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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현대미술관
Viva Video! 구보타시게코
EUGENE STUDIO After the rainbow
MOT Art Museum
東京都現代美術館
Viva Video! 久保田成子展
ユージーン・スタジオ 新しい海
Museum of Contemporary Art
Viva Video! The Art and Life of Shigeko Kubota
EUGENE STUDIO After the rainbow
2022 0219
비디오는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은 흐르고, 지나가는 것은 언제나 아름답다
Videoは時間のARTである
時は流れ、過ぎ去るものは常に美しい。
Video is Art of Time

#도쿄도현대미술관 #쿠보타시게코 #EUGENE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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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시게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보타 시게코(일본어: 久保田 成子, 1937년 8월 2일 ~ 2015년 7월 23일)는 일본의 조작가, 비디오 예술가이다. 대한민국의 비디오 예술가인 백남준의 부인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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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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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구보타 시게코의 사랑 – 조선일보

만물상 구보타 시게코의 사랑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비디오 미술가 백남준은 자신의 처지를 군사정권에 밀려난 장면 박사라고 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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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osun.com

Date Published: 5/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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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현대미술관 '비디오는 시간의 예술이다'│Viva Video! 구보타시게코 / EUGENE STUDIO After the rainbow _MOT Art Museum
도쿄도 현대미술관 ‘비디오는 시간의 예술이다’│Viva Video! 구보타시게코 / EUGENE STUDIO After the rainbow _MOT Art Museum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구보타 시게코

  • Author: aoi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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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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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슷한 이름의 비슷한 이름의 구로다 시게코 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구보타 시게코(일본어: 久保田 成子, 1937년 8월 2일 ~ 2015년 7월 23일)는 일본의 조작가, 비디오 예술가이다. 대한민국의 비디오 예술가인 백남준의 부인이기도 하다.

일생 [ 편집 ]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난 구보타 시게코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일본 전국 미전에서 입선하며 10대 때부터 일본 미술계에서 천재 소녀로 명성이 자자했다. 1964년 일본 도쿄 쇼게츠홀 공연에서 백남준을 처음으로 만났다. 전도 유망한 예술가였던 그녀는 뉴욕으로 가 플럭서스 본부로 갔고, 그곳에서 또다시 백남준을 만났다.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으나, 샬럿 무어맨과의 공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다 결국 구보타 시게코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다가 1971년, 시부모의 반대에 의해 이혼하게 되고, 다시 캘리포니아에서 백남준을 만나 뉴욕으로 갔고, 1974년에야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 후 백남준에게 비디오 아트를 배운 구보타 시게코는 비디오 아트로 현대 미술계에 이름을 날리는 작가로 성장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이다. 그러다 1977년, 암에 걸려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백남준과 재혼해 백남준의 암 보험으로 치료를 받게 된다. 그녀의 작품들은 세계 최고의 현대 미술관인 미국 뉴욕의 모마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 전시되기도 했다.

구보타 시게코: 버자이너 페인팅과 마르셀 뒤샹 – 백남준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

구보타 시게코: 버자이너 페인팅과 마르셀 뒤샹 – 백남준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

구보타 시게코와 백남준

구보타 시게코: 버자이너 페인팅과 마르셀 뒤샹

– 백남준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

구보타 시게코(1937-2015)는

행위예술과 영상예술(비디오아트)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 중 한명이다.

구보타 시게코는 도쿄교육대 졸업 후,

일본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도

전위예술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196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

전위예술가 그룹 플럭서스의 주요 작가로

세상에 충격을 주며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65년에 감행한

버자이너 페인팅(vagina painting)은

그녀의 이름을 예술계에 깊게 각인했다.

이 행위예술에서 구보타 시게코는

속옷 가랑이에 붓을 고정시킨 후,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움직이며

바닥에 깔아놓은 하얀 종이 위에

선을 그려나갔다.

피와도 같은 붉은 물감으로.

구보타 시게코는 “마르셀 뒤샹”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들로도 유명하다.

뒤샹의 이름에 “(관련된 자료, 물건, 이야기 등의) 모음”을 뜻하는 접미사 iana를 붙인

duchampiana series가 바로 그것이다.

구보타 시게코 <비디오 체스> 1975.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 뒤샹 옆에는 뒤샹의 부인 알렉시나 새틀러(애칭 “티니”)

구보타 시게코는 뒤샹(1887-1968) 생전에 촬영했던 영상을 뒤샹 사후에 작품으로 제작했다.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와 <자전거 바퀴>를 재해석한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들.

작품 제목도 뒤샹의 원작과 동일하다.

아래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와 <자전거 바퀴>

미술 독서모임: 전시/작품 도록 읽기

피카소와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

플럭서스, 구보타 시게코, 백남준, 아시아현대미술,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들

https://blog.naver.com/humanities1/221491593431

구보타 시게코: 버자이너 페인팅과 마르셀 뒤샹

백남준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

‘백남준 부인’말고 ‘비디오 조각가’…뉴욕은 왜 그를 주목할까

구보타 시게코(1937~2015)의 한국어 검색 결과를 보면, ‘백남준의 부인’이란 수식이 빠지지 않는다. ‘사랑’ ‘헌신’ ‘내조’ 같은 단어가 뒤따른다. ‘작가 구보타’가 한국에서 아예 지워진 건 아니다. ‘버자이너 페인팅’(1965)으로 주로 알려졌다. 플럭서스 동료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찍은 퍼포먼스 사진만 회자된다. 백남준의 요청으로 진행한 단 한 번의 퍼포먼스일 뿐인데, ‘전위 예술가’로만 여겨지는 결과를 낳았다.

구보타 시게코 개인전 ‘리퀴드 리얼리티’ 전시 안내. MoMA 홈페이지 갈무리.

“비디오 기술을 ‘새로운 붓’에 비유한 구보타는 1970년대 비디오에 전념한 최초의 아티스트들 중 한 명이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21일 개막하는 구보타 회고전 ‘리퀴드 리얼리티(Liquid Reality)’ 보도자료에 쓴 구절이다. “독특한 형태의 비디오 조각을 만든” 창시자로 소개한다. 1996년 뉴욕 휘트니미술관 전시 이후 26년 만의 개인전이다.

MoMA의 보도자료엔 ‘백남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남준과 별개의 아티스트일 뿐이다. MoMA는 구보타 작품 14점, 백남준 작품 14점을 소장하고 있다. 국제 미술계에서 MoMA의 권위는 독보적이다. ‘MoMA 개인전 개최가 곧 미술사 정립’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 미술관은 왜 이 전시를 개최할까. MoMA 측에 질의를 보냈으나 답변은 듣지 못했다. “기술이 어떻게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공하는지를 탐구했다”는 자료 문구가 그 이유가 될 듯하다.

미술 전문가들은 MoMA의 변화도 거론한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백인 이외 여성과 미국과 유럽 밖 작가에 집중하는 요즘의 시대적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고 했다. 회화 등 지배적 미술 사조와 미국·유럽의 남성 작가 중심에서 벗어나 비디오 같은 비주류 미술, 비서양 작가, 여성을 아우르며 폭을 넓히려는 미술관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작가 선정으로 볼 수 있다.

1972년 미국 뉴욕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구보타 시게코.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에서 구보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는 손에 꼽는다. <나의 사랑 백남준>(남정호 지음, arte)엔 구보타 작품에 관한 설명도 나온다.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들려주는 백남준의 삶과 사랑, 예술(부제)’이다 보니 주로 백남준과의 관계와 일화에서 구보타의 작품론을 끄집어낸다. 예를 들어, 구보타의 대표작 ‘뒤샹피아나’ 연작 중 ‘마르셀 뒤샹의 무덤’을 변형한 게 백남준의 ‘피라미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1968년 뒤샹과의 첫 만남 때 받은 영감과 작품 제작에 관한 구보타의 육성을 읽을 수 있다.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장이자 미술사학자인 김홍희씨는 박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1998, 재원)에서 비디오 작가 구보타를 한 장에 다뤘다. 김씨는 “여성 비디오 조각을 대표하는 구보타는 비디오를 통해 자연을 부활시키는 현대의 낭만주의자”로 규정한다.

구보타 시게코 비디오 조각 ‘뒤샹피아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76)의 독일 베를린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 출처 구보타 시게코 아트 파운데이션.

김씨가 책에서 다룬 작품들이 마침 MoMA 회고전의 주요 출품작이다. ‘뒤샹피아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76) 등 뒤샹피아나 연작이 그중 하나다. 뒤샹의 대표작인 회화를 차용했다. 계단 모양의 구조물에 모니터를 설치해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의 모습을 상영했다. 김씨는 여성 비디오 조각을 공식적으로 인정케 한 비디오 조각의 정수라고 평가한다.

‘3개의 산’(1976~1979)은 몬태나, 와이오밍,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미대륙 여행의 결과물이다. 김씨는 “막대한 덩어리와 볼륨감을 제시하는 미국의 산악지대에 매료, 그 복합적인 시각 형태들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았고, 그 결과를 4채널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표현했다”고 말한다. 3개의 산을 의미하는 3개의 사다리 모양의 목재 구조물에 모니터들을 박아 넣었다. 3개 모니터가 각각 그랜드캐니언, 애리조나 ‘에코 클리프’ 드라이브, 타오스와 텔톤의 황혼을 동시에 보여준다. 김씨는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와 동양 문화의 정신적, 언어적 유대감을 발견했다. 비디오 기술과 이미지 구조가 만드는 조각 형태를 통해 두 다른 문화의 변증법적 만남과 미국 문화 속의 자기 정체성을 재검증했다”고 분석한다.

구보타 시게코 설치 작품 ‘3개의 산’. 출처 : 일본 오사카 국립미술관

물과 모터로 인공 폭포를 만든 설치 작품 ‘나이아가라 폭포’(1987)는 구보타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김씨는 “자연에서 물의 역할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디오의 역할과 비교할 만하다”는 구보타의 말을 인용하며 자연주의를 설명한다. 구보타는 “자연의 미는 악몽이며 공포이고 일종의 테러이다. 특히 나이아가라 폭포는 그 웅장한 자연적 마력이 나로 하여금 폭포 속으로 몸을 던져 죽음으로 치닫게 하는 묘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말도 했다.

김씨는 구보타의 페미니즘 미술도 분석했다. 김씨는 “산은 자궁이다”라는 구보타의 말을 인용하며 “‘3개의 산’은 산을 여성의 메타포로 간주하는 여성의식의 발로”라고 설명한다. 구보타는 ‘V’자를 두운으로 “비디오(video)는 자궁(vagina)의 보복(vengeance)”이라고도 했다. 김씨는 ‘나바호의 하늘에 보내는 비디오 소녀들과 비디오 노래’(1973)라는 제목의 구보타의 다큐멘터리를 두고 “음식을 장만키 위해 양을 도살하는 여인들, 가사를 전담하는 여성들 간의 유대감을 그리며 ‘남성적 힘의 구조에 검열되지 않는 여성의 음성을 발견’하는 페미니즘 일기를 기술한다”고 평했다. 또 “비디오 작업을 통하여 표출되는 하나의 기본정신은 그녀의 플럭서스 활동에서 첨예화된 실험과 저항정신이다. 구보타의 저항은 서구 문명에 대항하는 타자의 발언인 동시에 가부장 문화에 대한 페미니즘 저항을 의미한다”고 했다.

정씨도 “구보타 활동 당시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잘 사용 안 했지만, 지금 시각으로 돌이켜보면 구보타의 미술이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이방인으로서 타향살이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고향을 떠나 자유로웠기에 가능한 작업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후 일본 여성이 미국으로 가 새롭고 과감한 미술로 미국 작가들에게 다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미국 여성 작가들에게 되레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MoMA는 ‘리퀴드 리얼리티’라는 전시 제목을 달았다. 리퀴드는 ‘액체’나 ‘유동(流動)’, 리얼리티는 ‘현실’이나 ‘실재’로 옮길 수 있다. MoMA는 이 제목을 통해 구보타가 실제 흐르는 물과 거울 같은 매체를 활용해 형태, 색상, 위치, 속도를 자유롭게 재구성, 변형했다는 점을 평가했다. 이는 페미니즘과도 연동된다. 미술에선 여성적인 것을 액체로, 남성적인 것을 고체에 은유하기도 한다.

전시는 MoMA의 마리-조세 & 헨리 크래비스 스튜디오와 인근 갤러리414에서 내년 1월1일까지 열린다.

故 백남준 부인, 구보타 시게코 못다한 사랑 이야기

글 이혜민 기자 사진 지호영 기자, (주)웅진씽크빅 제공 입력 2010.08.18 09:48:00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뒤에는 헌신적인 아내 구보타 시게코씨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 같은 감성을 지닌 백남준의 연인이며 누이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다. 남편을 그리며 한국을 찾은 그의 순정과 추억.

텔레비전을 활용한 비디오아트를 추구한 백남준·구보타 시게코 예술가 커플.

비디오아트의 선각자인 남편 백남준을 인생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는 시게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다다익선’.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수십대 수백대씩 사놓곤 작업을 구상했다.

여성동아 2010년 8월 560호

장마가 한창이던 7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카페에서 고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 여사(73)를 만났다. ‘이세이 미야케’의 검정 블라우스와 수수해 뵈는 재킷을 입고 뿔테 안경을 걸친 채 나타난 그는 70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미국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맨하탄 백’을 어깨에 가로질러 멘 모습을 보니 ‘실용적인 뉴요커 할머니’ 답다.섬유업체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6·25 전쟁 발발과 파산을 경험하고, 미학과 음악공부를 위해 홍콩, 일본, 독일, 미국, 유럽을 떠돌아다니는 전위예술가이자 비디오아티스트의 삶을 살았던 고 백남준. 부초처럼 살던 그가 마음으로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건 바로 동료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를 만난 뒤부터다. 둘은 10년 동안 연인으로 지낸 끝에 1977년 결혼해 함께 살았지만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한 뒤 시게코는 그들의 예술무대였던 뉴욕을 지키며 작품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그에게 소감부터 물었다.“남준의 나라에 와 기뻐요. 그와 함께 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한국 방문을 앞두고 예전에 일기 대신 찍어온 비디오를 보며 다시금 남편의 음성을 듣고 움직임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와 함께 처음으로 한국에 왔던 그날의 설렘도 떠올랐고요.”그에게 그때 추억을 묻자 대뜸 날짜부터 말한다. “1984년 6월22일.” 일본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왔다고 답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남준이 34년 만에 고국을 찾은 날을 어떻게 잊겠어요. 당시 그는 세계 주요도시에서 대대적으로 생중계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큰 성공을 거뒀어요. 이후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을 받아 도쿄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그곳에 들른 김에 한국에도 왔던 거죠. 계획했던 건 아니고 친구의 권유로 갑작스럽게 결정한 거였어요. 독일로 유학 갔다 사실상 가족과 연락이 끊기고 그 사이 부모님을 여읜 남준은 한국 방문이 망설여진다고 했지만, 막상 와서는 얼마나 좋아하던지…(웃음).”누구보다 가까이 백남준을 지켜본 그는 백남준이 평생토록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말한다. 모든 격식과 관습으로부터 탈피한 예술세계를 추구한 그도 고향에 대한 향수만은 간직했다는 얘기다. 냉전 시대, 동구권 나라의 전시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한국 여권을 소지한 것이 그만의 나라 사랑 방식이었다.(이후 미국 방문자 자격으로는 창작활동에 한계를 느낀 백남준은 시민권을 획득했다)“남준은 어머니 품도 많이 그리워했어요. 5남매 중 막내인데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잠자던 아이였다니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죠(웃음). 남준이 어머님의 유품인 가요 레코드 모음집을 소중히 다룬 것도 바로 그리움 때문이에요. 샤머니즘을 작품에 반영시켰던 것도 어쩌면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던 어머니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서였을 거예요.”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을 먼저 알아본 시게코에게서 시작됐다.“1963년 요미우리신문을 통해 남준을 처음 봤는데, 멋지다고 생각했죠. 파괴적인 퍼포먼스로 유럽을 놀라게 하는 한국인 전위예술가라니…. 당시 그룹 ‘옹카쿠’에 소속돼 전위예술을 추구하던 저로선 피아노를 ‘치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어요. 1년 뒤 일본에서 열린 그의 공연을 봤는데 정말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공연은 난장판 그 자체였어요. 남준이 벽에 계란을 던지고, 피아노를 부수고, 신고 있던 가죽구두에 물을 부어 마시고, 붓 대신 머리로 그림을 그리고…. 그런데 그 넘치는 에너지가 무서우면서도 멋있더라고요. ‘이 사람은 정말 본질(original)을 아는 사람이구나’ 싶었죠. 예술가에게 본질만큼 중요한 개념은 없거든요.”백남준에게 첫눈에 반한 시게코는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당시 공연이 끝난 뒤 ‘옹가쿠’ 그룹 친구들과 차를 마시던 백남준이 혹평일색이었던 예전 자신의 전시회를 칭찬해준 뒤로는 마음이 더 기울어졌다. 하지만 천재 예술가를 다시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시게코는 계획을 세워 만남의 가능성을 높이기로 한다. 바로 백남준처럼 유명한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당시 존 레논의 부인이 된 오노 요코와 함께 플럭서스운동(무정부주의, 허무주의 등을 신봉하는 다다이즘과 맥을 같이 하는 예술 행동주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플럭서스 운동의 기수인 조지 마치우나스가 플럭서스 콘서트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 시게코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부모님이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받아 뉴욕에 있는 플럭서스 본부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운명을 만난다.“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플럭서스 본부가 뉴욕 차이나타운의 허름한 건물에 있더라고요. 약간 실망했죠. 그때 누가 나를 보고 찡긋 웃는데 바로 그 사람, 남준이었어요(웃음). 그 뒤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당시 그는 전위예술과 함께 텔레비전을 활용한 비디오아트를 추구했는데, 마침 제가 필요했던 거죠. 텔레비전을 들어주는 무임금 노동자 친구가 있는데 왜 좋아하지 않았겠어요(웃음). 서로 얘기도 잘 통했고요. 남준은 제가 주관이 뚜렷해서 좋다고 맘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수줍음이 많았는데 제가 먼저 다가가길 잘한 것 같아요.”하지만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백남준은 첼리스트이자 전위예술가인 샬럿과 함께 공연을 하느라 시게코에게 소홀했다. 시게코는 샬럿에게 질투를 느끼고 급기야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지만 백남준은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게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3년 만에 다시 백남준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아이를 임신하려던 차, 자궁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의 비싼 수술비를 감당하지 못해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백남준은 그에게 특별한 선물을 안겼다. 프러포즈였다. 백남준은 “나를 후원하는 단체에서 보험에 가입해줬다. 배우자가 되면 그 혜택을 볼 수 있으니 결혼하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당시 기분을 묻자 시게코 여사가 함박웃음을 짓는다.“너무 놀랐어요. 남준은 인생에서 보장받을 만한 무엇이 없는 사람이고, 항상 창의적이고 도전적으로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결혼을 안 한다던 사람이에요. 그랬던 그가 제게 프러포즈를 한 거니까,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어찌됐든 결혼은 결혼인 거잖아요.”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백남준은 자신만의 독특한 피아노 연주로 아내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그만의 음표를 따라 ‘멋대로 치는’ 피아노였지만 시게코는 창의적인 그의 연주가 좋았다. 말하는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내만큼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즐겁게 대화했다. 백남준은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전시를 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오갈 때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텔레비전 모형을 사다주기도 하고 그녀의 마흔살 생일을 기념해 4백달러를 주기도 하고 카드도 자주 건넸다.하지만 때로는 백남준의 무심한 경제관념이 시게코의 신경을 건드리기도 했다. 당장 밥값도 없는데 중간에 흰 줄이 생기는 컬러텔레비전을 사와선 “이것이 예술이야. 너무 아름답지 않아?”라고 하면 시게코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유복한 집에서 자라나 “어머니에게 ‘돈은 물 쓰듯이 써야 한다’고 배웠다”고 주장하던 그는 수시로 텔레비전을 수십대씩 사놓곤 작업을 구상했다.하지만 시케코는 그런 남편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의 아내가 된 이상 이해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 예술가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남준의 작품은 ‘깨진 텔레비전’ 등 파괴적인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가는 사람이 드물어 시게코는 큐레이터로 강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꾸렸다.“남편에게 남준을 위한 시간이 오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만의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작품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죠. 이제는 누군가 피아노를 부수면서 파괴적인 예술을 하거나 텔레비전으로 작업하면 백남준을 떠올리잖아요. 사람들에게 작가의 정체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시간과 함께 작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죠.”그 누구보다 창의적인 예술가의 반려자인 그에게 예술가와 결혼한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솔직히 예술가와의 결혼을 권하지는 않겠어요(웃음). 저는 아티스트와 결혼하면 당분간 가난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당분간’이라는 게 일평생일 수도 있더라고요. 물론 예술가는 돈이 아닌 예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막상 그렇게 살아보니 현실은 가혹하더군요.”그럼에도 시게코는 가혹한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나간 여자였다. 뿐만 아니라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는 백남준에게 부족한 조형감각을 일깨워준 사람이라는 평도 듣는다. 그야말로 내조의 여왕인 것.“일본에선 내조를 잘하는 여자를 두고 ‘아게망’이라고 하는데, 저도 그런 면이 있긴 했죠(웃음). 평상시에는 부끄러움이 많은 남준을 대신해 제가 나서 유능한 이들을 소개시켜주었거든요. 그런데 남준도 제게 아게망 같은 존재예요. 제게 비디오아트 기술을 알려준 최고의 선생님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의 개성을 보완했어요. 남준은 에너지가 넘치고 다이내믹한 걸 하지만 조형미가 부족했고, 전 반대로 미적인 아름다움을 알았지만 에너지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서로 도와가며 윈윈했죠. 돌이켜 보면 그가 하도 많은 텔레비전을 사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그게 다 제 수업료라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아요. 그만큼 최고의 선생님한테 배웠으니까요.”남편에게 ‘사사’ 하다보니 좋은 점만큼 나쁜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남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시게코는 어느 순간 자신을 비디오아티스트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남편 덕 본다’는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아챘다.“사람들이 저를 남준의 아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와 함께 살다보니 비디오 아트에 빠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남편에게 배웠지만 예술가이기 때문에 저만의 방식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죠. 때로는 학생이 선생님보다 나을 수도 있는 법이예요(웃음). 스스로는 제 작품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그 작품들과 함께 살며 매일매일 행복해하기도 해요. 물론 제가 남준의 아내였기 때문에 비디오아티스트로서 주목받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 운명이에요. 그걸 깨닫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죠. 이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인정받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해요.”인터뷰를 마치며 최근 ‘나의 사랑 백남준’(이순)을 펴낸 시게코 여사에게 다음 생애에서도 그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다.“그는 정말로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심지어 부모님보다 더 따뜻하게 나를 보듬어줬죠. 그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나 또한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제가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거예요.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냈고,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냈어요.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남준을 대신해 ‘예술은 강하다. 절대 포기하자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와 또다시 결혼하겠냐고요? 물론이죠. 그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 번엔 남준에게 꼭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요.”백남준 또한 그녀와의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1. 위대한 부인이고2. 위대한 요리사이고3. 위대한 간호원이고4. 위대한 작가이고그리고 이런 내용이 100페이지는 더 계속되는구보타 시게코를 나는 사랑하고 존경한다.2003년 3월 28일, 마이애미 남편 백남준

[속보] 백남준 아내 구보타 시게코 78세 나이로 별세

백남준(1932~2006)의 아내이자 전위예술가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ㆍ사진)가 23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별세했다. 78세.

구보타는 1960년대 도쿄에서 백남준과 처음 만났고 후에 뉴욕에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인 ‘플럭서스(Fluxus)’에 참여했다. 백남준과는 76년 결혼했다. 예술적 반려였던 구보타는 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의 간호를 도맡았다. 백남준은 2003년 “1.위대한 부인이고 2.위대한 요리사이고 3.위대한 간호사이고 4.위대한 작가이고……그리고 이런 내용이 100페이지는 더 계속되는 구보타 시게코를 나는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메모를 남겼다. 백남준이 먼저 세상을 뜨자 구보타는 인터뷰에서 “난 아직도 그와 이야기한다. 작업실의 공기, 맨해튼의 바람에서도 그를 느낄 수 있다. 죽으면 남준을 다시 만날 것, 만나면 또 예술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센터 로비 아뜨리움에는 두 사람의 공동 작업 ‘철이철철-TV깔대기, TV나무’가 설치돼 있다.

권근영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중앙포토]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구보다 14년 구애 외면…자궁암 걸리자 되레 청혼한 휴머니스트

viewer 백남준과 구보다 시게코가 결혼하기 전인 1974년 작업실에서의 모습이다. ⓒTom Haar

viewer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백남준의 아내인 구보다 시게코 ⓒTom Haar

viewer 1983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텔레비전을 부둥켜 안은 백남준. /사진제공=임영균

viewer 구보다 시게코의 1965년 퍼포먼스 ‘버자이너 페인팅’. 조지 마키우나스가 찍은 사진이며 뉴욕근현대미술관(MOMA)이 아카이브로 소장하고 있다.

viewer 1984년 백남준이 아내 구보다 시게코와 함께 35년 만에 고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viewer 백남준의 드로잉 ‘My Love’ /사진제공=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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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백남준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스무 살 시절, 도쿄대학 재학 중에 만난 시부사와 미치코를 혼자 흠모한 첫사랑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로 건너가 전혀 새로운 음악과 미술에 빠져들면서부터 백남준은 항상 예술이 먼저였다.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백남준이 당대 서울 최고 갑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피아노를 배우고 홍콩·일본을 거쳐 독일에서 전위적인 예술세계에 빠져들 무렵, 일본에서는 구보다 시게코(1937~2015)라는 젊은 여성이 시대에 대한 반항심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일본 니가타현 출신의 구보다는 묵화(墨畵) 화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고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가 딸을 위해 실력 있는 미술교사를 수소문해 왔다. 니가타대학 미대 교수를 과외선생으로 붙여주었다. 그 교수의 권유로 전국 규모 미술 공모전에 출품해 17세 나이로 입선하기도 했다. 구보다는 오늘날 스쿠바대학의 전신인 도쿄교육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공부도 잘 했고 조형감각도 좋았으나 판에 박힌 수업방식이 싫어 반항하는 일이 잦았다. 저항의식과 문제의식이 뚜렷했던 그는 ‘반미 안보투쟁’을 벌이는 극렬 운동권 학생이 됐다. 1960년 6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하네다공항을 점거했다. 요철 많은 학교생활을 마치고 중학교 미술교사가 됐건만 구보다는 보수적인 일본사회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예술만이 그녀의 숨통을 틔워주었다.1963년 6월 초의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대문 앞에서 집어든 ‘요미우리 신문’에서 처음 본 그 남자의 살짝 치켜뜬 눈매의 영민한 첫인상을, 구보다는 죽는 날까지 기억했다. ‘파괴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독일에서 활약하던 백남준이 일본으로 왔고 전위적이며 파괴적인 공연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황색 재앙’이라 부르며 관객들 앞에서 엉덩이 까는 일도 서슴지 않은 백남준의 전복적인 행위를 묘사한 글을 읽어내려가던 구보다는 우수에 젖은 깊은 눈매와 부스스한 머리의 비쩍 마른 몸매의 남자가 뿜어내는 고독이 더 눈에 띄었다. 그녀는 기사를 자신의 방 벽에 붙여놓고 매일같이 사진을 들여다봤다. 기존 질서를 가뿐히 박살 내버리는 백남준은 구보다의 선망과 짝사랑이 됐다.구보다는 혼자 속 앓이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정성껏 쓴 연애편지를, 팬레터 명목으로 세 통이나 보냈다. 교사생활을 하며 1964년 초 도쿄 나이쿠아갤러리에서 연 구보다의 첫 개인전 제목도 ‘연애편지’였다. 구겨진 신문지를 산처럼 쌓아놓고 흰 천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청동 조각을 설치했다. 이런 설치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은 파격이었다. 자신의 연애편지처럼, 이 작품도 답장을 얻지 못했다. 평론 한 쪽, 기사 한 줄 나지 않았고 사석에서 혹평만 들었다. 그렇게 구보다는 자신의 기질과 백남준에 대한 연모가 뒤섞여 전위적인 예술사조인 다다이즘(Dadaism)과 플럭서스(Fluxus)운동에 빠져들고 있었다.1964년 5월 29일, 마침내 구보다는 백남준을 만나게 된다. 도쿄 쇼게츠홀에서 백남준의 공연이 열렸다. 백남준은 달걀을 벽에 던지고 피아노를 대패로 갈더니 도끼로 때려 부쉈다. 신고 있던 고린내 나는 가죽구두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엽기행각으로 관객들은 실신 지경이 됐다. 몰래 밖으로 빠져나간 백남준이 공연장 안으로 전화를 걸어 “공연이 끝났다”고 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구보다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마치 BTS를 지지하는 아미처럼 친구 예닐곱 명을 데리고 무대 뒤편으로 가 백남준에게 ‘차 한잔 하자’고 청했다. 공연장 뒷정리 후 찻집으로 온 백남준은 구보다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 그 자체였다.게다가 백남준은 “올 초 나이쿠아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 그 구보다가 맞느냐”며 “작품이 아주 창의적이고 독특해서 좋았다”고 칭찬의 말을 건넸다. “일본여자들은 대개 아주 작고 섬세한 작품을 하던데 당신 것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이 큰 대륙적인 작품”이라며 “당신은 일본 여자보다는 중국 여자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세심한 평도 잊지 않았다. 구보다는 이날 들은 찬사를 자신의 ‘연애편지’가 받은 답장으로 평생 여기고 살았다.이렇게 둘은 영영 헤어질 뻔했다. 백남준은 이 공연 후 미국 뉴욕으로 갔다. 1961년 독일에서 했던 음악극 ‘오리지날(The Original·오리지날레)’을 그해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발에서 공연해 달라는 샬럿 무어맨의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구보다는 적극적인 여자였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떠난 사실을 풍문으로 듣고 뉴욕행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 내에서도 플럭서스 운동이 꿈틀대고 있었고 구보다는 ‘플럭서스 동지’로 오노 요코와 교류했다. 오노가 뉴욕 플럭서스 본부를 이끌고 있는 조지 마키우나스에게 구보다를 소개했다. 마키우나스가 ‘뉴욕에서 플럭서스 콘서트를 열 계획이니 동참하라’는 초대장을 보냈다. 구보다는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나중에 내가 결혼할 때 쓰려고 떼어놓은 돈을 지금 달라”며 고집을 부렸고 1964년 7월 4일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다.뉴욕 커낼가(Cacal St.) 359번지에 있는 플럭서스 본부에서 쿠보다는 백남준을 다시 만났다. 백남준은 미국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대미술의 심장부로 부상한 뉴욕에 터를 잡기로 결심했고, 구보다는 맨해튼의 고급 일식당 웨이트리스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백남준은 쉽게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늘 동료작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예술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구보다는 사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었으나, 단둘이 있을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친한 동료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구보다는 1965년 7월 4일 워싱턴 스퀘어파크 근처에서 열린 플럭서스 공연에서 ‘버자이너 페인팅’을 공연한다. 짧은 치마를 입고 사타구니에 붓을 꽂고, 흰 종이 위를 쪼그려 앉아 걸어 다니며, 핏빛 붉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혹평이 빗발쳤지만 구보다는 단숨에 전위예술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 공연에 대해 구보다는 백남준 사후 출간된 자서전 ‘나의 사랑 백남준’(구보다 시게코·남정호 지음, 아르테 펴냄)에서 “실은 남준의 기획으로 이뤄진 공연이었다”고 밝혔다.그렇게 구보다는 노력했다. “이 사람은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이며 곧 세상의 전설이 될 것”이라는 첫 만남에서의 직감을 믿었기에 백남준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돌부처 같은 백남준은 넘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유대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먼이 구보다에게 호감을 보여 구애했다. 갈등하던 구보다는 초강수를 두었다.“데이비드가 결혼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그래, 데이비드와 결혼해. 난 결혼 같은 것과 맞지 않는 사람이야.”무심한 남자 때문에 화도 났다. 구보다는 데이비드와 결혼했다.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혼하고는 당장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백남준에게로 날아갔다.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 같은 구보다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 그 시절 백남준의 단짝은 단연 샬럿 무어맨이었다. 무어맨이 유부녀였음에도 구보다는 “벌거벗은 샬럿이 나오는 남준의 공연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꾹 참았다. 자신도 작가지만 때로는 백남준의 작품 조언자로, 전시 기획자로, 협력하는 동지이자 따끔한 비평가로 십수 년을 함께했다.마흔이 다가오자 구보다는 문득 “뛰어나고 재능있는 남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2세도 없이 살다 간다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백남준의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 생각이 없는 남자가 자식 생각이 있을 리 만무하기에 백남준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마음 한켠에는 아이를 낳아 백남준을 붙잡고 싶기도 했다. 6개월 정도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이상했다. 혼자 병원에 찾아갔다. 청천벽력 같은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임신은커녕 당장 자궁적출수술을 받아야 했다. 가난한 일본인 작가에게 미국 병원 수술비는 과하게 비쌌다. 고향의 가족들도 돌아오라고 했다. 조용히 짐을 싸던 날, 백남준이 다가왔다.“시게코. 우리 결혼하자, 당장.”구보다는 ‘결혼 퍼포먼스를 하려는가’ 싶었다고 한다.“방송국에서 일할 때 들었던 보험이 있어. 나와 결혼해서 아내 자격으로 수술을 받으면 보험으로 치료비를 댈 수 있어.”구보다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이제 애도 못 낳게 됐으니 더욱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괜찮아. 난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 예술 하고 작품 만드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야. 그리고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1977년3월21일. 백남준과 구보다는 뉴욕시청에서 결혼서약을 했다. 백남준의 부탁으로 시각장애인 작곡가인 필립이 결혼 증인을 서 주었다. 세 사람은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456’에서 조촐한 피로연처럼 같이 밥을 먹었다. 그 와중에 백남준은 “우리가 77년3월21일에 결혼해서 ‘456’에서 저녁을 먹고 있으니 1부터 7까지 숫자가 다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이후 둘은 여생을 함께했다. 백남준이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던 1984년의 방한 길에도 구보다가 따라나섰다. 백남준이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도 구보다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백남준을 맡기지 않았다. 이따금씩 악처인 적 있었지만 대단한 사랑이었다. 그는 투병 중이던 백남준이 2003년 3월 28일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그려준 편지드로잉을 무척 아꼈다.‘1.위대한 부인이고/ 2.위대한 요리사이고/ 3.위대한 간호사이고/ 4.위대한 작가이고…그리고 이런 내용이 100페이지는 더 계속되는/ 구보타 시게코를 나는 사랑하고 존경한다.’구보다는 백남준과 함께 살던 뉴욕의 집을 지키며 살다가 홀로 세상을 떠났다./조상인기자 [email protected]

백남준 삶의 동반자이자 예술가…구보타 시게코의 삶

“나도 같은 예술가이기에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한 병원에서 별세한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 여사는 국내에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부인이자 삶의 동반자로 잘 알려져있다.

그의 추모식에 참여하는 등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했다.

구보타 여사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예술적 동지로서의 삶이 함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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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일본 니가타현 출신으로 도쿄교육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뒤에는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 ‘플럭서스’에 관여한 구보타 여사는 1960년대 이미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린 백남준을 도쿄 소게츠(草月) 회관에서 퍼포먼스를 하던 모습으로 접하게 된다.

객석에서 백남준을 바라봤던 구보타 여사는 이후 뉴욕으로 날아갔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서 결혼했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궁 질환으로 비싼 수술비가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보험을 들지 않아 일본으로 귀국을 준비하던 순간, 백남준이 자신과 결혼해서 부인 자격으로 수술을 받으라며 청혼했다고 한다.

구보타 여사는 생전에 언론 인터뷰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였다”며 “입는 것도 형편없었고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해야 했던 가난한 예술가”로 기억했다.

백남준을 좋아하게 된 것은 “재능이 있고 천재 같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면서 “도쿄 공연에서 그의 에너지를 보고 굉장히 매료됐고 나 역시 예술가이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는데 백남준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라고 회고했다.

구보타 여사는 도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현대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등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1965년에는 백남준의 기획으로, 다리 사이에 붓을 꽂고 종이에 물감을 칠한 ‘버자이너 페인팅’을 선보였다.

예술가 커플로 산 구보타 여사는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를 돌봤고 2006년 1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임종할 때까지 함께했다.

백남준 사후에도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위대한 예술가”, “21세기 예술의 문을 연 사람”이라는 등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008년 백남준 2주기 기념전에선 자신이 만든 비디오아트 작품을 전시했으며 이때도 작품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당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남편으로서 백남준이 어떤 사람이었나를 묻자 “연인으로는 최고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최악이었다”고 답했다.

수입이 일정하지도 않고 미래가 확실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나마 나도 같은 예술가이기에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은 “다 남준의 예술관과 맞닿아 있다”면서 “비디오 아트를 하고 전위예술운동인 플럭서스를 함께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원래 ‘음양’, ‘더하기 빼기’처럼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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