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20절 설교 | 임영수 목사의 말씀묵상 ‘갈라디아서 2장 20절’|말씀 위에 머무는 삶 최근 답변 17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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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 목사의 말씀묵상 ‘갈라디아서 2장 20절’
정체성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CBSTV 말씀 위에 머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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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 목사의 말씀묵상 '갈라디아서 2장 20절'|말씀 위에 머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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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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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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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제목 : 내 삶이 십자가를 뒷전에 둘때 고장난다

본문 : 갈라디아서 2:20

프로 운동 선수들은 항상 잘 하는 게 아닙니다. 왜 이러지 할 정도로 안 풀릴때가 많습니다 .소위 슬럼프에 빠질때도 있다. 물론 슬럼프는 운동선수에게만 오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온다. 그 대상이 비지니스 맨, 직장인, 일반인 할 것 없이 다 겪는다.

그러면 왜 자꾸 슬럼프에 빠질까?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운동선수 들이 난 잘하니까.. 연습은 안해도 돼 지뭐..라고 교만한 생각을 가질 때에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집중하지 못하고 딴 것에 신경쓸때에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불평 불만을 자주 내뱉는다. 뭔가 못 마땅한 게 많다.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늘 걱정한다. 크게 보면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슬럼프에 빠진다.

삶이 힘들수록 해결 방법은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분노가 치밀지만 참고 또 참으면 얼마나 좋은 결과가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시 십자가를 붙들때에 다시금 깨닫는 것이 뭘까요?

첫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느니.. 나의 정체성은 십자가에 죽은 나다. 내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슬럼프의 원인을 위에서 크게 불평 비교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는 한 이 세가지에 의해서 괴롭고 두렵고 불안할 뿐입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들 때에 우리는 이런 쓸모없는 낭비를 줄 일 수 있습니다 .

십자가는 생생하게 나를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내가 누구인지 자기 인식이 분명해 집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설때에 우리는 영적 질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질서라는 말은 우선순위 입니다. 내가 중심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중심이냐 입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면 갈수록 내가 얼마나 내 고집대로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나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나를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

둘째,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라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깨닫는 것은? 내 안에 주인이 나였음을 알게 한다.

내 안에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다시 십자가 앞에 올 때에 파노라마처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주 분명하게 본다.

십자가가 나의 삶에서 뒷전으로 밀리면 어떻게 될까? 자아는 세상에 현혹된다. 겉으로는 믿음이라는 허울속에 내 평판만 생각한다. 나의 허세, 생색, 자기 과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이 될 때에 아름다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흔들렸던 영적 질서를 든든히 세워준다

십자가에서 멀어진 자아에서 십자가로 가까워져야 한다.그래서 빌 2:3-4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무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십자가는 나를 보게도 하지만 십자가는 나를 다시금 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됩니다 . 반면에 십자가를 뒷전에 두면 둘수록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더 약해질 뿐이다.

자신들의 부족한 약점들이 많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들고 살 때에 강해 진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따라 조석지변으로 변한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은 철저한 상황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이동이다.

오직 예수를 방향 삼고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기를 갖고 나아간다.

마지막,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때에 지금처럼 살 지 않는다.

갈 2:20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믿으면서도 습관적인 옛 성품을 드러낸다. 더 이상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매 순간 마다..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 내 안에 사는 이는 그리스도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을 매사에 인정하며 산다. 십자가 아래 서면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법을 깨닫는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낭비하는 삶은 믿음이 없을 때에 자주 나타난다.

믿음이 없다 보니까 자꾸 슬럼프에 빠진다. 불평, 걱정, 비교로 인해 삶이 행복할 수 없다.어느새 세상에 마음이 젖어 있다. 십자가를 붙잡고 살자. 그러면 더 이상 낭비하지 않는 삶에 집중할 수 있다. 십자가는 나를 거품과 뻥튀기 인생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십자가로 돌아올때에 나의 삶은 예수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충만히 경험할 것입니다.

다시 십자가 앞에 서 보라.

짧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된다. 믿음이 없어 삶을 낭비하며 살아서는 안된다. 세상에 빠져 살면 잘 사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면이 고장날 뿐이다. 이걸 알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확신하는 자는 내가 내 마음대로 살지 않는다. 매 순간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이제 이후로는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려고 합니까?

매일 이런 기도를 드려요..아무도 마지막 날에 삶을 낭비했습니다.하지 않게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잘 사는 삶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다. 바른 인생이다.

내 자아가 세상에 빠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뒷전에 두고 있지는 않는지 .. 깊이 묵상해 보자. 길이 아닌 길을 자꾸 가려고 하면 뭐만 남을까? 꼬이는 일만 볼 것입니다 .

내가 왜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다른 것으로는 제대로 보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분명하게 자신을 청진기로 호흡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상에 무너졌나요..십자가로 다시 일어서자.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자.’그리고 앞으로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자.

바울은 다시 십자가 앞에 선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이 죽는다. 날마다죽노라… 내가 그리스도 앞에 죽을 때에 내가 산다.

왜 나의 삶이 그동안 고달픈 인생이었는지.. 십자가 앞에 서니까 답을 얻는다. 십자가를 뒷전에 두고 살수록 자아는 병들 수 밖에 없다. 고장 날 수 밖에 없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오라

내 안에 가득찼던 욕심들 .. 이제 다시 버려라.

내 안을 텅비게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을

다스리게 하라.

그리스도가 경영하는 삶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다시 삶이 정상회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추구해 가시는 오늘 하루가 되면 어떨까!!

신앙이란?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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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절 (갈라디아서 2:20 / 갈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자신의 복과 유익을 위해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하나님만 섬기고 살도록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사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늘에 소속된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않습니다. (고전 1:2)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을 자신의 구원과 복을 위해 교회를 다니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종교적 어떤 행위들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주일날 외에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이웃들과 더불어 일을 하고 장사를 하고 돈을 벌며 함께 사는 것은 신앙생활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교회에 가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또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고 선교와 구제 등 교회의 모든 일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모든 일에 열심히 봉사하면 자신은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며, 그렇지 못할 경우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을 합니다.

또 생각하기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예수를 영접함으로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고, 그다음 모든 신앙생활은 자신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위해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배워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과 함께 더불어 함께 밥 먹고, 함께 잠자고,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매일을 같이 사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살듯이 신자는 주님께 꼭 붙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과 자신의 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를 통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지, 주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결코 아니고, 신앙의 본질을 놓쳐버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이란?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많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 6:28-29)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여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를 보내주신 것을 언약으로 주시고, 그 언약을 따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신 그 십자가의 새 언약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값없이 주신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나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자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내 이름표를 달고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죽은 자로 산다는 것을 믿는 표시가 바로 우리의 세례인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로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롬 6:3-4)

그리고 바울 사도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이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부활)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5)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지금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임을 믿는 것, 이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눅14:27)

죽은 자가 무슨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소망을 두고 살겠습니까?

내가 아직 죽지 않했기에 남들보다 더 편하게 더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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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규의 온새기&월새기

갈라디아서 2장 20-21절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은혜만 있으면 다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21절)

(알림) 온새기 월요일말씀과 홈페이지 주일설교의 차이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발췌해서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로 보내는 날입니다.

오늘은 어제 주일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주일설교 100% 원문을 보기를 원하면 본 홈페이지 ‘주일설교’ 란에서 보시면 됩니다

가끔 신실한 성도들에게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려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보다 ‘은혜 받는 사람’을 통해 더욱 영광을 받으십니다.일도 은혜를 받고 해야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자기 힘으로 다 하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일꾼을 찾아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을 사람을 찾아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많이 받고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하나님이 더욱 영광을 받으십니다.하나님은 사랑과 감사가 담기지 않은 일로는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순교도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할 때 행복을 노래하며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하나님! 이 원수를 갚아주소서!”라고 분노하며 죽으면 그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고난 중에도 범사에 감사하고 범사에 행복해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매년 입시철만 되면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판명 납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녀가 대학에 붙으면 붙은 대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삽니다.어느 날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업이 망했어요. 이젠 인생 끝장났어요.” 그러나 사업이 끝장난 것은 사업이 끝장난 것이지 인생이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최종목표는 ‘사업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사업하다 실패하면 그때도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그의 미래는 더욱 찬란할 것입니다. 사업이나 일보다 은혜가 중요합니다.옛날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가끔 신학생들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에서 사역을 돕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학생들을 다 환영했지만 사역을 목적으로 온 학생들은 꾸준히 출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올 때는 좋았지만 갈 때는 부작용과 상처가 컸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중에는 신학생들이 사역을 돕겠다고 교회에 오겠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교회에 오려면 사역을 위해 오지 말고 은혜 받으러 와!”일보다 은혜가 우선입니다. 교회는 일하러 오는 곳 이전에 은혜 받으러 오는 곳입니다. 일은 은혜 받은 후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 일손이 부족해서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보다 일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요새는 교회마다 돈 때문에 시험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교회출석의 목표가 되어도 안 되고 또한 교회에서는 돈 자랑을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돈 자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빌딩을 소유했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도봉산의 큰 바위덩어리 하나만도 못한 빌딩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특별히 3가지 자랑이 없어야 합니다. 첫째는 영성자랑이고, 둘째는 돈 자랑이고, 셋째는 봉사 자랑입니다.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통해 영광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노래하며 범사에 감사할 때 더욱 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 받을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본문 20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은 십자가 안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어야 진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가 최종목적지가 아니기에 광야에서 자꾸만 애굽을 바라보지 말고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속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광야 백성에게는 잠깐의 만족만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기뻐하다 슬퍼하다 40년을 보냈습니다. 왜 그렇게 변덕스럽게 살았습니까? 몸은 애굽을 떠났지만 수시로 애굽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가나안에 들어가야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그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가나안의 행복을 못 누리고 광야에서 배회합니까? 애굽의 고기 맛을 못 잊기 때문입니다.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여러분! 믿으면 부자 됩니다.” 물론 잘 믿으면 부자가 될 가능성은 커집니다. 그러나 부자 되는 것이 지상목표는 아닙니다. 그처럼 믿음을 내세워 애굽 것만 들춰내면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성도는 광야의 만나로 만족하지 말고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을 먹어야 합니다. 만나는 광야 백성이 먹는 것으로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그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 예배 때 만나를 배급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서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영적인 공복감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서십시오. 자꾸만 세상을 돌아보면 인생낭비가 심해집니다.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되었으면 옛사랑을 깨끗이 잊고 현재 배우자에게 몸과 마음을 확 주어야 합니다.어떤 여성은 결혼 전에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잡한 상황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혼 전 사정을 잘 아는 친구가 물었습니다. “너 대단하다. 어떻게 과거의 상처를 잊고 그렇게 잘 사니?” 그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이미 베린 몸이잖아. 돌이킬 수 없으면 마음을 확 주고 살아야지. 그렇게 살아보니까 현재 남편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그처럼 예수님께 마음을 확 주십시오. 몸은 예수님께 왔어도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있으면 복된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은혜생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성이 풍부해서 말씀을 듣고 눈물도 잘 흘리지만 눈물이 그치면 금방 현실을 보고 탄식합니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사나요?” 그렇게 기뻐하다 탄식하다 하면서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으면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그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서야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예수님은 감정적인 동정의 눈물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질 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는 승리와 평안의 원천이기에 동정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십자가의 고백을 가지고 살았기에 어떤 고난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십자가 안에서 행복을 노래하며 사십시오.본문 20절 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길을 찾아 헤매는데 진정한 축복의 길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체질화시키는 삶에 있습니다.20년 전에 미국에서 귀국할 때 신학교 1년 선배가 귀국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이 전도사님! 한국에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은데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합니까? 미국에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일전에 1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분은 그 전까지 한국에 왜 그렇게 초대형 교회가 많은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그분이 한국을 방문해서 8월 초 휴가철에 어디로 가는데 2시간 거리를 13시간 걸렸습니다. 너무 길이 막하니까 도로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 앞의 어떤 논두렁길로 한 자동차가 대담하게 들어서서 막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차들도 차머리를 들이밀고 그 길로 몰려서 얼마 후에는 그 길도 곧 막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비로소 대형교회의 생성원인을 깨달은 것입니다.우리나라는 지금 여러 방면에서 길이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길이 조금이라도 났다고 소문나면 사람들이 그리로 왕창 몰립니다. 교회도 작은 논두렁길이라도 열어주면 왕창 몰려서 대형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결국 세계 최대의 교회가 우리나라에 많다는 것이 자랑만은 아닙니다. 그 말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길이 막힌 사회라는 뜻도 됩니다.왜 그처럼 길이 막혔습니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불신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생각지 않은 곳에서 크게 길이 막힙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한건의 자동차 사고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인한 차 사고가 수많은 사람들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그처럼 한 사람의 불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길이 막힙니다. 게다가 서로 믿지 못하고 편법으로 남을 밟고 올라가려니까 더욱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옛날에 왜 공무원들의 진급이 힘들었습니까? 밑에서 위로 차근차근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뜻에 따라 갑자기 위로 투하되는 낙하산 부대 때문입니다. 공무원들은 1급에서 9급까지 직급이 있어서 1급 자리가 하나 비면 이론적으로는 최대한 8명의 연쇄 승진 여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낙하산 타고 내려와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8명의 승진 후보자의 승진 길이 막힙니다. 얼마나 기막힌 현실입니까?그런 낙하신 부대에 짓밟힌 한 공무원에게 어느 날 누군가 물었습니다. “요즘 잘 지내세요?” 그 질문에 그가 이렇게 역설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미치지 않았어요.” 참고 지내자니 너무 억울하고 사표를 내자니 처자식이 웁니다. 그래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된 것입니다. 그처럼 불신과 편법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을 막습니다.어느 날, 한 명문대출신 청년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속한 작은 부서에서도 직원들 사이에 험담과 권모술수가 판쳤습니다. 도대체 상식과 원칙이 없는 것을 보고 그가 금방 깨달았습니다. “이 사회는 정상적인 길은 없구나. 어떻게 살아남아 출세할 수 있을까? 손을 잘 비벼야 하나? 허리를 잘 굽혀야 하나? 뇌물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야 하나?”그때부터 요령을 피우며 논두렁길로 질러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 엉켜버립니다. 신호등이 고장 난 곳에서 서로 먼저 가려다가 얽혀서 아무도 못 나가는 상황이 회사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일에 대한 무슨 보람과 소명이 생기겠습니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불신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길을 막습니다.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좁은 진리의 길로 가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처음만 좁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뜻 안에서 좁은 길로 가면 점점 그 길이 넓어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길이 없어집니다. 사방이 다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단이 기뻐하는 길은 처음에는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찾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길이 좁아지다가 나중에는 꽉 막힌 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담을 곳을 선택할 때는 ‘작아질 큰 곳’을 선택하지 말고 ‘커질 작은 곳’을 선택하십시오.가끔 강남의 호텔에 가보면 늙은 일본 관광객과 젊은 한국 여자가 같이 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20대 여성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태연하게 같이 다닙니다. 얼굴은 아름답고 몸에는 고가 사치품도 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걸친 고가의 사치품은 인격의 싼 티만 부각시킬 뿐입니다. 그래도 현재의 모습만 보면 꽤 화려합니다. 문제는 미래입니다.5년 후에 그 여성들은 어떻게 될까요? 삶의 반경이 상당히 좁아져 있을 것입니다. 10년 후에는 삶의 반경이 더욱 좁아져 있을 것이고, 15년 후에는 삶이 더욱 절망적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불신의 길은 시간이 갈수록 좁아지지만 믿음의 길은 시간이 갈수록 넓어집니다. 이제 예수님을 꼭 붙잡고 믿음 안에서 사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믿음은 결코 자신의 삶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율법주의를 경고한 말씀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결국 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빠진 인본주의입니다.그런 인본적인 생각을 가지면 예수님을 믿어도 문제가 많습니다. 자기 의와 자랑 때문에 하나님의 진국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라는 의식이 강하면 진짜 은혜와 축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어도 “내가 잘해서! 내가 똑똑해서!”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철저히 버리십시오. 그래서 은밀한 헌신을 많이 훈련하고 체질화시켜야 합니다.습관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자기를 나타내려는 과거의 본능적인 습관이 모습을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느새 율법주의가 삶 속에 파고 들어와 참된 믿음을 방해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왜 영어를 못합니까? 밖에서는 열심히 영어를 써도 집에 돌아오면 편하게 다시 한국말을 쓰니까 영어가 습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니라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가 점점 자기를 내세우려는 본능이 작동하면 어느새 행위가 있어야 의롭게 된다고 착각합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목적은 현재를 토대로 세워도 방법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옛 것의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우상 숭배하던 사람이 회개하면 그 우상숭배 하던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어떤 사람은 예수 믿기 전에 중요한 일만 있으면 점을 치러 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점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줄 알고 그것을 버렸지만 점점 옛날의 점치는 습관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흔히 ‘예수점’이라고 말하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또한 한때 무속인을 섬기던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을 환각적인 무아지경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처럼 사람은 본능적으로 과거로 복귀하려는 습관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은혜의 삶에서 이탈될 수 있습니다.그처럼 외적인 행위와 현상에 마음을 잘 빼앗기는 율법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서 처음에는 은혜 가운데 지내다가 점점 행위와 현상을 따르는 본능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헛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마십시오. 성도다운 행위와 기적적인 현상은 은혜 받은 자가 은혜를 앞세워서 살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추구하고 많이 받으십시오. 진짜 능력 있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됩니다.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를 못 잡고 지친 몸으로 빈 배를 끌고 오자 예수님은 그의 빈 배에 ‘고기’를 채워주시기 전에 ‘말씀’을 채워주셨습니다. ‘물질이 채워지는 것’보다 ‘은혜가 채워지는 것’이 먼저입니다.요한 3서 2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에게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먼저 은혜가 있어야 범사가 잘 되고 건강도 찾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질은 많아도 은혜가 없는 사람보다 물질은 없어도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은 많은데 그 영혼은 얼마나 파리하고 창백합니까? 그처럼 세상 것이 아무리 넘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가끔 멋지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성공했어요?” 그러면 진짜 행복한 성공자들은 거의 유사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은 은혜 받을 자격이 없고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그런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은혜를 앞세우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짜 성공자입니다.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지난 세월에 어떻게 수많은 목회의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잘 지내왔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가 강력하게 떠올랐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몰라도 아마 신학교 때부터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부터 극심한 어려움을 만나면 저의 입에서는 자동반사적으로 이런 세 마디 말이 고백처럼 나왔습니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까 그 세 단어의 고백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수많은 삶의 위기를 잘 극복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한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열심히 공들인 사업이 망해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죽을병에 걸렸어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엄청난 배신의 상처를 당해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지어는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응답이 180도 반대로 나타나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그 고백을 체질화시키십시오. 그 고백이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고 그 고백이 들려지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물꼬도 급속히 트일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를 가장 멋진 인생으로 이끌 것입니다.어느 날, 한 목사님이 교회 사무원에게 설교 제목을 알려주었습니다. 제목은 ‘은혜’였습니다. 그러자 사무원이 주보를 만들다가 확인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목이 정말 ‘은혜’ 딱 두 글자입니까?” 설교 제목이 너무 간단해서 혹시 전달과정에 실수가 없었는가 해서 물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은혜 딱 두 글자면 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맞아! 은혜만 있으면 다 되지.” 그 뒤로부터 그녀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은혜만 있으면 다 됩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많이 받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받아도 부작용이 없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삶이 풍성해지고 누구보다 멋진 성공자가 됩니다. 항상 은혜를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이미 십자가 안에서 큰 은혜를 받은 존재로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처럼 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갈, 2장 20절을 붙잡으라 (갈 2:20)

갈, 2장 20절을 붙잡으라 (갈 2:20)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미국 인디애나 주(州) 해먼드 제일침례교회에서 1959년 어느 주일 누군가가 강단의 설교자에게 권총을 발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대각성운동의 기수, 사도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설교가, 가슴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 바울을 닮은 사람, 미국의 보물 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23년 동안 시무했던 노스햄턴교회에서 쫓겨납니다. 왜 쫓겨났을까요?

해먼드 제일침례교회의 총기사건은 잭 하일스(Dr. Jack Hyles) 목사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강단에서 ‘죄’를 외쳤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래서 듣다 못한 교인이 강단을 향하여 총구를 겨눈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이 ‘죄’에 대한 설교를 멈추지 않아서 교회는 하는 수 없이 방탄유리로 설교자를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가 쫓겨난 이유도 동일했습니다. 저들은 총알이 날아오고, 쫓겨나는 상황 앞에서도 죄를 외치고, 회개를 선포하며, 온전한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상은 어떠합니까? 이런저런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일차적으로는 강단에서 찾아야 합니다. 메시지가 과연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혹시 목사는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에 회중들 또한 부담스런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세겹줄 특새’를 앞두고 ‘기도응답과 복’에 대한 다섯 편의 설교를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 마음을 강하게 흔드셨습니다. 정말 이번기회에 들려줘야 할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라는 강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펼친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었고, 다섯 시간에 걸쳐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아니하신 분들이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강단에 섰던 잭 하일스, 쫓겨나면서도 반복하여 외쳤던 요나단 에드워즈를 떠올리며,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전하기 위해 섰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핵심이 2장 20절입니다. 이 한 구절이 성경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쓴 동기는 저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갈 1:6). 초대교회부터 벌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주’라는 단어를 동원하면서 두 번이나 단호하게 외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중세에 접어들면서 복음에 다른 것들이 가미되기 시작했습니다. 연옥설, 면죄부, 마리아무흠설, 그래서 종교개혁이 있었고, 그로부터 500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다른 복음이 없을까요? 진정 순수한 복음을 따르고 있는지,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나’라는 단어를 여섯 번 사용하고, 앞뒤 문맥에서는 열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이 ‘나’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부자는 ‘내’란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사용하면서(눅 12:17-19) 자신의 부(富)와 공로를 과시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주인입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성품입니다(사 14:13).

또 한 사람은 경이로운 경험을 했는데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1인칭을 쓰는데도 극도로 조심합니다. 불가피하게 드러내야 할 때는 3인칭 어법까지 동원하면서 ‘나’란 단어 사용을 절제했습니다(고후 12:2-5). 바울입니다. 그는 ‘나’란 단어로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극도로 삼갑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오늘 이 본문에서는 예외입니다. ‘나’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바울 자신의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냅니다(갈 2:20). 자신의 죄, 허물, 약함, 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능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 자신의 죄악과 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7:18,23-24).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때도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렇게 비교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다른 복음’을 가졌느냐의 여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나’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에 사용하는지를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일에 ‘나’를 사용하면, 순전한 복음에서 멀어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나’라는 단어를 어디에서, 어떤 일에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까? 나의 현주소는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도 미워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갈 5:19-21, 잠 6:16-19) 과연 우리가 이 부분에 자유롭습니까?

저는 목사이지만, 이런 정과 욕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뿌리치려고 해도 떠나지 않습니다. 심방할 때도, 성경을 연구할 때도, 예배를 인도할 때도, 메시지를 전할 때도 유혹은 찾아옵니다. ‘내가 이 정도의 인간인가?’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정말 덜된 인간, 냄새나는 벌레와 구더기와 같습니다.

죄의 문제,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고백하고, 생각에서 떨쳐버리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불교 고승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합니까?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세 수도승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까? 그러나 저들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나는 바른 복음을 따르고 있습니까?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늘 ‘나’라는 단어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때 ‘나’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때 자기 안에 있는 ‘나’가 점점 작아지고,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나를 지배할 때, 내가 다시 사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메시지가 전파될 수 있도록 강단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비추어 나는 내 의와 공로를 자랑하는 일에 ‘나’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허물과 잘못과 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나’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바른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 나가기를 힘쓰는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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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장 20절을 붙잡으라(2) (갈 2:20)

최근 ‘두 광인 이야기’(생명의말씀사)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영일만 모래밭에 세계최고의 제철소를 건설하여 오늘의 경제 한국을 있게 만든 청암(靑巖) 박태준, 또 한 사람은 영적 황무지에 제자훈련의 씨를 뿌려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건강한 영향력을 미친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를 일컫습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에 대해서는 저 또한 쭉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생전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의 오프닝 강의제목이 ‘광인론’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이 강의만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지금도 생전에 떠 두었던 영상으로 이 강의를 대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인’(狂人)이란 별칭을 가진 이들 조차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진짜 광인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주인공 바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 우레와 같은 톤으로 말합니다. ‘너는 지금 너의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지난 시간 이 본문의 앞부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를 깊이 묵상한바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 공로를 드러내는 일에 ‘나’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죄성, 허물을 드러내는 일에는 ‘나’란 단어를 적극적,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나는 혹시 어리석은 부자(눅 12장), 바리새인(눅 18장), 계명성(사 14장)처럼 자신의 의, 공로를 드러내는데 ‘나’란 단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부분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답니다. 우선 앞뒤 문장을 연결하는 ‘그런즉’이란 단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건강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던 제 친구 하나가 얼마 전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결단해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의사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따를 것인가?’ 그는 의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의사와 자신은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의사의 말이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 후에도 의사의 지시대로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고, 의사와 면담하면서 계속적으로 의사의 지시와 처방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친구는 신장(콩팥)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의사의 처방대로 소금기가 전혀 없는 식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식, 행동을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자신입니까? 의사입니까? 만일 의사의 처방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의 말을 따르는 순간, 나는 이제 없습니다. 의사의 의견, 그의 처방이 나를 지배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여전히 내가 나를 컨트롤하는 듯 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이 뜻입니다. 내가 죽을 죄인, 사형수 인생임을 절감했을 때부터 이제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병의 의원이신 그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 명령, 가르침이 나를 지배합니다. 지금까지 전혀 나와 상관없던 그 분이, 내 안에 새로운 한 분이 들어와서 나의 생각, 행동, 취미, 음식, 꿈, 생활리듬, 이 모든 것을 간섭하고, 지배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분이 나를 압도하십니다. 겉으로 볼 때 옛 모습의 ‘나’이지만,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을 성경은 간단히 한 단어로 정리합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저분의 말씀대로 행하면 분명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리라. 해결되리라.’는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의학계에서도 이미 입증된 바 있습니다.

플라시보(placebo), 즉 위약(僞藥)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로, 기도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전문적이지 않은 치료, 더 나아가 유효한 성분이 들어있지 않는 약제일지라도 그것이 환자의 증상이나 경과를 호전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상을 입은 병사들에게 모르핀이 없어서 생리식염수를 모르핀인 것처럼 주사했는데, 가짜 모르핀을 맞은 부상병들이 통증이 없어졌다며 군의관에게 고마워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위약효과 때문입니다. 당사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 결국 그 사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믿는 그분은 누구십니까?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능력으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 만왕의 왕, 만병의 의원이신 그분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인생 최대의 적인 죄의 문제, 나아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분명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믿음을 소유하는 자에게 주님이 임재하시고, 그분이 나를 지배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요일 5:4).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고후 13:5). 믿음은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약 2:18).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갈 2:21a). 바울의 입에서 ‘은혜’란 단어가 제일 먼저 터져 나옵니다. 내 입에서 ‘은혜’란 단어가 터져 나오는지, 터져 나오지 않는 지를 보면, 믿음이 있는지 판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이 영을 받은 사람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고전 15:10).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고의 위험에도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 내가 숨 쉬고 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오늘 내 입에서 어떤 단어가 많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나’란 단어를 통해서 내 의와 공로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입에서 ‘은혜’란 단어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와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주님이 역사하시고, 그러한 자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옥성석 목사)

[대구동부교회 김서택목사님 설교 말씀]갈라디아서 2장 20절 : 내 안에 사는 이 – 내 영혼이 은총 입어(찬송가 438장)

[대구동부교회 김서택목사님 설교 말씀]

​갈라디아서 2장 20절 : 내 안에 사는 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찬송가 438장)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2018년 5월 27일, 일요일, 오후 5시 오후예배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떤 사람 안에 다른 사람이 또 살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산모입니다. 산모는 어머니 몸 속에 또 아기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아기 때문에 입덧을 하기도 하고 또 배가 불러오기도 하고 때로는 굉장히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산모는 이 아기 때문에 함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함부로 뛸 수도 없고 함부로 다른 사람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아기가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기를 위해서 절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엄마 안에 아기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발달이 되가지고, 사람들은 핸즈프리라 해가지고 귀에 안보이게 꽂고 막 이야기 하면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히죽히죽 웃고 이야기를 막 하고 이러는데 미쳤나 저 사람이 미쳤나,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까 핸즈프리를 가지고 누구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은 지금 미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지금 연결되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봇대에 딱 박으면 굉장히 꼬시죠. 아, 저거 꼬시다. ​혼자 히죽 히죽 웃고 떠들고 이러더니 박아버리니까 조용하네. ​그런데 그렇게 요즘은 합니다.

미국의 특수부대요원들은 어떻습니까? 전부 이 무전기를 달고 작전을 합니다. 그래서 몇 명이 움직이지만 상부 부대와 같이 지금 움직이고 있고, 어디에 지금 적이 있고, 어디를 뚫고 들어가야 되고, 어디에 총을 쏘아야 되는지, 다 지시를 받으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결이 되어가지고 연합작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뇌사상태에 빠져가지고 심장을 다른 젊은이에게 기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뒤에 심장을 기증받은 그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즘 또 그런 행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어머니는 기증받은, 자기 아들의 심장을 기증받은 그 젊은이의 가슴에 손을 대어 봐도 되느냐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대어보라 이러니까 아, 자기 아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죽었지만 그래도 그 한 부분, 심장이 아직까지 다른 사람의 몸 속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굉장히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들의 심장이 지금 뛰고 있구나, 이 사람의 속에는 다른 삶의 심장이 뛰면서 이렇게 그 사람을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한 번은 심장수술 전문가, 흉부외과 의사선생님이죠,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천 번의 이식수술에 성공한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혹시 도둑놈 심장을 이식시키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 사람이 도둑질 하고 싶어지냐고 이랬더니, 그 분이 집사님 아닙니까, 집사님이 목사님이 또 농담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심장은 다 심장이죠,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도둑놈 심장을 이식한다고 해서 도둑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다른 분으로부터 뇌와 심장을 같이 이식을 받았다고 칩시다. 돌아가신 그 분이 천재예요. 천재. 천재의 뇌를 이식을 받은 겁니다. 도둑놈의 심장을 이식을 받은 게 아니고요. 그런데 만약에 그럴 리는 없지만 뇌가 막 작동을 해가지고 이 천재의 머리가 작동을 해가지고 시험을 치고 연구를 하고 이런다면 아, 이 사람은 굉장히 천재 같은 이런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가르침이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을 보고 더욱 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의 의미는 정확하게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위대한 승리지만 그 십자가가 나의 죄와 구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 복잡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0절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 가서는 이것을 더 상세하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살아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다 봤다, 그런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그 양심의 가치, 율법의 추적 이게 얼마나 집요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 할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옛날에 한 말, 옛날에 했던 행동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으로 거듭났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실제로 양심은 괴로운 것입니다. 나중에 심판대에 가면은 양심이 난리를 칩니다.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십자가가 율법을 어떻게 끝을 내었으며, 우리의 이 죄책감을 어떻게 끝을 내었으며, 우리의 양심의 가책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오늘 본문이고 이게 인제 로마서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게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뒤에도 늘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합니다. 옛날에 지었던 우리의 죄들이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 갈 때가 많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하게 이 양심의 고통, 죄의 추적을 해결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죄의 추적자가 있다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첫 번째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죄의 추적자가 있다 하는 사실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밤이나 낮이나 도시에서나 건물 안에서 죄 짓는 거 결국은 다 잡히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시나 건물 모든 곳에 지금 CCTV가 다 설치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폭행을 했다든지 성추행을 했다든지 또 자동차로 사람을 치고 이렇게 도망을 쳤다든지 뺑소니를 쳤다든지 거의 다 잡힙니다. 왜냐하면 지금 온 도시 건물 안팎에 CCTV가 설치가 되어서 24시간 계속 찍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아도 사거리에서 건물 구석구석에서 전부 다 찍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에 보면 이 장발장이 빵 하나를 훔쳐가지고 19년을 감옥에서 삽니다. 그리고 이제 나와가지고 회개하여서 새사람이 되는데, 어떤 소년의 돈을 별로 생각 없이 뺏습니다. 그리고 장발장은 정말 변화되어가지고 정말 시장이 되고 어떤 매춘 여성의 딸을 입양해가지고 키우고 참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형사는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이 19년이나 감옥에 살았던 이 흉악범이 소년을 위협해가지고 돈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 놈은 다시 감옥에 집어넣어야 된다 그래서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지금 양녀를 데리고 살고 있는데 형사가 계속 따라오니까 결국은 요양원으로 숨습니다. 수도원으로 도망을 갑니다. 거기까지 형사가 또 쫓아옵니다. 나중에 언제 이 형사의 추격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하면, 이 형사가 이 장발장의 도움을 받고 장발장이 참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내가 너무 저 사람을 의심했구나, 그래가지고 강에 빠져서 자살을 합니다. 형사가 죽고 장발장은 그 추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안 볼 줄 알고 몰래 몰래 죄를 짓고 있는데 그 죄의 추적자가 있습니다. 그 죄의 추적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장발장에 나오는 이 자베르 형사보다 더 집요하고 더 무서운 추적자인데 이 양심의 가책의 근거는 율법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모든 인간의 양심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지으면 처음에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이 죄가 다 기억이 나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고통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나이가 들면 생각이 다 나요. 지금 젊으신 분들은 잘 안 믿으시는 것 같은데 늙으면 옛날에 지었던 죄들이 다 생각이 납니다. 늙는 거 슬퍼요. 왜냐하면 양심의 이 고통, 20대, 30대, 40대, 했던 거, 어릴 때 했던 거 다 생각이 나기 때문에 굉장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양심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여자 체조 대표선수들을 의학적으로 도와주는 것 같았지만 실제도 성추행을 했던 의사가 고발이 되어가지고 70년형을 살게 됩니다. 지금도 늙었는데 70년을 감옥에서 살게 됩니다. 이 사람은 그냥 성추행을 하고 잊어먹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여자 선수들의 기억 속에 다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어린 여자 선수들이 어린이로 있습니까? 성인이 됩니다. 성인이 되면서 너무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견디다 견디다 자기 인생들이 너무 불행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고발을 하게 됩니다. 그 의사를 법정에 세우고 피해를 입은 체조 선수들이 나중에 커 가지고 전부 자기가 당한 피해를 다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웁니다. 70년형이 때려지고 난 뒤에 다 울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투(me too)라고 해가지고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지난 일이기 때문에 다 끝났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피해자의 마음속에는 그 고통이 그대로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본인들의 그 가해자의 마음속에도 있었는데 ‘아유, 그 때는 뭐 그냥 정신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눌러 놓았는데 이것이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반드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은 양심을 막 잠재워 놓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나는 그 때 술이 취해서 정신이 없었어, 이거는 내 의도가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 양심을 마비시켜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와서 증언을 하면, 피해를 입은 본인이 와서 증언을 하면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또는 어떤 날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비 오는 날 진지하게 생각할 때, 옛날에 잘못했던 행동들이 생각이 나게 됩니다. 또는 죽게 되었을 때, 아니면 심판대 앞에 서면 어떻게 됩니까? 심판대 앞에 서면 이 마비되어있던 양심들이 전부 눈을 벌떡 뜨면서 막 떠들기 시작합니다. 전부 다 이야기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나치 때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던 그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을 땅 끝까지 가서 찾아냈습니다. 이들이 이름을 바꾸고 성형수술을 하고 그들이 딴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끝까지 가서 찾아내가지고 결국은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서 살게 합니다. 90년, 100년, 90살, 100살까지 살게 합니다. 빨리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래 오래 살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오래 오래 살게 하면서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죄를 안 지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안 죽여 본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음란한 짓을 안 해 본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안줘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율법은 그 사람을 찾고 있고 그 사람의 양심은,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그 양심 속에 이게 죄가 살아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설교를 듣던지, 어떤 날 피해자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듣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은 이 양심이 막 소리를 지르면서 옛날에 남에게 상처 주었던 말들, 남에게 생각으로 죄를 지었던 거, 나중에 뭐 행동으로 죄를 지었던 거, 전부 자기 입으로 다 떠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7절 보면

갈라디아서 2장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일을 많이 했습니다. 큰일도 엄청나게 했습니다. 목회도 크게 했고 많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무슨 감투도 썼습니다. 감사패도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참 너무나도 감동적인 말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깨끗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돈도 깨끗하지 않고 남녀문제도 깨끗하지 않고 나중에 보니까 야망과 욕심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 교계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너무 큰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돈 문제나 남녀 문제나 명예나 욕심에 정직하지가 않은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의인입니다. 너무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죄인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시켰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 큰 목회를 하고, 그 많은 선교를 하고, 많은 일을 한 사람을 예수님이 죄 짓도록 시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 죄에 빠졌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거예요. 이 사람은 어떻게 자기를 합리화를 시켰는가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고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사업을 벌이는 것은 의로워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 저 사람 의인이구나,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사실 인간의 동기 속을 들어가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아무리 설교를 잘 한다 하더라도, 그 동기 속에는 돈을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고 명예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고 그러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큰 목회를 하니까 명예가 오는 거예요. 그리고 사례도 많이 주는 거예요. 차도 교회에서 좋은 차 사주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이, 예를 들어서 교인들이 백만 명인데 전부 노숙자라면 아무도 거기에 부임 안 할라고 합니다. 노숙자 백만 명의 교회에 누가 부임 할라고 합니까? 전부 와서 돈 달라고 그러고 말이죠. 와서 땡 깡 부리고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이 몸을 바쳐서, 열정을 바쳐서 한다고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돈 욕심, 명예 욕심,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반대급부 없이 진짜 순수하게, 한 때는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젊어서 미쳤을 때는 그럴 때가 조금은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 때라 하더라도,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 마음속에 이미 탐욕이 있기 때문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100% 순수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하면 인제 강사료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다 돌려주고 못 받게 하다가 굉장히 갈등이 생겨요. 갈등이 생겨요.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받는 것이 좋습니다. 받는 것이 좋아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뭔가 하면, 안 나가는 것이 제일 낫다, 교회에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기, 목사는 자기 교회를 지키는 것이 제일 낫다, 그래도 100% 순수하다고 볼 수 있느냐. 100% 순수한 거는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기 때문에, 큰 감투를 썼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의롭다 이런 거는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단지 경영능력이 좋은 거죠. 재주가 좋고 머리가 좋고. 의인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업적을 통해서, 어떤 일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해서 의롭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은 알고 있고 율법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이 틀리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하고 삽비라는 교회에 헌금을 바치는데 반을 떼 놓고 전부입니다 이렇게 했다가 죽었습니다. 천국 갔겠습니까 지옥 갔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얼마나 많아요. 남인데 돈 주면서 전부입니다 이렇게 해야 받는 사람도 기분 좋고 주는 사람도 기분 좋지, 실제로는 반인데.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그대로, 성경 그대로 실시해라 그러면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고 돈 주고 죽고 헌금 내고 죽고.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나르다가 막 뛰니까 잡지 않았습니까. 우리 교인들, 법궤가 떨어질려하는데 잡겠습니까, 안잡겠습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다 떨어질려면 떨어져라 이렇게 하겠습니까? 잡는다고요. 할머니들부터 먼저 잡지요. 죽겠습니까? 안죽겠습니까? 죽어야죠. 그러니까 어떤 행위를 가지고 저 사람 믿음이 좋다 나쁘다, 큰 목회를 했으니까, 설교를 잘하니까, 그러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는 겁니다.

18절 말씀 보면

갈라디아서 2장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허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난 뒤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는 허물어졌다 이게 뭡니까? 이제는 인간의 껍데기는 중요하지 않고 속에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도 아닙니다. 조사하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방인하고 유대인의 차이는 있다 만약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까지는 그런 행동을 안했거든요. 조금 전까지는 같은 형제라고 불렀거든요. 믿음의 사람이라고 불렀거든요. 그래서 그거는 내 자신을 정죄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언제 이 양심으로부터, 이 형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죽는 거밖에 없습니다.

19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2장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양심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율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죽는 그 방법 외에는 절대로 양심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죽은 것이 아닌데 죽었다고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 요게 문제. 요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요게 십자가와 예수님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의미

오늘 여기 크게 두 번째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 별 생각 없이 행동하고 말하면서 죄를 많이 짓습니다. 그 때는 우리는 양심의 고통 같은 거 잘 몰라요. 교회 안다니면서, 또 다니더라도 신앙이 별로 없을 때는 양심의 고통 같은 거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씀이 비춰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이 역사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그 영혼이 번민을 하게 됩니다. 번민이라는 말이 딱 맞아요. 왜냐하면 양심의 고통 같은 거를 모릅니다. 그냥 만족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심이 막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심이 생기고 그리고 죄를 안 짓고 싶은데 죄를 짓게 되고. 그리고 막 죄를 짓습니다. 술도 마시고 막 우상 숭배도 하려고 하는 반항심,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 그런 게 막 생깁니다. 이게 잘 믿다가 그런 일이 생겨요.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막 반항심이 생깁니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반항심이 생기고 목사님에 대해서도 반항심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반항심이 생기고. 이게 인제 사실은 영혼이 번민을 하는 것입니다. 번민을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쟤가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다 더 반항심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지금 막 반항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그 영혼이 번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 수 있으면 끝까지 내가 옳다 내 하고 싶은 대로 막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놀려고 하고 집도 나가 보려고 하고 담배도 막 숨어서 피우기도 하고, 예배도 빠지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의 번민은 점점점점 이게 커지는 것입니다. 누가 쫓아오는 것 같고 양심이 편할 날이 없어요. 계속 괴롭습니다. 수련회 가서 설교 들으면 어떻습니까? 전도사님, 목사님이 자기만 보고 막 설교하는 거 같애요. 특히 죄 가지고 설교하는데 자기만 보면서 막 회개하라고 하는 것 같애요. 그래서, 아, 오늘 왜 또 내보고 저런 소리를 하느냐고. 그런데 나도 한 번 앉아보니까 내보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앉아보니까. 설교하는 사람은 누구 한 명을 보고 하지는 않거든요. 앉아서 들어보니까 내 쪽으로 보면서 나를 찍어서 이야기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때는 눈이 더 갈 때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앉은키가 좀 크다든지 그날 머리를 좀 많이 볶았다든지. 그런데 본인은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해요. 본인은 오늘 나를 보면서 자꾸 설교를 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저도 앉아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저 뒤쪽에 앉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 뒤쪽을 보고 하는 거 같애요. 그런데 괴롭고, 엄마는 공부해라 그러는데 공부도 안 되고, 친구 만나도 헛소리입니다. 헛소리. 그런데 특징이 뭔가 하면 종교적 헛소리입니다. 종교적 헛소리.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고 반박을 하는데 좌우지간 종교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들은 술 마시러 가는데 끝에 가서 부르는 노래가 뭡니까? 내게 강 같은 평화 부르고 나옵니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요. 옛날에는 가다보면 술집에서 내게 강 같은 평화 부르고 이러면, 교회 다니다가 또 번민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견디다 견디다 못해가지고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진짜 죽고 싶어요. 공부도 안 되고 식욕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고 교회 나오기도 싫고 죽고 싶어요. 그런데 옛날에 들었던 복음이 어느 날 딱 생각이 납니다. 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네가 지금 막 반항하고, 대들고, 엄마인데 소리 지르고, 목사님인데 막 눈을 막 꼴시고 이러는데, 그게 번민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네가 죄 때문에 번민하고 있는 건데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 네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내가 손 위에 못이 박혔고, 네가 지금 반항하고 있는 그거 때문에 내 발에 못이 박혔고, 네가 술 마시고 막 토하고 막 별 짓 다하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옆에 창에, 옆구리가 창에 찔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물론 친구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이렇지만 날 위해 죽어준 사람은 없거든요. 어머니도 죽어줄 수는 없거든요.

예수님께서는 네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그거 때문에 내가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렸다. 이제는 더 이상 네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네 논리를 믿을려고 하지 말고, 네 의지를 믿을려고 하지 말고, 네 이제 나를 믿어라. 그 때, 결국 이제 무릎을 꿇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로기 상태에 빠졌으니까요.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별 일이 없어요. 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시원해지고요. 마음이 시원해지고 이제 부모님이 밉지가 않고 목사님도 목을 조르고 싶지 않고요. 그리고 아, 하나님이 싫지 않고요. 이렇게 큰 변화는 없어요. 그런데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20절 상반 절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양쪽에 있는 강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옆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위에 우리는 같이 엎어져서, 같이 겹쳐져서 못 박힌 적이 없습니다. 복음송도 요즘 보니까 유행하는 게 예수님하고 같이 겹쳐서, 그 손에 손을 겹쳐서. 우리는 예수님 위에 겹쳐진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뭔가 하면 그 번민하고 괴로워하다가 아, 예수님이 내 때문에 못 박히셨지, 죽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지, 이렇게 믿는 순간, 우리는 법적으로, 현실적으로가 아닙니다, 법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겁니다. 이거는 뭘 보여주는가 하면 죄의 추격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끝까지, 끝까지 추격을 해서 다 찾아냅니다. 어떤 죄까지 찾아냅니까? 그 사람이 한 말, 그 사람이 생각한 거, 그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거, 전부 다 찾아냅니다. 언젠가는 다 찾아냅니다. 그런데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뭔가 하면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이거를 사도 바울이 계시로 알아낸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의 추격으로부터, 율법의 추격으로부터, 모든 죄 지었던 생각들, 나쁜 말 했던 것들,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힌 그 앞에 무릎 꿇고 죄인입니다 고백하고 그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율법에 내 이름은 ‘사망’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김 누구누구는 사망, 이제 추격이 필요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죄인입니다, 두 손 두 발 다 드는 거, 그 외에는 절대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종교를 믿고, 무슨 철학을 믿고, 그것은 임시로 다 마취시켜 놓는 것입니다. 결국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다 살아납니다. 전부 다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 그 십자가가 그렇게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양심은 더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막 양심이 괴로운 거예요. 십자가에서 내 과거의 죄는 다 용서 받았는데도 기억이 나는 겁니다. 시도 때도 없이 양심의 고통이 막 찾아옵니다. 그래서 침체가 됩니다. 자주 자주 침체가 됩니다. 우울해집니다. 그러면 양심이 살아있는 것과 죄 용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심이 굉장히 예민해집니다. 시도 때도 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이미 해결되었는데도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면은 또 회개하면 돼요. 생각나면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그리고 로마서 읽고. 로마서 읽고 그리고 양심아, 양심아, 너도 양심이 좀 있어야 되지 어떻게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성경에는 다 해결되었다고 하는데 자꾸 나를 괴롭히느냐고. 그런데 계속 생각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조심을 하게 되는 겁니다. 조심 안하면 또 죄 짓습니다. 그래서 이게 경찰 노릇을 하는 겁니다. 무엇으로 바뀝니까? 양심이? 전에는 형사였는데 이제는 경찰로 바뀌는 겁니다. 이제는 죄 못 짓도록. 죄 못 짓도록 하는 것이지 죄를 찾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양심의 문제, 예수님 믿고 난 뒤의 양심의 고통 문제 이거는 아, 예민하구나, 그리고 이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잠깐만, 누구를 조금 안 좋은 눈으로 딱 봐도 아, 눈이 아프고 가슴이 아파요. 내가 이런 눈으로 보면 안 되는데. 욥은 뭐라 그럽니까? 내가 여자를 주목해서 봤습니까? 우리는 주목해서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때 양심이 아파야 됩니다. 이거는 형사가 아니고 경찰입니다. 경찰. 하지 말라고. 뚫어지게 바라보지 말라고. 뚫어지게 바라보면 뚫어지게 되니까, 죄 짓게 되니까 하지 말라고, 그래서 양심의 가책은 있지만 죄를 찾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괴로우면 또 회개하면 돼요.

3.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산다

오늘 여기 세 번째로는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옛 자아는 죽었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았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무릎은 꿇었습니다. 무릎은 꿇었고,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안 죽었는데 왜 죽었다고 합니까? 이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슨 이식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내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식이 되게 되고, 내 뇌가 예수님의 뇌로 이식이 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게 너무 약하게 뛰어가지고 정말 이게 예수님의 심장인지 옛날 내 심장인지 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축구할 때 막 뛰다가 예배드릴 때는 너무 느리게 뛰어 졸고,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뇌도 누가 돈 이야기 하면 눈이 번쩍 뜨이고 뇌가 막 빠르게 돌아가고 설교 말씀은 잘 안 들어오고 이러지만은, 조금씩 조금씩 심장도 뛰기 시작하고 뇌도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심장이 이식이 되고 뇌가 예수님의 것으로 이식이 되기 시작하는데 중요한 변화가 무엇인가 하면, 더 이상

하나님이 무섭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하나님을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십니까? 무서운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 번개를 치시는 하나님, 태풍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지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전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전부 엎드려서 절합니다. 무섭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전부 일동 경례 하, 그냥 머리숙여가지고 절을 합니다. 하나님이 무섭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굉장히 무섭습니다. 예배드리다가 딴 생각하다가 심장마비 일어날 것 같고 번개 치고 이러면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 같고요. 어떨 때는 제가 어렸을 때 화장실에 갔는데 막 번개가 쳐가지고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지금 예수님이 재림할 거 같은데 막 굉장히 무서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하, 참 좋죠.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어떤 분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이러면서 아버지를 계속 부릅니다. 아버지 우째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이버지가 좋아가지고. 여러분, 아들들은 좀 인정머리가 없어요. 아들들은. 아들들은 키워봐야 좀 그런 거 같애요. 딸들은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 간이 막 녹아버립니다. 한번 아버지 부르면 간이 녹고 두 번 아버지 부르면 쓸개가 녹아버리고, 아, 딸들은 아버지 이렇게 부르면 간이 그냥 없어져버려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거를 양자의 마음이라 그러고 성령을 마시는 겁니다.성령을 마신 겁니다. 술 마셨다고요? 아닙니다. 성령을 마신 겁니다. 성령을 마시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오 신이시여 이런 기도는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 오 신이시여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좋은 아버지.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예배가 좋은 거예요. 성령이, 성령을 그냥 마신 겁니다. 성령이 조금 온 게 아니고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오후 예배까지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변하는 것이 무언가 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학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학대를 합니까? 남을 괴롭히면서 학대를 합니다. 그래서 힘이 약한 사람을 막 괴롭혀요. 여자들을 막 괴롭힙니다. 학대하면서 즐기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인격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로 학대를 합니다. 술 마시면 얼마나 머리가 아픕니까. 비틀거립니까. 그런데 술을 막 퍼마시는 거예요. 남자도 퍼마시고 여자도 퍼마시고 아, 박치기 하고 퍼마시고요. 그러면서 우리 이 술 다 마시고 죽어버리자 그래요. 어떤 사람은 담배로 막 학대를 합니다. 피우고 또 피우고 또 피우고 한 갑을 피우고. 연기로 질식해서 죽어버리자. 화투로 학대를 하는데 2박3일 동안, 아니면 3박 4일 동안 한 숨도 안자고 쫍니다. 눈에 핏발이 서가지고 쫍니다. 그래가 죽을라고요. 방은 지저분합니다. 옆에는 짜장면 그릇, 그 옆에는 짬뽕 그릇, 이불도 안개고 담배, 재떨이, 막 종이 위에 비벼가 끄고. 목사님, 그런 거 상세하게 어떻게 잘 압니까? 그게 인제 목회 준비하는 것이죠. 음란한 사진은 크게 붙여놓습니다. 크게, 크게. 여자 막 수영복 입은 거, 입다 만 거 이런 거, 벽에다 반 쯤 입은 거 이렇게 붙여놓고 아, 삼삼해요. 그게 뭡니까? 자기를 학대를 하는 겁니다. 여자들을 못살게 굴고 어린이들을 못살게 굴고 옆 집 개를 발로 차고.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무릎 꿇고 난 뒤에는 자기를 사랑합니다. 술을 안 마셔요. 왜냐하면 맨 정신이 돌아오니까요. 연기를 싫어합니다. 연기를, 담배 연기를 싫어하고요. 화투 그거를 왜 해야 됩니까? 왜 해야 돼요? 2박3일 동안 이 짓을 왜 해야 돼요? 그리고 교회 오는 게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언어가 달라지게 됩니다. 옛날에는 말을 할 때는 독이 있었습니다. 아, 농담을 하는데 사람을 굉장히 괴롭게 하는 농담을 합니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양심이 살아있습니다. 양심의 뇌가 살아 있습니다. 이게 작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상이 아닙니다. 공부가 아닌 겁니다. 공부하지 마세요. 기독교에 대해서 공부하지 마세요. 단계를 밟지 마세요.

기독교는 뭡니까? 심장입니다. 심장이 뛰는 겁니다. 심장이 뛰는 것이고 뇌가 작동을 하는 것이고 양심이 살아나는 것이지 공부가 아니에요. 공부가 아니고 어떤 계단을 밟는 것이 아니고 어떤 코스를 밟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심장이 뛰는 겁니다. 심장이. 의학적인 겁니다. 의학적인 거예요. 뇌 이식 수술이고 심장 이식 수술이고 이게 살아나는 것이지 공부가 아니에요. 공부가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요절 하나도 안 외워도 우리 뭐라 안합니다. 상도 안주지만 뭐라 하지도 않습니다. 성경 안 읽어도 뭐라 안합니다. 읽으면 상 줘야 됩니다. 상 줘야 됩니다. 의무적으로 상 줘야 됩니다. 할 수 없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뭐가 살아 있습니다. 그 분이 이야기를 해요. 그 분이 이야기를 해요.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 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개똥철학 이야기 엄청나게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도 쓸모없어요. 회의 같은 거 할 때 제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앞에서 마이크 잡고 줄줄이 줄줄이 이야기하는 인간들, 제일 꼴 보기 싫어요. 이거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 개똥철학인 것이죠. 참 듣기 싫은데 자기만 모릅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들렸거든요. 마이크 귀신이 들려가지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 아내는 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70 넘으면 절대로 마이크 앞에 서지 말라고. 헛소리하기 때문에. 아이구, 그래 이야기 하면 안 되죠. 그래도. 부부인데, 너무 그렇게 70으로 딱 자르면 안 되죠. 그래도 칠십 두 살이나 뭐 이렇게 자르든지. 그런데 실제로 줄줄줄줄 이야기 하는데 굉장히 길게 이야기해요. 이게 절제가 안돼요. 그리고 자기는 짧게 이야기 했다고 말합니다.

아, 내 안에 계신 분이 이야기를 합니다. 나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속상해 합니다. 어떤 때는 속상해요. 내가 더 잘했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좌우간 속상해 하세요. 우리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어떤 때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격려를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 안에 있는 예수가 작았습니다. 아주 작았습니다. 심장도 굉장히 느리게 뛰었습니다. 나중에는 심장도 점점 빨리 뛰고, 뇌도 점점 활발하게 움직이고, 나중에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공통된 특징이 뭔가 하면 천재고 거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다 천재로 만들어서 쓰는 것을 봤습니다. 천재였습니다. 어거스틴, 천재입니다. 거물급이에요. 마틴 루터, 천재입니다. 거물급입니다. 존 칼빈, 천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야기를 해요. 칼빈은 천재라고. 그리고 거물급 아닙니까. 헨델, 천재입니다. 어떻게 그 찬송가 구절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렇게 하면서, 천재입니다. 천재.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또 듣고 있습니다. 영어로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천재입니다. 들으면서 천재예요. 헨델은 천재예요. 마틴 로이드 존스, 천재입니다. 존 스펄젼, 천재입니다. 거인입니다. 키는 좀 작지만 거인입니다. 그 육성으로 육천 명, 칠천 명 막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다 천재입니다. 다 천재고 다 거인들입니다.

20절 중간에 보면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옛날 내 심장, 막 죄 지을 때 빨리 뛰고 이랬던 그 심장은 죽어지고, 이제는 예배드리는 심장으로 이게 뛰게 되고, 옛날에 남을 막 미워하는 이런 뇌가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 말씀 듣고 사랑하는 뇌로 다시 뛰게 되는 겁니다. 새로운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옛날 감정도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음란하고 더럽고 좋지 못한 감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후회를 합니다. 기쁘지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뇌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천재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믿어도 땡 깡을 막 부립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심장이 떼를 쓰는 쪽으로 떼를 쓰고 막 자기 뜻대로 안되면 화를 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심장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좋은 겁니다. 이 세상에 내 뜻대로 안되는 게 얼마나 많아요. 내 뜻대로 안 돼야지요. 내 뜻대로 안되고 주님의 뜻대로 돼야지요. 그래야 화가 안나요.

20절 하반 절 보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이런 사랑 받아 봤습니까? 누가 사랑을 하는데 자기가 죽을 정도로 사랑 해주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참 행복할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있는데 남자가 죽을 정도로 자기를 사랑해주었을 때, 그 여성은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행복할 것입니다. 어떤 남자 분이 계신데 아내가 자기가 죽을 정도로 사랑해주었을 때,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너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질 정도로 나를 사랑했으면 딴 게 눈에 들어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도 공부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자꾸 갈등이 생깁니다. 옛날에는 세상이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재미가 없는 거예요. 옛날에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막 이야기 하고 이러면 기뻤는데 이제는 자꾸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단기선교를 가서 고생을 하고 뭐라고 얘기 합니까? 참 좋았더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단기선교 딴 사람인데 물어보면 아이고 그 천하에 그 못 갈 데라고 그렇게 덥고 씻기도 그렇더라 그러는데 너무 좋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예수님의 심장이 뛰기 때문에, 예수님의 뇌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는 세상에서 한 자리 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는, 한 자리가 그게 뭡니까? 한 자리. 한 자리가 뭐고 학벌이 뭐가 대단하고 돈이 뭐가 대단합니까? 그게 뭐가 대단해요? 내 속에 지금 새 심장이 있고 내 속에 새로운 뇌가 있는데 그 명예가 그게 뭐 그리 대단할까요? 명예가 뭐가 대단하고 돈이 뭐가 대단하고 학벌이 뭐가 대단할까요? 우리나라에 참 유명했고 참, 영향력을 미쳤던 그런 종들이 돈 욕심을 버리고 명예 욕심을 버렸더라면, 얼마나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 분들은 큰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명성만 컸지 실제로 큰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졸렬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명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다 새 살이니까요. 속사람, 내 속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줄 정도로 사랑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내 속에 하나님의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내 뇌가 하나님의 뇌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다른 영혼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름 성경학교 봉사를 합니다. 알바나 또 다른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거 부럽지 않아요. 그냥 성경학교 하면서, 아, 애들하고 같이 막 성경공부 하고 하는 것이 너무 너무 재미가 있습니다. 공부는 또 하면 되니까요. 공부는 또 하면 되니까요. 여러분, 선교기도회 우리 교회에서 지금 계속 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저는요 저 영대 옆에, 두란노가 영대 옆에 있었습니다, 그까지 갔어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할려고. 얼마나 먼지 몰라요. 그까지 가서 기도하고 또 오고요. 어느 선교회든지 상관이 없어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거는 너무 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요. 선교사들의 구두를 한평생 닦으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 때 제가 원했던 것은 선교사님들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나는 그 구두만 닦으면서 살아도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거 참 행복한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신뢰받고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아들을 보내어 주셨던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 하나님과 예배 시간에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공중에 끌려 올라가는 거 같애요.

21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2장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인생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굶어 죽어야 됩니다. 세상에 적응을 못하니까 굶어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돈도 막 주셔요. 돈도 주시고 유명하게 해주시고 공부도 하게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의 심장으로, 예수님의 뇌로 살다가 보니까, 굶어죽을 거 같은데 더 잘됐어요. 사업도 더 잘 되고 공부도 더 잘 되고. 여러분, 은혜 받고나서 그 학생들 보세요. 공부를 굉장히 잘 합니다. 공부를 굉장히 잘 합니다. 왜냐하면 뭐 때문에? 천재니까요. 천재니까. 천재기 때문에 세상에 먹고 사는 거 걱정하지 않습니다. 워낙 천재기 때문에. 먹고 사는 거 다 눈에 보여요. 그런데 안합니다. 그 길로 안갈려고, 시간이 아까워가지고. 시간이 아까워요. 죽을 걸 생각하니 시간이 아까와가지고 그런 길로 가지 않습니다. 천재기 때문에 결혼 잘 될까요 안 될까요? 잘 될 거 같은데 잘 안돼요. 왜냐하면 너무 수준 차이가 많이 나가지고요. 돌대가리하고 할라 하니까 힘든 겁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인생을 살고 있고, 하나님의 인생을 살고 있고, 껍데기는 내지만 내 안에 있는 심장과 내 속에 있는 뇌는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지 요즘 고민이 굉장히 많아요. 어떻게 살아야 될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될지, 예배드리는 것은 참 좋은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될지, 아, 껍데기는 내지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어느 게 더 진짜일까요? 껍데기인 내가 더 진짜일까요, 안에 있는 예수님이 진짜일까요. 처음에는 내가 진짜인 거 같은데 나중에는 예수님이 진짜로 변하게 됩니다.

막 세상 길 갈라 그러면 안에 있는 예수님이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뭐 막 할려고 그러면 하지 마, 하지 마. 결국은 예수님이 더 진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산 사람에게 자랑이 있을까요? 자랑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저는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앞으로 교인들이 다 알 겁니다. 목사님 아무것도 안했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이 한 거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예수님은 헛되이 죽지 아니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심장이 뛰게 하시고 우리에게 생각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심장 이식과 뇌 이식에 성공한 여러분들,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멋진 인생을 사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줄 정도로 우리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시는 줄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심장이 뛰게 하시고

예수님의 뇌가 살아서 움직이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통한 행실이 아름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료출처: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 2018년 5월 27일.일요일 오후 5시 오후예배>

​대구동부교회 홈페이지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dongbu.org/sub02/sub02_1.php

​ 성경 66권을 모두 설교하시고 책으로 엮어내신 김서택 목사님의 강해설교집을 소개해드립니다.

서적과 테입 판매의 수익금은 전액 청소년 사역을 위해 사용됩니다. 문의: 053-780-8000 (교회사무실) 책 한 권, 말씀 한 구절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갈라디아서 2장 주일 강해설교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다(갈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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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 주일 강해 설교문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항상 주님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다” (갈 2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갈라디아서 2:1~21

요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 2:20)

주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을 강해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호함(갈 2:1-10)

1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라. 2 내가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되 명성 있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하든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그리스 사람 디도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아 우리를 속박하려고 몰래 들어왔으나 5 우리가 그들에게 단 한 시간도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무엇이나 되는 것같이 여겨지던 이 사람들에 관하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내게는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느니라) 무엇이나 되는 것같이 여겨지던 그들이 회의에서 내게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아니하였느니라. 7 오히려 반대로 베드로가 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 같이 내가 무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을 그들이 보았나니 8 (베드로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사 할례자를 위한 사도직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내 안에서도 강력하게 일하사 이방인들을 향하게 하셨느니라.) 9 또 기둥같이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닫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교제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우리는 이교도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자들에게로 가고자 함이라. 10 다만 그들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원하였는데 바로 그 일은 나 역시 열심히 행하던 바라.

1절. 14년 후에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파송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에서 난 레위족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이 그를 일컬어 바나바(Barnabas, “위로의 아들”라 불렀는데 그가 밭이 있으니 팔아 그 값 모두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행 4:36-37).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자요(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요(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요(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어 바울의 1차 세계선교 여행을 동행한 자입니다(13:2-3).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Crete)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이며 할례를 받지 아니했고(갈 2:3), 디도서의 수신자입니다. 디모데와 더불어 바울 사도의 제자이면서 목회자였습니다.

2절. “내가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되 명성 있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하든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행 15장)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님의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했습니다(롬 1:16).

3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 끝을 덮은 겉가죽(foreskin, 양피, 포피)을 잘라내는 의식으로 평생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의 표식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본래 태어난 지 8일 만에 받아야 하며,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언제든 할례를 받는 것이 개종의 선제 조건입니다. 유대인의 할례파들은 기독교인이 될 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할례가 반드시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례는 본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adiaphora=“it does not matter” 현상문제, 비본질문제).

고전 7:19-20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래서 헬라인 출신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아니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예루살렘 회의에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4-5절. 바울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입니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의 누룩들이 침투합니다. 진실한 목회자들은 그들을 분별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당들이 몰래 들어온 목적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말하는데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입니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덕적 율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가만히 들어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잠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합니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6-9절.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이 전해받은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그 복음이었음을 확증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은 헬라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과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늘도 그 복음만이 모든 인생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됩니다.

10절. “다만 그들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원하였는데 바로 그 일은 나 역시 열심히 행하던 바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예루살렘과 동족 유대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행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Claudius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BC 10년 ~ AD 54년)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었는데 AD 50년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될 당시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제에 대하여,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합니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신 15:7-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2.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갈 2:11-16)

11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책망받아야 했으므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으며 13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느니라. 14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살고 유대인들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강요해서 유대인들처럼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인에 속한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

11절. 게바(Cephas)는 베드로와 같은 인물로 주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게바는 아람어며 베드로는 히브리어로 “돌 stone, 반석 rock”이란 뜻입니다(요 1:42, 마 16:18). 안디옥은 이방인들을 위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가 있었던 수리아(=시리아, 구약시대는 아람) 지방의 도시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가 위선한 일에 대해 책망할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행동의 실수를 한 것입니다. 3년간이나 주님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했던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12-13절에 보니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들이 도착하니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습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고 있다”라고 말했었습니다(행 10:28).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유대인의 관례법으로 음식에 대한 법이나 우상숭배를 금한 계명,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규정한 율법(신 7:3-4) 등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해 떠나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공격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떠나 물러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두려워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의 위선적 행동에 실망을 느꼈습니다. 사람 앞에서 그를 공의와 겸손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훌륭한 행동입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습니다(잠 27:5-6).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한 목표는 책망받을 일이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단번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적 성숙은 예수님 믿기 전에 그가 살아온 상태와 관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화는 매우 더디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것 같은데도 인격적 흠과 결함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큰 문제입니다. 인격적 결함 중 대표적인 것은 말의 실수입니다. 잠 10:19-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약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베드로뿐 아니라,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울의 동료인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은 그 혼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물러가자 함께 먹던 유대인들도 같이 물러갔습니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와 제직의 역할, 교사와의 역할, 각 선교회 회장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이 되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만, 그들이 본이 되지 못하면 해를 끼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말하며, 부덕한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믿음에 바로 서서 덕을 세우는 자, 즉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4-15절. 베드로의 외식은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습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본래 죄인이었음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도덕적으로도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들 가운데 파묻혀 살았었습니다.

16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복음의 핵심을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죄악 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죄성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신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롬 3:1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20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과 같습니다.

롬 3:21-22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대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시대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입니다. 또 이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예배 제도를 통해 암시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 3:24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518장(통 252장) “갈라디아서 주제가”를 부릅시다.

(1) 기쁜 소리 들리니 예수 구원하신다. 만민에게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주님 명령하시니 산을 넘고 물 건너 온 세상에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2) 바다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들으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섬아 일어나 메아리쳐 울려라.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3) 환난 중에 하는 말 예수 구원하신다. 다시 살아나시어 예수 구원하신다.

지은 죄로 인하여 슬픈 맘이 있어도 숨질 때에 내 할말 예수 구원하신다.

(4) 바람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기뻐하라 나라들 예수 구원하신다.

구원하는 복음을 산과 들에 전하라. 우리들의 승전가 예수 구원하신다

3.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갈 2:17-21)

17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자 하다가 우리 자신 또한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런 까닭으로 죄의 사역자가 되시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이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들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내 자신을 범법자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19 이는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7절. 의(義)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며 구원의 정도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의는 무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입니다. ‘의롭게 한다’는 원어(디카이오오 δικαιω dikaiow)는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만 믿고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줄 알았다가 그것이 아니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18절.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세우면’이라는 말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말하면, 그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고 그 주장이 틀린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하나님을 향해,’ ‘율법을 향해’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성을 나타냅니다(데오 Theo, 노모 nomo – 관계의 여격).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 곧 율법의 계속된 정죄, 누적된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죽었는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20절은 오늘의 요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뭇박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속했던 나, 곧 옛사람 나를 가리킵니다. ‘산 것’이라는 말은 ‘사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 그 ‘나’는 죄로 인하여 정죄되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어떤 이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단인 황국주 씨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전부가 예수화하였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모습을 흉내 낸다고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판명되고 정죄되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시므로, 이것은 마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참된 회개를 동반합니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또한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요 1:12) 영생을 얻습니다(요 3:16).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성도에게 예수님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디카이오쉬네 dikaiosyne)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지금 그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즉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또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과 욕심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롭게 태어납시다. 찬송 407장(통 465장)

(1)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후렴.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 맘 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3)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4) 낸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복음으로 은혜와 평강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사순절에 우리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주님께서 제 속에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언제나 주님은 저를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무엘하 16장 주석 강해설교]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삼하 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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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21)

제목 : 믿음 안에서 사는 것

본문 : 갈라디아서 2:20-21

설교자 : 조 정 의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지난 4개월 동안 함께 공부한 야고보서의 핵심은 한 마디로 ‘참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모든 환경에 대해서 기쁘게 여겨야 한다, 불평과 차별, 원망이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등을 배웠습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자연히 ‘내 행위는 과연 그러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날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면 스스로 구원을 확신하고, 또 다른 날 자신이 분노하거나 뭔가 잘못을 했을 때는 구원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행위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강조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행위로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이 율법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날마다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의로움을 얻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에서도 참선을 하고 선행해야 합니다. 이슬람교도 코란의 계율을 지켜야 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가 의로움을 얻는데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주의, 즉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강해질수록 교회 안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정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여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을 때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의 영향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야’라며 주변의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다보면, 결국 스스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노력해도 안 되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화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3절과 15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오직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오직 ‘은혜’로 의로움을 얻는 복음이었는데 그들은 현재 다른 복음을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찾아왔을 때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그의 외식적인 행동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나바도 유혹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할례, 행위에 의지하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냐’며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그들이 들은 복음은 ‘은혜로 온전히 얻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움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행위로 의로움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위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당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잘 살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의로워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려면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벽하신 거룩함만큼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하고 행동에 아무런 죄도 없어야 하며, 말과 행동의 동기까지도 잘못된 것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금의 악도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이것을 완벽하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하나님같이 거룩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로움의 기준에 오를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다시 ‘행위’ 중심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로 살고 있으니 거룩하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면서 의롭지 못하다고 정죄하게 됩니다. ‘은혜’로 의로움을 얻은 우리가 ‘행위’를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도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 이것은 십자가의 강도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연합한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 즉 율법의 요구조건을 완전하게 충족시키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다 이루었다”의 의미입니다. 율법은 완벽한 삶을 요구합니다. 말과 행동,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처럼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율법의 저주는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고 죄책감을 받으며 죄의 심판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와 같은 율법의 모든 요구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게 하거나 덜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고 낙심하며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모든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거나 분노케 할 수 없고, 반대로 내가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거나 나에게 어떤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정도면 거룩하니까 나를 사랑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여전히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역시 우리가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여러분을 의롭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행위를 가지고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 이 말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산다거나, 내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무조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때로 죄를 짓기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며 화를 참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믿는 자 안에는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성령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날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성화된 삶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삶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사도 바울도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 안에서 잘 산 것 같지만 어떤 날은 죄로 인해 실패하는 삶을 삽니다. 아브라함은 때로 믿음의 조상처럼 살지만 어떤 날은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이방신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을 선포했던 엘리야도 어떤 날은 두려움에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보면 연약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육체를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요 15:9),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오늘날에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가끔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도 그런 일은 힘든 일인데, 하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양 되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받으셔야 할 합당한 대우는 이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2,13). 그런 예수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나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2-4). 찬송과 영광 존귀를 세세토록 받기에 함당하신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멸시와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 더 되는 천사를 데리고 그들을 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죄가 있었을까요. 주님은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20절).

예수님은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의로움을 옷 입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의지한다면 넘어지고 좌절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육체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행위를 의지한다면 예수님이 헛되이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의로움을 얻었고 또한 은혜로 성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로 성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은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성령을 통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쁨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마음껏 살아도 된다’,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순종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자녀가 말을 잘 듣는다고 부모가 더 사랑하거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강령들을 종합하면 한 마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기뻐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성도들이 쌓아올린 것을 태울 때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으로 그의 상이 주어질 것인데, 태울 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고 평생을 헌신한 부모에게, 어떤 감사도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후회와 부끄러움이 어떠할까요?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늘에 속한 좋은 것들, 신령한 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비하신 복이 많이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과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은혜와 축복을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고 부부가 서로 닮아가듯이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순종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부모의 말에 사사건건 불순종하면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자녀가 있을까요? 순종하지 않고는 친밀한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사랑하십시오.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고,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품어주시고, 죄를 짓고 돌아와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우리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때때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처럼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움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온전히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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