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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속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서라는 뜻입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의무의 전부로만 여기면 겉모습을 잡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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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대로 일부만 준행한 사울왕처럼 하지 말고,히스기야왕처럼 유월절을 지켜서, 말라기의 기록처럼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서
세상으로 향했던 탕자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온전한 회개를 이루었다는 증표, 천국 복음이 있는 ‘하나님의 교회’]천상에서 지은 죄와 더불어 이 땅에서 알게 모르게 지은 많은 죄까지도
모든 죄의 원인 제공자인 사단에게 되돌려주는 날이 바로 대속죄일입니다.
안상홍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새 언약의 절기,
즉 천국 복음을 통해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말라기 3장 7~8절]“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역대하 30장 5~6절]“온 이스라엘에 반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의교회#설교#김주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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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 당당뉴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다가 심판받지 말고 돌이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천국의 삶을 살도록 하라는 뜻으로 전파된 말씀 …
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2/20/2022
View: 6904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나라가 임하시오며
1 크리스천이 죽어서 가는 곳을 성경에서는 ‘하늘’이라고 말한다. 천국(天國)은 ‘하늘 나라’이므로 ‘하늘’과는 다른 곳이다. 죽은 신자들은 하늘에 있다가 …
Source: hananimnara.com
Date Published: 12/30/2022
View: 2614
천국이 가까이 왔다 – 크리스천비전
예수님도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다.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은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묵시 …
Source: www.christianvision.net
Date Published: 5/3/2022
View: 9955
<가까이 왔다>라는 의미는? – Daum 블로그
세례 요한이 본 가까이 옴 먼저 예수님 앞서 외쳤던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세례 요한이..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4/2022
View: 5886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마태복음 4:12~25 / 마태복음 강해 7
그리고 그 의미를 성경자체가 풀어주고 있습니다. … 기독교는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 바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Source: www.nurim.or.kr
Date Published: 1/3/2022
View: 7792
Top 14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의미 Top 43 Best Answers
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예수가 실제 쓴 아람어의 뜻 [백성호의 예수뎐] | 중앙일보. Article author: www.joongang.co.kr …
Source: 1111.com.vn
Date Published: 2/14/2021
View: 6879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7월호) – 오늘의 양식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고 했고, 예수님도 첫 선교 여행 중 “회개하라 … 회개란 마음을 바꾸고 돌아선다는 뜻이다.
Source: www.odbkorea.org
Date Published: 7/20/2021
View: 9618
게시판 > 설교내용 >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천국에 갈려면 회개해야 한다’ 간단 명로한 말씀으로 그 말에 심오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회개는 어떤 회개인가? 예수님 당시 옛 유대나라 사회 …
Source: eunsanchurch.com
Date Published: 7/19/2021
View: 9554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래서 요한이 자신은 예수님의 신을 들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구원을 …
Source: changmoolee.tistory.com
Date Published: 3/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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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의미
- Author: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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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0.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oCC8sbbyc
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예수가 실제 쓴 아람어의 뜻 [백성호의 예수뎐]
[백성호의 예수뎐]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갔다. 유대 광야에 위치한 여리고에는 시험 산이 있다. 그곳에서 예수는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다고 한다. 시험 산 중턱의 가파른 절벽에는 1500년 전에 세운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수도원 안에는 예수가 당시 머물렀다는 동굴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악마의 유혹을 받을 때 예수가 걸터앉았다는 조그만 바위도 있었다. 예수 사후에도 수도자들은 광야로 갔다. 예수가 만났던 악마를 그들도 만나기 위해서였다.
(32)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
여리고에서 버스를 타고 사해(死海)로 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북쪽의 갈릴리 호수에서 강물이 흘러와 이스라엘 남쪽에서 고인 게 해수면보다 416m나 낮은 사해다. 사해 일대에서 세례 요한이 활동했다. 그는 메뚜기와 야생 꿀을 주로 먹고살았다. 요즘으로 치면 ‘생식과 자연식’이다.
복장도 특이했다. 낙타 털로 된 옷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는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부 신학자들은 세례 요한이 당시 광야에 있었던 수도 공동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보며, 조상을 따라서 유목민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다. 요르단 강물이 유입되지만 출구는 없다. 강물이 들어오기만 할 뿐, 나가지는 못 한다. 그만큼의 수량이 증발할 뿐이다. 염도가 높아 물고기도 살 수 없다. 성지를 순례하던 이들은 사해에 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소금 호수여서 물속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뜬다.
어쩌면 ‘물 위를 걷는 예수’라는 초월적인 이야기가 사해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예수가 몸소 물 위를 걸었을까. 어찌 됐든 몸이 물에 둥둥 뜨는 사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비의 호수였으리라.
예수도 나사렛을 떠나 세례 요한을 찾아왔고 실제로 그에게 세례도 받았다. 예수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고 한다.(마태복음 3장 16절)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쓴다. 나는 성경에서 “하늘이 열렸다”라는 구절에 눈길이 갔다. 그 대목을 안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 하늘이 열려야 성령이 내려온다. 하늘이 열리지 않는다면 성령이 내려올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이 열리는 걸까. 왜 우리의 하늘은 열리지 않는 걸까.
세례 요한은 당시에 유명 인사였다. 그의 세례는 소문이 났고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형식적인 체험 차원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고 하니 자기 속마음은 바꾸지 않은 채 세례만 받으려는 이들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뱀의 자식들!”이라고 쏘아붙였다. 과격한 발언이었다. 요한은 왜 그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했을까.
미국의 유진 피터슨 목사는 저서 『메시지』에서 요한의 말을 이렇게 풀었다. “너희의 뱀가죽에 물을 좀 묻힌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바꿔야 할 것은 너희 겉가죽이 아니라 너희 삶이다!”(마태복음 3장 7~10절) 요한의 발언은 예수 당시뿐 아니라 요즘 시대까지 겨냥한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뱀의 자식들’이다. ‘천국행 티켓’을 얻으려고 교회에 가서 몸에 물만 묻히는 세례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뱀의 허물을 벗으려면 말이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해주었던 요르단 강가로 갔다. 강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그가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으려는 이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는 ‘쪼갬’을 상징한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인간은 세상을 쪼개기 시작했다. 선과 악으로 쪼개고, 나와 너로 쪼개고, 이편과 저편으로 쪼개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쪼개고, 보수와 진보로 쪼갠다. 그렇게 세상을 쪼개는 눈을 가진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뱀의 자식들!”이라고 윽박질렀다.
선악과(善惡果)는 원래 한 덩어리의 열매였다. 거기에는 쪼갬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비로소 선과(善果)와 악과(惡果)로 쪼개졌다. 그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둘로 나누기 시작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선과 악, 자랑스러운 것과 부끄러운 것. 세상 모두를 그렇게 둘로 쪼갰다.
그때 하느님이 아담을 찾았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성서에는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쪼갬의 결과이다. 그걸 안고선 ‘신의 속성’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담은 하느님 속으로, ‘신의 속성’ 속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똑같이 말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장 17절) 요한이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섰다. 궁금했다. “회개하여라”의 뜻이 뭘까. . 그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게 회개일까. 당시 예수의 직설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어째서 회개와 함께 하느님 나라가 온다고 했을까.
예수 당시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다. 도올 김용옥은 그것을 ‘회심(回心)’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의 방향을 튼다.’ 반면 예수가 실제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다. ‘메타노이아’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타브(tab)’다. ‘회복하다, 돌아오다’란 뜻이다. 그럼 무엇을 회복하는 것일까. 예수는 대체 어디로 돌아오라고 한 걸까.
수년 전이었다. 네팔에서 나이 지긋한 힌두교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이마에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제3의 눈”이라고 답했다. 내가 “제3의 눈이 뭡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그는 “마음의 눈”이라고 답했다. 그랬다. 그들이 이마를 붉게 물들이며 그토록 간절히 구하는 건 ‘마음의 눈’이었다. 그게 누구의 마음일까. 지지고 볶는 ‘나의 마음’일까. 아니었다. 그건 ‘신의 마음’이었다. 그들이 구하는 ‘제3의 눈’은 다름 아닌 ‘신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예수의 눈’은 어떤 눈인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게 예수의 눈이다. 우리의 눈은 다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늘 불행해 보인다. 안타깝고 없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채우려고만 한다.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가지고 싶은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 그렇게 마음이 ‘가짐’으로 가득한 부자가 될 때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게 우리의 눈이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가 외친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결국 “회개하여라”는 ‘눈을 돌리라’는 뜻이다. 관점을 돌리라는 말이다. ‘나의 눈’에서 ‘신의 눈’으로 바꾸라는 의미다. 왜일까. 거기에 자유와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최후는 참담했다. 당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고 추종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을 ‘반체제 인사’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다. 요한은 유대의 지배자를 향해서도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유대의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다. 그는 이복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했다.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수차례 지적했다. 헤롯은 결국 요한을 체포했다. 그러나 요한이 두려워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다.
마침 헤롯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첫 남편의 딸)가 춤을 추자 다들 그 모습에 감탄했다. 헤롯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마가복음 6장 22~23절)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달려간 살로메가 돌아와 말했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가복음 6장 25절) 헤롯 왕은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형이 집행됐고, 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목이 살로메에게 전달됐다.
화가들은 살로메를 종종 ‘팜므 파탈의 상징’으로 쓴다. 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희곡 『살로메』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변주했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에게서 키스를 거절당하자 그의 머리를 요구했다. 결국 살로메는 목이 잘린 요한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에게 키스를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도 〈유디트Ⅱ(살로메)〉라는 작품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다루었다.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살로메의 창백한 얼굴 밑으로 독기와 욕망이 고여 있다. 화려한 팔찌에 감긴 살로메의 손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틀어쥐고 있다.
요르단 강은 지금도 흐른다. 예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2000년 세월을 관통하며 지금도 흐른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에게도 위협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마가복음 6장 14절)라고도 했다. 헤롯 왕도 이 소문을 들었으니 예수에게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예수는 조용히 유대 광야를 떠났다. 그리고 고향인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버스도 광야를 떠났다.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 그리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는 여전히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이 울렸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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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홈 > 신학 > 성서이야기 ‘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박경은 | [email protected] 입력 : 2013년 02월 19일 (화) 16:58:28
최종편집 : 2013년 02월 19일 (화) 19:23:52 [조회수 : 5629] ‘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마4:17↔3:2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도 있는데 ‘천국 간다’는 말만 쓰는 이유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과 예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왜 ‘천국 간다’는 말만 사용하는 것일까요? 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요? 혹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면 시한부 종말론자가 되거나 아니면 ‘너 죽을 때 다 됐어’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까요?
물론 ‘천국 간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성서의 여러 곳에 있습니다(마5:20; 7:21; 18:3,8,9; 19:23,24; 21:31; 25:46; 막9:43,45,47; 10:15,23,24,25; 눅16:22; 18:17,24; 행14:22; 딤후4:18; 히2:10; 4:3,11; 벧전5:10 비교참조). 그런데 이 구절들은 한결같이 ‘죽음 이후’를 전제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도록 인상지어집니다.
이런 인상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국 간다’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천국 간다’는 말이 죽음 이후의 특별한 사후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와 연관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현세에서의 행위에 근거한 심판경고 문맥 속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간다’에 대한 바울의 입장
바울은 ‘죽는 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살전4:13~15). 그렇다면 바울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죽으면 가게 되리라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 육체와 분리되어 육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구와 전혀 다른 별도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재림주께서 오시면 죽었던 사람들이 마치 잠자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주를 만난다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일까요?
누가복음에 분명히 나타나는 ‘사후의 세계’
바울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우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믿는 사람은 ‘천국 간다’는 개념에 아주 잘 들어맞는 누가복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너는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은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23:43). 여기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람이 죽으면 곧 그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육체는 썩게 되고 영혼은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판가름 나게 된다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누가복음이 전하는 다른 내용에 의해 재차 확인됩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영혼은 그 육체와 분리되어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된다는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그림 같은 말씀과 만나게 됩니다(16:22~23).
누가복음의 헬라 철학적 개념과 바울의 히브리식 개념의 차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이런 개념은 인간존재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헬라철학의 이분법적인 이원론에 영향을 받은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헬라철학의 이분법적 관념론에 근거한 인간론에 바탕을 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철학은 인간존재를 비물질적인 정신영역으로서의 영혼과 물질적인 영역으로서의 육체로 구성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인간론에 영향을 받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된 이중구조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관념이 바울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영육이 분리되는 이중구조의 인간론 개념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헬라철학적 인간론이 아니라 히브리식 인간론 개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식 인간론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거나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존재는 영육을 분리할 수 있는 이중구조로 된 두 차원의 결합이 아니라 이 둘을 결코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완전통합체로서의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생각이 수정되어야 할까?
그렇다면 바울과 누가복음 중에 어느 한 쪽이 틀렸거나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태복음이 동시에 말씀하고 있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표현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왜 성서의 표현은 이렇게 일관되지 못하게 이렇게도 표현되고 저렇게도 표현되어 있는 것일까요? 어느 표현이 맞는 겁니까? 믿는 사람이 죽을 경우 그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고 세상을 살면서 함께 했던 육체는 매장되거나 화장되어 없어지지만 부활의 때에는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 진정한 성서의 내용이 아닐까요? 그렇게 볼 경우 바울의 가르침은 뭡니까?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사후세계 관련 본문은 ‘강도의 예수에 대한 고백’과 ‘부자의 사회적 무책임’이라는 주제 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이원론적 사고에 의한 영혼의 육체이탈, 혹은 육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사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그림이 위치하는 문맥은 “예수를 고백하는 강도의 믿음”과 나사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던 “부자의 사회적 무책임”에 대한 형벌을 말하는 곳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 분명하게도 누가복음은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사후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하거나 분리되어 사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은 강도의 고백을 통해 “믿음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으며 지옥에 간 부자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행위가 없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가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위한 문학적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복음에 사후세계를 말씀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문자로 나타난 겉표지적인 표현인 그것만 갖고 사후세계에 대해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인 자기주장을 되풀이하거나 타성화된 관습적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믿는 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
‘천국 간다’는 말은 사실 ‘죽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국 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믿는 자가 죽었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신앙적인 소망을 담아 생전에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었으니 죽은 후에는 죽음의 세력에서 건짐 받아 죄와 죽음과 질병의 세력에서 자유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원”의 개념을 이 땅에 있는 죄와 고통과 질병과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 영원한 복락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장소이동 개념으로 이해하는 관습에서 추출된 언어표현입니다. 따라서 ‘천국 간다’는 말은 장소이동이나 공간이동을 생각하게 되는 그림과 연관되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동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심판개념의 표현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세례요한과 예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 쪽에서 움직이는 장소이동이나 공간이동의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행하시는 ‘심판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회개하라’는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모습에서 방향을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을 마주대하고 사는 모습으로 그림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은 ‘돌이켜 하나님과 마주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럴 때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맞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죽으면 가는 나라, 또 다른 공간? 지구 말고 다른 장소?’
따라서 세례요한에 의하면 ‘죽으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살아서 맞게 되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에 의하면 ‘믿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나라, 하늘나라’가 아니라 ‘돌이켜 하나님을 마주하면 죽음과 상관없이 맞는 나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이 말하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천국 간다’의 개념과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믿음의 사람들이 죽을 때 이 세상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간 ‘공간이동’이나 ‘장소이동’의 그림인데 그것은 죽은 이후의 삶을 소망하는 헬라철학의 이분법적인 사고인 이원론에서 유발된 상상적 표현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파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를 “믿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나라, 하늘나라”라는 장소이동이나 공간이동의 개념(눅16:22; 23:43; 고후12:4; 계2:7 참조)으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천체 물리학적인 해석을 가하는 ‘비신학적 견해’가 난무하게 될 겁니다. ‘가까이 왔다’로 표현되었으니 지구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 다스리는 별도의 세계가 천체 망원경으로 관측될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요.
하나님은 인간세계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니까 지구에서 몇 십만 광년 떨어진 곳쯤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또 다른 공간이나 장소로서의 새 나라가 이르렀어도 ‘가까이 왔다’라고 표현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주장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겠습니다. 성서본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세례요한 이후 오늘날까지 세례요한이 전파한 이 표현에 대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천체 물리학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비신학적인 해석’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신학적 의미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선포한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이해하려면 ‘장소이동’ 개념도 아니고 ‘공간이동’ 개념도 아닌, ‘삶의 방향전환’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다가 심판받지 말고 돌이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천국의 삶을 살도록 하라는 뜻으로 전파된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회개와 천국맞이
세례요한과 예수의 선포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천국은 없다’는 교훈입니다. 이것은 죽은 후를 기약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중에 맞아 누려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여 누려야 하는 현재적인 나라입니다.
따라서 죽어서 다른 장소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을 ‘천국 간다’고 말하기보다는 살아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도록 인생 방향을 바꾸는 것을 ‘천국 가는 것’이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께서 선포한 ‘가까이 와 있는 천국’은 살아 있는 자들의 현재의 삶을 향해 외친 회개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선포한 천국은 ‘죽으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아서 누리는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서 누리는 천국은 심판받지 않도록 방향이 전환된 삶일 때 경험되는 나라입니다. 세례요한에 의하면 살아서 누리는 천국의 삶은 알곡의 삶입니다. 사람이 알곡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서 얻게 되는 삶이 아니라 회개하고 방향을 바꾼 자가 예수와 함께 살 때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12절 참조).
‘천국 간다’는 말의 성서적 이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믿는 사람들이 죽으면 가게 되는 별도의 공간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천국이 있네 없네, 지옥이 있네 없네로 갑론을박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주 공간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특정 장소로서의 천국개념이나 죽으면 간다는 식의 영혼분리, 혹은 육체이탈에 의한 공간이동을 상상하면서 ‘죽으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대한 믿음이 있네 없네 하며 열을 올리고 상대방에게 천국을 부인하네 어쩌네 하며 성질부리며 나대는 것은 결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간다’는 말의 뜻은 오히려 세상에서 살 때 ‘하나님께 등 돌리고 살다가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산 후 지상에서의 수를 다하고 잠자는 것처럼 된 상태(바울적 관념)’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서적 내용에 충실한 ‘천국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성도의 부활은 재림주의 강림과 함께 자다가 일어나 맞이하는 것과 같이 될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살전4:13~18 참조).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
한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과 연관되어 ‘천국 간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연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에 대한 이해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지리적인 거리나 시간적인 거리를 통해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있을 것”이라는 임박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완성될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통해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는 개념은 “천국은 왔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왔다’는 말은 “곧 완성될 것”이라는 뜻이므로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완성을 향해 ‘현재진행 중’임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을 살필 때 우리는 죽은 후에 있을 영혼의 공간이동이나 장소이동에 관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죽은 후에 맞게 될 천국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누려야 할 참다운 기쁨으로서의 하나님의 지배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간다’와 성도의 죽음의 개념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의 용어가 바뀌어 그 표현을 통해 나타내는 천국의 개념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천국이란 믿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나라? 육체에서 분리된, 혹은 육체에서 이탈한 영혼이 이동하는 특별한 저 우주의 어떤 장소? 지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어떤 공간?….. 그러므로 ‘천국 간다’는 말은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지구 이외의 또 다른 공간? 장소?
No…. 그런 개념이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경험하는 하나님의 통치, 성도들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하나님의 지배, 믿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삶, 바로 그런 복을 누리는 현재적인 지상에서의 삶, 그러나 그런 삶이 완성되지 않은 나라, 예수 재림 때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복된 삶, 그 후에 세상에서의 수를 다한 뒤 재림의 때까지 편하게, 아주 편하게 마치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죄와 질병과 고난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 를 말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기술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천국 간다’는 말의 뜻을 죽은 후에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하여 어느 공간이나 특정 장소로 이동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고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예수와 함께 사는 현재적인 삶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신학적이며 성서적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표현의 신학적이며 성서적인 개념도 ‘천국 간다’는 개념과 함께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하여야 하는 천국은 죽은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한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경험하다가 주의 재림과 함께 참여하게 될 완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간다’는 말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함께 긴요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현재적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성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넉넉하게 누려지는 특별한 복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박경은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200 의견나누기 ( 6 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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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20 01:53:38 천국에 대한 이해를
짧은 글로써 이렇게
명확하고도 간결하게
정리해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리플달기 ▼ 0 0 글쎄요… (211.202.216.34) 2013-02-19 20:57:10 게다가, 누가는 가장 가까운 바울의 제자가 아닌가요? 누가와 바울이 서로 다른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리플달기 ▼ 1 1 참빛 (24.141.4.52) 2013-02-20 13:15:33 어느 신학자는
누가와 바울의 관계를 협력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의 관계로 설명하려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의 제자 누가’라는 공식이 만든
편견에 따라 우리는 그들이 서로 동지였을 것이라고
속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을 사도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누가의 노력을
사도행전을 통해 목격할 수 있고요.
누가는 바울의 지나친 교리적 가르침에 대한
자기나름대로의 반박을 가하기 위하여
누가복음을 저술하였을 가능성도
높다고 보는 것이지요.
바울과 누가는 서로가 겉으로는 동역자로 비쳐질 수 있지만
속으로는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지 않았었나 합니다. 리플달기 ▼ 0 1 Picky (76.23.169.116) 2013-02-20 12:08:11 누가가 실존인물인가요? 누가복음을 정말로 누가라는 사람이 썼나요? 그렇다면 그 누가가 사도행전으 누가인가요?
누가가 바울의 제자라구요? 예수의 제자와 바울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서로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을 보시고도 모르세요?
그들도 그냥 우리 같은 인간이예요. 무슨 천사와 인간 중간 정도쯤으로 착각하시면 안되죠.
로마서 보세요. 바울이 왜 자기가 가보지도 않은 로마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신학을 과시하려는 거죠? 쉽게 말하면 기득권을 베드로쪽에서 가지고 오려는 거예요. 그래야 스페인까지 자신이 의도한 선교여행의 물질적 후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리플달기 ▼ 0 0 글쎄요… (211.202.216.34) 2013-02-19 20:55:49 그럼… 낙원은 뭐지요? 예수님은 강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3:43,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 12:4, 개정)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은… 역시,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시나요? 리플달기 ▼ 1 1 참빛 (24.141.4.52) 2013-02-20 13:30:37 낙원에 대한 해석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낙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루기 힘든 부분이고요.
낙원이 공간적인 개념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낙원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말그대로 하늘 어디엔가 위치한 어떤 우주인의 나라로 볼 수 없고
그름타고 오신다는 말도 물리적인 구름을 손오공처럼 타고 예수가 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문자적으로 보고 직역만 하시려 한다면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라는 말을
‘예수는 어린양이고 하나님은 어미양 즉 신이 아닌 동물’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인데요.
이는 말도되지 않는것 아닙니까.
성경에는 심볼이 많습니다.
낙원은 영적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고달픈 현세의 삶과 대조되는 완벽한 세계를 말함이고요.
죽어서 가는 곳 그런 곳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바른것 같습니다.
실존하는 공간적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 2 0 신문사소개ㆍ기사제보ㆍ광고문의ㆍ불편신고ㆍ개인정보취급방침ㆍ청소년보호정책ㆍ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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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왔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세례 요한이 본 가까이 옴
먼저 예수님 앞서 외쳤던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세례 요한이 외쳤던 천국의 가까이 옴은 곧 심판의 날입니다.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천국에 합당치 않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엄한 심판에 처하게 됨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왔다라는 의미는 <심판 날에 매우 근접했단 뜻>입니다.
가까이 옴의 또 다른 의미는 이미 그 나라가 구약 시대에 시작되었음을 드러내 준 것입니다.
드러났던 그 나라가 이제 끝을 향한 매우 근접하게 도달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끝은 마치 나무의 뿌리에 도끼가 놓인 것 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눅3:9)
2. 예수님이 본 가까이 옴
예수님도 청중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가까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표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나라가 임하는 시기에 대하여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유대인 청중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나타남의 시기에 대하여 무척 조심스럽고,
청중들이 오해하는 것을 바로 잡아 주려고 애쓴 흔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눅19:11)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죄인들까지도 복종하는 실질적인 통치로 임하는 시기에 대해 <멀리> 있음을 보여줍니다.
*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눅19:12)
예수님과 유대 청중들이 공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적인 나타남은 주의 재림의 때 입니다.
* 이와 같이 이런 일이(종말의 징조들)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눅21:31)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루어진 시기는 어느 때로 볼까요?
주의 재림이 일어난 직후입니다.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
3. 구약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이 옴은 구약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구약 백성들에게 그 나라의 끝이 다가옴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먼저 유대 청중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그 나라의 백성됨에 초청하는 메시지를 거부하면
곧 바로 그 나라를 빼앗김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누려왔던 하나님 나라의 특권들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 받으리라(마21:43)
이 메시지는 옛 언약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오순절 이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이방인들에게도
좋은 교훈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먼저 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자세하게 전했고, 또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했습니다.
* (유대인들을 향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28:23)
* (이방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한 중간 심판,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는 하나님의 나라,
재림으로 인한 실질적인 통치까지 우리가 바로 세워야 할 하나님의 통치 개념의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뼈대를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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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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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예수가 실제 쓴 아람어의 뜻 [백성호의 예수뎐] [백성호의 예수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갔다. 유대 광야에 위치한 여리고에는 시험 산이 있다. 그곳에서 예수는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다고 한다. 시험 산 중턱의 가파른 절벽에는 1500년 전에 세운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수도원 안에는 예수가 당시 머물렀다는 동굴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악마의 유혹을 받을 때 예수가 걸터앉았다는 조그만 바위도 있었다. 예수 사후에도 수도자들은 광야로 갔다. 예수가 만났던 악마를 그들도 만나기 위해서였다. (32)회개하면 왜 천국이 가까이 오나 여리고에서 버스를 타고 사해(死海)로 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북쪽의 갈릴리 호수에서 강물이 흘러와 이스라엘 남쪽에서 고인 게 해수면보다 416m나 낮은 사해다. 사해 일대에서 세례 요한이 활동했다. 그는 메뚜기와 야생 꿀을 주로 먹고살았다. 요즘으로 치면 ‘생식과 자연식’이다. 복장도 특이했다. 낙타 털로 된 옷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는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부 신학자들은 세례 요한이 당시 광야에 있었던 수도 공동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보며, 조상을 따라서 유목민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다. 요르단 강물이 유입되지만 출구는 없다. 강물이 들어오기만 할 뿐, 나가지는 못 한다. 그만큼의 수량이 증발할 뿐이다. 염도가 높아 물고기도 살 수 없다. 성지를 순례하던 이들은 사해에 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소금 호수여서 물속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뜬다. 어쩌면 ‘물 위를 걷는 예수’라는 초월적인 이야기가 사해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예수가 몸소 물 위를 걸었을까. 어찌 됐든 몸이 물에 둥둥 뜨는 사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비의 호수였으리라. 예수도 나사렛을 떠나 세례 요한을 찾아왔고 실제로 그에게 세례도 받았다. 예수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고 한다.(마태복음 3장 16절)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쓴다. 나는 성경에서 “하늘이 열렸다”라는 구절에 눈길이 갔다. 그 대목을 안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 하늘이 열려야 성령이 내려온다. 하늘이 열리지 않는다면 성령이 내려올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이 열리는 걸까. 왜 우리의 하늘은 열리지 않는 걸까. 세례 요한은 당시에 유명 인사였다. 그의 세례는 소문이 났고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형식적인 체험 차원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고 하니 자기 속마음은 바꾸지 않은 채 세례만 받으려는 이들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뱀의 자식들!”이라고 쏘아붙였다. 과격한 발언이었다. 요한은 왜 그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했을까. 미국의 유진 피터슨 목사는 저서 『메시지』에서 요한의 말을 이렇게 풀었다. “너희의 뱀가죽에 물을 좀 묻힌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바꿔야 할 것은 너희 겉가죽이 아니라 너희 삶이다!”(마태복음 3장 7~10절) 요한의 발언은 예수 당시뿐 아니라 요즘 시대까지 겨냥한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뱀의 자식들’이다. ‘천국행 티켓’을 얻으려고 교회에 가서 몸에 물만 묻히는 세례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뱀의 허물을 벗으려면 말이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해주었던 요르단 강가로 갔다. 강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그가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으려는 이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는 ‘쪼갬’을 상징한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인간은 세상을 쪼개기 시작했다. 선과 악으로 쪼개고, 나와 너로 쪼개고, 이편과 저편으로 쪼개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쪼개고, 보수와 진보로 쪼갠다. 그렇게 세상을 쪼개는 눈을 가진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뱀의 자식들!”이라고 윽박질렀다. 선악과(善惡果)는 원래 한 덩어리의 열매였다. 거기에는 쪼갬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비로소 선과(善果)와 악과(惡果)로 쪼개졌다. 그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둘로 나누기 시작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선과 악, 자랑스러운 것과 부끄러운 것. 세상 모두를 그렇게 둘로 쪼갰다. 그때 하느님이 아담을 찾았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성서에는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쪼갬의 결과이다. 그걸 안고선 ‘신의 속성’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담은 하느님 속으로, ‘신의 속성’ 속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똑같이 말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4장 17절) 요한이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섰다. 궁금했다. “회개하여라”의 뜻이 뭘까. . 그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게 회개일까. 당시 예수의 직설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어째서 회개와 함께 하느님 나라가 온다고 했을까. 예수 당시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다. 도올 김용옥은 그것을 ‘회심(回心)’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의 방향을 튼다.’ 반면 예수가 실제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다. ‘메타노이아’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타브(tab)’다. ‘회복하다, 돌아오다’란 뜻이다. 그럼 무엇을 회복하는 것일까. 예수는 대체 어디로 돌아오라고 한 걸까. 수년 전이었다. 네팔에서 나이 지긋한 힌두교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이마에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제3의 눈”이라고 답했다. 내가 “제3의 눈이 뭡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그는 “마음의 눈”이라고 답했다. 그랬다. 그들이 이마를 붉게 물들이며 그토록 간절히 구하는 건 ‘마음의 눈’이었다. 그게 누구의 마음일까. 지지고 볶는 ‘나의 마음’일까. 아니었다. 그건 ‘신의 마음’이었다. 그들이 구하는 ‘제3의 눈’은 다름 아닌 ‘신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예수의 눈’은 어떤 눈인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게 예수의 눈이다. 우리의 눈은 다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늘 불행해 보인다. 안타깝고 없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채우려고만 한다.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가지고 싶은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 그렇게 마음이 ‘가짐’으로 가득한 부자가 될 때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게 우리의 눈이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가 외친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결국 “회개하여라”는 ‘눈을 돌리라’는 뜻이다. 관점을 돌리라는 말이다. ‘나의 눈’에서 ‘신의 눈’으로 바꾸라는 의미다. 왜일까. 거기에 자유와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최후는 참담했다. 당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고 추종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을 ‘반체제 인사’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다. 요한은 유대의 지배자를 향해서도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유대의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다. 그는 이복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했다.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수차례 지적했다. 헤롯은 결국 요한을 체포했다. 그러나 요한이 두려워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다. 마침 헤롯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첫 남편의 딸)가 춤을 추자 다들 그 모습에 감탄했다. 헤롯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마가복음 6장 22~23절)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달려간 살로메가 돌아와 말했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가복음 6장 25절) 헤롯 왕은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형이 집행됐고, 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목이 살로메에게 전달됐다. 화가들은 살로메를 종종 ‘팜므 파탈의 상징’으로 쓴다. 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희곡 『살로메』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변주했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에게서 키스를 거절당하자 그의 머리를 요구했다. 결국 살로메는 목이 잘린 요한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에게 키스를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도 〈유디트Ⅱ(살로메)〉라는 작품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다루었다.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살로메의 창백한 얼굴 밑으로 독기와 욕망이 고여 있다. 화려한 팔찌에 감긴 살로메의 손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틀어쥐고 있다. 요르단 강은 지금도 흐른다. 예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2000년 세월을 관통하며 지금도 흐른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에게도 위협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마가복음 6장 14절)라고도 했다. 헤롯 왕도 이 소문을 들었으니 예수에게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예수는 조용히 유대 광야를 떠났다. 그리고 고향인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버스도 광야를 떠났다.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 그리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는 여전히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이 울렸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뉴스 칼럼 교계 영성 설교 신학 여성 문화 환경 생활 사회 통일 농촌 선교 특집 알림 사진 동영상 자유게시판 나도기자 기사작성하기 나도기자작성법 후원하기 CMS후원하기 일반후원하기 결산보고 추천사이트 설교 황광민 목사의 설교노트 웨슬리 표준 설교 김명섭 목사의 말씀학교 당당TV 영상뉴스 생중계 세미나 강좌 설교 인터뷰 영화관 영상큐티 CCM 독자제보 탐방 성지순례 이스라엘 기사검색 처음으로 로그인 회원가입 트위터 페이스북 RSS 홈 > 신학 > 성서이야기 ‘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박경은 | [email protected] 입력 : 2013년 02월 19일 (화) 16:58:28 최종편집 : 2013년 02월 19일 (화) 19:23:52 [조회수 : 5610] ‘천국 간다’고? 그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뭐야? 마4:17↔3:2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도 있는데 ‘천국 간다’는 말만 쓰는 이유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과 예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왜 ‘천국 간다’는 말만 사용하는 것일까요? 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요? 혹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면 시한부 종말론자가 되거나 아니면 ‘너 죽을 때 다 됐어’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까요? 물론 ‘천국 간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성서의 여러 곳에 있습니다(마5:20; 7:21; 18:3,8,9; 19:23,24; 21:31; 25:46; 막9:43,45,47; 10:15,23,24,25; 눅16:22; 18:17,24; 행14:22; 딤후4:18; 히2:10; 4:3,11; 벧전5:10 비교참조). 그런데 이 구절들은 한결같이 ‘죽음 이후’를 전제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도록 인상지어집니다. 이런 인상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국 간다’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천국 간다’는 말이 죽음 이후의 특별한 사후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와 연관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현세에서의 행위에 근거한 심판경고 문맥 속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간다’에 대한 바울의 입장 바울은 ‘죽는 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살전4:13~15). 그렇다면 바울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죽으면 가게 되리라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 육체와 분리되어 육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구와 전혀 다른 별도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재림주께서 오시면 죽었던 사람들이 마치 잠자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주를 만난다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일까요? 누가복음에 분명히 나타나는 ‘사후의 세계’ 바울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우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믿는 사람은 ‘천국 간다’는 개념에 아주 잘 들어맞는 누가복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너는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은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23:43). 여기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람이 죽으면 곧 그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육체는 썩게 되고 영혼은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판가름 나게 된다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누가복음이 전하는 다른 내용에 의해 재차 확인됩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영혼은 그 육체와 분리되어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된다는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그림 같은 말씀과 만나게 됩니다(16:22~23). 누가복음의 헬라 철학적 개념과 바울의 히브리식 개념의 차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이런 개념은 인간존재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헬라철학의 이분법적인 이원론에 영향을 받은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헬라철학의 이분법적 관념론에 근거한 인간론에 바탕을 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철학은 인간존재를 비물질적인 정신영역으로서의 영혼과 물질적인 영역으로서의 육체로 구성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인간론에 영향을 받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된 이중구조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관념이 바울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영육이 분리되는 이중구조의 인간론 개념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헬라철학적 인간론이 아니라 히브리식 인간론 개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식 인간론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거나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존재는 영육을 분리할 수 있는 이중구조로 된 두 차원의 결합이 아니라 이 둘을 결코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완전통합체로서의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생각이 수정되어야 할까? 그렇다면 바울과 누가복음 중에 어느 한 쪽이 틀렸거나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태복음이 동시에 말씀하고 있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표현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왜 성서의 표현은 이렇게 일관되지 못하게 이렇게도 표현되고 저렇게도 표현되어 있는 것일까요? 어느 표현이 맞는 겁니까? 믿는 사람이 죽을 경우 그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고 세상을 살면서 함께 했던 육체는 매장되거나 화장되어 없어지지만 부활의 때에는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 진정한 성서의 내용이 아닐까요? 그렇게 볼 경우 바울의 가르침은 뭡니까?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사후세계 관련 본문은 ‘강도의 예수에 대한 고백’과 ‘부자의 사회적 무책임’이라는 주제 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이원론적 사고에 의한 영혼의 육체이탈, 혹은 육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사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그림이 위치하는 문맥은 “예수를 고백하는 강도의 믿음”과 나사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던 “부자의 사회적 무책임”에 대한 형벌을 말하는 곳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 분명하게도 누가복음은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사후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하거나 분리되어 사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은 강도의 고백을 통해 “믿음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으며 지옥에 간 부자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행위가 없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가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위한 문학적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복음에 사후세계를 말씀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문자로 나타난 겉표지적인 표현인 그것만 갖고 사후세계에 대해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인 자기주장을 되풀이하거나 타성화된 관습적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믿는 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 ‘천국 간다’는 말은 사실 ‘죽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국 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믿는 자가 죽었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신앙적인 소망을 담아 생전에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었으니 죽은 후에는 죽음의 세력에서 건짐 받아 죄와 죽음과 질병의 세력에서 자유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원”의 개념을 이 땅에 있는 죄와 고통과 질병과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 영원한 복락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장소이동 개념으로 이해하는 관습에서 추출된 언어표현입니다. 따라서 ‘천국 간다’는 말은 장소이동이나 공간이동을 생각하게 되는 그림과 연관되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동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심판개념의 표현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세례요한과 예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 쪽에서 움직이는 장소이동이나 공간이동의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행하시는 ‘심판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회개하라’는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모습에서 방향을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을 마주대하고 사는 모습으로 그림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은 ‘돌이켜 하나님과 마주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럴 때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맞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죽으면 가는 나라, 또 다른 공간? 지구 말고 다른 장소?’ 따라서 세례요한에 의하면 ‘죽으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살아서 맞게 되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에 의하면 ‘믿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나라, 하늘나라’가 아니라 ‘돌이켜 하나님을 마주하면 죽음과 상관없이 맞는 나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이 말하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천국 간다’의 개념과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믿음의 사람들이 죽을 때 이 세상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간 ‘공간이동’이나 ‘장소이동’의 그림인데 그것은 죽은 이후의 삶을 소망하는 헬라철학의 이분법적인 사고인 이원론에서 유발된 상상적 표현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파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를 “믿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나라, 하늘나라”라는 장소이동이나 공간이동의 개념(눅16:22; 23:43; 고후12:4; 계2:7 참조)으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천체 물리학적인 해석을 가하는 ‘비신학적 견해’가 난무하게 될 겁니다. ‘가까이 왔다’로 표현되었으니 지구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 다스리는 별도의 세계가 천체 망원경으로 관측될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요. 하나님은 인간세계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니까 지구에서 몇 십만 광년 떨어진 곳쯤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또 다른 공간이나 장소로서의 새 나라가 이르렀어도 ‘가까이 왔다’라고 표현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주장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겠습니다. 성서본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세례요한 이후 오늘날까지 세례요한이 전파한 이 표현에 대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천체 물리학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비신학적인 해석’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신학적 의미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선포한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이해하려면 ‘장소이동’ 개념도 아니고 ‘공간이동’ 개념도 아닌, ‘삶의 방향전환’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다가 심판받지 말고 돌이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천국의 삶을 살도록 하라는 뜻으로 전파된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회개와 천국맞이 세례요한과 예수의 선포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천국은 없다’는 교훈입니다. 이것은 죽은 후를 기약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중에 맞아 누려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여 누려야 하는 현재적인 나라입니다. 따라서 죽어서 다른 장소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을 ‘천국 간다’고 말하기보다는 살아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도록 인생 방향을 바꾸는 것을 ‘천국 가는 것’이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께서 선포한 ‘가까이 와 있는 천국’은 살아 있는 자들의 현재의 삶을 향해 외친 회개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선포한 천국은 ‘죽으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아서 누리는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서 누리는 천국은 심판받지 않도록 방향이 전환된 삶일 때 경험되는 나라입니다. 세례요한에 의하면 살아서 누리는 천국의 삶은 알곡의 삶입니다. 사람이 알곡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서 얻게 되는 삶이 아니라 회개하고 방향을 바꾼 자가 예수와 함께 살 때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12절 참조). ‘천국 간다’는 말의 성서적 이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믿는 사람들이 죽으면 가게 되는 별도의 공간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천국이 있네 없네, 지옥이 있네 없네로 갑론을박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주 공간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특정 장소로서의 천국개념이나 죽으면 간다는 식의 영혼분리, 혹은 육체이탈에 의한 공간이동을 상상하면서 ‘죽으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대한 믿음이 있네 없네 하며 열을 올리고 상대방에게 천국을 부인하네 어쩌네 하며 성질부리며 나대는 것은 결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간다’는 말의 뜻은 오히려 세상에서 살 때 ‘하나님께 등 돌리고 살다가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산 후 지상에서의 수를 다하고 잠자는 것처럼 된 상태(바울적 관념)’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서적 내용에 충실한 ‘천국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성도의 부활은 재림주의 강림과 함께 자다가 일어나 맞이하는 것과 같이 될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살전4:13~18 참조).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 한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과 연관되어 ‘천국 간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연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에 대한 이해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지리적인 거리나 시간적인 거리를 통해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있을 것”이라는 임박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완성될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통해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는 개념은 “천국은 왔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왔다’는 말은 “곧 완성될 것”이라는 뜻이므로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완성을 향해 ‘현재진행 중’임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뜻을 살필 때 우리는 죽은 후에 있을 영혼의 공간이동이나 장소이동에 관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죽은 후에 맞게 될 천국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누려야 할 참다운 기쁨으로서의 하나님의 지배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간다’와 성도의 죽음의 개념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의 용어가 바뀌어 그 표현을 통해 나타내는 천국의 개념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천국이란 믿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나라? 육체에서 분리된, 혹은 육체에서 이탈한 영혼이 이동하는 특별한 저 우주의 어떤 장소? 지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어떤 공간?….. 그러므로 ‘천국 간다’는 말은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지구 이외의 또 다른 공간? 장소? No…. 그런 개념이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경험하는 하나님의 통치, 성도들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하나님의 지배, 믿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삶, 바로 그런 복을 누리는 현재적인 지상에서의 삶, 그러나 그런 삶이 완성되지 않은 나라, 예수 재림 때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복된 삶, 그 후에 세상에서의 수를 다한 뒤 재림의 때까지 편하게, 아주 편하게 마치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죄와 질병과 고난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 를 말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기술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천국 간다’는 말의 뜻을 죽은 후에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하여 어느 공간이나 특정 장소로 이동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고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예수와 함께 사는 현재적인 삶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신학적이며 성서적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표현의 신학적이며 성서적인 개념도 ‘천국 간다’는 개념과 함께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하여야 하는 천국은 죽은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한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경험하다가 주의 재림과 함께 참여하게 될 완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간다’는 말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함께 긴요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현재적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성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넉넉하게 누려지는 특별한 복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박경은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197 의견나누기 ( 6 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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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43,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 12:4, 개정)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은… 역시,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시나요? 리플달기 ▼ 1 1 참빛 (24.141.4.52) 2013-02-20 13:30:37 낙원에 대한 해석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낙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루기 힘든 부분이고요. 낙원이 공간적인 개념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낙원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말그대로 하늘 어디엔가 위치한 어떤 우주인의 나라로 볼 수 없고 그름타고 오신다는 말도 물리적인 구름을 손오공처럼 타고 예수가 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문자적으로 보고 직역만 하시려 한다면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라는 말을 ‘예수는 어린양이고 하나님은 어미양 즉 신이 아닌 동물’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인데요. 이는 말도되지 않는것 아닙니까. 성경에는 심볼이 많습니다. 낙원은 영적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고달픈 현세의 삶과 대조되는 완벽한 세계를 말함이고요. 죽어서 가는 곳 그런 곳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바른것 같습니다. 실존하는 공간적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 2 0 신문사소개ㆍ기사제보ㆍ광고문의ㆍ불편신고ㆍ개인정보취급방침ㆍ청소년보호정책ㆍ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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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가 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세례 요한이 본 가까이 옴 먼저 예수님 앞서 외쳤던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회개하라, 이 왔느니라(마3:2) 세례 요한이 외쳤던 천국의 가까이 옴은 곧 심판의 날입니다.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천국에 합당치 않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엄한 심판에 처하게 됨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왔다라는 의미는 입니다. 가까이 옴의 또 다른 의미는 이미 그 나라가 구약 시대에 시작되었음을 드러내 준 것입니다. 드러났던 그 나라가 이제 끝을 향한 매우 근접하게 도달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끝은 마치 나무의 뿌리에 도끼가 놓인 것 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눅3:9) 2. 예수님이 본 가까이 옴 예수님도 청중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가까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왔느니라(마4:17)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표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나라가 임하는 시기에 대하여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유대인 청중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나타남의 시기에 대하여 무척 조심스럽고, 청중들이 오해하는 것을 바로 잡아 주려고 애쓴 흔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눅19:11)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죄인들까지도 복종하는 실질적인 통치로 임하는 시기에 대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눅19:12) 예수님과 유대 청중들이 공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적인 나타남은 주의 재림의 때 입니다. * 이와 같이 이런 일이(종말의 징조들)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을 알라(눅21:31)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루어진 시기는 어느 때로 볼까요? 주의 재림이 일어난 직후입니다.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 3. 구약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이 옴은 구약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구약 백성들에게 그 나라의 끝이 다가옴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먼저 유대 청중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그 나라의 백성됨에 초청하는 메시지를 거부하면 곧 바로 그 나라를 빼앗김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누려왔던 하나님 나라의 특권들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 받으리라(마21:43) 이 메시지는 옛 언약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오순절 이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이방인들에게도 좋은 교훈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먼저 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자세하게 전했고, 또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했습니다. * (유대인들을 향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28:23) * (이방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한 중간 심판,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는 하나님의 나라, 재림으로 인한 실질적인 통치까지 우리가 바로 세워야 할 하나님의 통치 개념의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뼈대를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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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7월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7월호)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설교가 똑같은 짧은 말씀이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고 했고, 예수님도 첫 선교 여행 중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회개하라”(막 6:12)라고 했고,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하리라”(눅 13:5)라는 예수님의 경고도 있었다.
회개란 마음을 바꾸고 돌아선다는 뜻이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로서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 감정, 태도, 언어, 행동, 습관들이 발견되면 바로 돌아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는 말씀처럼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서 자신과 주위에 고통이 시작되면 속히 깨닫고 돌아서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생명이 살아난다.
예를 들어 내게 나쁜 말버릇이 있음을 스스로 느끼거나 지적을 받으면 바로 돌아서서 좋은 말을 쓰는 습관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잘못에서 돌아서면 거기가 천국이 된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회개로서 죽음과 지옥으로 가던 발걸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돌이켜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계속 거부하고 무시하면 영원히 죽는다. 예수님은 죽음과 지옥으로 가던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 가셨다. 예수께로 돌아서는 것이 큰 회개이다. 이 돌아섬은 한 번이면 족하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영적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둘째는 작은 회개들이다. 일상생활에서 저지르는 작은 실수들에서 늘 돌아서야 한다. 작은 잘못들을 그냥 두면 결국 죽음에 이르는 파멸이 따라온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작은 잘못일지라도 즉시 회개해야 한다.
나쁜 태도, 습관적 반항, 무시하는 말과 행동, 미움과 질투 등에서 돌아서서 계속 가면 하늘나라가 있다. 우리에게 “돌이켜야” 할 것이 있으면 속히 돌아서야 한다. 하루라도 더 오래 두면 무너짐이 심해진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길이 시작되고 죄의식에서 벗어나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 거기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사랑이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발행인 김상복 목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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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3강 / 이창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 / 마태복음 3:1-12
요절 /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아직 바깥바람은 쌀쌀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봄은 오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벌써 목련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합니다.
이제 몇 주가 지나면 벚꽃이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릴 것입니다.
그러나 올해만큼 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해가 있었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좀처럼 밖에 나갈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벚꽃 축제로 유명한 진해 군항제도 57년 만에 처음으로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한 봄을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땅 가운데 천국이 이미 왔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천국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을 경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꽁꽁 얼어붙은 우리 마음 가운데 따스한 봄날과도 같은 천국이 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혜성처럼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을 향해서 전파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요?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요한이 이런 메시지를 전파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 근거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분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사40:3).
그런데 그 말씀대로 요한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요한의 이 모습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우선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엘리야도 털 옷에 가죽띠를 띠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또 한 목자님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떠오른다고 하셨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이야말로 도시를 떠난 자연인의 주식으로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요한의 메시지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나한테 회개하라고! 너무 부담스러워. 됐거든요.”
“세례 요한? 광야에서 엘리야 코스프레나 하고 희한한 것이나 먹는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런 식의 반응이 주로 나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5,6)”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세례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각자 자기들의 죄를 다 자복했습니다.
한 사람이 눈물과 콧물을 다 쏟으며 진실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도 용기를 내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왜 세례를 베풀었을까요?
당시에 세례는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유대인의 회당 예배에 참석하려 할 때 이방인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파격적으로 이 세례를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에게 시행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당신 유대인들도 이방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전혀 동의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7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당시 종교계의 두 거물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요한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는 그들에게 회개하는 시늉은 있었지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적당히 회개하는 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율법 박사이고 제사장인데 ‘내가 천국 못 가면 누가 가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브라함의 후손일지라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도끼에 찍혀서 땔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엄청난 팩트 폭력을 행사한 셈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가장 중요한 팩트 한 가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아예 클래스가 다른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신은 예수님의 신을 들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구원을 말하고 불은 심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계십니다.
키는 바람을 이용하여 곡식의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키를 들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십니다(12).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보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사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반면 교회에서는 빈번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면 회개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려운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잘못된 길을 가던 사람이 이를 깨닫고 바른 길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 요한은 왜 회개하라고 목소리 높여 외쳤을까요?
참된 회개는 무엇일까요?
회개하려면 누가 필요할까요?
첫째,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친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 아닐까요?
사람들은 좋고 풍성하고 신나는 것에 천국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아이들의 천국도 있고 알바 천국, 김밥 천국 등 다양한 천국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천국 하면 죽은 뒤 가게 될 낙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통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이 땅 가운데 천국이 임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천국은 먼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우주 어떤 곳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이미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천국이 임합니다.
죽음 대신 생명을 누립니다.
슬픔과 두려움 대신 천국의 기쁨과 평화가 임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천국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해야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손을 씻고 마스크를 써야만 공공 장소에 들어갈 수 있듯이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의 비밀번호는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하는 초대장이며 안내장입니다.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1907년부터 시작된 평양대부흥 운동입니다.
그럼 평양대부흥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평양에서 열린 사경회 중 길선주 장로(후에 목사)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친구가 죽으면서 가족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며 남기고 간 유산을 자신이 몰래 써버린 죄를 진솔하게 다 고백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너도 나도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회개 운동을 평양으로부터 전국으로 들불처럼 삽시간에 번져 나갔습니다.
회개가 있는 곳마다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심령에 천국이 임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수양회를 통해서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을 맛보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양회 때 주로 무엇을 했습니까?
소감을 쓰면서 회개했습니다.
다른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을 체험하고 싶으십니까?
천국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우리 마음에서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빛과 생명이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회개하기만 하면 천국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천국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계절이 이 땅 가운데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내가 범한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말로만 회개했다고 하면서 얼버무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눈물로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 눈물이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기 연민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진짜 회개를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삶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스스로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눅19:8,새번역).”
삭개오가 회개했다는 말이 없어도 이것을 보면 그가 진정한 회개를 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 회개는 가짜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참된 회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헛된 자부심입니다.
나는 신앙 생활한 지 오래되었다는 자부심, 그래도 내가 목자라는 자부심, 모태 신앙이라는 자부심,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 나는 이미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는 자부심이 그것입니다.
회개하려면 이런 헛된 자부심들이 ‘와장창’ 깨어져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깨지 않으면 하나님은 처절한 인생문제를 만나게 해서 깨트리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애통하게 여기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알곡으로 거두어 곡간에 모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왕 되신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셋째,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부끄럽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멀리서 요한을 찾아와 자복했을까요?
요한에게서 그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메시지에 화려한 수사학적 기교가 없었습니다.
메시지는 너무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삶도 아주 단순하고 소박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메시지에는 진실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간절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얼핏 꾸짖는 듯 들리는 음성 아래로 흐르는 목자의 심정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전한 말씀을 듣고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죄는 언급하기 부담스러운 문제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죄를 언급하기보다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이 대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불행한 근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영혼이 더러워져서 고통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죄로 더러워진 마음이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죄를 분별하고 죄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죄를 벗도록 도와주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일대일 성경 선생은 세례 요한과 같은 존재입니다.
죄 문제를 안고 괴로워하며 도움을 갈망하는 영혼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에 빠져 방탕한 삶을 즐기다가 인생을 낭비하고 말 것입니다.
자신도 원치 않게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과 상처를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 아닙니까?
사람은 죄를 자백하고 씻김 받아야 행복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정결케 되어야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죄인을 찾아가 말씀을 전하며 회개하도록 돕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과 같이 단순하지만 힘 있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내 안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두시겠습니까?
아프더라도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날카로운 메스로 생살을 째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는 마치 암과 같습니다.
아무리 합리화해도 암은 암일 뿐입니다.
회개는 우리 생명을 좀먹는 죄악 덩어리를 제거하는 영혼의 수술입니다.
회개는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결국 우리를 일깨우고 우리 병든 내면을 치료해서 천국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명약입니다.
회개는 내 영혼의 백신입니다.
회개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회개를 통해서 천국의 감격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회개의 메시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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