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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당) – 나무위키

태자의 책사 위징도 위협적인 인물로, 깐깐한데다 영리한 그는 뛰어난 참모였기에 진왕부의 가장 큰 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황제가 된 이연과 이세민이 사사건건 충돌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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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2/12/2022

View: 4288

중국 고전 인물열전 9당태종 이세민‥열린 마음으로 당제국 …

열린 마음과 소통 리더십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왕적 리더십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제왕이었다.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3/30/2021

View: 401

당 태종

당 태종의 생애. 이세민은 599년 1월 23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북주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 명문 출신이었고, …

+ 더 읽기

Source: chinesewiki.uos.ac.kr

Date Published: 10/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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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당나라 이세민

  • Author: 한국불교 대표방송 B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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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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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태종(太宗, 598년 1월 23일~649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2대 황제이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수나라 말기 중원의 혼란기를 모두 평정, 당의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뛰어난 명장이자 정치가, 전략가, 예술가이기도 했으며,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 당의 최전성기를 이끈 황제로 손꼽힌다.

당 고조 이연의 두 번째 아들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여당전쟁 당시 고구려를 침공한 황제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 편집 ]

초기 생애 [ 편집 ]

이세민은 개황 19년 (598년)에 당 국공 이연과 그의 처 두씨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선비족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인 이연이 수나라 황실 친인척 관계상 수 문제 양견의 처이질(妻姨姪)었던데다가 수나라에서 크게 활약하였기 때문에 이후 집안이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614년에는 장손씨와 혼인을 올렸다. 617년 수 양제 양광의 고구려 원정과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피폐해진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이연 역시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 무렵의 일화로, 운정흥 장군에게 깃발을 많이 세워 군의 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라는 계책을 올려 칭찬을 들었다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서 장안을 손에 넣고, 때마침 수 양제 양광(친인척 관계상 양광은 아버지 이연의 이종사촌 남동생이었음.)마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당의 황제 자리에 오르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그러나 뒤이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호족과 귀족들이 당나라에 충성을 바치지 않자, 이세민은 그들을 격파하러 출병했다. 반역 호족은 왕세충, 두건덕, 설인고, 유무주 등이었는데, 이세민은 이들에게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여,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현무문의 변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현무문의 변 입니다.

이후, 이세민의 권세는 점점 커졌고, 인기 또한 높아졌다. 이것을 불안하게 여긴 형이자 황태자인 이건성과 막내동생인 제왕(齊王)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우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의 부하들 중에는, 위징, 왕규(王珪), 배적(裴寂)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와 장군 이정, 이세적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을 알현하여,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고 아뢰었고, 이연은 지체없이 그들을 자신의 황궁으로 불렀다. 그들이 황궁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마구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현무문의 변’이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정관의 치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정관의 치 입니다.

이세민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어 조용조 제도로 세금을 걷었다. 이 제도는 토지를 받은 사람은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을 바치게 하는 제도로써, 국가는 풍족해지고 민생은 안정되었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의 편에 있던 위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위징은 명재상이 되어 중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군사 제도는 부병제인 징병제로 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인재를 등용시킨 당나라는 나날이 번창해져 갔으며 백성들도 더더욱 이세민을 우러러 보았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적의 밑에서 일했던 장수라 할지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신하들이 자기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역정을 내지 않고, 그 간언을 잘 받아들여 언제나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630년에 이세민은 동돌궐을 정벌하여 텡그리카간[天可汗], 즉 천하의 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중앙 아시아도 정복해 당의 영토를 이전 황조의 2배의 수치로 넓혔다.

후계자와 최후 [ 편집 ]

649년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 실패 후 이질을 앓았다.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폐하고,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역시 폐하였다. 그리하여, 9남 위진왕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황태자 이치는 이후 당의 제3대 황제 당 고종이 되며, 대리청정을 했다. 649년 7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은 장안 함풍전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존호, 시호, 묘호, 능호 [ 편집 ]

초기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며, 고종 때 개칭하여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로 고쳤으며, 당 현종 때 추가로 개칭한 정식시호는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이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며, 능호는 소릉(昭陵)이다.

대외 관계 [ 편집 ]

당 태종(太宗)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大連)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 당 태종은 이적(李勣:李世勣) · 장량(張亮)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약 60일간 사투(死鬪)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 태종은 2차 · 3차(647년 · 648년)에 걸쳐 이적(李勣:李世勣) · 우진달(于進達) ·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족 관계 [ 편집 ]

조부모와 부모 [ 편집 ]

조부 : 세조(世祖) 원황제(元皇帝) 이병(李昞)

: 세조(世祖) 원황제(元皇帝) 이병(李昞) 조모 : 원정황후(元貞皇后) 독고씨(獨孤氏)

: 원정황후(元貞皇后) 독고씨(獨孤氏) 부친 : 고조(高祖) 신요황제(神堯皇帝) 이연(李淵)

: 고조(高祖) 신요황제(神堯皇帝) 이연(李淵) 모친 : 태목황후(太穆皇后) 두씨(竇氏)

황후 [ 편집 ]

봉호 시호 이름(성씨) 별칭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장인/장모) 능묘 비고 황후(皇后) 문덕순성황후

(文德順聖皇后) 장손씨

(長孫氏) [1] 626년 ~ 636년 601년 ~ 636년 제국헌공(齊國獻公)

장손 성(長孫 晟)

제국공부인(齊國公夫人)

고씨(高氏) 소릉(昭陵)

후궁 [ 편집 ]

이름 미상의 첩실과 후궁은 제외함.

황자 [ 편집 ]

– 봉호 시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자식 별칭 비고 장남 항산군왕

(恆山郡王) 민(愍) 이승건(李承乾) 618년 ~ 645년 문덕황후 장손씨 2남 [10] [11] 차남 초왕(楚王) 이관(李寬) 619년 ~ 626년 [12] 3남 오왕(吳王) 이각(李恪) 619년 ~ 653년 황비 양씨 4남 5녀 [13] [14] 4남 복왕(濮王) 공(恭) 이태(李泰) 620년 ~ 653년 문덕황후 장손씨 2남 [15] [14] 5남 제왕(齊王) 이우(李祐) ? ~ 643년 황비 음씨 [16] [17] 6남 촉왕(蜀王) 도(悼) 이음(李愔) ? ~ 667년 황비 양씨 3남 1녀 [18] [14] 7남 장왕(蔣王) 이운(李惲) ? ~ 674년 궁인 박씨 16남 [19] 8남 월왕(越王) 경(敬) 이정(李貞) 627년 ~ 688년 월국태비 연씨 [20] 9남 황태자(皇太子) 이치(李治) 628년 ~ 683년 문덕황후 장손씨 [21] 제3대 황제 고종(高宗). 10남 기왕(紀王) 이신(李愼) ? ~ 689년 기국태비 위씨 11남 3녀 [22] 11남 강왕(江王) 상(殤) 이효(李囂) ? ~ 632년 월국태비 연씨 요절함. 12남 대왕(代王) 이간(李簡) ? ~ 631년 요절함. 13남 조왕(趙王) 이복(李福) 634년 ~ 670년 조국태비 양씨 4남 14남 조왕(曹王) 공(恭) 이명(李明) ? ~ 682년 소왕비 양씨 5남 [23]

황녀 [ 편집 ]

– 봉호(시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남편 별칭 비고 장녀 양성공주

(襄城公主) ? ~ 651년 송국공(宋國公)

소예(蕭鋭) 차녀 여남공주

(汝南公主) ? ~ 636년 요절함. 3녀 남평공주

(南平公主) ? ~ 650년 남평현남(南城縣男)

왕경직(王敬直) 투국공(渝國公)

유현의(劉玄意) 4녀 수안공주

(遂安公主) 신도현남(信都縣男)

두규(竇逵) 흡주자사(歙州刺史)

왕대예(王大禮) 5녀 장락공주

(長樂公主) 이여질(李麗質) 621년 ~ 643년 문덕왕후 장손씨 장손 충(長孫 冲) 6녀 예장공주

(豫章公主) 당의식(唐義識) 7녀 비경공주

(比景公主) ? ~ 653년 양양군공(襄陽郡公)

시영무(柴令武) [24] 8녀 보안공주

(普安公主) 두국공(竇國公)

사인표(史仁表) 9녀 동양공주

(東陽公主) ? ~ 701년 신국공(申國公)

고이행(高履行) 10녀 임천공주

(臨川公主) 이맹미(李孟姜) 624년 ~ 682년 기국태비 위씨 초양공(譙襄公)

주도무(周道務) 11녀 청하공주

(清河公主) 이경(李敬) 624년 ~ 664년 동아현공(東阿縣公)

정회량(程懷亮) [25] 12녀 난릉공주

(蘭陵公主) 이숙(李淑) 628년 ~ 659년 두회철(竇懷悊) [26] 13녀 진안공주

(晉安公主) 남주자사(嵐州刺史)

위사안(韋思安) 양인로(楊仁輅) 14녀 안강공주

(安康公主) 독고 심(獨孤 諶) 15녀 신흥공주

(新興公主) 장손 희(長孫 曦) 16녀 성양공주

(城陽公主) 문덕황후 장손씨 양양군공(襄陽郡公)

두하(杜荷) 하동현개국후(河東縣開國侯)

설관(薛瓘) 17녀 고양공주

(高陽公主) 627년 ~ 653년 방주자사(房州刺史)

방유애(房遺愛) [27] 18녀 금산공주

(金山公主) 요절함. 19녀 진양공주

(晉陽公主) 이명달(李明達) 633년 ~ 644년 문덕황후 장손씨 요절함. 20녀 상산공주

(常山公主) 요절함. 21녀 신성공주

(新城公主) 634년 ~ 663년 문덕황후 장손씨 장손 전(長孫 詮) 위정구(韋正矩)

기년 [ 편집 ]

기년 태종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서력

(西曆) 627년 628년 629년 630년 631년 632년 633년 634년 635년 636년 간지

(干支) 정해(丁亥) 무자(戊子) 기축(己丑) 경인(庚寅) 신묘(辛卯) 임진(壬辰) 계사(癸巳)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 연호

(年號) 정관(貞觀)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태종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서력

(西曆) 637년 638년 639년 640년 641년 642년 643년 644년 645년 646년 간지

(干支) 정유(丁酉) 무술(戊戌) 기해(己亥) 경자(庚子) 신축(辛丑) 임인(壬寅) 계묘(癸卯) 갑진(甲辰) 을사(乙巳) 병오(丙午) 연호

(年號)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태종 21년 22년 23년 서력

(西曆) 647년 648년 649년 간지

(干支) 정미(丁未) 무신(戊申) 기유(己酉) 연호

(年號) 21년 22년 23년

당 태종이 등장한 작품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전임

(건국) 당나라 상서령

618년 ~ 626년 후임

이괄

전임

(건국) 당나라의 태위

618년 ~ 626년 후임

장손무기

형제를 죽인 냉혈한을 최고의 황제로 만든 리더십 비결

안녕하세요. 한국경제신문 홍선표 기자입니다. <오늘은 친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제가 된 당 태종 이세민, 그는 어떻게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되었나. 동양 제왕학의 고전 ‘정관정요’로 살펴보는 리더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마련해봤습니다.

이 방송을 녹음하고 있는 2018년 10월엔 얼마 전 영화 <안시성>이 개봉해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영화 안시성은 고구려를 침략한 중국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는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그가 이끄는 고구려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방송에서 다루려는 인물이 바로 배우 박성웅 씨가 연기한 당 태종 이세민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작품 속에서 당 태종 이세민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사진들을 찾아보니 왠지 냉혹하고 잔인하기만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다면 실제로 역사 속 당 태종 이세민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영화 안시성에서 박성웅 씨가 연기한 당 태종 이세민

이번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서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에 출판돼 한국 중국 일본의 역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왔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리더십과 조직 경영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바로 중국 당나라 시대 때 출판된 정관정요란 책입니다. 이 책은 황제 자리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이 황제 자리에 있던 20여 년 동안 자신의 여러 신하들과 나눠온 대화를 묶은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해 소개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이 ‘동양 제왕학의 고전’이라는 건데요.

여기서 말하는 제왕학이란 말 그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배우는 학문입니다. 나라를 이끌기 위해선 수많은 능력이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신하와 백성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는 리더십, 권력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정치력,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영 능력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자질입니다. 제왕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나 그의 후계자가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학문입니다.

당 태종 이세민 초상화

정관정요는 그런 제왕학을 상징하는 책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세자의 필독서이기도 했고요. 역사책을 읽다 보면 큰 야망을 품고 있는 동양의 군주들이 정관정요를 읽으면서 마음 자세를 가다듬었다는 내용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광종은 권력을 휘두르던 권문세족들을 제압하기 전에 정관정요를 읽으면서 계획을 짰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일본 에도막부를 연 첫 번째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책을 늘 머리맡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자 그럼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당 태종 이세민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가 평소 신하들과 나눈 대화와 그의 일화를 묶은 책이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읽히고 있는 걸까요?

우리 역사에서 당 태종 이세민과 가장 비슷한 인물을 찾는다면 조선의 태종 이방원을 들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큰 공을 세우지만 주변의 견제로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자 군대를 이끌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세자이던 자신의 동생과 자신을 반대하던 무리를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왕이 되죠.

영화 <황후화>의 한 장면

당 태종 이세민도 똑같습니다. 이세민은 사실상 당나라의 창업주라고 불릴 정도로 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습니다.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 용병술이 뛰어났던 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쟁터를 누비며 적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면서 천하를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운 엄청난 공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아버지 당 고조 이연의 후계자가 되지 못합니다. 당 고조 이연은 이세민의 형 이건성을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자 당 태종 이세민도 태조 이방원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사실 당 태종 이세민이 조선의 태조 이방원보다 700여 년 전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방원이 이세민의 행동을 따라 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텐데요. 이세민은 군대를 일으켜서 황태자이던 친형 이건성과 친동생 이원길,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중국 역사에선 이 사건을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르는데요. 황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현무문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해서 적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이 글은 홍선표 기자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써먹는 경제경영’의 원고입니다. 써먹는 경제경영에선 이번 글과 같이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리더의 자세부터 ‘가계부채가 OECD 평균보다 8배 빨리 증가하는 이유, ‘국민연금 기금이 떨어져도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와 같은 경제 이슈 등 경제경영 전반에 대한 다양한 이슈를 쉽고 깊이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영화 <황후화>의 한 장면

자 여기까지만 들으시면 당 태종 이세민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젊은 시절부터 말을 타고 천하를 누비면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세운 뒤에는 권력에 대한 야망 때문에 친형과 친동생까지 살해한 냉혹하고 잔인한 권력자의 모습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고 백성들의 고통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야망만을 좇을 것 같은 인물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당 태종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존경받는 황제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권력을 잡은 뒤에도 무력에만 의지해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다면 이런 존경은 받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건 권력을 잡기 전에는 철저하게 힘과 무력을 바탕으로 밀어붙이다가 일단 권력을 잡은 후에는 덕과 너그러움을 바탕으로 온화한 정치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공자(왼쪽)와 한비자(오른쪽)

동양 고전에선 힘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패도라고 부릅니다.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 사상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덕을 바탕으로 한 정치는 왕도라고 표현합니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 사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패도와 왕도를 적절하게 구사한 게 이세민이 만들어낸 업적의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정관정요>를 읽으면서 느꼈던 당 태종 이세민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로 만든 그의 자질과 노력을 두 가지로만 정리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00전 중국에 살았던 한 군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끌고 있거나 앞으로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실 만한 내용들인 거 같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에게 배울 수 있는 자세 중 첫 번째는 ‘능력만 있다면 설사 원수였다고 하더라도 과감하게 등용하는 실력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정관정요는 그가 20여 년간 천하를 다스리면서 그의 신하들과 대화했던 내용들을 정리한 책입니다. 수많은 신하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신하들은 위징, 방현령, 두여회, 왕규 등인데요. 이 중에서도 위징은 그 이름이 가장 자주 나올 뿐 아니라 황제에게도 가장 많은 쓴소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위징이 당 태종 이세민에게 간언한 게 300차례나 된다고 합니다.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했다는 건데요. 이렇게 언제든 황제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었다는 말은 곧 당 태종 이세민이 위징을 그만큼 신임했다는 말입니다.

당나라 때의 명재상 위징

그런데 위징은 원래 당 태종 이세민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이세민이 자신의 형이자 황태자이던 이건성을 죽이고 황제가 됐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위징은 원래 이건성의 핵심 참모였습니다. 이세민과 이건성이 권력 다툼을 벌이던 시기 이세민을 제거할 수 있는 계책들을 줄기차게 내놨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만큼 이세민이 이건성을 죽인 뒤 위징을 불러다가 질책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보통 이럴 경우엔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경쟁자를 따르던 이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게 보통인데요.

이세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세민이 위징을 부르자 사람들은 당연히 이세민이 위징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세민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간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위징이 이간질을 해서 자신과 자신의 형을 싸우게 했다는 말인데요. 그러자 위징은 기죽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황태자 건성이 만일 저의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재앙은 없었을 겁니다”라고요. 황태자가 자신이 낸 계책을 안 듣고 망설이는 바람에 이세민이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지 만약 자기 말만 잘 들었어도 이세민은 어찌 됐을지 모를 거라는 말이죠. 손 하나만 까딱하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은 한 거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이세민은 위징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를 불러들여 조언을 구했습니다. 능력 있는 인재라고 하면 비록 자신의 원수였다고 하더라도 조직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등용하는 게 맞다는 판단이었죠.

당당한 체격의 당 태종 이세민

이세민은 위징의 강직한 성격과 사려 깊고 원대한 판단력을 존중해 그의 벼슬을 계속해서 높여줬는데요. 그러자 어느 날 원래부터 그를 따르던 신하 한 명이 불만을 늘어놨습니다. 쉽게 말하면 ‘원래 우리를 제거하려고 했던 적을 이렇게 잘 대해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원래부터 당 태종을 따랐던 부하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불만이죠. 이에 대한 당 태종 이세민의 대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과거에는 분명 위징은 나의 적이었소. 그러나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 자기가 섬기는 사람을 섬겼을 뿐이니, 이 또한 칭찬할 만하오. 나는 지금 그를 발탁해 중용했소. 어찌 고대의 영명한 군주에게 부끄러움이 있겠소? 그러나 위징은 나를 거스르면서 진실되게 간언 했고, 항상 내가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소. 나는 이 때문에 특별히 중히 여기는 것이오”

당 태종 이세민이 인재 등용에 있어서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영화 <황후화>의 한 장면

이세민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바로 남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세민은 전쟁터를 누비면서 말 위에서 전하를 통일한 무장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카리스마도 대단했는데요. 실제로 그의 초상화를 보면 체격도 당당하고 눈도 부리부리한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그가 자신의 형과 동생까지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의 기세에 눌린 신하들 모두가 그 앞에서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합니다. 혹시나 이세민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눈치만 보고 그의 입맛에 맞는 늘어놨다는 것이죠. 문무백관 모두가 황제의 말에 무조건 찬성하는 YES맨이 됐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야 나라가 잘 운영될 수가 없죠.

어느 날 이세민은 자신의 카리스에 눌려 신하들이 자신에게 솔직한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신하들을 만날 때면 표정을 부드럽게 해 신하들이 겁먹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한 의견을 들려줄 수 있도록 합니다.

“정직한 군주가 간사한 신하를 뽑으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고, 정직한 신하가 사악한 군주를 섬겨도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소. 나는 대신들의 솔직한 말과 바른 논의에 의지해서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고 싶소” 당 태종 이세민이 신하들에게 솔직한 의견을 내놓을 것을 당부하면서 한 말입니다.

당 태종 시대의 명재상 방현령

사실 <정관정요>를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는데요. 아무리 이세민이 신하들이 간언을 귀담아듣는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신하들이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조직 안에서 상사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자칫 황제의 분노를 사기라고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이세민의 신하들은 목숨을 내걸고 간언 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세민이 자신의 친척들을 모두 왕으로 봉해서 각자 자기의 지역을 다스리게 하려는 봉건제를 시행하려고 하자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서 황족이라고 해서 모두 왕으로 봉하는 건 백성들의 고통을 늘리면서 황제의 친척들만 살리는 길이라고 반대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결국 이세민의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이 추진하려고 했던 봉건제를 취소했고요.

그런데 이렇듯 자신의 카리스마까지 내려놓으면서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이세민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쓴소리를 하는 신하들 때문에 폭발한 적도 있는데요. 바로 앞에서 길게 설명한 위징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세민이 신하들과의 조회를 마치고 궁전으로 들어와 불 같이 화를 냈습니다. 이를 본 황후 장손황후가 이세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정관정요

“위징 그 시골 촌놈이 조회에서 또 짐에게 대들었소. 이 시골뜨기를 죽이지 않으면 내 마음속의 한을 풀 방법이 없을 것 같소!” 평소엔 위징이게 간언을 많이 해줘서 고맙다며 비단을 몇백 필씩 상으로도 내렸던 이세민이지만 이때만큼은 그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인 이세민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황후 장손황후는 즉시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평상복이 아닌 예복으로 갈아입고 이세민에게 절을 하면 축하를 했습니다.

남편은 지금 사사건건 자기 자신에게 대드는 신하 때문에 화가 나 죽을 지경인데 아내는 왜 갑자기 예복을 차려입고 와서 춤을 추며 좋아하는 걸까요? 당황한 이세민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장손황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서에 보면 군주가 성군이면 신하도 충신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폐하가 성군으로 계시는 까닭에 위징 같은 신하가 직언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천하에서 이런 성군을 얻었으니 폐하 곁에 있는 아내로서 어찌 이를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고 당 태종 이세민이 중국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게 된 데에는 이런 아내의 조언이 컸던 거 같습니다.

정관정요와 사기의 내용을 정리한 신동준 박사의 책

한국인들에게 당 태종 이세민은 주로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했다가 결국 패하고 물러나야만 했던 중국의 황제로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은 그와 신하들이 남긴 동양 제왕학의 고전 <정관정요>를 통해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리더의 자세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이세민이지만 그도 태평성대가 계속되자 말년에는 여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말년으로 갈수록 신하들의 간언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많아졌고 무리하게 고구려를 공격해 국력을 쇠퇴하게 만들었죠. 또한 자신을 뒤를 이를 후계자를 제대로 고르지 못한 탓에 결국엔 그의 후궁이던 측천무후가 그가 죽은 뒤 당나라를 차지하게 만드는 큰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이 같은 모습을 보면 한 때 좋은 리더라고 해서 영원히 좋은 리더로 남을 수는 없다는 사실과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선 항상 자신을 갈고닦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이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나라를 건국하는 것보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게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한번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그 성과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게 더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오늘은 친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제가 된 당 태종 이세민, 그는 어떻게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되었나. 동양 제왕학의 고전 ‘정관정요’로 살펴보는 리더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마련했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청취자 여러분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홍선표 한국경제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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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당나라의 건국과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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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당나라의 건국과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세

당 태종 이세민

당의 창업자는 고조 이연이지만 수나라 말기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실질적으로 창업을 주도한 인물은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이는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의 아들들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창업에 앞장선것과 매우 유사하다.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은 장안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황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로 부터 양위를 받았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여러모로 조선 태종 이방원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아 29세에 황제가 된 23년간의 태종의 정치는 후세에 정관의 치라 불리며 높게 평가되었다.

이런 정관의 치세를 연 태종의 정치에는 세가지 조처가 있었다. 태종은 오경정의를 편찬하여 남북조 시대에 갈라진 경서 해석에 대한 차이를 통일했다. 명분은 경서 해석의 통일이었지만 사실상 당 황실과 자신에게 맞게 경서해석을 통일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정관씨족지를 편찬하여 당시 최고의 문벌이었던 박릉 최씨의 서열을 끌어내리고 황실과 외척을 올려두었다. 이로써 남북조 시대 사회적 계층 질서를 황실 중심으로 바꾸는데 성공하였다. 또 관찬 역사를 열어 사관을 협박하여 실록을 보므로서 역사가 정치에 종속되는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도덕적, 정치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완과 업적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630년에는 북방 돌궐제국을 멸망시키고 천가한 호칭을 얻었다. 호월일가라는 태종의 종족관으로 농경과 유목지역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당 태종대에 당 제국은 만국내정과 화이대동의 세계제국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정치는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치세동안 당은 수의 국력을 절대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동생의 부인을 비로 끌어들이고 자신의 혈육을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는 수 양제와 매우 유사한 행태이지만 수양제는 희대의 폭군으로 그는 명군으로 정형화 되었다.

태종은 당의 건국 당시의 전쟁에서도, 또한 고구려 원정 이전까지 연전 연승하며 전장의 백전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의 영토팽창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나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을 공격하는데 실패하여 당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당 태종은 고구려 공략을 마치지 못한채 죽었고, 후계자인 당 고종이 유지를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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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인물열전] (9)당태종 이세민‥열린 마음으로 당제국 반석에 올린 ‘소통 리더십의 제왕’

구중궁궐에 갇혀 사는 군주는 사람의 장막에 가려 눈과 귀가 막히기 쉽다. 간신들이 판을 치고 올곧은 신하가 내쳐지는 이유는 의외로 자명하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칭찬보다 칭송과 아첨을 일삼는 것이 궁정의 속성이라고 하면 과언일까.열린 마음과 소통 리더십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왕적 리더십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제왕이었다. 물론 창업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으니,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수나라 양제(煬帝)를 타도하고자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설득해 병사를 일으킨다.그는 먼저 설거와 설인고 부자,유무주(劉武周)와 싸우고,다시 강적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을 제거해 스무살 때인 617년에 장안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듬해 당나라가 탄생했고,이연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이세민이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아 형제간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했다. 건성은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세민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지만 세민이 선수를 쳐 건성과 입조하는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는 곧바로 626년에 제위를 이어받아 즉위하니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반란 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겪어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예악(禮樂)과 인의(仁義) 등 유학에 바탕을 둔 문치를 내세우면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국학에는 학사(學舍)를 400여칸이나 증설하고,국자(國子) 태학(太學) 사문(四門) 광문(廣文)에서도 학생을 증원했다. 이와 동시에 도가의 무위(無爲)를 강조하고 도교를 국교로 정해 폭넓은 민심의 향방도 살폈다. 인재경영에 몰입해 자신에게 300번 이상이나 간언한 위징(魏徵)과 같은 신하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고,8대 명신이라 불리는 소신파 신하들을 곁에 두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다음과 같이 자기검증을 했다. ‘덕행을 쌓은 군주는 귀를 거스르는 말을 듣고,얼굴을 살피지 않고 하는 간언을 좋아한다. 군주가 충신을 가까이 하려면 의견을 제시하는 인사를 후하게 대우하고,참언하기 좋아하는 자를 질책하며,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정관정요》)그가 제위에 오른 해부터 649년에 이르는 23년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무엇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바로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는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태종은 군주보다 백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겸손한 제왕이었다. 그가 ‘창업이 쉬운가,수성이 어려운가(創業易 守成難)’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당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라고 칭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고,반대파를 포용한 태종은 군신관계란 신뢰로 맺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통치 말년에 태종은 자기관리에 허점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게 된다. 지나친 영토확장 정책과 고구려 침략 실패,후계자 선정의 난항 등을 한으로 남긴 채 그가 죽자 동요된 정권은 후궁이자 훗날 고종(高宗)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잠시 동안 거의 소멸상태를 맞이하게 된다.초심을 유지하고 민심의 향방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멀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곧은 나무는 그림자가 굽을까 걱정하지 않는다'(정관정요)고 하지만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곁에 두는 자도 군주요,내치는 자도 군주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제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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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의 생애

이세민은 599년 1월 23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북주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 명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두씨는 선비족의 귀족이었다. 16세에 장교가 되어 18세부터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617년, 아버지를 따라 태원 지방에 있던 이세민은 수양제의 실정으로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상황에서 거병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당이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크게 여섯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세민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하였다.

맏형 이건성도 앉아만 있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형제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적진에 뛰어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의 건국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이건성에게 돌아갔고, 이세민은 진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기 때문에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이러한 지위와 명성을 바탕으로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이연은 이세민에게 황태자 직위를 주고 2개월 뒤에 이세민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다.

즉위 후 연호를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와 전략가와 예술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대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런 그가 다스린 시기는 정관의 치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 왕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위징이라는 자의 간언이 두드러졌다.

당 태종의 업적

당 태종의 업적은 정관의 치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당태종은 내치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외치에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한나라 말기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을 유린했으며, 특히 최근 백여년 간은 돌궐의 세력이 막강했다. 이러한 막강한 돌궐의 세력 때문에 부황인 당고조도 돌궐에 사실상 신하 노릇을 하며 몸을 낮춰야 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또한 서방의 토욕혼,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 구자까지 정복했다. 이로 인해,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드디어 공세로 돌아섰다.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당태종은 제도의 정비와 문화의 창달에도 힘썼다. 그가 10년의 노력을 들여 마련한 율령은 ‘당률’이라고 해서 이후 신라, 일본 등 ‘동양 문화권’의 정치제도의 근간이 된다.

또 도교와 불교가 지나치게 유행해서 귀족들의 방종을 낳았다고 보아, <오경정의>를 편찬하고 과거제를 강화하는 등 보다 금욕적인 유교를 장려했다. 당태종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직접 서법 서적을 짓기도 했으며, 따라서 전국적으로 서예가 크게 발전했다. 또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을 보여 한족과 북방민족의 예술을 종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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