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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_빗살무늬 토기
뾰족 뾰족 고깔 모양 그릇
바깥 면엔 주룩주룩 비가 내려
음식을 저장 음식을 요리
토기 토기
빗살 무늬 토기
#최태성 #별별역사기차 #빗살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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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 나무위키:대문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서, 전체적인 모양은 타원포물면과 흡사하며 그릇 표면을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그어서 점·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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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3/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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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뾰족한 포탄모양의 형태를 하고 토기 겉면은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된 토기입니다. 기원전 4,500년경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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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useum.go.kr

Date Published: 5/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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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 우리역사넷

빗살무늬토기라는 명칭은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무늬 새기개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장식한 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밖에도 빗살무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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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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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 우리역사넷

빗살무늬토기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밑이 뾰족하고 빗살무늬가 새겨진 특정 토기만을 지칭하였으나 현재는 원시무문토기와 덧무늬토기 등 신석기시대 초기 토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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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7/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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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문화 – 서울 암사동 유적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 토기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포탄형 또는 반계란형으로 생긴 몸체에 음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 넣은 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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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unsa.gangdong.go.kr

Date Published: 9/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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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빗살 무늬 토기

  • Author: KBSKids TV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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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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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추천 소장품:국립중앙박물관

1만년 전, 길고 추었던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토기는 변화된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도구의 하나이지만, 구석기시대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자연자원의 활용, 음식의 조리, 정착생활 등 인류 생활의 큰 변화를 이끄는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 있어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석기시대를 상징하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토기의 출현과 의미

부산 동삼동에서 발견된 덧무늬토기의 모습.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점토가 불에 구워지면 단단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빚고 불에 구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죽이나 식물의 줄기로 만든 것을 이용해 음식을 저장하고 운반하였습니다. 하지만 토기를 만들게 되면서 액체를 저장하거나 불로 음식을 조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즉, 이전에는 날로 먹거나 불에 구워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토기를 이용하여 다양한 조리가 가능해졌고 날로 먹게 되면 유해하거나 섭취가 어려웠던 식물자원도 식량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식량자원이 보다 다양해 질 수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사냥 대신 주변의 다양한 식물자원을 식량으로 활용하면서 안정적인 식생활의 유지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한곳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토기는 흔히 빗살무늬토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토기는 무늬가 없는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것입니다. 제주도 고산리에서 확인된 이 토기는 토기를 빚을 때 풀과 같은 유기물을 첨가하여 만들었는데, 구석기시대 석기제작기술을 보여주는 돌 화살촉과 함께 확인되며 기원전 8,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덧무늬토기, 누른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고산리식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토기에 앞서 만들어진 또 다른 토기들로는 덧무늬토기와 누른무늬토기가 있습니다. 덧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진흙으로 만든 띠를 붙여 다양한 장식을 한 토기로 부산, 통영,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의 양양과 고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6000년경에서 기원전 3500년경까지 사용되었던 이 토기는 ‘고산리식 토기’가 확인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된 토기로 알려져 왔습니다. 누른무늬토기는 그릇의 아가리 주변을 무늬 새기개로 누르거나 찔러서 무늬를 장식한 것으로, 덧무늬토기와 비슷한 시기와 분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뾰족한 포탄모양의 형태를 하고 토기 겉면은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된 토기입니다. 기원전 4,500년경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뒤, 기원전 3,500년경 한반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전의 덧무늬토기나 누른무늬토기에 비해 넓은 분포권을 가지고 오랫동안 사용된 대표적인 토기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 부르기도 합니다.

빗살무늬토기의 문양과 지역적 차이

남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 남부지역 그릇의 형태는 아가리가 넓고 문양은 깊고 굵은 선을 이용하며, 이전의 덧무늬토기에서 많이 보이던 집선문이 많이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빗살무늬토기는 그릇의 형태와 장식된 문양에 따라 중서부지역, 남부지역, 동북지역, 서부지역 등 네 개의 지역군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한강과 대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서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뾰족한 바닥과 곧추선 아가리를 하고 있는 길쭉한 포탄모양이 특징입니다. 처음에는 토기의 겉면을 아가리-몸통-바닥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다른 문양을 채운 토기를 만들었지만, 점차 바닥이나 몸통의 문양을 생략하거나 같은 문양만으로 장식하는 경향으로 변화합니다. 낙동강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지역에 비해 아가리는 넓고 높이가 낮으며, 바닥도 둥근 형태에 가까운 반란형(半卵形)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문양도 처음에는 중서부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릇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문양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였지만, 점차 아가리를 중심으로 세모나 마름모꼴의 집선문(集線文)이나 문살무늬[格子文]로 채우고 몸통 아래에는 문양은 생략됩니다. 중서부지역과 유사하지만, 그릇의 형태는 아가리가 넓고 문양은 깊고 굵은 선을 이용하며, 이전의 덧무늬토기에서 많이 보이던 집선문이 많이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편 두만강을 중심으로 동해안 중부일대를 포함하는 동북지역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바닥이 납작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그릇의 종류나 문양의 구성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적으로 다른 특징을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기 겉면을 가득 채웠던 규칙적인 기하학적 문양이 간략화하고 불규칙적으로 바뀌면서 기원전 1,500년경 청동기시대의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로 점차 바뀌게 됩니다.

토기로 보는 신석기인들의 생활양식과 미적양식

소장품 검색:국립중앙박물관

덧무늬토기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여러 기하학적 무늬는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기는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겉면을 삼등분하고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하였다. 토기 아래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깨진 토기를 임시로 수리하여 사용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당시의 토기는 누구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드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빗살무늬토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암사동 선사유적지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시대( ── 土器時代) 또는 즐문토기 시대(櫛文土器時代, Jeulmun pottery period)는 한반도의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으로 기원전 8200년부터 기원전 1500년에 이른다. 이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토기에 빗살과 같은 모양의 무늬가 발견되어 이것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주로 곡식의 씨나 먹다남은 음식따위를 저장하는 용도로 쓰였다.

개요 [ 편집 ]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대로, 한반도는 신석기 시대이며, 농업은 아직 소규모인 수렵과 채집이 중심이었던 시대이다.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무늬새기개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그린 토기이다. 대체로 나무·뼈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 면에 짤막한 줄이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처럼 생긴 것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 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로 섭씨 600~700℃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의 용도는 그 크기에 따라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의 독과 같이 대형은 저장용, 중형은 취사용, 소형은 식기와 음식준비 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빗살무늬그릇은 형태와 무늬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역사 [ 편집 ]

초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초기 [ 편집 ]

초기는 기원전 8200년에서 기원전 6000년경까지 이른다. 초기의 토기로서는 남부에서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 융기문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겉면에 진흙띠를 덧대어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하여 무늬를 만든 것이다.

덧무늬토기는 남쪽으로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사적 266호, 영도구)과 영선동 유적, 울산 우봉리 유적, 거창 임불리 유적, 양산 신암리, 통영 상노대도 등과 남부 지역과 양양 오산리 유적, 춘천 내평리 등 북부지방까지 남해안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도 발견되었다.[1]

일본 쓰시마섬의 고시다카 유적(越高遺蹟)에서도 부산 동삼동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기원전 5000년∼기원전 4500년의 것으로 보이는 덧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전기 [ 편집 ]

전기는 기원전 6000년부터 기원전 3500년경까지로 추측된다. 어로나 수렵을 하고, 움집에 반정주적 인 생활을 했다. 후반기에는 대규모 패총을 볼 수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빗살무늬 토기〉가 출현한다. 이것은 유라시아 북부 일대(핀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만주 등)에 퍼진 넓은 의미의 《빗살무늬토기(Comb ceramic)》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2]

한편 조몬 시대 전기에 일본 열도의 규슈에서 난세이 제도까지 퍼진 《증전식 토기(曾畑式土器)》도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기 [ 편집 ]

중기는 기원전 35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경으로 여겨진다. 잡곡 등의 재배가 시작되었지만, 중심은 어로나 수렵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유적(사적 제266호)은 이 시기의 조개더미 유적으로 1930년 초반 일본인들에 의한 소규모 발굴이 있었으며, 1962년~64년까지 미국인들에 의한 발굴이, 1969년~1971년은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발굴을 하였다.

이 시기에 빗살무늬 토기가 서해안의 내륙과 남해안에서 발견되었다.

후기 [ 편집 ]

후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경으로 추측된다. 내륙부의 거주가 증가하여 패총의 수가 줄어들고, 농업에 의존하는 생활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 민무늬 토기(기원전 1500년~기원전 1250년)의 등장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소규모의 농경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후기 빗살무늬 토기는 랴오닝의 샤자디안 하층문화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가 이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후기 빗살무늬 토기 시대의 사람들은 점차 남쪽으로 이주하여 농경으로 전환된 민무늬 토기의 사람들로 바뀌어 갔다.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유적이나 합천댐 수몰지구에서 발견된 거창군 임불리 유적 등이 이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사진 [ 편집 ]

빗살무늬토기2

빗살무늬토기3

빗살무늬토기4

다양한 모습의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만들기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및 참고 문헌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빗살무늬토기(─土器)

토기의 일반적인 형태는 바닥면이 포탄모양으로 뾰족한 첨저형(尖底形)과 편평한 화분모양의 평저형(平底形)의 두 종류가 있다.

1. 첨저형 토기

첨저형 토기는 바탕흙인 점토를 빚어서 만들 때 운모(雲母)를 섞었으며,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도 있다.

토기를 제작하는 방법에는, 반죽한 점토를 일정한 크기의 반지모양의 테로 만들어 쌓아 만드는 법, 길고 납작하게 만든 점토띠를 아래로부터 위로 감아 올려 만드는 법, 점토 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눌러 빚어 토기모양을 만드는 법 등 3가지 방법이 있다.

토기 겉면에는 1개 또는 여러 개의 이가 달린 무늬새기개로 긋거나 눌러서 무늬를 새겼다. 토지 겉면을 평행으로 3등분해 위로부터 구연부·기복부·저부로 나눌 때, 각 부분에 각각 다른 무늬를 장식하는 것이 많다.

구연부를 장식하는 주요무늬로는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점렬문(點列文)·사격자문(斜格子文) 등이 있으나 평행밀집사단선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복부에는 평행사선을 어긋나게 그은, 마치 물고기뼈모양의 어골문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저부에는 평행사선문 또는 어골문 등으로 시문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구연부의 평행밀집사단선문과 기복부의 어골문이 결합한 형태가 수적으로 가장 많다. 또 이러한 구연부문과 기복부문의 사이에 파상점선문(波狀點線文)과 같이 곡선으로 된 특징있는 문양이 끼어 있는 것도 있으나 수적으로 많지는 않다.

이와 같이 토기의 각 부분마다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되는 종류 외에, 한 가지 무늬로 토기 겉면의 전체 또는 부분을 장식하는 종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앞에서 기복부에 가장 많이 새겼던 어골문으로 겉면 전체 또는 일부를 장식하는 예가 많다.

2. 평저형 토기

평저형토기에는 바탕흙에다 돌을 모래알 만하게 잘게 부숴 섞어 만든 것이 많으며, 수적으로는 적으나 조개가루를 섞은 것도 있다. 토기의 색은 갈색이나 흑갈색계통이 대부분이며, 토기 겉면을 반들반들하게 갈아서 광택이 나는 것도 있다.

무늬새기개로 긋거나 눌러서 생긴 선과 점을 배합해 토기 겉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토기 겉면의 상반부에 한해 무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무늬 종류로는 첨저형 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일반적인 무늬 외에 번개무늬와 같이 특징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는 섭씨 600°∼700℃ 정도의 열을 가해 구운 것이다. 토기를 구워낸 가마자리가 확인된 곳은 없지만,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워낸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의 용도는 크기에 따라 각각 달라, 현재의 독과 같은 대형은 저장용으로, 중형은 취사용으로, 소형은 식기나 음식 준비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3. 분포지역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토기는 핀란드, 스웨덴 남부, 북부 독일, 서북 러시아의 카렐리아지방에서 오카강·볼가강 상류지방에 걸친 북유럽 일대, 우랄산맥을 넘어서 오브강·예니세이강유역 일대, 바이칼호지역, 몽고지방, 연해주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 지역의 토기도 빗같은 무늬새기개의 끝으로 눌러서 새기고, 그어서 생긴 선으로 토기 겉면을 장식하고 있고, 토기의 기형면(器形面)에서도 공통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와 동일계통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는 135개에 달한다.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고 주로 해안가·강가 그리고 도서지방에서 발견된다.

크게는 대동강·한강을 포함한 서해안지역, 낙동강을 포함한 남해안지역, 두만강을 포함한 동해안지역의 3개 지역군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지역군 사이에는 뚜렷한 지역차가 있다.

서해안 및 남해안지역에서는 뾰족 밑을 기본으로 하는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분포된 반면, 동해안지역에서는 납작 밑을 기본으로 하는 평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분포되어 있다.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해안지역에서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서울특별시 암사동,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 경기도 부천군 시도(矢島) 패총 등이 있고, 남해안지역에서 부산광역시 동삼동패총, 경상남도 김해군 수가리 패총 등이 있다.

한편, 평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동해안지역에서는 함경북도 무산군 서포항(西浦項)패총,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빗살무늬토기는 해안변의 패총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며, 강변의 경우는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많다.

즐문은 원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학자가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토기의 문양을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k)과 연결시켜 즐목문으로 번역하여 쓴 용어였다. 이를 해방 후 우리나라 학자들이 즐문토기 혹은 이것을 한글로 풀어쓴 빗살무늬토기라 부르면서부터 일반화되었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 이후 빗살무늬토기가 캄케라믹의 단순한 번역어라는 점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새김무늬토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선이나 점 등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한 토기만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덧무늬(융기문)나 찔러서 도드라지게 한 무늬(자돌문), 눌러 찍은 후 끌어당긴 무늬(압인문)의 토기 등을 포함한 신석기 시대의 모든 토기를 말하기도 한다. 빗살무늬토기라는 명칭은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무늬 새기개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장식한 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밖에도 빗살무늬에 대한 다른 명칭으로는 즐문, 즐목문(櫛目文), 빗살문, 유문(有文), 기하문(幾何文), 새김무늬 등이 있다.

신석기인들은 주로 인접한 강이나 하천 주변에 풍부한 점토와 모래, 조개 가루 등을 섞은 바탕흙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빚고 무늬를 새긴 후, 토기 가마에서 토기를 구워 생활 용기로 이용하였다.

빗살무늬토기의 제작은 일반적으로 바탕흙 준비→성형→정면·시문→건조→소성의 순으로 진행된다. 토기 제작의 기본 원료가 되는 바탕흙은 점토와 기타 비짐을 섞어 만드는데, 점토에 비짐을 고루 섞어 다지게 되면 흙의 결집도가 높아져 성형시 작업 능률이 향상되고 건조나 소성 과정에서 갈라짐이 방지된다. 비짐으로는 모래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나, 우리나라의 중서부 지역 토기에는 활석, 제주 고산리 유적의 초창기 토기의 경우에는 풀(혹은 식물 줄기), 남해안 지역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 중에는 조개 가루를 섞은 것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토기를 만드는(성형) 방식은 테쌓기, 서리기, 손빚기 등이 있다. 그리고 쌓는 방향에 따라 바닥부터 쌓아 올린 방법과, 입술부터 거꾸로 쌓아 만드는 방식이 있다. 바닥부터 쌓아 올린 방법은 토기 바닥에 남아 있는 나뭇잎 흔적과 토기 제작 받침대의 존재에서 알 수 있다. 입술부터 거꾸로 쌓아 올린 방식은 비교적 큰 토기를 만드는 데 용이한 방법으로, 가장 분명한 특징은 토기의 입술 끝부분이 편평하고 입술 주위로 토기의 무게에 의해 점토가 밀려나 있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방법에는 납작한 돌 판이나 나무판자, 고래의 척추 뼈와 같은 바닥이 편평하고 넓은 받침대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실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유물이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토기의 정면 과정은 성형 단계에서 시작되는데, 몇 단의 띠를 쌓아 올린 후 이를 결합하여 띠 사이의 빈틈을 없앰과 동시에, 토기의 두께와 곡면의 각도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면이 이루어진다. 정면 도구는 손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성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곡면을 이루는 나무칼이나 조가비, 둥근 자갈돌 등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토기에 무늬를 새기는(시문) 시점은 정면 후, 토기의 표면이 어느 정도 건조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 바탕흙이 어느 정도 굳기 전에 무늬를 새기면 아직 무른 주변 흙들의 압력으로 무늬가 좁아지거나, 거의 덮어져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반면 적당히 건조된 후, 무늬를 새기면 파진 흙들은 최소 잔여물을 남기고 제거되어 뚜렷한 무늬가 남게 된다. 무늬 새기개는 대부분 끝이 뾰족하거나 둥근 것을 사용하였으며, 나무같이 만들기 편리한 것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유물로 확인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부 소형의 석기나 조가비, 뼈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를 굽는 작업(소성)은 토기 제작의 마지막 과정으로 만들어진 토기에 높은 열을 가하여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자연 상태의 점토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바꾸는 과정이다.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토기의 가장 큰 이점은 음식을 끓이거나 익힐 수 있는 조리 방법의 보급에 의해 식료로써 이용할 수 있는 종류가 증가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식물질 식료 자원의 개발을 진전된 것이다. 가장 좋은 예가 도토리로 그대로는 떫어서 먹을 수 없지만, 가루를 내서 물에 개어 가열해 떫은맛을 우려내면 귀중한 먹거리가 된다. 이러한 식물질 식료의 증가에 따라 육상 동물에 의존하고 있었던 칼로리원이 보다 용이하고 안전하게 획득할 수 있는 식물질 식료로 대체됨으로써, 식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메뉴가 추가되어 식생활이 풍부해진 것 외에도 살균에 의한 위생학 상의 효과와 함께 음식이 연하게 되기에 소화 기관의 부담을 덜고, 영양 흡수도 보다 용이하게 한 효과도 있었다. 덕분에 건강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시켜, 인류에게는 혁명적인 번성의 기회가 주어졌다.

신석기 시대 토기의 기능은 형태와 크기를 통해 추정하며, 용도는 사용의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의 장면’이란 유구 내에서의 출토 상황 또는 실제로 사용된 흔적이 토기에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저장용의 경우 실제 신석기 시대 집자리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토기가 놓여 있거나, 또는 토기 안에 곡물이 담겨 있을 경우는 저장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입술 끝부분에 탄화된 이물질이 부착되어 있을 경우는 그 토기가 자비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 토기를 형태별로 분류하면, 크게 바리, 독, 단지(항하리), 사발로 구분되며, 그 외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리 토기는 자비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다시 크기에 따라 저장, 자비, 식기용으로 나눈다. 바리 토기 이외의 토기는 각 형태에 따른 사용 용도가 한정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입술 지름이 좁은 목이 있고 입술이 바라진 토기의 경우에는 물 등의 액체 또는 나무 열매 등 적은 양의 음식물 저장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 접시 모양의 토기 또는 굽다리접시(고배) 모양의 토기는 음식을 담아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상생활 토기 외에 특수한 사용례로써 사물의 모양을 본 떠 만든 소형 토기나 미니어처 토기가 있는데, 이들 토기는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또 진주 상촌리와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는 무덤으로 사용된 빗살무늬토기도 출토되었다.

최종택

지금으로부터 1만년을 전후한 시점에 원시무문토기가 등장한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에서 덧무늬토기와 같은 이른 시기의 토기가 제작되고 사용되었으나 기원전 4,000년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빗살무늬토기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유행한다. 이는 한반도에서 토기의 제작과 사용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도구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장식한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토기의 형태는 깊은 바리 모양이 주를 이루며, 바닥은 계란처럼 뾰족한 것과 납작한 것이 있다. 빗살무늬토기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밑이 뾰족하고 빗살무늬가 새겨진 특정 토기만을 지칭하였으나 현재는 원시무문토기와 덧무늬토기 등 신석기시대 초기 토기를 제외한 다양한 형태의 신석기시대 토기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된다.

빗살무늬토기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 (Kammkeramik)을 번역하여 쓴 것이다. 캄케라믹은 빗(kamm, 영어의 comb)과 도기(keramik, 영어의 ceramic)가 합쳐진 말로, 북유럽의 선사시대에 유행한 밑이 뾰족한 깊은 바리 모양의 토기에 빗살로 찍어 무늬를 새긴 토기를 말한다. 일제시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선사시대의 토기가 이와 유사하다고 보아 즐목문토기(櫛目文土器)라고 불렀으며, 이후 일본식 표현을 고쳐 즐문토기(櫛文土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울러 빗살무늬토기는 북유럽의 캄케라믹이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문화의 변화를 전파론적 시각으로 이해하던 단순한 논리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북유럽과 한반도 사이의 넓은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토기가 별로 확인되지 않아 자세한 전파경로를 상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이 제기되었다. 이후 한반도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빗살무늬토기들이 발굴되고, 빗살무늬토기보다 이른 단계인 덧무늬토기와 아가리무늬토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힘입어 빗살무늬토기가 북유럽에서 전파되었다는 학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한반도 신석기시대 초기의 토기 제작 전통을 바탕으로 발생한 것으로 본다.

빗살무늬토기는 주로 석영이나 운모가 섞인 사질점토를 바탕흙으로 제작하였으며, 지역에 따라 조갯가루나 석면, 활석, 장석 등을 보강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서리기법이나 테쌓기법으로 성형하였는데, 뾰족 밑 토기는 그릇을 엎어놓은 형태로 아가리부터 만든 후 바닥을 마무리하였으며, 납작 밑 토기는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점토 띠를 쌓아올려 만들었다. 납작 밑 토기의 경우 바닥에 나뭇잎 모양이 찍혀 있는 점으로 보아 토기를 만들 때 편평한 바닥에 나뭇잎 등을 놓고 그 위에서 토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의 표면 에는 뼈나 나무 또는 석재 도구를 사용해 정면하고 문양을 새겼다.

빗살무늬토기 각종 빗살무늬토기 각종

아가리 쪽은 빗살과 같이 이빨이 여러 개 달린 도구를 비스듬히 눕혀서 짧은 점줄무늬[点列文]를 새기거나 이빨이 하나인 도구로 짧은 빗금을 연속적으로 새기는 예가 많다. 몸통에는 생선뼈무늬를 가로나 세로 방향으로 새기는데, 이빨이 여러 개인 도구와 하나인 도구가 함께 사용된다. 뾰족한 바닥은 밑을 향하여 짧은 빗금을 방사상으로 새겨 넣었는데, 대체로 뾰족 밑 토기는 엎어놓은 채로 무늬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무늬를 새기는 방법도 다양하여 눌러 긋기와 찌르기, 훑기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일부 지역에서 토기를 굽던 시설이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확실한 형태의 가마 시설은 밝혀진 것이 없다. 청동기시대의 토기 소성 시설 형태와 비교한 실험적 분석 결과를 통해 볼 때,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는 얕은 구덩이를 판 노천요에서 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탕흙에 대한 암석학적 분석 결과 빗살무늬 토기는 대략 섭씨 700도 안팎의 온도에서 소성되었으며,9) 최몽룡·신숙정, 「한국고고학에 있어서 토기의 과학적 분석에 대한 검토」, 『韓國上古史學報』 1, 1998, p.26. 토기질은 무르고 흡수성이 높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분포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분포도

빗살무늬토기는 용량에 따라 소형(평균 4ℓ), 중형(17ℓ), 대형(56ℓ)의 세 종류로 나뉘며, 소형과 중형은 음식물의 준비와 조리, 대형은 저장 기능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0) Im hyojai and Sarah M. Nelson, Implications of the sizes of Comb-pattern Vessels in Han River Site in Korea, Hanguk kogo-hakbo vol. 1, The Korean Archaeological Society, 1976, pp.117∼121. 빗살무늬토기는 화덕에 세워진 채로 출토된 예들이 있어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암사동유적의 경우 빗살무늬토기를 이용해 도토리를 조리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도토리는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그대로 먹을 경우 변비에 걸리는 등 소화하는 데 문제가 있으므로 빗살무늬토기에 담아 물과 함께 끓인 후 탄닌 성분을 우려내 제거한 후 먹었을 것이다. 그밖에 신석기시대의 집터에서는 곡물을 가는 데 사용한 갈판과 갈돌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들 도구를 이용해 준비한 가루음식 역시 토기에 담아 끓여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제작되는데, 크게는 신의주와 영덕을 잇는 선을 경계로 서남쪽은 뾰족 밑 토기, 동북쪽은 납작 밑 토기가 주를 이룬다. 좀 더 자세히 구분해 보면, 동북 지역과 서북 지역, 중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서북 지역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평안북도 일대에 해당하며, 납작 밑 토기가 주를 이룬다. 이른 시기에는 뾰족 밑의 바리 모양 토기도 사용되지만 늦은 시기에는 목이 긴 항아리와 둥근 항아리, 바리, 보시기 등으로 다양해진다. 무늬는 생선뼈무늬와 빗금무늬, 덧무늬 등이 사용된다.

동북 지방 출토 빗살무늬토기 각종 동북 지방 출토 빗살무늬토기 각종

동북 지역은 강원도 동해안과 함경남·북도 지방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뾰족 밑 토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납작 밑 바리 모양의 토기가 주로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가리나 몸통 위쪽에만 짧은 빗금무늬와 생선뼈무늬 등이 새겨 있다. 후기에는 몸통에 평행선을 긋고 그 안쪽에만 무늬를 새긴 특징이 있으며 주로 번개무늬를 많이 새겼고, 이는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중서부 지역은 대동강 유역의 평안남도와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한강 유역의 서울·경기 및 충청남·북도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전형적인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유행한다. 토기 표면에는 점줄무늬, 손톱무늬[爪文],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문살무늬[格子文], 생 선뼈무늬[魚骨文] 등 다양한 무늬를 새기는데, 아가리와 몸통, 바닥 등 부위별로 구분하여 무늬를 새기는 것이 특징이다.

남부 지방 출토 각종 빗살무늬토기 남부 지방 출토 각종 빗살무늬토기

남부 지역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내륙 지방보다는 해안 지방에 유적이 많이 분포한다. 남부 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며, 이른 시기에는 주로 아가리에만 무늬를 새기다가 점차 몸통 전체에 무늬를 새긴 토기가 유행한다. 늦은 시기가 되면 아가리에 입구가 달린 귀때토기, 붉은 색을 칠한 붉은간토기, 아가리를 두 겹으로 말은 겹아가리토기 등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6천년 이후에 등장하여 기원전 2,000∼1,500년까지 사용되었는데,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변화한다. 전형적인 중서부 지역의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는 아가리와 몸 통·바닥을 구분하여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문양을 시문하는 구분문계와 토기 전면에 동일한 문양을 시문하는 동일문계 토기로 구분한다. 두 경우 모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부에서부터 시문 범위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며 변화한다.11) 韓永熙, 「韓半島 中·西部地方의 新石器文化」, 『韓國考古學報』 5, 1978 ; 任孝宰, 「土器의 時代的 變遷過程」, 『韓國史論』 12, 國史編纂委員會, 1983, pp.615∼653.

신석기시대 최말기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최말기 빗살무늬토기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하여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문화를 전기(기원전 4,000년 이전)와 중기(기원전 4,000∼3,000년), 후기(기원전 3,000∼1,500년)의 세 시기로 구분한다.12) 임상택, 「중부지역 신석기시대 상대편년을 둘러싼 문제」, 『韓國新石器硏究)』 5, 韓國新石器硏究會), 2003, pp.21∼24. 전기는 전형적인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확대되기 이전 단계로 납작 밑 토기가 주를 이루며, 지자문토기·덧무늬토기·아가리무늬토기 등이 함께 유행한다. 중기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확산되지만 동북 지역에서는 납작 밑 토기가 여전히 사용된다. 후기는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이 조잡해지고, 무늬가 없거나 아가 리에만 무늬를 새기는 토기가 증가하며, 동북 지역에는 번개문토기, 남해안 지역에서는 겹아가리토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비슷한 토기는 중국 동북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출토되는데, 동북아시아 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 변화·발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형적인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는 일본 죠몬시대의 소바다식토기[曾畑式土器]의 성립에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3) 任孝宰, 앞의 글, 1986.

빗살무늬토기문화::서울 암사동 유적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 토기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포탄형 또는 반계란형으로 생긴 몸체에 음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 넣은 토기이다.

덧무늬토기가 출토되는 동해안지역과는 달리 중서부 해안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정교한 문양으로 장식된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뼈나 나무 등의 시문구를 활용하여 누르거나 그어서 음각 문양을 만드는데 짧은 직선을 반복하거나 긴 직선을 방향을 엇갈리게 그려서 흔히 ‘어골문’이라고 부르는 물고기 뼈 문양을 새겨 넣었다.

빗살무늬는 그 문양 패턴이 대단히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물고기 뼈 문양 이외에도 원이나 점무늬 등을 반복하여 전체적인 형태를 조성하기도 한다.실타래문양, 지자문, 점열문 등 수많은 문양 종류가 있어 신석기시대 생활 예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대체로 전 세계적으로 어로 신석기 문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서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고 하여 한 때 시베리아에 빗살무늬문화벨트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고 흔히 시베리아 기원설이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인용되어 왔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을 포함하여 한반도 일대의 지역에서 발생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의 토기의 기형이나 문양의 다양성이 특출할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앞서는 것으로 보이고 또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이 다양한 토기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은 가장 정교하고 발달된 문양의 토기가 출현하는 곳으로 빗살무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초기, 즉 기원전 5천년에서 4천년 기에 가장 완벽한 형태, 즉 토기의 몸통부를 3개의 시문구로 나누어 각기 다른 기하문을 정교하게 시문한 것에서 후기로 갈수록 점차 하부의 문양이 생략되고 문양의 정치도가 떨어지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월간문화재사랑 상세 – 문화재청

신석기시대의 상징,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이다. 토기를 쓰면서부터 음식을 끓여 먹을 수 있게 됐다. 또한 토기는 잘 깨지지 않고 썩지 않는 중요한 도기였다.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길쭉하고 둥근 것이 마치 팽이처럼 생겼다. 이 토기처럼 밑이 둥글고 길쭉한 토기는 중서부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는 한강이나 대동강 주변에서 많이발견된다.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둥글어서 똑바로 세울 수가 없는데 어떻게 썼을까 궁금할 수 있다. 이 토기는 땅에 파묻고 쓰던 그릇이라 이렇게 만들었다는 설과 운반하기 쉽도록 만든 모양이라는 설이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겉면을 삼등분해서 아가리, 몸통, 바닥에 각각 다른 무늬를 장식했다. 무늬를 넣음으로써 그릇이 더 단단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독특하고도 뛰어난 도자기

도자기는 우리나라 공예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처음 만든 것은 중국이지만 우리나라는 그 기술을 이어받아 세계 도자기사에 한 획을 긋는 발자취를 남겼다.

고려 사람들은 청자에 상감무늬를 새긴 상감청자를 개발하여 중국 청자와는 또 다른 도자기의 세계를 열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12세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고려청자로, 그릇 선이 매우 날씬한 곡선을 그리면서도 밑부분이 넓어지면서 안정감을 준다. 도 자기 표면의 학과 구름무늬는 율동감이 넘친다. 그 이유는 원 안의 학은 위로, 원 밖의 학은 아래로 엇갈리게 그려 시선을 아래위로 두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상감기법은 무늬를 넣는 방법으로, 초벌구이한 그릇 표면을 원하는 무늬를 새긴다. 그리고 백토나 자토로 그 홈을 메운다. 다 메운 다음 그릇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유약을 발라 구우면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타난다. 상감기법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고려 사람들은 그 상감기법을 도자기에 응용하여 상감청자라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재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분청사기는 청자에 쓰던 회색이나 회흑색 흙 위에 흰 흙을 덧칠하고 그 위에 유약을 입힌 자기를 가리킨다.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백자를 만들고 싶지만 백자용 흙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기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분청사기를 거쳐 드디어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게 된 조선의 도공들은 눈처럼 하얀 자기에 중국 것과 다른 아름다움을 불어넣었다. 조선백자는 대개 아무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많지만, 백자 표면에 철분 안료를 써서 무늬를 그리면 갈색을 띠는 철화백자도 만들었다. 무늬는 보통 포도와 함께 풀, 꽃 등을 그렸다. 조선 중기부터는 철화기법만 쓰지 않고 붉은색이나 푸른색 안료도 함께 썼다.

도자기의 색과 무늬

도자기의 색은 그릇을 구울 때 산소가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흙과 유약에 철분이 얼마나 포함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도자기를 구울 때 산소가 많이 공급되면 흙이나 유약 내 철분이 모두 산화되고 녹슬어 산화제이철이 된다. 그러면 그릇은 갈색을 띠게 된다. 빗살무늬토기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별 특별한 장치 없이 장작불로 구운 그릇이기에 갈색이나 흑갈색을 띠는 것 이다. 원삼국시대에 가면 산소가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버린 밀폐된 가마를 이용해 높은 온도로 구울 수 있는 기술로 발전한다. 밀폐된 가마는 도자기를 구울 때 산소를 차단하는데 이런 방식을 환원 변조라고 한다. 청자와 백자를 이런 방식으로 만든다.

시대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도자기의 색이 달랐다. 고려청자의 빛깔은 꿈결 같은 아득함, 끝없이 펼쳐진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고려청자가 보여주는 세계는 고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불교 세계 그 자체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흰 백자를 좋아했다. 흰색은 순결함과 검소함을 상징한다. 이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성리학은 무엇보다도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생활의 가르침으로 추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사대부들은 검소, 질박, 결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빗살무늬토기의 빗살무늬는 강렬한 햇살이나 물고기의 뼈 모양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고, 그 밖에 여러 현상을 추상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토기에 그런 무늬를 새기면서 곡식이 잘 자라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빌었다. 청자상감운 학문매병에 보이는 학과 구름 그림을 일컬어 운학무늬라고 한다. 학 자체가 신성한 동물이라는 점에서 많이 그렸을 뿐 아니라 푸른 그릇 표면을 하늘로 생각했다. 청자의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학과 구름은 고려시대 사람들이 바라는 불교적 이상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연꽃잎 무늬도 불교사상을 나타내는 문양이다.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의 물고기 문양은 아주 특이하다. 물고기와 모란을 표현한 간략한 선은 무척 자유롭고, 거꾸로 선 물고기 모습은 해학적이다. 물고기와 모란 문양은 분청사기에 많이 나타난다.

물고기는 보통 ‘다산’을 상징하고 모란은 부귀와 번창을 나타낸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미래 세계를 중시했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자철화매죽문대호에서 보이는 대나무와 매화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로 불린다. 사군자는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소재라 조선 초기 사대부들이 즐겨 그렸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일반 백성들도 문화적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릇의 문양으로 십장생이나 까치, 호랑이 같은 민화를 그려 넣었다.

● 동산문화재와 관련된 직업이 궁금한 당신을 위한 미니 인터뷰

Q. 문화재감정위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A. 문화재감정위원은 국제공항과 항만에서 한국의 문화재가 해외로 불법반출되지 않도록 문화재의 반출 가능 여부를 감정하여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문화재감정 업무는 국제선을 이용하는 여행객의 휴대품과 수하물을 주요 대상으로 하지만, 불법적인 도굴 혹은 도난된 문화재가 국외로 반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Q. 문화재감정위원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미술관, 박물관에서 멋진 작품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대학교에서 고고학 발굴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시공간을 견뎌내고 출토된 유물에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미술품일수록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해답을 찾기 어렵고 그러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문화재감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A. 저는 대학교에서 인문대-고고미술사학과에 진학하여 고고학, 미술사학, 박물관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원에서는 불교조각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교박물관에서 문화재에 대한 실무 경험도 쌓고 교수님따라 문화재 현지조사도 많이 다녔습니다. 문화재감정관실에 입사하기 전 2년간 비상근 경력 후에 문화재감정위원이 되었습니다.

Q. 문화재감정위원이라는 직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A.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문화재를 지키는 최전방의 파수꾼’이라는 문화재감정위원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집니다. 무엇보다 다양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대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A. 모든 미술품은 국외로 반출 가능 여부를 신고하고 확인받아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현장에서 업무를 진행하면서 이런 사항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대구공항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출국장에서 만났던 할머니께서 문화재 확인 감정을 마치자 제 손까지 잡으시며 정말 훌륭한 일을 한다면서 우리 역사가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말씀을 해주셨을 때,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납니다.

Q.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요?

A. 우리나라는 특별한 역사적인 상황으로 문화재가 해외로 상당히 많이 유출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문화재감정관실은 지난해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분들이 공항, 항만에서 문화재감정이라는 업무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잘 모릅니다. 우리 문화재의 보존을 위해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화재감정위원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배님들이 하신 것처럼 문화재감정위원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Q. 문화재감정위원이 되고 싶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한 말씀 남겨주세요.

A.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아오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작은 문화재 하나가 우리 역사의 조각난 퍼즐과도 같습니다. 문화재 감정위원은 본인의 전공별 전문적인 지식을 탄탄히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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