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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당하여 일왕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사형을 판결 받았다.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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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 나무위키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3] 또한 박열의 아내이다. 한국명은 박열의 성에 후미코를 한국어 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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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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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퍼포먼스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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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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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독립 유공자로 서훈된 …

독립운동가 박열과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혼인한 뒤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이 부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2017년 영화 ‘박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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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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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립 영웅] 가네코후미코 (프리젠터: 변영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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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가네코 후미코

  • Author: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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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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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 文子) 혹은 박문자(한국 한자: 朴文子,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이다.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에 묘가 있다.

생애 [ 편집 ]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하여 출생 신고가 되지 못해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학대당하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후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였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나, 문란한 생활을 하던 스님인 외삼촌과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집 점원으로서 노동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영향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되었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하였고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하고서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박열과 뜻을 같이하였다.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으며, 이면으로는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 의사를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다.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1]를 조직[2]하였고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당하였다.

如何ナル朝鮮人ノ思想ヨリ日本ニ對スル叛逆的氣分ヲ除キ去ル事ハ出來ナイデアリマセウ。 私ハ大正八年中朝鮮ニ居テ朝鮮ノ獨立騷擾ノ光景ヲ目擊シテ、私スラ權力ヘノ叛逆氣分ガ起リ、朝鮮ノ方ノ為サル獨立運動ヲ思フ時、他人ノ事トハ思ヒ得ヌ程ノ感激ガ胸ニ湧キマス。

그 어떤 조선인의 사상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반역적인 기분을 없앨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다이쇼 8년 중에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 소요의 광경을 목격하고 저조차 권력을 향한 반역적인 기분이 들었으며, 조선 분들이 하고 계신 독립 운동을 생각할 때면 남의 일 같지 않게 감격이 가슴에 벅차오릅니다. — 1924년 1월 23일 제4회 신문조서

그녀는 천황을 암살하려한, 소위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을 판결받았다. 며칠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으로 결혼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일본 제국 내에 시신을 거둬 줄 사람이 없어서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씨 문중의 사람이 되었다.[3] 여사의 묘는 경북 문경읍 팔영리에 조성됐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방치된 채 잊혀졌다. 그러다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현재 위치인 박열의사기념관 내로 이장하게 됐다.

사진 사건 [ 편집 ]

박열과 후미코가 같이 찍힌 사진이 감옥 밖으로 유출되었는데 정우회와 정우본당(일본어판) 등의 야당이 대역범죄인을 우대했다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와카쓰키 내각 사퇴 운동에 이용하였다. 야당은 이 사진을 인쇄 살포하여 정치 문제화 하려고 하였다.[3] 이 때문에 3일간 의회가 정지되었고 사건의 예심판사 다테마쓰는 1926년 8월 9일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11일 사표가 수리되었다.[3]

사후 [ 편집 ]

묘소는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건립된 박열의사기념관의 옆에 있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2018년 3월 1일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4]

전기로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후미코》가 있다.

한국방송의 《KBS스페셜》에서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하였다[5].

독립유공자 포상 [ 편집 ]

박열과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이 인정되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가네코후미코”. 《공훈전자사료관》.

관련 작품 [ 편집 ]

영화 《박열》 (배우:최희서)

뮤지컬 <박열> (배우: 이정화, 허혜진, 최지혜)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가네코 후미코, 日 조국에 이어 ‘후손에게도 박대 받다’

▲ 대한민국 정부가 2018년 11월 가네코 후미코 유족에게 준 건국훈장. 가네코 유족은 지난 7월 23일 보훈처에 반납하는 대신,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에 훈장을 기증했다.ⓒ김정원 기자

“저는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일본인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한다. 그때 그저 눈에 비쳤을 뿐인 사건들이 지금은 크나큰 반항의 뿌리가 되어 제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조선에서 사는 동안 보고 들은 것들 때문에 저는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조선인들의 모든 반항 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됐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일제강점기 천대받던 식민지의 남성인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1902~1974)를 도와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폭살시키려했으나 사전에 발각, 1923년 구속돼 일본 재판부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멸망과 일왕 부자 폭살의 필연성을 주장한 일본 여성으로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 유족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반납한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그의 조국에 이어 유족들까지도 끝내 그를 내치고 외면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은 최근 가네코 일본 유족들이 지난 7월 23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고 뉴데일리에 확인해줬다.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가네코 유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기념관 측은 “가네코의 일본 유족이 훈장을 반납한 것은 ‘박열의사기념관에서 훈장을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나 지난 3월 일본을 방문했던 이규상 전 부강면장(60‧전 청주시 공무원)은 “지난 3월 일본 방문 당시 유가족들이 가네코의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부담스러워했고 우리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면서 “일본에서 훈장 받은 사실이 알려지는 것 조차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

이 씨는 “가네코 유족이 ‘이 훈장을 왜 우리에게 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면서 “유족이 훈장을 부담스러워 한 것은 가네코가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폭살하려했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일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고 이런 과거의 사실이 알려질 경우 일본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훈장 반납배경을 전했다.

▲ 가네코 후미코와 아나키스트 박열의사.ⓒ박열의사기념관

◇ 가네코 유족, 건국훈장 반납

가네코는 박열을 도와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한 ‘대역죄(大逆罪)’로 일본 경찰에 검거돼 사형을 언도받은 데 이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는 꽃다운 나인(23세)에 옥중에서 순국한 날(1926년 7월 23일)인 지난 7월 23일 문경문화원에서 열린 추도식 및 기념식에서 박열의사기념관에 훈장을 반납했다.

가네코 유일한 후손인 가네코 다카시씨가 반납했다. 훈장은 후손을 대신해 가네코 후미코연구회 야마나시 회장이 지난 7월 23일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추도식 당시 후손을 대신해 전달했다. 반납이유는 ‘박열의사기념관에서 훈장을 전시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보관도 용이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했다. 앞서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순국선열의 날에 일본 한국대사관 요코하마 영사관을 통해 가네코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독립유공자들이 적국을 상대를 반일 투쟁을 벌였다면 가네코는 자신의 모국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고 재판 당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회유하고 증언을 번복하면 목숨만을 살려주겠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는 끝까지 폭탄으로 일본 왕세자를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했으며 사형 판결 당시 “만세”를 외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가네코 묘는2002년 박열의사기념관에 조성됐고 일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원들은 기일 등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 학예연구사는 “가네코에 대해 많이 연구된 것은 폭탄을 구입해서 실제 계획으로 옮기려 했다는 것은 빠져 있다. 그 부분은 ‘허무주의’ 쪽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생각해서 실제 계획을 하려는 의도 보다는 일본에 의해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집중 부각됐다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앞으로는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 진짜 의열단과의 연결을 통해 히로히토를 폭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더 밝혀지고 이 부분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 인근에 마련된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김정원 기자

◇ 가네코 유족, “건국훈장 받은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

그러나 박열의사기념관의 주장과는 달리 가네코 일본 유족들이 강력히 훈장 반납을 추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카네코의 모국에 대한 저항정신을 이어받고 부강에서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열고 일본 고향을 방문했던 이규상 전 부강면장은 “우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왜 건국훈장을 줬느냐’고 불만스러워 했다. 박열의사기념관은 가네코 유족이 훈장 반납 이유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가네코 유족에게 훈장은 줘 놓고 아무런 대책을 세워놓지 못해 일본 유족들이 자랑할 수 없었다. 지난 3월 일본을 방문, 유족을 만났지만, 우리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올해로 가네코(1926년 7월 23일 작고)가 생존했다면 93세가 되는 해다. 가네코는 관동대진때 박열 의사와 함께 경찰에 잡혀갔고 결국 옥중에서 돌아가셨다”고 설명했다.

이 전 면장은 “일본 가네코 연구회 회원들로부터 우리가 청주에서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한 날 가네코의 뜻을 기리는 모임을 가진 뒤 현수막에 참석자들의 사인을 받은 것을 일본에 가지고 갔더니, 연구회 회원들도 회합을 한 자리에서 반갑게 사인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는 이들이 가네코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서 회합을 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조선인 박열을 사랑했는가.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왜 살해하려고 했을까. 왜 박열 의사 시(詩)를 왜 좋아했을까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한국 정부가 가네코를 왜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한 것으로 미뤄 연구회원들의 관심은 우리와 차이가 있었다. 또한 훈장을 받은 유족이 아침 일찍 우리를 만나러 왔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려워했고 지금도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는다고 했다”고 전했다.

◇가네코의 부강생활‧박열과의 만남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출생한 가네코는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해 무적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10살이 돼서야 1912년 외할버지의 다섯째 딸로 호적에 올랐다. 가네코는 9살 때인 1912년 사에키 무츠 친할머니를 따라 조선(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 건너왔지만 권위주의적인 할머니와 고모의 차가운 학대, 그리고 하녀와 같은 생활을 견디다 못해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가네코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부강공립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다녔으며 두뇌가 명석해 곧잘 ‘학업‧품행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7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 이규상 전 부강면장이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가념관에서 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을 가르키고 있다.ⓒ김정원 기자

그는 부강에서 살면서 3‧1만세운동을 목격했고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식민지 조선인의 실상을 통해 일제의 비인간성을 경험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경험이 가네코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기반됐다.

가네코는 일본에서 진보적인 청년들이 많은 유라쿠정 스키야바시 이와사키 오뎅집에서 일을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녔다.

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진보적인 서적과 잡지를 탐독하며 1922년 ‘조선 청년’ 잡지 교정쇄를 보게 됐는데, 그 책에 박열의 ‘개새끼’란 시를 읽고 감동하게 된다. 박열은 일본에서 들개처럼 생활하는 것을 조금도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굴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 정열을 쏟아 붓는 청년 박열의 내면을 봤고 이어 박열과 만남과 그의 생활방식을 통해 자기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됐다.

가네코는 일본에서 활동한 박열의 시에 매료돼 그를 좋아하게 됐고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박열의 독립운동 정신에 매료돼 모국의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 폭살을 함께 계획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이 실패한 가네코는 옥중에서도 일본 천황제를 부정하고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25일 동경 대심원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수고했군, 재판장. 내 몸이야 너희들 마음대로 하지만 내 정신이야 어떨 수 없겠지”하며 재판장을 조롱했고,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일본 정부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 한 뒤 10일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천황의 칙명(勅命)을 발표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대심원의 마지막 공판을 앞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박열과 옥중 결혼식을 가진데 이어 1926년 3월 23일 우시고메 구역소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와 이상욱 세종시 부강면장, 이규상 전 청원군 부용면장 등이 지난해 11월 28일 청주 한 음식점에서 가네코 후미코 독립유공자 서훈을 기리는 모임을 가진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김정원기자

◇ 가네코 후미코 日 ‘천황제 부정’

일본 재판기록에는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 폭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사형까지 언도받은 그는 “산다는 것은 단지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저 살아간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행위가 있고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을 때, 그 행위가 비록 육체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고 긍정”이라며 히로히토를 폭살하려했던 자신의 행동을 옳았다는 것을 정당화했다.

가네코는 당시 확고한 천황제를 부정했다.

그는 “나는 과거에 대역죄인리라고 불려 마땅한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한 적도 있다. 아직도 나의 그러한 언동을 반성할 생각이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나 자산에 대해서조차 없다”며 사죄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 가네코가 살았던 부강에 기념관 건립 추진

이규상 전 부강면장은 “세종시에서 가장 떠받았던 역사적인 인물은 ‘임난수(최영장군 부관)’ 정도에 불과하다. 문경시에는 역사적인 인물로 박열 의사 한 명에 불과하며 세종시에서도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가네코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박열의사기념관 규모로 가네코의 기념관을 건립하려면 20~30억원이 필요하다. 가네코가 살았던 부강 집터는 800여 평으로 현재 평당 150만원 호가한다. 현재 소유자가 집터를 매각한다면 기 곳에 가네코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그렇지 않다면 ‘홍판서 집’ 옆에 600여 평의 부지가 있다”고 했다.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60)는 “최근 일본이 한국에 대해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등 경제침탈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가네코 일제 강점기 자유·독립정신(천황제‧군국주의)’을 이어받기 위해 세종시에 가네코 후미코 기념관을 짓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가 살았던 터에 기념관을 짓지 못한다면 건립할 터(부지)를 희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세종시가 가네코가 부강에서 살면서 3‧1운동을 목격한 것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면서 “이런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보존하고 후세에 전해야 할 정부와 세종시가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이규상 전 부강면장과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가 지난 3월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사진 이규상 전 부강면장

그러면서 “세종시는 역사적으로 가네코의 역할과 역사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이규상 전 부강면장과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 등 30여명은 민간차원에서 가네코를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2010년 부강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생활 학술대회’에 이어 지난 3월 31일 부강 홍판서 집에서 제례를 봉행했다.

한편 가네코는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묘역과 기념비를 세웠다가 2003년 박열의사기념관이 조성된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내에 이장해 두 사람이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독립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퍼포먼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재판과 ‘괴사진’ 사건 등 그 전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사건은 종종 보도가 금지되었지만, 식민지조선에서 그들에 대한 기사는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드라마틱하게 이어졌다. 본고는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이 사건이 기사화된 방식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살펴 사건이 전달·수용된 양상과 의미를 밝혔다. 퍼포먼스의 주인공답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구속된 이후 형무소 독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형무소 바깥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자’였다. 그들의 ‘행동’은 기민하고 파격적이었다. 1926년 박열은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재판 방식을 조율했고, 그래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예복을 입고 일본 재판정에 등장해 조선말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대역 사건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재판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5년 5월 예심 조사실에서 앞뒤로 밀착해 앉은 자세로 괴사진을 찍었고, 1926년 7월 이 사진이 괴문서와 함께 신문에 실리면서 사법부와 내각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불온한 사진을 남겨, 자신들을 가두고 재판한 일본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의 특성에 따라 이들의 행동은 특별하게 전달되고 수용되었다. 우선 보도 금지 때문에 관련 보도가 간헐적으로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이 플롯화된 채 알려져 긴장감이 증가했고, 조선인 또는 무산계층이 연루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둘째, 재판 전후의 진행 과정을 공연 관람기처럼 기사화하며 재판극을 경험하도록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상과 움직임,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밝히고, 그들과 재판관이 주고받는 문답을 대본처럼 기술하였다. 셋째, 재판부 판사의 ‘담화’를 되받아 쓴 ‘사설’과 괴사진의 이야기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사를 통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논란과 분란을 문제적으로 드러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조화가 깨진 사태를 보여주는 사회적 드라마였다. 본 연구는 이 사회적 드라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한 역할과 이 사회적 드라마가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의미를 밝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행위자로서 이 드라마를 직간접적으로 기획․추진했으며, 일제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당당한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수행했다.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illuminate the Park Yeol(朴烈)·Kaneko Humiko(金子文子) Case from the perspective of performance, by analyzing newspapers published in Colonial Korea. The Park Yeol · Kaneko Humiko Case include the High Treason Incident(大逆事件) case and the mysterious photo(怪寫眞) case that occurred in Tokyo in Imperial Japan from 1923 to 1926. Even though Park Yeol · Kaneko Humiko were individually imprisoned during this period, they proceeded to act shrewdly and preposterously as performers. First, they made the trial itself into an astonishing case by donning traditional Korean clothes and insisting on using the Korean language in Japanese Imperial Court. Second, they caused the judge in charge to accidentally take the so-called ‘mysterious photo,’ which later led to the collapse of the Japanese cabinet. The newspapers published in Colonial Korea served as unique stage on which Park Yeol and Kaneko Humiko performed. The newspaper articles reported on the public trials as if it were a drama, describing their clothes, look, and dialogue in public court. The news about them was published not as it occurred but in a plotted sequence because of a press ban, consequentially building suspense among readers. Meanwhile, the Korean newspaper editorials pointed out the injustice of the High Treason Incident, breaking down the Japanese judge’s opinion. The Park Yeol·Kaneko Humiko Case was a social drama that revealed the disharmony that led to the breakdown of Taisho Democracy and imprinting national resistance in Japan as well as in Korea.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의 고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며,

일본제국에 항거했던 한 아나키스트의 삶과 죽음

가네코 후미코는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의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이며 옥중에서 결혼한 부인이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옥중에서 자살이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삶과 사상 투쟁은 한 편의 ‘비극적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무적자(無籍者)로서, 여자로서, 나아가 밑바닥 삶을 살면서 자기의 뜻과 의지를 무시당한 아픔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식민지 조선은 확대된 자아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사람은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대학살을 무마하려고 일제가 조작한 ‘천황폭살사건’으로 법정에 서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식민지 청년 박열과의 사랑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가네코는 자기의 사상을 당당히 밝히는 법정 투쟁으로 일본 근대사상사에 기억되고 있다.

이 책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삶을 그린 평전으로 역사학자인 저자 야마다 쇼지는 재판 기록과 후미코의 자서전, 당대의 신문과 잡지 등 방대한 자료들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재구성한다. 식민지하의 암울했던 시기를 살아간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사상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 [박열]을 만들면서 참조를 했다고 인터뷰 때마다 언급하여 화제가 된 책이다.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Kaneko Fumiko)의 꿈(1903~1926)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이다.”

I chose to give my life for the independence of Joseon.

경상북도 문경에는 독립운동가 박열의사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이 있는 공원에는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박열의 무덤이 아닙니다.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입니 다. 후미코는 어떻게 일본여성으로서 조선인의 아내가 되어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부모가 후미 코의 양육을 거부하여 그녀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친척집에 맡겨졌습니다. 9살이 되던 1912년에는 충청북도 청원에 살고 있는 고모의 양녀가 되어 조선에서 7년동안 생활했으나, 이 기간도 하녀와 같은 학대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후에 박열을 비롯한 한국독립운동가 들을 만나 함께 활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있는 동안 그녀는 일제에 핍박 받는 한국 인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인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이듬해 도쿄로 갔습니다. 그녀는 신문팔이,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 트들과 교류하며 여러 사상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1922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후미코는 박열과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항일 단체인 ‘불령사 ’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가을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불령사가 일왕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날조했고, 1926년 3월 박열과 후미 코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4개월 뒤 감옥에서 사망했습 니다. 감옥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때 그녀는 일왕의 은사장을 찢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가네코 후미코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영화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추모하려 문경에 모인 일본인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은 주인공 박열(이제훈 분)보다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인 박열( (1902~1974)품에 안겨 환하게 웃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그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의 인상적인 일본어 액센트가 섞인 한국어 발음. 그리고 옥중 사형선고를 받는 과정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당당한 모습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경북 문경의 박열 의사 기념관 안에 있다.

가네코 여사 추도식 문경서 열려

여사 받은 건국훈장 문경에 기증

23일 오전 경북 문경시 마성면 박열의사기념관. 60~70대 일본인 10여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기념관 안에 있는 한 묘지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준비한 향도 피웠다. 일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 오자와 류히치 이사 등 연구회 회원과 관계자들이다. 바로 영화 박열에 나온 박열(1902~1974)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묘를 찾아 추도한 것이다.

여사의 묘비에는 ‘(재판에서) 추호의 동요 없이 천황유해론, 약소민족 해방, 한국 독립의 정당성, 인간의 자유를 시종여일하게 주장했다. 사형선고를 받자 여사는 만세를 외쳤다’고 쓰여 있다.

7월 23일은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옥사한 날이다. 여사는 1923년 박열 의사와 함께 일본 왕세자 결혼식 폭탄 테러를 모의했다는 ‘대역죄’로 기소됐다. 어린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여사는 식민지 한국인 처지에 공감, 박문자란 필명으로 활동하며 박열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등에 저항했다. 법정에서 여사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고 증언했다.

1926년 3월 23일 박 의사와 옥중 결혼하고 이틀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결국 옥사했다. 그는 남편 박열 의사 고향인 문경에 안장됐다. 박열의사기념관 측은 2003년 현재 기념관 안으로 여사 묘를 이장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번갈아 가며 추도식을 매년 열고 있다. 한번은 문경에서, 한번은 여사 외가가 있던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에서다.

추도식에 참석한 연구회 회원들은 건국훈장을 일본에서 가져와 박열의사기념관 측에 기증했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여사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이다. 건국훈장을 받는 일본인으로는 독립 열사들을 많이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2004년 독립유공자 포상)에 이어 두 번째다. 훈장은 그동안 일본의 여사 친척이 보관해왔다. 문경시 관계자는 “냉랭한 한일 관계 때문인지, 과거 독립운동에 목숨 바쳐 참여한 일본인 여성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한 박열 의사는 22년 2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그는 독립투사,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 사람)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박열 의사는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불렀다고 한다. 1922년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실린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통해서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 시는 권력을 향한 박열 의사의 저항 정신을 잘 나타낸다.

박열과 함께 일제에 맞섰던 여사 역시 박열의 시 때문에 그와 함께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사는 시를 읽고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경=김윤호 기자

[email protected]

박열 의사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독립 유공자로 서훈된 이유

독립운동가 박열과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혼인한 뒤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이 부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2017년 영화 ‘박열’의 포스터. 주연배우 이제훈과 최희서가 실제 사진을 그대로 재현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박열의사기념관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가네코 여사 서훈 신청을 담당했던 김진웅씨가 13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진웅씨 제공

가네코 여사가 쓴 글. 일본 입장에서 민감한 부분이 검은색 펜으로 지워져 있다. 김진웅씨 제공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일본 국적의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여사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의 부인인 가네코 여사는 식민지 조선의 처지에 공감하며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남편 박 의사와 함께 일왕 부자 폭살을 목적으로 폭탄 반입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옥살이하던 중 1926년 옥중에서 23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92년 만에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박열의사기념관은 지난해 4월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로 가네코 여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졌던 때다. 보훈처는 2008년 자체 발굴을 통해 보훈 심사를 진행하다 결국 보류했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던 가네코 여사의 활동을 온전한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박열의사기념관에서 포상 신청 실무 작업을 주도한 것은 당시 학예사로 근무하던 김진웅(30)씨였다. 2016년 초부터 가네코 여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김씨는 지난해 2월 가네코 여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마침 서훈 신청을 준비하던 기념관에 학예사로 입사했다.김씨는 치밀하게 서훈 신청을 준비했다. 그동안 확보한 자료 원문과 번역본을 하나씩 첨부한 뒤 독립운동과 관련된 부분에 모두 밑줄을 그어 표시했다. 가네코 여사 개인 신상자료나 재판기록은 물론이고 과거 신문기사와 관련 인사들 회고록까지 모두 모았다. 준비한 서류만 A4 용지 1000장 분량이었다. 김씨는 “과거 심사가 보류됐다는 얘기를 들어서 혹시나 서훈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며 “그동안 연구한 자료를 모두 첨부한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정리했다”고 말했다.100년 전, 그것도 일본인의 한국 독립운동 흔적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씨는 가네코 여사가 단순한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것을 증명해내야 했다. 가네코 여사가 직접 발간했던 잡지와 1972년 일본에서 출판된 가네코 여사 재판기록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일본이 가네코 여사의 글을 검열하면서 민감한 부분을 검은색 펜으로 덧칠했는데, 김씨가 직접 돋보기를 들고 덧칠된 글자를 식별해내기도 했다. ‘조선○○기념일’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총탄’ ‘만세’ ‘검속자’ 등의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김씨는 “글의 작성일이 1923년 3월 2일이고, 확인된 단어들을 고려하면 3·1절을 기념해 조선인들의 행동을 고양한 글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보훈처 관계자는 “기념관에서 제출한 서류에 가네코 여사의 제적등본 등 구하기 어려운 개인 신상에 관한 자료가 여럿 포함돼 있었다. 기존 자료에다 새로운 자료를 참고해 의미 있는 심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김씨는 왜 이렇게까지 일본인의 서훈에 몰두했을까. 김씨는 “외국인이어서도 아니고 여자여서도 아니다.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역사적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며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네코 여사의 말과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현재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씨는 가네코 여사를 통해 한·일 양국의 연대를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일본 사람을 악의 존재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인들을 돕고 같이 활동한 일본인도 많았다”며 “앞으로 재일조선인들의 독립운동과 그 과정에서 함께 활동한 일본인들의 관계를 연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김판 기자 [email protected]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후미코의 불꽃수기 – 교보문고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아플만큼 아팠고 외로울만큼 외로웠던 23년의 짧은 생을 모국의 한 교도소에서 스스로 마감하고 그녀의 인생에서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박열의사의 기념공원(경북 문경) 에서 영면하고 있다.‘태어났다’ 가 의미하는 어떤 축복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나서 오히려 세상에 ‘버려졌다’ 고 해도 좋을끔찍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휘몰아 치게 된다.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 못해 다니고 싶어 하던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9세 무렵에야외할아버지의 딸로 입적이 되어 1912년 가을부터 7년간을 조선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고 성장한다.일본으로 되돌아 가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어린 시절 자살을 결심했다가 느꼈던,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견지하고 목전에 펼쳐지는 참담한 현실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힘든 날들을 이겨 나간다.세상을 세상답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자신을 기록하고 동시에 말소한다고 결연하게 밝힌그녀의 수기는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 세상을 좀더 좋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읽어주기를희망하며 간토대지진으로 억울하게 투옥되어 1925년부터 쓰기 시작한 수기를 우리들 앞에 소중하게 남겨두었다.우리들은 모두 누구의 부모이거나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가?가족도 친척도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쥐어주지 않았다.모든 것을 스스로 구하고 힘들게 찾아야 했던 그녀가 스스로 선택했던 평생의 동지 박열은운명이 그녀에게 던져준 유일한 행운이었을까? 사형선고를 받기 이틀 전에 혼인신고까지 마쳤다.사형선고를 하는 순간 ‘만세’를 외쳤고 열흘 후 천황으로부터 온 감형의 은사장을 찢어버리는그녀는 그로부터 석달 뒤,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다.우리는 이제 그녀가 던졌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화두에나름대로 답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녀가 내린 답변은 이랬다.“나 스스로 말하지 못하겠다. 마음 있는 독자는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주리라.”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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