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인디언 |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현재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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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현재는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디언들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필그림의 상륙을 도왔던 원주민, 즉 인디언들의 역사는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배은숙의 호락호락한 세계사 제11편.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현재를 통해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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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 – 나무위키

또 다른 말로 인디언(영어, Indian)/인디오(스페인어, Indio)라 부르기도 한다. 대개 인디언은 북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이르는 것이고, 인디오는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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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5/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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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정복자’ 미국, 인디언 잔혹사는 지금도 진행중 – 한겨레

[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_ 그림 속 아메리칸 인디언유럽 백인이 ‘발견한 신대륙’에서원주민 약탈하고 쫓아낸 역사를그림에서 선민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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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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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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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메리카 인디언

  • Author: 일상의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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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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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기원, 정설로 굳어질까 – Sciencetimes

DNA 분석법이 발달하면서 전 세계 모든 인류의 뿌리는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직 모친의 난자를 통해서만 후손에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역추적한 결과 인류 최초의 여성은 약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여인이었던 것.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토콘드리아 이브’이다.

그 후 부친의 정자를 통해서 유전되는 Y염색체를 그 같은 방법으로 역추적한 결과 최초의 남성인 아담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남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그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인류학의 미스터리가 하나 남아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하는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정리된 가장 유력한 가설은 아시아 북부와 아메리카 북서부를 연결하는 연륙교인 ‘베링기아(Beringia)’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살던 아시아인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빙하기였던 3만년 전만 해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는 두께 수백 미터의 거대한 얼음 덩어리 연륙교인 베링기아로 연결되어 있었다.

베링기아가 가장 넓었을 때는 폭이 1500킬로미터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거기에 풀과 키 작은 나무들이 우거진 사이로 크고 작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난 1983년 구소련의 지질학자들은 베링해의 해저에서 탐사를 통해 베링기아의 호수 및 하천들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DNA 분석 결과, 폴리네시아인과 비슷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항해기술이 뛰어난 폴리네시아인이 태평양을 건너왔다는 설이 대두되었다. 브라질에서 원주민인 ‘보토쿠도스’를 대표하는 2개의 두개골에 대한 유전체적 선조가 폴리네이사인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대서양을 통해 유럽인들이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고대인의 유골이 현재 원주민이나 아시아계 인류의 모습과 너무 다르고 오히려 유럽인의 외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메리카 대륙의 클로비스라는 석기 유물과 동일한 유물들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발견되었다는 점도 그 증거 중 하나에 포함된다.

아메리카 이주 전에 유럽인 유전자 섞여

그밖에도 서아프리카인들이 멕시코 만류를 타고 남미에 도달했다는 설과 심지어 남극대륙에서 이주해 왔다는 설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같은 가설들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연구결과들이 잇달아 발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즉, 베링기아를 통한 베링해협 유입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인데, 그 외의 다른 가설들은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된 셈이다.

지난 5월 미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채터스 박사팀은 ‘나이아의 소녀’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베링기아 지역에 살았던 인류가 지닌 유전자 특질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나이아의 소녀’란 2007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 수중동굴에서 발견된 1만3000년 전의 소녀 유골이다.

애초 이 소녀의 유골은 작고 긴 얼굴 등의 특징이 현재 원주민과는 다르며, 오히려 유럽인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골의 사랑니 조직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했더니 현재 아메리카 원주민만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 것. 따라서 최초 정착 원주민과 현재 원주민 모두 베링기아를 통해 넘어온 사람들의 후예임이 확인됐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다만 이 소녀의 얼굴형이 원주민보다 유럽인과 비슷한 것은 이주하기 전에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가 서로 섞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시베리아의 말타 마을에서 발견된 2만4000년 전 소년의 유골은 더욱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 소년의 DNA는 현존하는 인류의 온전한 게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덴마크의 코펜하겐대학 연구팀이 이 소년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유럽에서 발견되는 ‘하플로그룹 U’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현대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 가운데 30%가 이 소년과 같은 유전자 풀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선조들이 동아시아인들과 분리되어서 북쪽으로 이동하던 중 시베리아의 어느 지역에서 서부 유라시아로부터 온 사람들과 서로 조우하게 되었고, 서로 피가 섞이면서 이 소년과 같은 후손들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 후손들이 결국 베링기아를 건너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이 된 것이다.

즉,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직접 건너간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를 거쳐 그곳 사람들과 섞인 다음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아메리카 초기 원주민들이 유럽인의 특징을 갖고 있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번 발견으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새로운 단서 제공해줄 쌍둥이 DNA 분석 중

현재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폴리네이사인들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이유에 대한 정황도 밝혀졌다. 이스터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DNA를 채집해 분석한 결과 이들이 14~16세기경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

이스터섬은 네덜란드 제독이었던 야곱 로게벤에 의해 1722년 처음 발견된 섬으로서, 남아메리카의 칠레로부터 약 3200킬로미터, 이웃 섬도 22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인간의 거주지 가운데 가장 고립된 절해고도다. 이스터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조상은 폴리네이사인이다.

그런데 최근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는 유골에 대한 DNA 분석이 시작됐다는 소식이다. 5년 전 알래스카의 타나마강 근처 ‘업워드 선 리버’에서 발견된 유아들의 유골이 바로 그것. 이 지역은 지난 25년 동안 북극의 베링기아 지역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 중 하나로 꼽힌다.

알래스카에서 발견되는 아메리카 원주민 거주지역의 대부분은 단기적인 수렵 캠프인데 비해 이곳은 장기적인 정착지로서 주거 구조의 흔적을 포함한 유적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연구팀의 추론에 의하면 1만1500년 전에 매장된 이 유아들은 쌍둥이로서,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다른 한 명은 태어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거주 구조물 안에서 아이들을 매장하는 것은 시베리아 동부의 우시키 유적지에서 보고된 바 있으며, 이러한 매장 행위는 베링해를 마주하고 있는 각 지역을 연결해주고 있다. 이 유아들의 DNA 분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4439)

‘야만의 정복자’ 미국, 인디언 잔혹사는 지금도 진행중

[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_ 그림 속 아메리칸 인디언

유럽 백인이 ‘발견한 신대륙’에서

원주민 약탈하고 쫓아낸 역사를

그림에서 선민사상·문명화로 미화

지금도 제 목소리 내면 탄압 여전

테오도르 갈레, <아메리카>, 1600년대, 동판화, 엘리샤 휘틀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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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캐나다 원주민(아메리칸 인디언) 기숙학교 터에서 어린이 215명의 유해가 발견돼 총리가 “캐나다의 부끄러운 역사”라며 사과한 일이 있었다. 과거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도 원주민 어린이를 가족과 강제로 떼어놓은 뒤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했고, 백인 사회 동화를 위해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육체적·정신적·성적 학대 등의 심각한 인권침해가 자행됐고, 많은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백인들은 왜 이다지도 집요하게 원주민 문화를 없애려 애썼던 걸까.

“하느님께서 주신 이 대륙”

1492년 콜럼버스가 발을 내디딘 이래, 아메리카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온 백인들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선 이미 원주민들이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백인들은 원주민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플랑드르 화가 얀 반데르스트라트(1523~1605)의 그림을 독일의 테오도르 갈레(1571~1633)가 판화로 제작한 작품 에는 그러한 편견이 잘 드러나 있다. 는 이탈리아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1512)가 1497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림 왼쪽에 보이는 대형 범선을 타고 온 그는 의복을 잘 갖춰 입고 십자가와 천체관측기를 든 채 막 상륙한 참이다. 그 앞 해먹에는 발가벗은 채 잠들어 있던 여성이 베스푸치의 기척에 놀라 일어나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작품 하단을 보면 라틴어로 “아메리쿠스(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한번 부르니, 이후로는 항상 깨어 있더라”라고 적혀 있다. 즉 야만의 상태로 잠들어 있던 여자는 아메리카이며, 그녀는 정복자 남성으로 형상화된 유럽 백인들에 의해 문명화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들 뒤편에 있는 원주민들의 식사 장면으로 확증된다. 원주민들은 불을 피우고 뭔가를 굽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다름 아닌 사람의 다리 부위이다. 원주민들은 미개하고 원시적인 타자인 것이다. 이제 유럽인들은 이 아메리카라는 여인이자 대륙을 미몽에서 구원할 남성 십자군이 될 터였다.

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대한 나름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존 오설리번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미국의 한 신문사 주필이었던 그는 1845년 “해마다 수백만씩 인구가 증가하는 우리(백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이 대륙을 우리가 모두 차지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다”라는 기사를 썼다. 요컨대 미국은 북미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오설리번은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인류의 진보를 추구하는 민족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명백한 운명’이 미국 백인의 ‘선민사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백인 화가 존 가스트(1842~1896)가 1872년에 그린 에서 엿볼 수 있다. 왼쪽에는 태평양이, 오른쪽에는 대서양이 보이는 가운데 미국을 상징하는 컬럼비아 여신이 전신선과 철도를 이끌고 로키산맥을 넘어 행진하고 있다. 여신의 뒤쪽으로는 역마차와 기차가 들어온다. 컬럼비아 여신은 서부로 금과 영토를 찾아 이동하는 백인들의 길을 터주고 이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팽창과 전진이 신의 계시이자 역사적 사명임을 보여준다.

존 가스트, <미국의 전진>, 1872년, 캔버스에 유채, 오트리 미국 서부 박물관

여신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 역시나 앞길에 있던 원주민과 버펄로(원주민 생존의 원천이자 ‘형제’로 불렸던 들소)는 혼비백산하며 밀려나고 있다. 이 그림이 보여주듯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영토 약탈을 합리화한 주장인 ‘명백한 운명’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그들은 학살당하거나, 백인들에게 속아 불평등 계약을 맺고 대대로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갈레의 가 설파하듯이 원주민의 ‘야만’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는 백인문화에 동화되어 알파벳을 모델로 문자까지 만들어 사용한 유일한 원주민인 체로키족조차 여지없이 내쫓겼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

결국은 땅이었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못 견디게 탐났기에 백인들은 그토록 모질게 원주민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주저할 필요조차 없었다. ‘명백한 운명’이 모든 것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주민들은 원래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토지의 5%에도 못 미치는 조그마한 ‘인디언 보호구역’에 고립되었다. ‘보호’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이제 원주민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만났던 15세기 당시 미국 내 원주민 인구는 500만명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25만명으로 95% 급감했다. 한때는 그들의 땅이었던 미국에서 이제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극소수 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주민은 더이상 괴성을 지르며 백인을 공격하는 악인이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원시인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대평원에서 생태주의적 삶을 영위하는 초월자나 현자로 그려진다. 백인에게 영적인 각성을 주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신화적·낭만적 재현은 이제 원주민들이 백인에게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이런 낭만적인 시각은 곧바로 거둬진다. 2016~2017년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 반대운동’ 진압이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노스다코타주의 스탠딩록 보호구역에 거대한 송유관을 건설하는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최초 설계에서는 이 송유관이 노스다코타주의 행정수도인 비즈마크시를 지나도록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도시의 주민은 90%가 백인이었고 결국 송유관 경로는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연히 원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송유관이 샐 경우 원주민의 수원지이자 성지인 오와히 호수가 오염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유관이 새든 말든 트럼프 행정부는 원주민들의 저항을 철저하게 무력화했고 결국 2017년 송유관을 완공했다.

1860~70년대에 대평원 지역 원주민과 버펄로 학살을 주도했던 필 셰리든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선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죽어야 사는 존재, ‘인디언 잔혹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아메리칸 인디언

“아메리칸 인디언”, 교회 역사 주제

“아메리칸 인디언”

교회가 조직되기 전 한 세기 동안, 북미에 거주하던 아메리칸 인디언 수는 40만 명 가량 감소했다. 유럽에서 온 새로운 정착민들과의 전쟁, 질병, 토착 경제의 붕괴가 그 원인이었다. 같은 시기에 유럽계 미국인 인구는 오백만 명 이상 증가했다. 1800년대 식민지 시대 정착지는 주로 대서양 연안에서 800킬로미터 범위 내에 있었지만, 백인 정착민들은 곧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 결과 인디언과 백인 정착민들 사이의 충돌이 빚어졌다.1

1800년대 초반까지 인디언 부족들은 유럽계 미국인 정착민들과 수 세기 동안 무역, 외교, 군사 동맹 관계를 맺어 왔으며,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부족이 영토와 자원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830년, 미국 의회는 인디언 부족들을 미시시피강 서쪽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개신교 교회들은 복음 전파를 통해 인디언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추방된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 사업을 후원했다. 그러나 인디언 이주 정책은 극심한 분열과 고통을 야기하며 갈등을 심화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 인디언과 후기 성도와의 만남 인디언 이주 법안이 통과된 같은 해에 몰몬경이 출판되었다. 몰몬경을 통해 교회 회원들은 아메리칸 인디언의 과거 역사와 앞으로의 운명에 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초기 성도들은 아메리칸 인디언이 모두 몰몬경에 나오는 백성의 후손이라고 믿었으며, 그들과 고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성약의 유산을 함께 나눈다고 믿었다.2 초기 성도들은 다른 유럽계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인디언에 대해 선입견을 품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후기 성도는 미국 원주민이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은 이들이며 한때 복음을 거절한 결과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3 이러한 믿음 때문에 초기 성도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몰몬경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있었다. 1830년 교회가 설립되고 몇 달 후, 후기 성도 선교사들은 미국 국경 지역에 있는 인디언 특별보호구로 떠났다. 팔리 피 프랫은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인근 지역으로 이주한 델라웨어(르나피) 부족의 지도자인 윌리엄 앤더슨(Kik-Tha-We-Nund)이 선교사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으며, 통역사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추장은 몰몬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는다”고 전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한 정부 관리는 선교사들이 제대로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에서 인디언에 대한 선교 활동을 금지했다.4 프랫과 그의 일행은 인디언이 몰몬경을 받아들일 날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 간, 후기 성도와 아메리칸 인디언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5 이미지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설교하는 조셉 스미스. 1830년대 미주리주에서 온갖 곤경을 겪으며, 교회 지도자들은 현지 원주민들과 접촉하는 것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선교 사업을 이용하여 인디언들을 선동한다는 교회 적대 세력의 비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1840년대에 조셉 스미스와 제일회장단은 수족(다코타), 포타와토미족(보데와드미), 스톡브리지족(모히칸)을 비롯하여 위스콘신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여러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냈다.6 소크족(아사키와키)과 폭스족(메스콰와키) 대표들은 나부에서 조셉 스미스를 만났으며, 조셉은 그들에게 몰몬경과 새 예루살렘을 세우려는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7 2년 후, 포타와토미 부족 지도자들은 조셉과 성도들에게 원조 및 연합 부족 동맹 가입을 요청했다. 조셉은 이를 거절했으나 그들에게 몰몬경을 통해 평화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8 조셉이 사망한 후 브리검 영의 지도 아래에 오십인 평의회는 인디언 부족들과 더 폭넓은 동맹을 논의했으나, 1846년 성도들의 서부 이주를 준비하면서 그들과의 외교 노력은 중단되었다.9

유타의 원주민과 후기 성도 개척자 교회 회장이자 준주 지사, 그리고 그 지역 인디언 사무국장이었던 브리검 영은 인디언 거주 지역에 몰몬 정착지를 개척하기 위해 평화 정책을 추구했다. 후기 성도들은 인디언의 언어를 배웠고, 교역을 구축했으며, 복음을 가르쳤고, 무엇보다도 인디언과의 공존을 추구했다. 후기 성도와 인디언 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일반적인 행동 기준이면서 궁극의 목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브리검 영이 지속적인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평화 정책은 공평하지 못했고 일관되지 않게 적용되곤 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두 문화 사이에는 토지와 재산 사용에 관한 추정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오해는 마찰로 이어졌고 때로는 폭력으로 번지기도 했다.10 유타 지역에서 후기 성도와 현지 인디언 부족 간에 있었던 가장 큰 충돌은 후에 워커 전쟁(1853~1854)과 블랙 호크 전쟁(1865~1872)으로 알려진 두 무력 사태였다. 이는 처음에는 몰몬 민병대와 우트족 인디언 사이의 작은 충돌에서 비롯되었으나 점점 대규모 접전으로 악화됐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서부 산악 지대에 있는 토착민들의 숫자가 급감하고 미국 연방법이 인디언들의 활동 지역을 보호 구역 내로만 제한하면서 후기 성도와 인디언 사이의 무력 충돌은 자연히 줄어들었다.11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장소 5선

오클라호마 주 탈레콰

오클라호마 주 오자크 산맥(Ozark Mountains) 산등성이에는 180,000m² 규모의 체로키 문화유산 센터(Cherokee Heritage Center)가 자리해 체로키 부족의 문화와 유산을 보존합니다. 1710년 그때 그 시절 체로키 마을을 꾸며놓고 역사를 보여주는 민속촌인 딜리그와(Diligwa)를 걸으며 수공예 시연을 관람하고 이야기도 들어보며 18세기 초 일상을 경험해보세요. 그리고서 19세기 말 체로키 마을의 시골 지역을 그대로 재현한 센터, 아담스 코너(Adams Corner)를 방문해보세요. 눈물의 트레일(Trail of Tears)로 향해 오늘날 오클라호마 주로 불리는 땅에서 대를 이으며 살아가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1830년대 내몰리며 강제로 이주했던 역사를 꼭 살펴보세요. 이 센터에는 자기 및 바구니 등 체로키 전통 예술을 체험하는 문화 강좌도 제공하며 아울러 체로키 부족의 전통 작품과 현대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연례 아트 쇼도 개최합니다.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아스텍 원주민들은 820년경 아스땅(아사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어

⊙ 아기를 업어 키우며 젖 줄 때는 ‘찌찌’라고 해

⊙ 상투·갓, 가체·쪽진 머리, 사주와 점, 정한수 등 풍속 유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 우리말 연구> 등.

우리 민족은 일찍이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이 지역을 호령했던 동북아(東北亞)의 강자(强者)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우리 민족은 소수(少數)로 전락하고, 고구려와 부여에 복속했던 숙신(肅愼)족의 후예인 말갈족(후의 여진족)이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만주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흔적을 멀리 중남미(中南美)의 멕시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은 우리 민족의 고대(古代)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비록 중국의 관점에서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시대 우리 선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왔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조선(古朝鮮)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漢)나라 후예인 공손(公孫)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가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戶),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숙신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 만주에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북쪽 연해주(沿海州)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 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스스로 부여를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숙신은) 한나라 때에 자연스럽게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국력은 인구 수에 좌우되었다. 인구가 적은 숙신은 약소국(弱小國)으로 8만호의 부여에 굴복했다. 부여는 그들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黃初·삼국시대 위나라의 연호. 220~226년) 연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숙신의 인구 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 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 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 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 만주와 요동 일대 우리 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 숙신은 2만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少數민족이 된 고구려인들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494년),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을 이어 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가족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 쪽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 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鮮卑)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원(中原)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은 선비족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당(唐)나라에 패망(敗亡)했다.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 집단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 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멕시코에서 발견된 우리 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려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貢物)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림 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흥분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구약(舊約)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支派)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텍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 버린 단의 후예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사람은 19세기까지도 이들이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가톨릭 신부(神父)인 학자들을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들은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貊族)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모든 피라미드는 위가 평평하다.

“맥이족은 820년 경 이곳에 왔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의미를 몰랐던 원주민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모두가’라는 의미)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 나오는 연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의 기원을 조사해 기록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후에 아메리카에 온 프랑스와 포르투갈, 영국은 원주민의 역사, 풍습, 언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의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이미 유럽의 언어와 풍습에 상당히 깊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이 상당히 변질되어 버린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뿌리 깊은 연구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아스텍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을 불태워 버렸고, 여러 가지 풍습도 금지했다. 그들은 그림으로 가득 찬 그 책들과 그들의 고유 풍습이 이교도적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원주민들의 말과 풍습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남겨 두었고,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원주민들의 그림 문자로 된 책도 남았다. 바로 이러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모습

멕시코의 원래 국명은 ‘맥이고(Mexico)’이다. 이 명칭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 아스텍제국을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맥이곳’이라고 불렀고, ‘맥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했을 때, 아스텍인들의 옛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했다. 오늘날 ‘멕시코’라고 함은 영어 발음으로 인한 것이고, 실제로 멕시코인들은 아직도 ‘맥이고’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모습

▲상투

그림 속의 아스텍인들은 한국인과 흡사한 상투를 하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멕시코 원주민들은 상투를 하고 있었다. 상투는 붉은 천으로 묶어서 만들었고, 조선시대 우리가 사용하던 망건 같은 것이 없어서, 묶은 천이 헐거워지면 뒷머리는 밑으로 처지곤 했다.

는 1325년 맥이족이 아스텍제국을 건설하던 때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다. 9명의 큰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상투를 하고 있다. 머리 위 양쪽으로 삐죽 나온 것은 상투를 묶은 천 자락이다.

가운데 머리를 풀고 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무당이다. 신(神)에게 나라 건설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다. 보통은 새의 피를 뿌렸지만, 중요한 제사에서는 무당이 스스로 피를 흘렸다. 그 제사를 그들도 ‘굿(cu)’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아직도 굿을 할 때 닭이나 돼지의 피를 먼저 주변에 뿌린다.

▲갓과 두루마기

17세기 멕시코 원주민 족장의 외출 모습(왼쪽)과 20세기 초 우리나라 사람의 복장(오른쪽). 은 아스텍제국의 노인들이 외출을 할 때의 모습이다. 검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우리 민족의 외출복인 흰 두루마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진다. 오른쪽의 20세기 초 우리 모습과 비교해도,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까지 같다.

여자들의 모습

▲한복과 加髢

명성황후 초상화와 20세기 중반 멕시코 여인의 모습.

영왕비의 소립봉잠(왼쪽)과 멕시코의 봉잠(오른쪽).

멕시코 태오티와칸 벽화 속 여인은 붉은 볼연지를 하고 있다.

애리조나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

미국 수족 추장 부부도 볼연지를 하고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창포에 머리 감고

아스텍 벽화에 나오는 지게를 진 장사꾼의 모습.

반란 용의자를 고문하는 모습. 가운데에 지게를 세워 놓은 것이 보인다.

금줄과 정한수

산파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는 모습.

금줄을 친 신령한 나무 아래서 연주하는 무당들.

四柱와 占

가운데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점쟁이가 들고 있는 것이 《토날보왈리(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책임을 나타낸다. 점쟁이 얼굴 앞에 있는 짧은 지팡이 같은 그림은 ‘굽어진 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한다’는 기호이다. 즉 점쟁이가 사주풀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한다’는 이 기호는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인 천마총의 천마 입 앞에도 그려져 있다.

아기를 업고 다니며 젖을 줄 때는 ‘찌찌(tzitzi)’라고 말해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왼쪽)과 20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젖을 먹이는 모습.

의 아스텍제국 여인들은 한복을 입었고, 머리는 가체(加髢)를 했다. 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머리는 가체를 하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 그림은 특히 스페인과 아스텍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후, 몇 달 후에 제국이 멸망당할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인들이 높은 건물 옥상에올라가 멀리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는 장면이다.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 의상이고 가체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왔던 우리 민족의 풍습이었다.가체를 만들기 위하여 빠지거나 자른 머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 땋아서 머리에 덧대었다. 아스텍제국 여인들도 그렇게 머리카락을 모았다. 또 가체를 머리에 붙이기 위해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에서는 아스텍제국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가체를 덧댔다. 다음 18세기 신윤복의 그림에도 천으로 가체를 묶은 모습이 나온다.은 우리 민족 여인의 머리 모습이고, 은 1521년경의 아스텍 여인들이 통곡하는 모습이다. 모두 머리 뒤의 목 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았다.아스텍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의 소매를 보면, 우리 한복의 소매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한복 소매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통이 넓어지다가 손목 부분에서 좁아진다.머리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이마 윗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두 개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우리 민족의 여인들은 머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가체뿐 아니라 다양한 머리꽂이를 머리에 꽂아서 장식했다. 는 19세기 말의 머리꽂이와 명성황후 초상화이고, 은 20세기 중반의 멕시코의 머리꽂이와 여인이 전통 머리꽂이를 한 사진이다.머리꽂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잠(鳳簪)이다. 봉잠은 봉황새 모양으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은 조선왕조 말 영왕비의 소립봉잠(小立鳳簪)과 멕시코 유물로 발견된 봉잠이다. 새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고, 꽁지는 뒤로 들고 있으며, 발을 길게 내려서 꽂는 부분으로 만든 모습이 모두 같다.우리 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아래는 고구려 쌍영총의 세 여인의 그림이다. 모두 붉은 볼연지를 찍은 모습이고, 머리엔 천을 두른 모습이 가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은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는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의 상투와 함께 여인들의 붉은 볼연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이동루트인 알류산열도(列島)와 캐나다 서해안 지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후예가 퍼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볼연지 풍습은 아메리카 거의 모든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우리 민족 여인들은 옛날부터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체를 하거나 각종 장식을 머리에 꽂기도 했고, 머릿결을 촉촉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창포(菖蒲)라는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로 머리를 감아 윤이 나게 했다. 멕시코의 여인들도 히어끼리들이라는 푸른 풀을 창포처럼 사용했다.아메리카 여인들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무거운 것을 일 때는 따배(똬리)를 사용했다.는 1540년대 그려진 아스텍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물건을 지게에 얹어서 진 모습과 지게를 지게막대기로 세워 놓은 모습이다. 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젊은이 두 명이 상투를 튼 어른 두 명을 창으로 고문하는 장면이다.아스텍제국에서는 상품을 지고 먼 지방으로 무역(물물거래)을 하러 다녔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정복한 속국(屬國)이나 마을의 감시자 역할도 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중앙 정부에 보고도 하고, 그림에서 보듯이 직접 반란 용의자를 심문하기도 했다.그림상의 심문 대상자도 상투를 한 모습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멕시코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이었고, 이 사람들은 씨족별로 혹은 원래 만주에서 살 때부터 조상들이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과 같은 곳에 정착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뒤늦게 도착한 맥이족(아스텍족)이 그곳에 살던 고리족과 힘을 합하여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전국 각지에 산재한 씨족별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지게의 특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게와 약간 다르다. 우선 지게끈을 어깨에 메지 않았고, 지겟가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을 기록한 《삼국지》 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지게 모양이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관가에서 성곽을 쌓는데, 젊은이들이 등에 1장 길이의 나무를 대고 짐을 나르는데, 온 종일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더라”는 내용이다. 그림상의 아스텍제국 지게와 같다.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厄),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古語)이다.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도 우리 민족의 것과 같은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만 공개하면, 징이다. 그들은 징을 ‘태질라가틀(신성한 질라가틀)’이라고 불렀다.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四柱)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로서, 각각 히의보왈리(Hiuhpohualli)와 토날보왈리(Tonalpohualli)이다. 각각 ‘해를 보아서’와 ‘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우리말이다. 달력 명칭에 사용된 ‘히’와 ‘날’은 오늘날의 우리말 ‘해’와 ‘날’이다.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주풀이와 점치는 데 사용한 달력은 토날보왈리였다. 이 달력은 우리 민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력 달력과 기본 체제가 같다. 우리 민족도 사주풀이나 점을 칠 때에는 음력 달력을 아직도 사용한다.는 멕시코 원주민이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아이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면, 점쟁이는 먼저 아이의 태어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물어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토날보왈리를 펼쳐서, 그날과 그 시각에 해당하는 각종 그림 기호를 보고서, 아이의 평생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바탕으로 운이 좋은 남녀가 결혼했는데, 이것도 우리 민족의 옛 풍습과 같다.이 달력을 이용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은 점을 매우 많이 쳤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항상 먼저 점을 치고 날을 받았다. 장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갈 때도 점을 쳐서 날을 받았고, 이사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을 때도, 결혼을 할 때에도 역시 점을 치고 길일(吉日)을 받아서 행했다.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아스텍제국이 정복된 지 20여년 후에 스페인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에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育兒) 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고마라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면서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은 멕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 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또 아이의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고, 그 다음해에는 두 살로 말했는데, 이런 나이 계산법은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하면 심지어 두 살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멕시코 원주민의 나이 계산법은 우리민족의 것과 같았다.⊙

[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 (2) 인디언들은 왜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나

척박한 땅 아메리카선 옥수수만 재배.. 가축 사육에 한계, 문명 발달 못 이뤄

유라시아는 밀·쌀 등 곡류 다양 아메리카선 수렵·채취에만 의존 농업 발달 기대하기 힘들어

가축으로 인한 전염병 면역 없어 유럽인들의 침입에 쉽게 무너져 각 부족간 교류도 쉽지 않아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5000년 전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석기시대에 살고 있었다. 즉 인종 간 문명수준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라시아에 남아 있던 인류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발전했으나 아메리카로 건너간 종족은 석기시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미국의 일부 고대문명 유적에서 구리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고, 남미의 잉카제국에선 스페인군이 침입하던 무렵 막 청동기로 이행하는 중이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문명수준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문명수준 격차로 인해 철제무기로 무장한 유럽인들은 돌도끼와 활로 저항하는 인디언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 백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라는 생물무기는 철제무기보다 몇십배의 위력을 발휘해 전쟁다운 전쟁 한 번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유럽인들은 너무나 쉽게 인디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자연환경 차이가 문명수준 격차 만들어이러한 문명의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백인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인종주의자들은 인종 간의 지적능력 차이로 인해 문명수준의 차이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유명한 인류학자이면서 진화생물학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반박한다. 인류학 분야의 고전이 된 그의 명저 ‘총 균 쇠’에서 다이아몬드 교수는 그의 이름만큼이나 찬란한 논리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문명수준의 격차는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는 생활방식에서는 문명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 야생의 식물을 개량해 농작물화함으로써 농업에 기반을 둔 정착생활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잉여생산물과 여유시간을 이용해 농업 이외의 분야에서도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밀, 보리, 쌀 등 곡물류 농작물로 개량할 수 있는 식물이 비교적 풍부했던 반면, 아메리카에는 옥수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옥수수는 유라시아에서 생산되는 곡물에 비해 훨씬 적은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유라시아에는 소나 말, 낙타와 같은 대형 포유동물을 가축으로 사육할 수 있었던 반면, 북아메리카에는 개밖에 없었으며 남아메리카에는 개보다는 약간 큰 라마가 있었으나 소나 말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체격이 작았다.또한 유라시아에서는 가축의 분뇨를 농작물 경작 시 비료로 활용할 수 있었으나 아메리카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유라시아에서는 가축으로 하여금 수레를 끌게 함으로써 무거운 화물도 운반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축의 힘을 빌려 쟁기질도 할 수 있었기에 토지의 생산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는 수레를 끌 만한 가축이 없었으므로 수레의 발명 필요성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농업 생산에서도 오로지 사람의 힘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산성이 비교적 낮을 수밖에 없었다.유라시아인들은 다양한 가축으로부터 전염병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여 전염병에 대한 면역성을 키울 수 있었던 반면, 전염병이 별로 없는 청정지역에 살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면역력을 갖지 못했다.실제로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1533년 잉카제국을 침략했을 때 백인들이 가져온 천연두가 멕시코를 경유해 남미에도 이미 널리 퍼지게 돼 인구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에 손쉽게 잉카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유라시아 대륙은 비슷한 위도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반면에 아메리카는 북극권에서부터 남극권까지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유라시아의 동서 간에는 기후 차이도 크지 않은 데다 특별한 지리적 장애도 없었기에 동서 간 문물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은 위도 차이로 인한 심한 기후 차이 외에도 사막과 높은 산으로 인해 지역 간 이동에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는 문명의 팽창과 교류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디언들은 운이 나빠서 문명발달에 불리한 땅을 택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발전한 문명권의 인류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부족 간 교류 단절이 빚어낸 수백개 언어바로 이웃 부족 간에도 교류가 별로 없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디언의 말은 분화를 거듭해 수백종의 언어가 형성됐다. 인디언의 언어는 워낙 복잡다기해 언어학자들이 이들 언어의 공통점을 찾아내 체계적으로 어족을 분류하는 데 큰 애를 먹고 있다.그런데 북아메리카에만 약 300개의 언어가 있었지만 이 중 상당수는 이미 사라졌으며 남아 있는 언어들도 극히 소수의 언어를 빼놓고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북미 인디언들도 주류사회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부족의 언어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사라져가는 원주민의 언어를 보전하고 나아가 그 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은 1990년 소위 ‘원주민언어보전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힘입어 인디언 부족들은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 등을 이용해 저마다 부족 고유의 말을 되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인디언 고대문명의 기반은 옥수수아메리칸 인디언의 문명 출현 배경에는 이른바 ‘세 자매’가 자리하고 있다. 세 자매란 호박·옥수수·콩을 일컫는 말로서, 고대 인디언들은 이 세 종류의 작물을 함께 재배하는 독특한 기술을 개발했다. 세 자매 중 특히 옥수수는 인디언의 생존과 문명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옥수수를 포함한 세 자매 작물농업은 문명 건설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 거의 모든 인디언 부족들의 기원에 관한 신화에는 옥수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옥수수는 멕시코의 테우칸 계곡에서 최초로 재배됐는데 약 4500년 전 무렵부터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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