삼손’과 ‘히스기야 왕’은 연약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다.(삿16:28-31, 왕하20장, 사38장)
‘에스더’역시 연약한 여자였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호수아, 사사들, 다윗의 전쟁사 등을 가리킨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권세나 군대의 세력, 모든 위험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구약의 사르밧 과부(왕상17:17-24), 수넴 여인(왕하4:18-37)의 경우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눅7:11-14),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요11장), 도르가(행9:36,41)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곧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더 좋은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킨다.
‘악형을 받되’의 헬라어‘에튐파니스데산’은 ‘고문대 위에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 죽이는 형벌’을 뜻한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보다는 새로운 삶과 부활이 있다는 믿음의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11:36)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렘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고(렘29:7) 구덩이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38:6)
본문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했음을 강조한다.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7)
‘돌로 치는 것’
돌로치는 행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방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지 않을 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쳤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탄식하셨다.(눅11:51) 이것은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랴를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대하24:21)
‘톱으로 켜는 것과’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칼로 죽임을 당하고’
엘리야는 이세벨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왕상19:10)
여호야김 집권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26:23)
신약 시대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12:2)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한 말로 볼 수 있으며,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다.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잆었다. 이러한 복장은 예언자들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한다.
‘궁핌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삶을 요약하는 말이다. 또한 안티오커스 4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시 될 수 없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박해가 있을 때 광야나 산 혹은 굴 속으로 피신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이 땅에서 안락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11:39)
‘이 사람들’은 11장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해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했다.
‘약속’
33절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었다.
39절의 ‘약속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으로, 영원한 하늘
나라의 구현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실제적인
본보기가 된다.
‘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40)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구약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잇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함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11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히 1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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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11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도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지만 그 믿음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믿음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믿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구원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위로는 구원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제목: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 (히 1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11:1~40
요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주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반드시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자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11장을 강해합니다. 앞으로 읽을 히 12:2에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author) 요 또 완성자(finisher)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로 나오는데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시작(author)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완성자(믿음의 장), 12장에서는 예수님은 소망의 완성자,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신 분(13:8) 임을 묵상합니다.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요약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합니다. “믿음으로”(by faith, Πίστει)란 단어가 21회 나오며, 믿음으로 산 선진(성도)들이 16명 거명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믿음을 완성하신 것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가 되시며 시작과 완성자가 되십니다.
1.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히 11:1-7)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음이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1-2절은 믿음의 정의와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음이라.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ὑπόστασις)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믿는 것인데,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믿지만,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그것들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πραγμάτων ἔλεγχος)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믿음의 ‘선진들’(πρεσβύτεροι, elders)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는데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16명의 성경의 인물들을 가리킵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인간 중에 아무도 본 자가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전히 믿음에 의존하며, 창조의 비밀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의 계시를 믿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ויאמר 혹은 이르시되, 말씀하시기를)’라는 말이 11번 나옵니다. 우리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어야 합니다(요 1:3).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①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으나,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 4:4). 아벨의 제사의 나은 점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②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분께 기도드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었고 천국의 실재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진 것이었습니다.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임이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두 가지로 증거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기본적으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새 세계에서 영생복락(이를 줄여서 “영락”)을 누리는 상입니다. 즉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1절). 이와 같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③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처럼, 노아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고 흠이 없는 신앙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습니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사라 (히 11:8-1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④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고자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의 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과정을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9-10절 “믿음으로 그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 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 건축자이시니,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다!’ 아브라함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넷길입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입니다. 장막을 펼치고 접듯이, 우리의 세상 생활은 때때로 이사하고 이동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듯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만간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시공하신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이동이 없는 영원한 집을 얻을 것입니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늙었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라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전하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그들은 다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들에 거하였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다가 죽으면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악인의 죽음은 곧 절망이요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백 년 내지 5백 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2천 년 이상이 지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예비하신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훗날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쁘게 믿고 소망하였습니다.
15-16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즉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았던 곳은 그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복음은 ‘더 좋은 소망’(7:19)이며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이십니다. 우리의 속죄는 ‘더 좋은 제물’(9:23)로 이루어졌고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고 그들의 재산도 빼앗겼던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즉 천국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이 건축자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입니다. 그 성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3.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히 11:17-2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⑤ 17-19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바치는 예증을 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순종을 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였고 그 경외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⑥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도 믿음 있는 족장입니다.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이 자기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순종했던 것 같고(창 22장),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여러 번 빼앗을 때에도 싸우지 않고 피하는 온유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창 26장). 이삭의 믿음은 특히 그가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한 말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아들 야곱에게 유언적 축복을 하면서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라고 말했는데(창 27:29),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을 그가 그대로 믿고 선포한 것입니다. 또 그는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유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⑦ 21절에 야곱이 믿음의 선진(족장)으로 살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 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하란에서 20년의 세월을 지나며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인간적, 육신적, 세상적 욕심들과 애착들을 하나씩 제거하셨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죽게 하셨고, 몇 년 후에 그의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았으며 또 22년 후 라헬의 남은 아들 베냐민까지 이집트에 담보물로 감금되었습니다. 그의 심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통의 현실 속에서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은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이민 오게 되어 죽은 줄로 믿었던 아들과 재회하게 되었고, 그의 마지막 17년의 세월을 고센 땅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죽을 때에 침상 끝에서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기를 찾아온 아들 요셉을 맞이하며 그의 두 아들[손자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이끌리는 그의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⑧ 22절에서 믿음이 선진 요셉의 유언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국에서의 종살이 중에서도 범죄치 않았으며,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터득하였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형들에게 증거 하기를,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고(신본주의, 창 45:8), 형들은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간증했습니다(창 50:20).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 그는 임종 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 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맹세시키며 부탁하였습니다(창 50:24-25). 그의 후손들은 이를 순종하여 출애굽 시 그의 해골을 가지고 나왔으며(출 13:19), 여호수아 장군이 죽은 후 요셉의 뼈를 그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 땅, 아버지(야곱)의 우물곁에 묻었습니다(수 24:32). 이 우물에서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하신 것입니다(요 4:12, 29, 42).
4. 믿음의 사람 모세(히 11:23-29)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⑨ 23~29절에 믿음의 선진인 모세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 사람인 모세도 믿음으로 태어났고 장성했고 사역했습니다.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그 아이를 석 달 동안이나 숨겨 키웁니다. 당시 바로가 ‘남자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명령을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비록 그 기간이 석 달에 불과했고 그 후 더 이상 아이를 집에서 숨기며 키울 수 없었지만(출 2:3),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죽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귀한 믿음이었고 그것이 모세에게 전수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24-26절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왕자 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을 것이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그의 모친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되었습니다(출 2:8-9). 모세는 아마 젖을 먹던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정보를 들었을 것이며 커서도 기회 있는 대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너는 이집트 사람이 아니고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 백성이다”는 생각이 심겨져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화려한 왕자의 생활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더 좋아하다’는 원어(헬로메노스 ellomenos)는 ‘선택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 모세의 귀한 점입니다. 모세는 단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강입니다. 27절에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 즉 위로부터 주신 새 원리를 따라 새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날 때 이집트 왕 바로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 보다 더 크시고 두려우시고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만을 두려워하며 모든 인간적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정하다’는 원어(포이에오 poieo)는 ‘만들다, 지키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양 기둥)와 문인방(위, 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유월’(逾越)이라는 말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29절에 “믿음으로 그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 합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집트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다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으며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 바닷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이에 하나님께서는 앞의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시고 구름기둥으로 뒤에 따라오는 이집트 군인들의 진로를 방해하시며 마침내 홍해 바다로 끌어들이사 모두 수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5. 기타 믿음의 선진들(히 11:30-40)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⑩ 30-31절에서 여리고의 라합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리고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조용히 돌라. 6일 동안 그렇게 하라. 제7일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일곱 번째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수 6:3-5) 이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벽이었습니다. 그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고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적 각오로 성을 지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문이 굳게 잠긴 큰 성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첫 번째 큰 어려운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한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라합의 가정이었습니다. 라합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벌써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것을 듣고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멸한 소식을 듣고 알았습니다. 라합은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참 하나님이시며 또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실히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고 신고를 받고 달려와 그들을 찾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에 나갔다고 속였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하나님의 일에 협조한 그의 중심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정탐군들은 살아남았고 약속대로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또 주님의 일을 수행하면서 여리고 성 같은 큰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합시다. 문제는 여리고 성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산다면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 성 같은 난관은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32-34절에서 거명된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⑪ 기드온, ⑫ 바락, ⑬ 삼손, ⑭ 입다와 ⑮ 다윗과 ⑯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단지 몇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고, 그가 언급한 혹은 언급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체험에 대해 열거합니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경험들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나 다윗 같은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12:4; 삼하 8:15). 또 다윗 같은 이는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습니다(삼상 16, 17장; 삼하 5: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단 6장).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풀무 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단 3장). 다윗이나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습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쳤습니다.
35-38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습니다(왕상 17장; 왕하 4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므낫세 때에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었는데(왕하 21:16) 그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크레이톤 아나스타시스 kreitton anastasis)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anastasis)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가리킵니다.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 하여 자기에게 바른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대하 16:7-10).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대언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하였습니다(왕상 22:24-27). 대언자 예레미야는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렘 20:2) 또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워졌습니다(렘 37:16; 38:6).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대하 24:21). 대언자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게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22:18).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고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39-40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 그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롬 3:24; 10:4).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습니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합니다.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믿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구약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살아가서 승리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믿음의 과정을 주관하시고 성령님께서 구원의 서정으로 인도하시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런 믿음의 승리가 날마다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믿음의 완성자로 오셔서 모든 죄악의 짐을 다 해결해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약속인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및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기다리며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인내하여 구원받는 천국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저도 믿음의 선진이 되게 하옵소서. 대한민국 온 국민들이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늘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엡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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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1-11절
2018년 5월 3일 목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 Hallelujah!
– 오늘도 참으로 복되고 좋은 화목 하는 목요일 하루가 시작 되었습니다.
– 믿음의 증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삶의 모범을 따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말씀을 굳게 잡아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고 달려갑시다.
–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영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여 우리 앞에 놓은 문제를 굴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히브리서 11장1-11절 }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 제 목 ♥♥♥
☞ 믿음의 본질과 그로 인한 삶
♥♥♥본문 이해와 요약 ♥♥♥
☞ 11장에서는 온전한 믿음과 최후 승리를 얻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 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본을 제시하는 믿음 장을 제시합니다.
– 그래서 서두에 믿음의 본질을 밝히고 후반부에서 영적 생활의 원리와 인내라는 관점에서 믿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믿음이란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그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히브리서 기자는 본장에서 믿음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실천적인 삶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 그는 여러 인물들을 열거하여 믿음으로 의를 이룬 사례를 통하여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형편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본11장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과 정의와 중요성에 관해 알 수 있습니다.
–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인간은 모두 나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모든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성도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는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삶의 모범을 따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잡아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훌륭한 신앙을 본받아야 구원받고 신령한 복을 받고, 평안과 기쁨을 얻으며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게 됩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믿음으로 살아야 진짜 믿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1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주님에 대한 믿음이 클수록 더 오래 기다릴 수 있으며 약속의 말씀 대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 1절을 살펴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실상’이라는 말은 본래 ‘아래에 서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 이는 어떤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다거나, 혹은 장래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발판을 지니고 서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 따라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확고한 발판이다’라는 말입니다.
☞ 그리고 믿음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선택과 신뢰입니다.
– 믿음이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그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 함께 미지의 세계를 가기에 믿음에는 모험적 정신이 필요합니다.
☞ 또한 믿음은 성도의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 그리고 ‘실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장차 있을 그것들의 성취를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은 곧 미래에 이루어질 사실을 현재의 시점에서 확보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영원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믿음이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에 따른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은 오직 한길밖에 없습니다.
– 믿음을 간직한 자만이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 세상의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재력은 결코 영원한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 때문에 믿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 믿음이 있다면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함으로 인해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 또한 믿음과 자기 확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믿음에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즉 그의 약속을 갖은 고생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성공 예감은 자기 확신이나 신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 그리고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는 영적인 눈입니다.
–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왜냐하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증거를 제시하며 실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시력이 나빠 사물을 볼 수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눈과 같은 것입니다.
– 영적인 일들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 곧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사실들에만 매여 있는 나의 육체의 눈을 감고 하나님의 크고 비범한 진리와 그의 약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 이 방법 외에는 우리의 혼탁한 영혼의 눈을 정화시켜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살지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갖게 할 것이 없습니다.
– 실로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고 선포된 것에 대한 단순한 동의 그 이상입니다.
–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 때문에 믿음은 우리의 기대와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 여기서 내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다고 한다면, 내가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 롬 4:20-21절에서“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 때문에 믿음과 확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 가령 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면서 아이에게 오늘 안으로 귀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는데 밤 열 두 시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 그때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아이는 아빠가 왜 안 오시느냐고 떼쓰며 울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오늘 아빠는 안 들어 오실거야 하고 체념하기도 하며, 어떤 아이는 아빠는 거짓말쟁이라는 낙인을 찍고 뾰로통하고, 혹은 아빠가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들어오시지만 오늘 안에 오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제 곧 오실 것이라고 믿는 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옵니까? 그것은 아빠에 대한 아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 아빠에 대한 믿음과 아빠가 하신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함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리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예수님의 성숙한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 중 누가 과연 성숙한 아이입니까? 아빠를 믿으며, 아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듬직하게 끝까지 기다린 아이일 것입니다.
– 이는 곧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입니다.
-사 25:9절에서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 그래서 믿는 성도들은 이런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히 6:12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신앙 성숙도 깊어가는 것입니다.
– 때문에 우리는 사방으로 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비난을 받으며 거절당할 때조차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 시 62편 1-2절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찬양한 다윗을 장성한 분량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 성숙하고 장성한 성도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 곧 신뢰와 확신이 강한 자입니다.
– 민 23:19절에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였습니다.
– 말씀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며, 그 신뢰를 언제나 저버리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자가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성령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과연 믿음의 확신이 있어서 약속하시는 말씀에 능력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그래서 내가 주님께 더욱 성숙하고자 한다면, 그 첫 디딤돌로서 바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들의 유형을 살펴보면서 지금 나의 신앙 품성을 구체적인 모델로 삼고 더욱 신실한 믿음으로 오래 참음과 인내로 온전히 주님께 신뢰받고 사랑받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
히브리서 11장
150325 히브리서 11장.hwp
우리 같이 오늘도 히브리서 공부하겠습니다. 11장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각각 특징이 있어요. 믿음장하면 보통 히브리서 11장을 얘기합니다. 로마서에도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긴 한데요. 그건 로마서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요. 이 히브리서는 조금 더 색다르게 11장에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장하면 고린도전서 13장 이렇게 얘기하고요. 또 바울이 그런 주제로 많이 썼어요. 부활장하면 고린도전서 15장, 은사장하면 고린도전서 14장 그러한 특징들이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특징을 보이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것도 길어요. 10장도 39절까지 있는데 이것도 40절까지 있네요. 전체가 13장까지 돼있고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세 번만하면 히브리서를 다 마치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의 요약문에 보면 다섯 대목으로 나누었어요. 다섯 패러그래프에요. 해당하는 구절들을 부분적으로 읽어가면서 공부하겠습니다. 도대체 이 히브리서가 믿음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봅시다. 먼저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오늘은 교독으로 말고 저와 함께 통독하겠습니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멘. 1절 보십시오.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게 번역이에요. 헬라어로부터 번역이 됐습니다. 헬라어는 철학적인 언어에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제논 등등 굵직굵직한 서양 철학의 대표자들이 다 헬라어로 자기의 철학을 논한 거예요. 이게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런데요. 이게 문자잖아요. 글이잖아요. 단어잖아요. 이 단어가 어떤 근본을 그대로 잘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안 됩니다. 물론 사물들은 가능하죠. 책이다, 하는 것들은 가능한데 철학적 언어들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질료와 형상이 낱말로 다 해명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이 쓴 글, 혹은 성령도 마찬가지인데요. 성령이 오순절 강림 때 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령에 대한 표현들이 많이 있잖아요. 성령이라는 말 자체로 정말 성령을 다 담아 낼 수 있냐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신학은 필요가 없어요. 확 들어나게 된다면. 삼위일체라고 하는 게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얘기할 때 핵심 개념이잖아요. 트리니티라고 하는 거, 이걸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확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잘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거예요. 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인데 본질로서는 하나라고 말하는 거 아니겠어요. 여기서 말한 위격이 뭐냐, 본질이 뭐냐를 알아야 삼위일체가 들어오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게 뭔지를 설명은 할 수는 있지만 아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확인하기는 힘든 겁니다. 페르조나라고 하는 게 위격이라고 합니다. 이 페르조나에서는 분리된다, 우시우스라는 이 본질에서는 동일하다는 게 삼위일체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제가 괜히 빙빙 돌려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기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라고 번역이 됐잖아요. 실상이 뭐냐, 헬라어에서 번역된 거거든요. 지금 제가 헬라어를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게 번역이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번역이 돼야합니다. 정확한 말로 해야 되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에요. 루터의 번역을 제가 그대로 직역을 해서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뢰이고, 이 마틴 루터의 성경이 우리말 성경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 부분인데 실상이라고 하는 것을 루터는 분명한 신뢰라고 번역했어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죠. 그 다음에, 보지 못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증거라고 하는 단어를 루터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독일어로 그렇게 돼있어요. 이거는 하나의 예인데 성경의 세계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지금도 학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요. 그리고 번역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1절 아주 유명한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이렇게 하면서 그게 뭐냐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합니다. 설명하면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여요. 여기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어떤 활동, 이런 것만 알아도 사실은 구약 성경을 다 꿰뚫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오는지 우리가 차차 보겠습니다.
그 실상이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나라 말로 그렇게 되어 있지만 딱 그건 아니다를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거고요. 오히려 그것을 진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있듯이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모든 진리가 경험되고 실현된다. 이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입니다. 전달이 됐죠. 그런데 이걸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믿음이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안되지만 ‘믿습니다’ 해가지고 믿는 건 아닌 거예요. 그 믿음은 어떤 진리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근거가 없는 대상을 향해서 믿는 것은 아닌 거죠. 왜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이냐는 것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고 그 근거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그게 아직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신뢰하는 거죠. 그럼 이제 그게 진리에 도달하는 바른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조금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부부 간이라도 좋고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좋습니다. 정말 상대방을 신뢰할 만하다는 그 관계가 정말 참되려면 그 사람을 믿어야 되는 거죠. 허황되게 믿는 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식이 지금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믿으면 그 길을 가게 되거든요. 그게 언젠가는 드러나죠. 아직까지는 묻혀있어서 그걸 믿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 가는 영적인 태도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사람 관계도 그럴 진대요. 자식들도 그렇게 정말 믿어주면 그렇게 되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자꾸 우리 입장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하지만 어쨌든 믿음의 관계가 사람 사이에서도 그게 중요한데 하물며 하나님 관계에서야 두말할 것도 없죠. 그런 걸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믿음의 본질, 실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우선 1절에서 7절까지 나오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아담은 제외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두드러지는 인물들 세 사람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에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니고요. 이건 역사가 아니라, 보통 신학에서는 원역사라고 얘기합니다. 역사의 근원이 되는 역사, 모든 인류의 보편사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노아 홍수까지예요. 노아 홍수가 끝나고 바벨탑 사건까지겠죠. 다 홍수와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전체 보편적인 근거를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세 사람 인물 아벨, 에녹, 노아가 나옵니다. 재밌는 것은 이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과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나왔어요. 그걸 근거로 해서 그런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고 판단을 하네요. 그러니까 아벨이 형 가인보다 믿음이 좋았다 그런 얘기입니다. 4절에 나와 있어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근데 사실은 이게 실제로 창세기 안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아벨이 가인보다 믿음으로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은 없고 결과적으로 이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시면 되겠어요.
에녹 이야기. 에녹 이야기도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엘리야와 더불어서 성경퀴즈대회 많이 나왔던 이야기인데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 두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 엘리야하고 에녹이거든요. 사실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건 그 당시의 문학적인 표현이고, 어떻게 두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하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믿음이 그만큼 돈독하다는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아담 이후로 죽음은 우리의 통과해야 될 문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에녹도 결국은 믿음으로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이야기해요. 근데 이건 사실적인 이야기라기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아 이야기. 이것도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7절에 나왔어요. 노아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건 뭐냐. 홍수 사건이 아직 멀었잖아요. 대충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가 일어날 거다 약속이 있은 다음에 몇 년 후에 일어났죠? 120년 후 정도 될 겁니다. 상당히 후에요. 몇 년 후가 아니라 우리 지금 시대로 말하면 몇 세대, 30년을 한 세대라고 한다면, 고대 창세기의 나이 계산이 좀 다르긴 했습니다마는, 상당히 여러 세대가 흘러갈 정도의 기간이 지난 후에 홍수가 시작이 되거든요. 그 전까지는 노아가 감당해야할 짐은 무거웠던 거예요. 사람들이 볼 때 웃기는 이야기거든요. 노아가 산꼭대기 비슷한데 가서 방주 짓고 하는 게 전혀 근거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믿음을 갖고 120년 후의 어떤 사건을 확실한 것으로 자기가 받아들인 거죠. 예, 그런 점을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나와 있는 인물을 짚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한 대상이 신뢰할만한 분이여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그거를 기다리고 뚫고 나가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거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죠. 오스틴 목사라는 사람이 긍정의 힘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맨 앞부분부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 어디 길을 가다보니까 멋진 전원주택이 있어서 하나님께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지더라. 이걸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기독교 신앙이, 성서 신앙이 왜곡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단락, 드디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이어지는데 두 번째 단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8절에서 16절, 이것도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절,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는 바울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다는 그 주제요. 그게 이제 기독교 전체의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고 특별히 로마 카톨릭하고 비교할 때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 이야기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게 복음의 핵심인데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강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바울은 아브라함을 봐라.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 얘기를 했어요.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거론하는 핵심은 땅에 대한 거예요. 팔레스타인 가나안땅. 갈데아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다가, 거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인 거기서, 고향이 거기에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방, 바벨론 문명의, 메소포타미아, 바벨론 같은 지역이죠. 거기였어요. 아버지가 데라였고, 거기를 떠나라. 이주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이 창세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었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될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거기에 신뢰를 갖고 떠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아직 갈 바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미래의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아주 분명한 신뢰이고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진리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 그런 차원이라고 하는 거죠.
이걸 우리 기독교의 신앙생활과 연결해서 생각할 하면요. 아직 우리는 부활 실체가 아니잖아요. 약속으로 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같이 부활의 생명으로 변한다는 약속을 받은 겁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걸 온전히 믿으면 믿음에 의해서, 혹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부활이 주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표현들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확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걸 극복하는 게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영성이기도 하고요.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의 증거, 실체, 의심하지 않는 것, 진리로 경험하는 겁니다.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잘못하면 망상으로 떨어지는 이상한 집단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사이비 이단들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음으로 처리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에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의 그 내용이 온전하게 우리가 정말 신뢰를 하고 의심하지 않되 그것이 왜 근거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을 꾸준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자기 성찰이 없어요. 그냥 믿는다고 하는 자기 주관성에 빠져버린 겁니다. 자기 성찰을 하려면 역사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신학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그러한 것들이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 주류는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도 있었고 그러면서 점점 기독교 진리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깊어지게 됐습니다.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거를 믿고, 나왔고, 길을 갔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죠. 시간, 역사의 흐름은 어떤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의 과정이었어요. 여기서 과정이라고 해서 금방 차근차근 그대로 순서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오히려 약속이 아닌 거 아닌가하는 그런 회의와 시행착오가 많은 거예요. 그럴 때 방향을 잘 정해서 꾸준하게 일관성을 갖고 가야되죠.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경건 훈련도 필요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믿음의 동지들도 필요하고 같이 가는 도반들도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중요한 겁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명석하고 영성이 깊어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아닌 거예요. 같이 격려하고 더불어서 같이 성찰하고 그러한 공동체에 근거하여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같이 신앙에서 실제로 담아내야 되는 거죠. 네, 약속의 땅 그 문제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곁들여서 사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라가 믿음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구약성서는 남성 중심으로 많이 되어 있어요. 그 당시는 가부장적이어서 여자들은 종속변수로 등장이 됩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했을 때 사라가 처음에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말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아까 아벨을 얘기할 때도 아벨이 정말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는 창세기에서 말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니까 믿음으로 드렸다고 해석하는 것처럼 이 사라 이야기도 사라가 믿음이 있었다는 근거는 창세기에 없지만 그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다는 결과를 놓고 보면 믿음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세 번째 단락이요. 17절부터 22절까지입니다. 여기도 우리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17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절,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멘, 여기까지요. 여기서 한 번 더 아브라함이 언급돼요. 족장들의 선봉장이라서 그렇습니다. 족장들은 대표적으로 네 명이에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까지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족장 전승이라고 해요. 전승이란 말을 이해하시겠죠. 구전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삭, 야곱, 요셉, 이런 것들이 사실은 독립적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창세기를 편집한 어떤 학자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다시 정리를 한 거예요. 성경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되어있는데 그렇게 말 하냐. 이걸 신학적으로 연구하면 다 나옵니다. 그런 것까지는 일반 신자들이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가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대표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족장이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로 보면요 일반 역사하고 비슷한 거예요. 보통 인류 고대사를 따질 때 씨족사회가 있고 그 다음에 부족 사회가 있고 왕정이 있고 봉건주의 그 다음에 민주사회가 쭉 내려오잖아요. 어쩐 체재가요. 씨족사회가 성경에 보면 족장들 시대에요. 아브라함은 씨족이에요. 이스라엘 씨족의 우두머리들입니다. 씨족사회가 쭉 진행이 됐고요. 그 다음에 인류의 역사에서 부족 사회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은 말하자면 작은 군주에요. 씨족에서 확장된 거예요. 사사시대에 마지막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사이기도 하고 예언자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사무엘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어요. 부족사회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오는 그 길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 뒤에 왕정시대가 시작이 되잖아요. 사울이 첫 왕이 됐습니다만 사울을 왕으로 삼지 않습니다. 왕정시대의 특징은 세습이에요. 아들이 왕이 돼야 되요. 사울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왕이라고 할 수 없고요. 다윗이 실제 왕이고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조입니다. 다윗 왕조라고 하죠. 사실은 이스라엘에 다툼은 많았습니다. 그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데 성경에는 일관되게 흐름이 있긴 한데 그 안에서도 서로 싸우고 북왕조, 남왕조 분리 되고 그런데서 우리나라가 북한과 남한이 갈라져 있듯이 서로 정통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 족장들이 나와요. 아브라함, 이삭이야기가 나와요. 이게 다 믿음으로 된 거예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간단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두 가지의 하나님 명령에 끼어있던 거예요. 하나는, 친자식 이삭이 후손이 된다는 분명한 약속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여기서 이게 어려운거죠. 이걸 그대로 순종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결국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에 다 충실한 거예요. 이삭을 바치라는 말에도 순종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후손이 이삭을 통해서 된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확실하게 믿은 거죠. 서로 충돌되는 사건인데 같이 믿은 거예요. 거기에 어떤 믿음을 통해서 결정적인 사건이 증거가 되고 확실성이 되고 그게 정말 모든 것의 근거, 진리다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오늘 이 시간에 믿음의 정체를 다 빠삭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이게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도피적으로 그냥 믿습니다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를 꿰뚫고 들어가는 영적인 태도에요. 이거는 근거가 없어서 종교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실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신비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참된 신뢰 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될 바른 영적 태도입니다. 이런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이고요. 그게 정말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삭, 야곱, 에서, 쭉 얘기 나오지요.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23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여기는 모세가 주로 나와요. 이거는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23절 읽겠습니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절,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여기 모세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의 기계적으로 믿음으로 했다고 구절구절마다 강조를 했습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모든 걸 다 믿음으로 기록을 했어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참된 것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 보세요. 믿음으로 쭉 나오죠. 23절, 24절, 27절, 28절, 29절, 30절, 31절, 라합까지 나오네요. 기생 라합. 여리고성을 칠 때 정탐꾼들을 도와줬던 여자입니다. 그건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스라엘 역사를 쭉 따라가면서 이 모든 게 다 믿음으로 일어났던 사건이다를 말하려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이 믿음은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어서 어디로 도피하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 과학은 확실한 거고, 실증적인 거고 이 믿음은 그렇지 않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계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얘기 잠깐 더 붙이면요.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 가나안 까지 들어가서 약속의 땅으로 거기서 정착하게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어요. 그거는 계산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거기에 우연한 많은 사건들이 개입돼서 아브라함의 전체 역사에 드러나게 된 거죠.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지 않습니까. 생각할 것도 많고요. 정치도 있고, 교육, 가정, 사회,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골치 아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명이 완성되는가 하는, 여기에도 솔깃하고 저기에도 솔깃하고 많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면 안 되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이야기하는 고유한 삶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은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의 시각, 혹은 그러한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계산해 내도 다 답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붙드는 것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거룩한 영적 상상력, 거룩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32절에서 40절입니다. 여기 사사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요. 여기도 교독 하실까요. 제가 32절을 읽겠습니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절,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절,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 11장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장엄해요. 어떻게 보면 큰 교향악단의 노래를 듣듯이 이 믿음의 세계를 아주 화려한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서 풀어가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부를 위해서 몇 번 읽었어요. 많이 더 깨달았습니다. 어떻다고 하는 게. 목사도 나름대로 교회 전문가이고 신학 전문가인데 멈춰 있는 게 아니에요. 거의 종말까지 계속 열려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진보, 앞으로 신앙이 나가야 되는 거예요. 목사도 계속 수행적인, 구도적인 자세로 일을 해야겠죠. 오늘도 이렇게 읽으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 말씀이 깊은 어떤 것들을 전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엄한 필치로 그 내용을 담고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나오네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가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온다면 다윗이 아니라 사무엘이 나와야 되죠. 순서대로 따진다면.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거든요. 그런데 순서가 좀 바뀌었어요. 아마 히브리서 기자가 사무엘을 거의 왕 수준으로 보는 건지요. 시대적으로 보자면 사무엘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사울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다윗이 나와야 되는 거죠. 여기서 순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지자들도 나와요. 이름은 나오지 않네요.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아까 제가 말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보세요. 씨족 사회, 족장들, 그 다음에 부족, 사사 시대, 그 다음 왕정 시대로 내려오는데, 예언자들이 주로 어느 때 활동을 했을까요. 당연히 왕정 시대죠. 그 전에는 사사들이 직접 그런 일들도 했으니까요. 왕정 시대에 들어오면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물론 이스라엘은 그래도 여전히 하나였지만, 그래도 좀 하는 역할이 분리되고 문명, 문화가 발달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때가 왕정시대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생활을 했다. 믿음으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얘기 하면서요. 특별히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거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다고 얘기합니다. 선지자들도 고난 많이 당했어요. 다음 주가 종려주일이고요. 고난주간이라고도 합니다. 부활절 앞두고 있는 주일인데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그게 지금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지.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으로써 여기에 오셔서 그렇게 감당하셔야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의 비천한 데에 오셔서 정말 낮은 데에 처하셨지, 케노시스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짐, 이런 것들을 굉장히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자연스러웠을까요? 그건 굉장히 앞, 뒤가 안 맞는 얘기예요. 메시야가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은 그동안의 해석을 통해서 구약의 여러 가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야기나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충분히 해석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걸 알아듣는 거죠.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하고 추종하던 사람들하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난 받는 얘기가 쭉 나오잖아요. 결국 36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뭘 말하는 걸까요. 믿음으로 사사 역할을 하고 선지자 얘기 하고 다윗처럼 왕의 역할을 했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과 조롱을 받았다.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런 고난을 지금 받고 있다. 그러니 영적인 전통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거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음, 믿음이 유대인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온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받은 고난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어요. 시대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좀 괜찮을 때도 있었어요. 황제에 따라서 좀 난폭한 황제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조금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있으면 마이너리티를 공격함으로써 정치 위기를 헤쳐 나가지 않습니까. 로마 황제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정말 그 땐 어려웠고요. 그리고 로마 제도가, 기독교는 로마하고 뗄 수 없습니다. 로마 정치. 로마 황제, 황제주의죠 말하자면. 거기는 왕하고는 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가 굉장히 세련된 집단입니다. 왕이라고 하면 세습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황제들은 세습을 하지 않습니다. 원로원이나 이런데서 민주적으로 뽑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로마의 황제, 이 제도를 우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곳곳 관공서 이런데다가, 황제의 이름을 까먹었는데, 황제 상을 세워놓고 공무원 되는 사람들은 절하고 인사하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거 안 하니까 로마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그런 등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좀 보시죠. 밑에서 마지막 넷째 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믿음에 의해서 살던 사람들이 받은 고난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모범들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전수된다는 사실을 전한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인물들은 믿음을 통해서 참된, 이거는 나중에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쓴 거예요. 구약의 위대한 사람들, 믿음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다. 그 약속된 게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요. 부활이요.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그건 못 받았어요. 그들만 있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를 통해서 구약의 믿음이 완성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지자나 사사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그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쭉 설명합니다. 재미있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 나오는 믿음의 실체,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천년 전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학 선언, 그리고 간증, 혹은 설교,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부활 생명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더 깊어지고 그것을 이미 오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주님 이렇게 한 주간의 중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또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각각 여러 형편들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필요한데로 인도하시사 믿음의 길을 잘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메튜 헨리 주석, 히브리서 11장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또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누구인가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이 세상을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신 것이다.하나님께서 대단히 정밀하게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창조는 “만드는 일”이었다. 즉 지어지는 모든 것들을 창조의 목적에 일치되어야 했고 또 창조자의 완전성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자신의 온전하신 지혜와, 영원하신 아들과 그의 능동적인 의지로 세상을 지으셨다. 그는 “모든 것이 있으라 하셨고 또 모든 것은 그대로 되었다”(시 23:9).이 세상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미리 있었던 물질로부터 재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는 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인간의 상식을 뒤엎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피조물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없던 것들을 마치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칭하셨고 또 그것들은 존재하도록 명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이해하게 된다. 정확한 지식을 주며 또한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에 대한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무시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창조기사는 인간의 환상적인 가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느 정도 있으나 현혹되기 잘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러한 환상적인 가설에 도취하여 결국 불신을 향해 첫 걸음 딛게 되고 결국 더욱 큰 불신에로 빠져드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Ⅲ.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규례의 첫 항목을 대하게 된다. 이 첫 항목은 모든 다른 믿음의 규례의 항목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기본 항목이다. 또한 이 첫 항목은 모든 시대에 걸쳐 세계 구석구석에 거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고백되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이 첫 항목의 내용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고” 또한 선재해 있던 물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요 무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3절).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앞을 내다볼 뿐 아니라 과거도 믿음으로 회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내다보아야 한다. 할 뿐만 아니라 태초의 시기에 대해서도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지니게 되면 이세상의 창조에 대해서 믿음 없는 이지(理智)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이해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이해하도록 돕는 조력자요 친구이다. 믿음을 통하여 이 세계에 관하여 즉 하늘과 땅 밑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참된 믿음의 역사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옛 믿음의 역사를 통하여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을 최상의 좋은 방법이다. 참 믿음은 새로운 발명품이 아니며 현대에 생긴 환상도 아니다. 이 믿음은 은혜의 언약이 이 세상에 발표된 이후로 인간의 영혼 가운데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은혜인 것이다. 믿음은 계시가 시작될때부터 역사되어져 왔다. 이 세상에 살았던 선진들과 가장 훌륭한 위인들은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지녔던 믿음은 그들에게 영예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영예롭게 하였다. 이 믿음이 선진들에게 역사하였으므로 그들은 전해져 오던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들을 실천할 수가 있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선조들이 강력한 믿음으로 행하였던 뛰어난 일을 기록하게 하사 그들로 하나님의 증거가 되도록 배려하셨다. 믿음으로 행한 순수한 행위는 기록으로 남겨져 증거될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기록은 참 믿는 자들에게 영예가 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1절).” 믿음과 희망은 언제나 병행한다. 우리 희망의 목적과 우리 믿음의 목적은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수행하실 것이라는 같은 사실을 우리는 믿고 또한 바란다. 이 믿음이 강열할 때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맛보고 또 소유하게 된다. 이 강력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바라는 것들의 첫 열매를 미리 맛보므로 영혼의 계속적인 유지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 안에 사는 믿는 자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게 된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시며 그의 영혼은(하나님의 현존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는 믿음의 대상에 대해 그 본질적인 실재를 이 세상에서 이미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1절).”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의 실재를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여 준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각 부분에 대한 우리 영혼의 확고한 동의이다. 또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인봉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룩함과 의와 선하심으로 계시하신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시인이다. 또한 믿음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게 하며 또 그의 뜻을 사랑하게 해 준다. 또한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영혼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육신에서 여러 가지 감관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영혼에게도 이러한 감관이 필요한데 믿음은 바로 이러한 영혼의 감관인 것이다. 믿음이란 무슨 환상이나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해 주며 또 우리의 영혼으로 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합당하게 생활하도록 고무시켜 주는 실질적인 것이다.
11:4
믿음의 선구자들(1)(히브리서 11:4-31)
1.
2.
앞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은혜에 관하여 일반적인 관점에서 설명하였던 바울은 구약 시대에 믿음에 있어서 뛰어난 선구자들을 본문에 소개되는 사람들을 다음의 두 가지 유형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기록되는 동시 그 사람 개인의 믿음의 역사도 함께 기록된 부류의 사람들.이름만이 기록되거나 또 거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믿음의 공적도 일괄적으로 처리된 부류의 사람들(역주: 4-31절까지에는 1번 부류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고 32-40절까지는 2번 부류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는 독자들이 구약 성경을 읽고 거기서 얻은 지식을 통하여 자신들이 믿음의 선진들과 그들의 공적을 연결하게 하기 위해 그대로 일괄하여 기록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 이름이 언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행동과 특별한 시련에 관하여도 기록된 부류의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
Ⅰ. 본문에 기록된 마음의 주된 본보기의 아벨의 믿음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첫 번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믿음을 여기에 기록하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회개케 하시고 또 그들에게 약속된 자손(역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셨고 또 그가 아담과 하와에게 제사 제도를 알려 주셨고 또 그들은 자기들의 자손에게 이 제도를 전해 주었고 그렇게 하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 자신들과 자기들의 후예를 파멸케 하였으나 그 이후에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본장의 믿음의 사람들의 복된 명부에 기재하지 않으셨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큰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아무리 많은 달란트를 받고 또 자신만만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리라는 자만은 결코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발견하게 된다. 본문은 최초의 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요 또한 아담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서 유일한 순교자였던 신앙의 인물의 첫 사람으로 제시한다. 그는 믿음에 의해 살았고 또 믿음을 위해 죽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인들이 본받을 만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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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6]아벨이 믿음으로 행한 행위. 그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4절).” pleiona qusi,an – 즉 그는 가인보다 좀더 풍부하고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손들이 믿음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아벨의 제사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기록 가운데서 첫 번 본보기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이 인간의 타락이다. 완전히 두절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자비이다.인간이 타락한 후에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가능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죄를 고백하며 또 인간의 영혼들에 대한 속전이신 구원자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므로 하나님 예배가 가능하였다는 말이다.태초부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갔던 두 사람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단한 차이가 있었다. 본문에 보면 가인의 장남이었으나 하나님이 기쁘시게 여기신 것은 아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참으로 명예로운 것은 먼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입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두 사람간에 그 인격에 있어서 이미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정직한 사람이며 의인이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인은 형식주의자였으며 중심되는 은혜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두 사람에게는 생활 원칙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또는 자연적인 양심에 따라 행하였을 뿐이다. 또한 이 두 사람간에는 자연적인 양심에 따라 행하였을 뿐이다. 또한 이 두 사람간에는 그들이 드린 제물에서도 차이점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아벨은 속죄의 희생 제물 즉 “양떼 중에 첫 번 새끼를 드림으로” 즉 자신은 죽음에 이르러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오직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써만이 자비를 바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가인은 단순한 자비를 바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가인은 단순한 감사제 즉 “땅의 첫 소산”만을 제물로 바쳤다. 이 감사제는 사실 속죄제를 드리고 죄없다고 인정함을 받은 후에야 드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이 감사제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또한 속전물의 필요성도 없었다. 그점이 가인의 제사 가운데서의 근본적인 잘못이었다. 참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차이점이 있게 마련이다. 거짓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성도답게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바래새인과 같이 자기의 의로움을 의지하는 예배자도 있을 것이요, 또 세리와 같이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아벨이 그의 믿음을 통하여 얻은 것. 이것에 대한 원래의 기록은 창세기 4장 4절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전인격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으셨고 그 다음 그의 제물을 믿음에 의해 드려진 것으로 받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아벨이 그의 믿음에 의해 특별한 유익을 얻은 사실을 대하게 된다.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즉 그는 의롭다 인정되고 성결하게 되었으며, 용납받은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그가 의로운 자였다는 증거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그의 제물을 살라 버렸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자신이 받으셨음을 증거하심으로 아벨의 인격이 의로움을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의의 상징인 불이 제물을 태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희생 제사를 보시고 그 예배자를 받으셨다는 자비의 증표인 것이다.”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오히려 후세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가 얻은 유익의 하나이다. 그는 후세에 길이 기억될 만한 교훈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이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이 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타락한 인간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납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만약 우리의 인격과 제물이 열납된다면 그것은 오직 메시야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하나님께 열납된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귀한 은총이라는 사실이다.하나님께 주시는 이러한 은총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질서와 모함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해한 자들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거나 그의 백성들이 당한 고난을 보상하지 않고 방관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위의 사실에 아벨의 제물이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아벨의 제사보다 더 귀중한 것임이 말씀되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그는 아벨과 같은 귀중한 믿음을 지닌 또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Ⅱ. 에녹의 믿음이 다음으로 소개된다(5절). 그는 믿음을 통하여 좋은 기록을 남긴 두 번째의 믿음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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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에녹에 대하여 전하여지는 내용 본문과 창세기 5장 2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즉 에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또 하나님과 교통함에 있어서 온전한 신앙으로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었다.”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즉 지상의 어느 곳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에녹의 영혼과 몸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성도들은 이같이 하늘나라로 올리우실 것이다.”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다.” 에녹은 자기 자신의 양심 가운데 그러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증거하셨다. 이 죄된 세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의 표시를 주시고 또 그들을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에녹의 믿음. 본문에 보면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이 말씀되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우리를 돕는 믿음 즉, 능동적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본문은 우리가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지 않는 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하였다. 그러면 에녹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자.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존재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의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 하나님의 실존에 대하여 말씀에 계시된 대로 믿는 믿음은 우리 영혼 위에 강력한 경외감을 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억제하는 굴레가 되며 우리를 모든 복음의 규례에 복종하게 하는 박차 역할을 한다.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의 빛과 생명, 사랑, 하나님과의 닮은 현상, 또한 그와의 사귐을 상실하였다.하나님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재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찾을 수 있는 수단에 방법들을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법도를 청종하며, 사역자들은 그들의 직책을 감당하며 그의 회중들과 한 마음이 되며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모든 일에 있어서 겸손하게 그의 은혜로운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그를 부지런히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또한 진지하고 끈기있게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단 하나님을 뵈옵고 그의 용서를 얻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데 소비하였던 수고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Ⅲ. 노아의 믿음(7절). 다음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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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노아의 믿음의 근거. 노아의 믿음의 근거는 그가 아직도 보지 못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경고였다. 노아는 하나의 거룩한 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가 음성을 통해 주어졌는지 또는 환상을 통해 주어졌는지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다. 이같이 그는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계시를 받은데 불과했으나 그러나 그도 그 일을 확실한 것으로 믿고 수행하였다. 본문에 보면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았다”고 하였다. 즉 그는 세상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크고도 혹독한 심판을 겪게 되리라는 경고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노아가 이런 경고를 받았을 때는 이런 심판의 징조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은밀한 경고를 노아는 그와 그의 경고를 비웃을 것이 틀림 없는 세상을 향하여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대체로 죄인을 벌하시기 전에 미리 경고를 주신다. 그리고 그는 그의 경고를 가벼이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무거운 진노를 내리신다.노아의 믿음의 행위와 그리고 그의 믿음과 행실에 미친 영향력.그의 믿음이 그의 마음 가운데 준 영향.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그의 마음에 일으켰다. 그는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믿음은 먼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다음에는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계시의 내용에 따라 적절히 적응하게 하신다. 만약 그 계시가 좋은 것이라면, 믿음은 우리의 마음에 사랑과 사모하는 심정을 품게 해준다. 그리고 그 계시가 불길한 것이라면 믿음은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준다.노아의 믿음은 그의 행실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의 경고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야기된 경외함은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준비하여 사악한 세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노아는 자기가 왜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하나님에게 따지지도 않았고 또 그가 방주에 넣으라고 하신 그 많은 것을 어떻게 그 배가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따지거나 또 이 정도의 배로 그렇게 큰 폭풍우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가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의 믿음은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였다.노아의 믿음의 축복된 결과와 보상.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죄인들이 그들 주변에서 멸망당하고 있을 때 노아와 그의 가정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인하여 그의 가정을 구원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노아의 아들과 딸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들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여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노아의 가족과 결혼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 여인들은 지위가 높은 다른 가정과 결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그들은 틀림 없이 물에 빠져 익사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지체 높은 가정과 인척관계를 맺는 것은 유익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진실로 유익한 것은 약속을 지닌 자와 인척관계를 맺는 일인 것이다.이 믿음으로 노아는 이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였다. 노아의 거룩한 경외함은 인간들의 안일과 헛된 신념을 정죄하였다. 또한 그의 믿음은 인간들의 불신을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의 순종은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멸시와 반역을 정죄하였다. 좋은 본보기는 죄인들을 개심시키거나 아니면 그들을 정죄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엄격한 경건함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무언중에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닌 힘은 모든 사람들로 그들의 양심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게 하신다. 그리하여 의인들은 죄인들로 스스로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악한 자들을 정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인들을 거칠고 책망하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본이 되는 생활을 그들에게 보이도록 스스로 정죄함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다.”노아는 그 일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7절).”노아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참된 의를 소유하게 되었다. 노아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이러한 노아의 상속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자체요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상속자가 됨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의 의(義) 또한 상대적인 것으로 그가 약속된 자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주께서 심판하실 무서운 날”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받을 것을 소망한다면 지금 방주를 준비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총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 또한 이 방주를 준비하는 일을 문이 닫혀지기전에 신속히 행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다른 길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Ⅳ. 하나님의 친구이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 이 아브라함은 히브리인들은 자랑으로 여겼고, 또 그들은 그들의 혈통과 특권들을 그로부터 물려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을 즐겁게 하고 또 그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다른 어떤 선진들의 믿음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업적이 위대함을 상론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중에 사라의 믿음에 대하여서도 얘기하므로 그녀의 후예들인 히브리 여인들이 계속 잘 해줄 것을 암시하였다. 다음을 유의하자.
Ⅰ.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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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 대한 부르심은 시련이 예상되는 부르심이었지만 그 부르심은 그럼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그 부름을 믿고 복종해야 한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 2,3절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셨다”고 말하였다. 이 부르심은 능력의 부름이었다. 이 부름을 받고 아브라함은 회개하고 자기 부친이 지켜오던 우상 숭배를 떠났던 것이다(창 12:1). 이 부르심은 그의 부친이 하란에서 운명한 후 아브라함에게 재차로 임명하였었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자유하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악한 사람을 취하시어 가장 선한 사람으로 만드시기로 하시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도 오신다는 사실이다.죄인을 부르시고 회개하도록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며 인간의 영혼 가운데 영광스러운 일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떠나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죄된 동료를 떠나라고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기서 떠나도록 명하신다.우리는 잘 시작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계속 잘 진행하기 위하여서도 부르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하늘나라의 가나안에 다다를 때까지 쉴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가라고 명하신 그 땅을 아브라함이 유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즉 잠시 후 그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는 하늘나라의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고, 다른 한편 현세에서는 그의 후손들이 지상의 가나안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그들이 받게 될 유업에로 불러내신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부르심을 통해 그가 부르신 자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상속자로 삼으신다.이 유업은 그들이 즉시 소유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할 때까지 확실한 것으로 때가 오면 반드시 성취될 것이었다.조상의 믿음이 그의 자손들에게 축복이 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절대적으로 복종하였다. 그러므로,”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8절)”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곳으로 자기를 이끌어 가시도록 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혜야말로 그를 이끄는 가장 훌륭한 인도자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자기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임을 믿었다.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하는 것이며 그분만이 받으셔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우선권을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비록 그들이 자기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안내자만은 안다면 충분히 안심하여도 좋은 것이다.”믿음으로 저는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였다(9절).” 이러한 행위도 그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가나안이 약속의 땅으로 불리우게 된 이유. 그 까닭은 그 땅이 오직 약속되었을 뿐 아직 약속 받은 자가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한 태도. 그는 상속자나 소유자처럼 그곳에 거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처럼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옛 거민들을 쫓아내지도 않았으며 또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그들에게 전쟁을 도발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나그네처럼 사는 것으로 만족해하였고 옛 주민들이 불친절할 때는 참고 또 그들이 호의를 베풀때는 감사함으로 그 호의를 받았으며 오직 그의 마음을 그의 고향인 하늘의 가나안에만 향하며 살았다.아브라함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같은 약속의 후사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 그는 이동식 주택인 장막에서 살았다. 그리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지냈다.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을 살 때 이와 같은 태도로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또한 좋은 반려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 상태의 생을 사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칠십 오세, 야곱이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또 이삭과 야곱은 같은 약속의 후사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이삭에서 갱신되었고(창 26:3) 또 야곱에게도 갱신되었기 때문이다(창 28:13). 모든 성도들은 같은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그 약속은 믿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주 하나님께서 부리실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부모나 자녀가 다같이 하늘의 유업의 후사로서 함께 나그네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다.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시켜 준 것은 그가 하늘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다(10절)”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하늘나라의 모습, 하늘나라는 도성이다. 그것은 잘 건설되고 또 방어되며 물자가 풍부한 정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또한 그곳은 기초가 든든한 도성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목적을 따라 지어졌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공적과 중보가 거하며 또한 영원하신 계약에 의해 약속된 곳으로 순전하며 그 주민들은 완전한 그러한 도성이다. 또한 이 성을 지으신 이와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 모델을 고안하시고, 또 그가 그 모델에 따라 그 성을 지으셨다. 그는 또한 그 성으로 들어가는 새롭고 살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는 그 길을 자기 백성들을 위해 열어 놓으셨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성을 소유하게 하시고, 그 안에 살도록 하시며, 스스로 그 성의 본체가 되시며 축복이 되셨다.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늘나라의 도성에 대해 응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성을 기대하였다. 또한 그는 그러한 하늘의 성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는 그곳을 기다렸고 또 기다리는 동안도 믿음에 의해 그 성과 친숙하여졌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가 되면 그가 정하신 방법에 의해 자기가 그곳에 안전하게 도달하리라는 즐거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희망이 아브라함의 현재에 생활에 미친 영향. 그 희망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나그네 상태에서 당하는 모든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하였고 나그네 생활의 모든 불편을 참을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이 소망은 그로 현재 생활 속에서의 모든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게 하였고 끝까지 그 의무를 감당할 수 있게 해주었다.
Ⅴ.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서 바울은 사라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삽입하였다. 다음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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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믿음이 통과해야 했던 여러 가지 시련. 그 시련은 매우 큰 것이었다.잠깐동안 불신앙이 그녀를 지배했었다. 사라는 약속에 대해 그것을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고 비웃었다.사라는 불신앙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저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갈과 동침하게 하였다. 이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후손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라의 이러한 죄는 그녀로 하여금 후에 믿음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사라가 나이먹어 출산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주어진 그녀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사라의 믿음의 행위. 그녀의 불신은 용서되고 잊혀졌다. 그녀의 믿음이 결국은 승리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녀가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다”고 하였다(11절). 사라는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또 그 약속을 그녀가 확신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불신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일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믿음으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그가 그의 백성들을 버리시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사라의 믿음에 대한 보상과 열매.그녀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11절). 은혜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섭리로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모의 영혼에게 열매를 맺도록 하실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모의 자궁에 수태를 가능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사라는 어린 아이를 얻었다.” 그 아이는 약속의 자녀로서 노년기에 접어든 양친에게 위로가 되었으며 미래의 희망이었다.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아이를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뛰어난 자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12절) 얻었다. 즉 주의에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난 크고도 강력하며 유명하게 될 민족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이 아이들을 통해 선별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얻었다. 그러나 모든 보상 중에서도 가장 영예롭고 뛰어난 보상은 이들 가운데서 “육을 따라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시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축복하신 분이신 메시야가 오셨다”는 점이었다.
Ⅵ. 바울은 다른 족장들 즉 이삭과 야곱 및 이 복된 가족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도 언급되었다(13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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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현재 생활의 불안정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된 것들을 아직 받지 못하였다. 즉 그들은 약속된 내용의 것들을 받지 못하였고, 아직 가나안을 소유하지도 못하였으며, 많은 자녀들도 아직 가지지 못하였으며,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아직 만나지도 못하였다. 다음을 유의하자.많은 사람들이 약속은 얻었어도 그들에게 약속된 것을 즉시로는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지상에 사는 성도들의 현재 상태의 불완전은 그들의 행복이 현세의 쾌락과 많은 제물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장래 저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 시대에 삶은 족장시대보다 좀더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언약의 여러 가지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가장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약속이 그곳에서 성취되고 완성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불안정한 세상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계속된 저희 믿음의 행위. 비록 그들이 아직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지만 다음의 것들을 행하였다.그들은 약속을 멀리서 보았다. 믿음은 맑고 강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아직 멀리 있는 약속된 자비를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날이 아직 멀리 있을 때 그날을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그들은 그 언약들이 참되며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다. 믿음은 하나님은 참되시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안정되게 해 준다.그들은 그 언약된 것을 부분적으로 누렸다. 그들의 믿음은 승낙의 믿음이었다. 믿음은 긴 팔을 가지고 있으므로 멀리 떨어진 축복을 끌어안아서 현재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누림으로 기쁨을 맛본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즐거움을 앞당기어서 맛보았다.그들은 자신들이 “땅에서는 타향사람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다”(13절). 다음을 생각해 보자.그들의 처지. 그들의 처지는 “타향 사람과 나그네”의 처지였다. 그들은 하늘나라가 고향인 나그네였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집을 향하여 여행하는 순례자들이었다. 그들의 여정이 때때로 초라하고 더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자기들이 처한 처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 그들의 생활을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삶의 태도 역시 떳떳하였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짐이 될 만한 것은 가급적 떨어 버리려고 노력하였으며, 마음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기 길을 가는데 전념하며, 동료 여행자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자 하였다. 그들은 어려움을 예상하고 그것들을 견뎠으며 또 집에 다다를 것을 소망하였다.그들은 다른 나라 즉 그들의 본향인 하늘나라를 목적 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하늘나라를 그들의 고향이라고 한 이유는 그곳이 그들의 영적인 출생지요 그곳이 그들의 유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 나라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삶이 지향하는 바는 이 나라에 있었고 그들의 소망도 이 나라에 있었다. 또한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이 나라에 관해서였다. 그들은 그 나라에 합당한 자격을 얻기 위해 또한 그 나라에 알맞는 성품을 지니며 그 나라에게 즐거움을 누리며 거기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였다.그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그들의 신실성을 충분히 증명하였다.그들은 자기들이 떠나온 나라를 생각하지 않았음을 고백하였다(15절). 그들은 떠나온 나라의 풍요함과 안락함을 동경하지도 않았으며, 그곳을 떠난 것을 후회하거나 언짢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결코 그리로 되돌아가려고 바라지 않았다. 구원의 능력이 깃든 부르심을 받아 죄된 처지에서 나온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함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더 좋은 것들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들은 자기들이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런 기회를 만들려면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정도의 시간을 충분히 있었다. 또한 돌아갈 수 있는 힘도 있었다. 또한 그들은 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도 그들을 기꺼이 보내 줄 것이었다. 그리고 옛날 친지들은 그들을 다시 기쁘게 맞아 주었을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경비도 충분히 있었다. 또한 사람을 타락케 하는 악한 상담자인 혈육은 그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라고 때때로 눈짓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낙망과 또 하나님을 거스르게 하려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따라갔다. 우리도 모든 일을 그렇게 행하여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치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끝날까지 하나님을 꾸준히 따름으로써 우리의 믿음과 고백의 참됨을 보여야만 한다. 그들의 신실성은 떠나온 나라로 돌아가지 않는 데서 나타나야 함은 물론이고 더 좋은 나라 즉 하늘에 있는 나라를 소망함으로써 나타나야 한다. 다음을 살펴 보자. 첫째, 하늘나라는 지상에 있는 어떤 나라보다도 더 좋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더 좋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며 또 아름다운 물건이 무엇이든지 있으며 악한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안정된 곳이었다. 고용주나 기쁨 사회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지상에 있는 가장 좋은 것보다 탁월하다. 둘째,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나라를 소망한다. 참된 믿음은 신실하고 열렬한 소망을 가져다 준다. 믿음이 강할수록 그러한 소망 또한 더욱 강렬하여진다.그들은 그러한 약속들을 믿으면서 죽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서 모든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충분히 믿는 가운데 죽었다(13절). 그들은 죽는 날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리고 죽을 때 그들은 믿음으로 속죄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탄의 격렬한 창을 꺾어 버렸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였으며, 죽음의 가시를 무력케 하였고,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안락과 십자가를 즐거이 하직하였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는 이러하였던 것이다. 이제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그들의 믿음에 대한 은혜롭고 큰 보상.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6절)”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하나님은 모든 참된 믿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충만함에 대한 관심을 준다.그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부르신다. 그러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그는 말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내버려 두셨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양자의 영을 주사 그들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본성이 천박함과 죄로 인해 악해진 성품과 그들의 외적인 조건 상태의 빈곤에도 불고하고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겸손이며, 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떤 멸시를 당하든지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께 비난과 부끄러움을 돌리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므로 그로 하여금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시게 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행하고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야 한다.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그 백성들을 위하여 한 도성 즉 그의 백성에게 울리는 행복의 장소를 예비하셨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낼 만한 적당한 장소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지 못하거나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자기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과 그런 관계를 맺게 하셨다면 또한 그 관계에 부끄럽지 않는 것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취하셨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만큼 충분한 응답을 주시고 이에 합당한 행동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칭에 부끄럽지 않을 나라를 그들을 위해 하늘에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한 백성으로 자기의 양자들로 삼으시고 그러나 그들에게 적절한 대우는 해 주시지 않았노라는 비난을 받으실 일은 결코 하시지 않았음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숙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도성을 향한 사랑을 불태우고 소망을 넓히며, 부지런한 노력으로 열심을 내야만 할 것이다.
Ⅶ. 바울은 지금까지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설명한 후에 아브라함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선조들이나 또는 그의 영적 자손 중 그 누구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시험과 믿음의 행위로 본보기로 우리에게 설명한다. 바로 이것은 그가 이삭을 제물로 드린 행위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다. 이삭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나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이다”(17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위대한 신앙의 본보기를 통해 다음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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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과 그의 믿음의 행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라고 하였다(창 22:1). 그러나 이 시험은 아브라함으로 죄를 짓게 하시려는 시험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올무에 걸리게 하시고자 시험하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과 복종을 더욱 온전케 하시기 위해 그를 시험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아브라함을 여러 번 시험하셨다. 그 첫 번째 시험은 그를 그의 고향과 부친의 집으로부터 불러내신 것이었고 다음은 그가 기근 때문에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떠날 수밖에 없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하여 다섯 왕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였고 또한 경우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서 사라를 빼앗았을 때였다. 그외에도 아브라함이 시험받은 경우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시험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욱 큰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창세기 22장 2절을 읽어보라. 우리는 22장 2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뼈에 맺히는 말씀들임을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너의 가축이나 노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네 아들을 드리라. 그것도 사라에게서 난 아들 곧 네게 웃음을 주며 네 기쁨과 즐거움의 아들이며 네가 네 영혼과 같이 떨어진 멀고 먼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그를 거기다 두고 올 뿐만 아니라 번제로 드리라.” 이 보다 더 큰 시험은 어떤 인간에게도 주어진 일이 없었으리라. 바울은 여기서 이 시험이 대단히 큰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덧붙여 말하였다.아브라함은 언약을 받은 후에 이 시험을 받았다. 즉 아브라함은 이 이삭이 그의 가문을 이을 것이요 또 이 이삭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하여질 것이라는 것과 (18절) 또 이 이삭이 메시야의 조상의 한 사람이 될 것이고 또 이삭의 후에 나는 메시야를 통해 모든 민족이 축복받을 것임을 약속받은 후에 이러한 시험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그에게 있어서는 곧 그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끊으시겠다는 명령으로 들렸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파기하시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막으시며, 온 세상을 파괴하시고, 아브라함의 영혼과 구원의 희망을 잘라버리시며 일격에 하나님의 교회를 송두리째 잘라버리시겠다는 명령으로 들리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시험이었다.또한 이 이삭은 아브라함에 아내 사라에게서 난 그의 독자이며, 사라에게서 얻은 유일한 소생이며, 약속의 자녀요 후사가될 유일한 씨였다. 이스마엘은 지상의 축복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이 아들에게서 성취되든지 아니면 전혀 성취되지 못하고 말든지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이 아브라함의 모든 사랑이 이 아들에게 쏟아진 이외에도 그의 모든 기대 또한 이삭에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이삭이 없어진다면 그와 함께 아브라함도 멸망하는 것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많은 아들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오직 이 아들이 모든 민족들에게 약속된 축복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었다. 이 아들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이었으며, 또 특별한 은총으로 받은 아들이었다. 그의 온 마음은 아들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은 희생 제물로 드려야만 하였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직접 아들을 죽여야 했다. 이 시험이야말로 아무리 감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시험이었다.그렇게 큰 시험 가운데서 굽히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 그는 순종하였다. 그는 이삭을 제물로 드렸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는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놓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일을 실제로 수행하려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저지하지 아니하였다면 그 일을 행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였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시련 중에서 이삭의 “아버지, 여기 나무가 있고 불도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말에 마음의 뭉클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삭은 자기가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위대한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였던 것이다.아브라함의 믿음을 버티어 준 받침들. 이 받침돌은 시험이 큰 만큼 큰 것이어야만 했었다. 본문은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19절)”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그는 그의 모든 의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주지시키시고 그의 아들을 바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그가 이런 것을 알았다면 시험이 성립될 수도 없었을 것이요 또한 그의 믿음의 승리도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삭에게 거대한 사명이 주어져 있는데 만일 이삭이 죽는다면 그를 통해 이루어질 거대한 사업도 실패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을 그는 믿었다. 다음을 살펴 보자.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다. 죽은자의 몸도 살필 수 있으며 죽은 영혼도 일으킬 수 있으시다.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당하는 어떤 어려움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이 될 것이다.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이러한 시험을 극복해 낸 그의 믿음에 대한 보상(19절).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돌려 받았다. 그것은 마치 죽은 아들을 되찾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아브라함은 아들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와 이별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그에게로 다시 돌려 주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가장 최선의 길은 우리의 행복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것들을 우리에게 돌려 주실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호의로 다른 행복을 주실 것이다.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되돌려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삭을 죽음에게 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삭은 죽은 아들과 다름없었으므로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부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위의 내용은 앞으로 있을 것의 비유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삭은 그리스도의 유형이었다. 그것은 또한 모든 참 믿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전조요 상징이다. 믿는 자의 생명은 이처럼 유실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지는 것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름이 언급되고 또 그들의 특별한 시련과 행위가 기록되고 있는 다른 규약의 신앙인들의 믿음에 대한 내용을 대하게 된다.
Ⅷ. 이삭의 믿음(20절). 앞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이삭에 대한 약간의 내용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삭에게만 특이한 신앙의 면모를 살펴 보자. 즉 이삭은 “앞으로 올 일에 대하여” 믿음으로 자기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던 것이다.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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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믿음의 행위.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다.” 이삭은 그들을 축복하였다. 즉 이삭은 그들을 계약의 하나님께서 양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과 믿음을 소개하였다. 또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의 어떤 상황에 처할 것이며 그들의 자손들이 어떤 상황이 될 것인가를 그들에게 예언해 주었다. 우리는 이에 관한 이야기를 창세기 27장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야곱과 에서는 이삭의 아들로서 축복을 받았다. 적어도 세상적인 좋은 것들에 대하여는 그들은 다같이 축복을 받았다. 좋은 부모의 자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흔히 악한 자식이라도 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덕으로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일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의 최선의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것들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신의 은총을 많이 받은 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야곱은 에서보다 우월하고 또 축복다운 축복을 받았다. 야곱이 받은 축복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 사람의 품위를 그 동료들보다 높여 주고 또 최상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중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우신 사람을 택하시고 다른 한 사람을 남겨두며, 한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을 미워하신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몫을 허락해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더 좋은 세상에서의 분깃을 할당해 주신다. 이같은 차별을 두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에 의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떠한 처사에 대해서도 인간은 불평할 권리가 없으며 또 인간이 현재 누리고 있는 생이한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하는 진노에 비하면 보다 놀라운 위로의 축복인 것이다.이삭의 믿음이 극복해야 했던 어려운 문제들.이삭은 그의 아들들이 출생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행하시고자 하는 뜻을 정하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창 25:23)(역주: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이삭이 잊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이삭에게 두 아들을 주실 때 정해 놓으셨던 뜻을 일생 동안 간직하고 그대로 행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사랑에 휩쓸리어, 또한 세상의 관계에 따라 장자인 에서를 야곱보다 배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으며 또한 그에게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이삭은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상반되는 타의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그는 에서에게 축복한다고 한 것이 야곱이 축복하고 말았다). 그는 잘못하여 야곱을 축복한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떨었다”(창 27:33). 그리고 그는 야곱에게 그가 교활하게 에서의 축복을 빼앗았음을 책망하였다(33,35절). 그러나 결국 이삭은 자기의 잘못됨을 깨닫고 믿음을 되찾아 야곱에 대한 축복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야곱을 위하여 축복을 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창 27:33). 리브가와 야곱은 이 축복을 얻는데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한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주권적 통치에 의해 인간의 죄일지라도 의롭다 하시고 그것을 그의 영광된 목적을 위하여 쓰신다. 이같이 하여 이삭은 그의 불신을 극복하고 믿음을 되찾았다. 또한 이삭이 이처럼 믿음이 연약한 상태를 거쳐 신실한 믿음을 지니게 된 것을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증거를 얻은” 선진들의 한 사람으로 여기셨다.
Ⅸ. 야곱의 믿음(21절).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21절)”고 하였다. 야곱의 믿음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많다. 그의 생활이 믿음의 생활이었고 또한 그의 믿음은 그의 생활에 크게 역사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족장의 많은 믿음 가운데서 오직 두 가지만 선택하셔서 본문에 기록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해 설명하면서 언급하였던 믿음의 내용들을 야곱에 대한 기록에서는 제외하시므로 중복됨을 피하고자 하셨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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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2)
2.
야곱의 믿음의 행위. 본문에는 그 행위 중 다음의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 야곱은 그들이 손자였지만 자기의 아들들과 같은 계열로 그들을 승격시켰다(역주: 직역하면 야곱이 그들을 자기의 양아들로 삼았다는 말이다). 또한 이같이 하므로 그들의 애굽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의 회중의 하나로 맞아들였다. 이같이 하나님의 보이는 교회에 허입되어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 허입되어 그화 영적인 교제를 하고 진리를 맛보는 것은 더욱 놀라운 축복이다.야곱은 마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자기의 아들들인 것과 같이 그들로 각각 지파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여 주었다.야곱은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가 되게 해달라고 위하여 기도하였다.야곱은 그들이 축복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삭이 전에 그의 맏아들을 더 사랑한 데 비해 야곱은 므낫세보다는 그의 동생인 에브라임을 더 좋아하였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오른손이 형인 므낫세에게 얹어질 수 있도록 그들을 앉혔으나 야곱은 의도적으로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었다. 사실 이미 야곱은 연노하여 실명상태에 있어 그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은 것은 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통하여 동생격인 후에 태어난 이방의 교회가 형격인 유대 교회보다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을 보여 주셨다.”야곱은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 즉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또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행하실 축복을 내다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야곱은 자기가 떠나도 그의 집안에서 믿음이 계속 살게 되기를 그의 두고 떠나는 자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는 이르기를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서” 하였다. 그가 지팡이에 기대어 기도한 것은 구교도들이 생각하듯이 야곱이 지팡이 머리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에 경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팡이에 기댔다는 것은 그의 힘이 쇠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그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침상에 단정한 자세로 앉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태만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몸이나 정신이 지탱될 수 있는 한에는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다. 비록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처럼은 예배할 수 없었더라도 그는 그렇게 하려고 하였다. 이것으로 야곱은 자기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나타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이란 지팡이를 의지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과 같은 것임을 이로써 증거하셨다. 또한 이러한 그의 자세는 세상에서의 그의 곤고함과 안식을 바라는 그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야곱이 이러한 믿음을 행한 시기. 그것은 그의 임종시였다. 야곱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에 의해 믿음 안에서 죽었다. 믿음의 은혜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언제나 유용한 것이지만 임종시에 특별히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믿음은 임종의 때에 가장 위대하게 역사 한다. 이 믿음은 믿는 자들로 그의 생애를 잘 마무리하게 해 주며, 주를 위하여 죽도록 하여 준다. 즉 믿음은 믿는 자들로 임종을 인내와 소망과 기쁨으로 맞게 하므로 주님을 영예롭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과 그의 법도의 뛰어남을 믿는 자들로 임종시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해 준다. 그래서 인내와 소망과 기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애를 끝마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와 하나님의 길의 탁월성을 그들에게 증거로 보여 줄 수 있으며, 자기의 임종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확신과 굳건함을 줄 수 있다. 부모가 자기의 생애를 가장 잘 마무리짓는 길은 자기 가족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다.
Ⅹ. 요셉의 믿음(22절).
1.
(1)
(2)
[1] [2] [3] [4] [5]2.
요셉에 믿음으로 행한 행위의 내용. 본문에 보면 “요셉도 죽을 때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빠져나갈 일을 말하고 자기 뼈의 처리를 일러 주었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창세기 50장 24,25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요셉은 믿음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애굽으로 팔려갔다. 그는 또한 유혹과 죄와 박해를 통해 시험을 받았으나 그의 순수성을 지켜 나갔다. 또한 그는 바로의 궁에서 고귀하게 되고 권력을 지니게 되므로 믿음에 태만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을 받았으나 그의 믿음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요셉은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 즉 그의 자손들이 애굽을 떠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그가 이같은 말을 한 것은 그들에게 지금은 지내기가 편하고 풍요한 애굽 땅에서 머물 생각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신이 예견하고 있던 고난과 재난이 그들에게 닥칠 때 그들로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요셉은 앞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으므로 자신 또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는 비록 살아서 자손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을 볼 수도 없었으나 반드시 떠날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서 죽을 수 있었다.요셉은 또 자기의 뼈를 애굽에 묻지 말고 보존하여 두었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박의 집에서 이끌어내실 때 그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지고 가서 가나안에 묻도록 부탁하였다. 육신의 믿는 자들은 주로 자기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들의 육신의 몸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이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또한 인간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써 마침내는 부활하여 영광을 받은 영혼과 하나로 합하여져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요셉이 그러한 명령을 한 것은 자기의 뼈를 애굽에 묻으면 자기 영혼이 훼손되거나 몸의 부활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니라 다음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어떤 랍비들은 가나안이 아닌 곳에 매장된 유대인의 시체는 그들이 다시 부활하려면 가나안으로 옮겨 이장되어야 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비록 자기가 애굽에서 살다가 실상은 애굽인으로 살고 애굽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자기가 애굽에서의 훌륭한 장례보다는 가나안에서의 의미 깊은 장례를 더 원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자기가 자기 백성 가는 곳은 어디나 따라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갈 수 있게 데까지는 그의 동족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자기가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과 또 자기 영혼이 죽자마자 즉시 먼저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할 수 있듯이, 그의 몸 또한 죽은 믿음의 조상들의 몸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그들에게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또 때가 오면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실 것이라는 확증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요셉이 믿음으로 위와 같은 예언을 하였던 시기. 그것은 야곱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죽을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기의 백성들의 임종시에 그들에게 생생한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위로로 임하실 때 임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이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형제와 친지들의 유익을 위하여 이러한 위로들에 대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XI. 모세의 부모들의 믿음.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2장 3절 이하에서 인용된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 보자.
1.
2.
모세의 부모들의 믿음의 행위. 그들은 석달 동안이나 자기의 아들을 숨겨 놓았다. 비록 구약에는 모세의 어머니가 이 모든 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본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모세의 아버지도 이 모든 일을 허락하고, 뿐만 아니라 이 일에 관하여 같이 협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부가 하나님의 은혜의 후사로 서로 도와 믿음의 멍에를 함께 메고 갈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더구나 그들이 자녀들의 신앙의 문제를 위해서 즉 자녀들을 보호하고 위하여 그들이 함께 노력하는 것은 복된 모습이다.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박해를 받고 숨겨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명심하자. 이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유형이었다. 그리스도 역시 태어나 쉬자마자 박해를 받았으며, 그의 부모들은 그의 안전을 위하여 애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던 것이다. 악한 법률과 칙령의 구속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우리는 우리의 안정을 위하여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모세의 부모들의 이러한 믿음 가운데는 불신앙의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 사실을 묵인하였다.모세의 부모들의 이러한 행위의 이유. 물론 본능적인 사랑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작용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큰 이유가 있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그 아이가 아름다움을 보고”라고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서는 이르기를 avstei/oj tw/| qew/| -venus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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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히 11:1~40)Article author: bedesd15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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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1-11절 – 성경묵상 – 설향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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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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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른바 ‘믿음 장’으로서, 먼저 믿음의 본질을 언급한 후에, 믿음의 실례로서 믿음을 좇아 살아간 성경의 여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 ‘실상이요’의 헬라어‘휘포스타시스’는 ‘실체, 확증 객관적 실체’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체’의 사전적 의미는 ‘늘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지속하면서 사물의 근원을 이루는 것, 언제나 있으며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바라는 것의 실상’ 믿음이 소원하고 있는 것의 실체로, 지금 당장 손에 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을 믿는 것이다. ‘실상’이란 실체를 눈으로 보듯이, 또는 손으로 실체를 붙잡은 것과 같은 확신에 찬 기대를 뜻한다. 저자는‘믿음’은 ‘바라는 것’과 동일시하였으며, 믿음은 미래 지향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아직 보이지 않는 장래 일을 가리킨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일에 대해 믿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11:2) ‘선진들’이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을 지칭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믿음으로’의 헬라어 ‘피스테이’는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믿음으로 … 아나니’ 진리에 대한 인식이 믿음을 통해 가능함을 보여준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 그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믿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저자는 ‘무에서의 창조’를 강조하고 있다. 물질 세계는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無 에서 창조된 것이다.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창4:3-5의 인용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3-5)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셨지만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힘으로, 아벨의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행위였음을 부여준다. 따라서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 ‘옮겨졌으니’의 헬라어 메테데켄‘은 ’변화되다‘는 뜻이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5:22, 24의 인용이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2,24)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믿음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계신 것’은, 존재가 보이지 않으나 그 존재를 믿는 것이며, 말씀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여호와의 존재와 그의 역사까지 받아들임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타난 하나님의 실존적 존재를 뜻한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 주시는’의 헬라어‘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뜻이며,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는 ‘신적인 의사 소통,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의 의미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경외함’이란 ‘거룩한 두려움’이란 뜻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아는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홍수 심판으로 정죄 받았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였다.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했음을 보여준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루메노스’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12:5-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창12:7)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11:9) ‘거류하여’의 헬라어‘파로케센’은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막에 거하였으니’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창12:2-3)를 성취하신 것을 굳게 믿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 10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터가 있는 성’은 ‘장막’과 반대되는 것으로, 한 곳에 견고하게 세워진 집을 의미한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 ‘시온 성’을 암시한다. ‘계획하시고 지으실’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11)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지만, 사라가 끝까지 의심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1:12)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며, 그가 자손을 낳을 수 없었던 늙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는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본 것이다. 약속의 성취는 1차적으로 가나안 정복이지만,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외국인과 나그네’는 창23:4,47:9의 인용이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네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저자는 옛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11:14-15) ‘본향’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은 자신들의 본향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사모하니’의 헬라어‘오레곤타이’는‘열렬히 갈망하다’는 이미로, 그들이 하늘나라를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원어상 현재분사로 시험을 받음과 이삭을 드림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시험적으로 이삭을 드리라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즉시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는 말이다.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생기게 되고,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문제였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11:18)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생각한지라’의 헬라어‘로기사메노스’는 단호한 내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삭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고,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22:5) 말할 수 있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비유컨대’의 헬라어‘엔 파라볼레’는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 그에게는 이삭이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11:20)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창27:27-29, 39-40)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은 비합법적이라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11:21)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다.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였다.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므낫세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얹고 왼손으로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장자의 축복을 차자에게 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의 주관대로 뜻을 이루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특징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지팡이는 순레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11:22) 창50:24-25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이다. ‘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11:23)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ㅂ개성의 인구 수가 급증함에 따라 위협을 느끼며 그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내 아이가 출산되었을 때, 그들을 전부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출1:9-10,15,22) 부모가 모세를 석 달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의 헬라어‘아스테이온’은‘잘 양육된, 우아한’이라는 뜻이다. 아마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을 예견한 듯하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11:24) 모세는 히브리인 어머니를 통해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알았음과 동시에 그가 내린 결단은 장성한 사람이 내린 신중한 것이었다. 모세는 자기 형제인 히브리 노예를 돕는다고 무력으로 개입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자처한 행위였으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거절하였다.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5) 모세는 왕궁에서 왕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향유하며 세상적인 온갖 쾌락을 다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주의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죄악의 낙’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큰 죄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더 가치있게 여겼다.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63:9은 그리스도가‘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전10:4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셨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을 수 있었다. ‘상’의 헬라어‘미스다포도시안’은 ‘보상’을 뜻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모세가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것은 바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출2:14) 비록 모세가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바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었다고 진술한다. 모세는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출33:11, 민12:7-8)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11:28) ‘정하였으니’의 헬라어‘페포이에켄’은 완료형으로 ‘만들다’는 뜻을 가진다. 유월절의 항구성을 시사한다. 모세는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제정하였다. 모세가 이같이 정한 것은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11:2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바다를 건넜다. 홍해를 믿음으로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애굽 군대는 바닷물이 본래대로 돌아와 물 속에 침몰하여 전멸하였다.(출14:23-28) ‘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11:30)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를 따른 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그 성이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기생’의 히브리어 ‘조나’는 이방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가 아니라, 일반 창녀를 가리킨다. 라합은 이러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받는 인물이다.이는 이스라엘의 첩자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이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함을 알면서도 그러한 일을 실행하여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아니한 자’는 여리고 백성들을 가리키며,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시킨다. ‘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믿음에 대한 예를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취급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6명의 믿음의 사람을 소개한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5번째 사사로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사람이었다.(삿7장) ‘바락’은 4번째 사사로 가나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이었다.(삿4장) ‘삼손’은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서 그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을 괴롭혔다(삿13-16장) ‘입다’는 길르앗의 서자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암몬 족속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큰 전과를 거둔 사사였다(삿11-12장)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인물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다.(삼상16:1-3)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일찍이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으며 성장후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자사장적 기능을 담당했다.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신앙으로 인도한 선지자였다. (33-38절은 믿음으로 산 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승리의 삶을 설명한다) ‘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11:33) 다윗에 대한 설명이다.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 사업은 다윗에 이르러 최고의 절정에 달하였다.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애굽 국경부터 유브라데강까지 확장되었다(왕상4:20-21) ‘의를 행하기도 하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사들이나 영왕들의 의롭고 바른 통치를 가리킨다. 이상 언급된 사사들이나 열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신체적으로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단6:17-22)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으며(삼상17:34-37), 브나야도 사자를 죽였었다(대상11:22).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세명의 친구 사드란, 메삭, 아벳느고를 가리킨다(단1:7) 그들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한 자들로는 구약 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였으며(왕상19:2) ‘엘리사’는 이세벨의 아들 여호람에게서 구원받았고(왕하6:3)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하였다(삼상18:11)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심을 강조한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으로서(삿6:31)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삼손’과 ‘히스기야 왕’은 연약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다.(삿16:28-31, 왕하20장, 사38장) ‘에스더’역시 연약한 여자였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호수아, 사사들, 다윗의 전쟁사 등을 가리킨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권세나 군대의 세력, 모든 위험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구약의 사르밧 과부(왕상17:17-24), 수넴 여인(왕하4:18-37)의 경우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눅7:11-14),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요11장), 도르가(행9:36,41)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곧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더 좋은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킨다. ‘악형을 받되’의 헬라어‘에튐파니스데산’은 ‘고문대 위에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 죽이는 형벌’을 뜻한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보다는 새로운 삶과 부활이 있다는 믿음의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11:36)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렘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고(렘29:7) 구덩이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38:6) 본문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했음을 강조한다.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7) ‘돌로 치는 것’ 돌로치는 행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방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지 않을 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쳤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탄식하셨다.(눅11:51) 이것은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랴를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대하24:21) ‘톱으로 켜는 것과’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칼로 죽임을 당하고’ 엘리야는 이세벨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왕상19:10) 여호야김 집권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26:23) 신약 시대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12:2)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한 말로 볼 수 있으며,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다.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잆었다. 이러한 복장은 예언자들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한다. ‘궁핌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삶을 요약하는 말이다. 또한 안티오커스 4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시 될 수 없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박해가 있을 때 광야나 산 혹은 굴 속으로 피신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이 땅에서 안락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11:39) ‘이 사람들’은 11장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해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했다. ‘약속’ 33절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었다. 39절의 ‘약속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으로, 영원한 하늘 나라의 구현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실제적인 본보기가 된다. ‘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40)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구약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잇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함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11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히 11:1~40)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11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도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지만 그 믿음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믿음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믿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구원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위로는 구원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제목: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 (히 1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11:1~40 요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주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반드시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자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11장을 강해합니다. 앞으로 읽을 히 12:2에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author) 요 또 완성자(finisher)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로 나오는데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시작(author)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완성자(믿음의 장), 12장에서는 예수님은 소망의 완성자,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신 분(13:8) 임을 묵상합니다.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요약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합니다. “믿음으로”(by faith, Πίστει)란 단어가 21회 나오며, 믿음으로 산 선진(성도)들이 16명 거명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믿음을 완성하신 것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가 되시며 시작과 완성자가 되십니다. 1.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히 11:1-7)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음이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1-2절은 믿음의 정의와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음이라.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ὑπόστασις)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믿는 것인데,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믿지만,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그것들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πραγμάτων ἔλεγχος)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믿음의 ‘선진들’(πρεσβύτεροι, elders)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는데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16명의 성경의 인물들을 가리킵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인간 중에 아무도 본 자가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전히 믿음에 의존하며, 창조의 비밀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의 계시를 믿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ויאמר 혹은 이르시되, 말씀하시기를)’라는 말이 11번 나옵니다. 우리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어야 합니다(요 1:3).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①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으나,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 4:4). 아벨의 제사의 나은 점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②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분께 기도드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었고 천국의 실재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진 것이었습니다.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임이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두 가지로 증거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기본적으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새 세계에서 영생복락(이를 줄여서 “영락”)을 누리는 상입니다. 즉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1절). 이와 같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③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처럼, 노아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고 흠이 없는 신앙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습니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사라 (히 11:8-1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④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고자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의 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과정을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9-10절 “믿음으로 그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 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 건축자이시니,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다!’ 아브라함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넷길입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입니다. 장막을 펼치고 접듯이, 우리의 세상 생활은 때때로 이사하고 이동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듯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만간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시공하신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이동이 없는 영원한 집을 얻을 것입니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늙었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라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전하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그들은 다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들에 거하였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다가 죽으면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악인의 죽음은 곧 절망이요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백 년 내지 5백 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2천 년 이상이 지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예비하신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훗날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쁘게 믿고 소망하였습니다. 15-16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즉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았던 곳은 그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복음은 ‘더 좋은 소망’(7:19)이며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이십니다. 우리의 속죄는 ‘더 좋은 제물’(9:23)로 이루어졌고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고 그들의 재산도 빼앗겼던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즉 천국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이 건축자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입니다. 그 성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3.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히 11:17-2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⑤ 17-19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바치는 예증을 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순종을 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였고 그 경외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⑥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도 믿음 있는 족장입니다.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이 자기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순종했던 것 같고(창 22장),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여러 번 빼앗을 때에도 싸우지 않고 피하는 온유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창 26장). 이삭의 믿음은 특히 그가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한 말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아들 야곱에게 유언적 축복을 하면서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라고 말했는데(창 27:29),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을 그가 그대로 믿고 선포한 것입니다. 또 그는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유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⑦ 21절에 야곱이 믿음의 선진(족장)으로 살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 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하란에서 20년의 세월을 지나며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인간적, 육신적, 세상적 욕심들과 애착들을 하나씩 제거하셨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죽게 하셨고, 몇 년 후에 그의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았으며 또 22년 후 라헬의 남은 아들 베냐민까지 이집트에 담보물로 감금되었습니다. 그의 심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통의 현실 속에서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은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이민 오게 되어 죽은 줄로 믿었던 아들과 재회하게 되었고, 그의 마지막 17년의 세월을 고센 땅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죽을 때에 침상 끝에서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기를 찾아온 아들 요셉을 맞이하며 그의 두 아들[손자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이끌리는 그의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⑧ 22절에서 믿음이 선진 요셉의 유언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국에서의 종살이 중에서도 범죄치 않았으며,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터득하였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형들에게 증거 하기를,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고(신본주의, 창 45:8), 형들은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간증했습니다(창 50:20).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 그는 임종 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 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맹세시키며 부탁하였습니다(창 50:24-25). 그의 후손들은 이를 순종하여 출애굽 시 그의 해골을 가지고 나왔으며(출 13:19), 여호수아 장군이 죽은 후 요셉의 뼈를 그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 땅, 아버지(야곱)의 우물곁에 묻었습니다(수 24:32). 이 우물에서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하신 것입니다(요 4:12, 29, 42). 4. 믿음의 사람 모세(히 11:23-29)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⑨ 23~29절에 믿음의 선진인 모세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 사람인 모세도 믿음으로 태어났고 장성했고 사역했습니다.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그 아이를 석 달 동안이나 숨겨 키웁니다. 당시 바로가 ‘남자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명령을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비록 그 기간이 석 달에 불과했고 그 후 더 이상 아이를 집에서 숨기며 키울 수 없었지만(출 2:3),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죽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귀한 믿음이었고 그것이 모세에게 전수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24-26절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왕자 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을 것이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그의 모친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되었습니다(출 2:8-9). 모세는 아마 젖을 먹던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정보를 들었을 것이며 커서도 기회 있는 대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너는 이집트 사람이 아니고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 백성이다”는 생각이 심겨져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화려한 왕자의 생활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더 좋아하다’는 원어(헬로메노스 ellomenos)는 ‘선택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 모세의 귀한 점입니다. 모세는 단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강입니다. 27절에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 즉 위로부터 주신 새 원리를 따라 새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날 때 이집트 왕 바로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 보다 더 크시고 두려우시고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만을 두려워하며 모든 인간적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정하다’는 원어(포이에오 poieo)는 ‘만들다, 지키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양 기둥)와 문인방(위, 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유월’(逾越)이라는 말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29절에 “믿음으로 그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 합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집트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다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으며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 바닷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이에 하나님께서는 앞의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시고 구름기둥으로 뒤에 따라오는 이집트 군인들의 진로를 방해하시며 마침내 홍해 바다로 끌어들이사 모두 수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5. 기타 믿음의 선진들(히 11:30-40)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⑩ 30-31절에서 여리고의 라합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리고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조용히 돌라. 6일 동안 그렇게 하라. 제7일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일곱 번째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수 6:3-5) 이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벽이었습니다. 그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고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적 각오로 성을 지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문이 굳게 잠긴 큰 성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첫 번째 큰 어려운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한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라합의 가정이었습니다. 라합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벌써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것을 듣고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멸한 소식을 듣고 알았습니다. 라합은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참 하나님이시며 또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실히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고 신고를 받고 달려와 그들을 찾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에 나갔다고 속였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하나님의 일에 협조한 그의 중심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정탐군들은 살아남았고 약속대로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또 주님의 일을 수행하면서 여리고 성 같은 큰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합시다. 문제는 여리고 성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산다면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 성 같은 난관은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32-34절에서 거명된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⑪ 기드온, ⑫ 바락, ⑬ 삼손, ⑭ 입다와 ⑮ 다윗과 ⑯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단지 몇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고, 그가 언급한 혹은 언급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체험에 대해 열거합니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경험들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나 다윗 같은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12:4; 삼하 8:15). 또 다윗 같은 이는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습니다(삼상 16, 17장; 삼하 5: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단 6장).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풀무 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단 3장). 다윗이나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습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쳤습니다. 35-38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습니다(왕상 17장; 왕하 4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므낫세 때에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었는데(왕하 21:16) 그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크레이톤 아나스타시스 kreitton anastasis)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anastasis)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가리킵니다.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 하여 자기에게 바른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대하 16:7-10).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대언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하였습니다(왕상 22:24-27). 대언자 예레미야는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렘 20:2) 또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워졌습니다(렘 37:16; 38:6).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대하 24:21). 대언자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게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22:18).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고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39-40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 그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롬 3:24; 10:4).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습니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합니다.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믿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구약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살아가서 승리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믿음의 과정을 주관하시고 성령님께서 구원의 서정으로 인도하시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런 믿음의 승리가 날마다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믿음의 완성자로 오셔서 모든 죄악의 짐을 다 해결해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약속인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및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기다리며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인내하여 구원받는 천국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저도 믿음의 선진이 되게 하옵소서. 대한민국 온 국민들이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늘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엡 2:1-22) 반응형
히브리서 11장1-11절
2018년 5월 3일 목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 Hallelujah! – 오늘도 참으로 복되고 좋은 화목 하는 목요일 하루가 시작 되었습니다. – 믿음의 증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삶의 모범을 따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말씀을 굳게 잡아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고 달려갑시다. –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영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여 우리 앞에 놓은 문제를 굴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히브리서 11장1-11절 }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 제 목 ♥♥♥ ☞ 믿음의 본질과 그로 인한 삶 ♥♥♥본문 이해와 요약 ♥♥♥ ☞ 11장에서는 온전한 믿음과 최후 승리를 얻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 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본을 제시하는 믿음 장을 제시합니다. – 그래서 서두에 믿음의 본질을 밝히고 후반부에서 영적 생활의 원리와 인내라는 관점에서 믿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믿음이란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그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히브리서 기자는 본장에서 믿음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실천적인 삶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 그는 여러 인물들을 열거하여 믿음으로 의를 이룬 사례를 통하여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형편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본11장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과 정의와 중요성에 관해 알 수 있습니다. –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인간은 모두 나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모든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성도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는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삶의 모범을 따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잡아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훌륭한 신앙을 본받아야 구원받고 신령한 복을 받고, 평안과 기쁨을 얻으며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게 됩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믿음으로 살아야 진짜 믿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1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주님에 대한 믿음이 클수록 더 오래 기다릴 수 있으며 약속의 말씀 대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 1절을 살펴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실상’이라는 말은 본래 ‘아래에 서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 이는 어떤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다거나, 혹은 장래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발판을 지니고 서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 따라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확고한 발판이다’라는 말입니다. ☞ 그리고 믿음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선택과 신뢰입니다. – 믿음이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그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 함께 미지의 세계를 가기에 믿음에는 모험적 정신이 필요합니다. ☞ 또한 믿음은 성도의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 그리고 ‘실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장차 있을 그것들의 성취를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은 곧 미래에 이루어질 사실을 현재의 시점에서 확보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영원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믿음이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에 따른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은 오직 한길밖에 없습니다. – 믿음을 간직한 자만이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 세상의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재력은 결코 영원한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 때문에 믿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 믿음이 있다면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함으로 인해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 또한 믿음과 자기 확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믿음에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즉 그의 약속을 갖은 고생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성공 예감은 자기 확신이나 신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 그리고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는 영적인 눈입니다. –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왜냐하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증거를 제시하며 실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시력이 나빠 사물을 볼 수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눈과 같은 것입니다. – 영적인 일들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 곧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사실들에만 매여 있는 나의 육체의 눈을 감고 하나님의 크고 비범한 진리와 그의 약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 이 방법 외에는 우리의 혼탁한 영혼의 눈을 정화시켜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살지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갖게 할 것이 없습니다. – 실로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고 선포된 것에 대한 단순한 동의 그 이상입니다. –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 때문에 믿음은 우리의 기대와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 여기서 내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다고 한다면, 내가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 롬 4:20-21절에서“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 때문에 믿음과 확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 가령 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면서 아이에게 오늘 안으로 귀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는데 밤 열 두 시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 그때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아이는 아빠가 왜 안 오시느냐고 떼쓰며 울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오늘 아빠는 안 들어 오실거야 하고 체념하기도 하며, 어떤 아이는 아빠는 거짓말쟁이라는 낙인을 찍고 뾰로통하고, 혹은 아빠가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들어오시지만 오늘 안에 오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제 곧 오실 것이라고 믿는 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옵니까? 그것은 아빠에 대한 아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 아빠에 대한 믿음과 아빠가 하신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함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리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예수님의 성숙한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 중 누가 과연 성숙한 아이입니까? 아빠를 믿으며, 아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듬직하게 끝까지 기다린 아이일 것입니다. – 이는 곧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입니다. -사 25:9절에서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 그래서 믿는 성도들은 이런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히 6:12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신앙 성숙도 깊어가는 것입니다. – 때문에 우리는 사방으로 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비난을 받으며 거절당할 때조차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 시 62편 1-2절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찬양한 다윗을 장성한 분량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 성숙하고 장성한 성도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 곧 신뢰와 확신이 강한 자입니다. – 민 23:19절에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였습니다. – 말씀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며, 그 신뢰를 언제나 저버리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자가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성령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과연 믿음의 확신이 있어서 약속하시는 말씀에 능력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그래서 내가 주님께 더욱 성숙하고자 한다면, 그 첫 디딤돌로서 바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들의 유형을 살펴보면서 지금 나의 신앙 품성을 구체적인 모델로 삼고 더욱 신실한 믿음으로 오래 참음과 인내로 온전히 주님께 신뢰받고 사랑받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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