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역사왜곡 | 기황후라는 인물의 실체 25608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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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기황후’…재밌다면 역사왜곡 눈감아도 될까 – 한겨레

방영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이 제기된 <기황후>(사진·문화방송)가 실체를 드러냈다. 화려한 볼거리와 빠른 전개로 몰입감을 증폭시키며 1회(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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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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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MBC새월화극 ‘기황후’ 왜곡 논란, 역사학자들도 “잘못”

MBC가 드라마 <기황후>의 역사 왜곡 논란(경향신문 28일자 22면)에도 불구, 촬영을 강행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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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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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 프레시안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담당 PD가 “기황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상당히 단출하고, 원나라의 역사 자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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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ressian.com

Date Published: 1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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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역사 드라마에 ‘역사’가 없다 – 시사IN

역사 드라마가 사료 해석에 초점을 맞췄던 경향에서 벗어나 작가의 상상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 과정에서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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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in.co.kr

Date Published: 3/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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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황후’의 역사왜곡 논란 – 경북대신문

이번에 특히 역사왜곡으로 논란이 된 ‘기황후’는 고려를 무너뜨리려한 기황후와 충혜왕을 드라마가 미화시켰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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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nun.net

Date Published: 8/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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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3가지 죄악… 드라마 통한 미화, 위험하다 – 오마이뉴스

오는 10월부터 방영될 MBC월화드라마 <기황후>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이 만만치 않다. 드라마 제작진이 기황후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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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8/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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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종영 ③] 끝내 자유롭지 못했던 역사왜곡 논란 – 매일경제

역사왜곡 논란의 가장 핵심되는 두 가지를 꼽자면 먼저 기황후라는 인물의 엇갈린 역사적 평가와 두 번째로 고려시대 최고의 폭군 충혜왕을 영웅적인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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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8/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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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라는 인물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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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기황후 역사왜곡

  • Author: 간다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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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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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기황후’…재밌다면 역사왜곡 눈감아도 될까

화려한 볼거리·빠른 전개 눈길

1·2회 두자릿수 시청률 몰이

“정보 부족해 왜곡 문제 심각”

평론가들 우려의 소리 높아

방영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이 제기된 (사진·문화방송)가 실체를 드러냈다. 화려한 볼거리와 빠른 전개로 몰입감을 증폭시키며 1회(28일) 11.1%, 2회(29일) 13.6%의 시청률(닐슨코리아 집계)을 기록했다. (에스비에스), (한국방송), (문화방송)의 거듭된 부진으로 침체의 늪에 빠진 사극이 모처럼 시청자들 눈길을 잡고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평론가들은 더욱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1·2회만 놓고 보면 는 흥행 사극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과 등에서 나온 남장 여인이나 여주인공의 고난, 신분을 초월한 사랑까지 등장한다. ‘공녀였다가 황후가 된 여인’이라는 고려판 신데렐라 스토리(원 황제와 고려 왕의 사랑을 동시에 받기까지 한다)는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일 수 있다.

문제는 기황후가 가상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며 부정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14세기에 고려에서 ‘공물’로 보내진 기황후는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의 황후 자리에까지 올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고려 입장에서 보면 부정적인 면이 컸다. 그 오빠인 기철 등이 기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실권을 행사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개혁을 추진하던 공민왕이 기씨 세력을 제거하자, 기황후는 고려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대어져 탄생한 다른 팩션(사실에 기반한 창작) 사극인 , 등보다 태생적으로 논란이 클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어국문학)는 “1·2부를 보면 기황후를 여전사로 만들고 있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이야기가 내적인 설득력을 얻어 결국 역사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는 기황후에 시청자가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어 “역사적 배경과 인물을 드라마 소재로 가져올 때는 작가 의식과 역사 의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부분이 전제되지 않은 게 심각해 보인다.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면서 역사 왜곡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 또한 “1·2부만 보면 판타지 시대극을 보는 느낌인데, 실존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논란은 감춰지고 있어 ‘역사가 이렇게 탈색돼도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에 앞서 도 통상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인물에 대한 긍정적 해석으로 논란이 있었다. ‘착한 인현왕후-악한 장희빈’이라는 기존 공식을 뒤엎고, 극 중반까지 ‘착한 장희빈-악한 인현왕후’라는 설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는 와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진 교수는 “장희빈은 사극에서 악인으로 많이 다뤄진 인물이라서 판단이 곡해될 여지가 많지 않다. 하지만 기황후는 등에서만 조금 다뤄졌을 뿐 그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장희빈보다 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왜곡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제작 발표회에서 장영철 작가는 “2008년 즈음 다큐멘터리를 보고, 한 여인이 쇠락해가는 나라에서 공녀로 끌려가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게 흥미로웠다. 기황후의 이름·나이 등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드라마의 70% 이상은 허구의 인물들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문화방송 또한 드라마 방영 직전 ‘이 드라마는 고려 말,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으며, 일부 가상의 인물과 허구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실제 역사와 다름을 밝혀드립니다’라는 자막을 내보내고 있다. 방영 전에는 방탕한 패륜아였던 고려 충혜왕에 대한 미화로 비판이 일자, 충혜왕 캐릭터를 허구의 ‘왕유’, ‘고려왕’으로 바꾸며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누그러뜨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기황후라는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이상 드라마 속 왕유는 충혜왕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실존 인물 설정 때문에 는 50부작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전망이다. “드라마를 보고도 역사 운운하면 귀를 열고 듣겠다”던 장 작가나 제작진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스케일도 괜찮고 이야기 전개도 속도감이 있어 ‘기황후’라는 소재만 아니었다면 좋은 사극이 됐을 것도 같다. 하지만 역사 왜곡은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작품이 좋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양희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문화방송 제공

[속보]MBC새월화극 ‘기황후’ 왜곡 논란, 역사학자들도 “잘못”

MBC가 드라마 <기황후>의 역사 왜곡 논란(경향신문 28일자 22면)에도 불구, 촬영을 강행할 방침이다.

<기황후>는 10월로 방송 예정인 하지원·주진모 주연의 50부작 사극이다. 모국인 고려를 농단한 기황후와 새어머니를 겁탈한 고려 충혜왕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MBC 관계자는 28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역사에 나온 한 줄을 갖고도 드라마·영화는 만들어 질 수 있다. 이미 지난 주말 촬영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그것을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두 일간지 인터넷 판에 실린 ‘서울대 이강한 교수’의 주장을 읽어보라”고 말했다.

기황후 영정 /타이페이 고궁박물관

이들 신문은 이 교수의 논문 내용이라면서 “기황후 때 원나라 공녀 징발이 없어졌고 고려 입성론(고려를 원나라로 편입 시키려는 시도)도 사라졌다”고 썼다. 이 교수는 또 “기황후에 대해 서술한 원자료인 원사와 고려사는 모두 기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며 “전부 봉건적인 유학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으로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유학의 입장에서는 기황후를 부정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 “충혜왕이 흔히 알려져 왜곡된 이미지의 주색에만 빠져 사는 왕이었다면, 고려의 경제가 다시 활발해지고 고려를 원나라의 한 행성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음모를 막을 수 있었을까”라고 했다.

기황후 영정 /행주기씨대종중

하지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이 같은 견해를 부인했다. 이 교수는 스포츠경향과 전화통화에서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또 “충혜왕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궁궐 내 방직 공장을 차려서 여종을 끌고 와서 말 안들으면 때려 죽였다”고 말했다. 그는 기황후와 충혜왕을 긍정적으로 봤다는 자신의 논문 관련 보도에 “내 논문에 그런 평가 없다. 그 사람들 내 논문을 읽어보기는 했다는 거냐”고 되물었다.

실제 고려사절요에는 기황후와 기씨 일가, 충혜왕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사절요 27권에 1363년 기황후는 국왕(고려 공민왕)을 원망해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했다고 돼 있다. 또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했다”고 적었다.

고려사절요 사진 온라인캡처

고려사절요 25권에는 충혜왕이 부왕의 후처인 수비(壽妃) 권(權)씨, 부왕 후처인 경화공주 몸을 겁탈했다고 썼고,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집에 행차해서 아내 이씨(李氏)를 강간하는 바람에 이들 부부가 야반도주했다고 썼다.

또 고려사절요 25~26권에 기삼만, 기주, 기철 등이 “일찍이 세력을 믿고 포악한 행동을 함부로 했다”,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들었다”고 돼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도 드라마 주인공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고려사를 전공한 도현철 연세대 교수는 이날 스포츠경향과 통화에서 “충혜왕과 기황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부정적”이라며 “한국사 연구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드라마 작가가 제작하는 듯 하다. 세계에 진출하려는 것은 알겠는데 사실 왜곡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도 “이완용이 일본 사람과 싸운다고 독립투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고려·원을 갈라놓고 권문세족인 기씨 일파와 갈등했다고 충혜왕이 잘한 왕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기황후에 개인적 연민을 가질 수는 있지만 원 간섭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평가할 때 고려 기준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주대 이상국 교수는 “역사는 사실과 해석”이라며 “당시 고려가 안고 있는 내·외적 문제(기씨일가·원나라) 모두에 기황후가 관여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다. 고려 말기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외세 개입을 받은 민감한 시기인 점을 생각하면 제작진은 ‘해석’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2005년 사극 <신돈>에서 묘사한 기황후를 연기한 김혜리.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제작을 멈추야 한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 누리꾼 lwhs**** “충혜왕이 로맨티스트? 이제 곧 매국노 이완용도 재해석한 드라마도 나오겠구나?”라고 썼다. 누리꾼 dlwn***은 “광해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이 나와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기황후는 다르나”라며 “요새 아이들이 책이 아닌 드라마를 보고 역사를 배우기 때문에 추측으로 사극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cess***도 “음행(강간)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여러 사료 및 역사서 기록에 대한 하나의 반대 가능성을 제시한 것일 뿐 조작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기황후 드라마 제작은 취소 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집필을 맡은 정경순 작가는 “2010년 이전부터 드라마를 기획하면서 고려사 원사·고려사절요 뿐 아니라 기존 논문 및 반대되는 시각의 논문과 책 등을 보니 의문점이 많이 들었고, 이를 토대로 집필했다”며 “근거 자료 없이 역사를 극화시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논란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자료 준비 과정에서 인물들이 충분히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인 장영철 작가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기황후가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정치권력들과 싸우는 등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극화해 그릴 것이고 충혜왕에 대해 역사서에 나온 부분도 다른 방식으로 극화해 표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기황후와 충혜왕의 악행을 기록한 문헌 내용

■충혜왕 악행 : 고려사절요 25권

1339년 5월 : 부왕의 후처인 수비(壽妃) 권(權)씨와 간통.

1339년 7월 : 부왕 후처인 경화공주를 강간. 송명리(宋明理)의 무리로 공주의 몸을 붙들어서 꼼짝할 수 없게 하고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하여 그를 간음.

1339년 8월 : 남씨는 본래 양반의 아내였는데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도 그와 간통하였다. 충혜왕도 그와 관계하고서 얼마 후에 영서(英瑞)에게 주고는, 또 그 집에 자주 다니며 사통.

1341년 11월 : 왕이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집에 행차해서 그의 아내 이씨(李氏)를 덮쳐 강간. 얼마 되지 않아 자유는 그의 아내와 함께 달아남. 기륜의 집으로 행차하여 마파를 잡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불량배를 보내어 또 마파를 기륜의 집에서 수색하게 함

1341년 12월 : 왕이 폐인(嬖人) 호첩목아(胡帖木兒)에게 곤장을 치고, 그 혀를 불로 지지며, 그 음낭을 불로 지지고는 섬에 귀양보냄.

■기황후 고려 침공 : 고려사절요 27궐

1362년 12월 : 서북면 만호 정찬(丁贊)이 원 나라에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아들)를 국왕으로 세운다고 보고

1363년 3월 : 황후(기황후)가 국왕(고려 공민왕)을 원망. 국왕을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함

1363년 3월 : 황후는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함.

1363년 12월 : 덕흥군 요동에 둔을 치고 척후기병(斥候騎兵)이 여러 번 압록강에 이름.

■기황후 일가 악행 기록 : 고려사절요 25~26권

1347년 3월 : 기황후 집안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이 세력을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

1347년 4월 : 기황후의 친족인 기주(奇柱)는 일찍이 세력을 믿고 포악한 행동을 함부로 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그에게 고통을 당함.

1356년 3월 : 기씨(奇氏) 일족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횡포하였는데, 어떤 자가 밀고하기를 기철(奇轍)이 쌍성의 반란민과 통하여 당을 만들고 역모를 꾸밈.

1356년 5월 : 기철 등이 세력을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백성을 한없이 해침. 원 나라 황실과 혼인 관계가 있어 한결같이 모두 따라줌.

1356년 5월 : 기철 등이 빼앗아 가진 인구와 토지에 대하여는, 빼앗긴 사람에게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여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함.

1356년 6월 : 기철 등이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듬. 관리의 임명은 그들의 희노(喜怒)에 좌우.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으며, 남이 노비를 가지고 있어도 빼앗음.

MBC ,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네이버 인물 한국사, 기황후)”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의 삶은 가혹하고 참담했다. 궁중의 시녀가 되거나 고관대작의 첩실이 되는가 하면, 유곽에 팔려나가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 기황후도 여느 공녀처럼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운명의 질곡 속에 내던져 져야만 했다”

ⓒMBC 드라마 <기황후> 홈페이지 갈무리

▲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공녀 기록.(려증동(1990)에서 재구성]) ⓒ김운회

▲ 대몽골 제국과 고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2006)

“거란을 평정하고 찰자(剳刺)를 죽인 뒤로부터 일찍이 한 번도 사자를 보내 궐하로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의 하나요, 사신에 명하여 훈언과 성유를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문득 감히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이 죄의 둘이요 너희들이 (황제의 사신인) 저고여를 모해하고 이에 만노의 민호가 이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죄의 셋이요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이어 너희 군신으로 하여금 입조케 하였는데 너희는 감히 항거하고 해도로 들어가 숨었으니 이것이 죄의 넷이요 너희들의 민호로서 구집되지 아니한 현재의 수를 감히 망주하였으니 이것이 죄의 다섯이다.”

“황제의 성지에는 말씀하기를 만약에 너희들이 전쟁을 바란다면 우리도 함께 싸워 끝까지 갈 것이나 만약에 투항해 온다면 전에 이미 투항해 온 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 황제의 대국토에서는 몽골인들은 사방의 땅들을 모두 수취하였는데 설령 투항해 오지 않는 나라들도 모두 점령해버렸다.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면 이미 투항해 온 사람들도 함께 타멸해 버리겠다. … 그러나 너희가 투항해 온다면 그 뒤에는 우리들은 단지 한 집안이 될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친밀해질 것이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국이 만일 실로 출항하면 비록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죽이지 않도록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해도를 공격하여 파멸케하라 하시었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에 나와 항복하면 우리는 곧 군대를 돌려 회군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도 왕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멀리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무술에 차라대가 몽골대 등 50인을 보내왔다. 기해에 제포궁에 행차하여 객사를 인견하니 그가 말하기를 “태자가 육지로 나와서 (항복하면) 저희 군사는 당연히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태자가 병이 있으니 어찌 능히 나갈 수가있느냐?”

본문 주석

(주1) 夏四月蒙古詔曰 : 自平契丹賊殺剳刺之後未嘗遣一介赴闕罪一也命使*賫{齎}訓言省諭輒敢射回罪二也爾等謀害著古與乃稱萬奴民戶殺之罪三也命汝進軍仍令汝弼入朝爾敢抗拒竄諸海島罪四也汝等民戶不拘執見數輒敢妄奏罪五也.(『高麗史』23卷「世家23-高宗2」)

(주2) 皇帝聖旨道若你每待廝交阿每一處廝相殺住到老者若還要投呵依前一□投了者去若你每民戶根底的愛惜依前一□投拜來下去底使臣怏怏地交回來者若要廝殺你識者皇帝大國土裏達達每將四向周圍國土都收了不投底國土都收了你每不聽得來投去了底人都一處行打你每不聽得來阿每將劫*호你每底寄不及都收撫了聽你每根底來. 高麗國王你每底民戶裏投拜了的人依舊住坐不投拜底人戶殺有虎兒年投投拜了咱每不啻一家(來那什麽使去底使臣是阿土(『高麗史』23卷-「世家23-高宗2」)

(주3) 皇帝勑云: ‘高麗國如實出降雖雞犬一無所殺否則攻破水內.’ 今國王及太子出降西京則便可回兵.” 王曰: “予旣老病不可遠行.” 乃遣永安公僖知中樞院事金寶鼎如車羅大屯所.(『高麗史』24卷「世家24-高宗3」)

(주4) 戊戌車羅大遣蒙古大等十五人來. 己亥幸梯浦宮引見客使曰: 太子出則兵可退矣. 王曰: 太子有病豈能出哉.(『高麗史』24卷「世家24」高宗3)

문화방송(MBC)이 50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 가 큰 화제를 몰면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담당 PD가 “기황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상당히 단출하고, 원나라의 역사 자체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기황후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역사드라마를 단순히 드라마로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그 동안 ‘기황후’의 역사왜곡에 대한 부분은 주로 기황후, 기황후의 족벌 세력, 충혜왕 등 에 국한되어있다. 즉 국내에서는 기황후를 필두로 기 씨 일족이 조국인 고려에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악녀와 그 가족으로 이해되고 있고, 충혜왕은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른 대표적인 퍠륜의 암군인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국한되어있다. 또 엉성한 전투장면도 봐주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제작비의 한계라고 보고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점들은 이미 많이 지적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새삼 다룰 문제는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몽골의 대제국(원나라)과 고려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특히 몽골의 일개 장군이 고려왕을 하대한다거나 공녀(貢女)에 대해서 지나치게 묘사된 부분이 문제다. 마치 공녀가 국가적인 시련인 듯이 묘사되어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라고 알고 있다.MBC의 기획 의도를 보면라고 한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이 나 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이런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렇다면 공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공녀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찾아보고 드라마를 썼더라면, 이런 드라마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에 나타난 공녀의 송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의 기록에 따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충렬왕 때 몰려 있고, 고려 원종 15년 3월부터 공민왕 5년까지 전체 82년간 원나라로 간 여인들의 수는 800여 명 미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식적으로 나온 수는 713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274년에서 1276년까지 3년간 전체의 91%가 공녀로 갔으며 이후 80여 년간은 매년 거의 1∼2명의 수준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그리는 시기는 충혜왕의 시기인데 이 당시는 공녀가 거의 없는 수준으로 그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였다.1년에 1∼2명이 고관대작들의 요청으로 공녀로 가는 것이 드라마의 작가나 PD가 말하는 것처럼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라고 비분강개한다면, 이들이 아는 역사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결국 공녀는 고려와 갈등이 많았던 초기에 일종의 전리(戰利)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몽골은 고려를 친인척으로 대했지만 초기에 고려가 몽골에 대해 지속해서 괴롭힌 데에 대한 일종의 보복성 조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의 시대인 충혜왕 당시에는 이미 공녀가 거의 사라진 상황인데 공녀 문제를 마치 국가적 문제인 듯 심각하게 다룬 것 자체가 무지의 소치이다.물론 공녀의 수치가 적다고 해서 이들의 행위가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일제강점기 정신대식으로 끌려간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 일부에서처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그리고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인들은 짝이 없는 여인들이었고 상당수의 고려 처녀들은 원나라 귀족 집으로 들어갔고 과부들은 일반 평민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기자오(奇子敖)의 따님은 원황제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아 황태후가 되었고(이 분이 바로 기황후이다), 김심(金深)의 따님은 원황제 무종(武宗)의 총애를 받았고, 조서(趙瑞)의 따님은 총신의 아내가 되었다.공녀 문제는 단지 원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명나라의 성조(영락제)는 즉위하자마자 조선의 여자들이 부드럽고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여러 차례 조선으로 보내어 여자들을 뽑아오게 했다. 성조 당시 궁인들은 330명(1차), 2800 명(2차) 등이 변을 당하여 몰살되었는데 이때 조선 여인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또 성조는 죽으면서도 순장(殉葬)을 명하여 13명의 비빈을 순장시켰는데 여기도 조선 여인이 있었다.역사상 가장 큰 만행 중의 하나인 순장은 조선의 선비들이 오매불망 부모의 나라라고 숭배하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서 시작되어 성조 이후 인종(仁宗), 선종(宣宗)때까지 계속되다가 1464년 영종(英宗)이 죽으면서 유조를 내려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함으로써 겨우 폐지됐다.이상을 보면 이 드라마의 작가나 PD가 역사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몽골에 대한 비하로 연결될 수가 있다.이러한 역사 왜곡은 조선 후기 광해군의 실각 이후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인조(仁祖) 이후 정권의 실세들이 자기들의 실정(失政)을 은폐하기 위해 시대착오적인 각종 역사 왜곡을 자행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들에게 중국과 조선을 제외하면 모두 오랑캐였다. 한족(漢族)에게 자신도 동이(東夷)라는 오랑캐이면서도 말이다. 이들이 이후 동이라는 말이 가지는 긍정성에 찾기 위해 온갖 역사의 쓰레기통을 다 뒤지는 풍토를 만들게 한 것이다.당시의 몽골대제국은 군대가 갈 수 있는 곳이면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에서 유독 고려(高麗)만이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 당시의 지도를 보면, 세상은 오직 원나라(몽골 대제국·Mongol Great Empire)과 고려(Korea)만이 있는 듯하다.이것을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대로 고려가 몽골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객관적인 국력의 수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나라의 남송 정벌 과정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킬 정도의 나라가 고려가 강성해서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착각하면 곤란한 일이다.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드라마와는 반대로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고려에 우호적이었고 관대하였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없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대량 학살과 전국토의 초토화(焦土化)를 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인다.에서는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짝사랑에 가까운 사항들이 비일비재하다. 당시 원나라의 지배층들의 고려에 대한 심경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즉 원나라(대몽골제국) 조정은 고려가 원나라에 대하여 잘못한 바에 대하여,(주1)라고 힐난했지만 고려 조정은 이에 대해 심각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다.에서는 원나라가 거란을 고려를 위해 처리해주었으며 사신 저고여를 죽인 것에 대해서 엄중히 문책하는 듯하면서도(주2)라고 하여 도대체 원나라의 궁극적인 의도는 무엇인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로 횡설수설하고 있다.그리고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원나라의 코앞에 있는 나라가 항복도 아니고 항전도 아닌 상태로 있는 나라도 없었을뿐더러, 원나라의 강력한 협박에도 고려에서의 대응은 이상할 정도로 여유롭다. 이런 대목들은 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에는라 하고 이에 영안공 희와 지중추원사 김보정을 보내어 차라대(車羅大)의 병영으로 가게 하였다.(주3)또 같은 부분의 기록에(주4)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역사에 대한 왜곡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드라마 작가들이 일상적으로 고등학교에서 배운 정도의 지식 정도만으로 제작하기에 앞서 좀 더 공부하고 몽골 관련 전문 학자들에게 자문하고서 드라마 제작에 임했으면 이런 이상한 드라마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황후, 역사 드라마에 ‘역사’가 없다

역사 드라마는 항상 정치적·사회적 논쟁에 휘말린다. ‘역사’와 ‘드라마’가 결합된 역사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사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지향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 드라마는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 드라마는 물론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창작된 상상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촉진시키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으로 해석되었다. ‘역사’에 내재된 ‘민족’ 또는 ‘민족의식’을 ‘국민 통합과 결속’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유했던 1970년대 유신정권의 ‘정책 사극’이 대표적이다. 개혁 담론이 팽배했던 2000년대 중반, 조선 시대의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 ‘정조 대왕’이 다양한 유형의 역사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정치적 논쟁이 일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역사 드라마는 ‘무엇’이라는 내용보다 ‘누가, 언제, 어떻게’ 형상화했느냐에 따라 현재적 의미가 달라지는 유동적인 장르다.

역사 드라마에서 역사관이 탈각된 부작용은 대단히 심각하다. 고려에서 원나라로 끌려갔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공녀 기승냥’을 “가장 높이, 가장 아름답게 핀 꽃”으로서 “대륙을 품은 철의 여인”으로 새롭게 조명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MBC 〈기황후〉가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실존 인물 기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기황후〉에서는 그녀를 “낯선 이국의 황실(왕실)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인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이자 특별한 감성과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새롭게 상상한다. 낯선 이국에 버려지다시피 했던 여인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조국을 원망하는 것이야 충분히 그럴 법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반민족적인 행위를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고려 내정에 간섭하는가 하면,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침공한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황후〉의 제작진이 기황후의 역사성을 거세하고 철저하게 개인적 맥락에서 그녀의 일대기를 다시 쓰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고려 말의 비극적 상황을 그저 풍경으로 처리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사 전유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관점에 따르면, 예술작품에서의 ‘전유(專有:appropriation)’는 일상의 맥락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술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전유는 ‘자기 혼자만 사용하기 위해 허가 없이 어떤 것을 차지하는 행위’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다. ‘전유’의 관점으로 보면, 〈기황후〉가 고려 말기에 갖은 횡포와 악행을 일삼은 인물이라는 〈고려사절요〉의 평가에서 벗어나 기황후의 일생을 새롭게 상상해 ‘다시 쓰기’ 하는 것은 예술작품에서의 전유일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역사적 평가와 다르게 형상화하느냐는 온전히 작가 몫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는 역사관의 차이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나 〈기황후〉의 작가가 기황후의 일생을 새롭게 상상하는 과정에서 고려 말기의 처참한 역사가 ‘기승냥(하지원)’의 파란만장한 일생으로 전유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기승냥과 고려의 왕 ‘왕유(주진모)’, 그리고 원나라의 황제 ‘타환(지창욱)’의 애정 관계를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은 〈기황후〉에서 고려 말기의 비극적 상황은 그저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공녀로 끌려갔던 기승냥이 어떻게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원나라의 황후의 자리에 오르느냐가 핵심 서사이기 때문이다. 기승냥의 고난과 역경 극복에 초점을 맞춘 서사 전개는 기승냥을 고려 말기 비극적 정치 상황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실존 인물 기황후의 반민족적인 행위를 소거하기 위해 드라마의 주인공 기승냥의 개인사를 새롭게 상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유의 결과다.

드라마 ‘기황후’의 역사왜곡 논란

결국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또한 소설과 드라마 역시 사람의 이야기, 사람에 의한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한발 떨어져서 이해해볼 수가 있다.

이번에 특히 역사왜곡으로 논란이 된 ‘기황후’는 고려를 무너뜨리려한 기황후와 충혜왕을 드라마가 미화시켰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러브스토리와 권력의 밀당 같은 흥미위주의 요소를 많이 배치해 얼마 전 높은 시청률로 방영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기황후도, 장희빈도 정말 악녀이기만 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 기존의 틀에 박힌 시각들로 그들을 인식해 왔다. 또 하나의 시선 속에서는 기황후 역시 나라에게 버림받은 그저 한 여인일 뿐이었다. 극심한 수탈을 한 오라비를 둔 여인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도 약한 국력을 가진 모국으로부터 버림받고 타국에 끌려가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던 민족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만 했던 피해자였다. 각색된 드라마나 소설은 이렇게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제작진이 ‘기황후’를 ‘픽션사극’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도 역사의 큰 틀 안에서 지켜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왜곡과 각색을 구분해야 한다. 사실관계를 뒤집어버리는 왜곡은 문제가 있다.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들을 위한 고민도 분명 필요하다.

작품의 목적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건의 인물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제작자로서, 소설가로서 올바른 역사 인식과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사료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 이어붙이는 것은 작가와 연출의 능력이지만, 이를 정사(正史)에 기반해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흥행과 작품성 모두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다.

시청자들이 ‘정통사극’을 표방한 후발주자인 ‘정도전’에 극찬을 쏟아내는 이유도 이 점에 있을 것이다. 더불어 열렬히 탐구하고 이해하고 난 뒤 창작된 작품은 그러한 과정 없이 만든 작품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의 질적 차이와 더불어 진정성의 획득에서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김보현 기자/[email protected]

높은 시청률, 온전히 칭찬하기 힘든 기황후

최근 MBC 드라마 기황후가 인기리에 종영했다. 처음부터 역사적 논란을 끌고 시작했던 만큼 시작부터 종영까지 말이 많았다. 제작진이 드라마 초반에 약속했던 기황후의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고려 공녀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 흥미를 느껴 기획을 시작한 작품이기 때문에 황후 등극 이후 그의 어두운 면을 20, 30회씩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극의 말미에는 기승냥이 가진 암적인 면모 역시 분명히 다룰 예정”이라던 초반의 약속은 종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모국인 고려에 악행을 저질렀던 기황후를 미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단지 인물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주는 ‘각색’으로 볼 수 있을까.

작년 1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방송이 역사적 사실 또는 위인을 객관적 근거 없이 왜곡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점은 인기 드라마는 대중을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청자들은 사극을 통해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기에 이른다. 드라마에 몰입이 강해질수록 시청자의 객관적 판단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문화를 이끄는 자들은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드라마를 구성해야 한다.

기황후를 비롯한 모든 사극은 ‘픽션사극’이 타당함을 주장한다. 처음부터 드라마는 픽션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판타지가 아닌 이상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드라마는 분명한 사실 관계나 역사적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역사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사건의 정황이나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하려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드라마를 보고, 드라마를 통해 얻은 인물에 대한 느낌이나 역사적인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이는 나이가 젊을수록 더 위험해진다. 역사적 판단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은 아닐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노출되는 역사적 사실부터 명확히 규명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기희경 기자/[email protected]

기황후의 3가지 죄악… 드라마 통한 미화, 위험하다

큰사진보기 ▲ 2006년에 종영된 드라마 <신돈>의 기황후(김혜리 분). ⓒ MBC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전통적인 몽골 가정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있는 몽골문화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몽골 군대의 모습.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칭기즈칸 사당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오는 10월부터 방영될 MBC월화드라마 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이 만만치 않다.드라마 제작진이 기황후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으로 묘사하겠다고 밝힌 것이 논란의 시작이다.아무리 드라마라지만 기황후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인물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설정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도 존재한다.기황후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세계 최강 몽골제국에서 궁녀로 시작해서 황후까지 올랐으니 그렇게 평가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요즘 식으로 말하면, 외국 여성이 백악관 인턴 직원에서 퍼스트레이디에 오른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기씨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33년에 공녀가 돼 몽골에 갔다. 그곳에서 궁녀가 된 그는 빼어난 미모와 학식을 바탕으로 몽골 토곤테무르칸(중국식 명칭은 혜종 황제)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 때문에 황후의 혹독한 학대를 받기도 했다.6년 뒤인 1339년, 기씨는 토곤테무르칸의 장남을 출산했다. 이 아이가 훗날 토곤테무르칸의 뒤를 이어 아유르시리다르칸(소종 황제)이 된다. 황자의 출산을 발판으로 1340년 제2황후가 된 기씨는 고려 출신 환관들의 도움에 힘입어 권력 실세가 되고, 1365년에는 제1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궁녀로 입궁한 지 26년 만에 황궁의 안방을 차지한 것이다.이후 몽골 황제의 혈통은 기황후의 핏줄로 채워졌다. 몽골제국이 중국 땅을 잃고 몽골초원으로 돌아간 뒤인 1370년부터 1402년까지의 몽골 황제들은 모두 기황후의 자손이었다. 32년 동안 등극한 다섯 명의 황제는 기황후의 아들에서 3세손까지였다.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에서 궁녀가 왕후가 된 사례는 장옥정(장희빈)뿐이다. 그런데 장옥정은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 왕궁에서 출세한 데 비해, 기황후는 고려 사람으로서 몽골 황궁에서 출세했다. 이국땅에서 외국인이라는 약점을 딛고 황후까지 되었으니, 장옥정보다 기황후가 훨씬 더 입지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만약 기황후가 인생을 그렇게 마감했다면, 그에 대한 고려인들의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외국에 나가 고려의 국위를 선양한 인물로 평가됐을지 모른다. 제작진의 설명처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으로 그를 묘사해도 무방할 것이다.하지만, 기황후는 단순히 출세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조국인 고려에 죄악을 지었다. 그는 몽골제국의 위세를 빌려 고려를 압박하고 괴롭힌 기씨 집안의 몸통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다.어떤 논문에서는 기황후가 몽골 황궁에서 음모를 꾸미고 세력확장을 도모한 행위까지 죄악으로 취급하지만, 모든 정치행위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어떤 것이 음모이고 어떤 것이 기획인지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기황후의 행적 중에서 확실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기씨 집안의 몸통이 되어 동족인 고려를 괴롭힌 부분이다. 일종의 민족반역행위라 할 수 있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첫째, 기황후는 기씨 집안을 조종해서 ‘정동행성’에 관여했다. 정동행성은 처음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 기구로 출범했지만, 나중에는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는 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물론 전적으로 고려에 간섭하기 위한 기구는 아니었지만, 이 기구가 그런 성격을 띠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와 비견될 만한 ‘고려총독부’라 할 수 있다.기황후의 후원을 받아 정동행성의 수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둘째 오빠인 기철이었다.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서도 고위직에 오른 기철은 충혜왕이 축출된 1332년 이후와 충목왕이 사망한 1348년 이후에 정동행성 수장의 직무를 대행했다.기철은 고려총독부의 성격이 있는 기관에서 수장 역할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이 정도면 명확한 친몽골파요 민족반역자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공민왕이 그를 죽인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기철이 그런 길을 걸은 것은 기황후의 전폭적 후원 덕분이었다.둘째, 기황후는 몽골 군대가 조국인 고려를 침략하도록 부추겼다. 공민왕이 반몽골(반원) 정책을 전개하자, 몽골은 고려 왕족인 덕흥군을 내세워 고려를 침략했다. 1356년의 이 침공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기황후였다. ‘최유 열전’에 따르면, 기황후가 황태자에게 고려 침공을 부추긴 일이 이 전쟁의 발단이었다.또 기황후의 조카이자 기철의 아들인 기새인첩목아는 1367년 몽골 군대를 모아 고려를 침공했다가 이성계·지용수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이 역시 기황후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몽골의 고려 침략과 연루된 기황후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킨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까?셋째, 기황후는 기씨 집안이 고려 서민들을 착취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기철 열전’에서는 이 집안의 횡포로 인해 “전국이 고통을 당했다”고 했다.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 남의 땅을 강탈하거나 유부녀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물론 기황후는 집안사람들에게 자제를 당부했다. 하지만, 기씨 집안의 횡포는 기황후의 권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그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이렇게 고려 서민들의 원성을 산 기씨 집안의 몸통인 기황후를 사극의 낭만적인 주인공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역사 기록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기황후는 단순히 몽골에 가서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에 그치지 않았다. 또 그는 단순히 매력적인 악녀에 불과하지도 않았다. 그는 집안사람들과 함께 고려를 간섭하고 침략하는 데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고려 서민들을 착취하는 데도 책임이 있었다. 그는 분명히 고려를 망가뜨리려 한 배신자였다.기황후는 개인적으로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공적으로 보면 동족의 피눈물을 이용해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을 드라마의 소재로 할 수는 있겠지만,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드라마에서는 기황후의 개인적 성공과 더불어 그의 반민족 행위가 명확히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황후’ 종영 ③] 끝내 자유롭지 못했던 역사왜곡 논란

[MBN스타 금빛나 기자]월화극 판도를 점령하며 안방극장의 사랑을 받은 ‘기황후’지만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역사왜곡 논란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고려 공녀라는 신분에서 원나라의 제1황후의 자리에 까지 오른 고려 여인 기황후의 일대기를 다룬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는 방송 전부터 역사왜곡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낳았던 작품이었다.역사왜곡 논란의 가장 핵심되는 두 가지를 꼽자면 먼저 기황후라는 인물의 엇갈린 역사적 평가와 두 번째로 고려시대 최고의 폭군 충혜왕을 영웅적인 인물로 미화시켰다는 것이었다.이중에서도 가장 도마 위에 올랐던 부분은 한순간에 충혜왕을 고려의 성군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충혜왕은 새어머니와 장모를 겁탈할 뿐 아니라 주색과 살인을 일삼는 등 각종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사다, 원에 의해 폐위된 왕이다.하지만 드라마 ‘기황후’는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을 무시한 채 원나라에 맞선 자주적 왕으로 설정, 기황후(하지원 분)와 원나라 황제 타환(지창욱 분)와 함께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그리며 많은 누리꾼의 질타를 받았었다. 방송이 되기 바로 직전까지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기황후’ 제작진들은 문제의 충혜왕 대신 가상의 고려왕 왕유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진화에 나섰다.이렇듯 초반 왕유(주진모 분)라는 캐릭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간 ‘기황후’였지만, 정작 드라마를 펼쳐보니 그가 꼭 고려의 왕이었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그 활약이 크지 않았다. 초반 기승냥과 러브라인을 그린 왕유지만, 기승냥이 황후로 황궁에 들어가고 극의 무게중심이 황실 여인들의 궁중암투와 타환과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지자, 점점 그의 활약은 주인공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두드러지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왕유의 활약에 시청자들은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않을 거면서, 시청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충혜왕, 아니 왕유를 만든 그 모르겠다”와 같은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다음으로 논란이 된 인물은 기황후 자신에게 있다. 실제 역사에 따르면 기황후가 제1황후자리에 오른 후 고려 조정은 기승냥의 친인척 관계에 있는 기씨 일가의 정치적 내정간섭을 받아왔다. 기황후가 통치한 원나라시대, 공녀를 제외한 각종 수탈을 일삼았으며,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공민왕의 움직임에 고려를 정벌하고자 군대를 일으키기도 했다.이와 관련해 지난해 10월 진행됐던 제작발표회 당시 정경순 작가는 기황후가 명과 암이 공존하는 인물이라고 인정하면서 “역사 구분이 될 수 있게끔 방송 말미 기황후의 암에 대해서 분명하게 다룰 것”이라고 전했다.하지만 그녀의 말과 달리 50회가 돼서야 겨우 황후가 된 기승냥이 기황후의 어둠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짧았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온 순간까지 기승냥은 원나라 황후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조국 고려를 사랑하는 자주적인 여인이었고, 문제의 기철일가는 등장조차 하지도 않았다.방송 이후에도 크고 작은 역사왜곡들은 존재했다. 팩션사극을 앞세운 ‘기황후’는 원나라시대 시대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현대의 타로카드의 등장은 애교고,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선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다가 병에 들어 조용히 눈을 감은 바얀 후투그를 두 얼굴의 황후로 만든 뒤 사약을 먹여 사형시키는 등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행보를 계속 지속해 왔다.한편 ‘기황후’의 후속으로 세 형제가 불행한 일로 헤어진 후 큰 형은 경찰, 둘째는 폭력 조직원, 셋째는 부유한 집에서 자란 뒤 서로를 모른 채 만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트라이앵글’이 전파를 탄다. 이범수, 김재중, 임시완, 오연수, 백진희 등이 출연하며 오는 5월 5일 첫 방송.금빛나 기자 [email protected][ⓒ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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