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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61년 8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지 석 달이 지난 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일본에 친서를 보냅니다.
\”근계(삼가 아룁니다) 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1961년 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귀하’
그것은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일본의 막후 실력자에게 보낸 편지글의 시작이었습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기시 노부스케.
기시 노부스케
– 전 만주국 산업부 차관
– 전 일본 상공부 대신
– 전 일본 총리
1930년대 만주국 산업차관을 지내면서 식민지 수탈을 주도했고 1940년대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는 상공부 대신을 역임한 A급 전범이자…
지금의 총리,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며 아베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합니다.
과연 과거를 딛고 양국이 미래로 향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그는 2년 뒤인 1963년 8월에 두 번째 친서를 보냅니다.
\”한·일 회담의 조기 타결을 위하여 배전의 협조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1963년 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귀하’
친서를 직접 전달한 인물은 화신백화점 사장을 지낸 박흥식.
\”박흥식 씨 편으로 전해주신 귀하의 서한에 접하고…금번 다시 박흥식 씨가 귀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 1963년 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귀하’
영화의 실제 모델로도 잘 알려진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첫 번째로 체포된 특급 친일파였습니다.
어제(5일)와 오늘 그리고 며칠동안 뉴스룸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이후에 감춰진 이야기를 취재해서 전해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어제는 협정의 대가로 들어온 일본의 돈이 결과적으로는 다시 일본의 전범 기업으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을 보도해드렸고…
\”돈을 빌려줄 때…일본 것을 쓰라고 딱 돼 있어요\”
\”일본과 겹치는 산업 육성 안 돼…\”
오늘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앞세운 한·일 협력위원회의 면담문건을 입수해서 전해드렸습니다.
#손석희앵커 #JTBC뉴스룸 #A급전범_훈장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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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 나무위키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56·57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태평양 전쟁 이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8/2022
View: 3538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의 보수적 DNA와 아베 신조의 집념
전후의 기시 노부스케는 1950년대 후반 일본의 수상이 되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 이어 ‘보수적인’ 그러나 미국 의존적인 전후정치의 틀을 완성했다. 현재까지도 …
Source: www.krm.or.kr
Date Published: 8/28/2021
View: 1004
“문선명 귀중한 존재”…기시 노부스케가 레이건에 보낸 탄원서 공개
“존귀한 문선명은 부당하게 구금. 석방해 달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조부로 역시 일본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가 1984년 로널드 레이건 …
Source: m.hankookilbo.com
Date Published: 7/3/2021
View: 3133
기시 노부스케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상무성장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정2위국화장을 받았다. 쇼와의 요괴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Source: artsandculture.google.com
Date Published: 6/12/2021
View: 133
[백가쟁명:유주열]만주국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 중앙일보
1936년 만주국의 산업차관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부임하였다. 당시 38세의 가장 잘 나가는 상공관료로서 만주국 건설을 위해 관동군의 끈질긴 요청에 의한 …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5/16/2022
View: 3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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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기시 노부스케
- Author: JTBC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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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8.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vPZVwkI3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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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일본어: 岸信介, 1896년 11월 13일 ~ 1987년 8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상무성장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정2위국화장을 받았다.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본래 성씨는 사토(佐藤)이다.
1936년에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이 되어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40년 귀국하여 1941년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 및 군수성 차관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전후 극동 국제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반 투옥 되던 중에 1950년 한국 전쟁 및 냉전이 시작됨으로 인해, 미국의 정책은 전범국 일본 권력 해체에서 다시금 일본 권력을 적극 사용하는 방향으로 정책 방침이 변경되어 결국 기시는 기사회생 하게 되었다. 1957년 총리가 되었으나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 등 혼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생애와 경력 [ 편집 ]
1896년 11월 13일에 야마구치현에서 출생하였고,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 직후 농상무성에 들어갔는데 1925년 농상무성이 상공성과 농림성이 분할 되면서 상공성에 배속되어 1933년 2월에 상공대신관방 문서 과장, 1935년 4월에는 상공성 공무 국장으로 취임하고 1936년 10월부터는 만주국 정부에서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39년 3월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하여 만주국「산업 개발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친동생은 사토 에이사쿠이다.
그는 사업가로 재기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53년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당내 헌법조사회 회장이 되었는데 1954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자유당에서 제명되자 일본 민주당을 결성하였고, 민주당이 1955년에 자유당과 통합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1955년 자유민주당의 간사장이 되고, 이듬해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하고 이시바시 내각의 외무상으로 취임, 이시바시가 병으로 물러나자 1957년 2월에 총리가 되었다. 1960년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미국, 한국 등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냉전에 일부 가담하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1]을 추진, 국회 비준을 강행하여 이에 반대하는 일본 기독교계와 민중들의 대규모 군중시위(안보투쟁)를 불러일으키면서 국민의 비난을 받고 총리직을 물러났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자민당에서 계속 활발히 활동했다.
1966년과 1972년 민간 외교 차원에서 한국을 찾은 것을 비롯하여,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방문하였다. 그 후 1979년 정계에서 은퇴하고 1981년 곡물소에서 일했으며, 1987년 8월 7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정책 [ 편집 ]
총리가 된 후 그는 외교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 미·일관계,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국가들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57년에는 이들 나라를 방문해 배상협정과 경제협력을 추진했다. 1959년 서유럽, 라틴아메리카 순방에 이어 1960년 1월 미국으로 가서 미·일관계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독자적인 외교권을 위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을 조인했다. 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전쟁을 금지하여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었던 전후 일본 평화헌법을 공식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하는 한편 일본의 자주국방을 추진했다.
가족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의 보수적 DNA와 아베 신조의 집념
– 정치적・사상적 계승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 –
일제 강점기의 쇼크가 너무도 컸던 탓인지 해방 이전의 한국과 해방 이후 사이에는 매우 큰 단절 혹은 높은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러한 단절로 인해 해방 이전을 쉽게 ‘근대’로 그리고 해방 이후를 ‘현대’로 규정하도록 자극하기도 한다. 물론 일본의 경우에도 패전 …
일제 강점기의 쇼크가 너무도 컸던 탓인지 해방 이전의 한국과 해방 이후 사이에는 매우 큰 단절 혹은 높은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러한 단절로 인해 해방 이전을 쉽게 ‘근대’로 그리고 해방 이후를 ‘현대’로 규정하도록 자극하기도 한다. 물론 일본의 경우에도 패전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정치・군사・역사・문화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일본의 우파들은 패전 이후의 체제를 ‘전후체제’・‘패전 후’・‘전후’라 규정하고, 이 ‘전후’를 전전적인 문제의 결과 혹은 해결이 아니라, ‘지양’ 혹은 ‘부인’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선언・인식하고 있다. 즉 이들은 ‘전후체제’가 일본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외부적으로 강제・이식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재정의・재구축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전전’과 ‘전중’과 ‘전후’ 혹은 ‘현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통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의 접근도 보다 중층적・통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즉 일본의 우경화의 문제를 단지 2015년 현재의 일본 현대사라는 한정된 시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갖는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강상중(姜尚中)과 현무암(玄武岩)에 의해 쓰여진 『흥망의 세계사 대일본・만주제국의 유산(興亡の世界史 大日本・満州帝国の遺産)』(講談社, 2010).『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함께, 2012)로 번역)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에 따르면 전전의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의 실제적인 최고 실세로서, 만주국을 군부 엘리트와 관료, 닛산(日産)과 같은 일본 재벌이 지배하는 철저한 중앙 통제형 개발독재체제의 실험실로 만들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식의 계획경제를 추진하였으며, 수출 주도, 농촌진흥,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을 통해 전후 일본의 압축적 정치・관료 주도의 성장전략의 기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기시 노부스케는 1950년대 후반 일본의 수상이 되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 이어 ‘보수적인’ 그러나 미국 의존적인 전후정치의 틀을 완성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자민당의 체질을 만든 장본인이다.
2015년 3월 현재의 일본 수상인 아베 신조에게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가 어릴 때부터 “일본의 장래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진지한 정치가”(安倍晋三,『美しい国へ』, 文芸春秋, 2006)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아베에게 각인된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가 정치인이 되고자 했을 때, 아베가 그의 정치적인 색깔을 선명히 하려 할 때, 보수적으로 일본의 미래를 그리려 할 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론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현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아베 신조의 본질을 밝힘과 동시에 이의 단서로서 기시 노부스케의 정체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베 신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시 노부스케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베 신조의 ‘집착’으로 상징되는 현대 일본의 우경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으로 선결되어야 한다.
(1) 기시 노부스케의 국가주의와 아베 신조의 국가주의
(2) 기시 및 아베의 정치적인 현실주의
(A급 전범에서 친미 우파로의 전향한 기시와 아베 신조의 미일동맹 중시)
(3)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자산을 계승한 아베 신조
(4) 전후 평화헌법을 개악하려는 열망의 근원
(5) 양자의 혈연적인 계승관계
즉 아베 신조에 대한 연구와 이의 모델로서의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개별적・교차적 연구, 전전과 전후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통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베 신조의 ‘현상’과 ‘현재’ 만을 직시・우려・대응하고, 이를 ‘극우’ 혹은 ‘망언’으로 경시 혹은 과대평가하여, 실제적・현실적으로 아베가 미치는 영향력의 내용과 크기를 객관화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학문적, 실제적인 문제점을 미약하나마 보완 혹은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문선명 귀중한 존재”…기시 노부스케가 레이건에 보낸 탄원서 공개
1984년 미국서 탈세로 수감된 문선명 석방 요청
“문선명은 성실하고 귀중한 존재”
반공산주의 이념에 통일교와 깊은 관계
“존귀한 문선명은 부당하게 구금. 석방해 달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조부로 역시 일본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가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에게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립자 문선명의 석방을 요청하며 보낸 서신이 공개됐다. 문선명은 1984년 미국에서 탈세 혐의로 복역 중이었다.
지난 8일 아베 전 총리를 총으로 쏘아 숨지게 한 야마가미 데쓰야(41)는 경찰 조사에서 “기시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통일교를 가져왔고, 아베는 통일교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며 아베 일가와 통일교의 밀접한 관계를 범행 동기로 밝힌 바 있다.
“문선명 부당하게 구금… 가능한 한 빨리 석방됐으면”
21일 발매된 일본 주간지 슈칸신초(週刊新潮)가 공개한 서한을 보면, 기시는 “문 존사(尊師)는 현재 부당하게 구금돼 있다. 당신의 협조를 얻어, 나는 꼭, 가능한 한 빨리, 그가 부당한 구금에서 석방되도록 부탁하고 싶다”고 적었다. 기시의 서명이 확실히 드러나 있는 이 서한의 작성 날짜는 1984년 11월 26일이다. 당시 87세였던 기시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상태였지만 매우 간곡하면서도 분명하게 문선명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는 편지에서 문선명을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의 투사로 묘사했다. “문 존사는 성실한 남성으로, 자유의 이념을 촉진하고 공산주의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평생을 걸고 임하고 있다”라거나 “그의 존재는 현재와 미래에 걸쳐 희귀하고 귀중한 것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표현했다. 슈칸신초는 이 편지를 보냈던 1980년대는 이미 통일교의 지나친 포교가 사회 문제화하고 있었는데도 기시는 그 교단의 수령을 ‘성실하고 귀중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가 답장도 작성… 아직도 기밀 해제 안 돼”
5년 전 신초의 의뢰를 받아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에 수록돼 있던 이 서한을 입수한 저널리스트 도쿠모토 에이치로씨는 “당시 미국 정부가 대응을 협의했다”면서 “전 일본 총리이고 당시까지도 여전히 자민당의 유력자였기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답장도 작성한 것 같지만 그 편지는 아직도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기밀 해제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시의 탄원은 통하지 않았고, 문선명이 출소한 것은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였다.
신초는 기시 전 총리가 통일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이유가 반공 이념 때문이라고 봤다. 잡지 ‘종교문제’ 편집장인 저널리스트 오가와 간다이씨는 “통일교는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만들어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다”며 “냉전 중이던 당시는 일본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의 세력이 강했고, 기시는 좌익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과도 손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기시는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장관과 군수성 차관을 역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냉전을 거치며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 방향이 바뀌자 다시금 정계에 복귀, 1957년 총리까지 된다. ‘쇼와의 요괴’라고도 불렸던 그는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했다. 1965년 한일 수교 과정에서도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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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 Google Arts & Culture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상무성장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정2위국화장을 받았다. 쇼와의 요괴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본래 성씨는 사토이다.
1936년에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이 되어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40년 귀국하여 1941년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 및 군수성 차관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전후 극동 국제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반 투옥 되던 중에 1950년 한국 전쟁 및 냉전이 시작됨으로 인해, 미국의 정책은 전범국 일본 권력 해체에서 다시금 일본 권력을 적극 사용하는 방향으로 정책 방침이 변경되어 결국 기시는 기사회생 하게 되었다. 1957년 총리가 되었으나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 등 혼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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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불가…박정희-기시 노부스케 친서
KBS 탐사보도팀이 취재한 <훈장 2부작> 이 넉 달째 방송날짜조차 잡지 못하면서 사실상 불방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KBS 간부들이 방송불가와 원고 삭제를 요구한 것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였다. 친서는 1961년 8월과 1963년 8월에 박정희 의장이 기시에게 보낸 것이다.
현재 친서의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고, 국내에는 사본 형태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에 남아있다. 기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김상중`현무암 저, 2012) 저서에 해당 친서 내용의 일부가 소개됐지만, 언론사가 친서 전문을 촬영한 것은 KBS 탐사보도팀이 처음이다.
KBS 탐사보도팀이 확인한 해당 친서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당시 전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에게 한일수교협정의 협력을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1년 8월과 196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보낸 친서를 통해 당시 박정희 당시 의장이 한일협정의 방향을 어디로 끌고가고자 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기시 노부스케는 36년 만주국 산업차관을 지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1년 상공대신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범죄 책임자 중 한 명이다
1961년 8월 서신에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에게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 친서에 대해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는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와 동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보단 과거 일제 강점기의 만주에서의 경험(대동아론)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흥미롭게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두번째 친서를 전달한 사람은 박흥식이다. 친서에 박흥식 이름이 등장한다. 박흥식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다.그는 1949년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1호 체포 대상자였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규명위는 박흥식을 친일행위자 1,006명에 포함시켰다.
또 1961년 기시 노부스케가 박정희에 보낸 밀사로 ‘신영민’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신영민은 박정희의 중학교 동창으로 나올 뿐 구체적 신원이 확인된 적은 없다. 그가 65년 한일협정 막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이 친서는 KBS 탐사보도팀이 국내 언론으로선 최초로 촬영한 것이지만 KBS 사측은 “누구나 인터넷 검색을 하면 찾을 수 있는”자료라며 방송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촬영한 친서의 사본 전문을 공개한다.
1961년 8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
근계(삼가 아룁니다) 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보다도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특히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가지고 한일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시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시고 있는 한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하신 신영민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동씨는 더욱 나와는 중학 동창 중에서도 친우의 한 사람인 관계로 해서 하등의 격의라든가 기탄을 개입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논의를 수차 장시간에 걸쳐서 교환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군사혁명정부의 오늘까지의 시정성과와 향후의 방침과 전망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판단과 이해와 기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확신하오니 금후에도 동씨를 통하여 귀하와 귀하를 위요한 제현의 호의로운 협력을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더욱 장차 재개하려는 한일국교정상화교섭에 있어서의 귀하(기시 노부스케)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귀하에게는 신영민씨가 약 이순에 걸쳐서 듣고 본 우리 국가의 정치경제 군사 민정 등 제실정을 자세히 보고설명 할 것으로 알고 나는 여기서 귀하의 건강을 축복하며 각필합니다. 1961년 8월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1963년 8월, 박정희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
[백가쟁명:유주열]만주국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베이징 대사관 근무시 지린(吉林)성의 성도 창춘(長春)에 출장을 자주 가게 되었다. 당시는 선양(瀋陽) 총영사관 개설되기 이전으로 지린성은 대사관 관할이었다.
창춘은 중국 도시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중국 공산당 지린성 위원회 본부가 있는 건물이 특이하였다. 건물 모습이 일본의 성(城)의 천수각(天守閣)을 닮아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과거 만주국 시대 일본 관동군의 참모본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 건국에 중심 역할을 한 악명 높은 일본 최강 정예군이다. 창설 당시 산하이관(山海關) 동쪽(지금의 동북 3성)을 지키는 군대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동군 본부의 건물을 지을 때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일본 고유의 성의 모습을 딴 것인지 모른다. 일본은 만주국을 건국하고 창춘을 수도로 정하면서 새로운 수도 즉 신경(新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경은 당시 옛 창춘에 도시 계획을 통하여 건설한 신도시였다. 창춘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린대학 기초의학원의 건물도 자세히 보면 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모습이다. 다만 지붕은 자금성처럼 기와로 되어있어 중일합작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건물은 당시 만주국 정부의 정무원 건물이었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만주국은 멸망되고 옛 이름 창춘을 되찾았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청조의 마지막 황제(선통제) 푸이(溥儀)를 만주국 초대황제(강덕제)로 내세운 일본의 괴뢰국가였다. 국제연맹이 리튼 조사단을 파견 만주국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1933년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는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에 대한 찬반 의결이 있었다. 당시 일본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후에 남만주 철도회사(滿鐵)의 총재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으로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13세 때 미국 오레곤 주의 친척집에 위탁되고 그 곳에서 미국 감리교의 후원으로 오레곤 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돌아 와서 외무성에 입부하였다가 퇴직하고 만철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마쓰오카 의원은 동양인의 영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유창한 영어로 ‘십자가 위의 일본‘이라는 논리로 국제연맹을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걸형(桀刑)에 처하였지만 그의 진실이 후에 알려지듯 국제사회는 일본을 십자가 걸형에 처하려고 하지만 일본의 정당성은 후세가 알아 줄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였다. 마쓰오카는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독교를 끌어넣은 억지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만장일치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부인하였다. 일본은 국제연맹의 결의에 불복 탈퇴하면서 고립을 자초하였다.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만주국과 관계가 깊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이야기한다. 그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현 총리의 외조부이다. 1936년 만주국의 산업차관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부임하였다. 당시 38세의 가장 잘 나가는 상공관료로서 만주국 건설을 위해 관동군의 끈질긴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의 기대대로 만주국의 산업(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 성공시키고 1940년 일본으로 귀국한다. 1941년 관동군 참모장 출신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총리가 되고 그는 상공대신으로 발탁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1898년 일본의 야마구치시(山口市)에서 사토 노부스케(佐藤信介)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토 히데스케(佐藤秀助)는 야마구치현청의 관리였다. 그는 본래 기시 히데스케(岸秀助)였는데 처가인 사토가(佐藤家)에 데릴사위로 입양되면서 처가 성을 따라 사토 히데스케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는 모요(茂世)로 사토 집안의 따님이다.
노부스케는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 날 때 증외조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寬)가 기뻐하여 자신의 이름 자 노부(信)를 취하도록 허락하여 노부스케가 되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유신 이전에 죠수번(長州藩)의 관료(藩士) 출신의 노부히로는 집권세력인 도쿠가와 막부 타도(倒幕派)에 가담한 혁신가였다. 죠수번이 구주를 토벌할 때 참가한 공로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마네(島根)현의 현령이 되었다. 그가 은퇴한 후에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치원로들이 찾아 올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부친 히데스케는 노부스케가 3살이 될 때 야마구치현청의 직장을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처가가 대를 이어 해오던 양조장 사업을 이어 받았다. 야마구치 현의 명문가인인 사토 집안은 본래 양조업(주조업)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모요가 결혼 직후에는 남편 따라 야마구치시에 살면서 그 면허를 일시 타인에게 빌려 주었다가 남편이 사직하고 고향(布施)에 돌아와서 양조업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부부는 1889년에 첫아들 이치로우(市郞), 1896년에는 둘째아들 노부스케, 1901년에는 셋째아들 에이사쿠(榮作)를 얻었다. 첫째 둘째는 현청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에이사쿠는 양조장 사장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형제 모두 머리가 좋아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마을 사람들은 세 형제 중에 ‘머리(頭 두뇌)는 첫째부터, 배짱(度胸)은 셋째부터’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머리 좋은 노부스케가 중학 3년 때 아버지 친가의 성 기시(岸)를 따르게 된다. ‘사토 노부스케’에서 ‘기시 노부스케’로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두 아들은 사토 성을 그대로 쓴다. 장남 이치로는 군인이 되어 해군 중장에서 퇴역하였고 막내 에이사쿠는 형 기시 노부스케에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수재들이 근무하는 내무성이 아닌 농상공성에 들어가 혁신관료로 두각을 나타낸다. 나중에 만주국 상공차관으로 만주국의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의 군수산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인연은 독(毒)이 되어 전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다. 육군대장 도조 히데키는 사형에 처하나 문관인 기시 노부스케는 다행히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공직에서는 일시 추방되었다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자유당에 가입하면서 복권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시게루와 대립하면서 자유당에서 제명되고 하토야마(鳩山一郞)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결성한다. 후에 민주당은 자유당과 합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되면서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이 된다. 후에 총리가 되는 자민당의 총재 경선에 나섰으나 이시바시(石橋)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2개월 후 이시바시 총리가 병으로 사직하여 기시 노부스케는 후임 총리가 된다.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가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의 외무대신을 역임한 아베 신타로는 3남 노부오(信夫)를 처남인 기시 노부스케의 장남 노부와(信和)에 입양시켜 기시(岸)의 성을 따르게 한다. ‘아베 노부오’에서 ‘기시 노부오’로 이름이 바뀐다. 기시 노부오는 현재 참의원 의원이다. 할아버지 대에는 형제간이 사토와 기시로 나누어지고 아베 총리에 와서는 아베와 기시로 나뉜다.
양조장 사장 집 아들인 에이사쿠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항상 우쭐한 기분으로 공부는 않고 강에 나가 물놀이 하느라고 본래 검은 얼굴이 더 새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야마쿠치 중학을 졸업하고 구마모토의 제5고에 합격한다. 당시 시험준비를 위해 같이 하숙하면서 제5고에 합격한 친구로 히로시마 출신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에이사쿠 보다 먼저 총리가 되었다.
에이사쿠도 형과 같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철도성에 근무하면서 형과 달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좌천되는 등 관료생활이 매끄럽지 못했다. 이것이 오히려 복(福)이 되어 패전 후 점령군으로부터 전범의 혐의를 받지 아니하고 공직에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후 정치인이 되어 형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간사장을 할 때 총무회장으로 형의 오른 팔 노릇을 하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된 후 대미 자주외교를 지향 미국과 일본의 불평등 안보조약을 개정 신 안보조약을 체결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협상 결과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국내여론은 친미의 기시 총리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으로 발전하여 기시 총리는 내각을 총 사퇴시킨다. 기시 총리가 사직하자 사토 에이사쿠의 친구 이케다가 총리가 된다. 에이사쿠는 이케다 총리의 총재의 3선을 막기 위해 총재 경선에 뛰어 들지만 이케다에게 패배한다. 얼마 후 이케다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다. 이는 1956년 형 기시가 총리가 된 과정과 유사하다. 형제끼리 총리가 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전임자의 병으로 총리직을 이어 받는 것도 더욱 드문 일일 것이다.
오는 8월 아베 담화를 앞두고 그의 뿌리이며 역사관의 원점이라고 보는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20년 전 1995년 10월 아베 총리가 초선의원 시절 창춘을 방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국 행적을 두루 살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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