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착륙 우주인 | 미국의 달 탐사는 주작이라는 충격 증거 9가지… 이게 정말 사실일까?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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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었으며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탔다.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발을 딛은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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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11호 대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에 진출하게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지만 아직까지도 미국의 달 착륙은 구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달 탐사 날조론자들.
과연 이들은 어떤 근거로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걸까요?
영화 퍼스트맨은 인류 최초로 달표면을 밟은 남자 닐 암스트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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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 – 나무위키

실제 로켓처럼 발사 단계별로 3단 분리가 가능하며, 마이크로스케일 달 착륙선과 사령선, 우주인 마이크로피규어 3개[59], 착륙선이 달 표면에 착륙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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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5/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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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달 탐사 50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안 믿는 사람들 …

벌써 50년이다. 1969년 7월 21일 미국항공우주국(NASA) 소속 우주인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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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ongascience.com

Date Published: 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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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5년 달 밟은 인간 없었다 – Sciencetimes – 사이언스타임즈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발사된 이래 불과 4년 동안 미국이 달에 보낸 아폴로 우주선은 9대나 된다. 그 중 6대가 달에 착륙했고, 12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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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ciencetimes.co.kr

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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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첫 착륙 주역 콜린스 별세…발자국 못 남긴 ‘잊힌 우주인'(종합 …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인류의 첫 달 착륙 위업을 이룬 미국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가 90세를 일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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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na.co.kr

Date Published: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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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 달 착륙 성공 – :: 티칭백과 ::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내디딘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한 … 달에 착륙한 미국 우주인(올드린) 미국 우주인 올드린이 달의 대지에 굳게 발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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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ic.kumsung.co.kr

Date Published: 7/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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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 50년 전 인류의 달 착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이다. … 우주인을 위해 개발됐던 내화성 섬유. 소방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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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bc.com

Date Published: 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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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달 착륙 우주인

  • Author: 리뷰엉이: Owl’s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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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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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폴로 11호(Apollo 11)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유인 우주선이다. 아폴로 계획의 다섯 번째 유인우주비행인 동시에 세 번째 유인 달 탐사이기도 했다.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었으며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탔다.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발을 딛은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당시 콜린스는 달 궤도를 돌고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탐사 성공으로, 존 F. 케네디가 주장했던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것’은 달성되었다.

“ 나는 이 나라가 196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킨 뒤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함을 믿었다. ” — 케네디, 1961년 연설

역사 [ 편집 ]

1969년 7월 16일 13시 32분 UTC에 플로리다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새턴 5호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NASA의 5번째 아폴로 프로그램 유인우주선 임무였다. 7월 20일 20시 17분 UTC에 달착륙선이 달의 표면에 착륙했다. 선장은 닐 암스트롱 중위, 조종사는 버즈 올드린이었다. 달에 착륙하고 6시간이 지나서 7월 21일 02시 56분 15초 UTC에 암스트롱이 달에 내렸다. 버즈 올드린은 20분 후에 내려왔다. 2시간 30분을 달에서 걸어다니면서 21.5 kg의 달 모래 등을 채집했다. 달 궤도를 돌고 있는 사령선에는 마이클 콜린스 (우주비행사)가 혼자 남아있었다. 달에 착륙하고 21.5 시간이 지나서 달착륙선이 이륙해 사령선과 도킹했다.

승무원 [ 편집 ]

콜린스는 원래 아폴로 8호 때 사령선 조종사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등 부상으로 인해 탈락하고 짐 러벨이 대신 임무를 맡았다. 또한 아폴로 11호 달 착륙선 조종사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령선 조종사는 우주 비행 경험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제미니 계획에서 우주비행을 한 경험이 있던 콜린스 비행사가 사령선 조종사로 일종의 ‘진급’을 하게 되었다.

비행 지휘자 [ 편집 ]

조직적 명명법 [ 편집 ]

달 착륙선은 미국의 국장이자 아폴로 11호의 기장 마스코트인 흰머리수리에서 착안, 이글(Eagle)로 이름지어졌다. 사령선의 이름은 아폴로 11호 승무원들이 자신들의 달 탐험을 미 대륙을 발견했던 콜롬버스의 이름을 따서 콜롬비아(Columbia)로 이름이 지어졌다. 미국 항공우주국 내부 문서에는 달 착륙선과 사령선을 각각 빙수(Snowcone)와 건초가리(Haystack)로 부를 계획이 잡혀 있었으나, 이들 이름은 언론에 계획이 공표되기 전에 조용히 바뀌었다.[1]

중요한 순간들 [ 편집 ]

발사와 달착륙 [ 편집 ]

관제센터의 담당관들

아폴로 11호의 발사 당일, 우주 기지 근처 고속도로와 바닷가에는 백만 명은 되는 인파가 몰렸으며 텔레비전으로 7억 명[3]에 이르는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사되었다.[4] 당시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이 광경을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폴로 11호를 탑재한 새턴 V 로켓은 1969년 7월 16일 협정시 13시 32분(지역시 9시 32분)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12분 후 기체는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5] 지구를 한 바퀴 반 돈 뒤, S-IVB 3단계 엔진은 TLI 점화(Trans Lunar Injection burn)와 함께 우주선을 밀어서 달로 가는 궤도로 진입시켰다. 30분 후 아폴로 사령선/서비스 모듈이 마지막으로 남은 새턴 V 로켓 기체에서 분리되었으며, 루나 모듈 어댑터 내에 있던 달착륙선과 합체했다.

1969년 7월 19일, 아폴로 11호는 달의 뒤편에서 기계선의 로켓 엔진을 점화시켜, 달 주회 궤도에 올랐다. 궤도를 13바퀴 돌았을 때, 승무원은 고요의 바다 사비누 D크레이터의 남서 20킬로의 상공에서 확실히 지금부터 그들이 착륙하려는 지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착륙 지점으로 선택된 것은, 무인 탐사기 레인저 8호·서베이어 5호에 의한 조사나 달 주회 위성으로부터의 사진 촬영에 의해서 비교적 평탄하고 착륙이나 선외 활동을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리 직후 사령선에서 촬영된 ‘이글’

1969년 7월 20일, 착륙선 이글은 사령선 콜럼비아에서 분리되었다. 이글은 기체를 천천히 회전시켰고, 사령선에 혼자 남은 콜린스는 기체가 손상을 입었는지를 확인했다.

엔진을 점화해 강하를 개시한 후 얼마가 지나고 나서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 상의 목표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 4분 정도 빠른 것을 알았다. 이것은 즉, 예정 착륙 지점을 수 마일 정도 지나쳐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 때, 착륙선의 항법 컴퓨터가 경보를 발령했다. 지상의 모의 실험 장치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훈련을 쌓아 온 비행사도, 이 경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텍사스주 휴스턴의 관제센터에 있던 컴퓨터 기사는, 항법 주임에게 이대로 강하를 계속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했고, 그것은 즉시 비행사들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그때 닐 암스트롱이 창 밖을 봤을 때, 거기에는 직경 100 m 정도의 크레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부에는 승용차 크기만한 바위가 많이 널려 있었고, 그곳에 착륙하면 착륙선이 넘어져 버리는 것은 분명했다. 닐 암스트롱은 조종을 반수동으로 전환했고(일반적으로는 전수동으로 전환했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옆에서는 올드린이 고도와 속도의 데이터를 읽어 내렸다. 1969년 7월 20일 20:17(UTC), 이글은 달 표면에 착륙했지만, 그때 연료는 10초 분이 남은 것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방금 전의 경보는, 컴퓨터가 오버플로우를 일으킨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착륙 때, 사령선과의 랑데부용의 레이다는 필요가 없어지지만, 만일 착륙을 중지해 긴급 탈출하는 사태에 대비해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그 때문에 컴퓨터에는, 고도 측정용 레이다로부터의 것과 랑데부용 레이다로부터의 것의 2종류의 데이터가 동시에 들어 와 버려, 연산 처리가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상의 시뮬레이션에서는 이러한 사태는 상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컴퓨터는 아니고 인간의 실수였지만, 숙련된 비행사들에 의해서 큰 문제로 진화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또 연료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표시되고 있었지만, 이것은 달의 중력이 지구의 6분의 1 밖에 없기 때문에, 탱크 내에서 연료가 예상 이상으로 교반되어 실제보다 낮게 표시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후의 미션에서는, 탱크 안에 연료의 동요를 억제하는 억류판이 설치되었다. 또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은 달 착륙 직후 연료가 얼어 관 속을 막아 우주비행사들이 안에 있을 때 폭발해 버릴 뻔했다고 한다.

달 표면으로부터 최초의 말을 한 사람은(기술적인 전문 용어였지만) 올드린이었다. 강하하고 있는 동안, 그는 쭉 조종을 담당하는 암스트롱의 옆에서 항법 데이터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착륙한 순간에 그가 말한 말은, “접촉등이 점등했다. OK, 엔진 스톱. ACA 해방”으로, 암스트롱이 “ACA 해방 이해”라고 확인해, 다시 올드린이 “모드 컨트롤 자동. 강하용 엔진 지령 모두 정지. 엔진 암, 오프. 413 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 암스트롱이, 유명한 다음의 말을 했던 것이다.

“ 휴스턴, 이쪽 고요의 기지. 이글은 착륙했다.

(Houston, Tranquility Base here. The Eagle has landed.) ”

암스트롱이 우주선의 명칭을 갑자기 이글로부터 ‘고요의 기지’로 변경했기 때문에, 관제 센터는 일순간 혼란스러웠다. 통신 담당관이 즉시 착륙을 확인해, 관계자들은 가장 곤란한 작업인 착륙 조작이 무사히 행해진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선외 활동 준비를 개시하기 직전, 돌연 올드린이 이렇게 말했다.

“ 이쪽은 달 착륙선 파일럿입니다. 이 기회를 빌려, 나는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누구도, 또 어디에 있어도, 당분간의 행동을 멈추고, 이 수 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심사숙고 해, 각각의 방법으로 감사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

그 후, 올드린은 혼자서 성찬식을 실시했다. 당시 NASA는, 아폴로 8호의 비행사들이 달을 주회하고 있을 때에 성서의 창세기를 낭독했던 것에 관계해, 무신론자인 마다린 마레이 오헤일로부터 “우주비행사는, 우주에 있는 동안은 종교적 활동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라고 고소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올드린은, 달에서 성찬식을 실시한다는 자신의 이 계획을 아내한테도 사전에 밝히지 않았고, 또 지구에 귀환하고 나서도 몇 년 동안이나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는 텍사스주 웹스타에 있는 교회의 신자로, 성찬 용구는 동교회의 딘 우드 러프 목사가 준비해 주었다. 이 사실은 올드린 자신의 저서 ‘달로부터의 귀환’ 중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후에 동 교회는, 이 때에 이용된 잔을 그로부터 받아, 매년 7월 20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달의 만찬의 날’로서 기념하게 되었다. [출처 필요]

월면 활동 [ 편집 ]

착륙선에 탑재된 슬로우 스캔 TV가 파악한, 사다리를 내려오는 닐 암스트롱 의 모습

비행사들은, 우선 최초로 60도의 시야가 있는 착륙선의 삼각형 창으로부터 밖의 모습을 관찰해 성조기와 과학 관측 기기를 설치하는 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선외 활동의 준비는 예정보다 2시간이나 불필요하게 더 걸려 버렸다. 존 영 비행사에 의하면, 착륙선의 해치는 개발 도중에 사이즈가 작게 변경되었지만, 우주복의 생명유지장치에는 아무 변경도 없었다. 그 때문에 암스트롱은 선외로 나오는 데 엄청난 고생을 해, 비행사의 심박수는 해치를 출입할 때에 최고치에 올랐다고 한다.

암스트롱이 발 밑을 확인하면서 구단의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는 동안, 마이크는 그의 숨결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리의 옆에 설치되어 있는 촬영기기의 D의 형태를 한 링을 당기면, 슬로우 스캔 TV의 카메라가 작동되어, 사다리를 나오는 암스트롱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그러나 이 영상은 TV 중계의 규격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방송에서는 화질이 뒤떨어지는 종래형의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이 표시되고 있었다. 신호는 미국의 골드 돌 기지가 수신하고 있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계 기지가 감도가 보다 선명했다. 몇 분 후, 중계 임무는 보다 감도가 양호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파카스 전파 망원경에 이양되었다.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달 표면으로부터의 사상 최초의 선외 활동을 파악한 영상은 전 세계에 전달되었다. 지구상에서는 이 순간, 적어도 6,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슬로우 스캔 TV로 촬영한 고화질의 영상은 녹화 테이프가 아직도 행방 불명 상태이다.

암스트롱은 착륙선의 다리 위에 내려서 달 표면 상태를 “밝고, 거의 가루와 같이 보인다.(fine and almost like a powder)”라고 보고한 후, 착륙으로부터 대략 6 시간 반 후의 1969년 7월 21일 02:56 UTC(미 동부 시간 오전 10시 56분), 달 표면에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었다.

“ I’m, ah… at the foot of the ladder. The LM footpads are only, ah… ah… depressed in the surface about, ah…. 1 or 2 inches, although the surface appears to be, ah… very, very fine grained, as you get close to it. It’s almost like a powder. (The) ground mass, ah… is very fine.

(지금 착륙선의 다리 위에 서 있다. 다리는 달 표면에 1 인치나 2 인치 정도 가라앉고 있지만, 달의 표면은 가까이서 보면 꽤…, 꽤 매끈하다. 거의 가루와 같이 보인다. 달표면은 분명히 보이고 있다.)

I’m going to step off the LM now.

(지금부터 착륙선으로부터 다리를 밟고 내려간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 — 동영상중의 암스트롱의 발언 내용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는 닐 암스트롱

암스트롱은 또, 중력이 지구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달 표면은 걸어 다니려면 아무 문제도 없고, 오히려 훈련보다 상당히 편하다라고 보고했다.

암스트롱이 촬영한 올드린. 헬멧에는 암스트롱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아폴로 11호의 비행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960년대가 가기 전까지 인간을 달표면에 도달시켜서”라는 최고 지령의 실현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술에의 도전이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후의 비행의 참고가 되도록 여러가지 각도로부터 착륙선의 사진을 촬영해, 그 후 홀쭉한 봉으로 달 표면 샘플을 모으고 가방에 채워 우퇴의 포켓에 밀어넣었다. 한층 더, 착륙선의 다리로부터 텔레비전 카메라를 꺼내 달표면을 파노라마 촬영한 후, 그것을 12 m 떨어진 장소에서 삼각대 위에 장치했다. 카메라의 케이블에는 감았을 때의 둥글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잡아늘이는 데에는 약간 고생을 했다.

착륙선의 옆에서 작업하는 암스트롱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내려간 지 15분 후, 올드린도 달표면에 내려가서, 달의 모습을 ‘장엄하고 황량한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양 다리로 하는 ‘캥거루 점프’등 여러가지 보행법을 시도하면, 등에 지고 있는 생명유지장치를 위해서 상체가 뒤로 젖혀지는 경향은 있지만, 밸런스를 취하려면 아무 문제도 없고, 익숙해지면 오히려 황새 걸음으로 걷는 편이 좋았다. 다만 이동할 때는 항상 6, 7보처를 예상할 필요가 있었다. 또 달 표면의 밝은 부분은 극히 미끄러지기 쉽고, 태양빛이 비치고 있는 곳으로부터 착륙선의 그림자에 들어갔을 때에는, 우주복 안의 온도에는 전혀 변화는 없었지만, 헬멧의 내부에는 명백한 온도차가 느껴졌다고 보고했다. 비행사들이 달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있는 동안, 갑자기 긴급 연락이 들어왔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의 것이었다. “일찍이 백악관의 전화 통화 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것”이라고 후에 닉슨 자신이 말하고 있는 이 전화 중에서, 그는 준비하고 있던 긴 스피치를 읽어 내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과의 연락 담당관을 맡고 있던 NASA의 프랭크 보먼은, “월면 착륙은 당신의 것이 아니고 케네디 대통령의 유산이다.”라고 하는 것은 물론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비행사들의 스케줄은 가득 차 있는 것을 설명해, 전화를 빨리 끝맺도록 설득했다.

달 표면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찍어진 올드린의 발자국

그 후 비행사들은, 지진계나 레이저 반사경등이 탑재된 과학 실험장치를 설치했다. 한층 더, 암스트롱이 사진 촬영을 위해서 착륙선으로부터 120 m 떨어진 이스트 크레이터까지 로프를 늘리고 있는 동안, 올드린은 삽이나 신장식의 가위를 사용해 토양 샘플이나 암석을 채집했다. 이전에 관제 센터는, 암스트롱의 대사율이 약간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조금 페이스를 떨어뜨리도록 전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내에 임무를 완수하려고 너무 급하게 일을 해내고 있었다. 비행사들의 호흡이나 심박수는 예상되고 있던 값보다는 낮았지만, 관제 센터는 신중을 기해 예정을 15분 연장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렇지만 달표면 활동의 시간이 예상외로 길어졌기 때문에, 샘플 채집 활동은 예정되어 있던 34분간의 도중에 끝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달표면으로부터의 이륙과 지구로의 귀환 [ 편집 ]

예정되어 있던 달표면 활동을 모두 수행한 후, 우선 올드린이 먼저 착륙선에 들어갔다. 채집한 암석이나 필름 등을 담은 상자는 중량이 22 kg 에 이르러, ‘달표면 컨베이어’라고 불리는 장치로 끌었지만, 선내에 넣을 때에는 약간 고생을 했다. 그리고 암스트롱은 사다리의 3단에까지 단번에 점프 해 뛰어 올라타, 자신도 선내에 들어갔다. 우주복의 생명유지장치, 달표면 구두, 카메라 등의 필요 없어진 기재를 던져 버린 후 해치를 닫아 선내를 가압해, 두 비행사는 간신히 달 표면에서의 첫 수면에 들어갔다.

올드린은 선내에서 작업하고 있을 때, 잘못해 상승용 엔진을 기동시키는 브레이커의 스위치를 부수어 버렸다. 다행히도 볼펜의 앞으로 스위치를 넣을 수 있었지만, 만약 엔진을 점화할 수 없으면, 그들은 영원히 달 표면에 남겨지게 될 수도 있었다.

7시간의 수면 뒤, 두 명은 휴스턴으로부터의 자명종에 의해서 일어나 이륙의 준비를 시작하도록 지시받았다. 2시간 반 후인 17:54(UTC) 에, 달표면으로부터 21.55 kg의 샘플을 태운 ‘이글’은 상승단의 엔진을 점화해, 이륙을 개시했다. 사령선 ‘콜럼비아’와의 도킹에 성공하고, 궤도상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콜린스 비행사와 무사히 재회를 완수했다.

착륙선 ‘이글’의 다리에 붙여진, 비행을 기념하는 플레이트. 현재에도 달 표면에 남아 있다

2시간 반의 달 표면 활동으로, 비행사들은 지진계나 지구와 달과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한 레이저 반사판 등, 여러가지 관측 장치를 달 표면에 설치했다. 과학 기기 외에는, 성조기나 비행을 기념한 플레이트 등도 남겨 놓고 왔다. 기념 플레이트는 착륙선의 정면의 다리에 붙여지고 있었고, 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 세 명의 비행사와 닉슨의 서명, 그리고 “서기 1969년 7월, 행성 지구로부터 온 인간이 달표면에서 다리를 밟아 내린 것을 여기에 기념한다. 우리는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왔다.”라는 성명이 쓰여 있었다. 또 그들이 달표면에 남겨 온 상자 안에는, 평화의 심볼인 돈의 월계관과 비행사 세 명이 화재 사고로 희생된 아폴로 1호의 휘장, 그리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등의 역대 대통령이나, 세계 73개국 정상들의 친선의 메시지를 녹음한 실리콘제의 레코드 등이 있었다. 이 레코드 안에서는, 미국 의회의 대표자나 NASA의 설립에 노력한 상하 양원의 네 개의 위원회의 멤버, 역대 NASA 국장의 이름 등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1989년에 출판된 ‘달부터 돌아온 남자’라는 책 중에서, 올드린은 이 상자안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나 옷의 안감 미르 코마료프를 기념한 메달도 들어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 NASA의 우주비행사 훈련 담당관 디크 슬레이톤은 ‘달을 노린다’라는 책 중에서, 암스트롱이 다이아몬드가 들어간 특제의 비행사의 계급장을 달표면에 두고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륙 때, 상승단의 창으로부터 달표면을 촬영한 영상은, 착륙선으로부터 8 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울 수 있었던 성조기가, 로켓의 배기가스로 격렬히 흔들리는 장면을 파악하고 있었다. 올드린은,

“ 상승을 시작했을 때, 나는 컴퓨터의 조작에 집중했고, 닐은 고도계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성조기가 날려 버려지는 것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

라고 보고했다. 이 때문에 이후의 비행에서는, 성조기는 착륙선으로부터 30 m 이상 멀어진 장소에 세우게 되었다.

사령선과의 랑데부와 도킹에 성공한 후, 이글은 1969년 7월 21일 23:41 UTC에, 달주회 궤도상에 투기되었다. 아폴로 12호의 비행 직전에는, 이글은 아직도 궤도상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NASA의 보고로는 그 후 점차 궤도가 낮아져, 달 표면의 어디엔가 추락했을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1969년 7월 23일, 귀환 전의 마지막 밤에, 세 명의 비행사는 텔레비전 인터뷰에 대답했다.

“ 우리를 쏘아 올린 새턴 V 로켓은 극히 복잡한 기계이지만, 모든 부품은 완벽하게 작동해 주었다. 우리는 이 기계가 아무 문제도 없게 일해 준다는 신뢰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 비행은, 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우리 세 명은, 몇천, 몇만의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고마워요! ” — 콜린스

“ 인간 세 명을 달에 보낸다는 위업은, 정부나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나 혹은 그 이상의 것에 의해서 완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미지에 대한 호기심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며칠 전의 그 달표면에서의 사건을 생각해 낼 때, 찬송가의 일절이 생각난다.「하늘을 생각할 때, “순리대로인 달이나 별의 운행은, 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항상 마음에 세워 두어야 할 일인 것은 아닐까. ” — 올드린

“ 이 비행이 실현된 것은, 가장 먼저 역사에 있어 무수한 실적을 남긴 과학사의 위대한 선인들, 다음에 이것을 완수하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낸 미국 국민, 그리고 그것을 이행한 정부와 의회, 한층 더 우주선이나 새턴 로켓, 사령선 콜럼비아, 착륙선 이글, 선외 활동 장치, 달표면에 있어서의 작은 우주선이라고도 말해야 할 우주복 등을 만들어낸 정부 기관이나 기업 등 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우리는, 이 우주선을 설계하고, 시험하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 모든 미국인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바치고 싶다. 그리고 또 이 방송문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의 축복을. 이상, 아폴로 11호로부터 ” — 암스트롱

1969년 7월 24일, ‘콜럼비아’는 웨이크 섬으로부터 2,660 km 동쪽, 존스튼 환초로부터 380 km 남쪽, 항공모함 호넷(USS Hornet)으로부터 불과 24 km 떨어진 서경 169도 9분, 북위 13도 19분의 태평양 상에 무사히 귀환했다. 비행사들은 착수로부터 1시간 후에 헬리콥터에 의해서 회수되어 즉시 달표면으로부터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가져오지 않았는지를 검사하기 위해서 특별한 병동에 격리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항공모함을 방문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될 우려가 있어 격리 병동에 수용되는 비행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닉슨 대통령

1969년 8월 13일, 3주간에 걸친 검사에 의해 이상이 없는 것이 확인되어, 세 명은 병동에서 해방되어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성대한 퍼레이드로 환영받았다. 수 주일 후에는 멕시코시티를 방문해 거기서도 환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퍼레이드가 있던 날 밤에는, 의회 의원, 44주의 주지사, 미국 최고재판소 장관, 83개국의 대사들에 의한 환영의 만찬회가 열렸고, 닉슨 대통령 및 스피로 T. 애그뉴 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그러나 이 만찬회는, 이 후 45일간에 걸쳐서 계속되는 ‘위대한 비약(Giant Leap) 투어’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로부터 25개국의 방문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각국의 원수와의 면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는 사상 최초의 월면 착륙을 기념해 우표나 메달을 발행했다. 또 베트남의 몇 개의 포로 수용소에서는, 아폴로 11호의 비행으로부터 수개월 후에 그러한 우표를 붙인 편지가 도착되어 미국이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던 것을 알게 되었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제27회 세계 SF대회에서는, “일찍이 (SF소설 중에서) 행해진 월면 착륙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것”으로서, SF잡지의 파이오니어, 휴고 게룬즈박크(Hugo Gernsback)에 연관된 특별 휴고상이 주어졌다.

1969년 9월 16일에는, 세 명은 연방 합동 의회의 개최전에서 스피치를 행해, 달표면에 가져 간 2개의 성조기 중 한 장을 상원에, 한 장을 하원에 건네주었다.

아폴로 11호의 사령선은, 현재는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의 중앙 전시 홀에,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벨 X-1, 노스아메리칸 X-15, 머큐리 우주선 프렌드십 7호, 제미니 4호 등, 미국의 항공사를 개척해 온 기체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격리 병동, 구명조끼, 천구의 등은 버지니아주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지난 45년 달 밟은 인간 없었다 – Sciencetimes

지난 16일 아폴로 17호의 선장이었던 유진 서난이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진 서난은 달 위의 마지막 인간이었으며, 달 위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인간이기도 했다.

그와 동료들이 아폴로 17호에서 촬영한 ‘블루 마블(The Blue Marble)’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1972년 12월 14일, 유진 서난이 달을 떠난 이후 45년이 다 되도록 아직 달을 밟은 인간은 없다. 지구 궤도를 벗어난 유인 우주선도 없었다.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발사된 이래 불과 4년 동안 미국이 달에 보낸 아폴로 우주선은 9대나 된다. 그 중 6대가 달에 착륙했고, 12명이 달의 땅을 밟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달을 밟지 못했다. 왜 미국은 유인 달 탐사를 멈췄을까? 그리고 다른 나라는 왜 아직까지 달에 가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은 아폴로 계획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항공우주국 NASA에서 진행한 유인 달 탐사 계획이었다. 1957년 10월 4일, 구 소련은 세계 최초로 스푸트니크 1호 위성을 발사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58년 7월 미국항공우주국 NASA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우주 개발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인 머큐리 계획이었다. 머큐리 계획은 지구 궤도를 도는 1인승 우주선을 이용하여 인간이 우주 공간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를 확인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61년 4월 12일, 구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최초의 우주인이 되는 순간 미국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미국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주 경쟁에서 구소련에 우위를 차지할 방안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기 전인 5월 5일 엘런 셰퍼드가 프리덤7호를 타고 15분간의 탄도 비행을 통해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고, 이에 고무된 케네디 대통령은 5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미국이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는 연설을 하게 된다. 이것이 아폴로 계획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1964년부터 1966년까지 2인승 우주선을 이용한 제미니 계획으로 우주 유영과 우주선 도킹 기술을 실험하였고, 1967년부터 3인승 우주선을 이용한 본격적인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였다. 아폴로 우주선은 사령선인 달 궤도선(CSM)과 달 착륙선(LM)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폴로 1호의 참사

아폴로 계획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1967년 1월 27일, 지구 궤도를 선회할 목적으로 발사대에서 시험 작업을 하던 아폴로 1호에 화재가 발생하여 우주인 3명이 질식사하는 비극이 있었다.

우주 비행사가 우주선 내부에서 사망한 것은 아폴로 1호가 최초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사는 우주선의 설계를 변경하였고, 우주 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우주를 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아폴로 계획에는 아폴로 2호와 3호가 없다. 아폴로 1호가 폭발하기 전 두 번의 무인 비행이 있었는데 이들이 비공식적으로 아폴로 1호와 2호였다. 그러나 폭발 사고 이후 사망한 우주인들의 이루지 못한 꿈을 애도하는 뜻에서 공식적인 아폴로 1호의 명칭을 유인 비행에 붙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9개월 후, 아폴로 1호의 화재 사고가 났던 케이프 케너베럴 공군기지의 34번 발사대에서 최초의 유인 아폴로 우주선인 아폴로 7호가 발사된다. 그 날 이후 34번 발사대는 폐쇄되었고, 아폴로 1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로 남겨졌다.

올해로 아폴로 1호의 참사가 발생한 지 50주년이 된다. 존슨 우주 센터 등 많은 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1968년 12월 24일, 드디어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도착했다. 아폴로 8호는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다른 천체의 궤도를 돈 최초의 유인 우주선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아폴로 8호가 촬영한 지구돋이 사진은 인류에게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다.

아폴로 8호에 탑승했던 짐 로벨은 “내가 아는 모든 것들 – 나의 삶, 사랑하는 사람들, 해군 -, 전 세계가 내 엄지 손가락 뒤에 있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1년 반 후 아폴로 13호의 선장이 되어 다시 달로 갔지만 산소 탱크 폭발로 끝내 달에 내리지는 못했다. (지구돋이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태형의 생활천문학 21, 크리스마스 이브, 달에서 본 지구를 참조하기 바람)

1969년 7월 20일. 드디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닐 암스트롱 선장과 버즈 올드린이 달을 밟으며 아폴로 계획을 완성시켰다.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적인 달 착륙 이후 나사는 아폴로 20호까지 9번의 추가적인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세 번의 발사가 취소되었고, 아폴로 17호를 마지막으로 아폴로 계획은 마무리 되었다.

아폴로 계획은 유인 달 탐사의 목적을 달성한 것 이외에도 로켓과 우주공학, 전자 통신,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 진보를 촉진시켰다.

아폴로 계획 이후

아폴로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72년 1월 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나사의 다음 목표를 “ 재사용이 가능한 저렴한 우주왕복선을 개발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써 인간의 달 착륙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아폴로 계획도 마무리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었다. 1960년대 말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은 전체 예산의 5% 정도를 우주 개발에 사용하였다. 아폴로 계획에 들어간 총 예산은 1,000억불에서 1,700억불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예산 문제 이외에도 단순한 달 탐사를 넘어서 달을 이용하기 위한 기술 진보의 시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구 소련 역시 미국의 달 착륙 이후 달에서 관심을 잃었고, 미국과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우주정거장 개발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구 소련은 미르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 외의 다른 나라들은 미국이나 구소련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달 탐사를 감행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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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첫 착륙 주역 콜린스 별세…발자국 못 남긴 ‘잊힌 우주인'(종합2보)

아폴로 11호 사령선 조종으로 달 못 밟아…뒤늦게 ‘영웅’ 재조명 홀로 사령선 남아 궤도 비행하며 달 뒷면 최초 관측…’아담의 고독’ 아폴로 11호 3인방 중 2명 사망, 버즈 올드린만 남아…바이든 애도 성명

아폴로 11호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AFP=연합뉴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인류의 첫 달 착륙 위업을 이룬 미국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가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콜린스 가족은 28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이같이 밝혔다고 A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유족에 따르면 콜린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에서 암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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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은 성명에서 “그는 항상 삶의 도전 과제에 품위와 겸손으로 맞섰고, 마지막 도전(암 투병)에도 같은 방식으로 맞섰다”며 “그의 날카로운 위트와 조용한 목적의식, 현명한 시각을 함께 기억하는데 애정을 갖고 동참해달라”고 추모했다.

콜린스는 1969년 7월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에 탑승해 인류의 과학기술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아폴로 11호에는 당시 선장 닐 암스트롱과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 사령선 조종사 콜린스가 탑승했다. 세 사람은 모두 동갑내기였다.

NASA 우주 비행사 시절 마이클 콜린스 [NASA/로이터=연합뉴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착륙선을 타고 월면에 첫발을 내디뎠고, 콜린스는 사령선 조종사로서 달 궤도를 선회하며 이들의 달 착륙 임무를 도왔다.

로이터통신은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콜린스는 21시간 넘게 사령선에 홀로 머물렀다”고 전했다.

콜린스는 역사적인 아폴로 11호 임무에 동참했지만, 달 표면에 내린 암스트롱과 올드린보다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에겐 ‘잊힌 우주비행사’, ‘기억하지 않는 세 번째 우주인’이라는 수식어가 달리곤 했다.

동료들이 달에 내려 성조기를 꽂는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관측한 사람이었다.

궤도 비행을 하던 사령선이 달의 뒷면으로 들어갔을 때 지구와의 교신은 끊겼고, 콜린스는 48분간 절대 고독의 상태에서 달의 뒷면을 지켜봤다.

콜린스는 “이곳을 아는 존재는 오직 신과 나 뿐이다. 온전히 홀로 있는 이 순간이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다”는 메모를 남겼고, 아폴로 11호 임무 일지는 “아담 이래로 누구도 콜린스가 겪었던 고독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됐다.

그는 2019년 달 착륙 50주년을 맞아 국가적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의 업적은 화려한 재조명을 받았다.

달에 남긴 인류의 발자국 [아폴로 프로젝트 아카이브(플리커),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은 닐 암스트롱과 함께 월면에 안착한 아폴로 11호 우주인 버즈 올드린의 발자국.

콜린스는 유명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존 J. 퍼싱 장군의 부관을 지낸 제임스 로턴 콜린스 육군 소장이고, 삼촌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조지프 로턴 콜린스 장군이다.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나왔고, 공군 파일럿을 거쳐 1963년부터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로 복무했다.

달 탐사를 위한 아폴로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제미니 10호 조종을 맡아 도킹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우주 비행은 역사적인 아폴로 11호 탑승이었다.

콜린스는 아폴로 11호 임무를 마친 뒤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와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장을 지냈다. 다수의 우주 관련 서적도 출간했다.

생전 아폴로 11호 임무에서 가장 강력했던 기억으로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봤던 것을 꼽았다.

그는 지구가 “부서지기 쉬운 것 같았다”면서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지구에서) 10만 마일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행성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우주인 3인방 [NASA/로이터=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이어 “그 모든 중요한 국경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시끄러운 논쟁도 조용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서 보고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며 “(우주) 탐사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내고 “많은 사람이 콜린스에 대해 홀로 달 궤도를 선회한 우주비행사로 기억한다”며 “그는 (생전에) 동등한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위대한 목표를 위한 협력의 중요성을 미국에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스티브 주르시크 NASA 국장 직무대행은 콜린스에 대해 “진정한 선구자”라며 “우리가 더 먼 곳을 향해 모험할 때 그의 정신은 우리와 함께 갈 것”이라고 밝혔다.

암스트롱에 이어 콜린스도 눈을 감으면서 아폴로 11호 3인방 중 생존해있는 사람은 올드린 1명뿐이다.

암스트롱은 2012년 8월 심장 수술 이후 합병증으로 숨졌다.

올드린은 트위터에 콜린스를 추모하는 글을 올려 “당신이 어디에 있었든, 어디에 있든 당신은 우리를 미래로 안내할 것”이라고 썼다.

아폴로 11호 발사 당시 장면 [NASA 홈페이지 캡처·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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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 달 착륙 성공

아폴로 11호는 미국의 유인 우주선으로,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었고,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발을 딛은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암스트롱의 말처럼 ‘인류의 위대한 첫걸음’이고, 탐구의 지평을 우주 전체로 확대한 우주 과학의 위대한 도약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비록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류로서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내디딘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한 첫 말이다.

1950년대 냉전이 심화된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 우주 기술 개발을 통해 자국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체제의 우수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1960년대 초까지 우주 탐사 경쟁은 소련이 우위였다.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여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 보냈다. 1961년에는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여 10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하는 우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1960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의회 연설에서 10년 안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무사히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은 제미니 계획(1964~1966)을 통해 기본 기술을 확보하고 뒤이어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아폴로 계획(1966~1972)을 추진하였다. 아폴로 계획은 3명의 우주비행사가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아폴로는 고대 그리스 신인 아폴론에서 따온 이름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말은 8년 뒤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현실이 되었다.

1969년 7월 16일. 사령선, 기계선, 달 착륙선으로 이루어진 아폴로 11호를 탑재한 새턴-V 로켓이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당시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이 광경을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폴로 우주선에는 선장 닐 암스트롱과 함께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탑승해 있었다. 아폴로 11호는 발사 3일 만에 달의 뒤편에 도달한 후, 기계선의 로켓 엔진을 점화해 달 궤도에 진입하였다. 궤도에서 달을 13바퀴 돈 후에야 착륙 지점인 고요의 바다 20 km 상공에 도달하였다.

△달에 착륙한 미국 우주인(올드린) 미국 우주인 올드린이 달의 대지에 굳게 발을 딛고 서 있다. 먼저 내린

암스트롱 선장의 모습이 우주복 헬멧에 비쳐 보이고 있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 선장 닐 암스트롱이 착륙선 이글에서 내려 바위로 뒤덮인 달의 ‘고요한 바다’표면에 인류 최초로 발을 내디뎠다. 함께 이글에 타고 있던 올드린도 곧 내려가 처음 본 달의 모습을 ‘장엄하고 황량한 풍경’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진의 주인공은 올드린이 차지하였는데, 암스트롱이 카메라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이후 약 2시간 반 동안 달의 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지진계와 레이저 반사경 등 여러 과학 장비를 설치하고 22 kg의 달 암석과 토양 샘플도 채집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인류의 달 착륙을 기념하는 여러 기념품과 우주복의 생명 유지 장치, 카메라 등 필요 없어진 기재들을 남겨두었다. 달을 떠나 모선인 콜롬비아호와 도킹하고 25일 지구로 귀환하여 하와이 남서쪽 1,500 km에 위치한 태평양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아폴로 11호 귀환 후 미국은 아폴로 12호를 다시 달에 보내 1967년 발사한 서베이 3호의 카메라 회수에 성공하였다. 11호 이후 발사된, 영화로도 잘 알려진 아폴로 13호는 달로 항해하던 중 폭발 사고로 임무를 포기하고 간신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후 미국은 1972년 발사한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의 달 착륙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소련의 우주 기술을 추월해 우주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아폴로 우주선과 소유즈 우주선을 도킹시키며 우주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태양계 탐사 및 우주 정거장 개발에 나섰다.

1969년 아폴로 11호 발사는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우리나라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관심이 대단하였다. 달 착륙을 생중계하였던 조경철 박사는 아폴로 박사로 불리며 유명해져 과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달 착륙 해에는 많은 학생들이 천문학과로 몰렸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아폴로 눈병’도 이 때 눈병이 유행해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 직접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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