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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이슬람 게릴라들의 공세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① 수도 카불의 확보, ② 아민 대통령의 제거, ③ 완전한 소련파에 의한 새로운 정권의 수립 등을 목표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켰다. 이로써 약 9년간에 걸쳐 지속된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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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가니스탄은 최근까지 끊임없이 내전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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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94%84%EA%B0%80%EB%8B%88%EC%8A%A4%ED%83%84#%EC%97%AD%EC%82%AC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Afghanistan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deed.ko
CC BY SA 3.0

또 지도매핑은 https://www.youtube.com/channel/UC6gNjP1W4FXWExT5QpYkmhQ
이곳을 참고 했습니다. 외국인 지도매핑 유튜버분인 Ollie bye님의 채널도 방문해보세요.

마이크
인프라소닉 UFO PRO X

배경음악
JR Tundra – Shesh Pesh – Extended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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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프가니스탄 내전 – 나무위키:대문

물론 미국에 대한 아프간 주민들의 감정도 좋지 않았고 그게 2021년 여름의 대공세 때 아프간 정부가 쉽게 무너진 원인이었기에 주민들이 쉽게 따를 거라는 계산도 깔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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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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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국가: 아프가니스탄 3분 정리 – BBC News 코리아

현대사에서 아프가니스탄은 끊임 없는 전쟁, 테러 등에 시달려왔다. …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반군 게릴라 집단 무자헤딘 주도 내전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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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bc.com

Date Published: 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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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 – 위키백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영어: U.S. War in Afghanistan, 파슈토어: د افغانستان جګړه, … 1.2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과 빈 라덴; 1.3 아프가니스탄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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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3/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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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분쟁

으켜 공화제를 선언한 때부터 소련과의 전쟁, 그리고 무자헤딘에 의한 내전과 탈 … 아프가니스탄의 역사가 리쉬트야(Rishtya)58)는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원인을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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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udio.dn.naver.com

Date Published: 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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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쟁의 비극적 결말, 아프가니스탄은 어디로 향하는가

아프간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도 전쟁 장기화의 원인으로 꼽힌다. 박태균 교수(국제대학원)는 “미국이 탈레반과 이슬람을 객관적으로 이해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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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nunews.com

Date Published: 9/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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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프간 전쟁, 시작도 마무리도 잘못됐다 – 한겨레

마침내 2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 연합조직이 내전을 벌이다가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아프간 북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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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9/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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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전개과정 및 미중관계와 한반도 파급영향

이 보고서는 미군 철군에 따른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양상과 특징을 살펴보고 … 들이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을 무력으로 종식 시키고, 이슬람 신정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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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nss.re.kr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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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아프간 국민, ‘전쟁 주요 원인은 빈곤과 실업’ – VOA 한국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선에 성공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19일 취임선서를 마친 가운데 아프간 국민은 내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빈곤과 실업을 꼽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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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voakorea.com

Date Published: 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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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가니스탄은 최근까지 끊임없이 내전이 벌어졌을까? (History of Afghan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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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프가니스탄 내전 원인

  • Author: 역사 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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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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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의 원인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서막

가. 개요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1978년 4월 27일 친소련파 세력이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키면서 발단되었다. 1973년 쿠데타를 통해 국왕통치체제를 종식시키고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대통령에 오른 다우드는 친위대를 동원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결국은 중화기로 무장한 친소련 쿠데타 세력에 의해 패배하였다. 다우드 대통령과 그의 가족 및 측근 세력은 반란군에 의해 피살되었고, 쿠데타 과정에서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침내 5월 1일 공산당 세력인 인민민주당의 다라키가 혁명평의회를 설치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다라키 정권은 출발부터 불안하였다. 먼저 다우드 정권의 와해에 동조하였던 이슬람교도 동맹과 대립하였고, 인민민주당과 파참파 정당 사이에도 충돌이 일어났다. 또한, 다라키가 군내 내부의 반마르크스주의 장교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군인들이 그에 반발하였고, 인민민주당이 토지개혁과 지방자치제 폐지 등의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지방 부족들의 맹렬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다라키의 인민민주당은 ① 지방자치 대 중앙집권화, ② 사회주의 대 이슬람주의, ③ 무리한 근대화 정책 대 고유의 전통문화 등의 측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과 대립하였다.

결국 다라키 정권이 출발한 이후 수개월도 안되어 정부군과 여러 종족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6월부터 8월에 걸쳐 다라키 정권에 대항하는 지방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28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23개 주에서 항쟁이 벌어졌다. 다라키 정권은 공군까지 동원하여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이슬람교도들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진압작전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다. 특히, 이른바 ‘무자히딘'(이슬람전사)으로 불리는 게릴라들이 각지에서 다라키 정부군에 타격을 가하였다.

무자히딘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소련은 다라키 정권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고문(정부군 지원)과 민간인 전문가(교육과 경제재건 지원)를 파견하였다. 이후 이슬람 게릴라들은 다라키 정권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체류·주둔하고 있는 소련인들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979년 3월에는 서부의 도시 헤라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4월에는 북부 도시 마자리 샤리프에서 소련인 수명이 살해되었다. 8월에는 간다하루에서는 소련 군사고문단과 이슬람 게릴라들이 충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라키 정권의 제2인자인 아민 수상이 9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직을 차지하였다. 10월 14일 아민을 축출하려는 역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아민 정권은 다라키 정권보다도 소련에 더욱 의지하여 반정부 활동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내전은 더욱 거세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한 내전의 지속으로 1979년 말까지 사상자 수가 5만명을 상회하였고, 10만명 이상의 난민이 파키스탄으로 유입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다라키와 아민 정권을 지원해오고 있던 소련이 1979년 12월 15일 아프가니스탄을 전면적으로 침공함으로서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이슬람 게릴라들의 공세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① 수도 카불의 확보, ② 아민 대통령의 제거, ③ 완전한 소련파에 의한 새로운 정권의 수립 등을 목표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켰다. 이로써 약 9년간에 걸쳐 지속된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목적의 하나는 자신의 타지크 공화국이 이슬람화되지 않도록 봉쇄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슬람 혁명이데올로기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중동지역 전체에 파죽지세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타지크공화국에 다수의 이슬람교도가 거주하였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이슬람 혁명이데올로기를 어떻게든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타지크 공화국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장악될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이웃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도 같은 이슬람권이라는 이유에서 정서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을 지지하고 있었다. 구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이 자신의 기대대로 이슬람 세력의 확대를 막아주지 못하자 전면적 침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소련군과 정부군이 한편이 되고 이슬람 게릴라 세력과 반정부 세력이 다른 한편이 되는 ‘제2의 베트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소련군은 사회주의 정권의 존속과 이슬람 세력의 제압을 위해 전쟁을 벌였고, 이슬람 게릴라세력과 반정부군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한 이슬람화와 사회주의 세력의 타도를 목표로 항쟁하였다. 이러한 상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5∼20만 명, 구소련군 10∼13만 명, 이슬람 게릴라 및 반정부군 10∼15만 명이 9년 동안 전선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결정적 승리도 없는 ‘전장 없는 소모전’을 지속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기나긴 소모전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종결 국면을 맞게 되었다. 소련의 국력 약화 및 개혁·개방 추진, 반정부 게릴라 세력의 공세 강화,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의 전쟁의지 약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종전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당시 유엔사무총장 데구에야르가 그러한 분위기를 활용하여 평화협상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88년 4월부터 유엔의 중재 하에 소련,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미국이 참여한 가운데 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5월 15일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은 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모든 외국의 간섭을 중지하고, ②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간의 상호 무력 행사 및 파괴활동을 중지하며, ③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9개월 내에 완전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88년부터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989년 3월까지 일부 조사요원만 남겨놓고 철수를 완료하였다.

그러면서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지불라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군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항공기, 지대지 미사일, 전차 등 72억불 상당의 무기와 장비를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제공하였다. 그 결과 나지불라 정부군의 군사능력을 현저하게 강화시켜 반정부 게릴라 세력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는 계기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소련이 개입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지불라 정부군과 반정부 게릴라 세력을 당사자로 한 내전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지불라 정부군은 구소련의 군사지원 하에서 반정부 게릴라 세력에 비해 우세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게릴라 세력도 이러한 형국을 인식하고 유화적 전략을 통해 카불을 해방시킨다는 입장을 택하였다. 그러나 나지불라의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이후 쇠잔해져 갔다.

나지불라 정권의 세력이 약화되어 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반정부 게릴라 세력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수도 카불에서 게릴라 세력의 군대가 점차 증강되었음에 반해, 정부군의 병사들은 전쟁기간의 군복을 그대로 입고 각기 자신의 종족에 귀속되어 갔다. 당시 정부군과 게릴라 세력간의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소련군이 운반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은 무기와 장비 및 탄약이 게릴라의 여러 파벌 수중으로 들어갔다. 1989년 봄을 기하여 수도 카불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정부군의 모습이 사라지고 게릴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소련이 지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주의 정권은 탄생 10년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나지불라 정권의 붕괴와 함께 반정부 게릴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은 또 다른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게릴라 세력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릴라 세력은 반정부·반소련 항쟁에서는 결속하였으나 공동의 적이 소멸된 이후, 정권의 주도권을 놓고 파벌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게릴라 세력은 크게 보면 8개 파, 세분하면 수십 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며, 종전의 전쟁기간에도 각자의 세력 확대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충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5년부터 1988년 기간동안 수도 카불 근교에서 게릴라들끼리 충돌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된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게릴라 세력 내부의 잠재적 갈등이 전쟁 종식 이후 1989년 여름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내전으로 분출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기보다 자신들이 속한 종족(종족: 파슈툰족 50%, 타지크족 25%, 우즈베크족 10%, 하자라족 10%, 기타 5%; 종교: 수니파 이슬람 74%, 시아파 이슬람 25% 등)의 세력 확대를 추구하면서 처참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내전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소련군의 철수로 급격히 약화된 나지불라 공산정권은 결국 1992년 4월 붕괴되었다. 그러나 반소 공동전선을 형성했던 이슬람 반군세력간에 권력투쟁이 전개되면서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 과정에서 최대 종족인 파슈툰족을 대표하는 탈레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슬람 율법을 배우는 ‘학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탈레반은 원래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파키스탄 난민촌에 설립된 종교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 세력이다.

탈레반 정권은 출범 이후 국명을 아프간 이슬람 토후국으로 개칭하고 철저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여성의 직장활동과 교육이 금지되었고, 범법자에 대한 가혹한 극형(손발 절단이나 투석형)도 부활되었다. 탈레반 정권의 극단적인 정책성향은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2001년 3월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2천년 된 국제 문화유적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등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이 강화되었다.

탈레반 정부군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북부동맹과의 내전을 유리하게 전개해왔고, 북부동맹 측은 우즈벡과 타지크 접경의 산악거점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저항을 벌여왔다. 북부동맹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인도, 이란 등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여러 종족별 군사조직간의 연합체를 말한다. 오랜 전쟁 참화로 남은 것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간 주민이며, 수백만의 국내외 난민이다. 그리고 아직도 수백만발의 불발탄과 지뢰는 매일 희생자를 낳고 있다. 탈레반 정권의 무능력은 내전에 더하여 추위와 가뭄에도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유엔과 서방권의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이다.

한 때 반소 투쟁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던 관계인 탈레반 정권이 반미주의 세력으로 변화된 것은 도주중인 사우디아라비아 부호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빈 라덴의 자금으로 국제테러조직의 훈련기지가 가동되면서 빈 라덴의 반미주의가 탈레반 세력에게도 전파된 셈이다. 빈 라덴 테러조직의 초기목표는 반미주의라기보다 이슬람권 국가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대표되는 일부 친미 이슬람 국가의 반이슬람 정책 성향과 이스라엘의 강경한 중동정책의 배후세력으로 미국을 지목하고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다. 1990년대 일련의 반미테러는 빈 라덴 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98년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에 대한 폭탄테러사건은 탈레반 정권의 반미투쟁이 강화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미국이 폭탄테러사건의 보복으로 빈 라덴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에 미사일 공격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20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미국 테러 참사 사건 역시 빈 라덴의 소행으로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이에 대해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빈 라덴의 색출과 체포는 물론 그와 국제테러조직을 비호하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같은 보복대상임을 천명한 바 있다. 빈 라덴의 신병 인도를 거부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결국 10월 7일 공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군사보복작전을 전개하였다. 국제테러조직과의 연계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성격은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각기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혼합형 내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번 테러 참사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국제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의 강력한 응징 의지와 보복 작전, 그리고 반테러 국제연대의 결성에 따라 탈레반 세력은 정권의 존망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1년 11월 이전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90% 이상을 장악했던 데 비해, 11월 12일부터는 미국과 반테러 연합세력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측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나. 의미 및 영향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처음에는 정치 노선과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이한 정파들(사회주의세력:이슬람세력)이 무력적 대결을 벌이면서 촉발되었으나, 1970년대 말 구소련이 자국에 우호적인 사회주의정권을 확고하게 유지하여 이슬람세력의 자국 내 파급을 차단할 목적으로 전면적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1980년대의 새로운 국제적 냉전을 초래하기도 하였던 국제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 동안 반군세력으로서 정부군에 저항해 왔던 이슬람원리주의세력(탈레반세력)이 정국을 장악하고 그 반대세력을 축출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어 국지전 성격의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이 내전은 오래 지속되면서 대규모의 인명 살상과 난민을 발생시켰으며, 러시아와 파키스탄 및 이란을 포함하여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게 정치て안보적 위험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내전이 격화될 경우 이 지역 전체의 불안정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적 분쟁 해결 노력에도 큰 부담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안보적 측면에서는 직접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나, 이 지역의 불안정이 심화될 경우 그 주변국에서의 경제적 이익 추구에 제한을 받게 될 것이며, 유엔 중심의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여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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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영어: U.S. War in Afghanistan[50], 파슈토어: د افغانستان جګړه, جګړه په افغانستان کی)은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전쟁이다.[51] 미국은 초기에 캐나다[52]와 영국의 지지를 받았고, 이후 모든 NATO 회원국을 포함한 40개국 지지를 받았다. 이 전쟁의 일반적 목표는 알카에다를 해체하고, 탈레반 정권을 축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의 안전한 작전 기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53]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분류한다.[54][55][56][57][58] 미국은 20년에 달하는 전쟁 기간 동안 막대한 인적 희생과 물적 지출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영토를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전체영토로 넓히는데 실패하였으며[59],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으나 철군이 완료되기 전에 탈레반에게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접수당하였으며, 일부 자국민을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둔채 급하게 철군을 완료하였고 이 과정에서 카불 공항 테러가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최종적으로 2021년 탈레반의 승리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이은 미국의 대표적인 패배 사례로 손꼽힌다.

전쟁 배경 [ 편집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편집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의 전쟁으로 이 전쟁을 통해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등장하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탈레반에게 무기와 전술 등을 원조해줬고, 훗날 그 화살이 미국에게 돌아오게 된다.[60]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Mujahedin) [ 편집 ]

무자헤딘은 무자헤드(Mujahid)의 복수형이다. 무자헤드란 이슬람을 위협하는 이들과 싸우는 성전(지하드)에 임하는 전사란 의미이다. 따라서 1979년부터 소련군의 침공에 맞선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을 의미하는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1980년대 무자헤딘의 소련 공산주의 침략자들과 싸우는 용감한 투사란 의미가 미국에 전달되었고, ‘무자헤딘에게 원조를’이란 플랜 카드 아래 미국 시민들이 모금을 했다.[61]

빈라덴의 등장 [ 편집 ]

무신론 공산주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슬람 국가들을 자극했다. 특히 당시 이슬람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를 크게 자극했는데, 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정보국을 파키스탄에 파견시키며 초기 180만 달러 자금원조를 하였다. 정보국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 가문 출신의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는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입국했고, 무자헤딘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1,000만 달러에 이르는 성금 모금을 했으며 무자헤딘 투쟁을 아랍세계에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62]

소련군 철수 [ 편집 ]

1980년대 후반, 여러 방면의 후원 등으로 성장한 무자헤딘은 점차 소련을 상대로 승리하기 시작했고, 결국 소련은 철군을 결심한다.[63]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과 빈 라덴 [ 편집 ]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 이슬람 신앙, 파키스탄의 지원이 만들어낸 복합적 산물이다. 이들은 소련의 침공 때 무자헤딘 투쟁에 참가하였고, 전쟁 동안 조직적이고 강력한 군사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실패 이후 기존의 나지불라 공산정권이 무너졌고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이는 무역에 종사하던 파슈툰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탈레반은 그들이 모금한 25만 달러의 자금을 바탕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이들은 파슈툰족 왕조를 복원해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편 파키스탄도 계속되는 아프가니스탄 분쟁으로 교역에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에 탈레반을 지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다. 탈레반은 내외의 지원을 바탕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점차 장악한다. 당시 빈 라덴은 알카에다를 중심으로 미국과 자신을 축출한 조국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여러번 폭력 테러를 감행하고 쫓기다가 자신이 오랫동안 후원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한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스캔들을 덮기 위해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남쪽 자와르 킬리 훈련장에 있다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예고 없이 타격했고 이에 탈레반은 미국에 적대심을 갖게 된다. 그러는 동시에 빈 라덴은 탈레반에 저항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인 아마드 샤 마수드를 암살했다. 여러 요인들이 맞물리며 탈레반은 빈 라덴과 긍정적인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했고, 미국에 대항하여 빈 라덴을 보호해주게 된다.[64]

아프가니스탄 내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아프가니스탄 내전 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9.11 테러 입니다.

2001년 9월 11일 15명의 사우디아라비아인을 포함한 19명의 아랍인들이 미국에서 합동 테러를 저질렀다. 4대의 민항기가 납치되었다.[65][66] 알카에다의 함부르크 조직의 조직원이었던 납치인들은[67] 아메리칸 항공 11편과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을 세계 무역 센터의 쌍둥이 빌딩에 강제로 충돌시켜,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전원과 건물 안의 2,000명이 사망했다. 쌍둥이 건물은 무너졌고, 충돌로 인해 인근의 건물이 부서지거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아메리칸 항공 77편은 워싱턴 D.C 인근의 펜타곤에 충돌했고,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워싱턴 DC로 날아가던 비행기가 셰익스빌 인근에 추락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뉴욕주 보건부에 따르면 2009년 6월 기준으로 소방관과 경찰관을 포함해 사망자 수가 총 836명으로 집계되었다.[68] 전체 사망자수는 19명의 납치범들을 포함해 2,996명이었다.[68]

미국의 최후 통첩과 탈레반의 반응 [ 편집 ]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9월 13일, 미국은 파키스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에게 탈레반에 대한 지원중단, 파키스탄 영공 통과와 이/착륙 백지 위임장을 요청했고, 바로 당일 날 모든 조건이 수락되었다. 탈레반에게는 24~48시간 안에 빈 라덴과 그 측근들의 인도 및 알카에다 캠프 폐쇄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모든 수단을 이용해 테러 시설을 공격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탈레반은 고민했지만 결국 빈 라덴을 보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69]

전쟁 전개 [ 편집 ]

미국 정부는 과거 영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인식하고, 이 전쟁이 미국과 이슬람권과의 대결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전쟁의 목적이 알 카에다를 지원하는 탈레반에 대한 응징에 있음을 명시하였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UN을 통하여 세계 각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2001년 10월 7일 공중 폭격을 시작으로 2개월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한 알 카에다를 완전히 격퇴하는 것은 실패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후의 안정화 작업도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국제안보지원군은 단호한 지원작전으로 명명된 임무를 맡았으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탈레반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서 탈레반의 테러가 이어지는 등 장기화되었다.[70]

초기의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초기 낮게 설정된 투입 병력으로 작전의 대부분을 북부동맹의 병력에 의존해야 했고, 작전 수준에서 미군에게 뒤지는 북부동맹은 패주하는 알카에다와 탈레반 일당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했다. 특히 2001년 12월 파키스탄 국경에 인접한 산악 지역인 토라보라에서 오사마 빈라덴을 포함한 2천 명의 적을 전략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살상 또는 섬멸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금전적 보상을 약속받은 부족 민병대들은 제대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고 미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카에다와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알카에다와 탈레반 잔당들이 파키스탄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미군을 대신해야 할 아프가니스탄인 군대와 경찰의 양성도 더뎠다.[71] 미군이 20년간 지원했던 아프가니스탄 군경에 대한 890억 달러 규모의 지출은 상당 부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이는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군과 그 계약 간에 있었던 부패를 야기했다.[72]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pecial Inspector General for Afghanistan Reconstruction, SIGAR)이 미국 의회 제출한 보고서에는 경찰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내의 심각한 부정부패에 대해 언급해왔고, 실질적인 군과 경찰 병력에 대한 데이터는 의심스럽고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또한 부패한 간부들이 봉급을 가로채기 위해 장부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 병사를 기재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작전 준비 [ 편집 ]

CIA와 제5특전단 [ 편집 ]

이전부터 미국 CIA정보국은 빈 라덴 제거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제5특전단장 존 멀홀랜드 대령이 군사작전을 제안하였다. 제5특전단은 미국 육군 특전부대 중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을 담당하는 특전단으로 적지 침투 후 게릴라전, 포섭 능력으로 미국에 호응하는 게릴라 세력 양성, 민사심리전, 동맹군 부대의 훈련 등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다. 존 멀홀랜드 대령은 그들의 특기인 포섭능력을 활용, 탈레반에 적대적인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 군벌세력을 통해 주전투전력을 확보하고 부족한 전투능력은 특전단에 소속된 공정통제사가 강력한 미국 공군 전력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보충하는 작전을 제안하였다. CIA는 이를 받아들였다.[73]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결정 [ 편집 ]

911테러가 일어난 지 4일이 지난 2001년 9월 15일, 부시 대통령은 미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복을 입은 모든 이들은 대기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부시 대통령은 일차적으로 빈 라덴 사살을 목표로 세운다. 당시 미국 군사 정책연구소들은 과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작전을 사례로 들면서 미국이 대규모 지상군을 동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경고를 했다. 이에 미국 합동참모본부(CJCS)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과 폭격기, 특수전 부대를 결합한 공격방식의 군사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존 멀홀랜드 대령과 CIA가 세운 아프가니스탄 작전계획이 현실화되기 시작한다.[74]

CIA의 공작활동, 외교활동 [ 편집 ]

CIA는 군사활동과 함께 공작활동과 외교활동도 병행하고자 하였다. 우선 공작활동은 2001년 9월 19일, 게리슈렌이 이끄는 CIA 공작팀(Jawbreaker : 조 브레이커, 광석 파쇄기)가 맡았다. 이들은 워싱턴을 떠나 아프가니스탄 북쪽 접경국인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아직 탈레반 정권에게 저항 중인 북부동맹 세력과 동맹을 맺어 탈레반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한편 외교활동도 지속되었는데, CIA 파키스탄 지부장 로버트 그레니어는 은밀히 탈레반 정권 2인자인 아크타르 모하마드 오스마니와 접촉하여 미군이 빈 라덴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제안을 했다. 탈레반측은 겉으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실질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즉 탈레반은 협상을 통해 시간만 끌고 있었던 것이다.[75]

펜타곤 의 전쟁준비 [ 편집 ]

CIA의 비군사활동들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휘하에 펜타곤은 공군력과 특수전 부대의 동원을 시작한다.[76]

주요 작전 및 전투 [ 편집 ]

항구적 자유작전(Operation Enduraing Freedom) [ 편집 ]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CVN-65

2001년 10월 7일, 탈레반에 대한 군사공격 작전인 항구적 자유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해군 수상함과 잠수함에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발사된 이후, 뒤이어 B-52H 폭격기에서 AGM-86C 순항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그 뒤를 따라 항공모함 CVN-65 엔터프라이즈와 CVN-70 칼 빈슨에서 이함한 미국해군 전투기와 함께 미국공군의 B-1B와 B-52H 폭격기가 탈레반과 알카에다 기지를 맹폭하였다.[77]

첫 번째 특수전 임무 [ 편집 ]

우즈베키스탄의 스트롱홀드 프리덤 기지를 기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침투작전 준비가 시작된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에 중동지역을 담당하는 제 5특전단 병력을 중심으로 특수전 부대를 파견해 공동작전을 수행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서 우즈베키스탄의 기지로부터 아프가니스탄까지 특수전 부대원들을 안전하게 수송해야 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 높이 3,000m 이상의 산맥이 길을 차단하고 있었고 산맥 너머 사막 고원지대의 모래폭풍이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산맥을 피해 산맥 사이의 계곡을 헬기로 통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때 MH-47E 치누크 헬기와 MH-60L 나이트 호크가 사용되었다.[78]

특수부대와 북부동맹 연합작전 [ 편집 ]

미군의 JDAM유도폭탄

제 5특전단 병력은 최소 부대단위인 ODA(Operational Detachment Alpha : 작전분견대)가 각각 임무를 수행하였다. 각 ODA는 10~12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상당히 작은 규모의 병력이므로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보다 항공지원 조율, 표적정보 제공, 레이저 타케팅 조사 등을 통해 미국공군 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79]빈 라덴이 북부동맹의 지도자 아마드 샤 마수드를 암살한 뒤 북부동맹이 분열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미국측은 각 ODA들을 북부동맹 각각의 파벌들에 분산시켰다. 이중 ODA 595와 라시드 도스툼 장군의 부대의 작전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의 주 임무는 아프가니스탄 공습작전을 수행하던 공군 폭격기나 전투기가 추락하면 이들을 구조하는 임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히 공격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AN/PEQ-1 SOFLAM(Special Operations Forces LAser Acquisition Marker) 특수부대용 레이저 표적지시기와 SATCOM(Satellite Communication, 위성통신기)을 사용한 폭격을 유도하였다.

1. AN/PEQ-1 SOFLAM를 사용해 10km 밖의 표적(탈레반 참호)을 확인하고

2. 레이저 거리측정기로 거리를 측정하고

3. SATCOM을 사용해 미국공군 B-52 폭격기를 호출하여 JDAM 유도폭탄을 투하한다.

위의 과정으로 폭격을 진행 하였다. 적중하지는 못했지만 도스툼 장군은 항공기를 호출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성공한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으로 평가하였다.[80]

미국과 탈레반의 전투1.다리아 서프(Darya-Suf) 전투 2.마자르이샤리프(Mazae-e-Sharif) 전투 3.카불(Kabul) 전투 4.타린 코트(Tarin Kot) 전투 5.사이드 알림 카라이(Sayd Alim Kalay) 전투 6.칸다하르(Kandahar) 전투

마자르이샤리프 공략작전 [ 편집 ]

ODA 595중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도스툼 휘하의 지휘관과 접촉해 10월 20일부터 공중폭격을 통해 탈레반의 수많은 진지와 참호선을 파괴하고, 장갑차 20여대와 지원차량 20여대를 파괴하였다. 이를 통해 다른 북부동맹 병사들이 탈레반 방어선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여 우즈베키스탄과 접경한 아프가니스탄 북부 최대 도시인 마자르이샤리프(Mazar-e-Sharif)까지 진격할 수 있는 다리아 서프(Darya Suf)계곡으로 접근하였다.[81]

탈레반은 마자르이샤리프를 상실할 경우 곧장 카불까지 상실할 수 있는데다, 과거 탈레반이 이곳을 점령한 덕분에 중동국가들로부터 정식 정부로 승인을 받을 수 있었던지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탈레반은 이 중요한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제5군과 제7군 병사 1만 5,000명을 마자르이샤리프 동쪽 탈리칸 전선에 배치하였다. 탈레반은 다리아 서프 계곡 방어에 사활을 걸었다. 이곳이 방어에 유리한 지역이며 이곳이 뚫리면 마자르이샤리프까지의 진격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탈레반은 주요 교통로에 대량의 대인지뢰를 매설하고 122mm곡사포와 BM-21 다연장 로켓까지 동원하여 저항했다.[82]

전투가 진행된 지 2주가 지난 시점, ODA 595는 폭격지점을 유도했고 미국 공군, 해군 전투기는 물론 영국 토네이도 공격기까지 날아와 하루에 120회 이상의 공습을 가했다. 이번에는 첫 임무때와 다르게 30m이내의 정확도로 2,000파운드(907kg)의 JDAM이 탈레반 진지를 맹타했다. 2,000파운드급 폭탄은 반경 500m 이내를 전멸시켰고 중량 35톤짜리 탱크가 장난감처럼 하늘로 치솟았다.[83]

11월 6일, 미국 공군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BLU-82 열 압력 폭탄을 다리아 서프 계곡에 투하한 것이다. 이는 중량이 5,700kg이나 되며 대규모 지뢰지대를 없애기 위해서 만든 폭탄으로 그 위력이 상당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연상하게 한다. 미국은 BLU-82 폭탄 2발을 계곡에 투하하였다. 엄청난 맹폭으로 사기를 상실한 탈레반은 드디어 도주하기 시작했고 도스툼과 미군 기병대는 말을 타고 무려 40km를 쫓아가면서 공격을 계속했다. 다리아 서프 계곡이 뚫리고 주력 병력이 항복한 11월 9일, 마자르이샤리프는 북부동맹에게 넘어왔다.[84]

카불 함락 [ 편집 ]

북부동맹과 미국은 탈레반이 카불에서 시가전을 준비할 틈을 주지 않고 신속하게 접근했고, 11월 12일에 특별히 격렬한 전투 없이 카불을 함락시켰다.[85]카불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이고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북부동맹과 미국의 카불 무혈 입성은 탈레반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이었다.

타린 코트 점령 [ 편집 ]

전투에서 쓰인 특수작전 부대용 레이저 조준기

카불이 함락되고 탈레반은 재빨리 그들의 근거지인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에서 대항할 준비를 시작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9.11테러 직후 하미드 카르자이라는 사람이 미국 대사관에 나타나 자신이 탈레반에 저항해 미국을 돕겠다고 하였고, 타린 코트(Tarin Kot 또는 Tarin Kowt)로 내려가서 반군을 조직했다. 그는 타린 코트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탈레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고향에서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린 코트는 탈레반의 실질적 수도 칸다하르 북쪽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분지지형이어서 탈레반의 공격을 막아내기 유리한 곳이었다.[86]

카르자이는 자신이 모은 25명의 파슈툰족 반군, 6명의 CIA 조브레이커 에코팀, 12명의 ODA-57팀 이렇게 적은 수의 병력으로 타린 코트 공세를 위해 타린 코트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이때 타린 코트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탈레반 계열의 시장을 사살하고 행정관리들을 몰아냈다.[87]

이 소식을 들은 탈레반은 80여대의 차량과 함께 300~500명 정도로 예상되는 정예군을 중심으로 타린 코트에 진격해왔다. 타린 코트에 총을 가진 남성들이 총동원되어 방어진지에 배치되었고, 미군은 근처 모든 미군 항공세력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AN/PEQ-1 SOFLAM(Special Operations Forces Laser Acquisition Marker : 특수작전 부대용 레이저 조준기)를 이용하여 적의 정확환 위치데이터를 파악하여 전투기에 알렸고 전투기들은 이 위치데이터를 바탕으로 적을 섬멸했다. 계속되는 폭격에 탈레반은 타린 코트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88]

칸다하르 점령 [ 편집 ]

12월 2일 미군, 텍사스 14와 카르자이 연합군은 칸다하르로 향하는 핵심 교량이 위치하는 사이드 알림 카라이(Sayd Alim Kalay)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탈레반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미군의 거센 폭격으로 철수하였다. 탈레반은 그간 미군과 여러 전투들로부터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되면 폭격된다는 것을 학습하였고,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되지 않는 동굴진지를 활용해 버티면서 지연전을 수행하기 시작한다.[89]

한편 칸다하르 남서쪽 90km 지점에 미국해병대가 비행장을 확보하고 투입 준비를 하고있었다. 투입 준비를 완료한 해병대 병력 약 750명은 텍사스 17이 이끄는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르자이 군에 합류해 핵심거점인 칸다하르 국제공항으로의 진격을 시작한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사용되어 엄청난 위력을 증명한 BLU-52 열압력 폭탄을 바탕으로 탈레반의 전의를 상실시켜나갔다.[90]

결국 2001년 12월 7일, 전쟁이 일어난 지 2개월 만에 탈레반이 항복을 하면서 전쟁이 일단락된다.

토라보라 전투와 빈라덴의 탈출 [ 편집 ]

토라보라 전투중 미군의 공습

참고: 이 전쟁은 탈레반과 미국 사이의 전투가 아닌 알카에다와 미국 사이의 전투이다.

한편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카불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프가니스탄 동부 잘랄라바드로 신속히 이동하였었다. 빈 라덴은 1987년 당시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위해 잘랄라바드에서 토라보라 산악지대를 잇는 도로공사를 수행한 적이 있었고, 그 결과 복잡한 토라보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CIA는 빈라덴이 토라보라 동굴로 잠적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찰조를 파견하여 알카에다가 은신한 동굴진지의 위치를 확인했다. 토라보라 동굴은 천연 동굴로 깊이가 300m에 이르고 주요 출입구는 철문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내부에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수력발전으로 전력을 공급받으며 최대 1,000명의 알카에다 병력이 은거할 수 있는 요새였다.[91] 보통의 미사일로는 타격을 줄 수 없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별다른 성과 없이 전투가 길어지자 작전을 지휘하던 핸리 크럼프턴이 빈라덴의 도주를 우려하여 백악관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불응했다. 불과 400여명에 불과한 미군 특수전 병력과 강력한 공중전력만으로 탈레반을 타도한 것을 이유로 자만했던 것이다. 빈 라덴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라크 전쟁을 논의하고 있었다.[92] 한편 토라보라에서는 오랜 전투 끝에 동굴을 공략해냈다. BLU-118/B 열압력 관통탄두를 사용한 것인데, 단단한 암석층으로 된 동굴 외벽을 관통한 이후 내부에서 폭발하는 구조였다. 폭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색에 들어가 시체들을 확인하지만 빈 라덴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파키스탄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미군의 병력은 제한적이었기에 대부분 알카에다와의 전투에 묶여 있었고, 봉쇄선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탈출했던 것이다.[93]

아나콘다 작전 [ 편집 ]

아나콘다 작전에서 동굴로 숨어든 탈레반 알카에다를 섬멸하기 위해 사용된 무반동총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세력이 사라지자,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미드 카리즈이 주도하에 아프가니스탄 임시정부(AIA)가 구성되었다. 한편 미군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잔당 토벌을 위해 아나콘다 작전을 개시한다. 샤히코트(Shah-i-Kot) 계곡에 숨어든 탈레반과 알카에다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3, 5특전단, 제10산악사단, 제101공수사단이 동원되었다. 또한 미군을 도와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작전에 참여한 ISAF(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 국제 안보지원군)소속의 호주, 덴마크,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연합군이 함께 하였다.[94] 이외에도 약 600여명의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참가했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병력이 참가하여 피아식별과 공동작전 상의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 작전에서 미군은 적의 병력을 과소평가하여 폭격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았고 실패하였다. 또한 탈레반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이 노출되면 폭격을 당한다는 것을 학습하고 숨어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군이 절대 아군을 버리지 않는 특성을 악용하여 미군이 추락하거나 고립되어 있으면 매복작전을 실시하였다.[95]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전략에 대응하여 ISAF는 그들이 동굴에 숨어서 공격하면 항공 엄호가 아닌 84mm 칼 구스타프(Carl Gustav) 무반동총을 사용해 적을 타격하였다. 사거리가 무려 700m나 되는 무반동총은 적의 사거리 밖에서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아나콘다 작전은 긴 시간 지속되었고 결국 성공한 작전으로 기록된다. 이 작전으로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약 1,500여명의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전사하였다.[96]

탈레반의 부활과 ISAF [ 편집 ]

미군이 탈레반의 중심 거점 칸다하르를 점령하였고, 2001년 12월 7일 탈레반이 항복 했었다(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칸다하르 점령 참고). 그 이후 탈레반은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으로 후퇴한 뒤 세력을 회복하였다.[97]한편 NATO는 9.11테러를 미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으로 간주했고, 상호안보조약에 근거해 치안 유지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2001년 12월 20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ISAF(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 국제안보 지원군)가 창설되었다. ISAF의 숫자는 2009년 1월 기준으로 55,100명 정도였고, 참여국가는 NATO 소속 26개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협력국이 12개에 이르렀다. 주요 파견국가는 미군을 중심으로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폴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제르바이잔, 터키, 싱가포르 등이었다.[98]

스완 전투 [ 편집 ]

2008년 8월 8일, 미국해병대 소속 7연대 2대대의 소대병력 30명과 탈레반 250명이 아프가니스탄 팔라하 스완(Shewan)마을에서 진행한 전투이다.[99]수적으로 매우 불리하여 상당한 병력손실이 일어날수도 있었지만, 미군 해병대 지정사수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키팅진지 방어전투 [ 편집 ]

미군 키팅진지에는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 진지에서 파견된 제 61기병연대 3대대 브라보 중대 소속병력 80명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곳은 원활한 헬기 접근을 위해 낮은 계곡지역에 위치해서 고지대에서의 공격에 취약했다.[100]탈레반은 이점을 공략해 고지에서 RPG-7 대전차 화기와 박격포 등의 곡사화기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다.[101] 미군은 AH-64D 아파치 공격헬기로 대응했지만 탈레반의 대전차 로켓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에 미군은 F-15E 전투기로 폭격을 가하여 전세 역전을 꿰했지만 계속하여 폭격을 가할수는 없었다. 결국 탈레반과 백병전을 수행할 정도로 전투가 격렬해졌다. 그러던 중 미군 전투기가 탈레반이 숨겨놓은 박격포 진지를 타격했고 전세가 역전된 탈레반은 후퇴했다.[102]

넵튠 스피어 작전 [ 편집 ]

2011년 4월 29일, 오바마 대통령은 특수전 부대를 통한 빈 라덴 제거작전, 즉 넵튠 스피어 작전을 지시하였다. 정예 특수전 병력 24명이 블랙호크 헬기를 타고 비밀리에 입수한 빈 라덴 저택으로 침투해서 빈 라덴을 사살했다.[103]

빈 라덴 사살 그 이후 [ 편집 ]

미군은 2011년 넵튠 스피어 작전에서 빈 라덴 사살을 성공한다. 미국은 전쟁 장기화로 인한 피로와 경제 위기 등의 다양한 요인들로 전쟁 지속에 부담을 느꼈고 2011년 NATO 회의에서 점진적 철군을 결정한다. 얼마 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치안권을 이양하고 철군을 완전히 마쳤다. 그러자 곧바로 탈레반이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역사 [ 편집 ]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탈레반에게 오사마 빈라덴의 인도와 알카에다 축출을 요구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98년부터 미국이 수배령을 내린 상태였다.[104] 탈레반은 빈라덴이 9·11 테러에 개입한 명백한 정황이 있음에도, 그 인도를 거부하였고, 다른 관련자 인도 요구도 묵살했다. 미국은 지연 전략으로써 증거 요구를 거부했고,[105] 2001년 10월 7일 영국과 함께 항구적 자유 작전을 개시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탈레반과 맞서 싸웠던 북부 동맹이 두 국가 연합에 참여했다.[106][107] 2001년 1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카불 확보를 비롯한 여러 임무에서 아프간 당국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안보지원군을 설립했다. 같은 달 본 회의에서 하미드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 임시 행정부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2002년 카불의 로야 지르가가 아프가니스탄 임시 행정부가 되었다. 2004년 아프가니스탄 총선에서 카르자이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국호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108]

NATO는 2003년 8월부터 국제안보지원군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2003년 말 국제안보지원군의 지도권을 인수했다. 이 무렵 국제안보지원군은 43개국에서 파병된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중 다수의 군대가 NATO 회원국에서 파병된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109]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일부도 NATO 사령부 예하에서 운용되었고, 나머지는 미국 사령부의 지시를 받았다.

초기 침공에서 패배한 이후, 무하마드 오마르가 탈레반을 재조직했고, 이들은 2003년부터 정부와 국제안보지원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110][111] 무기가 열악했고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 하카니 네트워크, 헤즈비 이슬라미 굴부딘을 비롯한 여러 무장단체의 반군들은 게릴라전, 교외 매복, 도심 지역에서의 자살 테러, 그리고 변절자들의 살해 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전쟁을 소모전으로 이끌었다. 탈레반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들에 속하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취약점을 이용했다. 탈레반은 남부와 동부의 교외 지역에서 다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국제안보지원군은 2006년 마을 소탕 및 방어 계획인 대반란 작전을 위해 군사를 파병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112][113]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폭력이 급속하게 증가했다.[114] 국제안보지원군이 탈레반 반군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동안, 북서 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115] 2009년 군대 수가 증가한 이래로, 2011년까지 군대 수는 향상세를 보였고, 2011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과 국제안보지원군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은 140,000명에 이르렀다.[116] 이들 중 100,000명이 미군이었다.[117][118] 2011년 5월 1일 네이비 실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2012년 5월, NATO 지도자들은 NATO 시카고 회담에서 그들 군대 철수를 지지했다. 유엔 지원 평화 회담이 정부와 탈레반 사이 시작했다.[119] 2014년 5월, 미국은 주요 작전이 2014년 12월 종료된다는 것과 이들 잔여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120] 2014년 10월, 영국군이 헬만드 주에 있는 마지막 기지를 아프가니스탄 군에 인계했고, 이것은 영국군 전투가 공식적으로 종료했음을 의미했다.[121] 2014년 12월 28일, NATO는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안보지원군 전투 작전권을 종료했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완전히 책임권을 인계·전환했다. NATO는 ISAF 계승단체로 RS 임무를 시작했다.[122][123] 2017년 5월, 13,000명 아프가니스탄 주둔 외국군이 철수에 관한 공식적인 계획 없이 남아있다.[124][125]

하지만 2021년 5월부터 미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판세가 탈레반 쪽으로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들을 탈레반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8월 12일, 아프가니스탄의 제2, 3의 도시 헤라트와 칸다하르가 탈레반에게 넘어갔고 8월 13일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결국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에게 항복하면서[126] 탈레반은 카불에 무혈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총사망자 23만 명, 난민 500만 명, 재산 1100조원(한화)의 피해가 발생했다.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자료 [ 편집 ]

20년 전쟁의 비극적 결말, 아프가니스탄은 어디로 향하는가

지난 15일(일)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에 항복을 선언하며 2001년 이후 20여 년 만에 탈레반이 아프간 권력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7월 초 미군이 아프간 내 최대 군사 기지인 바그람 공군 기지에서 전격 철수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아프간 정부는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한 직후 아프간 전역에서 출국하려는 인파가 몰리며 카불 국제공항은 아수라장이 됐다. 미국 대외 개입 실패의 대명사인 1975년 ‘사이공 탈출’이 46년 만에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왜 실패했나= 2001년 9·11 테러의 주동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간에 은신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곧장 다국적군을 조직해 아프간 침공에 나섰다. 개전 후 불과 한 달 만에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음에도 아프간 전쟁은 20년간 지속되며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됐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위해 아프간 주둔군을 감축하며 탈레반이 산악 지대로 이동할 여지를 줬고, 새롭게 수립된 아프간 정부가 지방 장악에 어려움을 겪는 틈을 타 탈레반이 다시 세력을 불렸기 때문이다. 이웅현 교수(고려대 융합연구원)는 “다민족 사회인 아프간은 전통적으로 민족의 자율성이 강조돼 중앙 권력이 지방 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라며 “아프간 정부가 무너지기 전부터 지방의 상당 지역은 탈레반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아프간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도 전쟁 장기화의 원인으로 꼽힌다. 박태균 교수(국제대학원)는 “미국이 탈레반과 이슬람을 객관적으로 이해했는지 의문”이라며 “테러 조직 소탕을 위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대신 탈레반 정부와 테러 세력을 분리하는 데 집중하면 됐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과거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오해해 베트남 전쟁이 발생했듯 아프간 전쟁에서도 미국의 부실한 인류학·지정학적 이해가 불필요한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아프간 침공 이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변수가 됐다. 유달승 교수(한국외대 페르시아어·이란학과)는 “미국은 아프간인을 위한 아프간 정부가 아닌 자국을 위한 친미 정부를 건설했다”라며 “강력한 친미 중앙 정부를 수립하면 아프간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탈레반의 주요 지지층인 파슈툰인 외에도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투르크멘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아프간의 특수성을 간과하며 전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가 수립됐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한화 2,000조 원을 상회하는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을 지출하며 대규모 병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2011년 파키스탄에서 미군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며 전쟁을 지속할 명분이 사라졌고, 대내적으로도 상황이 급변하며 미국은 출구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산정책연구원 장지향 선임연구위원은 “장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미국 국내 여론이 크게 악화했다”라며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비롯해 미국 사회의 전쟁 피로감이 심하게 누적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장 연구위원은 “미국이 셰일가스 혁명으로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면서 중동 지역의 전략적 중요도가 낮아졌다”라며 철군의 배경을 짚었다.

◇탈레반의 온건화는 가능할까= 과거 이슬람 극단주의에 기반한 ‘샤리아 법’ 통치로 악명을 떨친 탈레반이 아프간을 재장악하며 아프간 내 인권 상황에 대한 국제 사회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탈레반은 변화를 약속하며 극단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다. 다만 이것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지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이웅현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혼란 통제를 위한 공포 통치를 펼쳐도, 탈레반 내에서 세대 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변화할 것”이라며 “외국군 철군을 이끌어 낸 탈레반 온건파가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유달승 교수 역시 “아프간 재건을 위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탈레반이 다양한 정파가 참여한 개방적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예측했다.

반면 박현도 교수(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는 “국제사회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겉으로만 변화를 외칠 뿐, 탈레반이 극단주의 종교관을 버리지 않는 이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라고 전망했다. 이어서 “새 정부 구성원으로 하마평에 오른 인물 중 테러리스트도 포함됐다”라며 “새로운 정부 구성에 기대할 부분이 거의 없다”라고 지적했다. 장지향 연구위원도 “설사 탈레반 수뇌부가 온건 정책을 펼친다 해도 하부 조직원들이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라며 우려를 표했다.

◇탈레반 재집권 그 이후= 탈레반이 카불을 비롯해 아프간 국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정부 수립까지 선포한 상황이지만, 아프간 전역이 빠른 시일 내에 안정화될지는 미지수다. 장지향 연구위원은 “탈레반에 대한 항전을 선언한 구 북부동맹 세력의 전력이 상당하다”라며 “아프간이 내전으로 돌입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특히 혼란을 틈타 아프간이 테러 세력의 각축장이 될 우려가 있다. 장 연구위원은 “아프간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도피처로 인식되며 알 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세력이 집결하고 있다”라며 “근본주의 세력 간의 암투가 예상된다”라고 설명했다. 20여 년간 서구식 자유주의를 경험한 도시 지역 청년 세대도 변수다. 탈레반이 억압적 통치로 회귀한다면 이들의 집단적 반발이 예상된다.

국제정치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 아프간 철군은 미국이 중국 견제에 집중하며 대외 정책의 중심축을 중동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당장은 미국의 실패를 반길 중국과 러시아도 아프간의 혼란이 신장 위구르 지역이나 중앙아시아 일대의 이슬람 세력으로 전이되는 것을 경계할 것으로 보인다. 이웅현 교수는 “장기적으로 국제사회가 탈레반 정부를 승인할 것”이라며 “탈레반과 주요국 정부 모두 강경 대치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아프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하면 서방과 중국, 러시아 모두 안정을 추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단순한 선악 구분에 기반해서는 아프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아프간의 역사, 문화, 민족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돼야 한다. 유달승 교수는 “탈레반의 부상은 아프간의 비극적 역사를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눈에는 그저 테러집단으로 보이는 탈레반이 왜 아프간 농촌 지역에서는 지지를 받았는지, 누가 진정 아프간을 혼란으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 시작도 마무리도 잘못됐다

[기고] 유달승 교수(한국외대 페르시아어·이란학과)

탈레반 재집권 어떻게 볼 것인가

중, 경제지원 명분 우호 제스처

러·터키도 아프간에 대사관 유지

이란도 긴장 속 도움 유지 밝혀

이슬람 에미리트로 복귀할지

이슬람공화국 유지할지 갈림길

18일(현지시각) 탈레반 대원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스프레이로 지워진 미용실 광고판 앞을 총을 들고 지나가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마침내 2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탈레반은 15일(현지시각)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전쟁이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날부터 탈출하려고 카불 국제공항에 몰려든 아프간 국민들의 모습은 공포와 혼돈 그 자체였다. 지난 5월3일 미국이 아프간 철군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동안 아프간 상황이 어떠했기에 또다시 탈레반이 재집권할 수 있었을까?

아프간 전쟁은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었다. 20년간 미군 2448명이 사망했으며 1조달러(약 1176조원)가 넘는 전비가 소요되었다. 물론 아프간 현지인의 사망자와 피해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전쟁의 참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후 정확한 통계수치가 필요할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았으며, 미군 철수가 국익을 위한 결단이라고 항변했지만 실패한 전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 전쟁에서 실패했는가? 먼저 미국의 전쟁 목적과 의도는 정당하지 못했다. 미국의 공격은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조직을 넘기라는 제안을 탈레반 정권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병 인도를 거부했다고 공격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고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9·11 테러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거나 협력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유엔 승인 없는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지지기반과 목표가 매우 다르다. 탈레반은 아프간인, 주로 파슈툰인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아프간에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반면에 알카에다는 아랍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미국의 전쟁 의도는 친미 정권의 수립에 있었다.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반탈레반 세력인 북부 동맹과 연대했다. 북부 동맹은 1989년 소련군 철수 이후 나지불라 정권을 붕괴시키고 1992년 12월 탄생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과 관련된 조직이다. 반소련 저항조직이었던 무자헤딘 7개 단체가 연합해 랍바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이후 랍바니 연합조직 대 반랍바니 연합조직이 내전을 벌이다가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아프간 북부로 이동했다. 미국은 아프간인의 손으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북부 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북부 동맹은 사실상 탈레반 전복의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미국은 북부 동맹을 배제하고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정부의 수반으로 지명했다. 카르자이는 1996년부터 탈레반과 중앙아시아 가스(CENTGAS) 컨소시엄 협상에서 미국 에너지 회사 유노칼의 고문이자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과도 정부 수반을 거쳐 대통령(2004-2014)으로 당선되었다. 중앙아시아 가스 컨소시엄은 1996년 8월 유노칼, 델타 오일(사우디아라비아), 가즈프롬(러시아) 및 투르크멘로스가즈(Turkmenrosgaz: 투르크메니스탄)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송유관 협정을 체결했다. 1997년 5월 유노칼은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과 3자 협정을 체결했고 9월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이 탈레반에게 송유관 통과료를 15% 주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하자 탈레반이 크게 반발하면서 이 사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국의 실제 목적은 아프간에 친미 정권을 수립해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부 동맹을 배제한 미국의 또다른 목적은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2001년 가을 CIA와 이슬람혁명수비대 장교가 만나서 북부 동맹 지원을 논의했고 이란을 통해 자금과 무기가 북부 동맹의 지도자 랍바니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과거 미국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통해 탈레반을 지원했던 똑같은 방식이었다. 그 당시 이란 쪽 대표가 2020년 1월3일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암살당한 카셈 솔레이마니 이슬람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었다.

또한 미국의 아프간 국가 건설의 목표와 방향도 잘못되었다. 미국은 아프간에 강력한 친미 중앙정부를 수립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미국은 북부 동맹이 소수 민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수파인 파슈툰인(42~45%)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프간은 다민족 국가로 파슈툰인 이외에도 타지크인(25-27%), 하자라인(8~9%), 우즈벡인(8~9%), 투르크멘인(3%), 발루치인(2%)으로 구성되었다. 북부 동맹의 중심세력은 타지크인, 하자라인, 우즈벡인이다.

하지만 정통성도 없고 지지기반도 취약한 파슈툰인 지도자인 카르자이와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2014~2021)은 부패와 무능의 상징이었고 아프간 국민들은 그들을 카불 시장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과 협상 과정에서 해외로 도주해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과도 정부의 수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친미 중앙정부는 아프간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해관계와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국의 관심사도 친미 정권인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된다. 아프간 국민들은 비무슬림 이방인에 의존하는 친미 중앙정부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미군의 강압적이고 무례한 정책과 태도는 탈레반 해방의 구원자가 아니라 또다른 아프간의 점령자라는 시각으로 바뀌었고 미군의 공습에 의한 민간인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반미 감정은 점차 확산되었다. 특히, 2009년 5월 아프간 서부 파라주에서 미군의 오폭으로 인해 1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지방과 시골에서는 반미 운동으로 격화되었고 정통 탈레반의 주위에 다양한 민족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가 결합하면서 신탈레반이 탄생하게 되었다.

화력과 병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아프간 정부군이 탈레반을 상대로 교전 한번 없이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군의 부패와 무능을 언급하기도 한다. 탈레반은 정부군 30만명에 견줘 5분의 1 규모에 불과했지만 정부군의 실제 병력은 매우 적었고 대다수가 유령 군인이라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보다 분명한 사실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위해 어떤 군인도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은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마무리도 잘못되었다.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으로 다른 국가와 민족을 지배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잘못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쟁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주둔 미군을 9·11 테러 20주년인 9월11일 이전에 완전히 철수하겠다고 밝혔다가 7월 8일 기자회견을 통해 8월 31일로 변경했다. 아프간의 험난한 지형 및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아프간의 겨울철에는 사실상 휴전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 이벤트를 위한 철군 시점 오판으로 인해 아프간의 혼란을 가증시켰다.

탈레반 재집권 이후 중앙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고 주변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미군이 떠난 아프가니스탄을 중국과 러시아는 표면적으로는 환영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복잡하다. 이는 미국 세계전략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는 향후 아프간 사태가 자국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탈레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서방 국가들과 달리 아프간 대사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간을 침공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명분은 친소련 아프간 인민민주당 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 목적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국가로 이슬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아프간의 대중 봉기를 단순히 부족 갈등으로 규정하는 정책 오류를 범해 아프간의 덫에 빠졌고 이는 소련 붕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은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아프가니스탄은 약 76㎞의 국경선을 맞대고 있고 탈레반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지원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 지원을 명분으로 탈레반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17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미군이 배치되어 있다. 카불/로이터 연합뉴스

터키와 이란도 아프간 대사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상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상황과 입장은 다르다. 터키는 탈레반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로 환영한다면서 모든 정파와도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통해 아프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움직이고 있다. 이란은 아프간 사태를 미국의 군사적 패배로 규정하면서 아프간의 안정과 회복을 돕겠다고 밝혔지만 탈레반의 재집권에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는 탈레반이 시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시아파인 하자라인을 대규모로 학살했었고,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 재집권 이후 아프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슬람 에미리트(토후국)로 복귀할지 아니면 이슬람 공화국을 유지할지 크게 두 가지 갈림길에 직면해 있다. 탈레반은 공식석상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는 과거로의 복귀를 상징하지만 아프간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양한 정파를 내각에 참여시켜 개방적인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

과거 탈레반이 집권해 보여준 여성 차별, 우상숭배란 이유로 사진 촬영 금지와 세계문화유산 바미안 석불 파괴 등 충격적인 정책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우려와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및 파키스탄은 탈레반 정부를 공식 인정했고 미국은 탈레반의 이슬람법 조치에 대해서 반대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침묵했다. 이제는 국제사회가 하나된 목소리로 아프간 사태를 대처해야만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아프간 정부가 출범할 수 있다.

아프간의 현실과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고 2007년 아프간 피랍 사태를 겪었던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슬람주의자도 아니고 탈레반의 이슬람 극단주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탈레반의 재집권이라는 현실과 아프간의 역사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흔히 아프간을 ‘아시아의 각축장’, ‘침략자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이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과 분쟁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이다. 아프간의 비극은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 문화와 종교적 교조주의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아프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단지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세계] 아프간 국민, ‘전쟁 주요 원인은 빈곤과 실업’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선에 성공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19일 취임선서를 마친 가운데 아프간 국민은 내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빈곤과 실업을 꼽았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지속된 내전 기간 중 강제 이주와 감금, 고문 등에 시달렸던 아프간 국민들은 평화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나타냈습니다. 조은정 기자와 함께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문) 지난 1978년 친 소련 세력의 쿠데타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슬람 단체인 탈레반의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국민은 빈곤과 실업을 내전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고요?

답)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Oxfam)이 아프간 성인남녀 7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18일 공개했는데요. ‘전쟁의 대가, 아프간 갈등의 경험, 1978~ 2009’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빈곤과 실업을 전쟁 발생의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48%는 부패와 정부의 비효율성을 전쟁 발생의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문) 전문가들도 일반적으로 가난과 무력투쟁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죠?

답) 그렇습니다. 영국 정부 산하의 ‘왕립합동군사연구소’ RUSI의 말콤 차머 교수는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부패한 관료에 의해 악화된 빈부 격차가 무력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차머 교수는 “아프간 정부의 장관들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현재 진행되는 내전을 악용하고 국제 구호자원을 빼돌리며, 마약을 거래해 상당한 부를 축척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차머 교수는 이에 반해 대부분의 아프간 국민은 내전 기간 동안 별로 이득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지난 2001년부터 아프간 전역에서 게릴라전과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국민이 탈레반을 내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은 점이 흥미로운데요?

답) 탈레반 뿐 아니라 아프간 전쟁에 개입한 여러 당사측이 이번 조사에서 전쟁의 원인으로는 지목되었습니다. 응답자의 36%가 탈레반을 전쟁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고요, 25%는 다른 나라들, 18%는 알-카에다, 18%는 다국적군을 지목했습니다. 이 같은 배경으로 ‘왕립합동군사연구소’ RUSI의 말콤 차머 교수는 “지난 30년간 계속된 내전은 여러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탈레반 보다 더 심하게 국민 개개인에 불이익을 끼친 이들도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차머 교수는 “특정 시기를 놓고 볼 때 군벌이나 정부 관료들이 국민에게 해를 끼치기도 했기 때문에, 국민은 현재 고난의 책임을 여러 다른 세력에 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 그러면, 아프간 국민이 30여 년의 내전 중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궁금한데요.

답) 예.응답자들의 76%는 1979년 이후 강제이주를 당했고요, 13%는 투옥당한 경험이 있으며, 21%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43%는 내전 중 소유한 물건들이 파괴 됐다고 밝혔는데요. 이 같은 고난에 견디다 못해 응답자의 82%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문)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아프간 국민들이 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애타게 바라고 있을 것 같은데요.

답) 옥스팜은 설문조사에 응한 아프간 인들 모두가 평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나타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한 무력 충돌의 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옥스팜은 설명했습니다.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되고 빈곤이 경감되며, 효율적이고 신뢰 가는 정부가 세워져 보건과 교육 등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옥스팜의 마이클 베일리 씨의 말을 들어보시죠.

That analysis by Afghans them..

베일리 씨는 “이번 설문 조사를 통해 아프간 인들이 스스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한마디로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안정이 오려면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이 나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문) 옥스팜이 일반 국민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아프간 정부에 어떤 조언을 하고 있습니까?

답) 부패 척결을 가장 큰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최근 국제투명성 기구조사에서는 아프간이 소말리아다음으로 가장 부패한 국가로 지목되었습니다. 옥스팜은 아프간 정부가 부패를 척결하고 법 질서를 확립하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공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옥스팜은 또 경찰조직과 사법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내전을 벌이고 있는 반군과 정부군 양측은 무엇보다 민간인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옥스팜은 지적했습니다.

문) 아프간 정세를 개선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답) 단순히 아프가니스탄에 원조량을 늘릴 것이 아니라, 국가 전반에 걸쳐 인도주의적 지원과 재건 및 개발 활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할 것을 옥스팜은 촉구했습니다. 또 아프간 정부의 부패와 범죄 척결 노력을 국제사회가 지원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진행자) 조은정 기자와 함께 30년간 그치지 않고 있는 내전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평가와 개선 방안에 대해 알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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