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 장 주석 – [LIVE] 어떻게 해야 교회 되나? (에베소서 4:1-16)_주일 2부 예배 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10“?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ppa.pilgrimjournalist.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pilgrimjournalist.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베이직교회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51,046회 및 152477 Like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Table of Contents
에베소서 4 장 주석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LIVE] 어떻게 해야 교회 되나? (에베소서 4:1-16)_주일 2부 예배 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10 – 에베소서 4 장 주석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BASIC COMMUNITY CHURCH
* 베이직교회 예배영상 업로드 안내
유튜브 : 라이브 방송이 끝난 후 설교 외 모든 부분 편집
주일예배
베이직교회
http://www.basicchurch.or.kr
* 이 채널은 베이직교회 공식 채널입니다.
* 베이직교회는 설교영상에 광고를 넣지 않습니다.
* 이 영상의 저작권은 ‘베이직교회’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4 장 주석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에베소서 4장 주석 – 옥중목회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에베소서 제 4장 =====4:1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교리적인 내용중 영적인 특권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14/2021
View: 8362
헬라어 에베소서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헬라어 에베소서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굿윌러 2020. 10. 25. 07:34 … 새번역,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1/10/2021
View: 7236
매튜헨리주석1100-에베소서 04장 – 네이버 블로그
에베소서 4장. Ⅰ. 보다 일반적인 권면 4:1. 이것은 기독교 신앙 고백에 부합되게 행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에서 갇혀 있는 중이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2022
View: 8615
[장별설교]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 – Pensées
[장별설교]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에베소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는 이유와 하나님을 본 받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9/6/2022
View: 3135
에베소서 강해 – 옛신앙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 3장: 교회의 세계성 · 4장: 교회의 일체성.
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9/22/2021
View: 5230
[에베소서 4장 주일설교말씀]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자”(엡 4 …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베소서 4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Source: bedesd153.tistory.com
Date Published: 8/27/2022
View: 3095
에베소서 4장 – 에스라바이블
에베소서4장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A. 사도바울은 …
Source: ezrabible.net
Date Published: 8/13/2022
View: 1684
에베소서 4장 1-16절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늘 본문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성전이 되고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의 삶에 …
Source: www.storybible.kr
Date Published: 12/14/2022
View: 2687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에베소서 4 장 주석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LIVE] 어떻게 해야 교회 되나? (에베소서 4:1-16)_주일 2부 예배 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10.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베소서 4 장 주석
- Author: 베이직교회
- Views: 조회수 51,046회
- Likes: 152477 Like
-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1. 1.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af67Bx_2rM
에베소서 4장 주석
에베소서 제 4장
=====4:1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교리적인
내용중 영적인 특권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관한 추론으로서(Wood, Mitton) 교리적인
교훈에서 실천적인 교훈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실천적인 교훈이 기독교 교리에서 비롯
된 것임을 시사한다(Foulkes).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 3:1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의 ‘주 안
에서 갇힌 나’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하다가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한다
(Mitton, Foulkes). 이것은 이후에 바울이 권면하고자 하는 내용의 진실성과 권위를
암시한다(Foulkes, Lincoln).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 )는 문자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워’라는 의미로 그리
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Wood, Lincoln). 그 기준은
‘부르심’으로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통한 새 생명에의 초대이다
(1:4, 5, 12, 13).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
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앙인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한다(마 3:8;10:38; 행
26:20; 빌 1:27; 골 1:10, Mitton, Lincoln).
=====4:2
본절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들을 제시한다(Bruce).
(1) 겸손 – 이것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이다(빌 2:3).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다(Foulkes, Wood).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
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벧전 5:5)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은유 – 이것은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
역된다. 이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
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한다(약 3:3-8).
(3) 오래 참음 – 이것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며(롬 2:4;9:22; 벧전
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
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이다(Lightfoot, Lincoln).
(4)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본문은 앞서 언급한 ‘오래 참음’의 확대된 미
덕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나(골 3:13) 본
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
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
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
기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Lincoln).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 – 바울은 하나됨의 생활
곧 일치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일치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
의 매는 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됨’을 유지(維持)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다
(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매는 줄'(* , 쉰데스모)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
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한다. 이러
한 성도의 일치됨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얻을 수 있다(Calvin, Bruce).
한편 ‘힘써 지키라’의 헬라어 ‘스푸다존테스'(* )는 ‘노력하
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있는 태도를 가리킨다
(Blaikie). 이것은 평안을 통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매우 급박한 것이며 단호한 결
심이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일임을 나타낸다(Wood, Lincoln).
=====4:4
몸이 하나이요(* , 헨 소마) – 이것은 문자적으로 ‘한 몸’을 의미한
다. ‘한 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한다(1:23;
2:14-22).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이룬다(고전 6:15;10:17; 골 1:18).
성령이 하나이니(* , 헨 프뉴마) –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
나님의 성령을 영접하였다고 선언한다(1:13, 14).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공
통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이룸을 시사한다
(Wood, Lincoln, Mitton).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교회가 통일성
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인들을 특별한 소망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여기서 ‘한 소망’은 ‘우주적 통일성’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1:9, 10). 이 ‘우주적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
신 구원의 목적으로서 이에 대한 소망은 교회를 통일시키고 화해를 이루게 한다
(Lincoln).
=====4:5
주도 하나이요(* , 헤이스 퀴리오스) – 이것은 초대 교회의 신
앙 고백으로(롬 10:9;14:8, 9; 고전 8:6;12:3; 빌 2:9-11)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
정하고 주를 따르며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닌다(HedriKsen). 교회는 한 통치자의 인도
하에 있으므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믿음도 하나이요(* , 미아 피스티스) – 믿음은 개인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따라 충성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
(依托)하는 것이다(Wood, Lock, Lincoln).
세례도 하나이요(* , 헨 밥티스마) –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 있다고 하는 외적인 표적으로 물세례를 가리킨다(Bruce, Lincoln,
Wood).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그리스도
의 몸과 연합되었음을 시사하는 표시이다(1:13;2:5, 6). 한 주를 믿는 한 신앙인임을
고백하는 공적인 의식인 세례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고전 12:13; 갈 3:27,
28).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바울은 하나됨의 마지막 원리로 만유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다. ‘한 하나님’은 ‘만유의 아
버지’이시다. ‘만유의 아버지’는 인간을 구속하는 아버지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
이나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로 보아 ‘우주적인 아버지’의 의미도 담고 있다(Wood).
만유 위에 계시고 – 이것은 하나님의 지고성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이것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 온 우주의 아버지
이신 ‘한 하나님’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한 근거이시다.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바울은 지금까지
의 교회 전체의 하나됨이라는 주제에서 방향을 바꿔 이제는 교회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곧 개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Wood). 본절의 ‘은혜’는 ‘은사’와 동일시할 수
있다(롬 12:1; 고전 12:4, Bruce, Lincoln). 이런 은사의 다양성은 하나된 몸을 이루
는 각 지체인 성도들의 조화를 강화시키며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충만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게 한다(Calvin). 한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는
‘은사’와 동일시되는 ‘은혜’가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반면에 다른
신약성서에서 ‘선물’이나 ‘은사’는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난다(고전 12장).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은혜의 수여자이며 성령
을 통해서 은사를 수여하시기 때문이다(Bruce, Lincoln).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 바울은 앞에서 논의한 것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확증하고 있
다 ‘그러므로 이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레게이'(* )는 직
접 인용한 출처(出處)를 밝힐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서(Wood) ‘성경이 말하기를’ 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Bruce).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 본
절은 승리의 찬송인 시 68:18의 인용이다(Calvin). 본절은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
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대적한 자를 정복하신 후 하나님 보좌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은사를 주심을 의미한다.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 ‘땅 아랫
곳’의 헬라어 ‘에이스 타 카토테라 메레 테스 게스'(*
는 문자적으로 ‘땅의 낮은 곳’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리셨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급하는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음부에 내리셨다’는 의미(Meyer, Robinson, Buchsel). (2)
‘성령 안에서 내려오셨음’을 의미(Caird, Abbott, Houlden). (3) ‘성육신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의미(Wood, Bruce, Gnilka, Mitton).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
가 가장 타당하다. ‘타 카토테라 테스게스’는 ‘이 땅’을 가리키며(Bruce, Calvin) ‘이
땅’과 관련하여 ‘내리셨던 것’은 ‘성육신’을 의미한다(Wood, Bruce).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 ‘모든 하늘’이라는 것은 유대인들
이 하늘을 일곱층으로 생각했던 것을 암시하는데(Wood, Lincoln) 그리스도는 그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신다.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 본절은 ‘히나'(* , ‘하기위하여’)로 시
작하는 목적절로 본절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목적임을 시사한다. 그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만물을 충만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세
타 판타'(* )는 온 우주에 임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그의 주권 아래 두심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
셔서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영향력을 행사하신다(Bruce).
=====4:11
그가…주셨으니 – 본절에 언급된 직분중 세 직분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
하는 자’는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했던 것인 반면 나머지 두 직분 곧 ‘목사’와
‘교사’는 지역 교회에 국한된 직분들이다(Wood, Foulkes). 이러한 직분들에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직분의 다양성이다(고전 12:5). 교회는 한가지 직무나
은사만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개성이나 은사로 서로 협력하
는 가운데 진정한 하나됨을 발견할 수 있다. (2) 직분의 통일성이다. 이러한 다양한
직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는 영적인 유기체이다.
사도 –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로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섬긴 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바울 자신과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등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였다(행 14:4, 14; 고전
15:5; 갈 1:19).
선지자 – 하나님의 계시를 중재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고전 14:24) 교회를 훈계하
기도 하였다(행 15:32). 이들은 극심한 박해(迫害)와 직권 오용 그리고 정경의 등장으
로 인해 후에 교회에서 사라졌다(행 13:1; 고전 12:28, Foulkes, Lincoln).
복음 전하는 자 – 선교의 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빌립(행 8:4-7), 디모데
(딤후 4:5), 에바브라 등이 이에 해당된다.
목사와 교사 – 혹자는 두 직분 사이에 관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같은 직분이
라고 주장한다(Barth). 그러나 직분상 그 기능이 어느 정도는 중복된다 할지라도 동일
한 사람으로 볼 수 없으며, 관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 직분이 지역 교회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Lincoln). 따라서 ‘목사’는 교회를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자이며 ‘교사’는 사도적 교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자라고 볼 수 있
다.
=====4:12
바울은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을 세우신 목적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톤 카타르티스몬'(*
)은 외과 의학에서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
물을 수리할 때(마 4:21), 또는 범죄한 자를 바로잡는다고 할 때(갈 6:1) 사용되었다.
즉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적을 실현하며 성도들이 온전케 되도록 회복시키고 훈
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10; 살전 3:10, Lincoln, Foulkes).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직분이나 기능을 감당
할 수 있도록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회복(回復)과 훈련을 통해 온전케 된 성도들이
하나됨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벧전 2:4, 5).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
적으로서 성도 각자의 특별한 직분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온 성도들을 영적으
로 성장시킴을 시사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모든 지체의
과제이지만(16절) 특히 사역자들은 사도적 복음과 전승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독특하고
중요한 과제로 나머지 지체들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Lincoln).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
어 –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의 헬라어 ‘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
)은 문자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 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안드라’는 남성 단수형으로 전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한 새사
람’을 이룸을 시사하며 ‘텔레이온’은 ‘완전’보다는 ‘성숙’의 의미를 내포한다(고전
2:6;14:20; 히 5:14). 이것은 다음 절에서 언급되는 어린 아이와 대조적인 것으로 ‘성
숙한 성인’에 강조점이 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교회가 원리
상 교회 내에 이미 성숙함과 온전함을 획득하였음을 암시한다(2:15, Lincoln). 한편
‘믿는 것’은 믿음의 행위라기보다 믿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며 ‘믿는 것’과 마찬가
지로 아는 일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구원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런 ‘믿음’과 ‘지식’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
울의 전통적인 기독론적 칭호이다(롬 1:3, 4, 9;5:10;8:3; 고전 1:9; 고후 1:19; 갈
1:16;2:20;4:4; 골 1:13; 살전 1:10).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게 하는 것은 목사와 교사들에게 부여된 과제로서, 목사와 교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 믿음과 한 지식을 향한 점진적 진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Lincoln).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 교회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영
적 성숙을 나타낸다(Bruce). 여기서 ‘장성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스'(*
)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Wood). (1) ‘나이’를 의미한다(요 9:21). 이것
은 성인이 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분량의
연령에 이름’을 시사한다. (2) ‘키’를 의미한다(눅 19:3). 헬라의 고전 작품에서는
‘분량’을 나타내는 헬라어 ‘메트론'(* )과 함께 사용하여 ‘영적으로 자라
난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눅 2:52). 본절은 전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1:23)를
위하여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야 함을 시사한다(Best).
=====4:14
본절은 ‘히나'(* , ‘…하기 위하여’)로 시작되는 목적절로, 그리스도의 장성
한 분량까지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 본절은 성인이면서도 영적인 면
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자의 특징을 나타낸다(Wood). 신약성경에서 ‘어
린아이’는 영적 미숙을 시사한다(고전 3:1, 2;13:11; 히 5:13).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 ‘궤술’의 헬라어 ‘퀴베이아'(* )
는 문자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다’는 의미로 당시의 속임수나 사기를 가리킨다. 또한
‘유혹’의 헬라어 ‘파누르기아'(* )는 거짓 교사들이 미성숙의 길로
들어서도록 교활하게 유도함을 의미한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 영적 미숙아의 특징은 ‘요동하
는 것’이다. ‘요동치’로 번역된 헬라어 ‘클뤼도니조메노이'(*
)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
다. 따라서 이들은 조그만 어려움이나 거짓 교리에 대해 쉽게 넘어간다.그러나 성숙한
자는 진리를 분별(分別)하는 능력을 가지며(히 5:14) 어떤 거짓된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Bruce). 한편 ‘모든 교훈의 풍조’는 바울이 앞절에서 말한 ‘믿는 것과 아는 일
이 하나가 되는것’에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Lincoln,Bruce). 즉 바울은 영적
미숙아가 앞서 말한 거짓교사들의 사기와 교활함에 쉽게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
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가야 함을 권면한다.
=====4:15
개역 성경에는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과 본절을 대
비시키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 본절은 교회 성장의 수단을 나타낸다. ‘참된
것을 하여’의 헬라어 ‘알레듀온테스'(* )는 문자적으로 ‘진리를
말하여’를 의미하는데(speaking the truth, NIV) 이것은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
는 것을 시사한다(2:5). 교회의 복음 선포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
은 진리에 대해 충성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 ‘범사에’에 대해서 혹자는 ‘우주’로 해석하여 그리
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우주에 전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Meyer,
Schlier). 그러나 ‘범사에’는 부사적 목적격으로 ‘모든 방법으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Lincoln). 왜냐하면 앞절과 본절에서 성장에 관계된 것은 우주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
문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목표와 척도(尺度)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 과정 속에서 일관된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질적인면에서 그리스도
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한다.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 ‘연락하
고’의 헬라어 ‘쉬나르몰로구메논'(* )은 ‘함께 연
결하고’를 의미하며, ‘상합하여’의 헬라어 ‘쉼비바조메논'(*
)은 ‘함께 연합하여’라는 의미로 동의어로 사용된다(Bruce). 이것은 지체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마디’에 해당하는 ‘하페스'(* )는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감정이다(Meyer). (2) 접촉이다(Abbott, Barth). (3) 결속이다
(Foulke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즉 ‘마디’는 각 지체와 머리 사
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결속을 나타낸다(Lincoln).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각 지체’는 교회의 다양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본절은 ‘각 지체’가 몸 전체를 위해
서 자신만이 갖고있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시사한다. 특히 ‘스스로’는 비록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성장의 근원이 된다 할지라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의 자발
적인 참여를 필요로 함을 말한다(Lincoln). 각 지체가 유기적으로 잘 연합함으로 몸은
성장할 수 있다(Wood). 한편 각 지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그리스
도의 사랑’으로(고후 5:14) 사랑은 교회성장의 척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강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다(Bruce).
=====4:17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 ‘허
망’의 헬라어 ‘마타이오테티'(* )는 신약성경에서 때때로 우상 숭
배와 관련된 단어로 사용된다(Bruce).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으
로부터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책임한 처신에 이르게 하는 ‘쓸모 없는 생각’
을 가리킨다(롬 1:21; 벧전 1:18, Wood).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과거의 삶처럼 목적없이 헛된 것에 욕망을 기
울여 무익하고 공허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 것을 권면한다.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 ‘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노이아'(*
)는 70인역에서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중심부’를 의미하는 ‘카르디아스'(*
, ‘마음’)와 서로 혼용된다(창 8:21;27:41; 출 28:3). 본절은 하나님을 모르
는 이방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없음을 나타낸
다.
저희 가운데 있는…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 ‘하나님의 생명’은 모든 생
명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다(Bruce, Lincoln). ‘하나님의 생명에서의 떠남’은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으로 ‘죽은'(2:1, 5), ‘하나님이 없는'(2:12) 상
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무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이안'(* )은 선천적인 죄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Lenski).
마음이 굳어짐 – ‘굳어짐’의 헬라어 ‘포로신'(* )은 돌같이 딱딱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마음이 굳어짐’이란 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양심(良心)
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완고해지
는 것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골 1:21, Lincoln).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 ‘감각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펠게코테스'(*
)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앞절에서 언급한
‘마음이 굳어짐’과 연관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이란 의미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함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의 삶을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낸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어떠한 것에도 제한받지 않으며 수치나 두려움을 모르고
육욕(肉慾)에만 얽매이는 행동을 말한다(고후 12:21; 갈 5:19). 한편 롬 1:24-32에서
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내버려 두셨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이방인 스스로가
자신을 ‘방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방인의 도덕적 책임성을 강조한 것이다
(Lincoln).
모든 더러운 것 – ‘더러운 것’의 헬라어 ‘아카다르시아스'(* )
는 기본적으로 성적 부도덕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모든’이란 말로 수식되어 ‘모든
부도덕’을 의미한다.
욕심 –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만족을 모르는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탐욕’이나(5:3, 5) ‘우상 숭배'(5:5; 골 3:5)와 연관된다.
=====4:20
개역성경에는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서 언급한 이
방인의 생활과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 ‘너희’는 앞절의 ‘감각
없는 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인, 특히 에베소 교인을 지칭한다. 한편 ‘배우
지’의 헬라어 ‘에마데테'(* )는 단순한 학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
이나 제자가 되어 철저한 훈련으로 배우는 것을 말한다(Wood). 본절에서는 ‘그리스도’
를 배운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해 배우는 것을
지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Lincoln).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호칭에서 ‘예수'(구원자)라는 칭호로 바꾸고 있다. 이 칭호는 죽음에서 다시 부
활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원자임을 보여준 역사적 사실을 암
시한다(Bruce, Wood).
너희가 과연…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 ‘진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게'(*
)는 확실한 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3:2)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가르
침을 받았음을 바울이 전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4:22
너희는…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옛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
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다(Calvin). 또한 ‘옛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의 행
실, 성격, 태도를 총칭하는 말로서 옛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육적인 본성을 시사한다
(Moffatt, Bruce). 그리고 이것은 악이나 그 세력의 지배 하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
한다. 한편 ‘벗어 버리고’는 24절의 ‘입으라’와 대조적 개념으로 죄로 물든 옛 생활
방식에서 떠나는 것을 시사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이미 세례를 통해 이루어
졌다. 그러기에 본절의 이 금지 명령은 세례를 반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옛 사람을
포기하는 생활을 지속하라는 권면이다(Lincoln).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은 현재
시상(時相)으로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부패의 과정을 의미한다(Wood). 이 ‘썩어져 가
는 구습’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이방인 생활을 가리킨다(2:3). 이것은 과거의
이방인 생활 방식을 포기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삶’과 대조된다. 이방인의 옛 생활 방
식은 ‘유혹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유혹’의 헬라어 ‘아파테스'(* )는 진리
의 말씀인 복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마 13:22; 막 4:19; 히 3:13) 거짓 교사의 교리
를 나타낸다(골 2:18). 바울은 이렇듯 복음과 반대되는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영
위할때 그 결과는 죽음이기에(2:1, 5; 벧후 1:4) 에베소 교인들에게 벗어버리라고 권
면한다.
=====4:23
개역성경에는 ‘투 노오스 휘몬'(* , ‘너희 마음의’)이 생
략되어 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 ‘심령’의 헬라어 ‘프뉴마티'(* )에 대
해서 혹자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nilka, Houlden, Schlier). 그래서 본절
을 ‘성령에 의해서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라’로 해석한다(Houlden).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마음의’라는 속격에 의해서 수식당하는 것은 개연성(蓋然性)이 없다
(Mitton). 따라서 본절의 ‘심령’은 인간의 영과 마음을 가리킨다(Lincoln). 따라서 본
문은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라는 의미이다. 한편 ‘새롭게 되어’의 헬라어 ‘아나네
우스다이'(* )는 현재 부정사 수동태로, 성령에 의해서(고후
4:16; 딛 3:5, Wood) 날마다 계속적으로 새로와져야 함을 시사한다.
=====4:24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
타'(* )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
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
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
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
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
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한다. 이런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
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
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4:25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접속사는 ‘디오'(* )로 ‘옛 사람을 벗어버림
으로써 새 사람을 입었은즉'(Robertson)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접속사를 사용함으
로써 바울은 원리적인 교훈과 실천적인 교훈을 연관시키고 있다(Wood).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옛 사람의 특징 중 하
나는 ‘거짓’이다(골 3:9). ‘거짓’은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수 혹은 궤계를 가리킨
다. 반면에 ‘새 사람’의 특징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가랴 8:16(LXX)
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인은 상호간의 친교 가운데 솔직해야 함을 시사한다(Bruce).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
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
(4:15, 16;5:30; 롬 12:4, 5; 고전 12:12-15)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진실함
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통한 상호간의 신뢰감 대신에 거짓으로
인해 생겨난 불신은 유기체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기 때문이다(Lincoln).
=====4:26
말며’는 시 4:4(LXX)의 인용으로 역설적 명령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는 분을 허용
하는 것처럼 보이나 27절에 사단에게 빠지지 말라는 명령과 31절에 모든 분에 대한 금
지 명령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권면(마 5:22; 갈
5:20; 골 3:8; 딤전 2:8; 딛 1:7; 약 1:19, 20)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
님께서도 ‘의분'(義憤)을 내신 적이 있었다(막 3:5; 요 2:13-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을 금지시킨 이유는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해가
지도록’은 ‘분’을 처리하기 위한 시간 제한이다. 즉 시간 제한을 통해 한밤중까지 분
을 품지 않도록 함으로 죄에 빠지는 잘못을 막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Bruce,
Lincoln).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본절은 앞절에서 언급된 금지 명령의 동기이다.
분노를 마음에 오래 품음으로 탐닉(眈溺)하게 되면 사단에게 자유롭게 영을 유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품는 행위를 멈추든지 아니면 분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는 습관을 갖지 말라고 권면한다(Robertson).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분노로 가득 채워지기 전에 반드시 적당한 때에 풀어야만 한다(Calvin).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7계명에 대한 언
급이다(출 20:15; 신 5: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
(막 10:19; 롬 13:9). 여기서 ‘도적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클레프톤'(*
)은 직업적인 ‘도적'(* , 호 클레프테스)을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부당한 착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정죄
할 수 없는 사소한 도적질까지 포함한다(Calvin).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은 이러
한 것들을 끊어 버려야 한다(Wood).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
라 – 바울은 ‘도적질’을 하지 말라는 권면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 빈궁한 타인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인
(눅 6:29-36; 고후 8:1-15;9:6-12) 기독교적 노동 윤리를 나타낸다. 그 노동의 목적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돕는 선한 일에 있다(갈 6:1).
=====4:29
본절은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언어 생활에 대한 권면이다.
더러운 말은 너희입밖에도 내지 말고 – ‘더러운 말’은 문자적으로 ‘부패한’ 혹은
‘썩은’이란 의미로 단순히 좋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악의 있는 험담과 중상 모략을 나
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분쟁을 일으킨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 ‘선한 말’은 도덕적으로 건실하고 옳은 말로서 말을 잘 선별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선한 말을 하는 목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상호 간에 덕(德)을 세우며
(Bruce)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언어 생활에서 타인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이다.
=====4:30
개역성경에는 ‘카이'(* , ‘그리고’)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더러운 말을 통
해서 성령이 근심하게 됨을 암시한다(Wood).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본절은 사 63:10의 사상을 반영한다. 부주
의하고 옳지 못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한다(고전 3:16; 살전 5:19).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인격
적인 안내자이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에(롬 8:26; 갈 5:17)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
고 자신을 더럽히면 그를 근심케 만드는것이 된다(Calvin).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인의 소유주이심을 나타내는 보증의 표이다(1:13, 14). 한편 ‘구속의 날’은 본
서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으로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동반하는 ‘주의 날'(고전 1:8; 살
전 5:2; 살후 2:2) 혹은 ‘그리스도의 날'(빌 1:6, 10;2:16)을 가리킨다. 성령은 성도
의 일시적인 범죄로 떠나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 약속하신 기업을 주
시는 날까지 성도의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요 14:16; 요일 3:2, 3). 그러나 이 보증은
단지 미래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 구속 곧 죄사함의 확
신을 경험하며(1:7) 미래의 구속의 날에 몸전체의 구속을 경험하게 된다(롬 8:23).
=====4:31
너희는…버리고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버려야 할 악에 대해서 열거
한다. ‘버리다’의 헬라어 ‘아르데토'(* )는 문자적으로 ‘깨끗이 쓸어버리
다’, ‘제거되게 내버려 두라’는 의미로 더 이상 모든 악독과 관계를 갖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Wood).
악독 – 이것은 과거에 당한 손해나 모욕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품
어두어서 이웃과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이다(행 8:23; 롬 3:14; 히 12:15; 약
3:14).
노함과 분냄 – 이 두 가지는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나 엄밀히 구별하면, ‘노함’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분노로서 급격한 감정 폭발이며(고후 12:20; 갈 5:20), ‘분
냄’은 통렬하고 악독한 적의가 마음에 자리잡아서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표현되는 것
을 말한다(딤전 2:8; 약 1:19, 20).
떠드는 것 – 이것은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악한 덕목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소리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훼방하는 것 – 이것은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모욕적인 인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
다(막 7:22; 골 3:8; 딤전 6:4; 딤후 3:2).
=====4:32
바울은 앞절에서 금지 명령을 한 반면 본절에서는 행해야 할 덕목을 제시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 ‘인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난
다(2:7).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고후 6:6; 갈 5:22; 골
3:12). 또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자비’, ‘인자’와 함께 신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
으로 타인의 필요에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서로’에게 표현해야 하는 덕목이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 ‘…과
같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도스 카이'(* )는 ‘일치’를 나타내는 표
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기준과 근거
가 됨을 시사한다(Lincoln).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구원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인 원형(原型)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인도 타인에 대해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용서 자세는 반드시 사랑으로부
터 출발되어야 한다(Wood). 한편 ‘하라’의 헬라어 ‘기네스데'(* )는 실
제로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서로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들의 교제 가운데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행위이다.
헬라어 에베소서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반응형
파라칼로 운 휘마스 에고 호 데스미오스 엔 퀴리오 앜시오스 페리파테사이 테스 클레세오스 헤스 에클레데테
개역개정,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새번역,1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주를 위해 갇힌 몸인 나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영어NIV,1 As a prisoner for the Lord, then, I urge you to live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you have received.
영어NASB,1 I, therefore, the prisoner of the Lord, entreat you to walk in a manner worthy of the calling with which you have been called,
영어MSG,1 In light of all this, here’s what I want you to do. While I’m locked up here, a prisoner for the Master, I want you to get out there and walk–better yet, run!–on the road God called you to travel. I don’t want any of you sitting around on your hands. I don’t want anyone strolling off, down some path that goes nowhere.
영어NRSV,1 I therefore, the prisoner in the Lord, beg you to lead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to which you have been called,
헬라어신약Stephanos,1 παρακαλω ουν υμας εγω ο δεσμιος εν κυριω αξιως περιπατησαι της κλησεως ης εκληθητε
라틴어Vulgate,1 obsecro itaque vos ego vinctus in Domino ut digne ambuletis vocatione qua vocati estis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זהירכם אני האסור באדון להתהלך כאשר יאתה למשמרתכם אשר נקראתם לה׃
성 경: [엡4:1]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은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교리적인 내용 중 영적인 특권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관한 추론으로서(Wood, Mitton) 교리적인 교훈에서 실천적인 교훈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실천적인 교훈이 기독교 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Foulkes).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 3:1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의 ‘주 안에서 갇힌 나’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하다가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한다(Mitton, Foulkes). 이것은 이후에 바울이 권면하고자 하는 내용의 진실성과 권위를 암시한다(Foulkes, Lincoln).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는 문자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워’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Wood, Lincoln). 그 기준은 ‘부르심’으로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통한 새 생명에의 초대이다(1:4, 5, 12, 13).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앙인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한다(마 3:8;10:38; 행26:20; 빌 1:27; 골 1:10, Mitton, Lincoln).
메타 파세스 타페이노프로쉬네스 카이 프라우테토스 메타 마크로뒤미아스 아네코메노이 알렐론 엔 아가페
개역개정,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새번역,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우리말성경,2 온전히 겸손하고 온유하게 행동하고 오래 참음으로 행동하되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가톨릭성경,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영어NIV,2 Be completely humble and gentle; be patient,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
영어NASB,2 with all humility and gentleness, with patience, showing forbearance to one another in love,
영어MSG,2 And mark that you do this with humility and discipline–not in fits and starts, but steadily, pouring yourselves out for each other in acts of love,
영어NRSV,2 with all humility and gentleness, with patience,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
헬라어신약Stephanos,2 μετα πασης ταπεινοφροσυνης και πραοτητος μετα μακροθυμιας ανεχομενοι αλληλων εν αγαπη
라틴어Vulgate,2 cum omni humilitate et mansuetudine cum patientia subportantes invicem in caritate
히브리어Modern,2 בכל נמיכות וענוה ובארך רוח לשאת איש את רעהו באהבה׃
성 경: [엡4:2]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본절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들을 제시한다(Bruce).
(1) 겸손 – 이것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이다(빌 2:3).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다(Foulkes, Wood).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벧전 5:5)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은유 – 이것은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된다. 이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한다(약 3:3-8).
(3) 오래 참음 – 이것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며(롬 2:4;9:22; 벧전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이다(Lightfoot, Lincoln).
(4)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본문은 앞서 언급한 ‘오래 참음’의 확대된 미덕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나(골 3:13) 본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Lincoln).
스푸다존테스 테레인 텐 헤노테타 투 프뉴마토스 엔 토 쉰데스모 테스 에이레네스
개역개정,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새번역,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우리말성경,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가톨릭성경,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영어NIV,3 Make every effort to keep the unity of the Spirit through the bond of peace.
영어NASB,3 being diligent to preserve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영어MSG,3 alert at noticing differences and quick at mending fences.
영어NRSV,3 making every effort to maintain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헬라어신약Stephanos,3 σπουδαζοντες τηρειν την ενοτητα του πνευματος εν τω συνδεσμω της ειρηνης
라틴어Vulgate,3 solliciti servare unitatem spiritus in vinculo pacis
히브리어Modern,3 ושקדו לשמר את אחדות הרוח באגדת השלום׃
성 경: [엡4:3]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바울은 하나됨의 생활 곧 일치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일치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의 매는 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하나됨’을 유지(維持)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다(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매는 줄'(*, 쉰데스모)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한다. 이러한 성도의 일치됨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얻을 수 있다(Calvin, Bruce). 한편 ‘힘써 지키라’의 헬라어 ‘스푸다존테스'(*)는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있는 태도를 가리킨다(Blaikie). 이것은 평안을 통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매우 급박한 것이며 단호한 결심이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일임을 나타낸다(Wood, Lincoln).
헨 소마 카이 헨 프뉴마 카도스 카이 에클레데테 엔 미아 엘피디 테스 클레세오스 휘몬
개역개정,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새번역,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우리말성경,4 여러분이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며
가톨릭성경,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영어NIV,4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영어NASB,4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just as also you were called in one hope of your calling;
영어MSG,4 You were all called to travel on the same road and in the same direction, so stay together, both outwardly and inwardly.
영어NRSV,4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just as you were called to the one hope of your calling,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ν σωμα και εν πνευμα καθως και εκληθητε εν μια ελπιδι της κλησεως υμων
라틴어Vulgate,4 unum corpus et unus spiritus sicut vocati estis in una spe vocationis vestrae
히브리어Modern,4 גוף אחד ורוח אחד כאשר גם נקראתם בתקות משמרתכם האחת׃
성 경: [엡4:4]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몸이 하나이요(*, 헨 소마) – 이것은 문자적으로 ‘한 몸’을 의미한다. ‘한 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한다(1:23;2:14-22).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이룬다(고전 6:15;10:17; 골 1:18).
성령이 하나이니(*, 헨 프뉴마) –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하였다고 선언한다(1:13, 14).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공통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이룸을 시사한다(Wood, Lincoln, Mitton).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한 소망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여기서 ‘한 소망’은 ‘우주적 통일성’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1:9, 10). 이 ‘우주적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구원의 목적으로서 이에 대한 소망은 교회를 통일시키고 화해를 이루게 한다(Lincoln).
헤이스 퀴리오스 미아 피스티스 헨 밮티스마
개역개정,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새번역,5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5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가톨릭성경,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침례도 하나이고,
영어NIV,5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영어NASB,5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영어MSG,5 You have one Master, one faith, one baptism,
영어NRSV,5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ις κυριος μια πιστις εν βαπτισμα
라틴어Vulgate,5 unus Dominus una fides unum baptisma
히브리어Modern,5 אדון אחד אמונה אחת טבילה אחת׃
성 경: [엡4:5]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주도 하나이요(*, 헤이스 퀴리오스) – 이것은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롬 10:9;14:8, 9; 고전 8:6;12:3; 빌 2:9-11)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를 따르며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닌다(HedriKsen). 교회는 한 통치자의 인도하에 있으므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믿음도 하나이요(*, 미아 피스티스) – 믿음은 개인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따라 충성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依托)하는 것이다(Wood, Lock, Lincoln).
침례도 하나이요(*, 헨 밥티스마) – ‘침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 있다고 하는 외적인 표적으로 물침례를 가리킨다(Bruce, Lincoln,Wood). 이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었음을 시사하는 표시이다(1:13;2:5, 6). 한 주를 믿는 한 신앙인임을 고백하는 공적인 의식인 침례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고전 12:13; 갈 3:27,28).
헤이스 데오스 카이 파테르 판톤 호 에피 판톤 카이 디아 판톤 카이 엔 파신
개역개정,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새번역,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 ㉡또는 ‘천지 만물’
우리말성경,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가톨릭성경,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영어NIV,6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영어NASB,6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영어MSG,6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rules over all, works through all, and is present in all. Everything you are and think and do is permeated with Oneness.
영어NRSV,6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above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ις θεος και πατηρ παντων ο επι παντων και δια παντων και εν πασιν υμιν
라틴어Vulgate,6 unus Deus et Pater omnium qui super omnes et per omnia et in omnibus nobis
히브리어Modern,6 אל ואב אחד לכל שהוא על כל ובכל ובתוך כלכם׃
성 경: [엡4:6]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바울은 하나됨의 마지막 원리로 만유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다. ‘한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다. ‘만유의 아버지’는 인간을 구속하는 아버지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나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로 보아 ‘우주적인 아버지’의 의미도 담고 있다(Wood).
만유 위에 계시고 – 이것은 하나님의 지고성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이것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 온 우주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한 근거이시다.
헤니 데 헤카스토 헤몬 에도데 헤 카리스 카타 토 케트론 테스 도레아스 투 크리스투
개역개정,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새번역,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7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영어NIV,7 But to each one of us grace has been given as Christ apportioned it.
영어NASB,7 But to each one of us grace was given according to the measure of Christ’s gift.
영어MSG,7 But that doesn’t mean you should all look and speak and act the same. Out of the generosity of Christ, each of us is given his own gift.
영어NRSV,7 But each of us was given grace according to the measure of Christ’s gift.
헬라어신약Stephanos,7 ενι δε εκαστω ημων εδοθη η χαρις κατα το μετρον της δωρεας τ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7 unicuique autem nostrum data est gratia secundum mensuram donationis Christi
히브리어Modern,7 אבל לכל אחד ואחד ממנו נתן החסד כמדת מתנת המשיח׃
성 경: [엡4:7]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바울은 지금까지의 교회 전체의 하나됨이라는 주제에서 방향을 바꿔 이제는 교회 전체를 이루고 있는각 지체 곧 개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Wood). 본절의 ‘은혜’는 ‘은사’와 동일시할 수있다(롬 12:1; 고전 12:4, Bruce, Lincoln). 이런 은사의 다양성은 하나된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인 성도들의 조화를 강화시키며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충만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게 한다(Calvin). 한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는 ‘은사’와 동일시되는 ‘은혜’가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반면에 다른 신약성서에서 ‘선물’이나 ‘은사’는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난다(고전 12장).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은혜의 수여자이며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수여하시기 때문이다(Bruce, Lincoln).
디오 레게이 아나바스 에이스 휲소스 에크말로튜센 아이크말로시안 에도켄 도마타 토이스 안드로포이스
개역개정,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새번역,8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시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 ㉢시 68:18
우리말성경,8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높은 보좌에 올라가실 때 사로잡힌 사람을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시68:18
가톨릭성경,8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영어NIV,8 This is why it says: “When he ascended on high, he led captives in his train and gave gifts to men.”
영어NASB,8 Therefore it says, “WHEN HE ASCENDED ON HIGH, HE LED CAPTIVE A HOST OF CAPTIVES, AND HE GAVE GIFTS TO MEN.”
영어MSG,8 The text for this is, He climbed the high mountain, He captured the enemy and seized the booty, He handed it all out in gifts to the people.
영어NRSV,8 Therefore it is said, “When he ascended on high he made captivity itself a captive; he gave gifts to his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8 διο λεγει αναβας εις υψος ηχμαλωτευσεν αιχμαλωσιαν και εδωκεν δοματα τοις ανθρωποις
라틴어Vulgate,8 propter quod dicit ascendens in altum captivam duxit captivitatem dedit dona hominibus
히브리어Modern,8 על כן הוא אומר עלה למרום שבה שבי ויתן מתנות לאדם׃
성 경: [엡4:8]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그러므로 이르기를 – 바울은 앞에서 논의한 것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확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레게이'(*)는 직접 인용한 출처(出處)를 밝힐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서(Wood) ‘성경이 말하기를’ 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Bruce).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 본절은 승리의 찬송인 시 68:18의 인용이다(Calvin). 본절은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대적한 자를 정복하신 후 하나님 보좌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은사를 주심을 의미한다.
토 데 아네베 티 에스틴 에이 메 호티 카이 카테베 에이스 타 카토테라 메레 테스 게스
개역개정,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새번역,9 그런데 그분이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먼저 내려오셨다는 것이’
우리말성경,9 “올라가셨다” 하였으니 땅 아래로 내려오셨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성경,9 “그분께서 올라가셨다.” 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어NIV,9 (What does “he ascended” mean except that he also descended to the lower, earthly regions?
영어NASB,9 (Now this expression, “He ascended,” what does it mean except that He also had descended into the lower parts of the earth?
영어MSG,9 It’s true, is it not, that the One who climbed up also climbed down, down to the valley of earth?
영어NRSV,9 (When it says, “He ascended,” what does it mean but that he had also descended into the lower parts of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9 το δε ανεβη τι εστιν ει μη οτι και κατεβη πρωτον εις τα κατωτερα μερη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9 quod autem ascendit quid est nisi quia et descendit primum in inferiores partes terrae
히브리어Modern,9 ועלה שאמר מה הוא אם לא שירד ירד מקדם לתחתיות ארץ׃
성 경: [엡4:9]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 ‘땅 아랫곳’의 헬라어 ‘에이스 타 카토테라 메레 테스 게스'(* 는 문자적으로 ‘땅의 낮은 곳’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리셨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급하는지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음부에 내리셨다’는 의미(Meyer, Robinson, Buchsel). (2)’성령 안에서 내려오셨음’을 의미(Caird, Abbott, Houlden). (3) ‘성육신으로 이 땅에내려오셨음’을 의미(Wood, Bruce, Gnilka, Mitton).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타 카토테라 테스게스’는 ‘이 땅’을 가리키며(Bruce, Calvin) ‘이땅’과 관련하여 ‘내리셨던 것’은 ‘성육신’을 의미한다(Wood, Bruce).
호 카타바스 아우토스 에스틴 카이 호 아나바스 휘페라노 판톤 톤 우라논 히나 플레로세 타 판타
개역개정,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0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말성경,10 또한 내려오셨던 그 자신이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오르셨으니 이는 그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영어NIV,10 He who descended is the very one who ascended higher than all the heavens, in order to fill the whole universe.)
영어NASB,10 He who descended is Himself also He who ascended far above all the heavens, that He might fill all things.)
영어MSG,10 And the One who climbed down is the One who climbed back up, up to highest heaven. He handed out gifts above and below, filled heaven with his gifts,
영어NRSV,10 He who descended is the same one who ascended far above all the heavens, so that he might fill all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καταβας αυτος εστιν και ο αναβας υπερανω παντων των ουρανων ινα πληρωση τα παντα
라틴어Vulgate,10 qui descendit ipse est et qui ascendit super omnes caelos ut impleret omnia
히브리어Modern,10 הירד הוא אשר גם עלה למעלה מכל השמים למען ימלא את הכל׃
성 경: [엡4:10]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부르심에 합당한 삶]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 ‘모든 하늘’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하늘을 일곱층으로 생각했던 것을 암시하는데(Wood, Lincoln) 그리스도는 그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신다.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 본절은 ‘히나'(*, ‘하기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본절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목적임을 시사한다. 그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만물을 충만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세타 판타'(*)는 온 우주에 임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만물을 그의 주권 아래 두심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셔서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영향력을 행사하신다(Bruce).
카이 아우토스 에도켄 투스 멘 아포스톨루스 투스 데 프로페타스 투스 데 유앙겔리스타스 투스 데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개역개정,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새번역,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으니
가톨릭성경,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영어NIV,11 It was he who gave some to be apostles, some to be prophets, some to be evangelists, and some to be pastors and teachers,
영어NASB,11 And He gave some as apostles, and some as prophets, and some as evangelists, and some as pastors and teachers,
영어MSG,11 filled earth with his gifts. He handed out gifts of apostle, prophet, evangelist, and pastor-teacher
영어NRSV,11 The gifts he gave were that some would be apostles, some prophets, some evangelists, some pastors and teacher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αυτος εδωκεν τους μεν αποστολους τους δε προφητας τους δε ευαγγελιστας τους δε ποιμενας και διδασκαλους
라틴어Vulgate,11 et ipse dedit quosdam quidem apostolos quosdam autem prophetas alios vero evangelistas alios autem pastores et doctores
히브리어Modern,11 והוא נתן את אלה שליחים ואת אלה נביאים ואת אלה מבשרים ואת אלה רעים ומלמדים׃
성 경: [엡4:11]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그가…주셨으니 – 본절에 언급된 직분중 세 직분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했던 것인 반면 나머지 두 직분 곧 ‘목사’와 ‘교사’는 지역 교회에 국한된 직분들이다(Wood, Foulkes). 이러한 직분들에서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직분의 다양성이다(고전 12:5). 교회는 한가지 직무나 은사만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개성이나 은사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진정한 하나됨을 발견할 수 있다. (2) 직분의 통일성이다. 이러한 다양한 직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는 영적인 유기체이다.
사도 –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로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섬긴 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바울 자신과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등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였다(행 14:4, 14; 고전15:5; 갈 1:19).
선지자 – 하나님의 계시를 중재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고전 14:24) 교회를 훈계하기도 하였다(행 15:32). 이들은 극심한 박해(迫害)와 직권 오용 그리고 정경의 등장으로 인해 후에 교회에서 사라졌다(행 13:1; 고전 12:28, Foulkes, Lincoln).
복음 전하는 자 – 선교의 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빌립(행 8:4-7), 디모데(딤후 4:5), 에바브라 등이 이에 해당된다.
목사와 교사 – 혹자는 두 직분 사이에 관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같은 직분이라고 주장한다(Barth). 그러나 직분상 그 기능이 어느 정도는 중복된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람으로 볼 수 없으며, 관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 직분이 지역 교회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Lincoln). 따라서 ‘목사’는 교회를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자이며 ‘교사’는 사도적 교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프로스 톤 카타르티스몬 톤 하기온 에이스 에르곤 디아코니아스 에이스오이코도멘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개역개정,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새번역,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2 이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준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2 to prepare God’s people for works of service, so that the body of Christ may be built up
영어NASB,12 for the equipp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service, to the building up of the body of Christ;
영어MSG,12 to train Christians in skilled servant work, working within Christ’s body, the church,
영어NRSV,12 to equip the saints for the work of ministry, for 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2 προς τον καταρτισμον των αγιων εις εργον διακονιας εις οικοδομην του σω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12 ad consummationem sanctorum in opus ministerii in aedificationem corporis Christi
히브리어Modern,12 להשלים את הקדשים למעשה העבודה לבנין גוף המשיח׃
성 경: [엡4:12]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바울은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을 세우신 목적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톤 카타르티스몬'(*)은 외과 의학에서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수리할 때(마 4:21), 또는 범죄한 자를 바로잡는다고 할 때(갈 6:1) 사용되었다. 즉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적을 실현하며 성도들이 온전케 되도록 회복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10; 살전 3:10, Lincoln, Foulkes).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직분이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회복(回復)과 훈련을 통해 온전케 된 성도들이 하나됨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벧전 2:4, 5).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성도 각자의 특별한 직분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온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킴을 시사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모든 지체의 과제이지만(16절) 특히 사역자들은 사도적 복음과 전승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독특하고 중요한 과제로 나머지 지체들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Lincoln).
메크리 카탄테소멘 호이 판테스 에이스 텐 헤노테타 테스 피스테오스 카이 테스 에피그노세오스 투 휘우 투 데우 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 에이스 메트론 헬리키아스 투 플레로마토스 투 크리스투
개역개정,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새번역,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말성경,13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정도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가톨릭성경,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영어NIV,13 until we all reach unity in the faith and in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and become mature, attaining to 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영어NASB,13 until we all attain to the unity of the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to a mature man, 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which belongs to the fulness of Christ.
영어MSG,13 until we’re all moving rhythmically and easily with each other, efficient and graceful in response to God’s Son, fully mature adults, fully developed within and without, fully alive like Christ.
영어NRSV,13 until all of us come to the unity of the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to maturity, to the measure of the full stature of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3 μεχρι καταντησωμεν οι παντες εις την ενοτητα της πιστεως και της επιγνωσεως του υιου του θεου εις ανδρα τελειον εις μετρον ηλικιας του πληρω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13 donec occurramus omnes in unitatem fidei et agnitionis Filii Dei in virum perfectum in mensuram aetatis plenitudinis Christi
히브리어Modern,13 עד כי נגיע כלנו לאחדות האמונה ודעת בן האלהים כאיש אחד שלם לשעור קומת מלוא המשיח׃
성 경: [엡4:13]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의 헬라어 ‘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은 문자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 되다’라는의미이다. 여기서 ‘안드라’는 남성 단수형으로 전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한 새사람’을 이룸을 시사하며 ‘텔레이온’은 ‘완전’보다는 ‘성숙’의 의미를 내포한다(고전2:6;14:20; 히 5:14). 이것은 다음 절에서 언급되는 어린 아이와 대조적인 것으로 ‘성숙한 성인’에 강조점이 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교회가 원리상 교회 내에 이미 성숙함과 온전함을 획득하였음을 암시한다(2:15, Lincoln). 한편 ‘믿는 것’은 믿음의 행위라기보다 믿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며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는 일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구원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지식’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울의 전통적인 기독론적 칭호이다(롬 1:3, 4, 9;5:10;8:3; 고전 1:9; 고후 1:19; 갈1:16; 2:20; 4:4; 골 1:13; 살전 1:10).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게 하는 것은 목사와 교사들에게 부여된 과제로서, 목사와 교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 믿음과 한 지식을 향한 점진적 진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Lincoln).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 교회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Bruce). 여기서 ‘장성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스'(*)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Wood). (1) ‘나이’를 의미한다(요 9:21). 이것은 성인이 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분량의 연령에 이름’을 시사한다. (2) ‘키’를 의미한다(눅 19:3). 헬라의 고전 작품에서는 ‘분량’을 나타내는 헬라어 ‘메트론'(*)과 함께 사용하여 ‘영적으로 자라난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눅 2:52). 본절은 전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1:23)를 위하여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야 함을 시사한다(Best).
히나 메케티 오멘 네피오이 클뤼도니조메노이 카이 페리페로메노이 판티 아네모 테스 디다스칼리아스 엔 테 퀴베이아 톤 안드로폰 엔 파누르기아 프로스 텐 메도데이안 테스 플라네스
개역개정,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4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말성경,14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속임수, 곧 거짓된 간계로 인한 술책에 넘어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떠밀리고 휩쓸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가톨릭성경,14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영어NIV,14 Then we will no longer be infants, tossed back and forth by the waves, and blown here and there by every wind of teaching and by the cunning and craftiness of men in their deceitful scheming.
영어NASB,14 As a result, we are no longer to be children, tossed here and there by waves, and carried about by every wind of doctrine, by the trickery of men, by craftiness in deceitful scheming;
영어MSG,14 No prolonged infancies among us, please. We’ll not tolerate babes in the woods, small children who are an easy mark for impostors.
영어NRSV,14 We must no longer be children, tossed to and fro and blown about by every wind of doctrine, by people’s trickery, by their craftiness in deceitful scheming.
헬라어신약Stephanos,14 ινα μηκετι ωμεν νηπιοι κλυδωνιζομενοι και περιφερομενοι παντι ανεμω της διδασκαλιας εν τη κυβεια των ανθρωπων εν πανουργια προς την μεθοδειαν της πλανης
라틴어Vulgate,14 ut iam non simus parvuli fluctuantes et circumferamur omni vento doctrinae in nequitia hominum in astutia ad circumventionem erroris
히브리어Modern,14 ולא נהיה עוד ילדים נגרשים ונדפים בכל רוח הלמוד בתרמית בני אדם ומקשותם אשר שתו להתעות׃
성 경: [엡4:14]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본절은 ‘히나'(*, ‘…하기 위하여’)로 시작되는 목적절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 본절은 성인이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자의 특징을 나타낸다(Wood). 신약성경에서 ‘어린아이’는 영적 미숙을 시사한다(고전 3:1, 2;13:11; 히 5:13).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 ‘궤술’의 헬라어 ‘퀴베이아'(*)는 문자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다’는 의미로 당시의 속임수나 사기를 가리킨다. 또한 ‘유혹’의 헬라어 ‘파누르기아'(*)는 거짓 교사들이 미성숙의 길로 들어서도록 교활하게 유도함을 의미한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 영적 미숙아의 특징은 ‘요동하는 것’이다. ‘요동치’로 번역된 헬라어 ‘클뤼도니조메노이'(*)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조그만 어려움이나 거짓 교리에 대해 쉽게 넘어간다.그러나 성숙한자는 진리를 분별(分別)하는 능력을 가지며(히 5:14) 어떤 거짓된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Bruce). 한편 ‘모든 교훈의 풍조’는 바울이 앞절에서 말한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는 것’에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Lincoln,Bruce). 즉 바울은 영적 미숙아가 앞서 말한 거짓교사들의 사기와 교활함에 쉽게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가야 함을 권면한다.
알레듀온테스 데 엔 아가페 아웈세오멘 에이스 아우톤 타 판타 호스 에스틴 헤 케팔레 크리스토스
개역개정,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새번역,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우리말성경,15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가톨릭성경,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어NIV,15 Instead, speaking the truth in love, we will in all things grow up into him who is the Head, that is, Christ.
영어NASB,15 but speaking the truth in love, we are to grow up in all aspects into Him, who is the head, even Christ,
영어MSG,15 God wants us to grow up, to know the whole truth and tell it in love–like Christ in everything. We take our lead from Christ, who is the source of everything we do.
영어NRSV,15 But speaking the truth in love, we must grow up in every way into him who is the head, into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ληθευοντες δε εν αγαπη αυξησωμεν εις αυτον τα παντα ος εστιν η κεφαλη ο χριστος
라틴어Vulgate,15 veritatem autem facientes in caritate crescamus in illo per omnia qui est caput Christus
히브리어Modern,15 כי אם נדבר האמת באהבה ונגדלה בכל דבר לו למשיח שהוא הראש׃
성 경: [엡4:15]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개역 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과 본절을 대비시키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 본절은 교회 성장의 수단을 나타낸다. ‘참된 것을 하여’의 헬라어 ‘알레듀온테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를 말하여’를 의미하는데(speaking the truth, NIV) 이것은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시사한다(2:5). 교회의 복음 선포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은 진리에 대해 충성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 ‘범사에’에 대해서 혹자는 ‘우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우주에 전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Meyer,Schlier). 그러나 ‘범사에’는 부사적 목적격으로 ‘모든 방법으로’로 이해되어야 한다(Lincoln). 왜냐하면 앞절과 본절에서 성장에 관계된 것은 우주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목표와 척도(尺度)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 과정 속에서 일관된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질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한다.
엨스 후 판 토 소마 쉬나르몰로구메논 카이 쉼비바조메논 디아 파세스 하페스 테스 에피코레기아스 캍 에네르게이안 엔 메트로 헤노스 헤카스투 메루스 텐 아웈세신 투 소마토스 포이에이타이 에이스 오이코도멘 헤아우투 엔 아가페
개역개정,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새번역,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 ㉤또는 ‘영양을 공급해 주는 통로인 각 마디를’
우리말성경,16 그리스도로부터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가운데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
가톨릭성경,16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영어NIV,16 From him the whole body, joined and held together by every supporting ligament, grows and builds itself up in love, as each part does its work.
영어NASB,16 from whom the whole body, being fitted and held together by that which every joint supplies, according to the proper working of each individual part, causes the growth of the body for the building up of itself in love.
영어MSG,16 He keeps us in step with each other. His very breath and blood flow through us, nourishing us so that we will grow up healthy in God, robust in love.
영어NRSV,16 from whom the whole body, joined and knit together by every ligament with which it is equipped, as each part is working properly, promotes the body’s growth in building itself up in lov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ξ ου παν το σωμα συναρμολογουμενον και συμβιβαζομενον δια πασης αφης της επιχορηγιας κατ ενεργειαν εν μετρω ενος εκαστου μερους την αυξησιν του σωματος ποιειται εις οικοδομην εαυτου εν αγαπη
라틴어Vulgate,16 ex quo totum corpus conpactum et conexum per omnem iuncturam subministrationis secundum operationem in mensuram uniuscuiusque membri augmentum corporis facit in aedificationem sui in caritate
히브리어Modern,16 אשר ממנו כל הגוף בהיותו מרכב ומדבק בכל חבור השמוש כפי מדת הפעלה הנתונה לכל אבר ואבר ירבה ויגדל להשלמת בנינו באהבה׃
성 경: [엡4:16]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 ‘연락하고’의 헬라어 ‘쉬나르몰로구메논'(*)은 ‘함께 연결하고’를 의미하며, ‘상합하여’의 헬라어 ‘쉼비바조메논'(*)은 ‘함께 연합하여’라는 의미로 동의어로 사용된다(Bruce). 이것은 지체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마디’에 해당하는 ‘하페스'(*)는 세가지로 해석된다. (1) 감정이다(Meyer). (2) 접촉이다(Abbott, Barth). (3) 결속이다(Foulke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즉 ‘마디’는 각 지체와 머리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결속을 나타낸다(Lincoln).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각 지체’는 교회의 다양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본절은 ‘각 지체’가 몸 전체를 위해서 자신만이 갖고있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시사한다. 특히 ‘스스로’는 비록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성장의 근원이 된다 할지라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의 자발적인 참여를 필요로 함을 말한다(Lincoln). 각 지체가 유기적으로 잘 연합함으로 몸은 성장할 수 있다(Wood). 한편 각 지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고후 5:14) 사랑은 교회성장의 척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다(Bruce).
투토 운 레고 카이 마르튀로마이 엔 퀴리오 메케티 휘마스 페리파테인 카도스 카이 타 에드네 페리파테이 엔 마타이오테티 투 노오스 아우톤
개역개정,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새번역,17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우리말성경,17 그러므로 내가 주 안에서 이것을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사는 것같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가톨릭성경,17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영어NIV,17 So I tell you this, and insist on it in the Lord, that you must no longer live as the Gentiles do, in the futility of their thinking.
영어NASB,17 This I say therefore, and affirm together with the Lord, that you walk no longer just as the Gentiles also walk, in the futility of their mind,
영어MSG,17 And so I insist–and God backs me up on this–that there be no going along with the crowd, the empty-headed, mindless crowd.
영어NRSV,17 Now this I affirm and insist on in the Lord: you must no longer live as the Gentiles live, in the futility of their minds.
헬라어신약Stephanos,17 τουτο ουν λεγω και μαρτυρομαι εν κυριω μηκετι υμας περιπατειν καθως και τα λοιπα εθνη περιπατει εν ματαιοτητι του νοο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17 hoc igitur dico et testificor in Domino ut iam non ambuletis sicut gentes ambulant in vanitate sensus sui
히브리어Modern,17 והנה זאת אני אמר ומעיד באדון כי מעתה לא תלכו עוד כיתר הגוים ההלכים בהבלי שכלם׃
성 경: [엡4:17]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 ‘허망’의 헬라어 ‘마타이오테티'(*)는 신약성경에서 때때로 우상 숭배와 관련된 단어로 사용된다(Bruce).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책임한 처신에 이르게 하는 ‘쓸모 없는 생각’을 가리킨다(롬 1:21; 벧전 1:18, Wood).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과거의 삶처럼 목적없이 헛된 것에 욕망을 기울여 무익하고 공허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 것을 권면한다.
에스코토메노이 테 디아노이아 온테스 아펠로트리오메노이 테스조에스 투 데우 디아 텐 아그노이안 텐 우산 엔 아우토이스 디아텐 포로신 테스 카르디아스 아우톤
개역개정,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새번역,18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져 있고 무지함과 완악함이 그들 속에 있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영어NIV,18 They are darkened in their understanding and separated from the life of God because of the ignorance that is in them due to the hardening of their hearts.
영어NASB,18 being darkened in their understanding, excluded from the life of God, because of the ignorance that is in them, because of the hardness of their heart;
영어MSG,18 They’ve refused for so long to deal with God that they’ve lost touch not only with God but with reality itself.
영어NRSV,18 They are darkened in their understanding, alienated from the life of God because of their ignorance and hardness of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σκοτισμενοι τη διανοια οντες απηλλοτριωμενοι της ζωης του θεου δια την αγνοιαν την ουσαν εν αυτοις δια την πωρωσιν της καρδ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18 tenebris obscuratum habentes intellectum alienati a vita Dei per ignorantiam quae est in illis propter caecitatem cordis ipsorum
히브리어Modern,18 חשכי הדעת ומוזרים לחיי אלהים מפני אולתם אשר בהם כי טח מהשכיל לבבם׃
성 경: [엡4:18]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 ‘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노이아'(*)는 70인역에서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중심부’를 의미하는 ‘카르디아스'(*, ‘마음’)와 서로 혼용된다(창 8:21;27:41; 출 28:3). 본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희 가운데 있는…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 ‘하나님의 생명’은 모든 생명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다(Bruce, Lincoln). ‘하나님의 생명에서의 떠남’은 곧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으로 ‘죽은'(2:1, 5), ‘하나님이 없는'(2:12)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무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이안'(*)은 선천적인 죄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Lenski).
마음이 굳어짐 – ‘굳어짐’의 헬라어 ‘포로신'(*)은 돌같이 딱딱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마음이 굳어짐’이란 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양심(良心)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완고해지는 것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골 1:21, Lincoln).
호이티네스 아펠게코테스 헤아우투스 파레도칸 테 아셀게이아 에이스 에르가시안 아카다르시아스 파세스 엔 플레오넼시아
개역개정,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새번역,19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우리말성경,19 그들은 감각 없는 사람들이 돼 자신을 방탕에 내준 채 정욕으로 갖가지 더러운 일을 행했습니다.
가톨릭성경,19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영어NIV,19 Having lost all sensitivity, they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sensuality so as to indulge in every kind of impurity, with a continual lust for more.
영어NASB,19 and they, having become callous,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sensuality, for the practice of every kind of impurity with greediness.
영어MSG,19 They can’t think straight anymore. Feeling no pain, they let themselves go in sexual obsession, addicted to every sort of perversion.
영어NRSV,19 They have lost all sensitivity and have abandoned themselves to licentiousness, greedy to practice every kind of impurity.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ιτινες απηλγηκοτες εαυτους παρεδωκαν τη ασελγεια εις εργασιαν ακαθαρσιας πασης εν πλεονεξια
라틴어Vulgate,19 qui desperantes semet ipsos tradiderunt inpudicitiae in operationem inmunditiae omnis in avaritia
히브리어Modern,19 אשר השמינו ויתנו את נפשם לזמה לעשות כל תועבה באהבת הבצע׃
성 경: [엡4:19]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 ‘감각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펠게코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앞절에서 언급한 ‘마음이 굳어짐’과 연관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이란 의미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함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의 삶을 다음 세가지로 나타낸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어떠한 것에도 제한받지 않으며 수치나 두려움을 모르고 육욕(肉慾)에만 얽매이는 행동을 말한다(고후 12:21; 갈 5:19). 한편 롬 1:24-32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내버려 두셨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이방인 스스로가자신을 ‘방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방인의 도덕적 책임성을 강조한 것이다(Lincoln).
모든 더러운 것 – ‘더러운 것’의 헬라어 ‘아카다르시아스'(*)는 기본적으로 성적 부도덕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모든’이란 말로 수식되어 ‘모든부도덕’을 의미한다.
욕심 –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만족을 모르는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탐욕’이나(5:3, 5) ‘우상 숭배'(5:5; 골 3:5)와 연관된다.
휘메이스 데 우크 후토스 에마데테 톤 크리스톤
개역개정,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새번역,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영어NIV,20 You, however, did not come to know Christ that way.
영어NASB,20 But you did not learn Christ in this way,
영어MSG,20 But that’s no life for you. You learned Christ!
영어NRSV,20 That is not the way you learned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20 υμεις δε ουχ ουτως εμαθετε τον χριστον
라틴어Vulgate,20 vos autem non ita didicistis Christum
히브리어Modern,20 ואתם לא כן למדתם את המשיח׃
성 경: [엡4:20]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서 언급한 이방인의 생활과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 ‘너희’는 앞절의 ‘감각없는 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인, 특히 에베소 교인을 지칭한다. 한편 ‘배우지’의 헬라어 ‘에마데테'(*)는 단순한 학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나 제자가 되어 철저한 훈련으로 배우는 것을 말한다(Wood). 본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해 배우는 것을 지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Lincoln).
에이 게 아우톤 에쿠사테 카이 엔 아우토 에디다크데테 카도스 에스틴 알레데이아 엔 토 예수
개역개정,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새번역,21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우리말성경,21 참으로 여러분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그분에게서 듣고 또한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영어NIV,21 Surely you heard of him and were taught in him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that is in Jesus.
영어NASB,21 if indeed you have heard Him and have been taught in Him, just as truth is in Jesus,
영어MSG,21 My assumption is that you have paid careful attention to him, been well instructed in the truth precisely as we have it in Jesus.
영어NRSV,21 For surely you have heard about him and were taught in him, as truth is in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21 ειγε αυτον ηκουσατε και εν αυτω εδιδαχθητε καθως εστιν αληθεια εν τω ιησου
라틴어Vulgate,21 si tamen illum audistis et in ipso edocti estis sicut est veritas in Iesu
히브리어Modern,21 אם אמנם אתו שמעתם ובו למדתם כפי האמת בישוע׃
성 경: [엡4:21]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호칭에서 ‘예수'(구원자)라는 칭호로 바꾸고 있다. 이 칭호는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원자임을 보여준 역사적 사실을 암시한다(Bruce, Wood).
너희가 과연…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 ‘진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게'(*)는 확실한 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3:2)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음을 바울이 전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포데스다이 휘마스 카타 텐 프로테란 아나스트로펜 톤 팔라이온 안드로폰 톤 프데이로메논 카타 타스 에피뒤미아스 테스 아파테스
개역개정,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번역,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우리말성경,22 가르침의 내용은 거짓된 욕망을 따라 옛 습성을 좇아 썩고 있는 옛 사람을 버리고
가톨릭성경,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영어NIV,22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영어NASB,22 that, in reference to your former manner of life, you lay aside the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in accordance with the lusts of deceit,
영어MSG,22 Since, then, we do not have the excuse of ignorance, everything–and I do mean everything–connected with that old way of life has to go. It’s rotten through and through. Get rid of it! And then take on an entirely new way of life–a God-fashioned life,
영어NRSV,22 You were taught to put away your former way of life, your old self, corrupt and deluded by its lust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αποθεσθαι υμας κατα την προτεραν αναστροφην τον παλαιον ανθρωπον τον φθειρομενον κατα τας επιθυμιας της απατης
라틴어Vulgate,22 deponere vos secundum pristinam conversationem veterem hominem qui corrumpitur secundum desideria erroris
히브리어Modern,22 אשר תסורו מדרכיכם הראשנים ותפשטו את האדם הישן הנשחת בתאות התרמית׃
성 경: [엡4:22]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너희는…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옛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다(Calvin). 또한 ‘옛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의 행실, 성격, 태도를 총칭하는 말로서 옛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육적인 본성을 시사한다(Moffatt, Bruce). 그리고 이것은 악이나 그 세력의 지배 하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한편 ‘벗어 버리고’는 24절의 ‘입으라’와 대조적 개념으로 죄로 물든 옛 생활방식에서 떠나는 것을 시사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이미 침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본절의 이 금지 명령은 침례를 반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옛 사람을 포기하는 생활을 지속하라는 권면이다(Lincoln).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은 현재 시상(時相)으로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부패의 과정을 의미한다(Wood). 이 ‘썩어져 가는 구습’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이방인 생활을 가리킨다(2:3). 이것은 과거의 이방인 생활 방식을 포기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삶’과 대조된다. 이방인의 옛 생활 방식은 ‘유혹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유혹’의 헬라어 ‘아파테스'(*)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마 13:22; 막 4:19; 히 3:13) 거짓 교사의 교리를 나타낸다(골 2:18). 바울은 이렇듯 복음과 반대되는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할때 그 결과는 죽음이기에(2:1, 5; 벧후 1:4) 에베소 교인들에게 벗어버리라고 권면한다.
아나네우스다이 데 토 프뉴마티 투 노오스 휘몬
개역개정,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번역,23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우리말성경,23 심령으로 새롭게 돼
가톨릭성경,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영어NIV,23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영어NASB,23 and that you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영어MSG,23 a life renewed from the inside
영어NRSV,23 and to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ανανεουσθαι δε τω πνευματι του νοος υμων
라틴어Vulgate,23 renovamini autem spiritu mentis vestrae
히브리어Modern,23 ותתחדשו ברוח שכלכם׃
성 경: [엡4:23]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개역성경에는 ‘투 노오스 휘몬'(*, ‘너희 마음의’)이 생략되어 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 ‘심령’의 헬라어 ‘프뉴마티'(*)에 대해서 혹자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nilka, Houlden, Schlier). 그래서 본절을 ‘성령에 의해서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라’로 해석한다(Houlden).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마음의’라는 속격에 의해서 수식당하는 것은 개연성(蓋然性)이 없다(Mitton). 따라서 본절의 ‘심령’은 인간의 영과 마음을 가리킨다(Lincoln). 따라서 본문은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라는 의미이다. 한편 ‘새롭게 되어’의 헬라어 ‘아나네우스다이'(*)는 현재 부정사 수동태로, 성령에 의해서(고후4:16; 딛 3:5, Wood) 날마다 계속적으로 새로와져야 함을 시사한다.
카이 엔뒤사스다이 톤 카이논 안드로폰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개역개정,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번역,2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우리말성경,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NIV,24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영어NASB,24 and put on the new self, which in the likeness of God has been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the truth.
영어MSG,24 and working itself into your conduct as God accurately reproduces his character in you.
영어NRSV,24 and to clothe yourselves with the new self, created according to the likeness of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라틴어Vulgate,24 et induite novum hominem qui secundum Deum creatus est in iustitia et sanctitate veritatis
히브리어Modern,24 ותלבשו את האדם החדש הנברא כדמות אלהים בצדקה וקדשת האמת׃
성 경: [엡4:24]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한다. 이런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디오 아포데메노이 토 프슈도스 랄레이테 알레데이안 헤카스토스 메타 투 플레시온 아우투 에스멘 알렐론 멜레
개역개정,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새번역,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 ㉥슥 8:16
우리말성경,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5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영어NIV,25 Therefore each of you must put off falsehood and speak truthfully to his neighbor, for we are all members of one body.
영어NASB,25 Therefore, laying aside falsehood, SPEAK TRUTH, EACH ONE of you, WITH HIS NEIGHBOR, for we are members of one another.
영어MSG,25 What this adds up to, then, is this: no more lies, no more pretense. Tell your neighbor the truth. In Christ’s body we’re all connected to each other, after all. When you lie to others, you end up lying to yourself.
영어NRSV,25 So then, putting away falsehood, let all of us speak the truth to our neighbors, for we are members of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5 διο αποθεμενοι το ψευδος λαλειτε αληθειαν εκαστος μετα του πλησιον αυτου οτι εσμεν αλληλων μελη
라틴어Vulgate,25 propter quod deponentes mendacium loquimini veritatem unusquisque cum proximo suo quoniam sumus invicem membra
히브리어Modern,25 על כן הסירו מכם את השקר ודברו אמת איש את רעהו כי אברים כלנו יחד איש לאיש׃
성 경: [엡4:25]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접속사는 ‘디오'(*)로 ‘옛 사람을 벗어버림으로써 새 사람을 입었은즉'(Robertson)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원리적인 교훈과 실천적인 교훈을 연관시키고 있다(Wood).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옛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거짓’이다(골 3:9). ‘거짓’은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수 혹은 궤계를 가리킨다. 반면에 ‘새 사람’의 특징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가랴 8:16(LXX)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인은 상호간의 친교 가운데 솔직해야 함을 시사한다(Bruce).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4:15, 16;5:30; 롬 12:4, 5; 고전 12:12-15)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진실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통한 상호간의 신뢰감 대신에 거짓으로 인해 생겨난 불신은 유기체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기 때문이다(Lincoln).
오르기제스데 카이 메 하마르타네테 호 헬리오스 메 에피뒤에토 에피 토 파로르기스모 휘몬
개역개정,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새번역,26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 ㉦시 4:4(칠십인역)
우리말성경,26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말며 시4:4
가톨릭성경,26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영어NIV,26 “In your anger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영어NASB,26 BE ANGRY, AND yet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on your anger,
영어MSG,26 Go ahead and be angry. You do well to be angry–but don’t use your anger as fuel for revenge. And don’t stay angry. Don’t go to bed angry.
영어NRSV,26 Be angry but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on your anger,
헬라어신약Stephanos,26 οργιζεσθε και μη αμαρτανετε ο ηλιος μη επιδυετω επι τω παροργισμω υμων
라틴어Vulgate,26 irascimini et nolite peccare sol non occidat super iracundiam vestram
히브리어Modern,26 רגזו ואל תחטאו אל תשקע החמה על רגזכם׃
성 경: [엡4:26]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는 시 4:4(LXX)의 인용으로 역설적 명령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는 분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나 27절에 사단에게 빠지지 말라는 명령과 31절에 모든 분에 대한 금지 명령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권면(마 5:22; 갈5:20; 골 3:8; 딤전 2:8; 딛 1:7; 약 1:19, 20)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의분'(義憤)을 내신 적이 있었다(막 3:5; 요 2:13-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을 금지시킨 이유는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해가지도록’은 ‘분’을 처리하기 위한 시간 제한이다. 즉 시간 제한을 통해 한밤중까지 분을 품지 않도록 함으로 죄에 빠지는 잘못을 막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Bruce, Lincoln).
메데 디도테 토폰 토 디아볼로
개역개정,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새번역,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우리말성경,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가톨릭성경,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영어NIV,27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영어NASB,27 and do not give the devil an opportunity.
영어MSG,27 Don’t give the Devil that kind of foothold in your life.
영어NRSV,27 and do not make room for the devil.
헬라어신약Stephanos,27 μητε διδοτε τοπον τω διαβολω
라틴어Vulgate,27 nolite locum dare diabolo
히브리어Modern,27 גם לא תתנו מקום לשטן׃
성 경: [엡4:27]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본절은 앞절에서 언급된 금지 명령의 동기이다. 분노를 마음에 오래 품음으로 탐닉(眈溺)하게 되면 사단에게 자유롭게 영을 유린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품는 행위를 멈추든지 아니면 분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는 습관을 갖지 말라고 권면한다(Robertson).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분노로 가득 채워지기 전에 반드시 적당한 때에 풀어야만 한다(Calvin).
호 클렢톤 메케티 클렢테토 말론 데 코피아토 에르가조메노스 타이스 이디오스 케르신 토 아가돈 히나 에케 메타디도나이 토 크레이안 에콘티
개역개정,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새번역,28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우리말성경,28 도둑질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고 도리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줄 것이 있도록 자기 손으로 선한 일을 해 수고의 땀을 흘리십시오.
가톨릭성경,28 도둑질하던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NIV,28 He who has been stealing must steal no longer, but must work, doing something useful with his own hands, that he may have something to share with those in need.
영어NASB,28 Let him who steals steal no longer; but rather let him labor, performing with his own hands what is good, in order that he may have something to share with him who has need.
영어MSG,28 Did you used to make ends meet by stealing? Well, no more! Get an honest job so that you can help others who can’t work.
영어NRSV,28 Thieves must give up stealing; rather let them labor and work honestly with their own hands, so as to have something to share with the needy.
헬라어신약Stephanos,28 ο κλεπτων μηκετι κλεπτετω μαλλον δε κοπιατω εργαζομενος το αγαθον ταις χερσιν ινα εχη μεταδιδοναι τω χρειαν εχοντι
라틴어Vulgate,28 qui furabatur iam non furetur magis autem laboret operando manibus quod bonum est ut habeat unde tribuat necessitatem patienti
히브리어Modern,28 מי שגנב אל יסף לגנב כי אם ייגע ובידיו יעשה את הטוב למען יהיה לו לתת לאיש מחסור׃
성 경: [엡4:28]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7계명에 대한 언급이다(출 20:15; 신 5: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막 10:19; 롬 13:9). 여기서 ‘도적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클레프톤'(*)은 직업적인 ‘도적'(*, 호 클레프테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부당한 착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정죄할 수 없는 사소한 도적질까지 포함한다(Calvin).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끊어 버려야 한다(Wood).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 바울은 ‘도적질’을 하지 말라는 권면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 빈궁한 타인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인(눅 6:29-36; 고후 8:1-15;9:6-12) 기독교적 노동 윤리를 나타낸다. 그 노동의 목적은부의 축적이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돕는 선한 일에 있다(갈 6:1).
파스 로고스 사프로스 에크 투 스토마토스 휘몬 메 에크포류에스도 알라 에이 티스 아가도스 프로스 오이코도멘 테스 크레이아스 히나 도 카린 토이스 아쿠우신
개역개정,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새번역,29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믿음을 세우는 데’
우리말성경,29 더러운 말은 어떠한 것도 여러분의 입 밖에 내지 말고 오직 성도를 세워주는 데 필요한 대로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십시오.
가톨릭성경,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영어NIV,29 Do not let any unwholesome talk come out of your mouths, but only what is helpful for building others up according to their needs, that it may benefit those who listen.
영어NASB,29 Let no unwholesome word proceed from your mouth, but only such a word as is good for edification according to the need of the moment, that it may give grace to those who hear.
영어MSG,29 Watch the way you talk. Let nothing foul or dirty come out of your mouth. Say only what helps, each word a gift.
영어NRSV,29 Let no evil talk come out of your mouths, but only what is useful for building up, as there is need, so that your words may give grace to those who hear.
헬라어신약Stephanos,29 πας λογος σαπρος εκ του στοματος υμων μη εκπορευεσθω αλλ ει τις αγαθος προς οικοδομην της χρειας ινα δω χαριν τοις ακουουσιν
라틴어Vulgate,29 omnis sermo malus ex ore vestro non procedat sed si quis bonus ad aedificationem oportunitatis ut det gratiam audientibus
히브리어Modern,29 כל דבר נבול לא יצא מפיכם כי אם הטוב והמועיל לבנות לפי הצרך למען יתן חן לשמעיו׃
성 경: [엡4:29]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본절은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언어 생활에 대한 권면이다.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 ‘더러운 말’은 문자적으로 ‘부패한’ 혹은 ‘썩은’이란 의미로 단순히 좋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악의 있는 험담과 중상 모략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분쟁을 일으킨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 ‘선한 말’은 도덕적으로 건실하고 옳은 말로서 말을 잘 선별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선한 말을 하는 목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상호 간에 덕(德)을 세우며(Bruce)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언어 생활에서 타인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이다.
카이 메 뤼페이테 토 프뉴마 토 하기온 투 데우 엔 호 에스프라기스데테 에이스 헤메란 아포뤼트로세오스
개역개정,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새번역,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말성경,30 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영어NIV,30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영어NASB,30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by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영어MSG,30 Don’t grieve God. Don’t break his heart. His Holy Spirit, moving and breathing in you, is the most intimate part of your life, making you fit for himself. Don’t take such a gift for granted.
영어NRSV,30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ich you were marked with a seal for the day of redemption.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μη λυπειτε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ον του θεου εν ω εσφραγισθητε εις ημεραν απολυτρωσεως
라틴어Vulgate,30 et nolite contristare Spiritum Sanctum Dei in quo signati estis in die redemptionis
히브리어Modern,30 ולא תעצבו את רוח הקדש של אלהים אשר נחתמתם בו אל יום הגאלה׃
성 경: [엡4:30]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개역성경에는 ‘카이'(*, ‘그리고’)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더러운 말을 통해서 성령이 근심하게 됨을 암시한다(Wood).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본절은 사 63:10의 사상을 반영한다. 부주의하고 옳지 못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한다(고전 3:16; 살전 5:19).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안내자이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에(롬 8:26; 갈 5:17)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더럽히면 그를 근심케 만드는 것이 된다(Calvin).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소유주이심을 나타내는 보증의 표이다(1:13, 14). 한편 ‘구속의 날’은 본서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으로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동반하는 ‘주의 날'(고전 1:8; 살전 5:2; 살후 2:2) 혹은 ‘그리스도의 날'(빌 1:6, 10;2:16)을 가리킨다. 성령은 성도의 일시적인 범죄로 떠나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까지 성도의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요 14:16; 요일 3:2, 3). 그러나 이 보증은 단지 미래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 구속 곧 죄사함의 확신을 경험하며(1:7) 미래의 구속의 날에 몸전체의 구속을 경험하게 된다(롬 8:23).
파사 피크리아 카이 뒤모스 카이 오르게 카이 크라우게 카이 블라스페미아 아르데토 앞 휘몬 쉰 파세 카키아
개역개정,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새번역,31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우리말성경,31 모든 악독과 분노와 화내는 것과 고함치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가톨릭성경,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영어NIV,31 Get rid of all bitterness, rage and anger, brawling and slander, along with every form of malice.
영어NASB,31 Let all bitterness and wrath and anger and clamor and slander be put away from you, along with all malice.
영어MSG,31 Make a clean break with all cutting, backbiting, profane talk.
영어NRSV,31 Put away from you all bitterness and wrath and anger and wrangling and slander, together with all malice,
헬라어신약Stephanos,31 πασα πικρια και θυμος και οργη και κραυγη και βλασφημια αρθητω αφ υμων συν παση κακια
라틴어Vulgate,31 omnis amaritudo et ira et indignatio et clamor et blasphemia tollatur a vobis cum omni malitia
히브리어Modern,31 כל מרירות וחמה ורגז וצעקה וגדוף תסירו מכם עם כל הרשעה׃
성 경: [엡4:31]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너희는…버리고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버려야 할 악에 대해서 열거한다. ‘버리다’의 헬라어 ‘아르데토'(*)는 문자적으로 ‘깨끗이 쓸어버리다’, ‘제거되게 내버려 두라’는 의미로 더 이상 모든 악독과 관계를 갖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Wood).
악독 – 이것은 과거에 당한 손해나 모욕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품어 두어서 이웃과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이다(행 8:23; 롬 3:14; 히 12:15; 약3:14).
노함과 분냄 – 이 두 가지는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나 엄밀히 구별하면, ‘노함’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분노로서 급격한 감정 폭발이며(고후 12:20; 갈 5:20), ‘분냄’은 통렬하고 악독한 적의가 마음에 자리잡아서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딤전 2:8; 약 1:19, 20).
떠드는 것 – 이것은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악한 덕목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소리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훼방하는 것 – 이것은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모욕적인 인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막 7:22; 골 3:8; 딤전 6:4; 딤후 3:2).
기네스데 데 에이스 알렐루스 크레스토이 유스플랑크노이 카리조메노이 헤아우토이스 카도스 카이 호 데오스 엔 크리스토 에카리사토 휘민
개역개정,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새번역,32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우리말성경,32 서로 친절하고 인자하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가톨릭성경,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영어NIV,32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
영어NASB,32 And be kind to one another, tender-hearted,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God in Christ also has forgiven you.
영어MSG,32 Be gentle with one another, sensitive. Forgive one another as quickly and thoroughly as God in Christ forgave you.
영어NRSV,32 and be kind to one another, tenderhearted, forgiving one another, as God in Christ has forgiven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2 γινεσθε δε εις αλληλους χρηστοι ευσπλαγχνοι χαριζομενοι εαυτοις καθως και ο θεος εν χριστω εχαρισατο υμιν
라틴어Vulgate,32 estote autem invicem benigni misericordes donantes invicem sicut et Deus in Christo donavit nobis
히브리어Modern,32 והיו טובים איש אל רעהו ורחמנים וסלחים איש לאחיו כאשר סלח לכם האלהים במשיח׃
성 경: [엡4:32]
주제1: [성도의 연합과 새로운 삶]
주제2: [새로운 생활의 법칙]
바울은 앞절에서 금지 명령을 한 반면 본절에서는 행해야 할 덕목을 제시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 ‘인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난다(2:7).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고후 6:6; 갈 5:22; 골3:12). 또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자비’, ‘인자’와 함께 신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타인의 필요에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서로’에게 표현해야 하는 덕목이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 ‘…과 같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도스 카이'(*)는 ‘일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기준과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Lincoln).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구원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인 원형(原型)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타인에 대해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용서 자세는 반드시 사랑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Wood). 한편 ‘하라’의 헬라어 ‘기네스데'(*)는 실제로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서로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가운데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행위이다.
728×90
반응형
매튜헨리주석1100-에베소서 04장
에베소서 4장
Ⅰ. 보다 일반적인 권면 4:1
이것은 기독교 신앙 고백에 부합되게 행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에서 갇혀 있는 중이었다. 또한 그는 ‘주 안에서 갇힌 자’였다. 그는 여러 번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매임이 부끄럽지 않은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여기서 가련한 한 죄수의 간청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합당하게 행하여(1절). 이는 곧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이제 너희에게 진정으로 구하노니 이는 나에게 물품을 보내 달라는 것이거나 나의 석방을 위해서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로 선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게 함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즉 그리스인답게 살아야 하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후사답게 행하여야 하겠다.
Ⅱ. 서로 사랑할 것에 대한 교훈 4:2-16
사랑은 그리스도 왕국의 율법이며 그의 가르침의 내용이고 교회의 특징이다.
[1] 일치의 방법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절). 우리는 겸손을 통해서 교만과 반대되는 겸손을 이해하게 된다. 온유는 영혼의 가장 훌륭한 기질로서 다른 사람들을 성내지 않게 만들며 또한 온유한 사람 자신도 쉽게 성내지 아니한다. 오래 참음이란 자신이 받은 해를 보복하려고 함 없이 인내로 견디는 것을 말한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서로 서로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은혜를 고무시켜 줄지언정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 가운데서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많은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 가운데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것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 없이는 일치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일치를 향한 첫 단계는 겸손이라고 하겠다. 교만과 욕망은 화평을 깨뜨리며 온갖 해를 가져온다. 겸손과 온유는 화평을 회복시켜준다. 더욱 더 낮아진 마음이 될수록 더욱 더 같은 마음이 된다. [2] 일치의 특성 :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3절).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자리는 마음 또는 영혼안에서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생각이 일치된데 있다거나 예배의 형태나 양식이 일치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나 영혼이 일치된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힘써서 이것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은 복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투려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다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3절). 평안은 매는 것이다. 많은 가느다란 가지들이 서로 결합되어짐으로 강하게 된다. 평화로 매어지게 되면 사회의 힘이 된다. 모든 선한 사람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꼭 같은 길이에 꼭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많은 가지들이 한 다발에 묶어져 있는 것처럼 그들은 다른 길이와 다름 강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로 결속되어질 때 그들은 어떤 것보다, 심지어는 본래부터 아주 굵고 강한 것보다 더 강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3] 이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화합을 증진시켜주는 동기들.1) 많은 일치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마음의 일치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4절). 한 몸안에 두 마음이 있다면 참으로 기괴할 것이다. 만일 오직 한 몸만 있다면 그 몸에 소한 모든 것들은 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우리 모두는 같은 한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어야한다.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4절).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한분이시고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주도 하나이요(5절). 그리스도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5절). 이 믿음은 복음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모든 크리스챤을 구원하는 믿음의 동일한 은혜를 의미한다. 세례도 하나이요(5절).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6절).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교회의 모든 참된 구성원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인정해 주신다. 만유 위에 계시고(6절). 자신의 섭리를 통해서 그들을 붙들어 주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6절). 이는 곧 ‘너희 모두 가운데 계시다’는 뜻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 가운데 계시다는 말이다. 만일 그처럼 많은 ‘하나됨’이 있으면서 더욱 있어야 되는 한 가지, 즉 한 마음이나 한 영혼이 없다면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은사가 각기 다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을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들이 매우 많은 일에 있어서 일치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서로 다른 일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가운데 결코 어떤 불화도 가져오지 않는다. 이는 그것들이 모두 똑같이 풍성하신 한 분에게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온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다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모든 선물과 은혜를 그리스도께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시고 선물을 주신 모든 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이 경우에 있어서 선물을 받은 몇몇 사람들을 지적해 보이고 있다. 그는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 그리스도께 선물 받는 자들을 나타내고 있다(시 68:1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 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8절).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실 때 승리하신 정복자로서 승천하셨으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으셨다.’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대적을 정복하였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는데 특별히 이전에 다른 사람을 정복하였던 사람을 정복하였을 때 적용하는 말이다. 그는 죄, 마귀, 사망 등 우리를 정복했던 것들을 정복하셨다. 참으로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것들을 이기셨다. 그러나 그 승리는 그가 승천하실 때 완전하게 되었다. 그 때 그는 만물 위에 주가 되셨던 것이다. 그가…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8절). 시편에서는 ‘그가 인간에게서 선물을 받으시니’라고 되어 있다. (흠정역에는 ‘인간을 위해서’-역주) 그는 그들을 위해서 받으셨다. 이는 그들에게 주시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그가 먼저 땅 아랫곳으로 내려가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9절). 그는 육신을 입으시고 땅으로 내러오셨다. 그는 땅에 내려오시되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내려오셨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10절). 여기서 모든 하늘이란 곧 하늘들 가운데 하늘을 말하며, 만물을 충만케 한다는 말은 교회의 모든 서도들을 은혜와 선물로 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를 말해간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11절).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화평과 화목의 사역이었다. 사역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말미암은 결심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은 두 종류의 직분이라고 하겠다. 먼저 특수한 직분들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들이 있다. 여기서 사도가 가장 큰 직분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적과 교훈을 목격해 왔던 자들로 그들을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설명해주는 일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 전도자란 사도들이 임명한 사람들로 전도 여행에 있어서 사도들의 사역을 도와주었다. 다음은 일반 사역자들로 목사와 교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명칭이 한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직분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즉 목사들은 종종 감독이나 장로로 불리고 있는 자들이며 교사들은 권면함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여긴다.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선물들을 갖고 있으니 얼마나 부유한 곳인가! 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가!
3)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크신 목적과 계획 : 그리스도의 선물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의도되어진 것이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12절). 즉 죄로 말미암아 혼돈되고 잘못된 자들을 온전한 영의 상태로 인도해 주고 그들로 그 가운데서 더욱 진보케하여 각 사람으로 전체의 유익에 기여케 하기 위해서라고 하겠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2절). 즉 그들의 은혜를 더해가며 새로운 신자를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우리로 하늘 나라를 준비케 하기 위해서 예정된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이 말은 단지 사색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으로 충분히 전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이는 우리에게 은혜와 은사가 충만하게 됨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함을 벗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나타나는 모든 은혜로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세계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성장해 가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성직 임명에 있어서 그의 계획이 무엇이며 그 직분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를 무엇인가를 보도록 하자. ①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14절). 이는 곧 더 이상 지식에 있어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우리의 판단력이 변덕스럽지 아니하고 쉽게 모든 시험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의 시키는 대로 좌우되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어린 아니는 쉽게 강요되어진다. 우리는 중심을 잃은 배처럼 이리 저리로 요동하며 그리고 공중에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저기 떠다니는, 아무 진실성도 견고성도 없는 바람에 비유되는 그러한 교훈들을 유의해야 하겠다. 악한 자들은 사람의 궤술과 교활한 간계로 약한 자를 속여 넘어뜨리기 위해서 매복하고 있는 자처럼 속이고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자들에게서 우리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성령과 빛과 은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②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15절).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울러서 진리에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다툼으로서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와 화평 이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③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절). ‘그에게까지’란 곧 그리스도 안에 더욱 깊이 뿌리를 박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범사에’란 즉 ‘지식과 사랑과 믿음에’하고 하겠다. 우리는 어린 아이되는 것과는 반대로 성숙하게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될수록 그리고 그를 더욱 믿게 되고,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될수록 우리는 모든 은혜에 더욱 넘치게 될 것이다. ④온 몸이 각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 …자라게 하며(16절). 바울은 여기서 자연적인 몸과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몸 사이를 비교하고 있다. 몸의 각 지체들이 서로 연합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더욱 진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은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은사를 받는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절).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영적 성장에 큰 보탬이 된다. 몸이 스스로 세우는 것은 사랑안에서 가능하다.
Ⅲ. 바울의 여러 권면들 4:17-32
이어서 그리스도인이 정결하고 거룩한 마음과 생활을 가질 것에 대한 권고로서 보다 일반적인 권고가 나오고 있으며(17-24절) 계속해서 여러 특별한 것들에 대한 권고가 나타나고 있다(25-32절). 이상의 권면들은 엄숙하게 시작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여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17절).
[1] 정결하고 거룩한 마음과 생활을 가질 것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권면(17-24절)1)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17절). 회심한 이방인들은 회심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비록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같이 살아서는 안되다.
① 이방 세계의 사악함 : 첫째,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18절). 그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었으며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로 그들의 무지몽매함이 곧 그들이 하나님의 이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이유였다. 그러면 그들이 이와 같이 무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저희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이거나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었다. 그들의 무지함은 그들의 완고함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둘째, 그들의 양심은 타락하였고 무감각하게 되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19절).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했으며 자기들의 처지가 불행스런 것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더러운 정욕에 탐닉하였다. 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사람의 양심이 한번 무감각하여지게 되면 그들의 죄는 한이 없게 된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방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절). 어떤이들은 이 구절을 “너희는 그렇지 않다. 이는 너희는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이다”로 읽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배운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속해있는 어두움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므로 더 나은 태도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배우라! 이게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가 무슨 책이나 학과목이나 도나 무슨 직업이란 말인가?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21절). 그리스도는 학과목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또 교사이시다. 우리는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21절). 이는 곧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교훈과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참된 진리를 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것이 예수 안에서 나타나게 될 때, 아름답고 능력있게 나타난다.
2) 또다른 일반적인 권면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새 사람을 입으라(22-24절). 여기서 바울은 의복에 관한 비유를 예로서 들고 있다. 성화는 다음 두 가지 사랑을 포함한다. ①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22절). 타락한 본성이 옛 사람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그것은 옛 사람으로, 우리는 그것을 옛 아담에게서 물려받았다. 그것은 뿌리 깊이 박힌 본성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함께 온 것이다. 그것은 타락한 것으로 말씀되어지고 있다. 이는 영혼 안에 있는 죄가 영혼의 기능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 더 악화되어질 것이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22절). 유혹의 욕심은 사람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듯하나 그것은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할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낡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이러한 것을 벗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욕심은 `구습을 좇는 것’이다. ②새 사람을 입으라(24절). 타락한 원리들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은혜로운 원리들에 따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23절). 새 사람을 입으라(24절). 새 사람이란 곧 새본성, 새 피조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새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되어진 혹은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따라(24절).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하고 죄악된 상태를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 반면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의 영화로움과 복됨을 보여 주게 된다. 의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을 향한 말이며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말이다. 진리의 거룩함이란 곧 유대인들의 의식적인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려고 힘쓰게 될 때 우리는 새 사람을 입은 것으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2] 극복해야 할 옛 사람의 특별한 가지들과 벗어 버려야 할 옛 본성의 더러운 누더기들, 그리고 새 사람의 특별한 장식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25-32절). (1)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25절). 거짓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특히 이 죄를 많이 범하였는데 그들은 유익이 되는 거짓말은 해야 되는 진리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거짓과는 반대로 새 사람이 없어야 하는 습성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참된 것을 말하고자 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25절). 진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빛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결코 서로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몸 혹은 한 조직체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나 거짓과 허위는 그 조직체를 와해시키기가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피하고 참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 거짓말은 매우 큰 죄이다. (2) 분노와 무절제한 걱정을 멀리하라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26절) `분을 내어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을 내기가 쉽다는 사실을 아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한계를 넘지 않으려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며’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분을 내되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면 죄 이외에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분을 내어서는 안 된다. 분을 내게 됨으로 짓기 쉬운 큰 죄는 분노가 진노로 바뀌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밤이 되기 전에 너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너를 분노케 한 자와 화해하도록 하라.” 그래서 본문에서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였다. 분노 그 자체는 죄 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주의 깊게 경계하지 않는다면 죄가 될 가장 큰 위험이 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7절). 진노와 죄된 분노 가운데 있는 자들은 마귀로 그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게 하는 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27절의 말씀을 비방하는자 혹은 거짓 고소자들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라고 보는데 이는 곧 “속삭이는 자들과 이야기를 지어내는 자들과 중상모략하는 자들에 대해서 귀먹어리가 되도록 하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3) 우리는 여기서 도적질하지 말 것에 대한 경계와 정직하고 근면할 것과 구제할 것에 대한 권면의 말을 접하게 된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28절).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죄와 반대되는 의무를 풍성히 행하려고 해야 하겠다. 즉 도적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여야’할 것이다. 도적질은 게으름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불법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거짓 없는 부르심 안에서 근면하고 부지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선한 일을 하라(28절). 근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를 유혹에서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즉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서다.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만 수고해서는 안 된다. 거의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일지라도 하늘 창고에 자신들의 푼돈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의 것을 가지셔야 하며 가난한 자들은 그의 것을 받는 자들이다. (4) 우리는 여기서 더러운 말에 대해 경계하는 것과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할 것을 지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29절). 더럽고 추한 말과 강론은 썩어 냄새나는 고기처럼 독이 있는 것이며 전염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모든 언동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더러운 말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유익한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이는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들의 입술로 남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말을 개선해 가도록 유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큰 의무이다. (5) 서로 사랑할 것에 대한 충고와 분노에 대한 또 다른 경고(31, 32절) : `악독과 노함과 분냄’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격렬한 내적 의미하는 것이다. `떠드는 것’은 절제 없는 말로서 그것에 의해서 악독과 노함과 분냄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혀로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 ‘훼방하는 것’온 우리가 분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온갖 욕설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악의’는 사람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도록 음모를 꾸미게 해주는 뿌리깊은 분노라고 하겠다, 이 모든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32절). 이 말씀은 마음속에 사랑의 원리를 세우고 그것을 외부로 표현하는 것을 함축한다. 불쌍히 여기며(32절). 이는 곧 자비롭게 되는 것으로서 쉽게 마음이 움직여 동정과 연민을 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 용서하라(32절). 때때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견해의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꺼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 자신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들은 용서하는 심령을 가진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역설한 이 모든 특별한 권면들은 십계명의 후반부에 속한 것들이다. 외식적으로 그것들을 수행하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가장한다 할지라도 결코 참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30절). 우리는 성령의 거룩한 본성과 뜻에 역행하는 것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성령의 뜻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절한다거나 그의 다스림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복되신 성령을 격동시킴으로 그의 임재와 은혜로우신 결과들을 너에게서 거두어 가시지 않도록 하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절). 우리의 몸은 부활의 날에 무덤의 권세로부터 구원함을 받게 된다. 그 때 우리의 충만하고 완전한 행복은 시작된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그날까지 인치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보증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그의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1-6 Nothing is pressed more earnestly in the Scriptures, than to walk as becomes those called to Christ’s kingdom and glory.
By lowliness, understand humility, which is opposed to pride.
By meekness, that excellent disposition of soul, which makes men unwilling to provoke, and not easily to be provoked or offended.
We find much in ourselves for which we can hardly forgive ourselves; therefore we must not be surprised if we find in others that which we think it hard to forgive.
There is one Christ in whom all believers hope, and one heaven they are all hoping for; therefore they should be of one heart.
They had all one faith, as to its object, Author, nature, and power.
They all believed the same as to the great truths of religion; they had all been admitted into the church by one baptism, with water,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as the sign of regeneration.
In all believers God the Father dwells, as in his holy temple, by his Spirit and special grace.
#7-16 Unto every believer is given some gift of grace, for their mutual help.
All is given as seems best to Christ to bestow upon every one.
He received for them, that he might give to them, a large measure of gifts and graces; particularly the gift of the Holy Ghost.
Not a mere head knowledge, or bare acknowledging Christ to be the Son of God, but such as brings trust and obedience.
There is a fulness in Christ, and a measure of that fulness given in the counsel of God to every believer; but we never come to the perfect measure till we come to heaven.
God’s children are growing, as long as they are in this world; and the Christian’s growth tends to the glory of Christ.
The more a man finds himself drawn out to improve in his station, and according to his measure, all that he has received, to the spiritual good of others, he may the more certainly believe that he has the grace of sincere love and charity rooted in his heart.
#17-24 The apostle charged the Ephesians in the name and by the authority of the Lord Jesus, that having professed the gospel, they should not be as the unconverted Gentiles, who walked in vain fancies and carnal affections.
Do not men, on every side, walk in the vanity of their minds? Must not we then urge the distinction between real and nominal Christians? They were void of all saving knowledge; they sat in darkness, and loved it rather than light.
They had a dislike and hatred to a life of holiness, which is not only the way of life God requires and approves, and by which we live to him, but which has some likeness to God himself in his purity, righteousness, truth, and goodness.
The truth of Christ appears in its beauty and power, when it appears as in Jesus.
The corrupt nature is called a man; like the human body, it is of divers parts, supporting and strengthening one another.
Sinful desires are deceitful lusts; they promise men happiness, but render them more miserable; and bring them to destruction, if not subdued and mortified.
These therefore must be put off, as an old garment, a filthy garment; they must be subdued and mortified.
But it is not enough to shake off corrupt principles; we must have gracious ones.
By the new man, is meant the new nature, the new creature, directed by a new principle, even regenerating grace, enabling a man to lead a new life of righteousness and holiness.
This is created, or brought forth by God’s almighty power.
#25-28 Notice the particulars wherewith we should adorn our Christian profession.
Take heed of every thing contrary to truth.
No longer flatter or deceive others.
God’s people are children who will not lie, who dare not lie, who hate and abhor lying.
Take heed of anger and ungoverned passions.
If there is just occasion to express displeasure at what is wrong, and to reprove, see that it be without sin.
We give place to the devil, when the first motions of sin are not grievous to our souls; when we consent to them; and when we repeat an evil deed.
This teaches that as sin, if yielded unto, lets in the devil upon us, we are to resist it, keeping from all appearance of evil.
Idleness makes thieves.
Those who will not work, expose themselves to temptations to steal.
Men ought to be industrious, that they may do some good, and that they may be kept from temptation.
They must labour, not only that they may live honestly, but that they may have to give to the wants of others.
What then must we think of those called Christians, who grow rich by fraud, oppression, and deceitful practices! Alms, to be accepted of God, must not be gained by unrighteousness and robbery, but by honesty and industry.
God hates robbery for burnt-offerings.
#29-32 Filthy words proceed from corruption in the speaker, and they corrupt the minds and manners of those who hear them: Christians should beware of all such discourse.
It is the duty of Christians to seek, by the blessing of God, to bring persons to think seriously, and to encourage and warn believers by their conversation.
Be ye kind one to another.
This sets forth the principle of love in the heart, and the outward expression of it, in a humble, courteous behaviour.
Mark how God’s forgiveness causes us to forgive.
God forgives us, though we had no cause to sin against him.
We must forgive, as he has forgiven us.
All lying, and corrupt communications, that stir up evil desires and lusts, grieve the Spirit of God.
Corrupt passions of bitterness, wrath, anger, clamour, evil-speaking, and malice, grieve the Holy Spirit.
Provoke not the holy, blessed Spirit of God to withdraw his presence and his gracious influences.
The body will be redeemed from the power of the grave at the resurrection day.
Wherever that blessed Spirit dwells as a Sanctifier, he is the earnest of all the joys and glories of that redemption day; and we should be undone, should God take away his Holy Spirit from us.
[장별설교]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
728×90
반응형
[장별설교]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베소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는 이유와 하나님을 본 받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Ⅰ.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1-16절)
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바울은 먼저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조언합니다.(1절) 먼저 ‘부르심’이 뭔가 생각해 봅시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말하면 가장 쉬울 것 같습니다. 클린턴 E. 아놀드라는 학자는 부르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하나님의 초청 혹은 소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이 되도록 부르신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분과 가까이 관계를 맺도록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목적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 뭘까요? 2-3절에서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심이기 보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내 자신과 상대방을 향한 거룩한 성품입니다. 오래 참음과 사랑 역시 공동체 안에서 가져야할 삶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하면서 가장 먼저 ‘오래 참음’을 이야기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도 간의 관계 속으로 부름이라할 수 있습니다.
2. 부르심의 소망(목적)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교회론으로 나아갑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우리의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 소망이 무엇일까요? 12절에서 다양한 은사를 이야기한 다음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결국 성도를 부르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온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의 모범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또 닮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자 보십시오. 성도는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 성도를 세우시는 과정
5-12절까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교회의 직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에 나타난 교회의 직분을 봅시다. 먼저는 사도입니다. 두 번째는 선지자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 전하는 자로, 그 다음은 목사와 교사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칼로우스(ποιμένας καὶ διδασκάλους)’로 우리나라 성경은 목사로 번역했지만 목자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디다칼로우스는 말 그대로 교사입니다. 그런데 정관사 없기 때문에 두 직분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목사와 교사를 한 직분을 말합니다. 자 좋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직분은 성도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침의 세상의 풍조에 이끌리지 않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기 위함입니다.
먼저 8절 말씀을 봅시다. 이곳의 말씀은 시편 68:18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그런데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적군들을 쳐 부수고 그들의 탈취물들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늘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다시 9절로 가보겠습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바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적들을 쳐부신 것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올라가시면서 적들에게 빼앗을 탈취물을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 주신 것이죠. 그로 인해 주의 백성들이 풍성하게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건을 곧바로 신약의 교회로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탈취물로 나누어주신 선물을 11절에서 교회의 직분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낮아짐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고, 높아지심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사건, 즉 승귀하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면서 교회에 즉 새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통치하시는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직분자들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세웠고, 현대교회는 목사와 교사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있는 말입니다.
Ⅱ.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1. 새 사람을 입으라
첫 번째 권면은 새 사람을 입으라(24절)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22절) 옛 사람은 육체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른다’라고 말합니다.(22절 상) 17-19절에서 이러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17절),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는 것(18절)이며, 결국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19절)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입어야할 새 사람은 무엇입니까? 먼저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 그리고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삶의 방식, 즉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거룩함은 진리를 따라 삶을 통해 욕심이 아닌 사랑과 헌신을 통해 희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의와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할 덕목입니다.
[눅]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2. 삶으로 열매를 드러내라.
25절은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앞에 소개된 새 사람을 입은 자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26절에서는 분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어떤 이유든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마귀가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우리 자신을 방임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규모있는 절제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고, 더러운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9절의 ‘더러운 말’에서 ‘더럽다’라는 단언 ‘σαπρός’로 ‘썩어 악취가 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1-18에 의하면 나쁜 열매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13:48에서는 천국의 비유 중에서 버려야할 물고기에 사용되었습니다.
[마]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욕심과 욕망, 방탕과 방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세상의 헛된 것들과 죄악들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마땅히 다 버려야 합니다. 대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3.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말은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통해 우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오래 된 습관을 말합니다. 죄를 계속 짓게 되면 성도는 성령을 거의 소멸하게 됩니다. 물론 한 번 내주하신 성령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근심하심으로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교회의 사역도 똑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는 삶을 살지만, 어떤 교회는 철저히 육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이 눌리고 또 눌리면 결국 성령은 거의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728×90
반응형
에베소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2월 8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에베소서 서론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장: 교회의 세계성 4장: 교회의 일체성 5장: 교회의 성결성 6장: 교회의 전투성 서론 에 베소서의 저자 는 바울이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3:1, “. . . 갇힌 자된 나 바울은.” 초대교회에 익나시우스, 허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은 본 서신을 인용하며 그것이 사도 바울의 서신임을 증거하였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에베소 교인들이다. 몇몇 고대 사본들에 ‘에베소 교인들에게’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으나,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구절이 있는 사본들과 역본들의 압도적 증거들이 있고, 1) 무라토리 단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초대 교부들의 증거들도 있다. 본서의 저작 연대 는 주후 60년경일 것이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썼다고 본다(3:1; 4:1). 본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교회이다. 본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해 증거한다. 본서에는 ‘교회’라는 말이 9번 나온다(로마서에는 5번, 고린도전서에는 22번, 고린도후서에는 9번, 갈라디아서에는 3번 등).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1-2장, 교회의 본질]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6장, 교회의 속성] 3장, 교회의 보편성 4장, 교회의 일체성 5장, 교회의 성결성 6장, 교회의 전투성 1장: 교회의 기초 1-14절,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그가 무지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을 때, 주께서 그를 부르셨고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세우시고 보내신 자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하였다.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聖化)의 은혜이며, 평안은 그 은혜에 근거한 마음의 평안과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평안을 가리킨다. [3-6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때문에 그를 찬송하면서 그의 구원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이시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이시며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시다. 오늘 우리도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 곧 육신적, 물질적, 현세적 복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곧 영적, 내세적 복이다. 현세적 복도 복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죽으면 다 끝나는 복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원한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인류 중 어떤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는 그들을 아셨고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8:58)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영광을 누리셨던 자이시며(요 17:5)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영원 전부터 계신(미 5:2) 신적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죄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轉嫁)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제물이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일차적 목적은 택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함을 보인다. 죄는 사람 앞에서는 감출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롭고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으나(전 7:29; 골 3:10; 엡 4:24) 범죄함으로 더러워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를 계획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치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만, 양자(養子)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다(요 1:12; 롬 8:15). 하나님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이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죄인들은 지옥 갈 자신들을 택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것밖에 없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그들의 모든 죄는 씻음 받았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贖)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다(벧전 1:18-19). [8-10절] 이는( 헤스 )[그 은혜를]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계획]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뜻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속(代贖)의 이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구약 백성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요 14:6).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시간표가 있었다. 아담의 창조 후 6천년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었다. 아담 후 천년 경에 노아라는 인물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2천년 경에는 아브라함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3천년 경에는 다윗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4천년 경이 되어 ‘때가 찬 경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들 곧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 다함께 구원을 받는다. 디모데전서 2: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는 지금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 한 몸, 한 가족, 한 교회, 한 나라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모든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가 된다. [11-12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그리스도를 먼저 바랐던(혹은 믿었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役事)하시는 자’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우리의 예정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했다. 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 백성이 되었다.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원어는 6절과 14절의 말과 동일한데, 그것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천국 백성된 최종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13-14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그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하시고[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다. ‘너희도’라는 말은 11절의 ‘우리가’라는 말에 이어진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에베소 교인 너희도 구원의 복음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었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는 말은 ‘그것을 믿어’라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셨다. 성령의 인치심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택과 구속(救贖)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세 번째 단계이다. 14절의 ‘이는’( 호스 )( 남성 관계대명사)이라는 말은 앞절의 성령을 가리킨다. 원어에서 ‘성령’은 중성명사이지만, 남성 관계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성령의 인치심, 곧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는 일에 보증과 보장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은, 모두 다 끝까지 보존되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화(聖化)를 이루다가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둘째로, 우리는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도록 실제적으로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로 복음을 깨닫고 믿어 구원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15-23절, 사도 바울의 기도 [15-16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주 예수께 대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에베소인들의 구원받은 사실을 인하여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로 인해 감사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며 또 그들의 믿음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진실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인한 감사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고 그의 믿음이 참되며 자라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고(딤전 2:5)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이시고(고전 15:45, 47) ‘의인’이시다(행 7:52). 하나님께서는 또한 ‘영광의 아버지’이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구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죄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요 17:3). 그러나 에베소 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혹은 영]’이 필요했다. ‘계시(啓示)’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마 11:27; 막 4:12). 신앙생활의 시작에도 또 진행에도,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식을 이미 얻었으나 그의 지식은 자라고 확고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큰 복이다. [18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은 천국의 영광과 복을 가리킨다. 그것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이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고후 4:17)이며 또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영광’(계 21:10-11)이다. [19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셋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로 믿어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심히 무감각해졌던 우리를 깨우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의 능력의 일이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결코 다시 살 수 없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능력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 능력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신 자들을 오늘날도 구원하신다.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役事)하여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표이었다. 죽음은 인류 역사 수천 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세력처럼 보였고, 사람의 절망들 가운데서 가장 큰 절망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가장 큰 절망을 단번에 극복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심도 놀라운 사실들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들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 1:9, 10,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베드로전서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21절]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물론, 불신자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무시하고 그의 신적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지한 세상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뿐이지,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등한 권세를 가지시고 동등한 영광을 누리신다. [22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오른편에 앉게 하심은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주이시다. 만물은 그의 발 아래 있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 만물 중에는 인류의 원수인 사탄도 포함되며 사탄도 마침내 그리스도의 발 아래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발 아래 굴복할 것이다(시 110:1; 롬 16:20). 높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머리’라는 말은 ‘우두머리, 주’라는 뜻이다. 그가 교회의 우두머리이시므로 교회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또 교회의 지도자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마 23:10). ‘머리’라는 말은 몸의 머리라는 뜻도 가진다. 머리와 몸이 나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는 생명적 관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잠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개인이시지만, 또한 새 인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가 선택되었고(엡 1:4)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엡 1:10) 구원받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한 새 몸을 이룬다(엡 2:15).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온 세계적으로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전도, 곧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기지(基地)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이며 완성이다. 교회의 충만은 수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가 다 구원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성경과 역사가 증거하는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역적으로, 시대적으로 쇠퇴하는 단체가 아니고 수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 가는 단체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내용이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아는 복을 누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더 깨닫고 그 천국과 영생의 영광을 더 깨닫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무지하고 연약한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구주 예수님 믿고 구원 얻게 하셨다. 우리는 오늘도 그의 능력을 의지하며 이 험한 세상을 산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역사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가 교회의 머리 되심을 알고 그에게와 그의 모든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천사들과 모든 사람들의 이름들 위에 뛰어나신 이름이시다. 이 세상은 그를 모를지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찬송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과 주님과 왕이시다. 교회는 오직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의 뜻과 교훈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교회의 본분은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복종하는 것이다. 2장: 교회의 구성원 1-10절, 은혜의 구원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영혼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이었다. ‘허물과 죄’란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원죄(原罪)와 이 원죄 때문에 각 사람이 실제로 범하는 자범죄(自犯罪)를 포함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경고하셨던 대로(창 2:16-17), 죄의 보응은 죽음이다(롬 6:23).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은 자이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죽은 영혼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한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구원받기 전에 사람들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이 세상 풍속은 죄악된 풍속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이다. 사탄은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등으로 표현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요일 5:20).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믿음과 순종을 주시지만, 사탄은 사람들 속에 불신앙과 불순종을 일으키며 이 세상에 죄악된 풍조를 조장한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도 과거에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다. ‘육체’라는 말( 사르크스 )은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돈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세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 그러하다. 이것들은 다 세상적이요 죄악되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 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밖에 없었다. 다른 원인과 이유는 없었다. 우리 속에는 어떤 원인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고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무능력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렘 13:23).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확증되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다.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새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중생(重生,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일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이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리우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 믿는 모든 자들도 그와 함께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천국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그 특권에 대한 성취와 확증이며 상징이 되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자비와 은혜를 나타내심이었고 그 은혜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 세상에 밝히 전파되고 있고 증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피 흘리신 죽음은 순전히 죄인들을 대신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대속물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희생이었고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8절]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얻었으며].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의 은혜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의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 믿음은 지식과 찬동과 의지를 포함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며(요 6:35, 37) 그를 영접하는 것이며(요 1:12)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롬 6:17). 믿음은 입술로 고백된다(롬 10:9-10). 물론,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17). 참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사람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율법 순종의 행위와 대조되는 어떤 것이다(롬 4:5). 믿음은 빈손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 빈손이 필요하지만, 빈손은 자랑할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진실한 믿음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것은 공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 3:16).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정상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요 3:18, 36).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얻었다’는 원어( 세소스메노이 )(완료분사)는 믿는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음을 보인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 더러워진 자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현재 성화를 이루다가(빌 2:12)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9-10). [8-9절] . .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선물임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 투토 tou’to )은 ‘구원받은 사실’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랑하지 못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핏값으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롬 8:30).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들을 위해서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셨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디도서 3:4-5,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나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일이 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우리는 이 귀하고 복된 사실을 감사하자. 셋째로,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의 나태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되,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영혼 구원의 전도와 참 교회 건립에 힘써야 한다. 11-22절,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어떠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신분과 상태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었는가? 본문은 그들의 구원받기 전의 신분과 상태를 일곱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을 경외함도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과거에 다 이방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전에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무할례당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무할례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언약과 상관없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무할례자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백성에게 율법에 암시된 구주이셨다. 구약 백성은 율법 중 제사법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밖에’라는 원어( 코리스 )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구주가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알지 못했고 그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넷째로,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선민(選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셨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 나라에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규례 밖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과 상관이 없고 그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과거에 그러하였다. 다섯째로, 그들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말한다. 그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창 17:7-8; 렘 30:22; 31:33; 겔 11:20; 14:11; 36:28). 그것은 또 영생과 평안의 복을 포함한다(신 5:33; 잠 3:16-18). 할례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표이었다.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여섯째로, 그들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늙음과 쇠잔함, 질병들과 죽음 등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소망이 없다. 과거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슬픔이 많은 인생, 허무한 인생일 뿐이었다. 일곱째로, 그들은 전에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신(神)에 대한 약간의 의식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헛된 우상들을 신(神)인 줄 알고 섬겼다. 그들은 그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바랐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의 시작이지만, 이전의 그들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무지와 흑암 속에 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돌보심도 받지 못했다. 과거의 우리가 바로 그러하였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전에 멀리 있었다’는 말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 즉 그가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로 이루신 속죄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그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14절] [이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화평이심이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방인인 에베소인들이 이스라엘과 가까워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영적 특권의 차이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히 그를 부르는 자들을 누구나 차별 없이 받으신다. [15절]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은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므로, 과거에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의문(儀文) 곧 율법 조문에 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 예를 들어, 성막이나 제사들이나 절기들 그리고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들 등에 대한 법들은 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시키는 법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다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 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로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이제는 유대인의 교회가 따로 없고 이방인의 교회가 따로 없다. 이제는 둘을 다 포함하는 한 교회가 있을 뿐이다. 신약교회는 세계적 단체이며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된 관계가 되었다. [16-18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사람들은 원수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그러했다. 성경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못지 않게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였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미워하셨고 죄인들도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시며 그 둘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롬 5:10).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론하고 모두들에게 평안의 복음, 화목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고 한 성령 안에서 그의 위로와 권면을 받으며 하나님을 섬긴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은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곧 동료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즉 신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신약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즉 그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모퉁이 돌’은 건물을 구성하는 모든 돌들의 기준이 되는 기초석이다. 그것은 건물을 결합시키고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요, 둘째는 개인의 성화이다. 전도는 성전 건립의 일이다. 한 명의 택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건물의 벽돌 한 장이 쌓이는 것과 같다. 모든 영혼들이 다 돌아올 때 이 성전 공사는 완공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 즉 성화(聖化)도 필요하다. 성도는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받았으나(고전 1:30; 롬 3:23, 24; 10:4),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구원과 그 의를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함과 섬김을 그리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기 전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는 할례도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 우리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없었고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도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 그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받은 현재의 새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 아니고 외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 즉 가족이 되었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물론, 이 성전은 지금도 건축 중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성화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전체 교회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남김 없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존귀한 백성이 되었고 또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21절), 주 안에서(21절), 성령 안에서(22절), 예수 안에서(22절)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고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구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 하나같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과 원수 되고 서로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개인의 성화(聖化)를 위해서와 남은 택자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한다. 3장: 교회의 세계성 1-13절,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 [1절]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너희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KJV, NASB) 나 바울은. ‘이러므로’라는 말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즉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가는 은혜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 은혜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되었다. [2-4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 오이코노미아 )[경영, 계획, 직무]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구약 백성들에게는 감취어 있었던 내용이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이방인들의 구원은 암시되어 있었다(창 12:3; 시 117:1). 그러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아무도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사도 바울에게 알려졌고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려졌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은혜의 구주가 되신다고 증거한 내용을 읽는 자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사실과 그가 깨달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알았다. 이미 증거한 대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복이며 특권이다. [5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의 ‘선지자들’은 2:20과 4:11에도 나오는 말로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받고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곧 이방인들에게도 함께 주신 은혜의 복음 진리는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으로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의 진리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던 진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계시된 교회의 세계성의 진리 곧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고 또한 이방인들도 참여하는 교회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에 암시된 바는 있지만(창 12:3; 22:18; 시 117:1; 사 45:22), 밝히 드러나 있지는 않았던 바이었다. 그 사실은 구약시대에는 비밀과 같았다. [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의 내용을 다시 말한다. 즉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방인들 편에서 볼 때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비밀이 계시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기업을 이어받는 자들이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또 함께 복된 약속 곧 부활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주께로부터 이 복음을 받았고 이것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가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일이었다. 바른 직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받는다. 인위적인 직분은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세움을 받은 자마다 그 동일한 은혜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택하신 것은 바울이 남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실수를 깊이 회개했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회개하고 겸손해진 자를 들어 쓰신다. 그는 교만한 자는 쓰지 않으시고 도리어 물리치신다. 자신을 크게 여기는 자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울에게 바로 이런 은혜가 임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겸손한 봉사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며 그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름과 영광에만 관심을 둘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결국 그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될 것이다. [9-11절] 영원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전통사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계획]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Byz, UBS)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부터’라는 말은 ‘오랜 시대 동안’ (NASB)이라는 뜻이며 ‘감취었던’이라는 말에 걸린다.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이라는 말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피조물들은 심지어 하나님 곁에 있는 선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그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깊고 넓은 지혜가 알려진다.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엡 1:4).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전의 의논을 상상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 전의 의논과 작정대로 온 세상에 충만한 이 구원의 일이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복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 5:1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또 히브리서 10:19의 말씀대로, 우리는 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지성소] (KJV, NIV) 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고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달았다면, 고난의 현실을 인해 낙심치 말아야 한다. 고난은 항상 있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주의 종들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옛날부터 주의 종들은 항상 고난과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을 고난 중에서도 지키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셨다. 성도의 고난과 핍박은 그에게 부끄러움이 아니고 영광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사도들이 쓴 신약성경은 이방인들도 구원의 복을 누림을 밝히 증거하였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됨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을 얻었고 지금도 그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참된 헌신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러다 고난을 받을지라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다(8절).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14-21절, 바울의 기도와 찬송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2)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는 말씀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family)’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며, 하늘에 있는 가족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고, 땅에 있는 가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늘에 들어간 이들은 승리하여 안식을 누리고 있고, 땅에 사는 우리들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모든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이름이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 시작하였거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가 친히 이루시는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바울은 단지 에베소 교인들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의 선한 결심이나 노력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이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바울의 첫 번째 기도 내용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라는 것이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뜻을 포함할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심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권면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신다. ‘속사람’은 ‘중생한 영혼’을 가리킨다고 본다. 중생한 영혼들에 심겨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려는 새 성향은 더욱 자라고 강건케 되어야 한다. 중생한 성도들의 영혼들은 늘 죄성의 도전을 받는다. 중생한 성도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아직 연약하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육신의 연약’이라고 표현하였다.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不淨)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8:3-8,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중생한 자에게도 남아 있는 이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은 중생한 사람의 속사람에게 도전한다. 이것은 사람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의 도전이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들에게 이런 연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셔서 지식과 믿음, 의와 선과 진실에 굳게 서게 하시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갓난아이 같아서 자라가야 한다. 히브리서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영적 어린아이 곧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의 확신을 겨우 가진 성도들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 곧 의의 말씀을 체험하고 선악을 분별하며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대조시켰다(히 5:12-13). 또 히브리서 6:1-3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2에서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함으로 자라가야 할 것을 가르쳤고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했다(3:18). [17-19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그들 속에 거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성도는 그와 연합되어 있음을 믿음과 순종으로 표현해야 하며 체험해야 한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과 같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늘 계심을 믿어야 한다. 바울의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사랑 가운데 굳게 서서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랑은 하나님의 크신 구속(救贖)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구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확실히 믿고 그 사랑 가운데 확고하게 서야 한다. 바울은 또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 넓이’란 그 사랑이 각 민족, 각 나라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주어짐을 보이며, 그 ‘길이’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그가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이며, 그 ‘높이’란 그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고상함과 가치를 보이며, 또 그 ‘깊이’란 그의 사랑의 심오함, 곧 사람의 머리로 다 측량할 수 없고 사람의 가슴으로 다 느낄 수 없는 그의 긍휼의 사랑을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그것은 자신을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몸과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었다. 누가 그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있겠는가?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약 1:5)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을 영원히 돌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실 수 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이기고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항상 인정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셋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더욱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4장: 교회의 일체성 1-6절, 겸손, 사랑, 연합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라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은 바울이 주를 위해 또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자로서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보인다. ‘권한다’는 말은 권위적으로 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말함을 나타낸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는 단지 전도자의 음성을 통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셨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5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사랑과 거룩의 삶임을 증거한다. 그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의 삶으로 표현한다. 우선, 우리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해야 한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또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과거에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깨달은 자라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6-8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신 주께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속죄제물로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또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고린도전서 13:4, 7,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조급한 사랑은 부족한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린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아야 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그 아들을 오래 기다리며 참으며 용납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으시며 용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한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또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평안’은 ‘화평’이라고도 번역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불화와 분열은 좋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일치와 연합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0에서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악들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하였다. 요한일서 3:15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헤노테스 )’이라는 말은 ‘성령의 하나이심’이라는 말인데, 한글성경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모든 성도는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본문에 ‘힘써 지키라’는 말은 사람의 연약함을 전제한다. 성도들도 사람이며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교회가 분열하기 쉽고 성도들이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곧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체성은 불신앙과 오류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사귀리요]”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5:11에서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하였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바른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일치하고 연합해야 한다. [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 세상에 교회들이 많고 교파들이 많아도 또 성도가 속한 교회는 각각 달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이며 모든 성도는 그 한 교회의 교인이다. 택함 받은 죄인들은 중생과 회개와 믿음으로 이 한 몸 안으로 들어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큰 죄를 짓고 회개치 않아 제명, 출교를 받기 전까지 다 그 한 몸인 교회에 속한다. 성령께서도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救贖)을 택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여 구원하는 자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중생(重生)시켜 구주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모든 성도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 격려자, 권면자이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잘못을 책망하시고 부흥케 하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는 성령 말고 다른 영들, 곧 사탄과 악령들이 있다. 그들이 곧 미혹의 영들, 속이는 영들, 거짓말하는 영들, 이단의 영들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에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같지 않은 많은 비진리들과 거짓된 요소들이 포용되고 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요 14:17) 모든 일을 성경 교훈대로 행하신다. 그는 성경의 교훈에서 이탈하거나 성경 교훈을 넘어서거나 성경 교훈에 반대되는 일들을 하지 않으신다. 참된 성령 운동은 에스라 때의 부흥운동처럼 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강해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의 충실한 해석과 실천이 없는 운동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일 수 없다.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부르셨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의 영생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적, 물질적 부귀와 영광과 권세를 바라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장차 영광 가운데 드러날 일들을 소망하며 산다(고후 4:16-18). 예수님 믿는 모든 성도는 다 이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이다.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주께서도 한 분이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오늘날 불신앙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에 불과하며 그런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증거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장차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증거된 이 예수님 외에 다른 주님이 없다. 그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으시고 죄가 없고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사람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고 우리의 경배와 찬송과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주님이시다. 믿음도 하나이다. 물론, 이단과 정통 신앙은 다르다. 천주교의 믿음과 개신교의 믿음은 다르다. 자유주의의 믿음과 보수주의의 믿음은 다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각종 이단 사설들은 다르다. 물론 개신교회들 안에도 교파들 간에 믿는 내용의 차이가 있고, 한 교파 안에서도 작은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신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근본적인 내용에 일치가 있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하는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그의 신성(神性),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대속, 부활,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죄인들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영생, 천국과 지옥 등을 믿는다. 여기에 확실히 역사적 기독교회에 믿음의 일치가 있다. 세례도 하나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요일 1:7). 그러므로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세례밖에 없다.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만유로 말미암으시고] 만유[우리 모두] 3)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도 한 분이시다. 영원자존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그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홀로 섭리하신다. 그 외의 모든 신들은 다 거짓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참되시다. 그는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만유’는 ‘모든 것’ 혹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원천이시며 만유 위에 초월해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특히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또 항상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빌 2:5-8). 이것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덕이며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서 매우 요긴한 덕이다. 둘째로,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 13:4).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그가 깨닫기를 기다려주며 그가 깨닫고 사과할 때 용서해주고 그를 용납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런 인내와 사랑을 가져야 한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셋째로, 우리는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과 한 주님과 한 성령님을 믿고 섬기며 한 소망과 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한 세례를 받았고 한 몸이 되었다. 우리는 범사에 또 항상 겸손하며 온유하고, 오래 참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고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7-16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감 [7-8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된 교회를 완성하시기 위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다.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신다. 이것은 특히 봉사의 직분에 있어서 그러하다. 교회의 직분들은 그가 주신 다양한 은사들에 따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메시아 사역을 예언한 시편 68편(68:18)을 인용함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라는 말은 메시아의 원수 곧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인다. 시편 본문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는다’고 표현했으나,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셨음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9-10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먼저] 4)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고, ‘그가 먼저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키든지 그가 무덤 속에 묻히셨던 일을 가리킨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들어가신 천국은 지극히 높은 하늘임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했다(고후 1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대로 구원을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신다는 뜻이라고 본다.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직분은 ‘사도’이었다. 그 직분은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이었다. 원문 신약성경에서 예외적으로 바나바도 두 번 사도로 불리었다(행 14:4, 14). 사도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자로서 복음의 선포자요 해설자이었다(롬 1:1). ‘선지자’는 사도들처럼 복음 진리의 계시와 은혜를 받은 직분이었다. 사도행전 15:32의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이었다. 선지자의 사역은 미래의 예언보다 현재의 교훈이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과 더불어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불렀다(엡 2:20).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이다. ‘복음 전하는 자’는 빌립, 디모데, 디도 등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초대 교회가 뽑았던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은 ‘전도자’로 불렸고(행 21:8),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하였다(딤후 4:5). 오늘날에도 전도의 특별한 사명을 느끼고 그 일에 전념하는 자들, 국내외 선교사들과 개척 전도자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원문에서 ‘목사와 교사’라는 말( 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에서 하나의 관사는 그것이 한가지 직분임을 보인다. ‘목사’라는 원어( 포이멘 )는 ‘(양이나 소를 치는) 목자’라는 말로 양무리를 돌보는 자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4-16). 또 그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21:16). ‘치다’는 말( 포이마이노 )은 ‘돌보다, 다스리다, 인도하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은 양을 치는 직무를 수행한다. 목사를 ‘교사’라고 부른 것은 목사의 중요한 직무를 보인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모든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이다. 목회는 무엇보다 양들을 돌아보고 성경을 충실히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과 교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잘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참 목사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계시된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힘써 연구하고 바르게, 충실하게, 가감 없이 가르쳐야 한다.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목사의 직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부족한 점들을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8-29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성화(聖化)의 일이다. 성화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죄로 인해 어그러진 인격을 완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 맞는 인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완전 성화는 성도의 삶의 목표이며 목회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일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오늘날도 설교와 성경공부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성경말씀에 정통한 목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믿는다(딤후 3:16-17). 목사의 직무는 또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온전케 되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의 여러 가지 일들에 쓰시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필요로 한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주일학교 교사들, 구역 권찰들, 찬양대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목사의 직무는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한 명의 영혼이 구원받을 때마다 교회라는 건물의 벽돌이 한 장 쌓여져 간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영혼들이 다 구원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완성될 것이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화(聖化), 곧 그들의 지식과 인격과 삶을 온전케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신실한 목사후보생들을 일으키며 성경과 신학으로 잘 훈련시켜야 하며, 이것은 교회들의 미래를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이런 준비가 없다면 교회들에는 소망이 없을 것이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적인 온전한 인격이시다. 교회는 목사들의 직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자리에까지 자라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 목회의 목표는 개인들의 성화와 온전함뿐 아니라 또한 교회적 완전에 있다. 교회 전체가 ‘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사들의 사역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들은 지교회뿐 아니라, 전체교회에 책임이 있다. 교인들의 영적 성숙과 완전은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일치된 믿음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 목사는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성도들이 일치된 믿음과 지식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본받을 수는 없으나 그의 인성의 온전함은 본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격의 모범이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실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교인들에게 믿음과 지식의 온전함이 필요한 까닭은 세상에 있는 모든 잘못된 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린아이들처럼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방황하였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다시는 사람들의 교리들과 교훈들과 사상들을 따라 방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바른 지식과 믿음의 온전함이 필요하다. 성도들과 신약교회는 지식과 믿음이 온전해야 한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참된 것을 하다’는 원어( 알레듀오 )는 ‘참되다, 참된 말을 하다’는 뜻이다 (BDAG) .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는 말은 온전케 되는 방법을 보인다. 사랑과 진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사람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그 본래의 의롭고 선한 성품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악된 옛 성품을 다 버리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 자라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임을 보인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교회는 말씀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 그의 말들과 행동들, 그의 진실과 사랑, 그의 온유와 겸손, 그의 충성과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성화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의 이치를 사람의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몸을 자라게 하는 데 필수적 기관이다. 머리가 상하면 몸이 계속 자랄 수 없다. 건전한 머리는 몸을 성장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건전한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몸된 교회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 교회는 그를 통해 자라서 온전케 될 것이다.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되신 그에게서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자라며 사랑 안에서 건립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시는 힘의 근원이 되신다. 그에게서 온 몸은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어 자라게 된다. 그는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자신과 제자들을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비유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나무로부터 도움을 입음으로써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이치를 말씀하셨다. 물론 주께서는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신다. 참으로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성장과 온전함은 사람의 인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열심으로 가르치고 또 열심히 잘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에 목사들을 주셨다. 목사의 중요한 직무는 교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양무리를 돌보며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목회 사역의 목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과 그리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하게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위해 의도하신 이 뜻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날도 목사들은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성경을 바르게, 열심으로 가르쳐야 하고, 또 성도들은 성경을 열심히 잘 배워 자라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목사의 직무는 성도 개개인을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 교회를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범사에 자라고 완전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화의 목표이실 뿐 아니라, 전체 교회의 영적 성장의 목표이시다. 전체 교회는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온전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지교회 양무리들을 돌보는 목회의 책임뿐 아니라, 전체 교회에 대한 책임도 가진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며,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을 주셔서 우리로 자라며 온전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 참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말만 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점점 자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것이다. 17-25절, 의와 거룩과 진실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부터 다른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특징들을 열거한다. 첫째로, 이방인들은 그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계명도 모르고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모르고 허무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고 있다. [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굳어짐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둘째로, 이방인들은 깨달음이 없고 무지하다. 그들은 육신적인 일들이나 물질적인 일들에는 지혜가 있을지 모르나 참으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가장 기본적 사실들인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사람의 삶의 목적과 사람의 죄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모르고 있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해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진지하게 찾지 않으며,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떠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 아셀게이아 ajsevlgeia)[육욕, 호색,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넷째로, 이방인들은 도덕적 감각이 없고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도덕 의식이 없다. 그래서 이방 사회는 심히 부도덕하며 죄악된 사회가 되었다. 부도덕한 사람들의 죄악들 중 첫째는 음란이다. 사람들은 음란하고 방탕하다. 그들은 ‘모든 더러운 것’ 즉 온갖 죄악들을 행한다. 죄 없는 사회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지만, 죄악된 세상은 갈등들과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의는 깨끗하고 단정한 옷과 같지만, 죄는 더럽고 냄새나는 옷과 같다. 이런 점들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들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무지하고 부도덕한 모습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죄악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순종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악된 삶으로부터 회개하라고 배웠지, 이방인들의 죄악된 삶을 그대로 살라고 배우지 않았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그에 대하여]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안에 진리가 있다(요 14:6). 에베소 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듣지는 못했을 것이나 사도들을 통해 그에 대해 많이 들었고 그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본절 끝의 “받았을진대”라는 말부터 24절까지는, “받았으니 곧 . . . 입으라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즉 22절부터 24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구원의 초청이었다. [22절]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KJV, NASB), 너희는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하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람의 욕심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자아(自我)를 말하며 앞절들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하는 삶이었다. ‘벗어버리고’라는 원어( 아포데스다이 )(과거부정사)는 그 행위의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구원의 사건이다. 구원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이 중생이며 회개와 믿음이다. [23절]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영의 활동들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이다. 본절은 그 중에 특히 지식을 강조한다. 사람의 영의 활동들 중에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은 그의 행동을 결정한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생각의 변화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생각이 새롭게 되었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 아나네우스다이 )(현재부정사)는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숙해진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의 변화는 있다. 하나님을 아는 생각, 자신의 부족을 아는 생각, 구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해진다. 그 생각의 성숙은 평생 계속될 것이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새사람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의 내용은 ‘의와 참된 거룩’이다. 그것을 ‘본래의 의’라고 부른다. 구원은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즉 그 본래의 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입으라’는 원어( 엔뒤사스다이 )(과거부정사)는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명하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구원 초청의 내용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초청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사람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이루신 의(義)로 옷 입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이 칭의(稱義)이다. 이 칭의(稱義)는 이제 성화(聖化)로 나아간다.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고 믿어 구원을 받아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본문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거짓을 버리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한다. 세상에는 거짓말로 물질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산지를 속인 식자재나 인체에 해로운 식품을 파는 자, 이중장부를 쓰는 기업, 가짜 영수증, 가짜 추천서, 가짜 학위증, 가짜 증명서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자, 법정에서 위증하는 자, 가짜 취업 알선소, 가짜 결혼 소개소, 가짜 연예 기획사 등 속이는 자들이 많다. 거짓말은 나쁜 악이다. 모든 거짓의 근원은 마귀이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하셨다(요 8:44).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였었다. 거짓과 속임은 마귀의 본성이다. 마귀는 거짓으로 가득한 자이다. 세상은 마귀의 손 아래 있으므로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거짓말하는 자들을 반드시 철저하고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많지만, 성경은 그들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계 21:27; 22:15) 다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계 21:8).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짓말은 지극히 합당치 않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삼가야 한다. 사람의 남은 죄악성은 거짓말하고 속이는 데 익숙하다. 따라서 우리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생각하며 말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만을 말하려고 해야 하며 항상 참된 것만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위를 버려야 한다. 이방인들은 그 생각이 허무하고 깨달음이 없고 무지하며 마음이 굳어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고 도덕적 감각이 없고 방탕하고 음란하며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한다. 비록 과거에 우리의 삶이 그러했을지라도, 우리는 이제 그런 삶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초청은, 속이는 욕심을 따라 부패하는 옛사람을 버리고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대로 그의 은혜로 모든 죄를 회개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날마다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또 모든 거짓을 버리고 서로 간에 진실한 말만 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 예수님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고 또 그때로부터 날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 가운데 생각이 더욱 성숙해지고 도덕성에 있어서 성화(聖化)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6-32절, 선함, 덕스러움, 인자함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분을 낼 때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악된 일들에 대해 노하신다. 주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여 성전 제사의 제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 21:12-13).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노하며 엄히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분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정당하게 분을 낼 때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분을 낼 때 말과 행동에 실수하기 쉽다. 과격한 말, 미워하는 말, 욕설, 성급한 판단과 정죄, 싸움, 살인 등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할 때 그런 실수가 없도록 조금 멈추어 생각하고 기도하며 신앙적, 이성적 언행을 하도록 힘써야 하며, 죄악에 대한 미움과 분노 중에라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분을 내어도 그 분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깨닫지 못하고 사과하지도 고치지도 않는 때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께 있다(롬 12:19). 노를 품고 있으면 몸에도 해롭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분노의 감정은 미움, 과격한 말과 행동, 술취함, 살인 등으로 발전되며, 그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할 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심령은 항상 온유와 평안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도 신중히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하며, 분노 중에라도 마귀가 우리를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거짓과 탐심, 또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게으른 마음에서 생기는 일이다. 그것은, 돈 벌기가 어렵고 땀 흘려 일하기는 싫기 때문에 남이 벌어 놓은 것을 훔쳐서 쉽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한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행위이다. 오늘날 사회에는 도둑질이 많다. 옷 도둑, 학생의 부정행위, 학자의 논문 표절, 음악이나 영화의 불법 다운로드, 기업주의 노동력 착취, 피고용인의 근무 태만 등. 우리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하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을 면하고 도리어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며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더러운’이라는 원어( 사프로스 )는 ‘불건전한, 나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라가’ [빈 머리, 바보]라고 말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남에게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해를 주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 ‘성령,’ 혹은 ‘영’이라고 표현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령께서는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도덕적으로 성결하시다. 또 그는 자신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죄인들을 거룩케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생각과 정신, 거룩한 마음과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일위신론자(一位神論者 유니테리안들)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하나님의 힘이나 기운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며 성령께서도 그러하시다. 그는 기뻐하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신다. 그가 근심하시면 진노하실 것이다. 이사야 63:10은,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인을 친다는 것은 확인하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문서를 확인할 때 거기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이다. 그 효력은 ‘구속(救贖)의 날까지’ 지속된다.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므로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보장하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부족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셔서 멸망치 않고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요 3:16; 6:39-40; 10:28; 롬 8:30).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이라는 원어( 피크리아 )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말로 독한 생각을 뜻한다. 독한 생각에서 ‘노함과 분냄’이 나온다. 또 분노는 ‘떠듦과 훼방’으로 나타난다. ‘훼방’은 남을 악한 말로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끝으로 ‘악의(惡意)’는 남을 해치려는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남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말은 남을 해치려는 의지로 발전한다. 위의 말들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종류의 악한 생각이지만, 그 다음에는 노함과 분냄, 그 다음에는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한 의지로 발전해 나아간다고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죄성 즉 옛사람의 성질들이다. 이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하다’는 원어( 크레스토스 )는 ‘자비롭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 유스프랑크노스 )는 ‘동정하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인간 관계에서 취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며, 인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본문은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교훈한다. 용서는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결함과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후,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 그것은 제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1만 달란트의 빚과 같고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 정도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만 보아도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다.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는 1만 달란트와 같았다. 그것은 사람이 결코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분노라도 분노는 지나치거나 치우치기 쉽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범죄하기 쉽다. 둘째로,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며 선을 베풀 수 있도록 손으로 일하며 수고해야 한다. 성도는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우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모든 악독, 노함과 분냄, 떠듦과 훼방, 모든 악의를 다 버리고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정 있는 자들이 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다운 거룩한 삶이다. 5장: 교회의 성결성 1-7절, 사랑과 거룩함 [1-2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예물과 제물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주께서는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 내어주신 사실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확증되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9-11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본서신 에베소서의 시작 부분인 1:3-6에서 이렇게 말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의 아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救贖)하셨고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중생(重生)시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의 죽음은 예물과 제물로 향기로운 냄새[유화(속죄)의 냄새] 5) 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요한복음 15:12-13에 보면, 주께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큰 사랑을 본받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합법적 결혼관계 이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합법적 결혼관계란 본인들의 동의와 부모들이나 증인들의 인정 아래 이루어진 결혼관계를 말한다. 부부의 성행위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 외의 성행위, 즉 간음이나 강간이나 근친상간적 행위나 매춘행위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성행위 등은 음행의 죄악이다. ‘온갖 더러운 것’은 성적 불결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더러운 악을 가리킨다. 그것은 죄악된 것을 보고 들음으로 생각과 감정이 더러워지는 것부터 말이나 행위의 불결까지 모든 더러운 악들을 포함한다. 말과 행위의 더러움은 생각과 마음의 더러움에서 나오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8),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잠 4:23). ‘탐욕’은 좀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주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돈뿐 아니라, 또한 세상 영광,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근본이 다르다. 탐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돈이 그들의 바라는 것의 전부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죄를 미워하고 그런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이다. ‘성도’라는 말( 하기오스 )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거룩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행위들을 떠나는 도덕적 성결이다. 성도는 말과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원어( 아이스크로테스 )는 ‘더러움, 추잡함’이라는 뜻이다. ‘희롱의 말’은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더럽고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은 다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며 성도답지 못한 말들이다. 성도는 이런 말들을 버려야 하고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여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호의와 선을 베푼 사람들에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5절] [이는]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리고 더럽고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한 것은 탐하는 자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돈이 신이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자들과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9-10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동성애자)나 남색하는 자(동성애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탐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욕하는] 자나 토색하는[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육체의 일들인 여러 가지 죄악들을 열거한 후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2:15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진리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천국 확신과 소망을 가진 자들로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등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게 선하게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임함이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헛된 말’이란 율법과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웬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 정도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갈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그것은 헛된 말, 속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우리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모든 죄악을 버리려 할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쓸 것이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죄악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 등의 죄악들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참고만 계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들에 대하여 일어나셔서 그것들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영원한 지옥 불못은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우리도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으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들과 함께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과 의식주로 만족하며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음행, 온갖 더러운 것,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특히 더러운 말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거룩한 말을 하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8-14절, 빛의 자녀들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밝히 분간할 수 있다. [8절]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 교인들이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온갖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즉 그들은 앞부분에서 말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단정치 못함,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그들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므로 빛 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은 빛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어두움과 반대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또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으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게 된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로 단장되었고 오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하고, 지식과 도덕성을 가진 자들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생활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제일의 목표로 삼고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고, 또 오직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9절] [이는] 빛의[성령의](전통사본) 6) 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있음이니라].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는 성령께서 거하시며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도덕적 인격과 행위의 열매이다. 그것은 빛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롬 8:14), 그 열매는 빛의 삶, 즉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주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아야 한다. 빛의 자녀다운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의 기쁘신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처한 현실 속에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확인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암 5:6), 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암 5:14), “오직 공법[공의]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24).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고 섬기는 경건한 삶, 또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는 7절부터 계속 명령어로 교훈했다. 7절,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라.’ 8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라는 말은 어두움의 일들이 열매 없는 일들임을 보인다. 어두움의 행위들은 유익한 열매들이 없는, 사람답지 못한 행위들이다. 죄악을 사랑하고 죄악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헛된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한다. ‘책망하다’는 원어( 엘렝코 )는 ‘폭로하다, 책망하다’는 뜻이다 (BDAG) . 우리는 어두움 즉 음란과 더러움과 탐욕의 일들의 헛됨과 무가치함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책망해야 한다. [12-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휘포 투 포토스 )[빛에 의해]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죄인들은 악을 은밀히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일들, 즉 어두움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부끄러워한다. 공공연하게 뻔뻔스럽게 악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을 행할 때 그 행위의 악함을 느끼면서 행하며 그들의 악이 혹시 드러날 때면 자기 얼굴을 가리우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들이 빛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 죄의 죄악됨과 헛됨과 사악함이 책망될 때, 그것과 대조해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는 성도들 중에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던 영혼이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은 깨어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그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하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도덕성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불경건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 우리는 참 빛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치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성도들은 이제는 열매 없는 헛되고 무가치한 어두움의 행위들에 참여치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런 행위들을 드러내고 책망해야 한다. 7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6:17,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우리는 범죄치 말고 죄를 책망해야 한다. 셋째로, 잠자는 자들은 깨어 일어나야 한다. 누가 잠자는 자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진심으로 믿으면서도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그런 자들이다. 깨어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회복을 진심으로 간구하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할 자가 아니다. 그는 멸망할 자들과 구별되어야 하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자신을 증거해야 한다. 15-21절, 지혜, 성령 충만, 찬송, 감사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정확히]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자세히’라는 원어( 아크리보스 ) 7) 는 ‘[표준에 맞게] 정확히’라는 뜻이며 전통본문에는 ‘행할 것’이라는 말에 붙어 있다. 8) 우리는 표준에 맞게 정확히 행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행위의 표준이다. 성경말씀에 맞는 것이 의이다. 의롭게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어리석음이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만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도에 힘쓰고,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16-17절] 세월을 아끼라. [이는] 때가 악하니라[악함이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 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 )는 ‘시간을 사서 건지라’는 말인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장 잘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는 교인들을 죄에 빠뜨리려 하며, 물질적 탐욕과 육신적 쾌락은 교인들을 유혹하며, 세상의 염려들은 교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바쁜 일들은 교인들로 점점 교회의 일에 참여치 못하게 만든다. 또 악한 시대는 때때로 성도들을 핍박한다. 또 이 세상은 전도를 방해한다. 오늘날 공영 방송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 외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있다. 헛된 사상들과 이념들, 헛된 오락들, 불륜과 외도, 술취함, 폭력, 음란성 있는 복장, 노래, 춤, 심지어 귀신 이야기들까지 전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전달할 수 있으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진리만은 제외되고 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의 생애는 한 번뿐이다. 우리는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은 첫째로,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이며, 둘째로, 성도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은 육신적 기쁨을 위하고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잊으려고 사용된다. 그러나 술 취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실수하게 하며 방탕에 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술 취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전 6:10; 갈 5:21). 그러므로 술을 끊는 것은 성도의 좋은 전통이다. 잠언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성도는 술 취함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위로자’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풍성한 위로를 얻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 플레루스데 엔 프뉴마티 )는 ‘계속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뜻이다. 원문에서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어( 플레루스데 )(현재수동태)는 반복적 행위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가지는 일이 아니고 계속 반복적으로 가져야 하는 일이다. 또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수동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며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고 큰 위로와 힘을 주신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정상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행위로 나타난다. 본문의 ‘시’는 시편을 가리킨 듯하고, ‘찬미 혹은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영적인 노래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오는 간증적 노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감사와 죄의 회개와 선한 결심 등의 내용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서로들에게 말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드려질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성도들에게도 들려짐으로써 그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게 하고 그래서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한 삶을 살게 하라는 뜻이다. 본절과 비슷한 교훈인 골로새서 3:16의 원문은 “모든 지혜로,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말씀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우리의 입이나 목에서만 나와서는 안 되고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함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찬양대는 일반 합창단들과 다르다. 찬양대의 의미와 가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찬양의 내용이나 방법도 다르다. 세상 노래들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중심의 노래들이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노래들이다. 시편 33:1-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96:1-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시편 100:1-4,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섭리자이시다.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우리는 올해도 우리의 육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건강과 직장과 가정과 사회적 안정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무엇보다, 죄와 허물로 죽었었고 지옥 가야 마땅했던 우리를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하셨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고 복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린다. 비록 우리가 지금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 무서운 병과 싸우고 있고 경제적 곤란 가운데 있고 자녀 문제로 염려하고 있고 또 우리 사회가 이념의 대립과 갈등, 경제의 파탄, 안보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혹시 우리 자신의 부족과 죄가 없는지 반성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의 현실을 달게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처한 현실의 혹독함이 아니고, 우리가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가 있는가 여부이다. 욥은 고난 중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다(욥 1: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고난은 있으나 보호하심과 회복하심도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룸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1절] 그리스도를[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마 20:26). 사도 바울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교훈했고(롬 12:10) 또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빌 2: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정신이다.
본문의 교훈들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지혜자로서 주의하며 성경말씀에 맞게 정확히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의 찬송을 올려야 한다. 여섯째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22-33절, 아내와 남편의 의무 [22-24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알 )[그런즉, 그러므로] 9)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한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의 말에 대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아내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의 머리라고 가르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이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께 범사에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의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단지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의 경우이다. 그러나 죄 되는 일 외에는 언제든지 무엇에든지 아내들은 그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디도서 2:3-5,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3:1-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순종은 거룩한 부녀들의 본이었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남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 [26-27절] 이는 [그가 그것을]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남편들의 의무를 설명하다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영혼들이 그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함과 거룩함을 얻게 하시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복음으로 깨끗하게 된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은 실제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비록 지상에서 이런 노력은 불완전하며 우리의 의와 완전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지만, 우리는 교회들 곧 성도들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성화와 온전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 4:3). 성도들이나 교회가 사상이나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성도답지 못하며 교회답지 못한 것이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즉 아내는 남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29-30절] [이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주께서](전통사본)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함이니 이는] 우리는 그 몸의[그 몸과 살과 뼈의] 10) 지체임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사랑하며 자기의 몸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또 옷을 입혀 몸을 보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몸의 지체인 교회를 이처럼 보살피시고 공급하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하신다. [31-32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이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일이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결혼이 독립 가정을 이루는 일임을 나타낸다.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부부의 관계는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사도 바울은 결혼 관계의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과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의 비유로 종종 표현한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요한계시록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풍성한 생명(요 10:10)과 힘을 얻는 것(요 15:4-5)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존중하라, 존경하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하고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밝히 교훈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성경은 남존여비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가정의 질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여기며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자기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본문은 아내들이 범사에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죄 되는 일 외에는 항상 복종하라는 뜻이다. 또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둘째로,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도 성경에 밝히 교훈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아내는 남편의 몸의 한 부분, 즉 그의 갈빗대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심같이, 남편은 자기 아내를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생활로 나타나야 한다. 아내의 순종과 남편의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자신도 우리 가정도 평안하고 복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고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과 그의 계명들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셨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셨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억만분지 일이라고 보답하는 양으로 모든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6장: 교회의 전투성 1-9절,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의무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는] 이것이 옳으니라[옳음이니라].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근거를 보인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 사는 그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이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순종의 한계도 보인다. 부모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 없다. 부모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들은 자기들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들은 부모를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사랑과 수고를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서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약속하셨다. 그는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현세에서도 잘 되고 오래 사는 복을 주실 것이다. 구약에서 룻과 에스더는 좋은 예이다. 룻기 3:5,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에스더 2:20, “에스더가 모르드개[에스더를 길러준 부모와 같은 사촌 오빠]의 명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그들의 생애는 복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서 이 계명을 어기는 자는 엄하게 징벌되었다. 신명기 21:18-21에 보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부모가 그를 성읍 장로들에게 내어주고 성읍의 모든 사람은 그를 돌로 쳐죽임으로써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거해야 했다.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은 자녀 교육의 의무를 교훈한다.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주체가 아버지임을 보인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에 맡겨진 일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 맡겨진 일도 아니고 부모에게 그것도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이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 교육의 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을 말하면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말했다(딤전 3:4-5).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뜻을 포함한다. 부모는 자녀들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부당한 명령을 하거나 강압하고 위협하거나 구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 해가 되며 그들을 빗나가게 만들며 겉으로만 순종하는 이중적 인격을 만들기 쉽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은 자녀 교육의 방법을 말씀한다. ‘교양’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 )는 ‘교육, 훈련, 징계’ 등의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또 ‘훈계’라는 원어( 누데시아 )는 ‘훈계, 권면, 경고 등’의 뜻을 가진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성경말씀을 가지고 교훈하고 훈련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경고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해야 하고 늘 교훈하고 또 선한 본을 보여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날마다 규칙적 성경 읽기와 기도뿐 아니라, 성수주일(聖守主日)과 십일조 등 기본적인 경건 훈련을 시켜야 하고 또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 훈련을 시켜야 한다. 이사야 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성수주일은 복되다!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 생활도 복되다! 또 부모는 자녀가 잘못할 때 징계하고 체벌해야 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늦기 전에]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비인격적이고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체벌을 가진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도 잘못이지만, 엄격한 교훈과 규율과 체벌이 전혀 없는 자유방임적 교육은 잘못된 교육 방식이다. [5-7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플로테티 테스 카르디아스 )[마음의 단순함, 성실함, 진실함]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자기들의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순종하라는 뜻이다. 종이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면 그에게 순종하기 어렵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또 그들은 주인에게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않고 맡겨진 일에 단순하게 성실하게 두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종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종들은 종의 위치에서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주인의 모든 일들을 다 알려고 하거나 다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께 하듯’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교훈이다. 주인이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 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순종하는 것과 같다. 또 그들은 주인 앞에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 즉 겉보기에는 주인을 섬기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중심을 다 보시고 다 아시는 주 앞에서 단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오늘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직책상 아랫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아랫사람들은 단순한 마음으로 자기의 직책에 충실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며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단 마음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종이나 자유인이나 우리의 선행은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보상은 단지 종교적 봉사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세속적 직업에서의 선행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 직업에서 감사하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상은 마지막 심판 날에 주실 보상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기대할 만한 보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게 사는 자들에게 내세의 복뿐 아니라, 현세의 복도 약속하셨다(딤전 4:8).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위협]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본문은 주인들도 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종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종들을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들이 주인에게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에게 정당한 책망과 경고를 할 수 있다. 잠언 29:21에 보면,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종에게 정당한 책망과 경고를 하지 않으면 자기 분수를 모르게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주인들이 종들에게 부당하고 무리한 혹은 비인격적인 책망이나 위협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공의롭지 못하고 인정 없는 윗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며 주인의 권위를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인들이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 될 이유는, 모든 주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온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높으신 주인이시다.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또한 너희 자신의 상전[주]’이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 참 주인께서 계시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하나님 앞에 사는 자들일진대, 어떻게 주인들이 종들 앞에서 교만하고 부당하고 무리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4계명에 명령된 하나님의 뜻이며 옳은 일이다. 그것은 자녀들로서 마땅한 의무이다. 또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장수(長壽)와 번영의 약속이 있는 복된 의무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의 삶이 복되고 잘되고 또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다. 둘째로,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특히 아버지들에게 주신 엄숙한 의무이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의 책임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부모들의 책임이며 아버지들의 책임이다. 그들은 성경의 교훈과 훈계와 징계와 경건한 본으로 자녀들을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양육해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또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행에 대해 갚아주실 것이다. 이 교훈은 오늘날 성도들의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며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고 공정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하늘에 크시고 참되시고 공의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계심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범사에 정직하게, 선하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10-24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0-11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 중에 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을 돕는 악한 자들이다. 마귀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서 간교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대항하여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본문에는 ‘서기 위해’라는 말이 두 번(11, 13절), ‘서라’는 말이 한 번(14절)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목적과 목표는 마귀와의 싸움에 넘어지지 않고 서기 위함, 즉 승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우선 하나님의 힘으로 강건해져야 한다.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강한 군사력, 즉 가장 좋은 무기들과 병사들의 체력과 용맹스런 마음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 62:11).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사 40:28-29). [12-13절] [이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대함임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본문은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싸움의 성격이 어떠함을 보인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아니고 이 세상 나라 권세자들의 뒤에 있는 악령들이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를 범죄하게 한 이후 계속하여 온 세상을 미혹하여 사람들을 범죄하게 하고 또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일을 해왔다. 성도들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사탄과 악령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영적인 무장이다. 우리는 힘있는 병사로 잘 무장하고 싸움에 임할 때, 악한 날, 곧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날에 또 환난과 핍박의 날에, 마귀의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주께서 명하시고 맡기신 모든 일을 완수하고 설 수 있다. 그러나 겁약한 자들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는 자들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범죄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다. [14-17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본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설명한다. 첫째로,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이다. ‘진리’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마귀는 거짓되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의 특징이며, 거짓은 마귀의 세계의 특징이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필수적인 덕은 진실이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 ‘진리’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17에 보면, 주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둘째로,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우리는 이 의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또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이제 죄를 멀리하고 의만 행해야 한다. 성도는 모든 죄와 불의를 멀리하고 항상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평안의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였고 우리의 심령에 참 평안을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하였으며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이 평안의 복음, 이 화목의 복음을 늘 신처럼 신고 만나는 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넷째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속죄 신앙이 중요하다. 이 속죄 신앙이 구원 신앙이다. 우리의 순종과 선행은 늘 부족하지만,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밖에 없다. 요한일서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다섯째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리킨다고 본다. 투구를 쓴 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는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마귀의 밥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다면 마귀의 시험을 이길 것이다. 여섯째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다. 그것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성경을 읽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자는 칼 없이 전쟁에 나가는 자와 같다. 그 전쟁의 결과는 보나마나 실패이다. 사람들은 실패의 삶을 살면서도 성경 읽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 한다. [18-20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곱째로,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마지막 내용은 기도이다.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많이 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무시로’라는 말은 ‘항상’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6-27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자를 자기 밥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는 마귀를 이길 것이다. 마귀는 기도하는 자를 무서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원문은 직역하면, “이를 위하여 깨어 모든 인내와 간구로 모든 성도들을 위해 구하라”이다. ‘모든 인내로’라는 말은 기도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치 말고 오래 참으면서 기도해야 한다(눅 18:1-8). 또 ‘깨어’라는 말은 기도가 곧 깨어 있는 일임을 증거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이다. 기도의 내용에 관해,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야말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또 “나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쇠사슬에 매인 채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전도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런 죄수의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기를 기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전도자를 돕는 방법 중에 기도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없다.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고전 1:21; 골 1:28-29). 그러므로 설교자를 위한 기도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기도이다. [21-24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엔 압다르시아 )[식지 않고, 죽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아멘]. 1 1) 사도 바울에게는 두기고 같은 진실한 동역자가 있었다. 그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며 바울의 모든 사정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다. 또 사도 바울은 다른 편지들과 달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 외에 ‘믿음을 겸한 사랑’을 기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믿음과 사랑을 사모해야 한다. 또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식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식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상에서의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은 영적 전투와 같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넘어지지 말고 서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이렇게 영적 싸움을 잘 싸워 이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의 힘으로 강건해져야 한다. 우리의 심신이 연약하면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를 의지하면 우리는 힘을 얻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첫째,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실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둘째,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범사에 정직해야 한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했고 심령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복음을 만나는 자마다 증거해야 한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확고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일곱째,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늘 기도할 뿐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특히 목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미주 1 ) Byz A it d vg syr p cop sa bo arm 등. 2) Matthew Poole, “바울이 여기에서[빌립보서 2:12에서] 강조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의 일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가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협력은, 그리스도께만 합당한 구원의 획득이나 공로에 관계되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완성하신 것의 적용에 관계된다”( Commentary, III, 691). 3) Byz it d vg syr p arm Origen lat 등에 있음. 4) Byz it d vg syr p arm Irenaeus gr lat 등이 그러함. 5) Byz B 075 vg syr p cop sa-mss arm geo 등에 있음. 6) Byz p 46 등. 7) 한글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모두 ‘자세히’라고 번역하였다(마 2:8; 눅 1:3; 행 18:25; 살전 5:2). 8) Byz A D it (d) vg (arm) cop bo-mss 등이 그러함. 9) 보통의 경우는 ‘그러나’라고 번역하지만, 이 경우에는 문맥적으로 ‘그런즉, 그러므로’라는 뜻이 가능하다고 한다 (BDAG, KJV) . 10) Byz it d vg syr (p) arm Irenaeus 등이 그러함. 11) Byz it d vg cl ww syr p cop bo-pt arm eth 등에 있음.
[에베소서 4장 주일설교말씀]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자”(엡 4:1~32)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베소서 4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탄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은 하늘로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성장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나면 그다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의 분량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장성한 자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성숙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성숙한 자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지금부터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자”(에베소서 4:1~32)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요절: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엡 4:15)
주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새 생활 하자.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에베소서 4장을 강해합니다. 엡 4-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윤리]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4장은 교회의 일체성과 새로운 피조물로 된 그리스도인의 신앙 윤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교회의 일곱 가지 하나 됨 안에서 믿음 생활 하라(엡 4:1-6)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절. ‘그러므로’라는 말은 엡 1-3장의 교회론을 요약하는 말로 ‘교회의 참된 터는 그리스도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경륜이니’는 뜻입니다. ‘간청한다 beseech’는 말은 엄하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권한다는 말입니다. 간청하는 부탁의 말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그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2절은 엡 4-5장의 요약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사랑과 거룩의 삶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입니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또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로 인해 죽었던 자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또 오래 참음으로 행하여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속성입니다(고전 13:4, 7).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3절. ‘평안의 매는 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평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치와 단합이며 불화와 분열이 아닙니다. 갈 5:20은 육신의 죄악들 가운데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열거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입니다(요일 3:15).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헤노테스 ἑνότης henotes)’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의 하나 되게 하신 것 the unity of the Spirit’이라는 뜻입니다. ‘힘써 지키라 Endeavouring to keep’는 말은 인간의 연약성을 전제하면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분열하기 쉽고 성도들이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 빠지기 쉽기에 우리는 믿음과 진리와 의안에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 곧 교회의 일체성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교회의 일체성을 일곱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4절. ① 몸이 하나입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말합니다. 세상에 교회들이 많고 교파들이 많아도 또 우리가 속한 지교회는 달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며 모든 성도는 그 한 교회의 교인입니다. 택함 받은 성도들은 중생과 회개와 믿음으로 이 한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② 성령님은 한분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격적 영이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이루시며 죄인들을 중생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모든 성도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 격려자, 권면자이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책망하시고 부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요 14:17) 모든 일을 성경 교훈대로 행하십니다. 참된 성령 운동은 에스라 때의 말씀사경회처럼 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강해와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③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의 영생입니다. 모든 성도는 다 이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5절. ④ 주님도 하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증거 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장차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증거 된 이 예수님 외에 다른 주님이 없습니다.
⑤ 믿음도 하나입니다. 역사적 정통교회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하는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 그의 대속, 부활,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한 죄인들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 성화, 영화, 마지막 심판, 몸의 부활, 영생, 지옥과 천국 등을 믿습니다.
⑥ 세례[침례]도 하나입니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합니다. 죄 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합니다(요일 1:7). 그러므로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마 28:19, 행 2:38) 베풀어집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⑦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도 하나이십니다. 영원무궁 자존하신 참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이방 나라의 모든 신들은 다 거짓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십계명에서 밝히듯이 창조주, 구속주, 섭리주이신 하나님 이외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1-3 계명).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일곱 가지의 근거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을 믿고 섬기기 때문에, 또 한 소망, 한 믿음, 한 세례[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이런 일곱 가지 교리적 주제들의 일치에 근거해서 온전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2. 영적인 선물(엡 4:7-16)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엡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6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7-8절. 주님께서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완성하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한으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십니다. 특히 교회의 직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들에 따른 것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메시아 사역을 예언한 시 68:18을 인용함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라는 말은 메시아의 원수 곧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가리킵니다. 시편의 본문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는다’고 표현했으나,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님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셨음을 말합니다.
9-10절.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고, ‘그가 먼저 낮은 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키든지 그분께서 무덤 속에 묻히셨던 일을 말합니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들어가신 천국은 지극히 높은 하늘임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구원을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11절.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은사와 직분은 ‘사도 apostles’입니다. 사도는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 주어진 은사요 직분입니다. 원문 성경에서 예외적으로 바나바도 두 번 사도로 불린 적이 있습니다(행 14:4, 14). 사도들은 복음의 선포자요 해설자이었습니다(롬 1:1). ‘대언자(=선지자) prophets’는 사도들처럼 복음 진리의 계시와 은혜를 받은 직분입니다. 유다와 실라 등은 대언자들입니다(행 15:32). 대언자의 사역은 주로 말씀을 선포하던 설교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과 더불어 신약시대의 대언자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불렀습니다(엡 2:20). ‘복음 전하는 자 evangelists’는 빌립, 디모데, 디도 등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직분을 가리킵니다. 행 21:8은 초대 교회가 뽑았던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을 ‘전도자’라고 불렀습니다. 또 바울은 디모데후서 4:5에서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목사 겸 교사’라는 말 (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τοὺς δὲ ποιμένας καὶ διδασκάλους tous poimenas kai didaskalous)은 하나의 정관사에 두 명칭이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의 반복법, 즉 동격을 나타냅니다. 목사와 교사라기보다 “목사 즉 교사”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문법에서 이를 The Granville Sharp Rule이라고 합니다. 본래 ‘목사’라는 원어(포이멘poimen)는 ‘(양이나 소를 치는) 목자’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양무리를 돌보는 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한 목자이십니다(요 10:14-16).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6). ‘치라’는 말(포이마이노poimaino)은 ‘돌보다, 다스리다, 인도하다’는 뜻입니다. 행 20:28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님께서 그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의 회인 당회는 교인들을 돌보고 다스리고 인도하는 목양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목사를 ‘교사’라고 부른 것은 목사의 중요한 직무를 말합니다. 장로교에서 목사를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라고 부릅니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와 성경공부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모든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딤후 1:11에서 바울 자신을 ‘복음 전파자와 교사’라고 부릅니다. 참된 목회자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계시된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을 가감 없이,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12절. 교회의 지도자의 직무는 성도를 완전케 하고 섬김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도를 완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완전한 영적 성장을 말합니다. 골 1:28-29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심은 섬김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지도력(servant leadership)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이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교회학교 교사들, 주방 봉사자들, 찬양대원들, 재정 관리인들, 주차요원, 청소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또 교회 지도자의 직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혼(soul)들이 다 구원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은 수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질적으로 말한다면,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각자 지식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완전케 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13-16절. 그리스도는 완전하시고 이상적인 인격이십니다. 교회는 목회자들의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까지 자라서 완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합니다. 목회의 목표는 단순히 개인들의 성화와 온전함뿐 아니라 또한 교회적 완전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지식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온전함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본받을 수 없으나 그분의 인성의 완전함은 본받을 수 있습니다. 14절. 교회에게 영적 온전함이 필요한 까닭은 모든 인간적 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어린아이들처럼 사람들의 속임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방황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15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라는 말은 완전케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진리를 말하다’는 원어(알레듀오 aledeuo)는 ‘참된 말과 행동을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과 진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인생의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그 본래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을 잃어버렸고 심히 죄악 된 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악 된 옛 성품을 다 버리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 자라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의 이치를 사람의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두뇌]는 몸을 자라게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머리가 상하면 몸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머리는 몸을 성장케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이상적 머리이십니다. 16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자라며 사랑 안에서 건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힘의 근원이 되십니다.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성장과 온전함은 사람의 인위적 행위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 곧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3. 옛사람과 새 사람(엡 4:17-32)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7-19절. ‘이제부터는’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부터는’이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부터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여덟 가지 점들을 증거 합니다.
첫째로, 17절에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원어(누스 nous)는 ‘생각’이라는 뜻인데, 이방인들은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을 생각합니다.
둘째로, 18절에 이방인들은 총명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육신적인 일이나 물질적인 일에는 지혜가 있을지 모르나, 인생이 참으로 알아야 할 바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대한 총명과 깨달음이 없습니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무지함 가운데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목적도, 참된 도덕 원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넷째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진지하게 찾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비교적 순수해서 진리를 들을 때 잘 듣지만, 어른들은 마음이 고집스러워서 바른말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섯째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멀리 떠나 사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여섯째로, 19절에 이방인들은 감각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도덕적 감각이 없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있지만, 자기의 이익을 따라서 그 도덕적 감각은 억눌리고 억압됩니다.
일곱째로, 이방인들은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고 있습니다. ‘방탕’이라는 원어(아셀게이아 aselgeia)는 ‘육욕, 호색, 방탕’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인간관계의 죄악들 중 첫째는 음란입니다. 인간은 음란하고 방탕합니다.
여덟째로, 이방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이란 온갖 죄악들을 가리킵니다. 죄는 사람의 아름다운 인격을 더럽히고 아름다운 부부관계와 가족관계, 나아가 이웃 관계를 더럽힙니다. 죄 없는 사회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지만, 죄악 된 세상은 정신적, 육신적 상처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의는 깨끗한 옷과 같고, 죄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이런 여덟 가지 점들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이방인의 모습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20-2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죄악 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과거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진리가 그분 안에 있으십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구원의 초청입니다.
22절. “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너희는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입니다. ‘이전의 생활 방식’이라는 원어(카타 텐 프로테란 아나스트로펜 kata ten proteran anastrofen)는 ‘썩어져 가는’ 원어(톤 프데이로메논 ton fdeiromenon) ‘부패되어가는’와 연결됩니다. ‘유혹의 욕심’이라는 원어(타스 에피두미아스테스아파테스tas epiduastes apates) ‘속이는 욕심들’이라는 뜻입니다, 욕심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속이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자아(自我)를 말합니다. 이것은 앞절들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모습의 요약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삶입니다. ‘벗어버리고’라는 원어(아포데스다이 apodesdai, 과거부정사)는 단회성(單回性)을 보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구원 사건입니다. 23절. “너희의 생각의 영 속에서 새롭게 되라.” ‘생각의 영속에서’라는 원어(토 프뉴마티 투 누스 휘몬 to pneumati tou’ noos hymon)으로, 영의 기능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특히 지식 혹은 생각을 강조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집니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은 생각의 변화입니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 ananeousdai, 현재부정사)는 계속성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의 변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됩니다.
심령의 새로움은 평생 계속됩니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새사람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의 내용임을 말합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는 원어는 ‘의와 참된 거룩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의와 참된 거룩함’입니다. ‘입으라’는 원어(엔뒤사스다이 endysasdai, 과거부정사)는 단회성(單回性)을 말합니다. 그것은 지금 성도들에게 명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가 받았던 구원 초청의 내용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구원 초청은 바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사람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25-28절에서 새로운 사람의 모습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거짓을 버리고 서로 진리를 말하라고 교훈합니다. 죽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② 26-27절. “너희는 화를 내도 죄는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진노하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화를 내지 말고 화를 다스립시다(anger management, 창 4:7). 사람은 분을 낼 때 말이나 판단이나 행동에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과격한 감정, 미움, 지나친 말, 불완전한 판단과 성급한 정죄, 심지어 살인 등의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가 날 때 우리의 감정이 지나치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치우치지 않도록 조금 멈추어 생각하고 혹은 기도하면서 차분하게 신앙적, 이성적 판단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③ 28절 “도둑질을 한 자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오히려 노동을 하여 궁핍한 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선한 것을 할지니라.” 도둑질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과 탐심, 또 쉽게 살려는 불성실한 마음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돈 벌기가 어렵고 땀 흘려 일하기는 싫기 때문에 남이 벌어놓은 것을 훔쳐서 쉽게 사용하려는 것이 도둑질입니다. 성도는 제 손으로 부지런히 수고하여 수고의 대가를 누리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④ 29 상반절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부패한’이라는 원어(사프로스 sapros)는 ‘썩은, 나쁜, 불건전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라가’[빈 머리, 바보]라고 말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2).
⑤ 29 하반절. “오직 세워 주는 일에 쓸 좋은 것만을 말하여 그것이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남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잠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 12:18,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⑥ 30절.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는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도덕적으로 성결하십니다.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정신과 거룩한 마음, 거룩한 생각,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인을 치는 것은 확인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서를 확인할 때 거기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입니다.
⑦ 31절 “너희는 모든 쓴 것과 진노와 분노와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쓴 것’이라는 원어는 독한 생각을 뜻합니다. 거기에서 ‘진노와 분노’가 나옵니다. 진노는 악한 생각에서 나오고, 분노는 ‘소리 지르는 것(떠듦)과 비방’으로 나타납니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합니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입니다. ‘악의(惡意)’라는 말은 남을 해치려는 소원과 계획을 가리킵니다. 이 말들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이는데, 처음에는 ‘모든 쓴 것’이요, 그다음에는 ‘진노와 분냄’, 그 다음에는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의’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⑧ 32절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친절히’는 원어(크레스토스 crestos)는 ‘자비롭다, 친절하다’는 말입니다. ‘상냥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프랑크노스 eusplancnos)는 ‘동정적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또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용서는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지식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인 완전한 인격으로 성장합시다. 사랑 안에서 성장할 때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옛사람은 버리고 새 사람답게 살아갑시다. 진리 안에 행하고, 화를 다스리며, 도둑질하지 말고 정당한 일을 하며, 더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천국 언어를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지 말고, 인자한 언행으로 서로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찬송 600장(통 242장)은 “에베소서 주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 흘려 샀으니 땅 위의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2) 온 세계 모든 교회 한 몸을 이루어 한 주님 섬기면서 한 믿음 가지네.
한 이름 찬송하고 한 성경 읽으며 다 같은 소망 품고 늘 은혜받도다.
3) 땅 위의 모든 교회 주안에 있어서 하늘의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루네.
오 주여 복을 주사 저 성도들같이 우리도 주와 함께 늘 살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하나님, 귀한 교회를 주셔서 옛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 입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진리 말씀 속에 항상 새사람으로 거듭나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데 힘쓰게 하옵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레위기 2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 규례(레 2:1-3) [추수감사절 주일설교말씀] 다윗의 감사와 찬송(대상 29:10-17)반응형
에베소서 4장
에베소서4장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A.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갇혀 있다고 말하고 있다.그는 오직 주님 안에 매임을 당하였고 주님 안에서 모든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다.그가 우리에게 권한다.우리의 부르심에 받은 일에 합당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A. 부르심에 합당한 태도의 첫번째는 겸손함이다.모든 영역에서의 겸손함이다.자신이 있는 자리를 인정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 이것이 겸손함 아닐까?모든 겸손이 시작인 것이다.
B. 두번째는 온유함이 필요하다.우리에게 사랑의 따뜻한 마음과 용납하는 마음이 없이는 어떠한 사역도 불가능하다.이것은 기본적인 성품이다.
C. 세번째는 오래 참음이다.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여기서 실패한다.고린도전서의 사랑을 정의하는 첫번째도 오래참음 아닌가?사랑이라는 것 사역이라는 것 모든 것의 기본은 여기서 시작한다.오래참음.우리는 이것을 우리 스스로 훈련시켜야 하고 또 우리의 제자들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훈련시켜야 한다.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그러나 쉽지 않은 영역이다.그러므로 더욱 이것에 우리를 매여줄 채찍이 필요하다.
D. 용납의 기본조건은 사랑이다.오래참음과 온유와 겸손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다.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그리고 서로를 용납해 주는 것이다.모든 진리 아래에서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해야 한다.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A.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으나,그것을 지킬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A. 우리가 하나라는 것,그리고 우리의 부르심도 하나라는 것이다.우리는 같은 목표를 가진이들이다.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A. 그분은 만유 위에 계시며,만유를 통일하시고,만유 가운데 계신다.우리 위에 계시며 우리를 하나로 하시며 우리 가운데 계신다.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서 온 세계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가?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A. 그분의 목적이 드러나 있다.이것은 그분의 실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그가 이땅에 내려오신 목적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그분의 속성이다.그분을 머리로 하는 것이 이 땅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그분이 한분이시므로 그분과 연합하는 것 그것이 영광스러움의 모습이다.연합과 일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어떤 사람은 선지자로,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A.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에,사도는 교회가 세워지는 시기에 존재하였던 은사고 지금은 주어지지 않는 은사다.지금은 복음 전하는 전도자와 목양을 하는 목사와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은사를 주신다.이 은사는 모두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A. 은사의 목적은 몸을 하나되게 하는 데에 있다.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A. 영적인 성장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A. 우리의 성장의 목표는 어디까지 인가?그리스도까지이다.
B. 성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 것?그리스도안에서 주와 동행하며 모든 영역에서 그분과 같아지는 것이다.이것은 오직 성령님과 동행할 때 가능하다.의지를 가지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죄를 거절하는 것이며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며 육신의 속삭임을 과감히 거절하는 것이다.이가 영적전쟁이다.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A. 지체간에 은사를 서로서로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지체를 위한것이다.
B. 주어진 분량을 충분히 상요하는 것이 중요하다.
C. 하나됨은 그분의 원하는 계획이었는데 이를 위해 ‘교회’를 그분의 몸된 지체로 삼으셨다.우리의 이땅에서의 삶은 이 하나됨을 유지하고 지키는데 힘쓰는 것과 이 몸을 자라게 하는데 있다.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체가 필요하다.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A. 옛사람의 특징 중 한가지는 유혹의 욕심이다.이것이 옛사람 처럼 행하는 시작점이다.이전 습관을 따라하는 것이 옛 사람의 특징이다.성경은 이것을 벗어버리라고 명령한다.이것은 명령이므로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영역이다.명령은 가능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우리는 옛 습관을 벗어버리는 데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 먼저는 옛사람을 벗은 후에,새 사람을 입는 것이 필요하다.둘 모두 의지를 가지고 취해야하는 행동강령이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A. 옛사람은 참된 것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한다.우리는 이 옛사람의 거짓된 습관을 버려야 한다.그리고 각자가 이웃과 함께 참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성경은 요구한다.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는 진실해야 한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A. 우리 안에 화가 일어날 수 있지만,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또한 그 화가 일어나는 것을 하루보다 더 그 화를 제어하고 해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며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죄를 품어서는 안 된다.화난 것에서 해결해서 빠져 나올 수 있음을 성경은 알려준다.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A. 화를 계속 품는 행동으로 인하여 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문제의 시작점에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절제를 훈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A. 도둑질과 같이 나쁜 습관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그리고 회개에 그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선을 베풀도록 성경은 요구한다.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선한 행동으로 우리 안에 빛되신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A. 입에서 나오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조심해야 한다.속에서 그러한 생각이 혹 들었더라도 그것을 입밖에 내는 행위는 중단해야 한다.더불어 우리는 그러한 나쁜 말을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는 선한 말을 해야 한다.그러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어렵게 하는 말이 아닌 듣는 자들로 하여금 은혜로 주 안에서 자라게 하는 일에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계신다.그러나 우리가 죄에 빠지게 될 때 성령은 근심하신다.우리 몸은 더 이상 우리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매순간 할 필요가 있다.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케 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매순간 점검해서 근심케 하는 일이 있다면 벗어버리고 다시 성령으로 새롭게 함을 입자.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느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1-16절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장 1-16절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첫 번째 갇혔을 때 기록한 네 개의 서신 중에 하나입니다. 이 네 개의 성경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들을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경들 중에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교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제이고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주제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 에베소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으르렁 거리던 사람들이 화해하고 한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남북, 동서로 나누어진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 한마음, 한나라가 되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인종과 신분과 나이를 떠나 예수님을 통해 성도로 부름받아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행복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성전이 되고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의 삶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인 습관적로 ‘하나 됩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바른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나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 됩시다.’는 말은 성도들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은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할 일은 그것을 지키는 일인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가 된 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 안에 한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심령에 거하시지만 그분은 한분입니다.
그래서 4절부터 6절까지 말씀에서 모두가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부터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들에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한 이유는 바로 몸이 하나며 성령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것은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 첫 번째가 바로 분열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견대로 교회를 나누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누어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진적이 없음에도 나뉘었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기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말씀은 성도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더럽힌다는 말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나누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를 나누고 찢고 교회 내에서 파당을 나누어 싸우는 모든 행위를 책망하면서 무서운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의 분열은 사탄에게 교회를 무너뜨릴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며 어떤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누지 않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평안의 매는 줄’이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공동체에도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의견의 차이로, 성경의 차이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도 평안으로 서로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렇게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1절과 2절에서 하신 말씀이 전제됩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4:1,2)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워’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한 말씀이 모든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평안의 매는 줄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묶어주신 그 끈을 끊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힘써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순간 곧바로 한 성령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과 15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4,15)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도 간에 하나가 되는 법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래 참는 것’과 ‘항상 선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래 참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르지 않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신자나 나름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연약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을 용납하는 일에 약합니다. 그 이유는 그 기준이 자신이고 예전의 바르지 못했던 자신을 용납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한 것은 성도와의 관계에서 악한 일을 당했거나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항상 선을 따라 행함으로 주께서 하나 되게 해주신 것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 간에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해야 하는 것이 성도에게 마땅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의무란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셨고 그 빚을 형제들에게 갚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시면서 우리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하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여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20절에서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한 몸의 지체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눈으로, 누군가는 손으로,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장기의 역할을 하는 이로 교회를 섬기며 세워가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체 중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21절부터 27절에서는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필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림교회가 13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는 오늘 우리 중 누구도 힘을 다하지 않은 성도가 없습니다. 나름의 힘을 다했고 역할을 해 주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보이게 누군가는 보이지 않게 누군가는 오른손의 역할을 누군가는 새끼발가락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교회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없기를 바라거나 나 하나쯤이야 는 생각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거나 행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림교회는 우리 모두가 있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12절은 말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각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함으로 주께서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또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당장 어떤 것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욕심대로 무엇인가 되지 않아도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심고 누군가는 가꾸고 주님은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중소형 교회의 성도들이 자주 지칩니다. 정체된 것 같아 지치고,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보이지 않아 지치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 지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심어야 하고 누군가는 가꾸어야 하고 누군가는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삶과 사역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성도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라고 말해서 우리의 믿음과 지식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지식이 자라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여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성장은 했는데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거나 지식은 많은데 성장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모두 이상한 것입니다. 믿음이 바른 지식위에 세워졌는지 점검해야 하며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자신이 가진 지식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성장이 믿음과 지식이 없이 성장하는 것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되는 것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가 강한 태양 아래 나오면 타 죽듯이 바른 지식 위에 세워지지 않은 믿음은 환란이 오면 곧바로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 자체만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외적 성장입니다. 교회성장 세미나나 교회건축 세미나 등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한국교회는 외적 성장이 지상최대의 목표가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렇게 추구했던 외적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붕괴수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어떻게 믿는 것이 바르게 믿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앞에 진지하게 서서 그 말씀을 자신의 신앙의 기본으로 삼는 일에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믿는 것과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자라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게 됩니다. 이는 다음 절에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한다는 말과 대조됩니다.
신앙적 어린아이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어린아이 믿음이 아니라 부정적인 어린아이의 믿음입니다. 바르지 않은 가르침에 넘어가고 교계에 벌어지는 일이 말씀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의 성도입니다. 사탕으로 유혹하면 따라가는 아이처럼 세속의 유혹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기에 15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성도와 교회가 성장하는 수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알레듀온테스’라고 합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진리를 말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진리를 말하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성도와 교회를 성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성도들을 보면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저와 여러분이 많은 부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인해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리의 선포가 사랑 안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무리 바른 말이라고 해도 미움이나 시기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하기에 진리를 선포하고 그 말씀을 받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는 데 있어서 중요한 원리가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읽은 15절 후반에 ‘그는 머리는 곧 그리스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기록한 말씀이 1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머리를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기록한 골로새서는 이 원리를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골로새교회가 “천사숭배, 절기, 먹고 마심, 안식일, 고행”등의 바르지 않은 것을 지켜 신앙생활하는 그들에게 그 바르지 않은 것들을 통해 신앙생활하지 말라고 하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라고 말하였습니다. 기록되기를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라”(골2:29)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제일 원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배우고 그것을 지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머리를 붙들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가 없거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이 들어온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세속의 가치관과 싸우고 가면을 쓴 거짓 복음과 싸우고 편협하다는 말을 듣지만 진리가 아닌 것과는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순수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만을 붙드느냐 아니면 다른 것도 함께 붙들고 있느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교회설립 13주년 감사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오래 된 것도 자랑이 아닙니다. 외형적 성장을 이룬 것도 그렇지 못한 것도 중요한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에 근거해 바르게 자라고 있느냐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을 다해 지켰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하며 또 다른 성도들이 우리 안에서 태어나 주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일을 바르게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에베소서 4 장 주석
다음은 Bing에서 에베소서 4 장 주석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LIVE] 어떻게 해야 교회 되나? (에베소서 4:1-16)_주일 2부 예배 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10
- 기독교
- 교회
- 예수
- 성경
- 설교
- 강연
- 조정민
- 베이직
- 베이직교회
- 논현동교회
- 조정민목사
- 조정민설교
- 조정민목사설교
- 아침예배
YouTube에서 에베소서 4 장 주석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LIVE] 어떻게 해야 교회 되나? (에베소서 4:1-16)_주일 2부 예배 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10 | 에베소서 4 장 주석,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