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종교 |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최근 답변 152개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방글라데시 종교 –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ppa.pilgrimjournalist.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ppa.pilgrimjournalist.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5분상식 세계사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79,905회 및 좋아요 1,335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ㅇ 방글라데시 인구 1억 6,270만명(2020년) 중 이슬람교(수니파) 89%, 힌두교 10%, 나머지 기독교, 불교 및 소수 종교로 구성됨.

방글라데시 종교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 방글라데시 종교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 YouTube 자막기능을 켜보세요. ◈
(한국어 자막)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은
남아시아 인도 북동쪽의 벵골 만 연안에 있는 나라로, 수도는 다카(Dhaka)입니다.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부터 6세기 굽타 왕조, 8세기 중엽 팔라 왕조가 세워져
볼교가 번성하였으나 1200년경 무슬림의 침략을 받고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습니다.
12세기 후반 벵갈 술탄국이 수립되었으나,
세나 왕조를 거쳐 1576년 인도의 무굴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17세기 영국은 인도에 이어 벵골지역까지
식민통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1905년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분리하는 벵골 분할령 실시 이후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정에서도 힌두교가 주도한 국민회의와
이슬람교도들이 만든 전인도 무슬림연맹 사이의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1947년 인도가 자치권을 회복한 이후로도,
힌두교 위주의 인도자치령과 이슬람교 위주의 파키스탄 자치령이
따로 분리되었고,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이 됩니다.
동파키스탄은 아와이 연맹의 주도로 1971년 독립전쟁 끝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방글라데시가 성립하게 됩니다.

방글라데시 종교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방글라데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벵골어: গণপ্রজাতন্ত্রী বাংলাদেশ 고노프로자톤트리 방라데시, 영어: 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피플스 리퍼블릭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20/2022

View: 8216

미국 국무부 방글라데시 종교의 자유 보고서 발표

종교의 자유 존중 관련. (1) 종교 분포. ㅇ 방글라데시 인구 1억 5,782만 명(2017.7월) 중 이슬람교(수니파) 89%, 힌두교 10% 및 기독교,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bgd.mofa.go.kr

Date Published: 11/4/2021

View: 4883

방글라데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면적은 14만 3998㎢, 인구는 1억 6895만 7745명(2015년 현재), 수도는 다카(Dacca)이다. 주민은 벵골인이 인구의 98%를 차지하며, 언어는 벵골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국교 …

+ 여기에 표시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3/5/2022

View: 7917

방글라데시 – 나무위키

종교는 이슬람교가 대다수로, 사회 주류다. 그 중에서도 수니파가 가장 다수이며, 수피즘, 시아파, 아흐마디야 등 다른 종파를 믿는 이들도 있다. 인도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18/2021

View: 4459

선교지 소개 –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People’s Republic of …

주민은 벵갈인이 인구의 98%를 차지하며, 언어는 벵갈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국교인 이슬람교가 89%, 힌두교 10% 등이다. 기후는 고온 다습한 열대성 …

+ 여기를 클릭

Source: www.bauri.org

Date Published: 5/22/2022

View: 100

방글라데시의 종교 ㅣ 이슬람교

더군다나 방글라데시는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하여 이룩한 이슬람교 국가로서 민족적, 종교적 색채가 강한 나라이다. 파키스탄의 정치적,경제적 착취와의 …

+ 더 읽기

Source: www.bdkorea.org

Date Published: 6/29/2022

View: 4472

방글라데시 소수종교인들, 이슬람 국교화 반대 시위

로자리오는 “헌법에 따르면, 방글라데시는 세속국가로 규정돼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국교가 이슬람교라고 한다.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0/3/2022

View: 7162

방글라데시는 왜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 프레시안

종교적인 근대 국가를 표방한 파키스탄과 척을 졌다. 종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신생 국가로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파키스탄 건국이 1947년이고, 이스라엘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pressian.com

Date Published: 4/26/2022

View: 3526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방글라데시 종교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방글라데시 종교

  • Author: 5분상식 세계사
  • Views: 조회수 79,905회
  • Likes: 좋아요 1,335개
  • Date Published: 2020. 3.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25WpHxXrzqo

미 국무부 2020년도 국제 종교의 자유 보고서 (방글라데시) 상세보기

미 국무부가 5.12(수) 발간한“2020년도 국제 종교의 자유 보고서”중 방글라데시 관련 주요 내용:

※ 동 보고서 관련, 주재국 외교부 Shahriar Alam 국무장관은 5.17(월) Earl R. Miller 미국대사와 면담시, 동 보고서에서 언급된 종교적 배경 하에서 발생한 소수종족에 대한 공격 및 차별 등 일부 사건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주재국 정부가 동 사건들을 포함, 종족간 화합과 종교적 비차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함.

– 동 보고서는 지난해 7월 가지푸르 지역 수피 이슬람 회당 밖에서 수피 추종자 살해사건, Ahmadiya 종파 추정자 자녀 화장사건, 1월 콕스바자 난민촌에서 크리스챤 로힝야 가족에 대한 공격 사건, 힌두 사원에 대한 훼손 및 힌두 소수민족에 대한 폭력 등 다수 사례를 언급

1. 종교적 자유에 대한 존중 현황

가. 종교 분포

ㅇ 방글라데시 인구 1억 6,270만명(2020년) 중 이슬람교(수니파) 89%, 힌두교 10%, 나머지 기독교, 불교 및 소수 종교로 구성됨.

ㅇ Chittagong Hill Tracts (CHT) 지역 및 북부 지역에 밀집 거주하는 소수 민족들은 대체로 소수 종교를 믿음.

나. 법체계

ㅇ 이슬람교가 국교이나 세속주의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고 모든 종교활동에 대하여 동등한 지위, 권리 및 자유를 부여함.

– 헌법은 국가가 특정 종교에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교육기관에 다니는 사람은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종교에 관련된 의식이나 예배에 참여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안 됨.

ㅇ 형법상 종교적 정서를 모욕하려는‘고의적이고 악의적인’의도를 가진 발언이나 행위는 벌금 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짐.

– 디지털보안법(Digital Security Act) 은“종교적 가치나 정서를 해치는 모든 정보”의 출판이나 방송을 불법화하며, 법 위반시 보석 불허 및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짐.

ㅇ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주재국 정부가 디지털보안법을 국제인권법에 부합하도록 조속히 개정하고 개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임의적 체포, 구금 등에 대한 견제 및 균형을 보장할 것을 촉구 함.

ㅇ 결혼, 이혼, 입양 등을 다루는 가족법은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규정을 두고 있으며, 한 가족에 여러 종교가 혼재되어 있거나 기타 종교가 관련될 경우 별도의 민사가족법이 적용됨.

ㅇ 주재국은 시민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의 당사국임.

다. 교육

ㅇ 공립학교 3학년-10학년까지 종교수업이 필수 과정이며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기독교 학생들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종교수업을 받음.

2. 이슬람 극단주의 관련

ㅇ 2020.3.12. 방글라데시 신속재판소(Bangladesh Speedy Trial Tribunal)는 2016년 힌두교 사제 살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폭력적 극단주의 단체인 Jamaatul Mujahidin Bangladesh (JMB) 무슬림 조직원 4명에게 사형을 선고함.

ㅇ 2016.7월 다카 홀리 아티산 베이커리에서 非무슬림 22명을 살해한 혐의로 방글라데시 특별재판소는 2019.11월 피고인 7명에 유죄를 선고함.

ㅇ 주재국 정부는 폭력적 극단주의 예방을 위해 전국의 이맘들 앞 지침을 지속 하달하고 있으며 선동적인 메시지 차단을 위해 모스크들을 모니터링하고 있음.

– 정부는 폭력사태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종교시설, 축제, 행사들에 법집행 요원들을 지속 배치하고 있음.

3. 소수 종교 차별 및 토지몰수 관련

ㅇ 힌두교도, 불교도, 기독교도들은 토지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강제철거 및 토지몰수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이를 예방하기 위한 정부측 조치가 미흡하다고 함.

– 소수 종교측은 주재국 정부가 Moulvibazar과 Modhupur 숲 지역의 원주민이 전통적으로 소유해온 토지에 대한 건설사업을 계속 진행해 왔으며, 지방경찰 및 정치지도자들이 금전적 이득을 위해 토지몰수를 허용하였다고 주장함.

– 반면, 일부 인권운동가들은 이러한 분쟁이 소수 종교에 대한 정부의 고의적인 차별의 결과인지, 비효율적인 정부정책의 결과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함.

ㅇ Chittagong Hill Tracts 지역은 불교도, 힌두교도, 기독교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일부는 벵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부족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정부로부터의 혜택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실정임.

ㅇ 주재국 국토부 2018-2019년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까지 귀속재산회복법(Restoration of Vested Property Act)에 따른 재산환수 사건 11만 4,749건 중 2만 6,791건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졌으며, 이 중 소유주(주로 힌두교인)들이 승소한 건수는 1만 2,190건으로 1만 255에이커의 토지를 되찾은 바 있음.

– 이러한 저조한 토지반환 속도에는 사법 비효율성과 전반적인 정부의 무관심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됨.

4. 로힝야족

ㅇ 주재국내 최대 외국인 집단은 로힝야족으로,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이며 난민촌 인구 중 약 1,500명이 기독교인, 450명이 힌두교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함(Human Rights Watch).

ㅇ 주재국 정부는 2020.1월 로힝야족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제한 조치를 해제하고 미얀마 학사과정에 따라 교육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으나, 3월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학교가 폐쇄됨.

ㅇ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0.1월 신원미상자 수 명이 콕스바자르의 Kutupalong Maga 난민캠프 내 로힝야족 기독교인 가족들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기독교에 대한 불관용이 원인으로 추정됨.

– 동 사건 이후, 캠프 내 기독교 가정 25개 가구가 다른 캠프로 이주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벵골어: গণপ্রজাতন্ত্রী বাংলাদেশ 고노프로자톤트리 방라데시 , 영어: 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피플스 리퍼블릭 오브 뱅글러데시[*] ) 또는 방글라데시(벵골어: বাংলাদেশ 방라데시 , 영어: Bangladesh 뱅글러데시[*] , 문화어: 방글라데슈)는 남아시아에 있는 인민 공화국으로서 인도, 미얀마 그리고 벵골 만에 인접해 있다. 인도의 서벵골 주와 더불어 벵골어를 쓰는 지역에 속한다. 국명 방글라데시는 벵골어로 “벵골의 땅” 또는 “벵골의 나라”를 뜻한다. 주요 도시로는 다카, 치타공, 실렛, 마이멘싱 등이 있다.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방글라데시의 역사 입니다.

현재 방글라데시라 불리는 지역에는 예부터 문명이 발달하였다. 현재 방글라데시는 벵골 지방의 동쪽에 해당한다.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부터 6세기 굽타 제국까지 수많은 왕조의 속령이었다. 불교 사원에서 기원전 7세기에 문명이 존재했음이 입증된 이 사회 구조는 기원전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측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뒷받침되지 못했다. 초기 문명은 불교와 혹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북부 방글라데시에 남아있는 유적에서 이러한 영향을 추측할 수 있다.

8세기 중엽에 팔라 제국이 세워졌고, 불교 왕조가 번영했다. 1000년경 무슬림들은 벵골 지역에 있는 힌두와 불교 왕국을 침략하여 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이들은 벵골 동부의 대다수 주민을 무슬림로 개종시켰으며, 서부 벵골지역에도 소수 무슬림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로부터 이슬람은 이 지역의 역사와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는 힌두계의 세나 왕국으로 대체되었으며, 13세기에 접어들어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16세기에는 무굴 제국이 성립하여 상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1세기 세나 왕조에서 16세기 (무굴 제국에 편입된 1574년) 동안 벵골어가 발달했다. 이 무렵, 벵골 경제 성장에 따라 밀림이 많았던 동벵골 개발이 시작되어 이슬람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되어 갔다. 16세기 후반에 동벵골에서 무슬림이 다수파가 되어 갔다. 또한 17세기 중반에는 무슬림 농민 집단이 눈에 띄게 급증하였다.

15세기 후반 벵골지역에 도착한 첫 유럽인은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었다. 뒤를 이어 네덜란드,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잇달아 벵골에 나타났다. 18, 19세기 동안 영국은 점차 인도의 캘커타에서부터 벵골에까지 그들의 상업적, 정치적 세력을 미쳤다.

영국령 [ 편집 ]

19세기 후반 영국은 지배하의 인도에서 다수 힌두교도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소수 무슬림들을 우대하여 이간질 하였고 이로 인하여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에 적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양 진영에서는 각각 자신들을 대표하는 당을 만들고 영국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무슬림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방법을 찾는 데는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무슬림들의 당(黨)인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은 1935년 인도에서 첫 선거에 패배한 후 1940년 이슬람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을 독립주로 선언하였다. 그 후 이로 인하여 캘커타 등지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47년 인도가 자치권을 회복하고 벵골지역을 종교에 의해 무슬림인의 동파키스탄과 힌두교인의 서벵골로 분리하였다.

인도령 동벵골 [ 편집 ]

영국령 인도는 1947년 독립을 달성했지만, 종교 문제로 인해 힌두교 지역은 인도, 이슬람 지역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뉜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동벵골(1947년 – 1955년)은 파키스탄에 참여를 결정했다.

파키스탄령 동파키스탄 [ 편집 ]

두 개의 파키스탄이 성립하면서 현재 방글라데시 지역은 동파키스탄이 되었다. 양 지역간 인구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지만, 경제와 문화 등이 크게 달랐으며, 또한 인도에서 1000 km 이상 떨어진 국토였다. 이 차이는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문제가 일어난 것은 언어의 차이였다. 벵골어로 거의 통일된 동파키스탄과는 달리, 서파키스탄은 우르두어 공용어화를 결정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은 벵골어와 우르두어의 공용어화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우세한 서파키스탄에 치우친 정책이었다. 1970년 12월 선거에서 인구가 많은 동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서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의회 개회를 연기한 후, 1971년 3월에는 군이 개입하여 동파키스탄 수뇌부를 구속하였다. 이것은 동서 파키스탄 대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으며,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시도하여,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과 내란이 벌어지면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서파키스탄과 대립하고 있던 인도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지지하였고, 또한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인도의 승리로 끝나자,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쳐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 내에서 벵골의 무지부르는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신장하기 위하여 아와미 연맹(Awami League, 약칭 AL)을 만들었다. 그 후 무지브는 AL의 대표로서 벵골 자치운동을 벌였다. 1970년대 무지브는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AL당은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1년 3월 26일 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벵골 애국주의자들은 독립된 방글라데시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 후 파키스탄군과 벵골 자유 투사들 간의 전투가 가열되자(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000만 명에 이르는 힌두교를 믿는 벵골인들이 인도의 아삼, 서벵골 등지로 피신하였다. 인도의 지원 속에 결국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군대는 항복하고 ‘벵골 국가’라는 뜻의 방글라데시가 탄생하였다.

독립과 무지부르 라흐만 정권 [ 편집 ]

독립 후 아와미 연맹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총리가 되었다. 인도에서 독립 이전부터 이슬람을 기치로 한 파키스탄 정부와 원주민의 사이는 나빴으며, 주마는 파키스탄 편입을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 상태가 이어졌고, 방글라데시가 1971년 독립하면서 이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따라서 원주민은 1972년 〈치타공 구릉지 인민 연대 연합 협회〉(PCJSS)라는 정당을 만들고 이듬해부터 PCJSS 산하 샨티 바히니(Shanti Bahini)와 방글라데시 군대가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내전과 홍수로 인한 경제의 피폐로 1975년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무지부르 라흐만이 암살된다.

지아우르 라흐만 [ 편집 ]

그 후 군부에서 지아우르 라흐만 소장이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이후 방글라데시 정부의 정책에 의해 벵골인이 치타공 구릉지대에 많이 정착하게 되었으며, 치타공 구릉지대에서 주마와 벵골인들의 비율은 거의 1 대 1이되었다.

에르샤드 정권 [ 편집 ]

1981년 군 내부의 쿠데타로 지아우르 라흐만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1983년 12월 후세인 모하마드 에르샤드 중장이 다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1988년에는 치타공 구릉지의 카루나푸리 강 상류에 국내 유일의 수력 발전소 (230MW)인 카프타이 댐을 건설함으로써 10만명의 주민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2만 가구가 미얀마에, 4만명이 인도에 각각 난민으로 이주했다. 에르샤드 정권은 민주화 운동에 의해 1990년에 퇴진하였다.

민주화 [ 편집 ]

1972년 헌법에 의해 방글라데시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나 그 후 약 30년간 정치적인 혼란과 부정이 만연했는데 13명의 행정 수반 중 초대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후계자 지아우르 라흐만 등 2명이 암살당했고 쿠데타가 4번 이상 일어났다. 그 뒤 2번의 적법적인 정권 교체가 있었으나, 이슬람 테러라는 국가적인 위험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91년 총선에서 중도 우파 세력인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 Bangladesh Nationalist Party)이 아와미 연맹(AL, Awami League)을 꺾고 BNP 당수인 칼레다 지아가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했다. 1991년 총선이 실시된 이후는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통치하고 있다. 치타공 구릉지 분쟁은 20년간 지속된 후 1992년에 휴전을 하였고, 1997년에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어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1996년 헌법 개정으로 전 대법원장을 수장(총리 고문)과 비정당 선거관리 행정부(Non-Party Care-Taker Government)가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현직 내각이 선거 활동에 간섭하거나 투표 결과를 조작하는 직권 남용 방지를 위해, 의회 해산 후 임명된다. 1996년 6월 총선에서는 아와미 연맹이 다시 승리를 거두며, 셰이크 하시나가 두 번째 여성 총리로 취임했다.

2001년 10월 1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BNP 등의 야당 연합이 여당인 AL에 압승을 거두며, 칼레다 지아가 다시 총리로 취임하였다. 경제 건설을 중시하고 온화한 개혁을 호소하여, 도시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정 [ 편집 ]

2002년 9월 6일에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가 원래 다카 대학의 교수였던 이아쥬딩 아메드 1명 뿐이었기 때문에 투표없이 당선되었다.

2006년 10월, 군의 압력으로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BNP 정권이 퇴진하고 아메드 선거 관리 내각(임시정부)가 발족했다. 임시정부는 부패의 근절과 이슬람 과격파 대책에 임하고 있다. 2007년 1월 11일에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당이 대립하며 정세가 악화되어, 총선이 이듬해 2008년으로 연기되었다. 이아쥬딩 아메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함과 동시에 전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방글라데시는 2008년 12월 17일 0시 1분부터 국가 비상사태를 해제했다.[1] 2년간의 비상사태가 해제된 후 방글라데시에서 7년 만에 처음 치러진 87%의 선거율을 기록한 총선에서 셰이크 하시나 현 총리가 이끄는 연정이 의회 총 300석 중 245석을 확보한 가운데, 제 1야당은 31석을 얻는 데 그쳤다.[2][3]

자연 환경 [ 편집 ]

지리 [ 편집 ]

인도 접경과 갠지스강 삼각주 지역은 지대가 낮지만 미얀마 국경으로 가까워 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 지리적으로 비옥한 갠지스 강 삼각주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반도의 북동쪽 겨드랑이에 위치하기에 방글라데시의 동쪽 국경은 인도차이나반도와 접할 것 같지만, 국경선의 95%는 인도와 접하여 대부분의 방향에서 인도에 싸여져 있다. 남동쪽 말단 일부만 미얀마와 접한다.

방글라데시 국토의 대부분은 인도 아대륙의 벵골만 부근에 형성된 삼각주이다. 이 삼각주를 크고 작은 하천이나 칼이라는 수로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소택지와 정글이 많은 저지대이며, 정글은 벵골호랑이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 남쪽 기슭부, 실롱 고원(메가라야 고원), 동쪽은 트리푸라 언덕과 치타공 구릉, 서쪽은 라쥬모호르 구릉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벵골 만에 접해있다. 동부 및 동남부에 해발 100 ~ 500m의 구릉이 펼쳐진다.

방글라데시 최대의 정글 전둥 반

히말라야에 수원과 서쪽에서 갠지스 강(벵골어로 폿다강), 북쪽에서 브라마푸트라강이 계곡의 거의 중앙에 합류해, 최하류에서 메그나 강에 합류하여 유역 면적 173만km2의 삼각주를 만들고 있다. 삼각주는 매우 인구 밀도 가 높다. 방글라데시의 토양은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해 논경작에 알맞지만, 홍수와 가뭄에 취약하여, 하천이 종종 범람해 많은 피해를 미친다. 국내의 구릉지는 남동부의 치타공 구릉지(최고 지점: 케오쿠라돈산, 1230m)와 실렛주에 한정된다.

북회귀선에 가까운 방글라데시는 열대 기후로, 10월부터 3월까지 겨울은 온난하다. 여름은 3월부터 6월에 걸쳐 고온다습한 시기가 이어지며, 6월부터 10월까지는 몬순이 내습한다. 거의 매년 이 나라를 강타하는 홍수, 사이클론, 토네이도, 해일과 같은 자연 재해는 일시적인 피해에 머무르지 않고, 삼림 벌채, 토양 열화, 부식 등의 원인이 되면서 더욱 큰 피해를 미치고 있다.

국내 최대의 도시는 수도인 다카이다. 다른 주요 도시는 치타공, 쿨나, 라지샤히이다. 치타공의 남쪽에 위치한 콕스 바자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천연의 해변으로 알려져 있다.

기후 [ 편집 ]

세계에서 가장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 중 하나이다. 매년 몬순 홍수와, 사이클론(열대 저기압)이 있다.

행정 구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방글라데시의 행정 구역 입니다.

방글라데시는 8개의 주(division)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의 명칭은 각 주의 주도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4][5] 방글라데시에서 주 다음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은 구(zila, districts)이며 방글라데시에는 64개의 구가 있다. 이것은 다시 우파질라(upazila, subdistricts) 또는 타나(thana)로 나뉜다.

주 벵골어 2011 인구[6] 면적 (km2)[6] 인구 밀도

2011 (명/km2)[6] 주도 바리살주 বরিশাল 8,325,666 13,297 626 바리살 (328,278) 치타공주 চট্টগ্রাম 28,423,019 33,771 841 치타공 (2,592,439) 다카주 ঢাকা 36,054,418 20,594 1,751 다카 (7,033,075) 쿨나주 খুলনা 15,687,759 22,272 704 쿨나 (663,342) 마이멘싱주 ময়মনসিংহ 11,370,000 10,584 1,074 마이멘싱 (407,798) 라지샤히주 রাজশাহী 18,484,858 18,197 1,015 라지샤히 (449,756) 랑푸르주 রংপুর 15,787,758 16,317 960 랑푸르 (343,122) 실렛주 সিলেট 9,910,219 12,596 780 실렛 (479,837) – 144,043,697 147,570 976

주요 도시 [ 편집 ]

순위 시 인구 (2011 센서스)[6] 1 다카 7,033,075 2 치타공 2,592,439 3 쿨나 663,342 4 나라양간지 543,090 5 실렛 479,837 6 퉁기 476,350 7 라지샤히 449,756 8 보그라 350,397 9 바리살 328,278 10 코밀라 326,386

[7]

정치 [ 편집 ]

방글라데시의 국회의사당, 자티요 상샤드 브하반

1991년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을 상징적 존재로 원수로하는 의원 내각제가 확립되었다.

원수 [ 편집 ]

구 영국 식민지로 영국 연방에 가입하고 있지만, 총독을 두지 않고 원수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의례적 직무 만을 수행하는 상징적인 지위이다. 임기는 5년으로 국민 의회에서 선출된다. 그러나 의회와 정부가 대립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면 의회를 해산하고 임시 정부를 발족시킬 권한이 있다.

행정 [ 편집 ]

방글라데시의 빈곤의 원인으로 정부의 허약한 통치력을 들 수 있다. 부패가 심해, 2011년 부패인식지수는 2.7로 세계 120위에 위치하며 2003년의 1.2보다 훨씬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은 변함 없다. 또한 지방 행정이 약하고, 이로 인해 행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을 보조하는 형태로 각종 NGO가 다수 존재하여 개발 기능을 담당하는 형태가 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 최대라고 하는 NGO의 BRAC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적이 있는 그라민 은행 등이 규모도 크고 유명하다.

입법 [ 편집 ]

의회는 단원제로 자티야 상샤드(국회)라고 부른다. 전체 300석이며, 임기 5년 소선거구제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또한 입법에 여성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300석 외에도, 여성 전용 30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2001년 5월에 폐지되었다. 민주화 이후 총선마다 정권이 바뀌었으며,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정착되고 있다. 하지만 의회 정치를 담당하는 정당에 문제가 많다. 선거는 대체로 공정하게 치러지지만, 정당이나 정치 풍토에는 문제가 많다. 각 정당은 하부 정치 조직이 있고, 선거 때마다 그들을 동원하여 선거를 펼친다. 선거 종료 후 패배한 정당은 파업이나 시위에 호소함은 물론, 종종 폭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국제 관계 [ 편집 ]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경을 인도와 접경하고 있으며, 인도는 독립 전쟁 때와 독립시 여당 아와미 연맹이 친 인도 정당이기도 했으므로, 독립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원래 무슬림과 힌두교의 갈등으로 파키스탄에 편입되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관계는 이내 소원화되었다.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은 약간 반인도적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반대로 미국과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존재감이 강해지고 있으며, 중국에서의 수출액은 7년 새 4.5배로 늘었다. 인프라도 방글라데시 최대의 항구 도시 치타공에서 수도 다카로 통하는 간선 도로의 확장 공사를 중국의 지원 아래 길이 190 km 공사 구간 중 70%를 중국 기업이 하청을 받고 있다. 기타, 발전소 건설 및 교량 정비 등 민관공사에 방글라데시에 참여를 강화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기도 했고, 또한 발생시키기도 한 국가이다. 동파키스탄으로 독립했을 때에는 양국으로 많은 난민들이 흘러들어왔으며, 또한 방글라데시 독립 시에도 파키스탄 군의 침공을 피해 100만명 가까운 방글라데시인이 난민이되어 인도로 유입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치타공 구릉지대에서는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어, 이 지역의 불교계 원주민이 인도에 난민으로 유출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는 남쪽 미얀마에서 무슬림 로힝 족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빈곤 국가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거액의 경제 원조를 받고있다. 아시아 개발 은행과 미국, 영국, 세계 은행, 유럽 연합 등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한다. 방글라데시는 남아시아 지역협력협의체(SAARC)와 BIMSTEC의 창립 국가이며, OIC와 D-8에 참여하고 있다.

대한 관계 [ 편집 ]

방글라데시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시수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73년 12월 18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군사 [ 편집 ]

군대는 지원병 제도이며, 병력은 약 14만명이다. 방글라데시 군은 PKO에 적극적으로 인원을 보내고 있다. 방글라데시 군은 과거 몇 번이나 군사 정권을 수립하였고, 지금도 정치에 큰 발언권을 가진다. 2006년 BNP 정권을 퇴진시키고 아메드 선거 관리 내각을 발족시켰다.

경제 [ 편집 ]

다카, 방글라데시 경제의 중심인 메가 시티

IMF에 따르면, 2011년 방글라데시의 GDP는 1130억 달러이며, 일인당 GDP는 678달러이다. 국제 연합 기준에 따라 후발 개도국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8] 2011년에 아시아 개발 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빈곤층은 국민의 75% 이상 약 1억 18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9]

갠지스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세계 유수의 풍부한 토지를 자랑하며, 외부에서 침략도 끊이지 않았다. ‘황금 벵골’이라고 불리던 시절도 엄청난 인구와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의 잠재력은 높지만, 홍수 등의 영향도 있어 현재는 빈곤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방글라데시는 내외를 불문하고 원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인구와 정치 부패 등으로 아직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는 다발성 사이클론과 그에 따른 범람 등의 지리적, 기후적 요인, 능률이 나쁜 국영 기업, 부적절하게 운영되고 있는 항구 등 인프라의 인적 요인, 제1차 산업 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게 증가하는 노동 인구 등 인구 요인, 능률이 나쁜 에너지 이용법과 부족한 전력 공급 등의 자원적 요인, 또한 정치적 내부 투쟁과 붕괴 등의 정치적 요인을 들 수 있다.

2016년에는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서 100점 중 27.1점을 기록하며 심각한 수준을 나타냈다. (가장 기아가 심각한 나라도 50점을 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체 조사 대상인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90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으로도 기아 종식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10]

농업 [ 편집 ]

논농사

국내 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서비스업에 의한 것이지만, 국내 인구 중 62%가 농업에 종사하고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세계 생산량 중 4위)과 황마이다. 쌀 생산량은 세계에서도 상위에 있고, 생산량도 해마다 조금씩 증가하고 있지만, 인구가 많기 때문에 소비도 훨씬 많은 쌀 수입 국가이다.

방글라데시 벼는 우기 전반에 재배되는 아우도, 우기 후반에 재배되고 수확의 중심이 되고있는 아만도, 건기에 재배되는 보 벼의 3종으로 나뉜다. 기후적으로 이모작과 삼모작도 가능하지만, 건기에는 갠지스 강 수위가 낮아지기 때문에 삼모작을 할 수 있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물의 보급과 개량종의 보급으로 특히 건기 보 벼의 농업 생산이 크게 증가하고 그에 따라 오스 벼와 아만 벼의 생산도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이모작과 삼모작이 가능한 지역도 증가하고, 쌀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것이 방글라데시의 ‘녹색 혁명’이라 불리는 농업 생산의 현대화 촉진이다. 녹색 혁명은 국가 정책으로 이루어졌지만, 녹색 혁명은 농가의 설비 투자 지출의 증대를 강요했다. 한편 생산량 증대는 그 부담을 채울 때까지 이르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황마는 농산품으로 제2차세계대전과 1940년대 세계생산량의 80%로 정점을 이뤘고[11], 1970년대조차도 수출 수입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폴리프로필렌에 밀려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황마에 이어 수출 농산품은 홍차이고, 차의 명산지로 알려진 인도 아삼 주에 인접한 북부 실렛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다. 19세기에는 쪽(인디고)의 세계적 최대 산지였지만, 화학 염료의 발명과 보급으로 생산은 급감했다.

산업 [ 편집 ]

방직산업이 최근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낮은 임금으로 매년 156억 달러의 방직물을 수출하고 있고 이는 방글라데시 전체 수출규모에 80%에 육박한다. 그러나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공급망 인프라를 확보하지 못하고, 잦은 홍수와 자연재해로 인해 성장에 제한받고 있어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12]

사회 [ 편집 ]

주민 [ 편집 ]

주민은 벵골어를 사용하는 벵골 족이 대부분으로, 인구의 98%를 차지하고 있다.[4] 그 외에도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비하르 주 등 인도 출신인 비(非)벵갈인 이슬람교도가 2%를 차지한다. 그 밖에 남동부의 치타공 구릉지대에는 10개 이상의 민족이 존재한다. 이들 중 소수민족인 줌머족의 경우, 방글라데시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일부 줌마족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은 민중운동으로 이에 저항하고 있다.

인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방글라데시의 인구 입니다.

방글라데시는 싱가포르나 바레인 등 면적이 작은 소규모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이다. 방글라데시의 총 인구수는 2008년 기준으로 약 1억 5354만 6900명으로, 이 수치는 방글라데시보다 영토가 훨씬 넓고 광활한 러시아보다 약 천만명 정도가 더 많다(러시아의 인구는 약 1억 4천). 면적은 그리스보다 10% 더 크지만, 인구는 14배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다. 면적 1 km2당 인구는 2004년 현재는 982 명으로 인도네시아의 자와섬과 비교된다. 인구 폭발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1992년부터, 산아 제한에 의한 인구 조절을 추진하면서 인구 증가를 억제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성과가 올라가고 있지만, 인구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종교 [ 편집 ]

이슬람 바이툴 무카람 사원

종교는 이슬람교가 86.6%, 힌두교가 12.1%, 불교가 1% 크리스트교가0.4% 기타종교가 0.3%이다. 세계에서 무슬림이 많은 국가 중(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에서는 네번째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데, 그 수는 무슬림이 소수인 인도의 무슬림 인구보다 조금 적다. 기타 종교에는 불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 방글라데시 성공회, 부족종교가 포함된다. 이 나라의 종교 분쟁은 심각하여 같은 무슬림인데도 비하리 부족의 경우 방글라데시 시민권을 거부하여 차별받고 있다. 또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기독교인 등의 소수 종교인들도 방글라데시 국민임에도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언어 [ 편집 ]

방글라데시 사람 98% 이상이 벵골어를 모국어로 하며 공용어이다.[13][14] 문자는 데바나가리 문자와 비슷한 벵골 문자를 이용한다. 유일한 공용어는 벵골어이지만 교육기관에서는 영어 사용도 허용되어 있다. 일부는 미얀마어, 우르두어, 아랍어, 힌디어도 사용된다. 전반적으로 공용어인 벵골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다. 모국어의 날이 있고, 파키스탄과의 독립전쟁의 계기로 파키스탄의 우르두어의 사용이 강요된 적이 있었다.

교육 [ 편집 ]

교육 제도는 초등학교 5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2년 5-5-2제이다. 식자율은 2009년을 기준으로 53.5%로 의무교육은 초등학교 5년간이다. 취학률은 2000년 95%에 달했고, 그에 따라 문맹률도 서서히 개선되었지만, 아동의 퇴학율이 30%에 달해 또한 수업이나 교육환경의 질도 낮아서 아동의 학력향상이 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방글라데시의 문맹율은 아주 높다. 택시기사들은, 호텔에서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호텔 이름조차 못 읽는 경우가 많으며, 총선거가 실시될 때 벽보나 홍보 책자에 실리는 후보자를 구분하기 위해, 각색의 동물이나 물건(예컨대, 호랑이, 망고, 걸상, 비행기 등)의 그림으로 구분하여 적어야 한다. 방글라데시 민중들에게 배움이 없다는 현실은 곧 정치적, 경제적 부정부패과 비리의 온상이 된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문해율은 47% 정도로 다섯 명 가운데 두 명만 글을 읽을 수 있다.

방글라데시 이슬람 건축:

교통 [ 편집 ]

보트는 주요 교통 수단이다.

중요 교통로는 수로이며 약 7,240km 정도에 이른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데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기적으로 다닌다. 주요 항구는 항구 지역인 동부의 치타공에 있다. 다른 항구로 서쪽 챠루나 항구가 크고, 다카와 바리살, 나라양간지 등에는 규모가 큰 하항이 있다.

육상교통은 덜 발달된 상태로 국영 철도인 방글라데시 철도가 운영하는 약 2,900km 길이의 철도가 있다. 영국령 시대에 부설된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3개국에 나뉘어 있다. 방글라데시쪽의 철도는 태반이 1,000mm 게이지이다. 1960년 이후 계속적으로 전화(電化)보다는 디젤기관차를 채용하는 움직임이 강하다.[15]

차량은 좌측통행을 하며, 대중교통 수단으로 인력거(릭샤)가 있고 바이크를 개조해 만든 2인용 베이비택시와 10인용 템포는 공해의 주범으로 퇴출중이다. 가스 자원이 풍부하므로 현재 소형 택시의 대다수는 동력으로 CNG가스를 사용하는데, 이 약자가 해당 소형차량을 부르는 명칭이 되어 CNG라 칭하기도 한다.

다카에 샤잘랄 국제공항과 치타공에 샤아마나트 국제공항이 있다. 샤잘랄 국제공항을 기반으로 하는 항공사는 비만 방글라데시 항공과 US-방글라 항공 등의 항공사가 운행하고 있다. 방콕, 콜카타 등의 지역을 운항하고 있으며, 국내선은 치타공, 제소르, 실렛 등을 운항하고 있지만,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용객은 적다.

출처 [ 편집 ]

미국 국무부 방글라데시 종교의 자유 보고서 발표 상세보기

미국 국무부는 5.29(화) “2017년도 국제 종교의 자유 보고서”를 발표한 바, 주재국 종교의 자유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1. 종교의 자유 존중 관련

(1) 종교 분포

ㅇ 방글라데시 인구 1억 5,782만 명(2017.7월) 중 이슬람교(수니파) 89%, 힌두교 10% 및 기독교, 불교 등 소수 종교 1%로 구성

–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소수 종교를 믿으며 Chittagong Hill Tracts(CHT) 및 북부지역에 밀집 거주하고 있음.

(2) 법체계

ㅇ 이슬람교가 국교이나 세속주의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 모든 종교 활동에 대한 동등한 지위, 권리 및 자유 부여

– 법적으로 국가는 특정 종교에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종교부 2017-18 회계연도 예산 8,400만 미불 중 98.10%가 이슬람교 재단에 할당되는 등 국교가 우선시됨.

ㅇ 2001년 귀속재산법에 의거하여 정부는 국가의 적으로 분류된 개인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음.

– 정부 당국은 소수 종교 신도들이 1965 인도-파키스탄 전쟁 피난을 가면서 버리고 간 토지를 몰수할 때 상기 법을 인용함.

ㅇ 주재국은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가입국임.

(3) 교육

ㅇ 공립학교 3학년~10학년까지 종교수업이 필수교육과정이며 각 종교별로 수업을 받음.

ㅇ 하지만 근래 주재국 교육부는 벵골어 교과서에서 비(非)무슬림 작가들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고 비종교과목에 이슬람교 관련 내용을 추가하는 등 교과서의 상당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보고됨.

– 정부의 교과서 개정 결정에 이슬람교 교육 압력단체인 Hefazat-e-Islam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보도됨.

ㅇ 2017.4.11. Hefazat-e-Islam 대표 주도 하에 개최된 약 350명의 이슬람교도 지도자들과 Hasina 주재국 총리의 면담에서 Hasina 총리는 비인가 사립 이슬람교 교육기관인 Qawmi Madrassah의 학위를 인정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동 교육기관 졸업자들은 정부기관 취업이 가능하게 됨.

– 언론은 차기 총선 승리를 위한 지지를 얻기 위한 조치로 해석함.

2. 이슬람 극단주의 관련

ㅇ 2017년 테러단체 ISIS, 알카에다 남아시아지부(AQIS)에 의한 테러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음.

ㅇ 주재국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예방하고 회교 사원 내 자극적인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들에 설교 내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였고, 2015년 블로거 피살 사건 용의자이자 알카에다 연계 테러조직원 2명을 체포하는 등 이슬람 극단주의 처치에 주력하고 있음.

ㅇ 또한, 정부는 힌두교 축제 Durga Puja, 크리스마스, 부활절, 석가탄신일 등 종교 축제 및 행사 계기에 보안대를 배치하여 폭력 예방에 주력하고 있음.

ㅇ 다만 경찰청은 2016.7월 외교단지 내 카페에서 비무슬림 및 외국인을 겨냥한 테러사건을 기소하지 않고 작년 말까지 수사를 완결하지 않는 등 사후 수사 및 테러리스트 처벌이 미비함.

다. 소수 종교 인구에 대한 토지 몰수 관련

ㅇ 소수 종교 및 소수 민족 인구에 대한 토지 소유분쟁, 강제 철거가 지속되고 있으며, 산업개발구역과 같이 토지가치가 상승한 곳에서 토지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됨.

– 소수 종교측은 지역 경찰, 행정당국, 정치인들이 금전적 이득이나 정치적으로 막강한 이익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토지전용(轉用)을 허가하고 있다고 주장함.

ㅇ 토지 분쟁은 불균형적으로 소수 종교 인구에게 높게 발생하며, 이로 인한 사망자, 사상자 및 재산피해 발생

– 작년 힌두교인 및 힌두교인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사망자 1명, 사상자 76명, 종교건물피해 166건, 재산피해 29건 발생

– 작년 1~10월간 수집된 959건의 소수 집단 권리 위반 사례로 살인, 살인미수, 살해협박, 폭행, 주거지, 사업지 및 종교지 파괴, 성폭행, 납치 등이 있으며, 주요 동기는 토지 몰수 혹은 금전 갈취인 것으로 파악됨.

ㅇ 정부는 법률 개정 등을 통해 토지 분쟁 해결에 노력하고 있음.

4. 로힝야족

ㅇ 주재국내 최다 외국인 인구는 로힝야족(90~100만 명)이며, 이 중 대부분이 무슬림이며, 약 500명만이 힌두교도인임.

ㅇ 주재국 정부는 Muslim Aid를 포함한 몇몇 종교 단체들의 Cox’s Bazar 지역 로힝야족 구호활동을 불허함.

ㅇ 주재국 정부는 불교도인에 대한 로힝야족의 보복을 예방하기 위해 치타콩 및 다카에 위치한 불교 수도원 보안을 강화하였다고 보도됨.

– 하지만 주재국 내 불교인구는 로힝야족 사태에 분노한 무슬림인구의 보복을 우려하고 있음.

해당 보고서 링크 : https://bd.usembassy.gov/bdirf2017/

정식 명칭은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으로, 영연방의 하나이다. 벵골만에 접해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가 580㎞이다. 면적은 14만 3998㎢, 인구는 1억 6895만 7745명(2015년 현재), 수도는 다카(Dacca)이다. 주민은 벵골인이 인구의 98%를 차지하며, 언어는 벵골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국교인 이슬람교가 83%, 힌두교 16% 등이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로, 인구의 78%가 농업에 종사하며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로 경제개발예산의 80% 이상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연안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천연가스가 생산되고 있으나, 좁은 국토에 과다한 인구와 높은 인구성장률, 그리고 산업기반의 허약 등이 경제성장의 제약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2057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1,286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공화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300석)이다. 주요 정당은 방글라데시 민족당, 아와미연맹, 국민당 등이다.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선교지 소개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 정리 및 보고

도0수, 이0이 선교사

방글라데시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개관

공식 국가명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수도 다카(Dhaka) 인구 약 1,500만 명

면적 147,570㎢(한반도의 약 2/3)

기후 아열대 몬순(sub-tropical monsoon)

인구 164,098,818명(2021년 7월.UN), 세계 8위, 인구밀도 1265 per ㎢

민족구성 벵갈인 98%, 그 외 50개 이상 민족 비하리, 차크마, 무갈, 파탄족 등

종교 이슬람교 89.1%, 국교, 힌두교 10%, 그 외 불교 1%, 기독교, 기타 등

언어 벵갈어 90%(공용어), 힌두어 8%, 영어(통용)

화폐 타카(Taka)

GDP 약 3,174억6,500만 달러(세계 40위)

도메인 BD

환율 US$1 = TK84.83 (’20. 12월)

시차 서울 -3시간(GMT 기준+6시간)

국가 번호 +880

정식 명칭은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으로 벵골만에 접해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가 580㎞이다. 면적은 147,570㎢(한반도의 약 2/3), 인구는 164,098,818명(2021.7), 수도는 다카(Dhaka)이다. 주민은 벵갈인이 인구의 98%를 차지하며, 언어는 벵갈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국교인 이슬람교가 89%, 힌두교 10% 등이다. 기후는 고온 다습한 열대성 기후로, 인구의 78%가 농업에 종사하며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로 경제개발예산의 80% 이상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2. 지리 및 기후

방글라데시 국토 대부분은 인도 아대륙의 벵골만 부근에 형성된 삼각주이다. 이 삼각주를 크고 작은 하천과 수로(칼)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벵골 호랑이 서식지인 정글과 늪이 많은 저지대이다. 북쪽은 히말라야산맥의 남쪽 기슭부와 실롱 고원(메가라야 고원), 동쪽은 트리푸라 언덕과 치타공 구릉, 서쪽은 라쥬모호르 구릉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벵골만에 접해있다. 동부 및 동남부에 해발 100~500m의 구릉이 펼쳐진다.

히말라야의 수원과 서쪽에서 갠지스강(벵골어로 폿다 강), 북쪽에서 브라마푸트라강이 계곡의 거의 중앙에 합류해 최하류에서 메그나강에 합류하여 유역 면적 173만㎢의 삼각주를 만들고 있다. 삼각주는 매우 인구 밀도가 높고 홍수와 가뭄에 취약하여, 하천이 종종 범람해 많은 피해를 미친다.

북회귀선에 가까운 방글라데시는 열대 기후로 10월부터 3월까지 겨울은 온난하다. 여름은 3월부터 6월에 걸쳐 고온 다습한 시기가 이어지며, 6월부터 10월까지는 몬순이 내습한다. 거의 매년 찾아오는 홍수와 사이클론, 토네이도,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는 삼림 벌채, 토양 열화, 부식 등의 원인이 되면서 장기적 피해를 미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 중 하나로, 매년 몬순 홍수와 사이클론(열대 저기압)이 있다. 국내 최대의 도시는 수도인 다카이다. 다른 주요 도시는 치타공, 쿨나, 라지샤히이다. 치타공의 남쪽에 위치한 콕스바자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천연의 해변으로 알려져 있다.

3. 역사

1) 근대 이전

①B.C 6세기경 아리안족이 현재 방글라데시가 위치한 갠지스강 하류 벵갈 지방으로 진출하여 선주민 드라비다족과 함께 벵갈인 형성

②B.C 5세기 중엽 이후 인도대륙왕조 지배를 받았고, 8세기 중엽 팔라 왕조 이후 불교문화 융성

③13세기 이후 벵갈 지방이 이슬람교 세력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회교문화 발전

④1576년 무굴 제국이 벵갈 지방을 정복하고 통치를 시작한 이래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구가

2) 영국 식민지 시대

①1757년 영국이 벵갈지방을 포함한 인도 전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함에 따라 영국 식민지로 편입

②1905년 영국은 반영세력 분열을 위해 힌두교가 다수인 서 벵갈 지방과 이슬람교가 다수인 동 벵갈지방(현 방글라데시)으로 분리 통치할 것으로 공표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1911년 동 분할령을 철회

3) 동파키스탄 시대

①1947. 8. 14. 동 벵갈 지방(현 방글라데시)이 상이한 종족과 언어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공통점으로 인해 파키스탄의 11개 주 중 1개 주(파키스탄)로 독립

②독립 이후 정치·경제·사회적 차별정책, 이질적 요소 존재 등으로 동파키스탄 분리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1952. 2. 21. 벵갈어 운동을 효시로 반정부 시위 전개

③1971. 3. 26. 독립선언 및 내전 발발, 12.16 전쟁 승리 및 방글라데시 독립

4)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①독립 이후 초기 정부(1972~1981)→② 쿠데타 및 군부정권(1981~1990)→③ 의회 민주주의로의 복귀:Kaleda Zia 총리 1기 집권기(1991~1996)→Sheikh Hasina 1기 집권기(1996~2001)→Kaleda Zia 2기 집권기(2001~2006)→Sheikh Hasina 총리 2기 집권기 이후(2008년~)

4. 정치

1)정부 형태

①정부 형태: 내각책임제(’91.9월 개헌)

②정당(의석수)- 단원제(의석 350, 임기 5년)

③대통령: Md. Abdul Hamid(2013. 3. 24. 취임, 2018. 4. 24. 연임)

④총리: Sheikh Hasina(1996년, 2009년, 2014년, 2019년 네 번째 총리 수임 중)

⑤여당(AL) 당수: Sheikh Hasina 총리/제1야당(BNP) 당수 : Khaleda Zia 총재

2)국내정세

①야당(BNP) 참여하에 ’18.12.30. 총선 실시, 야당 탄압 및 불공정 선거 결과 Hasina 총리가 이끄는 아와미리그(AL) 3연속 집권, 의회 내 견제 세력 부재 및 야당 세력 위축으로 집권여당 독주 지속

②BNP 주도 야당 연합은 총선의 불공정행위를 이유로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요구, BNP Zia 총재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이 여러 민·형사 혐의로 기소당하고 야당 주최 평화 시위가 불허되는 등 야당의 정치 활동이 제한되고 있음

③2013년 이후 세속주의 블로거 연쇄 피살 사건, 외국인 피살 사건 등 테러 빈발로 치안이 불안정했으나 정부의 강력한 통제 및 처벌로 2017년 이후 대규모 테러 사태 미발생, 공무원 고용할당제, 교통안전 관련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

5. 경제

①총 GDP: 2,862억 불(2018)

②1인당 GDP: 1,736불(2018)

③교역: 956억 불(2018) – 총수출: 366억 불, 총수입: 590억 불

④2018.3월 최빈개도국(LDC) 졸업을 위한 요건 최초 충족(2024년 최빈개도국 졸업 가능)

⑤세계 경기침체에 따른 수출 부진과 국내 정정 불안 등에도 불구, 2011년 이후 지속적으로 6% 이상 경제성장-6.3%(2014), 6.8%(2015), 7.2%(2016), 7.1%(2017), 7.1%(2018)

6. 사회, 문화

1) 인구 및 민족

①총인구: 164,098,818명(2021.7), 인구밀도: 1,103명/㎢

②방글라데시는 여타 인근국과는 달리 국민의 대부분이 벵갈족인 단일민족으로 구성

③고립된 국경지대(특히 치타공 산악지대)에는 Chakma, Mogh, Mru, Bom, Mizo, Pankhu, Garo 약 50여 개의 소수민족 거주 -소수민족 구성비(전체 인구의 1.8%)가 낮아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

④모나코, 싱가포르 등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인구밀도가 세계 1위

2) 최근 대두되는 사회적 이슈

①이슬람 근본주의 강화: 최근 수년간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을 겨냥한 테러 사건이 지속됨에 따라 방글라데시 치안 당국은 2015년 이래 대대적 대테러 작전을 진행하고 있으나, 치안 불안이 계속되는 상황, 특히 사회 전반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강화 경향에 따라 기존 온건 야당 세력의 약화와 함께 근본주의 강경 세력이 약진

②로힝야족 문제: 미얀마 로힝야족 반군(ARSA)의 미얀마 라카인주 군경 초소 공격(2017.8.25) 이후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군부의 무차별 탄압으로 로힝야족 약 70만 명이 주재국 Cox’s Bazar 지역으로 유입되어 임시 거주 중이며, 방글라데시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는 상황

7. 종교

1988년 6월 8차 개헌 후 헌법상 회교를 국교로 규정했다. 전 국민의 약 88.4%가 이슬람교 신자이며 그 밖에 힌두교, 불교, 기독교 등이 있다. 이슬람교 종파는 수니(Sunni)파이며 전국적으로 20만 개 이상(수도 다카 내 2천 개)의 모스크가 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방면에서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힌두교는 약 10%를 차지하고 있는데, 과거 인도 시절의 주요 종교였다. 힌두교는 애니미즘 적인 경향으로 38만 개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과격 모슬렘들의 공격대상으로, 기독교를 피난처로 삼고, 때에 따라서는 집단으로 개종하기도 한다.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는 아직도 힌두적 요소가 있다.

세계 최대 이슬람 집회-이즈떼마

매해 1월 국제 이슬람 집회 ‘비샤 이즈떼마(Bishwa Ijtema)가 방글라데시 수도 인근 통기에서 열린다. 비샤 이즈떼마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하지(Hajj)'(이슬람교의 성지순례)가 끝난 후 3일간 진행되는 세계 최대 이슬람교 종교집회로, 규모 면에서도 엄청나다. 매년 방글라데시 등 세계 150개국 신자들이 참여하고, 이슬람교 200~500여만 명이 참석하는 두 번째로 큰 이슬람 모임이다.

8. 방글라데시 선교

1)선교 현황-기독교 현황(개신교 중심)

1793년에 윌리엄 캐리(영국 최초의 해외 선교 파송 단체인 1792년에 설립된 침례교 선교협회에 의해 파송, 벵골지역에서 사역) 입국, 1795년 현재 방글라데시 내에 있는 디나스푸르에 침례선교협회 선교지국을 설립하였다. 1816년 수도 다카에 선교지국이 개설되었고, 벵갈어 성경 또한 번역되었다. 200여 년의 세월 동안 뱅골지역 이슬람교와 힌두교들 사이에서 진행된 침례교선교협회의 사역은 방글라데시 최대의 기독교 단체인 침례교 연합을 만들었다. 19세기에는 영국선교회와 미국과 유럽 선교회가 방글라데시 선교에 참여하였다. 방글라데시 선교는 기독교는 사회복지와 교육, 문화, 의료선교를 통한 힌두교의 하층민과 소수 부족민들의 집단 개종이 특징이다.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후 활기를 띤 기독교는 1980년대에는 정부의 이슬람 정책 강화로 인한 선교사 견제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88년에는 이슬람을 국교선정 후 외국인의 직접선교가 불가능해 구호와 봉사 선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규제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 동안 교회는 두 배로 성장했다. 방글라데시 성경통신학교, 엠마오 성경연구통신학교, 국제 통신 연구소 등이 설립되어 문서 선교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벵갈어뿐 아니라 여러 부족 언어로 성경을 보급하고 있다. 현재 약 50개 교단 및 선교단체와 약 300명의 선교사가 있으며, 이외에도 파악되지 않은 상당수까지 포함하면 약 44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른 선교사 대 불신자의 비율은 선교사 한 명당 23만 명 정도이다.

2) 선교의 중요성

①방글라데시-서남아 무슬림 권역이 선교의 영역에서 중요한 이유

•세계 무슬림의 1/3이 거주하는 최대 무슬림 블록이며 한국 이슬람에 지배적 영향을 주는 지역인 동시에, 가장 적게 기독교 선교를 지원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②왜 한국교회의 전방개척적인 선교를 위해서 방글라데시-서남아 무슬림 권역이 최우선 순위 권역이 되어야 하는가?

•이 권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미전도 종족 전방이다. 5억의 인구, 근대 국가로서 막 형성되고 있는 기회의 땅이다. 힌두권과 이슬람권은 한국교회의 주요한 미전도 종족, 전방 개척권으로 대두되었으나 이 문화권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는 거의 전무하다. 한국선교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돌파해야 할 과제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무슬림과 힌두교인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방글라데시 선교의 성공은 무슬림 및 힌두 지역의 좋은 선교전략 모델이 될 수 있다.

3)방글라데시 선교의 문제점(과제)

①정부와 비정부기구(NGO)들의 물질과 재정 위주 후원은 뱅골인들을 외부 의존적 민족으로 만들었으며, ‘먹기 위한 그리스도인’을 낳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②NGO를 통한 사역은 직원 고용을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현지인 사역자를 양육하지 못해 현지교회가 성장, 성숙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또한 NGO를 통해서는 종교활동이나 복음전파를 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③현지의 문화와 정서와 삶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교회 건축과 재정 지원은 선교사에게 재정적으로 종속되어 자립하지 못하는 방글라데시 교회와 성도를 양산하고 있다.

④무슬림이나 힌두교인의 기독교 개종은 가족, 사회 및 모든 경제 활동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며, 개종 후의 성도는 필연적으로 선교단체에 의존하게 된다. 단일 부족이나 계급에 집중한 맞춤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선교단체나 교회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다.

⑤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대도시에 몰려 있어 국경 지역 소수부족들과 나마수드라 계급(천민 계급)은 간과되고 있다.

⑥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서구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늘어나고 있다. 국가도 정책적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4)선교전략

①무슬림권 선교는 위험성과 복음 전도의 어려움 때문에 선교사 스스로의 비전과 확신이 확고해야 한다. 어느 전략보다 앞서 선교사 자신의 신앙적 영적 돌봄이 필요하다.

②방글라데시에 머물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사회 개발 활동 참여로, 계속적인 개발과 구제사업을 통한 복음 전도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기독교 단체의 원조와 지역개발사업이 단순히 식량 제공을 넘어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③방글라데시는 이슬람과 힌두가 공존하여 살아가는 국가이다. 이에 선교 대상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교의 전략과 활동이 달라진다.

④방글라데시의 15세 미만 인구는 45%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린이 중심의 지속적인 교육 사업으로 복음 전파하는 것이 보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에 반발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면 보다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⑤잦은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의료 및 구제 사업을 통한 복음전파가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⑥방글라데시의 핵심선교 전략은 한국 내에 있는 7천 명의 방글라데시 근로자 선교에 있다. 2천 명의 연수생 이외에 불법체류 중인 5천 명에 대한 사역은 방글라데시 국내사역 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밖에도 현지인 지도자 양성, 신학교육, 교회개척, 의료, 매스컴, 문서 등을 통한 선교, 또한 방글라데시 지도자들의 한국교회 목회 현장 답사 선교, 단기 선교, 부녀자들 대상의 선교 전략 등이 있다.

기도 제목

방글라데시의 종교 ㅣ 이슬람교

1. 이슬람 전래

7세기에서부터 약 3세기동안의 인도는 외부의 침입이 없이 평화로운 시대였다. 부의 축적으로 생활은 매우 풍족하였으나, 정치 조직은 미약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인도라는 국가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국가정치는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특히, 왕의 이익만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때를 틈타 이슬람교도들은 중앙아시아의 통상로를 따라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신드지방을 병합했고, 10세기말에는 펀잡지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1001년에는 술탄 마하멜이란 사람이 이슬람의 대군을 이끌고 전면적으로 인도를 공략하여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후 1192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슬람교도들은 인도를 완전히 정복하고, 1205년에는 인더스 하구로부터 갠지즈 하구에 이르는 부분을 석권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도에 들어오게 된 이슬람교는, 문화적으로 발전했던 이란에서 성장한 이슬람교로 대부분이 고행에 의한 신인합일을 주장하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짙은 수피파였다.

12세기에 들어 인도에 이슬람왕국을 세워 계몽운동을 펴며 굳건한 기초를 다진 이슬람교는 13세기 이후에는 인도사회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어 텔리왕조와 무갈왕조를 탄생시켰다.

2. 이슬람교의 역사

방글라데시 이슬람교의 역사는, 곧 인도 내의 이슬람교의 역사와 같다.

nbsp;이슬람교는 인도로 들어오면서 기존해있던 힌두문화와 많은 융합을 이루면서 인도적 문화변용을 이루었다.

16세기 전반에 무갈제국을 이루어 이슬람교를 주축으로 북부인도를 지배했던 이들은 제3대 악바르황제때 가장 융성하여 이슬람교의 전성기를 맞았다.

악바르황제는 종교적 인격을 강하게 지녔고, 타종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했다. 이렇게해서 외래의 정복왕조가 인도의 토착세력으로서 기반을 굳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후 이슬람교는 힌두교의 베다사상과 불교의 영향으로 혼합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어 상징적이고 예술적으로 변하여 감정과 경험에 치중하게 되었다.

자연히 이들은 치유의 신비요법과 미신, 주술, 비정통적인 관습 등으로 민간생활을 주도하며 대중종교로 확산하였다.

이들은 지역의 관습과 신앙과도 타협하며 인도의 천민층을 개종시켰다.

이렇게 되자 인도에 들어 온 이슬람교 세력은 종교적, 정치적인 세력 중심지와 지리적으로 격리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차차 세속화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8,19세기에 울라마를 중심으로 서서히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힌두교나 불교에서 받은 혼합주의와 미신들의 영향에서 이슬람교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14세기의 이슬람교사상을 침식 당하지 않게 이슬람 신앙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를 재확립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벌인 자들은 일반적으로 행동주의자, 적응주의자들이었으며 군사적 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근대화운동으로 번져 서방에 대항하고,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합법적 정부를 세우고자 이슬람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특히 사이드 아마드 칸은 인도의 이슬람교를 영국세력과 연결시켜 인도 이슬람교의 몰락을 막아 보려고 애썼으며,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이슬람교에 도입하려고 하였고, 이에 따라 합리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이슬람교 사회의 정치체제에 위기가 닥치자 좌절감을 경험한 세대의 욕구에 응답하기는 했으나, 급진적이고 감정적인 이슬람 사상에 밀려 났다.

이슬람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한 익발은 이슬람교가 화해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자 인도의 지성주의적인 힌두교 밑에서 이슬람교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는 이슬람교는 역동적이며 창조적 종교이며 공동체적 종교임을 강조하였고, 평등사상의 개종 없는 공동체를 부르짖어 사회참여의 적극성을 띠게 하였는데, 이에 따른 사상이 전체 이슬람교도들에게 확산되어 이슬람교의 정체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익발이 시작한 이슬람교의 국가건설은 이슬람의 결속을 위해 정치운동을 시작했으며,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에 이슬람교도들도 자신의 공화국을 갖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치적,경제적 문제로 다시 동.서 파키스탄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각각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이슬람교의 영향

방글라데시에 있어서의 이슬람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다.

그들은 지나치리만큼 동일성과 통일성을 강조한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루에도 여러번씩 반복하며 같은 시간에 수백만의 사람이 같은 기도를 외우고 매년 순례의 길에서 만난다.

함께 예배 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순례하는 거대한 공동체인 것이다.

이 이슬람교가 방글라데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한 것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방글라데시는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하여 이룩한 이슬람교 국가로서 민족적, 종교적 색채가 강한 나라이다.

파키스탄의 정치적,경제적 착취와의 경쟁 속에서 이들을 단합시킬 수 있었던 것도 지역적, 종교적인 힘 때문이었다.

이러한 힘은 이슬람교를 적극 지지하는 정당이 대부분의 방글라데시 의회의 의석을 차지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중동의 산유국들의 막대한 원조는 방글라데시에 대한 압력도 가능케 하여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의 영향은 정치, 경제 및 사회, 문화와 더불어 그들의 한 순간의 삶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엄연히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에서 타종교에의 개종은 목숨을 건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들의 개종은 부모, 친척, 친구로부터의 이탈이며 직장에서의 추방이다.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해서 사회에서 버림받고 가족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이슬람교는 방글라데시에 있어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왜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 다카 무슬림. ⓒ이병한

ⓒworldatlas

▲ 치타공 항구. ⓒ이병한

▲ 로힝야 족 난민 캠프. ⓒ이병한

ⓒ이병한

방글라데시는 혁명 국가였다. 68 혁명이 산출한 유일한 현실 권력이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표방했다. 일괄 ‘인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국명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이라 했다.더불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였다. 종교적인 근대 국가를 표방한 파키스탄과 척을 졌다. 종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신생 국가로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파키스탄 건국이 1947년이고, 이스라엘은 1948년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는 성/속 분리, 정/교 분리를 공식화했다. 이슬람이라는 보편 문명 대신 민족 문화를 앞세운 것이다. 파키스탄의 펀자브와도 다를뿐더러, 인도의 서벵골과도 차별성을 지니는 ‘고유한 민족성’을 창달해야 했다.다카가 대타항으로 삼은 것은 콜카타이다. 콜카타는 영어 교육에 익숙한 엘리트주의의 산실로 지목했다. 브라만주의의 유산도 남은 힌두 도시라고 폄하했다. 반면 다카는 ‘혁명 도시’였다. 민중주의, 인민주의, 토착주의를 강조했다.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유산은 모두 기각시켰다. 전자는 봉건주의로, 후자는 제국주의로 배타했다. 오로지 벵골 민족주의만을 높이 기렸다. 1906년 타고르가 지은 “My Golden Bengal”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삼았다. 제국에서 국가로, 보편 문명에서 민족주의로, 전형적인 서구형 근대화의 궤도에 올라탄 것이다.곧장 국어 공정과 국사 공정이 개시되었다. 페르시아도 영어도 우르두어도 공론장에서 사라졌다. 벵골 어의 기원인 산스크리트 어마저 배척당했다. 벵골 어 전용론이 득세했다. 국사는 단연 민족 해방사로 채워졌다. 영국 제국주의, 힌두 근본주의, 파키스탄 패권주의에 맞서 싸운 ‘100년의 고난’을 영웅적으로 기록했다. 벵골 어 운동을 주도한 문인들과 전쟁을 이끌었던 군인들을 주인공으로 위인 전기도 편찬했다.남아시아 현대사도 바로 세우려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1947년을 분기점으로 삼는다면, 방글라데시는 1971년을 획기로 친다. 1971년 전쟁 또한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아니라, ‘방글라데시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부른다. 1971년에 가서야 남아시아에 잔존하던 제국주의/식민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세 개의 독립 국가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이러한 시대 구분법을 ‘탈식민주의적인 도전’이라며 열변하는 다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앞에서 나는 대놓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분명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복합성을 이해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더라도 아무리 곰곰 따져보아도 20세기 남아시아의 획기는 1947년인 것 같다. 1947년의 대분할이 없었다면, 1971년의 소분할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혁명 국가의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많은 제3세계 신생 국가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처지는 더욱 엄혹했다. 1971년 전쟁으로 1947년 이후 건설된 사회간접시설마저 죄다 파괴되었다. 다카 대학교 학생을 비롯한 고급 인력의 손실 또한 막대했다. 서벵골로 피난 간 사람들 가운데 살길이 막막한 이들만 방글라데시로 귀환하고, 재력과 학력을 갖춘 이들은 콜카타에 남는 경우가 더 많았다.방글라데시의 지도자들 또한 국정 운영에 미숙했다. 동파키스탄 시기 중앙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탓에 훈련과 숙련이 모자랐다. 거버넌스는 부실했고, 민간 역량도 부족했다. 자연이 자비를 베풀지도 않았다. 1974년 대홍수가 난다. 대기근이 잇따랐다. 총체적 난국이었다.결국 파키스탄 시절과 비슷한 경험이 이어진다. 군부가 나섰다. 1975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얄궂게도 1970~80년대 방글라데시의 궤적은 1950~60년대 (동)파키스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규모가 축소된 채 반복되었다. 군부의 무력을 통해서만이 간신히 질서가 유지되었다. 군사 정부가 물러난 것은 1990년이다.2016년, 건국 이념 전부가 흔들리고 있다. 사회주의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겠다. 민주주의도 위기다. 선거라는 요식만 남았다. 양대 정당 모두 ‘봉건적’이다. 각기 다카와 치타공에 거점을 둔 지역 할거 정당이다. 정당 문화도 후지다. 토호들의 가문 정치, 세습 정치가 만연하다. 애초 자본과 노동, 보수와 진보라는 정당 정치가 작동하기 힘든 토양이다. 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이고, 노동자 계급은 주로 중동에서 일한다. 생활 세계는 압도적으로 이슬람을 따른다.거버넌스의 부실이 뜻밖의 공간을 열어주기도 한다. 기층 단위에서 비정부기구(NGO)의 활약이 눈부시다. 대표적인 것이 그라민 은행이다. 빈곤 여성을 위한 소규모 융자를 제공했다. 그 창의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벵골은 노벨 문학상(타고르), 노벨 경제학상(센), 노벨 평화상(유누수) 수상자를 배출한 이례적인 지역이다.그러나 현장에서 관찰하니 과장의 혐의가 없지 않다. 1억6000만 명을 감당하기에는 그야말로 소규모이다. NGO의 뜻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비정부기구이다. 정부와 생산적인 협업이 이루어질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NGO의 역할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1억 명이 넘는 인구가 하루 2500원 남짓 수입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해결하는데 NGO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의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그러나 방글라데시도 전 지구적이자 동시대적인 현상,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앓고 있다. 민주인가 독재인가가 본질이 아닌 것도 같다. 대다수 방글라데시 인에게 공화정과 군주정, 민주정과 군사정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항만에 배가 들어오고,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다.내일이 오늘보다 낫지는 않을지언정,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지속될 것이라는 ‘항상성’이 가장 긴요하다. 진보와 발전이 아니라 항산과 항심을 원한다. 대중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이 예외적으로 지속된 20세기의 매우 이례적인 정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다.부실한 민주주의를 매워주었던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또한 갈수록 모순이 커지고 있다. 당장 제2도시 치타공부터 불만이 팽배하다. 놀랍게도 치타공 시민의 다수는 벵골 인이 아니었다. 복장부터 다카보다는 미안마의 양곤이나 만달레이에 흡사했다. 남자들은 긴 치마 같은 론지를 두르고 있고, 여자들은 얼굴에 흰색 분칠을 한다. 봄맞이 축제도 인도 아대륙의 홀리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송크란을 따른다. 불교도의 비중도 상당하다. 페르시아 세계보다는 만다라 세계에 속해 있던 곳이다.치타공은 항만 도시이다. 예로부터 세계 도시였다. 포르투갈 어, 아랍 어, 아라칸 어, 미얀마 어가 벵골 어와 뒤섞였다. 벵골 만 세계와 인도양 세계의 허브였던 것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이 메카로 성지 순례를 갈 때면 중간 항구로 삼는 곳이 치타공이었다. 반대 방향으로는 포르투갈 상인이 남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로 활용했다.이베리아 반도부터 아라비아 해의 고아(Goa)와 남중국해의 마카오와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연결시켰던 해양 제국 포르투갈도 치타공에 닻을 내렸던 것이다. 이슬람의 문류망과 유럽의 물류망이 이곳에서 교차했다. 바다 사람에게 ‘벵골 민족주의’는 답답한 틀이었다. 치타공은 열린 세계가 그리웠다.그 왕년의 연결망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복구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쫓겨난 무슬림계 소수 민족 로힝야 난민의 거주지가 바로 치타공이다. 치타공에서야 로힝야 족의 계보를 살펴볼 생각이 들었다. 무굴제국과 미얀마 사이에 자리했던 아라칸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인도 아대륙과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연결망이자, 벵골 만 세계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그들이 ‘소수 민족’으로 떠돌이 신세가 된 것 또한 국민 국가와 국가 간 체제가 이식된 ‘장기 20세기’의 사태이다. 따라서 ‘민주화된’ 미얀마 정권에 소수 민족의 인권을 보호하라는 빤한 주장만 되풀이해서는 쉽사리 해결될 사안도 아니라고 하겠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사이에서 유연하고 부드럽게 작동했던 ‘벵골 만 세계’를 복원해가는 집합적 과제와 연동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로힝야 족도 기왕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치타공의 활력 또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로힝야 족 난민 캠프에서는 또 다른 글로벌 연결망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비정부기구, 종교이다. 종교 단체는 시민 단체보다 훨씬 오랫동안 활약했던 대표적인 NGO이다. 방글라데시 정부 기관이 아니라 이슬람 NGO들이 난민 보호를 이끌고 있다. 이 이슬람 연결망 또한 유구하고 유장한 것이다. 14세기 모로코에서 방글라데시까지 이르렀던 인물이 이븐 바투타였다.헌데 사시 눈이 없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연계된 조직들이 푼돈으로 로힝야 족을 테러리스트로 육성하고 있다고 한다. 생거짓말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기왕의 페르시아 문명의 수피즘과는 다른 와하비즘을 전파하고 있음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알카에다가 중동과 동남아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방글라데시를 지목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실제로 마지막 남은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 또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재)이슬람화의 물결이 도저하다. 이슬람 난민촌, 이슬람 고아원, 이슬람 구제소, 이슬람 병원 등이 버섯구름처럼 퍼지고 있다. 덩달아 검은 천으로 온 몸을 덮은 부르카 복장의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다. 마드라사, 즉 이슬람 학교의 숫자가 중고등학교의 숫자보다 더 많아졌다는 통계도 있다. 다카 대학교의 그 역사학자는 ‘벵골 르네상스’를 자랑했던 지역의 고유함과 독자성이 약화되고, 이슬람의 영향이 커지고 있음을 깊이 탄식했다. 문명사가보다는 민족사학자였다.도시화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민이 유입될수록 가족과 친족, 마을공동체와 같은 전통적 소속감은 상실된다. 고독한 도시인들이 더욱 자주 모스크를 찾는다는 것이다. 다카의 현재 인구는 1500만 명을 넘어섰다. 매년 30만 명 이상이 유입되고 있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 2025년이면 2500만 명의 메가 시티가 될 것이다. 2000만 무슬림이 살아가는 거대한 이슬람 도시가 등장하는 것이다.정치가 생활 세계의 변동과 무관할 수가 없다. 양대 정당마저 갈수록 이슬람으로 기울고 있다. 기층 사회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이슬람 조직들과 연계해야 표를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이슬람의 입김은 더욱 커져간다.세속주의를 고수하는 ‘구세력’과 이슬람의 귀환을 추진하는 ‘신세력’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학교이다. 아이들을 일반 학교로 진학시킬 것인가, 이슬람 학교로 보낼 것인가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공립 학교와 마드라사에서 각기 청소년기를 마친 엘리트들이 조우하는 장소는 대학이다. 세계관의 차이가 현저하다. 세속주의 지식인과 언론인이 구타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일종의 ‘문명의 충돌’이다.혁명 국가의 쇠락이 비단 방글라데시에 한정된 현상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일개 국가의 일탈이라기보다는 유라시아 전체의 대세이다.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막론하고 재이슬람화는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구대륙의 구문명이 再起(재기)하고 있다.하여 정보화니 세계화를 서구화나 미국화와 등치시키는 독법은 도저히 통용되지 않는다. 도리어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가장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종교야말로 이슬람이기 때문이다. 1500년의 문명이 최첨단 기술과 뉴미디어와 결합하여 100년의 근대 정치를 잠식해가고 있는 것이다.더 이상 16억이 소통하는 아랍 어 공론장을 외면해서는 21세기를 파악할 수도 없다는 판단이다. 이 반전하는 역(逆)근대화(De-Modernization)의 풍경과 의미는 이슬람 세계로 서진하면서 더욱 소상하게 따져보려고 한다.다카에서 치타공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거리는 250킬로미터. 서너 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다. 웬걸, 장장 8시간이 걸렸다. 직행 버스가 없다. 완행버스이다. 중간 중간 정거장에 섰다. 킨들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군데군데 비포장도로마저 있었다. 교통망이 부실하다. 실은 교통뿐만이 아니다. 전력도 부족하다. 호텔에서도 수시로 전기가 나간다. 인터넷도 깜빡깜빡했다. 석탄과 석유 등 지하자원을 가장 덜 쓰는 나라이다. 태양과 대지와 물, 그리고 인간의 근력에 의존해 살아가는 가난한 나라이다.어쩔 수 없이 창밖으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망망한 벵골 델타의 풍경을 원 없이 바라보았다. 허리를 구부려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이 보인다. 저들은 3000년 전 조상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는 풍경을 장탄식하며 지켜보는 모습 또한 수백 년째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 중의 하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꼴은 가장 오래된 모습을 지속하고 있다.내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것은 5월 초였다. 아직은 하늘이 쾌청했다. 몬순이 비를 뿌리기 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6월 첫날에 비가 내린다고 말한다. 치타공에서 비가 오고 닷새가 지나면 콜카타에서도 비가 내린다. 그리고 또 닷새가 흐르면 뭄바이에서도 비가 온다. 6월 중순에는 뉴델리를 적실 것이고, 7월 초에는 카라치까지 이를 것이다. 하늘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국경을 가리지 않고 차례차례 비를 뿌려간다. 인도양의 몬순은 수천 년째 반복되고 있는 지구에서 가장 큰 기후 체제이다.그 몬순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기후 변동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봄 홍수부터 잦아졌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점점 더 많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몬순 시즌이 되면 바닷물이 영토를 잠식할 정도로 방글라데시는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나라이다. 해수면 상승의 영향 또한 가장 먼저 받지 않을 수 없다. 2030년까지 해수면이 20센티미터 상승하면, 치타공과 그 일대 1000만 명이 위험해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2050년이면 방글라데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식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있다. 벵골 만은 점점 더 넓어지고 벵골델타는 줄어들고 있다. 지구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가이아임을 실감한다.방글라데시는 인류의 활동이 가이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로 진입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구 온난화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시비비가 이곳 방글라데시에서 판별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진위 여부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라는 점이다.어제와 같은 오늘에 감사해하지 못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정체(停滯)된 것으로 여기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진보)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근대 정치가 지속되는 한 임박한 파국을 면하기는 힘들 것 같다. 내가 재이슬람화의 물결을 마냥 ‘퇴행’이라고만 재단하지 않고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근본적 까닭이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방글라데시 종교

다음은 Bing에서 방글라데시 종교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 방글라데시
  • yt:cc=on
  • Bangladesh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YouTube에서 방글라데시 종교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글라데시 10분 완벽정리 | 방글라데시 종교,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달달한 중국 드라마 추천 | 중드 입문자도 실패 없는 '평점 최강' 중드 추천! 상위 198개 베스트 답변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