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의 여인 들 |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30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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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번 미술사 강의에서는 즐기면서 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하실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미술사 공부를 하시면서 중요한 것은 나무와 숲을 함께 보셔야 합니다.
당연히 작품과 작가를 충분히 보아야 하겠지만
작가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작품이 제작될 무렵의 미술 경향을 함께 읽어 가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나무를 보면서 숲을 함께 보는 방법을 피카소의 유명한 명작이죠, 아비뇽의 처녀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감상되시기를 바라며, 미술사 공부에 조금이라도 즐거움과 도움이 되길 소망합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독일 뒤셀도르프대 철학박사, 미술사전공)\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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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처녀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에 이 세잔의 《수욕(水浴)》의 구도를 모방하여 나부(裸婦)의 군상을 그리려던 목적이라 말하지만, 세잔의 주체적인 색면 배합을 진일보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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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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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모마 MoMA,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 브런치

레 드모아젤 다비뇽 Les Demoiselles d’Avignon,. 우리말로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명이다. 그런데, 이 작품명은 원래 피카소가 지은 작품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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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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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처녀들, 피카소 ‘악명’ 높인 이유는? | 아주경제

피카소는 희대의 카사노바로 유명하다. 미성년자였던 14살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바르셀로나 매음굴을 배회하곤 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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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junews.com

Date Published: 4/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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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골목이 낳은 ‘아비뇽의 여인들’…미술을 바꾸다

피카소가 25세 때이던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 사실적인 회화의 전통을 깬 큐비즘을 연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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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han.co.kr

Date Published: 3/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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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파블로 피카소 빈티지 감성 명화 포스터 – 2. PP-아비뇽의 …

오늘의집 그림·사진 스토어, 파블로 피카소 빈티지 감성 명화 포스터 – 2. PP-아비뇽의 처녀들 I. 살까 말까 고민 될 땐 리얼 리뷰와 유저들이 직접 찍은 스타일링샷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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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hou.se

Date Published: 9/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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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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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모두를 위한 미술사Art History for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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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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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비뇽의 처녀들 작가 파블로 피카소 연도 1907년 크기 233.7 x 243.9 cm 소장 뉴욕 근대 미술관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피카소가 1907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뉴욕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1906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미완성의 대작인 이 작품은 작가 피카소의 화력(畵歷)에 중요한 전기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회화로서도 기념비적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아비뇽이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마도로스 상대의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며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부들이다.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초기의 피카소가 즐겨 그린 인생적인 주제가 답습되어 있는 셈인데 이 작품에는 벌써 청색 시대의 정감적(情感的)인 침울함이 없고, 대상은 주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비정(非情) 형태의 구성으로 포착하였다. 이것은 피카소가 스스로 제작에 가한 제1의 파괴인 것이다. 이 파괴의 힌트는 피카소가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의 흑인 조각에서 얻었다. 이들 원시 미술이 가진 분방한 데포르메와 충실된 양감은 무엇보다도 형(形)을 만드는 것, 즉 조형의 문제로서 정감적인 피카소를 경탄하게 하였고 매혹시켰다. 또 하나의 힌트는 세잔에게서 받았다. 세잔도 역시 현상과는 별개의 실재(實在)를 화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색면(色面)으로써 견고하게 구축할 것을 염원하였던 조형가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에 이 세잔의 《수욕(水浴)》의 구도를 모방하여 나부(裸婦)의 군상을 그리려던 목적이라 말하지만, 세잔의 주체적인 색면 배합을 진일보하여 피카소는 형태의 분해와 화가의 내적인 질서에 따르는 그 재배분(再配分)을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피카소의 조형에 대한 사고는 그 그림을 그린 당시에 있어서 친한 친구에게조차 잘 이해되지 않았다. 피카소는 머리가 돌아서 그 그림 뒤에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브라크만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브라크도 역시 세잔의 본을 따라 풍경화 가운데에 있는 색면에 의한 양(量)의 파악과 대상의 재구성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윽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공동연구에서 퀴비슴의 사조(思潮)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연의 모방을 근저로부터 뒤집어 엎는 이지(理知)의 조형이며 20세기의 회화가 달성한 주목할 만한 혁신이다.

참고 문헌 [ 편집 ]

03화 모마 MoMA,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d’Avignon

Paris, June-July 1907

243.9 x 233.7 cm

모마 MoMA는 1937년 자크 셀리그만 앤 코 Jacques Seligman & Co. 로부터 그때 당시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작품을 모마의 초대 디렉터인 알프레드 바 Alfred Barr의 설득으로 $24,000(약 3,000만 원)에 구매한다. 이 비용은 모마가 가지고 있던 드가 Edgar Degas의 한 작품을 팔아 $18,000을 모으고, 나머지 비용은 기부로 채워 구매자금에 보탠다(The co-owners of the gallery Germain Seligman and Cesar de Hauke). 1939년 모마가 지금의 위치에 새로운 미술관을 지어 리 오픈하면서 이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사실 피카소 자신은 이 작품이 루브르에 걸리길 바랬다.

Les Demoiselles d’Avignon by Pablo Picasso at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1939 © MoMA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20세기 최고의 화가, 스페인이 낳은 세계 최고의 화가, 큐비즘 Cubism(입체주의)의 대가, 이 시대 최고의 위대한 천재 화가 등 정말 많은 수식어가 붙는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최고의 찬사가 ‘피카소, 피카소 아냐?’라고 할 만큼 최고 화가의 대명사로 쓰이는 이름이기도 이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또한 이 세상에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미술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던 피카소는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대가로 손꼽히게 된다.

Pablo Picasso 1881–1973, wikipidia.org

레 드모아젤 다비뇽 Les Demoiselles d’Avignon,

우리말로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명이다. 그런데, 이 작품명은 원래 피카소가 지은 작품명이 아니라, 첫 전시회를 관리했던 비평가 앙드레 살몽 Andre Salmon이 사회적 반향을 줄이기 위해 살짝 다운시킨, 바꾼 작품명이다. 그럼, 원래 피카소가 지었던 작품명은 그럼 뭘까? 르 보르델 다비뇽 Le Bordel d’Avignon, ‘아비뇽의 창녀들’이다. 와- 쎄다. 작품도 모두 벗고 있는 누드 모습이고, 작품명 또한 ‘아비뇽의 창녀들’ 이라니,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작품과 작품명, 모두 쎈 것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이라고 작품명이 바뀐 이후에도, 정작 자신은 ‘아비뇽의 창녀들’로 작품명을 계속 부르곤 했다.

아비뇽 Avignon,

구글 맵에서 아비뇽을 검색하면 프랑스의 아비뇽이 먼저 나온다. 프랑스의 아비뇽이 여행지로 많이 알려져 있어 이 곳의 여인들을 피카소가 그린걸로 알고 있기도 하는데, 스페인 화가인 피카소가 얘기하는 아비뇽은 피카소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전에 살았던 스페인의 아비뇽을 말한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곳이다 보니 선원 Sailor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고, 그 선원들을 대상으로 성을 파는 골목 아비뇽을 말한다.

Avignon, Spain, maps.google.com

Paris, June-July 1907,

1907년 파리에서 약 6개월을 걸쳐 그의 나이 25살 때 이 대작을 완성하였으나, 일반인들에게 공개는 약 9년이나 더 뒤인 1916년 전시회 (Salon d’Antin)이다. 약 9년 동안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피카소의 작업실 스튜디오에 머물러 있게 된다. 왜 일까? 왜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린 후, 바로 공개하지 못하고 9년 후에나 오픈한 걸까?

This 2008 oil on canvas painting by Damian Elwes, “Picasso’s Studio at the Bateau Lavoir,” depicts the artist’s studio in about 1907, when he was painting and privately showing his epochal painting, “Demoiselles dAvignon”

243.9 x 233.7 cm,

이 작품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큰 사이즈의 작품인지 전혀 예상을 못했다. 2 m 가 넘는 큰 작품이다. 이렇게 큰 작품이었다니, 왜 나에게 아무도 이렇게 큰 작품이라는 걸 얘기 안 해 준 걸까? 보통의 미술책에서는 작품만 나오기에, 전혀 의심도 없이 일반적인 작품 사이즈겠거니, 생각했다. 세로가 약 2.5 m 정도이니 그림 속의 모델 Models 이 실제 우리보다 더 크다. 압도적이다. 큰 작품 앞에 서면, 느껴지는 감정이 두 가지라고 한다. 첫 번째, 압도감이다. 큰 그림 앞에서 우리는 작아진다. 큰 그림의 힘에서 압도를 당한다. 그 다음으로 오는 두 번째 감정이 경외감이라고 한다. 뭔가 있겠지, 뭔가 대단한 게 있겠지, 존경심 Respect 이 나온다고 한다. 이 그림 앞에서 느꼈던 두 가지 감정, 압도감과 경외감, 정확이다.

1907년 작품 완성 후 가까운 친구들에게 첫 오픈,

‘내가 이번에 대작을 하나 완성했어. 내 작품 한 번 보러 오지 않을래?’

그렇게 모인 친구들의 반응은 최악이다. 너무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이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모멸감이라고 말한다.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작품이라고 까지 얘기한다. 피카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이러한 반응에 깜짝 놀란다. 서로 놀란다. 왜일까? 왜 친구들은 이러한 반응을 보였던 걸까? 무엇 때문에?

그림 속 모델들의 시선,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와 마주치는 그 시선! 그 시선에서 오는 당혹감이다. 보통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 속 세계와 관람자 사이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제4의 벽’ 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 벽 때문에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다. 공연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위 공간과 관람자석 공간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세계라는 동의가 있다. 이 또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제4의 벽’이 있어서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공연을 관람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제4의 벽’이 작품 속 모델들의 시선 때문에 여실 없이 깨져 버린다. 그 시선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 서로 머물지 않고, 작품을 뚫고 나와 작품 밖에서 감상하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거기에 또한 눈 마주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밑바닥 일을 하고 있는 ‘성을 파는 여인들’이다. 더불어, 부끄럽게도 옷도 다 벗고 있다. 거기서 오는 모멸감이다.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감정이라고 까지 말한다.

이 생각지 못한 반응에 대한 충격으로 피카소는 이 작품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쳐 박아 두고, 공개하지 못하다가 일반인에게 오픈하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림 밖 관람자와 눈맞춤으로 인한 당혹감과 모멸감을 주는 효과는, 그전 마네 Édouard Manet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작품에서도 똑같은 발휘되게 된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Luncheon on the Grass), 1863, Édouard Manet, Musée d’Orsay

부르주아 Bourgeois들과 풀밭 위에서 점심 식사하는 모습인데, 한 여인이 벌거벗고 있다. 옆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끔 도구들이 흩트러져 있다. 성을 파는 여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여인의 시선이 관람자와 눈을 마주친다. 입가에 비웃음까지 살짝 띄고 있는 듯하다. 불쾌스럽다. 이 작품 또한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비난을 하고, 작품에 손상을 가할 까봐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작품이 걸리기도 한다. 살롱전에서 받아들어지지 않고 낙선한 작품들만 모아 전시한 전시회(Salon des Refusés)에서 걸리게 된다. 이 작품으로도 충분히 마네가 욕을 많이 먹었을 듯싶은데, 6개월 후에 더 파격적인 작품을 한 번 더 그린다.

올랭피아 Olympia, 1863,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Musée d’Orsay

‘올랭피아 Olympia’이다. 이번엔 몸 파는 여인이 아예 주인공이다. 올랭피아 라는 이름은 그림속 여인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성을 파는 여인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작품 한가운데에서 옷을 벗고 누워 있다. 오른쪽에 하녀는 꽃을 들고 있는데, 이 꽃은 딩동! 문 밖에 남자 고객이 도착했다는 걸 알리는, 그가 들고 온 꽃이다. 이전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등장했던 모델과 같은 모델(Victorine Meurent)인데, 더 당돌한 표정이다. 여기서도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우리를 비웃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작품 또한 그 시대에 참 많은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다.

피카소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메시지를 주고자 그린 것 아닐 텐데, 그럼 무엇일까? 그 메시지의 힌트로서, 작품 중앙 밑에 놓여 있는 과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일 Fruits, 너무나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이다. 과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나 달콤한 과일이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달콤함은 언제였는지, 바로 썩어 버린다. 썩어버리고 부패해 버린다. 너무나 짧은 달콤함이다. 우리의 짧은 인간 욕망과 닮았다. 그 짧은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이 곳, 성을 파는 골목까지 온 사람들인 것이다. 너무나 짧은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가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왼쪽의 두 여인이 쓰고 있는 아프리카 가면 African Masks이다. 그때 당시에 아프리카 미술이 유럽에 처음 소개되면서 많은 화가들이 아프리카 미술에 빠진다. 피카소에게 아프리카 미술을 소개해 줬던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원시미술이 좋아 타히티로 직접 날아가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폴 고갱 Paul Gauguin 등이 있다. 피카소도 아프리카 미술에 흠뻑 빠진다.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술로, 원시미술, 강렬한 보색 대비 색채 등을 보여주는 미술이다.

피카소 자신이 이전에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미술을 선 보이고자 했던 강한 메시지로 ‘아프리카 가면’를 작품 속에서 표현했고, 또한 작품 속의 여인들이 모두 옷을 벗고 있지만 유일하게 입고 있는 옷 아프리카 마스크이다. 영어식 표현으로, ‘Wear a mask’라고 표현하는 옷이 마스크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감추기 위해 쓰는 가면, 광대, 삐에로, 조커 Joker 의 가면, 세속적으로 밑바닥 일을 하고 있는 이 여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 가면, 마스크이다.

Head of a Sleeping Woman, 1907, Pablo Picasso, Museum of Modern Art

원근감 Perspective의 파괴,

그 당시 보통 클래식한 그림이라고 하면, 원근감이 크게 들어가 있든, 적게 들어가 있든, 어느 정도 표현이 되어 있어야 잘 그린 그림이라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파격적으로 원근감을 아예 없어 버렸다. 평면적인 느낌으로 그렸다. 공간의 느낌이 전혀 없는 2차원적인 그림이다. 모델들 또한 종이인형처럼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이 원근감의 파괴 때문에 이 그림을 ‘20세기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이다. 이전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작품이다.

피카소는 이 원근감의 파괴를 폴 세잔 Paul Cézanne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리게 된다.

피카소는 폴 세잔을 가리켜 ‘우리 모두의 아버지 The father of us all’ 이자 ‘나의 유일한 스승 ‘My one and only master!’라고 칭한다. 피카소가 폴 세잔을 얼마나 대단하게 보는지, 얼마나 존경하는지 여실히 들어내는 말이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영감을 준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The Large Bathers, 1906, Paul Cézanne, Philadelphia Museum

폴 세잔, 역시 천재적인 화가이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다, 자신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고 그림 잘 그린다는 평을 얻지 못하자, 다 때려치우고 자신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 Aix-en-Provence로 내려와 혼자 처박혀 몇 년 동안 엄청난 그림 연구에 몰입한다.

‘파리 Paris의 친구들이 그리는 인상주의 그림들은, 빛 Light 을 쫓아 겉모습의 변화만 표현하는데 너무 집착하는, 너무 가벼운 그림들을 그리고 있어! 나는 그런 겉치레 가벼운 그림 말고, 모든 사물의 다양한 겉모습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본질 Nature을 그릴 거야!’

‘본질 탐구 그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 고민의 결과로, 단순하고, 도형적이고, 원근감이 없어진 그림에 도달한다. 이 부분에 피카소가 영감을 얻는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구, 삼각뿔, 원통형의 형태에서 온다.

– 폴 세잔 Paul Cézanne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큐비즘 Cubism, 입체주의의 시작이다!

큐비즘 Cubism의 시작,

사실, 큐비즘(입체주의)의 기본 개념을 세우고 처음 선을 보인 화가는 세잔이고, 그것을 꽃을 피운게 피카소이다.

모마의 초대 디렉터 였던 알프레드 바 Alfred H. Barr. Jr. 가 정리한 현대미술의 계보에 관한 스케치.

폴 세잔의 본질 추구 그림이, 형태적 본질인 큐비즘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컬러의 본질인 야수주의의 대가 앙리 마티스에게 모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델들의 모습이 삐뚤빼뚤 각진 모습의 큐비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또한 폴 세잔의 ‘본질 탐구 그림’의 영감으로 피카소가 표현한 여인들의 모습이다.

‘한 여인의 본질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각도에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는 그 여인의 본질을 표현하는데 너무 부족해, 한계가 있어. 다양한, 여러 각도에서 보여지는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낸 그 모습, 그 모습이 저 여인의 진정한 본질이야!’

그렇게 다섯 여인을 완성한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모습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내는 것, 그게 바로 큐비즘인 것이다.

초반 스케치 Sketch 속 두 남자,

대작을 완성하기 위한 피카소의 6개월 동안의 노력은 참 많은 스케치와 연구의 흔적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moma.org

유독 눈에 띄는 스케치는, 초반의 스케치에 남자 둘을 포함한 모델 7명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자 둘을 뺀 여성 다섯 명으로만 완성한다. 아하, 그래서 왼쪽에 서 있는 여성의 자리가 원래 남성의 자리여서, 여성의 골격이 남성스럽게 흔적으로 남아 있는 거구나!

moma.org

wikiart.org

그럼, 두 남자는 누구일까?

왼쪽 남자는 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스케치에서는 해골을 들고 있기도 한다. 책과 해골을 들고 있는 남자, 의과 대학생 A Medical Student이다. 왜 뜬금 없이 해골을? 인간 욕망의 달콤함 바로 뒤에 오는 죽음,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넣어 주고자 했다. 그림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또 다른 남자는 이 성 性 을 파는 골목에 자주 오는 단골 고객, 선원 A Sailor이다. 지금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Picasso study for Demoiselles d’Avignon, 1907 Photo: Reunion des Musees natio- naux

그럼, 두 남자는 어디로?

두 남자가 그림 안에 있을 때는, 주위 여인들의 시선이 두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두 남자가 그림에서 빠지면서 여인들의 시선이 그림 밖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두 남자, 그림 밖으로 나와 우리가 그 두 남자가 된다. 그림 속 여인들이 쳐다보고 있는 우리, 우리가 두 남자이다. 달콤한 인간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우리가 두 남자가 되는 것이다. 피카소, 두 남자를 빼내고 우리를 두 남자로 남기면서 작품에 신의 한 수를 두게 된다. 대단하다. 천재 피카소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시작 The beginning of Modern Art,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20세기 현대미술이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전 클래식한 작품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파격적인 시도들이 많이 보이는 혁신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가만히 감상하면서, 작품 속 여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눈 마주침을 피하지 말고,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도 마냥 욕망만 쫒아 가고 있지 않다고, 변명이나마 그들에게 뭔가를 얘기해 보자.

‘피카소, 그림 못 그리는 화가 아니예요? 삐뚤빼뚤~’ 12살 때 그린 토르소, 14살 때 그린 나이든 어부, 15살 때 그린 사제와 어머니의 모습

난 12살때부터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단 4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렸다.

나는 평생 아이처럼 그리고 싶었다.

-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1951, Pablo Picasso, Musée Picasso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잔혹함’을 넘어 ‘전쟁의 잔혹함’ 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 작품

https://youtube.com/momavideos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email protected]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손호철의 피카소를 찾아서]바르셀로나 골목이 낳은 ‘아비뇽의 여인들’…미술을 바꾸다

(2)말라가와 바르셀로나 ‘현대미술혁명’을 향하여

내가 아이일 때, 어머니는 나에게 “만일 네가 군인이 되면 장군이 될 것이고, 성직자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신 나는 화가가 됐고 그래서 피카소가 됐다.(피카소)

내가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다. 그러나 어린애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피카소)

모든 창조행위는 먼저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피카소)

피카소가 25세 때이던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 사실적인 회화의 전통을 깬 큐비즘을 연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전문가들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한 바 있다. ‘아비뇽’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화실이 있던 거리 ‘아비요’를 말한다.

“흡연은 살인이다.” 최근 들어 흡연의 폐해가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흡연이 인류사적으로 크게 기여한 것이 있다. 흡연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피카소라는 20세기 최고 미술가의 작품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81년 10월25일 밤, 스페인 말라가의 한 중산층 집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울지도, 숨을 쉬지도 않았다. “안타깝지만, 사산입니다.” 산파는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아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놀란 산모와 식구들은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삼촌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시가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빤 뒤 내뿜었다. 강한 연기가 방 안에 퍼지자 아이는 갑자기 자지러지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시가 연기 때문에 살아난 아이, 그가 바로 피카소다.

지중해. 유럽의 ‘남쪽 바다’인 지중해는 감청색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 열정 등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잡아당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나 알랭 들롱이 주연한 1960년대 명작 <태양은 가득히>를 지중해가 아니라 대서양이나 북해를 배경으로 만들면 어찌 될까? 그 맛이 안 날 것이다. 평생 16만점 이상의 작품을 생산한 ‘정열의 화신’ 피카소는 많은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이 스페인의 지중해 항구도시 말라가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중해인’임을 자임했다. 그는 평생 지중해를 그리워했고, 말년을 프랑스의 지중해지역에서 지내다 이 세상을 떠났다.

말라가는 마드리드로부터 남쪽으로 528㎞ 떨어져 있어 5시간 이상 달려가야 한다. 말라가를 지나는 고속도로는 고지대를 통과하고 있어서 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저 아래로 말라가 시내와 지중해 바다가 보인다. 피카소가 자라던 동네는 이제 그를 기리는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동네 전체가 피카소마을로, 미술관을 찾아온 관광객이 넘쳐나고 관련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가득하다. 말라가 피카소미술관에 들어갔다. 피카소의 여러 작품들이 다 볼만하지만 특히 볼만한 것은 피카소의 어릴 적 그림이다. 8세 때 그린 ‘말라가항’이란 유화, 13세 때 그린 ‘롤라의 초상’이란 유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피카소 천재성의 싹을 보여주고 있다.

말라가가 피카소의 ‘육체의 고향’이라면 바르셀로나는 ‘정신의 고향’

‘아비뇽의 여인들’ 속 지명 ‘아비요 거리’는 유명한 사창가이다

당시 화단은 “미친놈의 작품”이라 평했지만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사실적으로 그리던 회화의 전통을 깬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피카소는 정물과 비둘기를 많이 그렸지만 화가로서는 ‘실패한 화가’라고 할 수 있는 미술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카소가 비둘기를 많이 그린 것(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비둘기 그림도 그가 그린 것이다)은 아버지 영향이 크다. 어머니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처음 한 말이 ‘연필’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무 데서나 그림을 그렸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미술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안 듣고 그림을 그리거나 기회가 있으면 학교를 도망쳤다. 9세 때, 아버지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북쪽 대서양(라코루냐)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전학에 필요한 학업성적이 너무 부족해 아버지가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해 시험 답을 가르쳐주고서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라코루냐에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옮긴 뒤 아버지는 그를 미술학교에 보냈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히려 거리에서 스스로 배우기를 원했고 마드리드로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친구인 팔라레스와 그의 고향인 시골마을에 갔는데 거기에서 자연과 농부들의 삶을 보고 그렸다. 그는 나중에 대가가 된 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팔라레스의 마을에서 배웠다”고 회고했다.

피카소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등록했던 바르셀로나 예술학교는 현재 건축회관으로 변했다. 건물의 3면에는 피카소 그림이 있다.

피카소의 어린 시절은 우리의 교육, 특히 예술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정규교육을 거부했지만 자연과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연구해 독창적인 스타일을 개발하고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됐다. 이는 학원교육으로 아이들의 창의성을 죽이는 우리 교육, 특히 미술교육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피카소는 말한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돼서도 예술가로 남아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 속에 있는 예술가를 죽이는 교육’이 아닐까?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노란 학원버스에 실려 몇개 학원을 순례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피카소 같은 독창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발명품인 컴퓨터에 열광할 때, 피카소는 비수 같은 말을 남겼다. “컴퓨터는 쓸모없다. 우리에게 답만 줄 뿐이다.” 컴퓨터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 답을 해줄 뿐이며, 진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이냐는 것이다. 창의성은 우리가 던지는 질문 속에 있다.

‘스페인의 꽃’인 바르셀로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을 지은 천재건축가 ‘가우디(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도시’이다. 그러나 ‘피카소의 도시’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말라가에서 9세 때까지 살았고 이후 10대와 20대 초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도 바르셀로나에 부모와 친지들이 살고 있어 자주 찾았다. 말라가가 그가 태어난 ‘육체의 고향’이라면, 바르셀로나는 그의 의식을 키운 ‘정신의 고향’이다. 피카소가 청년기를 보내던 바르셀로나는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화,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되던 때이다. 피카소는 당시 새로운 사조로 지식인들 간에 주목받고 있던 모더니즘의 전파소라고 할 수 있는 카페 ‘네 마리의 고양이’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곳에서 그는 모더니즘과 정치적 급진사상인 무정부주의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 카페 문에는 피카소가 술값 대신 주고 간 이 카페 그림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아버지가 등록을 시켜줬지만 피카소가 ‘땡땡이’를 친 예술학교는 이제 건축회관이 되어 있다. 그 겉면에는 3면을 돌아가며 피카소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그렇게 그리게 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피카소가 말한 ‘어린이 같은 그림’이다. 피카소가 계속 정식교육을 거부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아버지는 자신의 그림도구를 물려주고 피카소가 15세가 되자 전용화실을 마련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19세 때부터 아버지 성인 ‘루이스’를 버리고 어머니 쪽 성인 ‘피카소’만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가 강한 ‘남성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화실을 지나면 골목이 나타난다. ‘아비요’거리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나아가 세계미술사에 있어서 혁명적 전환점이라는 ‘아비뇽의 여인들’의 ‘아비뇽’이 프랑스의 아비뇽이 아니라 바로 이 거리를 말한다. 이곳은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사창가로 피카소는 그림 제목을 ‘아비뇽의 사창가’로 하려 했지만, 화상·화랑 등이 너무 비호감이라고 ‘아비뇽의 여인들’로 바꾼 것이다. 피카소가 25세 때인 1907년 그린 이 그림은 이전까지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던 회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문법으로 그림을 그린 현대미술의 효시, 특히 여러 큐브를 합치고 배열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큐비즘(내지 평면에 입체를 그려놓은 것 같다고 해서 입체파)이라고 부르는 흐름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전문가들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한 그림이다.

바르셀로나는 피카소에게 ‘정신의 고향’이다.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에는 피카소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을 변조해 그린 45개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그는 18세 때인 1900년 세계예술의 메카인 파리에 갔지만 같이 간 친구에게 일이 생겨 돌아와야 했다. 그 후에도 다시 갔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돈이 떨어져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최근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을 정밀검사한 결과 그 밑에 다른 그림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그림을 그린 캔버스에 다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의 죽음으로 우울한 청색이 지배적인 ‘청색시대’, 그리고 뜨거운 연애로 몽환적 분위기인 ‘장미시대’를 거쳤지만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지는 못했다. ‘아비뇽의 여인들’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당시 화단의 평은 “미친놈의 작품”이라는 등 매우 부정적이었지만 선구적인 화상이 이에 반해서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피카소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됐고 점점 명성을 얻게 된다.

다섯 명의 여자를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은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가 검은 마스크 같은 것을 쓰고 있고, 그 아래 앉아 있는 여자는 정면과 옆 얼굴을 같이 그려놓은 것처럼 ‘입체적으로’ 그렸다. 이는 이전 어느 그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표현방식으로 이 같은 현대미술의 혁명을 가져온 것이 아프리카 마스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이를 이렇게 회고했다.

“40년 전 내가 흑인미술에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린 것은 그때 내가 미술관의 ‘미’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갔을 때, 습하고 썩은 냄새가 내 목구멍을 엄습했다.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남아서 연구를 했다. 이 마스크 등은 신성한 목적, 주술적 목적, 그들과 주위의 미지의 적대적 힘 간의 일종의 매개체로 그것에 형태와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때 나는 회화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화란 미적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적대적 세계를 매개하는 주술의 한 형태, 우리의 공포와 욕망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힘을 갖게 하는 방식이다.”

그는 ‘창조적 진공청소기’란 별명답게 아프리카 미술을 흡수했고 미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비판하고 해체했다. “나는 미를 ‘감상’하는 감식가들과 고위층의 눈과 마음의 미적 게임을 싫어한다. 도대체 미가 무엇인가?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그는 미에 대한 통념에 기초한 ‘좋은 취향’이란 “창조성의 최대의 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아비뇽의 여인들’의 해체주의적 얼굴 표현을 발전시켜 이후 정면의 얼굴에 옆 얼굴 등을 조합한 큐비즘적 초상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혁명적 발상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피카소가 뛰어난 점은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술철학을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얼굴인가? 얼굴을 찍은 사진? 화장한 얼굴? 이런저런 화가가 그린 초상화? 얼굴의 전면? 내면? 아니면 뒷면? 그러면 나머지 부분은? 모두는 자신만의 특이한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간단히 말해, 데포르마시옹(모딜리아니 그림의 긴 얼굴처럼 형태를 과장하거나 변형시키는 ‘형태파괴’의 미술기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은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동창으로 평생 피카소의 비서를 지낸 제이미 사바르테스가 기증한 작품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스페인 황금기인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화가들이 좋아하고 이들에게 영향을 준 ‘화가들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해체하고 변조한 45개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시녀들’은 주 모델인 공주들과 시녀들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 거울 속 왕과 왕비가 그려져 있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때문에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글을 쓰는 등 미술작품 중 가장 많이 글로 쓰인 명작이다. 게다가 피카소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너무 좋았다. 미술관을 나오려고 하자 피카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화란 시각장애인의 직업이다.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그린다.”

그림·사진 > 파블로 피카소 빈티지 감성 명화 포스터 – 2. PP-아비뇽의 처녀들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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