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장 설교 | [하루 한 장] 창세기6장_방주를 만들되 25608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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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4일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방주를 만들되\” (창세기 6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는 대홍수사건입니다
6장은 그 중에서도 왜 홍수가 일어나서
모든 인간을 심판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된 셋의 후손은
땅의 딸들이라고 표현된 가인의 후손을
닥치는대로 자기의 아내를 삼으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가정의 원리의 깼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계속해서 부패해지고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남을 죽이고 빼앗는
포악함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홍수를 계획하시고
방주를 지어 인류를 보존할 사람으로
노아를 선택하여 불러 주십니다
노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에녹처럼 승천하지 않은 이유는 노아에게는
방주를 지을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똑같이 받아도 우리의 환경은
각자의 모습으로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심으로 주를 따르는 예배자로 살아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신구약 66권, 1,189장 전장 강해가 담긴 [하루 한 장] 완성판 USB가 나와 있습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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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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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장 – 사람의 죄악 – 새벽기도 설교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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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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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창세기6장_방주를 만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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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창세기 6장 설교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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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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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장 – 사람의 죄악 – 새벽기도 설교

창세기 6-9장에서는 천지창조 이후 가장 큰 사건이었던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대홍수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인류의 타락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경건했던 셋의 후손들까지도 점차 가인의 후손들과 함께 어울림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1. 먼저,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함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2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해서 인류를 구속할 ‘여자의 후손’의 씨로 주신 셋의 후손들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경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람의 딸’이란 하나님을 떠나감으로써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던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셋의 후손들과 가인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그 신분과 삶의 양식이 전혀 달랐지만,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의 쾌락적인 삶에 서서히 동화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라는 표현은 셋 후손들과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을 각각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타락하여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과 교류하고 연합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가인의 후손들처럼 부패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세속적인 삶을 살았음을 비유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3절).

또한, ‘사람이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하나님께서 보셨다’고 말씀합니다(5절).

결국 셋의 후손들까지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일말의 희망도 없이 온통 죄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즉각 심판하시지 않고 120년 동안을 유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때문에 이처럼 타락한 인류를 즉각 심판하시지 않고, 심판을 120년 동안이나 유보하셨을까요?

그것은 인류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묵과하시지 않는 공의로우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죄인이 진실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시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셨던 것입니다.

무려 120년, 인간들에게 있어 이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이처럼 죄인이 멸망당하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충분한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죄인들이 자신들의 욕심과 쾌락을 포기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회개의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멸망하는 것입니다.(히 12: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회개의 기간으로 주신 이때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와 같이 우리 또한 마지막 대심판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세상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성도들은 셋의 영적자손들로서, 하나님을 모르고 경외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가인의 영적자손들로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세상에서는 영에 속한 세력과 육에 속한 세력 간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세력은 서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결코 중단 없는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여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반면 성도들이 불신자들의 박해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믿음을 버리는 것은 영적 전투에서의 패배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소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패배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멸망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영적 전투에서의 패배는 영원한 멸망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미혹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과 함께 멸망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도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도록 항상 영적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죽기까지 악의 세력과 싸워 믿음을 지킴으로써 우리 앞에 놓인 영적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다(엡 6:10-20).

3.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사실에 대하여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6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신 것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5절).

그런데 인간의 죄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큰 잘못을 범하여 그들을 여러분의 손으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근심’이 바로 그러한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를 범함으로 우리의 참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엡 4:30).

또한 설령 연약하여 실수로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즉각적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근심을 풀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4.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이것은 죄악이 가득했던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대홍수로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노아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노아는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세태 속에서도 여호와 신앙과 도덕적 의로움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께 ‘당대에 완전한 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9절).

이 사실만 본다면 노아는 그의 행위로 구원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결코 그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자기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노아가 타락하고 부패한 세태 속에서도 신앙을 갖고 도덕적으로도 의로움을 보일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죄 아래 태어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그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비해 본래부터 더 의롭거나 잘났기 때문은 절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택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그의 의를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의 세상의 모습이 바로 노아 때의 세상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37-39).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가 과연 노아의 때에 비해 더 의롭고 경건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말세의 끝에 와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매우 임박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세상 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더욱 경건한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 때만이 노아 대홍수 당시 구원받은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6장 주일 설교 말씀] 은혜를 입은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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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6장 주일 설교 말씀 중에서 은혜를 입은 노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은혜를 입은 노아 <창세기 6장>

성경에 가르치기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창6:9)”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였다. 이러한 노아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노아의 가문

우리가 이제 노아의 가문과 아브라함의 가문을 비교할 때 조금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런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노아는 다르다. 경건한 조상들 밑에 태어난 믿음의 가정의 아들이다. 노아의 증조부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 에녹이었다. 에녹은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 그의 나이 252세 때에 (창5:21과 25절을 비교해 보라) 손자 라멕을 보았다. 에녹이 승천할 때 손자 라멕의 연령은 113세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와 라멕은 에녹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가를 친히 자라난 아들과 손자였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러한 므두셀라는 노아의 할아버지였고 또 그러한 라멕은 근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노아는 얼마나 경건한 가정의 아들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창세기 5:29를 깊이 생각해 볼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5:29)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는 그의 탄식이다. 우리가 이렇게 수고로이 일하며 고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때문이라고 그는 탄식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탄식에서 그의 슬픔이 무엇이었던 가를 상상케 된다. 우리 인생들은 다 범죄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되었다고 그는 탄식하며 슬퍼했던 것임을 본다.

이러한 탄식, 그러한 슬픔이야말로 곧 그의 믿음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길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죗값이라고 생각하는 그 양심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라멕이 그러한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났다면 그것을 가리켜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겠다.

라멕은 그저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저주받은 인간들이라도 장차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을 받을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지은 그의 아들 노아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아들의 이름을 작명함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믿음과 소망이 그 아들의 이름에 표현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이름에서 그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다.

창세기 5:29를 읽어 보라.

“라멕은 아들을 낳고….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

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는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노아라는 히브리 말의 원 뜻은 안식과 위로란 말이다.

라멕은 참 안식과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면서 그 아들을 통하여 참 안식과 위로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감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아 좋다. 이러한 그 아버지의 믿음은 노아에게도 깊은 감화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말라기 2:15 참고)

2. 노아 시대의 환경

노아 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다. 창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했음을 본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하늘의 천사들을 결혼하지 않는다. 그것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아벨의 거룩한 계대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어떻게 부패해진 것을 위의 성경은 보여준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도 셋의 후손도 다 같이 타락하게 됐다.

창6:5,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셨는데 이처럼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여 근심케 한 시대였다. 사람의 마음 악함과 세상의 죄악은 하나님을 그처럼 슬프게 했고 탄식케 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에서 7번이나 나온다 (1:4, 10, 18, 25, 31).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죄악이란 이처럼 흉악한 것이다. 노아 시대는 그러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암흑한 때이기에 노아는 하늘의 별같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그러한 시대에 오직 노아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시대를 슬퍼하시며 탄식하심이 사실이었으나 의인 노아,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는 지극히 기쁘셨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셨다. 억만 인이 죄악을 범한다 할지라도 오직 죄악을 이기며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우리는 노아에게서 배워야 한다.(참고, 예레미야5:1) 그러면 노아는 어떻게 그처럼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오직 창세기 6:8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가 그처럼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그가 큰 믿음을 지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의 물결이 홍수 같이 밀려드는 그런 때에 홀로 그것을 경건히 살아간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다. 그것이 결코 노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노아가 마침내 심판을 이기고 구원을 얻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큰 믿음을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노아의 그 승리의 생애를 기록하려 할 때에 먼저 기록한 말씀은 창세기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신 그 말씀이었다(엡2:8참고).

성경은 노아의 생애를 기록하기에 앞서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던가를 먼저 기록한 것을 우리는 주의 깊이 읽어야 할 것이다. 노아의 경건한 신앙과 생애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혹 우리에게 좋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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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보여 준 믿음, 수요기도회 복음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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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설교 : 노아가 보여 준 믿음

지금도 매우 많이 판매되고 있는 과자 중에 “초코파이”의 광고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냥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정”이라고 설명하며 감성적으로 큰 공감을 얻었던 광고였습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인터넷에 검색해 보시면 요즘 나오는 광고도 보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고, 명확한 예측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 옮긴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버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의롭다”라고 평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라고 평가하신 기준은 “믿음”이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밟는 땅인 가나안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서 별과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자녀마저도 없는 상태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었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믿는다”라는 말은 ‘아만'(אָמַן)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 “아만”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만’의 원 뜻은, “확실하게 한다” “믿는다”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뜻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 (쉬운성경)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고 분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마음과 머리 속으로 가지는 것을 넘어서서, 확실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마음과 입을 통하여 고백하고 행동으로까지 옮길 때 진짜 믿음, 요즘 말로 “찐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 역시,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노아 역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120년 동안이나 홍수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노아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은, 하늘에 먹구름 한 점 없는 상태에서도 홍수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준비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노아 역시 진짜 믿음, 찐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 하지만 안타깝게도 죄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불신앙의 행동, 불순종의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죄가 이 땅에 들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노아 시대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5절부터 7절까지 말씀에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괜히 인간을 만들었다”라고 후회하시고 인간의 범죄와 불순종, 그리고 그 결과로 맞이하게 될 심판을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또 창세기 18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길 즐기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의인 열명이라도 찾으면 심판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 드렸을 때 흔쾌히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심판 전에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을 후회하시게 만들고 마음 아파하시게 만들고 있습니다.

2. 마음 아파 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도의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믿음을 가진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았으며, 오늘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결코 내 믿음이 크다라고 자부해서는 안됩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믿음을 저버리게 될 지 나 자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첫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순종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오늘 본문인 창세기 6장 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집어 삼킬 만큼이나 많은 비가 40일 동안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층 높이로 큰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노아는 다 준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모든 일을 함으로써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도 말씀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의 크기를 오늘날 계산법으로 보면, 길이가 약 135m, 넓이가 22.5m, 높이가 13.5m의 크기로, 오늘날의 축구장(약 105m)보다도 더 긴 배였습니다. 이 큰 배를 노아와 7명의 가족들만 동참하여 만들었기에 매우 힘든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직접 나무를 잘라서 옮기고 조립하고 역청을 발라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8명이 120년 만에 만든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노아는 기쁨으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3.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방주 안에 들어간 생명을 가진 존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6장 18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새로운 언약, 즉 약속을 세우십니다. 바로 노아로부터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했던 인류는, 홍수로 인하여 모두 사라졌습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가능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믿음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로 인하여 실패하고 넘어졌다 할지라도, 때로는 불신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그 분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으로까지 옮길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기회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고, 그들 가운데는 복음을 받아 들이고 구원 받을 기회도 잃은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바꾸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나갈 때, 우리는 바이러스 이후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노아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믿었고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노아로부터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우리의 상황도 어렵고 불가능해 보인다 할지라도, 또한 뚜렷하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보여 준 믿음을 닮아, 하나님을 향한 진짜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진짜 성도, 찐 성도가 바로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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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시대가 가까이 올 때 (창세기 6:1-22)

창세기 6:1-22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주의 재림의 때에 대해말씀하셨습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따라서 우리는 주의 재림의 때와노아의 때는 대단히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멸망의 두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완전하게 멸망당할 때까지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는 일만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역사가 흘러갈수록이 땅의 멸망의 때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때, 즉, 주의 재림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1-2).

1절에 보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시작할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멸망의 시기의특징입니다. 그 특징은 땅 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지는 것입니다.주님의 재림의 때에는 노아의 때처럼 사람들이 급속하게 땅 위에 번성할 것입니다.

노아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이 땅에 살았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총 인구가 2억에서 90억 사이에 있는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람이 땅위에엄청나게 번성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유명 신학자들은 4억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인구 통계학에 따르면 지금 2019년의 인구 수는 77억입니다.그런데 77억은 노아 홍수 이후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았던 인류의 수를 다 합친 것보다 더많은 숫자입니다.

창조 과학의 아버지인 헨리 모리스에따르면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이후로 인류가 태어나 홍수 이전까지 이 땅에 살았던 수보다 노아 홍수 직전에 살던 인류의 인구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인구의 수가 한없이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벌써 77억 정도가되는 현재의 인구 수는 벌써 노아의 때의 패턴에 들어섰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자의 재림은 그리멀지 않았습니다.

또한 1절에서 “사람들에게서 딸들이 나더라”고말합니다. 이 표현은 세상의 여인들로 인해 인류에 어떤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와의 타락에 의해 인류에게 첫번째위기가 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으로 인해 인류는 첫번째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창세기 6장 본문에서 여성들이 죄로 향하는 모습을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난 딸들로 인하여 인류는 두번째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 주님의 재림의 때가노와의 때와 같은 패턴을 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 역시 노와의 때처럼 여인들로 인한 위기가 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의 딸들이 인류에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람들을 범죄로이끈다는 점에서 위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쾌락과 죄악으로 강력하게미혹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자신이 먼저 선악과를 따먹은죄를 범한 직후에 아직 죄를 범하지 없는 아담을 유혹하여 자신처럼 선악과를 먹도록 하였습니다. 이에아담은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고, 이로 인하여 인류는 완전한 멸망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 그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하였습니다. 사실 롯 외에는 한 사람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롯 역시 죄에 물든형편없는 주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멸망 당할 위기에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에 롯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즉, 롯 역시 오직 주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단 한 사람의 신자마저 없던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의 딸들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를 하게 하는 강력한 요인이 됨으로서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름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 죄는 다음 아닌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는배교의 범죄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냐에 대한 의견은 학자들 사이에서 분분합니다. 제일 주된 의견으로는천사라는 의견이 있고 셋의 후손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고하는 주장은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특히 성경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닌 천사의타락사가 되기 때문에 이 견해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또한 창세기 6장에서천사가 타락한다면 천사가 시도 때도 없이 타락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예수님께서 천사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장가와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즉, 천사들이 사람을 아내로 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눅 20:34-36)

그런데 2절에서 ‘아내’라는 단어는결혼이라는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이라고 하면 주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던 주의 백성을 말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과 같이 주의 영이 거하시는 주의 백성들로 보면 정확합니다.

더욱이 원어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약에서 찾아보면 경건한 주의 백성을 지칭할 때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들들이라는 원어는 ‘벤’이라고 되어 있는데, 신명기 32장 5절에도 같은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신 32:5)

호세아서 역시 주의 백성을 향해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호 1:10)

아삽이 시편에서 같은 표현을 합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시 73:15).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사람의 딸들은 가인 계통에서 태어난 불경건한 자녀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대응되는 불신앙의 여인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세상 여인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딸들은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의 눈에 탐스러웠습니다. 이는 외적으로 뛰어난 미모를 뜻합니다.

이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들의외적인 미모에 사로잡혀 그들이 불신앙의 여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아내로 삼아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절의 고발입니다.

즉, 진리와 빛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인의 후예인 불신자의 딸들과 인간적인 사랑에 빠져 서로언약을 맺어 아내로 삼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2절에서 그들을 아내로 취하였다는 것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언약을 맺고 육체적으로하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거듭난 청년이 거듭나지 않는 처녀의 외적인 미모와 조건들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결혼한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영이 거하시는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언약하며 육체적으로 합하는 것을 금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바울이 언급합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6:14-7:1).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성품 등, 내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여인의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하나님을 아는 자든모르는 자든 모든 사람이 비성경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주의 백성마저 세상의 여인들때문에 주 하나님을 저버리자 이제 모든 인류가 불신으로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멸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때에오직 노아 및 그의 가족 외에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한 것처럼 인자가 다시 오는 때에 믿음 있는 자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이는 인류의 역사가 끝으로 달려갈수록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신자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이유로는주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은엄청나게 번성하여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신자들은 세상 여인들과 짝하면서 신앙을저버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주님께서 재림하시기직전에도 똑같이 나타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딸들을 취한 이유는 세상 여인들의 미모 외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네피림이라는 특이한거인 족이 있었고, 노아 홍수 이전의 네피림은 온 세상을 군림할 만큼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과 연합하는 이유는 그들 네피림처럼 권력과 힘을 가진 자녀들을 원하였기때문인 사실을 본문이 말합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후에도 – 그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즉, 네피림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권력,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상징되는 쾌락등, 이생의 자랑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믿지만, 상대가 돈도 많고 권력가의 딸이고, 지독히 아름답기때문에 신앙이고 뭐고 다 뒤로 미루고 일단 불신자와 결혼해 버리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교회와신자를 떠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육신이 됨이라.”(창 6:3).

또한 5절 이하를 보면 믿는 자가 거의 사라지는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할 때 그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즉, 인간들끼리 보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노아 시대는 그저 밥먹고 놀고 일하고 계획하고 수고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죄라고 보기에 애매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 인류는 서로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를 인간 측에서 볼 때는 권력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면서 운영되는 조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의 문제는 하나님을 고려치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노아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을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죄악이온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계획 속에 하나님은 없고 오직 ‘나’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온 인류을 악하게보시고 멸망시키신 가장 주된 원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복음을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근거로 하여 복음적인 관점에서 죄를 보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의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돈 벌기 위해 신앙을 잃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입니다. 주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주 하나님을 만나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잊으면 그것이 죄입니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시달리거나 여러가지 오락에 빠짐으로 주 하나님을 계속 잊고 지내면 그것이 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모르고 감사치 않는 자들은 다 죄인이며 악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들의 창조주시며 또한 그들에게모든 좋은 것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시고, 나아가 주께로 돌아와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대항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외칩니다.

[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야고보 사도는 다른 무엇보다 주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함이 죄라고 지적합니다.

[4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4-5)

또한 야고보 사도는 주 하나님을고려치 않는 인생 계획은 악이라고 알려줍니다.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것이라(약 4:13-16)

사랑하는 여러분!

노아 시대의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힘을 쌓기 위해 불신자들과 함께 연합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언약을맺고 연합하였습니다. 그러자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물론그들은 세상의 힘과 자랑이 가득한 불신자의 딸들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네피림처럼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이는 주의 영이 그들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이 세상은 불신자들로만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주를 믿는 의인이 극소수가 되었습니다. 현 시대로 치면 교회는 많지만 거듭난 자가 거의 없는 현상입니다. 종교는많지만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인 참 교회가 희귀한 것입니다.

이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유황이소돔과 고모라를 전부 태워버린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극소수인 노아 시대를 큰 홍수로 쓸어버리기로 정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의 마지막 끝에 이 땅에 얼마나신자가 없었습니까? 남은 신자의 수는 겨우 8명이었습니다. 믿어집니까? 2억에서 90억까지가능한 그 당시의 인구 가운데 참 하나님을 믿은 신자가 오직 여덟 명이었습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도다”(벧후 2:5).

이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한탄하십니다. 그 이유는 온 인류가 하나님을 대항하며 무관심하며 감사치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9절을 보면, 참 신자인 노아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6:9).

수억명 가운데 홀로 믿음의 길을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믿음입니다. 온세상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채 죄악에 물들어가더라도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없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망각하고 사는 인간들은서로 착취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들의 목적은 세상의 힘이기때문에 최고의 네피림이 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즉, 누구도이길 수 없는 거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최고의 갑부가 되는 것이며, 그 누구도 덤빌 수 없는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가능한 오래살면서 자신의 권력과 영광을 누리려 하였을 것이며, 이를 위해 철저하게 약자들을 착취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생 및 사회는 반드시 부패하며 포악하여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노아의 때는 바울이 말한대로 주께서 재림하실때의 모습과 방불하였습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직도 보존하시는이유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주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면 이 세상은 곧바로 포악과 강포와 착취가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즉, 힘의 논리에 의해 세상은 운영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폭군, 즉 네피림들이 곳곳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철저한무질서와 죄악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시대의 그림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무엇에 의해 이 시대가 운영되고 있습니까? 네피림으로 상징되는 돈과권력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딸들로 상징되는 쾌락이 아니겠습니까? 온 세상이 사람들의 딸들에 의한 음란에 물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은스스로 살아남아 최고의 네피림이 되기 위해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바쁜 것이 아닙니까?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하는 자들과 교회마저 세상과 짝하고 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배도가 도를넘어서면 주 하나님은 이 땅과 시대를 버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이 땅을 버리시면곧바로 주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13절을 보면,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였다고 하면서, 인류의 멸망은 땅과함께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이뜻은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로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에 발을 델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형량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주의 백성이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의도적으로 범죄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를 넘을 경우, 그들은 약속의 땅에 거하지 못하고 먼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지진은 땅 없는 삶이기 때문에 극도로 무섭습니다.

구약은 땅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역시 새 땅으로 마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마 5:5).

여기서 온유한 자는 이미 구원을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죄의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이 영원히 주님께서 창조하신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멸망입니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은 큰 홍수로온 세상을 쓸어 버리시고 온 인류를 땅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지옥입니다. 음부입니다.

[19그리스도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3:19-20)

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이후의 새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이 땅에서 산 자들마다 불 심판 이후 정결하여진이 땅을 영원히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바라보도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0-14).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장면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것 같더라](계 21:1-2).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은 자들과 방불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처음에 잠깐 녹색을 띠지만시간이 지나면 색바랜 죽은 낙엽이 되는 것처럼,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없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과 같습니다. 그 증거가 그들의 생명은 고작 120살 미만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잠시 생명력을 띤 것 같이 120년 미만을 지내지만 그 후 죽음을 통과하는 순간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감옥으로 들어가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좀비처럼 수치스러운 썩은 시체의 몸으로 부활하여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것이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처럼 이 땅에 살았던 모든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두운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탄은여러분을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할 것입니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것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각오로 주의 말씀과 기도로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생명을 바칠 심정을 가지고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노아의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노아의 삶을 다음과같이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만일 이러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면서서히 세상의 네피림과 사람의 딸들에게 굴복하게 되면서 사탄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는롯처럼 오직 암몬과 모압의 불신 자녀들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재림의 때가 너무나 가까이다가왔습니다. 이는 새하늘과 새땅의 새로운 시대 역시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여러분의 남은 삶은 어떻게든 믿음을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다시 한번 심각한 결단을 내리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6장.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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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6장.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찬 435)

1. 창세기 6~8장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난 홍수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하나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6장은 한 번 인간 세상 속에 들어온 이래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죄의 속성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것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경계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고전 5:6).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의 기사는 그 해석이 쉽지 않다. 어떤 해석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이 가인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난한 해석이다. 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섞였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갔다. 거룩은 죄와 섞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어느 사람에게도 삶의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이 그 구별을 스스로 무너뜨려버렸다. 결국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120년 후에 있을 것이 선언되었다(창 6:3).

2. 하지만 이런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심판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8절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부연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을 만난다. 이 구절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특징과 열매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 노아를 통해서 심판 후에 세상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다시 세우실 것이다. 성경이 놓치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그의 의인됨과 하나님과 동행함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다. “노아가……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22).”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우습게 여긴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다. 비록 죄악이 무성하고 어두운 세상이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다. 오늘날에도 이 원리는 동일하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 말씀의 권위를 알 것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은혜를 받았다면 당신은 그 말씀을 결코 우습게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징지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삶이다.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3. “하나님 아버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중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노아를 통하여 은혜의 강이 멈추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절대기준인 말씀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현실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끝까지 굳게 잡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매일말씀묵상. 1월 6일. 창세기 6장. > 매일말씀묵상

창세기 6장.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 창세기 6~8장은 최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난 홍수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마지막 때에 있게 될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하나의 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온 죄악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경계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고전 5:6).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 그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

2. 성경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는 본문 중에 하나인,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의 이야기는 그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이 가인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무난한 해석입니다. 이 두 후손들, 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섞였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습니다. 거룩은 죄와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섞이면 거룩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어느 사람에게도 삶의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3. 결국 거룩은 무너지고 섞이면서 , 하나님의 영은 이들에게서 떠나시고 , 이들은 “ 육 ” 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 육이 되었다는 말은 죄된 본성 가운데 , 목이 곧고 마음이 부패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 이제 더 이상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쫓는 인생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 인생이 되고, 각기 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120년 후에 있을 것이 선언되었습니다(창 6:3).

4. 하지만 이런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끊이지 않는 이 은혜의 물결을 보아야 합니다. 심 판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5. 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하며, 이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던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구절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특징과 열매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 그의 의인됨과 하나님과 동행함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타납니까? “ 노아가 ……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22).”

6.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우습게 여긴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비록 죄악이 무성하고, 어두운 세상이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힘든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말입니다 .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7. 오늘날에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 당신은 그 말씀의 권위를 알 것이며 , 어떤 상황이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 당신은 그 말씀을 결코 우습게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징지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악의 물결이 넘실대는 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간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삶의 현장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았던 노아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어떠한 물결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을 소중히 여겼던 노아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한 행복인 것을 알고, 말씀대로 살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의 편에 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도록 붙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6장] 타락한 사람들이 짓는 세 가지 큰 죄

세가지 큰 죄들

성 경: 창6:1-12

<서론>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니이체의 저서중에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 이란 책이 잇다.” 니이체는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냉혹하고 냉철한 인간,기존의 도덕률과 진리라고 일컫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차가운 인간을 인간적이라고 햇다. 요즈음 사람들이 인간적이라고 하면 대개 따뜻한 정이 잇고 의리가 있다는 뜻으로 그런 말한다. 혹은 너무 딱딱하고 실수가 없고 철저한 사람을 두고 인간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인간 본래의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거역할 때 그것을 죄악이라,비인간적이라 하고 심리학적으로 인간소외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람,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자기를 용납하고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최초의 인간들의 비인간화, 홍수심판을 부른 원인이 되었던 세가지 무서운 죄악상들을 고발하고 잇다. 말세의 도적적 현상들 20가지 죄악들을 고발하고 있는 딤후 3장말씀과 쌍곡선이 되는 말씀으로 구약의 심판전 말세현상을 말하고 잇다.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나 아닌 나에게 굴종하여 진정한 나는 소멸되고 파괴된 인간소외가 말세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속에서 노아와 같은 사람,등불을 밝혀놓고 신랑을 기다리는 여인과 같은 살아있는 크리스찬들이 잇다. 오늘 노아시대의 비인간화 현상을 살펴 보면서 이 시대의 죄악들을 통찰하고 우리의 갈길을 말씀을 통하여 교훈받고자 한다.

<본론>

1. 결혼의 타락이다.

결혼은 인류가 창조된 후 가장 처음 주어진 제도로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인간의 성숙을 위해 주신 요람이다. 사회와 세계질서의 가장 작은 집단단위이다. 가정이 건전할 때 그 사회는 건전하게 되고 가정이 무너질 때 그 사회도 붕괴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평화롭다

는 뜻을 갖고 잇는 안(안)자를 집에 여자가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집에 여자가 그 가정을 지키고 있을 때 그 가정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 여자가 집을 돌아보지 않을 때 그 집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데는 남편의 역할도 무시될 수 없다. 남편이 자기 역할을 바로 감당할 때 아내는 집안에서

기쁨으로 집안일을 돌볼 수 잇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의미하고 사람의 딸들이란 살인자 가인의 후손들을 의마한다. 창4:16절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논땅에 거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26절에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볼렀다고 햇다. 가인의 후선들은 논땅에서 하나님없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창5장에서 셋의 계보가 나오는데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선민의 계보 십대 족장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6장에 와서 보니까 그 족장들의 가정마져 타락했다고 말한다. 경건한 가정의 자녀들이 자기들의 안목에 좋은 대로 가인의 집안의 딸들과 결혼했다.

(1)그들은 외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했습니다.

외적 아름다움만 따라가는 것은 항상 화를 불러 옵니다. 베드로는 아내된 자들에게 권면할 때 벧전3:3,4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나는 인간의 외모를 이미 버렸노라라고 하시면서 사람은 외모르 보나 나 여호와는 시람의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고후4:18).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내면보다 외면을 보기 더 좋와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좋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이다. 그러나 그 본뭉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절제되고 다스려져야 한다. 본능을 절제하지 못하는 삶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고 본능을 하나님의 뜻아래 굴복시키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거민들과 서로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다. 솔로몬왕은 그토록 지혜로운 왕이엇으나 외국 왕들의 딸들을 아내로 많이 들여 왔더니 그녀들을 연내하는 동안 그만 하나님응마 떠나고 우상들을 여호와의 전안으로 끌어 들이고 말앗다.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을 그런 악인으로 만든 자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로서 그의 왕비가 된 이세벧이란 여자엿다. 우리 자녀들의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아래서 이뤄지도록 많이 기도해야 하며 이성을 보고 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

(2)일부다처의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자기들의 좋와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지자” 4:19을 보면 이미 가인의 아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던 것을 볼 때 셋의 후손들도 이런 패역한 길을 따라 그 본능대로 아내들을 취했던 것이다. 훗날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아브라함도 하갈을 첩으로 취했고 야곱이 두 아내와 두 첩을 가졌던 것을 본다면 이런 이방의 풍속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나쁜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결혼하는 남녀들중 10쌍중의 한 쌍은 이혼으로 끝이 난다고 한다. 적지 않은 크리스찬 자정들도 이런 문제들로 시달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몰몬교의 교주 조셉스미스는 그 후계자 에드워드 영에 의하면 50명쯤 되는 아내를 두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영은 17명의 아내를 두었다. 지금도 유타주를 근거지로 삼고 잇는 그들은 일부 다처제를 고수한다. 그들 뿐만 아니라 내밀한 교리로 피가름을 하는 통일교,대학생들을 많이 유혹하는 정명석 애천교등 모두 극한 도덕적 방탕을 걷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분노하신다. 그래서 3절에 나의 성령이 영원히 사람과 함게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육체가 됨이니라고 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게서 셋의 후손들과는 성령으로 교통하시며 함게 하셨다. 그러나 이제 성령을 거두워 가셨다. 영적 은총을 거두심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가장 큰 형벌이다. 다윗은 범죄후 “하나님이여 내게서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기도했다. 하나닌바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고 그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롬 8장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령을 멸시하고 성령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고집하고 내 멋대로 죄짓고 사니 그 만 성령을 거두어 가셨던 것이다.

(3)결과적으로 그들은 무가치한 고기덩어리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들이 육체가 됨이니라.— 인간의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는 것이다. 이성적 자유, 영적 순결과 거룩 이런 것이 없으면 인간이란 하나님 보실 때 한낮 비계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카프카}가 쓴 {변신}이라는 소설에 주인공이 어느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있더라고 했습니다. 고귀한 인간이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버리고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가면 비인간적인 괴물같은 존재가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한낱 비계덩어리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는 정욕대로 행하는 이 시대의 풍류를 거스려 하나님의 법도를 귀;중히 여기며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신령한 것을 돌아보는 사람,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함을 우선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2. 생각의 타락입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을 보실 때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어려서 부터 항상 악할 뿐이었다 하였습니다. 여기 계획이란 말은 성향,경향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갈대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갈대다고 했던 파스칼의 말대로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생가하고 길을 가면서도 생각하고 일을 하면서도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인간만이 감능한 것으로 하나님의 형샹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하나님의 지배아래 잇지 않을 때 그것든 악한 경향을 띠게 됩니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본능이 하나님의 법도아래 절제되어야 하듯이 인간의 생각이란 스크린도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아래 잇어야 합니다. 생각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하는 이외에 다른 생가을 하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합니다. 음식을 만드는 주부가 음식을 만드는 일보다 다른 생각에 정신을 팔면 음식을 다 태우거나 간을 맞추지 못하게 됩니다. 연인간에 데이트를 하면서도 다른 이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잇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잘 다스리지 못할 때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생각이란 샘물속에서 엉뚱하고 악한 계획들을 만들어 내곤 합니다. 히틀러는 유럽을 자기 손안에 놓겠다는 야심을 가졌고 후세인은 20세기의 아하수에로가 되어 세계를 제패해 보겠노라는 그릇된 생각을 품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을 행해 집중시켜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고 잇습니다. 신6:5″ 네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했고 대상28:9에 다윗왕은 솔로몬에게 “내 아들 솔로몬아,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했습니다. 잠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햇고, 사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저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하루 내 마음의 생각을 주님게 복종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루의 계획을 세울 때도 주님안에서,한 주간의 계획도 성령안에서, 일년의 계획도 주님의 인도로, 일생의 계획도 기도하면서 세워야 하겠습니다.

3.에너지의 타락입니다.

11절,13절에 당시에 땅위에 강포가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강포란 말은 폭력, 맹렬하고 사나운 기세로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를 잘못되게 관리해서 방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속에 에너지가 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밤새도록 연인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잠을 자지 않아도 지칠 줄 무릅니다. 사랑의 에노지가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사업가는 동분서주하며 주야로 활동합니다. 김우중씨는 다섯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 대단한 정렬입니다. 그런데 이런 에너지가 바람직한 곳으로 발산되지 않을 때 젊은 사람은 폭력배가 될 수 있습니다.

힘,에너지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남보다 무엇인가 가진것이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육체적인 힘을 많이 가진 자들이 잇습니다. 뛰어난 지력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정부나 기업의 “브레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그 지적 에너지를 잘 못쓰면 무서운 살상 무기를 만들거나, 남의 기업을 무너뜨리는 교묘한 일을 꾸미게 됩니다. 남보다 돈을 많이 가진 자들,권력을 많이 가진 자들이 잇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동과 권력으로 남들을 도와주고 잘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약한 서민을 압제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재산만 증식하는데 혈안이 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신매매니 폭력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욕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정신적인 힌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이바지 해야 합니다. 자기 배만 부르라고 돈을 벌이면 그것도 강포입니다. 권력으로 남을 학대해도 강포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일할 때 그것도 강포입니다.

8절 말씀에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오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가정의 타락,성적 타락을 가져오고,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여지고 가진 힘으로 강포를 임삼았어도 오직 노아는 하나님의 은헤를 입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바르게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서 일요일이 잇습니다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일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좋와하는대로,내 생각대로,내 힘대로 산다는 신조를 가집니다만,성도는 하나님의 듯대로,하나님의 능력안에서 ,하나님 영공을 위해가 모토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끝으로 노아가 하나님게 은헤를 입었더라는 말슴은 비인간화의 극을 달리던 어두운 시대에 그렇게도 참 인간적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었던것은 노아의 힘과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과 인도와 도움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바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삼손처럼 넘어지고, 베드로처럼 물속에 다 빠지고 맙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자! 이것이 말세를 사는 경건한 성도들의 삶의 모토가 되어야 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창세기 6:5-12]

사람들이 세상을 보면서 점점 악해져 간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악에 물들지 않고, 선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관심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창조 이래로 가장 악했던 때를 들자면 노아가 살았던 시대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모든 생각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중심까지도 아시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근심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탄식하심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를 지으셨을 때에 모습과는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한숨지으시며 탄식했던 모습이 없으셨습니다. 도리어 천지를 만드시는 6일 동안, 매일 매일 만드신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6일 동안 지어 놓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죄악이 사람들 가운데서 퍼져가면서, 창조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시대 때에 가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좋아하실 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완전히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탄식과 근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탄식하게 하는 죄인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쓸어 버리기로 작성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멋지게 즐겁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결국은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시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보시기에 좋아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좋았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그나마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노아라고 하는 이름은 ‘위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5:29절에,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노아를 낳아 놓고 이름을 지을 때에 이러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라고 합니다. 아담의 죄로인해서 이 땅에서 노동하면서 수고하는데, ‘너가 우리의 위로가 된다.’ 라는 의미로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아버지 라멕에게도 위로가 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주셨습니다. 세상을 물로 심판할 때에 하나님은 노아를 살려 주셨고, 그를 통해서 다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노아는 죄악으로 멸망받는 시대에, 은혜를 입어 구원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운데서 하나님께 은혜받은 자로, 어떻게 노아와 같이 구원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푸신 것은,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이러한 모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은 악함가운데 있었는데, 노아만은 의롭고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행하다는 ‘할라크 halak’라는 단어는 ‘같이 걷다. 교제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노아는 누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감으로 의롭고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의롭고 완전하다는 묘사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묘사할 때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불의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며, 또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인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존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움과 완전하신 모습을 닮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 의해서 영향력을 받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과 동행하다가 보면 악해지게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착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가 보면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변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노아 자신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조상의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하나님과 처음으로 동행한 인물로 에녹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첫번째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에녹을 데리고 가셔서 이 땅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노아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이미 노아 이전에 그 가문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었고, 노아에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귀중한 가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관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관심하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어떤 사람과 연결시켜주려고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때에, 노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노아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지은 일로 확증됩니다. 창세기 7:5절에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 대해서 말하기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다 준행하는 모습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증거입니다. 노아가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말씀으로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계획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만큼은 달랐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말씀을 듣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롭고 완전하게 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행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모든 사람이 행동으로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믿음이 있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비록 사람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산위를 덮으실 정도로 홍수를 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노아는 믿고,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하고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리보다 불신앙의 소리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했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소리였습니다.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방주를 산위에다가 짓다니 너 제정신이냐? 지을려면 좀 작게짓게 그렇게 짓다가는 평생 못짓겠다.” 라며 세상적인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노아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세상적인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걷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지만 때로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과도 동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섬길수도 없는데 이를 병행하고자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걷다가 보면 하나님과의 동행에 방해받기가 십상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복을 받지 못할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동행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별하고 그 영향력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아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가 이러한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즐겨했다면, 결국 노아도 그들과 함께 멸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존재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싫어하고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노아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고 죄악가운데서 멸망당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어 갈 수 없도록 삶을 분주하게 만들고, 다른 관심거리를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주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함께 믿음생활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해서,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 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공원에 가면, 산책을 하며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부부나 친구끼리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면서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함께 온 부모는 아이와 함께 걸을 때에, 자신의 걸음에 아이를 맞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와 같이 보폭을 작게 해서 함께 걸어갑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어깨에 태우고 함께 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대단한 믿음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과 사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죄인된 사람들과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기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강한 의지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그리고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기에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도 그렇게 좋지 않았고, 이해력도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면 잘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을 꼭 설명해 주셔야지만 겨우 알아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승천하실 때에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면서 주님이 영원토록 그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요한 것은 그 동행이 이 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있게 될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과의 동행도 영생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은 천국에서의 영생을 보장해 줍니다. 그 가치를 알 때에 하나님과의 동행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이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어느덧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 동안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겠지만, 그 누구와의 동행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동행은 이 땅에 한시적인 즐거움과 유익이 있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 동행을 방해하는 사탄의 계략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과 상황들이 생길 때에,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주하면 분주할 수도록 더욱 하나님앞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기를 힘쓰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또한 서로에게 좋은 믿음의 동행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가족, 교우들, 또한 이웃들이 하나님과 잘 동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함께 보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세상이 영적으로 더욱 어두워져가고 악해져 가는 이 때에, 하나님의 탄식과 근심이 더해져 가는 이 때에,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영생의 축복을 늘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창세기 6:1-8

하나님의 아들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1-8

어제는 아담의 족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담의 족보 안에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였는데, 첫째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진리는, 에녹처럼,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지는 길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의 소망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시면, 하늘로 들림 받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창세기 6장 부터는, 노아의 가족과 홍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시는 이유를, 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관영함’ 이라는 말은, 가득찼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차게 되었는데, 어떤 죄였냐면, 성적인 죄와, 폭력이었습니다.

그래서, 6절과 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인간들의 생각이 너무나 악하고, 죄만 짓는 것을 보니까, 후회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로 보내서 다 멸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죄를 짓고, 생각이 악하게 된것입니까? 그 이유를 1-4절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고, 사람의 딸들이 누구길래, 그들의 후손들이 이렇게 죄를 짓게 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크게 두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번째, 학설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모순은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들의 후손이 4절에서 처럼, 네피림 같은, 거인들이 나올 수 있냐는 거예요. 셋의 후예도 거인이 아니고, 가인의 후손도 거인이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성경에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성경 구절은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학설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고, 사람의 딸들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딸들은, 아담의 후손을 말하는데, 그 당시의 모든 여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모순은 있습니다. 어떻게 천사가,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마태복음 22:30절 보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천사는 장가도 아니간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구약에 나타난 천사는 달랐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현현’ 이라고 하는데,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땅에 오실 때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드시기도 하시고, 배고프면, 잠자고, 아프기도 하시고, 슬프기도 하셨습니다.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천사들이 이땅에 올 때에는 그렇게 왔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시면, 천사 두명이서 롯의 집으로 들어 갔는데, 그러니까, 그 도시의 남자들이, 롯의 집으로 와서는, 그 천사를 내놓으라고 하죠. 그 두 천사와 성적인 관계를 맺겠다는 것이죠. 동성연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천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이렇게 함부로, 사람의 딸들을 자기 아내로 취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 로 보고 있습니다.

타락한 천사였기에, 그의 후손들이, 그렇기 악한 사람들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말씀은, 2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한 셋의 후손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 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이기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욥기서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 이 나오는데, 영어 성경은, ‘son of God’ 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The angels” 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신학적으로, 아주 난해한 구절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두 학설 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 견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가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가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고, 아무나 데려다 아내를 삼았다고 말합니다. 성적인 타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그 성이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러한 시대입니다.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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