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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다섯 가지 목적 | Desiring God

우리는 고난의 미시적인 이유는 좀처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믿음을 지탱해 주는 거시적인 이유들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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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esiringgod.org

Date Published: 7/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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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이유와 목적 바로 알기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왜냐하면 우리가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알고나면 회개하면서 변화될 수 있고, 그 고난이 멈추기도 하고 이겨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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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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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상담] 고난의 원인 – 가스펠투데이

그러나 동시에 고통의 원인과 이유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고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난 혹은 고통에는 5가지의 원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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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고난, 성경적인 원인과 의미 – 기독일보

베드로전서는 그가 초대교회 때에 핍박이 심하므로 각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고난 가운데라도 참 소망을 갖고 믿음의 정절을 지킴으로 승리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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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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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고난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 아이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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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이유 – 브런치

욥기 11 ~ 14 장 | 오늘의 말씀 오늘의 말씀 가운데 마음에 와닿는 한 구절(One Verse)을 찾아 종일 묵상하고 암기해 봅시다. > 욥기 12장 4절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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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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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의미 – 네이버 블로그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절에서 나사로의 병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나사로의 병을 인하여 어떻게 영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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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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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달게 받을 이유(벧전4:12~19)

“고난은 제3의 성례이다.”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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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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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설교] 고난과 환란, 주시는 이유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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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난 의 이유

  • Author: JO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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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qvQgOlnq3Q

고난의 다섯 가지 목적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우리는 고난의 미시적인 이유는 좀처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믿음을 지탱해 주는 거시적인 이유들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이유들 중 몇몇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고난에 빠질 때라든가 고난에 빠진 다른 사람을 도울 기회가 왔을 때,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 중 몇몇을 상기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기억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영문자 R로 시작하는 다섯 개의 핵심 단어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이 중 세 개 정도 택해서 이를 기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고난에 처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시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개(Repentance):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땅의 것을 높여 보물 삼는 데에서 돌이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4–5:

. . .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의존(Reliance): 고난은 세상살이에 필요한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고린도후서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의로움(Righteousness): 고난은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징계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12:6, 10-1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상급(Reward): 고난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잃는 것의 천 배나 더 보상받는 엄청난 천국의 상급을 이루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기억나게 하는 것(Reminder):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고난받게 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현재의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가 아니라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손길임을 기억나게 합니다. 빌립보서 3:10:

고난의 이유와 목적 바로 알기

한 귀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고난의 이유를 찾지말고 목적이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특히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난을 바라볼 때에는 이유를 찾지말고 목적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벧전 2장 19,20절,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나 자신의 공동체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유를 찾는 것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알고나면 회개하면서 변화될 수 있고, 그 고난이 멈추기도 하고 이겨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각자 어떤 형태이든 작고 큰 고난을 직면하게 된다. 그때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속에 그 고난의 목적을 발견하여 인내하고 성화하며 승리하기를 구한다.

우리는 지금 국가적 어려움 속에 있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서 그리스도인 특히 목사들도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우리는 이 국가적 어려움의 이유를 돌아보고 이 어려움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며 무엇보다 바른 분별력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징계와 형벌을 구별해야 한다. 징계는 돌이키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지만 형벌은 심판이다.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는 동안 섭리 가운데 징계를 받게 되지만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진정 무서운 형벌은 아무리 잘못해도 내버려 두셔서 겉으로는 승승장구 같다가 결국 주님을 모르고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징계든 아니든 작고 큰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굳건해지기에 고난이 있을 때든 형통할 때든지 언제나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김완숙 집사, 포항충진교회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후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성경적 상담] 고난의 원인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자기 잘못을 환경 탓에 돌리거나 남편이나 아내 탓을 하거나 부모님 탓을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사람은 실제로 희생당하기도 한다. 내 죄 때문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희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개인의 죄가 아닌데도 전체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태풍으로 인한 수해를 입었거나 외환위기로 인하여 경제적 곤경에 처한 경우가 그렇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고통당할 때 마음에서 자주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다. “하나님, 저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내가 고통 받고 있는 바로 이때에 왜 안 계신 것처럼 보입니까? 왜 주님의 보호하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다른 입장에서 위의 질문을 던진다. 이 시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위의 질문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돌리는 믿음의 외침이다. 환난을 당할 때, 그들은 절망적이며 홀로 있다고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 반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질문이 불신과 증오, 고발의 외침이 된다. 동일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경우가 그 한 예이다(눅 23:39-43). 시편 10장 1절은 무능하며 자비가 없는 어떤 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직접적이며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고통의 원인과 이유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고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난 혹은 고통에는 5가지의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나의 죄’이다.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닐지라도 죄의 성격상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둘째는 ‘남의 죄’이다. 인간은 본래 죄인이고 세상은 죄인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죄를 짓고, 또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게 된다. 셋째는 ‘사탄’이다. 악의 근원이요 죄의 시작이므로 당연히 고통의 원인이다. 그리고 욥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넷째는 ‘아담’이다. 인류의 조상으로서 죄를 범해 그 결과로 인류에 고난을 초래했다. 자연도 파괴되고 모든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로마서 8장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다. 다섯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지만, 때로는 깊은 섭리와 계획 가운데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욥의 경우와 같이 큰 뜻을 위하여 많은 고통을 허용하실 때도 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황규명 목사

성경적 상담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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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고난, 성경적인 원인과 의미

본문: 베드로전서 4:12-19, 제목: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전/후서는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서신서이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불러 제사 삼으신 후 주님을 잘 섬기며 제자들 중에 수제자가 되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 오순절 강림 사건 이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설교할 때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는 역사를 이루었으며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베드로전서는 그가 초대교회 때에 핍박이 심하므로 각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고난 가운데라도 참 소망을 갖고 믿음의 정절을 지킴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쓴 편지이다. 성경에서 ‘고난’이란 단어가 110번쯤 기록되어 있는데 베드로전서에만 무려 17번 사용되어 고난이란 단어를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성도의 고난’이다.

실로 신앙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고난이 크면 그 영광도 크다. 베드로전서를 통해 고난의 원인과 종류, 고난의 목적과 의미를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당하신 고통과 고난을 생각해 보며 말씀의 은혜를 나눠보다.

1. 고난의 원인과 종류

1) 당연한 고난(2:20.15) –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2:20). 죄를 짓고 그 죄의 댓가를 치루는 고난은 당연한 일이다. 또 남의 일에 간섭하므로 고난 받지 말라(2:15)고 권면한다. 즉,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고난 당하여 참고 견디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니 이런 고난 당하는 일을 피하라는 말씀이다. 아담의 범죄 후에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그에 대한 고난이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악을 보시고도 벌하시지 않고 그냥 넘어가시는 일은 절대 없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의 주로 재림하심은 당연하고 분명한 일이다.

2) 애매한 고난 (2:19) –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2:19)라고 말하는데, 이는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잘못도 없이 애매한 경우도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단체가 고난과 징벌과 피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다 적용되어 땀을 흘려야 했고 정녕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침공할 때 패하게 된다. 정탐꾼들의 소극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에 고통을 당해야 했다. 한 가정의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모든 구성원이 고통을 당해야 하며, 한 단체의 지도자의 잘못으로 인하여 모든 단원이 고통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3) 유익한 고난 (3:14,17) –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데– ”(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3:17).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전10:10). 강한 쇠를 만들려면 풀무불 연단과 강한 망치질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고난이 유익하며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양육하시려고 연단과 훈련의 고난을 통해 더 좋은 신앙인으로 성장시키신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마5:15). (시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2. 고난의 목적과 의미

1) 연단하시려고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고난의 풀무불에 넣으시고 정금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48:10).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롬5:3-4).

2) 시험하시려고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1:6).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4:12). “불 같은 시험 많으나 겁네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찬376장 3절).

3) 축복 주시려고 –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연단하시며 시험하시어 이를 통과(pass)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며 하늘의 상과 면류관을 주시려고 고난의 과정을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시려고 그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그를 번제로 바치라는 엄청난 시험을 치르게 하셨다. 이 시험에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하시고 그를 불러 큰 복을 주셨다. 동방의 의인 욥도 고난의 시험을 통과 했을 때 그에게 모든 것에 갑절의 축복을 내리셨다.

3. 하나님의 고통과 고난

1) 성부의 고통 –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의 보기에 좋았더라” (창1:4,10,12,18,21,25,31)고 말씀하셨다.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어야 함에도 오히려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고, 범죄하여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주셔야 했고, 죄 범한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피조물인 인간들로부터 조롱과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도록 허락하셨다. 즉, 자기 독생자를 죽게 하셨다. 아니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죽이셔야만 했다. 이 고통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리려고 칼을 들어 올려야만 했던 고통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되는 고통을 하나님은 당하셨다.

2) 성자의 고통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셨다. 그의 육체가 당하는 십자가의 고통이 문제가 아니요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고 그 죄사함을 위해 당하신 고통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고통이셨다.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도 그의 얼굴을 돌리셨다. 즉, 그의 아버지도 자기 아들을 버리셨다. 그래서 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고 통곡하셨다.

3) 성령의 고통 –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겠다고 작심 하고도 순간 순간마다 생각과 마음과 언행 가운데 성령을 근심케 하고 탄식케 하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자녀가 부모를 마음을 모르고 악한 길을 갈 때 자녀들은 부모의 아픔과 고통을 감히 짐작을 못한다.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자녀의 아픔보다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날게 될 때 부모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우리는 성령의 고통을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만 좋을 대로 행할 때가 많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 속에 거하시고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자. “성령으로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신앙인의 고난과 승리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power)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 있을찌어다 아멘.“(5:10-11).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3:17-19).

성경공부

1.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 그의 생애를 간단히 말해보라.

2. 베드로전서의 주제가 무엇이며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쓴 목적이 무엇인가?

3. 인간들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과 고난의 종류를 말해보라.

4. 하나님이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가.

5.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하나님이 당하신 고난을 비교해서 말해보라.

말씀 묵상과 나눔

1. 내가 잘못해서 당하게 되는 고난과 그 결과를 말해보라.

2. 내가 선을 행하거나 의를 위해 고난당한 사건과 그 결과를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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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고난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고난의 원인은 네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더 세분화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혹자는 고난의 원인을 한 가지로 축소한다. 혹은 모든 고난을 죄 값으로 돌리기도 하고 혹은 무슨 고난이 닥쳐도 십자가 고난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 생기는 고난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우연으로 돌리기도 한다. 우리는 고난의 원인을 비교적 소상히 분석해서 대처해야 할 것이다.

첫째, 죄 값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어겨 10가지 재앙을 만났고, 승리만을 기대했던 여호수아 군대는 아간 한 사람의 죄로 아이와의 전쟁에서 맥없이 패하고 말았다(수 7:1-26). 신약 시대의 고린도인들은 성찬 예식에 바르게 참여하지 않아 여러 가지 징계를 받았다(고전 11:29-30).

우리나라는 2002년 엄청난 홍수를 만났었다. 그리고 금년에도 큰 물난리는 아니지만 역시 홍수 피해를 만났다. 2002년에 우리는 엄청난 재난이 닥칠 것을 알고 붉은악마를 해체해줄 것을 많이 권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축구가 4강까지 올라가는 동안 붉은악마는 큰 세력을 얻어 활동했고 국민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붉은 옷을 입고 7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대형 홍수피해를 주셔서 우리는 5조원의 피해를 입었다. 금년에는 붉은악마가 크게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90만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방방곡곡에서 응원을 했다. 금년에도 이런저런 홍수피해를 만났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려면 십자가의 고난이 따라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마 16:16). 십자가란 그리스도를 따를 때 생기는 어려움을 지칭하는데 이 십자가는 아무리 회개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금생 내세에 상급을 받게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수없는 고난을 당했다고 말한다(고후 11:23-28). 우리는 바울 사도께서 당한 고난의 절반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병자들은 모두 그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 38년 된 전신마비 환자는 그 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고(요 5장),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은 그 병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병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이라고 하셨다(요 9:3). 오늘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 앞으로 오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망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큰 병을 앓아야 하며, 어떤 사람은 자식을 먼저 잃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주신 고난, 그리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도록 주신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재빨리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고난은 점차로 물러간다.

넷째, 부주의하여 고난을 당하는 수도 많이 있다. 암 같은 질병은 주로 부주의해서 생긴다.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많이 먹을 때 암병을 얻게 된다. 동양인 중 한국인이 암에 제일 많이 걸린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것은 한국인이 음식에 제일 부주의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의학계의 발표를 잘 듣고 음식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고난이 찾아올 때 그 원인을 잘 알지 못하여 엉뚱하게 사람들에게 말한다. 어느 분은 교회 임직식에서 순서를 맡아 권면하시는 중 스데반이 집사로서 설교를 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돌에 맞아 죽었다고 말해서 양식 있는 이들의 빈축을 샀다(행 7장). 혹자는 우리는 항상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바울 사도의 실례를 든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주님의 종으로서 십자가 고난을 받은 것이지 죄를 지어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혜를 구하여 고난의 원인을 바로 분변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한다(고전 2:10).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사람이 다 알 수 없는데 성령의 힘을 빌리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기도하면 대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을 알게 하신다.

우리가 죄 값으로 어려움을 만나는 경우 뼈를 깎는 회개를 하고, 또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는 잘 견딜 수 있는 힘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감사 찬송하고, 부주의하여 질병을 얻었다면 식이요법을 사용하여 질병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김수흥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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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이유

오늘의 말씀

오늘의 말씀 가운데 마음에 와닿는 한 구절(One Verse)을 찾아 종일 묵상하고 암기해 봅시다.

> 욥기 12장 4절 말씀

한때는 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적도 있지만,

지금 나는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의롭고 흠 없는 내가 조롱을 받고 있다.

> 마음에 와닿는 이유

: 욥의 친구 소발은 “네가 무언가를 하나라도 잘못했기 때문에” 네가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욥은 스스로 “의롭고 흠 없는” 자기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의롭고 흠이 없음을 하나님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과응보”적 사고에서는 그가 고통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점이 세상이 가르치는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다”라는 “인과응보” 내러티브 혹은 세계관과 그리스도적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하나님 또한 “죄”에 대하여 단호한 “벌”을 내리시기도 하시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만 하고 산다고 해서 “고난”을 빼주시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랑할수록 더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연단하시고 고통에 처하게 하신다. 욥과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무슨 잘못이 있다고. 무슨 죄가 있다고 한 사람을 탈탈 털어버리는 가.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평생 육체에 속하여 죄와 싸워야 하는 “죄”에 속한 인간이기 때문에 “고난”이 필요하다. 고난이 없이 그저 즐겁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말씀하신다. 나를 기억해라. 내 안에 거하라.

오늘의 감사

감사의 유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상황에 자족함을 배웁니다. 감사로 나아갈 때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살아가계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 돌립니다.

그럼에도 매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눈앞에 먹을 것 입을 것만 생각하며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날마다 말씀으로 깨우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셔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친히 만드시고 지으신 이 창조세계를 살아가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거하며 복된 삶을 누리게 하게 하소서.

오늘 고난에 대하여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회초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저희들은 부모 앞에 자녀들과 같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를 찾는 자녀처럼

저희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없더라도 항상 주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난의 의미

어떤 미모의 여배우가 극작가(버다드 쇼)에게 “당신의 뛰어난 두뇌와 나의 아름다운 육체가 결합을 하면 얼마나 이상적인 자녀가 태어날까요?” 이렇게 구애를 하였다. 그러자 극작가는 “당신의 빈약한 두뇌와 나의 볼품없는 육체가 결합하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까요?”라고 대답하였다.

극작가는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미모의 여배우는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극작가는 그 반대의 경우를 제시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한 가지를 제대로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양면을 알아야 한다. 성공을 알려면 실패를 알아야 하고, 행복을 알려면 불행을 알아야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기 전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밤과 낮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양면성이 있다. 참된 인생을 알려면 반드시 고난을 알아야 한다.

필연적인 삶의 고난

어떤 왕이 역사가들에게 인류의 역사를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해 온 곳을 보니 그 양이 너무 방대하여 다 읽을 수가 없어서 다시 기록하라고 했다. 대폭 줄여서 몇 권의 책으로 정리했으나 그것도 역시 양이 많아서 더 짧게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역사가들은 글자 하나를 써서 역사가에게 올렸다. 그 글자는 다름 아닌 괴로울 고(苦)자였다고 한다.

누구나 평안한 삶을 원하지만 인류 역사상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한평생 행복할 때보다는 낙심되고 좌절할 때가 더 많다. 왜 사람은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19절을 보면 죄 값으로 당하게 되는 인간의 고난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시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고난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모든 고난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장미빛 꿈길인양 전파하는 전도자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고난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고난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잘 믿고 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일수록 더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4장 22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니라”고 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없다. 미쳤다는 소리도 들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고난에 대한 견해

어느 세대이건 고난의 문제와 직면하지 않은 세대가 없었고, 그 고통의 이유와 해결의 방법을 찾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해 왔다. 많은 학자들이 고통의 문제를 놓고 크고 작은 책을 수없이 썼지만 아무도 그 고난의 깊이를 파헤치지는 못했다. 종교가 시작되는 동기는 바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이다.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 각 종교가 제시하는 고난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힌두교

힌두교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의 죄 값 대신에 받는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교리로서 고난을 해석한다. 이러한 사상을 표현하는 말이 Karma인데 우리말로는 업(業) 또는 인과응보(因果應報)로 표현된다. Karma의 영향으로 힌두교권의 사람들은 모든 일의 결과를 인과응보적으로 받아들인다. 법정이 1990년 조선일보에 불교기행을 연재했는데 업이 지배하고 있는 인도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인도 인구 8억 1천만 명(’86년 통계), 이 지구촌에서 여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인도 사람 인 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인도 사람이지만 의식의 바닥은 수많은 카스트로 나뉘 어 있다. 그들에게 카스트는 마치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인간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브라만(사제), 크사트리아(왕조, 무사), 바이사(서민), 수드라(노예)의 4대 카스트 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다시 가지를 쳐서 2천이 넘는 서브 카스트, 다시 그 카스트의 축에도 못 끼는 아웃 카스트인 불가촉천민을 지닌 복잡한 사회 구조….. 그러나 그들에게는 요즘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 사이에 일 어나는 계층 간의 갈등은 별로 없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카스트에서 내려온 인습과 윤회의 업에 대한 인식으로 자신이 받을 것을 받는다는 수동적인 자세다. 남을 원망할 것도 없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필요도 없이 다음에 올 우주 질서를 믿으며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힌두교는 씨를 뿌리게 되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인과율(因果律)의 법칙을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하는 기계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힌두교권의 사람들에게는 원망과 한탄이 없다. 이와 같은 인과응보의 사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도 이것이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가 오랫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온 탓도 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가 운명이나 팔자타령을 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5천년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한마디로 고난의 역사이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수많은 침략을 받고, 고난을 당했다. 이 백성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쌓여온 아픔의 응어리를 우리는 한(恨)이라고 표현하고 한이 맺혔다고 한다. 고통을 느끼고 처리할만한 능력이 결여되었을 때 위기가 연거푸 몰아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회피의 수단으로 나온 것이 운명이나 팔자였다.

이기기 어려운 아픔에 부딪쳤을 때 우리 민족은 그것을 아파하기도 전에 “이것은 우리의 팔자지”하고 운명과 팔자로 돌려버린다. 가난도 병도 모두 팔자소관이라 한다. 조선일보 칼럼 리스트인 이규태는 “팔자 곧 운명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아픔을 회피하는 고통을 넘기는 가장 보편적이고 유효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픔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해서 운명이나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릴 때 발전되고 전개되는 심리상태는 무감각, 무감동, 무관심의 심리상태로 굳어지고 아픔을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지 못할 때 병적인 무감각, 무감동, 냉담의 심리상태로 고착되어 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응어리는 몸과 마음을 좀먹어 결국엔 가슴앓이, 위궤양, 암 등 여러 가지 병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말이 없는 사람, 얌전한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여자들에게 수다를 떤다고 하는데 수다 떠는 것은 정신 건강상 좋은 것이다.

불교

불교의 기본 교리는 사성체 팔정도인데 인간은 4가지 고통, 즉 생노병사의 고통을 안고 있고, 이 고통의 원인을 집착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번뇌라고 부른다. 이 번뇌를 완전히 없어 버리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번뇌를 없어 버릴 수 없다. 그러려면 어느 코메디언의 말처럼 지구를 떠나야 한다. 불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도록 만든다.

아슬람교

이슬람교에서는 고난을 알라가 정해준 운명으로 가르친다. “신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으니 불평하지 말고 그대로 받으라”는 식이다.

기독교

인과율의 법칙은 자연계의 법칙일 뿐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 영적인 영역에서도 역시 법칙이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과율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인과율에 의해서만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고난의 원인은 의외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사단이 가져다 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사단은 우리에게 재난을 불러일으키고, 병을 가져다 주고, 근심과 걱정거리를 잔뜩 안겨주는 일들을 하고 있다.

또 조상의 죄로 인하여 뿌려진 죄악의 씨앗을 후손들이 거두는 예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심판할 때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씼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는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라고 하였다. 주후 70년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고난은 죄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측은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고 하셨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고난의 신비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류시켜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고난에 대해서 말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우리 속담에 “초년(初年) 고생은 은(銀) 주고 산다”는 말이 있다. 명심보감에서는 苦者樂之母 즉 “고난은 즐거움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영어 속담에도 “No pains, No gains” 고난 없이는 소득이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격언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해 보지 않고는 높은 자리에 올리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시험은 고난을 의미한다. 한결같이 고난을 의미 있게 수용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모처럼 만에 휴가를 맞아 놀다보니 본의 아니게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발을 다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감사를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해서 발을 다치게 하여 즉시로 잘못을 깨우쳐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신자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조그만 경험을 통해서 신앙의 각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고난의 정도와 그 기간이다. 고난의 정도가 심해지고 기간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예수님의 고난

우리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고 하였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40년 금식 이후 다가왔다. 사람들은 각 개인에 따라 금식 21일째 되는 날부터 40일째 되는 날까지 배고품의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비축물을 모두 사용하였다는 신호이며, 그 후부터는 살아있는 조직체에서 영양분을 끌어와야 한다.

그러므로 40일은 인간 능력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의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사탄은 그 기회를 노려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어느 인간이든 자신의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신념에 회의를 느끼고 또 한계점이 절벽같이 느껴져 희망이 없어 보일 때 결심한 바를 포기하기 일쑤이다.

욥의 고난

성경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은 욥기와 하박국인데 욥기는 개인적인 고난, 하박국은 국가적인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었다. 그러나 사단의 참소로 시험의 대상이 되어 한순간에 자신의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열 자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았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또 다시 사탄은 하나님께 또 다시 정죄하여 욥을 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그의 몸을 쳤다. 그 결과 욥은 악창이 나서 기와장으로 몸을 굵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욥의 아내는 욥을 향해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다. 그래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하고 입술로 범죄치 않았다.

욥의 소문을 듣고 친구들이 찾아 왔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위로하자고 서로 약속하고 욥을 찾아와 욥과 함께 칠일 칠야를 함께 지내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고 그의 친구들도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한 사람씩 욥을 정죄하고 비판하였다.

엘리바스는 풍부한 인생 경험을 논설의 강점으로 하여 경험론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 4:7-9) 이것은 인과응보적 견해이다. 이 세상에서 고통 당하는 것은 모두 죄 값이라는 의미이다.

빌닷은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신다는 전통적 신앙(욥 8:3)에서 이야기 하였다. 욥의 자녀의 몰살에 대해서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하였다(욥 8:4) 욥은 완전히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람이고, 욥의 고난은 죄악의 결과로 보았다.

소발은 냉정한 교리주의적 입장에서 욥의 고통과 그의 범죄를 규격적으로 보아버리려고 하였다(욥 11:6). 욥이 당한 벌은 그의 죄에 비하면 가벼울 정도라고 하였다. 욥을 죄인이요 위선자라고 하였다. 욥이 당한 고통은 당연한 분깃이요, 산업이라고까지 하였다(욥 20:29).

이와 같은 인과응보적 사상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편만하게 뿌리내린 전통적 교리였다. 이에 대한 욥기의 교훈은 고난은 악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에게도 임한다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너무 편협하게 생각해 버리는 위험성에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우리는 역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신앙의 위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은 200년 간 계속된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종교적 전쟁이었다. 처음에 십자군은 이슬람 교도들에게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실패가 계속되는 지리한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성지 탈환이라는 높고 헌신적인 정신을 잃어버리고 약탈자들로 변해 버렸다.

나중에는 성지 탈환의 실패 원인이 어른들의 더러운 마음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소년 십자군을 조직하여 철없는 소년들을 전쟁에 참여시켜 무참히 죽게 하고 붙잡혀 노예가 되게 하였다.

사람들은 기나긴 전쟁 속에서 곧잘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의아해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악이 판치도록 내버려 주시는 것일까 ?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병과 기근과 전쟁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선지자조차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합 1:2) 이는 옛날 하박국 선지자만의 절규가 아니라, 모든 의인들의 절규였으며, 또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의문이기도 하다.

의미 탐구의 중요성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사 중에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9가지 중에서 첫 번째가 ‘하나님은 왜 고통을 주는가’라는 것이었다. 겔럽연구소에서 조사한 인생의 최대 문제 열 가지 중 첫 번째가 ‘왜 이 세상에는 고난이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의미를 찾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파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쾌락을 지향하는 의지”라고 하였고, 프로이드를 계승한 아들러는 심층심리학의 창시자로서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경향을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 자세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라고 주장한다.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로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배고품과 추위와 그리고 짐승같은 취급 속에서 시간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떨면서, 그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힘없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살아야 하는 의미를 가진 자는 모든 고난을 견뎌냈다. 빅터 프랭클은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실존적 정신요법을 개발하여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한번은 나이 많은 의사가 심한 신경쇠약 때문에 빅터 프랭클을 찾아왔다. 그는 몹시 사랑하였던 부인을 2년 전에 잃고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까 ? 그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프랭클은 그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 대신 “당신이 먼저 죽고 당신 부인이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라고 질문하였다. “그녀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프랭클은 그 말을 듣고 “부인은 그런 고통을 받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선생이 그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선생이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여 그 댓가를 치러야지요”라고 말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않더니 프랭클의 손을 쥐고는 조용히 프랭클의 사무실을 떠났다. 고난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에 어느 점에서 고난은 고난이 되기를 그친다.

그러므로 상담자들이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찾는 자는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 가는 곡예사가 아니다.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다.

고난에 대한 성경의 답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 중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

루이스(C.S.Lewis)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떤 일에 고통을 당하면 가슴에서 소리친다.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비상 벨이 울린다.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던 발을 멈추게 하고 다시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가도록 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고 하였다.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때 반드시 시험하신다.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신다. 그러므로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고난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복을 안고 오는 변장된 복이라는 뜻이다.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교만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가 쉽다. 그래서 어디에 가도 자기가 왕으로 군림하여 든다. 그러나 고난을 경험하면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인간이 겸허하고 겸손한 자로 변화된다.

바울은 여러가지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세계 3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길리기아 다소의 권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면서부터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였다. 혈통적으로는 초대왕을 세운 귀족 지파인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유대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바리새파에 속했으며 당대 최고 지도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영적으로도 그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3층 천을 다녀온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이었고 사도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많은 계시를 받아 성경 13권이나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남겨 두었다. 그래서 그는 세 번 씩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기 쉬운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은 교만을 꺽기 위해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편 50편 15절에서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고 말씀하고 있다. 환란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 분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러면 왜 부르라고 하시는가 ? 그것은 우리의 사랑과 의뢰하는 마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편안하면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고통을 당하셨는데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기도한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통해 고난을 이기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올바르고, 지혜롭고, 합당한 일은 하나님의 궁휼을 바라고 그에게 의지하고 간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절에서 나사로의 병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나사로의 병을 인하여 어떻게 영광을 얻으셨는가 ?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요한복음 10장 24절로 돌아가야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요구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이에 예수님은 25절에서 자신이 이미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이적으로 증거를 분명히 제시했지만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대답하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매우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 그는 장사되었고 나흘이나 무덤 속에 있었다. 그의 몸은 썪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고 목격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 때 예수님은 무리가 똑똑히 보는 앞에서 말씀 한마디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질병을 치료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회복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질병 가운데 있을 때 어떻게 이 질병을 잘 선용하여 하나님께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라는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

칼빈의 고난관

보통 사람들은 현세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당장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의 현세의 삶에 대해 그처럼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현세에 있는 무언가 좋은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 대해 과도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종류의 고난을 주신다. 빈곤, 질병, 흉년, 화재, 강도, 전쟁 등의 재난과 재앙들을 주심으로 우리가 현세에서 깊고 든든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각종 시련과 어려움들을 보냄으로써 우리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고 말했던 저 어리석은 부자처럼 허리띠를 풀고 태만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때로는 악처나 탈선 자녀를 주셔서 가정생활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게 하시고,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데려가심으로써 그들을 슬프게 하시고, 그들의 교만을 꺾으신다. 이런 고통과 고난을 만날 때 인간은 현세의 모든 것이 다 무상하고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와 그의 아내

요한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붕괴 직전에 있을 때 성결운동으로 나라를 살린 위대한 전도자요, 신학자요, 목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웨슬리는 세 차례의 실연의 고배를 마신 후 49세 때에 바질이라는 미망인과 결혼하였는데, 그녀에게 다친 발목을 치료받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한 후 세상을 떠나기 10년 전까지 30년 동안 비극적인 결혼생활을 하였다.

웨슬리 부인은 소크라테스 아내와 링컨의 아내와 더불어 세계 3대 악처로 이름이 나 있다. 그녀는 원래 성격이 포악하고 남달리 질투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웨슬리를 감시하고 때로는 남편의 포켓을 뒤져서 사신(私信)을 훔쳐내 읽고는 조그만 꼬투리라도 있으면 폭언을 하고 그를 괴롭혔다. 웨슬리를 늘 의심하였기 때문에 그가 마차 여행을 할 때에는 그가 떠난 다음 그의 뒤를 좇아가 마차 안에 누가 탔나를 조사해 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바질이 웨슬리의 전도 여행에 동행하였는데 어느 숙소에 있을 때 웨슬리의 전도인 존 행슨이 그 숙소를 방문하였을 때 웨슬리는 방바닥에 넘어져 있었고, 그녀는 시근거리며 손에 머리카락 한 줌을 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웨슬리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레는 단 5분간도 의기소침한 일이 없었다. 웨슬리는 낙천주의자였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

웨슬리 전기 저자 존 델포오드(John Telford)는 “그녀는 그의 자제하지 못하는 질투심과 악독하고 포악한 성품 때문에 30년 동안이나 웨슬리의 생애를 암담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동안의 고난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만일 그녀가 좀더 좋은 아내였다면…자신은 하나님의 크신 사업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더 힘썼을는지 모릅니다”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고난을 당할 때

전도서 7장 13절, 14을 보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고난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고난에 대처하기 위한 지혜는 무엇인가?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였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 생각을 해야 한다.

나만이 당하는 일이 아니다.

자녀를 낳아본 부인이 그 산고를 혼자 당하는 일이라면 또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힘들지만 모든 어머니들이 다같이 그런 고난을 겪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만 고난을 당한다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그러나 이 세상 사람 중에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누구나 고난을 당하고 있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게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질 수 없다. 우연히 다가오는 고난, 의미없는 고난이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뚜렷한 목적을 두고 허락하신 일이다.

나쁜 것이 아니다.

로마서 8장 28장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다. 좋은 일이든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결국에 선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회개하며, 잘못된 것들을 수정하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고난 뒤에는 축복을 위한 놀라운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

항상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병행시켜 놓으셨기 때문에 이런 역경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곤고한 날이 계속되면 그 다음은 형통한 날이 다가 올 것이다. 반대로 형통한 날이 계속되면 곤고한 날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의 날에 낙심할 필요가 없고 형통한 날 자랑하고 교만해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때를 대비하여 친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한다.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2장 18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고 하셨다. 모든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도와 주시며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발자욱’이라는 영시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쌍의 발자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발자욱을 따라 그의 지나온 생애가 한 장면 한 장면 하늘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생애의 한 장면마다 모래 위에는 언제나 두 쌍의 발자욱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의 발자욱 옆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발자욱도 같이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계속해서 그의 자나온 생애가 한 장면 한 장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는 모래 위에 남긴 발자욱을 다시 한번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모래 위에는 한 쌍의 발자욱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곧 생각해 냈습니다.

이 기간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괴로운 기간이었다는 것을.

그러자 그는 무척 슬프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내가 가장 슬프고 괴로웠을 때, 그 때 주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내게 주님이 가장 필요했을 때 주님은 나를 떠나셨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랑스런 내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단다.

네가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네가 가여워 너를 품에 안고 걸었단다.

그래서 모래 위에는 나의 발자욱만 남아 있는 거란다.”

고난을 당한 자들을 대할 때

번뇌케 하는 안위자가 되지 말라

우리의 주변에는 고난을 당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우리는 종종 마음대로 주석을 달고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위로한다는 것이 자칫 욥을 찾아와서 괴롭히던 친구들과 같이 되기 쉽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판단하는 자들을 향하며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욥 16:2)라고 하였다. 사실 고난 당하는 당사자만큼 괴로운 사람은 없다.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성경은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할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다(롬 12:15).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 괴로워 할 때 웃으며 위로하는 말보다 함께 울어 주면서 침묵을 지키는 사람에게 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예상하며 살아야 한다(행 14:22). 그러나 성도의 고난은 일시적이며(시 30:5, 109:9, 사 54:7,8),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이 경하다(롬 8:18, 고후 4:17)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섭섭해하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의미 없는 고난은 하나도 없다. 비록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즉시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아프리카 선교사 윌리암 모리슨(W. Morrison)이 쓴 ‘고난의 의미’라는 시를 소개하고 마치고자 한다.

온 시절이 여름 뿐이면 내 어찌 알리요

눈같이 희게 씻어 주신다는 그 말씀을

날들이 늘 봄처럼 빛난다면 내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이제 주님의 나라에 이르면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그 말을

괴로움이 내게 없다면 내 어이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리요

사랑하는 자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무덤이 내 앞에 없다면 내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요

영생은 꿈이 아니라고

나는 믿노라 겨울과 눈물과 곤고함, 그리고 저 무덤까지 모두가 주님의 축복인 것을

아 나는 결코 의심치 않노라

내가 화라고 부른 모든 것들이

곧 주님이 내려주신 축복된 길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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