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 4 장 주석 | [Live] 교회를 덮치는 고난 (베드로전서 4:1-19)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01219 153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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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전서 4장 주석

베드로전서 제 4장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본

(本)을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고난’은 문자적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

는 의미로(KJV, RSV, NASB)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활영역’에서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음

을 시사한다(3:18, Michaels,Stibbs, Blum).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 ‘갑옷’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플리사스데’

(* )는 ‘무기’를 뜻하는 ‘호플론'(* )에서 유래된 단

어로 여기서는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의

삶 속에서 사상이나 이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Lenski). 베드로는 그리스

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제시하고있다. 여기서 ‘같

은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온유했던 대속적인

마음을 의미한다(빌 2:5, Cranfield).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에서

고난당하시는 가운데 가지셨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Kelly)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

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다(Calvin, Bigg, Selwyn, Michaels, Blum). 세례를 통해

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유혹과 권세

가 이기지 못하여 죄가 끊어지게 되며(롬 6:8, 11)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성화의 한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Selwyn, Cranfield, Stibbs).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함으로 죄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는 성화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한다.

=====4:2

그후로는…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

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을 제시한다. ‘육체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사르

키'(* )는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지상

생활을 나타낸다. 한편 ‘남은 때’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

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사람의 정욕’과 ‘하나님의뜻’

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의 정욕’의 헬라어 ‘안드로폰 에피뒤미아이스'(*

)에서 ‘안드로폰’은 본서에서 한번을 제외하고

는(3:4)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6절;2:4, 15), ‘에피뒤미아이스’는 단

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된 욕

망을 의미한다(요일 2:16, Selwyn, Michaels).한편 ‘하나님의 뜻’은 문맥상 죄를 그치

고(1절) 부끄러운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2, 3절).비록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

나님의 뜻’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지만, 본서 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를 사

랑하며 왕을 공경하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19절; 2:15,

17;3:17).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타락된 본성에서 비롯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4:3

너희가…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 – 본절은 수신자들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묘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은 과거 그

리스도인이 되기전으로 족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방인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정

면으로 배치된다. 본절의 ‘뜻’의 헬라어는 ‘불레마(* )로 2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뜻'(* , 델레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레마’는 확

고한 목적성이 없어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것을 가리키며 ‘델레

마’는 목적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뜻을 가리킨다(Caffin). 한편 ‘행한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이르가스다이'(* )는 완료 분사로 수신자들

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전부 이방인 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수신자들은 더이상 과거 이방인의 삶과 동일한 죄악된 삶을 영위할 이유가 없다. 죄악

된 삶은 과거 이방인 시절로 족한 것이다. 베드로는 경고하기 위해서 과거 수신자들이

저지른 세 가지 부류의 죄악을 열거한다.

(1) 음란과 정욕 – 본문은 성(性)과 관계된 죄악이다. ‘음란’은 절제되지 않은 지

나친 정욕으로 인한 부도덕한 성행위를 가리키며.’정욕’은 사악한 욕망들이 내적

으로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정욕’은 ‘음란’으로 향하게 된다(2절;2:11).

(2)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 – 본문은 ‘술’과 관계된 죄악이다. ‘술취함’의 헬라어

‘오이노플뤼기아이스'(* )는 ‘포도주’라는 뜻의 ‘오이노스’

(* )와 ‘솟아 오르다’라는 뜻의 ‘플뤼오'(* )의 합성어로서

술에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방탕’은 술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난동을 부

리는 것을 의미하며 ‘연락’은 ‘큰 술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술이 만

취 되었을때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쉽게 범죄하게 된다.

(3) 무법한 우상 숭배 – ‘무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데미토이스'(*

)는 부정 접두어 ‘아'(* )와 ‘허락하다’라는 뜻의 ‘데미토스'(*

)가 합성된 말로서 자연과 양심의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우상 숭

배를 가리킨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음주와 음란이 섞인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왕상 21

:26; 겔 7:20; 롬 2:22). 그 결과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며 구속주이신 하나님

을 기억지 못하게 되고 그분을 떠나 허탄한 우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4:4

이러므로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이러므로’의 헬라어 ‘엔 호'(*

)는 본서에서 다섯 번 나타나며(1:6; 2:12; 3:16,19) ‘이러한 생활안에 있으므로’

를 의미한다.이것은 한때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

화된 삶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상히 여겨’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존타이’

(* )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크세노스'(* )에서

유래된 말로 ‘낯선 사람처럼 보이다’라는 의미이다(행 10:6, 18;17:20). 이방인들은

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함

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Bigg). 이러한 모욕과 비방은 단순

히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아니하는 것을 – 본문은 이방인

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비방하는 이유이다. ‘극한'(* , 아소티아

스)은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눅 15:13). 그러므로 ‘극한 방

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

을 말한다(엡 5:18; 딛 1:6). 이방인들은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아 전혀 다른 새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본래 하나님께

서 소유하고 계시던 심판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셨다(요 5:22,27; 행 17:31; 롬 2:

16).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자와

죽은자’는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들을 말한다(살전 4:15). 여기서

‘죽은 자’는 복음을 듣지 못한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심판

하기를 예비하신 자’는 ‘마땅히 심판하시는 자’를 표현한 것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

타내는 말이다.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본절에 ‘이를위하여'(*

)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심을 가

리킨다(Selwyn).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자’의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죽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한

다고 주장하나(Augustine, Frasmus, Luther)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성이없다. 왜냐 하

면 앞절에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에 대해 이미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Stibbs). 따라

서 본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이 임하기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Dalton, Kelly, Moffat, Selwyn,

Cranfield).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베드로는 ‘육체로’와 ‘영으로’를, ‘심판을 받으나’와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조시켜

서 본절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목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받으나’

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도시(* )는 부정 과거로 육체로는 세상

에서 이미 심판을 당하였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조

시'(* )는 현재형으로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

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으로는 영원히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하는 능력으로(요일 3:14)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할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

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있다.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

한다(3:10, Stibbs). ‘가까 왔으니’의 헬라어 ‘엥기켄'(* )은 ‘가까이

잡아 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 )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

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네사테’

(* )는 ‘소리’라는 뜻의 ‘소스'(* )와 ‘마음’이라는

뜻의 ‘프렌'(* )의 합성어로서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하며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

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

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

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

이다. ‘열심으로'(* , 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

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

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

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

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

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대접하기를’의 헬라어 ‘필록세노이'(*

)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 )와 ‘나그네’를 의미

하는 ‘크세노스'(*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

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

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딤전 3:2; 5:10; 딛 1:8).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

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

스도인들이 쫓겨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Lenski, Cranfield).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뿐만 아

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

다(롬 12:13;히 13:2; 요삼 1:5-8). 한편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

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

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

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마 25:35, 38, 40 ).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

로서 다양하다(롬 12:6;고전 12:4).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할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

라(고전 4:7)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Cranfield).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

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해야 한다. 이 ‘봉사’ 는 ‘상대를 섬기는 것’이

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 본절은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

이 은사를 통해 서로 섬겨야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각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

킬레스'(* )는 여러 가지 특색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각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여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신다. 한편 ‘청지

기’는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양은사를 받은 그리

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

를 섬기고 봉사하며,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

는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멋을 추구해야 한다(Robertson, Blum).

=====4:11

베드로는 본절에서 은사의 사용 범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 첫번째 범주는 ‘말의 사

용’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레이'(* )는 모든

종류의 말을 의미하며 ‘말씀’의 헬라어 ‘로기아'(* )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계시를 의미한다(Blum ).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한다(고후 5:20; 살전 2:13).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

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함을 시사한다(Lenski).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 둘째범주는 ‘봉

사’이다. 베드로는 봉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다 열거하지 않고 한단어로 묶고 있다.

‘공급하다’의 헬라어 ‘코레게이'(* )는 본래 ‘합창하다’라는 의미였

으나 후에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

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

해야 한다(Calvin).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언급한 두가지 범주 즉 말과 봉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

이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행해야만 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한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Beare).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본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이다(롬 11:33-36; 엡 3:20, 21). ‘그에게’의 헬라어 ‘호 에스틴'(*

)은 선행사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인지 분명치 않으나 만약 ‘예수 그리스

도’라고 한다면(Stibbs, Michaels, Kelly, Goppelt, Selwy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이란 의미가 되어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예수그

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논리상 타당하므로 본절에 해당하는 선행사를 ‘하나

님’으로보는 것이 적절하다(Blum, Clemen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

고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기 때문에(롬 16:27; 유 1:25; 계 1:6, Lens

ki, Robertson) 찬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의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아마도 베드

로도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혹자는 송영이 이곳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래 본절이 독립된 것이었는데 삽입된 것으로 주장하나(Clement) 성경에서 그리스도

의 위엄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4:12

사랑하는 자들아 – 베드로는 본절부터 다시 핍박 받는 자들에 대한 권면을 한다.

본문은수신자를 향한 베드로의 애정어린 마음을 나타내며(2:11) 동시에 새로운 권면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불시험’으로 묘사된다. ‘시련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페이라스몬'(*

)은 진위(眞僞)를 가리는 것으로 유혹이아니라

시험(test)을 의미한다. 이 ‘시련’은 본절에서 ‘불 시험’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 시

험’의 헬라어 ‘테 엔 휘민 퓌로세이'(* )는 문자적으

로 ‘너희 중에 타고 있는 불’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고통스럽게 타는 불’로서 소돔

성을 파괴시킬 때의 불로 묘사되며(Josephus) 또한 종말에 ‘바벨론 성’을 멸망시킬 불

로 나타나기도 한다(계 18:9, 18). ‘퓌로세이’는 순수한 금속을 얻기 위해 제련하는것

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불같이 뜨거울 것을 상징한다(시 66:10; 잠

27:21; 계 3:18, Stibbs, Blum). 이러한 시련을 끝까지 믿음으로써 견디는 자는 저주

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한편 ‘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메 네'(*

)는 현재분사로 베드로나 수신자가 이미 경험했고 또한 현재에도 고난을

당하고 있으며 장차 계속 다가올 시험임을 시사한다.

이상한 일 당하는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이상히 여기지’의 헬라어 ‘크세니

제스데'(* )는 실제적인 박해에 의해서 ‘사람을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을 의미한다(Beare).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시련을 엄청난 충격

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그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그 고난의 동참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에 참예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고난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것이라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여러 가지 핍박과 치욕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가 십자가의 고난을 겪을 때와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

나 그것은 영광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즐거워

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 )는 현재분사로 그 즐거움이 일순간적

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후에 주어질 영광의 승리를 바라보며 항상 어떤 조건하에서도 즐거워해야 한

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줄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 본절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절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즐거워

하는 목적이며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한다. 현재에 당한 고난은 육체적

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할정도로 어려운 것이지만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능히

이기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기뻐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갈리오메노이'(*

)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극도의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로

(Lenski)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극명한 대조를 통해 고난보다 즐거움과 기쁨이 훨

씬 큰 것임을 암시한다.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 엔 오노마티 크리스투)는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님이 하셨던 표

현이며(마 5:11)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거의 전문적인 표현 방식으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

다(마 10:22; 요 15:21; 행 9:16; 15:26; 21:13; 계 2:3; 3:8, Kelly). 한편 ‘욕을 받

으면’은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비방이나 능욕을 받는 것으로 본서에서 여러 번 사용

되었다(4절; 2:12, 15; 3:16).이것은 70인역에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비방

했던 것에 대해 많이 사용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받은 모욕을 나타낼때 많

이 사용되었다(마 27:40 – 44; 롬 15:3; 히 13:13).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에서 당하신 고난

에 동참하는 것으로 후대 영광에 참여할 복된 것이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

난당하는 자들이 복 있는 이유이다. 본절에서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영’과 동일시되

어 ‘성령’을 나타낸다.’영광의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테스 독세스'(*

)는 문자적으로 ‘그영광의 그’이다. 이 표현은 쉐키나(S-

hekinah)를 묘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영광을 가리킨다(출 16:7; 24:

16; 29:43; 40:34; 민 14:10; 왕상 8:10, 11; 사 6:1 ; 겔 1:28,Cranfield, selwyn).

‘하나님의 영’ 곧 ‘영광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게 되며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소유됨을 시사한다

(Stibbs). ‘계심이라’의 헬라어 ‘아나파우에타이'(*

)는 ‘쉬게 하다’, ‘자리잡다’라는 의미로 성령의 임재를 시사한다. 성

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임재해 계셨으며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

다(행 7:55, Bigg).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시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그

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동참할 때 하나님의 두드러진 속성인 영광을 보게 된

다(행 7:55).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

을 받지 말려니와 –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것이어

야 하며 세상에서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악행

으로 받는 고난은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며 그 악행 자체는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로'(* , 호스)는 앞의

세 가지 범죄와 다음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사이를 분리하여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는 ‘남의것을 탐내는 사람’이나

(Deismann), ‘금지된 일 하는 자'(Bigg) 혹은 ‘밀고자'(NIV)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

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것도 아

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인해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은즉 – ‘그리스도인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그

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다(13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주 사

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행 11:26; 26:28) 그 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처

음에는 ‘제자’,’형제’, ‘성도’라는 호칭이 사용되다가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당

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아그립바는

그리스도인을 경멸할 때 사용하여(행 26:28) 초기에는 주로 신자들을 박해할 때 사

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Goppelt). 따라서 신약성경 기록 당시에는 보편적인 단어

가 아니었으나 그후 A.D. 64 년 경까지 로마에서 신자사이에 이 말의 적합성을 깨닫

고 그들 스스로가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Tacitus, 행 11:19 – 26 주제 강해 ‘그리스

도인’ 참조).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본절은 베드로 자신

의 수치인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을 암시한다(막 14:66 – 72, Blum). 베드로는 처음

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나(막 14:68)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있다. ‘그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오노마티투토'(* )

는 후기 사본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 엔 토 메레이 투토)로 기록 되어 있다(K,L,P). 그래서 흑자는 이 구문을 ‘그리

스도인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라는 의미로서 신분 의식이 강조되

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elwyn, kelly). 그러나 ‘그이름으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라는 이름으로’라는 의미이다(Blum, Stibbs). 왜냐하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름만 붙어도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14절).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 ‘하나님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전 3:16; 딤전 3:15; 벧전 2:5). 왜냐하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에 하나님의 심판

이 성소에서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렘 25:29; 겔 9:6; 말 3:1-6 ). 그리스도인들

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인하여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있으나(마 24:8, 9) 이

심판은 멸망당할 심판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종말의 모습이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임해서 성결케 하

고 다음에 확대될 것이라는 사상을 표현하고있다(1:7; 슥 13:7-9; 말 3:1-5, Stibbs,

Blum).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

떠하며 –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게 되는데 하물며 악인들은 어떠하겠는가? 이 심

판 앞에서는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베드로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는 하나님 집도심판

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더 크고 분명한 심판을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세상에 선포된 그리스도

인의 메시지’로(막 1:15; 롬 1:1; 살전 2:2, 8, 9, Michaels),이런 복음에 순종치 아

니하는 자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살후 1: 5-10).

=====4:18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 본절은 잠

11:31(LXX)의 인용이다. ‘의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

라도 구원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며 어려운 불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한다(12절). 그러

므로 경건한 자들이 얻는 구원도 ‘겨우’ 얻는 것이다. 혹자는 ‘겨우'(* ,

몰리스)를 ‘고통’이라고 하나(Scott) 여기서는 ‘간신히’, ‘겨우’라는 말이 합당하다.

의인인 그리스도인도 심판을 통해서 겨우 구원을얻는다. 의인들도 그러할진대 경건치

않은 자들은 당연히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것이다. 베드로가 본절에서 의

인의, 구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탕한 길에 빠지지 않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Calvin).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

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찾아오는 많은 시련

과 고난을 겪는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

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구

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1:6; 5:6).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 그리스도인들은 아

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박해하는 핍박자들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리어 선을 행하므로 갚아야 하며, 확신을 가지고 고난 가운데에도

자신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것을 부탁해야 한다(Stibbs). ‘부탁할지어다’의 헬라어 ‘파

라티데스도산'(* )은 ‘예금하다’, ‘맡기다’의 ‘파라티데

미'(* )에서 유래된 말로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의탁

하는 것’을 뜻한다. ‘파라티데스도산’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

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과(눅 23:46) 스데반의 의탁이다(행 7:

59). 한편 ‘조물주'(* , 크티스테)는 외경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신약성

경에는 이곳에만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능히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사한다(Bigg).

헬라어 베드로전서 4장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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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투 운 파돈토스 사르키 카이 휘메이스 텐 아우텐 엔노이안 호플리사스데 호티 호 파돈 사르키 페파우타이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새번역,1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위하여’ 또는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말성경,1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분이 죄를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고난을 겪으셨으니, 여러분도 같은 각오로 무장하십시오. 육으로 고난을 겪는 이는 이미 죄와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영어NIV,1 Therefore, since Christ suffered in his body, arm yourselves also with the same attitude, because he who has suffered in his body is done with sin.

영어NASB,1 Therefore, since Christ has suffered in the flesh, arm yourselves also with the same purpose, because he who has suffered in the flesh has ceased from sin,

영어MSG,1 Since Jesus went through everything you’re going through and more, learn to think like him. Think of your sufferings as a weaning from that old sinful habit of always expecting to get your own way.

영어NRSV,1 Since therefore Christ suffered in the flesh, arm yourselves also with the same intention (for whoever has suffered in the flesh has finished with sin),

헬라어신약Stephanos,1 χριστου ουν παθοντος υπερ ημων σαρκι και υμεις την αυτην εννοιαν οπλισασθε οτι ο παθων εν σαρκι πεπαυται αμαρτιας

라틴어Vulgate,1 Christo igitur passo in carne et vos eadem cogitatione armamini quia qui passus est carne desiit a peccatis

히브리어Modern,1 ועתה כאשר ענה המשיח בעדנו בבשר כן היו גם אתם מזינים במחשבה ההיא כי המענה בבשר חדל מחטוא׃

성 경: [벧전4:1]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본(本)을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고난’은 문자적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의미로(KJV, RSV, NASB)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활영역’에서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음을 시사한다(3:18, Michaels,Stibbs, Blum).

󰃨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 ‘갑옷’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플리사스데'(*)는 ‘무기’를 뜻하는 ‘호플론'(*)에서 유래된 단어로 여기서는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의 삶 속에서 사상이나 이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Lenski).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온유했던 대속적인 마음을 의미한다(빌 2:5, Cranfield).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에서 고난당하시는 가운데 가지셨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Kelly)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다(Calvin, Bigg, Selwyn, Michaels, Blum).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유혹과 권세가 이기지 못하여 죄가 끊어지게 되며(롬 6:8, 11)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성화의 한과정을 경험하게 된다(Selwyn, Cranfield, Stibbs).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함으로 죄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는 성화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한다.

에이스 토 메케티 안드로폰 에피뒤미아이스 알라 델레마티 데우 톤 에필로이폰 엔 사르키 비오사이 크로논

개역개정,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2 이제부터는, ㉡육신으로 살아갈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 ㉡이 세상에서의 삶

우리말성경,2 그분은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기 원하십니다.

가톨릭성경,2 그러니 남은 지상 생활 동안,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영어NIV,2 As a result, he does not live the rest of his earthly life for evil human desires, but rather for the will of God.

영어NASB,2 so as to live the rest of the time in the flesh no longer for the lusts of men, but for the will of God.

영어MSG,2 Then you’ll be able to live out your days free to pursue what God wants instead of being tyrannized by what you want.

영어NRSV,2 so as to live for the rest of your earthly life no longer by human desires but by the will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ς το μηκετι ανθρωπων επιθυμιαις αλλα θεληματι θεου τον επιλοιπον εν σαρκι βιωσαι χρονον

라틴어Vulgate,2 ut iam non hominum desideriis sed voluntate Dei quod reliquum est in carne vivat temporis

히브리어Modern,2 למען אשר לא תחיו עוד לתאות בני אדם כי אם לרצון אלהים כל ימי היתכם עוד בבשר׃

성 경: [벧전4:2]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그후로는…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을 제시한다. ‘육체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사르키'(*)는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지상 생활을 나타낸다. 한편 ‘남은 때’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사람의 정욕’과 ‘하나님의 뜻’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의 정욕’의 헬라어 ‘안드로폰 에피뒤미아이스'(*)에서 ‘안드로폰’은 본서에서 한번을 제외하고는(3:4)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6절;2:4, 15), ‘에피뒤미아이스’는 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된 욕망을 의미한다(요일 2:16, Selwyn, Michaels).한편 ‘하나님의 뜻’은 문맥상 죄를 그치고(1절) 부끄러운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2, 3절). 비록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지만, 본서 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19절; 2:15,17;3:17).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타락된 본성에서 비롯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아르케토스 가르 호 파르엘렐뤼도스 크로노스 토 불레마 톤 에드논 카테이르가스다이 페포류메뉴스 엔 아셀게이아스 에피뒤미아이스 오이노플뤼기아이스 코모이스 포토이스 카이 아데미토이스 에이돌로라트리아이스

개역개정,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새번역,3 여러분은 지난날에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였으니, 곧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살아 왔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우리말성경,3 과거에 여러분이 이방 사람의 뜻을 따라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가증한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가톨릭성경,3 지난날 여러분은 오랫동안 이교인들이 즐기는 것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방탕, 욕정, 주정, 흥청대는 술잔치, 폭음,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영어NIV,3 For you have spent enough time in the past doing what pagans choose to do–living in debauchery, lust, drunkenness, orgies, carousing and detestable idolatry.

영어NASB,3 For the time already past is sufficient for you to have carried out the desire of the Gentiles, having pursued a course of sensuality, lusts, drunkenness, carousals, drinking parties and abominable idolatries.

영어MSG,3 You’ve already put in your time in that God-ignorant way of life, partying night after night, a drunken and profligate life. Now it’s time to be done with it for good.

영어NRSV,3 You have already spent enough time in doing what the Gentiles like to do, living in licentiousness, passions, drunkenness, revels, carousing, and lawless idolatry.

헬라어신약Stephanos,3 αρκετος γαρ ημιν ο παρεληλυθως χρονος του βιου το θελημα των εθνων κατεργασασθαι πεπορευμενους εν ασελγειαις επιθυμιαις οινοφλυγιαις κωμοις ποτοις και αθεμιτοις ειδωλολατρειαις

라틴어Vulgate,3 sufficit enim praeteritum tempus ad voluntatem gentium consummandam qui ambulaverunt in luxuriis desideriis vinolentiis comesationibus potationibus et inlicitis idolorum cultibus

히브리어Modern,3 כי דינו עת החיים אשר עברה לעשות כחפץ הגוים בלכתנו בדרכי זמה ובתאות כסבאי יין וזללי בשר ורדפי שכר ותועבות עבדת האלילים׃

성 경: [벧전4:3]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너희가…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 – 본절은 수신자들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묘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은 과거 그리스도인이 되기전으로 족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방인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본절의 ‘뜻’의 헬라어는 ‘불레마(*)로 2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뜻'(*, 델레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레마’는 확고한 목적성이 없어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것을 가리키며 ‘델레마’는 목적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뜻을 가리킨다(Caffin). 한편 ‘행한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이르가스다이'(*)는 완료 분사로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전부 이방인 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수신자들은 더이상 과거 이방인의 삶과 동일한 죄악된 삶을 영위할 이유가 없다. 죄악된 삶은 과거 이방인 시절로 족한 것이다. 베드로는 경고하기 위해서 과거 수신자들이 저지른 세 가지 부류의 죄악을 열거한다. (1) 음란과 정욕 – 본문은 성(性)과 관계된 죄악이다. ‘음란’은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정욕으로 인한 부도덕한 성행위를 가리키며.’정욕’은 사악한 욕망들이 내적으로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정욕’은 ‘음란’으로 향하게 된다(2절;2:11). (2)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 – 본문은 ‘술’과 관계된 죄악이다. ‘술취함’의 헬라어 ‘오이노플뤼기아이스'(*)는 ‘포도주’라는 뜻의 ‘오이노스'(*)와 ‘솟아 오르다’라는 뜻의 ‘플뤼오'(*)의 합성어로서술에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방탕’은 술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의미하며 ‘연락’은 ‘큰 술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술이 만취 되었을때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쉽게 범죄하게 된다. (3) 무법한 우상 숭배 – ‘무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데미토이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허락하다’라는 뜻의 ‘데미토스'(*)가 합성된 말로서 자연과 양심의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음주와 음란이 섞인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왕상 21:26; 겔 7:20; 롬 2:22). 그 결과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기억지 못하게 되고 그분을 떠나 허탄한 우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엔 호 크세니존타이 메 쉰트레콘톤 휘몬 에이스 텐 아우텐 테스 아소티아스 아나퀴신 블라스페문테스

개역개정,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새번역,4 그들은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그런 지나친 방종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면서,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우리말성경,4 이방 사람들은 여러분이 그 같은 극한 방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하지만

가톨릭성경,4 그래서 그들은 이제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무모한 방종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놀라워하며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영어NIV,4 They think it strange that you do not plunge with them into the same flood of dissipation, and they heap abuse on you.

영어NASB,4 And in all this, they are surprised that you do not run with them into the same excess of dissipation, and they malign you;

영어MSG,4 Of course, your old friends don’t understand why you don’t join in with the old gang anymore. But you don’t have to give an account to them.

영어NRSV,4 They are surprised that you no longer join them in the same excesses of dissipation, and so they blaspheme.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ν ω ξενιζονται μη συντρεχοντων υμων εις την αυτην της ασωτιας αναχυσιν βλασφημουντες

라틴어Vulgate,4 in quo peregrinantur non concurrentibus vobis in eandem luxuriae confusionem blasphemantes

히브리어Modern,4 ועל זאת תמהים המה ומגדפים כי לא תרוצו עמהם לשטף בזמה כמוהם׃

성 경: [벧전4:4]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이러므로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이러므로’의 헬라어 ‘엔 호'(*)는 본서에서 다섯 번 나타나며(1:6; 2:12; 3:16,19) ‘이러한 생활 안에 있으므로’를 의미한다.이것은 한때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삶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상히 여겨’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존타이'(*)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크세노스'(*)에서유래된 말로 ‘낯선 사람처럼 보이다’라는 의미이다(행 10:6, 18;17:20). 이방인들은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Bigg). 이러한 모욕과 비방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아니하는 것을 –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비방하는 이유이다. ‘극한'(*, 아소티아스)은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눅 15:13). 그러므로 ‘극한 방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을 말한다(엡 5:18; 딛 1:6). 이방인들은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아 전혀 다른 새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호이 아포도수신 로곤 토 헤토이모스 에콘티 크리나이 존타스 카이 네크루스

개역개정,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새번역,5 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분에게 사실을 죄다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말성경,5 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예비하시는 분에게 바른대로 고하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5 그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를 갖추신 분께 셈을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영어NIV,5 But they will have to give account to him who is read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영어NASB,5 but they shall give account to Him who is read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영어MSG,5 They’re the ones who will be called on the carpet–and before God himself.

영어NRSV,5 But they will have to give an accounting to him who stands read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5 οι αποδωσουσιν λογον τω ετοιμως εχοντι κριναι ζωντας και νεκρους

라틴어Vulgate,5 qui reddent rationem ei qui parat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히브리어Modern,5 אשר יתנו חשבון לפני העתיד לשפט החיים והמתים׃

성 경: [벧전4:5]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본래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던 심판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셨다(요 5:22,27; 행 17:31; 롬 2:16).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들을 말한다(살전 4:15). 여기서 ‘죽은 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는 ‘마땅히 심판하시는 자’를 표현한 것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에이스 투토 가르 카이 네크로이스 유앙겔리스데 히나 크리도시 멘 카타 안드로푸스 사르키 조시 데 카타 데온 프뉴마티

개역개정,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6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6 이 때문에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됐는데 이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6 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6 For this is the reason the gospel was preached even to those who are now dead, so that they might be judged according to men in regard to the body, but live according to God in regard to the spirit.

영어NASB,6 For the gospel has for this purpose been preached even to those who are dead, that though they are judged in the flesh as men, they may live in the spirit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영어MSG,6 Listen to the Message. It was preached to those believers who are now dead, and yet even though they died (just as all people must), they will still get in on the life that God has given in Jesus.

영어NRSV,6 For this is the reason the gospel was proclaimed even to the dead, so that, though they had been judged in the flesh as everyone is judged, they might live in the spirit as God does.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ις τουτο γαρ και νεκροις ευηγγελισθη ινα κριθωσιν μεν κατα ανθρωπους σαρκι ζωσιν δε κατα θεον πνευματι

라틴어Vulgate,6 propter hoc enim et mortuis evangelizatum est ut iudicentur quidem secundum homines in carne vivant autem secundum Deum spiritu

히브리어Modern,6 כי על כן התבשרו גם המתים למען ישפטו בבשר לפי דרך בני אדם ויחיו ברוח לפי דרך אלהים׃

성 경: [벧전4:6]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본절에 ‘이를 위하여'(*)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심을 가리킨다(Selwyn).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자’의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 ‘죽은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죽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Augustine, Frasmus, Luther)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성이 없다. 왜냐 하면 앞절에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에 대해 이미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Stibbs). 따라서 본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Dalton, Kelly, Moffat, Selwyn,Cranfield).

󰃨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는 ‘육체로’와 ‘영으로’를, ‘심판을 받으나’와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조시켜서 본절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목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받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도시(*)는 부정 과거로 육체로는 세상에서 이미 심판을 당하였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조시'(*)는 현재형으로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으로는 영원히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하는 능력으로(요일 3:14)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할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있다.

판톤 데 토 텔로스 엥기켄 소프로네사테 운 카이 넾사테 에이스 프로슈카스

개역개정,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새번역,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우리말성경,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십시오.

가톨릭성경,7 만물의 종말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

영어NIV,7 The end of all things is near. Therefore be clear minded and self-controlled so that you can pray.

영어NASB,7 The end of all things is at hand; therefore, be of sound judgment and sober spirit for the purpose of prayer.

영어MSG,7 Everything in the world is about to be wrapped up, so take nothing for granted. Stay wide-awake in prayer.

영어NRSV,7 The end of all things is near; therefore be serious and discipline yourselves for the sake of your prayers.

헬라어신약Stephanos,7 παντων δε το τελος ηγγικεν σωφρονησατε ουν και νηψατε εις τας προσευχας

라틴어Vulgate,7 omnium autem finis adpropinquavit estote itaque prudentes et vigilate in orationibus

히브리어Modern,7 הן קץ הכל קרב לכן היו צנועים וערים להתפלל׃

성 경: [벧전4:7]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3:10, Stibbs). ‘가까왔으니’의 헬라어 ‘엥기켄'(*)은 ‘가까이잡아 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네사테'(*)는 ‘소리’라는 뜻의 ‘소스'(*)와 ‘마음’이라는뜻의 ‘프렌'(*)의 합성어로서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하며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프로 판톤 텐 에이스 헤아우투스 아가펜 에크테네 에콘테스

개역개정,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새번역,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우리말성경,8 무엇보다도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가톨릭성경,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영어NIV,8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영어NASB,8 Above all, keep fervent in your love for one another, because love covers a multitude of sins.

영어MSG,8 Most of all, love each other as if your life depended on it. Love makes up for practically anything.

영어NRSV,8 Above all, maintain constant love for one another, for love covers a multitude of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8 προ παντων δε την εις εαυτους αγαπην εκτενη εχοντες οτι αγαπη καλυψει πληθος αμαρτιων

라틴어Vulgate,8 ante omnia mutuam in vosmet ipsos caritatem continuam habentes quia caritas operit multitudinem peccatorum

히브리어Modern,8 ולפני כל דבר אהבו איש את אחיו אהבה חזקה כי על רב פשעים תכסה האהבה׃

성 경: [벧전4:8]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 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필롴세노이 에이스 알렐루스 아뉴 공귀스무

개역개정,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새번역,9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우리말성경,9 서로 대접하기를 불평 없이 하십시오.

가톨릭성경,9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

영어NIV,9 Offer hospitality to one another without grumbling.

영어NASB,9 Be hospitable to one another without complaint.

영어MSG,9 Be quick to give a meal to the hungry, a bed to the homeless–cheerfully.

영어NRSV,9 Be hospitable to one another without complaining.

헬라어신약Stephanos,9 φιλοξενοι εις αλληλους ανευ γογγυσμων

라틴어Vulgate,9 hospitales invicem sine murmuratione

히브리어Modern,9 היו מארחים איש את רעהו בבלי תלנות׃

성 경: [벧전4:9]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대접하기를’의 헬라어 ‘필록세노이'(*)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나그네’를 의미하는 ‘크세노스'(*)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딤전 3:2; 5:10; 딛 1:8).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때문이다(Lenski, Cranfield).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롬 12:13;히 13:2; 요삼 1:5-8). 한편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5:35, 38, 40).

헤카스토스 카도스 엘라벤 카리스마 에이스 헤아우투스 아우토 디아코눈테스 호스 칼로이 오이코노모이 포이킬레스 카리토스 데우

개역개정,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새번역,10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우리말성경,10 각자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십시오.

가톨릭성경,10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

영어NIV,10 Each one should use whatever gift he has received to serve others, faithfully administering God’s grace in its various forms.

영어NASB,10 As each one has received a special gift, employ it in serving one another, as good stewards of the manifold grace of God.

영어MSG,10 Be generous with the different things God gave you, passing them around so all get in on it:

영어NRSV,10 Like good stewards of the manifold grace of God, serve one another with whatever gift each of you has receiv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καστος καθως ελαβεν χαρισμα εις εαυτους αυτο διακονουντες ως καλοι οικονομοι ποικιλης χαριτος θεου

라틴어Vulgate,10 unusquisque sicut accepit gratiam in alterutrum illam administrantes sicut boni dispensatores multiformis gratiae Dei

히브리어Modern,10 איש איש כמתן החסד אשר קבל תעזרו איש לרעהו כגזברים ממנים על חסדי אלהים הרבים׃

성 경: [벧전4:10]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다양하다(롬 12:6;고전 12:4).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할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고전 4:7)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Cranfield).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해야 한다. 이 ‘봉사’ 는 ‘상대를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 본절은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해 서로 섬겨야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각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킬레스'(*)는 여러 가지 특색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각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여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신다. 한편 ‘청지기’는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양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멋을 추구해야 한다(Robertson, Blum).

에이 티스 랄레이 호스 로기아 데우 에이 티스 디아코네이 호스 엨스 이스퀴오스 헤스 코레게이 호 데오스 히나 엔 파신 돜사제타이 호 데오스 디아 예수 크리스투 호 에스틴 헤 돜사 카이 토 크라토스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아멘

개역개정,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새번역,11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우리말성경,11 누구든지 말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하고 누구든지 섬기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십시오. 이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광과 능력이 세세무궁토록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가톨릭성경,11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 아멘.

영어NIV,11 If anyone speaks, he should do it as one speaking the very words of God. If anyone serves, he should do it with the strength God provides, so that in all things God may be praised through Jesus Christ. To him be the glory and the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영어NASB,11 Whoever speaks, let him speak, as it were, the utterances of God; whoever serves, let him do so as by the strength which God supplies; so that in all things God may be glorified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longs the glory and dominion forever and ever. Amen.

영어MSG,11 if words, let it be God’s words; if help, let it be God’s hearty help. That way, God’s bright presence will be evident in everything through Jesus, and he’ll get all the credit as the One mighty in everything–encores to the end of time. Oh, yes!

영어NRSV,11 Whoever speaks must do so as one speaking the very words of God; whoever serves must do so with the strength that God supplies, so that God may be glorified in all things through Jesus Christ. To him belong the glory and the power forever and ever. Amen.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ι τις λαλει ως λογια θεου ει τις διακονει ως εξ ισχυος ης χορηγει ο θεος ινα εν πασιν δοξαζηται ο θεος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ω εστιν η δοξα και το κρατος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των αιωνων αμην

라틴어Vulgate,11 si quis loquitur quasi sermones Dei si quis ministrat tamquam ex virtute quam administrat Deus ut in omnibus honorificetur Deus per Iesum Christum cui est gloria et imperium in saecula saeculorum amen

히브리어Modern,11 איש כי ידבר יהי כאמרי אל ואיש כי יעזר תהי עזרתו מתוך החיל אשר חננו אלהים למען יכבד אלהים בכל על ידי ישוע המשיח אשר לו הכבוד והעז לעולמי עולמים אמן׃

성 경: [벧전4:11]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베드로는 본절에서 은사의 사용 범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 첫번째 범주는 ‘말의 사용’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레이'(*)는 모든 종류의 말을 의미하며 ‘말씀’의 헬라어 ‘로기아'(*)는 하나님의 입에서나오는 말씀으로 계시를 의미한다(Blum ).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한다(고후 5:20; 살전 2:13).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함을 시사한다(Lenski).

󰃨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 둘째범주는 ‘봉사’이다. 베드로는 봉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다 열거하지 않고 한 단어로 묶고 있다.’공급하다’의 헬라어 ‘코레게이'(*)는 본래 ‘합창하다’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한다(Calvin).

󰃨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언급한 두가지 범주 즉 말과 봉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행해야만 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Beare).

󰃨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본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이다(롬 11:33-36; 엡 3:20, 21). ‘그에게’의 헬라어 ‘호 에스틴'(*)은 선행사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인지 분명치 않으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Stibbs, Michaels, Kelly, Goppelt, Selwy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이란 의미가 되어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논리상 타당하므로 본절에 해당하는 선행사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Blum, Clemen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고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기 때문에(롬 16:27; 유 1:25; 계 1:6, Lenski, Robertson) 찬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의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아마도 베드로도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송영이 이곳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래 본절이 독립된 것이었는데 삽입된 것으로 주장하나(Clement)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아가페토이 메 크세니제스데 테 엔 휘민 퓌로세이 프로스 페이라스몬 휘민 기노메네 호스 크세누 휘민 쉼바이논토스

개역개정,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새번역,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말성경,12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험이 있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난 것처럼 여기지 말고

가톨릭성경,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영어NIV,12 Dear friends, do not be surprised at the painful trial you are suffering, as though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영어NASB,12 Beloved, do not be surprised at the fiery ordeal among you, which comes upon you for your testing, as though some strange thing were happening to you;

영어MSG,12 Friends, when life gets really difficult, don’t jump to the conclusion that God isn’t on the job.

영어NRSV,12 Beloved, do not be surprised at the fiery ordeal that is taking place among you to test you, as though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αγαπητοι μη ξενιζεσθε τη εν υμιν πυρωσει προς πειρασμον υμιν γινομενη ως ξενου υμιν συμβαινοντος

라틴어Vulgate,12 carissimi nolite peregrinari in fervore qui ad temptationem vobis fit quasi novi aliquid vobis contingat

히브리어Modern,12 אהובים בבאכם בתוך כור עני למען נסתכם אל נא תתמהו כאלו קרה לכם דבר זר׃

성 경: [벧전4:12]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사랑하는 자들아 – 베드로는 본절부터 다시 핍박 받는 자들에 대한 권면을 한다. 본문은 수신자를 향한 베드로의 애정어린 마음을 나타내며(2:11) 동시에 새로운 권면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불시험’으로 묘사된다. ‘시련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페이라스몬'(*)은 진위(眞僞)를 가리는 것으로 유혹이 아니라시험(test)을 의미한다. 이 ‘시련’은 본절에서 ‘불 시험’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 시험’의 헬라어 ‘테 엔 휘민 퓌로세이'(*)는 문자적으로 ‘너희 중에 타고 있는 불’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고통스럽게 타는 불’로서 소돔성을 파괴시킬 때의 불로 묘사되며(Josephus) 또한 종말에 ‘바벨론 성’을 멸망시킬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계 18:9, 18). ‘퓌로세이’는 순수한 금속을 얻기 위해 제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불같이 뜨거울 것을 상징한다(시 66:10; 잠27:21; 계 3:18, Stibbs, Blum). 이러한 시련을 끝까지 믿음으로써 견디는 자는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한편 ‘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메 네'(*)는 현재분사로 베드로나 수신자가 이미 경험했고 또한 현재에도 고난을 당하고 있으며 장차 계속 다가올 시험임을 시사한다.

󰃨 이상한 일 당하는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이상히 여기지’의 헬라어 ‘크세니제스데'(*)는 실제적인 박해에 의해서 ‘사람을 마비시킬 정도의충격’을 의미한다(Beare).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시련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그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그 고난의 동참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에 참예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알라 카도 코이노네이테 토이스 투크리스투 파데마신 카이레테 히나 카이 엔 테 아포칼륖세이 테스 돜세스 아우투 카레테 아갈리오메노이

개역개정,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3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이는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 여러분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3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13 But rejoice that you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so that you may be overjoyed when his glory is revealed.

영어NASB,13 but to the degree that you share the sufferings of Christ, keep on rejoicing; so that also at the revelation of His glory, you may rejoice with exultation.

영어MSG,13 Instead, be glad that you are in the very thick of what Christ experienced. This is a spiritual refining process, with glory just around the corner.

영어NRSV,13 But rejoice insofar as you are sharing Christ’s sufferings, so that you may also be glad and shout for joy when his glory is revealed.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λλα καθο κοινωνειτε τοις του χριστου παθημασιν χαιρετε ινα και εν τη αποκαλυψει της δοξης αυτου χαρητε αγαλλιωμενοι

라틴어Vulgate,13 sed communicantes Christi passionibus gaudete ut et in revelatione gloriae eius gaudeatis exultantes

히브리어Modern,13 כי אם שמחו על אשר חלק לכם בענויי המשיח למען גם תשמחו ותעלצו בהגלות כבודו׃

성 경: [벧전4:13]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고난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여러 가지 핍박과 치욕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겪을 때와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즐거워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는 현재분사로 그 즐거움이 일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받을 때 후에 주어질 영광의 승리를 바라보며 항상 어떤 조건하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

󰃨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줄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 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절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즐거워하는 목적이며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한다. 현재에 당한 고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할정도로 어려운 것이지만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능히 이기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기뻐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갈리오메노이'(*)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극도의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로(Lenski)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극명한 대조를 통해 고난보다 즐거움과 기쁨이 훨씬 큰 것임을 암시한다.

에이 오네이디제스데 엔 오노마티 크리스투 마카리오이 호티 토 테스 돜세스 카이 토 투 데우프뉴마 엪 휘마스 아나파우에타이

개역개정,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새번역,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영광과 능력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들 편에서 보면 그가 모독을 받지만, 여러분의 편에서 보면 그는 영광을 받습니다’가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4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4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영어NASB,14 If you are reviled for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because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upon you.

영어MSG,14 If you’re abused because of Christ, count yourself fortunate. It’s the Spirit of God and his glory in you that brought you to the notice of others.

영어NRSV,14 If you are reviled for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because the spirit of glory, which is the Spirit of God, is resting on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ι ονειδιζεσθε εν ονοματι χριστου μακαριοι οτι το της δοξης και το του θεου πνευμα εφ υμας αναπαυεται κατα μεν αυτους βλασφημειται κατα δε υμας δοξαζεται

라틴어Vulgate,14 si exprobramini in nomine Christi beati quoniam gloriae Dei Spiritus in vobis requiescit

히브리어Modern,14 אם יחרפו אתכם למען שם המשיח אשריכם כי נחה עליכם רוח הכבוד רוח אלהים אצלם מנאץ הוא ואצלכם נכבד׃

성 경: [벧전4:14]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엔 오노마티 크리스투)는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님이 하셨던 표현이며(마 5:11)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거의 전문적인 표현 방식으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마 10:22; 요 15:21; 행 9:16; 15:26; 21:13; 계 2:3; 3:8, Kelly). 한편 ‘욕을 받으면’은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비방이나 능욕을 받는 것으로 본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4절; 2:12, 15; 3:16). 이것은 70인역에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비방했던 것에 대해 많이 사용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받은 모욕을 나타낼때 많이 사용되었다(마 27:40 – 44; 롬 15:3; 히 13:13).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에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후대 영광에 참여할 복된 것이다.

󰃨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당하는 자들이 복 있는 이유이다. 본절에서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되어 ‘성령’을 나타낸다. ‘영광의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테스 독세스'(*)는 문자적으로 ‘그 영광의 그’이다. 이 표현은 쉐키나(S-hekinah)를 묘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영광을 가리킨다(출 16:7; 24:16; 29:43; 40:34; 민 14:10; 왕상 8:10, 11; 사 6:1 ; 겔 1:28,Cranfield, selwyn). ‘하나님의 영’ 곧 ‘영광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에게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게 되며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소유됨을 시사한다(Stibbs). ‘계심이라’의 헬라어 ‘아나파우에타이'(*)는 ‘쉬게 하다’, ‘자리잡다’라는 의미로 성령의 임재를 시사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임재해 계셨으며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행 7:55, Bigg).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시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동참할 때 하나님의 두드러진 속성인 영광을 보게 된다(행 7:55).

메 가르 티스 휘몬 파스케토 호스 포뉴스 에 클렢테스 에 카코포이오스 에 호스 알ㄹ로트리에피스코포스

개역개정,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새번역,15 여러분 가운데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말성경,15 여러분 가운데 누구라도 살인하는 사람이나 도둑이나 범죄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톨릭성경,15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영어NIV,15 If you suffer, it should not be as a murderer or thief or any other kind of criminal, or even as a meddler.

영어NASB,15 By no means let any of you suffer as a murderer, or thief, or evildoer, or a troublesome meddler;

영어MSG,15 If they’re on you because you broke the law or disturbed the peace, that’s a different matter.

영어NRSV,15 But let none of you suffer as a murderer, a thief, a criminal, or even as a mischief maker.

헬라어신약Stephanos,15 μη γαρ τις υμων πασχετω ως φονευς η κλεπτης η κακοποιος η ως αλλοτριοεπισκοπος

라틴어Vulgate,15 nemo enim vestrum patiatur quasi homicida aut fur aut maledicus aut alienorum appetitor

히브리어Modern,15 רק אל יענה איש מכם כרצח או כגנב או כפעל און או כנכנס בפקדת אחרים׃

성 경: [벧전4:15]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것이어야 하며 세상에서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악행으로 받는 고난은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며 그 악행 자체는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로'(*, 호스)는 앞의 세 가지 범죄와 다음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 사이를 분리하여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는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이나(Deismann), ‘금지된 일하는 자'(Bigg) 혹은 ‘밀고자'(NIV)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인해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에이 데 호스 크리스티아노스 메 아이스퀴네스도 돜사제토 데 톤 데온 엔 토 오노마티 투토

개역개정,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새번역,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말성경,16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가톨릭성경,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영어NIV,16 However, if you suffer as a Christian, do not be ashamed, but praise God that you bear that name.

영어NASB,16 but if anyone suffers as a Christian, let him not feel ashamed, but in that name let him glorify God.

영어MSG,16 But if it’s because you’re a Christian, don’t give it a second thought. Be proud of the distinguished status reflected in that name!

영어NRSV,16 Yet if any of you suffers as a Christian, do not consider it a disgrace, but glorify God because you bear this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ι δε ως χριστιανος μη αισχυνεσθω δοξαζετω δε τον θεον εν τω μερει τουτω

라틴어Vulgate,16 si autem ut Christianus non erubescat glorificet autem Deum in isto nomine

히브리어Modern,16 ואם יענה כאחד המשיחיים אל יבוש כי אם יודה לאלהים על הדבר הזה׃

성 경: [벧전4:16]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은즉 – ‘그리스도인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다(13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행 11:26; 26:28) 그 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제자’,’형제’, ‘성도’라는 호칭이 사용되다가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당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아그립바는 그리스도인을 경멸할 때 사용하여(행 26:28) 초기에는 주로 신자들을 박해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Goppelt). 따라서 신약성경 기록 당시에는 보편적인 단어가 아니었으나 그후 A.D. 64 년 경까지 로마에서 신자사이에 이 말의 적합성을 깨닫고 그들 스스로가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Tacitus, 행 11:19 – 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 참조).

󰃨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본절은 베드로 자신의 수치인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을 암시한다(막 14:66 – 72, Blum). 베드로는 처음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나(막 14:68)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있다. ‘그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엔 토 오노마티투토'(*)는 후기 사본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엔 토 메레이 투토)로 기록 되어 있다(K,L,P). 그래서 흑자는 이 구문을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라는 의미로서 신분 의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elwyn, kelly). 그러나 ‘그 이름으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라는 의미이다(Blum, Stibbs). 왜냐하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붙어도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14절).

호티 호 카이로스 투 아릌사스다이 토 크리마 아포 투 오이쿠 투 데우 에이 데 프로톤 앞 헤몬 티 토 텔로스 톤 아페이둔톤 토 투 데우 유앙겔리오

개역개정,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새번역,17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말성경,17 이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됐기 때문입니다. 만일 심판이 우리에게서 시작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

가톨릭성경,17 사실 심판이 하느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되었습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느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종말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영어NIV,17 For it is time for judgment to begin with the family of God; and if it begins with us, what will the outcome be for those who do not obey the gospel of God?

영어NASB,17 For it is time for judgment to begin with the household of God; and if it begins with us first, what will be the outcome for those who do not obey the gospel of God?

영어MSG,17 It’s judgment time for Christians. We’re first in line. If it starts with us, think what it’s going to be like for those who refuse God’s Message!

영어NRSV,17 For the time has come for judgment to begin with the household of God; if it begins with us, what will be the end for those who do not obey the gospel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τι ο καιρος του αρξασθαι το κριμα απο του οικου του θεου ει δε πρωτον αφ ημων τι το τελος των απειθουντων τω του θεου ευαγγελιω

라틴어Vulgate,17 quoniam tempus ut incipiat iudicium de domo Dei si autem primum a nobis qui finis eorum qui non credunt Dei evangelio

히브리어Modern,17 כי עת החל המשפט מבית אלהים ואם ממנו ראשנה מה אפוא תהיה אחרית הממרים את בשורת אלהים׃

성 경: [벧전4:17]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 ‘하나님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전 3:16; 딤전 3:15; 벧전 2:5). 왜냐하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에 하나님의 심판이 성소에서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렘 25:29; 겔 9:6; 말 3:1-6 ).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인하여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있으나(마 24:8, 9) 이 심판은 멸망당할 심판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종말의 모습이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임해서 성결케 하고 다음에 확대될 것이라는 사상을 표현하고있다(1:7; 슥 13:7-9; 말 3:1-5, Stibbs,Blum).

󰃨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게 되는데 하물며 악인들은 어떠하겠는가? 이 심판 앞에서는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베드로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는 하나님 집도 심판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더 크고 분명한 심판을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세상에 선포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로(막 1:15; 롬 1:1; 살전 2:2, 8, 9, Michaels), 이런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살후 1: 5-10).

카이 에이 호 디카이오스 몰리스 소제타이 호 아세베스 카이 하마르톨로스 푸 파네이타이

개역개정,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새번역,18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 ㉤잠 11:31(칠십인역)

우리말성경,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하지 못한 사람과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11:31

가톨릭성경,18 “의인이 가까스로 구원을 받는다면 불경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어NIV,18 And, “If it is hard for the righteous to be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ungodly and the sinner?”

영어NASB,18 AND IF IT IS WITH DIFFICULTY THAT THE RIGHTEOUS IS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GODLESS MAN AND THE SINNER?

영어MSG,18 If good people barely make it, What’s in store for the bad?

영어NRSV,18 And “If it is hard for the righteous to be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ungodly and the sinner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ει ο δικαιος μολις σωζεται ο ασεβης και αμαρτωλος που φανειται

라틴어Vulgate,18 et si iustus vix salvatur impius et peccator ubi parebit

히브리어Modern,18 הן צדיק כמעט יושע אף כי רשע וחוטא׃

성 경: [벧전4:18]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 본절은 잠11:31(LXX)의 인용이다. ‘의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며 어려운 불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한다(12절).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이 얻는 구원도 ‘겨우’ 얻는 것이다. 혹자는 ‘겨우'(*,몰리스)를 ‘고통’이라고 하나(Scott) 여기서는 ‘간신히’, ‘겨우’라는 말이 합당하다. 의인인 그리스도인도 심판을 통해서 겨우 구원을 얻는다. 의인들도 그러할진대 경건치 않은 자들은 당연히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것이다. 베드로가 본절에서 의인의, 구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탕한 길에 빠지지 않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Calvin).

호스테 카이 호이 파스콘테스 카타 토 델레마 투 데우 피스토 크리스테 파라티데스도산 타스 프쉬카스 아우톤 엔 아가도포이이아

개역개정,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새번역,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우리말성경,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계속 선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기십시오.

가톨릭성경,19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영어NIV,19 So then, those who suffer according to God’s will should commit themselves to their faithful Creator and continue to do good.

영어NASB,19 Therefore, let those also who suffer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entrust their souls to a faithful Creator in doing what is right.

영어MSG,19 So if you find life difficult because you’re doing what God said, take it in stride. Trust him. He knows what he’s doing, and he’ll keep on doing it.

영어NRSV,19 Therefore, let those suffering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entrust themselves to a faithful Creator, while continuing to do good.

헬라어신약Stephanos,19 ωστε και οι πασχοντες κατα το θελημα του θεου ως πιστω κτιστη παρατιθεσθωσαν τας ψυχας εαυτων εν αγαθοποιια

라틴어Vulgate,19 itaque et hii qui patiuntur secundum voluntatem Dei fideli creatori commendant animas suas in benefactis

히브리어Modern,19 לכן גם המענים כרצון אלהים יפקידו את נפשותם ביד אלהים הברא הנאמן ויוסיפו לעשות הטוב׃

성 경: [벧전4:19]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찾아오는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1:6; 5:6).

󰃨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박해하는 핍박자들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리어 선을 행하므로 갚아야 하며, 확신을 가지고 고난 가운데에도 자신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것을 부탁해야 한다(Stibbs). ‘부탁할지어다’의 헬라어 ‘파라티데스도산'(*)은 ‘예금하다’, ‘맡기다’의 ‘파라티데미'(*)에서 유래된 말로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의탁하는 것’을 뜻한다. ‘파라티데스도산’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과(눅 23:46) 스데반의 의탁이다(행 7:59). 한편 ‘조물주'(*, 크티스테)는 외경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이곳에만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능히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사한다(Bi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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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1211 – 베드로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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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리스도께서…고난을 받으셨으니. 참조 2:21; 3:18 주석. 이제 베드로는 3:18~22에서 제시한 사실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육체의. 참조 3:18 주석.

[우리를 위하여]. 유사 구절인 2:21에는 이 어구가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이것을 생략하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참조 20쪽). 3:18 주석을 참조하라.

마음. 헬라어 엔노이아(ennoia), “생각하고 느끼는 태도”로, 신약에서 “마음”이란 말로 보통 쓰인 누스(nous)가 아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생각과 행위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그들의 삶을 이루라고 강권한다(참조 벧전 2:21 주석; 빌 2:5).

육체의 고난을 받은. 참조 3:18 주석. 불 시험(4:12)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도록 하며 자신을 성령의 능력과 통제에 더욱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이끈다.

죄를 그쳤음이니. 즉 그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죄를 이미 버렸다(참조 롬 6:7, 12~17). 베드로가 암시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언급된 이 사람이 더 이상 어떤 실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해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품성의 완전은 그의 목표이다(참조 마 5:48 주석; 시대의 소망, 555; 정로의 계단, 62; 실물교훈, 316).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게 될 때 더 이상 죄를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에게 고통을 야기시키는 그 죄를 미워할 것이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338). 이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삶에는 죄가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한다(참조 고후 5:14; 갈 2:20 주석).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후로는 다시. 참조 롬 6:11~15 주석.

사람의 정욕. 즉 죄로 이끄는 악한 생각과 욕망.

하나님의 뜻. “죄를 그친”(1절) 자의 삶은 전혀 새로운 길을 따라간다. 그의 의지는 나침반이 남북을 가리키듯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그는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한다(롬 8: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가 약속되어 있다(요일 2:17).

육체의. 즉 사람으로서의.

남은 때. 즉 원래 타고난 생애의 남은 때.​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음란. 곧 “방종”, “방탕”, “호색”(참조 고후 12:21 주석).

정욕. 참조 요 8:44; 롬 7:7 주석.

술취함. 헬라어 오이노플뤼기아(oino-phlugia), 오이노스(oinos), “포도주”와 플뤼오(phluo-), “넘치다”에서 파생했다. 흥청망청한 연회의 방탕함을 언급하고 있다.

방탕. 헬라어 코모이(komoi). 세속 문학에서 억제되지 않은 술취함과 추잡함 일색의 방종한 축제 행렬이나 파티를 묘사하는 데 종종 사용됨.

연락. 곧 “떠들썩한 큰 술잔치.”

무법한 우상. 문자적으로 “불법한 우상.” 본 절은 베드로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이전의 우상 숭배자들이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한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이방인 친구들이 놀랐다(4절)는 사실은 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개심한 이방인이었다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참조 2:10 주석).

이방인. 참조 2:12 주석.

지나간 때. 문자적으로 “우리 생애의 지나간 시간.” 여기서 베드로의 이방인 독자들의 지나간 삶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본 절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너희가 이미 이방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 너희 삶의 많은 부분을 허비했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러므로. 즉 3절에 묘사된 행위로 비추어 볼 때.

극한 방탕. 문자적으로 “방탕으로 쇄도하는”, 진실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을 두르고 있는 정결함과 대조되는 더러운 쓰레기 같은 방종함의 큰 물줄기, 곧 도덕적 시궁창의 모습을 그린다.

이상히 여겨.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보통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의 엄청난 유익과 축복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된 자신의 옛 친구들이 이전의 삶의 패턴을 피하는 것에 놀란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만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비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체적 욕망의 만족에서 얻는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욕구, 곧 먹는 것, 마시는 것 또는 육욕적 탐닉을 거절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우매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데(약 1:27), 이는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기 때문이다(4:4). 결론적으로, 신자들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요일 3:13).

비방하나. 문자적으로 “저주하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극한 방탕”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을 때 스스로를 더 낫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한다. 이방인들의 이런 오해가 종종 박해의 화염을 점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저희가. 문자적으로 “그들”, 즉 4절의 비방하는 자들.

산 자. 곧 “살아 있는”(참조 행 10:42 주석; 살전 4:15~17).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참조 딤후 4:1 주석.

자에게.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참조 딤후 4:1; 계 19:11).

직고. 참조 롬 14:10~12 주석.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를 위하여. 본 절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목적] 때문에 죽은 자들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의 분량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에 기초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죽은 자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본 절의 마지막 부분이 암시하는 것처럼 죽은 그리스도인들임에 거의 틀림없다. 문맥상으로 볼 때, 비록 이런 비유적 의미가 성경에서 일반적일지라도(참조 마 8:22; 엡 2:1; 골 2:13 주석), 여기서 베드로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다. 벧전 4:5의 “죽은” 자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분명하며, 5절과 6절 모두 “죽은” 자를 심판과 연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6절의 “죽은” 자들 또한 문자적으로 죽은 자들임이 거의 확실하다. 만일 문자적 의미에서 비유적 의미로 전환했다면 문맥 중에 표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은혜의 시기는 죽을 때 마친다는 것과 죽은 자들의 무의식 상태를 분명히 말한다(참조 3:19 주석). 그러므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유일한 결론은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에 “죽은” 자들은 그들이 죽기 이전에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다. 복음은 지금은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었었다.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헬라어는 여기 언급된 복음 전파가 베드로가 본 서신을 쓴 시점보다 이전에 발생했으며, 그가 편지를 쓰고 있을 때는 더 이상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다. 만약 베드로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복음이 전파되고 있으니”라고 썼을 것이다.

육체로는. 문자적으로 “육체와 관련해서는”, 즉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참조 3:18 주석).

​(사람)처럼. 죽은 이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들도 5절에 언급된 깨어 있는 자들, 곧 “산 자들”처럼 동일한 근거 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심판을 받으나. 참조 요 5:29; 고후 5:10; 히 9:27 주석. 만일 그들이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다면, 복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참조 겔 3:18~20; 요 3:19; 15:22; 행 17:30; 약 4:17 주석; 눅 23:34; 딤전 1:13).

영으로는. 즉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몸처럼 영광스런 불멸의 몸으로(참조 3:18 주석). 그러나 요 3:6; 롬 8:9과 비교하라.

하나님처럼. 이것은 “하나님이 사시듯이”, 즉 그들이 불멸이 될 것(참조 고전 15:51~55; 살전 4:16, 17)임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심판에서 판결된 것같이, 그들은 산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살게. 신약의 신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던 예수 안에서 잠든 그리스도인들을 베드로가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참조 고전 15:12~14; 살전 4:13~17). 이 “죽은” 자들은 살았을 때 복음을 듣고 영접했으며, 심판 때에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 가치 있는 자들로 여김받을 것이다.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사도는 산 자들이 죽기 전에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 전파의 두 가지 결과를 지적하고 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 즉 세상의 마지막(참조 롬 13장의 추가적 설명; w/24/3e, 34; 계 1:3 주석; 롬 13:11, 12; 고전 7:29; 10:11; 빌 4:5; 약 5:3, 8, 9; 벧전 4:17; 벧후 3:11; 요일 2:18; 계 22:10).

가까웠으니. 문자적으로 “가까이 와 있다.” 잠시 후에 우주의 대심판관을 대면할(5, 6절) 것이라는 기대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생각이다. 신자들에게 준 베드로의 권면, 특히 이어지는 구절에서의 권면은 긴박감 속에서 주어졌는데, 이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참조 요일 3:3.

정신을 차리고. 헬라어 소프로네오(sophroneo-), “건전한 정신을 갖다”, “자제력을 발휘하다”(참조 롬 12:3; 딛 2:4, 5; 살전 5:6 주석). 그리스도의 재림이 점점 더 가까울지라도, 곧 발생할 일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위치에 서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 19:13)고 주님은 명령하신다.

근신하여. 헬라어 네포(ne-pho-), “술 취하지 않다”, 즉 주정음료를 절제하다(참조 살전 5:6 주석).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다가올 사건들을 생각하여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한다(참조 마 24:42, 44 주석).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고의 시험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이것이(사랑) 영향을 끼치느냐이다.

열심. 문자적으로 “충분히 광범위하게.”

사랑. 헬라어 아가페(agape-), “사랑”(참조 마 5:43; 고전 13:1 주석). 사랑에는 한계가 없으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그리스도인 교제 안에서 다른 배경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묶어 준다. 지성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환경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교회 문제는 없다.

(사랑)할지니. 문자적으로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사랑하라.”

덮느니라. 참조 약 5:20 주석. 베드로는 여기서 잠 10:12를 인용하고 있다. 사랑이 결여된 곳에 다른 이의 실수와 실패를 크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존재한다.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다른 이의 실수를 기꺼이 용서하고 잊는다. 더 나아가, 형제 사랑의 분명한 정신은 불신자의 관심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으로 확실히 이끈다는 것이다.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대접하기를. 헬라어 필록세노이(philoxenoi), “남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라]”(참조 롬 12:13).

원망 없이. 문자적으로 “불평 없이.” 일례로 어떤 대접도 대접하는 사람이 성가시다는 표시를 낸다면 그 대접이 손상을 받는다. 진정한 대접은 대접하는 마음이 함께해야 하는데, 이는 “주는 사람 없는 선물은 살풍경하기” 때문이다. 박해의 시기에(참조 12절) 그리스도인 피난민의 수가 많고 이 믿음의 형제들을 돌보는 데 희생이 크겠지만,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 줄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책임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각각.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이에게 돕는 손을 뻗지 못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장 작은 편의라도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 있게 만든다. 각 개인은 동료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능력은 다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책임이다.

은사. 헬라어 카리스마(charisma), 공짜로 후하게 주는 “선물” 또는 베푼 “호의.” 베드로가 언급하는 것은 성령이 나누어 주는 기적 같은 은사들보다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계속 나누어 받는 일반적인 재능과 평상시에 부어 주는 축복을 말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참조 마 10:8).

받은 대로…봉사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우 후하게 나누어 준 것들을 우리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하는데,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것이다(참조 갈 6:10).

각양. 참조 약 1:2 주석. 하나님의 은사는 기꺼운 마음으로 풍성하게 주어진다. 그분의 청지기들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주셨을 때와 동일한 정신으로 이 축복들을 나누어야 한다.

선한. 헬라어 칼로이(kaloi), “훌륭한”, “효과적인.”

청지기. 참조 고전 4:1 주석.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일 누가 말하려면.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능력 안에서.

말씀. 헬라어 로기아(logia). 참조 행 7:38; 롬 3:2. 하나님의 “각양 은사”의 한 예는 유창하고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 은사도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 전파가 결코 천박함, 무성의함 또는 경솔함으로 인해 장애를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부여한 재능들을 제대로 양육하고 계발해야 한다.

봉사하려면.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다음과 같다.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게 하라].”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인 생애란 하나님의 가능케 하는 능력을 계속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누구도 매 시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죄 없는 생애를 살 수 없다.

범사에. 즉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그 어떤 활동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참조 마 1:1 주석. 그리스도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는 분이다.

영광을 받으시게. 문자적으로 “계속 영광을 받으시게.” 하나님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 삶의 모든 활동의 진정한 목표이다. 결코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을 올바로 나타내고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게. 이 대명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성부 하나님을 또는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한다. 이 송영은, 금생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속받은 자들이 그들의 영원한 본향에 모일 때 삼위 하나님 세 분 모두에게 드려질 것이다(참조 롬 11:36; 딤후 4:18; 계 1:6).

영광. 참조 엡 1:6, 14. 본 절의 마지막 부분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한 기도문에서 따온 인용구라는 제안이 있어 왔다. 벧전 5:11에서 “영광”(glory)과 “능력”(dominion)이 짝지어 서술된 것과 비교해 보라.

권능. 문자적으로 “그 권능.” “권능”(헬라어 크라토스[kratos])에 대한 설명은 엡 1:19 주석을 참조하라. 크라토스가 송영 가운데 사용된 곳은 불과 본 절과 딤전 6:16; 유 25절; 계 1:6; 5:13뿐이다. “권능”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은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기꺼이 그를 통치자로 받드는 것이다.

아멘. 참조 마 5:18 주석.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사랑하는 자들아. 상호간의 동료애와 관심을 강조하는 따뜻한 인사말이다. 베드로는 앞에 다가올 어두운 날들을 예상하면서 다가오는 폭풍우에 대비해 그의 형제들을 붙들어 주고자 권면하고 있다.

시련하려고. 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 참조 마 6:13; 약 1:2 주석. 욥에게처럼, 하나님은 사탄이 그분의 신실한 자들의 품성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인내를 아셨고 그래서 그 후로 고통을 겪는 자들이 “불 시험” 아래서 꿋꿋하게 인내한 욥의 모본을 통해 힘을 얻게 되었다. 삶의 고통은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보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통제하여 당신의 자녀들의 품성을 계발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참조 욥 42:5; 시 38:3; 39:9의 주석.

불 시험. 헬라어 퓌로시스(purosis), “불이 탐”, “태움.” 참조 1:7. 네로의 격렬한 핍박이 이제 곧 교회를 태울 것이었다. 유대인과 로마인들의 더해가는 괴롭힘은 다가올 대학살에 대한 하나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사단은 어린 교회를 파괴하려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책략을 시도했다. 다가올 시련의 시간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베드로가 당시의 교회에 주었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상한 일. 즉 들어보지 못한 어떤 것. 그 “불 시험”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견디도록 요구된 것 이상으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13절). 그 “불 시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만들 뿐이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 문자적으로 “계속 놀라지 말라.”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사람의 영혼을 두고 대쟁투가 벌어지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파괴하고자 사단이 고안한 다양한 시험과 문제들을 예상해야 한다(참조 1:7; 3:17).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참예하는 것으로. 곧 “~의 한도까지”, “~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 세상이 오해함으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 예기된다. 그리스도인은 기뻐할 수 있는데, 이는 누구도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신 것보다 더 많이 인내하도록 요구받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참조 히 2:18; 4:15, 16).

즐거워하라. 참조 약 1:2 주석.

이는(that). 또는 “~하기 위하여”, 지금 즐거워하는 그 이유를 나타내 준다.

그의 영광. 즉 그의 재림의 영광(참조 마 25:31 주석).

나타내실. 헬라어 아포칼룹토(apokalupto-). 참조 고전 1:7; 벧전 1:7 주석.

기뻐하게. 영원한 삶을 시작하는 첫 시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이 땅에서의 외롭고 멸시받았던 모든 시간을 순식간에 잊게 해 줄 것이다. 하늘에서의 흥분과 경이로움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 참조 행 3:16 주석. 로마 세계가 그리스도의 정결함과 영광을 경멸했듯이 모든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도 그의 대리자들을 거절할 것이다(참조 마 5:11, 12; 벧전 2:21).

(이름)으로. 또는 “~때문에”, “~에 연관하여.”

욕을 받으면. 헬라어 오네이디조(oneidizo-), “책망하다”, “욕설하다”, 누구를 “모욕하다.” 핍박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성실성, 교양, 시민으로서의 행동에 대해 비방하는 일을 먼저 한다. 비방은 좀 더 잔혹한 공격으로 가는 하나의 전주곡이다. 참조 마 5:11 주석.

복 있는. 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s). 참조 마 5:3; 시 1:1 주석.

영광의 영. 곧 “영광스러운 영”, 즉 성령.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핍박과 고난의 시간에 그의 성령을 통해 함께하셔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지도하고, 축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곧 하나님의. 문자적으로 “바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의 모든 문제를 직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충만한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가 그리스도인의 평안과 신뢰의 근원이다. 이 세상의 물질과 쾌락으로 가득 채워진 삶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는 임재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너희 위에 계심이라. 즉 너희와 함께 계신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살인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특권이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 그리스도인이 어떤 악한 행위에 빠진다면 그는 교회를 조롱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멸시할 기회를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이다. 참조 2:20 주석.

도적질. 참조 출 20:15 주석; 마 19:18; 롬 2:21; 엡 4:28.

악행. 온갖 종류의 해악과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임.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 헬라어 알로트리에피스코포스(allotriepiskopos), “타인의 일을 감독하는 사람.”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확실치 않다. 베드로가 여기서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관해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행태와 관습을 지각없이 비판하는 무분별한 교인들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교인들이 가한 어떤 비난과 핍박은 현명한 그리스도인 생활방식으로 제거될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양심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의 행동이 분명히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꺼이 인정할 만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몫이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만일. 참조 3:14 주석.

그리스도인. 이 용어가 신약에 단 3회 등장한다. 처음에는 조롱 가운데서 사용되었으나(참조 행 11:26), 후에는 명예의 상징과 초기교회가 자랑스럽게 지닌 용어가 되었다(참조 행 26:28). 그리스도인을 향한 모욕의 말과 강제 명령들에 상관없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받는 것이 세상에 의해 영광을 받은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더 가치 있음을 그들은 알았다. 예수님 또한 의의 원칙에 굳게 서 있음으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았다.

부끄러워 말고. 참조 12~14절 주석.

그 이름으로. 본문상의 증거는 “이 이름과 관련하여”,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때문에”라는 독법을 지지한다(참조 20쪽).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즉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특권과 하나님을 위해 증거한 것으로 인해.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하나님의 집. 즉 교회(참조 딤전 3:15 주석).

심판. 헬라어 크리마(krima), “선고”(참조 계 17:1). 겔 9장의 심판 장면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벌어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경건치 않은 자들을 비교한 베드로가 한 말의 배경이 되고 있다. 시작할. 문자적으로 “시작하는”(begins). 본 절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적절한 때가 되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참조 7절 주석)과 곧 닥칠 “불 시험”(12절)을 염두에 두면서, 베드로는 그의 동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엄숙한 책임을 기억하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심판하는 천사들이 성소에서 시작하여 가장 많이 공언한 자들에게 심판을 베푼 겔 9:6과 비교해 보라. “불 시험”과 “심판”의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할 것이다.

때. 헬라어 카이로스(kairos), 특정하고, 구체적이며, 적절한 “시간”(참조 막 1:15; 행 1:7).

되었나니. 이 구절은 번역자들이 적절하게 추가하였다. “시작할”이라는 항목을 참조하라. 참조 7절 주석.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이 통과해야 할 그 “불 시험”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들.

그 마지막. 즉 운명. 악인들과 비교할 때 분명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을 받기에 더 족하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백성을 엄격하게 다루기로 계획한다면, 그의 증인들의 이름으로 주어진 진리를 고의로 반대한 자들을 얼마나 더 단호하게 대하겠는가.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박해자들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사도는 여기서 잠 11:31을 「70인역」의 번역대로 인용한다(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의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 덕분이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면 심판 날에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다.

경건치 아니한 자. 헬라어 아세베스(asebes), “불경건한”, “불경한.”

어디 서리요. 즉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어떤 빛 가운데 드러날 것인가? 그들은 구원받는 자를 위한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조롱하였다.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그러므로. 이제 베드로는 앞으로 다가올 “불 시험”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상하는 고난에 관련된 그의 광범위한 권면을 결론짓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즉 그들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드러난 뜻에 대한 신실함으로 인해(참조 2:12, 19, 20; 3:14, 16~18; 4:14, 16).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보호책은 비판할 아무런 것이 없는 생애이다(참조 단 6:4 주석). 그리스도인은 발생하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힘주시는 은혜 가운데 최선을 다한 후,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

그 영혼을. 그들은 어떤 위해(危害)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당당하게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하시는 그분에게만 그들의 생명을 의뢰할 것이다. “영혼”에 관한 설명은 마 10:28 주석을 참조하라.

미쁘신 조물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틀림없이 돌보실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것이라고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하늘이나 땅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보호하는 손길에서 그분에게 맡긴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참조 요 10:28, 29).

부탁할지어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안전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있다(참조 딤후 1:12; 2:19). 참된 목자처럼 베드로는 박해의 폭풍을 실은 구름이 모여들 때에 그의 동료 신자들을 하나밖에 없는 안전 장소로 인도한다.

성령은 통회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심―영혼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의탁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우리의 대언자 예수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고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통회하는 심령에 역사하실 것이지만 자부심이 강하고 스스로 의롭다는 정신을 가진 영혼을 위하여는 결코 일하실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자기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늘 교정해 보려고 할 것이다. 그는 성령과 자기 영혼 사이에 끼어 든다. 성령은 자아가 끼어들지 않을 때에 역사하실 것이다(원고 148, 1897).

[장별설교] 베드로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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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베드로전서 4장

1. 본문읽기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그리스도인이 받을 고난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1)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2. 주해 및 강해

베드로전서 4장은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봅시다. 첫 단락에서는 마음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는가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고난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주님께 의탁하도록 권면합니다.

1-6절 마음의 갑옷을 입으라

7-11절 네 가지의 실천

12-19절 고난 속에서 주님을 신뢰함

1. 1-6 절 마음의 갑옷을 입으라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역시 동일하게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해 ‘마음의 갑옷을 입으라’(1절)고 권면합니다. 갑옷은 전쟁에서 적들의 화살이나 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3:12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빛의 갑옷은 의로 삶, 말씀을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려 합니다. 객관적 입장에서는 분명히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괜찮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삶을 살아야 빛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갑옷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통해 얻어지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과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더욱더 거룩한 삶에 뿌리 내려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빌미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시작하면 급속하게 믿음에서 미끄러지게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고난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삶입니다. 3절에서는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향락, 무법한 우상 숭배를 행한 ‘이방인의 뜻’(3절)을 열거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지나간 삶이기에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2. 7-11절 네 가지의 섬김

ㄱ.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 또는 전제로서의 종말론적 사고(7절)

7절에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면서 그 기반 위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소개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삶의 기초이자 전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이란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연대기적 관점에서는 그리 합당해 보이지 않지만,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종말에 대해 약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곧 주님이 오실 것처럼 생각하고, 곧 시대의 종말이 시작될 것처럼 말합니다. 어찌 보면 불필요하게 걱정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과하게 보이는 종말에 대한 집착이야 말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종말에 대한 긴장을 늦추는 순간 생각이 나태해지고, 삶은 느슨해지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거룩하고 순결하게 드리려는 헌신도 충성도 희미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성도다운 삶을 말하기 전에 먼저 ‘만물의 마지막 때’가 이르렀다는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ㄴ . 실천 1): 근신하여 기도하라 (7 절 하 )

베드로는 단지 기도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절) 했습니다. 이 말은 ‘효과적인 기도의 삶을 가지라는 목적’과 더불어 마음과 정신도 함께 일깨워야 함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1:13에서 이미 근신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를 기다리라고 권면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한다는 말은 삶을 단정하게 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단정한 삶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 속에서 방종하고 탐욕적인 삶을 산다면 결코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ㄷ . 실천 2): 서로 사랑하라 .(8 절 )

성도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사랑하면 안 되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말입니다. 박해가 일어나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하며,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뜨덥게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사랑해야 합니다. ‘서로’는 공동체적 사랑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공동체적 관점보다는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서로’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종종 ‘네가 잘못 했으니 네가 사과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누군가의 죄나 잘못은 그 사람의 잘못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 사람ㄹ의 죄와 잘못은 나의 죄와 잘못이기도 합니다. 한 성도의 아픔은 모든 사람의 아픔이며, 한 성도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15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ㄹ . 실천 3): 서로 대접하라 (9 절 )

베드로는 이번에도 ‘서로 대접하라’라고 말합니다. 대접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매우 중요한 예의였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상태에 있는 이들을 대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ㅁ . 실천 4): 은사대로 봉사하라 (10 절 )

은사(χάρισμα)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교회를 섬기도록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를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여 불려 나가야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잘 일고, 이해하여 주인이 원하는 대로 지혜롭게 자신이 맡은 것들을 운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서로 봉사하라’고 조언하며,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12-19 절 고난을 해석하라 .

세 번째 단락에서는 고난에 집중합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ㄱ . 고난을 즐거워하라 .(12-14 절 )

삶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되지 않는 삶은 무용지물입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시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즐거워하라’(13절)라고 소개합니다. 고난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엄밀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모든 인류를 대신할 속죄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 없는 의인의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의인으로서 그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ㄴ . 죄로 인해 고난을 받지 말라 .(15 절 )

모든 고난이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할 고난은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살인, 도둑질, 악행,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으로 고난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은 아무런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ㄷ . 영혼을 창조주께 의탁하라 .(17-19 절 )

마지막 권면은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19절)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은 약간 의아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며, 베드로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한다고 선언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심판하시는가? 맞습니다. 하십니다. 거듭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 땅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2:5-11]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결국 이 땅에서의 고난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징계이며,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아들로서의 자격을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고난은 이 땅에서 징계를 통해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이 땅에서도 심판이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심판은 죽음 이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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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베드로전서 04장

4:1 고난과 죄의 종식 (베드로 전서 4:1-3)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숙고함으로 새로운 논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사도 베드로가 전에 신자들로 고난을 견디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논한 것처럼 여기에서는 죄의 극복을 들어 말한다. 주의를 집중해 관찰해 보자. Ⅰ. 사도 베드로의 권고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 혹은 그의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하신 고난이 전제 혹은 가설로 되어 있다. 또한 후제, 혹은 가정으로는 “같은 마음, 용기, 그리고 결단으로 무장하거나 자신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본문 전반부의 육체란 말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반부에 나타난 육체란 인간의 부패된 본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이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본성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너희의 세례시 서약과 고백을 따라 자기 부정과 고행을 통해 죄의 육체를 죽임으로 너희의 부패된 본성이 고난을 겪도록 하라. 이는 너희가 이러한 고난을 받으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안위함을 얻고 또한 죄를 그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각종의 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최선의 논쟁점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비롯된다. 고난받는 자로서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동정과 친근함은 만일 여러분이 죄를 멀리하지 아니하면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그가 죄악의 고난에 순복했을지라도 그는 최소한의 죄악에도 결코 순복할 수가 없었다.

2. 모든 참된 고행의 시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육체적인 고행이나 단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속적이요,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이해력은 어두워졌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유리되어 있다(엡 4:18). 인간은 성실한 피조물이 못된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성화 되기까지는 그는 사악한 존재에 불과하다. 모든 각종의 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최선의 논쟁점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비롯된다. 고난받는 자로서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동정과 친근함은 만일 여러분이 죄를 멀리하지 아니하면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그가 죄악의 고난에 순복했을지라도 그는 최소한의 죄악에도 결코 순복할 수가 없었다.모든 참된 고행의 시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육체적인 고행이나 단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속적이요,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이해력은 어두워졌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유리되어 있다(엡 4:18). 인간은 성실한 피조물이 못된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성화 되기까지는 그는 사악한 존재에 불과하다. Ⅱ. 여기에 관하여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가를 2절에서 살펴보자. 사도는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과 그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육체의 남은 때를 사악한 인간들의 죄악된 정욕과 부패된 욕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적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인간의 정욕은 그들의 모든 사악함에서 근원 된다(약 1:13, 14). 수시로 일어나는 시험이 어떻든지 간에 만일 인간들 자신의 부패가 없었다면 그 시험이 번창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2.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욕이나 욕망, 또는 자신들의 삶과 행동의 기준을 설정하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다.

3. 참된 중생은 그 중생함을 나누어 받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이룩한다. 중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오래되고 유행하는 감미로운 정욕과 세상의 넓은 길과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지게 한다. 중생은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판단력, 애정, 길, 그리고 행실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정욕은 그들의 모든 사악함에서 근원 된다(약 1:13, 14). 수시로 일어나는 시험이 어떻든지 간에 만일 인간들 자신의 부패가 없었다면 그 시험이 번창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욕이나 욕망, 또는 자신들의 삶과 행동의 기준을 설정하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다.참된 중생은 그 중생함을 나누어 받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이룩한다. 중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오래되고 유행하는 감미로운 정욕과 세상의 넓은 길과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지게 한다. 중생은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판단력, 애정, 길, 그리고 행실을 변화시킨다. Ⅲ. 어떻게 이러한 권고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안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도는 공평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너희가 지금까지 너희의 이전 모든 생활이 죄와 사탄을 섬긴 것과 같이 지금은 너희가 마땅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고 공평하며 합당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유대인들일지라도 그들은 이방인들 중에 살면서 그들의 길을 배웠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을 주시해 보자. 1. 한 인간이 참으로 중생되었을 경우, 그의 지난날의 삶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대단히 서글픈 일이 된다. 곧 그는 많은 해를 운명의 장난으로 보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고,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행했으며, 손해를 유지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몹시 괴로운 것이었다.

2. 인간의 의지가 성화되지 못하고 부패되어 있는 한 그는 계속 사악한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사악한 것을 그의 선택과 기쁨으로 그의 일과 사업으로 삼는다. 그리함으로 그는 매일매일 악화 일로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3. 허용된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이끌어 온다. 여기에 여섯 가지의 죄가 있는데 그 죄목들은 상호간 연관과 의존의 관계에 놓여 있다.

(1) “음란” 다시 말해서 음탕은 외모와 몸짓 혹은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롬 13:13).

(2) “정욕”은 매춘과 간음 같은 사악한 행위를 뜻한다.

(3) “술취함” 즉 술취함이 적다 하더라도 건강과 사업에 해를 끼치는 술의 무절제한 사용은 여기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4) “방탕” 혹은 사치스러운 잔치도 지나치게 빈번하며, 넘치며, 엄청난 값을 요구하는 잔치이다.

(5) “연락” 이는 과음과 과식을 의미한다.

(6) “무법한 우상숭배”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는 간악함, 마취, 포식, 모든 종류의 잔인성과 야수성을 수반하였다. 이러한 간악 중에 사는 유대인들은 적어도 그들 중 얼마가 이러한 행실로 말미암아 타락되고 부패되었다.

4. 크나큰 죄를 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죄와 악의 모양이라도 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술취함”이나 과도한 잔치는 정욕과 우상숭배와 같이 금지된 것이다. 한 인간이 참으로 중생되었을 경우, 그의 지난날의 삶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대단히 서글픈 일이 된다. 곧 그는 많은 해를 운명의 장난으로 보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고,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행했으며, 손해를 유지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몹시 괴로운 것이었다.인간의 의지가 성화되지 못하고 부패되어 있는 한 그는 계속 사악한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사악한 것을 그의 선택과 기쁨으로 그의 일과 사업으로 삼는다. 그리함으로 그는 매일매일 악화 일로의 조건을 만들어낸다.허용된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이끌어 온다. 여기에 여섯 가지의 죄가 있는데 그 죄목들은 상호간 연관과 의존의 관계에 놓여 있다.”음란” 다시 말해서 음탕은 외모와 몸짓 혹은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롬 13:13).”정욕”은 매춘과 간음 같은 사악한 행위를 뜻한다.”술취함” 즉 술취함이 적다 하더라도 건강과 사업에 해를 끼치는 술의 무절제한 사용은 여기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방탕” 혹은 사치스러운 잔치도 지나치게 빈번하며, 넘치며, 엄청난 값을 요구하는 잔치이다.”연락” 이는 과음과 과식을 의미한다.”무법한 우상숭배”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는 간악함, 마취, 포식, 모든 종류의 잔인성과 야수성을 수반하였다. 이러한 간악 중에 사는 유대인들은 적어도 그들 중 얼마가 이러한 행실로 말미암아 타락되고 부패되었다.크나큰 죄를 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죄와 악의 모양이라도 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술취함”이나 과도한 잔치는 정욕과 우상숭배와 같이 금지된 것이다.

4:4 산 자와 죽은 자 (베드로 전서 4:4-6) Ⅰ. 여러분들은 먼저 구절에서 이전 생활이 심히 간악한 것으로 나타났던 그들이 여기에서 눈에 뜨일 만큼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이전의 행한 바대로 동일한 동료와 함께 동일한 코스를 달리지 아니한다. 여기에서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사악한 친구들의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들은 그들의 옛 동료들이 많은 변화를 받아 이전에 하던 대로 저희와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며, 그들 이전에 욕심으로 미친 듯이 추구했던 동일한 술취함과 사치를 멀리하는 것을 보게 되자 새롭고 특이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며 놀라게 된다.

2. “이방인들의 뜻을 좇는 자들은 극한 방탕에 다름질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비방한다.” 그들의 놀람은 그들을 비방하는 곳으로 몰아 넣는다. 그들은 그들의 인품을 비방하며 그들의 길, 그들의 종교,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비방한다. 이런 점을 기억해 두자.

(1) 진실로 한 번 중생을 경험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눈살을 찌푸리며 아첨의 말로 많은 시험을 가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이전 생활 과정으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어떠한 설득이나 비난도 그들이 늘 버릇처럼 행하던 옛 생활로 돌아오게 하거나 또는 그렇게 행하도록 하는데 성공치 못할 것이다.

(2)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행동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경멸해야 하며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믿어야 하며, 그들은 지루하고 장황한 것을 즐겨야 하며 뚜렷한 이익도 없는데 열심이어야 하며, 소망에 의존하여야 하는 모든 것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깃이다.

(3) 신앙적인 사람들의 최선의 행동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면할 수 없다. 선한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과 위험, 그리고 자기 부정을 대가로 치르게 하는 이러한 행동은 무정하며 심술궂은 세상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 긍휼, 그리고 선함의 열매를 맺지만 세상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비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옛 동료들이 많은 변화를 받아 이전에 하던 대로 저희와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며, 그들 이전에 욕심으로 미친 듯이 추구했던 동일한 술취함과 사치를 멀리하는 것을 보게 되자 새롭고 특이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며 놀라게 된다.”이방인들의 뜻을 좇는 자들은 극한 방탕에 다름질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비방한다.” 그들의 놀람은 그들을 비방하는 곳으로 몰아 넣는다. 그들은 그들의 인품을 비방하며 그들의 길, 그들의 종교,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비방한다. 이런 점을 기억해 두자.진실로 한 번 중생을 경험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눈살을 찌푸리며 아첨의 말로 많은 시험을 가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이전 생활 과정으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어떠한 설득이나 비난도 그들이 늘 버릇처럼 행하던 옛 생활로 돌아오게 하거나 또는 그렇게 행하도록 하는데 성공치 못할 것이다.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행동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경멸해야 하며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믿어야 하며, 그들은 지루하고 장황한 것을 즐겨야 하며 뚜렷한 이익도 없는데 열심이어야 하며, 소망에 의존하여야 하는 모든 것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깃이다.신앙적인 사람들의 최선의 행동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면할 수 없다. 선한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과 위험, 그리고 자기 부정을 대가로 치르게 하는 이러한 행동은 무정하며 심술궂은 세상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 긍휼, 그리고 선함의 열매를 맺지만 세상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비방하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종들이 받을 위로를 여기에 첨가하고 있다. 1. 모든 사악한 사람들, 특히 그들 자신들 같이 나쁘지 아니한 자들을 비방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심판할 능력과 권위가 주어진 분, 머지 않아 심판하게 되며 살아있는 자들에게 선고를 내리며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실 분에게 설명을 해야 하며 그들의 행동의 까닭을 밝혀야만 하게 될 것이다(약 5:8, 9; 벧후 3:7). 이 점을 주시하자.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그들이 말한 모든 악한 말에 대해 위대하신 하나님께 잠시 동안 설명을 드리게 될 것이다(유 1:14, 15).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언급한 모든 그들의 저주, 어리석은 농담, 중상과 거짓말에 대한 불행한 설명을 하도록 요구를 받게 된다.

2.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함이니라”(6절). 어떤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 장면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옛 성도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의 격분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그들 위에 임하게 한 불의한 심판과 핍박을 참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함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영적인 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복음은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전파되었고 그들이 이교도와 그리고 단순한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살아오는 동안 이룩된 본성의 부패와 그들의 생활이 악함을 비난하기 위하여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들의 죄에 대해 고행을 겪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새롭고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취급하면서 이런 점을 배우도록 하자.

(1) 우리들이 죄의 고행과 하나님에 대하여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의 바람직한 결과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자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그렇게 문제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헛되이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할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3)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행하고 산다면 육체의 사람들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모든 사악한 사람들, 특히 그들 자신들 같이 나쁘지 아니한 자들을 비방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심판할 능력과 권위가 주어진 분, 머지 않아 심판하게 되며 살아있는 자들에게 선고를 내리며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실 분에게 설명을 해야 하며 그들의 행동의 까닭을 밝혀야만 하게 될 것이다(약 5:8, 9; 벧후 3:7). 이 점을 주시하자.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그들이 말한 모든 악한 말에 대해 위대하신 하나님께 잠시 동안 설명을 드리게 될 것이다(유 1:14, 15).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언급한 모든 그들의 저주, 어리석은 농담, 중상과 거짓말에 대한 불행한 설명을 하도록 요구를 받게 된다.”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함이니라”(6절). 어떤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 장면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옛 성도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의 격분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그들 위에 임하게 한 불의한 심판과 핍박을 참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함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영적인 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복음은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전파되었고 그들이 이교도와 그리고 단순한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살아오는 동안 이룩된 본성의 부패와 그들의 생활이 악함을 비난하기 위하여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들의 죄에 대해 고행을 겪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새롭고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취급하면서 이런 점을 배우도록 하자.우리들이 죄의 고행과 하나님에 대하여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의 바람직한 결과이다.하나님은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자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그렇게 문제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헛되이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할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다.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행하고 산다면 육체의 사람들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4:7 근신, 사랑, 봉사 (베드로 전서 4:7-11) 우리는 여기에서 무서운 상태, 혹은 교리에 접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유도된 추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그 상태는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에 의하여 예언된 유대교회와 국가의 비참한 멸망이 지금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박해와 너희들의 고난의 때가 이르렀는데, 매우 임박했다는 것이다. 너희와 너희 원수의 생명이 곧 극한 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상 자체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큰 불이 세상의 종말을 초래한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무한한 영원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고야 만다. 이것으로부터 유도된 추리는 일련의 권고를 포함하고 있다. 1.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라”(7절). 너희의 마음의 상태와 기질을 근엄하게, 안정되게, 그리고 견고히 하라.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오락을 이용할 때 엄격한 절제와 근신을 지키도록 하라. 너희의 이전 죄와 시험으로 너희 자신이 얽매어짐으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라(3절).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에 합당한 조용하고 냉철한 성향을 계속 유지하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마지막 날이 예고없이 너희에게 임하는 일이 없도록 자주 기도하라”(눅 21:34; 마 26:40, 41).

(1) 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우리들의 고려는 모든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근신하도록 하며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열심있게 하는 가장 능력있는 논증이다.

(2) 목적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는 깨어 기도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깨어 주시해야 하며 적합한 모든 기회를 주시하며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의 임무를 다 하도록 해야 한다.

(3) 육체의 올바른 질서는 영의 선함을 증진하는데 크게 유용하다. 육체의 기호와 경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지배를 받을 때, 그리고 육체의 이익이 영혼의 이익과 필요에 순응할 때, 그때는 육체가 영혼의 적이 아니요, 영혼의 친구요, 조력자가 된다.

2.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 여기에 기독교의 황금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그들의 인품에 대한 애정, 그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마음으로부터의 노력 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애정은 차가워서는 안 되며, 뜨거워야 한다. 사랑은 진실하고 강렬하며, 영원해야 한다. 이러한 진실한 애정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권고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골 3:14).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고전 13:13). 사랑의 놀라운 효과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가리운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1) 더 많은 뜨거운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보다 모든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있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사랑을 가지라.” 사도 베드로는 이교도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을 위함도 아니요, 혹은 배교자들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서 사랑을 베풀라”고 하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히 13:1).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 안에 있는 온후한 마음과 사랑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즉 각별한 애정을 요구한다.

(2) 악의를 품지 않는다든지 피차간에 일반적인 존경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강렬하게, 그리고 뜨겁도록 피차간 사랑해야 한다.

(3) “허다한 죄를 가리우는”것은 참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다.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고 잊게 해주며, 다른 사람의 죄를 악화시키거나 퍼뜨리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가리워 조고 감싸주도록 한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에 무수한 악한 죄를 범한 그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자들을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긍휼을 준비케 한다(마 6:14).

3. 대접하기를 권하고 있다(9절). 여기에서 요청되는 대접은 나그네나 여행자에 대한 자유롭고 친절한 접대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대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은 피차간 모두가 해당된다. 그들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박해와 재난의 시기에 있어서 그들의 환경의 여건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피차간 대접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약탈당하였으며, 그들은 안전을 위하여 먼 나라로 피신을 했다. 이러한 경우 만일 그들의 그리스도인 동료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굶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지혜롭고 필요한 규칙을 제안했다. 이러한 것은 여러 곳에 지시되어 있다(히 13:12; 롬 12:13).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지나친 부담과 수고로 인한 시비와 불평이 없이 쉽고 친절하며 간단한 방법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점을 알아두자.

(1) 그리스도인들은 사랑뿐만 아니라 서로 대접도 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나 대접의 방법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든지 그는 그것을 시비가 없이 기쁨으로 행해야 한다. “네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4. 재능의 향상을 권고하고 있다(11절).

(1) 우리의 은사가 일반적인 것이든 특수한 것이든 권능, 능력,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 등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간에 우리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 청지기같이 서로 똑같이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

[1] 선을 행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야 한다.

[2] 우리가 받은 은사가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부여받은 것으로 경모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은사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쓸 것을 쓰지 않고 숨겨 놓아도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겨야 한다.

[3]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고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오직 청지기로 생각하며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들에게 위탁된 재능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2) 사도는 두 가지를 들어 은사에 대한 교훈을 예증하고 있다. 즉 말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으로 이에 관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1] 공석에서의 교역자나 사석에서의 평신도이든, 이들 간에 누구든지 말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그는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사석에 있어서의 평신도들이나 공석에 있어서의 교역자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은 정결한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만 한다. 말하는 방법을 말하자면 말은 신중, 경의, 그리고 엄숙함을 지님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말이 되게 해야 한다.

[2] 교회에서 구제를 행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집사나, 사랑에 넘치는 은사와 헌금으로써 봉사하는 평신도이거나 교역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주신 능력으로 봉사를 행하도록 하라.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함과 능력을 부여받은 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마음껏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은 여러분의 모든 은사와 봉사와 그리고 섬기는 일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추종되고 시행되어야 한다(마 5:16). 그리고 그것들은 이러한 일을 시작하셨고 사람들에게 각양 선물을 나누어주시는 (엡 4: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직 그를 통해서만 우리와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에서 몇 가지 일들을 알아두자.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라”(7절). 너희의 마음의 상태와 기질을 근엄하게, 안정되게, 그리고 견고히 하라.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오락을 이용할 때 엄격한 절제와 근신을 지키도록 하라. 너희의 이전 죄와 시험으로 너희 자신이 얽매어짐으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라(3절).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에 합당한 조용하고 냉철한 성향을 계속 유지하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마지막 날이 예고없이 너희에게 임하는 일이 없도록 자주 기도하라”(눅 21:34; 마 26:40, 41).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우리들의 고려는 모든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근신하도록 하며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열심있게 하는 가장 능력있는 논증이다.목적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는 깨어 기도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깨어 주시해야 하며 적합한 모든 기회를 주시하며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의 임무를 다 하도록 해야 한다.육체의 올바른 질서는 영의 선함을 증진하는데 크게 유용하다. 육체의 기호와 경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지배를 받을 때, 그리고 육체의 이익이 영혼의 이익과 필요에 순응할 때, 그때는 육체가 영혼의 적이 아니요, 영혼의 친구요, 조력자가 된다.사랑하라고 권고한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 여기에 기독교의 황금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그들의 인품에 대한 애정, 그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마음으로부터의 노력 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애정은 차가워서는 안 되며, 뜨거워야 한다. 사랑은 진실하고 강렬하며, 영원해야 한다. 이러한 진실한 애정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권고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골 3:14).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고전 13:13). 사랑의 놀라운 효과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가리운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더 많은 뜨거운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보다 모든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있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사랑을 가지라.” 사도 베드로는 이교도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을 위함도 아니요, 혹은 배교자들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서 사랑을 베풀라”고 하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히 13:1).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 안에 있는 온후한 마음과 사랑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즉 각별한 애정을 요구한다.악의를 품지 않는다든지 피차간에 일반적인 존경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강렬하게, 그리고 뜨겁도록 피차간 사랑해야 한다.”허다한 죄를 가리우는”것은 참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다.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고 잊게 해주며, 다른 사람의 죄를 악화시키거나 퍼뜨리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가리워 조고 감싸주도록 한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에 무수한 악한 죄를 범한 그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자들을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긍휼을 준비케 한다(마 6:14).대접하기를 권하고 있다(9절). 여기에서 요청되는 대접은 나그네나 여행자에 대한 자유롭고 친절한 접대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대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은 피차간 모두가 해당된다. 그들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박해와 재난의 시기에 있어서 그들의 환경의 여건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피차간 대접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약탈당하였으며, 그들은 안전을 위하여 먼 나라로 피신을 했다. 이러한 경우 만일 그들의 그리스도인 동료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굶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지혜롭고 필요한 규칙을 제안했다. 이러한 것은 여러 곳에 지시되어 있다(히 13:12; 롬 12:13).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지나친 부담과 수고로 인한 시비와 불평이 없이 쉽고 친절하며 간단한 방법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점을 알아두자.그리스도인들은 사랑뿐만 아니라 서로 대접도 해야만 한다.그리스도인은 사랑이나 대접의 방법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든지 그는 그것을 시비가 없이 기쁨으로 행해야 한다. “네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자.재능의 향상을 권고하고 있다(11절).우리의 은사가 일반적인 것이든 특수한 것이든 권능, 능력,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 등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간에 우리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 청지기같이 서로 똑같이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선을 행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야 한다.우리가 받은 은사가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부여받은 것으로 경모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은사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쓸 것을 쓰지 않고 숨겨 놓아도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겨야 한다.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고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오직 청지기로 생각하며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들에게 위탁된 재능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사도는 두 가지를 들어 은사에 대한 교훈을 예증하고 있다. 즉 말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으로 이에 관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공석에서의 교역자나 사석에서의 평신도이든, 이들 간에 누구든지 말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그는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사석에 있어서의 평신도들이나 공석에 있어서의 교역자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은 정결한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만 한다. 말하는 방법을 말하자면 말은 신중, 경의, 그리고 엄숙함을 지님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말이 되게 해야 한다.교회에서 구제를 행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집사나, 사랑에 넘치는 은사와 헌금으로써 봉사하는 평신도이거나 교역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주신 능력으로 봉사를 행하도록 하라.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함과 능력을 부여받은 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마음껏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은 여러분의 모든 은사와 봉사와 그리고 섬기는 일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추종되고 시행되어야 한다(마 5:16). 그리고 그것들은 이러한 일을 시작하셨고 사람들에게 각양 선물을 나누어주시는 (엡 4: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직 그를 통해서만 우리와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에서 몇 가지 일들을 알아두자. 첫째, 사적인 위치에 있는 평신도이거나 공적인 자리에 있는 교역자들의 임무는 하나같이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피차간 이야기하는 것이다(말 3:16; 엡 4:29; 시 145:10-12). 둘째, 하나님의 일에 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모든 복음 전파자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맡은 임무만을 행할 뿐 아니라 열심을 가지고, 그들의 최선의 능력을 따라 그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차원이 높고도 어려운 그리스도인의 일의 본질, 주인(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상급의 탁월성 등,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노력이 필사적이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일에 어떠한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우리들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그것을 행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넷째, 이 모든 임무와 봉사의 생활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다른 견해도 우리의 행동과 사업을 성결케 하는(고전 10:3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증보와 그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는 어떠한 일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범사에 영광을 받으신다. 여섯째,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무한하고 영원한 찬양과 권능을 돌리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며 세세토록 모든 축복을 받으실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멘.

4:12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영광 (베드로 전서 4:12-19) 본서의 각 장마다 박해받는 사람들로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자주 반복된 것은 이 새로운 개종자들이 처해 있던 크나큰 위험은 그들이 섬기고 있던 기독교 때문에 발단된 박해임을 보여 준다. 고난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은 그들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위로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본장 전반부에서 그들에게 고행의 크나큰 임무 수행을 권고한 후, 여기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의 필수 조건인 인내의 임무를 그들에게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단련되지 못한 영은 시험을 참아 견디기에 매우 부적합하다. 이 점을 주시해 보자. Ⅰ. 이 경멸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친절한 권고의 방법으로 그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9절). Ⅱ. 사도 베드로의 충고는 그들의 고난과 관련되었으며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 1.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이상히 생각지도 말고, 어떤 예기치 못했던 일을 당한 것처럼 놀라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기억할 것은 아래와 같다.

(1) 그 고난이 심하고 극렬하다 할지라도, 이는 그들을 단련하고자 함이지 결코 멸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의 성실성과 강함과 인내,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도를 시험하고자 함이다. 반대로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난이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으로 마땅히 일컬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고난은 같은 종류의 것이며, 동일한 이유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 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면 또한 우리들은 그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며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고 그의 신실한 종들에게 면류관을 씌우기 위하여 재림하실 때 큰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후 1:7).

[1]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가장 비천하고 천대받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감싸준다. 사도 베드로는 이 불쌍하게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자기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역경 속에서 피차간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

[2]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불친절과 박해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놀랠 이유가 없다. 그 까닭은 이미 그들에게 이러한 고난이 경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 고난을 스스로 견디어 내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저버리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조건이 된다.

[3]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참아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극심한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극심한 고난이 거룩한 은총의 전조가 되기 때문이다. 고난은 복음을 증진시키며 영광을 예비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기뻐하는 자들은 영광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승리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2) 사도 베드로는 불 시험에 대한 이야기에서 좀 덜 심한 핍박 즉 말로 인한 중상과 비난을 들고 있다(14절).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종류의 고난은 그들의 몫으로 임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들이 비방을 받고 욕을 당하며 중상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기뻐하라”고 강조한다. 기뻐할 이유는 이러하다. “너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너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영광의 영으로서 너희를 고난 중에 보호하시고 영광 중에 부르시어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사 너희를 인치실 것이다. 이 영광의 영이 너희 위에 임하고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를 돕고, 너희와 함께 기뻐하시리라.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이 아니겠는가?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고 너희의 인내와 견인분발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성령께서 나타내신 바 말씀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는 너희를 대신해서 영광을 받고 그러신다. 그러나 너희 위에 임했던 비난과 보복, 그리고 힐책으로 인해서 영 자체는 비방을 받고 또한 훼방을 받고 있다.”

[1] 최선의 사람들과 최선의 것들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비난을 당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과 그 복음은 모두 비방을 받는다.

[2] 선량한 사람들의 기쁨은 그들의 고난과 일치할 뿐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복이 있는 자들”이다.

[3]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는 자는 비참하게 될 수 없다. 그의 고통이 항상 위대한 것이 되도록 하자. “너희는 복있는 자이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

[4]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던진 훼방과 비난은 마치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5] 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난을 받을 때 그의 성령은 그 가운데서 영광을 받는다.

2. 사도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같이 마땅한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한다(15절). 어떤 사람은 이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주의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들은 이러한 죄나 또는 다른 어리석은 죄목으로 그들을 씌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가 기독교의 종교 강령을 제정할 때 그들 중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소유물을 해치는 일이라든가, 어떠한 종류의 죄를 행하는 것이나, 아무런 요청이나 필요성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감독권을 행사하는 일,”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이 주의에 사도 베드로는 한 가지 지시를 더 첨가하고 있다. 누구든지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으로서 고난을 당한다면 그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는 아니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를 존귀하게 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16절).

(1) 최선의 사람은 가장 악한 죄에 대해서도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2)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불러들인 고난에는 위로함이 없다.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 고난의 참된 동기가 순교자를 만든다.

(3)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기독교의 어떤 교리나 임무 수행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받도록 부르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영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3. 그들의 시험은 임박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시험에 대비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베드로는 권고하고 있다(17,18절).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내리시는 심판의 일반적인 방법은 이러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큰 재난과 혹독한 심판을 만국에 내리실 때 대체로 심판을 그의 백성들로부터 시작한다(사 10:12; 렘 25:29; 겔 9:6). “이러한 우주적인 대재난이 지금 임박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예언하신 것이다(마 24:9, 10). 이는 너희에게 필요한 인내에 대해 앞서 언급한 권고를 상기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너희들을 지속시키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러한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집 그리고 하나님의 식구인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너희의 시험과 징계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2] “사악한 세상과 너희 유대 백성들과 너희 중에 살고 있는 불신앙적인 자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에 비하면, 너희의 고통은 매우 가볍고 순간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했는가?”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이상히 생각지도 말고, 어떤 예기치 못했던 일을 당한 것처럼 놀라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기억할 것은 아래와 같다.그 고난이 심하고 극렬하다 할지라도, 이는 그들을 단련하고자 함이지 결코 멸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의 성실성과 강함과 인내,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도를 시험하고자 함이다. 반대로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난이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으로 마땅히 일컬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고난은 같은 종류의 것이며, 동일한 이유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 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면 또한 우리들은 그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며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고 그의 신실한 종들에게 면류관을 씌우기 위하여 재림하실 때 큰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후 1:7).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가장 비천하고 천대받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감싸준다. 사도 베드로는 이 불쌍하게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자기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역경 속에서 피차간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불친절과 박해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놀랠 이유가 없다. 그 까닭은 이미 그들에게 이러한 고난이 경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 고난을 스스로 견디어 내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저버리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조건이 된다.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참아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극심한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극심한 고난이 거룩한 은총의 전조가 되기 때문이다. 고난은 복음을 증진시키며 영광을 예비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기뻐하는 자들은 영광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승리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사도 베드로는 불 시험에 대한 이야기에서 좀 덜 심한 핍박 즉 말로 인한 중상과 비난을 들고 있다(14절).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종류의 고난은 그들의 몫으로 임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들이 비방을 받고 욕을 당하며 중상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기뻐하라”고 강조한다. 기뻐할 이유는 이러하다. “너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너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영광의 영으로서 너희를 고난 중에 보호하시고 영광 중에 부르시어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사 너희를 인치실 것이다. 이 영광의 영이 너희 위에 임하고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를 돕고, 너희와 함께 기뻐하시리라.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이 아니겠는가?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고 너희의 인내와 견인분발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성령께서 나타내신 바 말씀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는 너희를 대신해서 영광을 받고 그러신다. 그러나 너희 위에 임했던 비난과 보복, 그리고 힐책으로 인해서 영 자체는 비방을 받고 또한 훼방을 받고 있다.”최선의 사람들과 최선의 것들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비난을 당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과 그 복음은 모두 비방을 받는다.선량한 사람들의 기쁨은 그들의 고난과 일치할 뿐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복이 있는 자들”이다.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는 자는 비참하게 될 수 없다. 그의 고통이 항상 위대한 것이 되도록 하자. “너희는 복있는 자이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던진 훼방과 비난은 마치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난을 받을 때 그의 성령은 그 가운데서 영광을 받는다.사도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같이 마땅한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한다(15절). 어떤 사람은 이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주의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들은 이러한 죄나 또는 다른 어리석은 죄목으로 그들을 씌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가 기독교의 종교 강령을 제정할 때 그들 중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소유물을 해치는 일이라든가, 어떠한 종류의 죄를 행하는 것이나, 아무런 요청이나 필요성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감독권을 행사하는 일,”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이 주의에 사도 베드로는 한 가지 지시를 더 첨가하고 있다. 누구든지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으로서 고난을 당한다면 그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는 아니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를 존귀하게 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16절).최선의 사람은 가장 악한 죄에 대해서도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불러들인 고난에는 위로함이 없다.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 고난의 참된 동기가 순교자를 만든다.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기독교의 어떤 교리나 임무 수행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받도록 부르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영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그들의 시험은 임박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시험에 대비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베드로는 권고하고 있다(17,18절).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내리시는 심판의 일반적인 방법은 이러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큰 재난과 혹독한 심판을 만국에 내리실 때 대체로 심판을 그의 백성들로부터 시작한다(사 10:12; 렘 25:29; 겔 9:6). “이러한 우주적인 대재난이 지금 임박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예언하신 것이다(마 24:9, 10). 이는 너희에게 필요한 인내에 대해 앞서 언급한 권고를 상기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너희들을 지속시키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이러한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집 그리고 하나님의 식구인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너희의 시험과 징계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사악한 세상과 너희 유대 백성들과 너희 중에 살고 있는 불신앙적인 자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에 비하면, 너희의 고통은 매우 가볍고 순간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했는가?” 첫째, 하나님의 가족에 그의 훌륭한 종들일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심판으로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합당하고 필요하게 하는 그런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심판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인 그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하는 악한 환경은 참을 수 있는 것이며 곧 종식될 것이다. 셋째, 아무리 큰 소리로 그럴 듯하게 주장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는 하나님의 교회나 식구의 일원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에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구분해 내고 있다. 넷째, 이 세상에서 당하는 선한 백성들의 고난은 불순종하는 자와 불신앙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과는 구분이 된다.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한가?” 그들의 마지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될 것인가를 누가 표현하거나 말할 수 있을까?

(2) 사도 베드로는 사악한 자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18절). 이 모든 말씀은 잠언 11장 31절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이것을 70인역(LXX)은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것과 정말 똑 같게 번역을 하고 있다.

[1] 이 세상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당하는 마음 아픈 고난은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 위에 임하게 될 과중한 심판의 슬픈 전조이다.

[2] 선한 사람들도 그들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많다. 고통과 유혹, 그리고 극복되어야 할 고난, 억제되어야 할 죄가 너무도 많다.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므로 의인이라도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하여야 할 일은 많다. 구원의 절대 필요성과 그 구원의 어려움은 평행한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자. 너희의 어려움이 우선 대단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도움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싸움은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계 2:10).

[3]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저주를 받는다.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어찌 그들이 그들의 심판에 견딜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그들이 머리를 들 수 있을까? “의인이 겨우 주의 구원을 얻는다면” 사악한 사람들은 확실히 멸망을 받게 된다.

4.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도록 부름을 받았을 경우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안전을 기쁨으로 쳐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보호해 주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이는 그가 그들의 창조자이시며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친절한 약속을 은혜로 말미암아 이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영원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미쁘시고 진실하심을 보여 주실 것이다(19절).

(1) 선한 사람에게 임할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

(2) 그들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신의 보존보다 그들의 영혼의 유지를 더욱 주시해야 한다. 영혼은 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나 아직 크나큰 위험에 놓여 있다. 만일 불안감, 짜증, 그리고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다른 죄와 괴로움을 느끼는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영혼은 매우 어려운 고통 중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의 영혼이 잘 보존되어 있지 못하면 박해는 그 사람을 배교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시 125:3).

(3) 영혼을 잘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기는 일이다. 너희의 영혼을 절대적인 헌신과 기도, 그리고 참고 선행을 지속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께 맡겨라(롬 2:7).

(4) 선한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도록 큰 격려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데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악한 자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18절). 이 모든 말씀은 잠언 11장 31절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이것을 70인역(LXX)은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것과 정말 똑 같게 번역을 하고 있다.이 세상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당하는 마음 아픈 고난은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 위에 임하게 될 과중한 심판의 슬픈 전조이다.선한 사람들도 그들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많다. 고통과 유혹, 그리고 극복되어야 할 고난, 억제되어야 할 죄가 너무도 많다.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므로 의인이라도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하여야 할 일은 많다. 구원의 절대 필요성과 그 구원의 어려움은 평행한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자. 너희의 어려움이 우선 대단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도움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싸움은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계 2:10).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저주를 받는다.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어찌 그들이 그들의 심판에 견딜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그들이 머리를 들 수 있을까? “의인이 겨우 주의 구원을 얻는다면” 사악한 사람들은 확실히 멸망을 받게 된다.”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도록 부름을 받았을 경우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안전을 기쁨으로 쳐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보호해 주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이는 그가 그들의 창조자이시며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친절한 약속을 은혜로 말미암아 이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영원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미쁘시고 진실하심을 보여 주실 것이다(19절).선한 사람에게 임할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그들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신의 보존보다 그들의 영혼의 유지를 더욱 주시해야 한다. 영혼은 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나 아직 크나큰 위험에 놓여 있다. 만일 불안감, 짜증, 그리고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다른 죄와 괴로움을 느끼는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영혼은 매우 어려운 고통 중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의 영혼이 잘 보존되어 있지 못하면 박해는 그 사람을 배교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시 125:3).영혼을 잘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기는 일이다. 너희의 영혼을 절대적인 헌신과 기도, 그리고 참고 선행을 지속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께 맡겨라(롬 2:7).선한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도록 큰 격려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데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베드로전서 4장. 난해 구절은 정말 난해한 것일까?

성경을 읽다보면 난해 구절로 알려진 본문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냥 읽기에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다.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 죽은 자들에게도 주님께서 내려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인가? 그럼 그 말씀을 듣고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회심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벧전 3:19 한 절만 봐도 좀 이상한데, 벧전 4:6에서 다시한번 좀더 구체적으로 이미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에서 말하는 최후 심판을 위해서 대기하는 ‘연옥’이라는 곳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이 교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등등…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전통적인 교리와 충돌이 일어나는 이런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난해 구절로 구분하고, 그 충돌을 피해보려는 나름대로의 변명(해석)을 학자들이 쓰는데 종종은 억지스러운 것조차 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난해 구절을 담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런 난해 구절은 단순히 문자적인 측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문맥상에서 어떤 흐름 속에 나오 이야기인지를 파악해서 그 흐름에 맞게 역으로 그 문자적 의미를 규정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이런 난해 구절은 의외로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론이 길었지만 암튼 시작하자.

[정리1. 본문을 내용으로 정리하기]

1. 그리스도께도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1)

1) 이는 육체의 고난은 죄를 그치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2) 고난을 통해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다.(2)

3) 음란과 방탕한 삶은 지난 날로 족하다.

4) 세상은 같이 극심한 방탕으로 가지 않는 너희들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

5)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실대로 고하게 될 것이다.

2. 나그네처럼 사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종말의식이다.(7-11)

1)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2)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라.

3)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4)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5) 말을 하려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봉사를 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처럼 하라.

3. 성도들을 향해 오는 시험을 어떠한 태도로 맞이해야 하는가?

1) 너희를 연단하기 위해서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오히려 즐거워하라.

2)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다.(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는 것이다)

3) 너희가 악행이나 불필요한 일을 행해서 당하는 고난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4) 우리가 그릇행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 어찌하리요?

5)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중에 그 영혼을 미쁘신 하나님께 의탁한다.

[정리2. 본문을 다시 정리하기.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1. 우리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을 자들인데, 이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고난은 죄를 그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남은 생애를 정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고하게 될 것이다.

2. 나그네처럼 살지만, 성도들이 행하면서 살아야 할 원칙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랑하고 원망하지 않으며 선한 청지기로 자기의 은사대로 봉사하는 살아야 한다.(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3. 성도들이 경험하게 되는 고난을 이상한 것처럼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복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중에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나그네인 성도가 살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억울한 고난까지 포함해서)

고난 자체는 힘든 것이지만,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에게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고난이 주고 있는 유익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로 부터 멀어지고 정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평온한 중에 죄를 짓는다. 악이 들어오고 유혹이 커진다. 오히려 적절한 고난과 환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고 불필요한 일과 생각으로부터 지켜준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죄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질때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죄다. 고난은 우리의 몸과 생각을 어느 정도는 구속함으로 오히려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유익을 누리게 된다.

고난과 정결함의 문제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래서 고난을 통해 그의 백성의 생각을 깊이하게 하시면도 동시에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시기도 하신다. 잘 생각해 보라. 내가 언제 죄를 많이 짓게 되는지… 한가할 때인지, 정신없을 때인지…

2. 우리가 나그네이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이 삶의 방식은 매우 높아야 한다.

나그네와 종들은 소극적인 삶, 가능하면 주류 중심의 가치와 법으로 형성된 사회시스템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하기 쉽다. 최소한의 시민의식 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다. 따라서 이 땅의 규칙과 룰에 적극적일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최소한의 것만 따르면 그만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땅의 나그네인 우리를 향해서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라고 권면한다. 자기가 해야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넉넉하게 그리하라고 말한다.

종교인들의 세금 문제가 최근에 대두되었던 것이 생각난다. 종교인들은 면세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권리와 특권으로 생각해서 고집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이 땅의 시민들이 하는 것과 같이 종교인들도 법이 정한 규정 안에서 세금을 내는 것이 베드로의 가르침을 고려해 볼 때 옳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3. 난해 구절(4:6)에 대한 평이한 해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여기서 말하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도 회심을 할 기회를 다시 주어진다는 의미처럼 보여지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죽은 자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결국은 죽음 이후 복된 소식이 전파되는데, 그 복된 소식이란 예수를 믿고 회심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말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던 그들이 결국은 옳다 인정을 받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복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육체적인 삶에 있어서는 심판을 받은 것처럼 보이나, 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려는 의도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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