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 Q23)어떻게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세워졌나?사도행전11장-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으로 전파되는 과정[나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191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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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에서는 바나바는 왜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왔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통해 수리아 안디옥교회를 세우셨는지를 통해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가에 대해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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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 e 푸른초장

2월 4일.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성경에는 ‘안디옥’이라는 지명이 2번 나온다. 하나는 사도 바울 시대에는 ‘수리아’ 의 (현재 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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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bcranch.com

Date Published: 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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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비시디아 안디옥 – 성경에는 두 안디옥이 있는데··· – 다음블로그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또 하나는 수리아 안디옥이다. …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복음을 전하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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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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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얄바츠) 이야기 – 리폼드뉴스

비시디아 안디옥은 비시디아 지역에 있는 안디옥을 말하는 것으로 수리아의 안디옥과 다른 곳이다. 지금은 터키 소도시 얄바츠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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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formednews.co.kr

Date Published: 4/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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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아 비시디아 안디옥 – 네이버 블로그

수리아 안디옥은 이방 선교의 전초지로 바울과 바나바가 1년간 복음을 …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셀리우코스 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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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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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 한인기독교회

그렇게 만들어진 다음 안식일 집회에는 거의 모든 비시디아 안디옥 시민들이 다 모여들어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듣게 되었다.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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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cdenver.org

Date Published: 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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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3)어떻게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세워졌나?사도행전11장-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으로 전파되는 과정[나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Q23)어떻게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세워졌나?사도행전11장-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으로 전파되는 과정[나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 Author: 나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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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6. 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OF4_D1Heo

19 비시디아 안디옥 – 성경에는 두 안디옥이 있는데···

19 비시디아 안디옥 – 성경에는 두 안디옥이 있는데···

어느 안디옥이 진짜 안디옥인가?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성경에 두 곳이 나온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또 하나는 수리아 안디옥이다.

사도행전 13장1절에 나오는 안디옥교회는 수리아 안디옥에 있던 교회로, 지금의 시리아와 터어키의 국경 지대에 있는 도시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 후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신자들이 유대교의 핍박을 피해서 이곳저곳으로 흩어 졌는데, 당시 핍박을 피해 안디옥 지방으로 도망을 갔던 사람들이 설립한 교회이다. 이 핍박으로 말미암아 안디옥은 그리스도인의 제 2 생활 중심지가 되었고 후일 이 곳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터키의 변방, 시리아에 가까이 있는 이곳이 아직까지 터키 영토로 남아 있게 된 연유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Kemal Pasha: 1922년 슐탄제를 폐지하고(오스만 제국의 멸망), 이듬해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정을 설립해 초대 대통령이 됨)가 1차 대전 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하였고, 그 뒤 2차 대전 때 온 세계가 독립을 요구할 즈음 수리아 안디옥 사람들은 터키의 영토로 남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터키로 남아 있다.)

오늘 이야기 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 14절에 나오는 도시다.

조그마한 도시로 들어서니 차도로는 마차가 다니고, 길옆에는 노점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영락없는 시골 마을이다.

여기가 그 옛날 영화를 누리던 비시디이 안디옥이란다.

그동안의 지진으로 다 무너져 지금은 터키의 안타키야(Antakya)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동양의 여왕’이란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로 모든 지역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와 상권이 형성되고 그 당시의 세속적인 종교적으로도 활동이 활발한 도시였다. 어느 시대이건 돈이 많으면 쾌락 중심의 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쾌락을 사랑하는 도시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모두 갖고 있었다. 도시가 몹시 화려하였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악한 도시로 바뀌었다. 그 결과 타락한 도시의 상징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이 불리어졌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도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세 번이나 이 도시를 방문하고 이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니 유적지의 입구가 나온다.

조금 경사진 입구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무너진 돌무더기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아직 다 발굴이 안 된 유적지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게 조각된 돌덩어리들이 열 지어 서있는 그 옛날의 대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옛날 사도바울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설파하였던 유대인 회당 터가 나타났다.

학자들은 이 유대인 회당 터가 사도행전 13장 14절에 명시 된 유대인의 회당 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비시디아 안디옥 아고라(장터)에서 발견된 바울 교회 비문이 당시의 유대인의 회당에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복음을 전하였고, 또 이곳이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이 퍼지게 하는데 중요한 시발점 역할을 한 도시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특히 바울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설교를 하며 이방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 선교에 헌신키로 결정한 곳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갈 3:16) 갈라디아서는 특히 이 지방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쓰인 편지인 것이다.

주춧돌만 남은 유대인 회당 터 옆에는 그 후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진 채로, 아니 아직 복원이 다 안 되어서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허물어 진 것을 다시 짓고 있는 옛 교회 터, 바울의 교회가 있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던 수리아(지금의 시리아 가까이 있는 터키영토)에 있는 안디옥하고는 다른 안디옥이지만 사도 바울이 이방선교를 시작한 시발점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 안디옥이라고 불리는 두 도시가 다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지역이 된 것 같다.

저 멀리로는 전에 이스라엘 지중해 변의 도시 가이사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형태 수로가 서 있어 그 옛날의 풍요롭던 도시에 물을 전달해 주었음을 침묵으로 증명하고 있고, 가까이에는 그 옛날 크게, 화려하게 지어 졌던 공중목욕탕이 복원되어 가고 있었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육신의 때를 벗기기에는 참으로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마음의 때는 무엇으로 씻어야 깨끗해지는 것일까?

1 길섶에 진열해 놓은 조각들의 파편.

2 복원중인 사도 바울 기념교회

3 사도 바울이 최초로 설교를 한 유대인 회당 터

4 안디옥의 수로

5 복원중인 목욕탕

수리아 비시디아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 ( Antakiya )

안디옥 지방에는 고대 선주(Tigh’s) 라고 불리던 농경 민족인 Prototigris인이 살았다. 그 후 B.C. 3천년에는 아카드인(Akad), B.C. 2천년 수바르인(Subar), B.C. 1,700년 히타이트인(Hitite), B.C. 841년 앗시리아인(Assyria), B.C. 538년 페르시아인(Persia)으로 연결이 되는데, 이 안디옥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과 함께 일약 유명한 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과 알렉산더 대왕의 대 결전이 이곳 잇수스(Issus)에서 B.C. 333년에 벌어졌는데 이 전쟁으로 알렉산더가 승리를 차지하고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이 방대한 영토는 그 휘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는데 바벨론 총독이었던 셀레우코스 장군이 B.C. 311년 전쟁으로 안디옥을 차지하게 된다. 셀레우코스는 지중해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셀루기야(Seleucia-사도행전의 실루기야)라는 항구 도시를 건설하여 동부 지중해의 중요한 무역항으로 성장시켜 최초로 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인들에 의해 쇠약해 지다가 결국 B.C. 148년 안디옥 지방의 대 지진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셀레우코스 8세는 B.C. 64년 이 지역을 로마제국에게 양도해 버리고 로마 통치하로 들어간다. B.C. 42년 시이져 황제의 지원으로 신 도시를 건설하여 당시 75만 인구를 가진 대 도시로 성장했다가 A.D. 71년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수리아 안디옥 베드로 암굴교회>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으며,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은 이그타시우스였다.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된 안디옥 교회는 “크리스챤” 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자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보내어 최초의 구제사업을 시작하였다.

수리아 안디옥은 이방 선교의 전초지로 바울과 바나바가 1년간 복음을 전하고(행11:19-26, 14:22-25), 제 1, 2, 3차 선교의 거점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다(행14:19-23).

수리아 안디옥은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후 로마,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에베소와 함께 기독교 5대 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이 도시 출신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요한 크리소스톰이다. 크리소스톰은 일명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운 설교의 달인이었으며,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다. 크리소스톰은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부인 유독시아의 부정한 행실과 황실의 향락과 사치를 비판하다가 추방을 당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콘스탄티노플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 소피아 성당이 불타게 되었다.(404년)

(배드로 암굴교회 내부)

638년부터 시작된 아랍인, 몽고인,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이 도시는 소 도시로 전략해 버렸고, 1097년 십자군들에게 9개월간 통치를 받다가 동부에서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터키의 패배로 1918년 채결된 Mondros 조약에 의해 이 지역은 프랑스 자치령이 된다. 전통적으로 시리아 지역에 속했던 이 지역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등장하면서 터키 영토에 속하게 되고, 아타투르크 대통령은 안디옥을 10년간 자치주로 하였으나 이들 스스로 국민투표로 터키에 귀속되었다.

들러보아야 할 곳으로는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모자이크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자이크 박물관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여겨지며 내부에 모자이크 흔적들이 남아있는 베드로 동굴(Piter’s Grotto)교회가 있다. 또한 사도바울이 1차 선교 때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하여 셀루기아(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떠났던 외항이 지중해변에 남아있다.

(셀루기아 항구)

비시디아 안디옥 ( Pisidia Antioch )

비시디아 안디옥은 콘야(Konya)에서 북서쪽 약170km(107마일) 지점에 있는 아나톨리아 평원(Anatoelin Plateau)에 위치한 한 고대 도시이다. 고대 안디옥의 유물들은 작고 아름다운 도시 얄바치(Yalvaç)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셀리우코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에 의하여 B.C. 301년에 도시가 세워졌으며, B.C.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이곳에 로마군을 주둔시키고 로마인 거주지로

삼았다. (Colonia Caesarea Antiochia)

<신전문 복원도 Propylon>

그 이후 번영을 누리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 이 시대의 우람하고 웅장한 여러 건축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도시의 아클로폴리스에서는 프로필레아(Propylaes:장식문)가 발견 되었는데 그 연대는 아우구스투스 때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곳은 반원형의 산책용 정원이 있는 동쪽 끝 아우구스타 플래디아(Augusta Platea) 광장으로 알려져 있다. 장식문 정면에는 티베리우스(Tiberius)황제를 위하여 건설했던 디베리아 플래티아(Tiberia Platea)가 있고, 광장은 상가들이 에워싸여 있었다. 물은 근처 언덕에서 송수관을 통하여 아크로폴리스로 흘러 들어오는 구조로 되었는데, 현재는 파괴된 송수관 유적이 도시의 남쪽 8km(5마일) 정도에서 발견된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A.D. 4세기에 이미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교(Bishop)의 근원지가 되었다. 옵티머스 주교(Bishop Optimus A.D. 357~381)에 관한 비문이 아우구스타 플래티아 북서쪽 아크로 폴리스에 서있는 폐허 된 바실리카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또 하나의 교회는 십자형으로 티베리아 플래티아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여 있다.

A.D. 4세기 후에 비시디아 안디옥은 기울기 시작했고 A.D. 713년 아랍의 침략으로 패망 후 재건되지 못하였다.

Top 27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Quick Answer

Q23)어떻게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세워졌나?사도행전11장-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으로 전파되는 과정[나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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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의 뜻은 병거 혹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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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4.3. 비시디아 안디옥 – 김홍욱 글 모음

Article author: hongkim.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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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성지순례 – 4.3. 비시디아 안디옥 – 김홍욱 글 모음 Updating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성지순례 – 4.3. 비시디아 안디옥 – 김홍욱 글 모음 Updating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셀류쿠스가 왕조를 세우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모두 안디옥이라 명명했다. 성경에는 안디옥이라는 지명으로 그 중 두 군데가 등장한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니골라의 고향(행 6:5)이자 이방 땅으로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행 11:20) 안디옥은 시리아와의 국경근처에 있는 수리아 지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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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4.3. 비시디아 안디옥 – 김홍욱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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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비시디아 안디옥 – 성경에는 두 안디옥이 있는데··· 어느 안디옥이 진짜 안디옥인가?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성경에 두 곳이 나온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또 하나는 수리아 안디옥이다. 사도행전 13장1절에 나오는 안디옥교회는 수리아 안디옥에 있던 교회로, 지금의 시리아와 터어키의 국경 지대에 있는 도시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 후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신자들이 유대교의 핍박을 피해서 이곳저곳으로 흩어 졌는데, 당시 핍박을 피해 안디옥 지방으로 도망을 갔던 사람들이 설립한 교회이다. 이 핍박으로 말미암아 안디옥은 그리스도인의 제 2 생활 중심지가 되었고 후일 이 곳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터키의 변방, 시리아에 가까이 있는 이곳이 아직까지 터키 영토로 남아 있게 된 연유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Kemal Pasha: 1922년 슐탄제를 폐지하고(오스만 제국의 멸망), 이듬해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정을 설립해 초대 대통령이 됨)가 1차 대전 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하였고, 그 뒤 2차 대전 때 온 세계가 독립을 요구할 즈음 수리아 안디옥 사람들은 터키의 영토로 남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터키로 남아 있다.) 오늘 이야기 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 14절에 나오는 도시다. 조그마한 도시로 들어서니 차도로는 마차가 다니고, 길옆에는 노점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영락없는 시골 마을이다. 여기가 그 옛날 영화를 누리던 비시디이 안디옥이란다. 그동안의 지진으로 다 무너져 지금은 터키의 안타키야(Antakya)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동양의 여왕’이란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로 모든 지역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와 상권이 형성되고 그 당시의 세속적인 종교적으로도 활동이 활발한 도시였다. 어느 시대이건 돈이 많으면 쾌락 중심의 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쾌락을 사랑하는 도시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모두 갖고 있었다. 도시가 몹시 화려하였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악한 도시로 바뀌었다. 그 결과 타락한 도시의 상징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이 불리어졌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도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세 번이나 이 도시를 방문하고 이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니 유적지의 입구가 나온다. 조금 경사진 입구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무너진 돌무더기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아직 다 발굴이 안 된 유적지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게 조각된 돌덩어리들이 열 지어 서있는 그 옛날의 대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옛날 사도바울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설파하였던 유대인 회당 터가 나타났다. 학자들은 이 유대인 회당 터가 사도행전 13장 14절에 명시 된 유대인의 회당 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비시디아 안디옥 아고라(장터)에서 발견된 바울 교회 비문이 당시의 유대인의 회당에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복음을 전하였고, 또 이곳이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이 퍼지게 하는데 중요한 시발점 역할을 한 도시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특히 바울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설교를 하며 이방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 선교에 헌신키로 결정한 곳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갈 3:16) 갈라디아서는 특히 이 지방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쓰인 편지인 것이다. 주춧돌만 남은 유대인 회당 터 옆에는 그 후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진 채로, 아니 아직 복원이 다 안 되어서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허물어 진 것을 다시 짓고 있는 옛 교회 터, 바울의 교회가 있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던 수리아(지금의 시리아 가까이 있는 터키영토)에 있는 안디옥하고는 다른 안디옥이지만 사도 바울이 이방선교를 시작한 시발점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 안디옥이라고 불리는 두 도시가 다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지역이 된 것 같다. 저 멀리로는 전에 이스라엘 지중해 변의 도시 가이사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형태 수로가 서 있어 그 옛날의 풍요롭던 도시에 물을 전달해 주었음을 침묵으로 증명하고 있고, 가까이에는 그 옛날 크게, 화려하게 지어 졌던 공중목욕탕이 복원되어 가고 있었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육신의 때를 벗기기에는 참으로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마음의 때는 무엇으로 씻어야 깨끗해지는 것일까? 1 길섶에 진열해 놓은 조각들의 파편. 2 복원중인 사도 바울 기념교회 3 사도 바울이 최초로 설교를 한 유대인 회당 터 4 안디옥의 수로 5 복원중인 목욕탕

수리아 비시디아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 ( Antakiya ) 안디옥 지방에는 고대 선주(Tigh’s) 라고 불리던 농경 민족인 Prototigris인이 살았다. 그 후 B.C. 3천년에는 아카드인(Akad), B.C. 2천년 수바르인(Subar), B.C. 1,700년 히타이트인(Hitite), B.C. 841년 앗시리아인(Assyria), B.C. 538년 페르시아인(Persia)으로 연결이 되는데, 이 안디옥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과 함께 일약 유명한 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과 알렉산더 대왕의 대 결전이 이곳 잇수스(Issus)에서 B.C. 333년에 벌어졌는데 이 전쟁으로 알렉산더가 승리를 차지하고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이 방대한 영토는 그 휘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는데 바벨론 총독이었던 셀레우코스 장군이 B.C. 311년 전쟁으로 안디옥을 차지하게 된다. 셀레우코스는 지중해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셀루기야(Seleucia-사도행전의 실루기야)라는 항구 도시를 건설하여 동부 지중해의 중요한 무역항으로 성장시켜 최초로 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인들에 의해 쇠약해 지다가 결국 B.C. 148년 안디옥 지방의 대 지진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셀레우코스 8세는 B.C. 64년 이 지역을 로마제국에게 양도해 버리고 로마 통치하로 들어간다. B.C. 42년 시이져 황제의 지원으로 신 도시를 건설하여 당시 75만 인구를 가진 대 도시로 성장했다가 A.D. 71년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으며,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은 이그타시우스였다.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된 안디옥 교회는 “크리스챤” 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자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보내어 최초의 구제사업을 시작하였다. 수리아 안디옥은 이방 선교의 전초지로 바울과 바나바가 1년간 복음을 전하고(행11:19-26, 14:22-25), 제 1, 2, 3차 선교의 거점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다(행14:19-23). 수리아 안디옥은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후 로마,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에베소와 함께 기독교 5대 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이 도시 출신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요한 크리소스톰이다. 크리소스톰은 일명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운 설교의 달인이었으며,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다. 크리소스톰은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부인 유독시아의 부정한 행실과 황실의 향락과 사치를 비판하다가 추방을 당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콘스탄티노플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 소피아 성당이 불타게 되었다.(404년) (배드로 암굴교회 내부) 638년부터 시작된 아랍인, 몽고인,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이 도시는 소 도시로 전략해 버렸고, 1097년 십자군들에게 9개월간 통치를 받다가 동부에서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터키의 패배로 1918년 채결된 Mondros 조약에 의해 이 지역은 프랑스 자치령이 된다. 전통적으로 시리아 지역에 속했던 이 지역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등장하면서 터키 영토에 속하게 되고, 아타투르크 대통령은 안디옥을 10년간 자치주로 하였으나 이들 스스로 국민투표로 터키에 귀속되었다. 들러보아야 할 곳으로는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모자이크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자이크 박물관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여겨지며 내부에 모자이크 흔적들이 남아있는 베드로 동굴(Piter’s Grotto)교회가 있다. 또한 사도바울이 1차 선교 때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하여 셀루기아(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떠났던 외항이 지중해변에 남아있다. (셀루기아 항구) 비시디아 안디옥 ( Pisidia Antioch ) 비시디아 안디옥은 콘야(Konya)에서 북서쪽 약170km(107마일) 지점에 있는 아나톨리아 평원(Anatoelin Plateau)에 위치한 한 고대 도시이다. 고대 안디옥의 유물들은 작고 아름다운 도시 얄바치(Yalvaç)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셀리우코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에 의하여 B.C. 301년에 도시가 세워졌으며, B.C.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이곳에 로마군을 주둔시키고 로마인 거주지로 삼았다. (Colonia Caesarea Antiochia) 그 이후 번영을 누리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 이 시대의 우람하고 웅장한 여러 건축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도시의 아클로폴리스에서는 프로필레아(Propylaes:장식문)가 발견 되었는데 그 연대는 아우구스투스 때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곳은 반원형의 산책용 정원이 있는 동쪽 끝 아우구스타 플래디아(Augusta Platea) 광장으로 알려져 있다. 장식문 정면에는 티베리우스(Tiberius)황제를 위하여 건설했던 디베리아 플래티아(Tiberia Platea)가 있고, 광장은 상가들이 에워싸여 있었다. 물은 근처 언덕에서 송수관을 통하여 아크로폴리스로 흘러 들어오는 구조로 되었는데, 현재는 파괴된 송수관 유적이 도시의 남쪽 8km(5마일) 정도에서 발견된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A.D. 4세기에 이미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교(Bishop)의 근원지가 되었다. 옵티머스 주교(Bishop Optimus A.D. 357~381)에 관한 비문이 아우구스타 플래티아 북서쪽 아크로 폴리스에 서있는 폐허 된 바실리카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또 하나의 교회는 십자형으로 티베리아 플래티아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여 있다. A.D. 4세기 후에 비시디아 안디옥은 기울기 시작했고 A.D. 713년 아랍의 침략으로 패망 후 재건되지 못하였다.

초기 기독교인의 선교 중심지 수리아의 안디옥 성경(聖經)과 성지(聖地) 연구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다. 이번 11월호에는 올해 1월 이후 격월로 게재한 ‘로마의 복사판 도시, 빌립보’, ‘고대 로마 제국의 대도시, 데살로니가’, ‘우상으로 가득 찬 학술과 예술의 도시, 아덴’, ‘바울이 처음으로 장기 체류한 선교 도시, 고린도’,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이며 사도 바울과 요한의 성지, 에베소’에 이어 ‘그 땅에 역사한 복음’ 여섯 번째 연재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수리아의 대도시 안디옥’을 소개하고, 이 도시가 언급된 신약 성경의 본문을 살펴본 다음, 이 둘의 관련 의미를 모색함으로 목회자의 성경 연구와 설교 준비에 올바른 지식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터키의 성지 중에서 수리아의 안디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안디옥이 주후 1세기 당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Rome)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다음 가는, 약 50~70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대도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1세기 초 기독교인들이 열방 선교를 위해 선교의 역량을 집중했던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리아의 안디옥은 신약의 일부 문헌의 저작지로도 추정되며, 이그나티우스(Ignatius), 테오빌로(Theophilus),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isostom) 등의 유명한 교부와 관련되어 있는 교회사적인 주요 유적지이기도 하다. 성지 연구 1. 지리적 특성 헬라어로 ‘안티오케이아’( jAntioVceia)로 불린 안디옥(Antioch)은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분할된 제국의 아나톨리아와 수리아 지역을 통치한 셀류시드(Seleucid) 가(家)의 여러 통치자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을 말하는데, 이 중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는 둘이다. 하나는 터키 남부 중앙 지역에 위치해 있는 비시디아(Pisidia)의 안디옥이며, 다른 하나는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인접해 있었던 수리아(Syria)의 안디옥이다. 현재 터키 ‘하타이’(Hatay) 주의 중심 도시인 수리아의 안디옥은 주전 약 300년경 셀류커스(Seleucus) Ⅰ세에 의해 지중해로부터 25km 떨어진 내륙에, 또 오론테스(Orontes) 강변(북위 36°14′, 동경 36°07′)에 세워진 군사적, 상업적 도시로 로마 시대에는 수리아 주의 수도였다. 고대의 안디옥은 현재 레바논 지역에서 시작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오론테스 강을 동편에 두고 그 서북쪽에 위치한 스타우리스(Stauris) 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실피우스(Silpius, 해발 590m) 산 사이 약 1.6km×3.2km 지역에 격자형 구조로 세워진 전형적인 헬라식 도시였다. 셀류커스(Seleucus) Ⅰ세는 이 도시의 외곽을 성곽으로 둘렀고, 그 후 안디옥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에 의해 확대되었으며 로마의 케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Tiberius)에 의해 재건되었다. 북쪽의 강 계곡과 호수가 있는 평원에서 공급되는 물로 곡물, 올리브, 포도 등이 생산되었고, 다프네(Daphne) 남쪽의 샘들로부터 두 개의 수로를 통해 이 도시에 식수가 공급되었다. 안디옥의 동쪽에 위치한 외항 실루기아(Seleucia Pieria)는 하룻길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선편으로 운반된 화물은 오론테스 강을 통해 안디옥의 도심까지 운반되었다. 이 항구를 통해 동방과의 무역이 성행했는데, 특히 중국의 자기나 비단 등이 거래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이런 입지 조건 때문에 안디옥은 국제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 상에 위치해있던, 북 시리아의 대상 무역의 중심지인 알렙포(Aleppo)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도 고대 실루기아 항구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사만다으(Samandag?) 지방에는 비단 산업이 남아 있다. 안디옥은 이런 경제적인 부유함, 군사적인 입지, 발전된 문화와 기술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대에 ‘동방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2. 역사적 개관 안디옥은 헬레니즘의 팽창과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결과 생겨난 도시였다. 알렉산더가 잇수스(Issus)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왕을 물리친 후, 현재 지명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알렉산드레타(Alexandretta)를 건설하였다. 몇 년 뒤인 주전 307년 마게도냐의 장수인 안티고노스(Antigonos)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통제할 목적으로 그 근처 오론테스 강변에 안티고니아(Antigonia)를 세웠다. 주전 301년 알렉산더의 한 장군이었던 셀류커스 1세(Seleucus Ⅰ Nicator)가 안티고노스를 잇수스에서 무찌른 다음 오른테스 강 어구에 항구 도시 실루기아 피에리아(Seleucia Pieria)를 건립하였다. 이듬해 봄 셀류커스는 안티고니아의 건축 재료를 가져다 근처에 도시를 세우고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도시를 만들어 자신의 부친 이름인 안티오쿠스(Antiochus)를 따서 안디옥(Antiocheia)으로 명명하였다. 고대 지리학자 스타라보(Strabo, 주전 64년~주후 25년)에 의하면, 셀류커스 1세는 수리아에 4개의 도시(Tetrapolis)를 세웠는데, 이 중 가장 큰 도시는 자신의 부친 명을 따라 안디옥(Antiocheia)으로, 가장 강한 요새 도시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실루기아(Seleucia)로, 나머지 두 도시 중 하나는 자신의 아내 이름으로 아파마(Apameia)로,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모친 이름을 따라서 라오디게아(Laodiceia)로 명명하였다. 안디옥은 원래 두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그 하나는 그리스인과 마게도냐에서 온 식민자들의 거주지였고, 다른 하나는 토착인들의 거주지였다. 안티오쿠스 3세 때 세 번째 지역이 추가로 건설되었고,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네 번째 지역인 에피파네아(Epiphanea)를 건설함으로써 이 도시를 확장시켰다. 주전 281년 셀류커스 1세의 사후 주후 1세기까지 수리아 안디옥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디옥은 262~244년 이집트의 침입으로 도시가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안디옥 침입으로 주전 69~64년 로마 제국에 대항해서 싸우던 셀류시드 왕조가 막을 내리고 안디옥이 로마 제국에 복속되면서 군사적인 전략도시로 부상하였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주전 175~163년) 당시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의 억압으로 아주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주전 165년 실루기아-체시폰(Seleucia-Ctesiphon)이 파괴될 당시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안디옥의 규모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지만 당시 안디옥의 인구는 50~7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주후 1세기 로마의 귀족이자 역사가인 플리니(Pliny)는 당시 실루기아-체시폰의 인구를 20만에서 60만으로 추산하였다. 스트라보 역시 그의 역작 「지리」에서 안디옥을 시리아 지역의 대도시로 소개하면서 안디옥이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가 자유민만 30만 명이 넘었다고 말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보다 크게 작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이로 보건대 안디옥의 인구는 노예를 포함해서 5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을 것이다. 로마가 이 도시를 정복한 후 주전 47년 율리우스 가이사르(Julius Caesar)가 이 도시를 방문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때 많은 관공서가 건축되었고,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시대에는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3. 고고학적 개요 주전 300년경 셀류커스 1세는 오론테스 강변에 중앙 대로를 제외하고는 격자형으로 도로를 만들고 중산층과 빈민층을 위한 아파트형 건물인 인슐라(insula)를 건축함으로써 전형적인 헬라식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신전, 상점, 목욕탕 등의 건물이 들어섰던 주(主)도로는 로마 시대에 완성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도시에 많은 공공건물을 건축하였다. 주전 67년 로마 관리인 마르치우스 렉스(Marcius Rex)는 이 지역을 통과하던 오론테스 강의 섬(지금은 사라졌음)에 궁전과 원형경기장을 세웠다. 주후 47년에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는 이 도시를 자치도시로 선포하고, 실피우스 산기슭에 들어선 주택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건설하였으며, 목욕탕, 극장, 검투장, 그리고 로마의 제의를 위해 카이사리온(Kaisareion) 등의 공공시설을 건축하였다. 그전에 이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실피우스 산에 대형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로마 시대에는 안디옥 근처 다프네의 여러 샘에 끌어들인 수로가 적어도 두 개는 있었다. 시저의 양자이면서 초대 로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주전 27년~주후 14년 재임)는 이곳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자신의 건축가인 마르쿠스 아그립바(Marcus Agrippa)에게 도시를 확대하여 건설하게 하고 이를 위해 재정을 지원하였다.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 14~37년 재위)는 직전 황제의 건설 사업을 이어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안디옥의 남북을 비스듬히 지나가는 중앙 대로이다. 원래 이 도로는 셀류커스 왕조 때 포장되었다가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주전 30~20년 사이에 대(大) 헤롯(주전 37~4년 팔레스틴 통치)이 다듬은 대리석을 깐 포장도로였던 것을 주후 31년에 티베리우스 황제가 이 대로 양편에 두 줄의 열주(列柱)식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비와 햇빛을 막았다. 신약 당시 안디옥에 두 차례 큰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한 번은 갈리굴라(Caligula) 황제(37~41년) 재위 원년인 37년에 일어났고, 다른 한 번은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당시에 에베소, 서머나를 포함한 소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났다. 지진 후 중앙 대로는 다시 복구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에서 주목하는 유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베드로 암굴’(St. Peter’s Grotto) 교회다. 이 교회가 ‘베드로의 암굴’로 불린 것은 베드로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교회 안벽에 남아 있는 기록 때문이다. 스타우리스(Stauris) 산의 서쪽 경사면의 암벽에 있는 자연 동굴은 길이 13m, 너비 9.5m, 높이 7m인데, 교회 전승에 의하면 안디옥 출신의 복음서 저자 누가가 제공한 이 굴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였다고 한다. 1098년 십자군이 안디옥을 점령할 당시 교회 정면의 양쪽 아치를 건축함으로써 교회는 확장되었다. 당시 모자이크 바닥이 남아 있으며, 거의 보이지 않는 프레스코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제단에서 왼쪽으로 피신할 수 있는 동굴이 있으며, 제단의 오른편으로 바닥에 고인 작은 수조가 있다. 아마도 초기 교회는 이 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이다. 1580년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무슬림이 이 굴을 정교회 기독교인들에게 기증한 뒤 이곳은 예배처로 사용되었다. 1856년 당시 이 굴을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의 알렙포 총독이 이를 성자 씨이(See)에게 기증하였다. 현재 이 굴에 있는 제단은 1931년에 돌로 제작된 것인데 1990년 재건한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 1863년에 제작한 목조 제단이 있었는데 이를 석조 제단으로 대체하였다. 제단 위 암벽 상층부 벽감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제작된 베드로의 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벽감은 1932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베드로 석상은 프랑스의 시리아 주교인 피에르 뒤리유(Pierre Durieux)가 기증한 것이다. 현지에서 난 돌로 건축된 동양적인 교회 전면은 1863년 교황 피우스(Pius) 9세의 명으로, 나폴레옹(Napoleon) 3세의 재정 후원을 받아 건축된 것이다. 교회 앞 정원은 기독교인들의 묘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교회 내부의 제단 아래에서 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846년 이래 지금까지 안디옥의 가톨릭교회 대표자로 프란체스코 종파의 수도회인 캐퓨친(Capuchin) 신부들에 의해 성탄절 미사 때 성찬식이 행해지고 있다. 그 밖에 흥미로운 유물로 안디옥의 한 우물에서 발견된 높이 약 19cm, 직경 15cm되는 이중 은제(銀製) 성배(聖杯)가 있는데, 안의 잔은 은으로 제작되었고, 손잡이가 있는 바깥 잔은 금으로 입힌 은제 성찬용 잔으로 예수의 형상 좌우에 각각 5명의 사도가 새겨져 있다. 바깥 잔은 2~6세기의 것이고 안의 잔은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때 사용하신 잔이라 하는데 그 진위를 밝힐 수 없다. 그 밖에 안디옥에서 발견된 중요한 유물로는 1932~39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와 프랑스의 소르본느대학교에 의해 발굴된 많은 모자이크들인데, 현재 안타키아(Antakya)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경 연구 신약 성경에서 수리아의 안디옥과 관련되어 있는 본문으로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의 구절들(6:5; 11:19~24, 25~26, 27~30; 13:1~3; 14:26~28; 15:22~29, 30~35; 18:22~23)과 바울 사도가 기록한 갈라디아 2장 11~14절을 들 수 있다. 1. 사도행전에서 안디옥 1) 니골라의 고향, 안디옥(6:5)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과부를 위한 일상 구제를 할 때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제외됨으로 이들과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유대인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열두 사도는 일곱 명의 일꾼을 뽑았다. 모두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디아스포라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인으로 추정된다. 그 중 한 사람인 이방인 니골라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유대교 개종자’였으나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이었다. 나중에 니골라가 자신의 정욕을 억제하기 위해 아내에 관해 언급한 말을 사람들은 오해하였고 부끄러움 없이 간음을 행했던 ‘니골라 당’(계 2:6)이 이 이름에서 유래되었다(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스트로마타」, 이레네우스의 「이단론」,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2)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11:19~24) 스데반이 순교한 후 예루살렘에 일어난 환난을 피하여 흩어졌던 신자들이 수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중에 구브로 섬과 북 아프리카의 해안도시 구레네로 피신했던 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이로써 안디옥은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안디옥에서 헬라인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다. 그는 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으로서 본명이 요셉이었는데, 자신의 밭을 판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와 사도들로부터 바나바로 불린 자이다(행 4:36). 누가는 ‘바나바’를 권위자(勸慰者)로 옮겼는데, 이는 원래 히브리어로 ‘예언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르-네부아(abn rb)에서 유래된 말로, 누가는 아마 ‘예언의 아들’을 위로적 권면인 ‘권위(勸慰)를 하는 아들’(u?o;?paraklhvsew?이라는 헬라어로 옮겼을 것이다.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었으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안디옥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하여 큰 무리가 주께 돌아왔다. 3) 바울의 사역지와 제자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곳(11:25~26) 바나바는 오래 전 일을 생각하고 길리기아의 다소로 가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던 사울(갈 2:1)을 찾아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 왔다. 바나바는, 14년 전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였지만 그들이 두려워하자,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의 회심 이후의 활동을 보고하여 그를 보호한 사람이었다(행 9:26~28).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에게 예수를 전하다가 위험에 처하자 형제들이 그를 당시 문화와 상업 중심도시이며 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어 줄곧 거기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행 9:29~30).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다소에서 데려온 사울과 함께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다. 그때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누가의 경우 제자는 사도와 달리 신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이 비로소 그리스도인(Cristianoiv)이라 불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명칭이 아니다. 그 명칭은 처음에는 외부인들이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신자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이로써 안디옥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독자적인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신자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참조 벧전 4:16). 4) 아가보 선지자가 기근을 예언한 곳(11:27~30) 예루살렘에서 온 기독교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인 아가보가 안디옥에 이르러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 통치)가 통치하던 로마 제국 전역에 흉년이 일어날 것을 성령에 힘입어 예고하였다. 이때가 47년쯤이었는데, 당시 팔레스틴 지역이나 로마 제국 전역에 일어난 기근에 대해서는 성경 외 다른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이 일로 안디옥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힘껏 부조하여 이를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예루살렘 장로들에게로 보냈다. 5)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교회(13:1~3)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도들과 장로들이었다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었다. 이 단락에서 다섯 명이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바나바, 마지막에는 사울, 그 사이에는 아프리카인 니게르(‘흑인’의 라틴어) 시므온과 대규모 유대인 식민지인 구레네 사람 루기오, 주전 4년에서 주후 39년까지 43년 동안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린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유아 시절의 친구인 유대 가문의 마나엔(히브리어로 므나헴)이 언급되었다. 이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중 성령의 지시를 받아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 후 이 둘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사도’(ajpovstolo?로 불렸다(참조 14:4). 6) 바나바와 바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 보고 장소(14:26~28) 두 사도는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고하였다. 7)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을 인편으로 전해 받은 안디옥 교회(15:22~35)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요긴한 것(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피할 것) 외에 어떤 율법의 짐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한 편지를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 편에 보냈다. 8)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 후 세 번째 선교 여행 전까지 머물렀던 곳(18:22~23) 2. 바울이 율법에 대한 이해 문제로 베드로를 책망한 곳(갈 2:11~14) 예루살렘 사도회의(행 15:1~35; 갈 2:1~10)에 대표를 보낸 안디옥교회에 유대적 성향의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적 안디옥교회를 답방하는 대표단을 보냈다. 선발대 격으로 안디옥에 이른 베드로 일행이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다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후발대 격으로 보낸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러 공동 식사 장면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고 그와 함께 식사하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바나바도 그 자리를 떠났다. 이를 본 바울이 그러한 행위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한 것이며 그들에게 유대적 생활 방식을 강요한 것이라고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말씀 적용의 유의점 앞에서 성지(聖地) 안디옥과 초기 기독교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안디옥에 대한 신약 성경의 관련 말씀을 살펴보았다. 양자를 서로 관련지어 그 의미를 설교나 성경 공부에 적용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리아의 안디옥은 교통과 무역의 중심 도시였다. 주전 3세기 이전에는 이곳에 도시가 없었고 아나톨리아와 수리아 지역을 잇는 중심 도시는 알렙포였다. 안디옥이 건설됨으로써 소아시아 지역과 팔레스틴을 왕래하는 교통이 편리해졌고, 외항인 실루기아를 통해서 안디옥은 뱃길을 이용해 로마 제국 전역과 빠르게 연결될 수 있었다. 이는 1세기 초기 기독교 선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방에 전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 수리아의 안디옥은 헬라적인 도시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안디옥은 도시 건설 자체가 알렉산더 대왕 수하의 셀류시드 가에 의해 세워진 헬라식 도시였다. 도시 건축뿐 아니라 도시를 채운 문화도 헬라적이었다. 헬라어가 일상어로 통용되었으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 몇 권도 이곳에서 저술되었다고 추정된다. 특히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저술 장소로 안디옥을 주장한다. 헬라의 학풍이 바울이나 후대의 교부, 특히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역사적인 성경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셋째,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적인 도시였다. 설립 당시 헬라 식으로 건축된 이 도시는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통치한 후 그리스 문화에 로마 문화가 수용된 그리스-로마 문화가 꽃 피우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로마의 여러 신들에 대한 숭배는 예루살렘 사도공회 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합의된 준수사항과도 관련되어 있다. 특히 우상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에 대한 금지는 그리스-로마의 종교, 문화, 사회 관습에서 이방 선교를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율법의 짐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도시였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으며, 또한 이곳에서 제국의 전 지역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안디옥 인구도 50~70만 명이나 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요약하면, 수리아의 안디옥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속해 있던 로마 제국 내 수리아 주의 수도이자 군사, 교통, 무역, 학문적으로 중요한 로마 제국의 대도시로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선교 초기 열방 선교의 전초기지였다. 따라서 수리아의 안디옥을 ‘그 땅에 역사한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선포에 열방을 향한 복음의 개방성과 진취성이 살아날 것이다. 한상인, 「신약고고학과 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Anchor Bible Ⅰ. Art. “Antioch of Syria”, pp. 265~269. McRay, John. Archaeology &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1991). Zambon, M.G., Bertogli, D. & Granelle, O. Antioch on the Orontes (Parma: Eteria, 1998). Vos, Howard F. St. An Introduction to Bible Geography. 한정건·신득일 공역, 「성경지리개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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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비시디아 안디옥 > 해외(성지)여행

비시디아 안디옥의 현재 지명은 얄바츠(Yalvac)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성경에는 안디옥이라는 이름이 두 군데가 나오는데 하나는 수리아 안디옥이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기원전 290년 경에 시리아의 헬로우코스가 자기 아버지 안티오쿠스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로 325년에 유대인 회당이 있던 곳에 바실리카 양식을 바울기념교회를 세웠다.

▲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이 1차 전도 때에 들렸던 곳으로(2, 3차 전도 여행 때에도 들름)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마가라 하는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둘만 이곳으로 와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다(행13장).

바울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서론에 구약역사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예수님이다(행13:17-22), 본론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설명(행13:17-22), 결론으로 믿음으로 죄용서와 의롭다 함을 선언(행13:38-41)하는 내용이다.

비시디아 인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13:44)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많은 이들이 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왔음을 알 수 있고, 유대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행13:50)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행13:51)에서 보듯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이동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방인 선교에 헌신키로 결심했고, 갈라디아서는 이 지역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을 위해 기록한 편지이다.

이곳에는 바울기념교회가 있는데 바울 당시 세운 교회가 아니라 바울을 기념해서 후에 세워진 교회로 지금은 무너져 그 윤곽과 돌들만 남아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대한 내용은 추후 보충할 예정입니다.>

▲ 지도 중간에 붉은 색 원안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에 피어있는 붉은 꽃, 개양귀비라고 한다.

▲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 소개 입간판

▲ 비시디아 안디옥의 원형 경기장(약 2만여명 수용했다고 한다)

▲ 아고라(광장, 시장) 길가에 위치한 상점들.

▲ 오른쪽 상점들이 위치한 길

▲ 하트 모양의 돌이 인상적이어서 찰칵~

▲ 멀리 수로가 보인다.

▲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 내의 목욕탕 유적

▲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 내에 사도바울기념교회를 설명하는 입간판

▲ 사도바울기념교회

▲ 사도바울기념교회: 바울이 설교했던 유대인 회당 터에 세워졌던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로 사진은 제단부분.

▲ 사도바울기념교회 건물도와 오른쪽 모자이크는 교회 바닥에 세겨진 모자이크라고 한다.

▲ 사도바울기념교회 제단 부분.

▲ 사도바울기념교회 전경

▲ 사도바울기념교회 전경

키워드에 대한 정보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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