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역사 | 당신이 몰랐던 맥도날드의 역사 통합편[브랜드 스토리] 4892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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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역사는 1954년 레이 크록(Ray Kroc)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햄버거 가게를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밀크 쉐이크 기계 판매원으로 근무하던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던 햄버거 가게에서 주문을 받았고 그들에게 감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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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u0026모리스 맥도날드 형제가 개발한 맥도날드 스피드 서비스 시스템!
게다가 교회 십자가만큼 맥도날드를 많이 만들고 싶었던 크록의 열정이 더해지며 전세계 프랜차이즈 매장 수 2위를 기록하는 브랜드가 되는데!
맥도날드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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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햄버거 #McDonald’s
참고
https://corporate.mcdonalds.com/corpmcd/about-us/history.html
영화 ‘Founder’
https://www.mashed.com/147897/the-tragic-real-life-story-of-the-mcdonald-brothers/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cDonald%27s
http://www.newenglandhistoricalsociety.com/mcdonald-brothers-open-restaurant-nh-shoe-factories-cl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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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맥도날드는 미국의 세계적인 햄버거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전 세계 약 37,000개 매장에서 하루에 … 1 역사; 2 대한민국의 맥도날드; 3 논란. 3.1 용혈성 요독증후군 감염 논란; 3.2 인종차별; 3.3 햄버거병. 4 갤러리;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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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2/2022

View: 1780

맥도날드 – 나무위키:대문

초기 역사에서 꽤나 어둡고도 독특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창업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리처드 제임스 맥도날드(Richard James McDonald, 1909. 2. 16. ~ 199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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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4/2021

View: 9314

패스트푸드 브랜드 맥도날드(mcdonalds)의 역사 – 네이버 블로그

동명의 햄버거 가게에서 유래했다. ‘맥도날드’라는 사명은 설립자 형제의 가족 이름에서 따왔다. … 제안하고 운영권을 따냈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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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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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의 역사… 레이크록의 지혜 – Steemit

오늘날의 세계적인 햄버거의 대명사 맥도날드!! 간단히설명을 하자면 (맥도날드 창업자 레이크록) 맥도날드의 역사는 1955년으로 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처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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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teemit.com

Date Published: 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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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의 역사 – 요다위키

1948년 10월 맥도날드 형제가 수익의 대부분이 햄버거 판매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들은 햄버거, 치즈버거, 감자칩, 커피, 청량음료, 애플파이만으로 구성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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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da.wiki

Date Published: 3/15/2021

View: 6545

美 맥도날드 1호점 역사 속으로…본사도 이전 | 중앙일보

1호점은 일리노이 출신 세일즈맨 레이 크록(1902~1984)이 캘리포니아에서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맥도날드 형제를 설득해 프랜차이즈 회사를 차리고 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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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5/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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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식음료 기업] ‘맥도날드’ – 맥도날드 탄생 스토리

맥도날드는 1948년 모리스 맥도날드(Maurice McDonald), 리처드 맥도날드(Richard McDonald) 형제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버나디노에서 열었던 ‘맥도날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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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worldtoday.com

Date Published: 8/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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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맥도날드의 역사 통합편[브랜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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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맥도날드 역사

  • Author: 세상의모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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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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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철학 및 역사

1955년, 일리노이주에 첫 매장 오픈에서 5년 후,

200개의 매장 오픈까지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미국 전역에 걸쳐 맥도날드 매장을 개장하는 비전을 제시하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습니다. 1955년에 크록은 일리노이주의 데스플레인스

(Des Plaines)에 맥도날드의 첫 정식 프랜차이즈 매장을 오픈했습니다.

이 후 큰 성공을 거두어 불과 5년 만에 점포 수는 200개가 되었습니다.

맥도날드의 기업철학의 뿌리, 레이 크록

1984년 1월, 8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크록은 맥도날드를 위해 헌신 했습니다.

그는 새 가맹점이 문을 열 때마다 영업 첫날의 판매 보고서를 받아 철저히 검토했으며,

맥도날드의 당시 신임 경영진이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가는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습니다. 레이 크록의 진정한 공로는 수평적이고 모두의 성장을 꾀하는 새로운

사업구조와 그 시스템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는 타고난 리더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프랜차이즈 업체와 공급업체, 그리고 직원 모두의 성장을 꾀하는 새로운 사업 구조를

창조했으며, 선진적인 기업 문화 정착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맥도널드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맥도널드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맥도날드는 미국의 세계적인 햄버거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전 세계 약 37,000개 매장에서 하루에 약 6,000만 명의 고객들에게 햄버거, 감자튀김, 콜라, 아침 메뉴, 커피, 간식 등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의 웰빙 경향을 반영해 샐러드, 과일 등의 식물성, 건강식을 메뉴로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2] 맥도날드를 세운 레이 크록의 천재성은 많은 사람들이 빠른 음식 서비스, 저렴한 가격, 맛있는 음식, 그리고 맛의 일관성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데에 있다. 맥도날드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러한 요소들을 제공하지 못했다.

역사 [ 편집 ]

1940년, 맥도날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 공항 근처 헌팅턴 드라이브(미국도 66)에서 ‘비행장’이라는 뜻을 지닌 ‘에어드롬'(Airdrome)이라는 상호의 식당을 창업하였다. 당시 햄버거는 10센트였고, 오렌지 주스는 5센트였다. 같은 해에 그의 두 아들인 모리스와 리처드는 본래 있었던 식당 자리에서 동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서부 샌버너디노 1398 노스 E 거리로 이사하며 식당 이름을 개명하였는데 이것이 “맥도날드의 바베큐”였다. 레이 크로크가 맥도날드를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키웠다. 2003년 무렵, 맥도날드는 재정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서비스 수준은 점점 더 비판을 받게 되었고, 매출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회사는 최초로 분기 손실의 적자를 냈다. 심지어 아이들을 비만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일부 부모들이 맥도날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당사 최고경영자 잭 그린버그(Jack Greenberg)는 맥도날드를 회생시킬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그 일을 집행하기 위해 계속 남아 있겠다고 했지만, 투자자들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다. 이사회는 짐 캔털루포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는 2003년 1월 회장이자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3] 2004년 4월, CEO 짐 캔털루포(Jim Cantalupo)가 심장발작으로 새벽 4시에 응급실에 실려 갔고, 바로 사망했다. 맥도날드는 그날 오전 7시에 이사회를 열어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 찰리 벨(Charlie Bell)을 신임 CEO로 선임했다(벨 역시 7개월 후에 암으로 사망했다.). 맥도날드는 평상시에 승계 계획을 수립하고 관리해 왔기 때문에 경영권 공백 없이 즉시 새로운 CEO를 선발할 수 있었다.[3]

2014년에는 ‘Create Your Tast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그니쳐 버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CYT 버거는 네 가지 추천 버거(골든 에그 치즈버거, 핫 올 오버 버거, 그릴드 머쉬룸 버거, 클래식 치즈버거)와 자신이 직접 만드는 ‘나만의 버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현재는 시그니처 버거라는 명칭으로 정식 런칭하여 2017년 4월 거의 대부분의 매장에서 판매하다 2020년 3월 26일에 단종되었다. 또한 핫 올 오버, 클래식 치즈버거는 판매하지 않으며, 나만의 버거 또한 판매가 종료되었다.

러시아에서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여파로 철수하게 되었으며 이후 현지 업체에서 바냐 아저씨라는 상표로 변경하여 그대로 유지되다가, 6월 12일 알렉산드르 고보르에 의해 인수하여 브쿠스노 이 토치카란 자체 브랜드로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맥도날드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맥도날드 입니다.

맥도날드 한국법인(한국맥도날드유한회사)은 1988년에 설립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지점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수도권 전철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및 한양쇼핑(現 갤러리아백화점) 건너편에 있었다. 현재 한국 페스트푸드 체인점 중 4번째로 많다. 원래 3번째로 많은 페스트푸드 체인점이었지만, 2021년 5월 4일, 버거킹에게 밀리면서 4위가 됐다. 한국 최초의 맥도날드 지점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매장 옥상에 유일하게 공기관처럼 대한민국 태극기와 맥도날드 로고기 2개를 게양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현재는 경기도 포천시 소재 포천DT점(포천시 호국로 894)에서 두 깃발을 이어 받아 게양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성장제가 깍이고 매장수도 줄어들고 점포들이 줄줄이 철수했다. 지역별로 매장 편차가 크다. 1위인 롯데리아와 달리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 특례를 받지 않는 도시는 매장을 잘 내주지 않아서 읍 단위에는 매장을 잘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면 지역이 있는 곳은 통영시(광도면) 뿐이다. 그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인구 30만에 경산시에는 매장이 없고(원래 2005년 하양읍에 있었지만 경산 시민들이 맥도날드를 잘 찾지 않아서 철수했다. 여담으로 경산에서 한개뿐인 KFC도 맥도날드 근처에 있었지만 이마저 맥도날드 철수 후 2009년경에 철수했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맥도날드가 없는 곳도 있는데 세종특별자치시다. 인구 40만인데도 하나도 없다. 수도권도 예외는 아닌데 인구 50만에 육박하는 파주시에도 매장이 없으나(경기도에 시 중 파주시만 맥도날드가 없다. 원래 문산읍에 있었지만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파주 시민도 맥도날드를 잘 찾지 않아서 철수했다. 현재 파주시에서 맥도날드를 먹으러면 고양까지 가야한다. 파주 시민들은 주로 인접한 탄현동으로 주로 먹으러 간다.), 같은 수도권에 있는 10만명대 도시인 동두천시, 과천시, 안성시, 포천시, 여주시, 의왕시에는 맥도날드가 1개씩 있다. 30만명대 도시에서도 광주시, 하남시에도 맥도날드가 1개씩 있다. 현재 파주시, 경산시, 공주시에서는 철수했다. 이후 2022년부터 매장수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출시메뉴는 햄버거, 치즈버거, 빅맥 등이었다. 빅맥의 경우 당시 정서상 생소한 버거라 한국인들 사이에도 화제가 된 버거였는데, 크기가 보통 햄버거에 비해서 크게 보이는데다가 고기 패티가 2개가 들어가있고 중간에 햄버거번이 그 사이에 끼어져있는 특이한 구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빅맥을 모델로 기업PR 광고를 지상파 방송에 송출한 적이 있다. 현재는 상하이버거 또한 빅맥 못지않게 인기가 많은 맥도날드의 베스트 버거이다.

McDonald’s는 ‘맥도널드의’ 혹은 ‘맥도널드네’라는 뜻으로, ‘맥도널즈’라고 쓰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상 맞지만, 대한민국 법인이 ‘맥도날드’로 상표를 등록함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맥도날드’로 표기하여 사용하고 있다.

논란 [ 편집 ]

용혈성 요독증후군 감염 논란 [ 편집 ]

2016년 9월 25일, 경기도 평택시에 사는 4세 여아가 용혈성 요독증후군(이하 HUS)에 걸리자 그 부모가 발병의 원인이 당일 먹은 햄버거라고 주장하며 맥도날드를 2017년 7월 5일에 고소하였다.[5] 이후 같은 해 7월 13일에는 그 해 5월에 서울특별시에 있는 한 지점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은 2살 어린이가 같은 증상을 보였다며 검찰에 추가로 고소장을 냈으며, 위 사건과 동일한 증상을 겪었다는 주장이다.[6]

인종차별 [ 편집 ]

버지니아에 있는 맥도날드 3개 점에서 근무하였던 직원 10명은 2015년 1월 22일 연방 버지니아 서부지법 재식 시 인종차별, 성희롱과 불법해고 됐다며 인권법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점포 책임자들은 평소 흑인, 라티노 직원에게 더러운 멕시칸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오럴섹스를 강요하고 성기를 휴대전화로 보내는 성희롱까지 하였다” 라고 밝혔다. 점포 책임자들은 2014년 3월 백인 직원들을 대거 채용하며 흑인과 라티노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였다. 해고 사유는 “점포에 흑인들이 많아 너무 어두운 데다가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였다. 맥도날드 본사에 자행된 인종차별과 성희롱 사실을 보고하면서 해고 불법성을 탄원하였지만, 본사는 우리들 문제가 아니다라고 무시하였다. 前 직원 파멜라 마라블은 “맥도날드는 우리가 점포 내에서 일하는 전 과정을 감시한다. 우리가 인종차별과 성희롱 사실을 보고하였을 때, 그들은 무시하였다.” 라고 밝혔다. 변호인 측은 “맥도날드 본사는 가맹점에 식자재 공급과 직원 교육·파견을 담당하고, 가맹점주들은 독립적 점포를 소유·운영하는 방식이지만, 본사가 가맹점주들을 통제하여야 하는 책임을 져야한다” 라고 비판하였다. 맥도날드 본사측은 “아직 소송에 관하여 일절 들은 바 없다. 직장에서 인종차별과 성희롱은 우리가 내세우는 가치와는 동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져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회사 측은 앞으로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조사가 끝나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것” 이라고 해명하였다. NLRB는 최근 맥도날드 가맹점 부당 노동행위 고발건 조정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본사와 가맹점 양측을 상대로 정식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2020년 9월 1일 WSJ는 맥도날드 가맹점 200개를 운영하였던 52명 흑인 사업자들이 일리노이주 북부 연방지원에 소장을 접수한 내용을 보도하였다. 맥도날드가 흑인 가맹점주들에게는 일정 수준 이하 매장을 주고,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부당한 대우를 하였다. 맥도날드 차별 행위 때문에, 52명 前 가맹점주들은 지난 4년간 가맹점 운영을 접었다. 흑인 가맹점주 수가 1998년 377명 ~ 2020년 186명으로 줄었다고 비판하였다. 점주들은 “맥도날드가 고의적이고 은밀하게 백인 가맹점주들이 누리는 권리를 동등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박탈하였다.” 라고 밝혔다. 가맹점 1곳당 47~60억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맥도날드 성명은 “맥도날드는 가맹점주들과 재료공급업자, 임직원들 다양성과 공평한 기회 제공에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라고 해명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이어지면서 인종적 다양성을 높이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7]

2017년 독일 남서부 만하임 市에 있는 맥도날드 매장 앞 유리창에는 독일어와 터키어 표지판이 내걸렸다. 그러나 가리키는 방향은 달랐다. 독일어 표지판은 안전하고 부유한 동네에 있는 매장을, 터키어 표지판은 누추한 동네에 있는 매장을 가르켰다. 이에 SNS에서 비난 여론이 확산되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다. “터키인은 빈민가로 가고, 독일인은 부유층 동네로 가라는 표지를 단 것은 인종 격리 나 다름없다” 라고 비난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맥도날드 매장을 운영하는 점장은 즉시 표지판을 제거하였다. 인종차별자는 “세 곳 맥도날드를 운영하고 잇는데, 한 지점이 문을 닫게 됐고, 찾는 손님에게 다른 지점을 찾아달라는 안내를 하려다보니 그리 됐다. 여러 국적 직원들과 함께 일하였으며, 논란이 있을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라고 역변하였다. 만하임 지방 의회 이민 위원회 프티흐 에켄치는 “사장이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국적 난민들과 함께 일한 사람이라면, 그들 입장을 더 잘 헤아려야 한다.” 라고 비판하였다. 맥도날드는 “맥도날드 사업장에서 인종차별을 결코 있을 수 없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점장의 신속한 대응에 박수를 보낸다” 라고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해명을 내놓았다.[8]

햄버거병 [ 편집 ]

맥도날드에서 판매하는 해피밀세트를 먹은 4세 아이가 신장장애 판정을 받은 사건을 두고, 피해자와 맥도날드간 공방이 격화됐다. 피해자측은 덜 익은 패티가 햄버거병 원인이라며, 맥도날드를 검찰에 고소한 가운데, 맥도날드는 “위생검사 결과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해명하였다. 환자 대리인은 2017년 7월 5일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한국맥도날드 본사를 고소하였다. CCTV 증거보전신청,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한다. 피해자는 “4살 딸은 2016년 9월 25일 경기도 평택 매장에서 해피밀세트를 먹은 후 2~3시간 복통, 구역, 설사 증상이 나타났다. 건강 상태가 악화되자 중환자실에 입원하였고, 출혈성 장염, 용혈성요독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아이는 상태가 호전되어 두 달 후 퇴원하였지만, 신장 기능 90%를 잃어 신장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하루 10시간씩 복막투석에 의지하고 있다. 햄버거병인 용혈성요독증후군은 신장 해독 기능이 저하되어 생기는 병이다. 경련, 혼수상태, 췌장염, 당뇨병을 일으킨다. 주로 고기를 갈아서 덜 익혀 조리한 음식을 섭취할 때 발병하는 햄버거병이다. 햄거버병 환자 절반은 신장기능을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다. 질병관리본부에 의하여 희귀난치성질환으로 분류된다. 피해자 측의 황다연 변호사는 “주로 고기를 갈아서 덜 익혀 조리한 음식을 먹을 때 발병한다. 미국에서는 1982년 햄버거에 의한 집단 발병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라고 밝혔다. 맥도날드는 “해당 패티 경우 정하여진 조리 기준에 따라 그릴이라는 장비가 상단 218.5℃, 하단 176.8℃로 준비되어 동시에 위, 아래로 한 번에 8~9장이 구워진다. 매일 점장, 매니저가 식품 안전 목록을 작성하여 그릴과 조리된 패티 온도를 측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300여개 제품 중 제품 이상, 건강 이상 사례가 보고, 접수된 바가 없다” 라고 해명하였다. 피해자 대리인은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그릴 설정이 잘못되어 간격이 높으면 패티가 제대로 익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정하여진 자리에 패티를 놓지 않을 경우, 제대로 조리가 되지 않은 것도 확인됐다” 라고 반박하였다. 형사 2부는 국민건강 의료를 담당하는 부서로, 16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수사하였다. 맥도날드는 “이번 사안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아이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 이번 조사를 통하여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앞으로 이루어질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 라고 밝혔다.[9] 30대 남자가 덜 익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었다며 2017년 7월 12일 공개하였다. 이번 사례는 두번째 사례이다. 두 사건의 황 변호사는 “HUS 합병증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초기 진행 양상이 거의 동일하다. 수사기관은 원인을 철저히 밝혀야 할 것이다. 유사 피해자를 모아 추후 고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 이라고 강조하였다.[10]

갤러리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패스트푸드 브랜드 맥도날드(mcdonalds)의 역사

맥도날드는 미국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체인으로, 딕 맥도날드와 마크 맥도날드 형제가 1948년 캘리포니아의 샌버너디노에서 시작한

동명의 햄버거 가게에서 유래했다. ‘맥도날드’라는 사명은 설립자 형제의 가족 이름에서 따왔다.

초기의 맥도날드는 빠른 서비스와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다. 레스토랑이 호황을 맞자 맥도날드 형제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밀크쉐이크를

주문할 수 있는 기계를 주문했다. 이를 위해 매장을 방문했던 밀크쉐이크 기계 영업사원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프렌차이즈 사업을

제안하고 운영권을 따냈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맥도날드는 돔 형태의 빵에 패티, 채소 등을 넣은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밀크 쉐이크, 탄산음료 등을 대표 메뉴로 오늘날 119개국 3만 5,000개 이상의 매장을 확보하고 있다.

맥도날드의 역사

맥도날드 역사 개요

이 글은 맥도날드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초기 역사

참고 항목: 햄버거의 역사

캘리포니아 다우니의 레이크우드와 플로렌스에서 가장 오래된 맥도날드를 운영한 곳은 이 체인점의 세 번째 식당이자 골든 아치와 함께 지어진 두 번째 식당이었다.

리차드와 모리스 맥도날드 설립

맥도날드 가족은 1930년대 후반 뉴햄프셔 주 맨체스터에서 캘리포니아 주 할리우드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리차드와 모리스 맥도날드 형제(“딕”과 “맥”)는 모션 픽처 스튜디오에서 세트메이버와 잡역부로 일하기 시작했다.[1] 1937년, 그들의 아버지 패트릭 맥도널드는 캘리포니아[2] 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몬로비아 공항 근처의 헌팅턴 드라이브(루트 66)에 음식 판매대인 “The Airdrome”을 열었다.

1948년 10월 맥도날드 형제가 수익의 대부분이 햄버거 판매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들은 햄버거, 치즈버거, 감자칩, 커피, 청량음료, 애플파이만으로 구성된 간단한 메뉴로 능률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성공적인 카홉 드라이브 인을 마감했다.[3]

1952년 4월, 형제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즉, 효율성 향상과 더욱 눈길을 끄는 외관이다. 그들은 건축가를 위한 추천서를 수집하고 적어도 4명을 인터뷰했고 마침내 근처의 폰타나에서 연습하는 건축가인 스탠리 클라크 메스턴을 선택했다.[1] 형제들과 메스톤은 그들의 새 건물의 설계에 있어서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맥도날드 집 뒤의 테니스 코트에 분필로 된 모든 장비의 실제 측정치를 그려 넣음으로써 그들이 필요로 하는 추가적인 효율성을 달성했다.[4] 새 식당의 디자인은 붉은색과 흰색의 세라믹 타일, 스테인리스강, 밝은 색상의 판금, 유리 등의 반짝이는 표면, 붉은색, 흰색, 노란색, 녹색 네온, 그리고 디자인 단계에서도 “황금 아치”라고 불리는 네온으로 다듬어진 25피트 노란색 판금 아치 두 개 덕분에 높은 수준의 주목을 받았다. 길가에 있는 세 번째 작은 아치 간판이 네온으로 장식된, 스피디라고 알려진 요리사의 모자에 웅장한 캐릭터를 장식했다. 맥도날드를 좌식당에서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바꾸기 위해 추가적인 마케팅 기법이 시행되었다. 그들은 난방을 꺼서 사람들이 너무 오래 고정되고 각진 좌석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막아서 손님들이 음식 위에 앉아 더 빨리 먹도록 홍보하고, 좌석을 더 멀리 떨어져서 식사를 하기에는 사교적인 장소가 덜 되도록 분산시키고, 손님들에게 브랜드 원뿔 모양의 컵을 선물하는 등의 것들을 사용했다. 식사하는 동안 링크해서 먹는 것을 빨리 할 수 있다.[1]

1953년 말, 메스톤의 디자인만 렌더링한 채, 이 형제들은 프랜차이즈 업체를 찾기 시작했다.[1] 그들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는 제너럴 석유 회사의 배급사인 닐 폭스였다. 메스턴의 황금 아치 디자인을 적용한 최초의 폭스 스탠드는 1953년 5월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센트럴 애비뉴와 인디언 스쿨 로드에 문을 열었다. 그들의 두 번째 프랜차이즈는 폭스의 처남 로저 윌리엄스와 버펫 “버드” 랜던의 팀이었는데, 둘 다 제너럴 페트롤리엄에서 일하기도 했다. 윌리엄스와 랜던은 1953년 8월 18일 캘리포니아 다우니의 레이크우드 대로 10207에 스탠드를 열었다. 다우니 스탠드는 살아남은 맥도날드 레스토랑 중 가장 오래된 식당이라는 특징이 있다.[5][6][7]

레이 크록은 1954년 이 체인점에 가입해 결국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성장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패스트푸드 법인이 됐다.

레이 크록이 합류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확대한다.

1954년 프린스 캐슬 브랜드 멀티믹서 밀크쉐이크 머신의 판매자인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가 샌버나디노 식당에서 8대의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식당을 구경하러 갔다. 그는 맥도날드 버거 레시피의 몇 가지 개선점을 크록에게 제안했던 좋은 친구 찰스 루이스와 함께 했다. 이때 맥도날드 형제는 6개의 프랜차이즈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8]

맥도날드의 공식이 성공으로 가는 티켓이라고 믿은 크록은 그들이 전국에 걸쳐 그들의 레스토랑을 프랜차이즈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셀프 서비스 방식이 더 춥고 비가 더 많이 내리는 기후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더욱이 샌 버나디노에서의 번창하는 사업과 이미 운영되거나 계획되어 있는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국가적인 모험을 꺼리게 만들었다.[1] 크록은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다른 곳에 설립하는 것에 대한 주요한 책임을 지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맥도날드 형제가 허가한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주의 소수 영토를 제외하고 전국에 맥도날드 식당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시카고 외곽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형제는 총매출의 2분의 1을 받게 되어 있었다.[1]

소네본 모델과 부동산 보유로 전환

1956년 레이 크록은 테스티-프리즈의 전 재무 담당 부사장 해리 J. 소네본과 만났는데, 그는 크록이 계획한 맥도날드 운영의 성장과 투자 등급을 가속화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미래의 프랜차이즈가 건설될 부동산을 소유하라. 크록은 소네본을 고용했고 그의 계획은 맥도날드의 부동산을 보유하기 위해 설립된 프랜차이즈 부동산 주식회사라는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실행되었다. 새 회사는 임대 계약을 체결하고 토지와 건물을 모두 담보로 대출을 받아 20-40%의 가격 인상과 950달러의 초기 보증금 인하로 가맹점에 이 비용을 전가했다.[9][10] 가맹점 내 부동산 소유라는 ‘손네본 모델’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어 회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재무적 결정일 가능성이 있다. 맥도날드의 현재 부동산 보유액은 대차대조표상 377억 달러에 달하며, 회사 자산의 약 99%, 연간 총수입의 35%를 차지한다.[11]

1960년대와 1970년대

1963년부터 로널드 맥도날드 캐릭터를 다룬 최초의 텔레비전 광고

1960년까지 맥도날드 식당은 연간 5,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교외화와 주간 고속도로 시스템이 동반된 미국 자동차 사용의 증가는 맥도날드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1961년 창립 형제들과 회사의 비전을 둘러싼 크록의 갈등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크록은 그들에게 사업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고 싶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형제는 크록이 갖지 못한 270만 달러(오늘의 달러로 약 2160만 달러)를 요구했다. 해리 J. 소네본은 그를 위해 돈을 모을 수 있었고, 크록은 창립 형제들을 매수했다. 이번 매입은 기업공개(IPO)를 위해 회사를 포지셔닝하고 맥도날드를 국내 1위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만들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 회사가 어떻게 매각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과정은 잘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영화 “창립자”에서 레이 크록의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묘사되지만 묘사가 논란이 되고 있으며, 당시의 인터뷰는 보다 자발적인 전환을 말해주고 있다.[8][12]

크록과 소네본은 회사 확장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면서 1967년 소네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크록이 CEO 겸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9]

1960년대 맥도날드의 성공은 회사의 능숙한 마케팅과 고객 수요에 대한 유연한 대처가 큰 몫을 했다. 1962년 맥도날드 식당에는 “사람을 잡는 물고기”로 청구된 Filet-O-Fish 샌드위치가 소개되었다.[13]

뉴질랜드 최초의 맥도날드 레스토랑, 포리루아에 있다.

그 회사가 국제적으로 경이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1974년 월리와 휴 모리스가 맥도날드를 뉴질랜드로 들여오기 위해 이 회사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크록으로부터 단호히 외면을 받았다. 크록은 이 나라를 방문한 이유를 들며 “아무도… 평생 이보다 더 죽은 구덩이를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형제들에 의한 끈기는 결국 1975년 5월에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장 설비의 높은 수입 비용을 상쇄하기 위해 뉴질랜드 치즈를 미국에 파는 것으로 공사와 협상을 해냈다. 최초의 뉴질랜드 식당은 1976년 6월 웰링턴 인근의 포리루아에서 문을 열었고, 회사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14]

1980년대 – 2010년대

맥도날드 익스프레스 첫 번째 장소는 1991년에 문을 열었다. 이들은 보통 조립식 건물이나 도시 상점가에서 제작되는 소규모 시제품으로, 밀크셰이크나 쿼터파운더와 같은 특정 메뉴 품목이 등장하지 않는다.[15]

중국 하이난시 산야에 있는 맥도날드 청량 음료/아이스크림 판매대

중국 본토 최초의 맥도날드는 1990년 10월 선전 동먼에서 문을 열었다.[16]

햄버거, 감자튀김, 음료 조합 거래인 Extra Value Meal은 원래 쥬라기 공원을 테마로 한 타이의 일부로 1993년부터 도입되었다.[17]

2000년, 그레이터 디트로이트의 미시건 디어본에 있는 맥도날드는 미시건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미시시피 강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고객들에게 할랄 음식을 제공한 곳이었다.[18]

2012년 1월 이 회사는 2011년 매출이 270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으며, 2400개의 식당을 업데이트하고 전 세계에 1,300개의 새로운 식당을 오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9]

10년 중반부터 이 식당은 수익 감소에 시달리기 시작했다.[20] 이에 맥도날드는 2015년부터 하루 종일 한정된 조식 메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21] 처음에는 이번 출시로 인해 서비스 속도가 느려졌다고 주장하는 가맹점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20] 그러나 이 계획은 이 회사의 4분기 실적이 “분석가들의 예상치를 쉽게 상회했다”[22]고 CNBC가 보도하면서 성과를 거두었다.

타임라인

1960년대 이전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 있는 블랙스톤과 쉴즈 어벤져스(두 번이나 허물어지고 재건되었지만)에서 10번째 장소인 크록의 노력으로 체인점을 얻은 최초의 레스토랑

1953: 로저 윌리엄스와 버데트 랜던에게 프랜차이즈를 한 세 번째 맥도날드 식당은 캘리포니아 다우니에서 레이크우드 블브드와 플로렌스 애비뉴 모퉁이에 문을 연다. 오늘날 맥도날드는 여전히 운영 중인 가장 오래된 맥도날드 식당이다. [23]

1957: 샌 버나디노에 있는 원래 식당은 황금 아치 디자인으로 재건되었다.[1]

1960년대

1962: 시장 조사는 사람들이 주로 맥도날드를 황금 아치와 동일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1967: 미국 밖 최초의 맥도날드가 리치몬드 BC캐나다에서 문을 연다.[24]

1970년대

1971년: 유럽 최초의 맥도날드가 네덜란드 슈퍼마켓 체인점 알버트 하이진과 협력하여 네덜란드 자안담에 문을 연다. [25]

1971: 남반구에 있는 최초의 맥도날드는 12월에 호주 시드니 교외 야구나에서 문을 연다. 그 식당은 지역적으로 “맥카”로 알려지게 된다. [26]

1972: 맥도날드 시스템은 2200개의 레스토랑을 통해 10억 달러의 매출을 창출한다. [27]

1972: 뉴욕의 첫 맥도날드는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사이드에 문을 열며, “타운하우스”라고 불리며 (드라이브인(드라이브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영하기 위해) 첫 주에 10만 개의 햄버거를 판매한다. [28]

1974년: 11월 13일, 영국 최초의 맥도날드가 런던 남동부 울리치에서 문을 연다. 그 회사는 3000번째 식당이다. [29]

1976년: 스위스의 첫 맥도날드, 제네바에 있는 루 뒤 몽블랑.[30]

1980년대

핀란드의 맥도날드, 탐페레 중심부의 하메엔카투에 위치한다. 핀란드의 첫 맥도날드 식당은 케스쿠스토리 시장 광장 근처의 커머스 하우스에 있었으나 그 후 문을 닫았다.[31]

1983년: 미국 멕시코 국경 근처 산 이시로에 있는 맥도날드 안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산 이시로 맥도날드 대학살) 총기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1984: 핀란드 최초의 맥도날드는 탐페레에 문을 연다. [31]

1987: 8월 12일, 서독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시작된 파이퍼 샤이엔이 뮌헨의 주요 공항 리엠에 모의 접근 중이었는데, 이때 모든 계기들이 고장이 났다. 그 비행기는 와세르버거 랜드스트라세(Washserburger Landstraasse)에 있는 맥도날드 식당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비행기 안에서 4명, 길거리에서 3명, 버스 안에서 3명이 숨졌으며, 이 역시 여객기와 부딪혔으며, 식당에서 7명이 사망했다. 와셔버거 랜드스트라세(Washserburger Landstraasse)에 있는 맥도날드는 그 후 재건되었다. [32]

1987: 11월 23일, 스코틀랜드 최초의 가게가 던디에서 문을 열었고, 그 다음으로는 커크칼디가 문을 연다. [33]

1988: 4월 29일, 맥도날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첫 번째 레스토랑을 오픈하는데, 그것은 바르샤바 조약국가의 첫 맥도날드가 철의 장막 뒤에 있다.[34]

1990년대

탈린 구시가지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최초의 맥도날드

2000년대

2010년대

2010년: 지하철은 맥도날드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단일 브랜드 레스토랑 체인점이자 가장 큰 레스토랑 운영자로 선정되었다. [51]

2011년: 맥도날드는 유럽에서 판매되는 Filet-O-Fish에 사용되는 물고기를 인증하기 위해 해양 스튜어드십 위원회와 계약을 맺는다. [52]

2012: 맥도날드는 드라이브 스루에 있는 메뉴판과 메뉴판에 품목의 칼로리 수치를 게시하기 시작한다. [53]

2013년: 베트남 최초의 맥도날드 버거 레스토랑 프랜차이즈가 베트남 총리 법률상 아들에게 수여되었다. [54]

2013: 맥도날드 호주는 시드니의 선별된 지역에서 홈 배송을 시험하며, 온라인 주문은 [55] [56] 메눌로그를 통해 가능하다.

2014: (10월) 맥도날드 호주 시험관습에서는 빵, 치즈, 소스 등을 골라 햄버거를 만들었다. 이것은 시드니의 캐슬 힐 스토어에서 출시되었다. [57]

2015: 미국 상점들은 하루 종일 아침식사를 시행한다. [58]

2016: 맥도날드는 손목에 차고 있는 Step-It 활동 추적기를 회수해 미국과 캐나다의 어린이들에게 해피밀스와 함께 나눠줬다. 그 장치들이 피부 염증을 일으킬까 봐 두려웠다. [59]

2018: 맥도날드는 영국과 아일랜드 식당에서 플라스틱 음료 빨대를 금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60]

2019년: 맥도날드는 개인화 기술 회사인 다이내믹 리저브를 3억 달러에 매입하고 모바일 소프트웨어 회사인 플렉셔의 지분 9.9%를 370만 달러에 인수한다. [61]

2019년: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벌집인 맥하이브를 연다. [62]

2019년 9월 10일 맥도날드가 인공지능을 활용한 미국 고객서비스 전문 스타트업 앱렌테를 인수했다.[63][64]

2020년대

2020: 3월에 맥도날드는 COVID-19 대유행으로 인해 아침식사를 하루 종일 중단했다. [65]

2022년 3월 8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러시아 내 850개 전 지역에서 조업중단을 선언한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다른 서방 기업들의 비슷한 결정과 비판자들의 압박에 따른 것이다.[36]

美 맥도날드 1호점 역사 속으로…본사도 이전

미국에 본격적인 패스트푸드 시대를 연 맥도날드 1호점이 6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5일(현지시간) 시카고 언론에 따르면 맥도날드는 전날 시카고 북서부 교외도시 데스플레인스에 위치한 1호점 박물관 철거에 착수했다.

1호점은 일리노이 출신 세일즈맨 레이 크록(1902~1984)이 캘리포니아에서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맥도날드 형제를 설득해 프랜차이즈 회사를 차리고 1955년 4월 15일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당시 햄버거 1개 가격인 ‘15센트’(약 150원)가 새겨진 대형 간판, 맥도날드를 상징하는 노란색 아치, 조리기구와 장비가 갖춰진 주방, 가구 등 맥도날드 초기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공간이다.

하지만 데스플레인강 유역 상습 침수지구에 위치해 홍수 피해가 이어져 어려움을 겪어왔다. 실제 1호점은 원래 건물이 1984년 큰 수해를 입은 뒤 원형 그대로 재건립해 박물관으로 보존해왔다.

2008년부터 일반에 대한 내부 공개를 중단하면서 방문객 수가 하루 10여 명, 한해 3000~4000명으로 급감했다. 지난해 1월 맥도날드 창업자 크록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파운더’(The Founder)가 개봉한 뒤 ‘반짝 효과’를 봤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맥도날드 측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지향해나가겠다”면서 1호점의 주요 간판과 전시물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품은 잘 보관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공개하지 않았다.

한편 맥도날드는 시카고 서부 교외도시 오크브룩에서 시카고 도심으로 본사를 이전한다. 맥도날드는 오프라 윈프리가 직접 건립하고 ‘오프라 윈프리쇼’를 제작한 하포 스튜디오 단지에 2억5000만 달러(약 2700억원)를 투입, 13층짜리 건물을 신축하고 입주를 준비 중이다.

추인영 기자 [email protected]

[글로벌 식음료 기업] ‘맥도날드’ – 맥도날드 탄생 스토리

맥도날드

[월드투데이=경민경 기자] 미국의 대표적인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맥도날드'(McDonald’s)

맥도날드는 단순 햄버거 프랜차이즈를 넘어, 미국식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심지어는 각국의 물가를 비교하는 ‘빅맥지수’라는 개념까지 등장하며 그 영향력을 여실히 뽐내고 있다.

과연 맥도날드는 어떻게 세계적인 햄버거 프랜차이즈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세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 2편에서는 맥도날드에 대해 파헤쳐 본다.

‘맥도날드'(McDonald) 형제와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

맥도날드는 1948년 모리스 맥도날드(Maurice McDonald), 리처드 맥도날드(Richard McDonald) 형제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버나디노에서 열었던 ‘맥도날드’라는 이름의 햄버거 가게에서 시작됐다.

미국 동부 출신이었던 맥도날드 형제는 극장 사업을 펼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하지만 형제의 극장 사업은 실패했고, 형제를 파산 직전까지 몰고갔다. 그때, 극장 앞의 노점상을 보고 요식업의 가능성을 엿본 형제는 ‘에어드롬(The Airdrome)’이라는 이름의 핫도그 레스토랑을 열며 사업을 요식업으로 전환했다.

당시 간편하게 외식을 즐길 수 있었던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레스토랑이 인기였는데, 드라이브 스루 형식으로 핫도그, 햄버거, 프렌치프라이, 쉐이크를 판매한 맥도날드는 10대 청소년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맥도날드 형제의 레스토랑은 1940년 샌버나디노에 ‘맥도날드 바비큐(McDonald’s Barbeque)’라는 이름으로 확장 이전했다. 사업이 성공하는 듯했으나, 맥도날드는 세계 경제 불황의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형제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1948년 레스토랑 이름을 ‘맥도날드’로 줄이면서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을 도입하는 등 재정비에 나섰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은 포드자동차 조립 공정의 분업 시스템을 매장 작업에 적용한 것으로, 음식 제작의 각 공정을 세분화해서 분업하는 공장식 시스템이다. 현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맥도날드는 이 시스템을 통해 조리 속도를 높여 매장 운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고, 낮은 가격으로 음식을 제공하면서 많은 손님을 끌어모았다.

무엇보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은 맥도날드를 성장으로 이끈 사업자 ‘레이 크록'(Ray Kroc)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했다.

맥도날드의 뿌리, 창업주 ‘레이 크록'(Ray Kroc)

현재의 맥도날드의 시작은 레이 크록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햄버거 가게에 방문하면서부터다.

시카고 출신인 레이 크록은 밀크쉐이크 기계 영업사원이었다. 1954년 영업차 맥도날드에 방문한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의 시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당시 52세였던 레이 크록은 전국적인 사업을 구상했고, 맥도날드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다.

레이 크록은 1955년 일리노이주 디플레인스(Des Plaines)에 첫 번째 정식 프랜차이즈 매장을 오픈하며 패스트푸드 브랜드 맥도날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후 큰 성공을 이루며 불과 5년 만에 점포 수 200개를 돌파했고, 1961년엔 맥도날드 형제로부터 맥도날드의 모든 경영권을 인수했다.

레이 크록의 경영 철학

‘세 다리 의자(The Three-Legged Stool)’

레이 크록은 뛰어난 품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모든 매장에서 동일하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세 다리 의자’처럼, 자신과 프랜차이즈, 그리고 공급 업체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튼튼하게 바로 서며 동반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을 경영 철학으로 둔 그는 ‘사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by yourself), 본인을 위해 하는 것(for yourself)이다’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남기기도 했다.

QSC&V(Quality, Service, Cleanliness & Value)

‘뛰어난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는 맥도날드의 핵심 가치다. 레이 크록은 깨끗한 레스토랑에서 친절한 서비스와 품질 높은 저렴한 음식을 제공하겠다며 끊임없이 약속했고, 이러한 정신은 QSC&V라고 불린다.

1984년 1월 14일, 레이 크록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맥도날드의 경영 철학은 맥도날드를 60년 가까이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랜차이즈 업체로 자리하게 했다.

맥도날드의 시그니처, 빅맥의 탄생

맥도날드의 상징인 ‘빅맥'(Big Mac)은 1967년 처음 등장했다.

빅맥은 펜실베니아 유니언타운(Uniontown)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의 소유주인 짐 델리게티(Jim Delligatti)가 개발한 메뉴다. 푸짐한 햄버거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3개의 빵 사이에 패티 2장을 끼워 빅맥을 만들었다. 등장 후 순식간에 공식 메뉴로 인정받은 빅맥은 출시 1년 만에 50억 개라는 판매 기록을 세웠다.

빅맥은 미국 패스트푸드 업계의 슈퍼 사이즈 문화를 주도하기도. 전 세계 동일한 레시피로 만들어지며 현지의 물가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는 빅맥의 특징은, 빅맥을 통해 각국 통화의 가치를 측정하는 ‘빅맥지수’의 개발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맥도날드는 2000년대 ‘웰빙’ 열풍에 따라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웰빙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최근엔 ‘스케일 포 굿(Scale for Good)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지속가능성, 환경개선, 기후변화대응에도 노력을 가하고 있다.

세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 ② 맥도날드 – 맥도날드 역사

키워드에 대한 정보 맥도날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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