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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For unto us a Child is born Messiah No. 12
Canticum Choir Conductor : Kwangte Su 4K 5.1 Dolby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지휘 번역 서광태 칸티쿰합창단
칸티쿰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소프라노 이윤주 메조 소프라노 김윤희 테너 김기선
바리톤 권용만 쳄발로 주현정 오르간 신나래
2015년 12월 15일 오후 7시 30분 고양아람누리 하이든홀
▶칸티쿰합창단 헨델 메시야 전곡 https://youtu.be/KK1xZ0x2LGs
▶칸티쿰합창단 http://www.canticum.co.kr
▶칸티쿰합창단 유투브 www.youtube.com/canticumchoir777
▶칸티쿰합창단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anticum.kr
▶칸타쿰합창단 판도라 http://channel.pandora.tv/video/?ch_userid=cantic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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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 나신 아기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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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4/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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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6~7) – 기멀전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6~7)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숲 속을 산책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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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0/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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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 9:6-7 > 칼럼 | MiNKWa.org

이사야는 신적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는’이라는 시작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음을 나타냅니다.이사야는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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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nkwa.org

Date Published: 7/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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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 이한교회

서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사야 예언들. 오늘 본문은 한 아기, 한 아들의 오심에 대해서 말씀한다. 7장 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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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hanchurch.cafe24.com

Date Published: 5/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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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 우리 게 주셨네 NWC PPT 악보 …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 우리 게 주셨네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네 그 이름 기묘자 그 이름 모사 전능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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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wy0675.tistory.com

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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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거창하고 화려하게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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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alomarkc.org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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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 Author: CANTICUM CHOIR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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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11.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RJczG06-Q

[성탄절]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6~7)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6~7)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숲 속을 산책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눈이 내린 전나무 숲 속이었는데, 전나무들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받을 때 우리도 전나무와 같이 빛을 발하게 된다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는 전나무 한 그루를 베어 집에 가져와, 촛불을 달아 우리를 비추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였는데 이것이 크리스마스 트리(Christmas Tree) 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을 보냅니다. 의미 없는 날로 삼지 말고,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탄생을 기뻐해야 합니다. 한 아기의 탄생은 천군 천사를 동원하는 우주적인 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비록 외모는 보잘 것 없으시나 약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오셨습니다. 가장 평범한 인간으로 오셔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예언을 이루셨지만 사실상 그 분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그 증거가 세상에 오실 때는 힘없는 한 아기로 오셨으나 그가 자라서 하신 사역들을 보면 불치병자들을 말씀으로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그 한 아기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의 예언대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존귀하신 분이 가장 낮아지시고, 부요하신 분이 일부러 가난해지신 날입니다. 성탄이 없었다면 십자가도 부활도 승천도 재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탄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속사역이 가능하게 되었다면 성탄은 바로 나를 위한 날임을 깨닫고 진실로 감사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려야 합니다. 수천 년 동안 멸시와 천대와 흑암과 고통의 땅이 영광스러운 성지로 변하게 되었다면, 성탄을 맞이하여 그 아기 예수를 스블론 땅과 같은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교회 안에 임하시게 하는 성탄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에 아기로 오신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다양한 이름을 주신 이유는 메시아의 위대하심을 한 마디로 표현 할 수 없기에 여러 이름으로 말한 것입니다. 한 아기로 오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잔 홈즈(Zan W. Holmes) 목사는 아홉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구경한 소감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흑인이었기에 3층 꼭대기의 좁은 방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되자 무대에 악사들이 나타나 각기 악기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소년 홈즈는 어리둥절해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 하는 거예요? 너무나 시끄러워요.” 그러자 아버지는 “조용히 기다려봐라” 라고 말합니다. 잠시 후 키가 작은 지휘자가 등장합니다. 지휘자는 악사들을 향해 손을 내리 저었습니다. 그 순간 시끄러운 잡음들은 음악이 되고, 분열이 화합이 되고 제 각기 내던 소리는 화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홈즈 목사는 이것이 교회요, 기독교가 지향하는 하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지휘자이신 예수의 통치하심을 따를 때 다른 소리의 악기와 높고 낮은 음들이 웅장한 교향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통치자이신 주께서 우리의 편견과 아집과 교만을 풀어 주실 때, 우리의 차이점은 더 높은 발전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각기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악기들이 지휘자의 통치를 받을 때에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여기의 ‘정사’ 는 히브리어로 ‘미스라’ 로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영어는 ‘Government’ 인데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즉 아기로 오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어깨는 힘을 상징합니다. 표준새번역은 ‘그 분은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 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이 통치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껏 다스리시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아하스 왕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쳐들어오자 아하스는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때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왕이여, 어려운 시기에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앗수르도, 왕도, 시리아도 이스라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통치자이시기에 하나님만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계속 예언합니다.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마침내 구원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 분이 민족을 다스리고 열방을 통치하며 개인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시고 있습니다”.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다스림을 받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의 ‘크리스마스 캐롤(A Christmas Carol)’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탄절 전날밤, 욕심 많은 스쿠루지(Scrooge)에게 동업자였던 말리의 유령이 찾아옵니다. 죽어서도 쇠사슬에 묶인 채 고통을 받는 말리의 유령은 스쿠루지에게 착하게 살지 않으면 자기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스쿠루지는 크리스마스의 유령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됩니다. 스쿠루지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지난 날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성탄절 아침, 마음의 빗장을 풀고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예수의 이름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소설로 얻은 명성과는 달리 디킨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에 소설을 쓴 것입니다. 빚더미 위에서 다섯 번째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니 답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써서 빚을 청산해야겠다고 생각하다 빈민가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빈민가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구두약통에 상표를 붙이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자. 신기하고 놀라운 기묘자의 이야기를 쓰자. 그래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자.” 기쁨을 줄 수 있는 책을 써서 빈민가에 선물하리라고 생각하고 써 내려간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캐롤’ 입니다. 그 책으로 인해 생의 감격이 생겼습니다. 삶의 권태와 절망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생명력이 움트게 되었습니다. 스쿠루지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면서 기뻐합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삶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여기의 ‘기묘자’ 라는 말을 영어 성경은 ‘wonderful’ 이라고 번역합니다. 기묘자는 놀라운 기적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의 주님을 만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기로 오신 하나님만이 모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미움과 시기와 다툼에서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의 이름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이름이 바로 기묘자입니다. 기묘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지혜자이신 하나님

1700년 영국의 작곡가 헨델(George. F. Handel) 은 뛰어나 재능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연주회마다 실패합니다. 그가 56세가 되었을 때 결국 두 손을 들고 맙니다. 몸은 오른 쪽이 마비될 만큼 건강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빚더미 위에 앉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음악을 포기하려고 할 때 ‘제닌스’ 라는 신실한 신앙을 가진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내가 주는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작곡을 해보게나. 이 책의 주인이 자네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일세”. 헨델은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평안을 찾기 시작했고 말씀에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그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주제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24일간 침식을 잊고 하늘의 영광만 바라보면서 작곡에 몰두한 결과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헨델의 ‘메시아(Messiah)’ 입니다. 메시아의 첫머리 곡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 로 시작됩니다. 메시아는 아기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결국 승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모사는 영어로 ‘counselor’ 로서 ‘상담자’ 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야아쯔’ 인데 “지혜로 가득 차 있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진정한 상담자는 지혜로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분만이 문제의 해답이고 길이 되십니다. 폴 틸리히의 말입니다. “인간 세계가 문제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 해답이시다.” 해답이신 예수가 함께 계시는 동안은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셨을 때 제자들은 아무 걱정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일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질병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둥병자도 소경도 앉은뱅이도 한편 손 마른 사람도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도 예수님과 만나면 해답을 얻었습니다. 문제해결을 받았습니다. 모사이신 지혜로 충만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습니다.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모든 인생의 해답이 되십니다. 바로 그 아기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기로 오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여 복된 성탄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 9:6-7 > 칼럼

본문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 9:6-7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은 9;6-7절의 메시아 예언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사야는 신적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는’이라는 시작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음을 나타냅니다.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과거시제를 사용한 것은 미래 사건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한 아기’라고 표현한 것은 메시아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메시아께서는 한 인간으로 탄생하실 것을 예언 한 것입니다.그 아기의 이름은 ‘기묘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기묘자’라는 원어(펠레 al,p,])는 ‘놀라우신 분’이라는 뜻으로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나타냅니다.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 행하심, 또 그의 부활 등은 다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들입니다. 인간으로 오실 메시아는 신적 존재이십니다.‘모사’(요에츠 $[wy~)(조언자)라는 이름은 메시아의 지혜를 나타내며,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 rw~bg laO~)이라는 이름은 그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특히 ‘영존하시는 아버지’(아비-아드 d[‘ yba)라는 명칭은 그의 영원성, 그의 사랑, 생명의 근원 되심, 아버지와 일체(一體) 되심 등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메시아의 신성에 관계됩니다. 메시아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겸비하신 독특하고 놀라운 인격이십니다. ‘평강의 왕’(사르-솰롬 !wl~~`-r`’)이라는 명칭과, “그 어깨에 정사(政事, 다스림)를 메었고,” “그 정사(政事)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메시아의 사역, 즉 그가 장차 하실 일을 증거합니다. 메시아는 왕 곧 통치자로 오실 것이며, 그의 통치 사역은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시는 사역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과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의와 평강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고(고후 5:18; 롬 5:1), 그것에 근거하여 참 평강을 얻었고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 또 그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7).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였습니다(살후 3:16).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되면 인류의 불안한 전쟁의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를 아니하고 완전히 종식이 될 것으로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5-6a). 또한 그리스도가 불완전한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온전히 청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을 이 땅에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政事, 다스리는 일)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 기이하고 신묘한 일을 행하는 사람)라, 모사(謀士, 일을 꾸미거나 계획하는 사람)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 영원히 존재함)하시는 아버지라, 평강(平康, 평안하고 강건함)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熱心, 열렬한 마음)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b-7).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사9:5); 적군과 아군이 서로 어울려 어지러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이 모두 벗겨지고 있습니다(사9:6a). 그 대목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시나무 불길 가운데 만나고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해줍니다(출3:1-5).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면 그 땅은 거룩한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선 자는 모두 전쟁을 멈추고 전쟁터로 달려나가는 그 분노의 신발을 벗어야만 합니다.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의미가 바로 “군인들의 피 묻은 겉옷이 불길에 휩싸여서 완전히 태워져 버리는 것”(사9:5b)입니다.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 훗날 그리스도 예수가 못 박히게 되는 십자가 앞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로마병정들의 채찍에 맞아 그 겉옷이 피에 낭자하게 됩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그 겉옷을 벗겨냅니다. 그리고 서로 가지려고 제비 뽑기를 합니다(마27:35).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피 묻은 겉옷을 처분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끝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군인들의 피가 묻은 겉옷을 하나님이 그 신위적인 능력으로 불살라버림으로써 다시는 전쟁의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하는 의미가 다분히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6ab); 반복되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징조가 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보통 아기와 똑 같아 보이는 한 아기가 탄생하고 있습니다(사9:6a).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특이합니다. 인류의 긴 역사 가운데 전혀 같은 예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사9:6b).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는 하나의 깊은 내용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지 아니하면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 곧 그 반목과 질시 그리고 전쟁의 반복을 결코 끝낼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온전히 위임 받아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인류의 죄를 없이하거나 그 악행을 끝장낼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요컨대, 사람들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는 이미 자정(自淨, 스스로 정화함)능력을 상실한 채 공멸(共滅, 다 함께 멸망함)의 종말을 향하여 계속 달려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의 어깨에는 정사(政事, 다스리는 일)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 기이하고 신묘한 일을 행하는 사람)라, 모사(謀士, 일을 꾸미거나 계획하는 사람)라”(사9:6c); 보통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브레이크가 없이 낭떠러지로 굴러가고 있는 인류의 전쟁의 역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정사, 기묘자, 모사’라고 하는 세 가지 용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지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단순하게 세상임금을 쫓아내고(요12:31)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가 모든 권세의 머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펴는 역사를 시작하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마28:18, 엡1:21-22). 그리스도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의식해야만 합니다. 구태의연하게 권력정치를 해서는 안됩니다. 정치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기묘하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으로 풀어서 제자와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교훈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특히 세상의 지혜 및 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주석적 히브리정경풀이와는 상당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3) 사람이 도모하는 일은 그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의 성사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이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성사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발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도록 맡겨드려야만 합니다. 과연 그러할 수가 있을까요? 엄청 어려운 일입니다.

(4) 그리스도 예수의 경우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발걸음을 자꾸만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고뇌가 심각합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매어 달립니다. 부디 다른 방법을 강구해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방법 외에는 만민구원을 위한 죄 사함의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히시기 직전에 온전히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모사는 계획에서부터 그 실행의 방법까지 그리스도가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 영원히 존재함)하시는 아버지라, 평강(平康, 평안하고 강령함)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c);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인간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인자 예수님이시지만 그 속에는 신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선재하시며 시공간을 넘어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롬8:37-39). 온전한 평안과 강건함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9-11).

다섯째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사9:7a);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게 진행이 되어오던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가 다음과 같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정치에 하나님의 뜻이 더욱 담기게 됩니다. (2)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안과 강건함을 옷 입게 됩니다(요삼1:2). (3) 다윗처럼 왕국을 접수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두렵게 여기는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삼상24:6-7, 26:9-12). (4) 그리고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자신에게 주는 징벌을 달게 받고 새로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고자 결심을 하는 자들이(삼하12:13-15, 22-23)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행2:34-35, 13:22).

끝으로,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熱心, 열렬한 마음)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bc).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정의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집단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 해주는 명분을 모두들 정의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의 충돌은 그들 집단 사이의 정의의 충돌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그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치유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의 힘과 지혜로써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의 조정의 지혜가 반드시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공의의 정신으로 이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숨쉬는 나라입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피조물을 바라보며 평등하게 대하고 주님과 같이 대접하는 나라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제대로 가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결단력이 대단하십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사9:7c)고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을 통해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참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생, 구원과 내세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셨고 완전한 의를 주셨고 기쁨과 행복을 주셨습니다. 메시아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십니다. 그는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가지신 독특하고 놀라우신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바로 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 그를 믿고 구원을 얻으셨습니까?

둘째로, 메시아께서는 특히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참 평안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복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이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하니습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마다 이 평안을 누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감사하며 누리며 또 다른 이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공멸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역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과 분쟁 나아가서 분노의 전쟁을 영원히 그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그때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역사가 달라질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하나님의 공의가 사람들마다 제각각인 정의를 다스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이익과 정의를 옹호하고 있는 선민의 종교 대신에 공의를 실천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금년 성탄절에 무엇을 선물로 받기 원하십니까? 70인치 4K ultra HD smart TV, 다이아몬드 목걸이, Mercedes Benz S550 sedan? 물론 그런 선물은 받는다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정말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들을 구하려고 카탈로그를 뒤적이거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샤핑몰을 헤매거나, 인터넷에서 아마존을 통하여 부지런히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탄절이 누구를 위한 절기인지 생각지 않고 엉뚱한 곳에만 신경을 쓴다면 별로 의미 없는 성탄절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물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는 이 귀한 계절에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게 하는 성경 구절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그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귀한 선물을 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통한 구원계획,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에 걸맞은 인물을 구약 성경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그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들이 멸망을 당했지만 이스라엘이 빼앗겼던 영토를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했지만 다윗이나 솔로몬 때와 같은 번영을 다시는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과 회복은 구약 시대에는 지극히 일부만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마태는 9:1-2의 말씀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마 4:15-16).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할 때 이사야 9:2을 인용했습니다. 또한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가 아들을 출생함으로 이사야 9:7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제공합니다.

8장 마지막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받아 흑암의 고통 아래 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본문에서는 흑암과 고통의 시대가 가고 구원의 새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세 단계로 설명됩니다.

1) 빛의 강림(1-2절)

먼저 1절에 나오는 지명을 살펴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이요 갈릴리 서편 지역으로 물이 풍부하여 농사 짓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해변길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서 서쪽을 따라 내려옵니다. 요단 저편은 갈릴리 바다 동북쪽을 가리킵니다. 결국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전부를 가리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를 포함한 갈릴리 지방은 지정학적인 여건으로 인해서 앗수르와 같은 북방 세력이 쳐들어올 때 제일 먼저 공격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지역은 원래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곳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한 대가로 징계를 받고 버려져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유대인은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가 이방 나라와 근접하여 있고 또 그곳에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버려진 땅, 어둡고 소외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고 하십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혹은 강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료형으로 선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 확실해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 화법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약속이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 침략을 당했다가 구원을 받음으로 일부 이루어진 적은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성취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스불론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5-16)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인하여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고향으로 삼으셨으며, 그곳 사람들 중에서 사도들을 택하셨고, 그곳을 복음의 전진 기지로 삼으셨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교만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도리어 배척하였습니다. ‘큰 빛을 비추었다’함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해 언약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빛 가운데 가장 귀한 빛이 예수님의 생명의 빛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이 생명의 빛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에게만 비춥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가지셔서 그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고난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게 하지는 않지만 고난을 통하여 깊은 은혜의 빛을 쪼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겸손하게 되고, 비슷한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연약한 자를 포용하며 섬기게 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따라서 우리는 삶 속에 나타난 놀라운 변화, 풍성한 열매를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2) 회복된 즐거움(3-5절)

1-2절이 외적인 변화 곧 흑암의 지배 아래 있던 세상에 빛을 비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했다면, 3절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으킨 백성의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을 압제자에게 넘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징계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빛이 비치는 새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번성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의 즐거움을 더하십니다. ‘즐거움’은‘빙빙 돌다, 춤추다’는 뜻을 가집니다.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 새 시대의 즐거움을 추수 때의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으로 비유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두 즐거움은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대표적인 복으로서 하나님과 회복된 언약 관계에서 백성이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 앞에서’즐거워합니다.

개역 성경에는 접속사가 별도로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4절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왜 즐거워하냐면’하는 뜻입니다. 멍에는 백성이 자유를 잃고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속박을 상징합니다. 또 채찍과 막대기는 멍에 아래 놓인 가축을 조종하는 수단으로서 압제자의 탄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압제자의 속박과 탄압을 이스라엘에게서 다 제거하실 것입니다. ‘미디안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치신 날을 가리킵니다(사 10:26).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 아래에서 놓인 것은 사사 시대 기드온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300명의 군인을 뽑아 전쟁에 나가게 하셨고, 그나마도 그들이 한 일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적군들 스스로 혼란에 빠져 서로 죽이다 패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5절 역시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없어지는 것은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피 묻은 겉옷’은 두말할 것 없이 살육의 흔적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정결을 위해 불에 견딜 수 있는 것은 불로, 그렇지 못한 것은 물로 씻도록 했는데, 옷은 물로 빨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불로 태워 없애는 것은 전쟁의 종식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심으로 압제자의 속박과 탄압을 꺾으십니다.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두시고 심지어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추수하는 자가 추수하며 즐거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전리품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이 메시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 영생 추수의 즐거움과 의의 면류관을 얻는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오늘도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십니다.

3) 한 아기의 탄생(6-7절)

즐거움의 이유가 세 번째로 6절에 언급됩니다. 대적들을 다 멸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통치자 곧 다윗의 이상을 실현하는 왕을 세우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이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이 땅에서의 메시아의 사역이 ‘내어줌’의 사역이 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며, 최종적으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주님을 본받아 내어주려면 우리가 먼저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사역 속에서도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히 채움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해질 때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거창하고 화려하게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하게 오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께로 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왕권의 존속은 땅의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이런 면에서 계승권자의 출생은 복된 소식이 됩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압제자의 멍에가 꺾이고 그 대신 아들의 어깨에는 ‘정사’, 곧 통치권이 주어집니다.

이 아기는 육신을 입고 태어나지만 신적 권능을 받은 존재입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왕들과 구별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 이름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기묘’란 단어는 메시아 자신과 그의 하시는 일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 오묘 그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말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시니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시는 지혜의 말씀이 잠자는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셨기에 그저 ‘놀랍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전하신 말씀 뿐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든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메시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죄가 있어서는 안 되므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동정녀 탄생 또한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제공하였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기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분은 ‘모사’(Counselor)입니다. ‘모사’는 세상의 어떤 이보다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모사에 해당되는 말이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돕도록 부름 받은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보혜사로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면서 구원의 길로 가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훌륭한 카운슬러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고 대언하시며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는 성령께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 조언자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or) 한 단어로 보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메시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공자, 맹자, 석가모니, 마호멧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한분이 아닙니다.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오셔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사 53:2)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표현은 그가 영원한 보호자로 임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중생’이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고 ‘위로부터 난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삼하 7:14), 백성을 돌보는 아버지와 같습니다(사 22:21). 아버지가 아들을 계속하여 사랑하고 아껴 주듯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능력과 사랑과 권위로 당신의 백성을 영원히 보존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고, 지켜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채워주십니다.

메시아를‘평강의 왕’(Prince of Peace)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적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평화를 완성하실 것이며, 정의와 공의가 그의 나라를 유지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자녀다운 생활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성도들도 한 몸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여야 합니다. 평강은 우리가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의 통치가 네 가지로 표현됩니다. 그의 정사와 평강은 온 우주에 무궁할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다윗의 나라를 굳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려 그로 말미암아 나라는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평화롭게 통치할 것입니다(삼하 7:16).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열심’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불타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열정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정을 그 누구도 방해하거나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열심’은 히브리어로 또한 ‘질투’를 뜻하기도 합니다. 백성이 백성답게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원수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죄로 가득한 흑암의 땅에 빛을 비추시고, 메시아를 보내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질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고,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열심에 기초를 둡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연약한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touch 하시고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까? 현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날마다 즐거워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에서 살 수 없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의 선물, 능력의 선물, 안정의 선물, 평강의 선물을 때를 따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예비하신 귀한 선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십자가로 다리를 놓으셨기에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영접하는’것은 ‘그 이름을 믿는’것인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인격과 삶의 전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는 약속과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믿는 사람들과 하늘나라 공동체를 이룬다는 의미까지 내포합니다. 이 하늘나라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요한은 ‘권세’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지, 자녀가 됨으로 주어지는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함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Lord)는 왕 또는 주관자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뿐 아니라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그분에게 맡길 때 그분이 우리를 주관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야 합니다.

3) 주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죄악의 사슬에 얽매이고, 사망의 그늘에 압도되며, 수치를 당하고 멸시받던 자들이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압제받던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 기쁨을 맛보아야 하고,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흑암의 땅은 땅 끝 선교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쳐야 할 곳이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예수님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가족과 이웃들 가운데도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그들도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참 빛 되신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시고 그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권면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을 갑옷을 입자”(롬 13:11-12).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전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임박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방탕, 음란, 다툼, 시기 등 어둠의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본 받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며 만군의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세상을 섬기다가 주님 오실 때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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