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 의 믿음 | 홍정길 목사 명설교 ‘에녹의 믿음’|다시 보는 명설교 더울림 77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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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명설교 ‘에녹의 믿음’
본문: 히브리서 11장 4절
CBSTV 다시 보는 명설교 더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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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격지 않은 에녹의 믿음 – 밀톤 한인장로교회

오늘 우리는 에녹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옮기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믿음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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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ltonkpc.com

Date Published: 7/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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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 믿음으로 동행하는 에녹

창세기 5장은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셋을 거쳐 아담의 10대 후손인 노아까지 이르는 계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계보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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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alomarkc.org

Date Published: 8/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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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믿음 (히 11:5-6)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었다 되었단 말입니다. 동양권의 전통유교윤리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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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7/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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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믿음 일자 (창5:21-24) – mission

에녹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가고 있음을 잊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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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9/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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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에녹의 믿음과 승천 (히 11:5-6) – 다음블로그

에녹은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으면 에녹과 같은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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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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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4) 에녹의 믿음(히브리서11:5-6) – 열린교회

믿음(4)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11:5-6 오늘은 “믿음” 4번째로 “에녹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주 “아벨의 믿음”을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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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olin.or.kr

Date Published: 9/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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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믿음으로 죽음을 넘어간 에녹 – 기도 24.365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했던 일은 ‘외치는 것’이었다. “경건하지 않은 자를 심판하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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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rayer24365.org

Date Published: 9/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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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에녹은 – 말씀침례교회

에녹은 아담의 칠대 손이며 ‘야렛’의 아들로서 그 이름은 “헌신된, 바쳐진”(dedicated)이란 뜻입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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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v1611.net

Date Published: 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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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명설교 '에녹의 믿음'|다시 보는 명설교 더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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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녹 의 믿음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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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6. 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J_SS96RtyU

죽음을 격지 않은 에녹의 믿음 – 밀톤 한인장로교회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동행하는 에녹

제가 신학교 들어가서 처음 학기를 수강할 때‘목회 상담과 가정 치유’라는 과목을 신청하였습니다. 개인 프로젝트로 친가 쪽 3대, 외가 쪽 3대 족보를 만들어오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보통 미국 친구들은 한 가정에 두세 명씩밖에 낳지 않아 letter size에 한 페이지면 족보를 다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친할머니가 10남매를 낳으시고 외할머니가 8남매를 낳으시고 삼촌, 고모, 이모들이 자식들을 많이 낳다보니 그 양이 꽤 많았습니다. 당시는 이메일도 안 되던 때인지라 한국에 전화를 걸어 친척들의 근황을 물어보느라 전화비가 꽤 나왔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족보를 관찰하면서 각 세대 별로 누가 bright child, 즉 동기 중에 누가 리더 역할을 하는지, 각 세대 별로 어떤 경향이나 특징이 있는지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셋째 아들이지만 대학을 나오시고 장교로서 복무하셨기에 집안의 대소사 결정을 하거나 큰일을 처리할 때 앞장을 서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53세를 일기로 일찍 돌아가셨을 때 친척들에게는 충격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저희 가족에게도 신앙생활 잘하라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일을 계기로 친척 어른들이나 사촌들이 예수님을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큰 슬픔이었지만 가문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bright child를 데려가시는 충격요법을 통하여 믿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을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족보와 관련지어 스토리를 목장에서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본문에도 보니 족보가 나옵니다. 아담의 아들인 셋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그 중에서도 에녹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을 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는지, 그렇다면 에녹의 삶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담의 족보(1-20절)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가인의 후손을 통하여 죄인의 계보가 이어져갑니다. 가인의 삶은 시기와 살인, 거짓말과 책임 회피, 두려움으로 얼룩졌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성이 세워지고,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인 야발이 나오고, 악기를 하는 자의 조상인 유발이 나오고, 각종 기구를 만드는 두발가인이 나옵니다. 그들을 통하여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잃은 슬픔에 빠진 아담과 하와를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반환, 보상’을 뜻하는 셋을 주셨습니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시작합니다. 이 회복은 바로 하나님을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에게서 필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가인의 후손은 성적 타락과 폭력으로 가정이 깨어지고 힘의 논리가 좌지우지 하는 악한 세상을 이룬 반면에 셋의 후손은 겉보기에 대단한 업적은 없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가인의 후손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다른 씨’가 계속 이어져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은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셋을 거쳐 아담의 10대 후손인 노아까지 이르는 계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계보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한 구속사의 계보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창조하실 때에’(1절)와 ‘창조되던 날에’(2절)라는 표현을 통하여 창세기 1장을 회고합니다. 특히 인간의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복 받은 존재임을 되새깁니다. 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해 피조물을 보호하고 다스릴 권한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창세기가 쓰일 당시에는 왕만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여겨겼는데 창세기는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귀한 존재임을 알려 줍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셋의 족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지음 받은 아담부터 시작되면서 그 정통성을 보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를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셋의 족보의 순서를 거꾸로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사람 또한 자신의 형상과 같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에게서 나온 자손들이 아담의 형상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면서도 죄의 영향력도 같이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족보를 보면 가인의 후손들처럼 세속적 발전이나 문명의 진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계보의 기록 방식을 보면 누가 언제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를 낳은 후 몇 년을 더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몇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하셨는데 과연 이들에게 죽음이 임했습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모든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죄가 신속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가인의 계보와 차이를 보이는 말이 셋의 계보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이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주셨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택한 자의 계보에 거룩한 자녀들의 출생이 계속 기록되고 있는 것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인류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가인의 계보와는 달리 5장에 나타난 셋의 자손은 장수하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긴 수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 5:33). 노아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이후에 시편 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탄식했습니다. 셋의 계보를 보면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따라 본질적으로 죄 속에서 태어났기에 죄의 대가인 죽음이 반드시 있음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서 다시 창조하고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족보의 나열이 다소 지루하게 보이지만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과 가족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개인과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반복되는 생활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인의 작은 언행이 그분의 계획과 목적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에녹(21-24절)

반복되는 패턴 속에 나타난 동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낳았다, 살았다, 죽었다’. 그런데 에녹의 경우에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낳았다, 동행했다, 살았다’왜 달라졌을까요?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녹의 삶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꼽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동행하다’는 ‘걷다’라는 뜻을 가진 ‘할라크’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를 직역하면 ‘하나님과 함께 스스로 걸어갔다’가 됩니다. 에녹은 셋의 족보 가운데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데려가다(히, 라카흐)’는 ‘옮겨가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에녹을 지상에서 하늘로 들어 올렸다는 말로 선지자 엘리야의 승천 시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왕하 2:3).

에녹이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에녹이 언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까?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므두셀라가 태어났을 때부터 동행했다고 할까요? 에녹은 므두셀라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냥 믿고 사는 것과 하나님께 집중하며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를 낳을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그 아이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었습니다. 카인은 창을 소유한 사람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가인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므두셀라는 ‘창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도 가인과 같은 재앙을 불러일으킨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를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하리라’로 보는 해석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심판의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그렇다고 에녹이 그 300년 동안 하늘만 바라보고 므두셀라만 바라보았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자기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땀 흘려 일하고 먹고 자며 자식을 낳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징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는 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했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것입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즉 므두셀라가 969세 되던 해에 홍수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가 죽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에녹이 살던 살인자 라멕은(이 라멕은 에녹의 손자 라멕이 아닙니다) ‘칼의 노래’를 지으면서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떠벌였습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여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이런 악한 세대에서 에녹은 평범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유다서 1:14-15을 읽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를 향하여 에녹이 외친 심판의 예언이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임하게 될 홍수심판을 앞에 놓고 에녹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시대의 빛이요 썩어져가는 세상의 소금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히 11:5). 비록 이 땅에서는 다른 조상들보다 짧게 살았지만, 에녹의 삶은 그 누구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의 승천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그분이 보호하시며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의 예표입니다. 우리도 에녹 때와 다를 바 없는 악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에녹처럼 의인의 심령으로 종말을 의식하면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남은 때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믿음

에녹이 살아있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혼의 상태가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실존 즉 그분의 계심을 믿는 것이 모든 믿음의 시작이요 근본입니다. 그가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자’이심을 알고 그에 합당한 관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에게도 동일한 복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 믿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이후에는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이 하늘 저편에서 그저 관망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을 향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고, 자신의 영을 보내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사랑하는 자들의 영원한 처소를 지금도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최상의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잠 8:17-18)

동행자의 자세

에녹은 그의 믿음을 삶으로 드러냄으로 참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에서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즉 하나님만을 우리 인생의 최고 되는 기쁨으로 여기고 그를 우리 삶의 목적으로 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 가치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 삶이 복을 받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 다윗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미가 선지자는 제사장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신약성경에도 동행과 관련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신, 요즘 말로 하면 대사라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대사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예수님을 믿었으면 구원받은 것이니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화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들의 죄 용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친밀한 사랑의 회복에 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님과 ‘계속해서 화목하라’는 뜻을 가집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를 고백하는 삶,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삶,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삶,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 삶을 계속 살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2) 성도들과 동행해야 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승자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영적 경기에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달린 자들이 모두 이긴 자가 되어 다 면류관을 받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주위의 성도들이 이겨야 할 경쟁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절제하고 훈련하는 일에 서로 돕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달려 나아가야 하는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상처받은 자의 상처를 싸매 주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격려하여 더불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함께 달려야 하는 영적인 경주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 공동체에는 각각의 믿음의 분량이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고 믿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신앙이 깊지 못한 자들도 있고 신실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영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회복할 때, 믿음의 공동체에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세상과 동행해야 합니다

78번 동쪽으로 따라 가다가 Twin Oaks를 지나 오른쪽 멀리 보면 언덕 위의 동네가 보입니다. 그 집들이 잘 보이는 이유는 언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산 위의 도성’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개인으로만 빛을 발할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함께 빛을 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 위의 도성이 감추어질 수 없듯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교회는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잘못 행동할 때 세상의 지탄을 받습니다. 그런 모습이 현재 한국교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성도들의 어떤 행동을 보고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착한 행실을 통하여. 여기서 착한 행실은 그저 윤리적인 차원의 착한 행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화목된 자의 신분’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화목케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웃과의 온전한 관계로 자연스럽게 발전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들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 자식, 이웃,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에녹과 같이,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성도들 서로 격려하며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장이, 우리의 선교회가,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생명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춤으로 팔로마 한인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산 위의 아름다운 도성으로 아름답게 만들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는데 앞장을 서시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을 인내를 가지고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거두며 온 마게도니아 지방에 믿음의 소문이 퍼졌던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모습이 우리 교회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 (히 11:5-6)

– 설교 : 유흥준 목사 (전주광성교회)

이철환씨의 <연탄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신부 아버지가 신부와 같이 입장을 하는데 신부는 다리를 절면서 걸어들어 옵니다. 신부가 신랑 앞에 거의 왔을 무렵에 갑자기 신부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객들은 당황하고 신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객들의 눈으로 믿기 어려운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감동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랑이 달려나오더니 아버지 대신 신부의 손을 힘차게 잡아 일으키고 팔짱을 키고 늠름하게 신부와 같이 걸어서 주례자 앞에 서게 한 것입니다. 그러던 신랑은 자신의 한쪽 발을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드려밀고 신부의 짧은 발을 자기 발등 위에 올려놓고 바치고 서 있는 모습이 하객들의 시선에 잡혔습니다. 안간힘을 다하면서 신랑은 만면에 건강한 미소를 머금고 신부의 발을 꽉 바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객들은 그 날 진정한 결혼이 무엇인가 결혼의 그림을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은 동행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같이 걷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도 동행입니다. 절뚝발이 인생으로 살던 우리가 어느 날 인생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평생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여행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여행을 믿음 때문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에녹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1. 첫째로 에녹의 믿음은 인정받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증거>라는 단어는 그것은 영어로 굳 리포트(good report)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인생을 살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었다 되었단 말입니다.

동양권의 전통유교윤리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냐? 그는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효자 효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에서는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여전히 소중한 가치로 받아드리지만, 기독교 윤리는 부모를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소개한 그런 다리를 절고 있었던 신부의 남편은 행복한 남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자기를 믿고 따라줄 수 있는 한 여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믿고, 나를 따라주는 신부의 존재가 신랑의 기쁨이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6절에 보시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단순히 두 가지만 강조했습니다.

①하나님이 계신 것, 그것 믿고 그 ②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찾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나에게 상급 주신다. 단순한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라고 오늘 본문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좀 부족하여도 그냥 주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 따라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는 인정을 받았다 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타난 기사를 보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동행하는 믿음> 우리가 창세기 5:22절에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300년을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저는 누가 저에게 목사님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같이 걷는 삶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만났습니다. 전에는 내가 주인으로 알고 살다가 <아 아니로구나 하나님이 내 주인이로구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내가 만났다면 이제 주인 되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한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에녹의 인생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든 이유 적어도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

1)첫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그러니까 두 사람이 뜻이 맞아야 동행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가정의 파경을 많이 목격하는 그런 불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이 파경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이 있을 수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이유는 <뜻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뜻이 완전하게 맞는 그런 부부는 한 분도 없습니다. 어떤 부부도 자연인 그대로 두 사람의 뜻이 자동적으로 일치하는 경우란 저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사랑하면 뜻을 따라주는 것이지요. 뜻을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배우자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상대방의 뜻을 따라준다 면은 대부분의 경우 결혼의 파경을 막아주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피차에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런 동기를 가지고 살면 건강한 부부관계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에녹의 경우를 보면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울 이유가 없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에녹이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정말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의 가장 주요한 동기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갈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분은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또 태초에도, 아니 영원 전부터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도 순간 순간마다 아버지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이 뭐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행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인간성을 입고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고난과 시련 앞에서 평안을 원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버지 뜻과 일시적 충돌을 경험하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우리가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면서 유명한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자기의 뜻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드릴 수가 있었던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줄 곳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비밀이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이었으며, 이것이 또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내 뜻을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내가 주의 뜻을 따르겠다 라는 각오만 되어있다면 저와 여러분의 생애 속에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멋진 삶이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22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뉴우베리(Newberry)라고 하는 성경학자는 므두셀라의 본래의 뜻은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고대 부족 국가에서 싸울 때 제일 앞장서는 사람이 창을 제일 잘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오는 사람, 창을 잘 던지는 저 사람만 거꾸러뜨리면 저 부족은 끝장이 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의 이름에는 보편적으로 이런 뜻이 붙어 다녔다고 합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끝이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세상은 끝이 온다>.

에녹은 그때부터 아들, 므두셀라 부를 때마다 에녹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했습니다> 그 리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왜 인생을 개판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토해놓은 모든 말, 내가 취한 낱낱의 행동들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반드시 심판된다> 이 심판의 사실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죄의 심판, 멸망의 심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 심판은 대망의 심판, 혹은 보상심판, 상급심판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랬습니다(고후 5:10).

우리의 살아왔던 결산의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살수가 있습니까? <오늘밤에 내 일생이 끝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내가 살아온 삶을 내가 결산해야 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좀 진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갔다고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7:11절에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에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였는데,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는 므두셀라가 969세입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는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던 해였습니다. 그 때 하늘의 창들이 열려 홍수심판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므두셀라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의 출생을 통하여 심판이라는 진지한 메시지를 받아 드리자 마자 그의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주께서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인도하는 삶보다 더 복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첫머리에 연탄 길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 다리를 절고 있었던 신부의 결혼식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 신부의 친구 한 분이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가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후에 자기의 친구 신랑 신부의 신혼 살림을 찾아갔다가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신혼 앨범 사진첩을 보다가 거기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쓴 편지하나가 뚝 떨어졌어요. 신랑이 다리 저는 신부 자기 아내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우리 인생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인생이 모두가 다 절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절름발이, 인생의 짐을 지고 너무너무 힘들어서 인생 길에서 쓰러짐에 경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절름발이의 상처와 경험을 가진 인생입니다. 내가 인생 길을 걷다가 쓰러졌을 때에 아무도 나를 일으킬 세워줄 생각을 아니했을 때에 그러나 내가 쓰러지는 그 자리에 내게 다가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와 상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그분,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사 살아 계신 주님! 살아있는 목자가 되겠다고 말씀하시던 그분이 달려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사건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자 걷기가 얼마나 힘들었니, 나는 네 고난과 상처와 눈물의 의미를 알아, 인생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 힘들고 나무 벅차고 너무나 어려운 길이기에 함께 가야해, 내 손을 꼭 잡아라.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함께 동행하는 거야, 저 하늘나라 도착할 때까지 내 손을 잡고 나를 따라야해,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고 그대의 곁에 서있는 나의 임재를 확인하면서 나와 더불어 걸어야해>

때로 그분을 잡고 걸어가면서도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분은 또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그랬어, 내 손 꼭 잡으라고, 다시 일어나라고>, 그 때 마다 내 손을 잡고 인생의 길을 함께 동행하시는 바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마침내 어느 날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여행에 이 아름다운 결실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에녹이 보여준 동일한 믿음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을 향한 가장 중요한 뜻으로 받아드리고 그의 곁에 바짝 서서 그를 붙들고 걸어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에녹의 동행은 바로 우리의 삶의 동행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 그분의 손을 잡고 주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의 나라를 향해 다시 서서 걸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에녹의 믿음 일자 (창5:21-24)

에녹의 믿음 일자 (창5:21-24)

지난주간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보내고 있을 때 유하영 어린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영이는 한 가정에 딸이요, 손녀였지만 교회의 딸이었습니다. 하영이가 유치부, 선교원을 거쳐갈 때 어른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예배도 참 예쁘게 드렸고, 찬양과 율동의 모습을 통해 기쁨을 주던 아이였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교회를 좋아했는지 교회이야기만 나오면 자다가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성도들이 안타까움에 울기만 했는데, 부모와 가족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여느 죽음과 같지 않은 하영이를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누구라도 갑니다. 늙었다고 빨리 가는 것이 아니고, 아이라고 늦게 가는 것도 아닙니다. 노인만이 아니라 아이도 죽습니다. 병든 사람만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갑니다.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있는 사람도 갑니다. 믿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도 갑니다. 누구라도 우리는 어느 날 저녁에 날아오는 비수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알고, 준비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인생에 소중한 준비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감사하고,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도록 이끄시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인생은 점점 천국으로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더 깊은 믿음, 더 좋은 신앙으로 하나님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믿음을 보면서 나의 믿음을 점검하고,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지난주에 아벨에 이어 오늘은 ‘에녹’입니다. 과연 에녹은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에녹의 믿음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에녹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그의 전 생애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기록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짧지만 아주 깊은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의 믿음을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강조합니다.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결국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여기 ‘동행’이란 말은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늘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끝없이 인간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인간과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함께, 동행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소중한 믿음이 없습니다. 에녹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느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아파할 때에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평온할 때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어 큰 은혜와 축복을 주는 것 같은데, 삶에 폭풍이 몰아치면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시는가 하며 탄식과 원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평온할 때만이 아니라 내가 힘들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가 아파할 때 멀리서 뒷짐지고 방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아파하면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때에는 더 나와 가까이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으로 용기와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모래 위에 두발자국’이란 시를 아시지요?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내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나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나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내가 걸어 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나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나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멀리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한 사람아/ 나는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그때에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란다…”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힘들 때에도 동행하십니다. 내가 물 가운데로 걸어갈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런 고통의 순간에는 나를 업고 가십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에녹에 대하여 이렇게 그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것이 에녹의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만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하면 동행에 무슨 유익이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에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놀라운 믿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인데 그와 동행하면서 그분을 좀 기쁘시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기쁨입니까, 아니면 슬픔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랑입니까, 아니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여러 사람의 여러 경우를 통해 그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믿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믿음으로 살면,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는 기준은 바로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굳건히 믿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그것은 바로 경건 생활입니다. 경건 생활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 예배와 찬송, 감사와 순종이 바로 우리의 경건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신앙 고백에서, 시편의 여러 말씀 속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왕상3:10, 시51:19, 시69:30-31) 신앙생활은 경건이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다른 것 아무리 다 잘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과 깊은 교제와 대화와 사귐을 갖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것을 추구하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경건을 우선 순위로 삼고 이것을 내 신앙과 삶에 중심에 두면서 추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무엇일까요? 바르고 참된 삶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만 특히 잠언에서 많이 강조합니다.(잠11:1, 20) 특히 잠언 2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하나님은 의와 공평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는 이것을 행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여러분, 믿음과 경건과 공의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새해에 지속적으로 이것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아는 믿음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본문에서 성경은 에녹이 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22절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라고 강조합니다. 에녹은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때가 므두셀라를 낳은 때, 아들을 낳을 즈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가 아들을 낳을 시기에 깨달았던 진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가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은 것에서 찾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특히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예언이 그대로 적중된 것을 알려줍니다. 에녹의 아들은, 므두셀라이고, 그의 아들은 라멕, 그리고 라멕의 아들이 노아입니다. 결국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심판이 임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신기하게도 므두셀라가 죽은 바로 그 해 홍수가 임하는 것을 봅니다.

가인이후에 사람들의 죄가 깊어갈 때 하나님은 에녹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앞으로 얼마 있으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에녹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면서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후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자기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날마다 나를 향하신,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보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말씀을 통해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찾는 지혜로운 사람, 믿음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길입니다.

로마서 2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율법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향하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에녹처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고, 강한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지고 무너지고, 없어지고,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고한 힘입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스런 순간이 다가올 때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에녹처럼, 많은 믿음의 사람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걱정과 염려로 엄습해 올 때, 때론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길 수 있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가질 자세입니다.

에녹은 자기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기쁘시게 할 수 있었고, 하나님과 평생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에녹의 이런 믿음을 본받아, 남은 생애동안 에녹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3강. 에녹의 믿음과 승천 (히 11:5-6)

3강. 에녹의 믿음과 승천 (히 11:5-6)

히 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지난 시간 아벨과 그 예물에 대하여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동일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예물로서 그들의 믿음을 증거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사를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예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예물의 제사이냐가 중요한 것이 됩니다. 제사 지냄을 지금 식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합시다. 그럼 예물은 신앙생활의 내용인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 되겠지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예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핵심은 어떤 믿음이냐 로 남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믿음은 내 것으로 나아오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는 믿음은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을 더 나은 예물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은 예물” 이란 “옳은 예물” 이라는 했어요. 옳음이란? 정답이란 말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물이란 뜻입니다.

그럼 신약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아벨의 예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전제로 기록이 되어져 있고, 신약은 구약을 배경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흔히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합니다. 아벨이 드린 예물이 그림자라고 한다면 그럼 그 예물의 실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제사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만 받으세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죽지 말아야 할 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심으로서 “이 예수는 죄가 없다!” “이 예수는 의롭다!” 고 세상에 공표하신 겁니다. 안 죽을 분이 죽은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틀린 자들이라는 것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모든 인간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했어요. 이는 예수님은 죽지 말아야 할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가두지 않고 부활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것을 받지 않는 이유는 죄인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 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선 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13장에서 내가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어요.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말입니다. 구제한다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순교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말짱 헛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헤 아가페” 라고 하는데 “그 사랑” 이란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님께 피 흘려 주신 사랑” 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의미를 모르고서 행하는 것은 모두가 종교 놀음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예수님의 피” 를 앞세우고 나아오지 않으면 안 받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였다!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선 전혀 무기치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옳음이 무엇인지 자명해 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음이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가 하나님께서 “의로운 피” 라고 증명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옳음이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아벨은 더 나은 예물로 옳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예수님의 피” 를 드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자기 대신 예수님이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 사실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양이라는 제물로 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냥 양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으로 보고 받으신 겁니다. 가인은 믿음을 못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예물을 몰랐고, 아벨은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아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믿음을 받으면 아벨처럼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걸 드리잖아요.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 를 앞세우고 나아온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자랑하면 안돼요. 감사하여야 해요. 신앙생활은 “나 믿음 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하지 못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해요. 이걸 잊으면 안돼요. 절대로 자랑으로 흐르지 말고 감사로 흘러야 돼요. 그러므로 누가 복음을 모른다고 하여도 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기가 믿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 알았고” “넌 모르지” 라고 하면 안 것이 자기 것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공로를 가로채는 도둑이 되는 겁니다. 비록 그 사람이 지금은 복음을 모르지만 언제라도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면 믿게 되어요.

그러니 남을 무시하지 말란 말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아침 일찍 포도원으로 부름 받은 사람도 있고, 낮에 부름 받은 사람도 있고, 저녁 때 부름 받은 사람도 있어요. 모두가 놀고 있었는데 주인이 불러서 갔습니다.

그러니 아침에 갔다고 해서 폼 잡을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주인이 그 때 불러 준 것 뿐입니다. 늦게 갔다고 기죽을 일도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교회 오자 말자 복음을 알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 1년 다니다가 복음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 30년 다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게 될 수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6살 때부터 교회는 다녔어요. 그런데 복음을 안 것은 십여 년 전에 알게 되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오후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셈입니다. 그러니 누가 언제 어떻게 복음을 깨닫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한 겁니다. 혹시 모르지요. 지금 이 글을 보고 또 누군가가 눈이 떠지고 마음이 열려서 복음이 믿어질지! 나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니 안 것뿐입니다! 라고 해야지 자신은 척 알아보았는데 당신은 왜? 모르십니까? 라고 하면 안돼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자랑하다가 지옥에 간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자기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두지 말고 감사거리로 두어야 합니다.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심이 믿어지니 놀라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은 믿음이 와야만 믿어지니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 주셔야만 믿어지는 것들이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믿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하였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선 자랑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께로 받은 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가 교회를 섬기고, 형제를 사랑하고, 남을 가르치고, 봉사하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공로이지 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신앙의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마귀의 일함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들고 나아오라고 하는데, 마귀는 인간의 것을 들고 나아가라고 해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나아가면 자기 자랑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만 드리게 되는데, 자기 것을 들고 나가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없고 오직 자기 자랑만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자랑으로 나아간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여 우리가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였나이다 자랑했어요.

그러니 나를 칭찬해 주고 내게 상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자기가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공로를 가로채니 불법이지요.

피조물은 창조주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피조물이 그 어떤 것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요.

지혜로움이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였지요. 가지가 포도나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보존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이 나무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자기가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적놈이지요. 진실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자기 자랑이 없어요.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이를 알았기에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삶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해요.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죄인은 불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고 은혜임을 알아야 해요. 그런데 이 죄라는 놈이 죽지 않고 늘 불평을 토하게 만듭니다. 왜? 난 남들보다 행복하지 못합니까? 왜? 난 돈이 없습니까? 왜? 난 건강이 좋지 않습니까? 왜? 난 공부를 못합니까? 왜? 우리 신랑은 월급이 적습니까? 온통 왜? 왜? 왜? 입니다. 감사라고는 눈뜨고 찾아보려고 해도 희귀해서 찾아지지가 않아요. 그러면서 신자라고 하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얼굴색도 안 변하고 뻔뻔스럽게 말해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아요. 본인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데 누가 말려요.

그러나 한 가지 신자라고 하면서 감사가 없다는 것은 뭔가 큰 문제라고 지적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가 감사치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면 그 어떤 것에도 감사가 되어져요. 십자가가 보이는 순간엔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자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깨달아지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요. 괜히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속상해 했다는 것이 깨달아져요. 자식 공부 못하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 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 없고 가난한 것도 예수님의 피 앞에 서면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깨달아져요. 병들고 아픈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당함을 보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요. 삶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날 행복하게 해 주세요 라고 악악대는 겁니다.

우리들이 세상 살면서 당하는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 찢기고 피 흘리신 아픔 보다 더 하진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님 앞에 서면 지금 내가 불평하는 그것도 배부른 투정이고 호사스러운 것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전 힘주어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입에 불평이 나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천국이 되고 감사가 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환경으로 판단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돼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알면 어디에 있어도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감사하고, 암으로 병상에 누워 있을지라도 천국 안에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모르면 그 어떤 좋은 환경도 지옥입니다. 재벌이면 뭐합니까?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에 가는데,,,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알면 천국에 가잖아요. 그러니 십자가를 알면 부자다 가난하다 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가난도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을 빼앗지 못해요.

병도 빼앗지 못해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이 믿어지는 믿음을 빼앗지 못해요.

그러니 염려 할 이유가 없지요.

바울은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가 하면 죽음조차도 빼앗지 못한다고 했어요.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위에 말씀을 잘 음미해 보세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믿음이 이런 것으로부터도 이기게 할 것입니다. 만약에 외부적 조건으로 탈락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믿음입니다. 그러니 어려우면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은 믿음을 성도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그냥 말장난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천국이나 모두가 현재적으로 와 있는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천국은 나중에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어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알면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동행을 오늘 살펴볼까 하는 겁니다.

성경은 에녹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인지 살펴보아야겠지요.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바라는 것을 현실의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였어요. 다시 말해서 믿음이 보지도 못한 것을 실제처럼 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히 11장의 인물들은 모두가 보지 못한 세계를 믿음으로 실제처럼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각 사람의 삶을 분해하여 보면 믿음의 본질인 예수님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던 흔적들이 절절히 배어 있어요.

구약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를 증거 해 주고 있어요.

이들이 예수님의 삶을 미리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미리 맛보도록 이리 저리 끌고 다녔던 것입니다. 마치 소 고삐를 잡고 끌듯이 믿음이 구약에 성도들을 끌고 다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본받고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믿음이 오면 그 믿음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것도 믿음이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모든 것이 믿음이 역사한 증거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가 하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게 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요.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믿음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성도들이 편하고 좋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면서 주님이 바라는 삶을 살았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기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아픔인줄 아십니까? 나그네는 최소한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나그네가 바리 바리 짐을 싸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겨우 겨우 연명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나그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빈핍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두 벌 옷도 가지고 가지 말고 저금통장도 가지고 가지 말고 하나님이 다 먹여 주시고 잠재워 주시겠지 하는 믿음만 가지고 가라고 했지요. 그게 나그네에요.

인간적으로 살라고 하면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이 소 고삐 잡듯이 끌고 다닌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의 12제자도 그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이 그러합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모습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평범한 일상사들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런 평범한 것조차 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노아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서고 팔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이게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오직 장차 올 심판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남들 놀러 다니며 맛난 음식 먹으러 다닐 때 방주만 짓고 살았어요. 변변한 여행한번 못하고 밥숟가락만 놓으면 방주를 지었어요. 남들한테 미쳤다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살았단 말입니다.

심판을 준비하는 사람이 호사스럽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여러분 6.25 동란 때 피난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산해진미(山海珍味) 먹으면서 피난길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궁중요리 먹으면서 피난하지 않았어요

초근목피하면서 부평초처럼 살았어요.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땠습니까? 허리에 띠를 단단히 동여매고 신발 끈 조여매고 주먹밥 깨물면서 준비하였습니다. 도망치듯이 출애굽을 했어요.

이게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삶에 자세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이 놀자 판을 벌리고 살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나그네라고 하는 겁니다. 나그네가 골프 치러 가겠어요. 나그네가 낚시하러 다니겠어요. 나그네는 해 걸음에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길 떠나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오로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어요. 지나가면서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집에 가서 누리고 맛 볼 것들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본향에 가서 누릴 것 다 누리지 이 땅에선 누릴 것이 없어요. 그러나 장차 올 심판을 모르는 사람들은 누릴 것 다 누리고 먹을 것 다 먹고 할 것 다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였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기 죽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또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가르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가치로 살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 신앙에 허구성을 고발하는 고발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함을 고발하기 위해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증인입니까?

이는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고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동일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이들과 같은 삶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들이 가 있는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 뻔뻔스러움이 어디서 주어지는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의 출처를 알아야 신자입니다. 제가 처음 히브리서 11장을 강해를 시작하면서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본받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과 우리의 다름을 깨닫고 그럼에도 우리가 멀쩡하게 살고 있는 그 이유를 알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람과 사건들은 우리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아벨이 우리를 고발하고, 에녹이 우리를 고발하고, 노아가 우리를 고발하고, 모세가 우리를 고발하고, 아브라함이 우리를 고발하고, 바울이 우리를 고발하고, 스데반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우리를 향하여 사기꾼, 거짓말쟁이, 엉터리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고발하는 것은 우리를 기죽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고발하는 것은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있는지 아느냐! 너희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고 사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도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살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아가 가 있고, 바울이 가 있고, 모세가 가 있는 천국에 갑니다. 어떻게 가느냐고요. 하나님의 은혜로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대신 책망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아 주었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꼴은 이래도 천국에 당당히 갑니다. 당당해지라고 성령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겁니다.

마귀 앞에서 기 죽지 말라고 믿음을 주셨어요.

누가 뭐라고 하거든 예수님을 앞세우라고 믿음을 주신 겁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어요.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꼬락서니보고 낙심하고 한심해하는 인간은 신자가 아닌 겁니다. 우리가 우리 꼬락서니를 제대로 간수 할 수 있으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갈고 닦아서 의를 만들어 천당 가면 되니까요? 우리는 아무리 갈고 닦아도 우리 꼬락서니를 하나님이 만족하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 피만 앞세우고 사는 겁니다.

이처럼 마마보이 같이 예수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라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런 망나니 같은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최고의 신앙은 내가 죄인이고, 이런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못내 고맙고 감사하고 생각만 하고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찡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야 말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 때 범사가 감사로 알알이 배어나게 됩니다. 빵 한 조각 놓고도 감사 할 수가 있어진단 말입니다.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워도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단풍 하나를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숨결을 느끼고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뭔가 큰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만물이 주님이 만드셨고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데반 집사처럼 순교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설령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설령 순교하였다고 하여도 순교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순교하였다고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영광도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게 하셨고 하나님 것인데 그게 뭬가 내 영광이 된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 어떤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벌리신 일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야! 세상에 내가 이렇게 악당인줄 몰랐네! 그런데 이런 악당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어야! 세상에 이런 은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난 지금까지 이런 하나님의 아픔과 자비로운 마음을 모른채 살았구나! 난 지금까지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고 살았구나! 이러고도 내가 신자라고 하였으니! 태산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져 유구무언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옥합을 깨트리고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알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지금까지 예수 헛 믿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는다고 한 것은 관념이고 공염불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가슴에 북받쳐 넘치는 고마움을 삶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이런 뜨거움이 있을 때 그 어떤 환경도 아픔도 감사함으로 이겨 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서 큰 일로 아버지는 감동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못난 놈을 아들이라고 여기고 사랑해 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최고의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그 어떤 일을 많이 하고 잘 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불효입니다. 효도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못난 자식을 품어주시기 위해 가슴 찢어지는 아픔도 감내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부디 말씀을 들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제 에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에녹이 무엇으로 지금 우리의 신앙에 허상을 고발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에녹은 최초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사람이 두 명 있지요.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에녹이나 엘리야를 세상에다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비웃겠지요. 맞아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우리가 비정상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상적인 대접을 받고자 하면 안돼요. 비정상적인 대접을 받아야 정상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음거리로 들려요.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 또 에녹처럼 죽지 않고 올라갔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아무리 쥐어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어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 신자는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비 웃음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니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비웃는다고 해도 섭섭해 하지도 말고 짜증내지도 마세요. 여러분의 일가친척들이 그런다 하여도 반발하지 마세요. 그분들은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해요. 전 명절 때 처가에 가면 먼저 복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요. 먼저 물어 오면 기회다 싶어 말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 합니다. 본인들이 관심도 없고 답답해하지도 않는데 말하면 괜히 이상해져요.

저도 처음엔 복음 전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분위기가 썰렁해져서 있는 기간 내내 불편해요. 하루 아니면 이틀 밤 자고 오는데 거북스러워져요.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겁니다. 말해 보아야 들을 사람도 없거니와 듣지도 않아요.

대화가 안돼요. 그래서 이젠 일부러 고스톱 치자고 해요. 그러다가 노래방 가자 그러면 따라가서 노래 부르다가 와요. 그럼 놀래요. 아마도 속으론 그럴 겁니다. 무슨 목사가 노래방에 가느냐! 라고 할 겁니다. 아마도 그러니 교회가 부흥되지 않지! 라고 생각을 할 거예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목사의 행동에 따라서 교회가 부흥되고 안 되고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교회 부흥은 목사의 행동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만약 목사의 행동에 따라서 교회가 부흥된다고 하였으면 저희 교회는 지금쯤 수만 명은 넘어야 해요. 전 교회 처음 개척할 때는 열심이라고 하면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특심했거든요.

일 년 365일 철야하고, 산기도 다니고, TV도 속되다고 안보고 속된말로 거룩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교인들 모아 놓으면 도망가고, 모아 놓으면 도망가고 해요.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고 삐지고 가요. 하나님이 복음 붙잡으라고 다 흩은 겁니다. 사람 믿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붙들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땐 하나님이 참으로 야속했지만 이제 생각하면 그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만약 그 때 교회가 부흥되었다면 지금쯤 전 정치하는 목사가 되어 있을 겁니다. 무당 노릇 열심히 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교회 붙들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붙잡으라고 한 것입니다. 노아처럼 종말을 준비하라고 나그네로 만든 것입니다. 참 감사하지요. 이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 깨달아져요. 깨달아지니 감사가 되는 겁니다.

다시 에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에녹은 어떻게 하였길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을까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나타난 결과는, 감추어진 원인에 따라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녹이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도 감추어진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에녹에게 나타난 결과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입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던 원인을 본문에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에녹의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인지 알아보아야지요. 신앙생활이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되거나, 장사하는 사람은 가게에 손님이 많아서 매출이 많이 올라간다거나, 학생이 시험을 잘 친다거나, 실직자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였다거나, 노처녀가 좋은 신랑 만나서 시집을 잘 간다거나 라는 식으로 자기에게 좋은 일들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다는 일들이 일어나면 난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받았고 이런 은혜를 받았다! 라고 자랑하잖아요. 반대로 세상 가치관으로 좋지 않고 창피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생각해서 입 딱 닫고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자기 가치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자기 생각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쁘고, 내가 슬프면 하나님도 슬프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 뜻에 가두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하나님 뜻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한 것은 성도의 몸에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함입니다.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은 예수님 그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 속에서 예수님의 그림들이 하나 하나 그려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삶 속에 예수님의 흔적들이 하나 둘 아로새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내는 그림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흔적들이므로 성도에게는 아파요. 이걸 베드로는 불같은 시련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지워져 가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들이 거울에 서렸던 입김들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모습이 드러나듯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내는 그림은 영웅호걸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존재감 없이 사라지는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란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정복하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쓸쓸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독방에서 잡초처럼 죽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을 던지고 이단이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하고 급기야는 목숨까지 거둬가는 일이란 말입니다. 누가 신앙을 기쁨이라고 했나요?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아픔입니다. 육으로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아픔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 되듯이 기도한 것이 쑈가 아닙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모세혈관들이 터져서 피가 땀으로 배출 되었겠습니까?

예수님도 아파한 그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걸어야 하는 것이 신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가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주셔서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셔도 아픔을 없애 주는 도우심이 아니고 아픔 속에서 참아내는 도우심입니다. 그러니 아픔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과, 인간이 기뻐하는 것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이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해요.

히 11장에 사람들이 이 다름에 속한 사람들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그린 그림이 있거든요. 에녹에게도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 그림을 찾아봅시다. 성경엔 에녹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추적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짧은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에녹에게 그린 그림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최초로 에녹에 대한 기록을 살펴봅시다.

창 5:21-24=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건 뭡니까?

아니 고작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의 기록치고는 너무도 단순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니 자식 낳고 산 것이야 모든 사람들이 다하는 것인데 그게 무슨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칭찬받을 일입니까?

알다시피 에녹은 365세를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에녹의 일생을 둘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에 비밀이 있어요. 자세히 보세요. 에녹은‘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을 했다고 하지요. 에녹이‘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다고 합니다.

그럼 에녹은‘므두셀라’는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단 말이 되지요. 정황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면 굳이 에녹은‘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 하였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본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에녹이‘므두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는데,‘므두셀라’는 낳고 난 후에 뭔가 마음에 변화가 생겨서 하나님과 동행 한 것이라는 해석이 되잖아요.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 에녹은‘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변화된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변화된 삶이란? 개과천선하였다는 말 보다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았는데 이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단 말입니다. 그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된 배경엔‘므두셀라’가 있는 것입니다. ‘므두셀라’에게 비밀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65년을 살았던 에녹이 갑자기‘므두셀라’를 낳고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인명이나, 지명이나, 사건 등은 모두가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이름이 아니고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이 행할 일들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예로 듭시다. “모세” 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졌다” 라는 뜻이지요. 이는 장차 모세를 통하여서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할 것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 라는 이름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류 모든 사람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백성만 구원한 것이잖아요. 그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도 뜻이 담겨져 있겠지요. 맞아요. “므두셀라” 라는 이름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가 죽으면 쏟아진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둘째로는, “새로운 세계가 확장된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두 가지를 조합해서 해석하면 “ 므두 셀라가 죽으면 재앙이 쏟아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라는 얘기가 됩니다. 이러면 “ 므두 셀라” 라는 이름은 하나의 “징조” 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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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강혜령이라는 분이 댓글로 므두셀라의 죽음과 홍수 심판을 계산하여 주신 것을 참고로 첨언하여서 올려놓았습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고 노아가 600살때 홍수가 났어요(노아가 950세를 살았는데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다고 했거든요).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으니까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후에 782년을 더 산거구요,(969-187=782)

라멕은 777살에 죽었고(아빠보다 5년 일찍 죽었네요) 182살에 노아를 낳고 595년 더 살았대요,

노아가 600살에 홍수가 났는데…

라멕 죽고 5년 후에=므두셀라 죽은 해에 (와우!) …진짜 났어요.

홍수가… 진짜 이게 딱 맞을 거라고 생각 못했거든요;;

어떻게 므두셀라 이름 뜻이랑 착착 맞게 이뤄지고 187, 182이런 걸 어쩜 이리도 고대로 보관해놨는지 새삼 말이 안나오게 신기해요..ㅋㅋ아 진짜.. 놀라우신 하나님! (당연한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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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으로 하여금 므두셀라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므두셀라’는 그냥 자식이 아니라 “예표적인 자식” 이라는 것을 알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받으면 긴장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이건 뭔가 불길한 이야기이지요. 종말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으니까요. 그러니 에녹이‘므두셀라’를 부를 때마다 이 아이가 죽으면 종말이지 라는 긴장감이 들겠지요.

이름이란 가장 많이 불려지는 거잖아요. 그러니 에녹은 자식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계시가 번뜩 번뜩 생각나는 겁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는 낳기 전 까지만 해도 종말은 무슨 놈의 종말이야!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인데! 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를 낳고 나선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뭔가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네! 이 세상을 쓸어버릴 생각을 하고 계신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역으로 추적해서 보면 에녹도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본문에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종말을 보게 하였고 다른 삶을 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는데 에녹은 믿음으로 안 것입니다.

그러니‘므두셀라’가 죽으면 장차 일어날 일과 새로운 세상을 본 것이 에녹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오고 나자 에녹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막연하던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던 하나님이 실제 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밖에서 신선놀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구석 하나 하나를 다 살피고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은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인간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천주교에선 하나님께서 세상을 인간에게 맡겼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신자는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세상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세상은 불타니 빨리 도망하라고 했어요.

천주교는 인본주의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예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신학이 나오는 겁니다.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의 시다바리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 맨 날 밥 먹고 인권 운동한다고 하는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입장에선 인권은 없어요. 아니 저주 받은 죄인에게 무슨 인권이 있어요. 그냥 바퀴벌레 밟듯이 죽여도 아무런 항의를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죄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교만임을 알아요. 에녹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에녹 역시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을 겁니다.

정의구현사제단처럼 정의를 외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받고 나선 확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세상을 쓸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말하고 행동하는 것하고는 상반된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로 본 세상은 저주 받아야 할 세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종말을 외치고 다닌 것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걸 신약의 유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어요.

유 1:14-15=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다가 누구인가 하면 혈육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그런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에녹을 보았던 것입니다. 에녹이 무엇을 하였는가 보니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종말을 외치고 다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신약 성경에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에녹을 보고 그랬을 겁니다. 미친 사람 같으니라구!

아니 그래 세상을 창조한지가 얼마나 됐다고 종말을 고한단 말인가? 무슨 멀쩡한 하늘에 날 벼락 같은 말을 하고 다닌다고 욕을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난 자들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세상이 망한다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좋게 보지 않아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사람 입장에선 재수 없는 인간들이예요.

제가 욕을 가장 많이 듣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를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면 목사님은 큰 교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습니까? 라고 해요.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 그럽니까? 그래요.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잘 되고, 잘 되고, 항상 잘 되는 것뿐입니다. 아가리를 크게 벌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채우시리라고 해요. 거기다가 하나님은 보이는 교회가 망하는 것을 원합니다! 라고 하면 난리를 치죠.

십자가 복음을 말하면 시큰둥하는 이유는 땅에 말을 하지 않고 하늘에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복이라고 해야 좋아라 하는데 맨 날 세상에서 잘되는 것인 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에 의미를 알고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속으로 재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해요. 신경질 나고 불편해하는 마음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요.

목사들에게도 지금 한창 교회가 부흥되려고 하는데 보이는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교회가 교회다 라고 하면 너만 잘났냐! 나도 안다! 라고 하면서 싫어해요. 안다고 하면서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안다고 하면 안다는 것으로서의 행동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안다고 하면서 행동은 모르는 것으로 나타내요. 그건 아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이 종말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욕먹을 일들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욕먹다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되어 있는 운명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팔자가 아주 더러워요. 그게 신자의 팔자예요. 아무튼 에녹은 ‘므두셀라’를 통하여서 종말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 종말이 온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심판 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종말이 온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므두셀라’가 태어나자 말자 세상은 종말 속으로 던져진 것이지요. 왜냐하면! ‘므두셀라’가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1년 살다가 죽을지, 10년 살다가 죽을지, 50년 살다가 죽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긴장의 하루 하루가 되겠지요. 이 놈이 혹시나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르니까 긴장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 아닙니까?

아니 몇 년 살다가 죽을 것이니 그 동안 준비해라!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몇 년을 살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 아이가 죽으면 종말이 온다 라고 하니 얼마나 불안 불안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종말이 언제 어느 때 일어날 것이다! 라고 알려 주는 것이 복일까요? 안 알려 주는 것이 복일까요? 아니 직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죽을 날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알려 주는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그러면 아! 내 인생이 앞으로 5년 밖에 안 남았구나!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야 되겠구나! 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죽기 이틀 전에 예수를 믿겠어요.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내가 결정 한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저 같으면 죽기 이틀 전도 아까워요. 죽는 날 아침에 주여 잘못 했습니다.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라고 했을 것입니다. 죄인의 속성상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죄인이 미리 알아서 예 하나님 이제부터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신 축복 중에 내가 죽을 때가 언제인지 안 알려 준 것과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날짜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목사님 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라고 항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런데 죄가 여러분 보다 더 센걸 어찌합니까? 죄가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지 않고 내 육신의 본능대로 살게 하는 걸 어찌합니까? 그러니 마음은 미리 미리 준비하고 살 것 같아도 막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그러니 에녹에게 ‘므두셀라’가 언제 죽을 것인가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사태가 이러하니 에녹은 하루 하루 사는게 살 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요. 하루 하루 하나님을 안 찾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공포감을 잔뜩 줘놓고 하나님을 찾게 한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말을 따른 것은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아니 공포를 주고 하나님을 믿게 한다면 안 믿을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다 믿지! 맞아요. 하나님이 지금 공중에 나타나서 너희들 내일 모래 다 죽는다! 라고 하면 지금부터 회개한다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자기 백성들만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종말이 있다는 것은 믿음을 받은 성도만 알아요. 믿음 없는 사람은 종말을 말해도 농담으로 여기고 안 믿어요. 그러나 믿음을 받은 신자는 그 말이 믿어지기 때문에 정신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뭔 줄 아세요.

공포심을 주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성도들에게만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줬어요. 너희들 내 말 안 들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해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지금 농담 하십니까? 웃기지 마세요! 라고 해요. 지옥이 있는지 천당이 있는지 죽어 봐야 알지! 라고 해요. 그러나 성도는 죽지 않고도 믿음으로 알기 때문에 예! 하나님 조심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걸 모르면 교회에 안 옵니다. 예수 안 믿어요.오늘 같이 좋은 날 어디 놀러 다니지요.

그럼에도 여러분이 이 시간 여기 이렇게 고리타분한 곳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믿음이 여러분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공포심을 심어주지 않으면 말을 안 들어요. 이런 측면에서 예수 잘 안 믿으면 매를 맞는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선 징계라고 하지요. 좌우지간 신자나 자식이나 매가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게 인간입니다. 곱게 말해서 말 듣는 인간은 세상엔 단 한명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도 자식을 초달하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학교나 군대나 개판이 되는 것은 매를 안대서 그래요. 그러니 군기도 없고 학교 규율도 없고 개판입니다. 이젠 학생이 선생을 두들겨 패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군대는 인권으로 세워지는 곳이 아니에요. 기합과 매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왜인 줄 아세요. 군인은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엔 인권이 통하지 않아요. 명령만 있어요. 깡다구만 통해요. 깡다구는 기합과 매를 통해서만 길러지는 것입니다.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좋게 말해서 말을 들어 쳐 먹는 자가 아니에요. 이상과 현실을 달라요. 이상이야 한번 말하면 척척 알아먹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자식들에게 한 번 말하면 열을 알아먹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군인에게 알아서 훈련 잘해라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매를 댈 필요도 없고,,

자식 키우면 알잖아요. 이 새끼들이 한번 말해서 알아 쳐 먹는가? 니에요. 수없이 싸우고 싸워야 한번 들을까 말까해요. 그 아이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안에 또 다른 센 놈이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반발하고 튕기는 겁니다. 모두가 죄 때문이에요. 이런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 감상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감상주의와 현실은 완전히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이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해서 알아먹은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공포심을 주고 매를 대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징계라고 합니다.

히 12:6-13=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보세요.

하나님이 아들로 대우해 주시는 증거가 징계라고 하잖아요. 징계는 왜? 받습니까? 말 안 들으니 받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 신앙생활 잘못하면 혼납니다. 교회도 안 오고, 말씀도 모르고, 놀러 다니고,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 보세요. 진정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어느 날 종용히 병원에서 면회하자고 할 겁니다. 멀쩡한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멀쩡한 남편이 죽어버리던가? 건강하다고 믿었던 몸이 이상이 생기던가? 좌우지간 돌발적으로 뭔가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전 우리 교인들이 지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 저 인간 말로 해서 안 되겠네요! 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요. 아니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겐 징계를 한다고 했잖아요. 징계를 해야 약속이 맞는 거지요.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대로 살라고 십자가에 죽은 줄 아세요. 그래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그렇게 삽니까?

성령은 육신의 소욕을 쳐서 복종케 하지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역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 육신이 가만 있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게 반발을 해요. 성도는 이 두 사이에 끼어서 살기 때문에 곤고한 것입니다.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활동을 합니다. 그러니 성령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늘 육으로서 죄를 발견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고난인 이유는 성령이라는 시어머니가 성도들 속에서 잔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아프게 찔러대요.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새기게 합니다. 여러분이 한번 육신이 편한 대로 이끄는 대로 살아보세요. 성령이 태클을 걸지요. 그래도 안 되면 손 좀 봐 주려고 종용히 면회를 신청합니다. 그러면 육신은 골치 아픈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징계를 통해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들로 허송세월 보냈다는 것을 책망 받게 되고 돌이키게 되는 겁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개과천선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말 안 들으면 혼 납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기존 교회에센 공갈로 이용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바쳐서 복 받고, 열심히 해서 화를 면하라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하여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을 따내고 화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이 복을 때내고 화를 면하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과 영은 똑 같은 징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하는 것과, 복을 따내고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으로 전혀 다른 양상의 신앙생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교회에선 죽는다는 말과 지옥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해요. 그러면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은 달리 반응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대처 방법을 찾고자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에 대처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인간들은 지옥 소리 그만하고 죽는다는 소리 그만 좀 하라고 해요. 왜? 좋고 좋은 말이 그렇게 많은데 하필이면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말을 하느냐고 짜증내요. 집안에 마누라나 새끼들도 죽는다는 말하면 화를 내요. 이건 신앙을 실제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육신에 미련이 있고 세상에 미련이 있기 때문에 종말이고 죽음을 말하면 짜증내는 겁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종말을 행해서 가면서도 종말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10대에는 시간이 10Km 가고, 20대엔 20Km 가고, 40대엔 40Km 가고, 60대엔 60Km 간다고,,,,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금새 금새 주일이 돌아오고 금새 일 년이 지나요. 벌써 2013년도 몇 일 안 남았어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삶에 집착이 강해져요. 젊었을 땐 까짓것 죽으면 죽지! 라고 했는데 늙어갈 수록 죽는다는 말을 기피하게 됩니다.

종말이 가까워지면 속된 말로 죽을 준비를 해야 함에도 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 때문이에요. 오직 인간만이 이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성령을 주셔서 늙은이에게 꿈을 준다고 합니다.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늙은이란? 나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도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세상에 대하여서는 미련이 사라지고 하늘에 대한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성 도는 성령이 꿈을 주기 때문에 육신에 미련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세상에서 퇴거하고 천국에 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꿈을 꾼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꿈을 꾸며 살게 합니다. 예수님이 가셨으니 이제 언제 올 줄 모르잖아요. 그러니 긴장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긴장하라는 것은 주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 라는 자세로 살란 말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의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지요. 그러자 어떤 종들은 열심히 일하고 남기는 삶을 살고, 어떤 놈은 주인이 없다고 놀고 농땡이 치고 살았어요.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주인이 있건 없건 주인을 의식하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남기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농땡이를 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 종말은 지금 준비하는 것이지 나중에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을 준비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요즘같이 사고 많은 세상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아직 젊은데 예수는 나중에 믿어도 되겠지 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죽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면 밤중에 자는데 하나님이 가자 할지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다.

목숨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날에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날 그 날 주님 앞에 선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학숙제 한꺼번에 몰아서 하듯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루 하루 일기를 쓰듯이 그 날 그 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감사하려고 하지 말고 그 날 그 날 감사하세요. 믿음은 항상 현재이어야 합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현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제나 내일은 죽은 시간입니다. 현재 만이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산 자라 함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와 같이 또는 주인을 늘 의식하고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과 같이 신앙을 현재화 하여 살아가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인 히브리서에 에녹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에녹이 구약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이야기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승천 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했어요. 내가 다시 오리라고,,, 이제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아무도 주님이 오실 날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왜? 그 날과 그 때를 알려 주지 않았을까요? 이는 항상 주님이 금방이라도 오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동화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제이듯이 믿음 또한 실제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약속했잖아요.

성도는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그대로 믿고 살아야지요. 약속을 믿고 안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집착하면 안 되지요.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믿는 척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삶을 투자하고 살아갑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므드셀라를 통하여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실제로 믿고 살았습니다. 실제로 살다보니 세상 것과는 자연히 멀어진 삶을 산 것입니다. 므드셀라를 얻기 전 까지만 해도 즉 믿음이 없었을 때는 자기를 위한 육신을 좇아가는 삶을 살았지만 믿음을 갖고 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란? 종말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라면 자연히 복음을 알기 전의 삶과 복음을 알고 난 후의 삶의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강요되어질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증거되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은 행함이지만 믿음이 만들어 내는 것은 순종입니다.

인간의 몸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찾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피곤함도 힘듦도 모릅니다. 그 일이 기쁨이고 의미이기 때문에 피곤이라 하지 않고 즐긴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안하고, 피곤하다고 안하고, 바쁘다고 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느니, 바쁘다느니 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다 핑계이지 실상은 그 속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머리로는 천국을 그리면서도, 몸은 세상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농담으로 여기니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지옥이 안 믿어지니 그렇게 사는 겁니다. 올바른 믿음은 반드시 믿는다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으면 에녹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삶이 그 믿음을 증거하는 셈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에 따른 행함이라고 합니다.

강요된 삶은 남의 삶이지 자기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몸으로 그려내야 신앙생활입니다. 그럼 무엇을 믿느냐가 남겠지요. 믿습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가 중요합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으니 그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어 놓아 보십시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것인지 확인해 보세요. 하나님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이라고 우기면 안 돼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에녹 시대엔 므드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이 있는 성도는 주님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얻어진 구원이기에 예수님의 재림이 더욱더 사모가 되는 것입니다.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그 세상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에 선진들이 믿음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그리며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았듯이 우리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삶이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믿음으로 사모하며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신 믿음으로 종말을 알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을 소망 삼고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ttp://blog.daum.net/cross114/ 울산목양교회 정낙원목사님

믿음(4) 에녹의 믿음(히브리서11:5-6)

믿음(4)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11:5-6

오늘은 “믿음” 4번째로 “에녹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주 “아벨의 믿음”을 통해 어떻게 예배 드려야 할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던 1세기에는 참으로 예배 드리기 힘든 때였습니다.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자신의 지위와 명예, 재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 놓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역사가 시작된 시기에 예배로 인하여 순교당한 아벨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우리 자신을 먼저 드리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예배에 둠으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 본을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창조 1세기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에녹의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1년과 유사한 365년 살았던 에녹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반복하여 강조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합하여 평생 하나님과 동행했고, 평범한 생활 속에 동행했으며, 죽음을 초월하여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죽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까? 믿음으로입니다.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도, 가정생활을 해도, 공부를 해도, 봉사를 해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엘리야 처럼 대단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민족 지도자로서 민족을 해방시킨 지도자도 아닙니다. 아브라함 처럼 고향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바울 처럼 위대한 선교사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윗처럼 민족의 추앙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기초를 가르치다”, “연단하다”는 뜻과 집이나 성전을 “봉헌하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하나크”에서 유래한 말로 “봉헌된, 헌신된”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경건한 자손인 에녹의 아버지 야렛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자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아담의 7대 손으로 하나님께 드린 자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므트는 심판, 죽음을 의미하며, 살라트는 보낸다라는 뜻입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의 뜻은 므두셀라를 보내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무두셀라가 죽으면 세상도 끝난다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기록인 969년을 산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세상이 끝이 있다고 믿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을 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에녹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창세기 5장 21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비전을 맞추고 보폭을 맞추며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에녹 당시 사람들을 보십시오. 창4:16절 이하는 보십시오. 대단한 업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에녹성을 쌓았고(창4:16), 야발은(20절)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21절) 수금을 치고 퉁소를 부는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22절)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도 아닙니다. 돈과 권력과 쾌락과 동행하는 삶이었고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자병 고주병에 걸려 있는 시대입니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사랑과 섬김의 대상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자신과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사는 시대입니다.

동물이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태고 때와 지금은 인간이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하나 태고 때나 이 성경이 기록될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비슷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업적을 통하여 자기 기쁨을 추구하는 시대에 에녹은 뛰어난 업적이나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아들이 죽으면 세상이 끝이 온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1세기 성도들에게 바로 에녹의 믿음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1세기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앙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본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신앙의 초년 시절에는 큰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표적과 기사, 여러 가지 능력, 성령 충만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0장 32-34절을 보십시오. 고난을 참았습니다. 비방과 환란으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욕과 박해, 심지어는 재산을 몰수 당했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신앙인들과 함께 입장을 같이했습니다(히10:32,34). 고난을 잘 견뎌냈을 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동정하였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형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였던 자들입니다(6:9-10).

그러나 계속적으로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의 핍박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당한 심문(행 3-4장), 사도들이 당한 투옥 및 심문(행 5:17-41), 스데반의 순교(행 7장, 사울이 행한 핍박(행 8:3; 9:1-2), 바울의 선교 여행 중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수난(행13:45-50; 14:2, 19-22; 17:5-14; 21:30-36; 22:12-30) 등을 보면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로마의 박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아마 이 때는 히12:4절에 “너희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을 볼 때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박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두려움(히10:32-34)이 생겼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미련(4:14-10:39; 13:9,10)이 생겼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고 유대교와의 타협 혹은 유대교에로의 복귀 유혹을 가장 심각하게 받았을 대상은 당연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예수 믿는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출세하는 것도 아니니까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점차 지쳐 있었습니다(히2:1-2). 거대한 힘 앞에서 조그마한 가정교회에서 모여(히13:24)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저 물결치는 대로 시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히2:1). 그들 중에는 신앙을 소홀히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히2:2).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약화되어 가는 위험에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히2:1-4). 믿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가는 사람도 생겼습니다(히3:12,13; 4:1,11; 6:11; 12:15).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강퍅케 된 사람도 생겼습니다(히3:13). 마음이 믿음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불신으로 향한 유혹을 느꼈고(히3:12-14), 죄의 기만이 그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기 시작했습니다(히3:13-16). 그들은 영적으로 자라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히5:11-14). 어린 아이와 같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성경공부하는 것도, 구역모임하는 것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기도회 하는 것도 훈련받은 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점차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히10:25). 어떤 이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히6:4-6, 10:26-31, 12:15-17). 신앙생활을 피곤하게 여기며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아벨의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하고 이제는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처럼 유명한 발명가가 못되어도, 뛰어난 예술가가 못되어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가 못되어도, 위대한 건축가가 못되어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14:23절에서는 바울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일하고 믿음으로 예배드리고 믿음으로 봉사하고 믿음으로 직장 생활하고 믿음으로 공부하고 믿음으로 대학을 선택하고 믿음으로 자식 기르고 믿음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받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불이익과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시대였습니다.

에녹은 아벨이 죽은 후 아담의 아들 셋의 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녹이 아담의 7대 손입니다. 인류 초기 역사입니다. 생생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십시오. 문자적인 연대로 계산한다면 아담과 한 시대에 산 사람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930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입니다. 4장 23절을 보십시오. 힘센자가 여인을 차지합니다. 악한 자가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잔인합니다. 교만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얼마나 타락해 있습니까? 이런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신이 아닙니다. 칸트가 말한 요청 신도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정신위생에 도움을 받기 위해 믿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루터 종교 개혁을 할 때 이제 최후 변론을 하기 위하여 웜스 공회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변론에서 정죄되면 그는 화형을 당하던지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고민하며 고통가운데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루터에게는 참으로 신앙이 좋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입니다. 욥의 부인처럼 남편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반대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에 헌신하지 못하도록 발목잡는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부인은 참으로 신앙이 좋은 분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믿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시토수도회의 수녀였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의 주장에 공감하고 11명의 수녀와 함께 수도원을 떠나 1525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신부인 루터와 결혼하여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핀 사람입니다. 루터가 두려워 떨고 있자 그녀는 상복을 입고 울기 시작했답니다. 루터는 왜 우냐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돌아 가셔셔 웁니다.” “왜 이런 망령된 소리를 하느냐”고 루터는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 그 부인은 “왜 하나님이 돌아가지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게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있는냐”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루터는 웜스 공회의 모든 기와 장이 다 마귀일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나아간다하며 소리치고 나가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십니다. 침묵하는 것과 같이 보이니까 니체처럼 돌아가신 하나님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을 일으켜 주시고 엘리야를 통하여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신앙인의 마음 속에 삶 속에서 살아 계심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 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쁜 늘 충만하네)

둘째, 우리는 심판하시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은 심판하는 하나님과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은 심판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는 근거는 유다서 1장 14-15절을 보면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번거롭더라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행하여 심판을 예고합니다. 주님이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뭇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믿음없이 행하는 악한 일 가만히 놓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슬린 완악한 말로 인해 정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300년을 산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예고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무드셀라로 지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는데 여기에서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놀라는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녹이 므드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이 므두셀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에서 그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므트는 심판, 죽음을 의미하며, 살라트는 보낸다라는 뜻입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의 뜻은 므두셀라를 보내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무두셀라가 죽으면 세상도 끝난다다는 말입니다. 매일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언젠가는 종말이 온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았으며 사람들에게 종말을 예고했을 것입니다. 에녹은 심판을 선언합니다. 언제가는 멸망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을 수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멸망이 온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5장 25절에서 에녹의 아들 무드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28절에 보면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무두셀라의 손자입니다. 계산해 보면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몇 살이 됩니까? 바로 969세가 됩니다. 무두셀라는 969살에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므두셀라가 죽을 때 홍수는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졌습니다. 개인 종말도 역사의 종말도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언젠가는 성경의 약속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땅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건강, 지식, 명예, 물질 영원히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다 놓고 갈 날이 있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 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 때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 수 있습니다. 동행하려면 목적지가 같아야 하고 보폭이 맞아야 합니다. 삶의 방법이 같아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뜻에 맞추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에녹은 제멋대로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에 맞추어 산 것입니다.

오늘날도 인본주의가 팽배합니다. 하나님은 없이 인간끼리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끼리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끼리 잘 살 수 없습니다. 코로나 19를 보십시오. 인간끼리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향락 주의가 판을 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무슨 심판이 오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노아의 홍수로 경고했듯이 코로나 19같은 것을 통해, 자연재해를 통해, 기후 변화를 통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니다. 상 주시는 하나님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믿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에 비해 에녹은 365살로 그리 오래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 제 일호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가라지로 살다가 지옥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영벌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상급이 분명히 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기쁨의 면류관(살전 12:19), 선한 싸움을 싸운 자에겐 의의 면류관(딤후 4:8),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한 자에겐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고난받고 순교한 자에겐 생명의 면류관(계 2:10),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한 자에겐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땅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질병도, 고통도, 증오도, 슬픔도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갓 미물에 불과한 애벌레들도 어느 날 나비가 되어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봅니다. 나뭇잎을 먹고 살던 것입니다. 나비가 되면 이제 삶의 질이 바뀌어 집니다. 꿀을 먹고 삽니다. 땅을 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우리 인생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영국의 크리스챤 문필가인 C.S 루이스는 “역사를 읽어보면 현세를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이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한 후배가 와서 “목사님의 일생에 있어서 마음을 움직이게 한 삶의 동기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답니다. 그때 목사님은 “나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일생동안 살았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학자 나인홀더 니버 박사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이 심각하게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심판대 아래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밀물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아니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우리는 상급 주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에녹처럼 평생 살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300년 동안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홀로 사는 삶이 편합니까? 둘이 사는 사람이 편합니까? 동행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동행하려면 같은 목적지를 행해 가야 합니다. 상대와 보폭을 맞추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앞길을 예배하시고 적들을 물리쳐 주신 하나님이 에녹시대에서도 타락한 문화 속에서 에녹이 끝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심판하시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글들을 다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간 때이기 때문이니라.’”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 말로 얼마나 축복된 인생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인생 여정 동안 함께 하시니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니까 사람들이 새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만군의 하나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 매일 매일 함께 걷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에녹은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동행하는 행복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루일과를 시작하면서 주님과 함께 출근하고, 그분 모시고 사업하고, 주님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쁩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이런 복은 자동적으로 주어집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옛날 선지 에녹같이 주만 따라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둘째, 죽은 후에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는 말은 에녹이 땅에서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이사하였다는 말입니다. 옮기웠으니는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는 말입니다. 이주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이 땅에서부터 천국으로 데려가신 사실을 말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통과해야 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 둘 나옵니다. 에녹과 엘리야(왕하2:11)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는 자도 둘이 나옵니다. 에녹(창5:24)과 노아(창6:9)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결국 승천한 사람은 에녹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고 천국에 갈 것을 소망할 것입니다. 에녹과 엘리야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런 복을 누리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재림할 때 성도들은 다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면 홀연히 변화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51)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육체의 변화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상급주실 하나님을 믿으면 죽음 이후에 펼쳐질 영광스런 세상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를 가지고 소망 가운데 죽음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었습니다. 해변에서 모래성도 만들고, 고기도 잡고, 조개도 줍고, 달리기도 하고 재미있게 돌았습니다. 그러다 손자가 지쳐 마루에 잠을 잤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들어 침대에 눕게 했습니다. 일어나 보니 손자는 포근한 침대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사람들을 영원한 천국에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경쟁도, 질병도, 노년에 달고 다니는 통증도, 근심도 걱정도 없은 영원한 곳에서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 보면 이런 축복은 자동적으로 주어집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죽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아들에게, 딸에게, 부모에게, 동료에게 인정받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치인들을 선거철이 되면 국민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을 기쁘게 하면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주심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민족을 해방시키고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 모세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 40년 동안 통치한 다윗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에녹처럼 특별한 업적이 없어도 그저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300년 산 에녹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우리 하나님은 상을 잃지 않은 것이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섯 달라트 남진 자만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달란트 남긴 자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 원치 않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아 눈문로 힘겹게 양육하는 부모에게 우리 하나님은 언젠가 그 눈물을 닦하주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해 주실 때가 옵니다.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상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을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를 기쁘게 한 자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19시대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다 할 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상급 주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기대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주일 마다 가정에서,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을 우리 하나님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유혹이 있을 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3.27.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에녹은

말씀: 히브리서 11:5

요절: 히브리서 11:5

아담의 직계 아들 아벨의 믿음에서 곧 바로 7대손 에녹으로 넘어갑니다. 2,3,4,5,6대의 자녀들은 족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에녹은 성경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으로서 환란 전 이 땅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의 휴거(들림받는 것)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예언적 사건의 예표라는 점에서 에녹의 사건은 교회 성도들의 한 모델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벨과 에녹은 둘 다 믿음으로 살았고, 둘 다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지만 그 믿음의 보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벨은 의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translated)을 받았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그대로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야고보는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옥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건짐 받았지만 초대 교회의 많은 순교자들은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과학적 실험과는 달리 동일한 원인에 동일한 현상이 결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상황마다, 개인마다 하나님께서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누구의 경우에, 어떤 경우에 이러했으니 나도 그럴 것이다.”라는 식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아도 그 사람과 같이 되게 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결과 죄인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언제나 같지만 그 나타나는 현상들은 경우마다 다릅니다. 이 땅에는 믿음으로 살다 아벨처럼 죽은 이들도 있지만 에녹처럼 하늘로 들림 받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칠대 손이며 ‘야렛’의 아들로서 그 이름은 “헌신된, 바쳐진”(dedicated)이란 뜻입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by faith) 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믿음으로 들림 받았습니다. “들림 받다”(translate)는 말은 옮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나오는데 처음에는 사무엘하 3:10에 이스라엘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부터 다윗의 집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다음은 골로새서 3:10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골3:10). 성도들은 모두 영적으로 왕국이 옮겨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죄악의 왕국, 어둠의 권능에서 하나님의 왕국, 빛의 왕국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어둠의 권능, 죄의 사슬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는 이미 한 차례 에녹과 같이 옮김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옮겨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나고 주님께서 “이리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순간 무덤에서 잠자던 자들은 물론이요, 살아 있는 우리는 이 땅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저 하늘로 들림 받게 됩니다. 몸이 순식간에 더 변화되어 순간 이동한다는 것입니다(고전15).

창세기 5장을 보십시오. 아담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조상들이 차례대로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낳았더라, 죽었더라” 의 반복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5:21-24절에 갑자기 이런 반복의 사슬을 끊고 “죽었더라” 가 없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took)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창5:21-24). 에녹은 300년을 하루같이 주님과 동행하다가 어느 날 이 땅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경찰에서 아무리 찾아도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실종이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유괴된 것도 아닙니다. 더 깊은 종교적 수련을 위해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데려 가 버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하나님께서…형제(자매)를 데려 가셨습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육신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데려 간 것은 ‘영과 혼이지 몸’이 아닙니다. 몸은 이 땅에 남겨 두고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이의 몸을 땅에 묻거나 화장을 하거나 등등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러나 에녹의 경우 “하나님께 그를 데려 가셨다” 는 것은 영과 혼이 아니라 몸 자체를 산 채로 하늘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란 말이 죽어서 혼이 떠났다는 말이 아니라 전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는 뜻이란 사실을 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라고 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 에녹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1.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다. 2.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다. 3. 에녹은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다. 4. 그는 아들을 낳은 후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5. 36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데려 가셨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그에 대한 정보가 몇 가지 더 추가 되어 있고, 설명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과 유다서에 에녹이 무슨 일을 했는가? 어떻게 살았는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에녹과 에녹의 믿음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에녹과 동일한 믿음의 영을 주셨음을 믿습니다(고후4:13).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5). 첫 마디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에녹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무엇을 바치거나 싸우거나 떠나거나 버리거나 지키거나 등등의 능동적인 무슨 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는 믿음을 살아 있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칭찬하고 따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에녹이 믿음으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쉽게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읽어 보십시오.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에녹이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한 것이 맞다 할지라도 지금 히브리서 기자의 초점은 동행이 아니라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것’입니다.

에녹은 무엇을 믿은 것입니까? 자신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받아 들여지는 법에 대해서 증거했다면, 에녹은 믿음으로 죄인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고, 지옥이 아니라 하늘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에녹이 어떻게 죽지 않았습니까? 그가 에덴의 동산으로 들어가서 생명 나무 실과를 훔쳐 온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신비를 깨우치고, 불사약을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신의 인물도 아니고, 천사의 씨도 아닙니다. 그는 아담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던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에녹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보여 준 실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 역시 ‘믿음’이란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40)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00세가 된 노인이 아들을 얻는 것이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믿음도 큰 믿음이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진다’는 믿음을 가졌던 에녹의 믿음이야말로 정말로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롬10:17).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생기는 것이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엡2:9). 믿음은 성령으로 인해 맺어지는 열매입니다(갈5:22). 에녹이 주님과 300년을 함께 걸으면서 주님으로부터 듣고 믿은 것은 ‘세상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지만 너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다’ 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에녹은 노아가 하늘에서 비가 온다는 사실을 믿었듯이 자신이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이 믿음으로 되는 일입니까? 하늘로 옮겨지는 것이 믿음으로 되는 일입니까? 에녹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생불사를 꿈꿉니다.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 올라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에 대한 해답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하늘로 옮겨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에녹은 가인이나 아벨이나 아버지 ‘야렛’과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입니다(히9:27). 그런데 에녹이 믿은 믿음의 내용인 즉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입니다. 그는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지만 ‘믿음으로 살 때’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첫 사람입니다. 믿음은 죽음을 이깁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사망을 이깁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옮겨집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옮겨집니다. 에녹처럼 우리는 옮겨집니다. 우리는 이 썩을 몸에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타 없어질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 마련된 우리의 몸, 우리의 맨션으로 옮겨집니다.

창세기 5:22에 에녹의 기사를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 아들딸들을 낳았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0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는 시간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보았거나 느꼈거나 체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으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고후5:7)는 말씀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에녹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65세까지는 별볼일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므두셀라를 낳은 뒤”에 삼백년이란 점입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아들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아버지들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때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생명의 존귀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고, 사람들이 다르게 보이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자식도 생겼으니…”란 말은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자식이 생기면서 삶이 진지해 지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자식이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들을 때만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의 출생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이 65세에 자식을 낳고 이런 믿음의 삶을 살게 된 데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므두셀라는 히브리어로 “그가 죽으면 그것이 보내어 질 것이다.” 란 뜻의 이름을 지녔습니다. 이 이름을 에녹이 직접 지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에 대한 분명한 계시를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후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심판과 재림에 대한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다서 14-15절에 자세히 나옵니다.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ten thousands-일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이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다서14,15). 에녹은 노아와 마찬가지로 의의 선포자였고, 하나님의 오심과 심판을 선포한 대언자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연도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아담을 1년으로 하면 에녹은 622년에 태어나 687년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987년에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은 자식 므두셀라가 300살이 되도록 믿음의 본을 보인 훌륭한 가장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담은 살아 있었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심판과 재림에 대해 전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담은 8대손 므드셀라와 243년간을 같이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으므로 1656년에 죽었습니다. 노아가 1056년에 태어나 600세 때 홍수가 났으므로 노아의 홍수가 나던 해에 므두셀라는 죽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므두셀라는 살아 있었습니다. 므두셀라는 아버지가 의를 전파하는 것을 들었고, 손자가 의를 전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에녹은 자식을 낳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거하기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다음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30년이 아니라 300년을 주님과 동행했다면 그가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지 상상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동행하는 것은 마음이 일치해야만 가능합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함께 걷겠느냐?](암3:3). 에녹의 마음은 하나님과 일치하였습니다.

에녹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란 주님의 말씀에 예외적인 적용을 받은 최초의 사람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곧 바로 들림 받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저희 교회 형제, 자매님들은 모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에녹처럼 바로 올라갑니다. 그는 노아의 홍수를 보지 않고 들림 받았기 때문에 교회 또한 환난을 보지 않고 들림 받을 것입니다. 에녹의 기적적인 들림 받은 사건이 세상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휴거 역시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한 날 한 시에 모두 휴거 되어 버리면 세상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고 마비될 것처럼 걱정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매주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휴거 연습을 합니다. 주일마다 집과 직장을 떠나 교회로 옵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만약 주말에 휴거 시켜 버리면 세상 사람들은 그 다음날까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교회 간 줄로 알 것이고, 어떤 목사님은 ‘오늘따라 믿음 좋은 사람이 교회 안 나왔네’ 할 것입니다.

에녹의 예언을 다시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ten thousands-일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이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다서14,15). 에녹의 설교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은 “경건치 아니한”(UNGODLY)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에녹은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았고, 그들에게 부정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설교 내용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심어 주는 내용이 아닙니다. 심판과 정죄에 대한 경고의 설교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마치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이나 노아가 한 설교와 우리의 설교는 비슷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는 항상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분명한 지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지침이 분명해야 합니다. 삶의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벨릭스에게 한 개인 전도를 유념해서 보십시오. 사도행전 24:25에 이르기를 [바울이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니 벨릭스가 떨며 대답하되, 이번에는 그만 가라. 적당한 때에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 *의는 불의한 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주제입니다. 절제는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주제입니다. 다가올 심판은 모든 죄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주제입니다. 바울은 총독 벨릭스가 가장 싫어할 만한 소리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이 어떤 삶인지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말라기 2:6에 이르기를,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법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공평으로 나와 함께 걸었으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불법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2:6). 여러분은 주님이 이 세상을 다시 심판 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대가없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멸시와 조롱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옮겨지는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어느 날 갑자기 저 공중으로 옮겨지는 영광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 것인가?”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답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갈1:10).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들을 기쁘게 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도다. 내가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그분께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이웃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반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5:2-3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의 유익을 구하여 세워지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2-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면 내 안에는 성령이 주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의 삶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창5:22).

‧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 가족들에게도 믿음의 영향을 끼쳤다(므두셀라, 라멕, 노아까지).-창5:23

‧ 그의 생애는 turning point가 있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유14-15).

‧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의 재림, 성도들의 구원, 주님의 심판,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 믿음의 결과 – 들림받았다.

이제 우리는 아벨과 에녹이란 2명의 믿음의 영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벨과 에녹은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아벨의 피)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에녹의 휴거) 보이느니라.] 이미 말씀드린대로 아벨과 에녹은 동일한 믿음의 증거를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셨습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했고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습니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드러난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29). 동일한 믿음이라고 해서 동일한 현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다만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누구일까요? 므두셀라(969세). 에녹은 5,000살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에녹이 얻었던 것과 동일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 주님과 동행 –빛 가운데서 교제하라(요한1:7).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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