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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축도(민 6:24-26) – 다음블로그

“아론의 축도”(민 6:24-26) 또는 “제사장의 축도”는 “사도의 축도”(고후 13:13)와 함께 교회에서 널리 사용 되어 온 축도이다. 우리 나라 개신교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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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6/2022

View: 9390

[여인갑의 바이블스토리] 아론의 축도란? – 기독일보

제사장의 축복이지만 일반적으로 아론의 축복이라고 불린다.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목사님 축도를 받는다. 이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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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5/18/2022

View: 2962

[여인갑의 바이블스토리] 아론의 축도란? : 칼럼 – 기독일보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목사님 축도를 받는다. 이때 아론의 축복으로 축도하여도 무방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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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1/30/2022

View: 1567

바울과 아론의 축도비교 – 네이버 블로그

신약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예배 마지막에 하는 축도에 대해서말하면, 민 6:24-26절 이하의 아론의 축도와 고후 13:13절의 바울의 축도 중 어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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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0/2021

View: 1843

아론의 축도 – 브런치

특별한 관심, 애착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 육군사관학교를 들 수 있다. 졸업반 생도들을 볼 때 수십 년간 그들을 배출해내고 양육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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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0/14/2022

View: 8675

아론의 축도 < 오늘의 말씀 < 말씀 < 기사본문 - 복음인

본문은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도록 하신 말씀인데 이 축도(아론의 축도) 속에는 자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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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ngn.net

Date Published: 6/24/2022

View: 1786

아론의 축도 – 한홍 목사 갓피플 TV

성경말씀 |. 민6:22-27. [민6:22-27];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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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9/2021

View: 2355

설교문 – 아론의 축복 기도 – 호산나순복음교회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대제사장인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시는 축도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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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fgc.co.kr

Date Published: 6/16/2021

View: 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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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축도 : 갓피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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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론 의 축도

  • Author: 갓피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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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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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성산 구약신학 연구방

아론의 축도(민 6:24-26)

민영진 (대한성서공회 총무 / 구약학 박사)

번역의 문제

“아론의 축도”(민 6:24-26) 또는 “제사장의 축도”는 “사도의 축도”(고후 13:13)와 함께 교회에서 널리 사용 되어 온 축도이다. 우리 나라 개신교에서는 사도의 축 도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고, 아론의 축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 아론의 축도라고 하는 것은 모 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전하여 일러준 축도이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 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이 이 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 때에는 다음과 같이 빌라고 하여라.'”(민 6:22-23) 하면서 준 내용이 바로 이 축복 이다. 우리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번역으로 읽어 볼 수 있다.

1) 개역 (1961)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개역}의 번역이다. 이 축도를 듣는 지상의 청중은 “이스라엘 자손”(민 6:23) 곧 이스라엘 백성이 다. 그러므로 여기 축도 안에 나오는 “너”는 바로 이스 라엘 백성이다. 이 축도의 발화자(發話者)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민 6:23) 곧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다. 그러므로 이 축도에서 세 번 반복되는 “원하며, 원하 며, 원하노라”라고 하는 동사의 주어는 “여호와”가 아 니고, 이 축도를 말하는 “제사장”이다. 이 축도의 내용 은, 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 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고,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고, 평강 주시기를, 축도를 하는 화 자가 원한다는 것이다. “원하다”라는 동사는 우리말 번역자가 첨가한 것으로서 이 동사의 주어는 이 축도 를 하는 제사장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 게 복을 베풀어주시기를, 축복을 하고 있는 제사장 자신 이 “원한다”는 것이다. 이 동사 외에, “복을 주시고(예 바레크카)”,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이슈므레카)”, “백성에게 얼굴을 비추시고(야에르)”, “은혜 베푸시고 (익후네카)”, “얼굴을 어느 쪽을 향하여 드시고(잇사)”, “평강 주시고(야셈)”, 하는 모든 동사의 주어는 바로 여호와이다. 여호와께서 직접 이런 행동을 하시는 주 체이다.

2) 공동번역 (1977)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집단적 단 수 “너”를 “너희”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의 이름 네 글 자를 그 본래의 발음을 따라 “야훼”로 음역하였다. {개역}이 “얼굴을 네게 비취사”를 {공동번역}은 “웃으 시며”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이 “은혜 베푸신다”라고 번역한 것을 “귀엽게 보아주시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개역}이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고 번역한 것 을 {공동번역}은 “고이 보시다”로 번역하였다. 이 축 도를 하는 제사장의 소원을, “빈다”라는 말을 첨가하 여 나타내었다.

3) 표준새번역 (1993)

24.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며

25.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26.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표준 새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의 뜻을 옮기려고 하여, 25절의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를 “주 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로 번역하였고, 26절 의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를 “주께 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주께서 이렇게 복을 베풀어주실 것을 축도를 하는 제사장 자 신이 하나님께 비는 것이므로 끝에 “빈다”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개역}의 “여호와”가 다 “주”로 바뀐 것 은, 하나님의 고유 이름 네 글자를,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독법(讀法)을 따라, 신약시대의 사도들의 전통 을 따라, 2천 년의 교회 역사의 전통을 따라, “아도나 이(主)”라고 읽은 것을 근거로 하여 번역한 결과이다. 이 축도를 하는 제사장의 소원을, “빈다”라는 말을 첨 가하여 나타낸 것은 {공동번역}과 같다.

3) 찬송가

주 너를 지키시고

그 얼굴을 네게 돌리시어 참 평강을 참 평강을

그 얼굴을 네게 돌리시어

주의 은혜 주의 은혜 주 은혜 늘 네게 있으라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우리의 {찬송가} 550장에 실린 이 축도가 “여호와” 를 사용하지 않고 “주”를 쓴 것은 [표준새번역]과 동 일한 전통에서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24절의 전반부 “주께서 네게 복을 주시기를” 빈다는 중요한 내용이 삭제되었으며, 25절과 26절이 순서가 바뀌어 서, “주께서 네게 얼굴을 돌리시어 참 평강을 주시기 를” 빈다는 26절의 내용이 먼저 나오고, “주께서 그 얼 굴을 네게 돌리시어 은혜 베푸시기를” 빈다는 25절의 내용이 그 뒤에 나오고 있다. 번역되는 말의 구문 법칙 에 따라 절이 바뀔 수는 있다. 그러나 음악적인 이유에 서나 구문상의 이유에서나 여기에서는 절의 순서가 바뀌어야 할 까닭이 없다. 뿐만 아니라 “얼굴을 돌린 다”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대면 하기를 꺼리어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리는 행위 를 연상시키는 말로서 본문의 본래 의미와는 정반대 의 뜻을 전할 수도 있어서 번역 대응어 선택도 적절하 지 못하다.

성서 안에서의 맥락

“여호와는 자기의 백성을 지키시는 분”(24절)이라는 생각이 집약적으로 나오는 곳이 바로 “내가 산을 향하 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고 시작 되는 시편 121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사람 을 향해 비추신다고 하는 것(25a절)은 사람을 향해 만 족해하시는 모습으로 보시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반대로 하 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거나 외면하시는 것은 진노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 다는 생각(26절) 역시 성서의 여러 곳에 나타난다. 아 론의 축도의 축복 내용은 여기 민수기 6장에서만 나타 나는 생각이 아니다. 구약 성서의 여러 곳, 특히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편에 보편적으로 나와 있는 생 각이다.

활용의 문제

{개역}의 것이든 {표준새번역}의 것이든, 이것을 그대로 우리말 예배에서 목사가 축도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말이 가지는 특별한 존대법 때문 이다. 목사가 청중을 향하여 “너” 혹은 “너희”라고 할 수 없고, 역시 청중을 향하여 “원하노라” 혹은 “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본래 우리의 존대법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 번역이 지닌 문제이다. 실제로 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문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개역}과 같은 것은 다음과 같이 조정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비치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로 향하여

드시어서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

{표준새번역}의 번역 본문을 축도에서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 주시며,

주께서 여러분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여러분을 고이 보시어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청중을 일컫는 말로서는 “여러분”을 “성도 여러분 에게”로 고치거나 같은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표현들 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곧바로 이 기도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음역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밑줄은 억양 표시이고, 사선(斜線)은 띄어 읽기이다. 겹 사선(\)에 서는 잠시 쉰다.

예바레크카 아도나이 브이슈므레카\

야에르 아도나이 파나브 엘레카 빅후네카\

잇사 아도나이 파나브 엘레카 브야셈 르카 샬롬\

찬송가에서 사용할 경우, 루킨(P. C. Lukin)의 곡에 이 축도의 본문을 그대로 붙여서 부른다면, 주어진 곡 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볼 수도 있다.

주 네게 복 주시고, 널 지켜 주시기를 바라며,

그 얼굴로 널 대하사, 은혜 베푸시기를 바라며,

너를 고이 보시어서, 평화 주시길 바라노라.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예배에서의 사용되어 온 역사

우리 나라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되는 축도는 고린 도후서 13장 13절의 것이고, 민수기 6장 24-26절의 제 사장의 축도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제사장의 축도 가 일반 신도들에게 알려진 것은 {찬송가}(1983) 550 장과 같은 {찬송가}의 머리말 뒷면에 예배 후 묵상이 라고 하여 민수기 6장 26절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과 함께 소개된 것이 그 처음인 것 같다. 이 축도가 찬송 가에 이처럼 소개가 되어 있었어도 그것이 바로 제사 장의 축도였음을 아는 일반 신도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예배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고린도후서 13장 13 절에 근거한 사도의 축도와 함께 민수기 6장 24-26절 에 근거한 아론의 축도를 함께 사용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16세기 유럽 교회의 예배 순서를 보면, 예배는 일반적으로 “아론의 축도” 곧 제사장의 축도로 끝맺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 예배의식과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 예 배 의식, 그리고 1542년 제네바 예배의식이 상세한 점 에서는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지만, 예배가 모두 “아 론의 강복선언”(민 6:24-26)으로 끝나는 것은 삼자가 동일하다. 존 낙스의 제네바 예식서에 나타난 성만찬 예전의 순서를 보면, 축복 기도는 아론의 축복기도나 사도의 축복기도가 번갈아 가면서 사용되었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여인갑의 바이블스토리] 아론의 축도란?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트윗하기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위 축복은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할 것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제사장의 축복이지만 일반적으로 아론의 축복이라고 불린다.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목사님 축도를 받는다. 이때 아론의 축복으로 축도하여도 무방하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아론의 축복 3행시는 보기에도 아름답다. 24절 말씀이 3단어

25절 말씀이 5단어

26절 말씀이 7단어로 되어있다. 모두 합하면 15단어이다. 2단어씩 증가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이 점점 더 크게 확장되어 간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여호와란 주어가 한번만 나와도 문장상 의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행마다 여호와란 주어가 반복됨으로 축도가 제사장에 의해 선포되지만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주체는 바로 여호와 되심을 3중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위 하나님의 복 주심이 완전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용된 총 단어 수 15에서 3번 쓰인 여호와를 제외하면 12단어가 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한다고 본다. 여호와의 복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빠짐없이 부어질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복 주심도 첫 행에서는 ‘복’이라는 포괄적이며 추상적인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두 번째 행에서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라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되어 복을 받을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행에서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란 표현으로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순간적 동작까지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회적인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도 멈추지 않고 복을 주시며, 계속해서 환하게 비추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는 지속적인 복을 점진적으로 더 크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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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스토리 #여인갑대표 #여인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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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갑의 바이블스토리] 아론의 축도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위 축복은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할 것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제사장의 축복이지만 일반적으로 아론의 축복이라고 불린다.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목사님 축도를 받는다. 이때 아론의 축복으로 축도하여도 무방하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아론의 축복 3행시는 보기에도 아름답다.

24절 말씀이 3단어

25절 말씀이 5단어

26절 말씀이 7단어로 되어있다.

모두 합하면 15단어이다. 2단어씩 증가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이 점점 더 크게 확장되어 간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여호와란 주어가 한번만 나와도 문장상 의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행마다 여호와란 주어가 반복됨으로 축도가 제사장에 의해 선포되지만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주체는 바로 여호와 되심을 3중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위 하나님의 복 주심이 완전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용된 총 단어 수 15에서 3번 쓰인 여호와를 제외하면 12단어가 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한다고 본다. 여호와의 복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빠짐없이 부어질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복 주심도 첫 행에서는 ‘복’이라는 포괄적이며 추상적인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두 번째 행에서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라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되어 복을 받을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행에서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란 표현으로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순간적 동작까지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회적인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도 멈추지 않고 복을 주시며, 계속해서 환하게 비추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는 지속적인 복을 점진적으로 더 크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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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아론의 축도비교

바울과 아론의 축도비교

신약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예배 마지막에 하는 축도에 대해서말하면, 민 6:24-26절 이하의 아론의 축도와 고후 13:13절의 바울의 축도 중 어느 것이 옳은가에 대해 논란이 있느나 결론은 후자가 옳다고 생각된다. 이유는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신분상의 변화로 인한 것 때문이다.

민수기 6장,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고후 13장,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민 6장의 아론의 축복기도문은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로 내 백성에게 이렇게 축복 하라고 주신 말씀이다. 이것은 곧 제사장인 너희가 나의 이 백성을 위해서 이렇게 간구하라고 주신 축복의 기도문인 것이다.

그러나 고후 13:13절의 바울의 기도문은 다른 것이다. 이것을 구태여기도문이라고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았고 거룩하신 삼위하나님을 직접 심령 속에 모시고 사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의 신분상의 차이가 없다. 있다면 그것은 기능상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다 같은 삼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들이기에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중재역이 있을 수 없고 성도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변해서 죄인과 하나님의 관계, 죄의 종, 마귀의 종과 하나님의 관계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같은 신분이 된 사도가 성도들에게 비록 물리적 거리는 떨어져 있을 지라도 나에게 임하신 삼위 하나님의 임재가 고린도 교회성도들 너희에게도 임하셔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함께 교통하게 될 것을 원한다는 이 바울의 기도문이 바울의 후계자들인 교회에 타당하다고 생각되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아론의 축복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성도들을 아들에서 다시 종의 신분으로 되돌리는 어리석을 범하는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목회에서는 이런 사고들은 아직도 목회자들 가운데 많이 스며들어 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목회사역에서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축복을 해주는 제사장적 지위의 사람이고 그러니 성직자이고 성도들은 속된 무리들이다. 또한 축도를 목사는 해도 되고 전도사는 안 된다고 하는 제도교회의 오류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전도사나 다 같은 구원받은 거룩한 제사장들이고 그들에게는 신분상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오직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각각의 사람들이 맡은바 역할을 달리하는 기능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일종의 신분상의 차이로 여기는 오류를 교회가 범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성도들과 목회자들 모두 가지고 있어서 그들 목회자들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축복받는다고 가르치는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 개혁가들 역시 완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잘못된 신학이 현대교회의 온갖 부정과 비리를 낳게 한다. 목사가 축도를 하면서 손을 높이 들고 바닥을 아래로 하는 것은 무속적인 사고가 깃든 것이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 손에서 나오는 것을 받는다는 제스쳐를 써야 하지 않을 까? 구약적 사고가 이런 곳곳에 스며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사장인 성도는 축도를 못하게 하는지…

루터는 만인 제사장사상을 주장하였지만 그의 주장이 끝까지 계속되지 못한 것은 그 밑바닥에 이러한 사고들이 깔려 있기에 그렇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그래서 구교와 같이 현대의 개신교 역시 목사가 예배말미에 거룩한 예복을 입고 성도를 행하여 손을 높이 들고 바울의 축도나 아론의 축도를 하면 무언가 내가 당신들을 위하여 목회자로서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한 면이 없지 않으며 성도들도 그것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축도는 목사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라면 누구나 서로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권장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도들의 신분이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고 삼위하나님을 심령 속에 영원토록 모시고 사는 자들로 변하게 된 이 사건이, 즉 주님의 십자가가 사건이 아론의 축도와 바울의 축도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다 거룩한 성도들이면서 제사장들이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가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축도를 못한다니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룩하신 성도의 직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역행적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도들의 구약적신앙의 모든 것을 다 뒤엎는 혁명적인 대 사건이고 그러기에 이는 제2의 창조라고까지 이른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생활에서는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이 너무나 많이 퇴색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 목회자들의 책임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이들이 바로 성도들이라는것을 왜곡하고 부인하기에 생기는 문제라 생각된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목사가 성도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자신들의 처지가 허물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지 스스로 자문해야 할 것이다. 목사는 성도와 같은 거룩한 무리들이고 자신들은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이 거룩한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 주도록 부탁받았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이 성경의 말씀이외에 다른 신령한 것을 전달하는 거룩한 자라고 하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리해야만 자신들의 지위가 다시 제사장들의 지위처럼 거룩한, 성도들보다 더 거룩한, 자가 된다고 믿는 것 아니겠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자문자답해야한다.

그러므로 만일 루터나 깔뱅이 그들의 교회에 아론의 축도를 시행했다면 그들은 반쪽의 종교개혁을 한 것이고 그러기에 그들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현대의 교회에 각종의 많은 문제들을 양산케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축도를 신약의 성도들이(목사를 포함해서) 한다는것은 좀 그렇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 성도들이 축복의 정의가 무엇인지… 왜 축복을 받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덮어놓고 복만 받으려는 무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축복기도는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나의 백성을 위해서 너희가 나에게 복을 주시라고 간구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아직 못주셨기 때문이다. 왜그런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3-26)라고 하라 하셨지만, 이것이 신약의 삼위하나님이 성도의 심령 속에 직접 거하시면서 그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과 비교를 할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 신약의 성도들은 이 놀라운 축복을 이미 다 받은 사람들 아닌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치매 걸린 자들처럼 이 사실을 다 잊어버리고 엉뚱한 것을 여전히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간구한다. 또 성도들에게 베풀어 준다고 한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솔직히 그만큼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대속하심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고 밖에 생각이 안 된다.

이 민수기 6:22-27절을 자세히 보면, 참 하나님도 왜 일을 그렇게 번거롭게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뭔소리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백성들에게 직접 주시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렇게 축도를 하라고 전하라고 하시는가? 왜 그런가?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가 없으신 것이다. 왜?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는 빛과 어둠의 관계이다.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가까이 할래야 가까이 할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필요한가? 대답은 ‘노’이다. 왜 그런가? 예수의십자가의 중보사역으로 인해서 성도는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고 그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과 자녀와백성사이는 이제 막힘이 없는 관계가 되었고 그러므로 더이상 중보자가 불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도 중보자가 여전히 계신다면 그분은 오직 성령님이실 뿐이다. 이 성령께서는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주님을 이야기 하시고 주님을 높이시고 주님의 일을 하신다. 그리고 성도들 속에 들어오셔서 교회를 이루신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구약에는없는 기관이 새로이 형성된 것이고 구약의 성도들은 이 신약의 주님의 몸으로 이루신 교회를 통해서 주의 백성이 완전하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민수기 6장의 축도는 이제 신약시대에는 그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즉, 그 의미과 완전히 이루어 진 것이다.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구약의 민수기 6장의 축복기도는 신약의 시대에는 용도폐기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용도폐기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완성되었기에 그리된 것이란 말이 적당하겠다.

그런데 이 신약의 시대에 왠 뜸금없는 구약적 축도의 개념이 또다시 나타나는가 하는 말이다. 그것은 여전히 이 신약시대에도 성도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만큼 이 십자가의 신학적 의미는 묻힌 채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틈에 사단은 성도들의 사이를 파고들어서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고 어둠의 영은 이제도 여전히 아니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다는 것이다.

아론의 축도

‘내려놓음’이 뭘까 항상 생각한다. 내 겉옷을 빼앗는 강도에게 속옷까지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은 뭘까 항상 고민한다. 내려놓음이 나를 잃어간다는 뜻은 아닐까 너무 궁금했다. 이 길이 맞는 건지 순간순간 사무치게 고민했다. 특히나 사람 관계에서.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때마다 비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서 주춤거렸다. 최소 만 번이상 주춤거렸을 것이다. 다이빙대 위에서 뛰어들지 못하고 발만 동동. 응원하던 사람들 다 돌아가고 이런 나를 지켜보는 분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세 분 뿐이었다. 온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주님안에서 내가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본능적인 내어맡김, 무방비 상태로 함께 있어도 내 존재가 어떠한 종류의 상처 하나 없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야 알겠다. 망설이고 망설이며 여러 번 두들겨 본 후에도 못 하면 어떡하나 자신없었던 내가, 최소한 내려놓는것이 맞다고 결정하기까지 당사자도 몰랐던 존재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알고계셨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시작이 반이 되도록 하실 수 있기에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망설이며 준비했다. 달팽이가 보드란 나뭇잎처럼, 껄끄러운 돌바닥도 매끄럽게 기어가듯이 그렇게. 요즘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 ‘믿는다’는 한 단어면 충분한 것 같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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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면 아주 뜨거운 감동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헌신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애틋하고 크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이다. 혹 신앙생활을 해나갈수록 그런 하나님께 뭔가 더 해 드려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힌다면 그건 옳지 않다. 흰 백발의 나이 지긋한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다가,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쯧쯧, 넌 좀 더 잘할 수 있는데’ 하시며 야단치기로 작정하고 계신 분 같다면, 틀렸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우리가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이 아니라 축복이다. 그 마음이 너무나 잘 표현된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민 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축복의 메시지를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달하셨다. 모세는 왕과 다름없었고 아론은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두 최고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축복하신 것이다. 직접 하지 않으시고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 축복을 훌려보내신 것이다. 왜? 이 질문 자체는 오류가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기 때문이다.

요즘은, 모든 권위가 땅에 떨어진 안타까운 상황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잘못 쥐어진 권위를 막 휘두른 경험과 그에 따른 상처들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상처 때문에 권위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모세와 아론 또한 부족한 점들이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마찬가지다. 영적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흘러온다.

하나님의 권위는, 백성들을 군기 잡고 그들 위에 군림하여 야단치고, 명령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권위자라면, 그 사람 옆에 가기만 해도 하나님의 축복된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과 대화하기만 해도 힘이 나고 눈빛만 봐도 다시 살맛이 나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목회자와 장로가 바로 이런 영적 지도자다. 부모는 가정의 영적 지도자이고, 모임의 리더는 그 모임의 영적 지도자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내 옆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존재만으로도 축복의 통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세는 왕으로써 아론은 대 제사장으로써 백성들을 축복했다. 지금은 모세도 아론도 없지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영원한 대 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과 교제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에너지가 우리를 다시 채울 것이며 그분의 축복이 우리 삶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은 가뭄 속에서도 축복의 강물이 끊기지 않는 인생이다. 예수님을 떠나면 축복도 중단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대로 살고 싶어도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축복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영어 성경에 보면 ‘This is how you are to bless the Israelites.’라고 나온다. 즉,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코칭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축복’하면 너무 좋아한다. 뭔진 상관없이 ‘복’을 바란다. 그런데 무조건 좋고 화려하다고 축복이 아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욕심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때 그것이 받는 자에게도, 통로가 된 자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복이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던 시대만 봐도 알 수 있다. 큰 재력을 관리할 능력과 마음자세가 되지 않은 자에게 갑자기 재물이 모이고 쌓이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삶을 망쳐놓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는가. 부모의 서포트를 받아 실력보다 높은 해외 명문대에 입학했다가 열등감만 커지고 인격적으로 상처만 난 채 돌아오는 학생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축복은 때에 맞게, 사람에 맞게, 형편에 맞게 하나님의 지혜대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자신을 위해 축복할 때 마음대로 기도한다고 대수가 아니다. 깊이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축복의 결을 인지할 수가 없다. 대패질도 나무 결을 따라 밀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코칭은 필수요건이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또한 이 축복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24절에서 나오는 ‘네게’는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셨다. 일반 은총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특별 은총’도 있는 것이다. 어린양의 보혈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된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 항상 예비되어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를 다루실 때는 일반 사람들을 다루실 때랑 다르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빽 없다고 서러워할 필요 없다. 가장 확실한 빽이 우리를 든든히 지키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축복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잠깐 힘들다고 해서, 지금 잠깐 사업이 어렵다고 해서 지금 잠깐 시험에 떨어지고 배신당했다고 해서 세상 다 끝난 것처럼 기 죽고 상처 받은 상태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 어깨 쫙 피고 다시 일어나 하늘의 전능자를 바라보고 힘차게 앞으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였다. 우리가 나만 복 많이 받았다고 자기도취에 빠지면 안 되는 이유이다. 내 옆의 형제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크고 풍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 나눠 쓰고도 남음이 있다. 세상에서는 남의 것을 뺐어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 집 자녀뿐만 아니면 남의 집 자녀들을 위해서도 중보하고 기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들과 딸이 있다면 최소 그들의 신랑 신부가 될 다른 두 명을 위해서도 같은 마음으로 중보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교회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선한 교회들이 일어나기를 함께 기도해야 한다.

2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복을 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한 번도 빈말을 하신 적이 없다. 말씀하셨으니 이루어질 것이다. 복 받고 싶은 우리 마음보다 복 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이 더 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지신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주실 것이다. 필요하다면 말이다. 이미 단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분이시다. 필요하다면 그분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갈길에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다.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불순종과 믿음의 부족 밖에 없다. 결코 하나님의 인색함 때문이 아니다. 담대하게 그 축복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의 레벨은 돈, 명예, 자식의 번성, 순조로운 사업 이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24절에서 말씀하시는 축복은,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총체적인 은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축복까지 다 포함한 것이다. 영적인 부분이 받쳐주지 않는 그저 눈에 보이는 축복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도 같다. 금방 무너질 것이다. 삶의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지혜의 축복,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관계의 축복, 악한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분별의 축복, 시시각각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명철의 축복, 말씀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영성의 축복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우리가 다 예측할 수도 없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큰 축복이 임하면 그것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땅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게 하셨다. 한꺼번에 확 주지 않으셨다. 경영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토지를 주면 그 땅이 황무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큰 축복을 맡겨버리면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는 것을 그분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것을 조율해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는 믿음과 함께 인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주님은 내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잠깐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광야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전 단계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런 의미에서 고난도 포장된 축복이라 볼 수 있다. 시험을 한번 떨어졌다가 통과한 사람은 다르다. 사업을 한번 망해봤다가 일어난 사람은 다르다. 이 고난의 시기를 지나온 사람은 깊이가 있고 성숙이 있다. 지혜가 있고 겸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의 광야를 지나고 있을지라도 그 기간조차 우리에게 포장된 축복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스스로를 향해 선포해야 한다. ‘나는 지금 넘치도록 큰 축복을 받고 있다!’ ‘축복의 수위를 조절해서 받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초월한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깜짝 서프라이즈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꿈이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과 불신앙을 혼동하며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의 다니엘로, 느헤미야로 쓰시고자 꿈꾸시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향해, ‘내 앞가림이나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처음엔 그랬었다. 그저 한 명의 아이만을 바랬을 뿐이었다. 근데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을 거라고 하셨다. 그가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하셨다.

예레미야 말씀에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던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한 만큼만 보여주신다고 하셨는가?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기도할 생각조차 못하던 차원의,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기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축복을 열게 하는 축복의 열쇠이다. 우리는 기대해야 한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지키시기 원하신다. 히브리 원어에서 ‘지킨다’는 단어는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아주 신중하게 보호한다는 말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에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하면 2,3주 전부터 어떤 일이 행해지는가? 모든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며 폭탄의 여부, 외부사람의 침투 가능성이 될만한 동선들, 그날 대통령과 함께 그곳에 있을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두 번 세 번 체크하고 당일날도 철저한 통제 아래 행사가 진행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경호대 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주의를 우리에게 기울이고 계신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빈 구석까지, 우리가 놓친 그 부분까지 하나님은 지키실 것이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헤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운 적들과 대치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무기도 훨씬 발전되었고 수도 훨씬 많은 그런 적들을 상대해야 했던 순간이 많았는데 그 모든 교활한 순간들을 지나 기적처럼 그들은 살아서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들어갔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이었다.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 보호하심의 축복이다.

빈털터리로 에서의 칼날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주셨었는지 생각해보라.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우리가 어디를 가냐 안 가느냐 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 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안 하시느냐이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주님의 빛이 나와 함께 하시면 안전하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위험수위가 높아져만 간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돈으로도, 기술로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인터넷 보안과 테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자하는 돈이 어마어마하지만 그래도 테러는 자행되고 해킹은 빈번히 잘만 일어난다. 인간은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고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 진정한 ‘안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키시느냐’이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공격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 주기도문에도 나오듯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자’로부터 구원하길 원하신다. 우리에게 항상 그것을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도 마찬가지다. ‘저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시옵소서.’ 그 주님의 기도가 지금도 우리를 지키고 계심을 믿는가? 우리가 기도 많이 해서 우리가 잘나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보혈의 보호막이 우리를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잠들어도 하나님은 24시간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기 때문에 마귀가 성난 사자처럼 영혼을 찾아 헤매어도 우리에게 치명타를 못 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 천로역정과 같이 수많은 영적 공격이 가해질 테지만 그때마다 내가 뭘 실수한 것 아닌가 고민할 필요 없다. 하나님 잘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엄청난 영적 포텐셜을 가진,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공격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해야 한다.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

마귀는 더러운 중상모략과 교활하고 급 낮은 거짓과 위선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몸에 묻는 진흙을 다시 던지려 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의 빛 앞으로 나와 몸을 말리고 쉬면 된다. 그리고 그 더러운 것들을 말끔하게 툭툭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간신히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듯, 공격당하기 전에 적의 심장부를 공격해 주실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기도로 능히 이기게 해 주신다. 교회는 살아남는 게 목적이 아니라 부흥이 목적이다.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를 원어 그대로 풀면, ‘He will smile at you’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걸음마를 막 뗀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미소처럼, 120% 이상 만족한 넉넉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은 우리를 비꼬아 보고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으로 우리를 바라봐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 부른다. 은혜는 사람의 선행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돈이라고 다 돈이 아니다. 사람이 주는 돈과 하나님이 주시는 돈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지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말 세게 하는 사람들 겁나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왜 조폭들이 욕을 잘하고 몰려다니는가? 겁나서 그런 것이다. 두려움이 계속 증폭돼서 그러는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다들 남보다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 눌려있다. 다 잘살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살려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두려움을 떠나게 한다. 절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기쁨과 소망이 밀물처럼 채워진다. 그러므로 삶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한눈팔지 말고 은혜의 강가로 나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에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큐티하는 시간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다. 받은 복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시간이고, 풍성한 하루를 지내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다니엘은 이 것을 알고, 하루 한 번이 아닌 세 번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너무 잘해주시는 것, 나보다 선한 사람이 많은데 나를 선택하셔서 여기까지 이끌고 와주신 것, 바로 이 거룩한 불공평함이 내가 받은 은혜이다. 사랑받을 조건이 안되는데 사랑해주신 것, 그것이 은혜이다. 내가 노력한 것 이상, 내가 경영한 것 이상의 열매를 누리고 있다면 감사해야 한다. 흘려보내야 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 더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가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 물어야 한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이다. 하버드 대학교 1학년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학교 전산실에서 오류로 합격이 아닌데 합격통보가 되었다는 전화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럴 때가 분명 있다. 내가 이 정도 수준이 안되는데, 내 정체가 탄로 나면 어떡하나 의심이 들 정도로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을 때. 그 복을 순전히 은혜로 알 때 오만하지 않은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은혜는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받는 것이다.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5절에서 나왔던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의 의미는 미소를 띠고 바라보신다는 의미였다. 26절의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는 전 구절보다 조금 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한 관심, 애착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 육군사관학교를 들 수 있다. 졸업반 생도들을 볼 때 수십 년간 그들을 배출해내고 양육한 교관들은 학생들을 바라만 봐도 누가 대령까지 갈지, 누가 몇 년 하다 예편할 학생인지 대충 보인다는데 거의 90% 정확하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생도들과 장교, 장군들을 봐온 리더들이 선택한 장군감 재목들은 졸업 후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 자체가 달라진다고 한다. 다양한 경험을 시키기 위해 강한 부대에 보내기도 하고 통솔력을 키우기 위해 허술한 부대에 보내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육사 시절 성적이 좋았는데도 왜 이런 역경이 있는지 본인도 영문을 모를 때가 있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서 나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걸작품이자 장군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타락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관리하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기도하고 내 앞길을 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챙기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내 삶과 가정의 문제를 걱정하고 기도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걱정하시고 챙기시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돈문제로 고민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고민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과 항상 교제하며 동행하는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는 그분의 앞선 챙김을 느끼며 살아간다.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위로가 필요할 때면 연락이 잘 안 오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 기도해주겠다고 할 때도 있다. 나에게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전혀 뜻밖의 사람들, 환경들을 통해서 답을 주시기도 한다. 내가 당장 먹을 양식이 필요할 때 전혀 뜻밖의 까마귀가 와서 오늘의 양식을 주기도 한다. 어떤 분이 내 뒤에서 나를 관리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디테일한 부분을 신경 써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격하고 감동하게 된다.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이 이렇게 특별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마음에 안정감이 온다. 주의 평강이 가득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계속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전쟁이다. 평강이 없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평강을 빼앗으려 한다. 온갖 불신과 불만을 계속 속삭여서 두렵게 만든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기 위하여 날마다 몸부림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기도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타협하지 말고 나아가서 마귀의 염려 바이러스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살아나야 한다.

빌립보서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공수표를 쓰신 것이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다. 어떤 힘든 상황일지라도 우리의 선포와 믿음의 고백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 축복 가운데 서 있음을 믿는 고백이 참 중요하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근본 없는 고백이 아니기에 그렇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믿음에서, 그 말씀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리더라면, 언어가 굉장히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항상 축복의 말을 선포하고 흘려보내고, 격려해야 한다. 덮어놓고 격려한다고 버릇 나빠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전혀 없다. 버릇이 나빠질 정도로 누군가를 향해 축복을 선포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속성이 그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축복해야 한다. 기도로 축복해야 한다. 단점보다 강점을, 장점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계속 축복의 강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권위, 리더십이 생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이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아론의 입을 빌려 축복했지만 그들은 축복의 근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축복의 배달부, 통로였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지, 축복의 생산자로 부르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이 관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자꾸 사람들을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니까, 부모니까, 자녀니까, 사장이니까, 팀장이니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 축복을 생산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래서 자꾸만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의 자리에서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 때 제자들이 그랬다. 밤은 저물어 가고 그들을 따라온 자들만 오천명이 넘어가니까 제자들은 달려왔다. 다 흩어 보내라고 했다. 자기들이 그들을 먹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속으로 ‘그럴 줄 알았어, 또 우리가 먹여야 하나보다!’ 하고 고민했고 그 압박감은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라는 말속에서 잘 드러났다. 우리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어떻게 할지를 알고 계셨다고 했다. 축도하셨고 오병이어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축복을 나눠주라고 하셨지 축복을 만들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부담감을 집어 던져 버려도 된다. 책임져야 할 일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지, 축복의 책임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사명으로부터 도망가지 마라. 그 어떤 엄청난 하나님의 일도 우리가 책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제공해 주실 것이다. 그저 믿음으로 흘려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모세와 아론도 신나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대하면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복 보다도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사랑하길 바란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말고 그분을 모든 결정 과정에 초대함으로 하나님을 항상 내 마음 안에 가득 채워두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때를 지나고 있든 그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우리 삶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0494

아론의 축도

“종인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 일꾼만이 주위의 판단과 저주가 누구를 향하는지

분별할 수 있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보할 수 있습니다.”

▲ 최성규 목사

송탄소망교회 담임

◈ 월 : 아론의 축도 / 민수기 6:22-27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본문은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도록 하신 말씀인데 이 축도(아론의 축도) 속에는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이 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구약 교회 성도들)이 성전에서 예배할 때마다 제사장을 통해 늘 선포되었습니다. 이 축도(24~26절)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각 절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각 절마다 시작되는 ‘여호와’라는 이름, 즉 세 번 반복되는 ‘여호와’는 24절은 성부 여호와의 보호하심의 복, 25절은 그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의 복, 26절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강의 복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론의 축도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풍성한 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축도를 아무나 하도록 허락하지 않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하도록 했습니다(22~23, 27). 하나님께서 지명해 세우신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축도는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선언됐습니다.

▶ 기도 : 주의 종들이 주신 축복기도를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 화 : 일곱등잔과 요제 / 민수기 8:1-26

본문에서 하나님이 ‘등잔을 담당하는 아론에게 등불을 켤 때 일곱 등단대 앞을 비추게 하라’, ‘레위인을 정결하게 한 후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서 제사장을 도와 회막을 섬기게 하라’는 말씀에 모세는 순종합니다(1-3, 5-26). ‘일곱 등잔이 등잔대 앞(출 40:24)을 비추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하나님을 상징하는 일곱 등잔(계 1:4)이 그 맞은편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덩어리의 떡(레 24:5-8)을 항상 비추고 계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요제는 제물을 앞, 뒤 또는 위, 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 방식인데 레위인이 여호와께 드려진 것으로, 이것은 다시 제사장에게 돌려집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회막을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문둥병자와 같았던 신약의 성도가 죄 사함과 함께 의롭다함을 입고 주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산 주님의 소유이고 그 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입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소제)로 죽기까지 주께 충성(번제)해야 마땅합니다.

▶ 기도 : 구원받은 크신 은혜에 감격해 죽기까지 주의 일 하게 하옵소서. 아멘.

◈ 수 : 유월절을 지키라! / 민수기 9:1-14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정해진 때 곧 출애굽 첫째 달 열넷째 날에 해질 때에 유월절을 모든 율례와 규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이에 순종합니다(1-5). 그때에 죽은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유월절 절기에 참여하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은지 묻자 모세는 즉답 대신 여호와께 묻고(6-8), 여호와께서는 세 가지로 답하셨습니다(9-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유월절은 신약의 성찬식의 그림자이고(고전 5: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월절은 성취되었습니다(요 19:30, 막 14:25). 어린양과 함께 먹은 무교병은 누룩이 상징하는 죄를 이기고 살아야 할 성도의 거룩한 삶을 예표하고, 쓴 나물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의 고통스런 삶을 되새기게 함입니다(고전 5:7). 유월절을 합당한 이유 없이 지키지 않은 자들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하신 것은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만홀히 여기는 자는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성찬의 음식을 합당하게 먹고 마시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음이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고전 11:27-30). 이방인도 유월절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이방인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삶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표합니다.

▶ 기도 : 유월절을 상징하는 성찬식을 믿음으로 받아 큰 은혜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 목 : 은 나팔 / 민수기 10:1-10

하나님께서는 은 나팔을 두 개 만들어 소집과 행진, 전쟁과 절기에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1-2). 나팔 두 개를 함께 불면 온 회중이 회막문 앞에(3), 한 개만을 불면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회막문 앞에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4). 행진을 떠날 때는 나팔을 크게 불되(짧게 끊어서) 첫 번째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이 행진하고, 두 번째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이 행진하고, 회중을 모을 때도 나팔을 불 것이나 크게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6~7). 이외에도 전쟁에 나갈 때나 경축일과 절기와 초하루에 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시고 그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실 것이라 하십니다(8-10). 이스라엘이 행진과 전투의 신호로 나팔을 분 것은 신약의 성도가 세상에 나가 영적 전투, 곧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고전 14:8, 계 22:17).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며 우리를 대적에게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경축일과 절기에 나팔을 부는 것은 예수께서 ‘큰 나팔 소리’로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왕 노릇하실 날이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시고 주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을 깨워 불러 모으실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고전 15:52, 마 24:31, 계 11:15).

▶ 기도 : 복음의 나팔을 온 세상을 향해 불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하옵소서. 아멘.

◈ 금 : 모세의 큰 실패 / 민수기 11:1-15

시내광야에서 약 11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가나안 정복을 위해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이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진영의 외곽을 불사르십니다(1). 이스라엘은 불평은 애굽에서 함께 나온 이방인들의 탐욕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들의 탐욕에 자극 받은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탐하여 소망 없이 고통가운데 살던 노예시절을 망각함으로 불평하고(5),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에 자족하여 감사하는 대신 업신여기며(6-9) 자신들의 장막문에서 울기 시작합니다(10).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멸시하는 그들의 울음소리에 심히 진노하셨고 모세 역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10, 20). 모세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불평 앞에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지만 큰 실패를 합니다. 구원의 주체는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신 것을 잊은 것입니다. 또 여호와는 불가능이 없으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불신했습니다(21-23). 많은 기적을 체험한 모세지만 그의 불신이 실패를 초래합니다. 또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오해했습니다(13, 14). 종인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 일꾼만이 주위의 판단과 저주가 누구를 향하는지 분별할 수 있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보할 수 있습니다.

▶ 기도 : 기도할 때 내가 누구인지 알고 바른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아멘.

◈ 토 : 모세의 온유 / 민수기 12:1-16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을 두고 비방합니다(1).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모세만 선지자인가? 우리도 선지자가 아닌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2) ‘당장’ 세 사람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십니다(12:4).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 가운데 강림하여 ‘모세는 환상과 꿈으로 계시를 받는 어느 선지자 중 하나와 같지 않다’고 꾸짖습니다(5, 6).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을 맡아 충성하는 선지자이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는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지만 형상을 보는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7, 8). 이러한 모세를 비방하는 두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떠나시자(8, 9) 비방의 중심에 있던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10). 이런 미리암을 보고 아론이 모세를 ‘주’라 부르면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기 전에 중보해 줄 것을 간구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합니다(11-13).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심으로, 모세의 중보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미리암이 일주일간 부정으로 인해 진영밖에 머물며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심으로 권세를 준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모세의 권세에 대한 도전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14, 15).

▶ 기도 :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함을 나타내게 하시옵소서! 아멘.

아론의 축복 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했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도 광야 생활과 같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격려하시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 혼자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대제사장인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시는 축도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의 축도라고 해서 이것이 아론의 간구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시겠다는 일종의 선포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축도는 세 줄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히브리 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가 총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시 한 편으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모두 축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1.축복의 원천은 누구신가?

축복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성도는 모두 축복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축복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 복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성도는 축복의 원천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짧은 축도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만 나와도 알 수 있는 것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해 놓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의 원천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는 강조형으로, 영어로 ‘I myself’(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121편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 받기 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2.축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론의 축도 속에는 구체적인 세 가지 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물질 공급의 축복입니다. 24절 전반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을 준다’는 히브리 동사가 ‘바라크’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라크’는 ‘복을 베푼다’는 의미지만,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으면 복이 온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동사가 바로 ‘바라크’입니다. 히브리어 ‘바라크’가 말하는 복은 양식, 피난처, 집, 가족, 친구, 직장, 휴가, 안전 등 가시적이고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보호하시는 축복입니다. 24절 후반에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내 광야는 그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위험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굶어 죽을 위기, 목 말라 죽을 위기, 야생동물에게 물려 죽을 위기, 이방 민족들의 위험 등 온갖 공포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양식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 임재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축복입니다. 25~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얼굴빛을 비춰주시면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호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사람을 앞으로 잘 되게 해 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3.축복의 방식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 전체적으로 복 주시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 복 주십니다. 23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자손’은 집합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24~26절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모두 축복의 대상이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계속해서 복 주십니다.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 한 번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영광스럽게 복 주십니다. 25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어두운 세상이 환히 밝아지듯이 하나님이 성도를 복 주시면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은혜스럽게 복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죄 성과 노예근성이 가득합니다.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우상숭배하고, 지도자 모세를 때려죽이려 합니다. 늘 불평불만을 토로합니다. 한 마디로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들입니다. 축도하고 있는 아론조차도 우상숭배를 조장하던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축복할 것은 그만두고 복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데도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단어로 ‘은혜’라고 합니다. 25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확실하게 복 주십니다.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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