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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서는 비전(꿈)이라는 단어가 단지 한 번(변화산 사건) 사용된다. 예수님은 학자들이 내부 그룹으로 분류하는 세 명의 제자들과 동행하여 산에 오른다. 거기서 제자들은 비전을 통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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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 3명과 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그때 옷이 희게 변하여 빛났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그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그 사건에서 다음 3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그 사건의 의미
2) 제자 3명을 데리고 가신 이유
3) 많은 인물 중 왜 모세와 엘리야가 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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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사건의 의미(막 9:2~13절, 2020년 3월 21일 성경묵상)

변화산 사건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스러움에 대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아직 제자들이 올바르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뒷날 이 경험은 주님이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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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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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사건의 의미

우리는 복음서에 있는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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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7/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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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조수현목사) 변화산 사건의 참의미 – 기독정보넷

제목 : 변화산 사건의 참의미 주제 : 구원 십자가 율법본문 : 마가복음 9:1-13 말씀의 깊이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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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9/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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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사건의 교훈 – 교회연합신문

마태복음 17장에는 저 유명한 변화산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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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cumenicalpress.co.kr

Date Published: 3/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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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연출하셨을까? 눅9:28-36 2016.6.19

우리는 이것을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는 누가복음만 기록하지 않고, 마태복음(17장)과 마가복음(9장)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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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3.or.kr

Date Published: 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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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에서 있었던 일 – 크리스천라이프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산상 변모의 사건은 예수님에게는’별세(exodus)’를 준비하는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세(處世)’의 욕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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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ristianlife.nz

Date Published: 6/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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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의 마지막 설교 ‘변화산에서 생긴 일’] : 목회/신학

그런데 바로 이 변화산 사건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때부터는 기도하지 않으면 견뎌내기 어려운 고난과 역경과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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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9/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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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사건(마 17:1-13)

변화산 사건(마 17:1-13). 노승수 목사.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2] 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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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ewisnoh.tistory.com

Date Published: 7/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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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코어]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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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변화 산 사건

  • Author: 타브의 바이블코어
  • Views: 조회수 2,2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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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4JdlQyvDI8

변화산 사건(마 17:1)에 대한 연구: 꿈(비전, ὁ ὁραμα)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신약 성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비전(꿈) 중 마태복음의 용례를 살펴본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비전(꿈)이라는 단어가 단지 한 번(변화산 사건) 사용된다. 예수님은 학자들이 내부 그룹으로 분류하는 세 명의 제자들과 동행하여 산에 오른다. 거기서 제자들은 비전을 통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본다. 산을 내려오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본 것을 비전(꿈)이라고 정의하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지시하신다. 필자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비전(꿈)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이 사건이 예수님의수난 예고와 그 예고에 따른 수난이 시작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수난을 예고하고, 그 예고에 따라 수난이 시작되기 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자들에게 미리 자신이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장차 자신에게 임하게 될 수난 사건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그런 종류의 수난이 아니라, 그 수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나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이를 제자들이 대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수난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한 과정이어서 제자들조차도 도망치게 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더 이상 예수의 가르침에 동조할 수 없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과정을 능히 극복하고 다시 돌아와 복음 전도 사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변화산에서 체험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변화산에서 보았던 예수님에 대한 비전(꿈)은 현실의 어려움을 능히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그 비전(꿈)은 고난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The reason for the New Testament’s “Vision” being the theme of Korean churches is because of Youngsan theory of the Spiritual Fourth dimension. The book that could be claimed as the summation of Youngsan past 50 years of ministry, “The Fourth Dimension, part 1: The Spiritual Fourth Dimension,” is based on Joel 2:28 and Acts 2:17, and claims that the Holy Spirit makes history through visions. Thus, according to Youngsan, the Christian Vision is an important part of the Christian life. This thesis attempts to explain what the word “Vision”(Dream) exactly means in the New Testament. In the New Testament, there are three different words used to mean “Vision.” Youngsan presents the word Vision as being equivalent to the word “Vision”(Dream). Also, this word comes up in Matthews once, and in Acts, nine times, so ten times in total. Vision, which could be related to Vision, is used in Acts 2:17 and Revelations 4:3; 9:17 three times. With the length of this thesis in mind, only the “Vision”(Dream) mentioned in Matthews will be covered. To summarize, the writer of Matthews presents this through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Christ. Thus, the “Vision”(Dream) that is presented in Matthews does not mean the dream that one gets while sleeping, but the dream of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Christ in the future. The important question is why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Christ in the future was only presented to the essential disciples. Through research, it is found that the reason for Jesus Christ revealing his future suffering to only a select disciple is related to the following events. Therefore, the reason why Jesus Christ showed his glorification early on is to prepare his disciples for their period of tribulation. Just as it can be seen in Peter’s denial of Jesus, the period of Jesus’ suffering also shows many people’s denial of him. The reason why Jesus Christ presented his future glory early on is to show that his suffering isn’t the end, but the start of his glory in order to strengthen the faith of his followers. Through Jesus’ transfiguration, the disciples were not only able to strengthen their own faith, but was also able to send Jesus’ message throughout the world. The transfiguration on the high mountain was to ensure to his disciples that his future glory is secured. The “Vision”(Dream) that was presented on the high mount, along with Youngsan representation of “Vision”(Dream) both support the claim of Jesus Christ’s future glorification. The incident on the high mount puts the focus on Jesus Christ’s eventual glory over his suffering. Youngsan presentation of the Vision to our fellow Christians strengthens our faith in an ever changing world.

변화산 사건의 의미(막 9:2~13절, 2020년 3월 21일 성경묵상)

변화산 사건의 의미(막 9:2~13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견고한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 베드로는 또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라는 호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변화산으로 베드로와 요한 안드레를 데리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 순서는 다른 복음서도 같은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아직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그 어떤 그림도 가지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차근차근 시간과 순서를 따라서 양육해 가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처음에는 이적과 기사를 보며 놀라서 주님을 따르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요구하시는 단계를 거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하느냐는 가르침에 관한 확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가르침 메시아가 너희가 생각하는 영광의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장차 그 부활의 몸을 입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가르치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가르침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변형되심의 의미

첫 번째 수난예고가 있는 후 6일이 지났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왜 세 사람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마 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뒷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에도 이 세 사람과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먼저 부르심을 받은 것 외에 제자들 가운데 헌신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9절에 의하면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이 무슨 산인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합니다. 초창기에는 다볼 산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는데 최근에는 가이사랴와의 근접성 때문에 빌립보와 가버나움 사이에 있는 메론 산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떤 산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그 산에서 변형되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어떻게 변형되셨습니까? 3절입니다.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변화는 예수께서 신적인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눅 9:28절 이하에 따르면 주님은 높은 산에 올라가 다른 것을 하신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변형되신 것입니다. 이 변형이라는 말은 겉과 속이 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졸고 있다가 깨다가 하다가 이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주님은 왜 변형되신 것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런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이 변형되신 모습은 부활 후에 누리게 될, 또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기 전에 가지셨던 신정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수난예고 다음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수난예고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확실히 이 본문의 사건은 주님께서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길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시고 기도하실 때 그 고난의 마지막 행로가 이렇게 높아지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신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그림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의 참된 영광을 어렴풋이라도 감지하게 하신 것은 수난예고와 함께 주님이 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주님이 당하시게 될 고난과 죽으심 앞에 주님이 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양육해 가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계시의 깊은 곳으로 인도해 가시는 주님!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더 높이 알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 주님을 닮고 싶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완전케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모세와 엘리야의 변화산 출현은 예수님을 구약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환생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부활 이후까지는 타인에게 말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은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제자들이 이를 잘못 해석하여 진리에서 멀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이 구약에서 예언된 엘리야임을 밝힌 것은 메시아 도래의 모든 여건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변화산 사건에 등장한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변형과 함께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의 한 부분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이들이 장차 완성될 천국에서 함께 교제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하는 비중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변형되신 주님과 교제하는 장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현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적 현현은 7절과 함께 보실 때 더 확실해집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빛난 구름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변화산 사건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다.” 무슨 말씀입니까? 참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초막 셋

5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이런 베드로의 답변은 두 가지 문제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앞서 주님께서 수난 기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아직 고난의 때를 맞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그 고난의 때를 앞두고 기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장차 얻게 되실 영광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를 보고 그만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해 버린 것입니다. 초막은 영원한 거처가 아닌 임시적인 거처이기는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엘리야 모세를 존경하는 마음에 말한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의도 자체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지셔야 하는 십자가를 지연시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말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 아직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셔야 할 메시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메시아와 모세 엘리야를 같이 취급함으로 역시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깨닫는 것이 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니라고 깨닫습니다. 이렇게 훈련되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깨닫는 것이 미숙하고 내가 아는 수준에서 밖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베드로,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때를 따라 말씀하시며 미숙한 것들을 어루만지시는 분이십니다. 선택하고 부르시는 것도 주님은 은혜지만 성장 성숙시켜가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뒷날 베드로와 사도들은 충분히 고난을 감당할 만큼 준비되어서 초대 교회의 엄청난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르게 알게 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엉뚱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동상이몽을 꿈꾸는 연약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위로를 얻습니다. 깨닫는 것이 둔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넓이와 깊이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고, 잘못 결정할 수 있지만, 훈련의 과정을 따라 성장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완전하게 준비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가장 앞선 자의 자리에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같은 어부들을 세우셨습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성격도 급하고 투박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에게 변화산의 놀라운 신적 영광을 보는 축복을 주시고 뒷날 그들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는 초석을 놓으신 것입니다.

또한, 고난의 때를 앞두고 기도하시는 주님에게 위로하시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변화산 사건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확증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두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신 17:6; 히 10:28). 주님은 메시아라는 증거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세 제자와 동행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이 그 사실을 즉시 말해 버린다면 이는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것이 되며 주님의 구속을 위한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변화산 사건을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일을 영원히 비밀로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은 확증된 것이며 이 이후에는 이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 그 의미를 묻되 바로 묻지 못하고 엘리야의 출현과 관련된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을 들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 4:5, 6절 등의 내용을 근거로 끊임없이 메시아에 앞서서 엘리야가 올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먼저 와서 죄인들을 회개시키며 모든 것을 회복하여야 할 엘리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아되신 예수께서는 이미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부활하신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의미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이 옳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 역시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시고 있습니다. 즉 엘리야가 왜곡된 모든 사물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개조시키는 도구가 되어 메시아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그가 오심을 준비하도록 할 것이라는 엘리야의 사명을(말 4:6)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로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했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이 목베어 죽임을 당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스러움에 대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아직 제자들이 올바르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뒷날 이 경험은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되어 제자들을 세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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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복음서에 있는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함께 했습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고 이 블로그의 마태복음에도 있고, 마가복음 YouTube 녹화분에도 있습니다.

이 변화산 사건은 사건 자체로도 놀라운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내용에 변화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다른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을 둘로 나누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있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변화산 사건 이전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하시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변화산 사건 이후로 부터는 그리스도란 누구인지를 전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에서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리스도란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라면 모름지기 모세와 같은 말씀의 권위와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수반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경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로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겠다고 하셨는데도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과 그것을 들은 제자들이 화를 내는 모습에서 그들이 그린 메시아는 세상에서 성공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는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고 할 수 있고, 그에 앞서 요한복은 21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도 예수님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시험에 합격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렇고, 사업에 실패하면 하나님께 뭔가 죄를 범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신앙관과 가치관 속의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육신의 평안을 주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시기는 말씀을 심도 있게 시작하신 변곡점이 바로 변화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변화산 사건 이후에 전개되는 예수님의 행적은 그런 관점에서 주의 깊게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특히 변화산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린아이에 대한 말씀, 바디메오의 사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의 상을 엎으시고 권세에 대하여 논쟁하시는 모습, 그리고 포도원 비유 등이 이어집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나 그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시는 말씀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각각의 사건들은 동영상으로 녹화하여 올려놓았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은 별도로 이렇게 글로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주제설교]

(조수현목사) 변화산 사건의 참의미

제목 : 변화산 사건의 참의미주제 : 구원 십자가 율법본문 : 마가복음 9:1-13말씀의 깊이 :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형이 되셔서 광채 나는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곳에 오래 전 구약 시대의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나타나서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그러다가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세분을 덮으시더니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러자 문득 둘러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데 없고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자 성경에서 이런 특이한 사건이 보여주는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이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등 공관 복음서에 전부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만큼 중요하고 독특한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는 이름의 기사입니다.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본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형이 되셔서 광채 나는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곳에 오래 전 구약 시대의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나타나서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그러다가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세분을 덮으시더니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러자 문득 둘러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데 없고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자 성경에서 이런 특이한 사건이 보여주는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1. 모세, 엘리야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위대먼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세분이 함께 계시다가 하늘에서 소리가 나더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데 없고 예수님만 계셨다고 하는 이 부분부터 실마리를 풀어 나가십시다.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지읍시다.”똑같은 초막 셋을 이렇게 짓자고 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이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세분을 똑같은 동급의 성인들인 것으로 생각을 했는가 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들과 같은 등급으로 제자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만약에 예수님을 위해서는 궁전을 짓고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는 초막을 짓자 이렇게 했으면 좋으련만 초막 셋을 다 똑같게 짓자고 제안을 한 것을 보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같은 등급으로 본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간데 없고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라고 보증을 하는 것을 보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오늘 이 사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2. 그 위대성은 “죽음”에 있는 것은 아닐까?그 다음을 또 보십시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갑자기 주님이 자기가 죽으셨다가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의아해 하면서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필경 무슨 뜻이 있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모세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더 위대하신 점은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나시기 때문에 더욱 위대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연결할 수가 있습니다.사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의 전수자입니다. 율법의 대표자로 성경에서 말하여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구약 예언자의 대표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자꾸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이 율법을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는다고 이렇게 권고의 말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변화산상에서 그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의 말씀은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남아 있게 되는데 주님이 자기는 죽었다가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4. 모세, 엘리야도 못한 인간 구원의 일을 예수님이자 그럼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모세도 못했고 엘리야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위대하신 예수님은 해 내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도 안되고 엘리야의 말로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었다가 사심으로 이루어 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인간의 구원 말입니다.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모세의 율법으로 될 것 같았으나 결국 안되었고 그 다음에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부지런히 말로 일렀으나 그래도 안되었습니다.결국은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이 직접 죽으셨다가 살아나심으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뜻입니다. 법으로도 안되고 말로 타일러도 안되고 그러자 이제는 주님께서 자기가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의 피를 흘려서 되었다는 것입니다.5. 엘리야의 경우 – 실패했다.조금 더 계속해서 본문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또 갑자기 묻습니다. “서기관들이 자꾸 엘리야가 먼저 와서 회복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동문서답인 것 같습니다만 다 연결이 되는 말들입니다.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아는,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이 또 특이합니다. 12절에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주님은 “정말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다 회복시킬 수 있는 줄 아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엘리야보다 나중에 오시는 메시야가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었겠는가?”엘리야보다 나중에 오실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보면 분명히 먼저 온 엘리야가 사실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데 실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번 타자가 안되니까 2번 타자가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1번 타자가 다 이룰 수 있다면 2번 타자가 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겠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논리입니다. 엘리야가 와서 다 회복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6. 오리라한 엘리야는 실상은 세례요한 – 실패했다.또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참 엘리야인 세례요한, 구약의 마지막 엘리야인 예언자 세례요한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왔으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다 회개하였습니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는데 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사람들이 듣고서 과연 다 돌아섰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고 헤롯의 부인 헤로디아가 죽여 버렸지 않습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결국은 이렇게 끝나 버렸습니다. 구약의 마지막이요, 최고의 예언자, 말 그대로 다시 내려온 엘리야를 사람들은 이렇게 대우해 버렸습니다.하나님께서는 구약에 보면 먼저 율법을 제정해 주시고 그 율법을 백성들이 듣지 않자 부지런히 엘리야들,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로 타일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지켰습니다. 그 사실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하36장 15절,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래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예레미야 7장 25절 ”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역시 거부했다는 말입니다.예레미야 25장 4절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 예레미야 29장 19절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마지막으로 예레미야 35장 14절 ”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그러니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법을 주시고 법을 안 지키자 부지런히 엘리야와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만 역시 안되었습니다. 경고해도 안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법대로 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이스라엘 땅에 멸망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망했습니다.7. 최후의 방법 – 예수 그리스도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이제 법의 방법이 아닌 또 말의 방법이 아닌 색다른 새로운 방법을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주님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대신 피흘려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입니다. 날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 그전에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고, 말로 해도 지키지 않던 자들이 마음이 감동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을 섬길 것으로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8. 모세 -> 여호수야(예수)에게 바톤을 넘김구약 율법의 대표자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비유되는 가나안까지 인도하지 못하고 중도에 죽었습니다. 그 대신 모세의 바톤을 이어 여호수아가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바로 예수입니다. 모세의 바톤이 여호수아 (예수님) 에게 넘겨 가서 가나안 땅, 천국으로 백성들을 인도한 것입니다.8. 엘리야 -> 엘리사(예수)에게 바톤을 넘김또 구약 예언자의 대표인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아세라 선지자, 바알 선지자와 맞 대결까지 벌였던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죽인다는 협박 앞에서 엘리야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서 하나님께 말을 합니다.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완전히 기권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으로 엘리야를 부르신 후에 누구한테 바톤을 넘기라고 하셨습니까?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서 엘리사에게 하는 일의 바톤을 넘기라고 했습니다.엘리사는 곧 신약 시대 예수의 예표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구약에서 제일 많은 기적을 행한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도 예수님만이 신약에서 하실 수 있는 그러한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엘리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합니다.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었습니다.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 살려내셨습니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추종자 100명을 먹였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엘리사는 불치의 병 문둥병자를 치료해 내었습니다. 구약에서 최초입니다. 예수님도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만의 기적을 행하신 분이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자입니다.9. 세례요한(엘리야) -> 예수에게 바톤을 넘김신약에도 세례 요한이 바로 마지막 예언자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바톤을 예수께 넘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세례요한도 바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긴 것입니다.자! 모세도 바톤을 여호수아 – 예수에게 넘겼고, 구약 엘리야도 바톤을 엘리사 – 예수에게 넘겼고, 신약의 마지막 엘리야인 세례요한도 바톤을 예수에게 넘겼습니다. 율법으로도 안되고 타이르는 예언의 말로도 안되고 이제 예수의 방법 십자가와 부활의 방법으로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법으로도 안되고 말로도 안되고 오직 피로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어떤 어머니가 자녀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책을 만들어 아들 방에다 붙였습니다. 이 명령의 법을 지켜야 참 내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못 지켰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지런히 아들을 데려다 놓고서 타이릅니다. 말로 권면합니다. 그래도 아들은 못합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매를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 대신 자신의 손을 때립니다. 하도 때려서 손에서 붉은 피가 나옵니다. 그전에 법으로 해도 안되고 말로 해도 안된 이 아들이 눈이 휘동그레 졌습니다. 이제야 아들은 비로소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서 울면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정말 인간은 법으로 안됩니다. 요즘 세대를 한 번 보십시다. 아무리 법을 만들어놓아도 인간은 지키지 못합니다. 부정 축재 법이 있어도, 선거법이 있어도 안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도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고 율법으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했습니다.아무리 말로 권고하고 홍보한다고 해도 못하는 것은 못합니다. 말로도 안됩니다. 언론에서, T. V에서, 라디오에서, 신문에서, 사설로, 논설로 권면하며 얼마나 백성들을 가르치고 말로 권면합니까? 그래도 안됩니다. 매일 보도되는 것을 보면 법을 어긴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올 뿐입니다.그러나 세 번째로 이렇게 완고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심령에 감동을 받으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인간입니다.주님은 십자가에 잡하시기 전날 밤 포도주와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요 피라.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 대신 주님이 당하셨습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이것을 보는 순간 법으로도 안되고 말로도 안되었으나, 우리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에 감동이 안 일어나겠습니까?어느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손끝에 피가 나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운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붉은 피를 보면 반드시 마음에 감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인간이라면 나 대신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보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 이제는 예수 앞에 나아와 주님은 믿을것입니다.만약에 이런 주님의 피를 보고서도, 이런 주님의 피를 내가 마시고서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없으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이미 사단의 종, 짐승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는 완전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주를 떠난 성도일지도 모릅니다.법과 말로 안되는 우리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서 피흘리는 방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주님을 섬기도록 하신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 본문을 통해서 확인하셨습니까?오늘 성찬식에 거룩한 살과 피를 받으시면서 우리 마음속에 감동이 되는지, 안되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동이 안되면 벌써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어린 아기도 피를 보면 운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주님의 보혈의 깊은 의미가 느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산 사건의 교훈

◇마태복음 17장에는 저 유명한 변화산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무엇인가 의논하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베드로가 불쑥 예수님께 우리가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을 위해 초막 셋을 짓고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이에 제자들이 놀라 두려워서 엎드려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했다. 이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1-8)는 것이다.◇여기에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가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들에게 전한 자로 신명기 34장에 의하면, 이 변화산 사건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이미 죽어 장사된 사람이다(신 34:1-8). 성경은 이 모세의 시체를 놓고 천사장 미카엘이 마귀와 소유권을 다투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유 1:9). 또 엘리야는 구약 예언자의 대표자로서 이 변화산 사건으로부터 900년 전 사람이다. 그는 열왕기하 2장에 의하면, 그의 제자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불수레와 불말이 호위하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다. 둘 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자들이다. 예수는 모세가 전한 율법을 완성하고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분으로, 변화산 사건은 곧 닥칠 십자가 희생을 앞두고 있는 때였다.◇그런데 분문은 구름 속에서 난 음성을 듣고 제자들은 엎드려 심히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다면 이 음성은 그 옛날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던 음성이나(출 3:4),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세벨의 낯이 두려워 도망가 숨어있던 엘리야에게 들려운 세미한 음성(왕상 19:12)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들은 책망의 음성(행 9;4)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위해 초막 셋을 짓고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는 베드로의 말에 그처럼 다급한 음성으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을까? 이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에 있다.◇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을 동격에 놓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모세나 엘리야와는 그 신분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의 복음이 모세의 율법이나, 엘리야의 에언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히 3:3-6). 따라서 복음은 생명의 떡이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예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변화산 사건은 증언하고 있다. 복음은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

누가복음 9장28절-36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으로 갈 때마다 제자들은 왜 그리도 잠을 자는 걸까요? 오늘 말씀에서도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 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인자를 따를 것을 상당히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2-27).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예수님과 달리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곳(마가복음 10:35-45)에서도 보여졌던 바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에 기대어 한 자리 차지할 생각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산상 변모의 사건은 예수님에게는‘별세(exodus)’를 준비하는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세(處世)’의 욕망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오늘 본문 뿐만이 아니라 끝까지(겟세마네) 예수님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 3인방은 기도도 하지 않고 졸고 있는 통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삼자 대화의 핵심을 놓치고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때 쯤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러니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는 자기들의 눈에 보인 것만이 다였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역사 상 최고의 인물 중의 하나인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었지요. 그 놀라운 모습을 본 것만으로 그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도 베드로가 제 정신이 아닌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아마 ‘우리 선생님이 저 정도였어? 저 분과 함께 있으면 이제 곧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겠지?.’ 이런 류의 이야기도 정신없이 주고 받았을 듯 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베드로가 흥분하여 하는 말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33, 새번역).

별세(別世)를 준비하는 예수님 앞에서 처세(處世)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한 말이었을까요? 모세, 엘리야와 함께 앞으로 닥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스라엘을 출애굽(exodus) 시켰던 것처럼 온 인류를 하나님의 나라로 진입시킬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피흘려 죽어야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저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 스승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아하고 있다니요.. 게다가 예수님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구원 사역을 계속해야하는데 여기서 살자니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 속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제자들의 헛소리를 잠재우고 정신을 차리게 하십니다. 산 위에 갑자기 구름이 덮입니다. 갑자기 산에 구름이 덮이는 것만 해도 무서운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 새번역). 보이는 것에만 정신 팔려있었던 제자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해주는 말입니다. 그들 눈에는 자신들의 스승 예수보다 모세와 엘리야가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늘 자기들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지냈던 예수님보다 이스라엘의 영웅들이 더 그럴 듯하게 보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에게 정신이 팔려 있으면 어떡합니까? 실제 중요한 인물은 예수님인데 말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36절에서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정신차리고 보니 예수님만 보이더랍니다. ‘우리가 뭘 잘 못 보았나?’ 제자 3인방은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그 당시에는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변화산 사건이라 불리는 이 기사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전부 기록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제자들보다 나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고뇌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지금도 애쓰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을 듣고 있나요?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의 역할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던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나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채 주님을 따르는 대신, 율법적 신앙(모세)으로 회귀하거나 이적과 기적(엘리야)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제자 3인방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면서도 예수님보다 예수님으로 얻게 될 물질적 축복이나 세상에서의 지위에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요?

하나님은 구름으로 제자들의 시야를 가리셨습니다. 세속에 오염된 눈을 가리셨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그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화려한 광채와 위대한 인물들로부터 그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눈을 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만 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어느 덧 대림절의 기다림과, 성탄의 기쁨, 주현절의 광채가 사순절의 수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순절의 끝에 부활절이 있음을 압니다. 그 순서를 압니다. 그런데도 가끔 그 순서를 ‘내 삶으로’ 따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약한 마음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욕심을 죽이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십자가의 길이 없이 어찌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온 몸으로 고난을 끌어안고 십자가로 향했던 주님곁에 잠들어 있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요? 세상의 왕으로 우뚝 서신 주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힘있게 펼쳐야 할 우리가 지금도 주님과 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다면, 지금도 주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보고 있다면, 지금도 주님의 말을 듣지 못하고 제 욕심의 말만 듣고 있다면, 2천년 전 변화산 위에서 있었던 영광스러운 장면과 함께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참회하듯 우리에게 전해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우린 과연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변화산 사건(마 17:1-13)

변화산 사건(마 17:1-13)

노승수 목사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야 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친지 엿새 후에 변화산의 일을 기록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엿새 후에’라는 표현은 상당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곧 새케이나 속에서 6일간 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말씀을 받으러 나아가는 장면(출 24:15-180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제자를 대동한 장면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대동한 장면을(출 24:1, 9) 주님의 얼굴이 해같이 변형된 사건은 모세가 율법을 수여받고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는 여러 차례 이런 기법들을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세례요한의 의복에 대한 표헌을 통해 엘리야를 연상되도록 했습니다. 이는 말라기에 예언된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예언의 성취로 표현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시며 이 그리스도를 가장 잘 이해하도록 계시된 책이 성경이며 성경은 그 전체 주제가 다 그리스도르를 나타내는데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마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말씀을 받은 사건은 그리스도의 이 변화산 사건의 그림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줄 곧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자로 묘사한 것처럼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을 위해 이후로 어떤 다른 구원의 계시가 필요치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우리기 이미 받은 성경과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을 능히 성취하기에 부족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계시의 최종 계시이며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의 몸을 우리 영혼의 입으로 먹으며 그의 몸에 참예하며 참으로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신앙을 날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육의 양식을 염두에 두심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의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 영혼에 관심을 두시고 계시며 그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참으로 우리 영혼은 이 말씀을 매일 먹음으로 우리 생명을 보존할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께 뿌리를 밖고 그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게 매일의 삶에서 없다면 신자가 아니거나 아사직전에 있는 신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갖가지 스팩을 갖추기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여러가지 자격증도 따고 어학도 능숙하게 합니다.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보험은 얼마나 발달했는지요. 이 땅을 사는 동안 있을지도 모를 질병이나 죽음 혹은 사망을 대비해서 갖가지 보험상품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많은 상품이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대비를 하면서 산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서 ‘보화를 하늘에 쌓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육신의 준비를 그렇게 철저히 하면서 영의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는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 생명이 보존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들은 신자들을 너무나 안심하게 합니다. 마치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임박한 진노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왜치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흔들려야 합니다. 자기 믿음을 확증해야 합니다. 나는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먹고 마시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만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두 선지자가 다시 와야 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증거하는데요. 모세의 경우 신명기를 통해 바로 그 선지자가 다시 와야함을 말하고 엘리야의 경우는 말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선지자로 와야함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다시 온다는 것은 환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보다 그와 같은 사역을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합니다. 특히 모세는 율법의 받은 자로 엘리야는 율법을 배도하는 것에 대한 고발자로 그려집니다(롬 11:2). 물론 예수님께서는 모세 역시 율법에 의한 기소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요 5:45). 구약에 있어서 오경은 율법을 나머지 선지서들은 율법에 대한 해석 곧 백성이 율법에서 어그러진 길을 걸을 때 그것을 율법에 의해 고소하는 역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율법 곧 구약성경은 궁극적으로 모두 그리스도의 오심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달리 보면 그리스도의 도래는 역시 심판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는 것은 이제 구약이 증거하던 바의 성취가 목적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이 대화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예루살렘에서 별새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눅 9:31)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별새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Exodus 곧 출애굽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2장에서 살폈듯이 예수님의 애굽으로의 피난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예언의 성취 곧 예루살렘은 애굽으로 보는 영적 관점을 그대로 들어내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행은 바로 이런 출애굽 곧 구속의 성취를 위한 것이고 모세와 엘리야는 바로 이것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출애굽에 있어서 홍해의 사건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사건이지만 바로와 애굽의 군대에게는 심판의 사건이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이 다시오시는 사건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사건이요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사건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그리스도에 의해 궁극적으로 이미 성취가 된 것입니다. 물론 장래에 다시 오심이 남아 있고 장소로서의 천국에 우리가 몸의 부활과 함께 들어가 살게 되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은 천사로 말미암아 준 것이라면(행 7:53, 갈 3:19), 이는 아들로 말미암아 주시는 말씀임을 성부께서 확증하여 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장의 천사와 그리스도의 비교는 천사와 비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말씀의 전달자로서 천사와 그리스도를 비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고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분명히 최종 계시입니다. 신약 성경의 여러 곳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즘 신사도운동은 성경의 이런 증언들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는 처사입니다.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고 성부께서 확증하여 이르시길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구약의 모든 계시는 바로 이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이 믿음의 안경이 없이는 결코 성경을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믿음이 있다면 성경의 진리를 풀어 가르칠 때 바르게 깨닫게 되며 그가 학식이 높은 자라 하더라도 믿음이 없이는 성경으로부터 생명의 진리를 길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이하에는 제자들의 의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예언을 따라 질문을 합니다. 세례 요한을 임의로 대우했습니다. 믿음이 없는고로 그리스도도 임의로 대우합니다. 어리석은 이 세대의 지도자들은 믿음이 없는고로 날씨는 읽을 줄 아나 시대의 표적은 읽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오셨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은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 그리고 그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까지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요한이 모든 일은 회복한다는 것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주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여호와의 날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이 심판과 구원의 날이 함께 하듯이 여호와의 날 역시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성령 강림이 여호와의 날의 성취라면 이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신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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