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를 위한 설교 |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 (2019-12-01 가족구원 전도축제) – 박한수 목사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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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1 사도행전 4:12
* * * 제자광성교회 * * *
주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일산로 462(정발산동 1140번지)
전화번호 : 031-975-4004
(박한수 위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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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위한 설교, 산 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의식이 없어도 임종 예배를 나누라. 영적으로는 소통할 수 있다. 5. 의식이 없어 보여도, 귀에 대고 성경을 읽어 주고 찬송을 불러 주라. 복음을 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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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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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장례 설교 : 네이버 블로그

헌신예배설교 닫힘 … 기관예배를위한기도 (0) … 마지막 대심판대 앞에서 주를 밎지 않던 불신자들이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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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3/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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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에게 가장 난감한 설교는… 불신자의 장례 설교 – 기독일보

엄밀한 의미에서 장례식도 일종의 예배로 보기 때문에, 불신자를 위한 장례예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난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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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5/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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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사는교회 – 2020.11.01. 벧후 3:9 목사가 불신자에 대한 …

그리고 이전에 정한조목사님은 자신이 집례하던 장례식 옆에서 어떤 목사가 교회를 출석하지 않던 분이 돌아가신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설교하기를 ‘우리는 이 사람의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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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acebook.com

Date Published: 5/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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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성도를 위한 임종 설교(계14:13;고후5:1~4), 불신자를 위한 임종 … 유족들은 고인과의 사별에 대한 충격으로 설교를 들을 만큼 심리적인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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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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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전도를 위한 설교자료 – 다음블로그

불신자 전도를 위한 설교자료 매형님에게 드릴 말씀.hwp 불신자 전도를 위한 설교자료 □ 고난의 의미 ㅇ 인간적으로 보면 매형님의 고난은 엄청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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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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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에게 가장 난감한 설교는… 불신자의 장례 설교

[정현욱 목사의 북토크 6] 장례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 엄밀한 의미에서 장례식도 일종의 예배로 보기 때문에, 불신자를 위한 장례예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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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9/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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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설교] “불신자에게 새 삶을 권면하라”(딤전 6:12) – 기혼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십니다. 이사야는 회개를 한 후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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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ihonsam153.tistory.com

Date Published: 6/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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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 설교집 – 10권 – 32.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 금란교회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히브리서 9장 27~28절, 시편 116편 15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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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umnan.org

Date Published: 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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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주검과 자살자를 위한 기독교 장례는 가능한가?/ 황대우

그래서 장례 설교와 메시지에는 신자에겐 소망을 품게 하고, 불신자에겐 복음을 들려주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난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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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rs.kr

Date Published: 7/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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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 (2019-12-01 가족구원 전도축제) - 박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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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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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dUrhDm-zZQ

죽은 자를 위한 설교, 산 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 김영봉 지음 / IVP / 236쪽 / 1만 1,000원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목사에게 장례식은 일상이다. 시골에서 오래 산 나는 장례 예배를 하러 나가시는 부모님 모습을 자주 봤다. 매주 교회 한쪽 구석에서 중얼중얼 기도하던 권사님이 더 이상 교회에 나오시지 않아도, 어린 나는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했다.

죽음을 실감한 건 스물한 살 때였다. 신학교를 다니며 교육전도사를 하던 시절, 교회 집사님이 하나님 부르심을 받았다. 집사님 관을 운구하며 그 무게만큼이나 남은 자들의 삶도 무거울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린 아들딸 앞에서 설교하던 목사님 모습이 기억난다. 그는 무슨 설교를 했고, 아이들은 무슨 설교를 들었을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말하는 건 어떻게 보면 우습다. 그러나 죽음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목사다. 이는 목사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부담이다. 먼저 간 사람 인생을 돌아보고, 남겨진 자를 위로해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목사 입을 응시한다. 그럴 때야말로 목사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IVP) 저자 김영봉 목사도 같은 고민을 겪었다. 목회 여정에서 마주한 수많은 죽음, 일반적이지 않은 죽음 앞에서 목사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그는 할 말 없음의 고뇌를 수차례 드러낸다.

“다 피기도 전에 꺾인 꽃처럼 고인은 그렇게 안타까이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다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저도 그냥 입 다물고 유가족과 함께 울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무슨 말이든 찾아 위로를 해야 하는 목사의 책임은 참 무겁습니다.” (49쪽) – 만 50세 나이에 부모와 아내, 고등학생 아들딸을 남기고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이의 장례 예배에서 “목사로서 저는 이 준비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슬픔에 빠져 있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들어야 마음이 위로를 받고 의문이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80쪽) –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인의 장례 예배에서 “목사는 자주 하나님의 대변자나 변호자가 되도록 요구당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목사에게 하나님을 대변하여 설명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중략)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이해 불가한 사건 앞에 설 때면 목사는 정말 괴롭습니다. 목사 자신에게도 대답 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어떻게 대변하거나 변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럴 때면 솔직히 목사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132쪽) – 분만실에 들어갔다가 시신이 되어 나온 이의 장례 예배에서 “이럴 때는 목사가 짊어져야 할 짐이 참 무겁게 느껴집니다. 아무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경에 목사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의미를 잃어버리는 이런 순간에도 뭔가 말해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습니다. 그냥 성경 말씀 한두 군데를 읽고 마치고 싶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한 말씀만 주소서!’라고 간구해 왔지만, 하나님도 하실 말씀이 없으신지 아무런 응답이 없으십니다.” (175쪽) –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인의 장례 예배에서

저자는 입을 연다. 폭력적이지 않았다.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영접 기도를 드리지 않았으니 천국에 갈 수 없다” 따위 말이 아니다. 그는 장례식장에서만큼은 전도의 열정을 자제하라고 했다. 대신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되짚었다.

고인의 삶을 반추하고 이를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는 과정은 산 자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들이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고인 삶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던 고인, 교인들과 원만하지 못한 고인 삶을 덤덤하게 말하되 그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영봉 목사는 한 사람을 위한 ‘맞춤 설교’ 효과는 마지막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열여섯 편 설교로 보여 주었다. 그는 “고별 설교는 한 사람의 일생을 구속(救贖)하는 일”(234쪽)이라고 말했다.

열여섯 편 설교 중 대부분은 일반적이지 않은 죽음을 다뤘다. 입 열기도 난감한 상황에서 어떤 말과 설교를 할 것인지, 독자들에게 깊이 있고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성경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돌아보는 데서 느껴진다. 그럴 때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난다. 타인의 죽음이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며, 삶의 무게와 죽음의 실존을 실감하게 한다. 저자가 수차례 암시하듯 죽은 자를 위한 설교는 기실 산 자에게 향한 메시지다.

저자는 11년 간 50여 건의 장례 예배를 집례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부록 ‘거룩하고 의미 있는 장례 예배’에는 임종 과정에서의 목회, 임종에서 애도까지 목사가 해야 할 일, 장례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이 담겼다. 잘 참고하면 고인과 유족, 신앙 공동체 모두에 유익이 될 것이다.

불신자 장례 설교

제목: 인생의 종말

찬송: 534, 539

성구: 창 49:28-30

인생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시유종(有始有終)한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났다가 때가 이르면 죽고마는 존재가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 지존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을 주심으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곧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생이 아닌 죽음이 다가옴으로 인해 인생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 사실입니다.

1. 죽음의 의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도 존재의 사라져버림도 아닌 분리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죽음이란 생명의 본체이신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범죄하면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겔18:4).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것이 곧 영혼의 죽음입니다.

둘째, 육체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가 영혼과 분리될 때 육체만 남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부패되고 썩어버립니다. 야고보서 2: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이것은 마지막 대심판대 앞에서 주를 밎지 않던 불신자들이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되어 고통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끝도 없는 세월 동안 단절된 상태와 분리된 상태 속에서 영육이 다같이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2. 사후 상태​

죽고 난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세 가지로 그 상태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첫째, 일반적인 상태인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은 후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죽거나 자는 것이 아니라 멸하지 않는 생을 가지며 죽은 후에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둘째, 신자의 상태를 보면 의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가서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립니다(히 12:23, 고후 5:1,6).

셋째, 불신자의 상태인데 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짐을 받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고통과 어두운 가운데서 대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서 능욕을 당하기 위해 부활하게 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좋은 세계로 갈 수도 있고 나쁜 세계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영원토록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는 날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부름을 받는 날도 있습니다.

임종예배 설교(믿지 않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제목: 영원한 장막

찬송: 187, 188

성구: 고후 5:1-5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육신의 장막집은 언젠가는 무너질 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흙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으신 장막집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우리 인생이 그렇다면 우리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나서는 반드시 선악을 판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그네 인생을 잘 살아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천국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아도 믿음으로 준비하며, 우리도 우리의 장막집을 벗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소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리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

사람의 몸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의 생명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날이 한 번 불어 흔적도 없어지는 바람 같고 공중에 쏘아서 금방 보이지 않게 되는 살과도 같습니다. 해가 오르면 말라서 사라지는 아침 이슬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가야합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같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귀한 유족들의 영혼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아버지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라건대 사랑하는 유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도 지금 바로 이 위로가 함께하사 과도한 슬픔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주신 대신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천국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이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로 집을 짓고 어떤 이는 돈으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이는 힘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지은 집은 육체가 죽는 그 순간에 함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목사에게 가장 난감한 설교는… 불신자의 장례 설교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김영봉 | IVP | 236쪽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마이클 부쉬 | 김요한 역 | 새물결플러스 | 224쪽

처음 목사 안수를 받고 몇 달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전임 사역도 얼마 되지 않았고 교구를 맡아 심방과 결혼식, 장례식 등 모든 게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정말 힘들었던 것은 장례식이었습니다. 지켜보기만 하고 한 번도 직접 해 보지 않아서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유족들을 위로해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특히 화장하는 경우는 수월했지만, 매장하는 경우는 장지까지 내려가야 하고 순서도 복잡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정말 힘들었던 시간은 불신자의 장례였습니다. 자녀가 교회 성도이기 때문에 불신자이지만 부모의 장례식을 집도해 달라고 부탁해 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장례식도 일종의 예배로 보기 때문에, 불신자를 위한 장례예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난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난감해 선배 목사님께 물어도 뾰족한 수도 없고 뻔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어떤 분은 거절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어떤 분은 망자가 아닌 유족을 위해 예배해야 한다면 수락하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만약 유족 중 불신자가 많다면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천국과 지옥을 설교하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았고, 그러한 난감함은 사역하는 동안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때론 천국과 지옥을 설교했고, 때론 망자와 아무 상관도 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도대체 장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그런데 수개월 전 김영봉 목사의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를 읽고, 장례 설교가 무엇인지 깊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또한 탁월한 장례 설교를 마이클 부쉬가 엮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는 바른 장례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은 두 책을 통해 장례식 설교가 무엇이고 상황별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장례 설교란 무엇인가?

장례식이 예배인가 아닌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먼저 저는 넓은 범주에서 장례식을 예배 안으로 넣고 장례식과 장례식 설교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에 장례식에 대한 짤막한 안내가 있습니다. 하나는 ‘적당한 시나 찬송을 부르고 합당한 성경을 낭독하고 목사가 생각하는 대로 합당한 설명을’ 하며, ‘비참한 일을 당한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며, 저희의 슬픔이 변하여 영원한 유익이 되게 하며 저희가 보호하심을 받아 비참한 가운데서 위로함을 받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부분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장례식의 목적은 ‘경계함과 훈계함과 생존의 위로함’에 주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여 신앙 없이 생활하다 별세한 자도 복음의 소망이 있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비록 짧은 설명이긴 하지만, 목사들이 어떻게 장례식을 대해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장례식의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빈약한 설명입니다.

이에 비해 김영봉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해석된 한 사람의 인생은 고인에 대한 존경과 유가족에 대한 위로가 되는 동시에 조객들에게는 영감과 지혜의 원천이 됩니다. … 독자들로 하여금 해석된 여러 인생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도록 돕기 위함입니다(14쪽).”

엄밀한 의미에서 장례식은 장례예배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배 형식을 취하며, 사람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넓은 범위의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장례식 설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이 돼야 함이 마땅합니다. 마이클 부쉬가 편집한 책에서 서문을 쓴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설교들에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반복됩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또는 젊은이의 짧은 생으로 인한 슬픔을 넘어서, 그들 가운데 머물렀던 아이의 존재에 대한 감사입니다. … 다른 하나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12쪽).”

이렇게 보면 장례식 설교는 비록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의미가 있지만, 핵심은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옳습니다. 즉 그의 삶에서 교훈을 얻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소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설교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총회 헌법이 ‘경계함과 훈계함과 생존의 위로함’에 주의하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해설이라고 믿습니다.

그럼 장례식 설교의 실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와 70대 후반에 골수암으로 돌아가신 여성분입니다. 남편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곳에 아내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골수암 진단을 받자 병원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3년 동안을 함께 생활했습니다.

남편은 자서전에 ‘만일 아내를 정신병원에 맡겼더라면, 지난 40년 동안 아내와 나누었던 사랑의 관계를 결코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40쪽)’ 라고 적었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고인과 남편의 관계를 언급하면서도 동행의 아름다움을 찾아냅니다. 비록 암으로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50세에 뇌종양으로 노부모와 자녀들,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떠난 가장입니다. 가족들은 참혹한 치료의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그는 하루 하루 죽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의 죽음을 설명하기에 신정론이란 조직신학적 명칭만으로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인생에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55쪽).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갈등하는 이들에게, 흑백논리로 하나님의 뜻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격다짐으로 강제한다면, 가족들은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스물 둘에 교통사고로 먼저 천국에 보낸 하워드 에딩턴은 아들의 장례를 직접 집례하면서 담담하게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런 삶의 불확실함 가운데서도 최후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03쪽).”

아들의 장례를 집례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상상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은 죽어도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 설교 가운데 네 아이들을 대서양에서 잃은 필립 블러스가 작시한 찬양을 소개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능력이 아닌 소망에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할 수 있는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례식 설교는 슬픔은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에게 가장 난감한 설교가 불신자의 장례 설교입니다. 김영봉 목사는 아내의 실수로 교통사고로 죽은 불신자의 설교에서 그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불신자 장례 설교는 먼저 그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고인이 살아생전 썼던 일기와 일상을 언급합니다.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장례 설교는 ‘잘 해석된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의 사고로 남편이 죽은 것은 ‘사고’가 아니라 ‘때가 되어 하나님이 불러가셨다고 받아들이라(93쪽)’는 충고는 현명해 보입니다. 모든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장례 설교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그 사람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故 춘계 이종성 목사의 장례식.

나가면서

김영봉 목사는 장례 설교에 대해 몇 가지를 조언합니다. 먼저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긴 설교를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장례식이 진행되는 곳은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도의 열심히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하라(232쪽)’고 당부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감동을 주지 못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결국 고인의 인생을 해석하는 ‘맞춤 설교(233쪽)’가 좋은데, 그것은 고인의 삶과 글, 생전의 대화 등을 통해 고인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장례식은 고인의 마지막 여정을 같이함과 동시에 남은 유족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장례 설교는 한 사람의 바른 해석과 소망을 주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마땅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영봉 목사의 조언으로 마무리합니다.

“전기는 해석된 역사입니다. 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사건일 뿐입니다. 해석되지 않은 한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입니다. … 해석은 칭찬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해석입니다.”

/정현욱 목사(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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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전도를 위한 설교자료

불신자 전도를 위한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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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전도를 위한 설교자료

□ 고난의 의미

ㅇ 인간적으로 보면 매형님의 고난은 엄청난 고난이자 슬픔

ㅇ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새로운 소망이자 기회

*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1~4)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ㅇ 고난을 통해 믿음을 얻고 행복해진 사람들

□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

ㅇ 마귀, 귀신은 실제 존재하는가 ?

– 무당이 되는 과정과 능력 : 탈랜트 정ㅇㅇ- 악역전문, 광개토왕에서 풍발

– 마귀, 귀신 때문에 죽이고 죽는 사람들 : 지존파 및 막가파, 강호순, 최ㅇㅇ과 주위 사람들

– 마귀와 귀신의 역할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 마귀가 가롯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집어넣었더니(요한복음 13:2)

ㅇ 하나님(예수, 성령)은 실제 존재하는가 ?

– 성경은 총 40명이 1,600년 동안 지은 책으로 놀랍게도 처음과 끝 모두가 일치. 일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 인류의 역사를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BC와 AD로 구분

– 수년천 역사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음악, 미술품, 건물 등이 만들어짐

– 예수가 전파되는 곳마다 기적적으로 경제와 문명발달(예수전파 과정 : 이스라엘 → 로마 → 유럽대륙(문명역전) → 영국(산업혁명) → 미국(건국 200년만에 1등 국가) → 한국(한강의 기적) → 중국(신도 1억명, 경제대국 성장)

ㅇ 하나님(예수 및 성령)과 마귀(악영, 귀신)의 차이점

– 인간의지 인정↔불인정, 생명↔죽음, 사랑과 섬김, 희망 ↔ 미움과 교만, 절망 등

□ 하나님을 만나 복된 인생을 사는 방법

ㅇ 예수님을 영접(마음을 열고 만나주시기를 기도-예수님 그림, 회개-특히 교회 및 교인들을 비판했던 것들 )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3)

ㅇ 하나님을 찾고자 노력하라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누가복음 11:9)

*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지옥)에 던져니는 것보다 나으니라(마태복음 18:8)

– 이기웅 목사 사례(박정희․전두환시절:사회정화운동위원회 위원, 수천억원대의 기업가, 교회 및 아내 핍박, 오산리기도원 기도굴에서 하나님(예수) 욕하다 불덩이에 맞음, 집에서 기도 중 천국과 지옥경험, 수천억 재산을 정리하고 목사가 됨)

ㅇ 하나님(예수, 성령)을 알고자 하는 노력 필요

– 말씀읽기와 기도생활화, 좋은 교회 출석

– 좋은 간증 및 책 보기

– 하나님(예수, 성령)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

[새벽기도 설교] “불신자에게 새 삶을 권면하라”(딤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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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새벽기도 설교 중에서 불신자에게 새 삶을 권면하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 보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믿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하나님을 욕하고 그리스도인을 보면 비아냥거리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화가 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화만 낼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해서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새 삶을 권면하라”(딤전 6:12)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양은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정한 기간에 단 한 번씩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공통된 점입니다. 사람은 한 번 이 땅에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마지막은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길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신 후 우리에게 살아가는 목적을 분명히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후에는 인격을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한없는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십니다. 이사야는 회개를 한 후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깨닫고 나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오늘 새벽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 절망은 휴지처럼 찢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악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다 씻김을 받고 우리의 영혼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에는 두려워하는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확고한 인생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허무나 회의나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다면 죽음도 두렵고 세상에서의 삶도 두렵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거듭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더 이상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생의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인생을 체험하고 새 존재, 새 생명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사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실 때 우리도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소명받은 우리는 이 세상과 불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다가올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권면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 우리의 이웃, 우리가 속한 불신사회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생의 등불을 비춰주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죽음과 절망과 허무에 부닥쳐 죄악의 어둠에서 인생을 끝마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힘을 얻고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받아 그 당시의 암담한 시대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했듯이 우리로 이 암담한 시대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뜨거운 사명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가진 자들은 진리의 무기를 받았으니 이 무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있는 백성들에게 진리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저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며 살 수 있도록 늘 지켜 주옵소서. 이 새벽을 깨워 주님께 기도하오니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러 가겠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이 시간 결단하여 진리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진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둠에 전하여 많은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삼천 명 오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교회에게 이런 사명을 주셔서 말씀이 선포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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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32.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히브리서 9장 27~28절, 시편 116편 15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1683년 영국의 애국자 윌리암 럿셀 경이 처형될 때 형장에 동석한 의사에게 시계를 꺼내주면서 말하기를 “이 시계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제 나는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므로 이런 시계는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거나 또 누구나 자기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며, 나와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 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엄숙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가 살아서 이루워진다면 구원받은 신자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번데기가 변화되어 나비가 되듯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나 여러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것입니다.

1963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죽었고 이어서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도 죽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그렇게 죽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죽음에 대한 준비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을 위해 준비한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보람 있고,가치 있고, 영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일에 다 성공했어도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계속됩니다.

많은 목회경험을 가진 어느 목사님의 간증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멸시하던 불신자의 죽음은 분명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어느 의사와 간호원의 말을 들어보면 교인과 불신자의 죽음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 같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아 왔다고 합니다.

1. 불신자의 죽음

불신자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므로 큰 공포와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778년에 죽은 무신론자 볼테르(Voltaire)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입니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주님! 예수님!”그러면서 “나의 생명 6개월만 연장시켜 준다면 나의 재산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1679년에 죽은 홉스(Hobbes)는 임종 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면 나의 생명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연장시켜 주는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 나는 지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갬베타(Gambetta)라는 불신자는 죽으면서 “나는 잃어버린 자이다. 이제 내가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케사르 보르지어는 “나는 살아서 모든 것을 예비하였으나 죽음에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는데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후회하며 죽었습니다.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라는 나쁜 책을 쓴 토마스 페인은 죽어가는 자리에서 “내가 쓴 이성의 시대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그 책을 모두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내 모든 것 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시여, 나를 구원하옵소서! 나와 함께 있어 주시옵소서! 홀로 있으면 지옥같이 무섭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불신자가 죽을 때는 흑암의 사자들이 어둠 속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영안이 열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자는 주님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을 얻고 수고와 선행에 따라 상급과 면류관을 받지만 불신자는 천년왕국시대가 지난 후에 심판의 부활을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 영원히 슬피 울며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 태어난 사람은(육신과 영혼의 거듭남) 한번 죽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했습니다. 죽음이란 육신과 영혼이 분리(separate)되는 것이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2. 신자의 죽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음 후에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되고, 주님 재림 시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던 어린 소녀가 그만 죽게 되었을 때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그 부모가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고 나서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 밖에서 놀다 들어와서 아래층에서 잠이 들면 아빠가 팔로 안아서 이층의 좋은 방에다 눕혀 주는 것을 경험했지? 죽음이란 바로 그와 같단다. 죄와 고통이 많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데려가시려고 잠들기를 기다린단다.”하고 설명해 주니까 환하게 웃으면서 하나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 시에 살아있던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고 나의 구주로 영접한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요 3:16, 5:24, 3:36). 그러므로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죽는 사람은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며 승리감에 넘치게 됩니다.

우리 금란교회를 개척해 주신 고 김활란 박사님은 평생 믿음으로 생활하다가 임종 시에 유언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죽거든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다오.”제가 김활란 박사님 돌아가신 후 몇 십 명 모일 때 부임해 왔는데, 오늘날까지 계속 부흥되어 오고 지금 수천 평의 예배당을 짓게까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김활란 박사님이 하늘나라에서까지 당신이 세운 금란교회가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그 분은 하늘나라에서 이화대학이나 이화여고, 금란여고, 영란여고보다 금란교회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그로 인하여 나는 죽음을 면하였습니다.”고 하였고, 존 녹스(John Knox)는 임종 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니 내 육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고 하였고, 존 웨슬리(John W esley)는 “최상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라고 했고,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에게 평화가 있습니다”라고 했고, 조셉 에베레트는 “영광! 영광! 영광!”하면서 임종 시 마지막 25분 동안을 기쁨이 넘쳐서 영광만 외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살면 너희들을 볼 수 있고 복음을 더 전할 수 있으니 좋고, 죽으면 고난의 생활이 그치고 주님 곁으로 가니 더 좋다는 뜻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뜻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박사님의 할머니는 임종 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보았어. 예수님이 친히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아 주셨어. 그 곁에는 두 눈,두 다리가 성한 벤(Ben)이 서 있단다”(Ben은 남편인데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한쪽 다리와 한 쪽 눈을 잃었다고 함)고 말했습니다.

어느 식품점을 경영하던 노인이 죽을 때 “프랭크 저 음악소리 들려요?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음악 이예요. 저 오케스트라, 저 찬양대, 아! 천사들의 노래”하면서 숨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님은 자기는 살아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변화를 받겠느냐, 죽었다가 부활하겠느냐,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죽었다가 부활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거쳐 부활하셨으니 자기도 예수님 거치신 과정을 거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차라리 죽읍시다. 우리 대장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셨으니 군병들도 즐거이 따릅시다.”했습니다.

두려움이 문을 두드릴 때 믿음의 대답을 보내십시오. 그러면 문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어떤 분이 말하기를 “나침반의 바늘이 북쪽에 자리 잡기까지는 떨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도 천국에 도달할 대 까지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시편 116편 15절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가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십니다. 가난하게 살다 죽어도 귀중히 보시고, 교통사고로 죽든지, 불치의 병으로 죽든지,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십니다. 전쟁터에서 외로이 죽든지, 이역만리 타국에서 죽든지 하나님은 다 귀중히 보십니다.

3. 지혜로운 삶

그러므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 때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며, 또한 나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C. T.스터트는 캠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다음과 같은 글을썼습니다. “오직 한번 뿐인 인생, 그러나 그것도 덧없이 지나가리.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일,그리스도를 위해 바친 시간, 그리스도를 위해 쓴 물질,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한 것만이 영원히 남는 것이요,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했으며,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에 대해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좀 더 바르게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승리하시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불신 주검과 자살자를 위한 기독교 장례는 가능한가?/ 황대우

*본 글은 “개혁정론”에 기고된 것입니다.

불신 주검과 자살자를 위한 기독교 장례는 가능한가?

작성자: 황대우

죽은 불신자나 자살한 사람을 위해서도 기독교 장례식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부정적일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 장례란 신자를 위한 것이지 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것은 간단한 문제도 아니고, 해결책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모든 것은 경우마다 상이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가령 신실한 집사 부부나 장로 부부의 양가 부모님 가운데 한분이 불신 죽음을 맞이했을 경우에 죽은 당사자가 불신자이기 때문에 기독교 장례를 치를 수 없는가? 이 질문 앞에 목회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기독교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상주가 기독교 장례를 원한다면 대부분 기독교 장례로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경우에는 왜 ‘불가’가 아닌 ‘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례식에 찾아오는 불신 인척과 친척에게 전도할 수 있는 호기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 죽은 사람이 신실한 집사였으나 혼자만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가족들이 기독교 장례를 강력히 반대할 경우 비록 신자의 죽음이지만 기독교 장례를 치를 도리가 없다.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불교식 혹은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교리적인 차원이나 신앙적은 측면을 고려한다면 이런 경우가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당황스럽고 황당하다. 왜냐하면 부정적으로는 죽음이 죄의 결과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하는 고통이지만, 긍적적으로는 모든 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는 기회요, 더 나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런 방해 없이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는 지복(至福),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신자의 장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동료 신자들에 의해 치러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할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럴 경우 살아 있는 동료 신자들은 비록 그의 시신을 두고 장례를 치르진 못할지라도 ‘추모’ 형식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따로 치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불신자가 죽었을 경우 그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나 유교의 장례식은 오직 죽은 자만을 위한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교리적으로 보면 신자의 장례식장은 분명 슬픔의 자리가 아닌, 기쁨의 자리다. 그러므로 신자들에 의한 신자의 장례식장에서는 인간적인 이별의 슬픔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연합에 들어간 것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경우 둘 다 이와 같은 기쁨과 축하와 위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불신자의 죽음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연합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며 위로하고 소망하는 일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죽은 사람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해달라는 유가족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쉽게 응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단호하게 거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 역사에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를 그 지역의 사제나 교구 목사가 담당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죽은 사람의 신분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도 시신을 묻고 매우 짧은 기도문을 외우는 등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천주교는 제사도 수용하기 때문에 죽은 불신자나 자살자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 아무런 문제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개신교에서는 죽은 불신자나 자살자의 장례가 당연히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는 원칙은 죽은 자가 단지 불신자인 경우에만 적용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그 원칙이 신자건 불신자건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 문제로 불신자의 장례를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신자의 죽음에서 단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죽음이 죽은 당사자에게 최고의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또한 이 사실에 기인하는 축복과 위로와 소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곤란한 문제들이 과연 개신교 목회자에게 불신자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는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사실상 개신교 장례는 죽은 당사자보다는 오히려 남은 유가족이나 장례식에 참석한 하객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불신자의 장례를 금지할 이유는 딱히 없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가 신자였건 불신자였건 유족들이나 하객들이 모두 신자가 아니라면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의미가 장례식에서 순전하게 적용되기는 어렵다. 또한 현재 한국 개신교의 장례 문화가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더 큰 문제는 후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상 유교적 장례 문화의 잔재인 부조 때문에 유족들이나 하객들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기독교인 장례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우리의 장례 문화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이 강조되지는 않는다. 또한 장차 누리게 될 온전한 연합에 대한 소망이 가장 중요한 장례 요소로 자리 잡은 것도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 장례식을 집례 하는 목회자가 고려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실상 참석한 유가족이나 하객들이다. 그래서 장례 설교와 메시지에는 신자에겐 소망을 품게 하고, 불신자에겐 복음을 들려주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난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메시지는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장례 문화와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 장례식에서 뺄 수 없는 기본 요소가 되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교회 안에서 불신자의 주검을 기독교 장례식으로 치르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할 당위성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불신 죽음을 기독교 장례식으로 치르도록 허용할 수 있다면 자살자의 죽음 역시 허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연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가 죽은 불신자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르는 것을 금하는가? 이것을 직접적으로 금하는 성경 말씀과 기독교 교리가 있는가? 아무튼 죽은 자가 불신자든 신자든 기독교 장례식으로 치르지 못하거나 목사가 그 장례식을 집례하지 못할 근본적인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 죽은 자의 장례를 맡아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선한 일이요, 한국 상황에서 불신자의 장례를 맡아 처리하는 것은 전도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기도 하다. 마음껏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격인데, 그런 장례 집례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전도를 위해서라면 교회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각 시대의 교회마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먼저 그와 연관된 교회의 교리와 역사를 살핀 다음, 무엇이 교회 건설(aedificatio ecclesiae)을 위해 더 정당하고 유익한지 신중하게 고민하여 선한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또한 새로운 관행을 만들 자유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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