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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경전상의 용어로서 공의는 행위에 따른 결과를 가져오는 불변의 율법이다. 공의의 율법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축복을 받는다. 공의의 율법은 또한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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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나라 영원하며
주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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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의 하나님이란?

인간사회에 불공평하고 부정한 일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분과 위치에 따라 불이익 차별을 당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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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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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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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자료] ‘의, 공의, 정의’의 원어와 그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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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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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모음 –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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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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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나님의 공의 by 김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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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공 의 의 하나님

  • Author: Beecompany 비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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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9.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9m9_TZU2Mtw

개요

경전상의 용어로서 공의는 행위에 따른 결과를 가져오는 불변의 율법이다. 공의의 율법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축복을 받는다. 공의의 율법은 또한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구주께서는 속죄를 이루시는 동안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 대해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을 직접 받으셨기 때문에 “율법의 목적에 부응”하실 수 있으셨다.(니파이후서 2:7)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자비의 팔을 내미셨다.(모사이야서 15:9; 앨마서 34:14~16 참조) 그분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으므로, 우리가 회개한다면 그 형벌을 겪지 않아도 된다.(교리와 성약 19:15~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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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의 하나님이란?

공의의 하나님이란?

[질문]

요즘 공의라는 말이 제 마음에 닿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공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세요? Righteousness of God이라는 의미인가요?

[답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다룰 내용이 아주 많으나 간단하게 알기 쉽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우선 공의(公議)라는 단어는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줄인 말입니다. 인간사회에 불공평하고 부정한 일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분과 위치에 따라 불이익 차별을 당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당연히 그러하며 또 그런 방향으로 그분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을 그분의 공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찌든 인간들이 사는 이 땅에선 완전한 공의가 실현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당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생기며 날이 갈수록 즉, 인간이 죄로 타락할수록 던 빈번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에 잘못이 있거나 세상을 방임한 탓이 아닙니다. 인간끼리 각기 어리석음과 오류와 죄를 품은 채 무한 시기 경쟁함으로써 파생되는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는커녕 인간사회에 자기들이 제정한 법과 제도와 관습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해 인간적인 공의마저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세상이 타락해진 것은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본을 보이고 불신세상을 이끌 책임이 있는 이스라엘의 잘못이 더 큽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최후심판으로라도 당신의 공의를 당신께서 바로 세웁니다. 작금 한국이나 미국의 사태가 아주 혼돈스러워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 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구원(인간에겐 긍정적 결말)과 심판(부정적 결말)이라는 양 측면이 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번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이전보다 부정 없이 깨끗케 될 수 있거나 아니면 계속 혼란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 그분만의 공의는 엄연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사회의 공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든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전혀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서라도 당신의 공의를 세웁니다. 아니 이 땅과 인류를 지금 당장 몽땅 멸망시킬지라도 그분의 공의는 눈곱만큼도 훼손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분 앞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미 예수를 믿어 그분의 공의 안에 살고 있는 자는 그 심판에서 건져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설명 드린 공의에 비해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는 조금 다르게, 더 넓고도 완전한 의미로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공의 즉, 하나님이 악인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벌을 주어서 사회정의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바로 세우는 일도 당신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그분의 의로움으로 인간이 그 계명대로 순전하게 살 때에 인간사회에 당신의 공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계명대로 온전히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벌하기로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도적 주도적 일방적 무조건적인 용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인간 죄의 형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대신에 죄인인 우리는 살려주셨습니다. 죄를 벌을 주는 것이 공의라면 죄인을 살려주는 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는 공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의입니다.

신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는데 자신의 공로 자격 능력 하나 없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바꿔주실 성령님이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말하자면 인간사회의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자는 신자뿐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온전한 십자가 은혜가 실현되지 않았고 성령님도 각 개인에게 내주하지 않아 옛 이스라엘에선 하나님의 공의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가 되어서 그분의 공의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의롭습니다. 그분의 의는 영원토록 단 한 치도 줄거나 퇴색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의,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바로 세울 책임은 십자가로 의롭게 된 신자에게 있습니다. 신자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정말로 의롭게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 다른 죄인들로 회개케 해야 합니다. 또 어떤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람은 주님의 긍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어 십자가 예수님의 의를 덧입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벌 받아 마땅한 자를 벌 주는 것이 공의라면, 벌 받아 마땅한데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이 그분의 의입니다.

3/14/2017

[기독자료] ‘의, 공의, 정의’의 원어와 그 개념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출처:biblenar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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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지난 번 글이 아직 어려운 감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 말씀을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쪼끔만 더 넓거나 깊게, 그러나 무쟈게 쉽게”를 글쓰기의 목표로 삼고 있는 제게, ‘글이 어렵다’는 말씀은 저의 게으름을 재우치는 말씀으로 새깁니다.

어쩌면 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해 봅니다. 그보다는 글의 내용이 좀 어려웠던 것이나 아닐까요?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의나 정의라는 개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개념들입니다. 저는 다만 그걸 산뜻하게 정리해 두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느낌을 드렸다면 그건 그다지도 쉬운 개념을 풀어내느라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난삽하게 동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먼저 딱 제시해 놓고서,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1) 의는 사적/개인적인 덕목이다.

(2) 정의는 공적/사회적인 덕목이다.

(3) 공의는 공적/법적인 덕목이다.

(1) 의(義)

의에 대해서 할 얘기는 지난 글에서 거의 다 했습니다. 약간 중복이 되겠지만 요약하고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정의(正義)

지금 우리가 널리 쓰는 정의라는 말은 그 뜻이 다소 모호하다고 했습니다.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3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잉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공적인 덕목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잉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잉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편5절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장5절에서 잉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레미야서 23장5절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잉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사적인 덕목과 사회적/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띵가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예수님-성직자의 관계는 양-목자-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3) 공의(公義)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개념은 공의입니다. 이 낱말도 역시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져서 20세기초에 한반도에 들여온 일본식 한자인데, 정의와 마찬가지로 ‘저스티스’의 번역어였습니다.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 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

너희는 공법 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 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 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

너희는 공평 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 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 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준비 운동 마무리

황봉구 선생님과 청랑 목사님의 대화에 살짝 끼어 들면서 (낄 데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한 채^^), 아무래도 그 주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의와 정의와 공의 개념을 나름대로 살펴봤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의와 정의와 공의는 모두 ‘옳음’이라는 덕목을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덕목이 자리를 잡는 위치가 제각각 다릅니다. 의(義)는 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수신 덕목입니다.

정의(正義)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약속된 공통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덕목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한 덕목입니다.

끝으로 공의(公義)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이지만, 그 적용은 정의에 비해 훨씬 제한적입니다. 명시적인 법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에 비추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공식적인 심판 과정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토론을 위해 준비한 개념들입니다. 충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의 이야기’에 뛰어들 수 있는 준비운동은 된 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렘 23:1-8), 11월21일, 성령강림절 후 26째 주일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성령강림절 후 26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력 첫 주일인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에 유대가 멸망하는 순간을 직접 목도한 예언자였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을 보는 것만큼 비통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제에 합병되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한 파멸이었었습니다. 유다가 역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성전의 값진 기물은 모두 약탈당했고, 마을의 모든 집은 불타버렸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은 시드기야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밤에 몇몇의 군사를 데리고 도망쳤다가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시키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서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시드기야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질병에 걸려 죽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남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과 기술자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 지역에는 주로 하층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

조국의 몰락만이 예레미야를 힘들게 한 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도살당하러 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렘 11:19)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크게 들고 일어났습니다.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렘 26:8b) 그들은 유다 고관들에게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외친 제사장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는 그를 지지하는 일부 백성들과 유다 고관들의 올바른 판단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비판한 대표 인물은 선지자 하나냐입니다. 그와 예레미야가 성전에 공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입니다. 하나냐가 먼저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이 유다 민족에게 씌운 멍에를 하나님께서 꺾을 것이며,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서 빼앗아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2년 안에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기 10 여 년 전에 이미 일부가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성전 기물도 강탈당했었습니다. 그것을 원상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반론이 이어집니다. 하나냐의 예언이 이뤄지기를 바라지만 그것보다 먼저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냐의 말은 현실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냐가 앞에서 한 자기의 이야기를 다시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2년 안에 나무 멍에를 꺾듯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꺾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반대의 예언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나무 멍에가 아니라 쇠 멍에를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렘 28:16)

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은 바벨론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총체적으로 불안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냐와 예레미야가 똑같이 선지자이면서 서로 다른 말을 했습니다. 하나냐는 모든 문제가 속히 해결된다고 주장했고,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심지어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돌아올 꿈을 꾸지 말고 바벨론 왕을 잘 섬기면서 살아남으라고 편지를 쓴 일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레미야가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들과 현실유지를 바라는 이들은 모든 게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말을 해주는 선지자를, 그런 설교자를 원합니다. 그런 기대는 사람의 기본 심리입니다.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들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달콤한 말로 위로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 러나 선지자는 신탁(神託)의 담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청중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는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선 일단 청중들의 압력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철없는 자녀들의 요구를 물리치기 힘들어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녀들이 너무 귀엽기 때문에 ‘오냐’ 하는 심정으로 따라갑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탁 담지자가 선지자라는 건 옳지만 모든 선지자가 신탁 담지자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준비가 안 된 선지자들도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탁은 점쟁이의 일처럼 마술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역사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옵니다. 사람과 그 시대를 읽는 눈이 필요합니다. 선지자들은 신앙의 눈을 가진 역사학자라고 보면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를 뚫어보았습니다. 유다는 바벨론 제국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군사적인 힘도 없었고, 신앙적인 힘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은 필연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을 먹고,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

예레미야가 조국 유다의 멸망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일정한 기간을 버림받은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바로 바벨론 포로 시대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갈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본문 렘 23:3절에서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장 오늘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의 현실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망적인 시간이 지난 뒤에 옵니다. 그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외치지만 동시에 희망의 미래를 외칩니다. 청중들은 이런 미래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이런 청중들의 영적 안목을 하나님이 행하실 미래의 구원으로 열어가는 것입니다. 절망이 깊을수록 이런 희망의 노래를 더 간절하게 불러야 합니다. 단순히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에 대한 희망에서 오늘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야 앞으로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것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한 왕이 나올 때가 온다고 말했습니다.(5절) 그 왕은 그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합니다. 이때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릴 것입니다.(6절) 구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여호와 우리의 공의’의 원어는 ‘야웨시드기누’인데, 이는 ‘여호와는 나의 변호’라는 뜻의 ‘야웨시드기아’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시드기아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다가 바벨론 제국 앞에서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는 길을 자초한 왕입니다. 이런 시드기아 왕과 발음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유다를 구원할 참된 왕이 역사에 등장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 속한 메시아사상을 따라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메시아 이름은 ‘야웨시드기누’이고, 그가 행할 일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엇일까요? 불의와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질서입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정의와 공의를 외쳤습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는 당시 광야로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따라서 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부른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눅 1:52, 5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누구나 똑같이 일당을 주는 포도원주인과 같다고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력과 상관없이 최소한 먹고 입고 잠잘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정의에 대한 개념입니다.

정의로운 세상,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에 화두로 등장한 ‘공정한 사회’는 쉬운 목표가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그런 사회에 도달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가 최고로 보장되는 북유럽에도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귀다툼처럼 경쟁에만 몰두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최고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도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다가 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에게 한 경고를 보십시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렘 22:13) 이게 인간사회의 딜레마입니다. 정의를 실현해야만 사람과 세상이 삽니다. 그러나 정의롭게만 살면 결국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사랑해야만 살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에게서 그런 모순, 그런 한계를 느끼실 겁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 년 동안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 절기를 끝낸다면 바른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다. 공정한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한쪽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고, 다른 한쪽은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마저 없다면 이건 메시아의 정의와 공의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동조하거나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잊지 말고 기억해 두십시오. 정의는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일입니다. 메시아만이 정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린다면 당연히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말한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이며, 왕이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메시아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도식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정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불법한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운명이 끝났다면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지배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악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바로 궁극적인 정의입니다. 죽음의 극복보다 더 큰 정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

▲ 유 승 준 작가

조국 법무부 장관과 그의 가족 문제로 한 달 넘게 온 나라가 시끄럽다. 대학가에서 그를 규탄하는 촛불 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고려대 학생들은 상복 차림으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며 국화를 헌화한 뒤 장례식까지 치렀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의 말과 삶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과 현 정부의 구호와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이 한없이 표리부동하다는 데 있으나 오직 당사자들만 이를 모르는 듯하다.

<맹자(孟子)> ‘공손추편(公孫丑篇)’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나오는 것, 이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다. 정의란 이론과 추상의 세계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힘없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정의다. 나의 정의와 남의 정의가 다르고, 내 편의 정의와 네 편의 정의가 다르다면 그건 정의가 아니다.

아모스는 유다 웃시야 왕 때에 활동하던 선지자다. 양떼를 몰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꼴을 먹이며 지내던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막중한 사명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무거운 짐을 진 채 혈혈단신 북이스라엘로 건너가 당당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로보암 2세는 이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며 사치와 향락과 우상 숭배에 취해 버렸고, 권력을 쥔 자들과 부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또한 심각한 도덕적 타락으로 빠져들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무절제한 생활과 외식적인 종교 의식과 부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격렬하게 꾸짖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장 21절~24절)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일까? 공의(公義, right)란 히브리어 ‘체다카’로 선과 악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공평하게 제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완전하고 의로운 법을 기준으로 잘못된 것이나 잘된 것을 가감 없이 판단하고 심판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백성들이 마땅히 따르며 살도록 규정한 의로운 법은 공법(公法, justice)이다. 정의(正義, righteousness)란 히브리어 ‘미슈파트’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도덕적, 윤리적 기준에 따라 응당 지켜야 할 도리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의의 유일한 기준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창한 행사나 집회, 요란한 선전이나 구호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자신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고, 사람들 사이에 정의가 공기처럼 살아 있는 세상이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는 말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욕망을 억누르는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뜨거운 가슴과 진정한 눈물을 수반한다. 끝내 장관 자리에 오르고 만 조국 씨와 그를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의 장막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말과 법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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